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그리아 주세요.”


9시 되기 5분 전
바(bar)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았다.
어두운 분위기지만 곳곳에 있는 은은한 조명이
왠지 들뜨게 만드는 것 같았다.


오빠 가게엔 항상 사람이 많았다.
그렇다 할 홍보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모여든 것 보면 ‘사장님 발’이 큰 거라고…
-진욱오빠가 말했다.


실제로 가게 안은 여자들로 북적거렸다.
저기 여자 둘, 저쪽은 여자 셋.
저어어어기엔 아주 무더기로 왔네.


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하나같이 입을 모아 물었다.


“사장님 어디 계세요?”


그럼 직원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안 나오셨습니다.”


라고 대답하곤 했다.


하지만 이미 다 알고 있었겠지?
어느 구석에서 책이나 보고 있었을 오빠를-


“상그리아 나왔습니다”


“감사합ㄴ…”


“이거 마셔”


“헐”


안 보이길래 어디 갔나 했더니 그새 나타난 오빠.
나의 귀중한 ‘상그리아’를 쏙 가져간다.


그리곤 건네는 ‘피치 크러시’


“내 상그리아...”


“어디서 술이야”


“상그리아가 술인가?”


“너한텐 센 술이지. 이거 마셔”


“여기엔 당연히…”


“안 들었어 알콜”


“하아.......”


잔인하다.
누가 음악 들으면서 ‘무알콜’을 마시냐 이 말이야.


“‘미스 루드’만 아니면 여기 안 왔을 거야”


“순순히 보내지 않았겠지 내가”


“무섭다”


“연락 좀 하고 와”


“왜?”


“너 좋아하는 거 만들어놓게”


“상그리아만 있으면 되는데”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옆에 앉으려던 오빠가
잠시 직원과 대화 나누는 사이,


“헤헤”


상그리아를 쪽 빨았다.
크흐- 맛있다



“나 없다고 해”


“이렇게 떡하니 계시는데 어떻게 없다고…”


“VVIP 와서 바쁘다고”


“아…”


직원이 날 위아래로 훑어본다.
나, 나는 VVIP로 온 건 아니지만...


“또 찾으면 내쫓아”


“네?”


“안 그럼 네가 잘려”


“....네”


직원이 입을 삐죽 내밀며 다시 전쟁터로 나간다.
저기 저 언니들 인상 무섭던데... 큰일났군



“누가 마시래”


“어? 아, 헤헤”


빨대 물고 있다 걸렸다.
괜찮아, 많이 마셨으니까


“술 마시지마. 안 돼”


“늬예늬예”


“후… 어지간히 말 안 들어”


“히히. 아, 오늘은 무슨 노래 할거래? 미스 루드?”


“너 좋아하는 거”


“어?”


“직접 들어봐”










S.her.lock

S의 이야기






“역시, 루드는 음악을 알아”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테마곡 ‘Young and Beautiful’을

빈티지로 소화하는 Miss Rude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이자 아티스트다.
매주 일요일 밤을 책임지는 이 가게의 간판 가수.



“밥 먹었어?”


“응. 오빠는?”


“누구랑”


“오빠는 누구랑?”


“뭐 먹었는데”


“오빤 뭐 먹었을까?”


오빠가 픽 웃는다.
내가 남긴 상그리아를 마저 마시는 것도 잊지 않고.


“오빤 항상 그러더라. 내 질문엔 답도 안 해주고”


“내가 언제”


“방금!!”


“나보다 네가 더 중요하니까”


“으유, 하나같이 다들 그 소리야.
삼촌도, 진욱오빠도”


고갤 저으며 무대 위 루드를 쳐다봤다.
매혹적인 눈빛과 몸짓으로 노래하는 그녀는
내가 봐도 참, 매력적이었다.



The crazy days, the city lights

The way you'd play with me like a child



멍하니 노래만 듣고 있는데
어깨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든다.



“가을이야 이제”


아침에 입고 나갔던,
일할 땐 잠시 의자에 걸어뒀던,
다시 입고 집으로 들어갈,


오빠의 자켓이었다.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m no longer young and beautiful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 got nothing but my aching soul



“안 추운데


“추워 보여”


사실은, 집에 두고 온 가디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참이었다.


“오빠는 역시”


“응?”


“날 너무 잘 알아”





또 피식, 아니 이번엔 씨익 웃어 보이는 오빠


“아- 좋다”


“…….”


“오빠, 루드한테 평생 이 노래만 하라고 해”


“왜”


“그냥. 가사가 좋잖아”



I know you will, I know you will

I know that you will

 


오빠가 다시 상그리아를 입에 댄다.
조명과 어우러진 오빠의 옆모습이 꽤나 멋있어 보인다.


“오빠”


“어”


“한 입만”


은 무슨.
나의 간절한 눈빛에도 남은 술을 다 마셔버리다니.


“허.......”


“너 벌써,”


“응?”


“빨개. 얼굴”


“나?”


오빠의 손이 내 얼굴을 감싼다.



“뜨거워”


“왜 뜨겁지? 나 안 취했는데?”


내 양볼에 올라 온 오빠 손 위에 나도 손을 올렸다.


“진짠데.”


“다른 데서 절대 술 마시지마”


“응”


“말 들어”


“응”






오빠가 말없이 날 뚫어져라 쳐다본다.
덕분에 나도 오빠의 두 눈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차가운 눈동자였다.
내 볼에 있는 두 손은 마냥 뜨거운데,
오빠의 눈은 차가웠다.
매서웠고, 날카로웠다.


“오빠”


“어”


“나 늙고 못 생겨져도 지금처럼 좋아해 줄거야?”


“…….”


“가진 거 하나 없어도?”


대답이 없다.
그저 가만히 날 바라볼 뿐.


“…….”


“…….”


Will you still love me?


시간이 멈춘 듯 루드의 노랫소리는
점점 희미해져가고
옅은 조명 속 우리만 남은 기분이 든다.


상처 뿐인 나라도 좋아해 줄거야?



.......



“저기 사장님, 죄송한데…”


순간, 무거운 침묵을 깨는 뜬금없는 목소리.
아까 그 직원이 나타나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대답대신 슬쩍 볼을 놓으며 내 뒤쪽을 보는 오빠.


“손님께서 직접…”



“VVIP가 맞긴 한가보네요?
직접 쓰다듬어주시기도 하고”


직원 뒤에는 웬 여자가 서있었다.
한 눈에 봐도 늘씬한 몸매를 가진 여자는
오빠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오빠는 아랑곳 하지 않고
직원의 얼굴만 쳐다봤다.
‘잘리고 싶어?’라는 표정으로.


“소, 손님께서 사장님이 직접 추천해주신 와인만 드시겠다고…”


“난 또. 뭔 유명인사라도 납셨나 했네”





고개를 살짝 비트는 오빠.
그러면서 지은 저 표정은 뭐랄까, 마치…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막말을 던지던
반장 엄마를 만났을 때의 얼굴이랄까


“사장님…”


직원이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제발 참아달라는 뜻이겠지.
저 여자는 이 가게에 자주 오는 ‘단골’이었으니


“취향이 그 쪽인가 봐요? 어린 애.”


“와인은 나보다 저 직원이 더 잘 아는데”


“사실은,”


“…….”



“와인 핑계로 사장님 얼굴이나 자세히 보려고 했죠.”


“…….”


“그리고, 나도 VVIP 대접 좀 해주면 안 되나?
여기 매출 내가 다 올려주는데”


“용건이 뭡니까”


“나랑 술 한 잔 하자고요”


“싫은데요”


“술맛은 나랑 마셔야 더 날텐데. 저 어린 친구 보단”


“다른 여자한텐 별 관심이 없어서.”


“여자친구 맞아요?”


“…….”



“맞아?”


순간 뜨끔해 뒤돌아보려는데 오빠가 내 어깨를 잡는다.


“맞는데요. 여자친구”


그리곤 내 눈을 보며 답하는 오빠


“엄.......”



“맞아요. 내 여자친구”


슬쩍 입꼬리만 올리며 웃는 모습이 꽤나 매력적이다.


“진짜? 둘이 사귄다고?”


저 질문은 정말 나한테 한 것 같은데…


여전히 오빤 어깨를 놓지 않는다.
그저 여자를 향해 비웃음을 날릴 뿐


“와, 사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능력 있으시네?”


“술맛 떨어지셨을 것 같은데.”


“아… 네, 뭐, 조금?
나이 먹은 거 서러워하려면 또 술이 필요해서요.”


“그럼 양주로 드리죠. 센 걸로”


“아니요, 됐어요.
여기 앉아서 둘이 만져대는 것만 마냥 보고 있을 순 없죠.”


꽤 단호한 말투의 여자.
다음 말이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정말 나갔나보다.
그제서야 오빠가 내 어깨를 놔주며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괜찮아?”


“나? 내가 왜”


“놀랐잖아”


“안 놀랐어. 그냥... 어, 쫌 놀랐어”


“미안”


“오빠 인기가 이렇게 많을 줄 몰랐네”


“없어 그런 거”


“하루에도 몇 번씩 저런 여자들이
오빠한테 막 들이대는 거 아니야?”


“말했잖아. 다른 여자한텐 관심 없다고”


“어?”



“음... 나 저기, 잠깐 주방에 좀”


답지않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오빠.
뭐야,


다 티나-



He's my sun,

he makes me shine like diamonds



너무 티난다고.
숨기려면 잘 좀 해보던가.


나한테만 짓는 미소
나한테만 다정한 말투
나한테만 보여주는 따뜻함


다 안단 말이야.
오빤 하나도 숨기지 못했어.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m no longer young and beautiful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 got nothing but my aching soul



그러니까 오빠, 내가 계속 묻잖아.
내가 더 이상 젊지 않고 예쁘지 않다 하더라도
계속 좋아해줄 수 있냐고.


지금처럼 날 ‘작은 별’이자
‘어린 햇살’로 봐줄 수 있냐고


누구처럼 떠나버릴 거라면,
매일 뒷모습만 보여줄 거면


섣부른 대답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I know that you will



난 지금 오빠의 눈을 믿어.
따뜻한 손길도 믿고, 쑥스러운 입꼬리도 믿어.


하지만 언젠가 차가워질 마음도 믿어.
얼음장 같은 뒷모습도, 굳어질 발걸음도 다 믿어.


그러니 대답은 최대한 늦게 해줬으면 해.
오빠 마음에 확신이 들 때까지, 최대한 느리게


나 또한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






우리 가족은 행복했다.
아니, 행복해 보였다.
엄마와 아빠는 최선을 다했고
나 또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아빠는 엄마를 떠났다.
엄마는 죄가 없었다.
한 가지 있다면 눈치가 없었다는 것.


아빠는 정확히 내가 10살이 되던 해부터
다른 여자와 만남을 가졌다.
엄마를 안아주는 시간은 적어졌지만
외박하는 날은 늘어갔다.


엄마는 그때 알았어야 했다.
아빠 셔츠에서 나던 여자 향수 냄새를,
관심도 없던 하이힐을 유심히 지켜보던 눈빛을.


나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고 알았다.
출근 전 항상 날 안아주던 아빠는
어느 날부터 그냥 지나치기 시작했다.
내가 볼 수 있는 거라곤 아빠의 뒷모습뿐이었다.


아빤 항상 급하게 집을 나섰고 밤늦게 들어왔다.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았지만-



어느 날 아빠는 말했다.
사흘 정도 런던을 떠나 있을 거라고,
그저 ‘출장’일 뿐이라고.
엄마는 실망한 눈치였다.
너무 오래 가는 것 아니냐며 투정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빠는 웃어주었다.
갔다가 바로 오겠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 말에 엄마는 금방 웃음을 되찾았다.


가장 바보 같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아빠가 떠난 지 이틀째 되던 날
엄마는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런던에서 유일하게 알고 지내던 친구가 쓰러졌기 때문이다.


마음이 다급해진 엄마는
아빠에게 전활 걸어 상황을 전했다.
‘병원에 계속 있어야 될 것 같다’며
‘ㅇㅇ이는 옆집에 맡기겠다’고 했다.
아빠는 ‘알았다’며 ‘조심’하라고 했다.


정작 조심해야 할 건 본인이었지만.


나는 왠지 그 집이 불편했다.
내 집 놔두고 굳이 옆집에서 자야 할
이유를 못 느꼈던 것 같다.
결국 난 아줌마가 잠들자마자 우리 집으로 향했다.


당연히 불은 꺼져 있었고
사람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금방 날이 밝을 거라 생각하고 내 방으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고 했다.


그때 난 처음으로 여자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힘에 겨운 아빠의 소리도 들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아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소리만 들으면 꼭,
엄청 무거운 물건을 들기 위해
힘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필이면 안방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엄마가 자던 침대에서
아빠와 다른 여자가 뒹굴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그들은 참 행복해보였다.
특히 아빠는 오랜만에 보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여자의 가슴을 주무르면서.



당장 엄마에게 말하고 싶었다.
‘엄마, 아빠가 다른 여자랑 엄마 침대에서
뒹굴었어요. 내가 봤어요!’라고.


하지만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한다는 말이 고작,


“너희 아빠 좋아하는 스테이크 해야겠다.
아빠도 좋아하시겠지?”였다.


그래서 난 입을 다물었다.
목까지 차올랐던 말을 억지로 삼켰다.


감당하지 못할 말이었으니


하루는 아빠가 날 불렀다.
엄마가 없는 곳으로 잡아끌더니
다짜고짜 “너 뭐 아는 거 있니?”라고 물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했을까.
아빤 어떤 답을 원했던 걸까.


조심스럽게 고개 젓는 날 보고 아빤
환한 미소를 보여줬다.


“그래, 넌 아무 것도 모르는 거야”


그렇게 난 아무 것도 모른 채 7년을 지냈다.
못 본 척, 못 들은 척, 모르는 척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아빠의 휴대폰 속 여자 나체 사진도,
그 여자와 통화하며 나눈 엄마의 욕도
난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도 참 대단했던 것 같다.
7년이나 참다니.
아마 그 이유는 엄마의 ‘돈’이었겠지만
그래도 긴 시간 엄마를 버리지 않고
되려 다정하게 대해준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엄마만큼은 행복해했으니.



엄만 아빠와 헤어진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시름시름 앓더니 결국 죽음까지 가더라.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보다 더 ‘꼴깝’은 없었던 것 같은데,
엄만 죽는 순간까지도 아빠를 그리워했다.
그게 사랑이었을까?
글쎄.



세상에 사랑이 존재할까?
세상에 ‘영원’은 없고 ‘평생’은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에
영원과 평생이 대입되는 순간
모든 것은 사라진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 당신들이 하는 그 고귀한 사랑을 믿는지






*






“막둥아!!!!!”


.
.


“일어나 밥 먹어!!!!”


.
.



벌컥-




“오구, 아직도 자고 있었어요?”


“음?”


“밥 먹게 일어나!”


“10분만...”


“10분? 안 되는데,”


“추워...”


“추워? 그니까 이불 좀 잘 덮고 자라니까”


주섬주섬, 오빠가 날 이불로 꽁꽁 싸맨다.
헤헤 깨울 땐 언제고...


“안 되겠다”


“응?”


“읏샤”


결국 날 들쳐 매는 오빠.
이불 속 애벌레가 된 나는
오빠 어깨에 걸쳐져 방문을 나섰다.


“아 무거워”


“히히..”


“웃음이 나와?”


“재밌당”


“너 밥 먹이려고 내가 이런 생고생까지 해야 되냐?”


“그냥 놔두지 그랬어 그럼”


“혼자 밥 먹어야 되니까 그렇지.”


“응? 오빠 혼자?”


“아니. 너 혼자”


“나 왜?”


“다 나가 우리. 아침 일찍”


“다? 어디?”


“후- 그건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


계단을 다 내려온 오빠가
날 식탁 의자에 살짝 내려놓는다.
이불에 묻혀있던 얼굴을 꺼내주는 것도 잊지 않고.
그 손길을 따라 꿈뻑꿈뻑- 눈을 뜨니
이미 차려져 있는 밥상이 들어온다.
아, 마주 보고 앉은 삼촌도


“잘 잤어?”


“더 자고 싶어”


“밥 먹고 더 자”


“다들 어디 가는데?”


“나는 미팅있고 쟤는 출근하고”


“수혁이도 약속있대”


“아침부터?”


“응”


뭔가 쎄-한 느낌이다.


“벌써 나갔어? 수혁오빠?”


“아니 씻는 중. 금방 내려올거야”


“자- 막둥이 좋아하는 콩나물국”


“흠.......”


“많이 먹고 쑥쑥 자라렴”


오빠가 국그릇을 놓곤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나 진짜 혼자야?”


“점심만 먹고 금방 들어올게. 미안”


“아니 미안할 것까진 아니지만…”


“수혁이보고 일찍 들어오라고 해”


둘이 주고받는 눈빛이 뭔가 수상하다.
혹시 또,


“알아서 하겠지”


“아니면 오빠 출근하지 말까?
오랜만에 데이트 할래 막둥아?”


“아니. 출근 해야지 오빠는…
대신 삼촌,
들어올 때 그 아이언맨 피규어 갖고 와”


“아이언맨?”


“토이한테 산 거”


.......









이제는 나도 알거든.
토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무슨 일을 하는지


“피규어 콜렉터라고 했잖아 그 사람”


왜 그렇게 당황하는지도 알고



“흠흠, 그랬지. 어... 맞아. 피규어 콜렉터”



“아... 하하하 ㅇㅇ이 아이언맨 많이 좋아하나보네?”


“셜록은 없다니까 어쩔 수 없잖아”


“아이언맨은.... 그....
내가 걔 만날 시간이 되려나 모르겠네.
미팅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아서”


“그래?”


“그럼 그냥 수혁이, 아, 아니다. 하하하하하하하”


“수혁오빠 뭐?”


“아니야 아무 것도.
아 이 새낀 왜 이렇게 안 내려와”


내 예상이 맞다면
수혁오빤 오늘 토이를 만날 것이다.


“얼른 밥 먹어”


“으응”


후… 큰일인데.
설마 토이가 나 만난 거 얘기하진 않겠지?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하긴 뭐, 약속까지 했으니



약속 지켜줄테니까 매주 한 번씩 나랑 만나요

 

전략적 파트너십. 어때요?’



아니야. 그 때 보니까 그 사람 거의 반 미쳐있던데.
미쳐서 또 다 말하는 거 아니야?
나랑 한 약속 벌써 까먹은 건 아니겠지?


그 사람이 수혁오빠한테 말하기라도 하면...
아 안 되는데!!!!



스륵-



“어디 가”


“휴대폰 가지러”


“밥부터 먹어”


“어? 아, 좀 급해서…”


“잘 잤어?”


때마침 등장한 수혁오빠.
씽긋 웃으며 내 옆에 앉는다.


“어, 어”


“밥 다 먹은거야?”


“한 숟가락도 안 먹었어. 얼른 앉아 막둥아”


“나 잠깐...”


“스읍- 국 식는다”


셋 다 나만 쳐다본다.
아이 씨, 늦으면 안 되는데


“그래 그럼. 먹어야지”


방법은 단 하나. 빨리 먹는 수밖에


“야 이수혁, 앞으로 막둥이 니가 업어”


“뭔 소리야”



“아침에 내가 들쳐 매고 내려왔다고. 그치 막둥아?”


뭐라고 떠들든 내 귀엔 들리지 않아.
콩나물국 드링킹 하는 거 안 보여?


“쟤...가 요즘 잘 먹더니 무거워졌어”


“그러니까 왜 자는 앨 깨워”


“밥은 먹어야 될 거 아니냐”


“먹는 거보다 잠을 더 좋아하는 앤데”


“쟤가? 아닐 걸?”


아싸! 국은 거의 다 클리어 했어!!


“삼촌 내 밥 더 먹어”


“어?”


“많이 먹어야 힘나지. 그치?”



“아니 나 괜찮은…”


삼촌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내 밥의 반을 얹어줬다.

먹으라면 먹어.
오빤 많이 먹고 쑥쑥 자라야 한다고.
아, 이건 아니구나


“눈 뜨자마자 밥을 저렇게 먹는데
무슨 잠이야. 잠보단 밥이야 쟤”


“아닐텐데…”


“저거 봐. 우리 말하는 것도 못 듣고 밥만 먹잖아. 먹보”



“넌 애한테 먹보가 뭐냐?”


“귀엽구만. 안 그래?”



“안 그래”



“에이 씨”


“켁! 나 물!!!”


“어어, 물”


떨리는 손으로 물을 찾으니
수혁오빠가 급히 물컵을 쥐어준다.


“천천히 먹어 천천히”


“엄청 배고팠나봐”


“어제 술 많이 마셨어?
술 마시면 밥부터 찾잖아 얘”


“아니… 그렇게 많이 안 마셨는데?”


“켁!!”


“국 더 줘?”


“아니!!!!!!!!!!!”


“아 깜짝아”


“다 먹었어 나!!!!!!!!”


빈 국그릇과 밥그릇을 보여주니 다들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됐지?”


“야, 야!!!”


“커피 안 마셔?”


“필요없어!!!!!!”


그런 거 필요없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쿵쾅쿵쾅- 이불도 팽개친 채
재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그리곤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또라이...”


나에게 있어 토이는 ‘또라이’였다.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오빠들 몰래 저장하려면 다른 이름이 필요했다.


“후…”



[오늘 수혁오빠 만나요?]



“설마 진짜 말하진 않겠지? 내가 그렇게 사정했는데.”




.
.




“그거 알고 싶어서 나 찾아왔구나”


“...네”


“진짜 알고 싶어요?
이왕이면 그냥 모른 척 하고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알아야 돼요”


“왜요”


“그래야,”


“…….”


“지킬 수 있거든요. 그 사람들을”


“어떻게 지킬건데요”


“…….”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싶네.
대신 죽여줄 것도 아니고...
ㅇㅇ씨가 안다고 해서 바뀌는 게 없잖아요.
본인만 더 힘들어질 뿐”


“…….”


“그럴 바엔 그냥 톡 까놓고 얘기하는 게 낫지 않나?
‘당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다 알았으니
이제 웬만하면 그만 해라.’
말리는 편이 쉽겠네, 그쵸”


“말리고 싶지 않아요”


“…….”


“내가 뭐라고 말리겠어요.”


“그럼”


“놔두려고요”


“그냥? 이렇게?”


“상처가 아물 때까지”


“…….”


“오빠들은 상처가 많거든요.
자세한 사연은 모르지만 삼촌이 그랬어요.
처음 봤을 때 그 눈빛을 잊지 못한다고.
여차하면 죽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만큼
아픈 눈이었대요.”


“…….”


“그런데 오빠들이 이 일을 시작하고 웃음을 찾았어요.
지금 봐선 그래요.
이 일 때문인지, 셋이 같이 지내서 그랬는지
아님... 그런 척을 하는 건지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이 일이 영향을 줬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겠다고? 그게 지키는 건가?”


“제가 안다고 얘기하면 오빠들은 더 힘들어 할 거예요.
삼촌은 저를 걱정하겠지만 저도 그들이 걱정 돼요.
예전보다 더 망가질까봐, 비참해질까봐.”


“…….”


“지금으로썬 지켜보는 게 최선이에요. 다만,”



“다만,”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거죠.
경찰의 눈도 잘 피했으면 하고...
해코지 당하지도 않았으면...”


“…….”


“이번엔 절대 모르는 척만 하진 않을 거예요.
지켜야 돼요. 나를 위해서라도”




.
.




[안녕?]
[이러니까 애들 장난같네]


[나랑 한 약속 지켜야 돼요. 절대 비밀]


[그건 내 맘이고]



“이런 씨...”



[매주 한번씩 가기로 했잖아요!!]


[알아요]
[걱정하지 마. 나 약속 잘 지킨다니까?]



“하여간 또라이..”



[오늘 새로 나온 칼에 이름 박을 예정]
[C, Crescent]



“Crescent... 초승달.”



[다음 번엔 S로 박아줄게요]
[Flower gun에]



“됐거든요?”



[됐어요]


[수요일에 와요]
[기다릴게]






*







“ㅇㅇ아 진짜로 말해봐. 나랑 데이트하기 싫어?
병원 째고 놀자니까?”


“오빠 의사잖아. 의사가 하는 일이 뭐야”


“너랑 노는 거”


“내가 환자야? 나랑 놀게?”


“음.......”


옷은 다 차려입었으면서 꼭 문앞에서만 저러더라.



“뭐 먹고 싶은 거 생기면 전화해.  올 때 사올게”


“응! 아 삼촌 삼촌!!!”


“응?”


“내가 매줄게!!”


쪼르르 달려가 넥타이를 매주니 씨익 웃던 삼촌,


“담배는 피우지 마시고”


물고 있던 담배를 빼자 이내 울상 짓는다.
그런데 잠깐,


“....... 오빠 뭐해?”



“나도 넥타이”


“스읍-”


다시 넥타이를 풀고 있는 진욱오빠의 부산스러운 손.
어허, 애도 아니고-


“앞으로 넥타이 네 담당이야. 문앞에서 매줘 꼭”


“내가 무슨 오빠 와이프냐?”


“넥타이 맬 때만 와이프 할래?”



퍽-



“아!!!!”


“미쳤냐?”


“아 왜 ㅇㅇ이도 가만히 있는데 형이 더 난리야!!!!”



“하나밖에 없는 조카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미친놈”


“아 형!!!!!!”


“크흐”


이럴 때보면 영락없는 코미디라니까.


“갈게”


“응! 잘 갔다 와!!”


“나도 간다. 안녕 막둥이”


“오늘은 언니한테 깨지지 말고”


“걘 나 혼내려고 병원 나와”


“푸흐. 그게 뭐야”


“무섭다고 진짜”


“아우 알았어!”



“진짜 가기 싫어.......”


입을 삐죽거리더니 영혼 없는 발걸음을 옮긴다.
힘없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내 마음도 석연해지는 게...


“혼자서 괜찮겠어?”


“으응.......”


그새 계단에서 내려온 수혁오빠를 살짝 울상 지으며 쳐다봤다.


“가지... 말까?”


“아-니! 가야지!”


“정 혼자 있기 그러면...”


“나 혼자 있는 거 좋아하거든? 얼른 가!”


“진짜?”


“다들 내 걱정만 하는구만.
여차하면 나가서 놀테니까 신경쓰지마”


“누구랑”


“몰라 그건”


“…….”


“도서관이라도 가야지.
아 씨 난 왜 공강을 만들어가지고”


“빨리 올게. 얼마 안 걸릴 거야”


“알았어. 얼른 가!”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안 생겨”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삼촌이 벌써 다 했거든?”



“…….”


“가!!!”


더듬더듬 발걸음을 옮기더니
뭔가 아련한 눈길을 남기며 문밖을 나선다.


“후.......”


드디어 적막이 흐르는 거실


“이제 정말 나만 남은 건가”


그렇다면.......









디 한번 시작해볼까-



먼저 삼촌 방.
모든 일은 ‘마스터’로부터 시작되지



벌컥-




“분명 여기 있어. 여기…”


삼촌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 옆 스탠드 안을 들여다봤다.
왼쪽 아니면 오른쪽인데....


“찾았다”


정답은 ‘왼쪽 스탠드’였다.
정확히 말하면,


‘왼쪽 스탠드 안에 붙어있는 포스트잇’



2029 B
8243 C
4250 M


☆9130



포스트잇에는 전과 다름없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9130이라.... 음”


한참 눈알을 굴리던 난 포스트잇을 들고
건너편 진욱오빠 방으로 뛰어갔다.



벌컥-





“가만있어봐, 달력이.......”


어? 선반에 있던 거 어디 갔지?
헐. 안 되는데?


안 되는데....



.......
아, 하하



“이걸 또 서랍장에 넣어 두셨군”


진욱오빠는 대체로  달력의 위치를 많이 바꾸는 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구 위치도 많이 바꿔
인테리어가 주는 ‘지루함’을 없앴다.
-라고 오빠가 알려줬다.


“어디 보자”


오빠가 꽁꽁 숨겨둔 달력에는
22일과 30일에 작은 체크표시가 되어 있었다.
펜으로 그어져 있지 않은
펜 자국만 남은 체크표시였다.


“항상 그렇지. 펜 뚜껑으로 표시 남기기”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수혁오빠.


떨리는 마음으로 계단을 밟았다.
콩콩거리며 사뿐사뿐 올라가는데 갑자기,



삐-



“헐”


문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뭐지? 아 뭐야!!!!!


깜짝 놀라 계단 옆 벽을 붙잡고 문만 노려보는데



벌컥-




“젠장할”


진욱오빠가 잔뜩 성질난 얼굴로 들어왔다.


“한심한 새끼, 지갑을 놓고... 어? 막둥이 뭐해?”


하지만 언제 성질냈냐는 듯 날 발견하고
다시 활짝 웃는 오빠


“어? 어, 나, 그... 자려고!”


“또? 너 진짜 졸렸구나”


“으응… 나 진짜 너-무 졸렸어”



“그랬어요? 내 새끼?”


“엉. 헤헤”


“근데 그건 뭐야?”


“뭐?”


“손에 쥔 거”


“손? 내 손이 뭐”


“빨간색 종이”


“이거? 이거, 이거는......”


아이 씨, 눈도 좋아 하여간.
뭐라고 하지? 아 씨... 이거는, 그,


“기름종이야! 하하하!!!
요즘은 기름종이가 빨간색으로 나와”


“아... 그래?”


급히 포스트잇을 빠르게 흔들었다.
하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 오빠는 왜 다시 들어왔어?”


“아! 나 지갑 놓고 갔어!!! 병신같이”


오빠가 욕을 하며 급히 방으로 들어간 사이
나 또한 벽을 붙잡고 작은 욕을 뱉었다.


“미친... 하아....... 죽을 뻔 했어...”


저 오빤 갑자기 왜 들어와서
가만히 있는 사람 놀래키고 난리야...!!!!
아, 가만히 있진 않았구나.


“훅 갈뻔 했네”


“찾았다!!”


“헙”


그 새를 못 참고 방에서 다시 나오는 오빠.
양반은 못 되는 인물이다 아주.


“후- 막둥아 오빠 다시 갈게”


“어어. 얼른 가 늦겠다”


“그렇게 이상한 포즈로 서있지 말고 얼른 자”


“어? 어어. 하하하”


“오빠 없다고 울지 말고”


“울기는. 하하”



“간다”


“어!!!!”


오빠의 경망스러운 하트가
문 뒤로 사라질 때까지, 아니,
아예 정원을 지나 대문 밖에 세워 놓은 차로
사라질 때까지 난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후우... 소름끼쳐”


정신 차려야 돼
아직 일이 남았다고.


“가자 가자”


고갤 세차게 흔든 뒤 두칸 씩 계단을 뛰어 올랐다.
계단 끝에서 왼쪽으로 꺾어 약간의 복도를 지나면
수혁오빠의 방이 보였다.
 


벌컥-





“후.......”


오빠 방은 왠지 모르게 따스했다.
햇빛이 잘 들어서 그런가, 피아노 때문인가-


“햇빛이고 나발이고.... 다트판 어딨니”


하지만 급한 건 다트판이었다.
이유는,




오빤 달력이 아닌 다트판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10과 13, 그리고 30에 꽂혀져 있는 다트


10+13=23
과녁 정중앙=30


23일 30일...



“이번 주도 바쁘겠어. 우리 킬러들”





.
.
.





못다한 이야기



<셜록, 사건의 전말>



고3 여름방학 즈음,
내가 한국에 온 지 1년 정도 됐을 때 이야기다.


지난 1년 간 난 이 집 식구들에 대해
어마어마한 의문점을 갖고 있었다.
굳이 묻지 않았지만 묻고 싶은 게 많았다고나 할까?


좋아하는 음식이나 색깔, 취미, 습관
이런 거였다면 망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궁금점은 차원이 달랐다.


‘밤마다 어디로 사라지는지’


‘밤에 본 얼굴은 왜 그렇게 상기 되어 있는지’


내가 궁금한 건 이들의 일률적인 행동이었다.


1년 간 관찰한 결과 이들은 밤에 많이 움직였다.
어느 날은 삼촌이, 그 다음 날은 수혁오빠가
또 어떤 날은 진욱오빠가 밤늦게 들어왔다.
처음엔 참 일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워커홀릭이라고들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이네, 이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석연치 않은 느낌이었다.
내가 너무 셜록 홈즈에 빠져있나 생각이 들만큼.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소름끼치게 ‘킬러 첩보 영화’를 싫어했다.
로맨스나 공포영화도 잘 보면서
총 쏘는 영화만 꺼리는 이유는 뭘까.


어떤 날엔 TV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쏘는 총을 보며
그들끼리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총의 종류, 위력, 폭탄의 종류 등
셋이서만 아는 대화가 오고갔다.
너무 전문적인 대화라 난 감히 낄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뉴스를 보다가 웬 의사 교통사고 소식,
교수 자살 소식이 나오면
그들끼리 하이파이브를 하곤 했다.
아무 멘트없이 그저 하이파이브만 하고
흩어지는 이들 사이에서 나는
멀뚱히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이때부터 난
너무 다정하지만 너무 이상한 이들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했다.


지난밤엔 누가 나갔는지
한 달 내내 누가 더 많이 나갔는지,
석연치 않은 멘트들, 행동들, 특징 등
여러 가지를 기록했다.


그리고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더운 여름날이었다.
에어컨을 켜도 영 시원하지 않던 그날,
난 주인 없는 빈방에 들어갔다.


삼촌은 지방 출장, 진욱오빠는 병원,
 수혁오빠는 가게 공사 때문에 일찍 집을 나섰었다.


증거를 찾기에 좋은 시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 그저 ‘셜록 놀이’에 빠져있었던 것도 같다.
무언가 찾아내고 밝혀내는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남의 방까지 무단 침입하다니.


아무튼 설레는 마음으로 삼촌 방에 먼저 들어갔다.


참 깔끔했다.
너무 깔끔해 아무 것도 건들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래도 이것저것 뒤져봤다.
서랍장, 옷장 등 무언가 숨길만한 곳은
다 찾아봤지만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기운이 빠진 난 침대에 철퍼덕 누워 천장만 쳐다봤다.


‘역시, 증거는 무슨 증거야’하며 자책하던 와중
왠지 모르게 스탠드에 눈이 갔다.
침대에서 제일 가깝잖아,
이런 단순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스탠드 안에 손을 넣는 순간
숨을 멈췄다.


있어서는 안 될 종이였다.
누가 스탠드 안에 종이를 붙여 놓겠는가,
‘비밀’이 아니고서야-



1810 C
9124 M
5165 B


☆4815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가슴이 뛰었다.
마치 하늘이 내려준 ‘암호’같은 느낌이랄까.
진짜로 셜록이 된듯한 기분에 휩싸여
침대에서 방방 뛰었던 기억이 난다.


난 일단 이 암호를 내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리곤 밤새 고민을 시작했다.
이게 뭘까, 뭘 의미하는 걸까…
밤에 나가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
순서인가? 아니야, 숫자가 네 개잖아.


깊은 고민을 했지만 내가 얻은 거라곤


삼촌 14일
진욱오빠 16일
수혁오빠 11일


셋 다 15일


이것 뿐이었다.
각자 늦게 들어온 날과 세 사람 전부 늦은 날.
이 정도밖엔 알 수가 없었다.
이거랑 저 암호랑 관련이 있는 걸까?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장난식으로 저 날짜가 들어간 숫자에 색을 입혔다.
1, 4, 5, 6 네 숫자로 이루어져 있으니
색을 더하면,



1810 C
9124 M
5165 B

4815



이렇게 됐다.
‘이게 뭐야…’ 하며 종이를 찢으려는데 순간,
뭔가 눈에 들어왔다.
숫자의 배열이었다.


B를 빼곤 한 줄에 숫자가 두 개 씩 들어가 있었다.
불규칙적이지만 규칙적인 형태로.


그때 처음으로 무릎을 탁! 쳤다.
말 그대로 ‘유레카’였다.


한껏 흥분한 난 급히 진욱오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곳에도 뭔가 증거가 있을 것만 같았다.
또 종이에 적었을까?
아니야 오빠는 워낙 특이하니까
이상한 곳에 숨겨뒀을 거야.
어쩌면 적어놓지 않았을 수도 있어.
뭐든 남으면 증거가 되니까-


꽤 오랜 시간 찾아봤지만
나오는 거라곤 철 지난 영수증 뿐,
알파벳과 숫자가 섞인 내용의 종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숨을 푹 쉬며 의자에 걸터앉아 방안을 둘러봤다.
‘역시, 이 큰방에서 증거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어’라는 혼잣말과 함께.


의자 옆 책상엔 달력이 있었다.
병원에서 나눠 준 달력이었다.
입을 삐죽 내밀며 달력을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15일, 16일 칸 끝에 작은 체크표시가 되어있었다.
잉크없는 펜 자국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곧 바로
전 달을 펴 확인했고, 그 결과


오빠만의 표식인 것으로 밝혀졌다.


하하, 두 번째 유레카랄까?



남은 건 수혁오빠였다.
평소 피아노 때문에 자주 방에 들어가긴 했지만
그렇다할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었다.
오빠 방엔 시계도, 달력도 없었다.


가장 난코스가 아니었나 싶다.
오빠 방엔 거대한 책장이 있어서
만약 그곳에 숨겨놨다면 밤을 새워도 다 못 찾을 터였다.


‘후…’ 심호흡을 하고 책상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평소 보던 책과 신문 사이를 구석구석 살펴봤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서랍 안 깊숙한 곳에서
웬 노트가 발견되긴 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일기같은 거였다.
사실 낙서에 더 가까웠지만
오빠의 기분 상태를 담고 있으니
일기가 더 맞는 것 같았다.


의미없는 낙서들이겠거니 생각하고 덮으려는데,


ㅇㅇ


내 이름이 나왔다.
이름 빼곤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지만
마치 일부러 비워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얀 종이 위에 적힌 거라곤 내 이름 뿐이었다.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만
이때부터 이 노트를 보기 시작했다.
오빠는 말이 없는 대신 이 노트에 낙서하곤 했다.


그래서 알게 됐다.


내가 오빠에게
작은 별 이고 어린 햇살 임을.


나를 위한 소나타, 월광을.



수혁오빠 방에서 증거를 찾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3주 정도 흘렀을 땐가,
피아노 의자에 앉아 멍하니 앞만 쳐다보는데
다트판이 눈에 들어왔다.


한번도 다트 던지는 걸 보지 못했었다.
매번 피아노만 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던데…


혼자 있을 때만 던지나, 해서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는데,


이번엔 다른 때보다 더 세게 내 무릎을 쳤다.


마지막 유레카였다.


때때로 다트는 세 개 혹은 네 개 꽂혀있었다.
다트판의 숫자는 20까지 밖에 없으니
그 이상의 수를 표현하기 위해선
다른 숫자와 더해야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삼촌이 M, 진욱오빠가 B,
수혁오빠가 C라는 것과
주로 ‘밤’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


그게 ‘총알’과 관련 있다는 것이었다.
(총알은 진욱오빠 자켓 안쪽 주머니에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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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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