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에는 봉사가 필요
봉사 전문가도 있다
봉사자에게 갑질하는 유가족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만…


▲학생 봉사활동




더 세월
(The Sewol)



제 31회



봉사의 원칙


가슴을 아프게 하는 표현은 다양하다.


너를 꺼내지 못해
너를 보내지 못해
감춰진 것이 드러나게 해줘
가만히 있으라
잊지 않겠다.
시간이 분하다.


참사 6개월 만에 나온 단편영화 <잊지 않겠습니다>는 안전사회로 가는 길, 국가는 뭔가를 생각하게 했다.


학생들이 의자로 창문 깨는 시도가 영상에 나타났는데, 이때 누군가 바깥에서 깨줬더라면 그들은 살았을 것이다


한승석 씨는 2미터 물에 잠긴 좌현 문을 통해 살아나왔다. 그는 구명조끼를 안 입은 게 다행이라고 했다. 조끼의 부력이 헤엄을 방해할 수도 있었다. 하늘로 향한 우현은 밧줄만 던져줘도 살았는데, 허다윤 양은 헬기 구조마저 친구한테 양보했다.


세월호 304명 사망 사건은 한국의 해난사고 중 두 번째로 1970년 12월 남영호 326명 사망 사건 다음이다. “가만히 있어라”는 비상식적인 안내방송과 정부의 부실한 대처는 두고두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사고 후 첫 겨울을 앞두고 서정민과 이순정은 진도체육관을 찾았다.
진도체육관은 유가족과 봉사자, 방문객으로 어수선했다.


서정민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진도 거리의 은행나무가 가을을 마감하는 낙엽을 흩날려서가 아니라 체육관의 온갖 언어들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미수습자는 “선체 절단을 해서라도 먼저 아이들을 찾아 달라”고 울부짖었다.
정부는 겨울 날씨와 제반 여건의 어려움을 들어 잠수 수색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유가족협의회는 진상규명을 위해서 선체 절단은 안 된다고 했다.


미수습자는 유가족협의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시민단체도 변호사도 유가족협의회도 자신들을 고립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좌절을 한 번 더 먹었다.


이순정이 자원봉사 간사와 대화를 나눴다.
간사의 첫 말은 “전 아는 체하는 사람 싫어요”였다.

그럼 어떤 사람을 좋아해요, 묻지 않았는데 그녀는 곧 말을 이었다.


“성경에도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했잖아요. 동참이 중요한 걸요.”


진도체육관에는 삼선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유가족이다. 언제든지 뛰쳐나가야 하니까. 신고 벗기가 불편하므로 아예 슬리퍼로만 생활한다.


진실이 거짓을 이기지 못하자 대안언론 조직이 생겼다. 거기에도 진실과 거짓이 비빔밥이 되어 전파를 탔다. 대중은 혼란에 빠졌다.


진도 자원봉사자는 7개월 동안 5만 명 이상이었다. 이들은 서명을 돕고 피케팅 일인시위를 하기도 했다.


자원봉사는 사전 승인이 필요하다. 일하다가 다칠 수 있으니 보험가입이나 업무 분장 등의 이유 때문이다.


“봉사도 절차가 필요하군요.”


이순정이 간사의 설명에 수긍한 후 서정민을 돌아보는데 그는 멀리 눈을 주고 있었다. 현수막에 엉뚱한 게 쓰여 있다.


걱정은 바람이 씻어가고
잡념은 구름이 걷어가고
외로움은 파도가 몰아가고


어수선함 속에서도 신선한 언어가 그의 시선을 끌었는가 보다.


진도체육관의 환기시설은 좋지 않았다.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그 위에 요 깔고 이불 덮고 다들 그래요.”


간사는 진도체육관의 설거지도 봉사의 하나에 속한다고 말했다.


“진도에는 기자, 자원봉사자, 방문객, 지원팀, 공무원까지 모두 밥을 먹으니까 완전 전쟁터예요.”


체육관은 가족들이 많이 미안해한다. 머리 감는 것도 미안할 정도다.
그녀는 계속 설명했다.
 
“봉사활동은 최대 3박4일로 제한합니다.”


유가족들과 동화할 염려가 있다는 정신과의사와 심리상담자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원봉사자 중에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진도체육관을 나왔다.
서정민을 옆에 태우고 이순정이 운전하는 차는 바닷바람이 싸 하게 부는 팽목항에 도착했다.


팽목항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시장바닥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팽목 자원봉사자는 1박2일이 원칙이다.


“정신적으로 엄청 힘들다는 뜻이지요.”


진도군 복지과 담당자가 말했다.


팽목항에서는 물, 음료수, 속옷, 세면도구, 위생품 등 생필품을 나눠주는 것도 확인하지 않았다. 가족일까 조심스런 접근 때문이다. 진도에서 아이들 유체가 한동안 올라오지 않아서 다들 노심초사한 상태였다.


“체육관팀이 택배를 담당한다면 팽목항팀은 검안서 보조를 하죠.”


유체가 팽목항으로 오니까 그렇다.
팽목항에서 30여분 있는 동안 봉사자를 지켜본 것은 참으로 낯설다.


“지금은 누구를 위해 밥을 하지?”


한 봉사자는 걱정하며 안타까워했다.
한낮에 술만 마시는 유가족에게 계란후라이를 주었다. 그 분은 버럭 화를 내면서,


“누가 이런 걸 주라고 했냐?” 막 짜증을 냈다.


봉사자는 놀라고 무안했다고 한다.
서로가 예민하고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봉사하면서 보람을 느낀 순간이 있어요?”


이순정이 물었을 때 그녀는 태연했다.


“아직 없었어요.” 순간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동안 변한 게 없으니까요.”


그랬구나.
정부는 하는 일이 없었다. 유체를 수습한 다음에는 아이를 데리고 가는지 어떤지 관심도 없었다.


▲진도체육관 봉사활동



광화문의 봉사자들


광화문에서 자원봉사는 어땠을까?


이순정은 자주 광화문에 나가곤 했다. 사무실이 가까우니 틈만 나면 광장에 나가서 봉사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봉사자들도 이제 이순정이 누구라는 걸 대부분 잘 안다.


서명받기, 영상제작, 기록물정리, 국회농성 지킴이…… 해야 할 봉사는 많다.


세월호 유가족의 광화문 천막이 쳐지자 ‘세월호 광장’이 시작됐다. 광화문 광장의 일부를 차지한 셈이다. 이슈마다 항의 농성이 있었다.
봉사자 간사가 이순정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참 5.18과 4.16은 단 한 자로 대변됩니다. ‘광’ 자 말입니다. 광주와 광화문.”


“유의미한 상징이군요.” 이순정이 머리를 끄덕였다.


“사상최대의 작전에도 선내에 있는 사람을 빼내지 못했는데 창피한 작전이죠.”


“대한민국의 민낯이 드러난 셈이군요.”


“2014년 이후 우리 삶에서 생존 자체에 물음표가 생긴 겁니다.”


“…….”


간사는 너무 진지했으나 이순정은 이런 경우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세월호는 구조적으로 언젠가는 문제를 일으킬 배였어요. 단원고가 아니라 집단이라도…… 대상이 누가 될지 모르지만.”


사실 그날 4월 16일 제주 오현고교생들도 세월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로 수학여행가기로 예정돼 있었던 것.


진학과 취업을 포기하고 시위에 참석한 고3 여학생이 노래로 봉사하기 시작했다.
이순정은 그녀를 만났다.
기타를 잘 치는 그녀는 <이름을 불러주세요>를 부르곤 했다. 304명 희생자 이름을 호명하며 불렀다. 미수습자 가족이 “우리들 소원은 유가족이 되는 것” 이라고 말했을 때 확 돌아버리겠더라고 그녀는 털어 놓았다.
예쁘장한 얼굴과는 달리 봉사의 결의가 찬 그녀에게 이순정이 물었다.


“삶의 기준이나 세계관이 바뀌었을 텐데?”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아요. 내 의견이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는 않을까…… 등.”


“소원이 있다면?”


“모두가 제 명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곳도 텅 빈 광장이 됐으면 좋겠어요.”


젊은이가 이런 말을?
못 말리겠다.


2015년 봄은 다시 시작되었다. 속도 모르고 벚꽃은 활짝 피었다.
영석 엄마는 벚꽃이 싫다고 했다. 봄이 싫고 고통스럽다고 했다.


유민 아빠 김영오 씨가 46일간 단식하여 650만 국민 서명으로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어 세월호특조위가 구성되었다.


영화 <다이빙 벨>, <나쁜 나라>, <업사이드다운>이 주목을 받으며 상영되었다.
사고 197일째 되는 날 2014년 11월 29일 296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이순정은 광장에 있는 유가족과 대화를 나누었다.
가족의 생활이 궁금해서 물었으나 대답은 가슴 아팠다.


“세월호 유가족은 돈을 쓰는 행복이 없습니다.”


“……” 이순정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식이 행복할 때 가장 행복한 거니까요.”


“아무리 오래 걸려도 싸움을 하실 건가요?”


“그럼요. 엄마니까 당연히.”


광장에는 외치는 사람이 늘어났다.
진실마중대는 서명, 식사지원, 피케팅에 열심을 다했다.


“밥을 해 갖고 오는 사람이 고맙지요. 맨날 사먹으니까요.”


“서명을 귀찮아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저희들은 서명을 목숨 줄로 생각해요.”


엄마손은 리본 만들기에 협력했다.
촛불 든 엄마들은 리본 단 엄마들이 되고 서명운동에도 참여했다.


2014년 4월 20일 세월호 광화문 촛불시위가 시작되었다.
정부가 생명권 보호의무를 위배했기에 시민은 광장에서 촛불을 든다고 했다.
4월 28일에는 임형주의 번안곡 ‘천 개의 바람이 되어’가 전국적으로 불러지기 시작했다.
 
유가족은 청운동에서 노숙하고, 광화문 TV를 만들기도 했다.
416연대는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이어나갔다.


민변 출신의 박주민 변호사는 세월호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쌍용, 강정, 밀양 사건에 깊숙이 관여한 바 있다.


“변호사가 여길 왜 와?”


처음에는 유가족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차츰 진심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부모님들에게 아이들 이름을 불러주면 좋아하죠. 자기 이름은 필요 없고 애들 이름만 부르면 됩니다.”


그는 부모의 마음을 파고드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지도 모른다. 유가족의 응원은 대단했다.


2016년 7월 여름, 이순정은 광화문에 있는 세월호 리본 공작소에 들렀다.
더운 날 애쓰는 봉사자들에게 냉커피 사드리고 노란리본도 많이 얻어 왔다. 홍소라와 친구들 가방에 달아주려고.


2016년 10월 23일 최순실과 정유라가 언론 지면에 거론되고 박 대통령이 의혹의 그늘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80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광화문 촛불시위에 참여했다.


10월 29일 국정논단 촛불집회가 시작된 이후 여럿이 모여 리본을 만들었다. 리본을 만들면서 봉사자들은 리본(ribbon)이 아니라 리본(re-born)으로 생각하며 대한민국이 재탄생해야 한다고 주먹을 쥐기도 했다.


이게 국가냐, 우리가 국민이냐?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모인 자원봉사자들은 구호를 선창했다.


“촛불국민 만세!”


2017년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이하여 광화문 416광장에서는 구호가 간명해졌다.


“미수습자 수습! 철저한 진상규명!”


세월호는 혼자만 넘어지지 않고, 기어코 박근혜 정부까지 물귀신처럼 끌고 넘어졌다. 이렇게 되기에는 촛불이 지속적으로 켜진 결과라고 자위하는 사람이 많다.


416가족협의회와 세월호특조위 조사관, 시민연구자들이 모여, 국민의 힘으로 진상을 규명하자는 취지로 2017년 1월 ‘416세월호참사 국민조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오는 장면에서 또 한 번 감격할 것이다.


▲특별법 제정 서명운동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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