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두극의 선구자

이경희 수필가를 만나다'

 왼쪽 정목일 이사장 / 이경희 수필가  

79년 꼭두극 국제기구인 유니마에 한국을 가입시키고 한국본부 회장직을 맡은 다음 꼭두극단 ‘어릿광대’를 창단, 모가비(단장)역할을 열정적으로 해낸 수필가. 계간지 꼭두극을 펴내고 꼭두극 양주별산대로 주목을 받기도 했던 수필가. KBS 라디오<스무고개>  <재치문답>등에 출연하여 박사로 더 알려졌던 이경희 수필가를 만났다.


대담 : 정목일 이사장

일시 : 2009년 7월 17일 금

장소 : 경희궁의 아침 아파트(선생님 자택)

글과  사진  : 권남희 편집주간


광화문 한복판에 이경희 수필가가 산다.  ‘경희궁의 아침 아파트’현관을 들어서니 보통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크기 김영주 화가의 추상화가 맞이한다. 거실 창문 쪽으로는 작은 책상 일년 반전에 고인이 되신 부군의 영정놓여져 있고 책상 유리장안에는, 휴대폰, 만년필, 안경, 은수저 등, 고인의 유품들이 담겨있다. 왼쪽으로 선생님의 책상과 노트북이 있다. ‘그’를 혼자 있게 하기가 안돼서 작업공간을 거실로 옮겨 글을 쓰신다고 한다. 일상의 물건들이 예사롭지 않은 설치작품처럼 구석구석을 장식하고 있다. 서재를 들어가니 책꽂이 맞은 벽에  신석정 시인이 써주신 ‘모란’이란 제목의 시화(詩畵) 액자가 높게 걸려있다. 

 

 함께하기 위해 작업실을 거실로 옮기다 

꼭두극 잡지

사인해주시는 선생님

 정목일 :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꼭두극 창단을 하여 세계에 한국을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일이나 처음 시작하여 이끌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꼭두극을 하게 된 동기와 극단 창단 일화를 듣고 싶습니다.


이경희 : 한국BPW(전문여성직클럽)창립멤버로  국제회의에  참가하는 등, 외국에 나갈 때마다 보게 된 마리오네뜨(줄꼭두극) 공연을 보고 감동을 받았었지요. 독일에 가서 유니마 이사의 도움으로 유니마(unima 국제꼭두극 연맹) 개인회원으로 가입하고, 또 마리오네뜨 제작 기초강습을 받고 돌아왔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아무런 바탕이 없지 않겠어요? 우선   korea center를 만들어야했고 그러다보니 회장을 맡아 당시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발기위원으로 모셨습니다. 구상시인. 김소운 수필가 . 이근삼 선생님. 이진순 연출가 , 조동화 춤 발행인, 김수근 공간대표 등 이 같이 도와주셨습니다. 줄로 조종하는 마리오넷을 우리나라에 들여왔을 때 민속학자와 언어학자에게 자문을 받아  ‘꼭두극’이라는 순우리말을 쓰기로 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사용했던 인형극이란 말은 일본어로 어린이들의 놀이차원의 극입니다. 꼭두극의  매력은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공연예술로 거기에는 해학이 있고 정서가 있고, 드라마, 음악, 미술, 문학 등이 다 포함된 공연예술의 또 다른 장르입니다. 생명이 없는, 가만히 놓고 보는 인형(doll)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거지요. 바로 우리의 전통 꼭두각시놀음(puppet show)이 생명이 들어있는 꼭두극입니다.

꼭두극 전문지도 계간으로 발행하였지요. 그 에 한국이 유니마회원국이 된지 4년있은 첫 번 총회 때 국제이사가 되기도 했지요.


무슨 일이든 쉬운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하고자 하는 일이 나만을 위한 일이 아니고 상대방과 에게 똑같이 기쁨을 주는 일은 이루어지더군요. 


: 현재 우리나라의 꼭두극의 현황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유니마 한국본부가 생긴 이후 꼭두극단이 많이 생기고 지금은 아주 활발히 공연들을 갖고 있습니다. 춘천인형극축제도 십년이상 이어지고 있고요.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 꼭두극사회가 이만큼 발전된 것을 크게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동숭아트 센터 김옥랑선생이 회장직을 맡아 하고 있지요. 이 분은 꼭두극단 ‘낭낭’도 창단하시고 꼭두극공연도 한 경험이 있는, 여러 가지로 능력있는 분이라 앞으로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정 : 1970년 첫 수필집『산귀래』는 삽화도 직접 그렸고 책에 대한 정성도 대단하여 페이지마다 선생님의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책을 냈을 때 정비석 소설가는 서울경제신문에  ‘사금채취의 명수’라 평을 했고 황순원 소설가, 김소운 수필가로부터 편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마흔의 늦은 나이라고 밝혔는데 어떤 생각이었는지요. 

 

 첫수필집내지 그림-직접그림

 직접그린 수필집속의 그림


:  당시 많은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했지만 아무리 일을 해도 나를 충족시키는 느낌이 없었어요. 책에도 ‘크게 허망함을 느꼈다’라고 썼지만 나를 만족시키는 일이 무엇인가, 그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던 중인데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글 청탁이 많이 오더군요. 본격적으로 문단데뷰를 위해 글을 쓴 것은 아니에요. 어떻든 374페이지 분량인데 8월부터 시작하며 교정까지 90일 만에 책을 써냈지요.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김소운 선생님, 피천득 선생님 등, 원로 문인들께서 신문에 서평을 내 주셔서 글을 쓰는데 힘이 생겼어요.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쓰는 일이에게 제일 보람을 느끼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 기행수필에도 첫 장을 열었다고 해야겠지요. 해외여행도 쉽지 않았을텐데  77년 『남미의 기억들 』기행수필집을 출간하였고 이후 1972년대부터 2007년까지 여행기를 총망라한 기행수필집의 출판기념회를 지난 늦봄 가졌습니다. 신선했던 부분은 당연히 주인공이여야 할  선생님은 숨고 촛불밝기의 실내에서  문학과 음악과 영상이 있는 출판기념회를 가지셨는데 선생님답다고 느꼈습니다.


: 저를 위해 출판기념회에 와주신분들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 생각해 낸 아이디어 였습니다. 다행히 모두들 좋아하셔서 기쁩니다. 음악평론가 선병철 선생님께서 아주 신선한 발상이라고 하시며 저의 기행수필을 두 번씩이나 읽고 수필집 속의 발길을 따라 음악을 선정하고 영상과 함께 멋진 해설로 진행을 해주신 덕분이었습니다. 그 분께 감사한 마음이지요. 1970년 대 당시 여자가 해외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보면 행운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로  BPW(전문여성클럽) 창립회원이었던 관계로 국제회의나 일 때문에 해외에 나가면서 그 때마다 여행코스를 늘려가며 다녔지요. 한국이 처음으로 참가한 벨기에 브뤼셀 제 4회 국제도서전참가도 기억에 남고  주간  칼럼을 연재하고 있던  코리아헤럴드  특파원자격으로 남미 이민자들의 생활상을 취재하는 일도 하였지요.   

: 수필문학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한 계획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 저는 글을 어렵게 쓰지 못합니다. 읽힐 수 있는 쉬운 글을 쓰면서  아름다운 인생의 마지막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 세상을 뜬 후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사람이 되는 것 이외에 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정: 백기사 공동대표( 백남준을 기는 사람들)이신데 이번 7월 20일 백남준 아트센터 행사가 조선일보에 기사로 소개되었습니다. 모임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시는지요.

 이 : 백남준은 세계에 내놓을 한국의 국가브랜드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었던 그의 예술을 정확히 알리기 위한 첫 번째 행사로 백남준의 77세 생일인 7월 20일에 

백남준의 1981년 작품인 ‘태내자서전(胎內自敍傳)’을 국악인 황병기 선생이 엄마 뱃속에 있는 백남준이 되고 제가 백남준의 어머니 역을 하는 포퍼먼스 형식의 낭독을 하게 됩니다. 세계적 아티스트가 되기 위한 백남준의 DNA를 엿볼 수 있는 아주 특이한 행사가 될 것입니다. 백기사는 백남준 아트센터를 도우며 그의 연구를 후원하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 1984년 35년 만에 고국을 찾은 백남준 선생이 서울에서 하고 싶은 세 가지 중의 하나가 ‘유치원친구 이경희’를 만나고싶다고 하여 만난 일은 화제였습니다. 많은 여성들의 로망인데 같은  애국유치원을 다녔고 또 부모님들이 몰래 정혼한 사이였다고 하니 한편의 동화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  이제 다시 ‘나만 아는 백남준에 대해 책을 내려고 합니다. 백남준 연구에 도움이 되는 일은 마다않고 할 생각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아쉬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좀 더 마음을 열고 그가 살아있을 때 사양치 말고 그의 예술세계와 교류를 하였다면  더 많은 자료를 남기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착하고 어린애같이 순수했던 사람이였지요.

 

 이경희수필가의 <백남준 이야기>

어머님유품

 

  글에도 생명이 있어서 정말 진실되게 써야겠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1970년에 낸 『산귀래』수필집에 ‘왕자와 공주’라는 제목으로 내가 남준이 이야기를 썼는데 백남준도 1968년 한국에 처음으로 공간잡지사에 글을 보내면서 ‘뉴욕단상’이란 제목 속에 저의 이야기를 더군요. 1986년 미국에 갔을 때 화가 이상남씨가 나를 찾아와서 그 글을 카피한 내용을 보여주었어요. 1968년에 쓴 글인데 18년을 떠돌다가 나에게 읽힐 때 너무도 놀라웠습니다. 에도 생명이 있어서 언젠가는 꼭 읽혀야 할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정 : 선생님의 열정과 창의력을 이제 한국수필가협회에 쏟아주었으면 하고 개인적으로 바람을 가져봅니다. 이 공간 역시  선생님의 생각처럼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방, 문화예술을 격의 없이 논하는 곳으로 자리 잡기를 희망합니다. 


이경희약력 :호  唯史. 1932년 12월 15일 서울 출생. 숙명여고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 대학 이학년 시절부터 KBS 라디오 <스무고개>와 <재치문답> 등 프로그램에 박사로 출연하기 시작하여 KBS텔레비젼 ‘나는 누구일까요 ?’ ‘나의 직업은/’ 등 이십년 가까이 방송 패널로 출연하였다.  1970년 첫수필집 『산귀래』를 시작으로『뜰이 보이는 창』『현이의 연극』 『남미의 기억들』등 열 두권의 수필집이 있다.   『백남준이야기 』로 현대수필문학상을 받았다.  수필 ‘현이의 연극’은 중학교 국정교과서에 선정되어 현재까지 삼십년 간 실리고 있다. 1994년부터 2007년까지 『월간 춤』지에 기행수필을 연재하였다.   

 

 

 같이 쓰던 소파 (영국에서 주문했던 1.3조 소파중 하나 )

 커피를 직접 타내는 이경희 수필가

 신석정 '모란' 시화  

 현관입구 김영주 화가의 그림

 거실의 디지털 기기들

 부군유품을 정리해두었다

  주방에 놓인 난 두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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