민족의 대명절
설이 다가온다해도 특별히 할 일은 없었다.
설명절을 앞두고 어김없이 장바구니물가가 치솟는다는
이번엔 계란값폭등,품귀라는 전대미문의 사태까지,
뉴스는 연일 바빴지만
명절준비로 계란 한 줄 살 일 없는 나는
독일에서보다도 외려 더 허전한 명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유일한 명절준비로 설 이틀전인가
서울 나들이를 갔다오는길이었다.
비좁은 지하철에서 이날 눈에 띈것은
이 사람 저사람 여러 사람들 손에 쥐여져있는
일명 명절선물세트라는 종이쇼핑백이었다
스팸,식용유, 샴푸, 아 참치캔셋트도...
그때 순간 울컥해지는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
선물문화도 문화여서
스팸,식용유같은것을 명절선물로 주고 받는것에
적지않은 문화충격을 느꼈던적이 있는데
남들이 다 주고받는 이런 선물조차에도
그간 어정쩡 이방인같은 태도를 보였지 않나
그런데 이런 명절대열을 부러워하게 되다니
고급스럽게 포장된 스팸캔이 갑자기 정겨워지며
문화 어쩌구 그러면서 명절셋트쇼핑백 하나 들기를
거부했던 내 자신이 막 불쌍해지기 시작하는것이었다.
제사와 차례를 지내지 않는 시댁덕분으로
더더욱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누구말에 의하면 호강에 겨운 외로움타령만 줄창 읊어대다
친정으로 달려갈 시간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설날 오전에 이미 귀경행렬이 시작되었다는 뉴스를
흐뭇하게 들으며
우리는 천천히 길을 나섰다.
남들 다 올라오는 귀경시간에 거꾸로 내려가는 셈이니
절묘한 타이밍이라며 기뻐했던 마음도 잠시
하행선 고속도로는 우리같은 차량들로 이미 점령이 되어있었다.
조금이라도 정체를 피해볼 요량으로
새로 들어 앉힌 두 젊은 여자 카카오네비양, 티맵양 그리고
조강지처격으로 이미 차에 설치되어있던 늙은 네비여사까지
세 여자가 분주하게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떠들어댄 덕분에
평상시보다 두배밖에 안 걸린 시간에 도착할수 있었다
금자씨의 명절준비는 대략 열흘전부터 시작되는듯 했다.
마른장, 젖은 장 장보기도 종류별로 순차적으로
나물을 불리고 떡을 하고
집을 정리하고
할 일없는 중년의 딸이 그저 외로움타령이나 늘어놓을때
일 많은 집 맏며느리 늙은 금자씨의 고단한 명절은
안 봐도 훤했다.
명절제사가 끝난뒤
금자씨 정신을 쏙 빼놓던 손님들이 떠나자마자
마치 바통터치하듯 다음 타자로 우리가 들이닥쳤다.
손이 큰 금자씨
베란다에 켜켜히 쌓인 음식광주리를 보고서는
나도 모르게 경악의 비명을 질렀는데
반 이상 음복으로 나누어주고 남았다는게 내보기에는
왠만한 집 제사 열번은 지내고 남을 양이었다.
이제 좀 가짓수도 줄이고 양도 줄이라고 말 하려는 찰나
이번에는 우리때문에 더 준비하셨다는... 쿨럭
또 차 트렁크가 미어 터지도록 싣고 돌아왔다
제사음식뿐 아니라 신선식품들도 왕창 싣고 왔는데
여기 비싸서 못 살겠다고 징징거렸던 이야기들을
허투로 듣지 않으신게 분명했다.
독일과 비교해 서너배가 비싼 식자재이야기를
푸념삼아 늘어 놓았던 결과로
우리집 냉장고와 냉동고 부엌선반은 차고도 넘쳐나게 되었으니
다른집들 이야기 들어보면 내 나이정도되면
거꾸로라던데
아이고 이런 철딱서니없는 딸이 있나
돌아와서 엄마가 싸준 음식들로 가볍게 손님을 치뤘다.
명절음식들이 맛있다고 꼴깍 넘어가는 손님들에게
이 나이가 되도록 늙은 엄마에게 빈대 붙는다는 오명이 붙을까
걱정은 되었지만 사실대로 실토를 했다.
소문난 금자씨의 음식들이라고
이정도는 되어야 경제공동체라는 말을 쓸수 있지 않나
엄마와 나는 이제 운명적인 밥상공동체로 엮여져버렸다. ㅋ
"손님접대할려면 니 이쁜 그릇에다 조금씩 담아서 내고... "
요새 세상에 태어났으면
셰프 내지는 요리블로거를 하고도 남았을 금자씨
앞으로 더도 말고 딱 오년만 아니 십년만
그녀와의 협업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