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승(名勝)기행<2>]혹한이 오기 전에 꼭 가 보고 싶은 한국의 절경...제21호에서 제30호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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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명승(名勝)기행<2>]혹한이 오기 전에 꼭 가 보고 싶은 한국의 절경...제21호에서 제30호까지 |

헤리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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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 제31호부터는 2020년 새해 봄부터 업 로드하겠습니다.



■ 명승 제 21호 공주 고마나루



소 재 지;충남 공주시 
공주 고마나루는 공주지역 금강 및 연미산을 포함한 무령왕릉 서쪽으로 전개되는 낮은 구릉지대와 금강변 나루 일대로, 공주의 태동지이자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는 유서 깊은 명승지이다.

고마나루는 공주의 옛 지명으로서 ‘고마(固麻)’는 곰의 옛말이며 한자로는 ‘웅진(熊津)’이라 썼다. 고마나루를 신라 신문왕 때는 웅천주(熊川州), 경덕왕 때는 웅주(熊州)라 하였으며, 고려 태조 때(940년) 공주(公州)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백제 문주왕(文周王)이 웅진 천도 시 이용하였던 교통로였고 660년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군인 소정방(蘇定方)이 백제 공격을 위해 금강을 거슬러 와 주둔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던 곳으로서 백제 역사의 중심무대이자 국제적 교통의 관문이었다.

또한 금강의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올리던 웅진단(熊津壇) 터가 남아있는 등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국가의 제사 공간이었으며, 일반 서민들의 주요 생활터이자 수상교통로로서 민중의 정서와 애환이 짙게 서려있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이곳에는 처녀곰과 나무꾼 총각에 얽힌 아름답고도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현재 고마나루 북쪽에 솟은 연미산 중턱에는 전설 속 곰이 살았다는 곰굴이 고마나루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곰의 원한을 풀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나루터 인근에 곰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고마나루는 백제 역사의 중심에 있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클 뿐 아니라 금강변에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450여주의 마을 솔밭이 금강 및 연미산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는 곳으로, 역사 문화적·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경승지로 평가되고 있다.

■ 명승 제22호 영광 법성진 숲쟁이

 법성진 숲쟁이 전경

법성진 숲쟁이 전경(고문헌 그림)
법성진 지도(고지도)

소 재 지;

전남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821-1 등


영광 법성진(法聖鎭) 숲쟁이는 고려시대 이래 전라도에서 가장 번창한 포구였던 법성포(法聖浦)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법성진성(法聖鎭城) 및 숲을 이르는 것으로, “법성포(法聖浦)”는 삼국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중국, 일본과의 해상 교통로 상에 위치하는 우리나라 서해안의 대표적인 항구였을 뿐 아니라, 서해에서 가장 품질 좋은 조기가 잡히는 칠산 앞바다에서 들어오는 조기배로 파시를 이루었기 때문에 “영광 법성으로 돈 실러 가세”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많은 보부상들이 모여들어 매우 번창했던 포구였다.

 “법성진(法聖鎭)”이란 법성 지역에 구축된 수군의 행정구역으로 조선 태조 7년(1398)부터 조창을 방비하기 위하여 수군 만호의 지휘 아래 수군의 상비 병력이 배치된 이후 성종 16년(1485)에 경국대전에 보이는 수군편제상 법성진의 모습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법성진성은 중종9년(1514)에 돌로 쌓은 석성으로 성의 전체 둘레는 약 462m이며 현재는 북벽만 전구간이 남아있고 나머지는 서쪽과 동쪽 일부만이 남아 있으나 그 성벽의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성벽에 새겨진 글 등은 조선시대 진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숲쟁이는 법성포 마을에서 홍농 방향의 지방도로 고개 마루 부분에 좌우측으로 산 능선을 따라 약 300m에 걸쳐 조성된 숲으로, ‘쟁이’란 재, 즉 성(城)이라는 뜻으로 ‘숲쟁이’란 숲으로 된 성을 의미한다.

법성포구와 마을을 보호하는 방풍림의 역할을 해 왔으며, 예로부터 파시로 몰려드는 보부상들이 이 숲에서 단오행사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용왕제와 단오날 선유놀이 등 지금의 “영광 단오제”와 지역의 각종 민속행사가 이 곳에서 열려왔다.

“영광 법성진 숲쟁이”는 법성진성과 숲이 포구와 어우러져 특이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을 뿐 아니라 각종 민속행사가 이어져 내려오고 조선시대 수군 진의 모습과 파시로 번창했던 법성진(法聖鎭)의 영광을 현재에까지 전해주는 등 역사적·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뛰어난 명승지이다.

■ 명승 제23호 봉화 청량산

청량산 고지도

소 재 지;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산 74번지 등
봉화 청량산(奉化 淸凉山)」은 낙동강 가에 우뚝이 자리 잡은 명산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예로부터 소금강이라고 전하여 왔으며,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의「택리지(擇里志)」에서 보면 백두대간의 8개 명산 외에 대간을 벗어난 4대 명산 중 하나로 평가되어 온 한국의 대표적 명산이다.

해발 800m 내외에 12개 암봉(六六峰 : 장인봉, 선학봉, 자란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연화봉, 향로봉, 경일봉, 탁립봉, 금탑봉, 축융봉)과 청량산 12대(독서대, 어풍대, 밀성대, 풍혈대, 학소대, 금강대, 원효대, 반야대, 만월대, 자비대, 청풍대, 송풍대, 의상대), 청량산 8굴(김생굴, 금강굴, 원효굴, 의상굴, 반야굴, 방장굴, 고운굴, 감생굴) 및 청량산 4우물(총명수, 청량약수, 감로수, 김생폭)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준다.

 청량산(淸凉山)에는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된 역암, 사암, 이암층이 융기·풍화·차별침식 등의 작용으로 다양한 지형이 나타나고 있는데, 봉우리들은 모두 역암으로 이루어져 저각도 수평층리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V자곡이 발달된 계곡 주변엔 소규모의 수직·수평절리에 의한 풍화혈과 타모니 등이 발달하여 특별한 경관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학술적 가치 또한 뛰어나다.

또한,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 몽진 시 머무르며 축조하였다는 산성 흔적과 마을 주민들이 공민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사당이 남아 있으며, 원효(元曉), 의상(義湘), 김생(金生), 최치원(崔致遠), 이황(李滉) 등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장소와 설화들이 많이 남아 있는 등 이 곳은 불교의 도량으로, 그리고 16세기 사림파의 등장 이후 산수경치를 사랑하고 유교와 퇴계를 숭상하는 선비들의 유교적 순례지가 되어 왔다.

「봉화 청량산(奉化 淸凉山)」은 이렇듯 역사적 유래가 깊은 명산일 뿐 아니라 공민왕을 기리는 당제가 아직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등 민속적 가치가 크고, 자연경관이 매우 뛰어난 명승지로 평가된다. 

■ 명승 제24호 부산 오륙도 



소 재 지;부산 남구 용호동 936번지 등

『부산 오륙도(釜山 五六島)』는 부산 북안 육지부인 승두말로부터 남남동 방향으로 가지런하게 늘어서있는 바위섬들로 오륙도(五六島)란 이름은 밀물과 썰물에 따라 5개 혹은 6개의 섬으로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승두말에서 가까운 섬부터 우삭도(밀물 시에는 방패섬과 솔섬으로 나눠짐),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의 순으로 늘어서 있으며, 각 섬마다 수직에 가까운 해안절벽과 파도의 침식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파식대와 각양 각색의 해식동 등 기이하고 다양한 해양지형과 오랜 세월동안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라온 동식물들, 그리고 짙푸른 바다가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오륙도(五六島)는 섬의 수가 5개 또는 6개로 보인다는 신비감과 함께 오륙도(五六島) 앞의 항로는 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張保皐)가 무역을 하기 위해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지금도 대한민국을 들어서는 주요 해상 관문의 하나이다.

또한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제영이 끊이지 않아 오륙도(五六島)를 주제로 한 많은 노래와 시가 전하는 등 오랜 기간 동안 부산 시민의 정서상 ‘부산의 표징’ 역할을 해 오는 등 부산을 대표하는 섬으로 상징성이 매우 큰 아름다운 명승지이다. 

■ 명승 제25호 순천 초연정 원림








초연정 상량문

소 재 지전남 순천시 송광면 삼청리 766 등

『순천 초연정 원림(順天 超然亭 園林)』은 “초연정(超然亭) 정자와 정자 주변의 외원(外苑)을 함께 일컫는 것으로, “초연정(超然亭)”은 원래 1788년(정조 12)경 대광사() 승려가 정자를 창건하여 수석정()이라 이름 짓고 수도하였던 곳이다.

 순조9년(1809년) 조진충(趙鎭忠)이 중창하여 옥천조씨(玉川趙氏)의 제각으로 사용하던 것을 이후 조진충(趙鎭忠)의 아들인 조재호(趙在浩)가 1880년에 중건하였으며 고종 25년(1888년) 송병선(宋秉璿)이 ‘초연정(超然亭)’이라 개칭한 정자이다.

왕대마을 모후산의 자연 계곡을 외원(外苑)으로 삼고 있는 초연정(超然亭)은 우리나라 정자가 대부분 풍경이 수려한 강변이나 구릉에 건축하여 확 트인 경관을 감상하는 게 목적인데 반해 마을 뒷산의 깊은 자연계곡을 이용하여 지어져 있어 매우 드문 예의 정자라 할 수 있다.

특히 초연정(超然亭)에서는 나무에 가려 계곡은 보이지 않으며 맑은 물소리만 들리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초연정(超然亭) 앞의 모후산 자연계곡은 유량은 많지 않으나 물이 맑고 인적이 드물어 주변의 아름다운 암반과 암벽, 암벽에 부착해 자라는 활엽수(개서어나무 등)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자연미를 보여주며 자연환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초연정(超然亭)과 초연정(超然亭) 앞 외원은 산간 계곡을 이용하여 지어진 특이한 예의 별서로 전통적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경사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주변 자연 경관이 아름답고 보존이 잘 되어 있어 경관적 가치가 큰 명승지이다.

■ 명승 제26호 안동 배군정 및 개호송 숲 일원 


백운정

백운정 현판

 섬처럼 남아 있는 개호송

 백운정 쑤 전경(송림)

개호송 숲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93-1번지 등


 『안동 백운정(白雲亭) 및 개호송(開湖松) 숲 일원』은 한국의 대표적 씨족 촌락인 내앞마을과 개호송(開湖松), 강 건너편의 백운정(白雲亭) 등이 낙동강의 제1지류인 반변천(半邊川)과 어우러져 뛰어난 절경을 자아내는 경승지이다.


“백운정(白雲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5호)”은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이 그의 아버지 청계(靑溪) 김진(金璡)으로부터 땅을 받아 조선 선조 1년(1568년)에 세운 정자로 반변천(半邊川) 강 언덕 위에서 내앞마을과 개호송(開湖松) 숲이 한폭의 경관으로 조망되는 지점에 위치하여 전통적 유교문화 경관을 체험할 수 있는 탁월한 조망점 역할을 하고 있는 정자이다.


“내앞마을”은 의성김씨(義城 金氏) 씨족 촌락 마을로 의성김씨(義城 金氏) 종택을 비롯하여 보물 2점과 고택이 잘 보전되어 있으며, <택리지>에 전통 씨족 촌락으로 소개되어 있고, 약300년 전에 제작된 이종악(李宗岳)의 <허주산부군수화첩 반변천십이경(虛舟山府君水畵帖 半邊川十二景)>에 ‘운정풍범(雲亭風帆)’이라는 제목으로 마을 풍광 그림이 남아 있는 등 500여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개호송(開湖松) 숲”은 통례공(通禮公) 김만근(金萬謹)이 조선 성종 무렵에 내앞마을 앞 수구(水口)가 허술함을 메우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8년(1605년) 대홍수 때 유실된 것을 운천(雲川) 김용(金涌) 선생의 발의로 다시 조성한 숲이다.


의성김씨(義城 金氏) 문중에서는 개호금송완의(開湖禁松完議)라는 문중 규약을 만들어 이 숲을 보호해 왔다고 전한다.


이 숲은 내앞마을의 농경지를 보호하고 바람과 물의 장애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수구막이 숲이며, 완만한 모래사장에 달빛이 비추는 ‘완사명월형(浣沙明月形)’ 혹은 소가 누워 풀을 되새김하는 ‘와우형(蝸牛形)’으로 알려져 있는 내앞마을 풍수형국의 모자람을 채우기 위한 비보림(裨補林) 역할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조성되어 보호하여 온 오랜 역사의 마을 숲이다.『


동 백운정(白雲亭) 및 개호송(開湖松) 숲 일원』은 강 건너편 백운정(白雲亭)과 반변천(半邊川) 수중에 조성되어 있는 반월형 섬 위의 소나무 숲인 개호송(開湖松) 숲, 강가를 따라 조성된 내앞마을, 반변천(半邊川)과 강가의 기암과 단애, 천변 숲이 한 눈에 펼쳐져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대표적인 씨족 촌락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가 큰 명승지이다.


■ 명승 제27호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 


관동십경의 낙산사

 관동십경의 낙산사

 의상대에서 내려다 보는 동해안

의상대

홍련암

 

소 재 지;


강원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산5-2번지 등


 「양양 낙산사(洛山寺) 의상대(義湘臺)와 홍련암(紅蓮庵)」은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소개된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동해 일출경으로 매우 유명한 곳이다.


 671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는 “낙산사(洛山寺)”와 낙산사(洛山寺) 창건 당시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관음보살을 친견한 해안 암벽 위에 설치하였다는 “의상대(義湘臺)”,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홍련(紅蓮) 속의 관음보살을 친견하여 설치한 “홍련암(紅蓮庵)” 등 낙산사(洛山寺)의 곳곳에 의상대사(義湘大師)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의상대(義湘臺)와 홍련암(紅蓮庵)은 바닷가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노송(老松)들이 자리하고 있어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안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떠오르는 일출 경관으로 유명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다.

낙산사(洛山寺) 주요 경관 요소이던 낙락장송이 2005년 강원지역의 큰 산불로 소실되어 경관이 크게 훼손되었으나, 의상대(義湘臺) 및 홍련암(紅蓮庵) 주변 해안에는 시스택(sea stack)이 발달하여 독특하고 아름다운 해안 경관을 보유하고 있다.

낙산사(洛山寺)는 <관동십경(關東十境)>에 옛 모습이 잘 남아있고, <삼국유사>, <동문선>, <동문여지승람> 등의 고문헌에 많은 시인묵객 등의 낙산사(洛山寺) 창건 및 중수 기록과 유람기, 경관을 노래한 시문이 다수 전하는 등 역사적 가치가 큰 명승지이다.


      ■ 명승  제28호 삼척 죽서루와 오십천 

    

 관동십경의 죽서루와 오십천

 오십천 위의 죽서루

죽서루

 죽서루에서 내려다보는 오십천과 삼척시내

  

소 재 지;


강원 삼척시 성내동 28번지 등


 「삼척 죽서루(竹西樓)와 오십천(五十川)」은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소개된 관동팔경(關東八景) 가운데 하나로 삼척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오십천(五十川)에서 가장 절경지로 알려진 곳으로 죽서루(竹西樓)에서 내려다보는 오십천(五十川) 경관과 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죽서루(竹西樓)와 절벽부의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죽서루(竹西樓) 누각은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에 의하면, 1266년(고려 원종 7년)에 이승휴(李承休)가 안집사(按集使) 진자후(陣子侯)와 같이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면 7칸, 북쪽 측면 2칸, 남쪽 측면 3칸의 특이한 형태의 누 건물이며 현재 보물 제21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오십천(五十川)은 삼척시 도계읍 백병산(白屛山)에서 발원하여 삼척시를 가로질러 동해로 흘러가는 동해안에서 가장 긴 감입곡류하천으로 오십천(五十川) 협곡의 암벽들은 중생대 백악기에 생성되어 오랜 기간 하천작용으로 퇴적 변형되어 현재의 다양한 석회암지대 지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오십천(五十川)이란 이름은 발원지에서부터 동해에 이르기까지 50여번 돌아 흐른다고 하여 붙은 것이라 전한다.


죽서루(竹西樓)가 위치하는 곳은 오십천(五十川)의 협곡이 끝나려 하는 부위로 오십천(五十川)과 주변 협곡, 죽서루(竹西樓) 절벽 배후의 카르스트 지형과 길게 늘어진 송림 등이 태백산지와 함께 어우러져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 곳이다.  


■ 명승  제29호 구룡령 옛길 


  


소 재 지;




강원 양양군 서면 갈천리 산1-1번



구룡령(九龍嶺) 옛길』은 양양과 홍천을 연결하는 옛길로 산세가 험한 진부령(陳富嶺), 미시령(彌矢嶺), 한계령(寒溪嶺)보다 산세가 평탄하여 양양, 고성 지방 사람들이 한양을 갈 때 주로 이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강원도의 영동과 영서를 잇는 중요한 상품 교역로였고, 양양, 고성 지방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러 한양으로 갈 때 명칭에서 유래하듯 용의 영험함을 빗대어 과거 급제를 기원하며 넘나들던 길이라 하며, 구룡령(九龍嶺)이라는 이름은 ‘아홉 마리 용이 고개를 넘어가다가 지쳐서 갈천리 마을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고갯길을 넘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하고 있다.


옛길 입구에는 굽이져 흐르는 계곡이 있고, 길의 중간중간에 길의 위치를 표시하는 횟돌반쟁이, 묘반쟁이, 솔반쟁이 등이 자리하여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옛길 걷기의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또한 구룡령(九龍嶺) 옛길에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되어 일대 주민들이 강제 징집되었던 애환의 역사가 서린 철광소와 케이블카가 남아 있고, 옛길 길가에는 1989년 경복궁 복원 당시 사용되어 밑둥만 남아 있는 소나무 거목 흔적이 남아 있는 등 조선시대와 근현대사의 역사가 함께 잔존하여 역사적 가치가 큰 소중한 명승지이다.



  ■ 명승  제30호 죽령 옛길 


희방폭포

단양쪽 계곡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산86-2번지 등


『죽령(竹嶺) 옛길』은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서 죽령길이 열리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을 제사지내는 사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오랜 역사의 옛길이다.

죽령(竹嶺) 지역은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역으로 오랜 기간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 분쟁지역이었는데,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년)에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죽령(竹嶺)이북 열 고을을 탈취한 기록과, 그 40년 뒤인 영양왕 1년(서기 590년)에 고구려 명장 온달(溫達) 장군이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한 기록 등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소백산국립공원 내에 위치하며 영주와 단양을 연결하던 옛길로 옛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과, 길게 늘어져 있는 수목 터널이 주변에 펼쳐지는 소백산 주요 능선 등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있는 명승지이다.



블로그 대문 / 국보 제226호 창경궁의 문정전에서 사도세자 숨지다.


사도세자가 숨진 뒤주


문정전이 영조의 비(妃)인 정성왕후의 혼전으로 사용되었을 때, 이곳 앞마당에서는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8일만에 죽게 만든 비극적인 사건. 바로 1762년의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일어났던 곳. 당시 문정전은 혼전이 되면서, ‘휘령전(徽寧殿)’으로 잠시 명칭이 바뀌었다. 영조는 휘령전을 지날 때, 죽은 왕비 정성왕후의 혼령이 사도세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며 정당화 시키려 애썼다.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추정된다.

첫 번째 원인은 영조의 금주령에 의한 부자(父子)간의 갈등이다.


영조 32년(1756) 1월부터 금주령이 발효됨과 동시에 한양 술집의 주등(酒燈)을 금지하는 것으로 했다. 또한 금주령 위반자는 엄형(嚴刑) 후에 섬으로 유배하는 것으로 했다.


영조가 갑자기 낙선당에 들이닥쳐 사도세자를 불렀을 때 세자는 얼굴도 씻지 않고 옷차림도 단정치 않았다. 영조는 혹시 사도세자가 밤새 술을 마시고 지금껏 자다 온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자신은 백성들을 상대로 엄격한 금주령을 시행하는 중인데 세자가 밤새 술을 마시다니…. 격노한 영조는 세자가 술을 마셨는지 또 누가 술을 들였는지 책망하듯 물었다. 그때 사도세자는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밧소주방 큰 나인 희정이가 주어 마셨다고 대답했다. 영조는 가슴을 두드리시며 ‘네가 이 금주하는 때 술을 먹어 광패(狂悖)하게 구느냐?’라고 엄히 책망하고는 술을 들인 책임을 물어 환관 신치하와 궁녀 해정을 유배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날 한밤중에 낙선당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사도세자의 방에 있던 촛대가 넘어져 일어난 화재였지만 영조는 세자가 홧김에 방화한 것이라 의심했다. 사도세자를 부른 영조는 ‘네가 불한당이냐? 불은 어이 지르나?’ 하며 전후 사정을 묻지도 않고 호되게 꾸짖었다. 사도세자 역시 변명하지 않고 자신이 방화했다고 대꾸했다. 이런 일은 근본적으로 불신과 불통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명색이 부자간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믿지도 않았고 소통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 때의 사건으로 사도세자는 크게 변했다. 이후 사도세자는 술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정말로 과음하기 시작했다. 과음은 술주정과 폭력 그리고 살인으로 이어졌다. 이러면서 사도세자는 아예 영조와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다.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 그래서 솟아나는 반항심을 그렇게 풀었지만 그 결과는 불신과 불통의 심화였다.


두 번째 원인은 사도세자의 과격한 탕평책이라고 본다.


타협적인 영·정조에 비해 사도세자는 매우 원칙적으로 탕평의 이념을 고수했다. 그는 1749~1762년의 13년 동안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권한대행)을 수행했다. 따라서 탕평정치가 시행된 76년 중에서 13년 동안은 실질적으로 사도세자의 시대였다. 그러므로 탕평정치의 계보는 영조-정조가 아니라 영조-사도세자-정조였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사도세자는 '100% 조선'을 이루려면 특권층인 노론당과 외척세력을 눌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노론당을 얼마나 경계했는지는 나이 열 살 때부터 노론당을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노론당을 비호한 영조의 태도까지 비판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처가인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선 사실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그는 외척세력이 국정에 개입하는 것을 견제했다. 노론당과 외척으로 이루어진 '1%'를 견제했던 셈이다. 한마디로, 그는 '100% 조선'에 목숨을 건 용감한 사나이였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13년 만에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은 것은, 그가 교과서적인 탕평을 추구했고 그것이 특권층에게 공포심을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화병을 앓았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 문제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뒤주에 갇힌 본질적 요인은 '1%'와의 갈등, 즉 특권층과의 싸움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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