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우리나라 12번째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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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우리나라 12번째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를 가다

헤리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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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 고분군

660년,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은 수도 부여가 함락 될 위기에 놓이자 공주로 피신합니다. 왕이 백성을 버린 채 도성을 탈출하자, 남아있던 궁녀들은 치마를 뒤집어 쓴 채 백마강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꽃잎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는 낙화암의 전설은 700년의 백제 역사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으로 남아있습니다. 한때 한강 유역을 차지할 정도로 번성했지만, 허무하게 패망한 왕국으로 치부된 백제.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역사는 과연 사실일까요?

 

<미륵사지>

 

세계유산으로 백제역사유적지구

 

백제는 3개의 수도를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의 서울, 공주, 부여인데요. 그중에서 공주와 부여가 수도였던 웅진과 사비시대의 유산 8곳이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현재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오는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리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확정될 예정입니다. 이제 최종 결과만을 앞두고 있지만, 이 시간이 오기까진 10년에 달하는 지난한 준비과정이 있었습니다. 유독 힘들었던 이유를 꼽으라면 백제역사유적지구에 웅진과 사비시대의 유산만 포함됐기 때문입니다. 백제 700년의 역사 중 500년을 차지하는 한성시대(서울)의 유산을 제외한다는 것에 우려와 비판의 시각이 있기도 했습니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제작진 역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공주와 부여를 찾아갔을 때 제작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뭔가 대단한 유적이 있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겉보기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허허벌판이었던 것입니다. 백제 역사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막막함에 사로잡혀 있는데, 같이 답사를 온 백제고도문화재단의 이동주 박사가 뒤통수를 때리는 한마디를 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백제의 진짜 모습은 땅 밑에 숨어있습니다”

 

1500년의 타임캡슐

 

1971년 송산리고분군에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인부의 삽에 뭔가 딱딱한 것이 걸립니다. 터널처럼 가지런히 쌓인 벽돌들. 그것은 150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백제 무령왕의 무덤이었는데요. 무덤 안에는 왕과 왕비의 신분을 밝힌 묘지(墓誌)가 있었는데, 무덤의 주인 뿐 아니라 무덤의 축조 시기, 장례 절차까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무덤에 대한 기록이 정확하게 남아있는 왕릉은 고대 동아시아의 왕릉 중에서 무령왕릉이 유일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백제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무령왕릉의 벽돌에는 놀라운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중국 양나라의 기술을 적용해 왕릉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중국 양나라의 고분과 무령왕릉을 비교해보면, 무덤 양식 뿐 아니라 건축에 사용된 벽돌까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백제가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 후 백제는 중국과 다른 독특한 무덤양식을 만들었고, 일본에 무덤 축조 기술을 전합니다. 일본의 칸논즈카 고분은 무덤의 형태 뿐 아니라 출토 유물까지 백제와 비슷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무령왕릉은 백제가 동아시아 문명 교류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인 것입니다.

 

 

<정림사지 5층석탑>

 

혁신적인 계획도시, 사비도성

 

백제가 만든 세 개의 수도는 놀라울 만큼 모습이 비슷합니다. 강가에 왕궁을 배치해 강을 천연의 방어막으로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백제의 세 번째 수도인 부여 사비도성은 완벽한 계획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궁과 산성, 외곽성, 그리고 국가 사찰과 능묘까지 도성의 핵심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선 백제의 가장 아름다운 석탑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정림사지 5층 석탑입니다. 중국 역사서 주서에 따르면 부여는 절과 탑이 매우 많은 곳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정림사지를 비롯해 몇 개의 사찰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과거 부여의 모습은 곳곳에 절과 탑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정림사지에 세운 5층석탑은 백제의 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단아한 정제미와 우아한 조형미 그리고 고도의 균형미를 보여주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이야말로 백제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내는 유산입니다.

 

<공산성>

 

1500년 전,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

 

중국과 일본을 잇는 핵심 고리이자 고대 동아시아의 중심지였던 백제. 우리나라의 12번째 세계유산이 될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세계유산의 기준을 완벽하게 충족하고 있습니다. 세계유산의 등재 심사를 맡은 이코모스 한국위원회 이혜은 위원장은 “백제역사유적지구가 백제 문화의 탁월한 가치를 담고 있으며 동아시아의 도시 발달과 문물 교류의 정성을 갖춘 유산”이라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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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재발견 - 사라진 왕국의 숨겨진 후원을 걷다

 

▲ 궁남지

123년 동안 백제의 왕도였던 부여. 천년 세월이 깃든 역사의 보물 창고다. 작은 도시 곳곳에는 옛 백제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부소산성, 정림사지, 궁남지 등등 화려하지 않지만 은근한 멋을 느낄 수 있는 부여로 떠나보자.

글 | 최갑수 여행작가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백제역사유적지구가 대한민국의 12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고 발표했다. 이번에 등재된 유적지구는 부여, 공주, 익산에 분포되어 있는 총 8개의 유적을 말하는데, 부여의 부소산성과 정림사지를 비롯해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익산시의 왕궁리 유적을 포함하고 있다. 백제 역사유적들은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고대 왕국들 사이의 상호 교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내세관·종교·건축기술·예술미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백제 역사와 문화의 특출한 증거라는 점 등을 높이 평가받았다.

이들 가운데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고 응축하고 있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부여일 것이다. 우리에게 백제 멸망의 현장으로 알려진 낙화암을 비롯해 수도 부여를 지키던 부소산성 등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가을볕 아래를 거닐며 사라진 왕국의 찬란한 역사를 더듬어보자.


백제를 산책하다

▲ 백마강


부여 초입, 관광안내소에서 얻은 부여 지도를 펼친다. 백마강이 부여의 중심을 지나며 크게 휘돌아 흐르는 것이 보인다. 백마강은 부여 사람들이 금강을 일컫는 이름으로 부여군 규암면 호암리의 천정대에서 시작해 낙화암, 구드래나루를 거쳐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약 16㎞를 흐른다. ‘삼국사기’에는 백강, ‘일본서기’에는 백촌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마(白馬)는 ‘큰 나라’라는 뜻으로 백마강은 ‘큰 나라가 있는 강’을 의미한다.

이 백마강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곳이 부소산성이다. 위례성(서울), 웅진(공주)에 이어 백제의 마지막 왕도였던 사비(부여)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부여 여행 일정은 부소산성을 들른 후 가까운 정림사지와 국립부여박물관, 궁남지 등의 차례로 돌아보는 것으로 잡으면 된다.

부소산은 평소 왕과 태자들이 즐겨 찾는 후원이었다. 산 정상과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은 유사시에 피신처 구실을 했고 왕성을 지키는 보루 역할도 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사비성 또는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기던 백제 성왕 16년(서기 538년)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여로 도읍을 옮긴 뒤로 강성해진 백제는 이전보다 더 화려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부소산은 부여 북쪽에 있는 해발 100m 정도의 낮은 구릉이다. 산성이라는 이름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오르는 길은 완만하기 그지없다. 소나무, 왕벚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 사이로 산책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아이들과 노약자도 쉽게 걸을 수 있다. 부여 사람들은 산책하듯 거닌다. 둘레는 약 2.2㎞. ‘부소’라는 말은 소나무의 옛 이름이다.

부소산성의 여행은 사비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길은 소나무가 울창한 데다 널찍한 돌이 깔려 있다. 처음 만나는 곳은 삼충사. 백제 삼충신인 성충과 흥수, 계백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곳이다.

삼충사를 지나면 백제시대 왕과 귀족들이 계룡산 연천봉에 떠오르는 해를 맞으며 하루를 계획했다는 영일루, 백제시대 곡물을 저장했던 창고인 군창지가 차례로 나타난다. 군창지를 지나면 반월루. 전망 좋은 누각이다. 부여읍내와 구드래 들판, 반월형으로 읍내를 감싸고 도는 백마강까지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반월루 뒤 산책로 안쪽 길가엔 복원해 놓은 백제 때 수혈주거지(현대식 건물)가 있다.

반월루에서 낙화암이 가깝다. 낙화암은 부소산성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하지만 삼천궁녀가 이곳에서 몸을 던졌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삼국유사’에서는 ‘타사암(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는 훨씬 사실적인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낙화암의 단단하고 너른 바위 위에는 ‘백화정’이라는 정자가 서 있는데, 이는 1929년 겉치레로 세워둔 것이다. 백화정에 서면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낙화암에서 10분쯤 걸어 내려가면 고란사가 나온다. 규모가 작은 삼국시대 사찰이지만 방문객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법당 뒤에 있는 고란약수 때문이다. 한 잔을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이곳 방문객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기가 될 수 있다’는 경고문에도 모두 한 잔 넘게 들이켠다.


석탑, 참 곱다

▲ 정림사지 5층석탑

부여의 백제 때 이름은 사비다. 백제가 일군 600년 넘는 역사 중 가장 찬란했던 시절이 사비의 품에서 탄생했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당시 사비에는 13만호가 살았다고 한다. 중국 사서인 ‘주서’ 중 백제전에 “절과 탑이 매우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왕도 사비는 나당연합군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불타고 스러졌다. 다행스럽게도 탑 하나가 남아 그 시절을 증언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정림사지 5층석탑이다. 이 석탑만이 백제 말 123년의 도읍기를 통틀어 남아 있는 유일한 백제 유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탑이며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고대 삼국시대 석탑의 원형을 밝혀주는 문화재로 꼽히고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소정방탑으로 알려져 있는데 비문에 대당평백제비(大唐平百濟碑)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했다는 뜻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백제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아침 안개 속의 정림사탑은 엘리건트하며 노블하며 그레이스한 우아미의 화신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는 ‘정림사탑이야말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다는 백제 미학의 상징적 유물’이라고 덧붙였다.

훤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를 지닌 이 석탑을 보고 있노라면 이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크고 작은 석재들을 정갈하게 조각한 뒤 조립한 탑은 백제 장인들의 선도적인 미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탑신부에는 모서리마다 배흘림 양식의 기둥을 세우고 층마다 넓은 지붕돌을 올렸다. 특히 부드러운 목재를 깎은 듯 지붕돌의 네 귀 단부를 살짝 들어올린 솜씨에는 혀가 내둘러질 지경이다. 또 기단부가 매우 좁고 낮아 마치 탑이 땅에서 솟아난 듯한 느낌을 준다. 얼핏 목탑의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한 것이 정림사지 5층석탑이다.

정림사지 석탑 앞에 서 있는데 옆에 서서 한참 동안 석탑을 바라보던 아저씨가 툭, 한마디를 던진다. “거 참, 곱다.” 우아한 기품이 우러나는 탑은 손을 대어 한 번 쓰다듬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게 만들 정도다.

5층석탑 뒤 복원된 강당 안에는 키 큰 석불이 모셔져 있다.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108호)이다. 돌로 된 중절모를 쓴 듯한 멋쟁이 석불이다. 탑은 백제 때 지어졌지만 석불은 고려 때 것이다. 고려시대의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전위적이다. 비바람에 닳아 둥글둥글한데, 그가 짓고 있는 온화한 미소와 조화롭게 어울린다.

정림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바로 옆에 자리한 정림사지 박물관을 찾는 것이 좋다. 박물관 건물은 불교의 상징인 ‘卍(만)’ 자 모양을 연상시킨다. 중앙 홀을 중심으로 진입로, 전시실, 관리실 등이 사방으로 날개를 뻗고 있는 듯하다. 발굴 당시부터 현재까지 정림사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전시했고, 중앙 홀에는 정림사를 축소 복원한 모형이 설치돼 사찰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또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삼존불입상, 소조불, 도용편 등 각종 유물과 복제본이 있으며, 석탑 전돌과 사찰 기와를 제작하는 과정과 탑을 축조하는 과정도 모형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정림사지를 나와 길을 하나만 건너면 국립부여박물관이다. 백제 문화의 진수로 손꼽히는 백제금동대향로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능산리사지에서 발굴된 세기의 보물로 백제 공예품의 절정을 보여준다. 6세기 말 백제 부여시대에 제작된 금동대향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우수한 걸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전체 높이 62.5㎝. 용 모양의 향로 받침 위에 연꽃 모양의 향로 몸체가 사뿐하게 얹혔다. 뚜껑 부분에는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산봉우리에는 온갖 것들의 형상이 빚어져 있다. 자세히 보면 말 타고 사냥하는 사람도 있고 신선들도 노닌다. 호랑이와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여러 동물도 보인다. 하나같이 금방이라도 살아움직일 듯 생동감 있다. 뚜껑의 손잡이 부분은 봉황이 날아갈 듯 깃털을 움직이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봉황 바로 아래에는 다섯 악사가 각각 소, 피리, 비파, 북, 현금을 연주하고 있다. 불교문화연구가들은 백제금동대향로가 불교의 이상향인 연화장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백제의 우아한 정원

▲ 능산리고분


부여를 여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궁남지다. 궁남지는 ‘궁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삼국사기’에 ‘궁궐의 남쪽에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를 파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적 제135호. 634년 무왕 시절 만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연못이라고 한다. 3만3000㎡(1만평) 정도에 이르는 지금의 궁남지는 1965년에 복원한 것인데, 원래 규모의 3분의 1 정도라고 한다.

궁남지 한가운데의 ‘뜬 섬’에는 포룡정(泡龍亭)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자가 있다. 이는 백제 무왕의 어머니가 궁남지에 살던 용이 나타나자 의식을 잃은 뒤 무왕을 잉태하게 되었다는 탄생 설화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뜬 섬으로 이어지는 나무 다리를 건너면 정자로 들어갈 수 있다.

궁남지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어릴 적 이름이 서동으로 불렸던 무왕은 신라의 국정을 탐지하라는 밀명을 받고 마를 파는 상인으로 위장해 서라벌로 잠입한다. 그리고 어느날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됐다.

서동은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서동 도련님을 밤마다 몰래 안고 간다’는 내용의 서동요를 직접 지어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아이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번지자 왕은 결국 선화공주를 내쫓았고, 무왕은 기다렸다는 듯 백제로 데려갔다. 두 사람이 신접 살림을 차린 곳이 바로 궁남지터다.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분들의 모습이 포근하게 다가온다. 신라의 거대한 왕릉과 달리 소박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전문가들은 이곳의 여린 듯 부드러운 고분을 두고 ‘백제의 곡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부여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백마강 건너에 자리한 백제문화단지다. 백제 왕궁과 마을을 재현해 놓았다. 당시의 생활상을 재현한 사비성에는 왕궁 및 능사, 생활문화마을, 위례성, 고분공원, 역사문화관 등이 들어서 있다.

입구인 정양문을 지나면 사비궁이 나온다. 백제문화단지에 재현된 사비궁은 궁궐의 중심이 되는 천정전과 문사전, 무덕전 등이 회랑으로 둘러싸인 형태를 하고 있다. 천정전은 사비성의 상징적 공간으로 신년하례식, 사신 접견 등 왕실의 중요 행사 때만 사용하던 공간이다. 이곳에 가면 백제 사비 시기의 중궁을 재현한 중궁전, 왕의 집무실 등을 볼 수 있다.

사비궁을 나오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목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능사’다. 능사는 백제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된 사찰이다. 능산리에서 발굴되었던 것을 원형과 똑같은 크기로 이곳에 재현했다고 한다. 능사의 건축, 색채, 조각품 등은 백제 예술의 전형을 보여주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백제문화단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람 포인트는 역시 생활문화마을. 백제시대 귀족부터 군관 가옥, 그리고 중류계급과 서민계급의 집들을 재현해 놓았다. 군관 계백의 집, 건축가 아비지의 집, 의박사 왕유릉타의 집, 불상조각가 도리의 집 등이 있다. 생활문화마을 위에 자리 잡은 위례성은 한성 백제(BC 18~AD 475)의 도읍을 재현해 놓은 공간으로 위례궁, 고상가옥, 개국공신 마려의 집 등이 당시 백제의 건축과 생활상을 볼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여행 정보경부고속도로와 천안논산고속도로를 이용해 남공주IC로 나와 ‘부여·이인’ 방면으로 가면 된다. 서울 남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여행 고속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2시간 소요. 대전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구드래나루터 주변으로 음식특화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구드래돌쌈밥(041-836-9259)의 쌈밥과 나루터식당(041-835-3155)의 장어구이가 유명하다. 장원막국수(041-835-6561)는 오래된 가정집을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어린 시절 뛰놀던 외할머니댁이 생각나게 한다. 육수는 새콤하고 달콤하다. 면은 메밀 함량이 높아 가위가 굳이 필요 없다. 끼니 때마다 요란한 줄이 대문 밖에 진풍경을 만든다. 롯데부여리조트(041-939-1000,
www.lottebuyeoresort.com), 백제관광호텔(041-835-0870), 스타팰리스모텔(041-833-3005) 등이 있다.

출처 | 주간조선 2375호

아래의 글과 사진은 '늘푸른햇살'님께서 제공하셨습니다.

원문보기: http://blog.daum.net/lkm20018/18317623

 

백제 ( 부여 - 공주 ) 박물관 기행

 

* 1편 부여 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은 이러한 문화적 배경 아래 1929년 발족된 부여고적보존회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약 80여년에 이르는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박물관은 충남 서부지역의 선사문화를 비롯하여 특히 백제의 문화유산을 보존 관리하는데 중심 역할을 다하여 왔습니다. 이외에도 유적·유물의 전시와 조사연구, 문화교육, 국제교류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선양하는 데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 부여박물관 홈페이지 발췌)

국보 287호 백제 금동 대향로

 

국보 제287호. 이 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부여 능산리의 백제시대 고분군(古墳群)과 사비성(泗泌城)의 나성(羅城) 터 중간에 위치한 백제유적 발굴 현장에서 백제시대의 다양한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동체(胴體)를 연꽃봉오리로, 뚜껑은 산모양으로 만들어 많은 물상(物象)을 등장시켰고 정상에 봉황을, 아래에는 용을 배치하였다. 이로 보아 이 향로는 불로장생하는 신선(神仙)이 용과 봉황과 같은 상상의 동물들과 어우러져 살고 있다는 해중(海中)의 박산(博山) 즉 신선세계(神仙世界)이자 별천지(別天地)·이상향(理想鄕)을 닮게 만들었다는 전형적인 박산향로(博山香爐)임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불교 전시관 서산 마애불과 태안 마애불

국보 293 호 금동 관음 보살입상

국립 부여 박물관 전경

부여 박물관을 둘러 보고 나와서 능산리 고분군을 찾어본다 ~

* 부여 능산리 고분군

능산리고분군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지를 옮긴후 사비시대 ( 538-660년) 백제 왕릉군이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왕릉군은 중앙의 7기가 지정되어있다~~

 

 

능산리 고분군 배치도

왕릉군 묘역 전경 ( 드론 촬영)

왕릉군 역 전경 ( 드론 촬영)

 

 

동하총 고분에는 네벽에 사신도가 천정에는 연꽃 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어 중요한 학술적가치가 있는고분이다

 

 

능산리 고분군내에 고분과같은 형태의 전시장이 있어 이곳 고분군에 관련된 유물에대해 설명을 해놓은 곳이다~

 

 

부여 나성

 

 

이곳은 능산리 사지터 전경

부여 능산리사지는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조성한 왕실사찰의 절터로서 일명 ‘능사(陵寺)’로도 불린다. 2001년 9월 29일 사적 제434호로 지정되었다. 능산리사지는 사비 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사적 제58호)과 능산리고분군(사적 제14호) 사이의 골짜기에 위치한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능산리사지 공방지터에서 발굴된 금동대향로 발견 당시의 모습을 현장에 재현해놓았다~~

 

 

공방지터

 

◀선조들의 숨결어린 문화재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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