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컴한 밤하늘에 새초롬한 달이 떴다.
도도한 양 아무 말 없는 달은
그저 나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하아.”


방 안에 누워있는 아이는
어미의 빈자리도 느끼지 못할 만큼 폭 잠들어있었고,
그 옆을 지켜야 마땅한 어미는 이렇게 밖에 나와
구중궁궐에 계신 임을 그리워하던 찰나.



휘릭. 훅.



“거, 거기 뉘시오!”


시커먼 무언가가 높은 담벼락을 넘어
주변을 살피는 모습을 보게 됐다.


“누, 누구냐!!  누군데 담을 넘.......”


“ㅇㅇ아”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시커먼 그림자를 두려워하던 것도 잠시,
너무나도 익숙한 그 목소리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옆에 있는 기둥을 부여잡고 말았다.


“ㅇㅇ아, ㅇㅇ아”


아-.
하마터면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할 뻔 하였다.
대체 얼마 만에 듣는 임의 목소리란 말인가.


“대답을 해 보거라. 어서. 어서!”


코앞까지 오신 임께서는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내 얼굴을 마주잡으신 채
나의 대답을 재촉하셨다.


“흐읍... 저...하.......”


“그래 ㅇㅇ아. 나다. 내가 널 보러 왔다.”


나의 하나 뿐인 임.
이 나라의 지아비가 되실, 세자 저하였다.


“어찌, 어찌 여기까지.......”


“얼마나 네 이름을 부르고 싶었는지 아느냐”


그리움의 양이 짐작 될 정도로 날 꽉 껴안으신 저하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시며,


“네 품이 그리워 잠도 한 숨 들지 못하였다.
너의 목소리가 그리워 정신도 놓치기 일쑤였다.
네가 눈앞에서 사라지니
세상을 잃은 것만큼 아프더구나.
어찌,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못다한 말을 이어하셨다.


“신첩도 그리하였습니다 저하.
옥체는 강령하신지,
홀로 외로이 계시는 것은 아닌지,
저하 걱정만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사옵니다.
....... 송구하옵니다 저하.
제가 옆에서 보살펴 드렸어야 했는데....”


“아니다, 아니야
널 붙잡지 못한 나의 불찰이다.
널 그리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내 잠시 실성을 하여 너를 이리 보내었구나. 다 내 탓이다.”


“흐윽.... 저하.......”


“어디, 얼굴 좀 보자.
우리 빈궁, 우리 세자빈.어찌 이리 쇠약해졌는고.
창백해진 얼굴이 날 더 침통케 하는구나”


“저하는 어떠십니까. 끼니는 거르지 않으셨는지요.
옥체 미령한 곳은 없으시옵니까?”


“너만 아프지 않는다면, 나 또한 아프지 않다.
그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
너만 괜찮다면, 이리 강령히 살아만 있어 준다면…….”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낀 따사로움이었다.




.
.
.



불인별곡
不忍別曲


지금부터 나의 이야기를 하려한다.
다른 이와 같이 평범한 삶을 살 거라 여겼던,


나의 비참한 이야기를.



.
.
.




“어머니, 가지 않으면 안 되나요?”


“궁에 가면 너의 투정 따위 들어줄 애미는 없다.
지금부터 마음 다잡아야 할 것이야”


“하지만.....”


“전하의 아량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예를 갖추는 것을 잊지 말고,
전하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매일 집중해야 해”


“....어머니......”


“또한 여기 걱정은 말거라. 너무 그리워도 말고.
이제부터 너의 집은 궁이다.
죽을 때까지 평생, 그곳에 있을 것이다. 알겠느냐”


그 당시 어머니의 눈을 잊지 못한다.
단호한 말씀과 달리 아련했던 그 눈빛.
내 비록 어린 나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어미의 심정을,
보내기 싫은 그 안타까움을.


“이제 새로운 삶을 사십시오.
적응하세요 마마.”



그렇게 난 친정을 떠나 궁으로 들어왔다.

내 나이 열 살 때 일이었다.




*





“참으로 곱구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고작 열 살.
아직 부모의 품이 그리울 나이였다.
하지만 그 누가 내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랴.
그저 고갤 숙인 채 전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뿐.


“아무리 보아도 내 며느리를 참 잘 얻은 듯하다.
영상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더니
역시, 그 지혜로움이 어디 갈리 있으랴.
어여쁜 네가 세자의 앞날에도 큰 도움을 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터,”


“..........”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힘들겠지만
어서 적응하여 세자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 주거라.

알겠느냐”


“예, 전하”


세자빈 간택 때부터 쭉 뵀던
주상 전하의 모습은 인자함의 으뜸이셨다.
처음부터 날 예뻐하셨고, 보듬어주셨으며,
친정과 멀어진 날 위로해주셨다.


“아바마마, 소인입니다”


“들거라”


그리고, 나의 반쪽이 되실 저하께선,


“부르셨사옵니까”


“가까이 앉거라”


“예, 아바마마"


나와 같은 또래인 열한 살짜리 작은 사내아이에 불과하셨다.


“빈궁을 알아보겠느냐”


“예?”


“너의 짝이 될 여인이니라”


“빈궁....... 말이옵니까?”


“본디 심성이 곱고, 여린 아이니
지아비가 될 네가 잘 보살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


“왜 대답이 없느냐”


“소자, 이제 짝이 생기는 것입니까?”


“그렇다. 이제 세자도 한 여인의 지아비가 되는 것이다”


전하의 말씀이 끝나자.
바짝 엎드려 계시던 저하께서 살짝 고개를 돌리시더니
내 얼굴을 바라보셨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그리고 그 기억은 뚜렷하다.
저하께서 보여주신 옅은 미소




.
.

.




“뭐가 더 좋겠느냐? 이거? 아니면....... 이거?”


“아무래도 마마의 심중은.......”


“이것이지?”


“예? 아, 예- 마마”


벌써 여러 번 시달린 설란이가 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젠 자신도 지쳤다는 뜻이겠지
노리개를 들고 꽤 오랜 시간 씨름을 하던 중이었으니.


“지금 저하는 어디 계시느냐?”


“전하의 부름을 받고 급히 가셨다 하옵니다”


“그래?”


“염려하지 마옵소서.
오늘 전하의 용안이 무척 밝으셨다 하옵니다”


“그렇구나”


하지만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린 세자 저하의 총명함을 그토록 아끼셨던 분이
요즈음엔 대신들 앞에서까지
크게 혼을 내시기 일 쑤셨기 때문이다.


“휴”


“갑자기 웬 한숨이시옵니까?”


“저하가 또 침울한 모습으로 나타나실까 두렵구나.
이런 치장이 다 무슨 소용 있겠느냐”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저하께선 마마 목소리만 들어도 환히 웃으시는 걸요?”


“하지만 내 어찌 저하의 빈 곳까지 채워드릴 수 있겠느냐.
그것은 오로지 전하만이 가능한 공간인 것을”


저하는 내게 자신의 상처는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셨다.
하지만 감추고, 숨기고, 속여 봐도
저하에게서 품어져 나오는 쓸쓸함은 어찌할 수 없었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마!! 세자 저하 드시옵니다!”


“뭐, 뭐? 대관절 이리 불쑥 오신단 말이냐!”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사옵ㄴ......”


“잠시, 잠시만 기다리시라 이르거라.
내 조금만 더 치장을 하ㅁ…….”



차악-



하지만 야속하게도 저하는 부드러운 손길로 문을 여셨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빈궁.
매일 봐도 고우시다 그리 말씀 드렸거늘"


“저, 저하. 그렇다고…….”


“어서 나오십시오.
한 시라도 빨리 빈궁과 후원을 거닐고 싶습니다”


“예, 저하”


열일곱, 열여덟.
그 사이 우린 꽤나 성숙해져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열, 열하나가 아닌,
이젠 서로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나이였다.


“날씨가 참으로 좋소 빈궁”


“그렇사옵니다 저하”


“꼭 이런 날이면 빈궁의 치마폭에 안겨…….”


“저하!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빈궁의 그 새초롬한 눈을 보니
어째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구려”


“저하!”


“하하하하!!”


저하는 참으로 다정하셨다.
뭇 나인들이 창피함에 빨개진 얼굴로 애써 시선을 거둘 만큼
저하는 나를 참 어여삐, 가엾이 여기셨다.


“너희는 물러나 있으라”


“예, 저하”


저하가 갑자기 내관을 뒤로 물리신다.
이 말은 즉,
나와 긴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단 뜻이었다.



“후... ㅇㅇ아


“예, 저하”


어려서부터 저하는 나의 이름을 곧잘 불러주시곤 하였다.
‘빈궁’이란 칭도 좋지만
저하께서는 내 이름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단 둘이 있을 때엔 꼭 내 이름을 부르셨다.



쪽-



입맞춤 또한 잊지 않으시고.


“저하! 나인들이 보기라도 하면,”


“그래서 뒤로 물리지 않았느냐”


“아무리 그래도...”


같이 지낸 지 일곱 해가 넘었는데도
부끄러워하는 너를 보면,”


“보면...요?”


“웃음이 나는 구나”


“절 놀리시는 것이지요?”


“아니다”


“저하 입꼬리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내 입리는 너를 볼 때만 올라가는 것을
정녕 모른다는 것이냐”


저하의 하얀 미소가 빛을 더해 더욱 환한 것만 같았다.
언제나. 언제나 저하는 내게 그 미소만을 보여주셨다.


“...알고 있습니다


“ㅇㅇ아


“예 저하”


“나와 내일 낮에 잠행을 나가지 않겠느냐?”


“잠행이요?”


“원, 궁이 답답해서 살 수가 없구나"


“허나.......”


“내 너에게 어여쁜 노리개를 사 줄 참이었는데 말이지”


“.......”


“아니면 뒤꽂이라든지....”


“가겠습니다!”


“참 말이냐?”


“예! 꼭 가서 마음에 드는 노리개를 고를 것입니다"


저하가 또 다시 미소를 지어 보이신다.
나도 저하를 따라 같이 웃었다.
너무나 평안하고 따스한 오후였다.


“헌데 저하”


“예, 빈궁”


이번엔 너무나 상냥히 나의 부름에 대답을 해주신다.
짓궂은 표정은 여전하시지만.


“전하의 부름은 어찌 되셨습니까?”


“…….”


“혹, 또 다시 대신들.......”


“아닙니다”


“허면,”


“오늘은 좋은 말을 들었습니다.
총명하다, 듬직하다, 이 나라의 주군 감이다! 이러셨습니다.”


“참말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담 정말 다행입니다!
매번 저하의 쓸쓸한 표정을 보며
저라도 전하께 나서서 저하의 심정을
고해야겠다 생각하던 찰나였습니다”


“하하.”


“...어찌 웃으십니까?”


“내 걱정을 해주는 건 우리 세자빈 밖에 없구려”


“저하께서도 제 걱정 많이 하시지 않으십니까”


“어느 새부터 난 빈의 걱정만을 하고 있었지요”


“예? 혹, 제가 저하께 걱정 끼칠만한 일을 한 것입니까?”


“하셨지요”


“예?!?”


“아주 큰 걱정입니다”


“그, 그것이 무엇입니까?”


“…….”


저하가 동그란 눈을 한 나를 갑작스레 꽉 껴안으신다.



“그대와 일각도 떨어지기 싫으니
이런 큰 걱정이 또 어딨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저하는 참 짓궂으셨다.
물론 내 앞에서만 그러셨지만 말이다.


“....빈궁”


“예, 저하”


“차라리 말이오. 차라리..”


“…….”


“그저 어느 평범한 사내였음 좋겠소”


“저하...”


“그대와 함께 논밭을 일구며 사는 그런 사내였음 좋겠소”


분명, 전하께 좋은 소릴 들으신 건 아니셨을 것이다.
또 그 수많은 대신들 앞에서 꾸지람을 듣고,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애써 참아가며
이곳에 오셨을 것이다.


“나는 천하를 다스릴만한 재목이 아니오 빈궁”


내 어깨에 살짝 기대시는 저하를
나도 두 손 모아 꼭 안아드렸다.


“저하께서는, 참 따뜻한 성품을 지니셨습니다.
백성들을 염려하시는 마음이 그렇습니다.
저하께서 천하를 다스리신다면
분명 백성들도 좋아할 것입니다.”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오”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께선 제게 종종 저하의 칭찬을 하십니다.
나날이 넓어지는 저하의 식견과,
정무를 보실 때 느껴지는 위엄이
장차 저하를 이 나라의 으뜸으로 만들 것이라 하셨습니다.”


“…….”


“그러니 염려 마옵소서.
전하께서도 저하에 대한 기대가 크셔서 그러신 것이옵니다.”


“빈궁"


“예, 저하”


“ㅇㅇ아”


“…….”


저하의 품에서 나와 살며시 저하와 눈을 맞추어 보았다.


“내 이것 하나만은 약속하마”


“…….”


“어떤 일이 있어도, 꼭 네 곁에 있을 것이다"


“…….”


“꼭 네 품에서 마음을 뉠 것이야.
정처 없이 떠돌다가도 네 앞에서만 멈출 것이다.
그러니 너도,”


“신첩은 그럼 저하를 꼭 안아드리겠습니다.
손도 잡아 드리고, 가끔은 무릎도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 무릎을 베고 잠든 저하를 보며
다짐하고, 또 다짐하겠습니다.
영원히 저하 곁을 지킬 것입니다.”


저하가 옅은 미소를 보이시며 내 볼을 쓰다듬어 주신다.



참으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이제는 내 집같이 편한 궐 안에서
나와 저하는 서로의 마음을 간질이며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




“마마! 대체 어쩌시려구요!”


“저하와 한 약조이니 당연히 따라 나서야지”


“저하가 그러신다고 마마까지 이러시면 어쩌십니까!”


“뭐가 그러시고- 이러시고-.

웬 말이 이리 많아!!”


“마마!!!”


“설란아”


“예!!!”


“걱정 말거라. 절대 들통나지 않을 것이야”


“그것을 어찌.......”


“그리고 내 절대 너를 벌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거라”


“소인은 제 명줄을 걱정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네 명줄이 걱정이다.
널 위해서라도 속히 다녀올 것이야”


“휴…….”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내 표정은 싱글벙글, 그 자체였다.
얼마만의 궁 밖이란 말인가.
저하의 잠행을 매번 말리기는 하였으나
속으로는 내심 따라가고 싶었었다.


“때가 되었다. 걱정 말고 잘 지키고 있거라!”


“마마!!!!”


설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난 저하와 약조한 장소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마음 한 구석엔 콕콕 가책이 느껴졌지만
기분이 좋은 건 어찌할 수 없었다.
궁 밖의 세상을, 그것도 저하와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겐 꿈만 같은 일이었다.


“어? 저하!”


모퉁이를 돌자 양반집 자제의 복색을 하신 저하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급히 뛰어가는데,


“조심, 조심하시오!”


미처 보지 못한 돌부리에 걸려 털썩 넘어지고 말았다.


“아.......”


“ㅇㅇ아!”


그러자 바로 달려오시는 저하



“어디 보자, 어딜 다쳤느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하.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하늘아, 안 되겠다. 오늘 잠행은 다음으로 미루ㄱ.......”


“아닙니다!”


“........”


“아니에요 저하.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거뜬하지 않습니까?”


잠행을 다음으로 미룬다는 말에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은 듯 걷자 피식 웃으시는 저하


“내 정녕……”


“제가 어찌 보이십니까? 괜찮아 보이지 않습니까?”


저하께 확답을 얻으려
일부러 옆에 있는 우익위 하늘에게 다시금 물었다.
하지만 저하의 눈치를 보며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얼굴인데.


“거짓으로 고하면 엄벌을 내릴 것이니 그런 줄 알거라.”


“저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저하, 잠행에 나가시기엔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꾸벅 고갤 숙이며 저하께 아뢰는 그를 보며
만족한 웃음을 지어 보이자
그런 내 볼을 살짝 꼬집는 저하.


“하늘이와는 언제 이리 친해진 것이오?”


“저하가 안 계신 틈을 타 몇 마디 나눈 것이 전부입니다.

그치요?”


“세자빈마마, 말씀 낮추시옵소서.”


“아니에요.
우리 저하를 지켜주시는 고마운 분이시잖아요.
하대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마마,”


“보았느냐. 나의 빈궁이 이런 분이시다.
곱지 않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


“저하도 참.......”


부끄러워하는 내 모습을 보며
저하가 환한 미소를 지으시더니
이내 내 손을 꼬옥 잡고  걸음을 옮기신다.


“힘이 들면 꼭 말씀하시오. 그 즉시 궁으로 돌아 올 것이니”


“예, 저하”


“그리고, 아무리 내가 좋다 한들 그리 정신없이 뛰면 어떡하오?
하마터면 큰 일 날뻔 하지 않았소”


“저하를 뵈니 매우 반가워서 그랬습니다!”


“그 마음 잘 알고 있으나 앞으론 조심하시오.
그대가 다치는 것은 원치 않소.”


“명심 하겠사옵니다 저하”


“ㅇㅇ아”


“…….”


“이제부턴 내 곁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
내 손도 놓지 말고, 절대 멀어지지 말고.
뛰어서도 안 되고, 다쳐서는 더더욱 안 돼.
그건 내가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니. 알겠지?”


“예!”


“나는 이제 어느 양반집의 자제가 되는 것이고,
너 또한 그저 영상의 외동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저 아이는,”


“우익위는 벗을 삼으면 되지요!”


“예, 예?”


“하하! 그래. 벗이 되면 되겠구나.
내 옆에서 함께 걷자꾸나.”


“아니되옵니다 저하!!”


“나는 너를 언제나 벗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만큼은 너도 그리 여겨주길 바라는데....

안 되겠느냐”


“하지만 저하 소신은…”


“우익위?”


“.....예 저하. 그리 하겠습니다”


망설이는 우익위를 향해 싱긋 눈짓을 보였다.
저하 마음 상하게 하지 말고
그저 따라만 와 달라는 의미.


그러자 우익위도 알아챈 듯 바로 대답했다.
덕분에 더욱 밝아지는 저하의 얼굴이
날 더 기분 좋게 만들었다.


“이제 되었습니다 저하! 어서 걸음을 옮기시지요!”


내 말이 끝나자 우익위가 앞장 서 쪽문을 나서고,
우리도 그를 따라 나섰다.




*




“저하”


“왜 그러느냐”


“송구하오나 이 손을 좀....”


사실 아까부터 신경 쓰였었다.
저하가 아무 거리낌 없이 내 손을 잡고
 저자거리를 활보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주변 상인들의 시선이 더욱 몰리기 전에
어서 이 손을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저하께 슬쩍 전하였지만,
날 약올리시듯 손을 더 꽉 잡으신다.


“저, 저하!”


“손을 놓으면 여린 네가 어디론가 휩쓸려 갈 것 같아 그러는데,”


“휩쓸려 가다니요! 악!!”



“내 말이 맞지 않느냐”


“…….”


순간, 지게를 짊어지고 가는 보부상을 피해 날 확 당기신 저하.
그리곤 어깨에 사악, 팔을 두르시며 승리의 미소를 보이신다.


“고집 부리지 말고 내 옆에 딱 붙어 오거라.”


“우, 우익위 나 좀…….”


전하께 내 말은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옆에 있는 우익위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가시지요 마마”


역시, 그 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두 손을 마주 잡고
소란스러운 이곳을 거닐게 된 저하와 나.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저자의 모습이었다.
어릴 때 보았던 모습과는 약간 달리진 듯한 이곳, 장터.


하하호호 떠드는 상인들과
한가로이 꽃신을 고르는 아낙네들,
그리고 끼리끼리 모여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아이들까지.


어릴 땐 그저 다양한 물건과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는
신기한 곳이라 여겼었는데,
이젠 이곳이 백성들의 삶이자 그들의 짙은 흔적으로 보였다.


저하의 눈에도 그리 보이실까.
웃음 속에 감춰진 그들의 아픔을 보고 계신 걸까.
순간 궁금해진 내가 고갤 돌려 저하의 얼굴을 쳐다보자,


속속들이 백성의 모습을 눈에 담으시는 저하가 보였다.


영락없는 군주의 모습이셨다.
장차 천하를 다스릴 제일의 군주.




“이리 와서 노리개 좀 보고 가십시오!
아주 예쁘고 귀한 물건이 들어왔습니다!
나으리! 나으리!!”


“좀 보시겠소?”


“예?”


“한 번 보고 가십시오!
오늘 아침에 들어온 물건입니다!”


상인의 외침이 저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걸음을 멈추시곤 곱디고운 노리개를 주욱, 훑어보신다.


“어떤 물건인고”


“아, 예! 나으리!"


허겁지겁 색색들이 다양한 노리개를 꺼내 보이는 상인.
하지만 마음에 드시지 않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신다.


“마음에 들지 않으신지요”


“그 어떤 것도 그대에 비하면 한낱 작은 물건에 불과하지요”


순간 부끄러움에 못 이겨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옆을 돌아보니 우익위도 웃음을 참는 모양인 듯
먼 산을 바라본 채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아마 그대에게 어울리는 것은”


“…….”


한참을 고민하시던 저하가 내게 보여주신 것은,


“이것이 아닐까 싶소만”



노리개가 아닌 영롱한 빛을 내는 가락지였다.


“와.......”


“어떻소”


“고운 빛이 나는 것이 꼭 가을에 핀 단풍 같습니다.”


“이걸로 주시오”


“예! 나으리!”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값을 치르시곤
그 자리에서 내 손가락에 껴주시는 저하


“하얀 손가락에 뭔들 어울리지 않겠소만,
그대 손에 무지갯빛이 들면 더욱 어여쁠 것 같아 골라보았소.
마음에....... 드시오?”


“예! 저ㅎ....... 아니, 흠흠.
마음에 들다 못해 차고 넘치는듯 하옵니다.”


나의 어설픈 대답에 피식 웃어 보이시는 저하.


“한 시라도 빼면 아니 되오. 내 항상 지켜보리다.”


“예, 저... 아니... 예.”


“하하. 가십시다.”


붉어진 얼굴을 한 채 저하를 따라나섰다.
어쩜 이리 정신을 못 차린단 말이야..!
하마터면 저하의 신변이 탄로 날 뻔하지 않았어!!
이럴 바엔 차라리 입을 열지 않는 게 나을 것이야.


저하 뒤를 졸졸 쫓아가며 든 생각은
나에 대한 꾸중이 전부였다.
결국 아예 입을 열지 않겠노라 다짐을 하던 와중에,



쿵-



갑자기 우뚝 멈추신 저하의 등에 쿵, 하고 머리를 부딪혔다.


“저, 저하?”


“하늘아”


“예, 저하”


“보았느냐”


“예. 보았습니다”


“어서 자리를 피해야겠다”


“이리 오시지요”


“손을 잡으시오 어서”


“예?”


머뭇거리는 내 손을 잡고 우익위를 따라 뛰는 저하.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는 나는
그저 당황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우린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앞서 달리며 길을 트던 우익위는
어느새 우리의 뒤를 시위(호위) 하고 있었고,
저하는 옆을 돌아보며 누군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내달리던 중 도착한
장터에서 가장 사람이 많은 그네놀이 장소.


“하아... 하아... 저하.......”


“저하, 일단 저 구석으로 몸을 숨기시옵소서.”


“어서 궁으로 돌아가야겠다


“제가 주변을 다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저하가 고갤 살짝 끄덕이자
우익위는 다시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괜찮은 것이냐


“하아... 저하 어찌된 일이옵니까?”


“누군가 우릴 쫓고 있었다”


“예?”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자였어”


“그것이 참말이옵니까?”


“허나 걱정하지 말거라.
내 얼른 궁으로 돌아가 자세히 알아 볼 터이니”


“감히 누가 세자 저하의 안위를 위협한단 말입니까?”


아무도 날 위협하지 않는다.
또 그러한 위협에 쓰러질 나도 아니고”


“하지만 저하,”


“미안하구나. 괜히 너만 힘들게 하였구나”


“아니옵니다 저하!!”


“다음 잠행 땐 이런 일이 없도록 할 것이야”


“신첩은 염려치 마시고 저하의 안위에만 몰두하시옵소서.”


“넌 언제나 내 걱정뿐이구나.”


“저하를 걱정하는 것은 저 뿐만이 아닙니다.”


“그 누가 너보다 내 걱정을 많이 한다는 것이냐”


“그, 그것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던 날
넌지시 쳐다보시던 저하.
직접 손으로 입술을 어루만져 주시더니,


“내 너를 위해서라도 살 것이다.
네 옆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버틸 것이야.”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


“저하, 혹 무슨 일이라도…….”


“저하! 이만 가시지요. 다들 놓친듯 하옵니다.”


“그래. 어서 가자꾸나”


하지만 채 묻기도 전에 급히 또 발걸음을 옮기시는 저하.
난 그저 말없이 저하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




“아버님!”


“마마!”


참으로 오랜만에 뵙는 아버님이었다.
매시 주상 전하의 업무를 관장하시느라
내가 있는 경춘전에도 들르기 힘드셨던 지난 날.
하지만 오늘은 친히 발걸음을 해주셨다.


“어찌 지내셨사옵니까!”


“저는 극진한 보살핌 아래 불편 없이 잘 지냈습니다.
아버님은 어떠십니까? 어머님은요? 무강하시지요?”


“예, 걱정마십시오. 별 일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희는 언제나 마마의 안위만 걱정할 뿐이옵니다.”


“염려 마세요 아버님
전하와 중전마마께서도 저를 극진히 대해주신답니다.”


“....... 세자 저하는 어떠십니까?”


“저하와 저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저하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탈이지만요.”


“그렇습니까”


“아버님께서도 아시잖아요. 저하께서 얼마나 다정하신지”


“혹, 마마께 제 얘기는 하시지 않으시더이까”


“...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아, 아닙니다”


“제가 모르는 무슨 변고라도 있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마마. 허나 요즈음 세자 저하의
안위가 염려되긴 하옵니다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상 전하와 세자 저하 간의 관계가 소원하다 들었습니다”


“아... 예. 그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세자 저하의 생각이 여론의 뜻과
맞지 않아 생기는 마찰일 것입니다.
허니 마마께서 저하께 한 번 말씀 올려주시옵소서”


“제가 어찌 그런 일을 저하께 고한단 말입니까”


“저하는 마마께 큰 의지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마마의 설득도 분명 귀담아 들어주실 것입니다”


전하와 저하 간의 갈등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가 나서서 저하께 왈가왈부 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라 여겼는데.


“예. 한 번 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혹 그 갈등이 저하의 안위까지 위협한다면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따뜻하고 냉철한 면을 두루 갖추신
전하의 눈 밖에 나는 것은 꽤 위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다.




.
.

.





“세자를 들라하라!!!”


저하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5년 째 되던 해,
전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대리청정: 조선 시대에 임금의 허락을 받아
임금의 정치 등 여러 일을 대신 수행하는 것)

귀양 보낸 대사간 신위(申暐)의 상소가
 전하의 노여움을 부른 것이다.
 
그의 상소에는
‘지극히 공평하고 크게 중정(中正)해야 한다’
는 대목이 있었다.
대조(전하)께선 이 부분을
자신이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라 지목하며

상소를 상세히 살피지 않은 저하를 크게 꾸짖으셨다.



“전하!!”


“꼼꼼치 못한 놈!!
장차 이 나라를 이끈다는 놈이 이래서야 된단 말이냐!!”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어릴 때부터 정무에는 관심 없고
밖에 나가 말 타는 것에만 몰두하더니
이젠 이 나라까지 포기하려는 것이냐”


“아닙니다 전하. 그것이 아니옵니다!!”


“너는 이 상소를 보고 아무 것도 감(感)하지 못했단 말이냐!!
내가 예순의 늙은 나이에 신위에게 속아
업신여김을 받았는데도 말이다!!”


“전하!!! 소신의 불초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시끄럽다!!!!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나가거라!!”


“전하!!!”


“뭣하느냐! 세자를 끌어내지 않고!!”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천하의 괘씸한 놈.
네 놈은 이 나라를 이끌 자격도 없다!!”



전하께선 냉정하고 차가운 분이셨다.
특히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겐 더욱 그러셨다.
처음엔 이 모든 게 저하를
 강하게 키우고자 하는 욕심이시라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전하의 심중에서 불고 있는 심경의 변화를.


저하에 대한 노여움을.






“뭐라! 저하가 어찌 하고 계신단 말이고!”


“저하께서 지금 관(冠)을 벗으시고
뜰에 내려가 석고대죄(席藁待罪)를 하고 계시다 하옵니다!!”


“석고대죄라 하였느냐!!!”


“예, 마마! 내리는 비를 홀딱 맞으시며
꿋꿋이 하고 계시다 하옵니다!!”


“저하가 어찌!!!....... 아, 안 되겠다.
내 지금 당장 그리로 갈 것이야”


“하지만 마마! 세자 저하께서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
엄명을 내리셨다 하온데.......”


“저하의 옥체를 위해서라도 말려야 할 것이 아니냐!!”


“마마!! 마마!!!!”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심신 가득 상처뿐인 저하를 보듬어 드릴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마마! 슈룹(우산)을 쓰고 가셔야 합니다!
뛰지 마십시오! 그러다 넘어지십니다!! 마마!”


설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난 내리는 비를 맞으며 저하가 계신 곳으로 뛰어갔다.
어느새 얼굴엔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고,
조금씩 느껴지는 한기에 가쁜 숨을 내쉴 때 즈음,


저 멀리 꼿꼿이 앉아 계신 저하의 모습이 보였다.


“저하!!!”


참으로 초라한 모습이셨다.
아무도 가까이 두지 않겠단 엄포에
내관과 익위사 관원들은 한참을 떨어져 있었고,
저하께선 오로지 빗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앉아 계셨다.


“마마!!”


“이거 놓거라!!”


“아니되옵니다 마마!!
저하의 엄명이 계셨습니다!!”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날 붙잡는 내관을 뿌리치고 저하의 곁으로 내달렸다.




“하아, 하아... 저하”


빗소리가 컸던 탓일까.
저하는 나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으셨다.


“저하. 신첩이 왔습니다.”


날 좀 봐달라는 간곡함이었다.
이러지 말고 나와 함께 가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저하께서는,


“뭣들 하느냐! 어서 빈궁을 뫼시지 않고!!”


날 쳐다보지도 않으셨다.


“이거 놔라!!!
나도 저하 곁에 있을 것이니 거적을 가져오거라!!”


“마마!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니들은 어찌 이리 혼자 비를 맞고 계신
저하를 곁에서 보살펴 드리지 않은 것이냐!
저하의 안위보다 니들 목숨이 더 귀하다 이것이냐!!!”


“마마!!!”


“다 필요 없다! 내가 저하를 지킬 것이다!
어서 거적을 가져오지 않고 뭐하느냐!!”


“마마


“우익위도 필요 없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 저는 저하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저하 곁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함께 있을 것입니다!!”


“마마를 염려하시는 저하의 큰 뜻을 알지 못하시겠습니까.”


우익위의 말이 끝나자

저하께서 조용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느낄 수 있었다.
나를 걱정하는 마음을,
미안함의 눈물을


“저는, 저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저 저하만 괜찮으시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저에겐 저하가 먼저이십니다.
우익위, 제발, 제발 저하를 멈춰주세요.
저하의 안위를 살펴주세요 제발.”


“우익위”


“예, 저하”


“잠시 물러나 있으라”


“예”


잠긴 목소리로 우익위를 물리신 저하.
저하의 명에 따라 물러나는 우익위를 보고
털썩 주저앉아 저하의 얼굴을 살폈다.
한기에 시퍼런 입술을 하신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워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간 정말, 저하를 잃을 수도 있겠단 생각에
그 자리에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흑... 저하....... 어찌 이러십니까.....”


“ㅇㅇ아”


“흑...흐.....”


“여기는 네가 올 곳이 아니다.”


“저하!!.......”


“천번 만번 잘못한 내가 있어야 할 곳이지
네가 와서는 안 되는 곳이다. 알겠느냐”


“흐읍... 저하....
제발,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세요.....”


“고뿔에 걸릴까 무섭구나. 어서 경춘전으로 돌아가거라.”


“저하 없이 어찌 돌아간단 말입니까!!!”


“나는, 나는 괜찮다.
불효자식의 죗값을 치르는 것이니 마땅한 일이다.
허니, 너는 어서 가거라. 입술이 파래지지 않았느냐.”


“저하...... 흑.......”


“모든 것이 끝나면 바로 너에게 갈 것이야.
그 때 나를 꼭 보듬어 주어라.
잠시나마 좋은 꿈 꿀 수 있게 꼭 붙들어 주어라.

알겠지?”


저하가 말을 마치신 뒤 내 볼을 쓰다듬어 주셨다.
그 손길에 더욱 흐느끼던 나를 보며
입술을 꾸욱 깨무시더니
물러나 있던 우익위에게 눈짓을 보내셨다.


어서 나를 데려가라는 뜻이었다.




.
.




“마마, 물이라도 한 모금.......”


“됐다”


“하지만 마마,”


“다 필요 없다 하지 않았느냐”


“벌써 사흘째입니다!
아무 것도 드시지 않으시면 소인은 어찌하란 말입니까!”


“...전하껜 잘 챙겨 먹는다 아뢰거라”


“마마!!”


또 다시 시작된 설란이와의 실랑이.
사흘째 물도 마시지 않는 나를 걱정하는 설란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으나,
밖에서 고생하시는 저하를 생각하면 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이젠 석고대죄를 넘어 머리를 조아리며 땅에 이마를
짓찧으신다는 저하.


하지만 전하께선 묵묵부답이셨다.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다.
길고 긴 싸움을 저하 혼자 하고 계신 것이었다.


“설란아”


“예, 마마”


“저하께선 어찌 하고 계시느냐”


“.......”


“이마에 난 상흔은,  상흔은 어떻게 됐느냐.
혹 여태 이마를 짓찧고 계신 것이냐.”


“마마. 저하께 가보시렵니까?”


“…….”


마음속으론 백 번, 천 번이라도 달려가
저하의 이마를 어루만져드리고,
억지로라도 이끌어 일으켜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갈 수 없었다.
비가오던 그 날 저하께서 보여주신 눈빛 때문에라도 갈 수 없었다.


저하의 말씀이 맞았다.
이것은 저하와 전하의 싸움이었다.
그 싸움엔 아무도 끼어들 수 없었다.
아니, 끼어들지 못했다.


“전하께선, 전하께선 어찌하고 계시더냐”


“전하께서는…….”


“마마!!”


밖에서 들리는 호들갑스런 나인의 소리


“무슨 일이냐”


“전하께서 드디어 세자 저하를 용서하셨다 하옵니다!!”


“뭐, 뭐라? 그것이 참말이냐!!”


“예! 마마!! 소인이 똑똑히 듣고 왔사옵니다!
어서 석고대죄를 거두고,
동궁전으로 돌아가라 명하셨다 하옵니다!”


“그것이 참말... 참말이라....”


“어? 마마!!! 마마!!!!”


기다리던 소식이었지만 내 정신은 이미 온 데 간 데 없었다.
점점 희미해지는 정신과 함께
나에게 달려드는 나인들의 외침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




‘빈궁’


‘예, 저하’


‘오늘 빈궁을 위해 시를 한 편 써보았는데
한 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저를 위한 시를 쓰셨단 말씀입니까?’


‘예. 제가 읊어보겠습니다’


어린 저하가 어린 나에게 시를 읊어주신 적이 있다.
궁에 들어와 친정을 그리워하던
날 위로해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높다란 누각 위엔 달이 휘영청
둥그런 기둥에 기대 섰으리
아리따운 그 미인 바로 내 사랑
그윽한 난초 향내 품겨 오는 듯
그리워서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애닮아라 그 역시 하늘 끝일 뿐.


어떻습니까? 맘에 드십니까?’


‘훌륭하십니다 저하! 어찌 이런 시를 저에게.....’


‘빈궁이 기뻐하시니 다행입니다.
혹 마음에 들지 않으실까 걱정하였었는데.....’


‘아닙니다 저하. 제 마음에 쏙 듭니다!
제가 잘 간직하고, 평생 기억하겠습니다.’


저하와 내가 환히 웃는 모습.
그 모습이 아름다워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정신이 드는 것이냐!”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어느새 건장한 사내가 된 저하께서 내 손을 부여잡고 계셨다.



“ㅇㅇ아, 날 알아보겠느냐”


“저...하.......”


“그래. 내가 왔다. 바로 이곳으로 달려 왔어”


“어찌 이곳으로 바로....”


“니가 혼절 하였다는데 내 어찌 지나칠 수 있었겠느냐!
정녕 괜찮은 것이냐?
어찌 밥 한 숟갈도 넘기지 않은 것이야!”


“저하....”


“저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마마께선 심히 안정을 취하셔야 하는지라...”


“어의가 보기엔 어떠한가. 빈궁의 상태 말일세!”


“예 저하. 마마께서 식사만 거르지 않으신다면
문제 없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하아. 정녕, 정녕 그렇단 말이지”


“송구하옵니다 저하.......”



“네 고집은 하늘도 꺾을 수 없는 노릇인가 보구나.
어찌, 어찌 그리하였어!
내 분명 조심히 잘 있으라 하였거늘....”


저하께서 고개를 푹 숙이시며 입술을 꽉 깨무신다.


“어의 옆에 계십니까?”


“예, 마마”


“저하의 기운은 어떻습니까.
이마의 상흔은 아물었는지요.
고뿔엔 걸리지 않으신 것입니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마마,
저하께서도 지금 아픈 몸으로 버티고 계시온지라.......”


“뭐라, 그것이 참말입니까? 정말이에요 저하?”


“됐으니 어의는 나가보아라”


“하오나 저하께서도.......”


“나가보라 하지 않았느냐”


“예, 저하”


어의를 물리는 저하.
걱정되는 마음에 급히 일어나 앉으려 하였지만,


“누워 있거라”


저하의 만류에 다시 눕게 되었다.


“나는 괜찮으니 염려치 말거라. 금방 나을 것이다.”


“공연히 저 때문에 더욱 고생만 하시는 것 같아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그것을 이제야 알았단 말이야”


“.......”



“내 그곳에 앉아 있으면서도 오로지 네 생각만 하였다.
전하께 용서를 구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네 생각만 하였단 말이다.
그 날 비를 맞고 고뿔에 걸린 것은 아닌지,
끼니는 잘 챙기는 지.
헌데 이런 꼴로 날 기다리다니.......”


“용서해주세요 저하.
저하께서도 물 한 모금 입에 대시지 않는다기에
저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아녀자가 지아비를 따르는 것은 당연히 도리 아니겠습니까..”


“요것, 입만 살았구나”


하얀 미소를 지으시며 내 볼을 살짝 꼬집으시는 저하


“저하”


“왜 그러느냐”


“이리 가까이 와보십시오”


“왜. 어디가 불편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저 신첩은...”


저하가 놀란 눈을 하시곤 내게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시자,
나 또한 살며시 손을 뻗어 이마의 상흔을 어루만져보았다.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


“이마를 짓찧으신다는 소릴 듣고
억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어찌 그러셨습니까"


“화가 나서 그랬지. 화가 나서”


“…….”


“내 자신에게 분풀이를 한 거야.
이렇게라도 하면 날 용서할 수 있을까 싶어서”


“그래서, 용서는 하셨습니까”


“아니”


“저하....”


“아마 영원히 용서 할 수 없을 것이야.
그대를 이렇게 만든 것도 내 탓이지 않은가”


“아니옵니다 저하!! 그것이 아니옵니다!!!”


피식. 가벼운 웃음을 보이시는 저하.
이내 내 볼을 쓰다듬어 주시곤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신다.


“ㅇㅇ아"


“예 저하”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거든,”


“…….”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당당히 맞서거라”


“저하...”


“너는 나 대신이니라.
너까지 이리 아파하면 세자의 꼴이 우스워지지 않겠느냐”


“하오나,”


“분명, 분명 또 이런 날이 올 것이야.”


“저하 그 무슨.......”


“내가 없을 수도 있다.
내가 미처 널 지키지 못하는 날이 올 수도 있어.
그래도, 그렇다 하더라도
절대, 이렇게 네 몸을 해하는 일을 해서는 아니 된다. 알겠느냐.”


“그런 날이 오지 않도록 전하 곁에서 꿋꿋이 지킬 것입니다”


“말만 들어도 고맙구나"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 알고 있다. 너의 고집이 센 것도 잘 알고 있지”


피식. 피식 웃으시는 저하의 눈길을 피해
입을 삐쭉 내밀자 쪽. 또 다시 입을 맞추시는 저하.


“하아. 여태까지는 내가 너를 보필하였으니
이젠 나도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


“예, 예?”


“여봐라”


“예, 저하”


“금침을 대령하여라. 오늘은 이곳에 머물 것이다”


“바로 대령하겠나이다”


“차, 참말이십니까?”


“저번에 말하지 않았느냐.
모든 것이 끝나면 바로 너에게 올 것이라고 말이야.
그 때 날 보듬어주기로 한 약속은 다 잊어버린 것이냐?”


“아닙니다 저하!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서 날 품에 안아주어라"


억지를 부리며 내 옆에 달라붙어 몸을 뉘시는 저하


“푸흐...”


“어찌 웃는 것이냐”


“참으로 어린 아이 같습니다 저하”


“내가 너를 볼 때도 그러하다”


“이리 오십시오. 제가 꼭 안아드리겠습니다”


팔을 뻗어 저하의 안으려 하자
오히려 팔베개를 하며 날 안으시는 저하


“나는 이것이 더 편하다”


나를 더 안쪽으로 끌어당기며
양손으로 포옥 보듬어주시는데,


“이리 하면 저하가 저를 안은 모양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허면.......”


“그래도 상관없어.
이미 넌 마음으로 날 품어주지 않았느냐.”


“…….”


“네 마음은 이미 오래 전에 날 품어주었다.
 보듬어주고, 아껴주었어.
내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젠 내가 널 안을 차례야.”


“저하....”


“더 자자꾸나.
한숨 푹 자고 나면 다 좋아져 있을 것이야.
우리의 기운도, 세상의 이치도. 전부가 말이야.”


그렇게 우린 서로를 품은 채 잠에 들었다.
며칠 만에 다시 얻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
.
.



이어서 계속





맨위로
통합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