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끝이 보일것 같지 않던 무더운 여름이

돌연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자 오늘부터 가을이야" 라고 

계절에 마치 확 선을 긋는것처럼 

아침 저녁으로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던것인데

여름홑이불 덮고 자다 얼마나 추웠는지

새벽에 잠이 깨 다락에 올라가

 오리털이불을 가져와야하나 말아야하나를

잠시 고민을 했을 정도였다.

 이 얼마만에 맞이하는 뽀송뽀송한 건조함이란말인가

척척하니 온 몸에 달라붙던 기분나쁜 습기들도

싸악 사라져버리고

햇볕도 얼마나 순하게 따사로운지

끔찍했던 이번 여름을 생각하면

이 급작스런 변화가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아침부터 기분은 좋아졌다.

날씨덕에 기분 좋은건 나뿐만이 아닌지 

이 날 기분 좋은 전화를 여러통 받았다. 

다들 첫인사가 날씨이야기였다.


멀리서 다니러 온 K가 

며칠전 잠시 짬을 내 우리집에 다녀갔다.

내가 꽃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고...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받은 꽃다발선물이다.

다시 독일로 가서 살 꿈을 꾸고 있는 K

부디 그 꿈 이루길



올해 우리집 고추농사는 대풍이다.

젓가락 만한 모종  네포기 심어 놓은것이

여름내내 풋고추를 안 사먹은지는 오래됐고 

얼마전부터는 붉은색으로 속속 변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한봉지는 생으로 갈아

김치에 넣을 양으로  냉장고에 모셔두고

나머지는  빨갛게 익는 족족 

태양초고추로 말릴 야무진 꿈을 꾼다.

고추 말리기 좋은 날씨다.




모처럼 혼자 있는 시간이었다.

앗싸 이 얼마만의 휴가란 말인가

무려 열네시간의 휴가!

꼭두새벽에 집을 나서야하는 영감에게

커피와 토스트를 준비해주고 

다시 온기가 남아있는 침대로 들어가 자는 바람에

 3시간이 허투로 날아가버렸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오랜만에 느긋하게 일어나

느긋하게 마셔보는 커피맛이란 아...


"저 고추들 말이야 저렇게 달아두면 썩지 않나"

빨간 고추를 보며 남편이 며칠전부터 한 마디씩 던졌다.

이런 당연한 말은 이상하게도 

꼭 잔소리로 들리게 되어있어

고추밭으로 향하다가도 발길이 멈추고 마는데

웬걸 열네시간의 긴 휴가시간에는 

저절로 고추가 따고 싶어지질않나

 며칠째 어지럽혀둔 집안 청소도 

절로 하고 싶어지고ㅋ


우리집 아덜놈들은 다른건 몰라도

형제간우애는 여느집 못지않게 끈끈하다고 감히 장담하는데

이런 사이 좋은놈들도 

방학같이 장기간 함께 지낼때가 되면

으르릉 투닥닥 서로 붙을 일이 생기곤한다.

투닥닥 횟수가 잦아지면 방학이 끝나간다는 소리 ㅋ

 그리하여 각자의 공간과 침해받지 않는 

사생활영역으로 돌아가서야

눈물없이는 볼수없는 그리운 형제들로 변신하게 되는것이다.

아덜놈들이야 각자 헤어졌다 만났다 하면 되지만

늙은 우리 부부는 이제 돌아갈곳 없는 평생방학에 돌입한지라

미우나 고우나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데

 몇달 살아보니 그게 그리 쉽지가 않더라는 사실

칠년동안의 기러기생활도 한몫했을것이다.

끼니라고  밥상 차려야 할 일도 없고

느긋하게 신문 읽으며 커피 한잔이면 아침으로 땡

 좋아하는 스파게티를  열흘 내내 식탁에 올려놔도 

누가 뭐라는 사람이 있길 하나 

퇴근해서 컴컴한 빈집에 열쇠꽂을 남편생각에

마음한구석이 늘 알싸했던게 문제였지

그때 나는 내게 주어진 자유를 마음껏 누렸던것 같다. 

그런데 기러기생활이 막바지쯤 이르렀을때

남편으로부터 뜻밖의 고백을 듣게 되었다.

그리운 집이고 보고싶던 새끼들이고 마눌이지만

좋을줄만 알았던 함께 있는 시간들이 어느순간에는 

버거워지기도 하더라는 이야기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나뿐 아니라 남편도 남편대로 

혼자 있는 시간에 익숙해버렸던것이다.

이 말을 들은 이후로 미안한 맘이 

조금 퉁쳐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슬픈 마음도 들었던것 같다.





한번은 혼자 양평읍에 다녀올일이 있어

갔다 올께  하고 집을 나서는데

대답이 없는것 같아 또 한번 갔다 올께 하고

좀 더 큰소리로 외쳤더니 

"알았어 도착하면 편지 해 "하고 

화장실쪽에서 큰소리의 화답이 들려왔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웃음이 났다.

한번은 테라스에 지렁이 한마리가 죽어있길레

지렁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지 하고 

혼잣말을 좀 큰소리로 했더니

"지렁이한테 물어봐라 너 하필이면 왜 여기와서 죽었냐고"

낄낄  또 웃음이 났다.

' 따로 또 같이 ' 가

가장 이상적인 경우이겠지만

이제 우리에게 '따로'는 아주 드문 일일것이고

(이건 무섬증 많은 내 탓도 크다)

늘 같이 하면서 

이런 객적은 소리나 해대며

서로 맘껏 누렸던 자유를 그리워하며 살지 모른다.

( 승질머리 급한 영감도 

내가 어쩌다 서울을 갔다와야하는 일이 있으면

천천히 볼일 다보고 와 하면서 은근히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것 같다.)


청소 좀 하고 낮잠도 설핏 들었다가

TV도 켰다가 고추 몇번 뒤적이다 보니 

어느새 저녁무렵 

새벽에 나갔던 차가 들어온다.

열네시간만의 재회라 살짝 반갑기도 하던데

누구는 보자마자 일성이다.  

" 배고프다 밥 먹자 " 아놔

열네시간이 허무하게 지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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