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세자 저하와 가는 길이 다르다 일렀습니다”


“아버님”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이를 악문 채 버티고 있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전하께서는 이미 마음을 비우셨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뱉으시는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음을 비우시다니요”


“마마께오서 원손만 생산하신다면,”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마마가 살아남는 방책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버님의 말씀은 즉, 전하께서 더 이상...”


“더 이상, 세자저하를 심중에 두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


“하지만 염려치 마시옵소서.

전하께서 마마만큼은 어여삐 여기고 계시니까요.”


“지금 그것이 저하의 장인이란 분이 하실 말씀이십니까”


믿을 수가 없었다.
인정 많고, 따뜻하기만 하셨던 아버지의 얼굴에서
권력에 놀아난 음흉한 신하의 모습이 비춰졌기 때문이다.


“마마를 아끼는 아비로서 하는 말입니다”


“정녕 저를 아끼신다면
저하의 편에 서서 지혜로움을 보이셔야죠”


“그러기엔 이미 저하께서 도를 지나치셨습니다”


“대체 저하께서 무슨 잘못을 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전하의 반대편에 서셨습니다. 저하께서”


“....아버님”


“예, 마마”


“저하께서는 전하의 반대편에 서신 것이 아닌
아버님의 반대편에 서신 것이겠지요.”


결국 참아왔던 화를 터뜨렸다.
영상의 자리에 오르시며 노장파의 수장이 되신 아버지는
소장파와 어울리는 세자 저하와

알 듯 말 듯한 작은 갈등을 겪고 계시던 찰나였다.


“저의 뜻이 전하의 뜻이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허면 마마께서 저하께

지금이라도 납작 엎드리라 청을 해보시던지요!!”


“아버님,”


“전하께서 약을 가져다 달라 하셨는데도
귓등으로 듣던 저하이십니다.
문안인사 한 번 제대로 올리지 않으신 저하이십니다!!
헌데 어찌 저하를 믿고 따르란 말씀이십니까!”


“이것은 전하와 저하 간의 문제입니다.
감히 신하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마마께서도 끼어들지 마시고
제가 시키는대로 조용히, 그저 조용히 계시옵소서.”


“....여봐라”


“예, 마마”


“대감을 뫼셔라”


“마마”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나의 단호함에 차가운 눈빛을 보이시던 아버님은,


“쯧. 정녕 구중궁궐에 핀 조용한 꽃 한 송이가 되셨구려”


비아냥이 섞인 말을 끝으로 문 밖을 나서셨다.


“하아...”


큰일이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대신들 뿐 아니라
전하까지 마음을 돌리신 상태라면

이대로는, 이대로라면, 저하껜 아무도 없는 꼴이었다.





*





드르륵-



“저하”


“하아...”


“어찌 신첩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쉬시는 것입니까?”


드르륵, 문이 열리고
심신이 지쳐 보이는 저하께서 안으로 드셨다.


“너무 따뜻해서 그리하였습니다. 따스하고 포근하여”


“많이 힘드신 것이지요? 이리 오십시오.
오늘도 저하가 마음 편히 주무실 수 있게
제가 꼭 안아드리겠습니다.”


“하루하루 빈궁의 품이 더 그리워집니다. 이를 어찌할꼬.”


“무엇이 걱정이십니까. 제가 항상 옆에 있는 걸요.”


“그렇지. 그대는 내 옆에 있지”


“예, 저하”


저하께서 내게 가까이 오시더니 무릎을 베곤 눈을 감으셨다.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빈궁”


“시를 읽고 있었습니다”


“이 밤에 시라...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연모하는 연인을 노래한 시였습니다”


“혹 누군가 빈궁을 노래한 시는 아니었겠지요”


“저를 노래한 시입니다.”


“뭐라?”


갑자기 벌떡 일어나시는 저하


“지금 뭐라 하였는가. 그대를 노래 해?
누가 그대를 함부로 노래했단 말입니까!”


“푸흐..”


“.... 지금 웃는 것이오?”


“예, 저하. 웃음이 나옵니다”


“어찌... 어찌 나를 앞에 두고 웃는단 말이오!!”


“저한테 시를 써주실 분은 단 한 분이 아니십니까”


“…….”


“저하께서 어릴 적 써주셨던 시입니다.
벌써 잊으신 것입니까?”


“그, 그걸 여태 갖고 계셨단 말이오.”


“제가 그 때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평생 간직하겠다구요”


“그것이 참말일 줄은…”


“보십시오. 저하의 필체이옵니다.”


저하께 시를 보여드리자
붉어진 얼굴로 주욱- 훑어보시곤

다시 내 무릎에 누워 눈을 감으신다.


“어찌 그러십니까?”


“집어넣으시오”


“어찌.......”


“부끄럽기 짝이 없소”


“푸흐흐..”


“지금이면 훨씬 더 잘 쓸 것을”


“그럼 지금 써주십시오!”


“지금 말이오?”


“예. 그것 또한 평생 간직할 것입니다!”


“흐음.......”


“지금 고민을 하시는 것입니까?
예전엔 제게 시도 잘 써주시더니...”


“어찌 맨입으로 바란단 말이오”


“예?”


“아무 대가없이 시를 써 줄 의향은 없소만”


“피-”


“허나 이렇게”



쪽-



“또 이렇게”



쪽-



“나를 기분 좋게 해주면
그깟 시는 백 편이 넘도록 써드릴 수 있소.

밤새도록 말이오.”


“저, 저하...”


순간이었다.

눈감고 계시던 저하께서 갑자기 내 입술로 돌진하신 것은.


“그리고 빈궁”


“예, 예...”



“그대 자체가 노래인데 어찌 또 노래해주길 바라는고.”


“아이 저하도 참…….”


가끔씩 저렇게 부끄러운 말도 서슴없이 하시는 것을 볼 때면
평소의 저하가 아닌 듯싶기도 하다.


“그대는, 그대 자체가”



쪽-



“노래이자,”



쪽-



“숨결이오.”


나를 빤히 바라보시던 저하께서 살며시 입을 맞추셨다.
천천히 부드럽게 이끌던 저하께선
점점 나의 입술을 강하게 탐하셨고,
어느새 저하는 나의 옷고름을 풀고 계셨다.



“하아... 저하,”


“쉬이. 아무 말도 말거라.”



전하께선 나를 번쩍 들어 올려 금침위에 살포시 내려놓으신 뒤,
방안을 밝히던 불을 끄고 다시금 내 위로 올라오셨다.


그리곤 목 언저리에 뜨거운 숨을 뱉으시면서,



“아름답다”


“…….”


“네가 나의 여인이어서 참으로, 참으로 다행이구나”


“처음부터 저는 저하의 짝이었습니다”


“그렇지. 그래야지”



저하의 숨결은 어느새 발가벗겨져 있는
나의 가슴 언저리에 계셨고,
나 또한 움찔거리며 조심스레 저하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아...”


“ㅇㅇ아”


“예”


“ㅇㅇ아”


“예, 저하”


“내 너를,”


“…….”


“참으로 연모한다”


“…….”


“사랑한다.”


옅게 속삭이시는 저하께 난 대답대신 따뜻한 품을 드렸다.

그러고는 우린 밤새 서로에게 얽혀

뜨겁고 찬란한 숨결을 나누었다.





*





1년 후






“마마”


“무슨.... 일입니까 대체”


“마마께선 빈궁전으로 가 계십시오.
제가 저하를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들리는 이 소리가 대체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우익위”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동궁전으로 달려가는 길이었다.
저하께서 환히 웃으시는 모습을 상상하며
급하게 뛰어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동궁전을 목전에 둔 지금,
생생하게 들리는 저하의 고함에
그 자리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내 옆을 급히 지나가던 우익위를 붙잡고 물어봐도
돌아오는 것은 경춘전으로 돌아가란 당부의 말 뿐이었다.


“네 놈도 내가 미치광이로 보이느냐”


“아, 아니옵니다 저하!!!”


“아버님께 인정하나 못 받는 나 따위가 우습게 보이는 것이지.
그렇지 않느냐? 내 말이 맞지?”


“저, 저하!! 제발 고정하시옵소서!!”


“하하. 하하하하!!!! 저 놈의 얼빠진 얼굴을 보아라.
얼마나 우스운가! 하하하하!!”


“어서 시신을 치우고 혈흔을 닦도록 하여라. 어서!”


“뭐라? 이젠 감히 내 앞에서 나의 시중을 부려?
김내관 네 이놈!!!!!!!”


“저하!!!!!!”



질끈, 눈을 감았다.
분명 칼부림의 소리였다.
우욱, 김내관이 뱉은 소리와 함께
쿵, 땅에 떨어지는 소리까지.
모든 것은 저하가 계신 동궁전에서 들리는
두렵고도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마마, 잠시”


상황파악이 다 된 우익위가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우익위는 왜 이제야 오는 것인가!!!!”


“저하. 고정하시옵소서.”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이 재밌는 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저하”


“그대도 한 번 해보겠는가?
어디, 그 칼 휘두르는 솜씨 좀 보지.
날 지킬 자격이 되냐 이 말이야! 하하하하하!!!”


“세자빈마마께서 밖에 계십니다”


“....뭐라”


“빈궁마마께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빈께서 이리 오셨단 말인가”


“하오니 저하, 이제 좀 고정하시고...”


“빈, 우리 빈궁. 빈궁!! 빈궁!!!!!!”


“저, 저하!!!!”



뚝. 뚝. 흐르는 눈물이 홍수가 되어 바닥에 가득 찰 때까지
마냥 서있던 나는,



“빈궁!!”



온 몸에 피를 묻힌 채 급히 문 밖을 뛰쳐나오시는
저하를 보곤
.......
애써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하”


“어찌 예까지 오신 것이오? 내가 보고 싶어 온 것이오?”


“저, 저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어서 들어오시지 않고
뭐하고 서 계셨던 것이오.
여봐라. 어서 빈궁을 안으로 뫼시어라!!”


“아, 아닙니다 저하”


“아니, 왜”


“다음에, 다음에 오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때가 아닌 듯하여..."


“그러지 말고 안으로 드시오. 자자,”


내 손을 친히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시려는 저하를 잠시 멈춰 세우고,
얼굴에 묻은 혈흔을 살며시 닦아 내었다.


하지만 들고 계신 칼에서 떨어지는 피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저하”


“왜 그러시오 빈궁”


“저와 함께...”


“…….”


“잠시 내려놓으시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함께 행궁에 가시지요 저하”


“대관절 무슨 행궁이란 말이요 빈궁.
나는 이곳에 있어야 하는 몸이오. 그대도 잘,”


“회임하였습니다.”


“…….”


“회임을 하였습니다 저하”


“정녕 빈궁께서 회임을... 하셨단 말이오?”


“감축드리옵니다 마마!!”

“감축드리옵니다!!!”


저하와 나를 둘러싼 모든 내관과 나인들이
그 자리에 엎드리며 감축의 인사를 올리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에 서있는 우리는
그저 말없이, 서로를 바라 볼 뿐이었다.


“그러니 저하, 저와 함께,”


“내 꼴이”


“.......”


“내 꼴이 말이 아니구려"


자신의 복색을 찬찬히 훑어보시더니
챙-

 들고 계시던 칼을 떨어트리셨다.


“아닙니다 저하. 괜찮습니다.
이제 고정하시고 잠시 눈을 붙이시면,”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이오 대체”


“저하...”


“내가 지금... 무슨...”


“저하!!!”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시는 저하.
깜짝 놀라 급히 부축하니,


“미치광이가 되었소.”


“아닙니다 저하. 단지 심신이 허약하시어...”


“아이가 금수의 아비를 두게 생겼소 빈.
다 내 탓이오. 다 나의 잘못이오.”


“그런 말씀 마옵소서 저하...!!”


결국, 저하는 내 품에 안겨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셨다.


“뭣하느냐, 어서 어의를 부르지 않고!!”


“예! 마마!!”




.
.




“세자빈마마 드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몸져누우신 저하를 뒤로 하고 내 발로 직접 희정당에 들었다.
주상 전하를 뵈러 온 것이었다.


“전하, 신첩 문안 인사드리옵니다.”


“오냐. 앉거라”


“예, 전하”


굳은 얼굴로 전하와 마주 하자 전하께서 먼저 입을 여신다.



“세자빈의 회임 소식은 이미 들었으나
실성한 세자 때문에 내 미처 챙기지 못했구나”


“....아닙니다 전하. 신첩은 괜찮사옵니다.”


“그래. 몸은 어떠하냐”


“신첩은 사실, 뱃속에 있는 아이 때문에
억지로 끼니를 하고 있나이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


“저하께서 저리 앓고 계시는데

어찌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겠나이까”


“세자의 일은 내가 미안하구나. 다 나의 불찰이다.
세자에게서 널 떨어트려 놨어야 하는 것을”


“…….”


“어찌 하겠느냐.
원손을 위해서라도 친정으로 가 보살핌을 받겠느냐”


“신첩은 절대 저하와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뭐라?”


“심신이 편찮으신 저하껜 제가 꼭 필요할 것입니다.
제가 옆에서 극진히 모실 것입니다.”


“세자빈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으나,”


“전하”


“…….”


“저하와 함께 온양 행궁에 갈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온양 행궁이라.”


“잠시나마 정무를 내려놓고 안정을 취하시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여 간청 드리는 것입니다.”


“정녕 그리 생각하느냐”


“예, 전하”


“아이를 밴 네가 온양까지 가 세자를 지키겠다는 것이냐”


“예, 전하. 성심껏 돌보아 드릴 것입니다.”


“…….”


전하께서 한동안 말씀이 없으셨다.
직접 세자 저하에 대해  ‘실성’이란 단어를 쓰신 분이었다.
그런 세자를 회임까지 한 아녀자가 직접 돌보겠다 나서다니
전하께서도 많은 생각이 드셨을 터.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


“세자를 데리고 다녀오너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다녀와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준다면,”


“…….”


“그동안 세자가 저질렀던 과오는 뒤로하고 다시금 여길 것이야.”


“예, 전하.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세자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니 그런 줄 알고 있으라”


“예, 전하”


“나가도 좋다”


“꼭, 꼭 예전의 세자 저하를 모시고 돌아오겠습니다.
그 때까지 옥체 강령히 하시옵소서”


“…….”


말 그대로 전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였다.
저하께서 다시 인정받으실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





*









“오랜만에 말을 타니 참으로 좋소, 빈궁”


“흡족해 하시는 것을 보니 저도 마음이 놓입니다 저하”


“빈궁과 함께 있는데 흡족하지 않을 리가 있겠소”


참 오랜만에 보는 저하의 밝은 얼굴이었다.
궁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은 다 묻으시고
새로운 이곳에 푹 빠지신 듯 보이는 저하.


“저하,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무엇을요.”


“저는 이전에 한 번도 온양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정녕 그렇단 말이오?”


“예. 저하와 함께 처음으로 가는 것이지요”


“어허, 그럴 리가”


“참이옵니다”


“허긴, 열의 나이에 궁으로 온 그대가 아니오”


“그렇지요"


“그렇담 내 이 참에 온양을 속속들이 보여주리다.
물론 나도 오래 되었지만”


“예, 저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말을 타고 가시던 저하께서 고개를 빼꼼 내미시더니
가마 안에 있던 나에게 싱긋, 미소를 보이신다.


“하하하하”


밝은 햇살을 받은 저하의 웃음이 온 대지로 뻗어 나가
산도, 바람도 춤추게 하는 것 같았다.




.
.




“저하, 이것을 보십시오! 나비가 자꾸 제 곁을 맴돕니다!”


“꽃향기를 찾아 왔구려.”


“꽃이요?”


“아주 강한 향기를 맡고 온 것이 분명하오.

아니 그러냐 하늘아”


“그러하옵니다 저하”


“허나 이곳엔 그런 꽃이 없는 걸요.”


“빈궁”


“네?”


“모르는 것이오, 아님 척을 하는 것이오.”


“가, 갑자기 무슨 말씀을...”


저하의 눈치를 살살 보며 옆에 있는 우익위를 쳐다보자
흠흠. 헛기침을 하며 반대편으로 고갤 돌리는데,


“내 살다 살다 움직이는 꽃은 또 처음 보는 구려”


“예?”


“그 몸짓은 또 어떻소.
바람에 흩날리는 깃털마냥 가볍고 아름답지 않소.”


“꽃이 말입니까?”


“재잘거리는 입도, 부드러운 손길도.
참 신비한 꽃이 분명하오.”


“정녕 그런 꽃ㅇ...”


“여기 있지. 내 앞에”


한 발짝 다가와 내 손을 꼭 잡아주시는 저하.
당황한 나머지 앞을 빤히 쳐다보자
쪽, 이마에 입맞춤을 하시곤 품에 가두신다.


“잠시 착각을 할 뻔 했소.
아무 죄 없는 나비까지 미워할 뻔 했단 말이오.”


“저하...”


“감히 우리 빈궁 곁을 맴돌다니”


“푸흐.... 저하, 지금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하하하하”


“치-. 우익위는 웃지 마십시오!”


“흠흠”


몰래 웃으려던 우익위는 나에게 딱 걸려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했고
저하는 그 모습을 보며 또 다시 크게 웃으셨다.


“하늘아, 여인들은 다 이렇단 말이냐.
부끄러워하는 모습마저 참으로 어여쁘구나.”


“모든 여인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하”


“그렇겠지. 우리 빈궁만 그런 것이겠지.
어떠냐 하늘아. 네가 지금껏 본 여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세미인이지 않느냐”


“저하도 참!”


“그러하옵니다 저하”


“하하하하”


빨개진 얼굴로 저하를 올려보자
등을 몇 번 토닥이시곤 크게 웃으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마, 준비가 다 됐나이다”


“오냐. 빈궁, 어서 들어가시지요."


입욕 준비를 마쳤다는 상궁의 말에 내 손을 이끄시는 저하


“저하, 저보다는 저하께서 먼저….”


“아닙니다.  나에겐 빈궁이 우선입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예, 저하”


결국 나는 상궁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고,
저하께선 우익위와 함께
뒤뜰에 남아 계속 이야기를 나누셨다.





“마마”


“왜 그러느냐”


“저하께선 마마를 참 많이 은애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 그리 생각하느냐”


“마마는 모르시지요?
마마께서 뒤로 돌아서 계실 때에도
저하께선 웃으며 지켜보시곤 합니다”


“그러셨느냐”


“예! 그 뿐만이 아닙니다.
동궁전 나인에게 들은 것인데요.
전하께서 매일 마마 이야기를 하신다고 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말이냐”


“꽃을 보면 꽃을 닮은 마마 이야기를 하시고,
맑게 갠 하늘을 보면 마마의 곧은 심성을 이야기 하시고...
어느 것을 봐도 마마 이야기만 하신다고 합니다.”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저하께선 참 변함이 없는 분이셨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저하는 나를 참 극진히 아끼셨다.


“궁중 나인들이 얼마나 두 분 금슬을 부러워하던지....”


“너도 부러운 것이야?”


“아, 아닙니다! 소인은 그저...”


“대신에 설란아,”


“예?”


“우리는 궁에 있지 않느냐.”


“그것이 무슨....”


“열 살에 궁에 들어왔지.
하루에도 열 번은 돌아가고 싶었었다.
낯선 곳에, 낯선 사람들과 있다는 것이
참으로 무섭고, 두려웠었어. 그 때엔”


뜨거운 열기에 옅은 숨을 내쉬곤 다시 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헌데 그 때마다 저하께서 내가 다가와 말씀하셨다.
그만큼 내가 더 잘하겠소.
그만큼 내가 더 힘 써 보이겠소.
그러니 울지 마시오. 서러워 마시오 빈궁.”


어렴풋이 그 때 생각이 난다.
밤에 잠도 못 이루던 그 시절. 그때가


“매일을 그리 말씀하셨어. 먼저 다가와 손잡아 주셨지.
그래서 내가 버틴 것이야.
그 분 하나 믿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설란아”


“마마...”


“나중 가더니 궁은 점점 친정만큼 편해지고,
오로지 저하를 볼 수 있는 곳은 궁밖에 없다는 생각에
더, 더 그곳을 좋아하게 됐지.
내가 사는 그 궁을 말이다.”


두려움이 가득했던 궁에 정을 붙인 건
오로지 저하의 정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설란아”


“네, 마마”


“요즘엔 밉다, 그 곳이”


“…….”


“그 곳이 있어야 우리가 있는 건데, 그 곳이 왠지 미워.”


“어찌....”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설란이

살짝 고갤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궁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더 행복해지지 않았을까.”


사실이었다.
저하가 가끔 하시던 말씀처럼

평범한 농민이었다면, 선비였다면, 그런 그의 아내였다면
훨씬 행복하지 않았을까.


“전하께서 들으신다면 노여워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내 마음은, 그냥, 가끔 내 생각이 이러하다.”


멍하니 내 말을 듣던 설란이가
훌쩍이며 옷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웃음이 나는 게,


“종종 네가 나대신 울어주는 게 좋더구나.
난 함부로 울면 안 되는 몸이지 않느냐.
울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게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더 미소를 지어보였다.
눈물이 가려질 수 있도록.




.
.
.




“으윽, 윽...”


깊은 밤, 나를 깨운 건 찬바람도, 악몽도 아니었다.


“저하, 저하?”


바로 저하의 신음 소리


“하아... 윽....”


저하, , 왜 그러시옵니까!”


“아.......”


황급히 저하를 살펴보니 온 몸엔 땀이 흥건했고,
눈가엔 눈물이 젖어있었다.


악몽을 꾸시는 듯 보였다.


“저하 저예요. 제가 옆에 있어요. 괜찮아요 저하”


어찌할 도리가 없는 난

그저 저하를 품에 넣고 쓰다듬을 뿐이었다.


“하아, 하아.......”


얼마나 지났을까.
저하께선 간신히 정신을 차리시고 살짝 눈을 뜨셨다.


“...ㅇㅇ아”


“예”


“정녕 네가 맞느냐...”


“예, 저하. 신첩입니다”


“참으로, 참으로 다행이구나”


“어지러운 꿈을 꾸신 것이옵니까?”


“네가 보여 다행이야. 네가, 네가 옆에 있어...”


“저하,”


대답은 하지 않으시고
그저 손을 뻗어 내 얼굴만 어루만지시는 저하


“왜, 왜 우는 것이야”


“아닙니다 저하. 그런 게 아니오라...”


깊은 밤이었지만 저하께선 내가 다 보이셨나보다.
뚝뚝 흐르는 눈물까지도


“눈을 떴을 때 네가 없었다면
그 땐 정말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지금은 아니야.
네가 내 곁에 있어 하나도 무섭지 않다.”


“예, 저하.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나 때문에 괜히 울지 말거라.”


“예. 울지 않겠습니다”


“하아.......”


“저, 저하. 어의를 불러올까요?”


“아니다. 아니야. 다시 자자꾸나”


“허나,”


“분명 너만한 처방이 없다 말할 것이다, 어의도.”


“…….”


저하께선 다시 날 눕히시고 얼굴을 쓰다듬어 주셨다.
토닥토닥, 작은 손길도 잊지 않으시고.


그리고 꽤 시간이 흘러 잠들려던 중,

저하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를 잃는 것보다 더한 악몽이 어딨겠느냐.”


어렴풋이 들리던 소리


“단지, 단지 나는...”


“널 혼자 두기 싫었던 게지.
이 험난한 곳에 널 홀로 남겨두기 무서웠던 게지”


나지막한 소리로 읊으시던 저하께서
토닥거리던 손길을 잠시 거두시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셨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



 “네가 먼저 날 잊을까........”



.......



그리곤 말씀이 없으셨다.





*





어느새 시간은 훌쩍 흘러 이곳에 온지 석 달이 되었고,
나의 배도 점점 더 부풀어 오르던 중.


“설란아”


“예, 마마”


“저하께선,”


“아직 입욕 중이시라 하옵니다”


“그래”


저하께선 점점 차도를 보이는 듯 하였다.
악몽을 꾸는 횟수도 줄었고,
괴로움에 몸을 떠는 것도 이젠 하지 않으셨다.


“마마, 바람이 꽤 무섭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아니다. 따뜻한 햇볕 아래 있으니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구나”


“허나 저하께서 마마 걱정을 계속 하시는 터라...”


“내 알아서 들어갈 것이니 걱정 말거라.”


“예...”


저하도 참, 여전히 어딜 가나 내 얘기만 하시는지


“설란아”


“예”


“따뜻한 차가 생각나는구나”


“아, 예!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총총총, 설란이 바삐 걸음을 옮기자


“휴우...”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고 기둥에 잠깐 기대어 섰다.


“내 너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멀리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그저, 그저 좀 혼자 있고 싶어 그리 한 것이니
너무 서운히 생각지 말거라.”


멀어지는 설란을 보며 작게 속삭이니
이내 피식 웃음이 났다.


“참, 혼자가 아니구나”


깜빡할 뻔 하였다. 뱃속에 있는 아가를.


“어미와 단 둘이 시간 좀 보내보자.
어떠냐. 좋은 것이지?”
 
배를 가만히 쓰다듬으니 또 다시 웃음이 났다.
행복하다. 행복했다.



쉬익-
쉭-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담벼락 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절대 바람 소리는 아닌 것이...


“비키십시오 마마!”



쉬익-



“이 무슨...!”


때마침 기와 위에서 나타난 우익위.
날 향해 다급한 목소리로 외친 후

담벼락을 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게 대체,”


분명 우익위가 지나가기 전 누군가 담을 넘었었다.
평범한 옷차림의 건장한 사내였다.
무심코 흘러들어 왔다기엔 너무나 능숙한 솜씨였던.


“마마! 안으로 드시지요. 차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잠시, 잠시만...”


“왜 그러시옵니까?”


“하아....”


순간 한기를 느낀 내가 배를 쓰다듬자
놀란 눈으로 한 걸음 다가서는 설란이


“편찮으시옵니까?”


“아니다. 아니...”


“허면,”


“....우익위를 보거든 당장 내게 데려오거라.
저하 몰래 해야 할 것이다.”


“어찌 우익위를 찾으십니까?”


차가운 눈으로 설란이를 보자 움찔하며 고갤 푹 숙였다.


“전하 몰래 데려 와야 한다. 명심하거라.”




.
.




“마마, 우익위 들었사옵니다.”


“들라 하라.”



드르륵-



문이 열리자 조심스레 들어오는 우익위


“앉으시지요.”


“예, 마마”


왠지 그의 얼굴에서 긴장이 느껴진다.
나의 부름이 의외라 그런 것이겠지.


“우익위”


“예”


“아까 내가 본 것이 무엇입니까?”


“…….”


“분명 우익위가 담을 넘기 전
웬 건정한 사내를 보았습니다.
복면을 하고 있어 자세히는 못 봤으나,
어렴풋, 사내의 얼굴이었습니다. 맞습니까 제 말이?”


“…….”


“대답해 주세요”


“....예 마마. 맞습니다”


“그를 잡으셨습니까”


“예”


“어찌 하셨습니까”


“돌려보냈습니다”


“어떤 자였습니까”


“…….”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혹 거짓으로 고하신다면, 제가 나서서 밝히겠습니다”


“허나 마마,”


“.......”


“저하께서 신신당부 하셨습니다.”


“저하께서요?”


“예. 마마께서 절대 아시면 안 되는 일이라 당부하셨던지라...”


“나와 관련된 일인가 보네요.”


“그, 그것이 아니오라,”


“누군가 사람을 보낸 것입니까”


“…….”


우익위가 말없이 고갤 떨궜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맞는 모양이었다.
누군가 우릴 염탐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의 짓입니까”


“그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하껜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아니되옵니다 마마”


“저하 홀로 그 큰 짐을 안게 할 순 없습니다.
우익위, 제발....”


“…….”


“혹, 예전 저자에서의 일도 같은 자의 소행입니까”


고개를 더욱 숙이는 우익위


“지금 말씀하지 않으시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마마”


“어리석게 일을 크게 벌이지 않을 것입니다. 약조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귀띔이라도 해주세요.”


나의 간곡한 부탁에 한숨을 쉬던 우익위가 드디어 입을 뗐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옵소서.”


“…….”


“그 일을 시킨 자는 다름 아닌,”


“…….”


“영의정 대감이십니다.”


우익위의 말을 끝으로 질끈, 눈을 감았다.


어쩌면 예상했던 이름이었다.
기필코 나오지 않았으면 했던 이름


“마, 마마, 괜찮으십니까?”


“....저하께서도 다 알고 계신 것입니까.”


“...예 마마”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저자에서 미행이 붙었던 때부터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헌데 지금까지 저만 몰랐던 것이네요”


“저, 저하께선 마마께서 혹 상처를 입으실까 하여...”


“…….”


“…….”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예?”


“아비와의 연을 끊으면,”


“아, 아니되옵니다 마마!!”


“그렇게 하면

저하께서 아무 위협 없이 지내실 수 있는 것입니까”


“마마께선 지금처럼 그저
저하 곁을 잘 보필해주시면 되십니다.”


“정녕 내가 할 일이...”


“저하께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 봐 주시옵소서.
마마께서 힘들어하시면
저하께서도 많이 괴로워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친아비가 나의 지아비를 해한다니
하나 뿐인 사위의 손을 놔 버리다니.


“마마”


“…….”


“저하껜 모르는 척 해주십시오”


“저하께서도 한 번 쯤은 절 원망하셨겠지요”


눈물이 고였다.
얼마나 미웠을꼬
얼마나 괴로우셨을꼬


“아닙니다 마마.
저하께선 오히려 마마를 걱정하셨습니다.
마마껜 무슨 일이 있어도 함구하라 이르셨고,
혹 마마께서 알게 되셨을 땐....
아니, 그 전에 모든 일을 해결하리라 다짐하셨습니다.”


“이리 못난 부인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목숨 값 하나 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궁궐에 핀 꽃 한 송이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무능력한 그런 꽃송이 말입니다.”


톡,톡.. 눈물이 볼을 따라 흘렀다.
눈앞에 보이는 평안함만을 쫓은 내가 한심스러워 나는 눈물이었다.
매일 밤, 내 품에 안기실 때 과연 어떤 기분이셨을지.
직접 느끼지 않아도 뻔히 알만한 그 마음을..


“이럴 때일수록 마마께서
저하를 더욱 붙잡아 주셔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도록, 약해지지 않도록
곁에서 꼭 붙들어 주십시오 마마”


“제가 어찌....”


“저하의 유일한 쉼터는 마마이십니다.”



저하의 유일한 쉼터
저하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곳


적의 자식
오직 그곳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결국은
적의 자식


나의 품









“어찌 여기 있는 것이냐”


“오늘은 좀 힘에 부쳐 쉬기로 하였습니다”


“어허, 내 너의 입욕을 도우려던 참이었던 것을”


“참말이십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네 창백한 얼굴을 보니 괜한 일이었나 싶구나.
어찌, 어디가 아픈 것이야?”


“아니에요 저하”


“기색이 영 좋지 않아 보여”


내 곁으로 와 얼굴을 한 번 쓰다듬으시곤
짧은 입맞춤을 남기시는 저하


“그런 표정 거두시옵소서. 신첩은 정말 괜찮습니다”


“혹, 뱃속에 있는 아이가 널 힘들게 하는 것이냐”


“하하. 어찌 그렇겠습니까.
그 흔한 발길질 한 번 하지 않는 걸요”


“넌 몰랐겠지만 내 밤새 아이에게 가르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미를 힘들게 하지 말라 일렀지”


“하하하”


“벌써부터 효를 행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구나 녀석”


저하의 잔잔한 미소에서 포근함이 느껴졌다.
배를 어루만지는 손길...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끝나지 않았음 좋겠어


“저하”


“응”


“한양으론 언제 가시렵니까?”


“어, 한양”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이내 나를 보곤 웃으며 물으신다.


“왜. 그곳이 그리운 것이냐”


“저하께선 어떠십니까”


“나는.. 글쎄”


“저하의 마음이 곧 저의 마음입니다”


“참 말이냐”


“예”


“할 수만 있다면,”


“…….”


“해를 넘기고, 또 넘기고.. 계속 해를 넘겨서...”


말끝을 흐리시는 저하.
힘들어하시는 것이 눈에 보여 말없이 품에 안겼다.


“저는 이곳이 좋습니다”


“그래”


“한양 행은 서둘지 마시옵소서.
신첩은 여기에 더 머물고 싶습니다”


차마 저하 스스로 하실 수 없는 말이기에 내가 먼저 뱉어버렸다.
돌아가기 싫다고,
여기 머물고 싶다고.


“그래도 아이가 태어나면 다시 돌아가야겠지"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요 저하. 급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저하의 손을 꼬옥 잡아 드리니 마저 내 손을 맞잡아 주신다.


“ㅇㅇ아”


“예, 저하”


“내일 다녀 올 곳이 있다”


“저하께서 말씀이십니까?”


“이곳 관리들과 이야기를 나눠 볼 참이다.
생활은 어떤지, 민심은 어떠한지”


“예...”


“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올 것이니
그 때까지 편히 있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저하. 걱정 마십시오”


“그새 눈물짓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저하의 얼굴.
그 모습을 보니 나도 장난끼가 동해,


“눈물짓다니요?
저하가 안 계신 동안 나인들과 즐겁게 놀아볼 참입니다!”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저하의 눈치를 살폈다.


“어찌 놀아볼 계획인고?”


“그것은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만,”


“어찌할 심산인지 심히 궁금하구나.
이곳을 벗어나지만 않으면
무얼 해도 상관하지 않을 것인데”


“바깥 구경을 해 볼 참입니다.”


“바깥 구경?”


“예. 신첩, 저하께서 이곳 구경을 시켜주신다는 말만 믿고
어디도 나가보지 않았사온데,
이번을 기회로 한 번 다녀오려 합니다.”


“안 된다.”


“예?”


“다음에. 다음에 꼭 나랑 같이 가자꾸나.
혼자서는 절대, 절대 아니 된다.”


“어찌…….”


금방 차가워진 저하의 얼굴을 보곤
그 연유를 여쭤보려던 차,
낮에 우익위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혹 그럴 일은 없겠지마는, 혼자서는 위험하다.
특히 이곳은 도성 안이 아니지 않느냐.
근처에 인적 드문 곳이 많다.
그런 곳을 너 홀로 보낼 순 없어”


“...예 저하. 신첩이 경솔하였습니다.
미처 그 생각을 못하고....”


송구한 마음에 고갤 푹 숙이자 다시 눈을 맞춰주시는 저하


“서운히 생각지 말아라. 나랑 가면 될 것이 아니냐”


“신첩 서운하지 않습니다. 그저,”


“안다. 너의 그 선한 마음을 왜 모르겠느냐.
미안해서 그러지. 미안해서...”


예전 같으면 왜 미안하다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했을 터,
이제는 저하의 뜻을 알아들을 것도 같다.


“신첩이 더 송구스럽사옵니다”


“어허, 나를 더 욕보이게 하는구나”


“예? 그것이 아니오라,”


“하하하”


멋쩍어 하는 날 두고 호탕하게 웃으시는 저하


“두 번 놀렸다간 눈물을 보이겠구나 ㅇㅇ아”


“짓궂으십니다 저하”


“알고 있다. 네게만 그렇지”


하하호호.
웃음소리 가득한 이 방에 노을빛이 드리운다.


따뜻한 온기만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인지
진한 노을이 둘을 감싸 안는다.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





“부탁할 것이 있어 불렀소.”


저하도, 우익위도 없는 조용한 이곳에
낯선 사내를 부른 이유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으시오."


꼭 알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 마마”


“당장 한양으로 가 영상 대감을 만나시오”


“예?”


“그리고 이 서찰을 전하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전해야 하오”


“예, 예. 마마”


“대감께서 서찰을 다 읽으시거든
지금 내가 하는 말 또한 그대로 전하시오”


“…….”




.
.





“'이 서찰을 허투루 응할 시 나도, 대감께서도
온전히 살아남지 못할 것임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대감.”


 “뭐, 뭐라!!!!!!!”


진노한 영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찰을 냅다 노려봤다.


“감히 나를 겁박한단 말인가!!! 제 아비를!!!!!”


대감의 호통이 쩌렁쩌렁 집안에 퍼져 나가자,
놀란 부인이 뛰어 들어왔다.


“웬 난리입니까 대감!!”


“맹랑한 것!!!”


씩씩거리는 대감의 눈치를 살피던 부인이
상에 있던 서찰을 들고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데,


“이, 이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필체에 한 번 놀라고,


“이게 무슨...!!!!”


강력한 어투에 또 한 번 놀라고 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정무에 힘쓰시는
아버님의 깊은 뜻은 잘 알고 있으나
그 뜻의 향방이 심히 왜곡된 듯하여
이렇게 한 자 적어 보냅니다.


세자 저하는 제가 잘 보살피고 있으니
구태여 사람을 붙이실 필요까진 없으십니다.


부자 간 이간을 하기 위한 노력은 그만하시고
그 정성을 백성에게 쏟으소서.


부디, 부끄러운 아비는 되지 말아주소서.’




.
.
.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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