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소일빈

경남양산/양산의 전설(1)

작성일 작성자 털보

<<1. 구포복설 용연리 세 비석의 유래>>

양산시 내원사 입구 국도변에 비석 셋이 서 있는데 그 내력을 모르고서 이 비석을 보면 어찌된 영문인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비록 한학에 능한 분이 보더라고 영상대감 이유원(領相大監 李裕元)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용연리(龍淵里) 국도변에 세워진 연유를 알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 비석 이면에 구포복설장두 우석규, 서상로, 이기수(龜浦復設將頭 禹錫奎, 徐相魯, 李基洙)라 씌어 있을 뿐 아무런 설명도 붙어 있지 않으니 비석 전면의 인물과 어떤 관계이며 구포복설(龜浦復設)이란 무엇인지 전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이 세 비석에 얽힌 전래의 설화는 대략 이러하다.

1869년(高宗6:己巳(기사))에 양산군 소속이던 구포면(龜浦面)이 인부족(?) 세부족으로 동래군에 탈속되게 되었다. 양산 고을에서는 군민이 하나같이 분개하여 구포면이 다시 양산군에 환속되도록 요로에 여러번 소진하였으나 시일만 지연될 뿐, 아무런 공효를 거두지 못한 나머지 향중 공론을 조성해 조정에 직소하기로 정하고 사림 우석규를 필두로 서상로, 이기수 등을 장두(將頭)-(상소하는 글의 우두머리)로 하여 세 사람이 직접 한양까지 가서 성상을 배알하고 향론을 주달토록 선정하였다.

여기 장두들의 인품을 소개하면, 먼저 우석규는 자가 도유오, 호는 동제, 본은 단양 1819년(순조19:巳卯(사묘))생이며, 고려말의 석학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15세손이요, 천품이 온화하고 행의가 근엄하고, 부모에게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남을 대함에는 반드시 예로서 하니 향당 사림간에 추앙 존중받는 바 컸으며 당시의 군수 어윤중으로부터 충신으로서 치상 받은 바 있는 인물이었고, 서상로는 자가 문진이요, 호는 묵헌, 본은 달성이며 천품이 관인대도하고, 효도와 우애로 이름이 높았고, 사림간에는 여망이 중후하였으며, 이기수는 자가 윤백이요, 호는 우남, 본은 경주이고 성품이 본래 강직하며 집에 와서는 효우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근하며 의가 아니면 취하지 않고, 의를 위해서는 분연히 일어서니 향인이 모두 추중하는 인물이었다. 세 사람은 향중의 공의(公議)로 추대된 바이니, 그 사명의 지중함을 통감하면서 한양 천리길을 죽장망애로 출발하였다.

때 마침 늦음 봄이라, 산천 경개는 녹음이 무르익어 미풍에 하늘거리며 바위 사이의 봄꽃은 지나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듯한데, 숲속에서 지저귀는 산새 소리는 먼 길을 떠나는 세 용사를 반겨주는듯도 했다. 이리하여 낮이면 산천경관에 피로를 달래고, 밤이면 여사의 한등 아래서 여독을 풀어가며 천신만고 끝에 한양에 당도하였다.

시골 선비가 한양에 지기(知己)가 있을리가 없으니 백방으로 주선해본들 성상을 배알하기란 아예 가망 밖이니 세사람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한 나머지, 우리는 향중 사림의 추대를 받은 몸이니, 그 책무의 중대함을 생각한다면 비록 죽음이 닥치는 한이 있더라도 어찌 물러설 수 있겠으며, 이러한 심상한 방법으로만 시종하다가는 무료(無聊) 공행할 수 밖에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범의 새끼를 얻으려면 범굴에 들어가야 하고, 큰일을 감행하려면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땅히 대장부로서 감사심(敢死心)을 가지고 최후의 방법을 취하자 이렇게 의논한 끝에 남산 봉수대에 올라가서 밤이 되기를 기다려 봉화를 올리면서 무슨 변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는데, 삽시간에 온 장안이 술렁이더니 즉각 군관들이 당도하여 성화 같이 꾸짖어 말하되, 너희들은 무엄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구나, 봉화는 나라가 위급한 때에 올리는 것인데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였으니 중벌을 면치 못하리라. 이렇게 호통이 떨어지자, 세 사람은 추호도 겁내는 기색이 없이 저희 고을에 일대 신원사가 있읍니다마는 천청에 주달할 길이 없어 이와같은 무엄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비옵건데 저희들의 원사를 성상께 주달할 길을 열어주옵소서 이런 간청도 주효하지 못하고, 그날 밤으로 세 사람은 체포 구금되었다.

며칠 후 삼인은 의금부에 끌려나가 추국(推鞠)-(중죄인을 다스리는 것)을 받게 되었다. 국문하는 관원은 추상같이 호령하면서, 너희들이 무슨 원사가 있어 이렇듯 무엄한 행동을 자행하느냐? 이실직고하렸다 하거늘 삼인은 복지부동하면서도 당당히 아뢰기를, 개국 이래로 군현은 서로 경계가 엄연하므로 이로써 백성들의 생업이 안정되어 있으며, 이것은 수백년 이래 한번도 변함이 없었사온데 이번 양산고을의 소속인 구포면이 불의에 동래군으로 탈속되었으니, 이는 반드시 동래군 내의 세도가들의 농간이라 아니할 수 없사오며 구포면민으로서도 일상생활에 관부 출입이 생소하여 친화에 해되는 바 적지 않사오며 향민들 상호간에도 여태껏 한 울타리 안에서 사는 친족처럼 지내오던 사이가 이제는 남의 집 식구처럼 인식되므로 상부상조의 미풍에 결여됨이 있을까 저어함이요, 또 경제적 유대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차질이 발생하고 있으므로 온 군민이 억울한 마음 금할 수 없어 수차에 걸쳐 요로에 진정하였으나 번번히 묵살되므로 마지막으로 우민등이 목숨을 걸고 성상께 주청코자 하여 이렇게 엄청난 죄과를 저질렀사오니 우러러 바라옵건데 우민등에게는 어떤 죄를 내리시더라도 이미 각오한 바가 있사오니 우민등의 숙원인 구포환속 문제만은 청허하여 주시옵기를 간곡히 비오며 아울러 전 양산군민이 우러러 천은에 감읍케 하는 날이 하루 빨리 올 수 있게 해주시옵기를 성수백배하옵나이다.

이렇게 답변하였던 바 이 추국(推鞠)한 내용이 당시의 영상대감 이유원에게 보고되자, 영상대감 이유원은 특별히 삼인의 의기를 가상히 여겨 봉수대에 봉화한 사건은 면책 불문하고 또 구포면은 즉시 양산군에 환속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이에 향민들이 그 공적을 치하하기 위하여 비석 셋을 세웠으니, 그 첫째가 당시의 영상을 기리는 비석인데, 그 비석 전면에는 영상대감 이합원 영세불망비(領相大監 李閤元 永世不忘碑) (閤(합)은 閤下(합하)의 준말인데 정일품 관원의 성밑에 붙이는 경칭)라 각자되어 있으며, 그 후면에 구포복설장두라 두서하고 삼인의 성명만이 병기되어 있다. 삼인만의 비석을 마땅히 따로 건립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영상의 비석 뒷면에 붙인 것은 관직이 없는 사람은 비석을 세울 수 없는 당시의 법 때문에 영상 비석 뒷면에 각자하여 그 공적을 더욱 빛나게 남기려는 의도에서이다.

둘째 비석은 복설 당시의 군수를 기린 비석이니, 행군수어공윤중영세불망비(行郡守漁公允中永世不忘碑)라 씌어 있고 또, 하나는 비석 건립 당시의 군수를 기린 것이니 행군수이공능화애민선정비(行郡守李公能華愛民善政碑)라 씌어 있다.

<<2. 용혈암과 구룡신지의 유래>>


통도사 대웅전 뒤에 있는 연못이 바로 구룡지이다. 그리고 용혈암은 통도사 입구 무풍교 근처에 지금도 있다. 옛날에 자장율사께서 중국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본국으로 돌아와 통도사를 지을려고 하던 즈음이었다. 그 당시는 통도사 터는 큰 연못이었다.

그런데 이 못에는 아홉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마음을 가다듬고 주문과 경을 읽으며 아홉마리의 용들에게 조용히 이못을 떠나달라는 청을 하였으나 그 용들은 일절 응하지 않자 스님께서는 법력으로 아홉 마리의 용과 결투를 벌였다고 한다. 이 싸움에서 견디지 못한 용들은 제각기 앞을 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하였는데 세마리의 용은 달아나다가 커다란 바위에 부딪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 부딪힌 바위에 이 용의 피가 낭자하게 묻히게 되어서 후세 사람들이 이 바위를 용혈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다섯 마리 용은 통도사의 남서쪽에 있는 영축산 아래의 골짜기에 이르러 떨어져 죽게 되었는데, 그곳을 오룡골이라고 부르며 뒷산 중턱에 약수정이 있고 검붉은 색의 바위는 이 용들이 흘린 피가 묻어서 그렇다고들 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리의 용은 자장율사에게 통도사 터를 수호할 것을 맹세하자 자장스님께서 조그마한 못을 하나 만들어 용을 살게 했는데 그 못이 지금 통도사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구룡지인 것이다

<<3. 원효암>>

원효대사는 처음으로 화엄경소,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소 등을 지어서 인류 문화에 불교와 더불어 큰 업적을 남긴 학자일 뿐만 아니라 그가 몸소 보인 언행은 우리나라 불교도에게 산 모범을 준 위인이다.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원적산에서는 원효암이란 암자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천 3백년 전 원효대사가 기장 척판암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암자에서 서쪽 하늘을 혜안으로 바라보니 중국 산동성에 있는 법운사에 천명의 신도가 불공하고 있는데 그절이 곧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 원인은 그 절의 법교가 죄인으로서 벼락을 내려 천벌을 주려는 찰라였다.

따라서 천명의 신도들도 법교를 따라서 억울한 죽음을 당할 형편이었다. 그 때 원효대사는 해동원효라고 새긴 판자를 던지니 갑자기 법운사 주위가 금빛으로 변하였다. 신도들은 환한 금빛을 보고 이상히 생각하여 전부 밖으로 뛰어 나오자 마자 그 절은 무너지고 신도 천명은 고스란히 목숨을 건질 수가 있게 되었다. 이것을 일컬어 해동원효척판구중이라고 한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천명의 신도들은 수륙만리 해동의 원효를 찾아 와서 제자 되기를 원하였다. 원효대사는 천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천백암을 떠나 지금의 동래 범어사쪽으로 가는 도중 하북면 중방리에 이르자 갑자기 호랑이가 대사 앞에 무릎을 끓고 나타나 몸과 꼬리로써 원적산을 가리켰다. 이상히 여긴 대사는 지금의 내원암으로 가니 동지 섣달의 찬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칡꽃 두송이가 피어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 자리를 정하였는데 식량이 곤란하여 지금의 상북면 대석리 모래불이라는 동네에 거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쌀 한되 가량 넣을수 있는 바랑을 가지고, 그 집으로 시주를 구하러 갔다. 하인이 쌀 한되를 갖고 나와 부으니 반에 반도 못찼다. 이상히 생각한 하인은 또 한되, 또 한되 아무리 넣어도 그 정도라, 너무도 이상히 생각하여 주인에게 고하였다.

주인은 도사임을 깨닫고 허리를 굽혀 그 소원을 물은 즉, 대사는 일천명 제자의 식량이 부족하다는 사유를 말하자 주인은 쾌히 해결해 줄 것을 승락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화암벌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산을 천명의 성인들이 산다하여 천성산이라 부르게 되고, 또 절을 짓고 원효암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지금도 천성산 일대의 칡덩굴은 다른 곳에 비하여 매우 짧은데 그 이유는 대사가 제자와 더불어 수도할 그 당시한 제자가 마을에 동냥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그만 칡덩굴에 걸려 넘어지자 쌀, 밥 할 것 없이 모두 쏟아진 일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대사는 그 이튿날 그 제자에게 흰종이 한장을 주어 그 자리에 가서 버리고 오라고 말하였더니 그 이후부터 칡덩굴이 길게 뻗어나지 못하였다 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화암벌에는 지금도 큰 책한권 정도 크기의 풀이 나지 않는 곳이 여러 군데 있는데, 이는 원효대사가 화엄경을 강독한 장소라고 한다.

<<4. 산막리 유래>>

양산시 산막동은 천성산 기슭에 자리잡은 산골 마을이다. 이 마을 남쪽 산등성이를 넘으면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반고굴이 있다.

옛날 원효대사를 찾아 이 마을까지 찾아온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은 다름아닌 요석공주였다. 이처럼 귀하신 신분의 공주가 중을 찾아 머나먼 산골까지 온데는 깊은 사연이 있었다.

원효는 다른 스님들과 달리 불교를 대중화 하는데 힘쓴 승려다. 그러나 이러한 원효의 태도를 다른 스님들은 방탕한 것으로 오해하고서는 원효를 미워했다. 그러나 원효의 재능을 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원효의 명성이 나날이 높아가자 요석공주가 그를 사모하게 되었다. 원효는 오직 불도를 닦고 중생들을 보살피는 데만 전력했을 뿐 요석공주의 애타는 구애를 듣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원효가 다리를 건너는데 어떤 사람이 무례하게도 원효를 다리 아래로 밀어넣어 옷을 젖게 한 다음 요석공주가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말려 입고 쉬어가게 하였다. 그 날 밤의 인연으로 생긴 아이가 바로 뒷날 신라의 위대한 학자였던 설총이었다.

원효는 요석공주와의 인연을 맺은 다음날 홀연히 궁을 빠져나와 수도와 진리탐구에 더욱 매진하기 위해 반고굴에 왔다. 그러자 일거후 무소식에 애가탄 요석공주는 원효를 만나기 위해 설총을 안고 여기까지 와서 산에 막을 치고 지냈다 한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사람들은 요석공주가 산에 막을 치고 지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산막리라 하였다고 한다.

<<5. 효성천>>

조선 성종때 양산 고을에 오준이라고 하는 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한분을 모시고 있었다. 그의 나이 서른살이 가까이 되던 해 그의 어머니 마저 몹쓸 병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생전에 어머님께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뒷산 기슭에 장사를 지내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삼년 동안을 하루도 빠짐 없이 아침 저녁으로 그 무덤에 가서 곡을 하였다.

그는 워낙 가난하였으므로 제상에 올릴 술 살 돈이 없어 산중에 있는 샘물을 늘 길어다가 바쳤다. 어느 해 여름날이 일이었다. 밤새도록 뇌성벽력이 치고 폭풍이 일고 한 그 이튿날 아침, 무덤에 가보니 전날에 보지 못하던 샘물이 무덤 근처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하도 이상하여 그 샘물을 떠먹어 보았다. 그것은 물이 아니고 술이었다. 그는 매우 기뻐하여 그 술을 길어다가 제상에 바치었다. 이것은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그 무덤 근처에 술이 솟아나게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가 삼년상을 다 마친 그 이튿날부터는 술이 솟아 오르지 않았으며, 술대신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고 하여 그 근처 사람들은 이 샘을 "효성천"이라 부르고 있다 한다.

<<6. 화암산>>

신라 때 화암산 기슭에 사냥꾼 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매일 같이 산에서 산으로 다니며 짐승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산꼭대기 커다란 바위굴 속에는 큰 곰 한 마리가 살고 있어서 이 산의 짐승은 거진 다 잡아 먹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안 사냥꾼의 내외는 어느날 그 곰을 잡아 없애려고 갔다가 도리어 그 곰에게 물려 죽고 말았다.

집에 남아 있던 오누이는 아무리 기다려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들은 부모를 찾아서 산에서 산으로 헤매고 있었다. 때가 마침 겨울이었으므로 모진 바람은 불고 눈은 점점 내려 쌓이는데 배는 고프고, 춥고 하여 두 오누이는 마침내 깊은 산 가운데에 넘어져 가엽게도 죽고 말았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두 성은 사랑하는 자기 자식의 죽음을 가엽게 여겨서 두 아이의 성을 복숭아 꽃으로 만들어 따뜻한 양지 쪽에 피어나게 하였다. 마침 그 때의 일이었다. 신라왕이 병이 들어 좋다는 약은 다 써 봐도 조금도 효능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유명한 의사의 말이 복숭아꽃을 잡수시면 낫는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때가 추운 겨울이라 복숭아꽃이 있을리가 없었다. 그러나 왕의 어명이라 사자는 여러 지방으로 그 꽃을 구하러 떠났다. 그때 사자가 언양의 남문근처에서 맞은 편 산 기슭을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그 곳에서 두 송이의 복숭아 꽃이 양지쪽에 활짝 피어 있었다. 사자는 이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여 곧 그것을 꺾어서 돌아가 왕에게 드리었다. 왕은 이상하게도 그 꽃을 먹고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 사자가 복숭아 꽃을 꺾을 때 떨어져 시든 꽃송이가 근처에 나서 오빠의 정은 죽숲이 되고, 누이의 정은 소나무가 되었다고 하는 데 추운 때에도 복숭아 꽃이 피어 있었다고 해서 그 산의 이름을 화암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7. 통도사의 사리탑>>

신라때 자장율사는 양산 통도사에다 사리를 받들어 모시고 뚜껑을 돌로 만들어 덮었다. 그런 뒤 어느 때 조정에서는 사자를 보내어 이 절에 참례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사자는 유명한 사리를 친히 보고자 스님들에게 명하여 돌 두껑을 열게 하여 보니까 그 곳에는 커다란 두꺼비가 앉아 눈알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 뚜껑에는 뒷날 아무개 성을 가진 사람이 이것을 열 것이라고 씌여져 있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아무개 성이 바로 그 사자의 성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리탑의 동쪽에 얼룩얼룩한 빛이 돌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고려광종 사년에 경주 황룡사 구층탑이 세번째 화재를 당하였을 때 이상하게도 이것이 나타났다고 한다.

<<8. 자장율사와 통도사>>

신라 때 자장율사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이 스님은 당나라에 건너가 수도를 하고 부처의 숭고한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고자 부처의 가사와 사리를 받들고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사리를 모실 절을 세우기로 하고 문수보살께 절을 세우기에 적당한 곳을 물었다. 그랬더니 어느날 밤 꿈에 훌륭하게 차려 입은 동자가 나타나서 부처님 모실 곳을 일러 주었다.

"동국에 부처를 모시도록 하라"

자장율사는 동국이 신라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나 넓은 신라의 어느곳이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동쪽으로 날려 보냈더니 얼마 후 오리는 한 송이 칡꽃을 물고 돌아왔다.

때 마침 엄동설한이어서 산과 들에는 흰눈이 쌓였는데 꽃이 핀 곳이 어디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자장율사는 칡꽃이 피어 있는 곳에 절을 세우라는 것이 부처님의 뜻임을 깨닫고 흰 눈이 쌓여 있는 한 겨울에 칡꽃을 찾아 나섰다. 몇 일을 찾아다니던 어느 날 양산읍에서 좀 더 들어가는 영취산에 이르러 보니 큰 못이 있었는데 그 못 주변에 신기하게도 두 송이의 칡꽃이 피어 있었다.

자장율사가 인근의 경치를 살펴보니 송림이 울창하고 산봉우리들이 열을 지어 둘러쳐져 있으며 검푸른 못물은 마치 고요히 잠들어 있는 듯 했다. 율사는 세상에서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은 다시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곳에 절을 세우니 그 절이 유명한 통도사였다.

그러나 이것은 칡꽃이 피어 있는 곳을 찾아내어서 그곳에 세우라는 부처님의 가르치심이라 생각하고 율사는 곧 그 칡꽃이 피어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며칠을 쉬지 않고 칡꼿을 찾아 다니던 중 율사는 양산고을에서 좀더 들어가는 영취산에 이르니 그곳에 큰 못이 있는데 그 못 근처에 신기하게도 두 송이의 칡꽃이 피어있었다. 처음에는 세 송이가 피어 있던 것인데, 한송이는 먼저 율사가 날려보낸 오리가 물고 왔던 까닭에 두 송이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근방에는 송죽이 울창하고 봉봉이 열을 지었는데 검푸른 못물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율사는 그 못 가에서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은 이 세상에서 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자장 율사는 얼마 후에 이 곳에 절을 세웠으니 이 절이 유명한 한국 제일의 통도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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