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많은 식구들






1:48 a.m.
시계 초침 소리만 울리는 늦은 새벽.
거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세 사람의 목소리가
 하나같이 차분했다.


아니, 이들은 그냥,
아무 말이 없었다.


적막이 흐르던 가운데
정우가 먼저 맥주캔을 입에 댔다.
보기 좋게 한 번에 털어 마신 그는
나머지를 스윽 둘러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라”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가는 정우


“잘 자”


진욱의 인사에 손만 흔들 뿐이었다.



쿵-



“넌 안 자냐?”


“형은”


“잠이 안 와”


“그럼 마셔 그냥”


먼저 맥주를 들이키는 수혁을 보고
따라 마셔 보지만 여전히 역부족인 듯 퍽 인상만 쓴다.


“저건 뭐야?”






“MP3. ㅇㅇ이 주려고”


수혁의 물음에 소파 구석으로 시선을 돌리자
귀여운 MP3와 헤드폰이 눈에 들어온다.


“형 거야?”


“어”


“생긴 게 참...”


“무시하냐?”



착-




“칼 있거든?”


엉덩이에서 나오는 칼을 보고 피식 웃는 수혁.
진욱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ㅇㅇ이 깜짝 놀라겠네”


“알아야 누르지. 겨드랑이 눌러야 나와”


“크흐...”


“혹시라도 누르면 너가 버려”


“싫어. 귀찮아”


“넌 끝까지 내 말 안 드는구나?”


“언제 끝날 줄 알고”


“언제든”


후우. 한숨 쉬는 진욱을 쳐다보던 수혁이
고갤 돌려 다시 맥주를 털어 넘겼다.


“야”


“왜”


“ㅇㅇ이 자냐?”


“형이 마지막까지 보다 왔잖아.”


“아 그렇지”


“…….”


“습관 됐어. 너한테 물어보는 거”


“자고 있을 거야”


“그렇겠지”


“…….”


“야 이수혁”


“또 뭐”


“너 그때 기억해?”


“언제”


“우리 처음 본 날”


“옛날 얘길 뭐하러 해”


“십 년도 안 됐구만”


“기억 안 나”


“진짜? 나 완전 생생한데”


“기억해서 뭐하게”


“너 놀리게”


“참나..”


희미하게 웃음 짓는 수혁을 보고
왠지 들뜬 얼굴을 하는 진욱.

자세까지 고쳐 앉으며 본격적인 이야길 시작했다.



“너 처음에 진짜 찌질이 같았어”


“뭐?”


“핏기 없이 창백해가지고.
흐물흐물 걷는 게 진짜 거지같았다니까?”


“하,”


“마르긴 또 엄청 말랐었지”


“남의 과거 그만 들추지? 형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나 뭐”


“수염 길렀던 거 기억 안 나? 집시 같았다고”


“헐... 누가 누구보고 집시래”



“엄청 촌스러웠어”


“크흐. 야, 너 사진 보여줘?”


“내놔봐”


“아유... 이걸 확,”


“정우 형한테 물어보면 알겠지”


“그래. 내일 물어보자”


“한국말 쓰는 집시 보기 힘들었는데 형이 딱,”


“그만 하라고”


진욱이 푸흐- 웃음을 뱉으며 수혁의 팔뚝을 발로 찼다.


“그러니까 옛날 얘길 뭐하러 해”


“갑자기 생각나는 걸 어떡해.
잠은 안 오고, 취하지도 않고”


“위스키 갖다 줘?”


“싫어. 일찍 일어나야 돼”


“가서 자 그럼”


“우리 수혁이 두고 어떻게 가”


“…….”



“내 동생 수혁찡”



“...그딴 건 대체...”


한껏 찡그리는 수혁을 보곤 낄낄대며 웃는 진욱.


“꼬마 환자가 쓰더라고.. 크흐흐 미안하다.
걔랑 세 시간 떠들고 나면 이렇게 돼”


“그런 꼬마들도 와?”


“많아. 내가 그랬지,
모든 정신병은 스트레스에서 시작된다.”


“…….”


“우리만 봐도 알 수 있지”


대답 없는 수혁을 빤히 보며 말을 잇는다.


“막둥이도 그렇고”


“많이 좋아졌잖아 ㅇㅇ이는”


“잠시 잊은 걸 수도 있어.
너무 힘드니까 회피하는 거지”


“완전히 사라지는 아픔은 없어”


“보통 사람들은 이겨내잖아.
ㅇㅇ이는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고”


“…….”


“그래서 불안해. 불안해 죽겠어”


“그렇게 약한 애 아니야. 믿고 기다리면 돼”


“만약에, 이건 정말 만약에 하는 말인데”


“…….”



“나 없을 때 ㅇㅇ이가 힘들어하면
려원이한테라도 보내. 도움 될 거야”


“뭔 소리야 또”


“어? 야, 진지하게 하는 말이니까 들어”


“그럴 시간에 그 새끼들 어떻게 죽일 건지
방법이나 연구해.”


“…….”



“진지하게 하는 말이니까 들어”


“크흐.......”


수혁이 웃음 터진 진욱을 두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자 이제”


“의리없는 새끼. 형 두고 혼자 가냐”


“나야 말로 일찍 일어나야 돼서”


“그래라”


“혼자 주접떨지 말고 들어가 빨리”


“어우 알았어!! 잔소리 하지마”


“잔소리는 무슨”


“후.......”


“안 가?”


“갑니다 가”


결국 성화에 못 이겨 일어나는 진욱.
수혁을 한번 째려보곤 방으로 걸음을 돌리는데,



픽-



순간 들린 이상한 소리에 숨을 멈춘다.






KAP

Bloody Midnight






픽-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멈춰 서서 소리에만 집중하는 진욱과 수혁.



픽- 픽-



멈추지 않는 소리에 둘이 시선을 마주한다.
그리곤 바로 현관으로 향하는데,



끼이익-



그새 조금 더 커진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채웠다.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진욱.
벽에 세워져있던 야구 배트를 잡더니
수혁에게 건네며 뒷문 쪽을 가리켰다.


“…….”


진욱의 지시에 뒷문으로 향한 수혁이
배트를 들고 준비 태세를 취했다.



탁-



이어 거실을 밝히던 스탠드를 끄곤
옆에 있던 유리컵을 집어 드는 진욱.




삼켜버릴 듯한 어둠 속에서
마른 침을 삼키는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진욱의 예상이 맞다면
지금 이 정체모를 놈들은 두꺼운 현관문에
잠금 해제 장치를 설치하고 있었다.


즉, 외부에 설치돼있던
모든 경보장치를 피해 들어왔단 뜻이었다.



끼이익-



더욱 커지는 소리에 뒤돌아 수혁을 확인했다.
그는 뒷문 앞에서 진욱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욱이 수혁을 보며 손가락을 귀에 대자
수혁이 고갤 끄덕인다.
곧이어 그쪽에서도 정체 모를 소리가 났다.



끽-



이때 찰나의 마찰음이 들렸고, 순간



쾅!!!!!



현관문이 아닌 정우의 방문이 활짝 열렸다.


“씨발,”


모습을 드러낸 정우의 손엔
웬 시커먼 놈의 목덜미가 잡혀있었다.
놈들이 현관 쪽이 아닌
정우의 방에도 침입한 모양이었다.


“형”


“50명 넘어. 준비해”


“뭐?”


“넌 빨리 올라가서 ㅇㅇ이...”



철컥,



그의 말에 집중하던 진욱이
재빨리 현관으로 고갤 돌렸다.


문고리가 돌아가며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문.
틈새 사이로 검은 무리들이 보이자
진욱이 한 걸음 물러서는데,



툭-



그의 발 앞에 작은 물건이 던져졌다.



연막탄이었다.




놈들은 열린 현관문과 뒷문으로 쉴 새 없이 들어왔다.
하나같이 칼을 들고 있던 이들은
일사불란하게 거실에 들어찼고,
꽉 메운 연기만큼이나 엄청난 수를 자랑했다.


수혁은 연신 배트를 휘두르며
뒷문으로 들어오는 놈들을 하나둘씩 때려눕혔다.
그의 표정엔 한 치의 일그러짐도 없었으며
도리어 차분하게 이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침묵을 지키는 건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공격을 받아 쓰러지는 쿵- 소리밖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침착했다.


마치 잘 훈련된 요원들 같달까.




진욱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연기를 직격으로 맞은 그는
눈을 찡긋하고 고갤 세차게 흔들며
정신 차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타 물밀 듯이 들어온 놈들에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골프채를 집어 들고 맞서기 시작했다.


그를 정신차리게 한 건 사방에서 들리는
 바람을 가르는 칼 소리였다.




정우는 누구보다 빠르고 날렵하게 놈들을 처리했다.
눈앞을 가로 막는 연기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공격하고 막아냈다.


비록 맨주먹으로 칼을 상대해야 했지만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2층에 혼자 있을
ㅇㅇ이 생각만 가득할 뿐이었다.




“이 씨발, 왜 계속 들어와!!!”


자신의 눈에 칼을 들이밀던 놈을
제압한 진욱이 주변을 돌아보며 외쳤다.
그러자 뒤에서 또 다시 돌진하는 시커먼 사내.


“개새끼야”


놈의 공격을 재빠르게 피한 진욱이
쥐고 있던 칼을 뺏어 그의 배를 찔렀다.


“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보며 한숨을 내쉬던 진욱.
살짝 고갤 틀자 고군분투하는
정우와 수혁이 눈에 들어왔다.


“이진욱!!!”


“형!!”


“2층!!!!!”


“어?”


순간 커진 동공.
바로 계단으로 시선을 돌린 진욱이
입술을 꽉 깨물며 뛰어갔다.

그곳엔 놈들 여럿이 계단을 뛰어 오르고 있었다.


“어디 가 이 씹새들아”


전보다 더 차가워진 얼굴로 놈들의 뒤를 공격하는 진욱.


놈들의 머리채를 잡아끌어 1층으로 던지곤
제일 먼저 뛰어가는 놈의 옆구리를 칼로 찔렀다.


“으윽…”


“하아...”


쓰러진 놈을 밟고 ㅇㅇ의 방으로 향하려던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놈을 끌고 다시 계단으로 향했다.


“심약자 관람 불가라”


혼잣말을 뱉으며 덩치 큰 놈을 계단에서 굴리자
쿵- 쿵- 소리와 함께 1층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 지켜보던 진욱,
퍽 인상쓰며 다시 1층으로 뛰어 내려가더니


소파에 나뒹굴던 MP3 플레이어와 헤드폰을 손에 쥐었다.




                                                         




진욱이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며 간신히 계단에 올랐다.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자
전원 버튼이 눌린 MP3 플레이어에서
뭔지 모를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ㅇㅇ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를 뛰는데,
그 순간



“…….”


진욱이 걸음을 멈췄다.
그의 등 뒤에는 피칠갑을 한 남자가 칼을 들고 서있었다.


뚝, 뚝- 칼에서 떨어지는 핏줄기


남자의 흔들리는 눈빛이 영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즈음


“윽!”


진욱이 재빨리 뒤돌아 남자를 발로 찼다.
그리곤 힘없이 나가떨어진 그에게 다가가
손에 있던 칼을 빼앗곤 높이 쳐들었다.


“겁도 없이...”


진욱은 단칼에 그의 가슴을 찌른 뒤
다시 ㅇㅇ의 방으로 향했다.



벌컥-




“ㅇㅇ아”


“오빠?”


“너, 너 안 자고 있었어?”


“방금 깼어...”


“왜. 빨리 자야 아침 일찍 가지”


당황한 얼굴로 방문을 걸어 잠그는 진욱.
ㅇㅇ의 눈치를 살피며
급히 방 안 창문으로 밖을 내다본다.


“오빠 뭐해?”


“어? 아니야 아무 것도. 바람 들어오면 안 되잖아”


진욱이 황급히 커튼을 친다.
밖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들어오는 시커먼 놈들로 가득했다.


“오빠”


“어”


“밖에서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았어? 쿵쿵거리던데?”


“어? 쿵쿵거렸다고? 아니, 나 못 들었는데”


“분명히 들렸는데...”


“아무 소리도 아니야. 걱정마”


“흐음...”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ㅇㅇ을 보곤 활짝 웃는 진욱.
하지만 등 뒤로 전해지는 고통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곤
ㅇㅇ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오빤 안 자고 뭐했어 여태까지”


“나? 어, 나는...”



쿵-



“어! 이거봐!! 쿵 소리 나잖아!!”


“이거? 아 이거... 영화 소리야. 영화 틀어놨어 내가”


“이 새벽에 영화를?”


ㅇㅇ의 물음에 머뭇거리던 진욱이
뜬금없이 ㅇㅇ에게 헤드폰을 씌웟다.


“어? 뭐야 이거?”


“MP3 플레이어. 내일 갈 때 가져가. 선물이야”


말을 이으며 볼륨 버튼만 계속 누르자
ㅇㅇ가 퍽 인상쓰며 외쳤다.


“아!! 귀 아파 오빠!!!”


“이거 오빠가 좋아하는 음악이야. 한번 들어봐, 어?”


“오빠!!”


“꼭 들어. 끝까지 들어야 돼. 5분, 5분이면 돼”


“뭐라고? 하나도 안 들려!!!”


헤드폰을 벗으려는 ㅇㅇ을 붙잡곤 다시 씌워주는 진욱


“듣고 있어. 밑에 틀어 놓은 영화 끄고 올게”


“안 들린다니까??”


“정말 안 들려?”


“뭐라고?”



쿵-



또 다시 들린 쿵 소리.
문을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활짝 웃으며 ㅇㅇ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금방 올게”


한 글자 한 글자 씩 전하는 진욱


“알았지?”


“금방 온다고???”



끄덕-



“알았으니까 소리 좀 줄여주면 안돼?”


ㅇㅇ의 뾰로통한 표정을 본 진욱이
피식 웃으며 락핑거를 보여줬다.



“락은 원래 크게 듣는 거야”


“아 오빠!!!”


“듣고 있어. 빼지 말고”


“오빠!!!!”


그리곤 플레이어를 ㅇㅇ의 잠옷 주머니에 넣어주곤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기다려!!”


“뭐야 이게!”



“5분, 아니 10분”


손가락을 펼쳐 보여주고 황급히 방을 빠져나가는 진욱



쾅-



방을 나서자 막 2층에 올라온 놈들이
덤벼들기 시작했다.


진욱은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곤 전보다 더 화려한 몸짓으로
달려드는 이들을 맞이했다.


피로 물드는 옷을 비웃듯
그는 손쉽게 놈들을 처리했고,
더 이상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즘
다시 ㅇㅇ의 방 문 앞으로 향했다.


“비밀번호?”


문고리 옆에 손을 대자 나타난 비밀번호 화면.
진욱은 망설임 없이 9를 네 번 눌렀다.



“기특한 새끼”


그리곤 다시 1층으로 걸음을 돌렸다.






*






혼자 남겨진 ㅇㅇ가 입을 삐죽이며
양손으로 헤드폰을 잡았다.


 “귀 아파...”


ㅇㅇ이도 잘 알고 있는 락밴드 ‘뮤즈’의 음악이었다.
진욱의 차에 타면 항상 흘러나오던 ‘뮤즈.’


“근데 이거,”


ㅇㅇ가 주머니 속 플레이어를 꺼내 든다.


“진짜 갖고 있었네”


정말 토이의 집에서 밨던 거랑 같은 모양이었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ㅇㅇ.
왼쪽 겨드랑이를 누르니 똑같이 칼이 튀어나왔다.


“하여간 못 말려”


ㅇㅇ가 고갤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는 터질 것 같았지만
화려한 기타 리프와 묵직한 베이스,
심장 박동 같은 드럼 소리가 꽤 듣기 좋았던 것 같다.


ㅇㅇ은 볼륨을 줄이지 않은 채 고갤 까딱이기 시작했다.


“young soulless is everywhere..”


가사를 읊으며 방안을 서성거리던 ㅇㅇ.
갑자기 우뚝 서 사방으로 눈을 굴리더니
진욱이 쳐놨던 커튼을 걷었다.


그리곤 밖을 내다보는데,


“허어.......”


집 앞에 잔뜩 서있는 검은 차와
검은 무리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뭐, 뭐야”


그 광경에 눈을 떼지 못하던 ㅇㅇ가
까치발까지 들어가며 더 얼굴을 내밀던 사이


“…….”


웬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무리 속에서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ㅇㅇ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남과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람이었다.


이어 손까지 흔들어 보이는 남자.
깜짝 놀란 ㅇㅇ가 급히 커튼을 치고 뒤돌아섰다.


“이게 다 무슨...”


ㅇㅇ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이 새벽에 집 앞에 진을 친 남자들,
진욱의 당황스런 표정, 쿵 소리…


“설마,”


급히 문 쪽으로 뛰어가 문고리를 돌려보는데
이상하게 열리지 않는다.
분명 잠기지 않았는데, 문고리는 돌아가는데...


“아,”


순간 토이와 나눈 대활 떠올린 ㅇㅇ.
밖에서도 잠글 수 있다고 했으니
방금 전에 나간 진욱이 짓이 분명했다.


ㅇㅇ가 가슴에 손을 얹고 크게 심호흡 한 뒤
조심스럽게 문고리 옆에 손바닥을 댔다.


그러자 문 표면이 희미해지며
그의 말처럼 비밀번호를 누르는 패드가 나타났다.


“지, 진짜네...”


천천히 번호를 누르는 ㅇㅇ


“999...9”


다 누르자 순식간에 화면은 사라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의 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문고리를 돌리자,


“헙”


이번엔 쉬이 문이 열렸다.




빼꼼, 밖을 내다 본 ㅇㅇ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문 앞에는 건장한 남자가 떡하니 누워있었다.
온몸에 피를 묻힌 채.


손으로 입을 막고 놀람을 감추는 ㅇㅇ.
문을 더 열어 복도 끝을 보자
그곳에도 남자 여럿이 누워있었다.
복도엔 피가 흥건했고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모든 상황이 귀를 때리는 음악과 어우러져
더 긴박하게 느껴졌다.
이에 ㅇㅇ가 헤드폰을 목에 걸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헤드폰을 빼고 나니
1층의 급박한 상황이 그대로 전해졌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도 들렸고,
누군가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도 들렸다.


떨리는 몸을 진정하지 못하고
간신히 복도 중간까지 걸어간 ㅇㅇ가
슬며시 계단 쪽으로 고갤 돌렸다.


“..엄..마....”


그리곤 곧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난장판이 된 거실에는 누워있는 사람 반,
 싸우는 사람 반으로 채워져 있었다.


ㅇㅇ은 그 속에서 재빨리 세 사람을 확인했다.
정우는 소파 앞에서 싸우고 있었고
진욱은 현관 앞에서 들어오는 이들과 맞서고 있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꼭 액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실 그보다 더 잔인하게
사람을 찌르고, 때리고, 밟았다.


자상하던 정우와 진욱의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수혁은,


“...오빠?”


.......


“오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1층 곳곳을 둘러보는 ㅇㅇ.
하지만 그 또한, 거실 어디에도 없었다.


ㅇㅇ가 입술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칼부림 소리와
고통의 외침, 거친 숨소리...
모든 것들이 온전히 ㅇㅇ의 귓가에 닿았고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 것 같은 수혁과 겹쳐졌다.


복도에 누워있는 사람들처럼,
저 거실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처럼
피투성이가 돼있을 수혁이 얼굴이 자꾸 ㅇㅇ을 괴롭혔다.


“오빠.... 오빠..!!!!”


뒤돌아 복도를 훑어보던 ㅇㅇ가 젖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한 남자가 ㅇㅇ을 보곤 계단으로 향했다.


그는 한눈에 봐도 무시무시한 칼을 들고 있었다.
얼굴엔 이미 칼자국이 나있었고
피 또한 뚝뚝 흐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입맛을 다시는 그의 표정이
ㅇㅇ을 소름돋게 했다.


“어, 어..!”


다급해진 ㅇㅇ가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 몸을 돌렸다.
하지만 발끝에 닿은 시체에 치여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이를 가만히 볼 리 없는 남자는
어느새 계단 앞까지 성큼성큼 뛰어왔고,
ㅇㅇ은 재빨리 일어나 반대편 수혁의 방으로 뛰었다.


그리곤 문을 잠근 채 숨을 가다듬었다.


눈엔 눈물이 가득했고,
입술엔 피가 맺혀 있었다.



쿵! 쿵쿵쿵!!!



신경질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남자.
문에 기대어 있던 ㅇㅇ가
화들짝 놀라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러자 남자는 문을 칼로 쑤시기 시작했다.
아예 뜯어낼 작정이었다.


“어, 어떡해...”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저 문은 언젠가 열릴 터였고, 그렇게 되면
ㅇㅇ은 이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도망쳐야 했다.
근데 어디로? 어디로 가지?
숨어야 하나? 숨을 곳도 없을텐데..!



쉬이이-



그 때, ㅇㅇ의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방 끝에 있는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


머뭇거리던 ㅇㅇ가 문을 확인하더니
바로 창문 쪽으로 뛰어갔다.
문은 곧 열릴 태세였고
방안에 숨을 곳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으로썬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집 뒤쪽으로 나있던 창문 밑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여차하면 집을 벗어나 경찰을 부를 셈이었다.
세 사람이 다치는 것보다 들통나는 편이 나았기에-


“제발... 흑 제발”


ㅇㅇ가 발을 동동 구르며 창밖을 내다봤다.
하지만 무서운 건 사실이었다.
뛰어내리자마자 잡힐 지도 모르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도 ㅇㅇ은



쿵!! 쿵!!!!



점점 더 헐거워지는 문을 보곤 질끈 눈을 감았다.
최악은 피해야 했다.


“후우…….”


의자를 끌고 와 위에 올라선 ㅇㅇ.

곧이어 들리는 쾅!!!!! 소리와 함께  발을 내딛었다.





“아아...”


철퍼덕, 밑으로 떨어진 ㅇㅇ가
다리를 잡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다친 곳은 없는지  옷을 털며 일어나는데,


바로 옆 창문에 시선이 꽂혔다.


창문은 거실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게끔 되어있었다.
불빛 하나 없었지만 ㅇㅇ은 대강
정우와 진욱의 위치를 짐작했다.


중요한 건 수혁이었다.


“아 어딨어..!!”


이쪽저쪽 자세히 훑어보던 ㅇㅇ.
저기 저, 정우 너머로 약간 마른 체구의 남자가 보일 즈음


“…….”


ㅇㅇ가 입을 다물었다.


유리창에 낯익은 남자가 비춰졌다.
그는 전처럼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꽤나 가까이 서있었다.


정확히, ㅇㅇ의 등 뒤에서.


“…….”


서서히 뒤돌아서는 ㅇㅇ.
그녀는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남자는 큰 키를 자랑했다.
창백해 보일 정도로 말랐으며
특유의 눈빛은 공포심을 자아냈다.


“안 추워요?”


“…….”


낮고 단정한 목소리를 가졌으나
그것마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남자는,


“맨발이잖아요. 발 시렵겠다, 그쵸?”


잔인한 웃음을 띠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갈까요?”


“…….”


“들어가요. 여기 ㅇㅇ씨 집이잖아”


자연스럽게 ㅇㅇ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뒷문으로 들어가는 남자.
ㅇㅇ은 숨도 쉬지 못한 채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을 뿐이었다.


뒷문에는 칼에 찔린 사람,
다리가 부러진 사람, 머리를 다친 사람 등
여럿이 쓰러져 있었다.


남자는 그들을 발로 차며 걸었고
덕분에 ㅇㅇ도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덜덜거리며 걷는 ㅇㅇ을 본 남자는
또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곤 계단 밑까지 가서야 걸음을 멈췄다.


이제 거실에 서있는 사람은 몇 되어 보이지 않았다.
정우와 진욱을 포함한 열 명 정도.
ㅇㅇ가 애타게 찾던 수혁은
주방 안쪽에서 싸우고 있었다.


“좀 시끄럽죠?”


“…….”


“듣고 있어요 이거.”


목에 걸쳐둔 헤드폰을 빼 다시 귀에 껴주는 남자.


ㅇㅇ은 그저 말없이
차오르는 눈물만 삼킬 뿐이었다.




헤드폰 속 음악은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고
눈앞에 벌어지던 싸움 또한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은 매우 지친 표정을 지었다.




정우는 힘이 빠진 팔로
자신에게 달려오는 남자를 막아냈고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치며 쓰러트렸다.



수혁은 여전히 날렵했다.
놈들도 달려들기 무서워 할 정도로 빠르고, 민첩했다.
하지만 그 또한 힘이 빠지긴 마찬가지였다.
자꾸 손에서 미끄러지는 칼 탓에
바닥에 있는 아무 물건이나 잡고
놈들과 싸우고 있었다.


진욱의 상태는 좋지 않아보였다.
비틀거리기까지 하던 그는
자신의 눈앞에 있던 마지막 상대를 제압한 뒤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벽에 기댔다.


그러던 순간,




“…….”


“…….”


공중에서 눈이 마주쳤다.




ㅇㅇ가 진욱의 얼굴을 보곤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얼굴도 피투성이였으며 옷 또한 피에 젖어있었다.


“오..빠.......”


ㅇㅇ의 말소리가 들리자 어깨를 더 부여잡는 남자.


당황한 듯 아무 말도 못하던 진욱이
ㅇㅇ을 향해 한 걸음씩 떼기 시작했다.


“오빠!!!”


그를 보곤 앞으로 뛰어 나가려던 ㅇㅇ.
하지만 남자의 강한 손길에 저지 되고
헤드폰마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거 놔!!!! 놓으라고!!!!!!”



“이러면,”


목에 칼을 대는 남자.
갑작스런 상황에 말을 잃은 ㅇㅇ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ㅇㅇ아!!!!!!!!!!”






*






“진짜 대단하시네요. 100명 좀 안 됐었는데”


대치 상황.
ㅇㅇ을 두고 남자와 세 사람이
뜨거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깨끗한 얼굴의 남자와 달리
온통 피범벅이 된 세 사람 눈엔
오로지 ㅇㅇ의 얼굴 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칼 앞에서 온 몸을 떠는 ㅇㅇ만.


“많이 다치지도 않고.
와.. KAP 명성이 거짓말은 아니었나 봐요”


비꼬듯 말하는 남자를 매섭게 보던 정우가
천천히 입을 뗐다.



“원하는 게 뭐야”


“내가 누군진 안 궁금하고?”


“다 필요 없으니까 칼부터 치워”


차가운 목소리로 남자에게 경고하는 진욱.
수혁은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다시 고쳐 잡았다.


“되게 귀하네, 우리 ㅇㅇ씨”


애써 울음을 참는 ㅇㅇ.
감았던 두 눈을 떠,

앞에 서있는 세 사람을 천천히 둘러봤다.


“삼촌...”


“…….”


“근데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되겠던데요?
창문으로 뛰어내릴 정도면 이 친구도 자질 있어 보여.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뭐?”


“대단해. 참 대단한 집안이야”


남자의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메아리로 퍼지는 느낌.


“원하는 거 말하고 놔줘.”


“말하면, 다 들어줄 겁니까?”


“…….”


“어렵지 않은 일이긴 한데.”


“삼촌”


ㅇㅇ가 고갤 저었다.
뭐가 됐든 섣불리 결정하지 말란 뜻이었다.



“최근에 만난 여자, 그 여자도 이렇게 말했겠죠?
한 사람만 죽이면 된다고”


“…….”


“나도 똑같아요. 한 사람만 죽이면 돼”


“근데 나는,”



“그 여자가 죽었으면 해”



정우의 동공이 커졌다.
적어도 인영과 같은 편일 거라 생각한 그였다.



“아침에 공항으로 와요.
우리 대표님이 보고 싶어 하시니까”


“그럼 당신,”


“이제 좀 이해가 되시나. 대표님이 보내서 왔어요 나”


…….”


“그 여자도 참 바보같아.
아직도 모르나봐, 우리 손바닥 위에 있는 거”


“…….”


“그러니 우리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예요.
그 여자는.... 뭐랄까, 썩은 동아줄이랄까”


“그딴 줄 같은 거 필요 없다면”


“아마 ㅇㅇ씨가 먼저 죽겠죠”


“이 개새끼가..!!”


화를 참지 못하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는 진욱



“다 살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내일, 원래 하려던 대로
공항으로 가서 대표님 만나요.
그분 지시대로만 움직이면 아무도 안 다칠겁니다”


남자가 씨익 웃으며 다시 ㅇㅇ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오늘 일은 미안했어요.
대표님께서 여러분 실력 좀 알아보라 하셔서..”


“…….”


“그럼 내일 봅시다. 아, ㅇㅇ씨는 내가 데려갑니다”


“야!!!!!!!”


남자가 말을 마치고 ㅇㅇ의 어깨를 당기던 그때,

ㅇㅇ가 주머니 속 플레이어를 꺼내 왼쪽 버튼을 눌렀다.
그리곤,



푹-



“으윽..!!!”


남자의 다리를 찌르고 품에서 벗어났다.


“ㅇㅇ아!!!!”


곧바로 진욱의 품에 안긴 ㅇㅇ.
그 틈을 타 수혁이 잡고 있던 칼을
반대편 다리에 던져 남자를 주저앉혔다.



“너, 너...”


“오빠... 흑 괜찮아? 응?”


“..... 나 괜찮아. 울지마”


진욱이 ㅇㅇ을 다독이며 정우를 쳐다봤다.
눈빛을 읽은 그는 지체없이 남자에게 향했고,
수혁 또한 뒤를 따랐다.


“ㅇㅇ이는 우리가 데리고 있을 거니까”


“하아…”


“네가 이 집에서 나가”


“후회... 할텐데?”


“원하는 대로 해줄테니까 나가라고”


“형,”


“그 말을 어떻게 믿지?”


고갤 숙이며 흐릿한 미소를 짓던 정우가
남자의 다리에 꽂혀있던 칼을 빼내 목에 대며 말을 이었다.


“으악!!!!”


“살려서 보내주는 거 보면 모르겠어?”


“으윽....”


“안 할 생각이었음 벌써 찔렀겠지.
네가 ㅇㅇ이 목에 칼 대던 그 순간에”


“....하아..”


“죽을 정도로 찔린 건 아니니까
가서 잘 치료받고. 아침에 보자고”


“…….”


“아, 대푠지 뭔지한테 꼭 전해.
다시 한 번 이딴 식으로 장난치면
뼛조각도 안 남게 없애버릴 거라고”






*






병원으로 가는 차 안.
운전대를 잡은 수혁과 옆에 앉은 정우,
진욱의 출혈을 막고 있는 ㅇㅇ 모두 말이 없었다.


그저 심각한 표정으로 앞만 볼 뿐이었다.
마치 어떤 말이든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될 것처럼.


그렇게 한참을 침묵 속에 달리던 중,


“아 쪽팔려...”


진욱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가”


“칼 맞은 거 처음이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쪽팔린 걸 어떡해”



찰싹-



“아아...”


“조용히 해”


“칼 맞은 것 보다 네 손이 더 아파”


“오빠,”


“으유, 나 안 죽는다니까? 지금까지 나불대는 거 봐”


“그래도 가만히 좀 있어. 말도 하지 말고”


“나 의사야. 내 몸은 내가 잘...”



찰싹-



“…….”


“오빠 죽으면 죽을 줄 알아”


“히이.......”


“웃지마”


백미러로 뒤를 힐끗 쳐다보는 수혁.



히히 웃는 진욱을 보곤 입술을 깨문다.


“ㅇㅇ아”


“왜 또”


“우리한테 궁금한 거 많지?”


“아니”


“없어?”


“응”


진욱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시선을 돌리며 말을 잇는다.


“알고 있었어. 생각보다 많이”


“뭐?”


셋의 시선이 모두 ㅇㅇ에게 머물렀다.
다들 하나같이 놀란 표정인데,


“토이도 알아”



끼이이익-



“아!!!!”


“오빠!!!”


급브레이크를 밟은 수혁의 시선이 백미러에 닿아있다.


“뭐하는 거야!!! 나 환자라고 환자!!
‘차에 환자가 타고 있어요’ 몰라?”


“네가 토이를 어떻게 알아”


“만났어”


“그러니까 네가 왜..!”


“일단 병원부터 가. 오빠 눕혀놓고 얘기해”


여전히 ㅇㅇ만 쳐다보던 수혁,
정우가 어깨를 두드리자 간신히 엑셀을 밟았다.


“살살 하라니까... 씨...”


“..오빠 진짜 괜찮은거지?”


“겉에만 긁힌거야. 내부 장기 손상도 없어”


“근데 피를 왜 이렇게 많이 흘려”


“아, 과다 출혈로 힘들 순 있겠다”


“…….”


진욱이 ㅇㅇ의 매서운 눈빛을 외면하며 작게 읊조렸다.


“으... ㅇㅇㅇ 무서워서라도 빨리 나아야지”


또 다시 흐르는 침묵


진욱의 상처를 들여다보던 ㅇㅇ가
방금 전 일어났던 일들을 회상하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화에서만 보던 장면이었다.
그것도 난폭한 영화에서,
주인공이 피를 흘릴 땐 애써 외면하던
그런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었는데.


.......


여전히 집안 곳곳엔 그들이 흘린 피와
남기고 간 칼들이 가득할 터였다.


“후.......”



ㅇㅇ의 한숨 소리가 귓가에 닿자 살짝 돌아보는 진욱.

이내 볼을 어루만지며 작게 속삭인다.



“...미안해”





.
.
.





못다한 이야기








<너는 나에게 다가와>



저기, 응급실 복도 끝 의자에 ㅇㅇ가 앉아있다.
두 손을 꼭 마주잡고 있는 걸 보니
아직도, 여전히 떨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용서도 빌고 싶지만
그럴 자신이 없다.


그럴 자격 또한... 없다.


전부터 궁금해 했던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에 대한 답은


어쩌면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답은,



“오빠!!”



우리가 만난 그 순간부터




“이리와. 거기 서 있지 말고”


ㅇㅇ이의 애처로운 눈길에도 난 그저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가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앞으로도 계속, 너에게 있어 나는
이 정도의 거리를 둬야 할 것만 같아서.


“빨리”


ㅇㅇ가 내게 손을 뻗는다.


몇 번을 망설이던 나는 결국
터벅터벅, ㅇㅇ이에게 다가갔다.




코앞까지 걸어가 살짝 손을 잡아주니
그대로 품에 안기는 너


“그렇게 떨어져 있지마”


“…….”


“응?”


“알았어”


ㅇㅇ이가 날 더 꽉 껴안는다.
두려움의 크기만큼


“오빠”


“…….”


“미안해”


“…….”


“아는 데도 말 안 해서. 속이고... 모른 척 해서”


순서가 바뀌었다.
이건 내가 할 말이지 네 입에서 나올 게 아니야.


“말하고 싶었는데...
계속 때만 기다렸는데 그게 잘,”


“ㅇㅇ아”


“…….”


“나는 매주 사람을 죽였어”


“…….”


“아침엔 피아노 치고 밤엔 사람 찌르고.
그렇게 살아왔어 나는”


“오빠...”


“일말의 동정심 없이
뒤도 안 보고 걸어 나오면서
아무렇지 않게 칼에 묻은 피도 닦고”


“…….”



“또 아무렇지 않게... 너한테 웃어줬어.
그래서, 그래서 미안해”


숨이 턱 막혀온다.


몇 번이고 생각해 본 상황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내 입으로
진실을 말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 손으로... 더러운 손으로 지금 또
 널 안고 있어서. 그래서 미안해”



미련없이 네 곁을 떠나리라.




“그냥... 네 앞에 있어서 미안”


품에 안긴 ㅇㅇ이 뒤로
상처투성이가 된 내 손이 보인다.


드디어, 그렇게 바라던 대로
잔뜩 상처 나버렸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지


미어지는지.



“...오빠”


“…….”


“나 좀 봐봐”


품에서 나온 ㅇㅇ가 날 불렀다.


“봐봐, 응?”


차마 볼 자신이 없어 외면하던 얼굴.
젖어있는 목소리가 마음에 걸려
살짝 고갤 돌리던 순간,


.......


ㅇㅇ의 숨결이 내 입술에 닿았다.


꾹 감은 두 눈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까치발 때문인지 살짝살짝 몸이 흔들렸다.


그래도 ㅇㅇ이는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나는 그냥, 그게 꼭,
네 마음인 것 같아서


어쩌면 내 마음일 것 같아서


조심스레 ㅇㅇ이를 다시 품었다.




떨리지 않게, 흔들리지 않게
다시 품에 안았다.




.
.
.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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