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후, 학교)



“어떻게 하면 된다고?”


“여기 카페에서 잠깐 보기로 했으니까
선배님은 그냥,”


“지나가는 척 하다가 살짝 앉으라고?”


“네”


“눈치 없어 보이면 어떡하지?”


“선배님이 지나가시면 제가 부를 테니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와서 앉으세요.”


“아 그럼 되겠다”


“선배님은 계속 가려고 하고
저는 잡으려고 하고. 그러면 돼요”


“어 그래 알았어.”


결국 난 강준이의 주먹을 택했다.
왠지 선배님한테 맞으면
병원에 입원할 것만 같았다.


여자한테 맞고 입원할 순 없었기에.



“야 나 오늘 어때?”



“예뻐요”


“아 좀, 진심을 담아봐”


“예뻐요 정말”


“진짜? 진짜지?”


“네”


“조금이라도 날씬해 보여야 되는데....”


“.......”


“아 이거 말고 회색 원피스 입고 올 걸.
그게 그나마 덜 커 보이거든”


“꼭 그렇게 날씬하게 보이지 않아도 돼요.
선배님 원래 예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이것만 좀 떼면...”


선배 어깨에 붙은 머리카락을 살짝 뗐다.
그리곤 한 발짝 떨어져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자
선배님이 붉어진 얼굴로 날 쳐다봤다.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오해하니까”


“무슨 오해요?”


“니가 아직도 날 좋아한다는 오해”



“.......저기..”


“저번에 나 포기한 거 아니었어?”



“깨끗이 포기했습니다. 완전히 포기했어요.”


개미지옥에 빠진 기분이지만
최대한 정신을 차려본다.



“그렇담 다행이고”


“저도 다행입니다”


“강준이 앞에선 더더욱 그런 말 하지마. 알겠어?”


“하늘에 맹세코 그럴 일 없습니다”


“좋아”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정신 차려 도경수
단 1초도 방심해선 안 돼.
무서운 선배라고.


“후.......”


“야야 저거 강준이 아니야?”


“어디요?”


갑자기 선배가 내 팔뚝을 때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시선을 따라가니 정말 강준이가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맞네!!!”


“헐”


난 황급히 선배를 기둥 뒤로 잡아끌었다.
곧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선배와 눈빛을 주고받았고,
무슨 말인지 이해한 것 같은 선배는
반대편 엘리베이터 쪽으로 빠르게 뛰었다.



 “후.......”


이젠 내가 나서야 할 타이밍이군.


강준아 미안하다
이번 한 번만 봐줘
나도 좀 살자.


“흠흠. 서강준!!”



“아 깜짝아!!!!”



“하! 하하하!!!! 이 녀석, 일찍 왔구나”


“놀랐잖아 인마!!! 거기서 뭐해?!!”


“....... 널, 너만을 기다렸지”


“기둥 뒤에서?”


“어”


“왜?”



“음....... 서프라~이즈!!!”


.......



“너 어디 아프냐?”


“하아, 일단 커피나 마시자”



예전 일이다.
공모전에 출품할 영상을 찍다가
조연이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내가 대신 연기했던 적이 있었다.


대사는 “이 똥멍청아”였고
난 정확히 그 다섯 자만 20번을 말했다.
그리고 회장 선배에게 같은 대사를 100번 들었다.


“니가 똥멍청이야!!! 니가!!!!!!!!”
“이럴 거면 나가 죽어 그냥!!!!!!”
“지나가던 똥개도 너보단 잘하겠다!!!”


 내 연기는 똥개의 개똥만도 못했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야 여기 말고 밖으로 나가자. 후문 쪽에...”



“안 돼!!!!!!!”


“.......”


“.......”


“왜”


“난 여기가 좋아. 여기 커피 최고야”


“저번엔 맛 더럽게 없다며”


그건 사실이다.
라떼를 시켰는데 담뱃재 맛이 났다.
당혹스러웠다.


“아메리카노는 맛있더라고”


“너 라떼만 마시잖아”


“바꼈어. 입맛이”


“....갑자기?”


“어. 그니까 일단 앉아”


의심병이 도진 강준이를 간신히 앉혔다.


“야 그럼 커피부터 시키고 앉지 뭐하러 벌써..”


“내가 시키고 올게!!!!”


“엉?”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움직이면 죽일 지도 몰라”


“.......”


“그 분이”


“뭔 소리야”


“너, 너도 아메리카노 맞지?”


“어”


퍽 인상쓰는 녀석을 두고
황급히 계산대로 향했다.
식은땀을 닦으며 커피를 시키니
알바생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카톡 카톡-



그 때,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



“허업”



[이국주선배님]
야 나 언제 나가?
커피는 내가 사줄테니까
그냥 지금 나가면 안돼?


[도경수]
참으세요


[이국주선배님]
아 언제 나가냐고!!!!!


[도경수]
참으세요


[이국주선배님]
ㅡㅡ
야 강준이 커피 뭐 마셔?


[도경수]
아메리



“커피나왔습니다”


“아, 아 네”



[도경수]
카노입니다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고맙습니다”



양손에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물론 어디선가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자, 마셔”


“고마워”


“하아...”


자리에 풀썩 앉자
강준이가 고갤 갸웃거리며 날 쳐다본다.



“너 오늘 좀 이상하다?”


“내가 봐도 그래”


“무슨 일 있어?”


“어”


“뭔데”


“니?”


“어?”



“없어. 아무 일도 없어”



“이상한데.......”


“후우. 저기, 강준아”


“왜”


“너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아니?”


“호감이 있거나.. 관심 가는 사람은?”


“뭔데 갑자기”



“있어 없어”


“.......”


“어?”


“없어”


강준이의 대답을 듣자마자 옅은 숨을 내뱉었다.
안도의 한숨 같은 거였다.


“그건 왜 물어보는데”


“그냥”



“너 뭐, 요즘 외롭냐?”


“나?”


“여자 소개시켜 달라는 거 아니야?
괜히 쪽팔리니까 말 돌려서...”



“나 안 외로워!!!”


“.......”


“내가 요즘 얼마나 바쁜데”



“얼마나 바쁜데?”


“영화 보고 분석 하고,
시나리오도 쓰고, 관련 책도 읽고.
하루가 짧아서 문젠데 뭔 소리야”


“아 그럼 갑자기 여자 문제는 왜 물어보냐고”


“그냥 인마 그냥. 친군데 그것도 못 물어봐?”


“왜 성질이야 또”


그러게. 나 왜 성질냈지?


“...커피나 마셔. 아 뜨거...!!!!!”


“븅신. 괜찮냐?”


“어어”


손등에 흘린 커피를 닦아내며
엘리베이터 쪽을 쳐다봤다.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 같아서 신호를 보내려는데,
하필 선배는 지금 이 순간 어떤 다른 남자와 대화중이었다.



“뭐야...”



“아, 갑자기 니가 여자 얘기하니까 생각났어”


“어? 뭐가?”


“그 누나”


“엉?”


“너네 과 선배. 이국주 누나”


“아... 이국주 선배님?”



“야 그 누나 장난 아니야”


“뭐가”


“나 스토킹 하는 것 같은 느낌?
아니 왜, 아이돌 가수 보면 사생팬 있잖아.
약간 그런 느낌이야”


“.....왜?”


“나 인스타에 글 올리면
10초도 안 돼서 댓글 쓰고 하트 누르고.
특히 여자랑 찍은 사진에다가는
저 여자 누구냐고 댓글 달고.
진짜 무섭다니까?”


“너 좋아하니까 그런 거겠지..”


“그게 좋아하는 사람한테 할 행동이냐?
해도 정도껏 해야지”



“니가 너무 안 받아줘서 그런 거 아니야?
카톡 답장도 그렇고...”


“싫은데 어떻게 받아줘”


“어?”



“나 싫어 그 누나”



“.......”


“좀만 잘해주면 자기 좋아하는 줄 알고
혼자 상상연애하고 이별하고.
어쩔 때 보면 무섭다니까?”


“.......”


“거기다 또 나 좋아하는 티는 엄청 내요.
과 애들도 다 알아. 그 누나가 나 좋아하는 거.
쪽팔려 죽겠어”


저기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는 선배가 보였다.
대화를 나누던 남자는 사라진지 오래였고,
선배 혼자 날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정신없는 손짓을 해댔다.


“아니, 눈치라도 있어야 될 거 아냐.
내 반응 보면 감이 안 오나?
연애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처럼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진짜 스트레스야”


내가 빤히 쳐다만 보고 있으니
선배도 꽤 답답했는지
한 걸음 앞으로 살짝 걸어 나왔다.



“혹시 진짜 모쏠인건가?
헐. 그럼 완전 답 안 나오는데”


고개를 돌려 앞을 쳐다봤다.



“아... 그런 여자가 나 좋아한다는 것조차 쪽팔려.”


그리고 다시 선배를 쳐다봤다.
‘오지 마요’




“쪽팔려?”


“.....어. 아 근데,”


“야”


“어?”


“넌 뭐가 그렇게 잘났냐?”


“.......”



“너는 인마, 누군가가 널 좋아해주는 마음을
쪽팔려 하는 그 정신머리, 그걸 쪽팔려 해야 돼.
내 말 무슨 뜻인지는 아냐?
얼굴만큼 대가리는 잘생기지 않아서
이해가 느릴 수도 있겠네.”



“야”



“니가 하는 사랑만 사랑이냐?
너만 특별한 거 아니야. 정신 차려”


“.......”


“인기만 많으면 뭐해. 진심을 모르는데”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 진심이
어떤 느낌인지 짐작도 못하는데
인기만 많아서 뭐하냐고.”


“그리고 너 솔직히 즐겼잖아.
선배가 너한테 죽어라 매달리는 거 보면서
속으론 재밌어 했잖아 새끼야.”


“치사하게 뒤에서 여자 하나 조롱거리 만드는
너 같은 놈을 양아치라고 부르는 거야.
그것도 못 되 처먹은 양아치 새끼.”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같은 남자로서 쪽팔린다”


“그리고 입 조심해. 우리 과 선배한테.”


.......



“어머, 너네 여기 있었니?”



“아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어, 어?”


“가요 선배”


“어? 가자고?”



“.......”


“빨리 나와요!!!!!”


“왜!! 왜 그러는데...!!!”


버티고 서있는 선배를 간신히 끌고 나왔다.


건물을 벗어나 잔디밭을 가로질러
공대 건물 옆에 있는 벤치까지 가고 나서야
선배가 내게 붙잡인 채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됐다.



“이거 놓으라고!!!!”


“아, 죄송합니다”


“뭐하는 거야 너!!!!!”


“죄송합니다 선배”


“여긴 또 어디야.  아 왜 여기까지 끌고 나와!!”


“.......”


“아까운 구두만 다 까졌네. 씨...”


“선배님”


“왜!!!”



“쟤 좋아하지 마요.
제가 더 좋은 남자 소개해 드릴게요.
더 멋있고 잘생기고 키 크고.
농구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치는 남자로요.”


“뭐?”


“더 괜찮은 남자 만나요.
선배는 그래도 돼요. 그럴 자격 충분하니까,”


“뭔 소리야”


“그냥 좀, 그렇게 상처받으면서까지
아까운 사랑 퍼주지 말라고요.”


“야...”



“상처 주는 놈은 과감히 버리고
선배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주는 남자를 잡아요.
그런 게 진짜 사랑이에요.”


모르겠다.
잠깐 눈이 흔들렸던 것 같다.
그게 나였는지

앞에 서있는 선배였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누군가는 눈이 흔들렸다.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그렇게 내가 싫대?”


“네?”


“강준이가 그래? 내가 징그럽게 싫다고?”


“선배님,”


“멀리 있어도 보이더라 네 표정.
네가 오지 말라고 할 때 그 표정이...
마치 알 것만 같았어.
왠지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그런 거 아니에요.”



“나도 들었어, 네 말. 양아치 어쩌고저쩌고”


“.......”


“뭐하러 네가 화를 내. 따져도 내가 따져야지”


“.......”


“어차피 한 마디도 못 했겠지만”


선배가 옆에 있던 벤치에 살짝 앉았다.
그리곤 날 쳐다보더니 턱으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다리 아파”


“....... 아무튼 선배님, 저런 놈 말고...”


“앉으라고”


“네”


곧바로 옆에 앉아 선배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여러 번 입술을 달짝이는 게 눈에 보였다.



“강준이가 무슨 말을 했는 진 모르겠지만
아마 틀린 말은 아니었을 거야”



“다 틀렸는데요.”


“뭐라고 했는데?”


“까먹었어요.”


“.......”


“.......”



“어쭈구리”


“뭐가 됐든 다 틀린 말이었으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


“그리고 그런 놈 좋아하지도 말고요”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주는 남자를 만나라?”



“네. 원래 그게 맞는 거예요”


“그런 남자가 없으면?”


“왜 없어요!!!”


“어딨는데”


“그거는 이제, 그, 뭐냐,”


“어딨냐고”


“찾아야죠”


“.......”


“그런 상대가 쉽게 나타나겠어요?
어렵게 만나야 진짜 사랑인 거죠”


“27년을 기다렸는데?”


“네?”


“27년이나 기다렸다고. 그런 사랑을”


“.......”


“근데 없었어. 한 번도”


“그럼 선배,”


“짝사랑만 한 거지.”


“.......”



“나 모쏠이야. 웃기지”


“.......”


선배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갤 숙였다.
그리고 한동안 앞코가 까진 구두를 쳐다봤다.


“이거 너한테 처음 말하는 거다?
맨날 거짓말 했었어. 연애 많이 해봤다고”


“모쏠이 뭐가 어때서요”


“너 모쏠이야?”


“..아니요”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야.
모쏠도 괜찮다, 아무 문제없다,
짝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거”


“.......”


“나도 짝사랑 하기 싫어. 얼마나 힘든지 알아?
매일 가슴 졸이고  작은 호의 하나에도 설레 하고.
그러다 또 외로워하고...”


“이게 계속 반복되면 나중엔 내가 날 증오하게 돼.
나를 돌볼 시간은 주지 않고 상대방만 좇는 거지.
나란 사람은 점점 작아지고 그러다 사라지고...”


“그래서 하는 거야.
이거라도 안 하면 나는...
내 존재가 정말 먼지처럼 돼 버릴까봐.
너무 쓸모없어 보일까봐.”


“나도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어.”


“특별한 것까진 바라지도 않아.
그냥 보통의 존재,
사랑이란 걸 받을 수 있는 평범한 사람”


“그것 뿐이야”



선배의 울먹임이 귓가에 울렸다.
오늘따라 날은 화창했고
바람은 머리칼을 간간이 스치며
이마를 간질였다.


이럴 때면 꼭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떤 영화라고 명확히 말할 순 없지만
사실 그 영화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마치 스크린에서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좋은 연출가라면 이런 장면에서
굳이 여주인공의 눈물을
클로즈업 하지 않을 것이다.
관객들은 이미 주인공의 대사를 음미하며
슬픔의 위로를 던지고 있을 테니.


그런데 나는,
나쁜 연출가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그래서 모든 관객이 떠난다 하더라도,


이 여자만 특별하게 만들고 싶다.


모든 햇빛, 바람, 파란 하늘,
심지어 머리칼까지
아무 것도 방해할 수 없게끔 하고 싶다.


보통 세상에 사는 특별한 존재로-





“선배는 특별한 사람이에요.”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
.
.








탁탁탁-



운동장에서 동아리방까지 걸어서 15분 뛰면 10분.


근데 지금처럼 눈썹 휘날리며 전력질주하면
약 6분.


“야 도경수 어디 가냐!!!!”


“동방!!!”


“왜 뛰는데!!!!”


“몰라도 돼!!!!”


“치킨 시켰어???”


“더 좋은 거!!!!”


“어??”


“더 좋은 거 왔다고!!!!”


눈도 좋은 정수정이
도서관 건물 5층 창문에서 나에게 소릴 질렀다.
보라는 책은 안 보고
바깥 구경만 하니 성적이 그 모양이지.


혹시 아직도 보고 있나?


힐끔-


아 뭐야, 얘도 따라서 뛰고 있나 보네.
그새 사라지고 없는 거 보니.



오늘도 그날처럼 바람이 머리칼을 스쳤고
그 머리칼은 넘실넘실 춤을 췄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우릴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더 크게, 더 화려하게 움직여주길 바란다는 것.


더 특별해질 수 있도록.



“오- 우리 경수 잘 뛰는데??”


“형 안녕하세요!!!”


“어딜 그렇게 가냐!!”


“동방이요!!!”


“무슨 일 있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흙 하나 묻지 않은 축구화가
옆에 가지런히 놓인 걸 보니
오늘도 두준 형한테 끌려나왔나 보다.


단과대별 축구 토너먼트 경기에
예비선수로 참가하게 된 빈이 형은
원래 움직이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두준 형도 아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매일 빈이 형을 끌고 나왔을 것이다.
예대 축구팀 주장으로서
운동에 젬병인 빈이 형을
예비선수로 써야만 하는 현실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탁탁탁-



안 그래도 빠른 걸음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점점 더 빨라졌다.


아무 생각 없이 계단으로 가려던 나는
급히 정신을 차리고 엘리베이터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곳은 오늘따라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결국 다시 찾은 계단.
꽤 높은 계단 때문에 숨이 막혔지만
이미 다리는 성큼성큼
알아서 뛰어 오르고 있었다.


나는 지금 왜 뛰고 있는 걸까.
이유는 명료했다.


반가움,
그리고 고마움


지난 3주간 나는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매일같이 학교에 나왔고
강의 중 쏟아지는 과제와
늦게까지 이어진 동아리 회의에 치였으며
낮엔 축구 연습, 밤엔 영화 분석을 하며
바쁘게 하루하루를 채웠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러지 못 했다.


3주 동안이나 그 존재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벌컥, 쾅-



“하아, 하아... 아 내 다리... 아아...”



“어이, 도토리!”


“에? 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어 안녕 해. 도토리 많이 바뻐?”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교수님이 목소리가 날 반겼다.
황 교수님은 입학 첫 날부터 날 도토리라 부르셨다.
그리고 지금가지 쭈우욱...



“저 지금 좀 바쁩니다”



“어! 그럼 안 되는데!!”


“네?”


“심부름 하나만 해주면 안 돼?”


“심부름이요?”



“어. 내 방에서 자료 좀 갖다주라”


“교수님... 방이요?”


“어. 안 그래도 내가 지금 가던 길이었거덩.
근데 너도 알잖아. 내 방 겁나 먼 거.
여기 위층에서 대학원생들 데리고  얘기 좀 하려는데
내가 중요한 걸 깜빡했더라고.”


교수님 방은 옆 건물 꼭대기 층 구석 어딘가에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닿지 않는 곳이었고
설령 그 층에 어떻게든 간다 해도
미로 속에서 몇 분을 헤매야 간신히 찾을 수 있는
호그와트 비밀의 방...


“아마 A4 자료들이 뭉탱이로 있을 거야.
무겁진 않으니까 들고 와줘. 바로 위층으로”


“저 지금 바쁜데...”


“내가 술 살게”


술은 나보다 교수님이 더 좋아하는 거였다.
코가 빨개질 정도로 마시는
소문난 술꾼...



“.......”



“워우, 표정이 너무 구린데?”


“.......”


“그러면....”


“.......”


“아, 이번 과제에 어드밴티지를 줄게”


“어떤 어드밴티지요?”


잠깐만, 과제는 뭐였지?


“니가 지금 갖고 올 자료 뭉탱이 있잖아.”


“네”


“거기 보면 첫 번째 페이퍼에 죽이는 에세이가 있어.
그거 참고하게 해줄게”


과제, 과제가 뭐였지...
과제가 뭐더라.......



“어때. 이 정도면 짱이지?”


“그......”


“그럼 너 믿고 간다?”


“과제가...”


“얼른 갖고 와!!!!! 착하다 도토리!!!!”


교수님은 순박한 웃음을 흘리며
반대편 복도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쎄-한 기분이 들었다.
뭘까, 이 기분...



쾅-



“아악!!!! 내 다리!!!!!!!!!!”


“흐업”



“어우 씨.... 야 도경수!!!”


“너 진짜 나 쫓아온 거냐?”


“그래!!!! 더 좋은 게 뭔데!!!!”


“뭐?”


“더 좋은 게 뭐냐고!!!”


“...아.......”


“니가 분명히 치킨보다 좋은 거라고 했다?
피자 햄버거 이런 거면 죽을 줄 알어”



“크흡”


“어? 웃어?”


“그거야 가보면 알겠지”



“아 뭐야, 아무 냄새도 안 나잖아.
원래 맛있는 거 오면 냄새가 나야 정상인데”


킁킁거리며 걷는 정수정을 힐끔 쳐다보며
동방을 향해 걸었다.


“참, 황 교수님 과제가 뭐야?”


“누구, 황정민?”


“어”


“과제 없어”


“어?”


“없다고.

이번 학기엔 과제 안 낼 거라고 했잖아. OT때”


“.......”



“벌써 까먹었냐? 쯧쯧...”


내가 까먹은 건 과제 뿐 만이 아니었다.
황 교수님이 예전 연극영화과 재학 당시
알아주는 ‘연극배우’였다는 사실 또한 까먹고 있었다.


없는 과제도 만들어내는 교수님의 창조 연기란.



“분하다”


“뭐래”


“분해...”


날 보며 혀를 차던 정수정이
있는 힘껏 동방 문을 열었다.
나는 커진 눈을 하곤 얼떨결에 앞을 쳐다봤고
그 순간,


“어, 선배님!!!”



“안녕-”


눈물 콧물 닦으며 속 얘기를 털어 놓던,
그 순간에도 까진 구두를 걱정하던,
‘잘 가라.’ 시크한 인사를 남겼던,
그 이후 3주씩이나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


보통의 존재와 눈을 마주했다.



“안녕, 국영수”



“나오셨네요, 오늘은”


“어”



“선배님 갑자기 안 나오셔서 엄청 놀랐었어요!!”


“안 그래도 지금 따지던 중이었어.
선배 어떻게 된 거예요!
전화도 안 받고 카톡은 읽지도 않고!”


“아우 시끄러워!!!”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아무 일 없었어!!!”


“근데 왜 학교를 안 나왔냐고요!”


“그건 그냥,”


뭔가 말 하려다 날 슬쩍 쳐다보는 선배님.
내가 급히 시선을 돌리자
한숨을 한번 내쉬곤 가까스로 답한다.



“좀 아팠어”


“헐! 진짜요? 어디가요?”


“병원에 있었어요??”


“무슨 병원이야!! 오버 하지마라 ㅇㅇㅇ”



“그러고 보니까 선배님 살 빠지신 거 같아요”


“맞아 맞아”


“쪘는데”


“에이...”


“쪘어”


갑자기 조용해진 동방.
회장선배와 수정이가 서로 다른 곳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무튼, 나 이제 다 나았으니까 걱정하지마”


“어디가 아팠는데요?”


“.......마음”


선배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마치 여주인공처럼.



“내가 이래봬도 완전 소녀감성이잖아.
마음에 쉽게 스크래치 나는 스타일”


“.......”


“그동안 여기저기 긁혔던 거
보수 공사 하느라 바빴어.
이젠 홀가분하고 좋아. 하나도 안 아파”


선배와 또 다시 눈이 마주쳤다.
내가 먼저 씨익 웃었고,
선배도 따라서 피식 웃었다.



“그런 의미로 오늘 삼겹살에 소주 쏠 건데 올 사람?”


“저요!!!!!”



“오예~ 오예~”


“오케이, 지긋지긋한 여자 둘이랑... 야 국영수,”


“네?”


“너도 가자”


“아, 저는 괜찮은...”


“스읍-”


.......



“이따 뵙겠습니다”



“오냐”



“참, 야 너 어떻게 된 거야?
치킨 보다 좋은 거 시켰다며”


“뭘 시켜?”


“쟤가 치킨보다 더 좋은 거 있다면서
여기로 엄청 뛰었거든요.
저도 따라서 뛰고”


세 여자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닿았다.


“엄.......”


“배달시켰어? 여기로?”


“뭐 시켰는데?”


“그.......”


“치킨 시키지. 난 치킨이 제일 좋아”


“양념?”


“치킨은 반반이죠”


“오- 꽤 먹는데?”


“헤헷”


“.......”


“뭐 시켰냐고 국영수”


“아 참, 저 황정민 교수님 심부름해야 되는데!”


“엉?”



“교수님이 뭐 좀 가져다 달라고 하셔서요.
하하하하하!!!!! 큰일 날 뻔 했네?”


“.......”


저거 백퍼 연기톤이야. 더러운 발연기”


“다, 다녀오겠습니다!!!!!”


“아 야!!!!!! 도경수!!!!!!”



쾅!!!!!!!!!!!



문이 떨어질 듯 닫고 계단을 향해 내달렸다.
추격자 하정우,
런닝맨 신하균,
맨발의 기봉이 신현준,
.......
달려라 ‘하니’처럼.





*







(사흘 후)




똑똑똑-



“들어오쎄요옹”


교수님의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듣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잇, 도토리?”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어쩐 일이야 이 먼 데까지?”


“드릴 게 있어서요”


“뭔데”


“에세이입니다”


교수님 책상에 한 장의 종이를 올려놨다.


“진짜 썼어?”


“아니요. 이거 두준 형 거예요”


“아... 반납하는 거야? 가져도 된댔잖아”



“제가 가지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교수님에게 속아 심부름을 했던 날,
누군가의 진심이 가득 담긴
종이 한 장을 갖게 됐다.


교수님 말씀대로 책상 위엔
종이 뭉탱이가 쌓여있었고,
그 중 첫 장엔 낯익은 이름이 적혀있었다.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세 번, 네 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같은 자리에서 글만 읽던 중
기다리다 지친 교수님이 직접 오셨고,


오자마자 한 말씀만 하셨다.
'너 가져.'



“나도 돌려줄까 생각 중이야”


“.......”


“이 글 볼 때마다 미안해 죽겠걸랑.
가슴이 좀 쓰리기도 하고”


“.......”


“아 이 자식은 과제 내랬더니 일기를 쓰고 지랄이야. 그치”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를”


“이 글이요.”


“나? 나는,”


“.......”



“이 글이 틀렸으면 좋겠어”


“.......”


“내 바람이야.
윤두준이 사랑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어.”


“.......”


“너는”


“.......”





저도요.





.
.
.





<보통의 존재>
-201108531 윤두준



나는 요즘 보통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은, 무척 괴롭다.
이미 날 그런 존재로 바라보는 눈을
애써 참아내는 그 순간순간이 너무 괴롭다.
한 때는 사랑했었지, 한 때는 사랑 받았었지 라고
추억하는 그 순간조차도 무섭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무섭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아마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묻지 못했다.


그녀에게 시간을 갖자고 했다.
그리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시간까지 가져왔다.
이미 필요 없어 보이는 그 시간들을
나는 아직도, 여전히 갖고 있다.


내가 가진 이 시간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그래서 줄어들지도 않는다.
보통의 시간은 쉽게 줄지 않는 모양이다.


어쩌면 내가 붙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간이 끝나면 나는, 우리는.......
 
보통의 존재로밖에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결국에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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