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타운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이듬해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중국인들이 현 선린동 일대에 이민, 정착하여 그들만의 생활문화를 형성한 화교들은
소매잡화 점포와 주택을 짓고 본격적으로 상권을 넓혀 중국 산둥성 지역에서 소금과 곡물을 수입, 193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1920년대부터 6·25전쟁 전까지는 청요리로 명성을 얻었는데 공화춘, 중화루, 동흥루 등이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외환 거래규제, 무역 규제, 거주자격 심사 강화 등 각종 제도적 제한으로 화교들이 떠나는 등
차이나타운의 화교사회가 위축되었으나 한중수교의 영향으로 활기를 되찾고 있다.
















































오늘날에는 역사적 의의가 깊은 관광명소로서

관광쇼핑, 특화점, 예술의 거리 등 권역별로 변화하고 있으며
풍미, 자금성, 태화원, 태창반점, 신승반점 등이 중국의 맛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화교 2,3세들로 구성된 약 170가구, 약500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자유공원





인천역 맞은 편에는 차이나타운이 있고 차이나타운 선방문을 지나면 나지막한 응봉산 자유공원으로 오를 수 있다.
응봉산 전체를 자유공원이라 부르는데 조성연대는 서울의 파고다공원(1897)보다 몇 년 앞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인천항 개항 뒤 1888년 외국인 거류민단에서 관리 운영하여 당시 시민들은 이를 각국공원이라 불렀고,
그 뒤 일본의 세력이 커지면서 1914년 각국 거류지의 철폐와 함께 공원 관리권이 인천부로 이관되자
그 때부터는 서공원으로 불렀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만국공원으로 불렸다.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응봉산 정상에 세워진 1957년 10월 3일부터이다.
지난날 이곳에는 존스턴 별장(인천각)·세창양행숙사(청광각) 등의 건조물이 들어서 있었으나 6·25전쟁 때 없어졌다.
충혼탑을 비롯하여 석정루·연오정 등이 있으며, 학익고인돌을 옮겨 보존하고 있다.

시민의 휴식장소로 인천 시가지와 인천 앞바다 등이 한눈에 조망된다.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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