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 문선명 한학자 총재

1. 한 분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

작성일 작성자 하동

1. 한 분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

날 짜 : 1972년 2월 3일

장 소 : 미국 뉴욕 링컨센터

행 사 : 미국 9개 도시 순회강연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밤 이와 같이 날씨가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많이 모여 주신 데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을 이렇게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은 수십년 전부터 해왔습니다. 오늘 저녁 처음으로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먼저 여러분 앞에 감사를 드림과 동시에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평화경 p. 355, 72.2.3)

 

1.1.1. 하나님은 실존하는가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제목은 ‘한 분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입니다. 여기 뉴욕에 사는 분들은 ‘하나님’ 하게 되면 하나님은 죽었다 하는 것을 연상하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있는데, 있는 하나님을 가지고 죽었다고 한다면 이 이상 죄가 되는 일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데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것은, 있는 하나님을 죽었다고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볼 수 있습니다.(평화경 p. 355, 72.2.3)

오늘 말씀드릴 ‘한 분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라는 제목을 두고 보더라도 여기에 사람이 없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과 하나의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고,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과 하나님이 합해서 이루어지는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평화경 p. 355, 72.2.3)

만일 절대자인 하나님이 혼자 있다면, 그 하나님이 있는 자리는 행복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혼자 좋아하고 기뻐한다면 하나님도 정상적인 하나님이 아닐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평화경 p. 355-356, 72.2.3)

그렇지만 그 하나님이 아무도 없는 데서 그러면 이상하지만, 조그마한 상대라고 하더라도 그 하나를 보고 ‘하하하’ 웃으면서 좋아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상적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을 보고 웃는다고 하더라도 그 웃는 하나님에 대하여 미쳤다고 한다면, 미쳤다고 하는 사람이 오히려 미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 존재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여러분 앞에 먼저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불행이니 비참이니 하는 말들은 상대가 없는 데서 시작되는 말입니다.(평화경 p. 356, 72.2.3)

그러면 하나님이 상대를 좋아한다면 이 세계에서 대관절 어떠한 존재를 좋아할 것 같습니까? 감각이 없는 광물이겠습니까? 광물이 아닙니다. 식물도 아닙니다. 식물보다는 동물은 조금 관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관심거리가 될 수 있는 중심존재가 무엇이냐고 묻게 되면, 그것은 유치원생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라고 지적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보면 사람은 피조물 가운데서 최대의 걸작품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대상을 찾아간다면 인간을 내놓고는 찾아갈 대상이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평화경 p. 356, 72.2.3)

오늘날 이 복잡한 정세 속에서 금후의 미국의 운명이라든가 혹은 세계의 운명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이 있으면 좋겠느냐 없으면 좋겠느냐 하는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절대자가 있어 참은 참으로써 악은 악으로써 처단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분이 없다면 금후의 세계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것보다 있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평화경 p. 356, 72.2.3)

 

1.1.2. 이성성상의 하나님

이 우주는 존재세계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고 있습니다. 그 힘이 있기 위해서는 힘이 먼저냐 존재가 먼저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힘이 없으면 존재도 없습니다. 힘이라는 것은 작용을 하지 않고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힘이 있기 전에 작용의 현상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작용을 하려면 거기에는 힘이 있기 전에 선행의 조건으로 주체와 대상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평화경 p. 356-357, 72.2.3)

이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는 데서 작용이 벌어지고, 작용이 벌어짐으로써 힘이 존속하는 것입니다. 힘이 있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체와 대상입니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다른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이들이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서로가 상대의 내용에 맞게끔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작용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이 작용하게 될 때는 주체의 목적과 대상의 목적이 합할 수 있는 기점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작용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평화경 p. 357, 72.2.3)

우리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일로 외부에 나간다 할 때 자신이 손해 보기 위해서 나가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에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집에서 나올 때 ‘나 오늘 1전이라도 손해 보기 위해 집에서 떠난다.’ 하고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나올 때는 반드시 자기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것을 바라고, 자기에게 플러스될 수 있는 무엇을 바라서 출발하는 것입니다.(평화경 p. 357, 72.2.3)

여러분이 친구들을 만나거나 혹은 좋아하는 데 있어서 서로가 마이너스될 수 있고 지금보다도 나빠질 수 있는 자리에서는 절대 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갑이라는 사람과 을이라는 사람 둘이 서로서로 합하는 데는 지금보다 나을 수 있는 서로의 목적을 바라보기 때문에 거기에 작용이 벌어지고 하나로 합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힘이 작용하는 데는 이중목적, 즉 주체와 대상이 서로서로의 목적을 플러스시키는 그러한 것이 있지 않고는 하나로 합하지도 않고 작용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평화경 p. 357, 72.2.3)

원자면 원자를 두고 볼 때, 원자에는 양자를 중심삼고 전자가 돌고 습니다. 그것도 역시 두 목적을 결합할 수 있는, 주고받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하나의 원자형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자의 목적과 양자의 목적을 겸한 목적을 중심삼고 합해 있는 것입니다. 크게 보면 하나님도 존재자입니다. 하나님도 존재한다면 실존체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역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되어 있어서 완전히 주고받을 수 있는 이중목적성을 중심삼고 결합된 자리에 서지 않고는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도 결국은 주체성과 대상성이 합해져 한 분의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말입니다.(평화경 p. 357-358, 72.2.3)

 

1.1.3. 인간의 양심작용으로 본 신의 실존성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는데 1남1녀더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을 귀납적으로 추구하면 하나님은 한 남성과 한 여성을 합한 분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혼자 있어서는 안 되겠기 때문에, 대상을 필요로 해서 이 세계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어진 것이 하나의 남자고 하나의 여자입니다. 사람을 두고 봐도 사람에게는 마음과 몸이 있습니다. 이 마음과 몸이 주고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일 틀려지게 될 때는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어느 한쪽이 기울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합해져서 올라가게 되면 기쁩니다. 이것이 완전히 하나된 남자가 있다면 그는 완전한 남자일 것입니다.(평화경 p. 358, 72.2.3)

만일에 절대자가 있다면 어떠한 남자를 요구하겠습니까? 그러한 남자를 요구할 것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과 몸이 완전히 하나된 여자가 있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여자를 만나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대자의 위신을 두고 보더라도 사람을 만나는 데는 최고의 남자, 최고의 여자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이 찾기를 바라고 하늘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는 사람을 하늘도 요구하는 것이요, 우리도 요구하는 것입니다.(평화경 p. 358, 72.2.3)

우리 인간을 보게 되면 아무래도 원인적인 존재가 아닌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결과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존재하고 안 하고를 자유로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원인이 못 되니 결과적인 입장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결과적인 존재도 원인이 절대적이면 절대적인 상대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평화경 p. 358-359, 72.2.3)

 

1.1.4. 인체의 신비를 통해서 본 신의 실존성

여러분!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 잠깐 말해 봅시다. 우리가 인류시조를 찾아 올라가면 최초의 인류시조가 나올 것입니다. 그 인류시조는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 태어난 최초의 인간이 땅에 태어나면서 태양이 있어서 눈으로 봐야 된다는 것을 그 자체가 알아서 준비해 나왔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 자체가 모르고 나왔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평화경 p. 359, 72.2.3)

이 땅에 나와서 눈이 태양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그 자체는 몰랐다 하더라도 벌써 천체에 햇빛이 있어 볼 수 있는 것을 알고 눈이 그렇게 생겨난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을 보면 깜박거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땅의 열을 받아 눈의 수분이 증발함으로 말미암아 축여 줘야 할 것을 알기 때문에 깜박거리는 것입니다. 또 눈썹은 먼지를 방지해야 할 것을 알고 생겨났습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은 박물학적, 천문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평화경 p. 359, 72.2.3)

여러분! 눈을 보십시오. 눈은 벌써 땀을 흘릴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고 이 귀중한 데에 이물질이 들어가면 큰일 나겠기에 방파제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서서 다닐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또 귀를 보십시오. 벌써 상대 방향의 음파를 듣게끔 다 알고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코를 보십시오. 코가 왜 요렇게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코에 땀이 들어가면 안 되겠기 때문에 입가에 방파제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전부 알고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자기 멋대로 생겨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평화경 p. 359, 72.2.3)

우리의 인체를 보면 신비의 왕궁같이 되어 있는데, 이것이 그냥 그대로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 자기 자신은 몰랐지만 그것을 안 분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렇게 태어날 것을 모르고 태어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십니다.(평화경 p. 359, 72.2.3)

 

1.1.5. 하나님과의 관계로 본 인간 본연의 가치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다면 우리 인간을 어떠한 자리에 두고 어떤 관계를 맺기 위해서 지었느냐를 알아봅시다. 하나님이 만약에 인간을 지었다면, 지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지어진 사람이라면 그 사람 자신에게도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지어진 사람의 목적과 지은 하나님의 목적이 따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필시 어떤 일치점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도 바랄 것이고 우리 인간도 바랄 것입니다.(평화경 p. 360, 72.2.3)

여기에 온 사람들 가운데 세계적인 대통령이 계시다면 그 대통령보다도 낮아지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높아지고 싶습니까, 낮아지고 싶습니까? 높아지고 싶은 것입니다. 최고로 높아지고 싶은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분이 있으면 그분과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평화경 p. 360, 72.2.3)

그리고 그 높은 사람을 중심삼고 하나되었다 해도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으면 그분과도 하나되고 싶은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그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일지라도 그러한 생각을 다 갖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천지를 창조한 절대자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싶겠습니까, 안 맺고 싶겠습니까?(평화경 p. 360, 72.2.3)

그 하나님을 점령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속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점령하지 못할 때는 안심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점령하고 하나님 속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까지도 점령하고 나면 만사는 다 오케이입니다. 그분의 사랑만 점령하는 날에는 그분의 것은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양심에 우리를 그곳까지 내몰아 주는 작용이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본래 인간의 가치적 자리가 있기 때문에 그런 작용을 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평화경 p. 360, 72.2.3)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우리 인간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어떤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겠습니까? 또 우리 인간은 어떤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겠습니까? 그 자리는 부자관계, 즉 아버지와 아들의 자리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에서 하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버지이고 아들이면 상하관계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두고 볼 때, 그 높은 아버지 자리에 나도 한번 가고 싶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염려해 우리의 마음, 즉 내적인 자리에 들어오고, 우리 인간 자신은 바깥, 즉 하나님의 몸과 같이 되는 자리까지 허락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동등한 자리에 서게 됩니다.(평화경 360-361, 72.2.3)

인간으로 보게 될 때 그 아버지가 귀하다면, 하나밖에 없는 그 아버지를 어디에 갖다 건사할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 먼 데 두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나와 더불어, 나만이 만나고, 나만이 좋아할 수 있는 자리에 갖다 두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어디 딴 데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만이 알 수 있는 마음속에다 두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욕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평화경 p. 361, 72.2.3)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을 같은 자리에 두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 자리에서 사랑받을 수 있게끔 해주고,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로 세워 주시려는 뜻이 계신 것입니다.(평화경 p. 361, 72.2.3)

그다음에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능력을 가진 분이니 그 창조의 능력까지도 갖게 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난 후, 우리 인간을 지어 놓고 보니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는지 그것까지도, 그러한 묘미까지도 우리 인간이 느끼게 하고 싶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받으려면, 하나님은 한 분 가운데 완전한 남성과 여성의 모습으로 계시므로 갈라져 태어난 완전한 남자와 여자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상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상대가 됨으로써 창조적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평화경 p. 361, 72.2.3)

그래서 부부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창조 능력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자녀입니다. 아기를 낳아 얼마나 기쁘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녀에 대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제일 은 것을 우리 인간에게 다 퍼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어 행복과 만족 가운데 평화스러운 에덴에서 살게끔 우리 인간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영원히 상대되는 입장에서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는 행복한 사람으로서 살아야 할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평화경 p. 361-362, 72.2.3)

 

1.1.6. 세계를 구해야 할 종교의 사명

절대적인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물은 하나의 목적을 가져야 될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절대적인 상대 입장에 선 인간이 이 땅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없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지었으니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인간이 되어야 할 텐데, 인간을 보게 되면 이율배반적인 반대의 목적이 된 또 하나의 길에 서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사람에게 있어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 보고 있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양심이 내적인 플러스라고 한다면 사심은 또 다른 하나의 플러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이 지상에 살고 있는 우리 인생인 것입니다.(평화경 p. 362, 72.2.3)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귀한 위업으로 주셨던 사랑의 이념, 절대적 가치의 이념을 상실해 버리고 오늘날 우리 자체는 반대적인 두 현상세계에서 신음하고 사는 비참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고장 난 사람들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인간을 그냥 둘 수 없어서 역사과정을 통하여 재생시키는 운동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수리공장을 만들어야 되는데, 그것이 종교라는 것입니다.(평화경 p. 362, 72.2.3)

세계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혹은 민족 배경이 다른 기준에 따라서 수많은 종교를 세워 규합해 나오는 것입니다. 종교가 바라는 목적은 세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목적도 세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구하려는 종교가 아니고는 오래 남아지지 않습니다.(평화경 p. 362, 72.2.3)

여러분! 종교지도자들은 민족주의자가 아니고 세계주의자요, 하늘을 중심삼은 세계적인 운동을 제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4대 성인이라고 해서 네 사람을 꼽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석가모니, 공자, 마호메트를 꼽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크라테스를 꼽고 있는데, 소크라테스는 철인이지 성인은 아닙니다. 지식을 가지고는 생명을 구하지 못합니다. 하늘만이 생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평화경 363, 72.2.3)

그렇기 때문에 4대 성인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전부 세계적인 대종교의 종주가 되어 있습니다. 하늘을 섬기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성인은 존중시하면서 하늘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평화경 p. 363, 72.2.3)

 

1.1.7. 세계적 중심종교는 기독교

그러면 이 수리공장과 같은 사명을 종교가 하는데, 하나님이 절대자라면 절대자가 제일 좋아하는 종교가 어떠한 종교냐 하는 것을 이 4대 종교 가운데서 알아야 됩니다. (평화경 p. 363, 72.2.3)

유교를 보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것을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선을 행하면 하늘이 복을 주고 악을 행하면 화를 준다는 정도밖에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불교를 보게 되면, 법적인 신은 인정하지만 인격적인 신은 모르고 있습니다. 또 이슬람교를 보게 되면, 이것은 기독교를 이어받은 중간적인 종교입니다.(평화경 p. 363, 72.2.3)

그런데 단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장한 내용이 다릅니다. 그가 나타나서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했습니다. 인류역사상에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주장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했습니다.(평화경 p. 363, 72.2.3)

이런 것을 볼 때 누구를 중심삼고 이것을 이루려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이루려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아들이 되어 한 몸이 되고 하나의 신랑 신부를 이루어 하나의 가정을 이루자는 것이 기독교의 목적인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우리 인간 앞에 최고의 가치로 주어졌던 아들의 자리와 동등한 자리, 그리고 창조의 위업과 창조한 그 이후의 기쁨까지도 느낄 수 있는 가정적 기원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고 간 것입니다.(평화경 p. 364, 72.2.3)

 

1.1.8. 기독교의 한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하나님 아버지와 한 몸이 되었지만 상대할 수 있는 신랑 신부의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나라와 유태교가 그때 당시에 예수님과 하나된 자리에서 예수님이 신부를 맞이할 수 있게 했더라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직접 상대가 되어 창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터전을 가졌을 것인데 그것을 못 이루고 갔습니다.(평화경 p. 364, 72.2.3)

이러한 하나님을 중심한 아들딸이 나와 가정을 이루어 새로운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가 되었더라면, 이 지구성은 곧 하늘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하늘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유태교인들이 믿지 못해서 예수님이 죽었지, 믿었다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평화경 p. 364, 72.2.3)

만일 그때 이스라엘 나라와 유태교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이 이상 하였던 신랑 신부를 모시고 새로운 출발을 했더라면, 그렇게 헤쳐져 2차 세계대전 중에 6백만 명의 유태교인이 히틀러한테 학살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 이래 처음 나왔던, 하나님의 대상이 되고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자를 쳐 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이상 큰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평화경 p. 364, 72.2.3)

지금 여기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이 왔다고 봅니다. 지금 믿고 있는 기독교를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가다가는 이스라엘 민족같이 헤쳐져 버리는 일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어, 다시 오시는 주님이 이러한 사명을 갖고 오시기 때문에, 다시 추방하는 일이 없끔 기반을 닦는 운동을 하지 않고는 앞으로 이 세계의 전망은 비참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평화경 p. 364, 72.2.3)

그분이 와서 신부로서 혼인잔치를 한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잔치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는 타락한 거짓 부모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모델로서 생각하였던 선한 참부모는 안 나왔습니다. 이 계획했던 것을 끝날에 와서 다시 갖다 맞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참부모가 나와서 다시 낳아 주고 다시 접붙여 주는 일을 하지 않고는 세계의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평화경 p. 365, 72.2.3)

 

1.1.9. 새로운 사랑의 이상세계 건설을 위해 출현한 통일교회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무슨 사명을 갖고 오시느냐? 타락하지 않고 선한 부모의 자리에서 완성을 보아야 할 참부모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받는 참부모의 가정에서부터 인류가 다시 사랑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평화경 p. 365, 72.2.3)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들이 이 땅에서 살다가 가정적으로 천국 가는 것이 행복이겠습니까, 오늘날 기독교에서 믿듯이 그저 잘 믿어 가지고 어머니는 천당 가고 아버지는 지옥 가게 되어 따로따로 헤어져 가는 것이 행복이겠습니까? 부모로부터 자녀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들어가고, 종족이 들어가고, 나라가 들어가고, 세계가 다 들어가야 됩니다.(평화경 p. 365, 72.2.3)

이러한 새로운 부모를 중심삼은 세계적인 가정이 앞으로 생겨나고 거기서부터 인연되어 인류역사상에 없었던 새로운 사랑이상을 중심삼은 문화와 전통이 이 지구성에 현현하게 될 때, 오늘날 이 복잡하고 죄악 된 세계가 아닌 새로운 지상천국이 되는 것입니다.(평화경 p. 365, 72.2.3)

그러려면 여러분이 어떻게 수속을 밟아야 하는 것을 모르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내용을 가르쳐 주는 것을 우리 통일교회의 사명입니다. (평화경 365, 72.2.3)

방대한 내용을 이렇게 추려서 짧은 시간 내에 이야기하려니 비약도 많았고 무리한 것도 많았지만, 여러분이 양해하고 들어 주신 데 대해서 진실로 감사를 드립니다.(평화경 365, 7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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