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 문선명 한학자 총재

5절 흥남감옥 해방과 식구 수습

작성일 작성자 하동

 

5절 흥남감옥 해방과 식구 수습

 

6․25전쟁과 흥남감옥 해방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유엔 평화군이 결성되어 세계연합군이 참전한 첫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장이었으며, 아벨형 인생관을 집약한 신본주의의 유심사상과 가인형 인생관을 집약한 무신론의 유물사상이 대립한 전쟁이었다. 참아버님께서는 유엔군의 폭격으로 전쟁 발발 112일 만인 10월 14일 흥남감옥에서 해방되셨다. 유엔 16개국이 참전한 6․25전쟁은 섭리로 보면 하나님께서 재림메시아를 구출하시기 위한 성전(聖戰)이었다. (p. 758)

 

1 한국동란은 세계 16개국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 승리를 주장하고 표방했던 전쟁입니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가는 인류역사상에 처음 있었던 일입니다. 한 나라의 내란과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역사 가운데 이와 같은 전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버님과 연결되면 하늘의 메시아정신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쟁역사를 밝힘으로써 전 세계가 받을 영향이 얼마나 크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메시아가 태어난 곳이 조국이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조국이 되는 한국을 보호하고 조국광복을 위해서 한국동란에 여러 나라를 동원하였던 것입니다. (119-218, 1982.09.13) p. 759

 

2 아버님이 흥남감옥에 있을 때 6․25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공산당은 감옥에 잇는 모든 죄수들을 삼팔선, 최일선에 내세워서 죽일 계획을 했습니다. 사태가 점점 급박해지니까 거기에 있는 모든 죄수들 가운데서 형기가 긴 사람들은 더 먼 데로 후퇴시키고 나머지 3분의 2가량은 일선에 내보내려고 했습니다. 인해전술을 쓰기 위해서 좋든 나쁘든 전부 끌고 나간 것입니다.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전부 쏴 버린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때 800여 면을 흥남에서 정평까지 끌고 갔습니다. 원래 흥남에서 원산까지 기차가 다녔는데 그 때는 유엔군의 폭격으로 철로가 끊어져서 120리가량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70여 명밖에 안 남기고 전부 데려간 것입니다. 그때 아버님도 끌려갔는데 저녁 8시에 출발하여 밤새껏 걸어서 새벽쯤에 80리가량 갔습니다. 낮에는 폭격 때문에 걷지를 못했습니다. 기차도 역시 밤 시간을 이용해야 되기 때문에 새벽 4시 전에 도착하게끔 한 것입니다. 하루에 못 가니 이틀에 갈 계획으로 첫날밤에는 밤새껏 걸어서 새벽에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중앙에서 우리를 태우러 내려오던 기차가 중간에 사고가 생겨서 할 수 없이 며칠 거기에 정차해 놓고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그대로 있으면 상당히 지장이 큽니다. 이 죄수들을 데리고 가다가 만일 사건이라도 나면 문제가 벌어지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수들은 불과 몇 명밖에 안 되고 죄수들은 많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까 봐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되돌아와서 또 사흘 만에 그 800여 명의 죄수들을 데려갔는데 그때에는 내가 남아 있다가 감옥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154-137, 1964.06.12)

 

3 흥남감옥에서 석방되어 나올 때에 내 뒤에는 네 사람이 따라 나왔습니다. ‘선생님이 가시는 데를 가겠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아내고 자식이 할 것 없이 전부 버리고 나를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 문씨 성을 가진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문씨 중에 가인이 하나 생긴 셈입니다. 자기들 고향에 안 가겠다고 해서 나올 때에 네 사람이 평양에까지 따라 나왔는데, 문씨는 어디에 연락하러 갔다가 우리가 이남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가인으로서 이북에 남았고 나는 아벨로서 이남으로 나온 것입니다. 내가 이북에 가게 되었을 때 그가 죽지 않았으면 찾아올 것입니다. 만일 죽었으면 내가 그 무덤을 찾아가서 비석을 하나 세워 줘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너의 정성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남한과 북한이 앞으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서는 기도를 안 하지만 그를 위해서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060-237, 1972.08.17) p. 760

 

4 흥남감옥에서 나올 때 감옥에서 내 뒤를 따라 나온 사람 중에 문씨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함흥에 있는 함경남도 도청에서 과장을 하던 사람인데 이름이 문정빈입니다. 부하가 잘못해서 걸려든 것입니다. 나와 한 감방에 있었는데 영계의 가르침을 받고 아버님과 인연된 사람입니다. 흥남에서 평양으로 나올 때 내 뒤를 따라 나왔습니다. 그에게는 부인이 있고 아들딸이 있었습니다. 내가 감옥에서 나와 그 집에 들러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그 사람이 따라온 것입니다. 이제 평양에서 남쪽을 나오려고 하는 때입니다. 김원필 어머니가 교회 식구였는데 그 어머니가 순안에 장사하러 가고 없었습니다. 며칠 후면 떠나야 할 텐데 안 돌아와서 할 수 없이 김원필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문정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걸어가더라도 하루 이틀이면 돌아왔을 거리인데 안 돌아왔습니다. 사태는 점점 불리해져서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되겠기에 안 되겠다 싶어 할 수 없이 먼저 길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고 따라온 그 문씨라는 사람은 못 나왔습니다. 김원필 어머니를 데리고 오려다가 남쪽으로 못 나온 것입니다. (130-325, 1984.02.13)

 

5 내가 감옥에서 나와 평양으로 갈 때에 따라 나온 사람이 많았습니다. 자기 고향으로 가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야 될 텐데 안 돌아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죄다 돌려보내고 네 사람만 데리고 왔습니다. 평양에 와서는 자기 고향에 다녀 오라고 전부 보냈습니다. 아무 날 몇시까지 오라고 했는데, 잠깐 날짜를 놓침으로써 후퇴하는 바람에 전부 따라 나오지 못했습니다. 언제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날 것입니다. 하늘을 위해서 충성하고 하늘을 위해서 정성들이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하늘은 아버님을 사랑합니다. 세상의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외로울 때 하늘이 그렇게 협조해 준 사실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비일비재한 그러한 과거를 회상해 볼 때 그 은덕을 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158-054, 1967.02.14) p. 761

 

6 내가 흥남감옥에서만 2년 5개월 동안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나올 때 노동하면서 입던 옷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옷 중에서 작업복, 러닝셔츠, 팬티, 이런 것은 전부 면으로 된 것입니다. 황산암모늄 비료공장에서 일했기 때문에 면에 그것이 묻게 되면 면이 녹게 됩니다. 면은 산에 약하기 때문에 잡아당기면 전부 찢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래 입다 보니 구멍이 뚫리고 삭고 해서 입으면 거지 중에 상거지가 됩니다. 냄새가 나고 형편없습니다. 옷을 비비면 가루가 돼 버립니다. 그것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에 역사적인 재산으로 보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버릴 수 없으니 전부 이불 속에 빽빽이 집어넣습니다. 이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게 될 때에는 그것을 펴 놓고 잠을 잤습니다. 이불솜을 빼내고 2년 반 동안 입었던 누더기 보따리를 대신 집어넣은 것입니다. 감옥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올 재산이라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흥남에서부터 평양에까지 10일간 그것을 지고 왔습니다. 다른 세간을 다 집어던지면서 그것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나올 때 그것을 어떤 식구한테 맡기면서 ‘비단 저고리 치마나 양단 이불은 다 버리더라도 이것만은 틀림없이 나에게 가져다줘야 돼요.’라고 했는데, 그것을 먼저 버리고 자기네들 것만 챙겨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만약 그 재료가 지금 있었으면 내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재료입니다. (083-260, 1976.02.08)

 

7 내가 흥남감옥에서 나오면서 그동안 입고 있었던 그 누더기들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것을 팔아 봤자 한푼도 안 됩니다. 엿장수한테 주어도 엿 반 가락도 안 주는 것입니다. 3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면서 명주바지 저고리는 남에게 주어 버리고 그 수의만 입고 살았습니다. 만지면 문적 문적 솜과 같이 풀려 나가는 그 누더기가 무엇 때문에 필요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10년, 1세기, 혹은 수십 세기가 지난 후에는 억천만금을 주고도 사지 못할 보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쓰던 젓가락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설사 영국을 준다해도 못 살 것이고, 미국을 준다고 해도 못 살 것입니다. 이런 말을 오늘날 젊은이들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천금만금 보다도 더 귀하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면서까지 그것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026-020, 1969.10.14) p. 762

 

평양에서 40일간 제자 수습

흥남감옥을 나오신 참아버님께서는 10일 만에 평양에 도착하셔서 많은 사람들이 피란길을 떠나는 상황에서도 40일 동안 흩어진 제자들을 일일이 찾으셨다. 고향 정주가 먼 거리가 아님에도 부모형제를 만나러 가지 않으신 것은 아벨보다 가인을 먼저 사랑해야 된다는 탕감복귀의 길을 가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원필․박정화씨를 데리고 남하의 길에 올라 비로소 새 출발을 하셨다.

 

8 생각만 해도 아주 몸서리쳐지는 평양인데 흥남감옥에서 나와 평양을 찾아들어 갔습니다. 거기에 식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람 같으면 응당 자기 고향을 찾아갈 것입니다. 내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 나를 생각해 준 몇몇 식구가 남아 있는 것을 알았고, 또 내가 이런 생활을 하게 된 것은 하늘이 동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 평양에 있을 때 관계되었던 식구들을 전부 찾아본 것입니다. 반대하던 사람, 떨어져 나간 사람까지 찾아본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내가 감옥에 들어갔기에 떨어진 것이지 내가 있을 때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나를 믿는다고 맹세했던 사람들입니다. 나한테 떨어진다고 보고를 안 했고 통고도 안 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스승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배반하더라도 하늘 앞에 믿겠다고 맹세하고 약속했던 기준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그들이 박대할 때에는 하늘도 역시 포기하겠지만, 하늘이 아직까지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이상 그전까지는 스승으로서 맹세한 책임을 져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흩어진 모든 식구들을 찾았던 것입니다. 내가 직접 못 가면 김원필을 시켜서 만나다 보니 고향에 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일주일을 헤매도 못 찾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158-054, 1967.02.14)

 

9 아버님이 흥남감옥에서 나올 때 따라 나온 사람은 네 사람입니다. 예수은 홀로 갔습니다. 그렇지만 아버님은 감옥에서 나올 때 네 사람이 같이 나왔습니다. 함경남도에서부터 평안남도까지 제일 어려운 산악지대를 걸어 나온 것입니다. 동해안을 중심삼고 금강산․설악산의 태백산맥, 강원도․함경도․평안도의 삼각지대를 넘어온 것입니다. 그때 북한 인민군이 태백산맥을 통해서 도망갔습니다. 군대가 우글우글하던 소굴을 거쳐 나온 것입니다. 자기들은 도망가는데 우리는 이남으로 내려오니 문제가 되었습니다. 돌아가려면 나흘 닷새를 잃어버려야 되기 때문입니다. 데리고 갔던 죄수들을 쏴 버리고 도망가는 판입니다. 그런 위험지대를 거쳐 올 때에도 ‘감옥에 있다가 나오는 살마에게는 다 위험지대지 못 갈 데가 어디 있느냐?’라면서 일부러 그런 데를 찾아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평양에 왔습니다. 피란민 생활을 하면서 평양에서 전도할 때 모였던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내가 감옥 갈 때 눈물짓던 사람들을 잊지 않고 찾겠다고 해서 찾은 것입니다. 중공군이 평양에 입성한다는 보도를 들은 판국이었지만 만나 보지 못한 한 할머니를 찾으러 갔습니다. 그 할머니가 죽은 것을 알고 난 후에 피란을 나온 것입니다. (520-186, 2006.03.13) p. 763

 

10 북한에서 공산당이 모든 종교단체를 핍박하고 없애려고 했는데 제일 나중에까지 남은 단체가 우리였습니다. 그때는 통일교회라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아버님이 가르치는 하나의 집단이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와서 해야 될 것은 교회 일을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평양에 있는 옛날 식구들을 만나 봤습니다. 아버님이 3년 가까이 감옥에 있었고 공산당이 핍박을 하니 드러 내 놓고 종교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못 됐습니다. 그래서 점점 지하로 들어갔기 때문에 감옥에서 나와서도 그런 일을 전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이남으로 내려오기 전에 옛날에 인연되었던 모든 식구들을 다 만난 것입니다. 감옥에 들어갈 때 그들이 눈물 흘리고 슬퍼하던 것이 생생합니다. 내가 쇠고랑을 차고 5년형을 선고받고 5년 동안 잘 있다가 만나자고 할 때 눈물 흘리던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생생합니다. 감옥에서 나와 뜻 가운데 맺어진 식구들을 다시 규합하기 위해 늙은 사람으로부터 젊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생각나는 모든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170-015, 1987.11.01)

 

11 내가 흥남감옥에서 평양으로 나온 후에 세 번씩이나 사람을 보내 찾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한 번 가니 문전에서 배반하고 두 번 가니 문전에 배반하고 세 번 갔는데도 문전에서 배반하였습니다. 나로서는 하나님이 돌아서라는 지시가 있을 때까지 최고의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버릴 수 없습니다. 남들은 전부 이남으로 피란을 가는데 12월 2일 저녁때까지 사람을 시켜서 연락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내가 할 책임을 다했습니다. 천하의 어디를 가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심정의 이념을 들고 나와 심정에 받은 상처, 내 가슴속에 심어졌던 모든 상처를 뽑고 새로운 심정을 하나님 앞에 연결시킬 수 있다는 자신을 찾고 나서 비로소 거기를 떠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밤에 평양을 떠난 것입니다. 지도자는 이렇게 신중하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지사판에서도 하나님이 맡겨 준 책임분야를 끝맺고 가지 않으면 그 사람이 가는 길이 막혀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에 인연되었던 사람에 대해 끝을 맺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늘땅 앞에 금세나 내세에 있어서 그들의 조상이 동정하고 후손이 동정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런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170-015, 1987.11.01) p. 764

 

12 나는 8남매의 형제를 다 버린 사람입니다. 이북에서 감옥생활을 할 때 앞으로의 정세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상했던 사람입니다. 평양에 가서 40일 동안 있었는데 거기에서 280리만 가면 내 고향입니다. 이틀이면 고향에 갔다 올 수도 있었지만 고향에 있는 부모형제들을 찾아가지 않고 뜻을 대했던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했던 사람들을 만나러 다닌 것입니다. 고향에 있는 부모와 친척을 돌보지 않고 식구 한 사람을 위해 생명을 걸고 찾아다녔습니다. (038-325, 1971.01.08)

 

13 내가 평양에 가 있을 때 이틀만 걸어가면 형님을 모셔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형님 이상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워 놓지 않고는 모셔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탕감복귀입니다. 아벨이 되기 위해서는 가인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다음 참부모를 모시기 위해서는 먼저 사탄세계의 부모를 모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런 역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할머니들을 모시고 나왔습니다. 원칙이 그렇습니다. 할머니들을 삼위기대로 묶고, 모자협조를 할 수 있는 사탄세계의 세 아들딸을 세워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원칙대로 그렇게 해야 됩니다. (029-226, 1970.02) p. 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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