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빛, 자유의 정신과 성산 이영식 목사님의 삶


                                                              이원보목사(대구대 대명동 캠퍼스 영광교회 담임목사)

 

이영식목사는 한국이 어렵고 힘든 시절 자신의 삶을 나환자와, 장애인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고 그들이 당당한 인격체로 존중받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어 그리스도의 참된 섬김과 사랑의 삶을 살아가신 분이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항의한 독립 유공자이며, 한국에 장애인 교육시설이 전무하전 시절, 대구 경북 지역에 최초로 특수학교를 세우신 교육자이며, 한국 사회사업대학을 만들어 사회복지의 기반을 닦아 대구대학교 설립에 주춧돌을 놓고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신 분이다. 현 대구대학교의 실질적 설립자이다.


정의 -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이영식 목사는 1894년 12월 3일 경북 성주군 금수면 봉두동에서 태어나셨다. 1909년에 성주군 대가면 옥화동 옥화교회 부설 소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하였으며 1913년 계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학문에 대한 열의를 빼앗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자 부해리 선교사에 청원하여 근로 장학생으로 신정교회(현 서문교회)에 정재순목사에게 청원하여 저녁예배와 학생회와 청년 면려회에서 설교로 봉사하고 교회 종지기로 지내며 어렵게 학업을 이을 수가 있었다.

 

계성학교 5학년인 1919년에 3․1 만세 운동이 전국을 뒤흔들 때 대구에서도 3월 8일에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그 때 학생 대표로서 만세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나 체포되지 아니하고 독립선언서 23매를 몰래 가지고 나와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 교회에 찾아가서 자신의 처족과 교인들과 합세하여 밤 11시에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이후 김수길, 허성도, 김기명, 이진식 등과 함께 민족 운동의 궐기를 촉구하는 한편, 철시운동, 독립운동 군자금 마련, 비밀결사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단체가 바로 ‘혜성단’이다. 그 때 ‘동정표시경고문’(일본인과 상거래를 중단할 것을 촉구함)을 300매 인쇄하여 대구 부내 상인들에게 발송하여 80여 상가의 호응받았고, ‘근고동포, 경계동포’등을 등사하여 조선인 군수, 면장들에게 발송하여 궐기를 촉구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6월 복역하고 그 이후에도 계속 전국을 돌며 독립운동을 수행하다가 징역 1년 6월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사랑의 삶 - 나환자들의 친구

삼일운동 이후 일제는 조선의 통치방식을 무력과 억압으로 다스렸던 무단통치 방식을 바꾸어 문화통치를 시작하였다. 조선의 독립운동가 역시도 ‘무장투쟁’과 ‘실력양성론’의 두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실력양성론’의 독립운동을 전개했기에 이영식목사도 당시의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아 조선의 힘을 키우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여 강건하게 되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가난하고 억압받는 백성들의 아픔을 감싸는 목자 되기 위해 일본의 고베의 신학교 입학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는 거기에서 우리에게 ‘사선을 넘어서’의 저자로 알려진 ‘가가와 도요히코’목사의 삶을 통하여 병든 자, 약한 자, 가난한 자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귀국하여 얼마간 서문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애락원’에서 나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과 함께 살았다. 1929년부터 1938년 까지 10여년을 나환자를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그 만남을 통해 해방 후에는 ‘애생원’ 건립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그곳에 신촌교회(원래 애생교회)를 설립하여 10년 동안 또 나환자들과 삶을 함께 하였다. 현재는 애생원은 없어지고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호 2리로 나환자 정착촌으로 있으며 복음화율 85%를 넘어선다고 한다. 그래서 이영식목사는 대구 경북의 ‘나환자의 구세주’로 불림을 받았다.


빛으로의 삶 - 장애인들의 친구

이영식목사는 애락원 교회를 사임한 뒤 함경북도 성진중앙교회, 만주 간도성 명월구 제일교회, 일본 횡병시 타월정 조선인 교회를 목회를 하다가 해방을 맞았고 해방 후 바로 그의 가족을 데리고 제2의 개척자의 삶을 살기 위해 대구로 돌아왔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봉사사업으로 국가 사회에 기여할 뜻을 갖고 대구에 맹․농아인을 위한 학교가 필요한 생각에 몇 몇 사람과 뜻을 같이 하여 ‘맹아 학교’ 설립을 구상하였다. 그 당시에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의식이 심하였고 사회복지시설이 거의 전무하던 시절이었기에 이러한 구상 자체가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영식목사는 기독교 정신과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에 입각하여 ‘대구맹아학원’의 설립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이미 기독교계에서 장애인 학교 설립에 대한 의지가 있었고 대구지역에 맹아학교가 없었기에 그의 정신을 실현한 여러 가지 조건이 이루어져 있었기에 종교계와 관계의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1946년 4월 19일 기성회 창립총회를 통하여 학교를 설립하였고 이듬해 1947년 4월 9일에 맹생(시각 장애인) 2명, 아생(청각 장애인) 10명으로 개교하였다. 학교를 개교하였으나 마땅히 교육할 건물이 없어 대구시 태평로 3가 150번지의 대구 중앙교회를 임시로 사용하기로 합의 하였다. 그 후 대구맹아학원 원사를 대구 제일교회당 내로 이전 후 1947년 5월 22일에 대구맹아학원 설치인가를 경상북도 도지사로부터 받았다.


대구제일교회에서도 6개월도 넘기지 못한 채 1947년 9월 1일에 대구시 삼덕동 지택이던(당시 형무소 관사 당시 대구시 형무과장을 지내고 있었다.) 곳에 임시로 이전을 했다. 얼마 후 미국 선교회의 도움으로 동년 10월 1일에 대구시 대신동 아담스목사의 사택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1949년 2월 5일에 대구시 태평로 3가 150번지의 대구시 소유건물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순례의 길을 걸어야 했다. 당시의 열악한 교육환경이나마 장애인도 존엄한 인격체이며 당당한 사회인으로 재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장애인의 교육과 학교 설립에 온 힘을 쏟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동년 7월 20일에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태평로의 원사도 군징발령에 따라 헌병대가 주둔하게 되어 다시 개교했을 때 수업의 장애가 많아 임시로 다른 거물을 사용하여 수업을 진행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새로운 신입생을 받아들였다. 1951년 7월 26일에 이사회를 통하여 ‘대구맹아학원’을 대구맹아학교’로 학교 이름을 개명하였다. 1953년 4월 13일에 대구시가 대명동 공동묘지 터 약 1만 평을 학원에 증여해 주었다. 1953년 3월 19일에 원사 신축 기공식이 있었고 원대동 임시 원사에서 맹, 농생이 걸어와서 원생들이 직접 배움터를 일구어 나갔다. 이것을 본 공병부대에서 직접 지원하여 많은 도움이 되었다.1953년 11월 23일에 정처 없이 이동하며 수업하던 학생들의 보금자리가 공동묘지 터 위에 세워진 목조 건물 153평의 건물로 이전하게 되었다. 실로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1954년 12월 11일에 본관 건물이 완성됨으로 교사와 기숙사가 겸비된 특수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영식목사의 투지와 집념이 장애인 교육의 불모지인 학교에서 이루어 낸 쾌거라 할 수 있다. 대구맹아학교는 1958년 4월 10일에 맹부와 아부로 분리하기로 결의하고 1959년 3월 9일에 광명학교와 영화학교로 특수 교육의 영역별로 분화되어 전문화되어져 갔다. 그 이후 1967년에 보병학교(정신지체), 보건학교(지체부자유아) 가 설립되었고 이영식목사 소천 이후에 1983년에 한국 최초의 정서장애 학교인 덕희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태영선생과 함께 1956년에 ‘대구이공학원’을 설치하였는데 이 학교가 대구대학교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1957년 4월 22일에 ‘한국사회사업학교’로 개교되었으며 1961년 4월 8일에 ‘한국사회사업대학’으로 4년제 정규대학의 시대를 열었다. 대명동에 대학과 특수학교들이 들어섬에 따라 부지 부족함을 깨달아 1971년 경산시 진량면 내리에 10만평의 땅 중에 약 5만 평을 구입하여 제 2 캠퍼스 시대를 준비하였다. 한국사회사업대학 병설로 설립된 전문학교가 1974년에 개교하였으며 그 후 한사실업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978년부터 경산에 단과 대학 건물이 건립되어 이전이 이루어졌다. 1981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대구대학교라고 교명을 변경하였다. 이영식목사는 ‘대구대학교’의 완전히 이전되고 신축되는 것을 다 보시지 못한 채 소천하였으나 현 대구대학교의 온전한 밑그림을 그리고 터전을 이룩해 놓으신 분이시다.


실로 35년 이상을 이 땅에서 소외받고 외면 받는 자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온전히 되살리기 위해 그리스도의 빛 된 삶을 살아오신 것이다. 그는 장애인의 빛이었고 한국 장애인 교육과 사회복지 사업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한 큰 빛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빛 된 삶은 많은 장애인들에게 교육을 받게 했으며 대구대학교를 특수교육의 요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자유의 삶 - 인간 존엄을 위한 무명 한국인 위령 사업

이영식목사는 팔십세가 넘어서도 인간존엄의 사업을 하였는데 그 대표적 사업 중 하나가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사이판, 티나안 등에서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하는 것이었다. 1975년 12월 29일에 미국령 괌도에 ‘국제복지문화센터(I.W.C.C)’를 설립하고 1976년 10월 티니안을 방문하는 중 티니안 시의원 보라와의 안내로 추루 지방 정글 속에서 ‘조선인지묘’란 비석과 합장된 무덤 3기를 발견하였다. 이후 1977년 3월 23일 학교법인 영광학원 이사장 명의로 보건복지부 ‘제외동포 모국 방문 추진위원회’에 전사자의 유해를 봉환할 수 있도록 봉환 허가 신청서를 제출하여 4월 23일에 허가를 받았다. 1977년 3월 25일에 ‘봉환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4월 30일에 1진이 도착하고 5월 10일에 2진이 도착하여 5월 12일에 작업을 완료하여 5월 15일에 천안 ‘망향의 동상’에 5,000여 구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1977년 12월 5일에 티니안 현지에 ‘평화기원한국인위령비’를 제막하여 세계평화와 번영을 기원하였다. 그리고 해외 희생 동포를 위한 후원 사업으로 북미 마라아나에 라이트 하우스를 설립했으며 1981년 10월 파라우 공화국에 한국인 위령탑 제막식에도 참석했다. 그는 건강한 삶을 살다가 1981년 12월 8일에 괌도에서 하나님 나라에 부름을 받아 영원한 자유인이 되었다.

 

이영식목사는 참된 자유인의 삶을 누리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란 말씀처럼 그의 삶이 사랑과 빛 된 삶을 통하여 참된 삶의 자유를 누리신 분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자유는 선택이고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는 것이며 스스로의 선택을 통하여 실현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으며 자유는 필요적으로 책임을 수반한다고 말하였다. 자유는 타인과의 접촉에서는 사랑과 광명(빛)으로 나타난다고 역설하였다. 그럴 때 내 자유가 제한될 수 있으나 이것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활력소가 될 수 있기에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영식목사의 삶을 돌아보건 데 그의 사랑, 빛, 자유의 삶은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합체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실천하면서 여생을 보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나이 80세에 A4 용지 6장의 분량의 유훈을 남겼는데 그 중에 다음의 글귀가 있었다.

 

* 나를 기념하기 위한 동상, 비석, 등은 어느 것도 필요 없다. 다만 아래와 같은 글을 새긴 조그만 한 돌 하나를 세워 두면 족하다. “큰 뜻을 품고 인간 세상의 밑바닥을 헤매면서 모든 공포를 벗어나 저 하늘을 넘어 선한 사람이 여기 잠들다.”

  

* 창조적 생활에 힘쓰라. 너희들은 항상 인간 존엄성에 입각하여 하루 하루 창조하는 보람 있는 직업에 앞장서라. 행복을 자신에서 구하고 과거를 후회하지 말고 미래에 걸지도 말고 오늘의 인생관을 바르게 하여 인생길을 엮어가라.



이영식목사 연보(‘대구의 문화 인물’ 중 이명식교수 저)


● 1894년 12월 13일

   경상북도 성주에서 출생

● 1909년 9월

   성주군 대가면 옥화동 옥화교회 부설 소학교입학

● 1913년 4월

   대구 계성학교 입학

● 1919년 3월 1일

   대구계성학교 졸업

● 1919년 4월

   서울 형무소에서 항일독립운동 참가 혐의로 6개월 복역

   대구 형무소에서 항일독립운동 참가 혐의로 1년6개월 복역

● 1923년 4월

   일본 고베 신학교 입학

● 1927년 3월

   고베 신학교 졸업 대구 서문교회 전도사 취임 목사 안수

● 1929년 9월

   대구 애락원 나환자 교회 목사 취임


● 1938년 1월 1일

   함경북도 성진 중앙교회 목사 취임

● 1941년 9월

   만주국 간도성 명월구 제일교회 목사 취임

● 1943년2월

   일본 횡병시 타월정 조선인 교회 목사 취임

● 1945년 5월 25일

   가족을 대동하여 귀국

● 1945년 9월(1949년 12월 경 신촌교회 요람)

   대구 애생원 나환자 교회 설립 목사 취임

● 1946년 4월 19일

   대구맹아학원 설립 대구 형무소 교무과장 겸임

● 1950년 9월 17일

   성주군 가천지서에 체포 구류 사형 집행 직 전 대 연설 무죄석방

● 1953년 5월 15일

   대구시 대명동 공동묘지 약 1만평 사용권 취득

● 1956년 5월

   한국사회사업학교 인가 초대 학장 취임

● 1958년 2월

   학교법인 영광학원 이사장 취임

● 1961년 8월 10일

   한국특수교육연구협회 초대 회장

● 1963년 8월 15일

   문화훈장 국민장 교육 부문 수상

● 1967년 3월 1일

   대구보명학교 대구보건학교 설립

● 1969년 5월 16일

   5·16민족상 교육 부분 본상 수상

● 1971년 8월15일

   국민훈장 수상

● 1973년 9월10일

   광복회 경상북도 지회장

● 1977년 12월 16일

   학교법인 영광학원 학원장

● 1980년 9월 2일

   안중근 의사 동상건립추진위원회 조직 회장

● 1981년 12월 8일

   괌도에서 87세를 일기로 서거

 

 

1933년의 계성학교 출신 목회자(앞줄 오른쪽 두번째가 이영식목사 맨 뒤에 해더슨 교장)

 

 

 

 

 

  

 

 

 

 

 

 

 

 

 

 

      

 

1947년 4월 9일대구맹아학원 개원 (서성로 대구 중앙교회)

                                                                                                                                                                                                                                                                                                                                  

 

 

  

 

 

 

 

                                                                                                       

한국전전쟁 당시 성주에 있는 가족을 구하고려 집으로 가서 인민군에게 붙잡혀 총살 당하기 직전 자신이 항일운동과 장애인을 위한 교육을 하고 있음을 연설하고 그에 감명 받은 인민군이 풀어 줌(당시 목사이며 대구 형무소 형무과장이었기에 죽을 수 밖어 없는 처지였다.)

                                                                                                                                                  

 

 

 

 

 

 

 

 

 

 

 

 

 

 

 

 

 

 

 

 

 

 

 

 

 

 

 

 

 

 

 

 

 

맹아학원 초기의 이영식목사와 그의 가족 (1948년)                  

                                                                                                                                                                                                                                                                                                                                                                                                                                                                                                                                                                                                                                                                                                                                                              

 

                                                                                                                                    

대구맹아학교 교사 신축 기념(1955)

 

 

                                                                                                                                

맹아학교 설립 직후 설립자 내외(이영식목사 박두순 권사)

 

 

                                                                                                                         

사이판 전몰 무명 한국인 묘비 제막(망향의 동산 1977. 5)

 

 

 

 

 

 

 

 

 

 

 

 

 

 

 

 

이영식목사 학원장 집무 모습(1980년 그는 건강한 삶을 살았다.80세가 넘어서도 학교 일에 전력을 다했다.)

 

 

 

 



맨위로
통합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