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사

친일파 청산 ‘한국 vs 프랑스’ 어떻게 달랐나?

작성일 작성자 道雨







친일파 청산 ‘한국 vs 프랑스’ 어떻게 달랐나?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파들의 잔재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다
임병도 | 2019-03-22 09:15:22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여기 두 나라가 있습니다. 두 나라 모두 타국에 침략을 당했고 점령된 시간 동안 부역자도 생겼습니다. 해방이 되자, 두 나라는 부역자들을 청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청산 과정과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35년간 일본의 식민지로 살았던 한국의 친일파와 4년 동안 독일에 점령당했던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이야기입니다.


해방 이후 가장 시급했던 친일파 처벌


▲제헌헌법 101조에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한다는 반민족행위 처벌 조항이 포함됐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화면캡처



1945년 해방이 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임시정부 당면 정책’을 발표합니다. 14조를 보면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노에 대해 공개적으로 엄중히 처벌할 것’이라며 친일파 청산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선정합니다.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서도 해방이 됐으니 친일파 청산은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1946년 과도입법의원 개원식이 열렸고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모리 간상배에 관한 특별법’ 조례안이 통과됐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친일파 처벌 법안 인준을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미군정 하에 있던 경찰과 공무원들 대부분이 친일파였기 때문입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제헌국회는 헌법 101조를 통해 친일파 처벌의 근거를 만듭니다. 그리고 국회는 반민족행위 처벌법을 통과시킵니다.


‘반민족행위 처벌법’을 보면 한일합병을 비롯해 주권침해 조약에 조인, 모의한 자에게 사형 또는 무기징역, 재산 몰수를 일제 고등경찰로서 독립운동자와 가족을 살상한 자에게는 사형과 징역을 선고하도록 제정됐습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친일을 하거나 악질적인 행위로 일제에 아부하고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들에게는 징역과 공민권 정지, 재산 몰수도 가능했습니다.


반민공판 사형 1호는 친일경찰 고문왕 김태석


▲‘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회의’를 마치고 기념촬영한 모습. 좌측 상단의 원내는 반민특위 조사관 겸 총무과장을 지낸 고 이원용씨(2002년 작고). 앞줄 왼쪽 일곱번째가 신익희 국회의장, 그 다음이 이범석 국무총리, 한 사람 건너 김병로 대법원장 등이 보인다. 출처:오마이뉴스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되자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약칭 반민특위가 조직됐습니다. 특별조사관과 특경대가 만들어졌고, 특별재판부와 특별검찰부도 구성됐습니다. 반민특위는 독립운동가와 일제강점기 지조를 지킨 인물로 국회가 선임했습니다.


반민특위 특경대는 친일 실업가 박흥식을 체포했습니다. 박흥식은 화신백화점 사장으로 조선비행기 주식회사를 차려 일제 침략 전쟁에 기여했던 인물입니다. 이후 반민특위는 일제 중추원 부의장 박중양, 친일 기업가 김연수, 친일 문학가 이광수, 친일 고등경찰 노덕술 등을 체포했습니다.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의 한 명이었지만 변절한 최린이나 이완용 손자 이병길 등 친일파들은 도주하거나 일본으로 밀항하려다가 반민특위에 체포됐습니다.


친일파들이 체포된 후 반민공판, 즉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법정에 나온 친일파들은 친일 행적을 부인하고 변명하기에 급급했습니다.

반민공판 사형 1호는 강의규 의사를 체포해 사형시킨 친일 형사 김태석이었습니다. 김태석은 얼마나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는지, ‘고문왕’이라고까지 불리던 악질 친일 경찰이었습니다.


반민특위 습격을 지시한 이승만


▲1949년 6월 8일 경향신문은 이승만이 외신 기자에게 자신이 반민특위 특경대 해산을 명령했다고 보도했다.



반민족행위자, 즉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반민특위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제 경찰을 등용한 미군정과 임시 정부를 부정하는 이승만, 그리고 처벌받을까 봐 두려웠던 친일파들이었습니다.


친일파와 이승만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반민특위를 해산할 정치 공작을 펼칩니다.

친일파들은 극우단체를 이용해 반공대회를 열었고, 친일 경찰 노덕술은 반민특위에 체포되자 반민특위 요원과 국회의원을 암살하려고 우익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은 반민특위 활동에 제동을 거는 담화문과 기자회견을 잇달아 발표합니다. 이승만은 국회프락치 사건을 만들어 제헌국회 의원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체포합니다. 실형을 선고받은 국회의원 13명 중 5명이 반민법을 제정하고 친일파 청산에 앞장섰던 의원들이었습니다.



▲이병창 특경대 부대장은 중부서 경찰서에 끌려가 물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특경대원들은 친일 경찰에게 끌려가 잔인하게 고문 당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화면 캡처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은 친일파 출신 경찰들에게 반민특위 습격을 지시합니다. 친일파 출신 경찰들은 특경대원들을 체포한 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에게 했던 고문을 그대로 자행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은 해방이 된 조국에서도 친일 경찰들에게 또다시 고문을 당한 겁니다.

이승만의 반민특위 습격 사건 이후 반민법이 개정되고, 친일파들에 대한 공소시효가 단축됐습니다. 결국, 친일파 처단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반민특위가 활동하는 동안 영장은 408건이었지만, 기소는 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마저 판결은 41건에 불과했고 실제 체형은 단 12건에 그쳤습니다. 실형을 받았던 7명 마저도 1950년 3월까지 형 집행정지 등으로 전원 석방됐습니다.

대한민국은 친일파 처단을 단 한 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흘러온 셈입니다.


4년간 독일에 점령당했던 프랑스는 어땠을까?




프랑스는 독일군이 물러나자 레지스탕스를 중심으로 나치 협력자의 처벌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944년 드골은 나치협력자 전담 재판소를 전국에 설치하고, 나치 부역 정권이었던 비시정권의 3부 요인을 처벌하는 최고 재판소까지 운영하는 드골훈령을 발표합니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처벌은 단호했습니다. 최고재판소를 통해 사형 집행된 것만 767건이었습니다. 징역형을 선고받은 나치 협력자만 4만 명이 넘었습니다. 나치 정권에 협력했던 12만 명은 시민권이 박탈당했고, 파면 조치됐습니다.


프랑스뿐만 아니었습니다. 독일에 점령당했던 유럽 전역에서 나치협력자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습니다. 노르웨이는 프랑스에 6배에 달하는 나치협력자들이 처벌받았습니다. 단 한 명의 친일파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 한국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주인공 장하림이 자신을 고문했던 친일 경찰을 만나 멱살을 잡는 장면. 장하림은 친일 경찰에 의해 끌려 나갔다. ⓒMBC 여명의눈동자 드라마 화면 캡처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주인공 장하림은 해방 후 종로 경찰서를 찾습니다. 장하림은 여기에서 자신을 고문했던 친일경찰 스즈키를 발견하고 놀랍니다.

장하림은 스즈키에게 ‘해방이 됐는데 왜 여기 있냐’며 멱살을 잡고 소리를 치다가 친일 경찰에 의해 끌려 나갑니다.

끌려가는 장하림을 보면서 스즈키는 빨갱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장면일까요?


2019년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반민특위로 국민이 분열됐다’고 말했습니다. 1949년 친일파 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를 습격한 이승만의 주장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대한민국에는 독립운동가를 고문하고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파들의 잔재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해방이 된 지 74년이 지났는데도 당신들은 왜 거기에 있느냐고라고 묻고 싶습니다.


유튜브에서 바로보기: 친일파 청산 ‘한국 vs 프랑스’ 어떻게 달랐나?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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