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 조금만 더 힘을 내시옵소서!!!”


“아악!!!!”


“지금 힘을 내셔야 합니다!!”


“마마!!”


이를 악 물었다.
있는 대로 힘을 내었다.
아비 곁을 지켜줄 원손이 나오길 기대하며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냈다.


“마마!!!”




“하아...”




천지를 흔드는 듯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자님이십니다!!”


환희에 가득 찬 나인의 소리가  나의 귓가를 때렸다.




.
.
.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느냐”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갤 돌려 옆에 누우신 저하를 쳐다봤다.


“너의 비명이 너무 가슴 아파서,
꼭 살려달란 외침 같아서
뱃속에 있던 원손을 잠시나마 원망했었다”


“.......”


“괘씸한 놈이라 욕도 했었다”


“저하...”


“그러니,”


“.......”


“앞으론 절대 아프지 말거라
슬퍼하지도 말고, 다치지도 말거라”


“.......”


“네 비명을 또 다시 듣는다면 그 땐,
내 자신을 원망할 것이다
대신 아프지도 슬퍼하지도 못하는 내 자신에게
화를 낼 것이다. 알겠느냐”


“송구하오나 그 약조는 지키지 못 할 것 같사옵니다 저하”


“뭐라”


“신첩이 뱃속에 있던 원손에게 먼저 약조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아우를 만들어 주기로 했지요”


잠시 생각에 잠기시는 것 같더니 이내 환히 웃으시곤,


“원손이 참 좋은 어미를 두었구나”


내 손을 잡아주셨다.


“그 때의 그 비명은 저하,
아프고 괴롭기만 하여 지른 것이 아닙니다.
원손이 나오길 기도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지른 것입니다”


저하의 편이 될 원손을 기대했다.
아비의 뜻을 따르는 아들을 기대했다.


“미안하다”


“.......”


“너에게 큰 부담을 준 것 같구나”


“아닙니다 저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원손이 아니었어도 변하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네 곁에.......”


말끝을 흐리시는 저하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짓자,
따라 웃으시는 저하


“말이 길어졌구나. 어서 자자”


“예, 저하”





*







품에 안긴 잠든 아이를 쳐다봤다.
어쩜, 저하를 빼다 박은 듯 했다.
짙은 눈썹에 초롱초롱한 눈,
우직하고 날카로운 콧날까지.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온통 저하의 모습이었다.


“참으로 보기 좋소 빈궁”


“예? 아, 예 저하”


“시기가 날 만큼 보기 좋구려”


“저하도 참.......”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
가마 옆에 붙어 가시던 저하께서 날 들여다보신 모양이다.


“하늘아”


“예”


“조금 천천히 가자꾸나. 어찌 그리 서두르느냐”


“송구하옵니다 저하.
한 시라도 빨리 궁에 도착해 편히 쉬셔야 하온지라...”


날 향해 미소를 보이시는 저하


“내 욕심이니라.
빈궁과 걷는 길이 좋아 내는 욕심 말이다”


“저하, 혹,”


“아니오”


“…….”


“그저 조금 더 오래
이 순간을 감(感)하고 싶어 그런 것이니 괜한 염려 마시오”


“신첩도 그러 하옵니다”


“빈궁도 나와 같단 말이오?”


“예, 저하”


“들었느냐, 빈궁도 나와 같다 하지 않느냐”


“예. 천천히 가겠습니다 저하”


우익위의 대답이 들리자마자
가마의 움직임이 한층 느려졌다.
아이는 여전히 새근새근 자고 있었고,
우리의 행렬은 평화롭기만 했다.


“전하께서 좋아하실 것이오”


“예?”


“현이를 얼마나 기다리셨겠소.
빈궁도 마찬가질테고”


“전하께선 저하를 가장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나를 기다리셨다…”


“소식을 듣자하니 저하가 안 계신 동안
전하께서 심히 외로워하셨다 합니다”


“그게 참말이오?”


“그렇습니다 저하”


“…….”


“전하께서 저하를 뵙고 기뻐하실 것을 생각하면
신첩, 벌써부터 설레옵나이다”


“진정 그것이 설렌단 말이오?”


“예?”


“나와 함께 궁을 거닐 생각으로
설레야 하는 것이 아니오 빈궁”


“놀리지 마시옵소서”


붉어진 얼굴로 저하를 힐끔 쳐다보니
호탕하게 웃으시며 말을 이으셨다.


“현이는 그대를 닮아 참으로 따뜻할 것이오.
천진난만하겠지”


“신첩이 천진난만하단 뜻이옵니까?”


“그렇지”


“마치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습니다 저하”


“맘에 들지 않는 것이오?”


“내키진 않사옵니다”


“하하, 그런 얼굴을 하니 더욱 어린 아이같소 빈궁”


“저하!”


“어서 빨리 공주를 낳아야겠소.
빈궁을 흠뻑 닮은 공주 말이오”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숙이니
그것 또한 짓궂게 놀리시는 저하.


저하의 웃음소리가 천지사방을 가득 채우는 듯 했다.





*





“전하, 어찌 자리에 드시지 않는 것이옵니까”


“상선”


“예, 전하”


“그대는 세자를 어찌 생각하는가”


“…….”


“괜찮으니 말해보라”


“세자 저하께서는 성정이 올곧으신 줄로 아옵니다”


“올곧다?”


“예, 전하”


깊은 밤,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하염없이 달만 쳐다보던 임금이 상선에게 말을 건넸다.


“세자가 온양에 간 후로 조정이 조용했던 것을 아느냐.
그 어떤 소란도 없이 물 흐르듯
흘러갔던 것을 아느냔 말이다”


“…….”


“날이 밝으면 세자가 궁으로 들어올 것이다”


“예, 전하”


“세자빈이 그랬지.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노라고”


그 당시 빈궁이 보여준 결연한 눈빛을 회상하는 듯 했다.


“과인이 세자를 온 뜻으로 맞이하기 위해
과인의 사람을 쫓아내었다.
세자가 신임하던 우상 조진호,
이조참판 이중성을 궁 밖으로 내보냈어”


상선이 대답 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엄한 왕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젠 세자가 나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야.
다른 누구보다도 세자를 선택한 과인의 뜻을 지켜야 할 것이야”


“꼭 그리 하실 것입니다 전하”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니 기꺼이 따라주겠지.
아니 그런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하얀 달은 내일의 해를 기다리듯
그 자리에 멈춰 환히 빛나고 있었다.





*





“소자, 어머님, 아버님께 문안인사 올리옵니다”


“오냐, 어서 오거라”


중전마마와 전하께 절을 하고 다소곳이 앉아
이어질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세자저하를 새롭게 봐 주시옵소서,
부디 어여삐 여겨 주시옵소서 하는 깊은 마음과 함께.


“아가, 고생하였다. 참으로 고맙구나”


“다 세자저하의 보살핌 덕분이옵니다 마마”


“우리 동궁이 안사람 아끼기는
조선 팔도에서 제일일 것이다, 아니 그러냐?”


“그러하옵니다 마마”


“…….”


호탕하게 웃으시는 전하와 달리
고개만 숙인 채 아무 말씀 않으시는 세자저하.
염려된 마음에 살짝 옆을 돌아보니
아무 표정 없이 바닥만 쳐다보고 계셨다.


“동궁은 고개를 들라”


전하의 부름에 간신히 고갤 드시더니
그제서야 전하와 눈을 마주치시는데,


“오랜만에 본 아비에게
얼굴도 보여주지 않을 작정이더냐”


“송구하옵니다 전하, 너무 오랜만에 뵈어
감격한 마음에 그리하였습니다”


“정녕 그러한 것이냐”


“예, 전하”


“나도 그러하다. 참으로 반갑구나”


전하의 미소를 보았다. 참으로 환한 미소였다.


이제 모든 불화는 끝이구나
모든 오해는 풀렸으리라.
이제 두 분께서 서로 의지하시며 정사를 베푸시리라.


생각하고 여겼고 믿었다.





“저하”


나의 부름에 찬찬히 돌아보시는 저하


“참으로 보기 좋았습니다”


“그랬소?”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저하께서 내 손을 꼭 잡으며 따라 웃으셨다.


“앞으론 빈궁과 현이를 위해 더 노력할 것이오.
날 믿어줄 수 있겠소?”


“신첩은 지금껏 저하만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어찌 물으시는 것이옵니까”


“하하, 그렇지. 그러했지”


“신첩의 지아비는 저하이십니다.
지아비는 하늘의 뜻과도 같다 하였습니다”


“그럼 내가 그대의 하늘이 되는 것인가”


“그러하옵니다”


“어찌, 어찌 이리 고운 말만 골라 한단 말인가”


“그것 또한 저하의 뜻이옵니다”


“하하하하”


동궁전으로 돌아가는 길.
뒤따라오던 나인들의 웃음소리도
작게나마 들릴 만큼 즐거운 때였다.
인상을 쓰고, 슬퍼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우익위가 뛰어오기 전까진 말이다.




“저하”


“무슨 일이냐”


“저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서 말하라”


“저하 그것이,”


잠깐이지만 나에게 우익위의 눈빛이 닿았다.


“차마 여기선...”


“저하, 신첩은 처소에 가 있겠습니다”


“아니 어찌,”


“신첩 염려 마시고 정무에 힘쓰소서”


분명 위급한 일이었다.
아주 다급한 일임이 분명했다.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대체.......”


분명 경춘전으로 향하는 길이었지만
정신은 온통 다른 데에 가있었다.
방금 입궐하신 저하께
혹 또 다른 변고가 생긴 것은 아닌가,
그 변고가 또 다시 저하를 아프게 한다면...


“마마!!”


“무슨 일이냐!”


한참을 멈춰 서 골똘히 생각하던 내 앞에 설란이가 나타났다.
이마가 땀으로 흥건한 것을 보아
꽤 멀리서부터 뛰어온 것이 분명했다.


“마마!! 하아, 하아-”


“무슨 일이길래 그리 급히 뛰어오는 게야”


“하아... 우상대감께서!!”


“대감이 왜”


“하루 전 날 귀양을 가셨다 하옵니다!”


“뭐라?”


“또한 이조참판께서도 관직을 박탈당하셨다 하옵니다!!”


“무, 무슨...”


“마마!!”


털썩,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뒤따르던 궁인들이 몰려들어 부축하기 바빴지만 일어날 수 없었다.
일어날 힘도, 의지도 없었다.


우상 조진호 대감과 이조참판 이중성 대감은
세자저하의 유일한 측근이자 버팀목과도 같았다.
그 분들이 있기에 저하께선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고,
전하와의 연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다 틀린 일이었다.
이제 그들은 궁에 없었다.


또 다시 홀로 버려진 세자저하셨다.




.
.




그 날, 저하께선 나에게 들르지 않으셨다.
나 또한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알 수 있었다. 저하의 심중을..
분명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셨을 것이다
또 다시 깊은 고독에 빠지셨을 것이다.
자책하고 또 원망하셨을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소상히 말해주세요’


‘마마 그것이…’


‘우익위, 부탁입니다.
저하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셔야 합니다’


‘…….’


‘혹, 제 아버님입니까?’


‘마마,’


‘제 아버님이 저하를 어지럽히는 것입니까?’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


‘영의정 대감께서 직접 전하께 고하였다 하옵니다’


‘진정...’


‘저하의 곁을 물리치라, 그리 전하였다 하옵니다’


‘아버님이 그리 말씀 하셨단 말입니까’


‘예, 마마’



그 원망의 끝엔 어쩜 내가 있을 것이었다.
증오하는 자의 자식이 예쁠 리 없을 터,
원망의 화살이 나에게 온다 해도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나였다.



“마마, 영의정 대감 드셨사옵니다”


“드시라 해라”


스륵, 소리가 들리고 조용한 발걸음이 내 앞에 닿았다.


“마마, 그간 잘 계셨사옵니까”


참, 예전엔 그리웠던 목소리였다.
외롭고 지칠 때마다 듣고 싶었던 인자한 목소리..
하나 밖에 없는 아비의 소리렷다.


“제 서찰은 아마 읽지도 않고 태워 버리셨나 봅니다.”


“읽어 보았습니다.
곱씹고 또 곱씹어 보기도 했습니다”


“헌데 어찌,”


“마마, 오해마소서.
소인이 우상과 이조참판을 물리친 것은
다 세자저하를 위함이었나이다”


“…….”


“새로이 시작하시려는 저하 곁에
옛 신하가 있어봤자 무슨 소용 있겠사옵니까?
새 인물과 함께 하심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하, 새 인물이라.......”


기가차고 어이가 없어 찢어진 눈을 하고 아버님을 쳐다봤다.


“누가 새 인물입니까.
자리에 임명된 김택현, 박수의가 새 인물입니까?
영상 대감을 수발들던 이가 새 인물이 되는 것입니까?”


“마마,”


“어찌 불 보듯 뻔한 거짓을 고하는 것입니까.
언제까지나 내가 그냥 넘어갈 거라 여긴 것이겠지요.
구중궁궐에 핀 꽃은 아무 힘이 없을테니까요!
아니 그렇습니까 대감!!!”


“…….”


“어찌... 어찌하여 자꾸
부끄러운 아비가 되려는 것입니까!!!!”


아버님이 나의 외침에 고개를 드셨다.
그리곤 아무 표정 없이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하셨다.
마치 나의 외침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아무 동요 없이 나를 쳐다보셨다.


“진정, 제 뜻을 반(反)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러하옵니다”


“…….”


“귀하디 귀한 딸을 살리려는 아비의 마음을
 부디 헤아려 주시길 바랄 뿐이옵니다”


“아버님이 그리 하신다면,”


“…….”


“이 자리에서 끊지요. 아비와 자식의 연 말입니다”


“마, 마마!!”


“귀한 딸과의 연을 말입니다 대감!!!”


“어찌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분명 말씀 드렸습니다.
이제 이곳 경춘전까지 오실 일 없으십니다.
저 또한 친정에 아무 기별 하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고 돌아가십시오.”


“…….”


“대감과 장차 이 나라 국왕이 되실 세자저하께서는
이제 명백한 군신의 관계가 되었으니
더 이상 장인의 이름으로 찾지 말아주십시오.
원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정녕, 아비를 버리시려이까”


“먼저 자식을 버린 건 대감이 아니십니까?”


“....우리 가문을 모른 체 하겠다는 말씀이시겠지요”


주먹을 꽉 쥐었다.
잠깐이지만 눈앞에 유년 시절의 기억들이 스쳐갔다.


“이야긴 다 끝났으니 나가 보시지요”


“눈이 먼 장님과 다름없구나”


“…….”


“한낱 정(情)에 눈이 멀어 제 스스로 늪에 빠지다니.......
내 너를 이리 키우지 않았거늘”


“나가시라 일렀습니다”


“이 일이 전하의 귀에 들어갈 시엔
너 또한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저하 내외 모두에게 등을 돌리실지도 모르겠구나.”


“…….”


“어리석다. 참으로 어리석어”


대감의 모진 눈길이 나에게 닿았다.
불효막심한 어리석은 자식에 대한 원망 섞인 눈길이었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대감을 밖으로 뫼시도록 하라”


“예, 마마”


“또한 채비를 하거라,
내 지금 당장 전하를 뵈러 갈 것이야”


“예-”


전하께 직접 말씀드리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대감의 입을 통해봤자
더 큰 오해만 생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문전에서 걸음을 멈춘 대감이 뒤를 돌아봤다.


“안녕히 계십시오, 마마”



스르륵-



나에겐 이제 저하와 원손뿐이었다.
친정도, 조정의 대신도, 그 누구도 나의 편에 서있지 않았다.
오직 세자저하와 현이, 이 둘만이 있을 뿐이었다.


내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저하를 위로해드리는 것만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걸까?
내가 전하께 직접 간청드린다면
마음이 달라지시지 않을까.


“마마”


“그래”


“채비를 마쳤나이다”


“알았다”


“헌데 마마,”


“왜 그러느냐”


“세자저하께서.......”


“저하께서 왜”


“그, 그것이.......”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자꾸 뜸을 들이는 설란이를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니
곧 더듬거리며 입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어젯밤... 궁을 나가셨다 하옵니다”


“…….”


“또한 기생집에 출입하시어 밤새 술을 드셨다 하옵니다”





*








“동궁의 출궁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


“…….”


“어찌 대답이 없느냐!!!”


“알고 있었사옵니다”


“허면, 기생집에 드나들었다는 것도 다 알고 있으렸다?”


“…….”


“또 답이 없구나!!!”


“알고... 있었사옵니다”


설란이의 말을 듣고도 곧장 희정당에 왔다.
분명 전하가 계신 이곳까진 전해지지 않았을 거라
확신하고, 또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정은 달랐다.
그 누구보다도 상세히 알고 계셨다.


“온양에 가기 전 네가 뭐라 하였느냐”


“…….”


“답하라”


“송구하옵니다 전하,
허나 저하께선 어젯밤 심히 마음의 혼란을 겪으시어...”


“무슨 혼란을 겪었단 말이냐!!!”


“우상 대감의 일이옵니다”


“지금 네 말은 우상의 부재 때문에
일국의 세자가 기생들과 희희낙락하였단 것이렷다!!”


“전하, 그것이 아니오라…”


“어서 답하라!! 온양에 가기 전 나에게 뭐라 말했느냐.
네가 그 자리에서 과인을 쳐다보며 무슨 말을 뱉었었냐 이 말이다!!!”


“전하, 부디 세자저하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어서 바른대로 답하라!!!!!”


전하의 진노에 옴짝달싹 못한 채 벌벌 떨고만 있던 그 순간


“전하, 세자저하 드셨사옵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들이지 말라!!”


밖을 지키던 상선의 소리가 들려 왔고 곧이어,



스륵- 탁,



전하의 불호령에도 개의치 않고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오신 저하의 모습이 내 눈에 가득 찼다.


“전하, 소자가 잘못하였나이다.
남은 추궁은 저에게 하시고 빈궁은 그만 보내주시옵소서”


“감히 예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는 것이냐!!!”


“죄는 소자가 지었으니
아무 뜻 없는 빈궁은 돌려 보내주시길 간청드리옵나이다”


“이 놈, 입만 살았구나!!!”


두 눈을 꾹 감았다.
제발, 더 이상 전하의 노여움을 받지 않길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저하께선 요지부동이셨다.


“빈궁은 어서 경춘전으로 돌아가시오”


“저하…”


“어서 돌아가라 일렀소!!!”


“감히 네 놈이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전하, 소자를 벌하소서!!!”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당장 동궁을 끌고 나가라!!!”


“전하!!!”


전하의 명에 밖에 있던 내관들이 들어와
저하를 밖으로 잡아끌기 시작했다.


“저, 저하...!! 이 무슨 짓들이란 말이냐!!
세자 저하시다!!! 어서 놓지 못할까!!!”


“이거 놔라!!! 전하!!! 소자를 추궁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제발 저하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시끄럽다!!!”


끌려 나가시는 저하를 쳐다봤다.
참으로 처량하고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일국의 세자가 보일 모습 또한 전혀 아니었다.


“네 말대로 세자를 믿고 기다렸다.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며 긴 시간 외로이 보내 왔다.
허나 궁에 들어온 지 하루만에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누구냐!
세자가 아니냐!!!!”


“전하.. 제발 저하의 심중을 한 번만...”


“얼마나 더 자식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단 말이냐!!!
또 기회를 달란 말이냐!!”


“궁에 들어오자마자 우상 대감과 이조참판의
귀양 소식을 들었나이다.
그 분들은 세자 저하를 지척에서 도와주시던 분들이 아니옵니까!”


“오호라, 네 말인 즉 세자가 당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제 편의 충신들을 잃었다는 뜻이렷다!!”


“전하!! 어찌!!”


저하의 외침 소리는 점점 희미해졌고,
전하와 마주하고 있는 이곳의 공기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텁텁해져갔다.


“이것이 네가 말한 새 것이냐?
세자가 진정 변했다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저하께선, 궁 밖에 나와 계신 내내
백성들과 직접 이야기도 나누시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며
진정한 군주가 되는 법에 대해
밤낮으로 고민, 또 고민 하셨사옵니다.
이 나라의 안위만을 걱정하시고 또한,”


“무엇이냐”


“아버님을 그리워하셨사옵니다.”


“하, 하하! 하하하하!!!!”


전하의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고,
난 또 다시 잔뜩 움츠려야했다.


전하의 파안대소는 진정한 그것이 아니었다.


“나를 그리워했다 하였느냐?”


“예, 전하. 그러하옵니다”


“세자를 생각하는 너의 마음이
참으로 갸륵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


“거짓이라도 고해 세자를 감싸겠다는 것 아니냐”


“아니옵니다 전하!!”


“내 속으로 세자를 낳았다.
세자의 얼굴만 봐도 그 속을 알 수 있단 뜻이다.
어제 오랜만에 마주 본 세자의 얼굴을 내 잊을 수가 없더구나”


“전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한심하고 나태할 뿐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


“…….”


“세자빈”


“…….”


“지금 과인에게 소릴 지른 것이냐?”


“저, 전하, 그것이 아니오라...”


“과인이 너를 예뻐한 건
영상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네가 그 은혜를 모르고 이리 방자한 태도를 보인다면,”


냉담하다 못해 서늘한 전하의 눈빛이
나를, 내 심장을 관통했다.


“더 이상 너의 안위를 보장하지 않을 것이다”


“전하…”


“나가보거라”


“신첩이, 신첩을...”


“…….”


우물쭈물, 어디 눈 둘 곳 하나 찾지 못하다가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괘씸한 것”





간신히 기둥을 붙잡고 섰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기둥을 꽉 붙잡으며 두 눈을 감았다.


“마마!!”


“괜찮다”


“낯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식은땀도 나시고...”


“괜찮으니 놓아라”


“하지만 마마,”


“놔라”


순간, 내 곁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물러나라”


“저하, 괜찮으십니까”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시는 저하를 뵈니
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물러나라 하지 않았느냐!!!”


저하의 호통에 뒤로 물러난 나인들.
그 사이, 휘청거리며 쓰러지려는 날
저하께서 재빨리 붙잡으셨다.


“괜찮소 빈궁”


“예, 저하”


“걸을 수 있겠소”


“예…”


한 발짝, 두 발짝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도, 저하도, 모든 궁인들도 숨죽인 채 줄곧 걷기만 했다.


“왜 아무 말이 없소”


“…….”


“어젯밤 어딜 다녀왔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물어봐야 맞지 않소”


“저하의 상심이 더 염려될 뿐이옵니다”


“…….”


“저를, 제 아비를 원망하셔도
저는 아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그저 저하 곁에서...”


“됐소”


“…….”


“어젯밤 기방엘 갔었소.
우익위의 만류에도 거나하게 취했었지.
그래야 살 것 같았소”


귓가에 울리는 저하의 음성에서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소.
이 넓은 궁 안에 내 몸 하나
기댈 곳 없는 처절한 외로움 말이오”


“저하…”


“세자 체면이 말이 아니지 않소?”


“…….”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말이오”


“저하께선 혼자가 아니십니다”


“…….”


“제가 있습니다. 저하의 하나뿐인 원손도 있습니다”


“모든 게 내 탓이오”


“저하,”


“내가 전하의 명만 잘 따랐다면,
그저 흘러가는 대로 놔뒀다면 그대가 울 일도 없었을 것이오.
나 또한 편히 지냈겠지”


“…….”


“허나 어쩌겠소, 난 저들이 싫소.
매 순간 군림하려 드는 저들의 뻔뻔한 모양새가 싫소.
노장이니 소장이니 당색에 맞춰 잇속만 챙기는 저들이!!!!
나는 죽기보다 싫소”


저하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목청껏 지르시던 외침은
조용한 궁에 메아리가 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근데 빈궁, 사실은 말이오.
어젯밤 내 너무 무섭고 두려워 눈물을 보였소.
내가 혹, 빈을... 그대를...”


“…….”


“아니, 어쩌면 그대도 나를...”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저하.
저하께서 저를 밀어내실 일도,
제가 저하를 밀어낼 일도 절대 없습니다 저하”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날이 오면 그 땐 어쩐단 말이오”


“제가 저하를 믿을 것입니다”


저하께서 말씀을 잊지 못하고 날 끌어안으셨다.
크게 흐느끼진 않으셨으나 분명한 떨림이 있었다.
서로가 느낄 수 있는 그런 떨림이었다.





*





“이 늦은 시각에 어인 행차십니까”


“…….”


“들어오시지요”


세자가 궁을 나선 것은 자시(子時) 쯤이었다.
세자는 어렵게 잠든 빈의 곁을 지키다
곧바로 궁을 빠져나왔다.
우익위와 함께 말을 타고 달리는
그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비장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처가, 영의정의 집이었다.


“궁 안팎으로 보는 눈이 많습니다.
잦은 출궁은 화를 부를 것입니다”


“이곳이 기생집이 아닌 이상 화를 입을 일은 없을 겁니다”


“전하께서 크게 노하셨다 들었습니다”


“다 못난 제 탓입니다. 역정을 내시는 게 당연하지요”


세자가 살짝 고갤 숙였다.
아까의 기억이 났는지 눈을 꾹 감은 채 얼굴을 찌푸렸다.


“저하”


“…….”


“소신을 찾아오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옅은 미소를 짓는 세자


“나는 장인이 좋습니다.
어려서부터 인자한 모습이셨지요”


“…….”


“어쩌면 전하보다 장인께서
저를 더 안아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비와 진배 없으셨습니다”


“저하, 어찌.......”


“지금은, 그때의 그분이 참으로 그립습니다”


“…….”


“내 뒤를 든든히 지켜주시던 그때의 장인이 그립습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저하”


“…….”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사리가 밝아
어떤 사안이든 명확하게 짚던 그때의 저하가 그립습니다”


“변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변하셔야 합니다”


“…….”


“변하셔야 합니다 저하.
세상이 변하라 하면 변해야 합니다.
뼛속까지 변하지 못하더라도 변한 척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요즘 세상입니다.
요즘 세상의 이치입니다 저하”


“그 말은 즉, 노장이 세상의 이치란 말씀이십니까”


“…….”


“이 나라가 언제부터 노장의 이치로 돌아갔단 말입니까”


“전하께선 이미 그리 하고 계십니다”


“…….”


세자의 불끈 쥔 주먹이 떨려왔다.


“내 잠시 잊고 있었나 봅니다.
장인께서 노장의 수장인 것을”


“세자빈마마께서 오늘 저와의 연을 끊으셨습니다”


“....무, 무슨...”


“우상과 이조참판의 일로 화를 내셨지요.
그리곤 저와의 연을 끊으셨습니다”


“빈이...”


“저하를 끔찍이 여기는가 봅니다. 낳아준 부모를 버릴 만큼”


“…….”


“허나 이 모든 것이 저하와
세자빈 마마를 위한 것이었음을
저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하를 시험대에 올려놓으신
전하의 심중을 파악하셨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제게
노장의 개가 되라 이르신 적이 없습니다”


“모른 체 하시는 것이겠지요”


“…….”


“지금 저의 손을 잡지 않으면
세자저하 뿐만 아니라
세자빈마마, 더 나아가 원손마마까지
위험해지실 수 있습니다”


“지금 나를 겁박하는 것입니까”


“전하의 심중이 그러하옵니다”


“전하께서 손자까지 내치실 분으로
보이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지 않길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입니다”


“…….”


“그러니 저하께서도 전하의 뜻을 받드시옵소서”


“하.......”


“저하만 뜻을 함께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정녕 아비로서 빈궁의 편에 설 마음은 없으십니까”


“반대편에 서더라도
자식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뭐든 하는 것이
 모든 부모의 심정일 것입니다”


세자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말없이 일어나 뒤돌아섰다.


“빈과 원손은 끝까지 지켜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둘은 장인께서 꼭 지켜주세요”





*





“송구하옵니다 저하”


“.......”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까”


“그러하옵니다 마마”


“상선”


“예 저하”


“전하께 지난 밤 영의정 대감과 긴 이야길 나눴다 전해 주시오”


“예?”


“또한 전하의 심중을 깨달았으니
앞으로 정무에 힘을 보태어 드리겠다,
이리 전해 주시오”


“저하...”


“예 저하”


희정당 앞에서 상선에게 가로 막힌 저하께서는
처음 듣는 이야길 꺼내셨다.


“오늘은 이만 갑시다 빈궁”


“…….”


“아마 내일부턴 전하를 뵐 수 있을 것이오”


“저하, 방금 영의정 대감이라 하셨습니까”


“…….”


“대감을 만나셨습니까?”


“빈궁, 함께 원손을 보러 가시겠소”


“저하”


자리에 멈춰 저하의 용포자락을 붙잡았다.


“대감을 만나셨습니까”


그러자 옅게 웃으며 답 하셨다


“잠시 나눈 담소일 뿐이오”


“어찌 저에게 말씀도 없이...”


“자시가 넘은 시각이었소.
너무 늦어 빈에게 알릴 수 없었던 것뿐이오”


“허나,”


“아무 염려 마시오”


아무 염려 말라 하는 저하의 표정이 참으로 슬펐다.
웃고 있는 얼굴에서 슬픔이 묻어나왔다.
서러움과 쓸쓸함, 괴로움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그래서 더 여쭤볼 수 없었다.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하에게 지난밤은 그 어떤 날보다도 고통스러웠을 것이었다.


“내가 장인께는 잘 말씀드렸소.
부모 자식의 연은 그리 쉽게 끊는 것이 아니오 빈궁”


“저하”


“큰 깨달음을 얻었소.
나의 선택이 모두의 행복을 결정한다는 것을”


또 다시 슬픈 표정을 지으셨다.
저하의 속내를 읽은 나 또한 침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입술을 꾹 깨물며 눈물을 참아보았다.


“아프지 않소”


그러자 내 입술을 어루만져주셨다.
여전히 따스한 손길로


“굳이 나 때문에 부모와 연을 끊을 필요는 없소.
빈을 불효자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눈곱 만큼도 없다는 뜻이오. 아시겠소”


“허나 그리하지 않으면
저하 곁에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째서”


“저하를 괴롭히는 자의 여식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빈이기도 하지”


“…….”


“내 그제 밤은 사리분별을 하지 못해
불안감에 떨어야만 했소.
떠나간 사람과, 떠나갈 사람들을 떠올리며 한탄했지.
그 중엔 빈도 있었소.
그래서 더 참을 수 없었고”


“…….”


“하지만 빈의 마음을 알게 된 이상
다 괜한 염려였단 생각이 든다오.
미안한 마음도 들고...”


“허나 제 아비는 저하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계속 쥐고 흔들 것이 분명합니다”


“그대가 날 위해 포기 했듯
나도 그댈 위해 포기할 때가 온 것뿐이오”


“그러지 마세요 저하”


“…….”


“저 때문에 부러 괴로운 일에 나서지 마세요”


우린 서로를 위한 선택을 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해 포기했다.
그 결과 우린 또 다시 불행 앞에 나앉게 됐다.


“내 약속하지 않았느냐.
너와 현이를 위해서라도 노력하겠다고”


“버텨보려 한다 ㅇㅇ아”
이 말을 끝으로 걸음을 옮기시는 저하.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나도 따라 걸음을 뗐다.





*





그날 이후, 궐내 분위기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저하께서는 전하와 소원했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셨고, 나 또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루는 저하께서 아버님을 불러
지난날의 회포를 풀기도 하셨다.
나는 여전히 아버님께 경계심을 풀지 못했으나
어머니 품에 안겨 한없이 눈물을 쏟아내곤 했다.


현이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고
노론의 손을 잡은 저하께서는
그들과 자주 자리를 가지며 하루하루 보내셨다.


하지만 난 느낄 수 있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저하의 마음을.
어딘가 묶어 놓지 못한 저하의 고뇌를...




.
.
.




삼년 후




“그거 알아? 전하께서 세자저하를 또 혼내셨대”


“또? 이번엔 무슨 일인데?”


“뭐 또 시답잖은 일이었겠지.
왜 저번에는 저하께서 병기 구축을 명하자
전하께서 노발대발 하셨잖아. 국고 낭비라고”


“하긴....... 저하는? 괜찮으셔?”


“괜찮으시긴! 온 몸을 벌벌 떨면서 도망치듯 뛰어 나오셨대”


“이를 어째...”


“빈궁마마랑 계실 땐 그래도 좀 나아지시던데...”


“그러게.......”


“네 이년들!!!!”


머리도 식힐 겸 홀로 걷던 중
담벼락 뒤에서 들리는 나인들의 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그들의 대화를 엿듣다가 김상궁에게 들키고 말았다.


“마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예가 어디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게야!!”


“됐습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소인은 그저...”


“됐다. 가보거라”


“허나 마마,”


“나쁜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보내줘도 됩니다”


눈치를 보던 나인들이 꾸벅 인사를 하곤 뒤돌아 뛰어갔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다 잊어버리세요.
밑에 것들이 떠들던 이야기입니다”


“틀린 얘기 하나 없더이다”


“마마”


“저하께서 밤마다 악몽을 꾸십니다.
매일 잘못했다, 살려 달라 외치며 눈물을 보이십니다.
저하가 매신 짐이 참으로 무거운 것이겠지요”


“…….”


“그런 저하 곁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물을 닦아드리는 것밖엔 없습니다.
무능하고, 또 무능한 여인네일 뿐”


“그렇지 않습니다 마마”


그것 뿐 만이 아닙니다.
어느 날은 달라진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시더이다.
가까이 다가가도 멀리 떨어지시고는
다가오지 말라.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다음날 여쭤보니 기억을 못하셨지요.


그런 날이 몇 번이나 더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없이 다정하시다가도
하루는 나를 벌레 보듯 하셨지요.


.......
미처 하지 못한 말을 가슴에 묻고 담을 돌아 나섰다.
그리곤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얼른 훔쳐냈다.


그런데 그 때,


“마, 마마!”


“저기...”


저 멀리 흑색 용포를 휘날리며
바삐 걸음을 옮기시는 저하가 눈에 들어왔다.


“저하께서 지금...”


“선정전으로 향하시나 봅니다”


“대체 무슨...”


심장이 떨려왔다.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저하께서 크게 혼나시는 건 아닌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가봐야겠어요”


“마마!”


김상궁이 막아서기 전에
저하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
.







“아니 되옵니다 전하!!!!!”


“어찌 자식을 떼어 놓으려 하십니까!!”


“현이는 하나밖에 없는 제 아들입니다.
지척에 부모를 두고 어찌 나인들 손에 맡긴단 말입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저하의 외침이 내 귓가를 때렸다.



“너에게 원손을 맡길 순 없다!!”


“현이는 아직 어린 아이일 뿐입니다. 지금은 그저......”


“듣기 싫다!!! 내 원손은 꼭
자질을 갖춘 이 나라의 군주로 키울 것이다!!!”




“마마...”


“현이를, 현이가...”




“현이에게 고통을 안길 순 없습니다”


“뭐라?”


“이 나라 군주의 자질이 책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릇 군주는 백성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했습니다.
백성의 뜻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바깥 세상에 귀를 기울이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히 네 놈이...!!!!”


“책만 고집하는 조정 신하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백성의 뜻을 단 한번이라도 받든 적이 있었나이까!!”


“이 놈!!!!!!”



쨍그랑-




“저, 저하...!!!!!”


“마마!”


상궁들이 나의 앞을 막아섰다.
당장 들어가 저하를 도와야 하는데
이들은 내 안위만을 걱정하며 말리기만 했다.


“과인이 왜 네게서 현이를 떨어트리려는지 아느냐”


“너같은 세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너같이 학문에 뜻을 두지 않고 바깥에만 나돌며,
아비 앞에서도 벌벌 떠는
계집 같은 놈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영상의 말이 틀리지 않았구나.
너는 군주의 자격이 없다”




털썩, 주저앉았다.
사방에서 나를 부축하며 눈물을 보였다.


“마마, 처소로 드시지요”


“…….”


“뭣들 하느냐! 어서 마마를 뫼시지 않고”


“놓아라. 저하를 기다릴 것이다”


“이러다 마마께서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나는 괜찮다, 나는.....”


뿌옇게 흐려지는 눈앞을 닦아내자
이마에 상흔을 입어 피를 철철 흘리시는 저하가 눈에 들어왔다.


“저, 저하...”


넋이 나간 채 박 내관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내려오시는 저하.


걱정되는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저하께선 그저 내 앞을 말없이 지나치실 뿐이었다.


“저하…….”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겁에 질린 표정도 아니요, 화가 난 얼굴도 아니었다.
고통스러운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니었다.
정말 처음 보는 표정이었기에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서 마마를 뫼시거라”


“예”


나 또한 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처소로 돌아갔고, 곧 정신을 잃었다.






“마마! 정신이 드십니까?”


“설란아”


“예”


“저하께서는”


“의관이 곁을 지키고 있사옵니다”


“상흔은 어찌 되었다 하더냐”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으셨다 하옵니다”


“현이, 우리 현이는”


“…….”


“묻지 않느냐”


“저승전으로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


“열흘 뒤에는 마마의 세손책봉식이 열린다 하옵니다”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았다.


“현이의 모습을 보았느냐”


“그것이...”


“나를 찾진 않더냐”


“마마를 애타게 찾으셨습니다”


“그래... 그랬구나”


“마마.......”


감은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누군가를 원망할 여력도 없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이렇게 눈만 감을 수 있다면..


“알았으니 나가보아라”


“마마...”


반대편으로 고갤 돌렸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누워계신 저하도, 진노하신 전하도.
그저 외로워하고 있을 현이만 떠올랐다.


“못난 어미를 만났구나...”


자식 하나 지키지 못하는 어미가 다 무슨 소용이랴.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궁에 발을 들인 과거의 그 날을 떠올렸다.
깊은 후회와 함께...



“저하!!!!”


“비켜라!!!!!!”


“꺅!!!”



드르륵 탁!!!



“저, 저하...”


“아비를 불러라”


순간이었다.
저하께서 피묻은 칼을 들고 내 방에 들어오신 건


“저하!! 이러시면 아니..”



쉬이익-



“윽.....”


“저하!!!!!!!”


“비키라 하였다”


“설란아, 설란아!!
정신 차려 보거라!!!! 설란아!!”


눈앞에서 설란이가 칼에 맞아 쓰러졌다.
설란이의 피가 저하의 얼굴에 흩뿌려졌고,
난 쓰러진 설란이를 붙잡고 눈물만 쏟아낼 뿐이었다.


“당장 아비를 불러라”


“저, 저하... 어찌.”


“죽일 것이다”


저하의 눈을 봤다.
전에 알던 눈이 아니었다.
또 다시 처음 보는 눈을 보이셨다.


“저하 고정하시옵소서!!”


“네 아비를 죽여 이 나라 조선의
법도와 기강을 다시 세울 것이다.
감히 신하 따위가!!! 일국의 세자에게
왕의 자격을 운운하는 시건방진 태도를 죽여 없앨 것이다”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제발, 제발 신첩을 봐서라도 고정하시옵소서..!!”


“너는 그 놈의 자식이 아니냐”


“…….”


“내가 왜 너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


“저하”


“이제 보니 너도 그놈과 한 통 속이렷다”


“저하!!!”


“내 너부터 베어야 네 아비가 달려올까 싶구나”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가까이 다가오시는 저하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리고 저하께서 칼을 드는 순간,



챙-



“저하!!!”


우익위가 나타나 저하를 막아냈다.


“고정하시옵소서!! 빈궁마마이십니다!”


“우익위 네 이놈!!!!!!”


저하의 외침과 함께 칼부림이 시작됐다.
챙-챙- 사방에서 들리는 칼 소리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손에 힘을 잃은 설란이를 붙잡고
그저 이 모든 것이 끝나길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밖에 누구 없느냐!!
어서 빈궁마마를 모시고 나가거라!!”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다 베어버릴 것이다”


“저하,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네 놈이 겨눈 칼에 찔려 죽으랴”


“허면 빈궁마마를 찔러 죽이시겠습니까!!!”


“…….”


“저하께서 그토록 아끼시는 빈궁마마 아니십니까!!
훗날 이 일을 어찌 감당하시려고 이러십니까”


“악!!!!!!!!!!!!”


챙-챙- 또 다시 이어진 칼부림.
저하와 우익위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싸움은



퍽-



칼을 놓친 우익위가
칼집으로 저하를 쓰러트리며 끝이 났다.


“저하.......”


저하께선 눈을 감은 채 바닥에 쓰러져계셨다.


“저하.... 저하.......”


“밖에 누구 없느냐!!
저하를 방으로 뫼시고 의관을 불러오라!!”


“…….”


“마마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우익위”


“예 마마”


“이 일이 대조께 알려지면 안 됩니다”


“…….”


“내관과 나인들에게 입단속을 시켜 주십시오
또한, 또... 우리 설란이를......”


“마마”


“…….”


“제가 다 조치해두겠습니다”


“…….”


“마마께서는 잠시 사가에 머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고개를 들어 우익위를 쳐다봤다.
그의 간곡한 눈빛이
나의 썩어 문드러진 심장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친정이 그리워 잠시 머물겠다 하시면
전하께서도 의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저하께서 안정을 취하신 후에 다시 보심이 마땅한 줄 아룁니다”


“…….”


“원손마마와 함께 가십시오”


“저하를 홀로 둘 순 없습니다”


“제가 잘 보필하겠습니다.
오늘과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약조하겠습니다 마마”


“…….”


“마마의 안위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저하께 눈을 돌렸다.
아까와는 달리 평안한 얼굴이셨다.
옆에 떨어진 칼자루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자한 국본의 모습이셨다.




*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나의 간곡한 청을 들으신 전하께서 현이를 보내주셨고,
덕분에 난 현이의 손을 잡고 사가에 갈 수 있었다.


사가 또한 마냥 편한 것은 아니었다.
꼬일대로 꼬여버린 부녀 사이가 쉬이 풀릴 리는 없었다.
그저 현이의 책 읽는 소리, 웃음소리를 들으며
하루하루 보낼 뿐이었다.


그러다 가끔,


“전하께서는 아직 그 일에 대해 모르시는 듯 하옵니다”


“저하의 병세가 호전되셨다 하니 너무 염려치 마옵소서”


김상궁이 전해주는 저하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
.




“전하”


“무슨 일이냐”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가 상소를 올렸습니다”


“오늘은 좀 쉬어야겠구나.
날이 밝는대로 읽어볼 터이니 놔둬라”


“허나 내용이......”


“내용?”


“세자저하와 관련돼 있습니다”


“세자라면 듣기도 싫으니 치우라”


“허나 지, 직접 보시는 것이...”


“치우라 하지 않느냐”


상선이 당황한 얼굴로 급히 상소를 치웠다.
그 모습을 눈여겨보던 주상,


“가만”


“…….”


“이리 가져오라”


근엄한 목소리로 상선을 다시 부른다.


“저, 전하”


“가져오라”


벌벌 떨리는 손으로 주상에게 상소를 바치는 상선.


상소를 읽어 내려가던 주상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시뻘건 얼굴을 한 그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이 자를 당장 내 앞에 데려오라!!!!”





*





사가에 머무는 마지막 밤.


컴컴한 밤하늘에 새초롬한 달이 떴다.
도도한 양 아무 말 없는 달은
그저 나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하아.”


방 안에 누워있는 아이는
어미의 빈자리도 느끼지 못할 만큼 폭 잠들어있었고,
그 옆을 지켜야 마땅한 어미는 이렇게 밖에 나와
구중궁궐에 계신 임을 그리워하던 찰나.



휘릭. 훅.



“거, 거기 뉘시오!”


시커먼 무언가가 높은 담벼락을 넘어
주변을 살피는 모습을 보게 됐다.


“누, 누구냐!!  누군데 담을 넘.......”


“ㅇㅇ아”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시커먼 그림자를 두려워하던 것도 잠시,
너무나도 익숙한 그 목소리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옆에 있는 기둥을 부여잡고 말았다.


“ㅇㅇ아, ㅇㅇ아”


아-.
하마터면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할 뻔 하였다.
대체 얼마 만에 듣는 임의 목소리란 말인가.


“대답을 해 보거라. 어서. 어서!”


코앞까지 오신 임께서는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내 얼굴을 마주잡으신 채
나의 대답을 재촉하셨다.


“흐읍... 저...하.......”


“그래 ㅇㅇ아. 나다. 내가 널 보러 왔다.”


나의 하나 뿐인 임.
이 나라의 지아비가 되실, 세자 저하였다.


“어찌, 어찌 여기까지.......”


“얼마나 네 이름을 부르고 싶었는지 아느냐”


그리움의 양이 짐작 될 정도로 날 꽉 껴안으신 저하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시며,


“네 품이 그리워 잠도 한 숨 들지 못하였다.
너의 목소리가 그리워 정신도 놓치기 일쑤였다.
네가 눈앞에서 사라지니
세상을 잃은 것만큼 아프더구나.
어찌,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못다한 말을 이어하셨다.


“신첩도 그리하였습니다 저하.
옥체는 강령하신지,
홀로 외로이 계시는 것은 아닌지,
저하 걱정만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사옵니다.
....... 송구하옵니다 저하.
제가 옆에서 보살펴 드렸어야 했는데....”


“아니다, 아니야
널 붙잡지 못한 나의 불찰이다.
널 그리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내 잠시 실성을 하여 너를 이리 보내었구나. 다 내 탓이다.”


“흐윽.... 저하.......”


“어디, 얼굴 좀 보자.
우리 빈궁, 우리 세자빈.어찌 이리 쇠약해졌는고.
창백해진 얼굴이 날 더 침통케 하는구나”


“저하는 어떠십니까. 끼니는 거르지 않으셨는지요.
옥체 미령한 곳은 없으시옵니까?”


“너만 아프지 않는다면, 나 또한 아프지 않다.
그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
너만 괜찮다면, 이리 강령히 살아만 있어 준다면…….”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낀 따사로움이었다.






“내일이면 입궁할 참이었습니다”


“그래”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돌아갈 걸 그랬습니다”


“…….”


“저하께서 이리 늦은 시각에 나오지 않으셔도 됐을 터인데...”


“…….”


“신첩이 그리 그리우셨던 겝니까?”


“그래. 그랬다”


활짝 웃으며 짓궂은 농을 던졌다.
하지만 저하께선 잠든 현이 이마에 올린 손길을 천천히 거두셨다.


“하늘이에게 다 들었다.
나는 오로지 너의 겁먹은 얼굴만 기억나더구나”


“예?”


“그 날 말이다.
내 너에게... 칼을 들이 대었다지”


“저하.......”


“하늘이가 아니었음 그날 나는 너를... 정녕 너를,”


“…….”


“잃었을 것이다.
너를 잃고 평생을 후회하며 살았겠지.
후회가 무엇이냐. 어쩌면 너 없는 세상을 한탄하며
부질없는 목숨 따위 버렸을 것이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하”


“현이에게도 미안하구나.
내 아들에게 몹쓸 짓을 할 뻔했다”


“당시 저하께선 아프셨습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저하”


“미안하다.
너를 지켜준다 약조하였거늘
되려 내 손으로 해칠뻔 하지 않았느냐”


“저하.......”


저하께서 고갤 숙이셨다.


안쓰러운 그 모습에 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어찌, 어찌 이리 작아지시는지.


“약조도 못 지키는 지아비가
무슨 소용이겠느냐. 면목이 없구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하께선 최선을 다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하의 말씀이 맞다. 현이는 나처럼 되어선 안 돼”


“저하!”


“약해빠진 나를 닮아선 안 된다.
돌이켜보니 그렇더구나.
내 이리, 미쳐버리지 않았느냐”


“…….”


“헌데 ㅇㅇ아
나는 현이에게 좀 더 좋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책에만 있는 이상이 아닌,
논메는 농사꾼의 이야기를 알려주고 싶었어.
저자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사정을 들려주고 싶었다.
그것이 진정한 군주의 역할이라 여겼다”


“…….”


“세상은 순탄치 않고,
나의 선택 또한 자유롭지 못했으나
현이 만큼은... 우리 현이 만큼은
좀 더 나은 세상과 만나길 바랐다”


“그리 하십시오 저하.
현이도 그런 세상과 마주하길 바랄 것입니다”


“후에 말이다, 후에”


“…….”


“현이가 왕이 되거든 꼭 물어 보아라”


“…….”


“아비가 바라던 세상,
아비가 꿈꾸던 세상은 어떠한지.
살아봄직 한지 아니면 정녕 내가 틀린 것인지
꼭, 꼭 물어보거라”


“그것을 어찌 신첩에게 시키시는 것입니까.
후에 저하께서 직접 물어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저하께서 살짝 미소를 보이셨다.


“그냥. 그저 어미가 물으면
조금이나마 더 진심을 담을 것 같아서.
아무렴 날 더 무서워하지 않겠느냐”


분명 저하께서 가벼운 농을 하셨을 뿐인데
왜 눈물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왜 그렇게 서러웠는지 모르겠다.


“이제 가봐야겠다”


“버, 벌써요?”


“네 눈물을 보니 얼른 가야겠단 생각이 드는구나”


“저하...!”


“하하. 내일은 웃는 얼굴로 입궁하거라
오랜만에 너와 후원을 거닐 것이다.
그때도 눈물을 보인다면 진짜 화를 낼 것이니 각오해야 한다”


“예 저하”


빙긋 웃는 나의 뺨을 어루만지시곤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저하.
현이에게 잠시 눈길을 주신 후 걸음을 옮기셨다.


“일찍 오거라. 기다리게 하지 말고”


“예”


“어서 들어가”


고갤 끄덕이곤 빙긋 웃자
저하께서도 따라 웃으시곤 이내 담을 넘으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리는 말발굽 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생애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다.


앞으로 많은 시련이 찾아오겠지만
오늘만 같아라, 오늘만 같아라…


달에게 빌고 또 빌었다.




.
.
.



불인별곡 [작별] 편에서 계속






맨위로
통합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