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그래도 돼요?"


"네 그럼요"


"믿어주실 건가요?"


"네. 믿겠습니다"


"왜요?"


"ㅇㅇ씨를 믿으니까요"


"저를 왜 믿는데요?"


"못 믿을 이유가 없어서요"


"......."


"많은 분들이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고 하면
머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잘못된 인식입니다.
우린 지금 그냥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뿐이에요.
내용 상관없이"


"......."


"물론 비밀로요"


의사가 밝게 웃으며 ㅇㅇ을 쳐다봤다.


"그러니 걱정 말고 말씀해 보세요.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으셨다던 그 이야기요."


의사에게 닿아있던 ㅇㅇ의 눈길이
손에 쥔 명함으로 떨어졌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공 효 진

'상담은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명함을 한참 들여다보던 ㅇㅇ는
결심이라도 한 듯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제가요, 선생님"


"네"


"사실은요"


"......."


"이번이 네 번쨉니다."


"뭐가요?"


"......."


"......."


"이번 생이요. 네 번째예요."


"......."


"네 번이나 살고 있다고요."





찬란한 슬픔의 봄
by. 별유





처음엔 몰랐어요, 아무 것도.
어떤 사람이
'지금이 몇 번째 생일까' 생각하고 살겠어요.
그냥 태어났고, 태어났으니 사는 거고.
그렇잖아요.


근데 그 사람만 만나면
저도 몰랐던 기억이 재생 돼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면서 영상들이 지나가는데,


그 안에 다 그 사람뿐이에요.


웃는 거, 화내는 거, 우는 거.
온통 그 사람에 대한 거요.
옷차림하고 배경은 달라지는데
그 사람만 그대로 있어요.



-그럼 그 사람도 ㅇㅇ씨처럼 계속 생을,


...아마도요.



-이번에도 만났나요?


네.



-기억은요. 그 사람도 기억을 해요?


아니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해요.



-...누군가요, 그 사람이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요.
사랑했던 사람이자, 앞으로 사랑할 사람.
거스를 수 없는 사람.



-.......


.......



-어떻게 매번 새로운 생을 살고 있다고
확신하게 됐습니까?


반복 되니까요.
두 번째에도, 세 번째에도
지난 생의 기억을 떠올렸으니까.
내가 타임머신을 탄 게 아닌 이상
그럴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자세하게 기억하기도 하고.



-반복된다는 것까지 기억을 한단 얘기네요.


네.



-지나온 모든 생을 다 기억한다고 받아들여도 될까요?


네. 그와 함께한 순간은요.
아, 한 가지만 빼고요.



-어떤 거죠?


어떻게 끝이 났는지... 그것만 빼고.



-관계의 결말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쉽게 말해 해피엔딩인지, 아니면...


만약 우리가 헤어졌다면
헤어진 순간이 마지막 기억이 돼야 하잖아요.
근데 그런 건 없어요.



-그럼 해피엔딩 아닌가요?


해피엔딩이면 둘 중 하나가 명을 다 하는 순간이
마지막 기억이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어요.



-그럼 주로 어떤 기억이 마지막이 되나요?


그냥... 함께 있는 순간이요.
그리고 마지막과 가까운 기억들은 흐릿해요.
조각처럼 나눠져 있기도 하고.



-그것에 대해 왜 그런지 고민해 보신 적 있나요?


일부러 그 기억만 지운 게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은 있어요.



-누가 그 기억을 지웠을까요.


모르죠. 신? 나 자신?



-지운 이유는?


내가 계속 태어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니까.



-계속 태어나는 이유가
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매번 새로운 생을 살 때마다
우연히 그를 만났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어요.
이건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는 걸.
나는 그를 만나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거예요.
똑같이 사랑에 빠져야 하는 운명을...

그래서 생각하게 됐죠.
내가 태어나는 이유는, 다 그 사람 때문이다.



-그 사람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
아마도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네요.





*






"이게 시라고? 치기(稚氣)도 아니고."


처음 기억은 이날부터 시작 돼요.
중절모를 쓰고 멜빵을 한,
장난끼 짙었던 그의 표정에서부터.


“이깟 게 시라면 나도 쓰겠네.
자네 같은 룸펜도 말야.”


“젊은 날의 치기라 하기엔 문장이 좋아.
보통 솜씨가 아닐세”


“그러니 자네가 나부랭이 소리를 듣는 게야.
소설가 나부랭이”


“밖에 나가 봐.
나뿐 만이 아니라 거진 모든 사람들이
직입(直入) 이 자의 시에 열광하고 있다고.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잘 담아냈다고 말이야.”


“그래서 한심하다는 것 아닌가.
20세기에 들어선 지 벌써 3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뒤쳐져 있다니.”


“거 참”


그와 그의 친구는 늦은 시간까지 다방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테이블엔 타자기와 신문 뭉치가 놓여 있었죠.


“자넨 어찌 그리 비관적인가”


“글쎄. 자네 말대로 맨날 살인 사건만
들쑤시고 다니니 그런 걸지도”


“참, 부산 사건은 어찌 되었나?
철도국 사무소장 부인이 조선인 하녀를
죽인 사건 말이야.”


“마침 그 기사를 쓰고 있던 참이었네.”


“어디 좀 보게나”


친구가 다급하게 기사를 읽는 사이,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봤고


“.......”


“.......”


구석에서 글을 쓰고 있던 저와 눈이 마주쳤어요.
사실 먼저 쳐다보고 있었던 건 나였지만.


“바뀐 것 하나 없구만.
주범이긴 하나 기소는 하지 않겠다?
이 망할 놈들.”


“.......”


“죄 없이 죽은 이 하녀의 원한은 누가 달래줄꼬.”


“달래준다 한들 무엇이 바뀌겠는가.
그런 걸 바라는 것 자체가 사치일세”


그는 나를 보며 말했어요.


“몇 줄 되지도 않는 시를 보며
이 나라에 희망을 갖는 것처럼”


그 눈길을 감당하지 못했던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다방을 나섰고,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됐어요.


시가 적힌 종이 한 장을 그곳에 놓고 왔다는 걸.




다음날 저녁이 돼서야 그곳을 찾은 저는
어제 앉았던 자리로 가
바닥 이곳저곳을 확인했어요.
떨어져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걸 찾으시오?”


종이가 아닌 남자의 구두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


“그대가 어제 두고 간 이 종이 말이오.”


“아, 네. 맞습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곱게 접힌 종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어요.
하지만 그는 건네지 않고 도리어,


“그대가 이 시의 주인이오?”


질문을 하더라고요.


“.......”


“시를 쓴 게 당신이냐고 물었소.”


“아닙니다”


“.......”


“아는 분의 시를 필사한 것입니다.”


“혹시 그 아는 분이 ‘직입’이오?


“.......”


“‘직입’을 안다?”


“.......”


“한 번도 정체를 드러낸 적 없는,

유령이라고까지 불리는 이 자를 여인이 알고 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 자의 정인이오?”


“제가 왜 답을 해야 하죠?”


“.......”


“그리고, 왜 이 시의 주인을 그리 쉽게 단정하십니까?”


“.......”


“전 그저 ‘아는 분’이라고 했을 뿐인데요.”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어요.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소.
내가 워낙 궁금한 건 못 참는 성질이라”


“이만 주시죠.”


“아, 여기”


그는 신경질 적으로 종이를 낚아채는 날 보며
너무나도 환한 미소를 지었어요.
이유를 물으려다 다시 말을 섞고 싶진 않아
옆으로 지나치려는데


“시간 좀 내어주시겠소?”


“...네?”


“잠시만.”


날 붙잡더라고요.
그저 한 마디 말일 뿐인데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어요.


모르죠.
저도 그 사람이 심히 궁금했는지도.


“인사가 늦었소. 조승우라 하오.”


“...ㅇㅇㅇ입니다.”


“ㅇㅇ이라. 좋은 이름이오”


“.......”


“난 조선중앙일보에서 사건부 기자로 일하고 있소.
그대는,”


“여전을 다니고 있습니다.”


“아, 인텔리”


“.......”


“왠지 그럴 것 같았소. 옷차림을 보아하니”


“선생님도 그리 보이십니다만.”


“난 그저 펜대를 굴리는 사람에 불과하오.”


“저 또한 책상 앞에 앉아있는 사람에 불과한 걸요.”


그는 내 대답에 껄껄 웃었어요.


“이제 제 차례입니다”


“.......”


“왜 이 시를 읽고 직입 선생의 글이라 확신하셨습니까?”


“문체가 그렇지 않소.”


“선생의 시를 많이 좋아하시나 보네요.
문체까지 알 정도면.”


“좋아한다기 보단, 그냥 안다는 표현이
더 맞을듯 싶소만.”
 
“많이 읽어보셨기에 아시는 것 아닌가요?”


“읽어봤다 해서 좋다는 뜻은 아니니까.”


“.......”


“우리 신문에 연재되는 시라서
그냥 읽어본 것뿐이오.
그 작자 덕에 신문이 더 잘 팔린대나 뭐래나...”


“그 분의 시를...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


“.......”


“정말 직입의 시가 아니오?”


“아닙니다.”


“.......”


“실망 하셨나요?”


“아니. 실망은 무슨”


“.......”


“웃음이라면 모를까”


“웃음이라뇨?”


“직입의 문체를 따라하는 이들이 생겼다는 것 아니오.
이것보다 더 웃긴 일이 어디있소”


“그게 왜 웃기죠?”


그가 어렴풋이 웃었어요.
날 놀리려는 웃음이 분명했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었어요.


“그들이 직입을 따라하며 무슨 생각을 했겠소.”


“.......”


“이 시라면, 이런 시가 널리 퍼져서
조선인들이 각성한다면
이 나라가, 내 나라가 언젠간 독립이란 걸 할 수 있겠지
그 날이 오겠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소?”


“.......”


“그러곤 단칸방에 모여 앉아
우리의 사명이니 조국의 운명이니 하며
핏대를 세웠을 것이오. 아니 그렇소”


“.......”


“지식인들의 발상이란 참으로 단순한 게지.”


“선생님은 독립에 대한 의지가
한낱 농지거리로 들리시나 봅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농지거리라니”


“.......”


“나에게 독립이란, 저 커피와도 같소”


그가 옆 테이블에 놓여있던 커피를 보며 말했어요.


“너무 써서 제 맛을 알 수 없는 것.
굶어 죽는 사람에게 줘봤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것.”


“.......”


“날이 밝아올 때 쯤 잠들게 만드는 것.”


“.......”


“독립은 나에게 그런 것이오.”


그는 냉소적인 사람이었으나 호기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사건부 기자직이 자신에겐 천직이라고 설명했었죠.


우린 그날, 서로에게 재밌는 제안을 했어요.
나는 그에게 시를 알려주고
그는 나를 취재 현장에 데려가고.


그래서 어떤 일이 더 재밌는지 확인해보기로 했죠.




“후.......”


“어때요?”


“전혀,”


“네?”


“재미가 없소.”


“아니 왜요?”


“뭐랄까. 좀 허무하달까?”


“그게 이 시의 주제인데요?”


“허무함을 표현하기 위해
시까지 짓는 수고를 했단 말이오?”


“푸흐...”


“그쪽 문인들은 참, 세상을 복잡하게 사는 것 같소”


“그냥 표현하는 것뿐인 걸요.”


“해서, 학교에서도 모자라
도서관에서까지 이런 시를 공부한단 말이오?”


“네.”


“거 참...”


“이 시도 읽어보십시오”


“안 그래도 여기 많이 있으니 서두르지 마시오.”


“크흐....”


“웃지도 말고.”


“웃긴 걸 어떡해요”


“웃으랄 땐 안 웃고 이럴 때만...”


“전 선생님이 난처해하실 때가 제일 재밌더라고요”


“.......”


“.......”


“그래도 너무 그리 환하게 웃지 마시오.
...못 쳐다보겠으니까”




우린 몇날 며칠을 함께 했어요.
하루는 시를 읽고, 또 하루는 취재를 하러 다녔죠.
그가 얼마나 시를 좋아하게 됐는 진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어요.


서로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이길 너머에 있는 산 중턱.”


“거기를... 지금요?”


“그렇소”


“이 캄캄한 밤에?


“그렇다오”


“왜요?”


“제보가 하나 들어왔소”


“무슨 제본데요?”


“경성부금고도난사건 기억하시오?”


“아.. 얼마 전에 있었던...”


“도난 된 그 금고가
오늘 밤 그곳에 묻힐 거라는 제보였소.”


“누가 제보했는데요?”


“무명의 누군가가.”


“제보 하나만 믿고 이렇게 가시는 겁니까?”


“가봐야죠. 진실이든 아니든”


“헌데 선생님”


“왜 그러시오”


“조금만 천천히 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걸음이 너무 빠르셔서...”


“아, 미안하오”


“.......”


“혹 다리가 아프거나 춥거나 하면 말씀하시오.”


“그럼 돌아갈 건가요?”


“놓고 갈 거요”


“예?”


“나라도 빨리 다녀와야지 않겠소”


“.......”


“거 얼굴이 왜 그렇게 굳은 것이오?”


“.......”


“대답은 왜,”


“.......”


“골나셨소?”


“아닙니다”


“골난 것 같은데”


“아닌데요”


“농이요 농. 뭐 그런 거 가지고...”


“아니라니까요?”


“내 언제 당신 두고 가는 거 봤소?”


“.......”


“...걱정 마시오. 업고라도 갈 테니”


“.......”


“대답 좀 해주시오. 귀신이랑 걷는 것 같아 무,”


“쉿!!!”


“아니 왜,”


“저기 좀 보십시오”


“.......”


“사람 같지 않습니까?”



“....사람 같은 게 아니라 사람이 맞소.이리오시오”


그는 내 손목을 붙잡고
큰 바위 밑으로 몸을 숨겼어요.
그리고 나에게 속삭였죠.


“날 잘 따라오시오.
절대 한 눈 팔거나 멀어진다거나 그럼 아니 되오.
아시겠소?”


“네”


“무서우면 날 붙잡고.”


“네”


“무섭지 않아도 붙잡고.”


“네. 네?”


“혹 저들이 공격 해오면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시오.”


“...선생님은요?”


“당연히 옆에 있지 않겠소? 그대가 날 붙잡았을 테니”


“아.......”


“갑시다 그럼”


“네!”


그의 뒷모습만 죽어라 쫓았던 것 같아요.
무서워서 고개도 못 들고...
몇 번이나 그의 등에 이마를 박았을까,
그가 뒤로 손을 건네며 말하더군요.


“붙잡으라 하지 않았소”


결국 우린 손을 맞잡고 입구까지 갔어요.
나무 뒤에 숨어 동태를 살피는데
두 남자가 큰 자루를 들고 오더라고요.
낑낑대는 꼴이 분명 뭔가 있겠다 싶었어요.


“선생님! 저거...”


“쉿”


“근데요,”


“.......”


“우리가 현장을 잡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날 밝는 대로 경찰에 신고할 것이오”


“아...”


남자들은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자리를 떴어요.
기회라고 생각한 우리는
그들이 돌아오기 전 자루를 확인하기 위해 앞으로 뛰어나갔죠.


“여기 뭐가 들었을까요?”


“딱딱한 걸 보니 금덩이일 확률이,”


“금덩이요?”


“가장 높을 것... 같았는데”


“이, 이건...”


하지만 자루 안엔 금덩이가 아닌 벽돌만 잔뜩 들어있었어요.


“.......”


“.......”


“이게 여기 왜 있을까요”


“.......”


“다음엔 그 무명의 제보자를 잡으러 가시죠.”


“젠장...”



“거 누구요!!!!!!!!!”



“어?”


“.......”


“우릴 봤,”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반대편으로 뛰었어요.
아무런 말없이 앞만 보고서.


“선생님!!!”


“.......”


“왜 우리가 도망가야 되는 겁니까??”


“그 벽돌, 저들이 훔친 거요”


“네???”


“어찌됐든 도둑이라고!!!”



“이 쥐새끼 같은 놈들아!!!!!”



“꺅!!!!!!!”



“어서 갑시다"


어둠을 뚫고 뛰다보니
민가가 보이는 길목에 도착했더라고요.
더 이상 쫓아오지 않겠구나 싶어 한숨 돌리는데,



“저깄다!!!”



다시 외침이 들렸어요.
그래서 이번엔 아예 좁은 골목길 사이
어두운 구석에 몸을 숨겼죠.


“괜찮소?”


“네. 선생님은요?”


우린 속삭이며 대화를 나눴어요.
최대한 들리지 않게.


“..미안하오. 괜히 데리고 와서는,”


“아닙니다. 재밌는 걸요”


“.......”


“시보다는 아니지만. 히히”


“.......”


어둠 속이었지만
가까이에서 마주 본 그의 얼굴은 참 멋졌어요.
큰 눈에 오똑한 코, 가지런한 입술까지.


“그리 날 훑어보면,”


“.......‘


“숨을 쉴 수가 없잖소.”


“네?”



“아 이쯤에 있을 거 같은데...”



도둑의 목소리가 코앞에서 들린 순간이었어요.
갑자기 그가 날 품에 안았죠.


“.......”


“.......”


차가운 공기가 따듯해지는 걸 느꼈어요.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도.



“이 쪽이다!!!!”

“에라잇!!!!



다다다다- 우리 주변에서 헤매던 남자는
반대편으로 뛰어갔고,
바로 옆에 숨어있던 우리는


“.......”


“.......”


아무 말 없이 계속 그렇게,


“.......”


“.......”


서로를 안고 있었어요.


그러다 그가 먼저 입을 떼었죠.


“...매일 유리문 안에 앉아 있던 내가”


“.......”


“아직 겨울이다, 겨울이다 생각하는 사이”


“.......”


“봄은 어느새 내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


“.......”


“나쓰메 소세키, ‘유리문 안에서’”


 “맞소”


그가 내 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어요.


“그대와 수많은 글을 읽었는데
기억에 남는 구절이라곤 이것 밖에 없더이다.”


“.......”


“왜 그럴까... 한참을 생각했는데”


“.......”


“그대가 봄이어서 그런 거였소”


“.......”


“날 흔드는 봄. 그게 당신이어서”




그때의 제 표정은 기억하지 못해요.
날 보던 그의 얼굴만 뚜렷할 뿐.


그는 미소 지었어요.
내 눈가를 손으로 닦아주며
살짝 찌푸리기도 했고요.
아마 울었나 봐요 내가.
그리곤 다시 날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줬어요.


볼에 닿았던 차가운 셔츠
등에 닿은 따뜻한 손


차갑고도 따뜻한 밤이었어요.




-그게 첫 번째 생의 마지막 기억인가요?


아니요. 많진 않지만 여러 기억들이 이어져요.




“ㅇㅇ아”


“네”


“ㅇㅇ아”


“네에”


“ㅇㅇ아”


“.......”


“참 예쁘구나”


“.......”


“이름이”


“아이, 선생님!!”


“하하하하!!”



/



“김현순과 아는 사이였다고?”


“네. 학교 선배님이니까요”


“그럼 안기영과의 관계도 알고 있었나?”


“음... 어느 정도는요?”


“아니 그 얘길 왜 이제야 해?”


“왜요?”



“내가 취재하던 사건이잖아”


“그런 스캔들도 취재하셨어요?”


“응. ‘사제지간을 뛰어넘은 애정의 도피행각’”


“아... 그게 선생님 기사였군요”


“읽었어?”


“네. 읽으면서 욕했던 기억이 납니다”


“뭐?”


“아무리 사회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일일지라도
그렇게 가볍게 쓰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가볍다니. 내 그 기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데”


“쓰신 분은 그러셨는지 몰라도
읽는 사람에겐 그저 웃고 떠드는
풍문거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


“.......”


“우리 부장보다 까다로운 사람이 여기 있었구만.”


“안기영 교수 부인의 이야기도 신파로 쓰셔 놓구선.”


“크흐...”


“웃지 마십시오. 반성하셔야 됩니다.”



“반성할게. 반성하고 있어 지금”


“치”


“그대 말은 내 다 듣지”


“말만...”


“크으... 애정의 도피 행각이라.”


“.......”


“나도 가고 싶어지는데?”


“네?”


“어때. 나와 함께 갈래?”


“.......”


“여기 일 다 제쳐두고
아무도 못 찾는 곳에 가서 둘이 사는 거야.
방해꾼 없이 자유롭게.”


“여기서, 누가 우릴 방해하던가요?”


“.......”


“.......”


“아... 하하, 아니지 그건.
흠흠, 그, 밥이나 먹으러 갈까? 배 안 고파?”


“.......”




우리에게 ‘행복’이란 단어는
허용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슬픈 행복’이라면 모를까.




♪우리의 얘기를 쓰겠소 – SG워너비





“당분간 시 쓰지마”


“네? 왜요?”


“총독부에서 문인들을 주시하라는 명을 내렸대.”


“그치만 전 전문 작가도 아닌 한낱 학생일 뿐인걸요?”


“시를 쓰는 모든 이들을 감시하겠단 얘기야.


“아무리 그래도,”


“쓰지 말라면 쓰지마.”


“.......”


“위험해”



/





“이유가 뭐요. 저 여인이 조사 받아야 하는 이유”


“독서회라는 명목으로 불법학회 활동을 했소.”


“독서회가 어찌 불법이란 말이오.
이 나라에선 책 한 권 읽는 것도 맘대로 못 한단 말이오?”


“그냥 책이 아니니까 하는 소리요.”


“저 이가 읽는 책은 일본에서도 출판된 문집일 게 뻔한데,”


“이학인의 ‘무궁화’, 김소운의 ‘조선민요선’,
김동환의 ‘시가집’ 그리고,
러시아에서 넘어온 ‘청년에게 소함’까지.
우린 이걸 ‘금서’라 부르지.”


“.......”


“이 책들을 쫓고 있던 차에 학회를 알게 되었소.
쥐새끼들처럼 밤에 모여앉아 떠들어대는 꼴이라니.”


“.......”


“조선의 앞날이 참으로 밝지 않소? 하하하!!”


“금서인지 몰랐을 것이오.
그냥 누가 읽으라기에 읽어봤을,”


“본인이 주도자라 자백했소.”


“그게 무슨,”


“더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만약 저 여인이 학회장으로 밝혀진다면,”


“.......”


“그 이후는 각오를 해야 할 것이오.”


“.......”


“연약한 여인에겐 안 됐소만”


“....얘기를 나누게 해주시오.잠깐이면 됩니다.”


취조실 밖에서 들리던 소리였어요.
힘없이 문만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열리더군요.


“.......”


그리곤 창백한 얼굴의 그가 나타났어요.


“...선생님”


“너”


“.......”


“독립운동 이딴 거”


“.......”


“하지 말라고 했지”


“.......”


“난 더 이상 이 나라를 원망할 자신이 없으니까,”


“.......”


“너까지 잃으면
이 나라에서 살아 갈 자신이 없으니까”


“.......”


“독립운동 한답시고
네 목숨 내주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그 때 처음으로 그의 눈물을 봤어요.
맨날 웃어주기만 했었는데.


“...독립 운동이라니요.
전 그냥 책만 읽었을 뿐인데요.”


“.......”


“하긴, 우린 식민지 국민이니까
아무 책이나 읽으면 안 되는 거겠죠?”


“.......”


“근데 우린 정말 순수한 의도로,”


“그만해”


“.......”


“어떻게든 여기서 빼줄 테니까
넌 그냥 학회에 참여한 것뿐이라고 말해.
주도자라고 했던 건 다른 친구를 위해
거짓으로 자백한 거라고.
그리고 나와. 여기 있지 말고”


“...싫어요”


“제발”


“.......”


“날 봐서라도 제발.”


“제가 아니면 다른 친구가 희생될 텐데,”


“왜 너여야 하는데!!!!!!”


“.......”


“왜 그 희생자가 너여야만 하는데.”


“.......”


“안 돼. 싫어. 그 꼴 못봐”


“선생님”


“차라리 아무 대답도 하지마.
뭘 묻든 다 모른다고 해.
넌 아무 것도 모르는 거야”


“.......”


“사랑해.”


“.......”


“사랑해 ㅇㅇ아”


“.......”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딱 한 번만 내 말 들어줘.”


그날 처음으로 사랑한단 말을 들었어요.
일그러진 얼굴로 뱉은 말이었죠.



/




“요즘 뭘 하길래 그리 피곤해 하는 거야?”


“저 피곤해 보여요?”


“응. 하품도 여러 번 하고”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냥... 잠이 안 와요”


“어디 아픈 거 아니고?”


“그럴 리가요. 제가 얼마나 튼튼한데”


“튼튼하긴...”


“모르긴 몰라도 제가 선생님보단 힘 셀 걸요?”


“뭐?”


“히히”


“날 뭘로 보고”


“으악!!”


그가 일어서있던 날 옆으로 끌어 앉히며 말했어요.


“내 옆에서 편히 주무시오.”


“.......”


“흔쾌히 내어드리리다.”


그리곤 자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대게 했어요.


“어깨든, 심장이든 뭐든”


“정말입니까?”


“응”


“와, 나 부자 됐다”


“.......”


“히히”


정신을 빠트릴 정도로 좋았나 봐요.
그가 내 손을 잡을 때까지도 몰랐거든요.


손에 잉크가 잔뜩 묻어있었다는 걸.


“ㅇㅇ아”


“네”


“내 옆에 오래 있어줘”


“.......”



“그냥. 내 옆에만 있어줘”



/



“여긴 너무 위험하오. 여기 있으면,"


“압니다. 이것만 전해드리고 가겠습니다”


“.......”


“남은 연재 일에 맞춘 시 전문입니다.
날짜에 맞춰서 신문에 실어주세요”


“이 시까지 실리면 정말 잡힐 지도 모르오.
그대가 잡지에 민족시를 투고한 이후로
총독부에서 벼르고 있는 상황인데...”


“...몸조심하세요 부장님.”


“지금 내 걱정을 하는 것이오?”


“죄송합니다. 부장님까지 위험에 처하게 해서..”


“직입,”


“혹 저에 대해 묻거든, 모른다고 하십시오.
매주 우편으로만 전해 받았다고"


“직입!!”


“상황이 좋아지면 그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경성을 떠날 참이오?”


“아직은...”


“혼자서는 힘에 부칠 것이오.
승우에게라도 솔직하게 텉어 놓으면,”


“안 됩니다.”


“.......”


“아무 말씀 말아주세요.”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거기 누구야!!!!!!”



“경찰이오!! 얼른 가시오!!!”


“네, 연락드리겠습니다!!”



“잡아라!!!!!”



제대로 된 인사도 못 나눈 채
눈에 보이는 길목 어딘가로 뛰었어요.
그 순간만큼은 어둠도 무섭지 않더라고요.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
총이 스칠 때마다 나는 마찰 소리


그 소리들을 피해 죽어라 달리는데,


“헙!!”


누군가가 저를 전봇대 뒤에 있던
담벼락 안으로 잡아당겼어요.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정신도 못 차리고 있는데
웬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이제 괜찮아”


“.......”


그 사람이었어요.

항상 그렇듯 날 안고 토닥여주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어요.


“괜찮아”


“.......”



/



“언제부터 알았어요?”



“처음부터”


“...어떻게요?”


“직입의 필체를 본 적이 있어.
우연히 부장 자리에서
자필로 쓴 시가 동봉된 편지를 봤지.”


“.......”


“너한테 문체를 기억한다고 했었지.
사실은 필체를 기억했던 거야.
거친 필명과는 달리 필체가 너무 섬세했으니까”


“.......”


“그게, 네 필체와 똑같았어.
그래서 그날 널 보자마자 물었던 거야.
네가 직입이냐고.
원본을 보지 않은 이상
이렇게 똑같을 순 없는데, 생각하면서”


“.......”


“대필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
그러길 바랐어 사실. 널 만나면서”


그 사람을 쳐다볼 수 없었어요.
발가벗겨진 기분이었거든요.
애써 숨기려했던 모든 것들이
그에겐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니.


“그러다 네 방에서 연습장을 보게 됐는데”


“.......”


“너의 고민이 담긴 그 공책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가장 마지막장에 있던 시가”


“.......”


“다음날 신문에 실린 걸 보고 확신했어.
네가 맞구나.
독립투사들이 줄줄 외고 다닌다는
그 민족시를 쓴 이가, 직입이라는 자가,
너였구나.”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어요.



“한동안 넌 자필로 글을 쓰지 않았지.
총독부가 대대적인 조사를 시작한 이후로.”


“.......”


“항상 타자기만 치던 네가,”


“.......”


“어느 날 잉크가 범벅이 된 손으로 나타났을 때”


“.......”


“.......”


“...선생님”


“...얼마나 무서웠으면”


“.......”


“타자기 소리 새어나갈까
얼마나 조마조마했으면 그랬을까...”


“.......”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어깰 내어주는 것뿐인데..”


“미안해요...”


“.......”


“미안합니다..”




그 사람 품에 안겼던 기억이 나요.
흐느끼는 그의 품에 안겨
나 또한 흐느꼈던...



이제 남은 기억은 두 개예요.
흐릿한 기억들이요.


그가 이태리에 가자고 했어요.
김우진과 윤심덕이 이태리에 살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면서
자기가 출장을 가게 됐다고.
같이 가자고 그랬어요.


가서 아예 돌아오지 말자고.
‘애정의 도피.’ 우리도 하자고.



-그래서, 같이 갔나요?


가는 날 아침에 나눴던 대화가 마지막이에요.



“해방되는 그 날, 꼭 돌아오자.”


“꼭, 와요.”



.
.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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