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많은 식구들









“처진다 처져”


소파에 엎어져 멍때리고 있던
진욱의 입에서 원망섞인 소리가 나온다.


“신나는 거 듣고 싶다”


오늘 수혁의 선곡은 브람스의 16개 왈츠 중
A Flat Major Op. 39, No.15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곡이었다.


“답지 않게 이런 거 치고 지랄이야”


아침부터 거친 말을 뱉는 진욱.


간밤에 잠을 설친 그는
이른 아침부터 거실에 나와 TV만 보던 중이었다.


뒹굴거리다가 우연히 시계를 본 진욱은
8시 5분 전부터 TV도 끈 채
꽤 경건한 자세로 수혁의 연주를 기다렸다.


물론, 썩 맘에 들어 보이진 않지만.


“레스토랑 가면 나오는 노래잖아.
8시에 밥 먹자니까 밥노래나 치고 앉았어”


“뭘 그렇게 혼자 시부렁거리냐?”


혼잣말 하는 진욱의 뒤로 정우가 등장한다.


그 또한 잠을 설쳤는지 왠지 모를 퀭한 얼굴을 하고 있다.


“형 나 배고파졌어”


“왜”


“이거 식당 노래잖아”


“이게 왜 식당 노래야”


“레스토랑 레퍼토리”


“이거 유명한 건데. 누구 거더라”



“하얏트 호텔 거 아니야? 호텔 조리부?”




정우가 말없이 피식 웃는다.
가끔 진욱이 던지는 가벼운 농담에
피식 피식 웃는 그였다.


“신라호텔인가. 아 몰라, 어디서 많이 들어보긴 했어.
밥집이야 분명히…”


“배고프면 먼저 밥 먹어”


“안돼. 우리 막둥이 기다려야지”


“아, 어”


입을 굳게 다무는 정우.
사실 그의 퀭한 얼굴은 다 ㅇㅇ이 때문이었다.


밤새 잠 못 이루며 걱정한 터-.


“딴딴딴 딴♪”


“싫다 할 땐 언제고”


“노래는 싫은데 저 자식이 너무 잘 쳐”


“하루 이틀도 아니고”


“후… 아 근데 쟤 변명거리는 잘 준비 했으려나?”


“했겠지”


“안 해놓고 배 째라 하면 어떡해?”


“그럴 애 아니잖아”


“그럴 수도 있지!! 요즘 얼마나 개기는데 나한테”


“나한텐 안 개겨”



“그...래?”


“...뭐든 생각해 놨을 거야. 안 그럼,”


“안 그러면? 안 그랬으면?”


“지가 더 괴로울 걸”


“누구. 수혁이?”



“어”



쿵. 쿵쿵쿵쿵.



“삼초온-”


“일어났어?”


때마침 ㅇㅇ가 눈을 비비며 1층으로 내려온다.
수혁의 피아노 소리를 듣고 깨서 그런지
평소와 달리 조용하다.


“오빠도 안녕?”


“웬 일이야? 수혁이 방 안 가고 바로 내려오네”


“되게 집중한 거 같아서 방해 안 했어...”


계단 끝자락 즈음 살짝 삐끗하려는 ㅇㅇ을 보고
같이 움찔하는 정우와 진욱.
더듬거리는 ㅇㅇ을 진욱이 나서서 데려온다.



“눈은 좀 뜨고 내려와”


“졸려”


“더 자지 왜 일어났어 그럼”


“피아노...”


“너도 오늘 노래 맘에 안 들지?”


“아니 좋은데... 브람스잖아”


“브람스야? 이거 알고 있었어?”


“응... 기본이지 기본”


“너 지금 나 기본도 안 돼있다고 놀리는 거냐?”


“으응...”


하암- 하품하며 눈에 손대려는 ㅇㅇ을 진욱이 막는다.
그리곤 “눈 비비지마”라며  꽤 엄한 표정을 짓는데,


“헤헤”


그래도 박박 눈만 문질러대는 ㅇㅇ을 보고
퍽 인상 쓰고야 만다.


“삼촌 잘 잤어?”



“그럼~”


“아닌 거 같은데... 피곤해보여”


“아냐. 잘 잤어”


“아닌데.......”


“야 나한텐 왜 그런 인사 안 해”


“오빤 딱 봐도,”


“엉”


“못 잔 거 같아.
얼굴이 왜 이래? 노랗게 떴잖아”



“뭔가... 걱정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걱정해주는 거야. 어? 연주 끝났다!”


“그러네”


“야 이수혁 내려와!!!!!”


“밥 먹자”


“응!”






KAP

Guess What






“준비됐어?”


“뭐”


“독일”


“아...”


“아? 아아-? 준비 안 했어?”


“했어”


“뭐라고 할 건데?”


“몰라도 돼”


“미리 말을 해줘야 내가 쿵짝을 맞추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ㅇㅇ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진욱과 수혁이 식탁에 앉아 몰래 대화를 나눈다.


“너 이상한 소린 하지 마라. 여행은 절대 안 돼”


“안 해”


“쳇. 두고 보겠어”


코웃음 치는 진욱을 표정 없이 쳐다보는 수혁.


옆에 있던 정우가 수혁을 향해 묻는다.


“비행기 편 알아봤어?”


“어. 내일 11시”


“어디 있을 거야?”


“베를린”


“호텔도 예약했어?”


“어”


“너 가서 우리 막둥이 밥 굶기면 안 된다”



“...뭐래”


“쟤 라면 엄청 좋아하니까 많이 가져가”


“거기도 팔아”



“그래?”


진욱이 머쓱해하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밤을 지새운 건 수혁도 마찬가지였다.
ㅇㅇ과 단 둘이 가는 여행 아닌 ‘여행’에
챙겨야 할 물건, 호텔, 비행기 편 등등
이것저것 살펴야 할 게 많았다.


남겨질 이들에 대한 걱정은 덤으로.


“형”


“어”


“그 일, 안 할거야?”


“…….”


“ㅇㅇ이는 안전하다 쳐도 형들은,”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


“아마 그쪽도 마냥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다시 올까? 한국?”


“네가?”


“둘보단 셋이 나을 거 아냐”


“ㅇㅇ이는 어쩌고”


“…….”



“일단 ㅇㅇ이만 괜찮으면 딱히 문제될 거 없으니까”


수혁이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멈춘다.
당신들 ‘목숨’을 요구하면 어떻게 할 생각인지,
정말 아무 상관없는 건지 묻고 싶지만 참아본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아서.


“만약 정말 하게 된다면... 리스크가 클거야 우리한테”



“원래 그런 거 신경 안 썼잖아”


“형,”


“으아 맛있는 냄새!!!!!”


굳은 얼굴을 하던 수혁이 바로 미소를 보인다.
진욱과 정우 또한 방금 전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른
미소와 말투로 ㅇㅇ을 반긴다.


“먼저 먹고 있지!”


“너 섭섭해 할 거잖아”


“응. 히히”


“얼른 앉아”


“우와- 잘 먹겠습니다”


아침부터 신이 난 ㅇㅇ이가 숟가락을 들자
셋 다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곤 밥 먹는 모습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기특한 표정을 짓는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어?”


“심각해 보이던데”


“심각하긴. 이수혁 놀리고 있었어”


“수혁오빠? 왜?”


“어, 그게.......”


“너 할 말 있다며. 해봐”


진욱이 갑작스레 윙크를 날리며 수혁을 쳐다본다.
고갤 저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는 수혁.



“가만히 있으라니까...”


“뭐라고?”


“아니. 아니야 아무 것도”


“할 말 있잖아”


“어. 그렇긴 한데…”


이젠 정우까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수혁을 쳐다본다.


결국 서서히 입을 떼는데,


“ㅇㅇ아”


벌써부터 수혁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응?”


“그게,”


“응”


“…….”


“…….”


“독일... 가자”


수혁이 긴 침묵 끝에 간신히 한 마디 건넸다.
그러자 진욱과 정우 둘 다 멍한 표정을 짓는다.


“독일?”


“어. 나랑”


“오빠랑?”


“어”


“그래!”


“어?”


“가자 가자! 독일 가보고 싶었어”


이젠 아예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진욱과 정우.
쉽게 허락된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듯
수혁과 ㅇㅇ을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진짜?”


“응. 독일 맥주 유명하지 않아?
가서 엄청 마셔야지!! 밤새도록”


“아니, 그게...”


“근데 왜 우리 둘만 가?
진욱오빠랑 삼촌도 데려가지.
아, 일해서 안 되나?”



“나? 나는, 그, 어,
환자 봐야지. 나 환자 무지 많아”



“나도, 난 고객”


“흐음... 하긴, 오빠들은 엄연히 하던 일이 있으니까.
수혁오빠는 아무래도 널널하지?”


“.......”


“그럼 날짜는 언제로 잡을까? 방학 때 쯤으로 해야겠지?”



.......



“아니, 내일”


“응?”



“내일 가자. 아침 비행기로”


ㅇㅇ이가 동그래진 눈으로 수혁을 쳐다본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


“…….”


“만나기로 한... 사람?”


입을 꾹 다무는 수혁.
그 모습을 보던 진욱이 코를 찡긋하며
작게 속삭인다. “저 병신 새끼...”


“와서 연주해달래”


“헐! 진짜? 누가?”


“…….”


“누군데!”


“콩쿨 때... 심사위원이”


“너 진짜야?”


수혁이 말을 마치자마자 정우가 묻는다.
고갤 젓는 진욱과 달리
수혁의 얼굴에서 무언가 느낀 것이 분명했다.


“…….”


“오빠 진짜로? 그 사람이 직접 그랬어?”


“얼마 전에 가게로 왔었어.”


“진짜?”


“찾았대 나를. 미국 전역을 돌다가 한국까지 오게 돼서...”


“그래서?”


“....다시 연주하면 안 되겠냐고..”


“우와!!!!!!!!!”


“하아...”


박수치며 좋아하는 ㅇㅇ과 달리
놀란 얼굴을 한 채 의자에 기대는 정우.
옆에선 진욱이 입만 헤- 벌린 채 수혁을 쳐다보고 있다.


“그래서 독일 가자는 거였어?
우와!!!! 오빠 나 당장 갈래!!!”


“…….”


수혁이 진욱과 정우의 눈치를 살핀다.



한 달 전쯤, 웬 노신사가 수혁의 가게를 찾았었다.


그저 지나가는 노인이라 치기엔 자꾸 시선을 끌었다.
피부색이 하얘서도,
센 억양의 영어를 사용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낯이 익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칼날 같은 콧수염이
자꾸 무언가를 기억하게 했다.


수혁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앞으로 향했다.
그게 무엇이든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노신사는 야속하게도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곤 말했다.


“I was looking for you, Lee”



“너 진짜,”


“진짜야”


“오빠 그럼 다시 피아노 시작할거야?
응? 나 매니저 되는 거야 진짜?”



“아냐 그건. 그냥... 한번 가보는 거지”


“가서 잘 되면 가능성은 있는 거잖아! 안 그래?”


수혁이 해맑게 웃는 ㅇㅇ을 보고 살짝 미소 짓는다.


“드디어 무대 서는 거야 오빠?
으아, 살면서 한번은 볼까 싶었는데...”


“이수혁”


“…….”


“잘 다녀와”


“…….”



“잘 됐다”


수혁을 빤히 보던 정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한다.


진심을 담아, 천천히.


“아!!!”


“왜”


“그래서 오빠 브람스 거 쳤구나?”


“…….”


“브람스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 웬 일인가 했는데.”


“뭔데?”


“독일 사람이거든. 헤헤”





*







“가지 말라니까”


“오늘 가서 말해야 돼. 못 나온다고”


“니가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학교 가는 길.
운전대를 잡은 진욱이
옆에 앉은 ㅇㅇ을 보며 말을 잇는다.


“그냥 빠지면 되지”


“어떻게 그냥 빠져!”


“안 어울려. 날라리 주제에”


“아니거든? 나 완전 모범생이거든?”


“네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뭐”


“모범생. 완전 안 어울려”



퍽-



“아!! 나 운전하잖아!!”


팔뚝을 부여잡고 징징대는 진욱.
차가 신호에 걸리자 ㅇㅇ을 확 째려본다.


“째려보지마!”



“너 남자였음 반 죽었어 벌써”


“고마워해야 되는 거야 뭐야”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치”


“치~? 어유 이거 아주”


진욱이 ㅇㅇ의 양볼을 잡고 요리조리 흔들자
“아아 하지마!!”라고 외쳐보지만,
역시 소용없다.
오히려 더 힘줄 뿐


“야 ㅇㅇㅇ”


“왜!!”


“너 가서 이 오빠 보고싶다고 울면 안 된다?”


“퍽이나”


“전화도 하지마. 국제전화 비싸”


“안 해!!”


“선물은 사오고”


“쳇”


“아프지 말고”


“…….”


“안 아픈 척은 더더욱 하지 말고”


“꼭 어디 멀리 보내는 것처럼 말하지마. 이상해”


“그치? 미안. 오빠가 오버했다”


“소름 돋을 뻔 했어”



“미안 미안”


다시 엑셀을 밟는 진욱의 눈이 괜히 촉촉해 보인다.
창밖으로 고갤 돌리는 ㅇㅇ의 눈 또한,


“선물은 뭐 사와”


“뭐 그냥. 네 맘에 드는 거”


“초콜릿만 잔뜩 사와야지”


“어우, 청개구리야 완전”


“히이.......”


“선물은 됐고, 그냥 몸 건강히 돌아오기나 해”


“아 또 그런다! 거기 일주일 가 있는다고
어디 아플 거 같아 내가?”


“크흐 진짜 미안. 나 왜 이러지?”


“하지 말라고 쫌”


“야 다 너 걱정해서 하는 말이잖아.
너 우리랑 살면서 하루라도 떨어져 본 적 있어?”


“없지”


“없잖아! 그 흔한 오티, 엠티도 안 보냈는데”


“그럼 지금은 왜 보내?”


“어?”


“못 가게 하면 되잖아”


“그, 이번엔 수혁이가 같이 가니까...
그나마 안심하는 거지”


“그럼 쭉 안심해. 괜히 이상한 말 하지 말고”


“기집애 까칠하긴”


투닥거리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학교.
진욱이 백미러를 유심히 보곤 정문에 차를 세운다.


“간다!”


“끝나면 전화해”


“왜?”


“데리러 올게”


“됐어~”



“꼭 전화해. 무슨 일 생겨도 전화하고
뭐 이상하다 싶음 바로 전화해”


“이 양반 진짜 왜 이러실까?”


ㅇㅇ가 잡고있던 문고리를 놓고
진욱을 빤히 보다 고갤 갸우뚱거린다.


“나 안 받으면 형이나 수혁이한테라도 꼭 해. 어?”


“수업 끝나고 팀플 과제 있는데...”


“그럼 그거 끝나고”


“…….”


“어?”


“알았어”


“됐어. 이제 가”


“이상해...”


“뛰어가.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


“아 왜!!”


“시계 못봤어? 지금 수업 시작 5분 전인데”


“뭐???? 아 짜증나!!!!!!!!”


“크흐흐 잘 가라 ㅇㅇㅇ”



쾅-



문을 세게 닫은 뒤 죽어라 뛰기 시작하는 ㅇㅇ.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욱이
다시 백미러로 시선을 돌린다.



“씹새끼들”





*





“뭐가 있긴 있는데...”


교수의 열정적인 강의가 무색할 정도로
깊은 생각에 잠긴 ㅇㅇ가 작게 읊조린다.


“내일 당장 독일....”



독일
수혁오빠


나머지는?
왜 둘만.......


긴급상황?
도망


피아노 복귀!!!!!


이수혁 피아니스트



노트 한 쪽에 적어 내려간 낙서.
마지막 하트까지 그리고 앞을 쳐다 보자
여전히 열변을 토하고 있는 교수가 눈에 들어온다.


“아 맞다, 또라이...”


그 모습이 마치 타오르는 눈으로
자신에게 총을 겨누던 토이 같아서,


“말을 해줘야 되나...”


휴대폰을 꺼내 몇 자 적어보는 ㅇㅇ.
어떤 말이 좋을까 꽤 고민하던 그녀가
이내 결심한 듯 전송 버튼을 누른다.



[저... 죄송한데 내일 못 갈 것 같아요]


[왜]



“헐”


고민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재빨리 답을 보낸 토이.



[갑자기 독일 가게 됐어요]


[언제]


[내일 아침에요]


[혼자?]


[아니요. 수혁오빠랑..]



“이젠 아예 대놓고 반말이네”


삐죽 입을 내밀던 ㅇㅇ가
교수의 눈치를 보며 휴대폰을 아래로 내린다.



[그럼 오늘 와]


[오늘이요?]


[오는 게 좋을 걸.]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떠는 ㅇㅇ.
아마 진짜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 느낌 때문일 것이다.

ㅇㅇ은 토이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강렬한 눈, 요상한 말투도
그를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겠지만

ㅇㅇ은 그의 목소리에 더 집중했다.


식구들 또한 그랬다.
ㅇㅇ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항상 진지함이 묻어나는 낮은 톤 정우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안정감을 줬다.
그래서 마음이 복잡하거나 심란할 땐
일부러 정우를 찾았다.


특히 정우 품에 안겨있을 때 들리는,
그의 가슴팍에서 나는 소리를 좋아했다.



[오늘은 안 돼요. 수업 끝나고 과제도 해야 돼서...]



진욱의 목소리는 항상 부드러웠다.


그는 화가 났을 때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욕을 뱉었다.
하나도 욕같지 않게, 은은하게.


어쩔 땐 낭랑하기도 했다.
주로 ㅇㅇ이나 동료 려원을 놀릴 때 그랬지만
그 목소리 또한 좋았다.
소년의 느낌이 배어있었다.



[데리러 갈게. 나와]



수혁은 남다른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너무 낮고 어두워서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덤덤했다가도 살기가 느껴져서 항상 긴장하게 만드는,


그만의 차가운 목소리를.



[날 만나는 게 좋을 거야. 해줄 얘기가 많거든.
보고 싶기도 하고]



토이의 목소리는, 뭐랄까.
가슴 깊숙이 박히는 기분이랄까-


마치 그의 말이면 다 따라야 할 것 같은,
그의 말이 다 맞는 것 같은.



[이따 봐요]






*






“형”


“…….”


정우의 지하실.
권총을 챙기는 정우 옆에 선 수혁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같이 가자 그냥”


“안 돼”


“왜”


“내가 해결해야 끝나”


“같이 하면 되잖아.
일단 ㅇㅇ이부터 데려다 놓고 거기서 다시 생각해보자고”


“거기까지 쫓아올 놈들이야.”


“쫓아오면 쫓아온 대로 해결해. 거기서 끝내면,”


“ㅇㅇ이는 어쩌고”


“평소 하던 대로 임무 수행 하면 되는 거 아냐?
평소처럼 잘 하면 되잖아.”


“…….”


“왜 꼭 죽을 것처럼..”


“항상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해왔어.
이번 경우도 그렇고”


“....장난해? 그게 할 소리야 지금?”


“너, 살려고 이 일해? 아니잖아”



“.......”


“어떻게든 죽으려고 시작한거잖아”


“형”



“...죽자는 얘긴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거야.
그놈의 준비는 나만 하면 되는 거고.
너희들도, ㅇㅇ이도 할 필요 없이 나만”


“걔네가 그렇게 무서워?”


“…….”


“형이 이렇게 약해질 정도로 무서운 놈들이야?”


“수혁아”


“…….”


“그날, 파리에서 그놈 죽이던 날”


“…….”


“아니, 죽는 모습 지켜본 날”


“뭐?”


“직접 자기 머리에 총 겨누면서 그러더라,
죽고 싶은 찰나에 와줘서 고맙다고.”


“…….”


잠시 생각에 잠기는 정우.


마주한 타겟은 말끔하게 생긴 남자였다.
물론 약에 쩔어 반쯤 넋나간 눈빛을 했지만
그 힘은 살아있었다.
눈빛이 주는 힘, 생동감.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정우보다 여유로워 보였다.
그는 웃는 얼굴로 정우를 맞이했고
기꺼이 총을 받아들었다.


두렵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마음 편하다며
정확한 타이밍에 와줘 고맙다는 말까지 전했다.


그의 비릿한 미소는 정우를 소름돋게 했다.
생각보다 훨씬, 무섭고 잔인한 사람이 분명했다.


그는 자기 같은 족속은 죽음 따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죽게 되더라도, 목표했던 상대방이 죽는다면
거리낌없이 눈감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


마치 자살 폭탄 같았다.


그리고 그는,


“우린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만날 거라고.
그 땐, 기꺼이 내 목숨도 가져가겠다고..”


“형 지금 그 말 때문에 이러는 거야?”



“이제 알겠어. 그 여자가 왜 날 찾아왔는지”


“…….”


“날 다시 만나러 온 거야. 기꺼이, 내 목숨도 가지러”



“형!!!!”


“무서운 게 뭔지 아냐?
그놈들은 잃을 게 없고,
난 잃으면 안 되는 게 생겼단 거야”


“형...”


“걔네들은, 목숨 따위에
그리 신경 쓰는 놈들이 아니거든”


“…….”


“물론 그놈들이 원하는대로 해주진 않을 거지만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할 거야.
그냥, 나 항상 이래왔어 수혁아.”


“후...”



“그러니까, 우리 조카 잘 부탁한다.
피아노는.... 꼭 쳤으면 좋겠는데”



“그런 말 하지마. 짜증나”


“......걱정마.  ㅇㅇ이 위해서라도 꼭 살아남을 거니까”






*













빵빵-



“아 깜짝..!!!”


“타”


“뭐예요!!!”


“타 빨리. 30분 기다렸어”


“내가 분명히 2시에 나올 거라고...”


“1시 반부터 기다렸다고. 안 타?”


학교를 나서는 ㅇㅇ 앞에 떡하니 서있는 검은색 스포츠카.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로
삐까뻔쩍한 차를 몰고 온 그가
ㅇㅇ에게 재촉 아닌 재촉을 한다.


더불어 창문 사이로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놀란 ㅇㅇ가


“타요 타”


주변 눈치를 보며 바로 조수석에 올라탄다.


“후...”



“안녕?”


“아, 안녕하세요”


“와… 여기서 보니까 진짜 어린 애 같네”


“…….”


“잘 지냈어요?”


“네, 뭐... 그럭저럭”


“나도 뭐 그럭저럭”


“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차 안을 둘러보는 ㅇㅇ.
내부 또한 겉만큼 번지르르 했다.


“제임스 본드 아나?”


“007이요? 네”


“본드가 타는 차예요. 이게”


“어? 진짜요?”


“딱 열 개 있거든.”


“우리나라에요?”


“전 세계에”


“헐”


“하하하하하!!!”


ㅇㅇ의 리얼한 표정을 본 토이가 배를 잡고 웃는다.


“아 배 아파”


“흠.......”


“표정 진짜 재밌는 거 알아요?”


“저요?”


“응”


‘지는..’
속으로 백번은 더 했을 질문을 간신히 삼키는 ㅇㅇ.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토이에게 말을 건다.


“저기 근데요”


“네”


“존댓말이든 반말이든 하나만 하면 안 돼요? 헷갈려서요.”


“싫은데?”


“…….”


“내 맘이에요”


ㅇㅇ가 할 말을 잃은 채 창밖으로 고갤 돌린다.
‘또라이...’ 혼잣말도 잊지 않고.



“독일은 왜 갑니까?”


“아, 저 그게...”


“응?”


“오빠는 피아노 때문에 간다고 하는데...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피아노?”


“연주하게 됐다고 했거든요”


“갑자기 피아노를... 독일로?”


“네”


“그걸 믿어요?”


“네?”


“우리 셜록께서는 그걸 믿으시냐고.”


“그럼...요?”


“탐정의 기본은 의심인데”


“…….”


“내 생각엔, 만약 그게 맞다 하더라도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수혁이 성격 알잖아. 갑작스러운 거 싫어하고”


“다른 이유... 어떤 거요?”


“굳이 그쪽 데려가는 거면...”


“…….”



“뭘까”


얄밉게 웃는 토이.
ㅇㅇ가 고갤 내저으며 그를 한심스럽게 쳐다본다.


“도망가는 건가?”


“네?”


“위급상황인거지.
그쪽을 피신시켜야 할 정도로”


ㅇㅇ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모든 게 마냥 자연스럽진 않았기 때문이다.


“근데 아마 그 집이 제일 안전할 건데”


“집이요? 왜요?”


“청와대 보다 튼튼할 걸?”


“네에?”


“설계자로서 한 마디 하자면
그쪽 방은 요새 안에서도 요새,
예를 들어... 캥거루 주머니? 아니야,
인큐베이터 같달까.”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길 하는 토이.
ㅇㅇ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옆을 돌아보며 말을 잇는다.


지금부터 재밌는 얘기 해줄게”



끼이익-



“헙”


“법부터 지키고”


급브레이크를 밟고 정면을 보는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빨간불이다.


“크흐”


“후우.......”



“자 셜록, 이제부터 머리를 좀 굴려봐요. 네?
내가 몇 마디 안 해도 한 번에 알아듣게.”


“…….”


“KAP은 기본적으로 총을 써요.
크레센트는 칼을 쓰지만”


“네”


“그 외에도... 블러디 형 같은 경우엔
별 희한한 물건을 사용하지.
사람 죽이는 덴 도가 텄으니”


“…….”


“그럼 그 물건들은 다 어디 있을까-요”


“물건들이요?”


“응”


머뭇거리던 ㅇㅇ가 서서히 입을 연다.


“집...에?”


“빙고!!!! 와 열라 똑똑한데? 셜록 인정!!!!”


“집 어디요? 집에 그런 공간 없는데...”


“왜 없어. 숨어있지”


“…….”


“그러니까 요새라고 하는 거야.
집에 없는 무기가 없어”


ㅇㅇ이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 총과 칼이 수두룩하다니,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Are you okay?”


“어디 있는데요? 그 방”


“음... 방마다 다르지.
마스터랑 블러디 방은 지하에 있고
크레센트는 다락방이고”


“어떻게 그런...”


“어찌됐든 사람을 죽이잖아, 아무도 몰래.
최대한 비밀로 해야지”


“…….”


“그래서 활동명이 따로 있는 거고,
그쪽 존재도 숨기는 거고”


“…….”


“나한테까지 숨긴 거 보면
마스터가 그쪽 얼마나 아끼는지 알 것도 같고”


고갤 떨구는 ㅇㅇ이다.
이제야 정말 킬러와 한 집에 산다는 기분이 들어서.
 
“내가 너무 많이 말했나?”


“아니에요..”


“내가 말이 좀 많아.
알렉스랑 주고받는 게 습관이 돼서”


“네...”



“뭐 알지도 못하면서 대답은”


토이가 시부렁거리며 다시 엑셀을 밟는다.
하지만 ㅇㅇ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정면만 쳐다보는데.


“이제 좀 무서운가보네.”


“뭐가요?”


“식구들”


“아니요”


“표정은 맞는데?”


“아니에요 그런 거”


“나는?”


“네?”


“나 아직도 무서워요?”


“네”


“와.......”


“…….”



“존나 매력있어”


“네에??”


“좋다고. 하하”


“후.......”


“그쪽한테 예쁨 받으려면
이거 하나 더 가르쳐 줘야겠다”


“어떤 거요?”


“비밀번호”


“비밀번호?”


“그 방에 비번 걸려있거든”


“물건.. 방에요?”


“아니. 그쪽 방”


“제 방에요?”


“응”


“정말요??”


“어. 내가 걸어놨어”


“왜요??”


“마스터가 시켜서.
거기 창문도 다 방탄유리야.
블러디 형이 개고생 하면서 달았어. 크흐”


“방탄..유리.......”


“비번은 안팎에서 걸거나 풀 수 있게 돼있어.
비상사태를 대비한거지.
혹시 누가 침입했을 때 그 방만은 못 들어가게”


“…….”


“kind of shelter, got it?”


“shelter...”


“오늘 집에 가서 한번 해봐.
문고리 옆에 손바닥만 대면 무슨 얘긴지 알거야”


“…….”


“아... 너무 많이 알려주는데? 천하의 토이가”


“…….”



“내일 가지 말고 나랑 살래?”


“네에??!?”


“내 집도 니네 집만큼 튼튼하거든. maybe more”






*









“마담! 손님 왔다!!”


토이의 외침에 어디선가 나타나는 마담


“어떤 손님....... 어? 저번에 그 아가씨..”


ㅇㅇ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맞아. 저번에 그 아가씨”


“안녕하세요”


“여긴 왜 또 왔어요?”


“아 마담, 그게 지금 할 소리야?”



“여기가 어디라고...”


“그건.... 그래. 여기가 어디라고 또 왔을까?”


“네?”


“나갈 땐 맘대로 못 나가는 곳인데. 그치 마담”


“휴.......”


“일단 들어가지? 맛있는 거 줄게”


토이와 ㅇㅇ가 떨떠름한 표정의 마담을 지나쳐

서재로 들어선다.






“이해해요. 원래 좀 까칠해 우리 마담”


“두 분은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우리?”


“네”


“우리가 좀... 특별한 사이라서.”


“…….”


“의도치 않게,”


“…….”


“피를 나눴거든”


“네?”


태연하게 소파에 앉는 토이.
ㅇㅇ가 멀뚱멀뚱 쳐다보자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한다.


“앉아”


“네? 네”


“뭐 좀 마실래요?”


“아니요. 괜찮아요”


“와인 한잔?”


“아니요”


“그럼 맥주 마셔”


“흠... 네”


마지못해 대답하는 ㅇㅇ을 보던 토이가
껄껄 웃으며 다시 마담을 부른다.


“마담! 여기 맥주 두 캔!!”


“그.. 피를 나눈 사이가 뭔데요?”



“뭐겠어. 셜록처럼 생각해봐”


“혹시...”


“땡”


“에?”


“뭘 대답하든 땡이야. 그 말인즉 대답하지 말란 소리고”


“그런 게 어딨어요..”


“생각만 해 생각.”


“……."



“후.... 이 새끼 어디 갔지?”


“누구..요?”


“알렉스”


“알렉스라면...”


“마담!!!! 알렉스 어딨어!!!!!!”


신경질적으로 마담을 찾는 토이.
곧이어 마담이 모습을 드러낸다.

‘알렉스’를 들고.


“여깄다”


“얘 치우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네 침대 위에 있더라”


“내 침대? 아닐 텐데”


“자, 맥주나 받아”



“다신 옮기지마”



“알았어”


둘이 주고받는 눈빛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ㅇㅇ가
토이 대신 맥주 캔을 집어 든다.


“감사합니다아...”


그런 ㅇㅇ을 힐끗 째려보곤 쌩- 뒤돌아 나가는 마담.


“이 새끼야 너 어디 갔었어?”


토이는 오로지 알렉스에게만 열중한 모습이다.


“저.......”


“뭐”


“그 인형,”


“알렉스”


“…….”


“알렉스라고. 엄연히 이름 있는 놈이야”


“네...”


“얘 뭐.”


“아, 아니에요”


“흠.... 그럼 아까 하던 얘기나 더 해볼까?
맥주는 나 주고”


“네”


맥주 한 캔을 건네는 ㅇㅇ.
그러자 나머지 한 캔도 마저 가져간다.


“술 마시기 싫다며”


“그.. 렇긴 한데...”


“마시지마. 잡아먹을 것 같아서 안 되겠어”


“네?”


“나 술 마신 여자 좋아하거든”


“허어.......”


“마실래?”


“아니요”


“푸흐. 농담이야 농담”


“농담을 농담같이 해야 농담으로 받아들이죠”


“오호”


“…….”



“그럼 어디 진짜만 말해볼까요?”


“네?”


“나도 솔직한 거 좋아해요. 남들은 싫어하지만”


“왜, 왜요?”


“글쎄, 무섭고 재수없다던데”


“…….”


“또라이 같다고도 하고...”


토이가 벌컥벌컥 맥주를 마신다.
그 모습을 벙찐 얼굴로 쳐다보는 ㅇㅇ.


순간 토이와 눈이 마주치자 고갤 푹 숙인다.


“엄마 좋아해요?”


“엄마요?”


“…….”


“아니요. 별로”


“왜?”


“옆에 없으니까요.”


“있었으면 좋았으려나?”


“지금보단 나았겠죠”


“정말?”


“....... 엄마는 엄마니까”


“엄마는 엄마라.......”


토이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좋네. 그런 마음”


“…….”


“난 평생 못 가질 마음인데”


“…….”


“엄마가 옆에 있어도
평생 그런 마음은 안 생길 거예요.
나한테 엄마는,”


“…….”



“존나 지랄 같은 거야.”


ㅇㅇ가 침을 꼴깍 삼킨다.
‘솔직해진’ 토이는 그의 말처럼 정말 무서워보였다.
 재수 없기도 했고. 일단은 그냥 또라이 같았다.



지이잉-



“어, 잠시만요”



[아직 안 끝났어?]



“누군데”


“수혁오빠요”



[어. 아직]



“여기 오라고 해요. 아, 안 되는 구나”



[학교야?]


[응]


[뭐 이상한 건 없고?]


[이상한 거 뭐?]


[아냐. 끝나면 전화해]


[응]



“수혁이가 잘 해줘요?”


“네?”


“…….”


“아, 네. 당연히 잘해주죠”


“아침마다 피아노 친다며?”


“네!”


“부럽다. 난 한번도 못 들어 봤는데”


“오빠 연주요?”


“응. 새끼가 치사하게 나만 안 들려줘”


“오빠 연주가 좀 귀해요”


“나도 그 집 가서 살까봐”


“하하”


“농담 아닌데.”


“…….”


“푸하하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하하하!!!!”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하는 토이가  얄미운 ㅇㅇ이다.


“와, 진짜 귀엽다”


“됐어요”


“왜 그렇게 귀엽지?”


“하지마요”



“귀여워 죽겠네”


ㅇㅇ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싼다.


“푸흐.......”


“저기, 그, 저한테 알려주신다고 한 거 있잖아요”


“어떤 거?”


“비밀번호”


“아 맞다! 비번”


“알려주세요”


“되게 쉬워. 9999”


“네?”


“빵빵빵빵 한다는 걸 말렸지 내가”


“헐”


“다 블러디 형 짓이야.
뭐라더라, 비번은 까먹는 순간 엿되는 거라고?
무조건 쉬운 거 해야 된다고.”


“오빠가 그런 면에선 좀 단순해요..”


“그런 거 같아”


“9999라니...”


“구구콘 생각난다고 좋아하던데”


“풉”


“음. 또 뭐, 궁금한 거 있어요?
안 그래도 만나면 이런 얘기 해주려고 했었어.
그쪽도 이제 내 고객이니까 성심성의껏 대해야지”


“그.. 비밀의 방도 궁금하고...”


“비밀의 방? 아, 무기고?”


“네”


“그런 얘긴 좀 더 으슥한 데 가서 하자”


“으슥한 데요? 어디?”


“공장”


“아...”


“어떻게, 샤워 부스로 갈까?”


“아니요”



“그 ‘아니요’ 소리 좀 늦게 하면 안돼?
너무 빨라서 소름돋아”


“아니요”


“…….”


“...네”


“...갑시다”






*






“다녀왔습니다!!”


“ㅇㅇㅇ”


“응?”


“너 내가 전화하라고 했잖아”


“어? 아... 깜빡했어”


“…….”


집에 돌아온 ㅇㅇ과 마주한
수혁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다.
그는 심하게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


“하아... 너 정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품에 안기는 ㅇㅇ.


“미안해 오빠”


갑작스런 상황에 아무 말 못하던 그가
서서히 몸의 힘을 뺀다.


“학교 하루 이틀 다니는 거 아닌데
데리러 오라고 전화하기 좀 그래서...
내가 어린 애도 아니고”


“그래도,”


“미안하다니까?”


“…….”


다시 목소리에 힘주려 하자 더 꽉 껴안는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응? 미안해 오빠. 화 풀어”


“…….”


“잘못했어.. 한번만 봐주라, 응?
독일 가서는 오빠 말 잘 들을게!”


“그거 뿐 만이 아니라,”


“계-속 잘 들을게! 됐지?”


“…….”


“됐다고 말해 빨리”


ㅇㅇ의 재촉에도 한참을 망설이던 수혁이
결국 등을 어루만지며 어깨에 기댄다.



“걱정시키지마”


“응...”


“특히 오늘은...”


“응?”


“...아니야. 이제 들어가서 쉬어”


“히이, 좀만 더 이러고 있자”


“왜”


“그냥. 따뜻하잖아”


“짧은 옷 그만 입어. 추워”


“그거 말한 거 아니거든?”



“…….”


“아 몰라”


“…….”


“휴.......”


“ㅇㅇ아”


“응?”


“정말... 가도 괜찮겠어?”


“어디, 독일?”


“응”


“응! 좋다니까? 독일 가보고 싶었어!”


“형들 보고 싶을 거 아냐”


“일주일인데 뭐.
평생 볼 사람들 일주일 안 본다고 어떻게 되겠어?”


“…….”


“근데 자꾸 진욱오빠가
완전히 헤어지는 것처럼 말하더라고 아침에.”


“그래..?”


“....우리 일주일이면 다시 한국 오는 거 맞지?”



“…….”


“응? 맞지?”


“응. 맞아”


“…….”


“맞아. 무조건 와”


“진짜지?”


“진짜야”


“히히... 나 그럼 이제 진짜 짐 싸야겠다!
일주일이면 꽤 길잖아”


“그래”


품에서 벗어나 계단에 오르는 ㅇㅇ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수혁의 눈이 왠지 애처롭다.




안쓰럽고, 안타깝다.






*






새벽 2시.
아무 기척도 없는 조용함 중간에
ㅇㅇ가 몸을 뒤척인다.


한기를 느낀 건지 이불을 폭 뒤집어쓰는 ㅇㅇ.


하지만 이내 살짝 눈 뜨고야 만다.
그리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일어나 앉는다.


꿈을 꾼 건 아니었다.
그냥,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시커먼 바다 위에 혼자 둥둥 떠있는 느낌.
사람 많은 길거리 한 가운데에서
온 우주가 멈춘 느낌.


대체로 ㅇㅇ가 무척 싫어하는 느낌들이었다.


“후…”


이제 조금 있으면 독일로 향한단 생각이
그녈 잠 못 이루게 하는 것 같았다.


사실 잠들기 직전까지
진욱은 옆을 지키고 앉아 주의사항을 전했고,
정우는 왠지 모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ㅇㅇ을 쳐다봤더랬다.


 꼭 다신 못 볼 것처럼 말이다.


ㅇㅇ가 무릎에 고갤 파묻으며 다시 생각에 잠긴다.
뭐지, 왜 그러지.
다들 이상해. 분명 뭔가 있어.



쿵-



“응?”


순간 고갤 번쩍 드는 ㅇㅇ.



쿵-



다시 자신의 귓가에 닿은 쿵- 소리를
이해하려 애써본다. 하지만,



쿵- 쿵-



야속하게도 더 크게,
더 많이 울리기 시작하는데
그 순간



벌컥-




“ㅇㅇ아”


진욱이 문을 열고 황급히 뛰어 들어온다.





.
.
.





못다한 이야기




<그래야 그쪽 얼굴 한 번 더 보지>



토이와 함께 공장으로 내려온 ㅇㅇ가
신기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아직도 신기해요? 저번에 봤잖아”


“봐도 봐도 신기해요.”


“익숙해져야지 이제. 자주 올 건데”


“여기를요? 에이...”


“마스터나 블러디 형이 무슨 무기 쓰는지 안 궁금해요?”


“음... 궁금해요”


“거봐, 그럼 자주 와야 돼”


승리의 미소를 짓는 토이가 얄미운지
고갤 홱 돌려 버린다.
그러자 눈에 닿는 귀여운 피규어.




“이건 뭐예요?”


“아 그거, MP3 Player”


“MP3요? 음악 듣는 거? 우와..
의외로 취향이 좀 귀여우시네요?”


“이거?”


“네”



착-



“엄마!!!!”


“귀엽지?”


왼쪽 버튼을 누르자
엉덩이에서 작은 칼이 나온다.


“칼...”


“블러디 형이 만들어 달래서. 그 형도 갖고 있어”


“아...”


“이거 1테라짜리야. 가져”


“음악이 나오긴 해요?”


“응. 1테라라니까? 음악 15,000개는 들어가”


“허어...”


벙 쪄있는 ㅇㅇ을 보고 씨익 웃더니
벽에 기대어 서는 토이


“그쪽은 나한테 뭐 해줄 얘기 없어?”


“무슨 얘기요?”


“그냥. 이것저것”


“음....”


“어떻게 알게 됐어? 이런 일 하는 거”


“삼촌이랑 오빠들이요?”


“응”


“셜록이니까 당연히 알죠”


“푸흐..”


“뭔가 좀 이상했어요.
밤늦게 들어오는 것도 그렇고...
그냥, 그런 거 있잖아요. 분위기”


“음...”


“그러다 쪽지를 하나 발견했거든요.
숫자랑 알파벳 써있는 거”


“증거 확보네?”


“네. 히히...”


“뭐라고 써있었는데”


“네 자리 숫자랑 알파벳 하나가 같이 써있었어요.
그게 뭘까 한참 고민하다가 뭐, 운 좋게 알게 됐죠”


“어떻게”


“음... 오빠들이랑 삼촌이 늦게 들어온 날을
다 기록했었거든요.
각자 일주일에 한번 씩은 늦더라고요.
예를 들어 13일 15일 16일 이렇게”


“응”


“처음엔 뭘 어떻게 해야 되나 싶었는데
숫자가 눈에 들어왔어요.
왠지 날짜랑 연관있을 것 같아서
1, 3, 5, 6에만 동그라미 쳐봤는데
뭔가 윤곽이 잡히더라고요.
알고보니 숫자 배열 수수께끼였어요”


“…….”


“숨겨놨던 거죠 숫자 사이에 날짜를.
13일이면, 1438 이렇게.
첫째 자리랑 셋째 자리에 껴넣은 거예요.”


“오...”


“15일은 6125?”


“그건 둘째랑 넷째 자리네”


“네. 재밌죠!”


“각자 배열 위치가 정해져 있었어?”


“아니요 딱히 그런 건 없었어요.
삼촌 성격 상 복잡한 거 싫어하거든요.
일단 빠른 날짜대로 숫자 배열부터 한 다음
알파벳을 쓴 것 같아요. 그러니까,”


주변을 둘러보던 ㅇㅇ,
옆에 있던 화이트보드에 직접 설명을 시작한다.


“13일 15일 16일이면 먼저 숫자부터 만들고”


13일 1438
15일 6125
16일 9160


“그 옆에 알파벳을 넣은 거죠.
일을 부여한다고 봐야 되나?”


13일  1438 C
15일  6125 M
16일  9160 B


“이런 식으로!”


“와... 이걸 그쪽이 다 풀었다고?”


“네. 기록의 승리랄까?”


“장난 아닌데?”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얼굴 옆에 대자
토이가 껄껄 웃어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엔 별표랑 네 자리 숫자가
같이 있었어요. 이렇게”


☆3417


“그건 뭔데?”


“셋이 같이 나간 날이요. 정답은...”


“끝자리겠네. 17일”


“어? 우와! 어떻게 알았어요?”


☆3417


“나도 그쪽만큼 똑똑하긴 해”


“흐흐. 아무튼 이거 풀고 나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그랬겠네”


잠시 침묵이 흐른다.
각자 다른 생각에 빠진듯한 이들.


“이제...”


“어?”


“알려주세요. 무기고”


“아, 그거”




토이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갤 내젓는다.


“네?”


“생각이 바뀌었어”


“무슨..”


“나중에 알려줄게”


“에?”


“지금 다 알려주면 재미없잖아”


“그런 게 어딨어요!!!”


“한국 돌아오면 그때 얘기해”


“헐!”



“그래야 그쪽 얼굴 한 번 더 보지”




.
.
.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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