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다이스 호텔, 2105호. 10:00 A.M.’


이른 아침 정우에게 도착한 문자였다.
2시에 보자며 전화할 땐 언제고
당일이 돼서야 시간을 바꾸는 무례함에
그는 꽤 불쾌함을 느꼈다.



그는 기본적으로
예의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특히 지극히 이기적인 성격을 싫어했다.
마음만 먹으면 인연까지 끊었고
희미한 눈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 단호함에 진욱 또한 고개를 내저을 정도였다.







정우는 잠시 신호 대기 중인 차 안에서 라디오를 켰다.
그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음악엔 큰 흥미가 없다’고.


진욱은 시끄러운 락을, 수혁은 클래식을 들었지만
그에겐 딱히 어울리는 장르가 없었다.
그저 들리는 대로 듣고 이후 다시 찾아듣지 않았다.
이에 대해 진욱은 ‘낭만 없는 사람’이라며
손가락질 하곤 했다.


“투란도…트…”


그렇다고 해서 음악적 지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중요한 멜로디나 가사 정도는 기억했다.
외우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으나
그냥 머리가 기억했다.


정우는 기억하는 걸 좋아했다.


“네순 도르마”


라디오에서는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부르는
‘네순 도르마’가 흐르고 있었다.


아침부터 파바로티라니.
그는 귀가 호강하는구나 생각했다.



“아무도 잠들지 마라. 당신도, 공주여”


네순 도르마는 오페라 ‘투란도트’ 속 가장 유명한 아리아로
주인공 칼라프가 투란도트 공주에게
바치는 노래이기도 했다.


그는 차가운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녀가 던진 세 가지 수수께끼를 다 풀었지만
도리어 하루 안에 자신의 이름을 맞히면
억지로 결혼하지 않고 감옥에 갇히겠다 선언했다.


이에 공주는 도시 전역에
‘그의 이름을 알아낼 때까지 잠들지 말라’ 했고
칼라프 또한 이 노래를 부르며 밤을 지새웠다.



하지만 정우는 사실 내용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칼라프를 진정으로 사랑한 시녀 ‘리우’의
가슴 절절한 로맨스에는 더더욱 관심두지 않았다.


그는 승기를 잡은 칼라프의 심정을 대변한
가사에 초점을 뒀다.



사라져라 밤이여

희미해져라 별이여

새벽이 되면 나는 이기리

이기리, 이기리.



정우는 파리에서 KAP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었다.


7월 14일, 프랑스 혁명기념일 축제로
한층 들떠있던 파리 젊은이들은
늦은 밤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에펠탑 앞에 모여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밤을 기다리고 있을 당시
정우도 밤이 오길 기다렸다.
이유는 달랐지만-



타겟은 마약 밀매범이었다.
우리나라 굴지의 건설회사 대표였던 그는
반듯한 인상과 달리 마약 유통을 주도했다.


그의 죽음을 의뢰한 이는
그에게 납치당한 한 여자의 아버지였다.
그는 자신의 딸이 마약실험에 이용됐고
결국 내다 버려졌다고 말했다.


정우는 의뢰를 맡으며 생각했다.
파리까지 가서 죽일 가치가 있는 놈이라고.



정우는 그날 저녁,
그가 머무는 호텔 스위트룸에 침입했고
정확히 총알 하나로 그를 ‘자살’시켰다.





창밖에서는 ‘네순 도르마’와 함께
에펠탑 불꽅놀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특히 마지막 가사 ‘빈체로’가 나올 땐
가장 화려한 불꽃이 터졌다.





Dilegua, o notte Tramontate, stelle

Tramontate, stelle

All'alba vincero

Vincero, Vincero

 

사라져라 밤이여

희미해져라 별이여

새벽이 되면 나는 이기리

이기리,

이기리.



‘승리’에 걸맞은 불꽃이었다.






*






9:50 A.M.


정우가 시계를 보며 정문 앞에 차를 세운다.
호텔은 아침이라 그런지 조용하고 한산했다.



그는 휴대폰을 한번 확인한 뒤 곧바로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그러자 검은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정우는 고갤 끄덕이곤
남자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정우는 대충 알고 있었다.
남자의 재킷 안주머니에 총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눈에 띄게 침착했다.
총이 있는 걸 들킬 정도면
총질 또한 허접할 게 분명했으니.


의뢰인은 어떨까
보통은 아닌 것 같던데.



띵-



제일 끝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남자는 정우를 복도로 안내했다.


2105호 문앞에 설 때까지도 아무 말 없던 남자는
노크를 한 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안에서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이들은 하나같이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잠시만,”


정우가 얼굴을 찌푸린다.
예의없이 자신의 몸을 수색하는 남자의 태도가
 영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어가십시오.”


한참이나 그를 뒤졌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남자는
고갤 푹 숙이며 길을 텄다.


정우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훑어본 뒤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깔끔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검은 무리 몇몇이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어서 오세요”


하지만 그를 더 거슬리게 한 건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였다.


“반가워요”


의뢰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강렬하고 매서운, 자비도 없는…


“갑자기 재촉해서 미안해요.
오후까지 못 기다릴 것 같아서”


정우는 아무 말 없이 여자를 쳐다봤다.
마치 아직도 라디오 속 ‘네순 도르마’에
도취 돼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그렇게 빤히 보실까?
그런 눈으로 보면 나 막 설레는데”


정우는 기억하는 걸 좋아했다.


꼭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머리가 기억했다.
정우는 가끔 그런 자신이 싫었다.





“…….”


“설마, 벌써 기억한 건 아니죠?”


지금 이 순간이 그랬다.
정우는 자신이 기억하는 누군가를 떠올리자마자
입술을 깨물었다.


“많이 안 닮았다던데, 나. 우리 오빠랑”


기억 속 ‘네순 도르마’가
다시 귓가에 울리기 시작했다.






KAP

Master Plan







“의외로 솔직하신가 봐요. 표정이 거짓말을 못하네”


여자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짓는 표정은
정우의 심기를 건드렸다.


“아, 난 유인영이라고 해요.”



“이유가 뭡니까”


“네?”


“날 부른 이유”


“뭐겠어요”


“…….”


“그 화려한 솜씨로 누굴 좀 죽여줬으면 해서.”


“……."


“우리 오빠한테 했던 것처럼”


여자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해줄거죠?”


“안 합니다”


“누군진 알고?”


“누가 됐든,”


“그럴 순 없을텐데”


“…….”


“내가 그쪽 조사를 좀 많이 했거든요.
힘들더라고, 어찌나 꼭꼭 숨기셨던지”


정우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퍽 인상을 쓴다.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장정 열은 상대해야했다.


“하나같이 잘 생겼던데요? 얼굴 보고 뽑나?”


“후…”


“블러디는 정신과에 있으니
자주 가면 미친년 취급 당할테고”


“…….”


“그나마 많이 본 게 우리 크레센트…”


짜증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정우.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시커먼 무리들이 그를 둘러싼다.



“랑, 그쪽 조카”


그녀의 손짓에 바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무리들.
홀로 남겨진 정우의 눈이 금세 떨리기 시작한다.


“좀 끈적하던데요? 그 둘이”



“뭐하자는 거야”


“의뢰하잖아요, 마스터 씨”


“이런다고 할 것 같아?”


“그럼 이건 어때요?”


인영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들더니 누군가에게 전활 건다.


“어, 나야. 거긴 어때?”


이내 스피커폰으로 바꾸곤 다시 테이블에 올려놓는데,


“계속 주시하고 있습니다”


웬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몇 명이 대기 중이지?”


“스무 명입니다”


“집엔... 아무도 없고?”


“다 나가고 여자 혼자 있습니다”



“혼자? 어머 어떡해. 무섭겠다”


“지시만 내려주시면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잠깐만, 그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ㅇㅇㅇ. ㅇㅇㅇ입니다”


순간 인영을 향해 돌진하는 정우.
장정 여럿이 막아서자 인영이 피식 웃는다.


“귀한 조카 혼자 두고 다들 어디 가셨대?”



“미쳤어?”


“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지켜만 보고 있는 거니까”


“죽고 싶냐고!!!!!!!!!!!!!!”


“진짜라니까? 나 주인 허락없이
집 쳐들어가는 취미 없거든요?
못 믿겠음 전화라도 해보든가”


입을 삐죽이는 인영을 보던 정우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곧바로 전화하는데,



뚜우- 뚜우-



‘여보세요?’


“ㅇㅇ아”


‘어 삼촌!’


“너 어디야”


‘나 집이지’


“집, 맞아?”


‘응. 빈둥거리는 중 헤헤’


“뭐 이상한...”


‘어?’


“이상한 건 없고?”


‘이상한 거? 뭐?’


정우가 살짝 인영을 쳐다본다.
눈빛을 알아챘는지 곧바로 휴대폰에 대고
뭐라 작게 속삭이는 그녀.


“어, 아니…”


‘뭔데? 무슨 일 있어? 이상한 거 뭐…
삐- 삐- 삐- 삐-
아 뭐야, 시끄럽게!’


순간 휴대폰 너머로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누가 갑자기 빵빵대 삼촌!’


ㅇㅇ의 외침을 뒤로한 채 휴대폰을 떨군 정우의 귓가에
더 크게 들리는 삐- 소리


인영의 휴대폰에서 나는 그것과 같은 소리였다.


어깨를 으쓱이며 씨익 웃는 인영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보는 정우


‘누구지?’


“ㅇㅇ아”


‘응?’


“방에 있어”


‘방에? 왜?’


“가만히, 방에 가만히 있어.
밖에 내다보지도 말고 나가지도 말고.
집 안에... 가만히 있어 꼭”


‘삼촌 무슨 일 있어?’


“금방 갈게”



툭-



전화를 끊은 정우가 방 안을 둘러본다.


“이제 좀 마음이 동하셨나?”


그리곤 곧바로
자기 옆에 서있던 남자의 자켓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인영을 겨눈다.


“푸흐...”


“…….”


“역시 멋있네요”



“네 쫄개 치워. 목 날아가기 전에”


정우는 자신을 둘러싼 무리들의 총구도 개의치 않고
오로지 인영만 주시했다.

인영의 ‘웃는 얼굴’만


“나 죽고 그쪽 죽어도
내 쫄개는 그 자리에 있을 거예요.
의뢰 접수가 안 됐으니까”


“…….”


“왜 이렇게 대화가 안 되죠?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치워, 당장”


순간 얼굴을 굳히는 인영,


“지금부터 총소리 한 번이라도 나면 바로 들어가. 알았어?”


“네!!”


전에 그 낭랑한 목소리로
휴대폰 속 남자에게 지시를 내린다.


“내가 지시하기 전까지 철수는 없어.”


“네”


“…….”


“이러면 어쩔건데?”


정우가 총 슬라이드를 한번 당기고 다시 인영을 겨눈다.



“그 총이나 좀 치워!!!!!!”


핏대까지 세우며 소리지르는 인영을 한참 쳐다보던 정우가
방향을 틀어 검은 무리 중 하나의
다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픽-



소음기를 단 총이 픽, 하며 총알을 뱉자
남자가 다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 쓰러진다.


“짜증나 진짜”


“치워”


“아니 왜 싫다는 거야?
그 쪽이 맨날 하던 일이잖아!”


“사람 봐가며 하지”


“누군지 알고 이러냐고”


“의뢰인 가린다는 소리야”


“내가 뭐 어때서”


“…….”


“나 알아? 나에 대해 뭘 알아 그 쪽이”


“뻔하지. 마약 만지던 놈 동생이면”


“하,”


비린 웃음을 뱉은 인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우를 향해 걷는다.
그리곤 총구를 자신의 이마에 댄다.


“죽여 그럼”


“…….”


“오빠한테 했던 것처럼 머리에 구멍 내라고 빨리”


심하게 흔들리는 인영의 눈.
표정없이 그녈 쳐다보던 정우가 총을 고쳐 잡는 순간,


다시 휴대폰이 울린다.



‘우리 ㅇㅇ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 나 죽이면
그 쪽도, 조카도 죽어. 다 망하는 거라고”



“…….”


“다른 사람 아니고 한 명만 죽이면 돼.”


“…….”



“내 남편”






*






쾅-



“ㅇㅇ아”


정우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ㅇㅇ을 찾는다.


“ㅇㅇ아”


빈 거실을 둘러보더니 급히 2층에 올라가
ㅇㅇ의 방문을 여는데,


“ㅇㅇㅇ”





여전히 보이지 않는 ㅇㅇ.
침대 위 덩그러니 놓인 휴대폰만이 정우를 반긴다.


“ㅇㅇ아!!!!”


다시 방을 나서 수혁의 방에 들어가 보지만
어디에도 ㅇㅇ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1층으로 내려와 진욱의 방을 확인하는 정우
동시에 그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ㅇㅇ이는”


“엥?”


“ㅇㅇ이 어딨냐고!!!!”


“뭔 소리야 갑자기. 집에 있겠지”


“없어”


“없어?”


“후, 너한테 아무 연락 없었어?”


“집에 없어 ㅇㅇ이?”


“없어. 없다고”


“휴대폰은”


“휴대폰만 두고 나갔어”


“그럼 거기 갔겠네”


“어디”


“편의점”



“거긴 왜…”



쾅-



“어? 삼촌!”


“걔 라면 사러 자주…”



툭-



“너 어디 갔었어!!!!!!!”


마침 들어온 ㅇㅇ가 현관문 앞에 서서 방긋 웃는다.
진욱의 말대로 ㅇㅇ의 손에는
편의점 봉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 라면 사러”


그 꼴을 보고 가만히 있을리 없는 정우.
급히 달려나가 ㅇㅇ의 몸 이곳저곳을 살핀다.


“내가 너...!!”


“배고파서 사러 갔는데...”


“가만히 있으라 했잖아!!!!”


“집에 밥도 없고...”


“하아…”


“나 찾았어?”


“휴대폰은 왜 놓고 나가”


“요 앞에 가는데 뭐”


“.....걱정했잖아”


“에이, 나? 왜?”


“…….”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삼촌?”



“.....어디 아픈 데 없어?”


“갑자기?”


“다친 덴, 없고?”


“나 안 다쳤는데...”


“이상한 건 없었어?
누가 자꾸 쳐다본다거나, 따라온다거나”


“아니?”


“찾아온 사람도 없었고?”


“삼촌, 진짜 무슨 일 있었어?”


“…….”


“아까 전화도 급하게 끊고...”


ㅇㅇ을 와락 껴안는다.
숨 막힐 정도로 꽉.
걱정의 무게가 느껴질 만큼


“내 말 좀 들어 ㅇㅇ아”


“삼촌…”



“어디 가지 말고 꼭 여기 있어, 응?”


“…….”


“밖은 너무 위험하니까.
네가 있기엔 좀... 그래서 그래”


“…….”


“나는 네가...”


“…….”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순간 흐르는 정적.
ㅇㅇ을 안고 있는 정우도, 품에 안긴 ㅇㅇ도 그저 말없이
서로의 온기만 느낄 뿐이다.


“알았어 삼촌. 삼촌 말 들을게”


“…….”


“어디 안 가고 여기 있을테니까 걱정하지마.”


ㅇㅇ이 정우의 품에서 나와 씨익 웃어 보인다.


“삼촌도 계속 내 옆에 있고.”


“뭐?”


“다치지 말고”


“…….”


“죽지 말고”


“내가 왜 죽어 갑자기”


“그냥. 오래 살란 뜻이야”


“노인네도 아니고”


“노인네지 뭐~ 장가 못간 노인네”


그제서야 피식 웃는 정우.
따라 웃던 ㅇㅇ가 정우를 끌고 주방으로 향한다.


“라면 먹자 라면!”


“점심 사줄게. 나가자”


“라면 사왔잖아!!”


“더 맛있는 거 사줄테니까 나가자고”


“그럼 카레라면 사줘”


“크흐...”


“라면 먹고 싶어 죽겠는데 왜 자꾸 나가재”


“알았어 알았어. 먹자 라면”


“그래!!”



지이잉- 지이잉-



‘진욱’



“삼촌 전화오는데?”



“안 받아도 돼”






*









그 어떤 잡음도 들리지 않는 늦은 밤,
정우가 자신의 방에 있는 책장 앞에 선다.


정갈하게 놓인 책을 쭉 훑어보던 그는
눈에 띄는 빨간색 책을 집어
살짝 들었다 내려놓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뒤로 밀려나는 책장.


정우는 바닥 밑으로 드러난 계단을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이곳은 설계 때부터 예정된 공간이었다.
직업이 직업인만큼
이들에겐 비밀스러운 공간이 하나쯤 필요했고,
세 사람 다 집 안에 차려지길 바랐다.


그래서 정우와 진욱의 방은 지하에,
수혁의 방은 다락에 지어졌다.


이들의 방은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각종 무기들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였으나
특히 정우의 방, 즉 마스터 룸은
큰 사건이나 위급상황 발생 시
회의하는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 방의 존재를 아는 건 오로지 네 사람뿐이었다.


마스터, 블러디, 크레센트를 포함한 셋과
이 집을 설계한 토이.


넷은 최대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누구의 도움없이 스스로 방을 만들었다.


이런 위험한 공간을 집안에 만든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이들에게 집은 ‘요새’여야 했기 때문에





“아 추워”


이미 자리에 앉아있는 정우를 발견한
진욱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잇는다.


“난방 좀 해주면 안 돼?
아니면 그냥 밖에서 회의하던가”


“앉기나 해”


“쳇”


정우 왼편에 앉는 진욱


“아까 전화는 뭐야?”


“그럴 일이 있었어”


“완전 심각해 보이던데”


“이따 설명할거야”


“ㅇㅇ이 라면 사러 간 거 맞지?”


“어”


“역시”


“넌 어떻게 알았는데”


“라면 되게 좋아해. 우리 집에서 걔만 라면 먹잖아”


“…….”



“아 근데 애가 휴대폰에 대한 개념이 없어.
휴대하고 다니라고 해서 휴대폰 아니야?
아니, 핸드폰이라 쳐도 그래.
손에 쥐고 있어야 핸드폰이지.”


“…….”


“근데 꼭 놓고 다닌다니까?
가까우면 가깝다고, 멀면 귀찮다고 안 들고 가.
 사람 걱정하게”


“오늘도 그랬어”


“거봐! 하여간 속 썩이는 덴 일등이야”


“후.......”


“...형은 왜 전화 안 받았냐”


“언제”


“아까”


“귀찮아서”



“…….”


허망해 하는 진욱의 뒤로 수혁이 모습을 드러낸다.


“왔어?”


“어”


“ㅇㅇ이는”


“잠들었어”


피곤한 듯 눈을 비비며  진욱의 맞은편에 앉는 수혁.


“뭐해”


“이 형이 내 전화…”


“됐어”


“…….”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


진욱과 수혁이 정우의 입만 쳐다본다.
정우는 중요한 얘기를 하기 전
항상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곤 마음의 준비가 됐을 때 입을 열었다.



“ㅇㅇ이를 피신시켜야겠어”


정우는 이들 앞에서 딱 세 번 입술을 깨물었었다.


진욱에게 KAP를 소개하던 저녁,
수혁의 KAP 가입을 허락하던 밤,
ㅇㅇ이와 같이 살게된 날 아침.


딱 세 번 뿐이었다.



“뭐?”


“수요일 아침 비행기로, 어디든.
최대한 멀리, 아무도 못 찾는 곳으로”


“형”


"네가 같이 가줘. 가게는 잠시 비워도 되니까”


“무슨 일인데”


정우가 크게 한숨을 쉬며 답한다.


“오늘 의뢰인이 ㅇㅇ이 신변을 위협했어”


“뭐?”



“어떤 새끼가”


“우리에 대해 다 알아.
ㅇㅇ이 정체도 알 정도면 이미 다 털렸단 뜻이야”


“누구냐고. 뭐하는 놈이야”


“유지태, 기억 해?”


“유지태?”


“누구, 파리?”


“어”


“누군데”


“그... 마약?”


정우가 말없이 고갤 끄덕인다.


지난 타겟의 이름은 두 번 다시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이 이들의 암묵적 룰이었다.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고
보안상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모든 문제는 그로부터 시작됐으니.


“그 자식 동생이었어, 의뢰인이”


“동생도 있었어? 아니 이게 아니라,
 우릴 어떻게 알고?”


“자살을 믿지 않은거지”


“자살이든 아니든
우리 존재를 알았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


진욱이 살짝 고갤 비틀곤 정우를 향해 묻는다.


“원하는 게 뭐래”


“의뢰 맡아달래”


“누구”


“남편”



“미친, 여동생이었어?”


머릴 헝클이는 수혁


“이유는”



“유지태가 죽고 난 후 비어진 대표 자리를
남편이 가로챘나봐. 권력 싸움에서 진거지”


“그래서”


“그래서, 다시 그 자리를 뺏고 싶대.”


“자리 뺏으려고 사람을 죽여달라?”


“그 여자에 의하면 놈도 똑같이 마약에 손을 댄다네”


“그 년도 하겠지 당연히”


“그래서 형은 뭐라고 했어? 한다고 했어?”


“어”


“형!!!!!!!!!”


진욱이 몸을 뒤로 젖히며
또 다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뭐하자는 거야 지금!!!”


“하고 안 하고는 내가 결정해”


“그래도 이건 아니지!!”



“ㅇㅇ이 때문이야?”


“…….”


“진짜 ㅇㅇ이 때문에 그런거야?
왜, 걔네가 뭐 어떻게 했는데”


“하고 안 하고는 내가 결정한다고.”


.......



“안 할 거구나?”


진욱과 수혁이 서로를 쳐다보며 살짝 미소 짓는다.


“계획은 있어?”


“ㅇㅇ이부터 비행기 태우는 거”


“영국으로 갈게”


“아니, 영국은 피해”


“그럼... 독일”


“수요일 오전 11시 비행기로 찾아봐.
그때 맞바꿔야 되니까”


“뭘”



“놈이 그날 그 시간에 귀국해.
뒤 밟는다 말하고 공항 가면 이해해 줄거야.”


“감시 붙었어?”


“붙겠지. 여기도 아는데”


“우리 집도 알아?”


“아까 집 앞에서 ㅇㅇ이 감시했어”


“씨발 그냥 싹 다 죽여버리자”



“…….”



“뭘 꼬라봐 이씨”


“흠흠. 정리하면, 그 놈 마중나간다 말해놓고
ㅇㅇ이부터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거야.
다음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ㅇㅇ이한텐 뭐라고 해”


“…….”


“뭔가 적당한 이유가 있어야 될 거 아냐.
갑자기 비행기 타라고 하면 걔가 순순히 타겠어?”



“그거 때문에 니들 부른 거야. 빨리 이유 찾아”


“이거 때문에 불렀다고?”


“…….”


“내일 아침 먹으면서 말할거니까
오늘 밤에 정해야 돼”


“뜬금없이 독일 가라면 가겠냐고 애가”


“여행이라고 하면…”


“잘도 믿겠다. 여행을 수업 빼가며 가냐?”


진욱의 말에 입을 꾹 닫는 정우와 수혁.



“이수혁”


“…….”


“네가 같이 가니까 네가 알아서 해”


“아 뭐야”


“ㅇㅇ이 눈치 빠른 거 알지? 잘해라”


“형”


“이럴 때만 형이래”


수혁이 인상쓰며 정우를 쳐다보지만
그 역시 고개만 끄덕이고 있다.


“아- 됐지?”



“뭐가 돼”


“그럼 소인은 이만 퇴청하겠나이다”


“그러시게”


“뭐하자는 거야 지금”


“아침식사는 8시니 그리 알고 있으시게 자네”


“이만 나가 다들”


“장난해?”


“어허, 이게 장난으로 보이는가”


“아 왜 이러냐고”


“하-암 소인은 이만, 총총”


크게 하품하던 진욱이 허리 굽혀 인사하곤
뒤돌아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밟는다.


“형까지 왜 이래?”



“너만 믿는다”



“…….”


“나가. 불 끄게”





.
.
.





못다한 이야기




<Secret House - 3년 전>



거실 쇼파에 나란히 앉은 수혁과 토이.
커피 향을 지그시 맡는 수혁과 달리
토이는 레드와인 색만 들여다보고 있다.



“so weird...”


“뭐가”


“왜 그 방만 바꾸냐고”


“시키는 대로 해 그냥”


“야”


토이가 수혁을 째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혁은 마시던 커피에만 집중할 뿐-


“다들 무기고 있잖아”


“…….”


“근데 그 방도 무기고 만들려고?
또? 오버야 오버”


“뭐가 오버야”



“아 형”


때마침 정우와 진욱이 거실에 들어서자
토이가 벌떡 일어나 그들을 맞이한다.


“일찍 왔네?”


“남는 게 시간이라 헤헤.”


“수혁아 설명 좀 해줬어?”


“아니 아직”



“야 너 오랜만이다? 살 좀 빠졌네?”


“형 독침 만드느라 맨날 밤새워요 요즘”


“그것 좀 빨리 내놔!! 내일 모레 일 있다고!!”


“내일이면 되니까 좀만 기다려요”


“맨날 좀만 기다리래. 좀만이냐 니가?”


“크흐”


“이 좆만아”


진욱의 말에 웃음바다가 된 거실.
가만히 있던 수혁도 결국 웃고 만다.


“이 형 진짜 미친 거 같아”


“여기 안 미친놈이 어딨어”


“마스터도?”


“어”



퍽-



“아… 맞을 줄 알았어. 알고 맞으니까 더 아파”


“작작하고 일하자 일”


정우가 소파에 앉자 나머지도 따라 앉는다.


“전화로 대충 얘기해서 알텐데
2층 오른쪽 끝방 수리 좀 하고 싶어서.”


“네. 방탄유리랑... 도어락이요”


“어. 일주일 내로 되나?”


“되죠. 방탄유리는 이틀이면 될 거고

도어락도... 사흘이면 돼요”


“유리 누가 달거야?”



“형이”


“나? 내가 왜”


“키 제일 크잖아”


“유리 다는 거랑 키 큰거랑 뭔 상관인데”


“팔다리가 더 기니까 편할 거 아냐”


“너랑 나랑 1cm 차이난다고”


“1cm나 더 크네”


“아 형!!! 저 새끼 좀 때려!!!!”


“니가 해”


“하.......”


“큭큭 그럼 유리는 블러디 형이 다는 걸로”



“너까지 이씨”


혼자 씩씩거리는 진욱을 두고
정우는 또 다시 토이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시작한다.


“도어락 말이야. 티 안 나게 달 수 있는 거지?”


“네”


“나무문인데?”


“괜찮아요”


“안이나 밖이나 다?”


“네”


“어 그래 그럼. 시작해”


“근데 형님”


“어”


“왜 그 방만 고치는 거예요?”


“그럴 일이 있어”


“거기도 개인적인 공간으로 쓰실 거면...”



“이 집에서 그 방이 제일 중요해.
신경 써서 해줘”


“.......네”


급히 자리를 뜨는 정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토이가
옆에 있던 수혁에게 작게 속삭인다.



“솔직히 뭐 있지. 빨리 말해”


“뭘”


“방. 왜 고치냐고”


“저 형한테 물어봐”


수혁의 손끝엔 씨익 웃는 진욱이 있었다.


“뭔 얘기를 그리 재밌게 할까?”


“형”


“엉”


“가시죠. 2층으로”


“나? 그래!”


싱글벙글 웃는 진욱을 데리고 2층에 오르는 토이


“형”


“왜”


“뭐하는 방인데요?”


“뭐가, 이 방? 어… 중요한 방”


“그러니까 왜 중요하냐고요. 또 누가 들어오나?”


“너무 많이 알면 다친다”



“여자 들이나 보네”



“토라이야, 시끄럽고 빨리 문 상태나 보렴”


“누군지 알아야 제대로 고치지”


“누구 안 와. 어, 그냥... 보물창고로 쓸거야”


“보물창고요?”


“어. 되게 중요한 거 넣을거니까 니가 잘 해야 돼.

보안이 시급하다고”


“음.......”


“야 근데 어떤 식으로 만드는 거야?
도어락이면 뭐, 비밀번호 걸어놓나?”


“아파트 문 비슷한거죠”


“뭐야 그럼. 버튼도 다 나와 있고?
너무 감옥같잖아”


“어차피 보물창고로 쓸거라면서 뭐가 문제예요”


“아냐. 안돼. 너무 창고 티나서 안돼”


“안 그래도 마스터가 다 알아서 지시했습니다~”


“어떻게 되는 건데 그래서”


“손잡이 옆에 인식 패드를 넣을 거예요”


“인식 패드?”


“손바닥 갖다 대면 문짝에 뜨는 거죠.
비밀번호 누르라고”


“헐. 미션 임파서블처럼?”


“네”


“유리 아닌데도?”


“나무인척 하는 전자시스템이랄까”



“와 씨 너 진짜 천재였어??!”



“아마도”


“열라 사랑스럽네”


“푸흐”



“참, 비밀번호는 뭘로 해요?”


“비밀번호?”


“그래야 잠기죠”


“한번 정하면 못 바꾸나?”


“내가 와서 바꿔야 돼요”


“그럼 안 되겠네”


“그럴 것까지야...”


“비밀번호는 심플한 게 최고야”


“1234 이런 것만 아니면,”


“그걸로 해”


“에?”


“1234 좋다. 아니, 1111?”


“보물창고라면서요”


“어”


“근데 비번을 1234로 해요?
패스워드라고요 패스워드”


“너무 어려워서 까먹으면
패스워드고 뭐고 그냥 엿되는 거야”


“그래도,”


“좋다. 내가 봐줄게. 9999로 가자”


“…….”


“9876?”


“형”



“확 빵빵빵빵으로 해버릴까 보다”



“…….”





.
.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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