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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가을밤에 나누는 의미없는 이야기 by별유

작성일 작성자 별유




♪ 순간 - 권순일, 존박  

 





“후...”


시끄러운 대로변을 지나 

작은 골목길로 꺾어 들어갈 때 쯤,

ㅇㅇ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가로등 불빛 여러 개가 ㅇㅇ의 앞을 밝혔지만

고맙긴커녕 왠지 서글픈 기분이었다.


그럴 리 없는 가로등 빛이 일렁였고

그러자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햇살 같은 사람이

차가운 가로등을 배경 삼아 떠오르니

어색하고 속상했다.


그렇게 낭만적이던 황혼빛이

노랗게 바래져 멍울지는 것 같았다.


“후...”


다시 한숨이 나왔다.

땅 깊숙이 떨어진대도 이상하지 않을

깊은 한숨이.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아니 그게,’


‘말은 해줄 수 있었잖아요’


‘.......’


‘...할 수 있었잖아’


‘.......’


‘네가 말을 안 해버리면,’


‘.......’


‘난 그게 더 이상하고, 궁금하고,

속상하고, 미칠 거 같거든’


‘.......’


‘내가 막, 부질없는 놈 같아서’



생각에 잠겨 마냥 걷기만 하던 ㅇㅇ가

어느 꽉 닫힌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곤 고갤 푹 숙인 채

문을 힘주어 밀었다.



[햇살주점]



“어서오세요!”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리자

안에 있던 주인이 소릴 높여 ㅇㅇ을 반겼다.

달콤 쌉싸름한 소주 향도

오늘 만큼은 그녀를 격하게 반기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사,”


여전히 땅만 보고 있던 그녀는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갤 들었고,


“.......”


“.......”


그 순간, 뜻밖이지만 그리웠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좀 늦으셨네요? 항상 같이 퇴근하시더니”


주인의 목소리가 ㅇㅇ의 앞을 스쳐 지났다.


“우동 드리면 되죠?”


그는 자연스럽게 이미 누군가 앉아있는 테이블 위에

젓가락과 숟가락,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금방 되니까 어서 앉으세요”


그러곤 ㅇㅇ의 대답도 듣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버렸다.


“.......”


“.......”


하필이면 손님도 없어서

적막만 흐르던 술집에

쓸쓸함까지 흐르기 시작할 때 즈음,


ㅇㅇ은 결심이라도 한 듯 세차게 돌아섰고

다시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는 순간,


“우동말고 라면으로 주세요”


잡혔다.

쌉싸름한 목소리에.


“이왕이면 칼칼하게.

계란도 하나 풀어주시고요. 그런 거 좋아하니까”


“.......”


ㅇㅇ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돌아섰다.


빈 잔에 소주를 따르던 그는


“와 빨리”


여전히 망설이고 서있는 ㅇㅇ을 향해

덤덤하게 말했다.


“와서 앉아”


퉁명스럽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목소리에

ㅇㅇ은 울컥한 마음을 뒤로한 채

터덜터덜, 테이블로 향했다.


그러곤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늦었으면 바로 집으로 가지

여긴 뭐하러 들러”


“여기 술집이잖아”


“.......”


“술 마시러 왔지”


“그럼 마시고 가지 왜 그냥 가려고 했는데”


“.......”


“.......”


“...사장님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소주 한 잔 들이켜곤 

다시 잔을 채우는 ㅇㅇ


“갈 데가 여기 밖에 없어서 왔는데,”


“.......”


“왜 하필 여기로 왔을까... 후회되더라고”


“.......”


“그래서 그랬어”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소주를 털어 넘긴 ㅇㅇ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넌”


“...나는.....”


“.......”


“너 기다렸지”


“.......”


“자존심에 집 앞에서 기다리지도 못하고,

전화는커녕 문자도 못하고...”


“.......”


“아무 것도 못하니까

여기서 술이나 마셔야겠다,

병신처럼 여기서라도 너 기다려야겠다, 했지”


“.......”


“반갑더라”

 

살짝 웃어보이던 것도 잠시,

그의 시선이 다시 테이블 밑으로 떨어졌다.


“왜 안 물어봐?”


“뭘”


“뭐하다 왔는지”


“.......”


“진호 선배랑 어디서 뭐하다 왔는지

왜 안 물어보냐고”


“.......”


“그것도 자존심 때문에 안 되겠니?”


“.......”


“대단한 자존심이네.

여친이 다른 남자랑 있다가

밤늦게 들어오는데도 꿈쩍 안 할 만큼”


“.......”


“.......”


“.......”


“야 남주혁. 무슨 말이라도 좀,”


“무슨 일을 했던, 난 모르잖아”


“.......”


“한낱 사원이 팀장들 일을 어떻게 알아.

거길 어떻게 끼어들어 내가”


“.......”


“물어서 뭐해”



이번엔 주혁이 가득 채워진 술잔을 털어 마셨다.

그러곤 다시 잔을 채우며 말했다.


“...너한테 화난 거 아니야.

나한테 화난 거야”


“왜. 한낱 사원이라서?

능력이 부족해서? 아니면,”


“그냥 다”


“.......”


“그냥 다... 내가 부족해서”


“.......”


“.......”


“어우 저 병신”


불쑥 욕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ㅇㅇ가

직접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더니


“야, 야...!”


보란 듯이 병째 마시기 시작했다.


“너 뭐하는 거야!!!”


보다 못한 그가 간신히 병을 낚아채자,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쓴맛을 참던 ㅇㅇ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뭐가 부족한데.

뭐가 부족해서 그러고 기죽어있는데!!!!!”


“.......”


“너 네 프로젝트 뺏겨서

자존심 상한 거 아니잖아”


“.......”


“선배보다 직급 낮고, 돈 없고 차 없고,

가진 거 개뿔 없어서 그런 거잖아”


“......”


“그 선배는 잘 사는 부모 만나서

호강에 겨워 사는데

넌 아니라서 그런 거잖아. 아니야?

네 그 잘난 자존심!!!! 이거 아니냐고”


“아니야”


“.......”


“아니야 그거”


“그럼 뭔데”


“.......”


“뭔데!!!”


“너랑 잘 어울려서”


“.......”


“그 새끼랑 너랑 누가 봐도 잘 어울려서...”


“.......”


“네 옆에 그 새끼가 서있는데,”


“.......”


“진짜 눈물 나게 잘 어울리더라”


주혁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나도 쪽팔린 거 아는데...

진짜 그런 걸 어떡해.

난 너 하나 가졌는데

그것마저도 그 새끼한테 잘 어울리잖아.

서럽게...”


차마 ㅇㅇ은 쳐다보지 못한 채

고갤 돌려 눈물을 닦던 주혁이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병신 같이”


“...어 너 병신이야”


“.......”


“가진 게 뭔지도 모르는 병신”


“.......”


거친 말과는 달리 울먹이던 ㅇㅇ가

까치발을 들어 직접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네가 가진 것 중에 제일 비싼 게 나고”


“.......”


“그 새끼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게 나고”


“.......”


“난 널 떠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


“너 하나도 안 부족해. 넘쳐 아주”


입을 삐죽이며 간신히 참던 ㅇㅇ에게서

결국 눈물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너한텐 내가 자존심이라고”


“.......”


“알았어?”


“.......”


“알았냐고 이 멍충아!!!!!”



.......



“저... 라면 다 됐는데요”




.

.

.




“무슨 남자가 그렇게 잘 우냐?”


“처음 운거거든?”


“처음 아닌 거 같은데”


“네 앞에선 처음 운거야”


“쳇”


“.......”


“.......”


“라면 먹어. 붇겠다”


다시 마주앉은 두 사람.

주혁은 우동을, ㅇㅇ은 라면을

말없이 먹기 시작했다.


“나 그 새끼랑 출장 안 가기로 했어”


“어?”


“프로젝트도 안 할 거고.”


“.......”


“애초에 너랑 하던 건데 그 새끼가 낀 거잖아”


“그래도,”


“팀장이 치사하게 사원 일이나 가로채고”


“.......”


“재수없어”


“나 때문에 그럴 필요 없어”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내가 기분 나빠서 그런 거야”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말은 해줄 수 있었잖아요’


‘...할 수 있었잖아’



“.......”


순간 낮에 주혁과 나눈 대화가 떠오른 ㅇㅇ은


“...출장 얘기 미리 못해서 미안”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내려놓곤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


“내 딴에 이리저리 해결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

그 새끼가 얼마나 윗선에 사바사바를 해놨던지

다들 김진호 팀장 데려가라고 난린 거야.

미국 대학 출신이라 인맥도 많을 거라고.”


“.......”


“우리 둘이 갈 수 있는 첫 출장이었는데”


“.......”


“그 새끼가 다 망쳐버렸어”


“...푸흐”


“.......”


“푸흐흐...”


“웃어? 웃는 거야 지금?”



“하하하하하”


“.......”


갑자기 자지러지듯 웃는 주혁.

그 모습을 이상하게 쳐다보던 ㅇㅇ가

고갤 저으며 잔을 채우려하자,

급히 소주를 가로채며 말했다.


“그만 마셔. 취해”


“넌 이미 취한 거 같은데?”


“안 취했어. 너가 웃겨서 그래”


“내가? 왜?”


“왜 자꾸 그 새끼라고 해?”


“누구. 김진호? 그 새끼니까”


“왜 갑자기 진호 선배에서 그 새끼가 됐냐고”


“너가 그 새끼라며”


“푸흐”


“그래서. 나도 앞으로 그 새끼라고 부를 거야”


“하하하”


“진작 그렇게 불렀어야 했어.

그 새끼 진짜 재수 없다니까?

나 저녁 내내 뭐하고 온 줄 알아?”


“뭐 했는데”


“그 새끼 자랑 들어주고 왔어!!!

자기랑 출장 가면 이런 사람 만날 수 있다~

막 이러면서

얼마나 목에 힘을 주던지”


“능력있잖아”


“능력만 있으면 뭐해. 재수가 없는데”


“하하”


“그래서 그냥, 나 그쪽이랑 일 안 할 거니까

출장 혼자 가라고 했지.

프로젝트고 뭐고 다 안 할 거라고”


“.......”


“그랬더니 막 화내더라?

자기랑 안 가면 손해라고.

승진할 수 있는 기횐데 왜 버리냐고”


“.......”


“그래서 너나 승진하세요, 하고 왔어. 

나 잘했지!”


주혁이 대답대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진짜 승진할 수 있는 기회였으면,”


“승진은 때 되면 다 해. 

그리고 다른 일 잘해서 성과내면 되지

뭐 꼭, 그 일만 있나?”


“오랫동안 준비한 거잖아”


“그래. 오랫동안 너랑 준비한 거잖아”


“.......”


“근데 너 빼고 그 새끼랑 일하라고?

난 못해. 안 해”


“.......”


“그러니까 너도 그런 줄 알아”


“.......”


“응? 알았어?”


“...알았어”


“.......”


“.......”


“그런 표정 짓지 말고”


“뭐. 내가 어떤 표정 지었는데”


“걱정스럽고 염려스러운 표정”


“.......”


“속상한 표정”


“.......”


“그런 얼굴 하지마. 안 어울려”


“그래 알았어”


“.......”


“.......”


“히히”


“하하”


오랜만에 서롤 마주보며 웃는 두 사람.



딸랑딸랑-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술집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제야 적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근데 있잖아.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뭔데?”


“진짜 기다렸어?”


“뭘”


“나”


“어”


“진짜? 여기 올 줄 어떻게 알고?”


“음... 텔레파시?”


“보낸 적도 없고 받은 적도 없는데”


“몰라. 난 보냈고 받았어”


“.......”


“진짜 반갑더라”


“반갑긴 뭐가 반가워.

솔직히 쫄았지?”


“어”


“치”


“너 나가려고 할 때, 그 때 쫄았어”


“.......”


“가슴이 철렁 하더라고”


“왜?”


“몰라”


“뭐야...”


“너 엄청 좋아하나봐 내가”


“어?”


“네가 그 길로 나가서 영영 안 돌아오면 어쩌나...

그 생각 하니까 엄청 무섭더라”


“.......”


“네 말이 맞아”


“.......”


“난 자존심이 전분데, 너가 내 자존심이니까

넌 내 전부야”


“.......”


“고마워 ㅇㅇㅇ”


“...야 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막, 

그렇게 막, 어?”


피식, 주혁이 웃자 따라웃는 ㅇㅇ.


“너 근데”


“응”


“반말 되게 자연스럽다?”


“어?”


“누가 들으면 친군 줄 알겠어”


“에이, 거의 친구지”


“네 살 많은 친구 봤어?”


“아니”


“근데?”


“근데 우린 친구 맞지.

남자친구 여자친구”


“흠...”


“그리고 회사에선 맨날 존댓말 쓰잖아”


“남들 앞에서만 쓰잖아”


“그럼 남들 없을 때도 써? 싫어”


“뭐야 왜 네가 대답을 해”


“너보다 나이 어린 것도 억울한데

존댓말까지 쓸 순 없지.

누나 소리는 더더욱”


“허,”


“너, ㅇㅇ 씨, 자기, 여보.

이게 다야”


“.......”


“누나는 없어”


“쳇”


“포기해”


“누가 불러달래?

그냥 그렇다는 거지”

 

“누나같이 생겼으면 말을 안 해...”


“엉? 뭐라고?”


“아니야. 너 예쁘다고”


“알아. 소주 좀 줘봐”


“마시게?”


“응”


“안 돼. 너 아까 병나발 불었잖아”


“너 때문이었잖아”


“어찌됐든”


“으유,”


ㅇㅇ가 입을 삐죽이며 직접 소주를 꺼내오더니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사장님 소주 하나 가져가요~”


“술꾼 다 됐어 아주”


“오늘은 좀 마시자. 날도 날인데”


“무슨 날인데”


“너가 일방적으로 화냈다가 화 푼 날”


“.......”


“내 설명도 안 듣고.”


“...할 말이 없네”


“그치? 그러니까 그만 시비 걸고

같이 마셔”


“오늘 또 ㅇㅇ이 업을 준비 해야겠네~”


“준비해”


“같은 동네 살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헤헤”




.

.

.




“ㅇㅇ아”


“응”


“ㅇㅇ아”


“응”


“ㅇㅇ아-”


“왜~”



양손을 턱에 괸 채 ㅇㅇ을 빤히 쳐다보는 주혁


“너 일할 때 있잖아”


“응”


“안경 고쳐 쓰면서 집중할 때”


“응”


“그 때 진짜 이쁘다?”


“음... 알아”


“알아?”


“응”


“어떻게”


“너가 맨날 쳐다보잖아”


“응?”


“회의할 때”


“오...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빤히 보는데 어떻게 몰라. 지금처럼”



주혁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방금도 술기운에 빨개진 ㅇㅇ의 양볼이

참 귀엽다고 생각하던 그였다.


“티나?”


“응”


“들킬까봐 겁나?”


“아니?”


“.......”


“들키면 들키는 거지 뭐.

우리가 죄진 것도 아니고”


“.......”


“.......”


“용감하네”


“그럼. 내가 누군데”


“푸흐...”


“확 들켰으면 좋겠어. 대놓고 연애하게”


ㅇㅇ가 주혁을 따라 턱을 괴며 말했다.


“수현 씨가 너한테 관심있어 보이던데”


“최 대리님?”


“응. 완전 티나!!”


“난 모르겠던데”


“여자들만 아는 그런 거 있어”


“그럼 난 평생 몰라도 되겠네.

너가 아니까”


“너도 알고 잘 처신해야지!!”


“내가 처신 못 했어?”


“아니”


“근데”


“아 그냥 거슬려~”


입을 삐죽 내미는 ㅇㅇ.

주혁이 씩 웃으며 입술을 어루만져주자

못 이기는 척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거슬리는 거 많아”


“어떤 거”


“김 팀장이 너랑 얘기할 때마다

어깨 툭툭 건드리는 거”


“그 새끼 얘긴 꺼내지마”


“회식 자리에서 강 이사한테 술 따르는 거”


“그건 나도 하기 싫어”


“이 대리가 너한테만 커피 사주는 거”


“이 대리가?”


“...이거 봐. 몰랐지?”


“그거 다 사주는 거 아니었어?”


“아니. 너만”


“왜 그러지?”


“너 좋대”


“이 대리가? 나를?”


“응. 그래서 내가,”


“.......”


“그 자식 의자 바퀴 빼놨어”


“풉. 아 그래서 저번에 넘어진 거구나?”


“응”


“대박. 하하하”


“.......”


하하 웃는 ㅇㅇ과

입술을 살짝 깨무는 주혁.


그 이후 한동안 말이 없던 주혁은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너무 이쁘지말고 너무 잘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이기적인 말인 거 아는데, 그냥,”


“.......”


“나 네가 너무 좋아”


부끄러운 듯 고갤 숙이던 그가

소주를 털어 마시자

ㅇㅇ가 망설이듯 말했다.


“이쁘고 잘나서 너 만나는 건데?”


“.......”


“나도 너 너무 좋아”


“.......”


“네가 그랬잖아. 

계급장 떼고, 그냥 ㅇㅇㅇ 씨 당신이 좋다고”


“.......”


“나도 네가 좋아. 너 자체를 내가,”


“사랑해”


“...많이”


두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햇살을 닮은 미소였다.




.

.

.




“사장님 잘 먹었습니다~”


“네~ 또 오세요!”


“내일 올 수도 있어요. 헤헤”



딸랑딸랑-



마지막까지 종소리를 들으며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노랗게 멍울졌던 가로등 빛이

아름다운 여명으로 바뀌자

그 아래 주혁과 ㅇㅇ의 얼굴에도

따스한 빛이 드리워졌다.


“으 추워. 가을은 가을인가봐”


“손”


“손! 헤헤”



망설임 없이 주혁이 내민 손을 잡는 ㅇㅇ.


“웃는 거 보니까 취했네 우리 ㅇㅇ”


“너도”


“업어줄까?”


“아니 아니”


“그럼”


“그냥 이렇게 걷자. 손잡고”


“힘들면 말해”


“안 힘들어~”


“맨날 안 힘들대”


“진짜로!”


ㅇㅇ가 주혁과 마주잡은 손을

앞뒤로 힘차게 흔들었다.


“완전 힘나는데?”


“힘들다고는 죽어도 안 하지”


“너랑 있음 안 힘들어”


“...듣기 좋다”


“아- 나는 기분이 좋다!”


하하, 주혁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따라 웃는 ㅇㅇ의 잔웃음소리도.


“이 골목 걸을 때가 제일 좋아”


“왜?”


“역사적인 장소잖아”


“음...”


“아직도 생생해”


“.......”


“네 표정, 네 목소리 다”


“난 네 반응”


“반응?”


“진짜 귀여웠는데”


“그랬나?”


“그 때도 지금처럼 취해서...

어우 그냥 엄청 귀여웠어”


“난 취해야 귀엽나봐”


“넌 그냥,”


“.......”


“말을 못할 정도로”


“.......”


“귀여워”


“푸히...”


“못 살겠어”


“너도 그래”


“.......”


“회사에서는 소심해서 귀여운데

나랑 술 마실 땐 그냥 귀여워”


“.......”


“눈코입 다 귀여워”



“아 진짜 부끄럽게...”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주혁.

남몰래 비웃고 서있던 ㅇㅇ가

그의 빨개진 귀를 감싸주자

으아- 소릴 지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거 봐. 귀엽다니까?”


“네가 훨씬 귀엽거든?”


“둘 다 귀여운 걸로 하자”


“휴...”


간신히 정신을 차린 주혁이

ㅇㅇ의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러고 가자. 얼굴 보면 안 되겠어”


“왜!”


“몰라”


“쳇. 하여튼 귀엽다니까”


뒤뚱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

잠시 대화를 멈추곤 걷기에만 집중하던 것도 잠시,

사부작, 낙엽 밟는 소리에

다시 꺄르르 웃고 만다.


“재밌다”


“벌써 낙엽이 있을 땐가?”


“가을이잖아”


“지금은 한창 단풍 질 시긴데”


“이번 가을은 성격이 급한가보지”


“이러다 겨울도 빨리 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겨울 오면 더 좋지!”


“왜?”


“우리 아직 같이 눈 맞아본 적 없잖아.

겨울 같이 나면 더 정들 거 같아”


“음... 그러네”


“사계절 다 보내면 우린 더 가까워져 있겠지?”


“응. 엄청”


“좋네”


“좋다”


“이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땐 뭐, 거의 한 몸이 돼 있겠지”


“푸하. 아 어감이 이상한데”


“그냥 우리, 가을부터 잘 보내자”


“그래”


“성격 급한 가을 잘 보내면

겨울도 잘 맞을 수 있겠지”


“응”


“가자”


“응! 후우-”


찬바람에 몸을 떠는 ㅇㅇ을 본 주혁이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ㅇㅇ아”


“응?”


“집에 가잖아”


“응”


그럼 화장 지우고 대충 씻고

대충 책상 정리 한 다음에”


“응”


“몸살 감기약 하나 먹고

이불 폭 뒤집어쓰고 자. 알았지?”


“웬 약?”


“보니까 감기 걸릴 거 같아서”


“안 걸렸는데?”


“예방용으로”


“.......”


“옷도 얇게 입었는데 밤마다 찬바람 맞으면

감기 걸리게 되어있어”


“그런가? 그럼 너도”


“알았으니까 무조건 약 먹고 자. 알았지?”


“뭐야... 내가 애냐?”


“너가 애지 그럼”


“어머? 딴 사람은 몰라도 넌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왜”


“너가 애잖아”


“이렇게 큰 애 봤어?”


“어. 너”


“뭔 소리야~”


“어어? 민증 까?”


“.......”


“히히”


“아 억울해”


“뭐가 억울해”


“너보다 어린 거”


“그게 왜”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았어야

더 기대고 의지했을 텐데...”


“나 지금도 너한테 많이 의지해”


“내 말은,”


“.......”


“오빠만 믿어, 이거 하고 싶다고”


“풉”


“오빠 믿지. 믿고 따라와- 이런 거”


“많이 해봤나보다?”


“어?”


“오빠 소리 좀 많이 들어보셨나 봐요”


“아니?”


“요즘은 오빠 믿지, 이런 거 안 해”


“그럼”


“누나가 다 해줄게, 이게 대세지”


“허...”


“누나가 다 해줄 테니까

주혁이 넌 그냥 따라와”


“하지마 그런 거”


“누나 믿지”


“하지 말라고”


“누나가 우리 주혁이 고생 안 시키고

잘 데려다 키워볼게. 크흐흐”


“으 씨,”


“어어!!!!”


씩씩거리던 주혁이 ㅇㅇ을 들쳐 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대롱대롱 매달린 ㅇㅇ가 꽥 소리 질렀지만

주혁은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하지 말랬지”


“아아!!! 뭐하는 거야!!!”


“어? 꼭 그렇게 말을 안 들어요”


“알았으니까 내려줘! 응?”


“싫어”


“야 나 무거워!!!”


“안 무거운데?”


“너 다친다고!!”


“말 들을 거야 안 들을 거야”


“들을게 들을게. 내가 잘못했어 어?”


“누나 포기할 거야 안 할 거야”


“...그건 장담 못해”


“어헛”


“으아!!!”


계단을 다 오르곤 아예 뛰기 시작하는 주혁


“포기할게!!!!!!!!”


“.......”


“한다고. 원래 그렇게 막 원하지도 않았어!”


“.......”


“어? 야 주혁아”


“좀만 기다려봐”


“왜”


“조금만”


“아 왜!!!”


“.......”


“야!!”


ㅇㅇ의 외침에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주혁이

ㅇㅇ을 천천히 내려주며 말했다.


“하아, 다 왔어”


“어?”


“집 다 왔다고. 얼른 들어가”


“우리 집? 벌써?”


“응”


ㅇㅇ가 말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계단 지나 골목 끝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울타리 친 하얀 대문.

ㅇㅇ의 집이 맞았다.


“헐...”


“아까 말한대로 약 먹고 이불 꼭 덮고 자”


“이러기냐?”


“뭐가”


“이렇게 일찍 들여보내기냐고”


“추워서 안 되겠어”


“안 추운데?”


“덜덜 떨었잖아”


“그건 갑자기 찬바람 쐬니까,”


“안 돼. 들어가 얼른”


“어우 야”


“아침에 데리러올게”


“.......”


“잘 자”


“.......”


“.......”


“.......”


“왜”


“.......”


“왜... 그런 눈으로 봐?”


“.......”


“잡아먹고 싶게”


눈에 힘을 주고 주혁을 째려보던 ㅇㅇ가

몸을 홱 돌려 문 앞으로 다가섰다.


“이래서 너보고 애라고 하는 거야”


그러곤 혼자 중얼거리며

번호키를 누르기 시작했다.


“멍충이”



삐삐삐삐- 삐삐삐-

철컥



“간다. 잘 자든지 말든지,”


순간, 안으로 들어가려는 ㅇㅇ의 팔을 붙잡아

돌려 세운 주혁.

다짜고짜 품에 가두며 입을 맞춰왔다.


“.......”


“.......”


“누나”


“.......”


“나 자꾸 흥분시키지 말아요.

진짜 잡아먹을 수도 있거든”


“.......”


“누나는 그냥,”


“.......”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요. 알았죠”


“.......”


“...사랑해, 누나”


“.......”


“.......”


“허어...”


ㅇㅇ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리자

주혁이 얄밉게 웃으며 어깨를 붙들어줬다.


“오늘 미안하고 고마웠어.

잘 자고 내일 보자 ㅇㅇ아”


“어어...”


“들어가 얼른”


“어...”


ㅇㅇ가 혼이 나간 얼굴로 돌아섰다.

그러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보고있던 주혁은


“푸흐...”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돌아섰고,


그 뒤로 여명 가득했던 가로등 빛이

달빛과 함께 여울져 빈자리를 채웠다.




.

.

.



서로가 전부인 두 사람이

차디찬 가을밤에 나누는 의미없는 이야기



.

.

.





+ Behind Story






♪ it's been a long long time  






(몇 달 전)




“혼자 갈 수 있는데...”


“멀지도 않은데요 뭐”


“.......”


“.......”


“솔직히 말해봐요”


“네?”


“퇴근까지 상사랑 같이 하니까

좀 답답하죠?”


“아...니요?”


“주혁 씨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나랑 같이 퇴근하고 있잖아요”


“네”


“...나 같으면 진짜 싫을 거 같애”


“왜요?”


“회사에서 내내 보던 사람을, 그것도 상사를

퇴근할 때도 봐야된다니... 으...”


“전 괜찮은데”


“착해서 그래요. 착해서”


ㅇㅇ가 간신히 눈을 뜨며 이어 말했다.


“심지어 오늘처럼 회식한 날은 더더욱.”


“.......”


“데려다주기까지 해야 되니까, 막,”


“.......”


“피곤할 거야”


“전 정말 괜찮습니다 팀장님”


“나야말로 괜찮으니까 다음부터는 그냥

모른 척하고 일찍 들어가요”


“.......”


“알았죠?”


주혁이 옆에서 재잘대는 ㅇㅇ을 빤히 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팀장님”


“에?”


“내일부턴 우리 출근도 같이 해요”


“네... 에??”


“제가 데리러 가겠습니다”


“나를요?”


“그리고 매일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나를?”


“네”


“왜?”


“그러고 싶어서요”


“.......”


“막 싫지만 않으시다면,”


“.......”


“좋아하는 티도 막 내겠습니다”


“.......”


입을 헤- 벌린 채 자리에 멈춰선 ㅇㅇ.

주혁이 조심스럽게 입을 닫아주자

눈에 힘을 주며 한 발 짝 앞으로 다가섰다.


“뭐라고요?”


“.......”


“내가 입력이 안 돼서 그래요.

다시 말해봐요”


“팀장님 저 싫으세요?”


“아니요?”


“그럼 됐습니다”


“뭐가 됐는데요?”


“저 팀장님 좋아합니다”


“네?”


“솔직히 말씀드리면,

계급장 떼고 ㅇㅇㅇ 씨 자체를 좋아합니다”


“.......”


“ㅇㅇ 씨랑 같이 일해서 좋고,

같이 퇴근해서 좋습니다”


“.......”


“진심으로요”


“ㅇㅇ 씨...”


“.......”


“ㅇㅇ 씨라...”


“.......”


“부하 직원한테 이름 불려보긴 처음이네요”


“.......”


“답지 않게 죄송하다고도 안 하고”


“죄송하지만 안 죄송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팀장님이 여자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


“ㅇㅇ 씨로”


“음...”


“.......”


“내가 지금, 좀,”


“.......”


“많이 취했나요?

내가 들은 게 맞나?

나 지금 꿈꾸는 중인가?”


“.......”


“남주혁 씨가 막 나 좋다고 갑자기 고백했는데...

진짠지 아닌지... 모르겠네”


“실제 상황입니다”


“아 그렇구나...”


“.......”


말을 마친 ㅇㅇ가

한동안 그를 빤히 쳐다봤다.

평소와 달리 껌벅대는 눈으로.


“나랑 사귈래요?”


그리고 가벼운 입술로.


“.......”


“나랑 사귀어 볼 거냐고요”



“진짜로?”


“응. 진짜로”


“나 좋아해요?”


“남주혁 씨,”


“.......”


“좋으니까 같이 다녔죠”


“.......”


“회사에서 자꾸 눈이 마주치니까

이상하잖아요.

저 사람은 왜 날 보고 있지?

왜 내가 힘들 때마다 나타나서 도와주지?

왜 꼭 기다렸다가 같이 퇴근하지?”


“.......”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이상했단 말이죠”


“.......”


“근데 기분이 나쁘진 않았어요.

오히려 좋았지. 음. 좋았어”


“.......”


“나 사실, 지금도 기분이 좋아요!”


“푸흡. 네?”


“취해서 좋았는데 더 좋아졌어!”


“정말요?”


“고백 받은 거잖아요. 이 밤에. 여기서”


“네”


“좋은데요?”


“그럼 우리,”


“.......”



“진짜로 사귀는 겁니다”


“네!”


“진짜”


“네!”


“진짜다”


“네. 아, 어?”


당황한 ㅇㅇ을 품에 넣어 꽉 안아주는 주혁


“내일 기억 안 난다고 내빼도 소용없어.

무르기 없고 변명도 안 돼”


“.......”


“잊어버리지마”


“아, 알겠는데...”


“.......”


“갑자기 반말은 좀,”


“.......”


“.......”


“ㅇㅇ아”


“.......”


“ㅇㅇ아”


주혁이 ㅇㅇ의 눈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부르자

그저 멍하니 쳐다보던 ㅇㅇ은,


“아니다 됐다. 그냥 반말 해”


뭐에 홀린 듯 고갤 끄덕이곤

다시 품에 안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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