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세계 3대 미녀인 양귀비 등 중국의 4대 미인과 4대 추녀 외 제갈량의 부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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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세계 3대 미녀인 양귀비 등 중국의 4대 미인과 4대 추녀 외 제갈량의 부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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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4대 미녀란?

중국 역사상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옥환(楊玉環)이란 4대 미녀가 있다는 건 동양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들의 영광과 굴욕은 다분히 당시 국가의 운명과 백성들의 목숨과 직결되어 있었다. 이 4대 미녀는 수천 년에 이어져 온 동양적 아름다움의 극치로 오늘날까지도 세인들에게 가끔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미녀는 비록 경국경성(傾國傾城), 즉 나라도 성도 무너뜨리는 미모를 가졌지만 최후의 운명은 대부분 끔찍할 정도로 비참했다. 오죽했으면 미녀를 두고 홍안박명(紅顔薄命, 여자의 용모가 너무 아름다우면 명이 짧다), 천투가인(天妬佳人, 미인은 하늘도 질투한다)이라고 표현했을까? 이 4대 미녀에 얽힌 전설을 보면 그 당시의 시대상과 이들의 미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중국의 4대 미인도. 왼쪽부터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수화-양귀비(羞花-楊貴妃)

    : 꽃을 부끄럽게 하는 그 도도함이여...세계 3대 미인  




중국정부 공식 양귀비 초상화로 남긴 실제 양귀비의 얼굴



양귀비(719년-756년)의 실제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양귀비는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이며, 이름은 양옥환이고 현종(이융기)와 무혜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수왕(이모)의 비로 17세때 궁에 들어 왔다.


시와 노래에 뛰어나고 보기드문 절세의 미인으로, 현종의 눈에 들게되어 현종은 자신의 아들인 수왕(이모)에게서 당시 며느리인 양귀비를 빼앗아 자신의 비로 삼았다


그리고 양귀비는 뻐어난 미모로 일본의 "오노노 고마치"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더불러 세계 3대 미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의 4대 미인 (양귀비, 서시, 왕소군, 초선)중의 한 사람 이다


양귀비는 실존 인물인가?


양귀비는 실존 인물인가? 양귀비는 실존 인물이다. 양귀비는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 이며,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블어 중국의 4대 미인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양귀비(719년-756년)의 이름은 "양옥환"이며, "현종(이융기)"과 "무혜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수왕(이모)"의 비로, 17세때 궁궐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시와 노래에 뛰어나고 능통하였던 양귀비는 740년 환관 "고력사"의 소개로 만난 현종의 눈에 들게 된다. 그리고 양귀비가 눈에 들게된 현종은 자신의 아들인 수왕(이모)에게서 당시 며느리인 양귀비를 빼앗아, 궁안에 "태진궁"을 짓고 그곳에 양귀비를 머물게 한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가 22세 이며, 현종은 57세가 된다.


745년 양옥환(양귀비)이 "귀비"가 되면서, 당나라는 서서히 환란의 길로 다가가게 된다. 당 현종의 초기에는 어진 정치를 하였으나 양귀비의 등장 이후부터 양귀비 및 양귀비의 일가의 전횡이 시작되면서, 당나라는 나라의 정세가 상당히 어지럽게 된다.


747년 절도사 안록산이 양귀비의 총애와 함께 전면에 나타나게 되는데, 그 당시 당 현종은 양귀비에게 빠져서 나라의 정치를 돌보지 않고 정치에 관한 모든것을 "고력사(환관)"등의 환관들에게 넘겼으며, 이로 인한 환관과 양귀비의 친척들의 전횡과 부패 속에서 정치 제도와 관리들의 타락이 안록산에게 난(안사의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게된다.


양귀비는 안록산의 반란(755년)이 일어난후, 756년 당 현종과 함께 양국충(양귀비의 4촌 오빠)의 가문 세력인 "쓰촨"으로 달아나다가 현종을 모시던 근위군이 양국충을 죽이고, 양귀비에게 죽음을 요구하자 양귀비는 목을 매어 생을 마감한다.


당 현종(이융기)는 양귀비에 대한 그리움과 지난날의 영화에 대한 허무감으로 병을 얻어,762년 5월에 그의 나이 78세에 생을 마감한다.  양귀비 초상화는 실제 양귀비가 살았던 중국 황제의 별장, 당화청궁에 걸려있는 그림이다




양귀비(羞花-楊貴妃)에 얽힌 야사--일본의 가수가 양귀비 후손이라고 주장


양귀비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쓰촨성 관리이던 숙부의 집에서 자랐다.

  양옥환은 노래와 춤에 능하고 미모가 출중해 17세에 당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의 비가 되었다.


수왕 이모는 당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황제계승권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수많은 왕자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아무튼, 6년 동안 수왕 이모와 결혼해서 알콩달콩하게 살고 있는데양귀비가 23살이 되던 해에 현종이 총애하던 무혜비가 죽고 나서 환관인 고력사에게 미녀를 알아보고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고력사는 수왕 이모의 부인인 양옥환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현종에게 데려와 춤과 노래를 보였고현종은 해서는 안 될 사랑을 시작하게 돼버렸다.



현종도 며느리를 자신의 여자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비도덕적인 일인지 알았지만 계책을 내어 양귀비를 도가에 입문시켜 결국 양귀비를 취했다.



현종은 양귀비를 만난 뒤부터 정치는 뒤로 미루고 사랑에만 몰두하여 양귀비가 해달라는 것,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해줬다그러다보니 점점 양귀비의 친인척들이 득세하기 시작하면서 당은 망조의 길을 걸었다. 특히 양귀비는 안록산 장군을 양자를 입양했는데 양귀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양귀비가 굉장히 총애 했다


어느날 안록산의 애무로 양귀비의 가슴에 흠이 생기자 현종을 속이기 위해 비단으로 가슴을 가렸는데


당시 이를 '뚜떠우'라고 불렸다. 오늘날 '브라자'의 원조가 됐다는 설이 있다.

양귀비가 총애하는 만금 안록산의 세력은 점점 커져나가 양귀비의 6촌 친척오빠인 양국충과의 갈등원인이 되어서 양국충은 안록산을 죽이려 하고이를 눈치 챈 안록산은 안사의 난을 일으켜서 당나라에 엄청난 내란이 일어났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서쪽으로 피신했는데 현종과 양귀비를 호위하던 군사들은 나라를 망친 양귀비와 그 일가를 처벌하기를 원했고, 현종은 어쩔 수 없이 고민하다가 자결하도록 명한다.


그런데 양귀비를 죽이려 간 군인들이 미모에 반해 양귀비를 죽이지 않고 일본에 빼돌렸다는 설이 있다

  일본에는 양귀비의 유물과 사당, 무덤이 일본 야마구치 현에 남아 있으며, 실제로 양귀비의 후손이라고 족보까지 있다.

  시대를 뒤흔들 만큼 엄청난 미모를 가진 양귀비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도 부른다

  

  사기에 기록한 양귀비 모습은 얼굴의 목은 학처럼 길고, 입술은 작도 도톰하며, 치아는 하얗고 혀는 가늘고 길었다. 목에 비해 손발이 길었고팔다리는 산맥처럼 유연했다. 겨느랑이에는 털이 없었고, 배꼽은 우물처럼 깊었으며, 음모는 숲처럼 무성했다. 허리는 버들가지처럼 하늘하늘 거렸으며 춤은 타고난 명수였다. 현종이 반하여 하루 종일 양귀비 곁에서 붙어서 살았다.” 양귀비는 키 155cm에 몸무게 65kg의 건강한 체형으로 좋아하는 과일은 여지라 한다.

PS:양귀비는 리치의 맛에 반해 해마다 5월이 오면 매일 리치를 먹겠다고 황제를 졸랐다.

원산지 광둥부터 수도 시안까지는 오늘날 기차로 스물여섯시간, 비행기를 타고도 3시간 거리다. 상온에서 사흘 안에 변하는 리치를 직송하기 위해 백성들은 리치를 담은 얼음 상자를 등에 진 채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고 한다. '말도 백성도 지쳐 숨이 끊어질 무렵 양귀비의 입안에는 리치 향내가 가득하다'는 말도 있다.





                                                                    

서안에 있는 양귀비의 묘


┃▶◀▶양귀비의 묘가 일본에도 있다는데◀▶◀▶◀┃

▶왕후가 죽은 뒤 쓸쓸하던 당 현종은 시집 온 며느리가 ㄴㅓ무

아름다워 강제로 빼앗아 귀비로 앉혔다. 당 현종의 양귀비 사랑은

수많은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각별했는데 '안록산의 난'으로 피난

가는 도중 반란군에게 잡혀 38살의 나이에 자결하고 만다.


섬서성(陝西省) 의 다른 농촌 마을들과 같이 황토고원 위의 마외진에

자리잡은 양귀비묘는 다른 당나라 황실 무덤과 달리 아담하고

소박하다. 청대에 이르러 성역화되기 이전에는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던 양귀비 묘는 무덤과 더불어 6m 높이의 대리석으로 된

양귀비상과 사당, 시비당 등으로 조성되어 있다.


1970년대 일본을 사로잡은 십대 아이돌(idol)로서 우리

나라에도 많은 팬을 갖고 있던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惠,

1959~ )는 1980년 연예계에서 은퇴했지만 2002년에 갑자기

동아시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어느 날 중국 기자들의 회견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원래 성(姓)은 양(楊)씨로서, 

양귀비(楊貴妃)의 후손이라고 밝힌 것이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 

집안의 족보 등을 제시, 화제의 주인공이 됐다.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 大津郡(오쯔군) 유다초마을(油谷町村)에는

양귀비 상점, 양귀비 주점, 양귀비 호텔 등 온통 양귀비 

이름이 붙어 있고, 이곳에 양귀비 묘와 건물, 정자들은 중국식과

흡사하게 지어져 있고 화장실도 중국식으로 쪼그려 앉아서 보는

구덩이식이다. 거기에는 양귀비를 옥으로 빚은 상(像)도 서 있다.


▶이와 같은 사태의 배경에는 '안록산의 날' 당시 근위대장인 

진헌례(陳玄禮)가 시녀를 대신 죽도록 하고 양귀비를 일본으로

 빼돌렸으며 양국충의 아들 며느리와 손자 양환(楊歡)도 양귀비와

함께 일본에 도망갔다는 설이 뒷받침하고 있다.






침어-서시 (沈魚-西施 )

   :그녀를 본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 먹을 정도로 예쁘다.

     

                                                    

 서시는 춘추시대(春秋時代)말 월()나라의 가난한 나뭇꾼의 딸이었는데 기가 막히게 빼어난 용모를 갖추고 있었다 합니다.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월나라의  왕 구천(勾踐)과 책사 범려 등은 오나라에 대한 복수의 방편으로 서시를 이용한 미인계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서시의 얼굴이 얼마나 예뻣던지 그녀를 한번이라도 보고자 하는 구경꾼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 )를 이루었기 때문에 범려는 서시를 보기 희망하는 사람들 한테 돈을 받아 이 돈으로 무기를 만들고 병사들을 훈련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범려는 서시를 극진하게 대우해주며 3년간의 고된 훈련을 통해 잘 다듬어진 스파이로 키웁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세계 2차 대전 때의 마타하리이고 영화로 얘기하면 니키타 정도 되겠네요.

 드디어 서시는 오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보여지고 서시를 본 부차는 첫 눈에 서시한테 빠져 듭니다.

 부차는 서시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하게 했고, 특히 그녀가 뱃놀이를 좋아 했기 때문에 대운하 공사를 벌였으며 이는 오나라의 국력을 낭비 시키고 높은 세금과 강제노역으로 백성들을 심하게 괴롭히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어찌됐든 서시는 오나라왕 부차의 넋을 빼놓아 부차는 국정을 돌보지 않고 사치와 환락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 이틈을 이용하여 월나라는 국권회복을 할 수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서시는 어려서부터 가슴앓이라는 지병이 있어 가슴이 자주 아팠고 이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게 되었는데 이 찡그린 얼굴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네요.

 물론 부차 또한 서시의 이런 아름다운 모습에 완전히 넋이 나갔음은 물론이구요.

 

 또한 이 소문이 궁중 밖으로 까지 퍼지자 오나라 여자들은 자신들도 찡그리면 모두 예쁜 줄 알고

오나라 여자들 모두가 찡그리고 다녔다 합니다. 그래서 찡그린 미인하면 서시를 말합니다.



낙안-왕소군(落雁-王昭君)

   :하늘을 날던 기러기, 그녀의 아름다움에 날개 짓을 멈추다.

 

 때는 한()나라 원제(元帝) 건소(建昭 ) 원년.

옛날의 왕들이 다 그렇듯이 원제 또한 전국의 미인들을 모집하여

후궁으로 삼게 됩니다.

 물론 우리의 왕소군도 18세의 꽃다운 나이와 아름다운 미모로 당당히

입궁합니다.

 이런 것도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겠지요. 그 때의 왕들은 왜 하나같이 욕심이 많았을까요. 남 주기는 아까우니 세상 모든 여자들을 죄다

입궁시켜 놓고 보니 선택의 폭이 너무 컸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궁중화가인 모연수(毛延壽)에게 후궁들의 얼굴을 그리게 하고

그 초상화에 의거 수청들 후궁을 간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귀한 집안의 출신이거나 경성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모연수에게 각종 뇌물과 청탁을 하며 자신의 얼굴과 자태를 예쁘게 그려 달라고 합니다.

 지금의 촌지와 뽀샵과 같은 형태이겠지요.

 

 그러나 왕소군은 집안이 비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고 황제에게 자신의 용모를 속일 마음은 물론 그렇게 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결국 모연수는 자신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을 추녀로 그려서 황제에게 보여줬고 이런 왕소군한테 황제는 5년동안 전혀 관심이 없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던 중에 한나라는 흉노족(匈奴族)의 지배를 받게 되고 흉노의 왕인 호한야(胡韓耶)를 장인으로

모셔야 하는 굴욕적인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에 원제는 자신의 호탕함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부인(후궁)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지 가져도 된다는 제안을 합니다.  원제는 호한야에게 직접 선택하도록 하였고, 호한야가 가르킨

그 곳에는 천하절색의 미녀가 사뿐히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곱고 윤기있는 머릿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엔 원망이 서린듯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 처음으로 왕소군을 실제 보면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원제는 그 자리에서 모연수의 목을 베어 버립니다.

 

 졸지에 말도 통하지 않는 흉노족에게 시집을 가게 된 왕소군은 가는 길에 서글픈 자신의 심정을 

노래했는데요, 그 구슬픈 소리와 왕소군의 처연한 아름다움에 기러기가 날개짓을 잊고 그만 떨어

졌다는 말에서 낙안(落雁)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합니다.

 또한 왕소군이 흉노족 호한야한테 시집가서 지은 시중에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유명한 구절이

이것입니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    

 오랑케 땅인들 화초가 없으련만,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폐월-초선(閉月-貂蟬)

          :달이 부끄러워 숨어버린 얼굴


                                                                    

  초선에 대한 기록은 확실치가 않습니다.

실재했던 인물인지 가공의 인물인지 어느것 하나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지난 2000년 5월경에  초선의 무덤이라고 추측되는 묘를

발굴하기는 하였으나 이것마저 확실치는 않구요. 

 

 그러다보니 초선은 왕윤의 양녀(養女) 또는 가기(歌妓), 동탁의 시녀(侍女), 여포의 아내 등등 갖가지 설이 난무합니다. 

 초선! 당신은 도대체 누구의 여인이란 말입니까?

 

 왕윤은 동한왕조를 찬탈하려는 동탁(董卓)을 제거하는 작전을 짭니다. 전형적인 미인계(美人計)요, 연환계(連環計)의 계략을 꾸미는데, 초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먼저 초선을 젊은 여포(呂布)에게 결혼을 약속하고는 늙은 동탁에게 바칩니다. 동탁과 여포는 양부와 양자로 맺어진 사이인데 이 둘이 서로 칼을 들이대게 하려는 반간계(反間計)의 작전을 펼친 것입니다.

 

 여포가 어쩔 수 없이 초선을 동탁에게 빼앗기다시피 바칠 수 밖에

없게 되자 속에서는 불이 일었죠. 이러던 차에 여포가 동탁부에 들러 봉의정(鳳儀亭)에서 초선을 만나고 이에 초선은 그 동안 동탁에게서 받은 온갖 설움을 눈물로 하소연합니다.

 

 물론 시나리오에 의한 초선의 연기이기는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예쁜여자의 한숨어린 눈물에 돌지 않는 남자가 있을까요.

 여포는 당연히 분노하였고 동탁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동탁에게 칼질을 합니다. 

그러나 노회한 동탁이지만 순간적인 위기를 모면하고 오히려 여포를 궁지로 몰아 내쫒습니다.

 

 이 둘 사이는 철천지 원수가 되었고 중간에 낀 왕윤(王允)은 여포에게 지혜를 주어 여포의 양부(養父)인 동탁을 양자(養子)인 여포가 죽이게 합니다.

 

 이러한 계략이 성공한 후에 초선은 달밤의 후원에서 왕윤의 무사기원을 달에게 절했는데,

그 때 구름이 달을 가렸기에 이 모습을 본 왕윤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초선의 미모에 달도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구나"한데서 폐월(閉月)이라는 말을 얻었다 합니다.  



◆ 고대 중국, 미인 박대(薄待)?

이처럼 중국의 4대 절세미인은 ‘침어낙안, 폐월수화’란 상상력 넘치는 문학적 표현의 탄생에 기여했지만 그들의 운명은 하나같이 기구하고 비극적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중국인들의 머릿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미녀는 대개 화를 초래하는 존재’란 편견에서 찾을 수 있다. 또 역사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미녀는 왕조의 말기에 등장하면서 왕을 미색으로 현혹시켜 왕조의 종지부를 찍는 데 일조하기는 했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방탕한 생활을 하여 중국 최초의 왕조 하(夏)나라를 멸망케 한 말희(妺喜), ‘꼬리 아홉 개를 가진 여우’의 화신으로 상(商)나라를 무너뜨린 달기(妲己), ‘봉화(烽火)를 태워 제후(諸侯)를 희롱’하여 서주(西周) 시대를 끝내고 춘추전국 시대의 도래를 앞당긴 포사(褒姒) 등이 수천 년 동안 미녀에 대한 중국인들의 편견을 강화해 왔다.



물론 이들 왕조가 멸망한 데는 왕들의 무도함과 나라가 직면해 있었던 외우내환(外憂內患)이 더 큰 이유였겠지만 말이다.


◆ 미인 더 대우받는 한국에서 4대 미인이 태어났더라면?

중국에 비해 한국은 미인이 훨씬 대우를 받는 나라인 것 같다. 현실적으로 미인이라면 모든 게 용서가 된다는 사회적 인식도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다.


미인을 선호하고 외모의 미를 추구하는 사회적 풍토가 한국을 성형대국으로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한국의 성형인구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인구대비 성형수술 인구도 이미 세계 정상수준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예뻐지면 그로 인해 받는 사회적 인정과 혜택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국제미용성형협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인구 1000명 당 성형수술을 한 사람이 13명으로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그리스, 3위는 이탈리아, 4위는 미국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중국의 4대 미녀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운명이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는 상상도 해본다.


◆ 사회적 성공을 꿈꾸는 중국여성, 최대한 중성화 추구

오늘날 중국사회에서 여자가 화장을 하지 않고 소박하게 입고 다니는 것을 좋게 보는 풍토가 있는 이유도 이러한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특히 관료사회나 공기업 등 제도권 내에서 여자가 승진이나 사회적 성공을 꿈꾼다면 자신의 외모, 복장, 언행 등을 여성이란 특징을 부각하지 않고 최대한 중성화해야 가능하다는 사회인식이 보편적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한국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 중국의 4대 추녀란?

 
중국의 4대 추녀 중 한 사람인 황제 헌원씨의 4째 부인 모모
‘전설시대의 모모(嫫母·추녀였으나 현명했던 황제(黃帝) 헌원(軒轅)씨의 넷째 부인,

전국 시대 제나라의 무염군에 봉해졌던 4대 추녀 중 한 사람인 종리춘
◆ 덕행 높은 4대 추녀(醜女) 높이 평가

어쨌거나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미인을 좋아하면서도 항상 경계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은 ‘미인과 바보는 형제간’이란 영국 속담과 ‘미인이란 보는 것이지 결혼할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유태인의 사고방식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고 보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인을 얕잡아 보거나 멀리 하려는 경향이 두루 있는 것 같다.

반면에 중국문화에서 추녀에 대해서는 의외로 관용적인 나머지 선호까지 부추기는 경향이 예로부터 있었다. ‘추한 아내와 가까이 있는 밭은 집안의 보배다(丑妻近地家中宝)’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또 ‘전설시대의 모모(嫫母·추녀였으나 현명했던 황제(黃帝) 헌원(軒轅)씨의 넷째 부인), 전국시대의 종리춘(鐘離春·전국시대 제나라의 무염(無鹽)지방에 살았던 추녀. 얼굴은 못생겼지만 왕에게 제나라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자주 제시해 능력을 인정받아 무염군에 봉해졌고 나중에 황후가 됨), 동한시대의 맹광(孟光·후한 양홍(梁鴻)의 아내로 몸집이 크고 얼굴이 검은 추녀였으나 덕행이 높았다.
남편에게 음식을 올릴 때마다 밥상을 눈썹까지 들어올려 바쳤다는 거안제미(擧案齊眉)의 사자성어가 나오게 한 장본인이다),

동진(東晋)시대의 완씨(阮氏·동진의 명사 허윤(許允)의 아내. 허윤은 완덕위(阮德慰)의 딸에게 장가를 간 첫날 밤 완씨의 용모에 놀라 신방을 뛰쳐나왔지만 뒤에 그의 덕행을 알고 백년해로했다)’라는 ‘4대 추녀’의 이야기를 널리 보급하여 여자의 아름다운 외모보다는 내면의 재능과 훌륭한 품행을 훨씬 더 강조해왔다.
동한 시대의 추녀 맹광. 양홍의 아내였던 그는 거안제미 사자성어가 나오게 한 장본인이다.
.
동진시대 명사 허윤의 아내 완씨. 신혼 첫날 밤 남편이 도주할 정도로 추녀였으나 나중에 그의 덕행을 알아본 남편과 백년해로했다.




PS:제갈공명의 부인도 꽤 못 생겼다고 전해 온다.



양양기(襄陽記)》에 의하면 면남(沔南) 지역의 명사였던 황승언은 제갈량이 결혼 상대를 찾고

있다고 듣고 그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게 못생긴 딸이 있는데, 머리는 노랗고 낯빛은 검지만, 재주가 당신과 배필이 될 만 하다.

라고 하며 자신의 딸을 권하였다. 제갈량이 이를 허락하자 황승언은 바로 딸을 수레에 실어 보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일을 웃음거리로 삼았고, 세간에는 "공명이 아내 고르는 것을 흉내내지 마라. 바로 아승(阿承, 황승언)의

못난 딸을 얻게 된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  군수품 수송에 유용하게 사용했던 목우도

부인의 지혜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PS:삼국지의 남만 맹획(孟獲)의 부인인 축융부인(祝融婦人) 역시 무예는 출중했으나 얼굴은 못 냉긴데다

음탕해서 남편 몰래 미남 장교들이랑 바람을 폈다고 전해 온다. 


축융부인이 청년 미남 장교를 초청해서 술을 마시게하여 취해 쓰러지게한 다음 침대로 데려가 옷을 벗겼다.

막 팬티까지 벗기는데 마침 맹획의 아우 맹우가 들어왔다 맹우<형수님 뭐하시는겁니가?>
축융부인<이 장교의 속옷을 빨아줄려고요>



PS:포스팅한 사진은 인터넷 검색창에서 모셔 왔습니다.




블로그 대문/백두산 화산폭발 시뮬레이션, 9시간 만에 한반도 초토화

15일 오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깨어나는 백두산 화산, 어떻게 할 것인가?' 세미나에서 이윤수 포항공대 교수가 백두산 화산 재해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15일 오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깨어나는 백두산 화산, 어떻게 할 것인가?' 세미나에서
이윤수 포항공대 교수가 백두산 화산 재해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백두산 천지를 중심으로 화산지진, 가스, 지각변형 등 심각한 화산분화 징후가 포착됐고, 폭발 시 2010년 아이슬란드 화산 분화량 천배 규모가 될 수도 있다는 예측이 나왔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1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2002∼2005년 백두산 천지 근방에서는 화산지진이 3천여 회 이상 발생하며 천지가 부풀어 오르는 등 심각한 화산분화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

연구원에 따르면 서기 946년 천지에서 발생한 '밀레니엄 대분화'는 남한 전체를 1m나 덮을 수 있는 엄청난 양의 분출물을 쏟아 냈으며, 이는 과거 1만 년 이래 지구상에서 가장 큰 규모의 분화 사건에 속한다. 


이윤수 포항공대 교수는 발표에서 "백두산의 과거 분화는 2010년에 아이슬란드 화산분화량의 천배 이상 규모였다"면서 "앞으로 백두산 화산이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르나 그걸 알기 위해 정밀 조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윤성효 부산대 지구과학교육과 교수는 "백두산이 가까운 장래에 분화한다면 칼데라 물이 넘쳐 대홍수가 발생할 수 있으며, 그러면 도로, 댐, 전기 등이 마비되고 생태계 변란, 토양 침식, 호흡기 질환 등 악순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윤 교수(지구과학교육) 등이 참여한 연구진이 10년 평균 기상장을 반영해 시뮬레이션을 한 결과 서울 일부와 경기 북부, 강원도, 경북 북부 지역에도 피해가 예상됐다. 


북풍이 강하게 불면 화산 폭발 9시간 만에 우리나라 전역에 화산재가 떨어질 수도 있다.


백두산 천지(칼데라)에는 20억t이 넘는 물이 담겨있다. 뜨거운 냄비에 갑자기 물을 부으면 물방울이 튀어 오르는 것처럼 1000도가 넘는 마그마가 천지에 물을 만나면 재앙적인 결과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물은 순간적으로 기화해 수증기로 변하고, 마그마는 급랭해 산산조각나 화산재로 변한다. 물이 흘러넘쳐 화산성 홍수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윤 교수는 설명했다. 


'대폭발' 다룬 영화 백두산…실제 화산폭발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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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백두산' 포스터

최근 인기 영화 배우 이병헌과 하정우, 마동석이 출연하는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 '백두산'의 티저 예고편이 공개돼 주목을 받고 있다. 백두산 화산의 마지막 폭발을 막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백두산이 화산 활동을 멈춘 '사화산'이 아닌 휴지기에 들어간 '휴화산'이라는 데서 착안된 픽션이다. 이에 따라 실제로도 백두산이 폭발할 가능성과, 폭발이 됐을 경우 우리나라와 한반도에 어떤 피해가 발생할지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영화 개봉은 12월>


백두산은 '휴화산', 1000년전 '세기의 분화' 때 화산재가 그린란드까지



백두산 화산 폭발은 우리나라뿐만 아나리 전 세계 지질학자들의 주요 연구대상이다. 약 1000년 전인 946년 발생한 폭발이 '세기의 분화(Millenium eruption)'라고 명명될 정도로 커다란 재해였기 때문이다.  


당시 폭발했던 화산재는 그린란드의 빙하 속에서 발견될 정도로 엄청난 흔적을 남겼다. 한반도는 물론이고 동북아와 전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1668년과 1702년, 1903년에도 백두산 화산 분출 기록이 남아있다.

  
최근 들어 백두산 화산 폭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는 백두산이 다시 들썩이며 재분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어서다. 지난 5월 영국 밀턴케인스에서 열린 '제4차 한·영 리서치 컨퍼런스'에서 북한과 영국 지질학자들은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백두산 주변에서 총 10회의 지진이 발생했다"며 "백두산 주변 땅속 민감도가 증가하고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아울러 2002~2005년 사이 백두산 천지 근방에서만 3000회 이상의 화산지진이 발생해 화산 분화 징후를 보이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만약 1000년 전과 같은 분화가 다시 발생할 경우 지난 2010년 유럽을 화산재로 뒤엎었던 아이슬란드 화산 분화의 1000배 이상 규모가 될 것이란 예측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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