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己丑獄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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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己丑獄事)

道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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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己丑獄事)

 

- 조선왕조 최대 피의 숙청 사건

- 정여립 역모(모반)사건이 불러온 피의 광풍 기축옥사(己丑獄事)

- 정여립 모반사건을 계기로 서인(西人) 정철이 주도한 피의 숙청 기축옥사와 동인(東人)의 몰락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때까지 훈구(공신)세력과 사림(士林, 선비)세력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왔다.

 

선조 때 이르러 사림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이조전랑의 자리를 놓고 시작된 개인적인 앙금은, 1575(선조 8) 사림(士林)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면서, 정치적 대립관계 유지하는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정여립의 모반(역모)사건으로 촉발된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기축년, 선조 22)에 시작하여 1590(경인년, 선조 23), 1591(신묘년, 선조 24)까지 3년 동안 계속된 옥사(獄事), 서인에 의해 동인이 몰락하고,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된 피의 숙청을 말한다.

 

조선의 정승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숙청된 기축옥사는, 조선 시대 4대 사화, 무오사화(연산군 4, 1498), 갑자사화(연산군 10, 1504), 기묘사화(중종 14, 1519), 을사사화(명종 즉위년, 1545)에서 희생된 500여 명의 두 배가 넘는 1천여 명이 희생되었다.

 

 

조선왕조 500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

 

정여립(1546~1589)은 서인(西人) 율곡 이이(1536~1584)와 우계 성혼(1535~1598)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서인 세력으로 관직에 들어온 정여립은 스승 율곡 이이가 사망하고, 동인(東人)으로 전향한다.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정여립이 모반(謀反))을 주도했다는 역모사건의 조직 대동계는, 기축옥사(1589)가 일어나기 2년 전인 1587(선조 20) 전라도 손죽도를 노략질하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전주 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정여립이 조직했다.

 

 

동인으로 전향한 정여립은 서인에게 비난을 받고 선조는 중용하지 않자, 현재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동곡마을에 낙향하여 인근 지역의 관리와 선비들과 교류했다. 정여립은 한동안 김제에서 지내다, 전라북도 진안으로 거처를 옮긴다.

 

 

1589(선조 22) 10월 황해도 안악 군수 이축, 재령 군수 박충간, 신청 군수 한응인이 황해도 관찰사 한준에게 정여립 모반(역모)사건을 고변하고, 황해도 관찰사 한준은 조정에 장계를 올린다.

 

정여립이 한양의 한강이 얼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거병해서, 한양 도성에 입성하여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한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즉시 정여립 모반(역모)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을 잡아들이라고 하였고,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연관있는 사람은 모두 잡혀왔고, 체포된 사람들은 국문(鞫問) 중에 견디기 어려운 고신을 받았다.

 

 

정여립 모반(역모)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은 대다수가 동인이었으며, 특히 남명 조식과 화담 서경덕 문하의 선비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정여립 모반(역모)사건의 당사자 정여립과 그의 아들은 전라도 진안 조도에서 자결하였다.

 

역모와 연루된 것으로 의심돼 잡혀온 사람 중에 끝까지 역모사건이 아니라고 견디다 죽은 사람도 있고, 고문을 견디지 못한 일부 사람은 역모사건이라고 자백하기도 했다.

 

 

정여립의 모반(謨反)사건은 말 그대로 역모를 준비한 사건이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아니다.

대동계는 황해도 지역까지 진출했고, 대동계의 핵심 지역인 전라도가 아닌 황해도에서 정여립의 역모를 고변하는 일이 발생한다.

정여립 모반(역모)사건은 역모 관련자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던 일부 사람의 자백만 있다.

 

왜인 토벌을 위해 조직됐던 대동계와 정여립의 자살로 정여립의 모반은 기정사실화됐다.

일부 관련자의 자백과 정여립의 자결은, 선조와 추국청은 정여립이 역모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단정 짓는 결과가 된다.

 

 

정여립 모반(역모)사건으로 시작된 기축옥사에서 희생된 대부분 사람이 동인이었으나, 정치와는 무관한 주변인물까지 희생됐다.

 

선조 재위 당시 일어난 기축옥사는, 학자이며 정치인이었던 서인과 동인, 송강 정철과 서애 류성룡 등 붕당정치가 만든 첨예한 정치적 대립 속에 일어난 사건이다.

 

정여립의 모반(역모)이 사실이든 조작이든,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람까지 1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은 기축옥사는, 사림(士林, 선비)이 많이 희생되어 기축사화(己丑士禍)로도 불린다.

 

1천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은 기축사화의 정점에는, 3년 후 일어난 임진왜란에서 백성을 모두 버리고 저 혼자 살겠다고 야반도주(夜半逃走)한 선조가 있다.

 

정여립의 모반(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는, 사림(士林, 선비)세력 간의 대충돌이며, 피의 숙청이고 피의 광풍이다.

서인 정철이 주도한 기축옥사로, 동인은 몰락의 위기를 맞고,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됐다.

 

혹자는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조선왕조 최대의 정치 미스터리라고 한다.

정여립 모반(역모)사건은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작이냐, 실재냐 하는 첨예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동인(東人)의 영수였던 이발은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받은 사실이 드러나 죽는다.

이발과 이발의 형제뿐만 아니라, 어린 아들과 80세 늙은 노모까지 혹독한 국문과정에서 죽어나가자, 국문에 대한 백성의 비난 여론이 거세진다.

 

기축사화 당시 국문을 지휘한 추국청의 책임자, 즉 위관(委官)이 서인 정철이었는지, 동인 류성룡이었는지를 두고, 광해군 때부터 4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첨예하게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서인 정철과 동인 류성룡 두 사람 중 추국청의 위관이 누구였느냐에 따라, 정여립 모반(역모)사건이 조작이냐 실재냐 하는 문제로도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인의 정철이 위관이었으면 서인과 동인 간의 당쟁 권력 투쟁으로 말미암은 정여립 역모사건은 조작이 크게 의심되고, 동인 류성룡이 위관이었으면 진짜 역모사건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https://gdlsg.tistory.com/1577 [증산도 이도경세 이의보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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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옥사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조선 선조 때의 옥사로 158910월의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어 정여립과 함께 3년여간 그와 연루된 많은 동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여립의 옥사로도 부른다.

 

정여립은 호남 지역에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술 연마를 하며, 1587년에는 왜구를 소탕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대동계의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황해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당시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조정은 파란을 일으켰다.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동인들이 서인들, 특히 정철과 배후의 성혼, 송익필에 원한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목차

 

1 배경

2 사건

2.1 억울한 죽음

 

3 논란

4 영향

5 평가 및 복원 노력

6 각주

7 외부 링크

 

 

배경

 

정여립은 본래 서인 세력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 편에 들어가,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 박순을 비판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조가 그의 이당을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린다.

 

이이와 정여립 사이에 서인과 동인에 대한 인식 차이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 다 붕당에 얽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이이는 평소 선조에게 붕당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건의한 바 있었고, 정여립은 이이 문하에 의외로 서인당이 많고 그들이 편견이 심하다는 사실에 반발하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정여립은 이미 이이가 죽기 전에 서인당을 떠났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정여립이 이이를 배반했다는 당시 서인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여립은 이이를 참다운 성인으로 숭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히려 이이는 정여립의 과격한 성격을 상기시켜,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반대하였다.

 

이이가 죽자, 이이에 대한 동인들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그러자 이이에 대한 선조의 믿음도 점차 변하여, 이른바 삼찬 사건(1583년 이이를 탄핵한 송응개, 박근원, 허봉을 유배시킨 사건으로, 이들 셋을 삼찬이라 했다. 계미변란이라고도 한다) 관련자들을 용서한 일이 일어났다.

이때 정여립은 이러한 선조의 마음을 헤아려 경연에서 이이를 공격하는데 앞장 선 적이 있었는데, 이 일은 궁지에 몰린 서인들에게 절호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사건

 

이이의 문하생이었던 정여립은, 1583년 수찬이 된 후 서인을 비판하다가 귀향하였다. 정여립은 호남 지역에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술 연마를 하며, 1587년에는 왜구를 소탕하기도 하였다. 그는 낙향한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인들 사이에서는 명망이 높았다.

 

호남 금구현으로 간 뒤로는, 전주에 거주하기도 하고, 김제와 진안의 별장을 왕래하기도 하였다.

조정에서 그가 물러가는 것을 애석히 여겨 그에게 다시 벼슬길을 열어 줄 것을 간청하는 신하들이 나타났지만, 선조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158910, 황해도 관찰사, 재령 군수, 안악 군수, 신천 군수 등이 그가 대동계 사병을 이끌고 도성으로 와서 선조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고 고변하였다.

 

선조는 이들의 세력이 막강함을 우려하여,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정여립은 토굴에서 자결하고, 관련자 80명이 압송되었으며, 점차 범위가 확대되어 2년간 국문장이 열렸다.

 

정여립 반란 사건 초기에 위관이었다가 동인이었기에 물러 나온 정언신도,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정여립과 연루되었음이 드러났다.

정언신은 체포 후, 정언신의 아들 율의 상소와 성혼의 권고로 죄가 감해졌으나, 정여립의 문서에서 정언신의 편지가 비교적 많이 들어 있었음이 드러나, 유배형이 내려졌다.

 

정언신에 이어 형문을 담당하던 위관은 송강 정철이었다.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지자, 정철은 정여립의 도주를 예견하였고, 자원하여 입궐하였다.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초기 수십일 간은 선조 임금이 직접 심문하였고, 15905월 이전까지 정철이 위관을 담당하였다. 이후로는 류성룡과 이양원 등이 위관을 담당하였다.

옥사는 20개월 간 계속되어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15915월에 끝이 났다. 옥사로 인한 사망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고, 수백 명이 유배되었다.

 

 

억울한 죽음

 

심지어 조대중(曺大中)은 당시 전라도 도사로 있으면서, 관내 순찰 중 전라남도 보성에서 정여립 자살의 소식을 들었는데, 그때 그가 눈물을 흘렸다는 죄로 장살을 당하였다고 한다. 사실은 마침 부안에서 데려온 한 관기가 이별의 정 때문에 흘린 눈물이 잘못 전달되어 그런 참혹한 형벌을 당한 것이라고 하는데, 한 여인과의 '이별의 눈물'이 나라에 반역한 '역적의 눈물'로 오인되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러한 사건을 두고 오익창은 상소문에서 "간교한 무리들이 그 기회를 타, 역적을 토벌한다는 구실을 빌어 사사로운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날조를 하여, 평소 원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다 죽이고야 말았습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정여립 사건을 빌미로 이에 얽혀 들어 희생을 당한 사람이 천여 명에 이르렀고, 그 중에서도 전라도의 인사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논란

 

정여립이 조직했던 대동계가 역모의 가장 유력한 증거로 제시되고 있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만일 대동계가 역모를 위한 조직이라면, 서인당인 남언경이 어떻게 동인계로 전향한 정여립에게 협조를 요청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미 서인당인 전주 부윤이 알고 있을 정도의 조직이라면, 더욱 마음 놓고 조직을 활성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며, 그래서 정여립은 매월 공공연하게 모임을 갖고 국난을 당하여 협조했을 것이며, 만일 그가 진정 임진왜란을 예상했다면 그의 이러한 조직은 의병 활동에 크게 활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되기도 한다.

 

 

영향

 

동인의 영수 이발의 노모를 비롯한 가족들의 죽음, 처사 최영경의 죽음을 비롯한 1천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여, 이후 논란의 원인이 되었다.

 

북인이었다가 남인이 된 허목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기축옥사에 대한 것을 접하고, 서인들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그는 정여립 사건 당시 억울하게 죽은 선비가 많다며, 이들의 신원과 복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허목의 증언에 의하면, 정여립 사건 당시 호남의 선비들 중 정개청을 추존한 사실 때문에 죄인으로 억울하게 몰린 자가 50, 그 중 유배형을 당하고 혹은 목숨을 잃은 자 20, 금고된 자 4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허목은 또 "일찍이 정개청이 정철을 가리켜 소인이라고 지탄한 그 한마디의 화가 이토록 심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당시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무골하게 피해를 입었는지 알 수 있다.

허목 외에도 북인, 남인계 인사들 일부에는 서인에 대해 이 사건에 대해 오래도록 원한을 품기도 했다.

 

 

평가 및 복원 노력

 

이후 동인과 그 후신인 북인, 남인이 집권했을 시, 정여립의 옥사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복권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광해군 퇴출 후 북인이 숙청당하고,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남인마저 숙청당하면서, 옥사, 반란으로 규정되었다.

 

이후 정여립의 난이 서인에 의한 조작이라는 주장이 나타났다. 현재는 송익필이 조작했다는 설, 정철이 조작했다는 설, 서인 전체가 조작에 가담했다는 설, 정여립의 혁명적인 주장이 옥사를 초래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주장이 공존하나, 정설은 없다.

 

 

 

 

 

 

 

 

 

 

기축옥사(己丑獄事) : 정여립 역모사건, 기축사화, 己丑士禍)

 

 

[ 요약 ]

 

1575년 이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사림세력은 1582년부터 붕당정치를 전개했다. 우세를 장악했던 서인은, 이이가 죽은 뒤 선조의 견제로 위축되고, 동인이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정여립은 이이가 죽은 뒤 그를 배신했다하여 선조의 미움을 받고, 고향인 전주로 쫓겨 갔다.

정여립은 대동계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모역을 꾀했으나, 서인의 탄핵을 받고 진안군 죽도로 도망갔다가 자결했다.

서인을 중심으로 사건이 조사되면서, 동인의 주요인물들이 거의 제거되었다. 그 결과 동인은 크게 위축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으나, 서인의 지나친 세력 확대는 선조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다시 동인이 정국을 주도했다. 이후 동인은 서인에 대한 입장 차이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이 사건은 이후 북인이 서인을 공격하는 주요 명분이 되었다.

 

 

[ 본문 ]

 

1567년 선조의 즉위로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정국을 장악한 사림세력은 1575년 이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고, 그 동안 양쪽의 조화를 주장하던 이이가 서인이 되면서 서인이 정파로서의 틀을 잡게 되는 1582년부터 본격적인 붕당정치가 전개되었다. 한때 정국의 우세를 장악했던 서인은 이이가 죽은 뒤 선조의 견제를 받으면서 위축되고, 동인이 권력의 핵심에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때 이이의 천거로 청현직에 오르기도 했던 동인 정여립은 이이가 죽은 후 그를 배신했다 하여 선조의 미움을 받고 고향인 전주로 쫓겨갔다. 정여립은 전라도·황해도 일대의 세력들과 결탁하여 '대동계'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모역을 꾀하였다. 그는 천하는 공물이라는 전제 아래 혈통에 의한 왕위 계승이 결코 절대성을 가질 수 없다 하고, 주자학적인 '불사이군론'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당시 동인 중 조식(曺植)이나 서경덕 계열의 사람들에게서 많이 보여지던 것인데, 정여립은 선조의 한계에 적극적으로 반발하여 모역을 준비했던 것이다.

 

옥사는 황해도에서 비밀이 누설되어 158910월 황해감사 한준 등의 고변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정철 등 서인세력은 사건을 처리하면서 이를 정권장악의 기회로 삼아 동인을 제거하고자 옥사를 확대하였다. 정여립은 진안군 죽도로 도망했다가 자살하고 그 아들 옥남은 잡혀와서 처형되었다. 정여립의 친척인 정언신·정언지·이진길과 평소 정여립과 친분이 깊었던 이발·이길·백유양·이급 등이 일당으로 몰려 심문 도중에 죽고, 이산해(李山海정인홍 등 다수의 동인 핵심인물들이 관직에서 밀려났다.

 

특히 조식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은 역모의 또 다른 괴수로 인식된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옥사하고, 서경덕의 제자인 정개청도 일당으로 지목되었다가 '절의를 배척했다'는 죄목으로 옥사하였다. 그 결과 동인은 크게 위축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으나, 서인의 지나친 세력 확대는 선조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정철이 후계자 문제를 거론하다가 밀려나면서 다시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이후 동인은 서인 처리에 대한 온건과 강경의 입장 차이로 이황(李滉) 계열의 사람들이 남인으로, 조식과 서경덕 계열의 사람들은 북인으로 나뉘는 조짐을 보이게 된다.

 

이 사건은 붕당정치의 운영 방식이 미숙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사림정치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지만, 이후의 붕당정치 전개과정에서 북인의 정인홍 등이 서인을 공격하는 주요한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기축옥사(己丑獄事)

 

 

발단은 158910월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과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군수 이축(李軸),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전 홍문관수찬이었던 전주사람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의 고변에서 열거된 정여립의 역모죄상은,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전주와 진안·금구 등지를 내왕하면서 무뢰배와 공·사노비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단체를 만들어 매월 활쏘기를 익혔다는 것이다.

또 당시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도참설을 이용해 민심을 현혹시킨 뒤, 기축년말에 서울에 쳐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그 책임 부서까지 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선전관과 의금부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파견하여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정여립은 안악에 사는 변숭복(邊崇福)에게서 그의 제자였던 안악교생 조구(趙球)가 자복했다는 말을 전해듣고,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도망하여 진안에 숨어 있다가 자결하였다.

 

그리고 옥남은 잡혀 문초를 받은 끝에 길삼봉(吉三峯)이 모의 주모자이고, 해서사람 김세겸(金世謙박연령(朴延齡이기(李箕이광수(李光秀변숭복 등이 공모했다고 자백하였다. 그 결과 다시 이들이 잡혀가 일부는 조구와 같은 내용을 자백하고, 일부는 불복하다가 장살 당하였다. 정여립의 자결과 일부 연루자의 자백에 의해, 그가 역모를 꾀했다는 것은 사실로 단정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지고, 서인인 정철(鄭澈)이 옥사를 엄하게 다스려서, 이발(李潑이길(李洁김우옹(金宇顒백유양(白惟讓정언신(鄭彦信홍종록(洪宗祿정언지(鄭彦智정창연(鄭昌衍) , 당시 동인의 지도자급 인물들이 연루되어 처형 또는 유배당하였다.

 

그 가운데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가 발견되어, 다시 불려가 고문을 받다가 죽었으며, 그의 형제·노모·자식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호남 유생 정암수(丁巖壽)를 비롯한 50여인의 상소로, 이산해(李山海나사침(羅士忱나덕명(羅德明나덕준(羅德峻정인홍(鄭仁弘한효순(韓孝純정개청(鄭介淸유종지(柳宗智김우굉(金宇宏윤의중(尹毅中김응남(金應男유성룡(柳成龍유몽정(柳夢井조대중(曺大中우성전(禹性傳남언경(南彦經) 30여인이 연루되어, 처형되거나 혹은 유배되었다.

 

이때의 상소로 조정의 동인계 고관과 함께 호남 지방 사류가 다수 연좌되었다. 그리하여 그 뒤부터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불리게 되었고, 호남 지역 사류간 반목과 대립이 후대에까지 이어져 여러 가지 문제를 낳게 되었다.

 

, 진주에 거주하던 처사 최영경(崔永慶)은 모주인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옥사하였는데, 그의 연좌 또한 지극히 모호한 내용이어서 많은 말썽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약 3년여 동안 정여립과 친교가 있었거나, 또는 동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된 자가 무려 1,000여인에 이르는 대옥사로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문제는 그 뒤 당쟁의 전개 과정에서 주요한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이 옥사의 발생원인에 대해서는 학설이 나누어진다.

 

노비 출신인 송익필(宋翼弼)이 당시 서인의 참모격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친족 70여인을 다시 노비로 전락시키려는 동인의 이발·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설.

당시 위관(委官죄인을 치죄할 때 의정대신 가운데 임시로 뽑아서 임명하던 재판장)으로 있던 정철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설.

이이(李珥)가 죽은 뒤 열세에 몰린 서인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날조한 사건이라는 설.

 

일부 조작된 바도 있으나, 당시 정여립이 전제군주정치 아래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선양(禪讓)에 의한 왕위계승방식을 주장하는 등, 혁명성을 가진 주장이 옥사를 발생시킨 요인이 되었다는 설, 즉 정여립의 모역상도 어느 정도는 인정된다고 보는 설 등으로, 아직 정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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