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의 기억을 다 갖고 계신 셈인데,
그것 때문에 현재 겪는 불편함 같은 건
없으신가요?


그 사람을 볼 때 왠지 모르게 외로워져요.



-왜요?


저만 기억하니까요. 나만 알고 있으니까.



-전생에 대해 아직 얘기 안 해보셨나요?


네. 안 하려고요.



-그래도 해보시는 게...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혼자 추억팔이 하는 것도 아니고...
대신 선생님한테 얘기하잖아요.
그걸로 됐어요.



-...근데 혹시,


네?



-전생의 그 사람과 현재 그 사람을
헷갈려 하신 적은 없나요?
만약 저였다면 그랬을 것 같아서요.


그런 적은 없어요. 너무 달라서





*





세 번째 생에서 만난 그는 노래를 잘 했어요.
들어보니 알겠더라고요.


음악을 제일 잘 한다던 고2짜리 그 사람이
어른이 됐다면 저랬을까 싶을 정도로.





♪ 영화 ‘후아유’ OST – 조승우




꽤 늦은 밤,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 맥주 한 캔을 마실 때였어요.
베란다에 서있는데 옆집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그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어요.


원래 옆집은 비어있었거든요.
집주인이 꽤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있었다고 들었는데
최근에 돌아왔나 보더라고요.


얼굴은 한 번도 본적 없었어요.
봤다면 그 때부터 기억이 시작 됐을 텐데...


근데 정말 신기하지 않아요?
원랜 마주치는 순간부터 기억이 시작되는데
이 날은 그 사람의 목소리만 들은 게 전부거든요.
그래도 기억하잖아요. 자세하게.


하늘이 장난치는 것처럼.


전생과 현생을 헷갈려한 적 있냐고 물으셨죠?
저도 그럴까봐 걱정했었는데
지금 만나는 그이 노래 부르는 거 듣고
마음을 놓았어요.


지금, 그러니까 네 번째로 만난 그 사람은
노래를 엄청 못하거든요. 하하.




“난 너를 원해!! 냉면보다 더!!!
난 네가 좋아!! 야구보다 더!!!
난 네가 좋아!! 우주보다 더!!!”


“푸흐...”


노래를 듣고 얌전한 성격은 아니겠거니 했어요.
재밌는 사람이네, 생각도 했고요.


“그대... 그대... 아 시발”


보통은 아니겠구나....



/



“그대를 사랑하는 것이 뭐 어렵나요~”


다음날이었어요.
역시나 늦게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데
전날 그 사람이 불렀던 노래가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가사를 흥얼거리며 걷는데,



터벅, 터벅-



뒤에서 나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어요.
가깝진 않지만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난 그대 맘을 몰라 두려운 것 뿐이죠...”


처음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 동네 사람이겠지. 주택가니까.
근데 집에 가까워질수록 불안해지더라고요.
이 골목엔 내가 사는 빌라뿐인데
거기 사는 사람인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이.... 뭐 어렵나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노랠 부르다
왠지 모를 차가운 기운에 입을 꾹 다물었어요.
그러곤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


거친 숨소리도 같이 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바로 등 뒤에서.


너무 무섭더라고요. 깜깜하고, 아무도 없고.
괜히 설레발치는 건가 싶으면서도
저 사람이 나 덮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도 들고.


그래서 더 빨리 걷기 시작했어요.
뒤를 돌아볼 용기도 없었거든요.


“.......”


내 걸음이 빨라지니까
그 사람도 빨리지더라고요.


등에선 식은땀 나지, 다리는 점점 풀리지.
정신없이 앞만 보고 걷는데
마침, 누군가가 우리 빌라에서 나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저 사람이 다른 데로 가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들었어요.
날 구해줄 유일한 사람일 테니까.


다행히 계속 그 현관 앞에 서있더라고요.
그래서 더 빨리 걸었어요.


그리고 결국, 그 사람과 마주했죠.
네. 그 사람이요.


나의 세 번째 사람.


“.......”


“.......”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앞에 멀뚱히 서있는 날 그가 쳐다봤어요.


뭐라 말은 해야겠는데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처음 보는 사람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그냥 입술을 깨물며 서있는데



“.......”


그가 날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어요.
그러고는,


“자기야”


“.......”


갑자기 ‘자기’를 찾았어요.


“왜 이렇게 늦게 와. 걱정했잖아”


“.......”


“전화는 또 왜 안 받고. 응? 데리러 가려고 했더니”


“어...”


“그리고 자기야”


“.......”


“뒤에 저 어둠의 자식은 누구야? 시커먼 새끼?”


“어?”



“야 너 나와”


 그는 거침이 없었어요.
당장이라도 칠 것 같은 얼굴로 뒤에 있던 사람에게 향했죠.


“일로 오라고 새끼야”


그리고 그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어? 잡으러 간다!!!!!”


줄행랑을 쳤어요.



“확 씨 발라 먹을까 보다 씨...”


“.......”


“저 변태새끼”


“.......”


“아가씨, 괜찮아요?”


“....하아.......”


“많이 놀랐겠네.  저 변태 호로 개잡놈 때문에”


“가, 감사합니다...”


“진짜 괜찮아요?”


“네...”


“흠...”


“.......”


“아 쫓아가서 잡을 걸 그랬나 보다.
그래야 아가씨가 안심했을 텐데. 그쵸”


“아니에요. 충분히 감사했습니다....”


“...얼른 들어가요. 청심환을 먹든가”


“...네”


“집에 청심환 있어요?”


“아니요, 네. 아니... 아니요.”


“에효... 혼이 나갔네, 나갔어.”


“.......”


“일단 들어가요.”


꾸벅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갔어요.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는데
그가 대신 버튼을 눌러주더라고요.


“원래 이렇게 늦게 끝납니까?”


“.......”


“앞으론 칼퇴해요 칼퇴.
야근 이런 건 개나 줘버리고”


“.......”



띵-



“난 5층 사는데 그 쪽은?”


“...저도”


“어? 우리 이웃주민이네?”


“.......”


“나 엊그저께 이사왔어요. 507호”


그가 5층 버튼을 누르곤
손가락 일곱 개를 펼쳐보였어요.
빙긋 웃으면서.


“이사 떡을 돌릴 걸 그랬나...”


그리고 그제야 제가 그의 얼굴을 보게 됐어요.
가로등 불빛에선 잘 안 보였거든요.


“......”


“왜요”


“.......”


“떡 안 줘서 섭섭해서 그래요?”


“혹시...”


“네?”


“우리 만난 적 있어요?”


기억의 재생이 또 시작된 거죠.
이번엔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찾아왔어요.


“우리요? 내가 알기론 없는데”


“우리...”


“네?”


“하아.....”


“왜, 왜요. 어디 아파요?


“당신.......”


“저기요, 저기요!! 정신 차려 봐요!!!! 저기요!!!!”



/



“.......”


두 가지 기억이 입력되다 보니 충격이 컸었나 봐요.
그 자리에서 쓰러질 만큼.


“어? 일어났네”


눈 떠보니 그 사람 집이었어요.
보고있던 책을 덮으며 나에게 묻더라고요.
괜찮냐고.


“여기는...”


“아, 그 쪽 호수를 몰라서 우리 집으로 데려왔어요.
눕혀놓고 이불 덮어준 거 밖에 없으니까
오해는 마시고. 응?”


“.......”



“거봐요. 아가씨 많이 놀랐다니까?
쓰러질 정도면 엄청 충격 받은 거지.”


“그게 아니라,”


“일단 청심환 사왔으니까 이거부터 먹어요”


“.......”


“빨리”


그가 빨리 먹으라는 눈빛으로 내 손에 약을 쥐어줬어요.
 
“물은 여기”


“.......”


“내 얼굴 닳겠네.  이상한 약 아니니까 먹어요.
이거 청심환 맞아”


하는 수 없이 약을 먹었더니
그가 웃으면서 그러더라고요.



“이제 괜찮아요.”
“이제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어둠 속에서 품에 안아주었던
그 사람 얼굴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물었죠.


“이거 꿈이에요?”


두 번째 생에서 첫 번째 생을 꿈이라고 생각했듯
이번에도 그러려고 했는데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꿈에서 꿈을 꾸고
꿈인지 묻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그러다보니 지금 내가 현실에 있는 건지
꿈속에 있는 건지 분간이 안 되더라고요.


“꿈 아닌데요.”
“꿈 아닌데요?”


“.......”


“.......”


“그럼요?”


“현실인데요”


“나 지금 현실에 있는 거 맞아요?”


“네. 다행히도”


“.......”



“원래 이 약 먹으면 약간 헤롱헤롱 한대요.
그러려니 하고 일단은 쉬어요.
아, 여기가 불편하면 그쪽 방으로...”


“.......”


“가도 되긴 하는데...”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일단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어요.


“가게요?”


“네”


“혹시 어디 아프면 병원 가요 꼭. 알았죠”


“.......”


“일찍 다니고”


“.......”



/



며칠이 지난 후에
우린 다시 현관 앞에서 만났어요.
이번엔 반대로 그가 들어오는 길이었지만.


“.......”


“.......”


왠지 표정이 좋지 않더라고요.
잔뜩 어두워서는,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그래서 그냥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가려고 했어요.


사실, 그 사람을 보는 게 두려웠거든요.
아직 그 기억들이 꿈인지 뭔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만난다는 게...
계속 그 사람만 기억한다는 게 무서워서.


피할 수 있다면 피해보려고 했어요.
악몽일 수도 있으니까.


근데,




“.......”


그 사람 손에서 피가 나더라고요.
어디서 다친 건지, 싸운 건지 모를
무시무시한 피가요.


그래서 순간 나도 모르게


“잠깐 기다려요.”


말을 건네고 말았어요.


운명의 소용돌이랄까? 다시 거기에 빠진 거죠.




“.......”


집에서 구급상자를 갖고 내려왔더니
현관 옆 계단에 앉아있더라고요.
그래서 옆에 따라 앉아
다짜고짜 손을 끌어당겼어요.


“.......”


“넘어졌어요?”


“.......”


“싸운 건가?”


“.......”


“또 누구 구해주다 다친 거예요?”



거즈를 대며 물었어요.
따가울 법도 한데 꿈쩍도 안 하는 걸 보고
좀 놀라긴 했죠.


“또?”


“나 구해줬잖아요.”


“.......”


“그쪽 아니었음 어떻게 됐을지 누가 알아요”


“그건 구해준 게 아니라,”


“.......”


“그냥. 눈에 보여서 그런 거고”


“내 입장에선 구해준 거예요.”



“.......”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근데,”


“.......”


“지금 밤 12시가 다 돼 가는데
또 어디 가려고 나와요 나오긴?”


“아... 안주 사러요”


“안주?”


“집에서 한 잔 하려고 했거든요.”


구급상자에 넣어온 캔맥주를 보여주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어요.



“살다 살다 여기에  맥주 갖고 다니는 사람 처음 봤네”


“안주대신 술친구랑 마시려고 그랬죠.”


“술친구? 나?”


“네”


“참나...”


그를 한번 쳐다봤어요.
익숙한 그 얼굴을요.


“우리 그럼 이웃주민에서
술친구로 업그레이드 되는 겁니까?”


“네”


“근데 날 뭘 믿고 술친구로 삼아요?”


“뭐가요?”


“내가 술 먹으면 어떻게 될 줄 알고.”


“아...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


“쯧쯧쯧. 이거 봐라 이거 봐.
이렇게 순진해빠져서야”


“.......”


“남자랑 함부로 술친구 하면 안 돼요.
어? 남자는 다 늑대야 늑대.”


“그럼 그쪽도 늑대예요?”


“여우겠어요?”


“...풉”


“내 말 명심해요. 세상에 변태가 얼마나 많은데”


“알았으니까 일단 이거부터 마시죠?”


왠지 정다운 그의 잔소리를 들으며
맥주를 건넸어요.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받아 들더라고요.


“나 옆집 살아요. 506호”


“압니다”


“어떻게요?”


“그날 옆집으로 들어가는 소리 들었어요.”


“아.......”


“병원 가봤어요?”


“아니요”


“왜요. 기절까지 했던 사람이”


“괜찮아져서요.”



“걱정했잖아요.
지나가다 마주치기라도 했으면 물어봤을 텐데”


“.......”


“대체 몇 시에 출근하고 몇 시에 퇴근하는 겁니까?
뭔 사람이 코빼기도 안 보여. 어떻게 된 게”


“7시 출근, 10시 퇴근”


“뭐요?”


“거의 매일 야근하거든요.”


“뭐하는 회사길래 사람을 그따위로...”


“다 그렇죠 뭐. 어느 회사나”


“안 그런 회사도 있거든요?”


“.......”


“적어도 하나는...”


“그쪽은요. 무슨 일 해요?”


“딱 보면 모르겠어요?”


“네”



“백수잖아요 백수.
얼굴에도 써있구만 못 알아보네”


“백수라고요?”


“네”


“언제부터요?”


“일주일 전부터?”


“아... 일주일 전이면 이사 왔을 때 아니에요?”


“여기로 이사 오면서 백수 됐어요”


“그렇구나...”


“.......”


“나도 백수가 꿈인데”


“내일 바로 사직서 내요.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냥 백수 말고요. 돈 많은 백수”


“아...”


“먹고 살 걱정 안 해도 되는 백수?”


피식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어요.


“근데 왜 백수가 된 거예요?
전에 일이 그렇게 별로였어요?”


“네”


“무슨 일 했는데요?”


순간 느꼈어요.
그 사람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는 걸.



“그냥... 기분 나쁜 일이요”


“상사가 엄청 재수 없었나 보다”


“네. 재수 없고 무섭고.”


“우리 부서에도 그런 상사 있거든요.
완전 밥맛”


“너무 재수없게 군다 그러면 커피에 침도 뱉고 그래요.
자잘한 복수로다가”


“그건 이미 많이 했는데요?”


“푸흐... 재밌게 사시네”


베시시 웃던 그가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켰어요.



“다음번엔 밥이나 먹읍시다.”


“네?”


“이것도 고맙고, 이것도 고맙고 해서”


붕대감은 손과 맥주캔을 번갈아 들었어요.
안 어울리게 귀엽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백수한테 밥을 얻어먹어요”


“누가 사준대요? 그냥 같이 먹자는 거지”


“뭔가 이상한데...”


“푸흐.. 토요일 점심 어때요. 12시”


“점심이요?”


“네”


“뭐...”


“일요일은 내가 안 돼요.”


“뭐야. 백수가 바빠요?”


“원래 백수가 제일 바빠요.”


“치...”


“그날 보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아, 장소는”


“여기서 보죠?”


“그럽시다. 잘 됐네.
이 동네 맛집 좀 데려가줘요.
짜장면 지겨워서 못 먹겠어”


“맨날 시켜먹어요?”


“네”


“짜장면만?”


“네”


“왜요?”


“거기밖에 번호를 몰라요”


“.......”



“그렇게 쳐다보지 말죠?”


“스마트폰 어플 같은 거 안 써요?”


“그런 거 귀찮아서 안 해요”


“.......”



“자꾸 그렇게 볼 겁니까?”


“들어가요. 집에 있는 전단지 줄 테니까”


“오- 진작에 주지”


다 마신 맥주캔을 찌그러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엘리베이터 앞에 나란히 서니
그가 들고 있던 가방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초등학생이 들고 다닐 법한 작은 가방이.


“그건 뭐예요?”


“가방이요”


“본인 거예요?”


“.......”


“애들 거 같은데”


“.......”


“.......”


더 이상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그냥 모른 척 했어요.


알게 모르게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죠.



/



그 사람 옆집에 사니
은근히 문소리에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어디 나가는구나
지금 들어오는구나


그는 이상하게 밤에 많이 움직였어요.
가끔은 새벽 3시에도 나갔다가
내가 출근할 때 즘 들어오기도 하고.
뭐랄까. 낮과 밤이 바뀌었달까?


그날도 그랬어요.
금요일 밤에 나가서
다음날이 되도록 안 들어왔어요.


토요일 12시. 약속시간은 다 돼 가는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하던 찰나,


“오래 기다렸어요?”


그가 나타났어요. 웬 차를 끌고.


“아, 아니요?”


“일단 타요. 동네 투어는 나중에 합시다”


“.......”


“꼭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더라”


“얼굴은 왜 그래요?”


“아 이거? 넘어졌어요”


“.......”


“내가 좀, 칠칠맞지 못해서”


볼에 생채기가 난 채로 씨익 웃는 그를 보니
한숨이 푹 나오더라고요.
뭐가 좋다고 저리 웃는지.
넘어졌다는 말에 속아 넘어갈 줄 알았나 봐요.
입술도 까졌으면서.


“타요. 나 배고파요”




그런 게 있나 봐요.
전생의 기억들 때문에
그 사람이 더 좋아지는 거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생각되나 봐요.


난 어차피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뭐가 먼저인지 모르겠어요.
그를 사랑해서 운명이 된 건지,
운명이라 사랑하게 된 건지.


세 번째 생에선 그 생각을 주로 했던 것 같아요.



-그럼 어느 정도 전생과 꿈, 현실을
분간하게 됐단 얘긴가요?


분간 했다기 보단 포기한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한 건 한 가지뿐이었거든요.
그와 나는 뭔가가 있다.
상식적으로 우린 그걸 ‘운명’이라 부르는 거고요.


운명은 내가 바꿀 수도 있는 거니까,
꼭 이 사람과 기억 속 드라마처럼
사랑할 필요는 없으니까
정신 차리고 그를 다시 보려고 해도,


결국엔 또 그 사람 옆에서 웃고 있었어요. 내가.






“뭐 먹을까요?”


“뭐 좋아하는데요?”


“나는 뭐, 밥이라면 다 좋아하죠”


“.......”


“그,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이름은 알고 밥을 먹어야지”


“저는,”


“.......”


“...혹시 내 이름 알아요?”


“알았으면 안 물어봤겠죠?”


“진짜 몰라요? 생각해 봐요”


“진짜 모르는데...”


“꿈에서라도 나 본 적 없어요?”


“푸흐. 그쪽은 내 꿈에 나오면 안 돼요”


“왜요?”



“악몽 속 여주인공을 시킬 순 없죠”


“.......”


“내가 구하지도 못할 텐데”


“.......”


“그쪽을 꿈에서 봐야하는 이유는 뭡니까?"


“.......”


“음....... 오케이.
그럼 내 소개부터 먼저 할게요.
이름은 조승우, 나이는 서른 셋,
처자식 없고 현재는 백수.”


“.......”


“자 이제 그쪽 차례예요.”


“...이름은 ㅇㅇㅇ, 나이는 서른.”


“.......”


“회사 다니고...”


“그리고요”


“.......”


“그리고?”


“그게 다예요”


“끝? 끝이에요?”


“네”



“연애는. 남자친구 있어요?”


“아니요”


“됐어요 그럼”


“뭐가 됐는데요?”


“소개 잘 들었다고요”


“.......”


“아, 혹시 몰라서 말해주는 건데”


“.......”



“나도 여자친구 없습니다.”


“.......”


“덧붙이자면 그렇단 얘기예요.”



/



휴대폰 속 그 사람의 이름이
‘옆집 남자’에서 ‘조승우 씨’,
‘승우 씨’로 변하면서
우리 일상에도 꽤 변화가 생겼어요.


비가 오는 날에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려주는 것 처럼요.
하필이면 분홍색 우산을 쓰고.


그래서 그 날도
분홍색 우산이 정류장에 있는 걸 보곤
되게 좋아하면서 내렸는데,


“승우 씨!”


“.......”


그 사람이 아니었어요.


“아, 죄송합니다”


날 어디론가 끌고 갈 남자였죠.




몸싸움을 했던 기억이 나요.
그 사람은 날 밧줄로 묶으려 했고
난 벗어나려 했어요.
하지만 결국 힘없이 나자빠지게 되더라고요.
쏟아지는 비 때문에 눈앞도 캄캄하고,
많이 맞아서 온몸이 아팠거든요.


죽겠구나 싶었어요.
이렇게 죽나. 길거리에서.
인생 참 덧없다 생각하던 중에



“이 씨발놈아!!!!!!”


그가 나타났어요. 캡틴 아메리카처럼.


퍽, 퍽 소리만 들리는데
정신이 혼미해지니 그런 것도 무감각해지더라고요.




그는 정말 싸움을 잘했어요.
자기보다 덩치가 큰 남자를 눈 깜짝할 새 때려눕힐 정도로.


힘없이 누워 그 모습을 보다가 점점 눈이 감길 찰나,



“하아, 하... ㅇㅇ 씨, ㅇㅇ 씨!!!!!”


그가 내게 달려왔어요.


“괜찮아요? 눈 좀 떠봐요!!!!”


“...승우 씨”


“맞아요. 나 맞아. 이제 괜찮아요”


“.......”



“미안해요. 미안해요 ㅇㅇ 씨”



/



그날 이후로 그는 날 피했어요.
전화도 안 받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병원에 누워있을 때
미안하다고, 다 자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던 것 같은데...


그 이유를 물을 기회조차 주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뜻밖의 순간에 다시 보게 됐어요.




“나 잘하지? 봐봐라!!!”


“아 아저씨!!!”


몸이 좋지 않아 병가를 내고  집에 가던 길이었어요.
집 근처에서 아이 목소리가 들리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자, 아저씨 한다!!!”


그 사람이 있더라고요.
아이와 함께 해맑게 웃으면서.





“이것만 하면 아저씨가 봄이 딱지 다 딴다!!!”


“으아앙!!!!”


“자-”


“흐어...”



“하하하”


“흐엉 아저씨이...”



“봐봐 봄아. 이거 안 넘어갔는데~? 응?”


“(훌쩍)”



“우리 봄봄 울보였네. 울보였어 진짜로”


“힝...”


“봄이 울면  산타 닮은 할아버지가 선물 줘 안 줘?”


“안 줘요...”


“안 줘도 돼. 아저씨가 줄게”


“(훌쩍)”


“자 이제 봄이 해봐”


“네에...”


처음엔 섭섭하고 서럽고,
화나고 열 받고 그랬는데
계속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어요.


보고 싶었었거든요.
웃는 모습을.




“아이고 우리 강아지 잘한다~”


“헤헤. 저 하나 땄어요!!!”


“잘했어 잘했어!!”


“어? 아저씨!”


“응, 왜?”


“저 언니도 우리랑 같이 하고 싶은가 봐요”



“언니? 누구,”


아이가 날 손으로 가리키자 그가 돌아봤어요.
그새 또 얼굴이 굳더라고요.
보면 안 되는 사람을 본 것처럼.


“아.......”


“언니! 언니도 같이 할래요?”


“.......”


“아니야 봄아. 언니는 바빠”


“바쁜 건 그쪽 아닌가요?”


“.......”


“연락도 안 되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


“나 걱정도 안 됐어요?
그냥 잘 먹고 잘 살 줄 알았어?”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뭐요.
내가 그 이유 듣고 싶어서 그렇게 전화한 건데.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왜 승우 씨 잘못인지 듣고 싶어서...
그래서 전화한 건데”


“.......”


“비겁하게 피해요 왜.”


쪽팔리게 목소리가 떨리더라고요.
어설프게 눈물도 고이고.
그걸 알아챘는지 그가 가까이 다가와
품에 날 안으며 말했어요.


“미안해요.”


“.......”


“나 그래도 ㅇㅇ 씨 다 보고 있었어”


“.......”


“엄한 놈이 또 따라붙을까봐 엄청 째려보면서.”


“치...”


“어제 약국 가는 것도 봤는데. 어디 아파요?”


“네. 아파요 나”


“어디”


“감기 걸렸어요”


“그래서 회사 때려치우고 온 거예요?”


“네”


“잘했어요”


“.......”


“내가 빨리 낫게 해줄게”


“어떻게요?”



“사랑으로”



/



“안 돼... 안 돼”


“승우 씨”


“안 돼 일어나...”


“승우 씨, 정신 좀 차려 봐요!”



“안 돼... 봄아!”


“승우 씨!”


“.......”


“봄이 여깄어요. 승우 씨 옆에”


“.......”


“아까부터 잘 자고 있었는데...”


“...이리 와요”


“네?”


“내 옆으로”


“.......”


그가 날 끌어와 옆에 눕히며 말했어요.


“조금만 더 자고 말해줄게요.”


“.......”


“다 말할게요. ㅇㅇ 씨한테”


“.......”


“그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줘요.”


“...알았어요. 얼른 자요, 다시”




내 품에서 곤히 자던 그는
눈을 뜨자마자 베시시 웃었어요.
내가 옆에 있어서 좋았대요.


그리고 하나하나 이야기를 털어놨어요.


“그날 ㅇㅇ 씨를 그렇게 한 건
날 자극시키기 위한 거였어요.
날 노리던 놈들이거든요.”


“나는, 사실 백수에 건달이에요.
백수건달.
낮에는 놀고, 밤에는 건달 짓을 해요.
우리 조직이 이끄는 회사에서 대표로 있긴 한데,
말만 대표지 일은 안 해요.
하기 싫어서”


“건달 짓은 왜 하냐면,
시작을 그렇게 해버렸어요.
나오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우리 아버지가 만든 조직이거든요.”


“조직에 몸 담기 싫어서
해외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내가 맡게 됐어요.
한국에 몰래 온다고 왔는데
여기저기 소문이 퍼진 모양이에요.
ㅇㅇ 씨까지 알아낼 정도면”


“봄이는, 내가 아끼는 동생놈 딸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딸.
그놈이 나 대신 칼을 맞아서
지금 병원에 누워있거든요. 중환자실에요.
그래서 내가 데리고 놀아주던 거였어요.
미안해서.”


“ㅇㅇ 씨 피한 이유도 미안해서였어요.
나 때문이니까. 나랑 있으면 또 다치니까.
근데 오늘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
ㅇㅇ 씨 없을 때 잠깐 온 건데”


“참, 방금 전에 ㅇㅇ 씨 안고 잤잖아요.
나 악몽 안 꿨어요.
처음이에요. 꿈 안 꾸고 푹 자는 거...
맨날 때리거나 맞는 꿈만 꾸는데.”


“...미안해요. 이런 놈이라”



/





♪ 마법의 성 - 조승우




우린 특이한 연애를 시작했어요.
말 그대로 ‘특이한’ 연애요.


그 사람이 수백 번은 물은 것 같아요.
괜찮겠냐고. 위험할 거라고.


그럼 내 대답은 항상,
“시끄럽고 발차기나 알려줘요.”
이거였어요.


그런 제 기억 속 특이한 연애는....




유치장에 갇힌 그 사람을
구하러, 아니 구경하러 갔던 거





자잘한 복수랍시고
라이벌 조직 아지트 초인종을
미친 듯이 누르던 그를 말리던 거





배신자 잡겠다고
사업장에 CCTV 다는 그를
인증샷 찍어줬던 거




안 그렇게 생겨서는, 봄이만 예뻐한다며
여자애처럼 삐치는 그를 달래주던 거 정도?


근데 우릴 정말 아프게 할 일이
다가오고 있었던 건 맞아요.
정확히 기억해요.


모든 게 다 좋았거든요.
운수 좋은 날처럼






날 위해 노랠 불러주던 그에게 키스 하려다,




짓궂게 장난치던 그 날처럼...



“잠깐만요”


우우?”


“오늘 병원 갔어요 안 갔어요?”


“우?”


“갔어요 안 갔어요”


“하던 건 마저 하면 안 돼요?”


“안 돼요”


“아 왜...”


“대답이나 해요”


“.......”


“안 갔죠?”


“못 갔습니다”


“왜요”


“회사에 볼 일이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 출근하시는 분이 무슨 볼 일?”



“그 한 번이 오늘이었어요”


“월요일에 간 거 알거든요?”


“.......”


“자꾸 거짓말 할 거예요?”


“어제는 진짜 볼 일이 있었어요.
회사 일은 아니고 조직 일”


“무슨 일인데요”


“.......”


“비밀 없기로 해놓고선”



“그렇게 안 좋은 일은 아니에요.”


“.......”


“걱정 안 해도 되는 일”


“.......”


“대신 ㅇㅇ 씨가 잠깐 어디 좀 가 있는 게...”


“.......”


“안전할 것 같긴 해요.”


“안 좋은 일이구나”


“아니에요. 해결할 수 있어요”


“내가 도울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왜요. 우리 이미 한 배 탔는데”



“ㅇㅇ 씨는 구명보트 태워서
무조건 육지로 보낼 거예요”


“배가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왜 구명보트를 태워요”


“혹시 가라앉으면...”


“같이 가라앉는 거지”


“스읍-”


“뭐요. 하나도 안 무섭거든요?”


“.......”


“.......”



“아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진짜...
심장 떨어져요 나”


“난 승우 씨한테 일 생길 때마다 그러거든요?”


“나 못 믿어요? 내가 누군데.
일 처리 만큼은 일등으로 하는 사람인데 내가”


“...다칠까봐 그러죠. 또 다치고 들어올까봐”


“안 다치게 할게요.”


“.......”



“하나도 안 다치고 멀쩡하게 올 테니까
ㅇㅇ 씨는 나 믿고 내 부탁만 들어줘요.
어디에 있든 데리러 갈 거예요.
잠깐만 떨어져 있으면 돼요. 응?”



.
.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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