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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당 박철희 노사의 태권도 이야기

작성일 작성자 말리크

태권도 최고 원로 중 한분으로 태권도의 사범이란 호칭이 좋아 노사라고 불러주는 것이 가장 좋다는 소박하신 고수...

 

이 글은 YMCA권법부에서 윤병인선생으로 부터 권법을 배운 가장 초창기 제자 중 한분이시고 후에 강덕원 사범을 역임하신 사운당 박철희 선생의 구술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분 구술대로 기록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있을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태권도를 초창기부터 알고 있는 분의 구술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태권도, 나의 길 

 

들어가며

 

 태권도(跆拳道)에 대해서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다. 일본무술인 가라테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을 하거나, 우리전통 무예인 택견과 수박에서 왔다는 등의 말들이 존재하고 있다.

 현재 태권도의 뿌리가 되는 초대 선생들 가운데 대부분이 '오키나와(沖 縄) 카라테(唐手)'를 연마했기 때문에 태권도의 뿌리는 가라테인양 말해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 말은 곧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권도가 결국 일본무술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 되는데  태권도를 수련하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끼게 되는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태권도를 무시하면서 아예 멀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태권도를 전통무예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는 기존의 이야기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아예 거론 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현재, 태권도는 내가 처음 수련할 때 본래 가지고 있던 무예로서의 기능을 상당부분 잃어버린 채 어린이 위주의 스포츠로 변색되어 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이 태권도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지난 60여 년 가까이 태권도를 수련해 온 나의 임무라고 생각된다.

 태권도 초기 스승들 중에서는 '오키나와 가라테' 뿐만 아니라 다른 무예를 접한 분들도 계셨는데, 그런 분 중의 한 분이 바로 나의 스승 윤병인 선생님이다. 다른 분들에 대해서는 내가 깊이 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쉽게 언급할 수는 없고, 우선 나를 가르쳐주신 윤병인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하여 내가 수련한 조금은 '다른' 태권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2005년 2월

사운당 박철희

 

1장. 태권도와 함께 한 나의 무예 인생

 

 

스승 윤병인 선생

 

 

 내가 처음 태권도에 접한 것은 10대 초반의 어린 시절이었다. 당시 내게 태권도(당시에는 내가 배운 YMCA권법부에서는 권법(拳法)이라고 했다.)를 가르쳐주신 분은 윤병인(尹炳仁)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함경북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내가 너무 어려서 선생님에게 연세를 직접 여쭙지 못한 탓에 정확히 언제 태어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정황들을 종합하여 1914년이나 1915년 생으로 보고 있다. 광복 후에 28세 혹은 29세 정도의 젊은 나이셨고 고향 후배인 국제태권도연맹을 이끌었던 최홍희(崔泓熙)씨 보다 3~4년 위였으므로 그렇게 추정하는 것이다.

 선생은 천상 무인이셨다. 내가 볼 때 그 분은 한마디로 무예밖에 모르는 정통 무도인이셨다. 키는 보통 사람의 키였지만, 무예로 몸이 단련되어 혈기가 넘쳐났다. 윤선생님은 제자들에게 무예 수련을 할 때 어떤 명칭이나 동작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별로 하지 않으셨다. 글이나 말보다는 몸을 움직여 직접 수련하는 것을 선호하셨기 때문이다. 또 멋을 부릴 줄 몰라 신발도 미국 군화를 신고 다녔다. 가방은 갈색 가방, 일명 '채권장수 가방'을 가지고 다니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생은 10대 시절, 그러니까 1930년대에 만주(滿洲)에서 무예를 익혔다. 당시 만주에서는 무예를 배우기가 요즘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처음엔 가르쳐주지 않으려 하자, 마당을 매일 쓸어 주는 등 성의를 보였으며, 교습비도 다른 사람의 2배를 내며 무예를 배웠다. 그러나 선생은 당시 어떻게 무예를 배웠는지 또 누구에게 무예를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제자들에게도 잘 말씀을 해주지 않아 정확한 상황은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재 윤 선생님이 전수한 형(型·품새)들을 보면 지금 중국의 동북 삼성(만주일대)에서 전해지고 있는 무술과는 별개의 무예를 다양하게 익혔을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 후 만주에서 일본에 건너간 선생은 니혼(日本)대학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는데, 그 때 우연히 '수도관(修道館) 가라테'의 개조로 불리는 '도야마 간켄(遠山寬賢) -------------이후 부터는 빡셔서 무카스를 펌합니다.------------------------------------------------


이 글은 사운당 박철희 선생이 2005년 구술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2008)'에 수록하였다. 이후 빠진 부분들을 여러 차례 만남을 통해 조금 더 보완하였다. 이 글 또한 가능한 한 구술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려고 했으며, 기존 주장 혹은 사실과 다른 점에 대해서는 「정리자 주」로 보완하였다(정리자 주 : 박철희는 1933년 생으로 YMCA권법부에서 권법을 수련하였으며, 6․25 이후에는 강덕원을 창설하였다. 육군사관학교 태권도 교관, 경무대 무도 사범, 대한태수도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파사권법'이 있다.)

스승 윤병인 선생

저는 1933년 1월 15일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창신국민(초등)학교와 당시 6년제였던 경복중학교를 1950년에, 경희대학교 체육학과를 1958년에 졸업하였고, 1962년에는 고려대 대학원(국제정치)에서 2년간의 연수를 마쳤습니다. 

제가 처음 태권도(跆拳道)를 접한 것은 경복중학교 때로, 15살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당시 제게 태권도(당시에는 내가 수련을 한 YMCA권법부에서는 권법(拳法)이라고 했다)를 가르쳐주신 분은 윤병인(尹炳仁)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분의 고향은 함경북도 북청입니다. 내가 너무 어려서 선생님에게 감히 연세를 직접 여쭙지 못한 탓에 정확히 언제 태어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러 정황들을 종합하여 1914년 아니면, 1915년 생으로 생각됩니다. 광복 후에 28세 혹은 29세 정도의 젊은 나이셨고, 고향 후배인 국제태권도연맹을 이끌었던 최홍희(崔泓熙)씨보다 세 네 살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정리자 주 : 이 부분은 박철희 선생의 기억과 다른 기록으로 차이를 보인다. 최홍희는 1918년 생이고, 윤병인은 1920년 생이기 때문이다. 또한 윤병인이 태어난 곳은 만주 장춘이어서 최홍희가 고향후배라는 것도 맞지 않다. 다만, 이들의 서열문제는 일본 유학 중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무예실력이 높았던 윤병인이 어른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 윤병인(아랫줄 가운데) 관장이 1946년 난지도에서 제자들과 합숙훈련을 하고 있다.


윤병인 선생은 천상 무인이셨습니다. 무예밖에 모르는 정통 무도인이셨죠. 키는 보통이었지만, 무예로 단련된 몸에서는 혈기가 넘쳐 났습니다. 윤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무예 수련을 할 때 어떤 명칭이나 동작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별로 하지 않으셨어요. 글이나 말보다는 몸을 움직여 직접 수련하는 것을 좋아하셨죠. 또 멋을 부릴 줄 몰라 신발도 미국 군화를 신고 다녔습니다. 가방은 갈색가방, 일명 ‘채권장수 가방’을 가지고 다니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선생님은 수련하실 때 흰 목장갑을 끼시곤 하셨는데, 한쪽 손가락이 온전치 않았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청량리에서 불량배들과 다툼 중 칼을 막다가 손가락이 잘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선생은 10대 시절, 그러니까 1930년대에 만주(滿洲)에서 무예를 익히셨습니다. 당시 만주에서는 무예를 배우기가 요즘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가르쳐주지 않아서 마당을 매일 쓸어 주는 등 성의를 보였다고 합니다. 교습비도 다른 사람의 2배를 내며 무예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당시 어떻게 무예를 배웠는지 또 누구에게 무예를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제자들에게도 잘 말을 하지 않아 정확한 상황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현재 윤 선생님이 전수한 형(型․품새)들을 보면 지금 중국의 동북 삼성(만주일대)에서 전해지고 있는 무술과는 별개의 무예를 다양하게 익혔을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만주에서 일본에 건너간 선생은 니혼[日本]대학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 때 우연히 ‘수도관(修道館) 카라테’의 개조로 불리는 ‘도야마 간켄(遠山寬賢)’선생과 만나게 되었죠. 당시 간켄 선생도 윤 선생의 무예 실력을 인정해 서로의 무예를 바꾸어 배웠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스승과 제자로서가 관계가 아니라 무인과 무인 사이에 이루어진 대등한 교류 차원이었습니다. 도야마 선생의 나이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교류가 이루어졌던 데에는 도야마 선생의 인격이 훌륭한 점도 작용을 했겠지만 윤 선생님의 탁월한 무술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윤 선생님이 도야마 선생과 만나게 된 데에는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추측에는 일본인 학생들이 윤 선생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혼줄이 났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도야마 선생이 윤 선생을 찾아와 대면하게 되었고, 윤 선생의 무예 실력을 인정하고 교류를 하게 된 것이죠. 도야마 선생은 그 자리에서 윤 선생에게 4단을 인정해 주었다고 합니다(정리자 주 : 도야마 간켄이 저술한 '공수도대보감(학서방, 1963)'에는 5단 이상 고단자에 윤병인의 이름이 올라 있다). 그 후 윤 선생님은 일본대학 카라테부의 사범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시중의 태권도 역사를 서술한 책들을 보면 일본인을 제치고 카라테부 주장을 맡았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뭔가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윤 선생은 주장이 아닌 학생들을 지도하는 사범이었기 때문이다. 부원들을 관리하는 주장과 지도하는 사범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으므로 이에 바로 잡아야 합니다. 당시 가라테부 주장은 ‘긴조 히로시[金城 裕]’였습니다.

해방 후 선생은 경성농업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재직하면서 당신이 배운 무예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후 직장을 경동중학교로 옮기셨는데, 이 당시 세계태권도연맹 회장을 맡아 태권도를 세계화시키고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게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김운용(金雲龍) 씨도 이 학교에서 권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경동중학교에서 건국대학교(당시 낙원동 소재) 학생과장으로, 다시 성균관대학교 학생부 처장으로 교직원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46년 서울 종로에 있던 YMCA에 권법부(拳法部)를 설치하면서 본격적으로 무예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윤 선생님은 조선연무관(朝鮮硏武館) 권법부에서 전상섭(田祥燮) 선생과 같이 사범으로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내 친구인 백상기의 형님이신 백용기 씨가 주선해서 YMCA에 권법부를 두게 된 것이다.

YMCA 권법부는 창무관(彰武館)과 강덕원의 파생관을 만들어내는데, 창무관은 윤병인 선생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던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루는 사범실 앞에서 운동하고 있는데, 윤 선생님이 어느 분이랑 지나가면서 ‘빛날 창(彰)’자 창자가 좋지라고 하면서, ‘호반 무(武)’자를 쓰는 창무관이 좋다고 하셨다. 이를 계기로 창무관이라는 명칭으로 단증을 발급하기도 했죠. 공개적으로 창무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당시 도장이 YMCA 내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권법부 수련 시절 


당시 YMCA권법부의 수련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교본 '파사권법'


제가 YMCA에서 태권도를 수련할 당시, 권법(YMCA에서 가르치는 무예를 윤 선생님은 권법이라고 불렀다)을 시작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사내들이 보통 그러하듯이 나도 어릴 때부터 무술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두발당상으로 초가지붕에 얼린 고드름을 깨는 등의 기본적인 발차기는 배우지 않고도 구사할 줄 알았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았죠. 하지만 본격적인 무예 수련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로부터 ‘경농 18기’라는 분이 무술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이 모집광고를 그를 찾아 왔습니다. 당시 윤병인 선생님의 별명은 ‘경농 18기’였는데, 선생이 경성농업학교에 재직하면서 권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다.

물론 저는 그 전에 우연히 선생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때는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경복중학교 1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나는데, 그 해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와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의 연․보전(지금의 연․고전)이 서울운동장(지금의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는데, 축구시합을 보러 갔었다. 축구시합이 끝나고 장내 아나운서가 정구장에서 ‘18기 연무’가 있다고 안내방송을 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저는 곧바로 안내방송에서 일러준 장소로 뛰어갔습니다. 막 역도 경기가 끝나고 연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죠. 체격이 좋은 어떤 사람이 태극띠(띠 윗부분의 붉은색․가운데는 하얀색․아랫부분은 파란색, 윤선생님은 태극띠라고 부른 적은 없고 박철희 본인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를 두른 사람이 품새 등을 선보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이 바로 윤병인 선생님이었습니다. 이 띠는 조선연무관권법부의 전상섭 선생님도 맺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때 장권과 팔기권 등을 선보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박철희 선생님 정근상과 오른쪽 고 윤병인(아랫줄 첫번째) 선생님


그 후 동네 레슬링 선수를 하던 선배들로부터 ‘경농 18기’라는 이름을 자주 들을 수 있었는데, 때마침 또한번 수련생 모집 광고가 났죠.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등록을 했습니다. 나 외에 500여명 정도가 등록을 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러다 보니 체육관에 모든 관원들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을 3개로 나누어서 지도해야 할 정도였죠. 그 때 수련하면서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데, 수련생들은 한 동작을 하고 난 다음에는 얼마간을 그대로 멈춰 있어야 했습니다. 2층에 있던 농구장에서 했는데, 자리가 모자라 강당 및 1층에 있는 역도장까지 치우고 운동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자리를 옮겨가며 지도를 해야 했기에 한바퀴 다 돌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운동하는 시간보다 대기하는 시간이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수련은 방과 후 오후 4시 반부터 시작됐습니다. 선생님의 본업은 학교 교사였기 때문에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청량리에서 종로까지 오려면 시간이 걸려 종종 지각을 하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원래 말이 없었습니다. 앞에서 설명 없이 동작을 하면 눈치껏 따라해야 했습니다. 품새 등 당시에는 형의 이름이나 동작에 대한 설명을 아예 안 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배워서 알고 있긴 하지만 동작들의 구체적 명칭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유겨루기를 하게 되면 성인부와 학생부가 2열로 나눠 섰다가 한 명씩 돌아가면서 겨루었습니다. 윤 선생님하고도 겨루기를 했는데, 겨루기를 할 때 선생은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은 자신도 모르게 권법부 한쪽 구석 모퉁이에 몰려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는 처음 권법을 시작할 때 15살 정도였으므로 어린애 축에 들었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누구보다 수련에 열심히 참가했습니다. 덕분에 개관이래 2년 반 동안 유일하게 개근했다고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은 아직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 때문인지 본의 아니게 윤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기법이나 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수련한 지 2달 반 정도 지난 후에 8급 심사를 봤습니다. 심사 내용은 기본형 1절부터 5절까지였는데, 8급에 합격한 사람은 나 외에도 180명 정도였습니다. 성인부에 있던 이동주, 이남석, 이창용, 김주갑, 김동주 씨 등은 학생부와 달리 4급 혹은 5급 심사를 봤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YMCA권법부는 8급에서 5급까지는 하얀띠를, 4급부터 1급까지는 파란띠를 착용했습니다. 그 때는 지금과 달리 승급이나 승단이 빨리 이뤄지지 않아 내가 4급 이상인 파란띠를 따는데, 1년 반이나 걸렸습니다. 1단 승단은 1949년(단기 4282) 11월 15일에 보았습니다.

그 후 2단 승단 시험을 봤습니다. 그 때 성인부 어른들은 통과가 됐는데, 저는 승단에서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대련을 해도 상대가 안 될 정도로 학생부 수련생들이 훨씬 잘했습니다. 떨어지자 속이 상했습니다. 나보다 늦게 입관한 김순배 씨도 2단 승단을 했습니다. 서운했죠. 저만 떨어진 것에 마음이 좋지 않았죠. 내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시더니, 윤 선생님도 안 됐었는지 “(실력은) 2단인데, 다음에 (승단)해”라고 다독여 주셨죠.

당시 나는 권법 외에도 한국체육관에서 역도, 건우체육관에서 8시부터 이원영 선생으로부터 유도를 수련하는 등 하루에 3가지 운동을 했습니다.



권법부 수련 과정 



파사권법에 실린 형들
선생이 6.25전쟁에서 실종되셨기 때문에 윤병인 선생님의 무술을 전부 전해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권법부는 유급자 과정과 유단자 과정으로 나뉘었습니다. 유급자 과정은 다시 8급에서 5급, 4급에서 1급까지로 나누어졌습니다. 4급부터는 파란띠를 매고, 유단자가 되면 검은띠를 매야하는데, 지금의 띠와는 달리 검은색에 안에 하얀 줄이 들어가 있는 띠를 착용했습니다. 

조선연무관 권법부의 유단자 띠는 가운데는 하얗고, 위․아래는 파란색이었던 걸로, 유급자 띠는 빨간 바탕에 가운데에 파란 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정리자 주 : 조선연무관 권법부 출신이자 한무관을 창설했던 이교윤은 유단자의 띠는 검은색 바탕에 가운데가 파란색 줄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 기본동작은 '파사권법(破邪拳法)' 책에도 들어있는 기본 1절부터 5절까지의 동작이다. 방어동작과 공격동작을 연결시킨 것으로 공(工)자형으로 움직임이 구성되어 있다(정리자 주 : 기본형 1절과 3절은 송도관 후나고시 기친의 3남 기고가 창안한 태극 초단․3단과 동일한 형태를 띠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2절․4절․5절은 다른 동작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5절 모두 마지막 주먹지르기를 할 때는 발 구르기를 사용하는 특징을 지닌다). 이 동작들은 윤 선생님이 교육을 위해 창안한 듯한데,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간단한 기본 동작들을 중심으로 정리하신 것 같습니다. 

3급 이상부터는 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당시 배웠던 형, 지금 태권도로 말하면 품새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키나와 가라테의 형 및 토조산(공격․방어형)․단권(공격․방어형)․장권(공격․방어형)․팔기권(공격․방어형)․태조권․태극권 등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봉술과 도술의 무기술도 있었습니다. 그 때 배웠던 형들은 지금도 수련하고 있습니다. 당시 배운 순서는 장권, 단권, 팔기권과 태극권(이 두 형은 거의 동시에 배웠다), 토조산, 태조권입니다.



윤병인 선생으로부터 배운 기본형 5절
장권-도약을 잘하고 날쌘 사람들에게 맞는 형이다. 발차기가 많이 들어 있으며, 차오는 발을 손으로 막는 기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연습을 한 형의 하나입니다.

팔기권-육중한 체구를 가진 사람이 밀고 당기는 것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윤선생님이 주로 하신 형 중의 하나입니다.

단권-제자리에서 중심을 잡는 것을 위주로 합니다.

토조산-손을 위주로 한 형입니다. 발차기 사용 빈도가 매우 적습니다.

태조권-윤병인 선생님께서 나와 서울대 공과대학에 다니던 조귀술씨에게만 전수 해준 형입니다. 이 형에는 손끝으로 이마를 공격하거나, 안으로 뛰어 돌며 안쪽으로 발을 차거나, 앉으며 뒤돌려차기와 안에서 밖으로 후려차내는 발차기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극권-이건 필자가 배운 형은 아닙니다. 이창용씨와 김주갑씨에게 윤 선생님이 가르쳤는데, 옆에 있던 나는 앞부분 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만 기존의 형들과는 달리 힘을 순간적으로 뽑아내는 단순 동작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연히 현재 유행하는 중국의 태극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형입니다.

이런 형 외에 ‘삼보대타(三步對打)’, ‘칠본대타(七本對打)’ 등도 많이 수련습니다. 하지만, 권법부의 핵심은 두 사람이 직접 몸을 부딪치며 연습하는 방법들이습니다. 그 때 수련했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당시 배울 때는 명칭이 없는 것들이 있었다. 여기에 나오는 명칭은 그 당시 사용하던 것과 내 식으로 정리한 것이 혼재해 있다).

□ 제자리익히기
1. 손날로 맞부딪치기
2. 팔뚝 부딪치기
3. 손바탕으로 아랫배 밀기
4. 손끝으로 어깨 밀기

□ 손목대련
1. 팔뚝 부딪치기(아래 바깥․아래 안쪽․위 바깥) 한 다음에 정권 지르기
2. 손 3번부딪치고 안으로 잡고 발로 걸기
4. 팔뚝 2번 부딪치고 곧은 발질
5. 앉았다가 서서 아래 위 안으로 걸어 넘기기

□ 진퇴(進退)대련
1. 밖으로 해주면 안으로 막기(진퇴) 
2. 뒷발 구르면 상대방이 발을 굴러주면 진퇴방향 바꿈
3. 하나 찔러 막고 번갈아 막으면서 
4. 찌르고 막고 돌려 막고
5. 손 등짐 쥐고 발바닥으로 차기-상대방의 발차기가 나오는 발의 무릎 아래를 발바닥으로 막으면서 공격하는 훈련이다.
6. 이마치기-손가락을 모아서 상대의 이마를 치는 것인데, 김기황선생으로부터 배운 기억이 있다.
7. 막고 차기

이외에도 이 기본들을 변형한 연습방법들이 많이 있습니다.


6. 25 전날의 연무대회 


박철희 선생의 수련모습

YMCA권법부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연무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날 YMCA권법부는 그동안 배웠던 형 등을 시범보였는데, 나는 ‘도(刀)’를 가지고 박희태는 ‘봉(棒)’을 가지고 서로 약속겨루기를 했었죠. 저는 도술을 몇 개월 동안 혼자 윤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는데, 선생이 사용하시던 청룡도 모양의 칼(그 모양은 칼 몸의 등에 가지가 있는데, 󰡔무예도보통지󰡕에 나와 있는 언월도(偃月刀)를 연상하면 된다. 대신 자루가 길지 않고 짧았다)을 가지고 연습을 했다. 저는 그 날 뛰어 옆차기로 한 치(3.3cm) 송판 두 장을 격파하는 시범도 보였습니다. 이날 ‘장(張)○○’라는 청도관 유단자는 관수(편손끝)로 송판 격파를 시범보이다가 손가락이 부러지기도 했었습니다(웃음).

이날엔 여러 도장의 관계자들이 방문했습니다. 당시 선생은 여러 선생들과도 친분이 있었기습니다. 이원국(李元國) 선생하고도 친분이 있었구요 황기(黃琦) 선생도 가끔 와서 구경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특히 조선연무관의 전상섭 선생과는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일본 주오[中央]대학교를 다니신 걸로 기억되는 김기황 선생도 YMCA권법부 교범으로 계셨습니다(당시 교범은 사범보다 한 단계 아래를 말한다). 내 기억으로 김기황 선생은 발차기 같은 것을 간혹 가리킨 적은 있었지만, 정식 수업을 맡아서 진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김기황 선생과 윤 선생님은 서로 토조산 형을 많이 연무하셨습니다.

국제태권도연맹을 창설한 고(故) 최홍희 씨도 가끔 YMCA권법부에 들렀습니다. 윤 선생님 하고는 같은 고향 출신이어서 친하게 지냈었죠. 최홍희 씨가 YMCA에 와서 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구요. 저는 한 쪽 구석에서 혼자 수련하기를 좋아해 개인 수련을 많이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최홍희 씨가 윤 선생님에게 “형님 국방경비대에 와서 좀 지도 좀 해주십시오”라고 하니, 윤 선생님이 “안 해, 자네가 참령(지금의 소령)인데, 내가 어찌 참위(지금의 소위)달고 가르칠 수 있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최홍희 씨도 윤 선생님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부탁드린 건데, 윤 선생님이 일언지하에 거절해서 조금 무안하기도 했을겁니다. 

연무대회를 한 다음날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윤 선생님과의 인연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죠. 들리는 말에 의하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끌려가셨다고 계셨다고 하는데 그 안에서도 김주호 씨와 강무관을 세운 이동주씨 등과 수련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YMCA권법부로 와서 운동한 걸로 기억되는 김주호 씨가 윤 선생님을 보호하려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김주호씨는 동중학교를 다니며, 조선연무관 권법부에서 자띠까지 하고 선생님을 따라 다니던 인물이었죠. 하지만 그 이후의 소식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가 없었습니다(정리자 주 : YMCA권법부 출신으로 미국에서 태권도를 전파하고 있는 김병수 선생의 조사에 의하면, 윤병인 선생이 북송되었고, 1967년 경에는 북한의 호위총국에서 격술지도원으로 재직하다가, 격술 프로그램이 취소되면서 1969년이나 1970년 경에 함경남도의 시멘트 공장으로 보내진 이후, 폐암으로 1983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YMCA권법부에서 파생되어 나온 관은 홍정표 씨가 먼저 무도원으로 시작했다가 내가 맡아 이름을 바꾼 강덕원 외에 이남석, 김순배 씨가 이끈 창무관, 이동주 씨가 대구에 만든 강무관 등이 있습니다. 강무관 출신에는 현 조증덕 씨가 생존해 계시죠. 그 제자 중의 한 사람이 택견협회를 이끌고 있는 이용복 씨 입니다. 또 이남석 씨의 제자가 서대문에서 충무관을 열었던 기억이 납니다. 마산인가 어디에서 성균관대학교 주장을 하던 사람이 도장을 열었는데, 관 명칭은 무언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권재화 씨가 이곳 출신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포병장교 시절 


광주제일고 수련 모습

17살 때인 1950년 6․25가 일어나자, 12월에 육군 포병 간부 후보생으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1951년 3월 3일, 육군소위로 임관을 했죠. 포병을 선택한 이유는 포병장교는 나이 제한이 없어 입대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장교들이 많다보니, 타 장교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한 장교가 같은 계급임에도 불구하고 경례를 하지 않았다고 시비를 걸어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 장교의 팔목을 잡고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간 후 기합을 질렀다. 그랬을 뿐인데, 그 장교가 놀랐는지 곧바로 사과를 해서 아무 일 없이 끝난 적도 있었습니다.

군 복무기간 중에도 혼자 수련을 꾸준히 했다. 1953년에는 광주 상무대에서 근무를 했는데, 그 때 유도하고 검도를 하던 전남경찰국 무덕전에서 개인 수련을 하였다. 유도사범이었던 김소춘(金小春) 선생이 검도장에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이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내가 운동하던 걸 구경한 것이 기억난다.

광주에 있으면서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권법부를 만들어 지도했습니다. 당시 청도관에서 운동을 하던 우종림 대위(후에 의료보험공단 이사장을 역임)가 나한테 ‘여기서 운동 좀 할 수 있느냐’라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광주제일고등학교 학생 3명을 데려온 게 시초가 되었습니다. 무덕전에서 같이 수련을 하게 되었는데, 우종림 대위가 전속을 가게 되면서 운동할 데가 없어지기도 했죠. 그렇게 해서 광주제일고등학교에 권법부를 만들게 된 것이다. 물론 정규과목은 아니고 지금의 방과후 과외할동과 같은 것이었다. 

당시는 자유당 시절이었는데, 전국 고등학교에서 무예를 가르치는 곳이 없었습니다. 학생들이 무예를 배우면 싸움만 한다고 문교부에서 중지시키라는 공문을 내려보낼 정도로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했죠. 당시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도 교원들이 폐지시키자고 말이 불거져 나왔고 투표까지 하게 되었다. 결과는 ‘폐지’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장준환 교장선생님이 “이걸 왜 폐지시킵니까”라고 하면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죠. 교감선생님은 “문교부에서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폐지하기를 건의했습니다. 학교에 피해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그런데, 장준환 교장선생님은 “강당이 얼마나 깨끗한지 알아요. 쓰레기 한 점 없잖아요. 상무대의 장교 그 양반이(박중위) 와서 가르치는 걸 뭐하러 폐지시킵니까”라고 하면서 일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육군사관학교 초대 태권도 교관으로 가기 전까지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개인적인 수련과 지도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제일고등학교 출신으로는 군 장군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한 임복진, 강원대 법대 학장을 지낸 김정후, 건국대 사회과학대학 학장과 대학원장을 지낸 한정일 씨 등이 있습니다. 

 

엄운규 전 원장과의 한판 승부 


육사교관시절 졸업사진 박철희 사범(아랫줄 가운데)의 모습

1954년 사관학교에 가기 직전인 중위시절(포병학교에 있을 때이다)에 4단 심사를 봤습니다. 장교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외박이 허락된 때라 서울에 다녀올 수 있었죠. 어느 날 서울에 왔더니 이남석 씨가 심사가 있다고 하는 얘기를 듣게 됐습니다. 그 때 나는 군대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협회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어떤 계획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그전에는 각 도장 별로 별도 심사를 봤기 때문에 더더욱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얼떨결에 심사를 보라고 해서 심사를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4단 심사였던 것입니다.

이 심사에는 전 엄운규(嚴雲奎) 국기원장도 참가했습니다. 당시에는 서로 안면은 없었습니다. 당시 협회라고는 하지만 각 도장별로 별도 수련을 했으므로 실제 수련하는 모습을 서로 본 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소문을 통해 ‘어느 관에 누가 어떻다’더라 하는 정도 였습니다.

엄운규씨는 당시 청도관에서 제일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옆차기를 맞고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는 소문도 있었죠. 그런 엄운규 원장하고 겨루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잘 모르던 사이였으므로 어떤 특기를 가지고 있는지 몰라 탐색을 하였다. 그러다 내가 돌려차기를 하며 선제공격에 나섰죠.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졌습니다. ‘진짜로 때리는 거냐’는 항의가 들어온 것이다. 엄운규씨하고는 감정이 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심사위원인 노병직 선생에게 “뭘 때리는 겁니까, 저 사람이 저렇게 항의를 하고 있는데…”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노병직 선생이 “가(서) 해”라고 지시해 다시 겨루기가 진행되었습니다(당시 심사위원은 노병직․윤쾌병 선생이었습니다). 이후 엄운규 원장이 뛰어오면서 공격 하려는 걸 살짝 피하는 찰나 심사를 주관하던 선생님들이 겨루기를 중단시켰습니다. 한창 혈기 왕성한 때이므로 일이 크게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랬던 것이죠. 어린 나이 때문이었는지 이때 저는 3단을 취득했습니다.

6개월 뒤에 다시 4단 심사를 보러갔습니다. 창무관 도장이었습니다. 이 때 형을 연무하다가 마루바닥이 낡아서인지 약해서인지 발을 구르다가 마루바닥이 깨졌던 기억이 납니다. 이 심사에서는 전일섭 선생과 대련하게 되었죠(정리자 주: 전일섭은 조선연무관권법부를 창설한 전상섭의 친동생으로, 6․25이후 전주를 중심으로 전라북도에서 지도관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때는 군인이었으므로 민간에 있는 도장(관)에 가입하지는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중위시절 하루는 한체(한국체육관)에 들렸는데, 고려대 학생이 날 알아보더니, 선생님 체신부 자리에 창무관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가보니까, 이남석 씨가 그 자리에서 창무관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서울 올라오면 여기서 운동이나 해야겠다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물론 저는 창무관에 가입한 적이 없습니다. 저를 교범으로 해 놓았다는 기억이 납니다. 이 때문에 간혹 저와 창무관을 연결시키기도 하는데요 저는 가입조차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이남석 씨는 YMCA권법부에서 저와 수련을 하면서, 6․25 이전에 이미 체신부에 권법부를 두고 운동을 가르쳤습니다. 윤병인 선생도 가끔 가서 운동을 가르치고 심사에 참여하시곤 했습니다.

1954년 육군 사관학교에서 ‘태권도’라는 과목이 개설되면서 초대 태권도 교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육군사관학교에 태권도를 하는 모임은 있었습니다. 4년 동안 초단을 따야하는 정식 과목으로 채택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포병학교 참모장에게 사관학교로 가겠다고 부탁을 해서 전출을 가게 되었고 이후 초대교관을 지냈습니다.

1946년 설립된 육군사관학교는 1952년 4년제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4년제가 처음 적용된 육사 11기생 중에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정호용 전 국방부장관, 김복동 전 육군사관학교장 등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11기생이 아닌 1기생이라고 했습니다. 이 학사 학위를 따는데 2학점이 모자라서 뭘 가르칠 것인가 고민 하다가 태권도를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보충학기에 3~4개월 집중적으로 가르쳤습니다. 태권도는 육사 생도들이 대부분 참가할 정도로 체육 활동 종목 가운데 럭비, 검도, 유도보다 인기 있는 종목이었습니다. 육군사관학교 교관은 1956년 5월 제대하면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육사에서도 윤병인 선생에게 배운 무예를 지도했습니다.

육사에 있는 동안 명동에 있는 중국(당시는 대만을 말함)대사관에서 무예를 가르치는 산동 출신의 고광유 씨하고 잠시 동안이나마 무예를 교류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게 많지 않기 때문에 중국대사관에 가서 무예에 대해 물어보자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죠. 고광유 씨는 원래 산동성의 마령 장군 밑에 있다가 군산에서 포목장사를 했는데, 당시 중국인들이 한국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자, 왕동원 장군이 요청해서 중국대사관에서 무예를 가르치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고광유 씨를 처음 봤을 때 나보고 뭘 하나 해보라고 했습니다. 내가 뭘 할 줄 아는지 알아야 그 다음을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 때 장권을 시연했습니다. 당시 형 연무를 본 고광유 씨는 가르칠 게 없다면서 교류를 제의했죠. 별도로 도장을 만들테니 그 곳에서 수련하자고 했습니다. 그 때 고광유씨가 자기 딸을 훈련시켰던 기억이 있다. 당시 저는 차가 없었습니다. 새벽 4시에 명동까지 걸어 와서 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관학교에 출근해야 했죠. 이후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이 생겨 중간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교본을 내다 


파사권법 책 표지

1956년 5월경에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하다가 제대를 한 후 그 해 7월부터 8월 12일까지 한달 간 해인사에서 그동안 배운 권법을 중심으로 해서 ‘파사권법(破邪拳法)’이라는 책의 내용을 탈고했습니다 이 책은 신설동에 있을 때, 김용채씨가 데리고 와서 수련하던 최성규(崔成圭) 중령이 미국에 가서 계속 수련을 하고 싶은데, 권법 하는 것을 잊지 않겠다고 사진을 찍어가야겠다고 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럴 바에 아예 교본을 한 권 만들자’라고 해서 시작된 거였죠. 그래서 한달 간 해인사(海印寺) 홍제암(弘濟菴) 영자전(影子殿)에 들어가 완성한 것이었습니다.

원래 이 교본은 3부작으로 그 첫 번째 권이 ‘파사권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연작으로 ‘활인권법(活人拳法)’,․‘완인권법(完人拳法)’을 이어 구상했습니다. ‘파사권법’은 기본기와 오키나와 카라테 형들을 중심으로 구성됐습니다. ‘활인권법’과 ‘완인권법’은 윤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형들을 중심으로 기록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아직까지 정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파사권법’의 파사는 삿된 것을 깨트리고 바름을 드러낸다는 ‘파사현정(破邪顯正)’에서 따온 것입니다. ‘활인권법’의 활인(活人)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뜻으로 다른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자는 의미입니다. ‘완인권법’의 완인(完人)은 인간을 완성하고자 한 뜻에서 붙인 것인데, 이 명칭들은 권법, 즉 태권도를 하는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즉 ‘파사권법’은 내가 수련한 권법의 이름이라기보다는 무예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저의 이상이 담긴 명칭인 것입니다.

‘파사권법’에는 윤 선생님이 창안한 기본형 1절 부터 5절의 내용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정리한 정공형 중 제1형도 포함되어 있죠. 자세를 고정한 채 뒷손으로 찌르는 걸 해 보자는 뜻에서 형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대구에 아이끼를 한다는 노인이 있다고 해서 대구에 가서 만났는데, 그 분이 바로 최용술 선생이었습니다. 마당에 권고대를 세워놓고 장막이 쳐져 있었죠. 최용술 씨의 수도부위는 권고를 얼마나 쳤던지 달걀 하나가 더 있는 것처럼 두꺼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박철희 사범 수련 모습
‘파사권법’을 탈고하고 얼마 뒤 조선연무관 창설자이신 이경석(李景錫) 선생이 추천을 해서 경무대에 ‘태권술부(跆拳術部)’ 무도 사범으로 들어갔습니다. 경무대에서도 윤 선생님의 권법을 중심으로 해서 가르쳤죠. 당시 경무대에는 태권도 외에도 유도와 검도 등을 가르쳤는데, 유도는 이원영 선생이, 검도는 김종달 선생님께서 지도했습니다.

당시 경무대 행사 중의 하나는 이승만 대통령 생일(3월 26일)을 기념해 열리는 ‘전국무술개인선수권대회(全國武術個人選手權大會)’였습니다. 제가 1958년,59년,60년 무도대회를 주관했습니다. 태권도 및 유도,검도,궁도 등을 시연했습니다. 당시 경찰관들이 시연을 많이 하고 경무대 경찰서에서 주관을 해서 경찰무도대회라고 인식을 하고 있는 듯 합니다.

당시 경무대 사범이던 저는 모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시범을 지도했습니다. YMCA권법부 소속의 홍정표, 나종남, 최익진, 김병수, 서영익, 박세혁, 정화, 조기정 등이 참여했는데, 저는 홍정표씨와 장권(長拳)형 및 대련을 시연했습니다. 

1959년 시연 때는 오도관(吾道館)의 최홍희 씨와 남태희 씨가 와서 전국무도대회에서 시연을 할 수 있도록 부탁을 해 왔고, 그래서 시연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경호실 남태우 서장이 나를 보자고 해서 갔더니 마침 남태희 관장하고 최홍희 소장이 와 있었습니다. 저는 다방에서 시연을 하나만 해달라고 했습니다. 충무형이 좋겠다고 해서 그 형을 시연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최홍희 씨가 당신이 일본에서 현해탄을 건너올 때에 윤병인 선생하고 같이 오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고 제게 말을 했습니다. 자신과 윤 선생님이 가깝다는 것을 나에게 환기시키려고 하는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일 날 충무형 시연이 끝나고 한 사람이 오더니(최홍희 씨는 내빈석에 앉아 있었다), ‘형을 하나 더 시연할 수 없느냐’고 해서 다시 요구했습니다. 월남(베트남)에 태권도 선수단이 갔다 와서 인사를 여쭙는 거라는 설명을 하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경무대에 있던 1959년 11월 3일에는 광주학생운동 30주년을 기념해 「전국학생태권도특별연무대회(全國學生택권道特別演武大會)」를 사비를 들여 시공관(市公館)에서 개최했습니다. 광주 학생운동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하게 된 것이죠. 당시 주최는 강덕원에서 맡았고, 주관은 「전국학생태권도연합회」에서 했습니다. 경무대에는 1960년 4.19 의거가 일어난 후 경무대가 편제상 없어지면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무도원에서 강덕원으로 


광주학생운동 30주년 기념 연무대회 포스터
경무대에 있을 때 최홍희 씨 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 엄운규,현종명 씨 등도 있었습니다. 최홍희 씨가 2군 부사령관으로 재직하고 있었을 때였죠. 제가 최홍희 씨에게 무예 명칭을 무도대회에 사용할 때 ‘택견’으로 하자고 건의를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택견이라고 하시니까, 태권도라는 것을 접어 두자’라고 말을 하면서, 나중에 태권도라는 명칭이 되도록 돕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최홍희 씨는 기차 시간 5분 전까지 생각하더니 ‘안되겠는데, 태권도로 해야지’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대한 후인, 1956년 아마 '파사권법' 책을 탈고하던 즈음에 YMCA권법부에서 수련한 홍정표 씨가 제게 와서 개인적으로 도장을 열고자 하는데 좀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마침 저의 집 근처에 빈 건물이 있어서 거기서 하시라고 했습니다. ‘명칭은 어떤 걸로 할까요’라고 하니, 한 번 나보고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도원’과 ‘강덕원’ 두 가지를 추천했더니, 무도원이 좋다고 해서 시작한 것입니다. 무도원은 ‘무도원택견권법도장’을 편의상 줄여 부른 말입니다. 

무도원 사범은 홍정표 씨가 맡았습니다. 당시 관장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홍정표 씨가 3개월 내지 4개월 정도 운영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보고 맡아달라고 해서 사범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강덕원(講德院)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게 되었죠. 1956년 서울 신설동에 도장을 마련한 강덕원은 ‘익힐 강(講)’에 ‘덕 덕(德)’ 자를 선택, 공정하고 포용성 있는 마음을 가르치는 집을 표방했습니다. 원(院)이란 표현은 일본식의 관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마음에 '파사권법' 책을 탈고하던 해인사의 경학원(經學院)에서 따왔습니다.

1956년에는 ‘대한 학생 택견권법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는데, 클럽활동으로 1주일에 한번인가 두 번 씩 대학에서 가르치던 연세대와 외국어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간판까지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초창기 관원은 이금홍(세계 태권도연맹사무총장 역임)과 그후 대한 태권도 협회 5대 회장을 역임하고 태권도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김용채를 비롯해 정화(세계 태권도연맹 집행위원), 김정후(강원대학 법정대학 학장 역임), 이강희(멤피스 사범-앨비스 프레슬리 지도), 한정일(건국대학교 교수), 김병수(미국 휴스턴 태권도 사범), 지승원(한동대학 법학과 교수), 임복진(전 국회의원) 등이 있었습니다.

강덕원은 그후 창신동, 청진동, 서대문, 서울운동장 등으로 도장을 옮기다가 이금홍 씨가 3대 관장으로 부임하면서 인사동으로 이전 정착했습니다. 현재 ‘강덕원 무도회(강무회)’로 계승되고 있으나 저는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송덕기 선생과의 만남 


박철희 사범과 송덕기 옹이 경회루 앞에서의 시연 모습

송덕기(宋德基 1893~1987) 선생은 1958년 또는 1959년 경에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해 열리는 ‘전국무술개인선수권대회(全國武術個人選手權大會)’에 시연자로 오게 되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1958년 이승만 전(前)대통령이 태권도 시범을 본 후 ‘택견’이라는 말을 언급한 이후, 경무대 경호원이 송덕기 선생을 개인적으로 알아서 시연자로 모시고 온 것이었죠. 당시 60대이셨던 송덕기 선생은 움직임을 볼 때 명인이셨다. 송 선생님은 이후 경무대 상무관에 거의 매일 놀러오셨던 관계로 만남이 지속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리 무예에 대해 조사하기를 좋아했던 나는 어디에 뭐가 있다고 하면 찾아다니곤 했습니다. 이리(지금의 전북 익산)역 앞에 택견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분은 장심 단련을 위해 나무에다 새끼를 감아놓고 그 것을 밟고 지나가는 훈련을 많이 했으며, 서울 답십리에도 80이 넘으신 정노인이라는 택견을 잘하는 분도 계셨다. 이분은 내가 찾아뵈었을 때는 너무 연세가 들어, 움직임을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송덕기 선생을 뵙기 전에 이미 택견에 대해 알고 있긴 했죠.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 때 출전하게 된 한국 대표팀이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장에 전시할 것으로 태권도가 채택되면서, 그 옛 모습으로 ‘택견’도 같이 전시할 수 있게 되면서 본격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당시 ‘문교부 체육과’가 이 일을 주관했는데, 경복궁 경회루에서 택견동작을 3~4시간에 걸쳐 사진 촬영했습니다. 당시 경복궁은 일반인들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문교부 체육과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촬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송덕기 선생은 두발당상을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문교부에 필름을 줄 것을 요청했는데, 없어졌다는 회신만 돌아왔습니다. 이 사진들은 40년 후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저한테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미군 해군대령이자, 태권도를 수련했던 나종남 씨가 ‘사범님이 가지고 계셔야 될 거’라면서 되돌려 준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그 사진을 입수해 보관하고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송 선생을 뵌 후 택견을 보존하기 위해서 가칭 ‘사단법인 대한택견무도연구원’을 설립하려고 문교부 체육과에 제출했습니다. 하루는 문교부의 사무관이 와서 ‘선생님 위에다 말 좀 해주세요. 유사단체에서 반대가 들어왔어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죠. 그랬더니, 더이상 일이 진행되지 못하고 법인문제가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을 때도 체육과에 아는 사람이 있어 해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 4․19, 5․16 등의 사건이 발생했고 내가 미국에 가게 되면서 송덕기 선생님과의 인연도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송덕기 선생님은 경무대와 선생 댁이 가까워서 시간이 나시면 자주 방문하셨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습니다. 내가 택견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었던 탓에 그랬는지 송덕기 선생님은 저를 무척이나 신뢰했습니다. 송 선생님은 그 때 황학정에서 활을 쏘러 다니곤 했습니다. 법인 문제로 문교부 학예국장을 만났을 때는 ‘박철희 사범에게만 택견을 가르친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송덕기 선생의 말에 의하면, 지금의 을지로에 위치한 국립의료원이 위치한 곳은 구한말 훈련원이 있던 자리인데, 모래밭에서 택견시합을 했다고 합니다. 시합을 결련이라고 하였는데, 강조한 것이 손이 땅에 닿으면 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합에서 가장 중요한 택견 기술은 발바닥으로 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손은 주먹을 사용해 치는 게 아니라 손바닥으로 공격을 하는 거라고 말씀을 하셨죠. 그리고 아랫대와 윗대는 누상동과 누하동을 일컫는 말로 누상동이 웃대, 누하동이 아랫대라 했습니다.


태수도협회 


박철희 사범의 수련 모습


1960년 5월 16일 이후 문교 위원회에서 유사단체 통합에 관한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문교위원회에서(문교 위원: 홍종철) 소집책임자로 9명을 지정했습니다. 한국체육관 관장사무실에서 모여 통합에 대해 논의 했습니다. 저를 포함해 황기, 노병직, 엄운규, 현종명, 남태희, 고재천, 이남석, 이교윤 등이 있었습니다.

통합회의를 여러 차례 했는데 수박도의 황기 선생과 공수도 지도관의 윤쾌병 선생이 적극적으로 참여 하지 않았죠. 당시 한국체육관 건너편에 있던 동남빌딩의 지하실에 있던 동남다방에 문교위원회 김용채씨하고 문교위원 보좌관 이효석 씨가 저를 찾는다고 해서 나갔습니다. 통합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러 온 것이었습니다. 진행에 대해선 ‘우리끼리 알아서 결정 할테니 상관하지 말라’고 해서 돌려보냈습니다. 

통합이 지지부진 한 가운데, 통합의 효율을 높이고자 9명 중에서 적은 인원으로 실무자를 줄이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엄운규, 이종우 씨가 그 일을 맡게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와 엄운규, 이종우 씨와 여러 번 만나게 되었죠. 이 두 분도 “박 사범에게 일임할테니 윤쾌병 선생하고 황기 선생을 가입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건을 걸었습니다. 

“종신심사위원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그건 박 사범이 알아서 하라’고 했고 그래서 그 일을 도맡게 되었습니다. 

윤쾌병 선생이 재직하고 있는 건국대와 황기 선생이 있는 무덕관을 10여 차례 이상 왔다갔다하면서 협회에 가입하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윤쾌병 선생은 ‘황기 선생이 좋다고 하면 당신도 좋다’고 하셨죠. 황기 선생을 유도회 회관 들어가는 데 있는 수양다방이라는 곳에서 뵙고 ‘모든 것을 맡기고 젊은 관장들은 그만둘테니 원로들이 하시라’고 했습니다. 황기 선생은 ‘태권도라는 이름은 좋은데, 최홍희가 회장이 되는 것은 좋지 않아’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만났을 때는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나는 두 분에게 ‘최고 심사위원이 되시라’고 하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당시 종신 최고 심사위원으로 두 분을 아무런 조건 없이 모시겠다고 한 것이었죠. 이 부분에 대해 태권도 역사를 다룬 글들에서 종신제 최고 심사위원을 윤쾌병, 황기 선생이 요구한 걸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그렇게 대우해드린다고 말씀드린 거였습니다. 물론 이전 협회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관여한 ‘태수도협회(跆手道協會)’ 때는 내가 먼저 말씀드린 것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 말씀을 드렸지만 계속 이러저러한 말씀을 하셔서 힘이 들었습니다.

두 분을 만날 때마다 엄운규 씨와 이종우 씨에게 종로 영풍빌딩 자리에 있던 건물의 2층 명 다방에서 진행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분들과의 일이 원만히 풀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엄운규, 이종우 씨가 ‘안 되겠다. 우리끼리라도 해야겠다’고 해서 협회를 구성하게 된 것입니다.

소집인들을 모아서 명칭을 무엇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로 말들이 오갔는데, 태권도를 싫어하는 자도 있고, 공수도라고도 할 수 없어서, 결국은 발을 뜻하는 ‘태(跆)’자하고 손기술을 뜻하는 ‘수(手)’자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한태수도협회’가 발족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대한 체육회에 산하단체로 가맹을 했습니다. 대한체육회에 가맹을 하면 전국대회 등에 참여할 수 있어서 태권도 보급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입니다.

태수도협회 이후에는 개인적인 일로 1971년 미국에 건너가면서, 국내 협회 일에서는 손을 떼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이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이부터 다시 씀-------------------------------------------------

 

태권도는 왜색인가?

 현재 태권도의 역사에 대해 말이 많은 것은 태권도가 일본 무술에서 왔다는 점에 집중되어 있다. 일본에 유학을 한 이들이 '오키나와(沖縄)의 카라테(唐手)'를 수련했고, 해방이후 국내에 그것을 보급했으므로 그렇다는 것이다. 당시에 카라테의 한자를 그대로 사용한 당수도라는 명칭도 존재했으므로 이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YMCA권법부와 조선연무관 권법부는 '권법'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며, 현재에는 태권도와 별개의 무술 유파로 정착한 황기선생의 무덕관은 화수도나 수박도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조선연무관의 경우도 당수도부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6.25전쟁 이후 한국체육관으로 옮겨가 '연무관 공수도부'로 이름을 바꾸기 이전에는 분명 권법부였다. 이런 점은 당시 5개 관 중 당수도를 사용한 것이 생각보다 적었음을 말해준다.

 한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에 권법이나 가라테를 보급한 이들은 열렬한 민족주의자 였다는 것이다. 윤병인 선생님이나 연무관의 전상섭선생은 민족적인 자긍심에서 태극띠를 착용했으며, 유단자의 띠도 6.25사변 전에 연무관에서는 유단자의 띠가 지금의 검은 띠와는 달리 위와 아래는 파란 줄이고 가운데 흰 줄이 들어가 있는 띠를 착용했었다. 또한 무덕관은 고구려의 복장을 도복으로 채택하는 등 젊은이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었다. 더군다나 이들은 가라테를 일본 무술로 이해하지도 않았다. 가라테는 일본 무술이 아니라 식민지라는 점에서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던 오키나와의 무술로 이해한 것이다. 일설에는 일본가라테의 아버지로 불리는 '후나고시 키친(船越 義珍)'이 가라테를 일본에 보급한 것은 오키나와가 일본에 점령을 당하고 점점 독립의 희망은 사라졌지만, 그가 가라테를 가르친 사람들에 의해 오키나와의 정신이 기억되고 가라테가 전승되는 한 언제까지고 남겨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가라테를 배우는 사람들은 결국 이 무술이 오키나와로부터 왔다는 걸 알게되고, 이로 인해 오키라나와라는 독립국가에 대한 인식이 백년이고 천년이고 이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마 당시 우리나라에 '오키나와 가라테'를 보급한 이들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는 아직 일본에도 가라테가 보급되기 시작한 초기였으므로 일본 무술이라는 인식도 없었다. 당시 가라테는 영화같은 데서도 보면 알겠지만, 악당이 하는 무술로 취급되었다. 그런 가라테를 연마한 사람들을 혼내주는 것은 유도나 검도를 한 일본사람의 역할 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라테를 배운 선생들이 일본 무술로 인식했을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가라테를 보급한 이들을 왜색무술을 한 이들로 말 할 수가 없으며, 태권도 또한 일본 무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태권도 역사의 시기구분


 '태권도' 역사에 대해 서술하는 글들을 보면, 윤병인 선생님을 비롯한 이원국, 전상섭, 노병직 선생 등을 '태권도 1세대'로 나를 포함한 제자들을 '2세대'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뭔가 잘 못 생각한 것 같다. 물론 이분들의 무예가 훗날 태권도의 모태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 별도의 무예를 하고 있었다. 맨손을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연관이 있지만, 각 관별로 기술의 차이도 있었고, 관과 관끼리는 별도의 심사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태권도 1세대'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이들은 각자가 별도의 무예를 보급한 세대인 것이다. 편의상 '관(館)세대' 또는 '전(前)세대'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현대의 태권도는 그 시원(始原)을 5개의 큰 기간도장이 합한 이후부터로 봐야하고, '태권도 1세대'들 또한 그렇게 통합을 이뤄낸 세대들부터를 지칭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각 관 간에 공통의 심사를 보기도 하는 등의 일이 시작되는 시기부터를 '태권도'의 본 역사가 시작되며, 이 시기에 참여한 이들을 '태권도 1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볼 때는 이시기는 '대한태수도협회' 때부터로 보는 게 옳을 듯 하다. 현재 '태권도'의 근간이 된 여러 단체들이 참여했고, 심사를 통해 단을 일괄적으로 정리하는 등의 외형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현재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1967년 5월의 '태권도협회' 문서에도 그 연원을 '태수도협회'로부터 찾고 있어 당시 '태권도'인들도 그렇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태권도는 전통 무예인가? 

 

 '태권도'는 신라의 화랑이 하던 전통무예는 아니다. 다만 광복 이후 60년 된 한국무예인 것이다. 일본에 유학했다 해방을 즈음한 시기에 귀국한 선생들에 의해 국내에 들어온 '오키나와 가라테'와 윤병인 선생의 '만주권법', 그리고 한국의 전통적인 발을 차는 기법이 서로 영향을 주어 나타난 무술이기 때문이다.

 윤병인 선생의 무예를 '만주권법'이라고 서술한 것은 그 연원을 자세히 모르기 때문이다. 현재는 중국영토였지만, 윤병인 선생이 무예를 수련하던 당시 만주는 중국영토가 아니였다. 만주는 전통적으로 중국영토가 된 적이 없는 지역으로 중국영토로 편입된 것은 일본이 만주에서 물러나면서부터 였다. 그 지역에는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부의(溥儀)'가 명목상으로나마 만주국(滿洲國)의 황제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양했다. 그 중에는 현재 중국인의 주류를 이루는 한족들도 있었지만, 조선족이나 만주족, 혹은 러시아인, 일본인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그러다보니 팔극권 같은 중국 무술도 있었지만, 각양각색의 다양한 형태의 무술이 존재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만주에서 무예를 익힌 윤병인 선생님의 권법을 중국무술로 보기 어려운 면이 존재한다. 그래서 '만주권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주권법'은 '발끌기'가 움직임의 기본인데, 이 발끌기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태권도'의 '태극품새'의 기본에 포함되어 있다. 태극 1장 등에 보이는 막고 지르기 동작에 모두 '발끌기'가 포함 되어 있는 것이다.

 '태권도'에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발차기 기법이 포함되어 있다. '태권도'에 영향을 준 발을 사용하는 우리 전통 무예는 대개 '택견'이라고 서술하고 있으므로 '택견'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실제 그것이 '택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발을 잘 찼는데, 누구한테 배운 것은 아니지만 '두발 당상'은 쉽게 했다. 친구들과 초가지붕에 열린 고드름을 '두발 당상'으로 차서 떨어뜨리는 놀이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아는 분 중에 한 분은(후일 검도로 일가를 이루신 분이시다.) 학교 교실에 들어갈 때 교실문의 윗 턱을 한번씩 차고 다녔으며, 싸움을 해도 발로 다 제압을 할 정도였다. 그 분도 어떤 특정 인물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었다. '태권도'에는 이런 '발을 잘 차는 문화적 토양'의 영향을 받아서 발차기가 특징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비록 문파로 구체화되지는 않았지만 한국 전통 무예의 영향도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실제로 현재 태권도 유단자 품새인 '고려'에 포함 되어있는 '칼재비'는 택견의 기술인 '칼잽이'에서 가져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가지, 전통무예와 관련해 염려스러운 것은 역사 서술을 할 때 이 점을 너무 강조하게 되고, 이런 점을 강조하여 그 기원을 찾아 올라가다 보면 '태권도'가 아주 옛날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서술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오키나와 가라테'와 '만주권법', 그리고 한국전통무예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태어난 '태권도'라는 무예가 갖는 역사적 실체를 애매하게 흐릴 수 있다. 만약 그렇게 서술 한다면, 이는 '태권도' 역사가 아니라 한국전통무예의 역사가 되고, 따라서 '태권도'는 전통무예가 되어 버리는 모순을 가져오게 된다. '태권도'가 전통무예의 흐름을 이은 것임은 분명하지만, '태권도'라는 특정 무예의 역사를 서술 할 때는 '태권도'라는 명칭 자체가 나타나는 시기 즉, 광복 이후 우리나라에 '만주권법'과 '오키나와 가라테'가 유입되고 각 관들이 통합된 시기 이후에 한정해서 '태권도'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끝)

 

-----------------------------------------------------------난 전통주의 사관을 가진 학생으로서 원로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고 가치가 있음을 안다. 그리고 상당히 중량감 있게 받아들이지만 단순히 통합과 명칭으로 태권도의 역사를 쉽게 단정지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실제 그 시대를 살아가며 보고 듣고 실제로 실천하시며 경험하신 사운당 노사님을 폄하하고 비방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박철희 노사님 역시 YMCA권법부 출신으로 권법에 익숙하신 분이고 다른 관 출신 분들과 마찬가지로 만주권법의 진한 냄세를 맡으며 익혔으니 후일 통합이나 태권도를 보지 못하였다면 자신이 익힌 태권도를 메이디 인 차이나[아니면 만주]라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권법과 가라테의 투로와 카타 그리고 도장 문화등 태권도에 영향을 미친 것이 있겠지만 태권도의 가장 큰 영향을 준 격투기법은 태껸에서 왔다고 믿으며 실증해 보일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환경적 요인 또한 태권도의 통합을 요구한(실제로는 명령한) 환경이 실은 사회가 아니라 군부(태권도의 통합은 5.16 군사쿠데타로 인한 정부 포고령에서 시작되었다.)였으므로 유사단체의 통합차원에서 당시의 대부분의 무술단체가 합쳐졌으니 가라테, 권법 할 것 없이 엉겨붙어 협회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치 애초에 태권도 선배들이 후배들을 속였다라고 여겨서도 않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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