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bridge)


삶은 기적이다
운명의 파도가 있는데
여성항해사가 파도에 오르고…




                                       7. 항해사 양외란
 
  영화 벤허에 나오는 대사 하나. ⌜삶은 기적이다⌟
  삶은 운명의 파도를 탄다.
  세월은 흘러 전계린 박사의 외동딸 양외란이 성인이 되어 갑자가 매스컴을 타기 시작했다.
  부산의 유명 일간지에 하나의 기사가 오른 후부터다.


  양외란 1985년생.
  2004년 해사대학 항해학과 입학.
  2008년 삼등항해사.
  2011년 쇄빙선 ‘아라빙호’ 이등항해사
             극지탐사선 최초 여성 항해사


  “양외란, 니 진짜 떴더라.”
  양외란의 학교 친구는 그녀를 부러워했다. 한국 쇄빙연구선 아라빙호의 최초 여성 항해사로서 남극과 북극을 항해하는 활약상이 대서특필됐기 때문이다.
  2012년 초여름 부산신보의 고득종 기자가 아라빙호를 방문하여 선내 사무실에서 양외란 이항사와 인터뷰했다.
  “남성도 아닌 여성으로서 어떻게 쇄빙연구선 항해사의 꿈을 키웠나요?”
  고득종 기자의 질문에 양외란의 대답은 간명했다.
  “네 살 때부터 어머니께서 항해사의 꿈을 키워주셨습니다.”
  “그럼, 어떤 동기라도?”
  “선원선박연구소에 계시는 어머니께서 23년 전 연구소에서 함께 연구 활동한 선장님을 거울삼으라고 하신 말씀이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혹시 그 선장님의 이름을 기억하시나요?”
  “오선덕 선장님이라고 들었습니다. 해양박사를 뜻하는 오션닥(OceanDoc)이라고 자주 언급하셔서 그 이름이 항상 제 기억에 남아 있어요.”
  “그렇군요. 당시에는 여성 선원이 없었는데 어머니께서 특별한 생각을?”
  “어머니께서는 언젠가 여성 선원시대가 온다는 걸 확신하셨던가봅니다. 그 방면 연구를 하신 탓인지, 아니면 그 선장님 영향인지 모르지만요.”
  “둘 다 영향을 줬었을 수도 있겠네요.”
  기자는 삶이란 기적 같기도 하고, 운명 같기도 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수년 후 2019년 말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여성 기관장, 여성 선장이 탄생하게 됐다.


  양외란은 태어날 때 바로 똥오줌을 쌌다. 그것부터 남달랐다. 이혼녀 어머니는 딸을 여자와 남자의 몫을 다하도록 키워야 한다고 다짐했다. 때로는 팔씨름을 해서 남자를 이겨야 한다고 가르칠 정도였다
  어머니는 딸에게 해양을 지배한 역사적 인물을 백과사전을 뒤져가면서 알려주곤 했다. 콜럼버스나 마젤란보다 제임스 쿡(James Cook)이 더 존경스런 인물로 올려놓는 것은 어머니의 해양관(海洋觀) 때문이었다.
  쿡은 최초로 남극과 북극을 탐험하려고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바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섬과 육지의 이름을 짓기도 했던 영원한 선장이요 탐험가였다. 캡틴 쿡은 선원들의 괴혈병을 막기 위해 매질을 해가면서 야채를 먹이기도 한 일화를 남겼다. 쿡보다 2세기 앞선 콜럼버스나 마젤란의 선원들이 거의 대부분 비타민 부족으로 죽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쿡 선장은 영국 해군성으로부터 ‘남극 대륙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라’는 명령을 받고 1774년 1월 사상 처음으로 남극권 남위 71°10′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남극대륙을 불과 120km를 남겨두고 유빙 때문에 돌아서야만 했다. 그 후 그는 북극권에도 관심을 두어 베링해에 들어가 북위 70°33'까지 진출했다.


  이때부터 남극과 북극은 탐험가들의 탐험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쿡 선장은 남자로서 바다 정복의 야망을 가졌지만 이항사님은 여성으로서 바다가 너무 넓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기자가 양외란을 계속 붙잡고 인터뷰하는 이유는 그녀가 여성 항해사가 되기까지 어릴 적부터 극지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양외란의 매력에 반한 또 하나의 포인트는 다음의 말이었다.
  “맞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것은 바답니다. 그러나 바다보다 더 넓은 것은 하늘이고, 하늘보다 더 넓은 것은 인간의 영혼입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가르쳤어요.”
  고득종은 그녀의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자꾸 궁금해졌다.
  “영혼을 탐험정신으로 의역해도 되나요?”
  “적어도 제 경우엔….”
  양외란, 그녀는 정말 대찼다.
  더구나 그녀의 어머니는 맹모의 후손쯤이라도 되나.
  고득종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기가 팍 죽었다.
  다른 질문으로 남자의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다.
  “아라빙호가 북극에 갔었지만 최초 북극점 탐험은 미국인 피어리 아닙니까?
  “그렇지요.”
  “배로 갔다가 얼음 위를 어떻게 갔을까요?”
  “에스키모인 30명과 개 300마리를 데리고 갔다나요. 소수정예 팀으로 마지막 북극점을 정복했고요.”
  그녀는 전문가답게 이렇게 설명을 계속 이어갔다.


  북극점은 육지가 아닌 얼음 위의 고지다. 북극점(북위 90도)을 가장 먼저 밟은 로버트 피어리(Robert Peary)는 이전에 두 차례에 걸쳐 그린란드 북극권 2,000km 이상을 왕복 탐험했다. 1905년 모금으로 제작된 '루즈벨트호'를 타고 뉴욕을 떠났는데 북극점을 300km 남겨두고 식량과 연료 부족으로 돌아온 일이 있었다.
  피어리는 1856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지리학과 측량학을 전공했지만 30세부터 23년이라는 세월을 오직 북극점 도달의 꿈에 모두 바쳤다. 1903년 해군에 복귀하여 ‘피어리 북극클럽’을 결성했다. 세 번이나 그린란드에 갔었다. 동상에 걸려 8개의 발가락을 자르기도 했지만 1908년 7월 피어리는 대원 23명과 함께 군중들의 환송을 받으며 뉴욕을 출발했다. 52세가 된 그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1909년 4월 9일 오전 북극점에 도달했다.
  전진기지에서 얼음산과 골짜기, 살을 찢는 추위, 빙산사이 바닷물이 출렁이는 험난한 코스

660km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발가락을 잘리고도 포기하지 않은 정신은 과연 미국의 영웅답네요.”
  설명을 한참 듣고 난 고득종은 탐험가의 정신에 감탄하고 말았다.
  “대단하지요. 극점을 밟은 후 그는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건 도전으로 만들어진다’고 한 말은 유명하지요.”
  “마지막 북극점 정복이 궁금하네요.”
  “정상 정복대원의 대부분을 지원대로 하고, 본대는 될 수 있는 대로 적은 인원으로 하는 극지법을 사용한 것은 그의 특이한 스타일이었지요.”
  피어리는 북극점에서 245Km 떨어진 곳에서 마지막 지원대를 돌려보내고 본대 5명과 함께 진행했다. 5명에는 흑인 한 명과 네 명의 에스키모인이 포함됐다.
  드디어 피어리는 북극점에 도달했다.
  그는 아내가 만들어 준 성조기와, 15년의 극지탐험 동안 가지고 다녔던 성조기를 함께 북극점에 꽂았다. 30시간 동안 얼음을 깨어 그 밑의 바다의 깊이를 재고, 기상 관측을 한 다음 귀로에 오른 것은 해군 측량장교답다.
  피어리는 해군 소장으로 특진했고, 1920년 63세로 엘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한때 북극점에 누가 먼저 도달했느냐에 대한 추잡한 논쟁이 있었지요?”
  고득종의 기자다운 질문이었다.
  “논쟁을 건 사람은 자신의 거짓말을 사과했고 결국 감옥까지 갔지요.”
  피어리가 37일 만에 북극점을 밟았다는 기록은 오랜 논란거리였으나 2005년 영국의 탐험대가 동일한 탐험 경로(765㎞)를 36일 만에 완료함으로써 논란은 종식됐다.
  “피어리가 에스키모 여자의 아들을 낳았다고 하던데 진실인가요?”
  기자는 양념이 들어간 스토리를 좋아하는 법이다.
  “고 기자님은 별것 다 알고 계시네요. 소문 때문에 다른 대원이 키웠다고 합 니다만…. 오랜 탐험 생활을 고려한다면 남자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여자의 아량 섞인 웃음에 기자는 갸우뚱했다.
  “생각보다 남녀관계에 너그러우시네요.”
  “저는 21세기에 살고 있는 여성입니다.”
  “극 공감!”
  맞장구를 치면서도 기자는 입 대신 이마에 손을 대고 웃었다. 마치 수화라도 하는 듯.
  여자도 보란 듯 입에다 손을 대고 웃었다.
  두 남녀의 웃음은 1퍼센트 모자란 사람같이 보였으나 선내 사무실은 웃음꽃으로 인해 아름다운 꽃을 피워가는 분위기였다.


▲북극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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