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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존재만으로도 위대했던 `팝의 황제`44년 무대 조명 꺼지다

작성일 작성자 프랑세스

 

10년만에 신문을 오리게 했던 동아일보 마이클 잭슨 기사-

신문 한 면 전체를 할애했었습니다.

일부 단락은 보기 편하게 임의로 정리했습니다.

 

 

2009년 6월 27일 동아일보 기사

:: 존재만으로도 위대했던 '팝의 황제'44년 무대 조명 꺼지다

 

 

 

여섯 살 때 잭슨파이브로 데뷔…
통산 7억5000만장 앨범 판매
팝의 역사에 새 장 열었지만 성형 탐닉하며 나락으로


‘영원한 네버랜드의 피터 팬을 꿈꿨던 황제, 끝내 영원으로 떠나다.’

‘킹 오브 팝’(King of POP·2008년 발매한 베스트앨범 제목). 그에게 다른 호칭은 필요 없다. 전 지구에 오싹한 충격을 안겨준 스릴러(Thriller·1982년 앨범)이자, 노래는 치명적으로 아름답다 못해 위험하기까지(Dangerous·1991년 앨범)했다. 13개의 그래미상 수상, 통산 7억5000만 장이 넘는 앨범 판매. 팝 DJ인 김광한 씨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의 제왕이었다면 그는 장르를 초월한 황제였다”고 말했다.

Who is it (앨범 ‘데인저러스’ 수록곡)

1958년 8월 29일 미국 인디애나 주 게리 시. 평범한 노동자 가정 잭슨가()의 7번째 아이.
하지만 마이클 조지프 잭슨의 천재성은 일찌감치 드러났다. 다섯 살짜리 꼬마가 ‘솔(soul)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의 춤과 음악을 그대로 따라 했다. 장안의 화제가 된 이들 형제를 여가수 다이애나 로스가
음반레이블 ‘모타운’에 소개했다. ‘아일 비 데어’ 등 7장의 플래티넘(100만 장 이상 팔린 앨범)을 기록한
‘잭슨 파이브’는 이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영광 뒤엔 잭슨의 시련이 감춰져 있었다.
“아버지 조가 마이클을 가혹하게 조련한 건 돈벌이가 목적이었다”
(미국 MTV 다큐멘터리 ‘마이클 잭슨의 부침’) 같은 폭로에 이은 가족과의 불화와 결별.
 
마이클은 1979년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음반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손잡고 앨범 ‘오프 더 월’을 낸다. 1000만 장 이상 팔렸으나, 이는 대관식을 앞둔 황제의 전초전에 불과했다.

History (앨범 ‘히스토리’ 타이틀)

꿈으로 끝난 컴백 마이클 잭슨이 2009년 3월 영국 런던에서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연합뉴스
하얀 장갑, 선글라스와 중절모, 그리고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문 워크(moon walk)’. 1982년은 팝의 역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이다. 잭슨의 앨범 ‘스릴러’는 팝을 이전과 이후로 가르는 가늠자였다. “팝 역사상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퍼포먼스.”(가수 비) 이 앨범은 통산 37주 동안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지금까지 1억4000만 장 이상 팔렸다. 군무나 몸동작의 맵시를 내세우기 위한 퍼포먼스로 입었던 제복 같은 무대 의상도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러 개 뒤따른다. ‘최초로 앨범 9곡 모두 빌보드 댄스 차트 1위.’ ‘MTV 사상 처음 방영한 흑인 뮤직비디오.’ ‘싱글과 댄스, 블랙차트에서 최초로 동시 1위.’ 황제의 통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7년 ‘배드’와 1991년 ‘데인저러스’, 1995년 ‘히스토리’까지 계속 음반마다 2000만 장 이상 판매를 기록했다. 한상철 팝 칼럼니스트는 “가장 거대한 임팩트(impact)를 가진 지구상 가장 완벽한 팝 뮤지션”이라고 평가했다. 자신의 저택을 동화 ‘피터 팬’에 나오는 네버랜드라고 이름 지은 잭슨은 살아 있는 전설이 되기 시작했다.

Human Nature (앨범 ‘스릴러’ 수록곡)

기나긴 고독한 군림이 독이 됐을까. “지나친 부와 권력은 조금씩 그를 현실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로버트 톰슨 미국 시러큐스대 교수)

MTV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의 얼굴과 피부색을 싫어해 성형수술에 빠진다. 흰 재킷이 어울리던 검은 피부는 재킷보다 하얘졌다. “코는 보철물”(미국 잡지 배니티 페어)로 바뀌고, 피부암에 시달린다는 말도 나왔다.

사생활도 우울했다. 1994년 엘비스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세기의 결혼’을 치렀지만 2년을 못 넘겼다. 1997년 성형수술 때 만난 간호사 데비 로와의 결합도 99년 결별.
세상을 치유하는(Heal the world·데인저러스 수록곡) ‘어린이의 친구’란 이미지도 사라졌다.
1993년 10대 꼬마 조던 챈들러를 성적 학대한 혐의로 2330만 달러란 합의금을 치른다.

2005년 또 한번의 성추행 혐의는 그를 벼랑으로 내몬다.
무죄로 판결났지만 마이클은 세상에 등을 돌린다.
바레인과 아일랜드 등을 전전한 은둔생활. 주머니 사정마저 악화돼 네버랜드까지 남의 손에 넘겼다.
10년 만에 갖는, 7월 영국 런던 콘서트는 고별무대이자 전세를 뒤집을 회심의 카드였다.
하지만 황제의 심장은 스스로 왕관을 물려줄 기회를 앗아갔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피터 팬처럼.

 

 

 

 

충격… 슬픔… 비아냥에 대한 반성 뒤섞여

 

25일 사망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을 추모하는 팬들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촛불을 밝히고 생전 사진과 꽃, 선물 등을 바치며 기도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FP 연합뉴스
■ 세계가 추모 분위기

미국 서부 시간으로 25일 오후 2시(한국 시간 26일 오전 6시)가 조금 지난 시간 “마이클 잭슨이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긴급 뉴스가 전해지면서 미국의 양대 뉴스채널인 CNN과 폭스뉴스는 정규 뉴스를 중단했다. “잭슨이 응급차에 실려 갈 때 호흡이 멈췄다”는 초기 자막이 1시간가량 지나 “잭슨 사망”으로 바뀌면서 미국 사회는 충격과 슬픔, 반성이 뒤섞인 추모 열기에 휩싸였다.

CNN 등의 현장 화면에 따르면 잭슨이 이송된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 메디컬센터와 자택 앞에는 첫 뉴스가 나오자마자 수백 명의 팬들이 몰려들었다. 잠시 후 잭슨이 사망했다는 공식 발표가 나오자 팬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미국 사회의 추모 열기에는 50세 나이에 해외 콘서트를 코앞에 두고 일어난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자체가
던져준 놀라움에 더해 후회와 반성의 기류가 섞여 있다. 잭슨은 일찍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CNN의 표현)의 자리에 올랐지만 한편에선 끊임없이 손가락질과 비아냥거림을 받는 대상이었다.
스캔들 가운데는 그 스스로 원인을 제공한 대목도 있지만 황색 언론과 대중의 저급한 상상력,
루머가 휘발유를 끼얹곤 했다.

그는 음악으로 인종의 벽을 허물었지만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인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흑인이지만 팬은 흑백 구분이 없었다. 하지만 점점 백색인종 코카시안을 닮아가는 얼굴과 탈색돼 가는
피부색을 놓고 세상은 조롱 섞인 논쟁을 벌였다. 잭슨은 “두 차례 성형수술을 한 것은 (어린 시절 자신을 학대했던) 아버지를 닮아가는 모습이 싫었기 때문이며 피부 톤의 변화는 백반증이란 질환 때문”이라고 해명했으나 언론들은 잭슨이 백인이 되고 싶어 피부를 박피했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세상은 또 그에게 ‘동심()에 머물고 있는 순수한 영혼’이란 이미지와 동시에 ‘아동 성추행범’이란 낙인을 확인 없이 찍어댔다. 지인들은 그가 ‘네버랜드’ 건설을 갈망하고, 아이들과 어울리며 음악적 영감을 얻는 순수한 영혼(의학적으론 열 살짜리의 정신세계로 퇴행했다는 판정을 받았음)의 소유자라고 주장했지만 성추행 논란에 대한 집요하고 선정적인 보도는 ‘아동 성도착자’의 이미지를 덧씌워 버렸다. 1993년의 성추행 의혹은 결백 주장 속에 금전적 합의로 종결됐고, 2005년의 소년 성추행 혐의는 무죄 평결이 났지만 잭슨은 심신() 모두 재기하기 힘든 상태로 추락했다.

세계 곳곳에서 팬들의 충격과 슬픔이 이어졌다. 일본 후지TV는 정규 아침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을 생방송으로 연결해 잭슨이 떠난 현지 상황을 자세히 전달했다.
중국에서도 그의 죽음이 소호닷컴, 시나닷컴 등 주요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톱뉴스로 다뤄졌다.
잭슨의 두 번째 결혼식이 열렸던 호주 시드니에서는 주요 거리의 전광판을 통해
그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뉴스가 연이어 보도됐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비빔밥 애호가… 공연과 투자 목적으로 4번 방한

 

 

■ 한국과의 인연

26일 세상을 떠난 마이클 잭슨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평소 ‘비빔밥’ 애호가라고 자주 말했던

그는 네 차례 한국을 찾았고 많은 국내 가수들도 잭슨의 추종자임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첫 내한공연을 가진 것은 1996년 10월. 서울 잠실 올림픽경기장에서 열린 두 번의 콘서트는 매회 6만5000석이 매진됐다.

당시 시민단체들이 잭슨의 성추행 스캔들과 외화 낭비를 이유로 입국을 막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두 번째는 1997년 말 무주리조트 투자건을 협의하기 위해서 내한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당선인과 만나기도 했는데,

이 인연으로 1998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게 세 번째 방문이 됐다.

김 전 대통령은 26일 잭슨의 사망 소식을 듣고

“우리는 세계의 한 영웅이자 한국 통일에 관심을 갖고 성원해 준 사랑스러운 벗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마지막 방한은 1999년. 세계 전쟁 희생자 및 불우어린이 돕기 자선공연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에 참여했다.

머라이어 캐리, 보이즈투멘 등이 참여한 대형 콘서트였다. 당시 잭슨은 “한국이 통일되면 꼭 다시 찾아와 공연하겠다”고 약속했다.

‘팝의 황제’는 한국 대중음악 뮤지션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가수 비(정지훈 씨)는 2008년 ‘마이클 잭슨 스릴러 25주년 기념앨범 발매’ 당시 “그는 나와 모든 이들의 우상이었으며

그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면서 “그를 보고 가수로서 꿈을 키웠으며 그는 여전히 세계 최고다”고 말했다.

가수 겸 프로듀서인 박진영 씨는 지난해 건국 60년 기념사업단이 연 ‘건국 60주년, 60일 연속강연’에서

“어린 시절 미군 방송을 보며 팝을 익혔는데 마이클 잭슨의 춤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록밴드 ‘YB’의 보컬 윤도현 씨는 “육체가 아닌 영혼이 영원하듯 그의 음악은 지구가 멸망해도 살아남을 것”이라 말했다.

국내 팬들의 애도도 잇따랐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게시판에는 명복을 비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이소정 씨(40)는 “대학시절 마이클 잭슨은 한국에서도 최고의 스타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의 음악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1996년 공연 당시 마이클 잭슨을 경호했던 경호업체 ‘강한 친구들’의 김덕영 씨(37)는 “보육원을 방문한 마이클 잭슨이 아이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안아주던 인간적 모습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기고/성기완]마이클 잭슨, 신화는 지금부터다

 

 

 

 

‘팝의 황제’를 떠나보내며

이것을 비보라고 해야 할까.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이 상실감은 슬픔 이전에 허망함으로 다가온다.

아직 정확한 사인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을 아는

수많은 팬들의 발걸음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향하고 있다. 그의 집은 벌써 수많은 발걸음의 목적지가 되었다.

마이클 잭슨에게는 인생의 종점이 되었으나 마치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듯, 사람들은 그리로 모여든다. 이것은 순례다.

엘비스-비틀스 반열에 오른 흑인

그렇다. 잭슨은 이미 신화가 되었지만, 그렇게 신화의 2막은 열린다. 우리는 그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

사실은 거기서부터가 진정한 신화다. 늘 신화는 영웅의 죽음을 통해 그 영웅을 영원의 반열에 올리면서 현재형이 되지 않는가.

존 레넌과 조지 해리슨이 죽었지만 비틀스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33년 전인 1977년에 세상을 떠난 엘비스 프레슬리의 망령은 여전히 ‘그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소문에 시달린다.

그의 집 ‘그레이스랜드’는 순례자들의 성지가 되었다.

마이클 잭슨. 무엇이 그를 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었을까. 아마도 그의 생애는 1982년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미증유의 히트 앨범 ‘스릴러(Thriller)’가 나온 것이 바로 그해.

이 앨범의 성공이 없었다면 아무리 6세에 데뷔했고 13세에 롤링스톤 표지를 장식했더라도 그의 신화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팝 스타의 신화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출발한다.

‘스릴러’는 팝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기가 시작됐음을 알려주었다. MTV의 시기, 비주얼의 시기,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무의미의 시기’였다. 저항의 메시지나 열창 대신 현란한 몇 개의 동작이면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렇다고 잭슨이 노래를 못한다거나 춤을 못 춘다는 뜻은 아니다.

그만큼 정교한 리듬앤드블루스(R&B) 창법을 구사하는 가수는 역사상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가십에 묻힌 음악적 성과 조명을

미국의 흑인 거리 뒷골목에서는 ‘퍼블릭 에너미’ 같은 급진적인 힙합 뮤지션들이 흑인의 현실을 격앙된 톤으로 폭로하고 있었지만,

팝의 세상은 그런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때는 이른바 ‘별들의 전쟁’을 위해 미국 예산을 퍼붓던 레이건의 시대였다.

이것은 아이러니다. 잭슨은 최초로 팝의 신화가 된 흑인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이후로 잭슨 한 명뿐이다.

그러니 어쩌면 지배당하던 계층의 영웅이 지배자의 대열에 낀 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자기 정체성을 지우고 싶어 했다. ‘성형’의 배경에도 그런 마음의 움직임이 있다.

그는 팝 세상의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 흰색이 되고 싶어 했고 그것은 결국은 치명적인 부작용으로 작용했다.  (이건 뭐죠 -_-)

그러나 추억은 의외로 단순하다. 몇 개의 강렬한 요소가 추억을 장악한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앨범이 발매되고 난 다음 해의 그래미상 시상식장에서 잭슨이 부르던 ‘빌리 진’을.

엉거주춤 짧아 보이는 바지와 휘황한 장갑과 검은 선글라스는 어딘지 잘 안 어울리는 듯했지만

문 워크를 비롯한 그의 춤과 간드러지는 R&B 창법은 그 모든 것이 신화의 없어서는 안 될 소품이 되었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순간이었다. 마치 영원의 한 단면인 양, 그때의 잭슨은 시간을 벗어나 내 기억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그것이 나만의 추억은 아닐 것이다.

팝은 그처럼 강렬한 하나의 자극이 전 세계의 팬들에게 복제되도록 한다.

너무나 많이 팔려서, 너무나 흔해서 마이클 잭슨은 오히려 평가받지 못했던 면도 없지 않다.

잭슨이 남긴 음악적인 공헌은 구체적으로는 흑인 현대 대중음악의 틀 내에서 평가돼야 할 것이다.

흑인 대중음악의 가장 광범위한 장르 이름이라 할 수 있는 ‘리듬앤드블루스’를 보편화한

잭슨의 음악적 성과는 지금부터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피터팬 콤플렉스, 성형충동 등의 가십 때문에 오히려 그의 음악은 제대로 대중에게 전달되기 힘들었다.

 

팝 스타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시작일지 모른다.

성기완 시인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 기타리스트

 

 

 

관련 기사 링크 ::

 

http://news.donga.com/fbin/output?rellink=1&code=f__&n=200906270110

 

 

출처 : Michael Jackson's MOONWALKIDs | 글쓴이 : Lima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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