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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여행] 산울림산악회 산울림산악회우중에 우수영관광지 명량대첩공원 탐방.

작성일 작성자 신박사

*산울림산악회 제77차 정기산행은 우중에 우수영관광지 명량대첩기념공원을 탐방 하였습니다.

목적지는 전라남도 진도 동석산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현지에 비가 많이와서 목적지를 변경했습니다.

오늘은 우중 이라서 사진 해상도가 떨어집니다.

◈ 명량대첩기념공원

위치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관광레져로 12 / 학동리 산 36.

☎ : 061-530-5541.

 

 

명량대첩공원:

해남 우수영 국민관광지는 명량대첩기념공원, 충무사, 우수영 성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명량대첩기념공원은 조선수군의 사기를 크게 높인 명량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울돌목 일대를 정비하여 성역화한 곳이다.


1597년 4월 1일 감옥에서 풀려나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삼도 수군통제사 임명장을 받은 후 길을 서둘러 장흥 회령포로 갔다. 회령포에서 12척의 전함을 수습한 이순신은 선단을 이끌고 해남 이진, 어란포, 진도 벽파진을 거쳐 해남 전라우수영에 도착했다.

비슷한 시각에 일본 지상군은 해남 방면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일본수군은 조선수군의 궤적을 따라 좇아오고 있었다.


전막대 입산








명량산책로 안내도:

*우수영관광단지

위치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관광레저로 12

문화재지정 : 국민관광지 지정(1987년), [해남우수영강강술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무형문화유산.

1597년 충무공이 이룩한 명랑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옛 성지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1986년 국민관광지와 1991년 명량대첩 기념공원으로 조성, 명량대첩의 역사적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울돌목이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거북배 등 다양한 체험 공간을 활용해 10월에는 전남도 축제로 명량대첩축제와 주말에는 명량역사체험마당 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공원 내 또 공원 곳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관군들의 전투모습을 조각한상들이 배치되어 생생한 감동을 공원내 전망대에 서면 명량해협과 진도대교를 비롯하여 명량대첩탑, 명량대첩비 탁본, 어록비, 충무공유물전시관 등의 시설물들이 보인다.



전망대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 본 풍경


전망대에서 바라 본 풍경


전망대에서 바라 본 풍경


전망대에서 바라 본 풍경



중식



동백꽃


전망대



명량대첩공원 명량대첩탑:

우수영은 고려시대 말기인 1377년(우왕 3) 조정은 무안 당곶포에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을 설치했다. 그 후 조선 조정은 1440년(세종 22) 해남 황원곶 현재의 위치로 수군 진영을 옮겼으며 1465년(세조 11)에 수군절도사영(水營)으로 승격시켰다.


명량대첩공원 명량대첩탑:

1479년(성종 10)에는 순천 내례포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左水營)을 설치하고 이곳 해남의 수영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右水營)으로 편제했다.


명량대첩공원 명량대첩탑:

전라도 서남해안이 광범위한 탓에 효율적인 왜구 방비를 위해 여수에 좌수영, 이곳 해남에는 우수영을 설치한 것이다.


명량대첩공원 명량대첩탑:

우수영은 임진왜란 때 전라우도 연해지역 14관을 관할했을 만큼 군사적인 기능과 역할이 중요시되던 곳이다. 우수영의 군비로는 내아 제승당 등 20여 개의 각종 시설과 누정이 있었다. 군기고 터, 군량고 터, 영창 터, 우물터 등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멸되고 현재는 우물터와 성곽 일부만 남아 있다.

전라우수영 성터는 1992년 3월 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전시관:

명량해전은 해남 어란진은 작은 어촌마을이지만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어 조선시대에 수군의 무관 만호들이 주재했던 곳이다.


전시관:

1597년 명량해전 직전에는 조선수군이 8월 24일부터 8월 28일까지 진영을 설치했었고 조선수군이 떠난 뒤에는 뒤쫓아 온 일본수군이 9월 7일부터 9월 16일까지 우수영의 조선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명량대첩공원 명량대첩탑:

9월 7일 어란진 앞바다에 전함, 보급선, 연락선 등 500여 척의 일본수군함대가 집결했다. 탐망 군관 임준영과 김중걸 등으로부터 일본군의 동향을 전해들은 이순신은 상황이 급박해지고 있음을 알고 9월 15일 본진을 벽파진에서 해남군 문내면의 전라우수영으로 옮겼다. 조선수군이 보유한 적은 수의 전선으로 일본수군에 맞서 싸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또한 울돌목의 좁은 수로를 지나는 급류를 등지고 해전을 벌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전라좌수사로 재직할 때부터 울돌목의 지형조건을 파악하고 있던 이순신은 이때 명량해협의 급한 물살을 이용하는 전략을 구상했다


명량대첩공원 회령포 결의 조각상:

한편 일본함대는 9월 16일 조류가 잠시 멎는 정조(停潮) 시간대인 오전 7시경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의 지휘하에 어란진을 출발하여 밀물을 타고 조선수군이 진을 치고 있는 명량 우수영을 향했다. 조류는 곧 북서류로 바뀌어 일본함대가 우수영 앞바다로 진입하기에 좋은 상황이 되었다.


구 전시관:

2개월 전인 7월 16일에 있었던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보유하고 있던 전함이 거의 궤멸된 상태에서 명량해전을 앞두고 조선수군이 가지고 있는 전력은 전함 13척이 전부였다. 일본함대가 어란진을 출발했다는 척후병의 보고가 우수영에 접수되자 13척의 전함은 일본 함대와 맞서 싸우기 위해 우수영을 출발하여 명량해협으로 나아가 울돌목 좁은 수로에서 일자진(一字陣) 대형으로 함대를 전개했다.


명량대첩공원 명량대첩의 의의:

일본함대는 어란진에서 울돌목 부근까지 온 후 해협 앞에서 세키부네 133척을 전위로 보내고 나머지 함선들은 후위에 포진했다. 이들 133척이 울돌목을 지나 우수영 앞바다로 진격해 오면서 해상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때가 오전 11시경이다.


정유난 구국공신 충혼비:

이에 이순신이 승선한 판옥선 전함이 먼저 앞으로 전진했고 일본전함들은 이순신이 승선해 있는 판옥선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순신이 승선한 전선만이 선봉에서 싸우는 위태로운 상황이 전개되었으나 이순신이 신호 깃발을 사용하여 뒤처져 있는 다른 전선들을 앞으로 불러내자 안위 · 김응함 등이 먼저 나오고 그 뒤를 따라 다른 전선들이 돌진하면서 접전이 벌어졌다.


정유난 구국공신 충혼비:

일본함대는 우수영 방향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울돌목에 진입하여 작전에 돌입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수의 흐름이 썰물로 돌아섰다. 물의 흐름이 바뀌는 것을 본 이순신이 병사들에게 적극 대응할 것을 명령하니 조선수군은 각종 화포를 발사하며 공격을 가했다.



충무공어록비:

일본수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일명 마다시(馬多時)]가 승선한 전함이 격파되면서 구루시마가 물에 빠졌다. 이순신과 같은 배에 승선해 있던 항왜 준사(俊沙)에 의해 구루시마가 확인되자 수군병사 김돌손이 그를 배 위로 건져 올렸다. 구루시마는 곧 참살당했고 그의 목이 효수되자 일본수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우수영수변무대:

이날의 해전을 정리해보면, 300여 척의 일본함선이 우수영을 향해 출동했고 이 중 200척은 명량해협 어란진 방향 밖에서 대기하고 나머지 133척이 해협으로 진입했다. 오전 11시경 133척 중 선발대로 31척이 먼저 나서서 공격해왔다. 이들 31척은 조선수군의 화포공격으로 전부 격침됐다.


전시관:

전의를 상실한 나머지 102척도 후퇴하다가 피격되어 90척이 대파되고 10여 척만 온전히 방향을 바꾸어 퇴각했다. 격침된 배의 일본군 전사자는 최소 3,500명으로 추산되었다. 도주한 배에도 전사자가 있을 것이기에 이를 추산해보면 일본 수군 9천 명이 배에 타고 왔다가 절반 정도인 4,500명이 조선군의 포격이나 화살에 맞아 전사하거나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조선수군의 경우 함선은 단 한 척의 손실도 없었으며, 전사자 약 30명, 부상자는 약 40명 정도로 파악되었다.



쇠사슬 감기틀:

해남과 진도 해안에 쇠사슬을 매어 놓고 일본 함선을 유인하여 급한 물살을 이용하여 쇠사슬을 양쪽에서 당김으로써 배를 전복시켜 격침시키고 빠져나온 함선들은 근접한 거리에 있던 조선수군이 섬멸시켰다고 하는 구전에 따라 쇠사슬 감기 틀이 만들어졌다. 당시 널리 사용된 기술과 장비를 상상하여 만든 것이다.
근년 바닷가 바위에 박혀 있는 큰 쇠고리가 발견되었는데 이 쇠사슬이 실제로 명량해전 때 사용되었는지의 여부를 떠나 쇠사슬 감기 틀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쇠사슬 감기틀:

조선수군은 퇴각하는 일본수군을 금갑포(진도군 의신면 금갑리)까지 추격하다가 멈추고 우수영으로 되돌아왔다.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전함을 격파한 명량해전은 종반에 접어든 전란의 상황을 반전시키는 시발점이 되었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그날 저녁 늦은 시각에 서쪽 방향 65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당사도(唐笥島, 신안군 암태면)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이순신이 하루 종일 치열한 전투를 행하면서 지칠 대로 지친 수군 격군들에게 충분한 휴식시간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노를 젓게 하여 이동시킨 것은 일시 퇴각했던 일본수군함대가 뱃머리를 돌려 다시 공격해 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함선과 병력의 숫자에서 크게 열세였고 무엇보다도 화살, 화약, 포탄 등 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전투물자가 부족했기에 적군을 물리치고도 퇴각과 이동은 불가피했다. 게다가 우수영은 일본함대의 현재 위치에서 볼 때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당사도로 옮겨갔던 조선수군은 그 후 해안선을 따라 고군산도 부근까지 북상하여, 육지의 상황을 살피고, 병사들의 휴식을 도모했다. 무엇보다 시급했던 것은 군량이었다. 이들은 해전에서 승리하고도 계속해서 이동해야 했기에 또 스스로 군량을 해결해야 했기에 힘든 날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해전 후 20여 일 만인 10월 9일에 해남 우수영으로 돌아왔다.


조선수군함대는 그 후 43일 동안 서남해 도서지방을 돌다가 10월 29일 영산강 입구인 보화도(寶花島, 현재의 목포 고하도)에 닿을 내리고 삼도 수군통제영을 설치했다.


이순신은 1598년 2월 17일 수군영을 보화도에서 완도 고금도로 옮길 때까지 108일 동안 보화도에서 전함 29척을 새로 건조하여 총 42척을 갖춘 수군함대의 모습을 갖추었다.


전함 건조 및 수리, 화약 제조 등에는 막대한 재정이 소요된다. 이순신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13개의 염전을 운영하여 생산한 소금을 판매하여 자금을 확보했고, 한편에서 서남해를 운항하는 선박에게 통행첩(通行帖)을 발급하면서 쌀을 거둬들였다. 대선(大船), 중선은 2섬, 소선은 1섬을 받았다.










미하수 일가 5부자상





정충량.김세호등의 판옥선 수리



유물전시관:

포르투갈에서 도입한 신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지상전에서 조선군과 의병부대를 압도했으나 해상전투에서는 조총보다 먼 거리에서 발사하여 배를 격파하는 조선수군의 대포가 유리했다.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것은 이순신의 리더십, 지리 지형 이용전술, 배수진을 친 결전 의지, 그리고 함선에 장착한 대포였다.


당시 조선수군은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등의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천자총통은 30킬로그램 무게의 대장군전을 400여 미터 정도 날려 보내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자총통의 경우에는 나무화살 대신에 작은 탄환 300발 정도를 놓고 쏘는 조란탄이 있었는데 강력한 살상력을 발휘했다.


유물전시관에는 거북선 실제 모형, 거북선 절개 단면, 판옥선 모형, 명량대첩비 탁본, 강강술래 배경 그림 그리고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 여러 가지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조음량. 조명신 부자의 용전상


조음량. 조명신 부자의 용전상



어록비문









































강강술래전수관















우수영유스호스텔



산울림산악회 하산주


산울림산악회 전세버스



*명량대첩기념공원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산 36

해남 우수영 국민관광지는 명량대첩기념공원, 충무사, 우수영 성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명량대첩기념공원은 조선수군의 사기를 크게 높인 명량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울돌목 일대를 정비하여 성역화한 곳이다.
1597년 4월 1일 감옥에서 풀려나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삼도 수군통제사 임명장을 받은 후 길을 서둘러 장흥 회령포로 갔다. 회령포에서 12척의 전함을 수습한 이순신은 선단을 이끌고 해남 이진, 어란포, 진도 벽파진을 거쳐 해남 전라우수영에 도착했다.
비슷한 시각에 일본 지상군은 해남 방면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일본수군은 조선수군의 궤적을 따라 좇아오고 있었다.

전라우수영            

고려시대 말기인 1377년(우왕 3) 조정은 무안 당곶포에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을 설치했다. 그 후 조선 조정은 1440년(세종 22) 해남 황원곶 현재의 위치로 수군 진영을 옮겼으며 1465년(세조 11)에 수군절도사영(水營)으로 승격시켰다.
1479년(성종 10)에는 순천 내례포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左水營)을 설치하고 이곳 해남의 수영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右水營)각주1) 으로 편제했다.
전라도 서남해안이 광범위한 탓에 효율적인 왜구 방비를 위해 여수에 좌수영, 이곳 해남에는 우수영을 설치한 것이다.
우수영은 임진왜란 때 전라우도 연해지역 14관을 관할했을 만큼 군사적인 기능과 역할이 중요시되던 곳이다. 우수영의 군비로는 내아 제승당 등 20여 개의 각종 시설과 누정이 있었다. 군기고 터, 군량고 터, 영창 터, 우물터 등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멸되고 현재는 우물터와 성곽 일부만 남아 있다.
전라우수영 성터는 1992년 3월 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명량해전      

해남 어란진은 작은 어촌마을이지만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어 조선시대에 수군의 무관 만호들이 주재했던 곳이다.
1597년 명량해전 직전에는 조선수군이 8월 24일부터 8월 28일까지 진영을 설치했었고 조선수군이 떠난 뒤에는 뒤쫓아 온 일본수군이 9월 7일부터 9월 16일까지 우수영의 조선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9월 7일 어란진 앞바다에 전함, 보급선, 연락선 등 500여 척의 일본수군함대가 집결했다. 탐망 군관 임준영과 김중걸 등으로부터 일본군의 동향을 전해들은 이순신은 상황이 급박해지고 있음을 알고 9월 15일 본진을 벽파진에서 해남군 문내면의 전라우수영으로 옮겼다.각주2) 조선수군이 보유한 적은 수의 전선으로 일본수군에 맞서 싸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또한 울돌목의 좁은 수로를 지나는 급류를 등지고 해전을 벌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전라좌수사로 재직할 때부터 울돌목의 지형조건을 파악하고 있던 이순신은 이때 명량해협의 급한 물살을 이용하는 전략을 구상했다.각주3)
한편 일본함대는 9월 16일 조류가 잠시 멎는 정조(停潮) 시간대인 오전 7시경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의 지휘하에 어란진을 출발하여 밀물을 타고 조선수군이 진을 치고 있는 명량 우수영을 향했다. 조류는 곧 북서류로 바뀌어 일본함대가 우수영 앞바다로 진입하기에 좋은 상황이 되었다.각주4)
2개월 전인 7월 16일에 있었던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보유하고 있던 전함이 거의 궤멸된 상태에서 명량해전을 앞두고 조선수군이 가지고 있는 전력은 전함 13척이 전부였다. 일본함대가 어란진을 출발했다는 척후병의 보고가 우수영에 접수되자 13척의 전함은 일본 함대와 맞서 싸우기 위해 우수영을 출발하여 명량해협으로 나아가 울돌목 좁은 수로에서 일자진(一字陣) 대형으로 함대를 전개했다.
일본함대는 어란진에서 울돌목 부근까지 온 후 해협 앞에서 세키부네 133척을 전위로 보내고 나머지 함선들은 후위에 포진했다. 이들 133척이 울돌목을 지나 우수영 앞바다로 진격해 오면서 해상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때가 오전 11시경이다.
이에 이순신이 승선한 판옥선 전함이 먼저 앞으로 전진했고 일본전함들은 이순신이 승선해 있는 판옥선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순신이 승선한 전선만이 선봉에서 싸우는 위태로운 상황이 전개되었으나 이순신이 신호 깃발을 사용하여 뒤처져 있는 다른 전선들을 앞으로 불러내자 안위 · 김응함 등이 먼저 나오고 그 뒤를 따라 다른 전선들이 돌진하면서 접전이 벌어졌다.
일본함대는 우수영 방향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울돌목에 진입하여 작전에 돌입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수의 흐름이 썰물로 돌아섰다. 물의 흐름이 바뀌는 것을 본 이순신이 병사들에게 적극 대응할 것을 명령하니 조선수군은 각종 화포를 발사하며 공격을 가했다.
일본수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일명 마다시(馬多時)]가 승선한 전함이 격파되면서 구루시마가 물에 빠졌다. 이순신과 같은 배에 승선해 있던 항왜 준사(俊沙)에 의해 구루시마가 확인되자 수군병사 김돌손이 그를 배 위로 건져 올렸다. 구루시마는 곧 참살당했고 그의 목이 효수되자 일본수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각주5)
이날의 해전을 정리해보면, 300여 척의 일본함선이 우수영을 향해 출동했고 이 중 200척은 명량해협 어란진 방향 밖에서 대기하고 나머지 133척이 해협으로 진입했다. 오전 11시경 133척 중 선발대로 31척이 먼저 나서서 공격해왔다. 이들 31척은 조선수군의 화포공격으로 전부 격침됐다.
전의를 상실한 나머지 102척도 후퇴하다가 피격되어 90척이 대파되고 10여 척만 온전히 방향을 바꾸어 퇴각했다. 격침된 배의 일본군 전사자는 최소 3,500명으로 추산되었다. 도주한 배에도 전사자가 있을 것이기에 이를 추산해보면 일본 수군 9천 명이 배에 타고 왔다가 절반 정도인 4,500명이 조선군의 포격이나 화살에 맞아 전사하거나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조선수군의 경우 함선은 단 한 척의 손실도 없었으며, 전사자 약 30명, 부상자는 약 40명 정도로 파악되었다.
조선수군은 퇴각하는 일본수군을 금갑포(진도군 의신면 금갑리)까지 추격하다가 멈추고 우수영으로 되돌아왔다.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전함을 격파한 명량해전은 종반에 접어든 전란의 상황을 반전시키는 시발점이 되었다.

명량해전 직후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그날 저녁 늦은 시각에 서쪽 방향 65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당사도(唐笥島, 신안군 암태면)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이순신이 하루 종일 치열한 전투를 행하면서 지칠 대로 지친 수군 격군들에게 충분한 휴식시간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노를 젓게 하여 이동시킨 것은 일시 퇴각했던 일본수군함대가 뱃머리를 돌려 다시 공격해 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함선과 병력의 숫자에서 크게 열세였고 무엇보다도 화살, 화약, 포탄 등 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전투물자가 부족했기에 적군을 물리치고도 퇴각과 이동은 불가피했다. 게다가 우수영은 일본함대의 현재 위치에서 볼 때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당사도로 옮겨갔던 조선수군은 그 후 해안선을 따라 고군산도 부근까지 북상하여, 육지의 상황을 살피고, 병사들의 휴식을 도모했다. 무엇보다 시급했던 것은 군량이었다. 이들은 해전에서 승리하고도 계속해서 이동해야 했기에 또 스스로 군량을 해결해야 했기에 힘든 날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해전 후 20여 일 만인 10월 9일에 해남 우수영으로 돌아왔다.
조선수군함대는 그 후 43일 동안 서남해 도서지방을 돌다가 10월 29일 영산강 입구인 보화도(寶花島, 현재의 목포 고하도)에 닿을 내리고 삼도 수군통제영을 설치했다.
이순신은 1598년 2월 17일 수군영을 보화도에서 완도 고금도로 옮길 때까지 108일 동안 보화도에서 전함 29척을 새로 건조하여 총 42척을 갖춘 수군함대의 모습을 갖추었다.
전함 건조 및 수리, 화약 제조 등에는 막대한 재정이 소요된다. 이순신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13개의 염전을 운영하여 생산한 소금을 판매하여 자금을 확보했고, 한편에서 서남해를 운항하는 선박에게 통행첩(通行帖)을 발급하면서 쌀을 거둬들였다. 대선(大船), 중선은 2섬, 소선은 1섬을 받았다.

시각 전투 상황 및 이동(1597. 09. 16.)
오전 7시경일본수군함대, 어란진 출발
오전 10시 전후조선수군함대, 우수영 앞바다로 나와 진형을 갖춤.
오전 11시경일본수군함대,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우수영 앞바다로 전진. 공격 시작
오전 11시경이순신이 승선한 대장선, 일본함선을 향해 포격 시작.
휘하의 일부 함선들 대장선보다 몇백 미터 후방에 위치하여
대장선이 홀로 방치되고 위기를 맞음.
오전 11시 이후이순신, 신호 깃발 등으로 조선함선들을 앞으로 불러냄.
거제현령 안위의 함선과 중군 김응함의 함선이 먼저 전진해 나감.
이순신의 호령에 나머지 함선들도 전진하여 본격적인 전투 시작됨.
조류가 잠시 멈췄다가 조선수군함대에 유리한 남동류로 바뀜.
방향이 바뀐 조류를 타고 안위의 함선을 필두로 함대 전체가
일본함대를 향해 빠르게 돌진함. 가장 먼저 전진해 간 안위의
함선이 적선에게 포위됨. 대장선을 비롯한 모든 함선들이
집중공격을 가해 안위의 함선을 구하고 31척의 일본함선을 격파함.
이때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사살하고 효시함.
오후 2시경일본수군함대, 일단 전투를 중지하고 물러남. 외곽 해역에서 양측 수군함대 대치함.
오후 6시 전후일본수군함대, 조류를 타고 후퇴함. 조선수군함대, 추격하다가 멈추고 우수영으로 귀환
오후 6시 이후조선수군함대, 우수영 건너편 진도의 포구로 진영을 옮김.
오후 9시 이후조선수군함대, 야음을 틈타 당사도로 진영을 옮김.
출처: 제장명(2004), 226~228쪽.

유물전시관        

포르투갈에서 도입한 신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지상전에서 조선군과 의병부대를 압도했으나 해상전투에서는 조총보다 먼 거리에서 발사하여 배를 격파하는 조선수군의 대포가 유리했다.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것은 이순신의 리더십, 지리 지형 이용전술, 배수진을 친 결전 의지, 그리고 함선에 장착한 대포였다.
당시 조선수군은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등의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천자총통은 30킬로그램 무게의 대장군전을 400여 미터 정도 날려 보내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자총통의 경우에는 나무화살 대신에 작은 탄환 300발 정도를 놓고 쏘는 조란탄이 있었는데 강력한 살상력을 발휘했다.
유물전시관에는 거북선 실제 모형, 거북선 절개 단면, 판옥선 모형, 명량대첩비 탁본, 강강술래 배경 그림 그리고 천자총통각주6) , 지자총통 등 여러 가지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울돌목의 의병        

명량대첩기념공원 내에는 명량해전과 인근 지역에서의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구국의지를 기리는 여러 개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명량해전은 해남 · 진도 등 해안지방 사람들이 수군과 같이 목숨을 바쳐 싸운 의병항쟁이기도 하다. 마하수는 적선에 포위된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구원하다가 적군이 쏜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부친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던 마하수의 네 아들은 다시 힘을 내고 일본수군 격퇴에 힘을 보탰다.
조응량 부자와 양응지도 백성들과 함께 의병으로 참전하여 낫과 괭이를 들고 적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오국신 · 오계적 부자도 의병으로 참전하여 여러 싸움에서 공을 세웠는데 명량해전 때 돌과 창으로 일본군을 무찌르다가 부자가 함께 전사했다.

쇠사슬 감기 틀            

해남과 진도 해안에 쇠사슬을 매어 놓고 일본 함선을 유인하여 급한 물살을 이용하여 쇠사슬을 양쪽에서 당김으로써 배를 전복시켜 격침시키고 빠져나온 함선들은 근접한 거리에 있던 조선수군이 섬멸시켰다고 하는 구전에 따라 쇠사슬 감기 틀이 만들어졌다. 당시 널리 사용된 기술과 장비를 상상하여 만든 것이다.
근년 바닷가 바위에 박혀 있는 큰 쇠고리가 발견되었는데 이 쇠사슬이 실제로 명량해전 때 사용되었는지의 여부를 떠나 쇠사슬 감기 틀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수영관광단지

위치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관광레저로 12

문화재지정 : 국민관광지 지정(1987년), [해남우수영강강술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무형문화유산.

1597년 충무공이 이룩한 명랑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옛 성지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1986년 국민관광지와 1991년 명량대첩 기념공원으로 조성, 명량대첩의 역사적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울돌목이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거북배 등 다양한 체험 공간을 활용해 10월에는 전남도 축제로 명량대첩축제와 주말에는 명량역사체험마당 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공원 내 또 공원 곳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관군들의 전투모습을 조각한상들이 배치되어 생생한 감동을 공원내 전망대에 서면 명량해협과 진도대교를 비롯하여 명량대첩탑, 명량대첩비 탁본, 어록비, 충무공유물전시관 등의 시설물들이 보인다.




*웃자퀴즈 469 : 씨름 선수들이 죽 늘어서 있다'를 세자로 줄이면? 정답:장사진. 

*힌트:인터넷에 검색하면 정답이 있습니다. ㅎㅎㅎㅎ 매주 월요일 정답 공개 합니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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