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다해] 5월 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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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다해] 5월 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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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아침기도

5월 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저녁기도

5월 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끝기도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

1515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로마에 가서 젊은이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을 연마했으며 병들고 가난한 이를 돌보는 형제단을 구성했다. 1551년 사제가 되어 오라토리오회를 창설했는데 거기에서 하는 일은 영적 독서, 노래, 자선 사업들이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복음적 단순성, 하느님을 기쁘게 섬기는 데에 뛰어났다. 1595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171,1-3. 5: PL 38,933-935)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사도 바울로는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하지 세상을 두고 기뻐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성서가 말해 주는 대로 "누구든지 이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 은 하느님의 원수가 됩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세상과 주님 안에서 함께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승리를 거두어 세상을 누리는 기쁨이 날로 증가하고 세상을 두고 누리는 기쁨은 날로 감소하여 사라지도록 하십시오. 이 말은 우리가 세사에 있는 동안 기뻐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세상에 있는 동안이라도 이미 주님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렇게 말할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기뻐한다면 내가 있는 곳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다면 여러분이 세상에 있다고 해서 주님 안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까?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사도 바울로가 아테네인들에게 하는 설교에서 우리 주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대해 하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어디에나 계시는 분께서 계시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로가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할 때 바로 이것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늘 위에 드높이 오르시면서도 동시에 지상에서 살고 있는 이들과 가까이 계시는 분이 참으로 무한한 분이십니다. 멀고도 가까이 계시는 이분이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와 가까워지신 그분이 아니라면 누구이겠습니까?


전인류는 강도를 만나 반쯤 죽어 길바닥에 누워 있는데 사제와 레위는 못 본 체 지나가 버리고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이 부축하여 간호해 주고 돌보아 주었던 바로 그 사람과 같습니다. 불사 불멸이시고 의로우신 분께서는 죄인이고 죽어야 할 우리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셨지만, 멀리 떨어져 계신 그분은 우리의 이웃이 되시고자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악대로 갚지도 않으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증명합니까? 외아드님께서는 외아들로 홀로 남아 계시지 않도록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홀로 죽으신 그분은 홀로 계시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은 하느님의 많은 자녀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피로써 형제들을 사들이시고, 당신께서 단죄받으심으로 단죄받은 이들을 구하시고, 팔려 가심으로 그들을 속량하시고, 모욕당하심으로 그들에게 영광을 가져다 주셨으며, 죽으심으로 그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형제들이여, 세상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죄 안에서 기뻐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허영의 꽃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영원의 희망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디 있든 얼마나 오래 살든 간에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2. 성 필립보 네리 ① '엄친아' 필립보
쾌활하고 신심 깊었던 피렌체 유명인사
- ‘성 필립보 네리에게 나타난 성모 마리아’(지오반니 티에폴로 작). 필립보 성인은 어린 시절 도미니코회 수도자들로부터 교육 받으며 신심의 깊이도 갈수록 심오해졌다.
“따라 하기 힘들어요.”
비안네 성인을 불편해 하는 사제들이 많다. ‘너무’사제답기 때문이다. 하루 10시간 이상의 고해성사 집전, 철저한 강론 준비, 시간날 때마다 기도를 바치는 그 신앙 열성을 따라 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필립보 네리 성인에게 눈을 돌려 보면 어떨까. 비안네가 가난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한 근엄한 사제라면, 필립보 네리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한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괴테(1749~1832)는 필립보 네리에게 “유머 감각 풍부한 성인”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쾌활한 성격의 필립보 네리는 깊은 영성을 늘 재기 넘치는 연설로 표현했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런 필립보 네리를 “매력 넘치는 인품을 지닌, 사람을 저절로 끌어들이는 능력을 가진 성인 신부님”이라고 불렀다. 교회는 그래서 필립보 네리를 ‘교회 역사상 가장 명랑한 성인’이라고 기억한다.
위대한 인물은 반드시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난다? 큰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지독한 편견이다.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가정환경에서 태어났음에도 인류 역사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 이들은 얼마든지 있다.
성 필립보 네리가 그렇다. 필립보는 1515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중산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증인이었으며, 어머니는 건축업자의 딸이었다. 귀족 가문이었던 아버지는 집안으로부터 물려받은 땅도 있었다. 그래서 필립보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생계에 큰 어려움을 모르고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필립보가 5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이후 아버지는 재혼을 했는데, 필립보는 이 새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새어머니는 사랑이 넘치고 쾌활한 성격이었다. 새어머니는 필립보를 친자녀처럼 정성을 다해 키웠다.
그 결과, 필립보는 어린 시절부터 피렌체 사교계에서 ‘착한 아이’라는 평이 자자했다. 착하고 활달했던 성격의 필립보에겐 당연히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들 앞에서 필립보는 늘 골목대장이었으며, 항상 목소리를 높여 ‘까르르’ 웃었다. 신심도 뛰어났다. 8살도 채 되지 않은 이 소년은 거의 매일 침실 창문턱에 기대서서 명상에 잠기곤 했다. 특히 시편을 자주 암송했다.
이런 필립보를 두고 주위 사람들은 모두 “내 아이가 필립보처럼 착하고 공부 잘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필립보는 소위 피렌체판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였던 셈이다.
비안네 성인이 라틴어 공부 때문에 고민했지만, 필립보는 정반대였다. 라틴어에 능통했다. 그리고 라틴어로 된 수많은 책을 읽으며 지적 능력을 높여나갔다. 특히 그가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책 중에는 영적 독서 이 외에도 우화집이 많았다. 그는 우화집에 나온 익살스런 이야기와 농담을 어른이 된 후에도 자주 인용하곤 했다. 필립보는 천성적으로 ‘신명’이 있는 사람,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적절한 유머 한마디가 사람들을 매료시킨다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필립보는 당시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도회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특히 도미니코회 수도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는데, 성장한 후 “선(善)에 대한 대부분의 인식은 도미니코회 수도자들로부터 물려받았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라틴어 실력도 더욱 늘었으며, 신심의 깊이도 갈수록 심오해졌다. 필립보는 어느덧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 놓치기 아까워하는 인재로 성장했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용모, 그리고 깊은 신심에 풍부한 유머감각까지. 사제가 되기에 나무랄 데 없는 청년이었다. 그런데 필립보는 전혀 뜻밖의 선택을 한다.
어느 날 친척 아저씨가 편지를 보내왔다. 아들이 없었던 그 아저씨는 자신의 사업을 물려줄 후계자가 필요하다며 필립보를 양자로 삼겠다고 했다. 자신의 곁에 있으면 사업을 가르치고,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필립보는 그 제안에 흔쾌히 응한다.
필립보를 가르치며 우정을 쌓아왔던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들은 의아해한다.
“라틴어도 잘하고 시편을 즐겨 읽고 신심도 깊은 네가 장사꾼이 된다고?” 필립보는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정중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가족들과도 마지막 만찬을 하며 이별을 했다. 여동생이 과자를 직접 만들어 선물했다. “오빠는 절대로 우리를 잊지 않겠지? 우리 또 만날 수 있겠지?” “그래. 난 너를 절대로 잊지 않을게. 우리 또다시 만날 수 있어. 약속할게.”
하지만 필립보는 이후 여동생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한다. 피렌체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찬을 마친 그 이튿날 아침, 필립보는 부모와 작별한 뒤 집을 나섰다. 1532년 가을 어느 날, 필립보는 그렇게 돈을 벌기 위해 피렌체를 떠났다.
성 필립보 네리가 남긴 말
- 안심하여라. 머지않아서 네 자신을 완전히 바로잡을 것이다.
-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은 축복받은 자들이다. 인생이 그대들에게 미소짓고 있으며, 황홀한 미래가 여러분 앞에 펼쳐져 있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축복받은 것은 앞으로 선행을 행할 시간이 충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 기쁘게 지내라, 그러나 죄를 짓지 말라.
[가톨릭신문, 2009년 8월 16일, 우광호 기자]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2. 성 필립보 네리 ② 영성적 삶 위한 결단
돈 · 지식 대신 가난한 이 돕는 삶 선택
- 성 필립보 네리를 표현한 성화 (스테파노 볼로니니 작). 어린 나이에 출가해 사업가의 꿈을 키웠던 성인은 베네딕도 수도자들의 가난한 삶을 접하며 평생동안 보장된 부유한 삶을 포기하고 로마에서의 기도생활을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는 삶을 택했다.

베네딕도회 수도자 가난한 삶 보며 사업가 꿈 접어
선행 실천하기위해 출세 보장된 학업적 성취 포기
사료마다 전하는 내용이 달라서 정확한 사실 관계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필립보 네리를 양자로 삼고 사업체를 물려주겠다고 한 인물을 두고 어떤 자료에서는 큰아버지로, 또 다른 자료에서는 먼 친척뻘되는 아저씨로 소개하고 있다. 로마 교황청 홈페이지를 비롯해 필립보 네리와 관련한 모든 자료를 뒤져 봤지만 역시 정확한 언급이 없었다. ‘로물로’라는 이름만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할 수 없이 여기서는 그냥 ‘로물로 아저씨’로 부르기로 한다.
로물로 아저씨는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이 바라보이는 마을에 살고 있었다.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은 수도생활의 아버지 베네딕토 성인이 교회 최초로 수도원 제도를 정착시킨 곳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몬테카시노는 오래전부터 신앙의 땅이었다.
청빈의 상징인 수도원의 원조가 자리 잡고 있는 땅에, 필립보 네리가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은 재벌 2세로 살았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실제로 로물로 아저씨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부자였다. 엄청난 규모의 집, 서민들은 평생 동안 구경도 하지 못하는 아름다운 가구들, 넓고 비옥한 토지, 짐수레를 끄는 네 마리의 말과 두 마리의 승마용 말…. 로물로 아저씨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 필립보 네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넌 앞으로 내 아들이다. 이 모든 것이 네 것이다.”
그런데 필립보 네리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돈보다도 소중한 그 무엇이 있을 듯했다. 그래서 필립보 네리는 마을 인근에 있는 몬테카시노 수도원(베네딕토회)을 자주 방문했다. 자연히 베네딕토회 수사들과의 교류가 많아졌다. 여기서 그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가난의 삶(특히 에우세비오 데볼리 수사 신부의 삶)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도 시작됐다. 이후 필립보 네리는 성경의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묵상했다고 한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필립보 네리는 이 말씀을 실천에 옮긴다. 평생 동안 보장된 부유한 삶을 포기한 것이다. “아저씨, 저 떠나겠어요.” 로물로 아저씨의 실망은 컸다. 그리고 적극 만류했다.
하지만 필립보 네리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로 훌쩍 떠났다. 필립보 네리는 로마에서 영성적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진정한 영성적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겠다고 결심했다.
로마에서의 삶은 한동안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단 로물로 아저씨가 억지로 주머니에 넣어준 여비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게다가 필립보 네리는 귀족 가문인데다 피렌체 출신이었다. 당시 로마의 정치 경제는 피렌체 출신들이 대부분 장악하고 있었다. 교황도 피렌체 출신이었다. 메디치 가문 등 당시 로마 권력의 상수 관계까지 언급하면 말이 길어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아무튼 피렌체 출신의 필립보 네리는 로마에서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실제로 몇몇 지인들의 도움으로 생계에 대한 별다른 걱정 없이 학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가난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은인들의 자녀들을 가르쳤지만 숙식제공 이 외의 어떤 대가도 받지 않았다. 하루에 먹는 음식도 빵 한 덩이와 올리브 한 종지, 물 한 사발뿐이었다고 한다. 달리 더 먹는 것이 있다면 치즈 몇 조각이 전부였다.
어쩔 수 없이 가난하게 사는 것과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는 것은 다르다. 필립보 네리는 원했다면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것이다. 그 목적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었다. 그는 많은 밤들을 새우며 기도에 매달렸고, 낮 시간에도 8시간 이상씩 로마 시내 성당을 순례하며 기도를 바쳤다. 기도에 매달리는 그에 대한 소문이 고향에 전해지자 가족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한 행적이 내게는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아요. 소년 시절부터 필립보는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이처럼 하루 10시간 이상의 기도 생활 속에서도 그는 학문적으로 상당한 경지에 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로마 사피엔자 대학의 최고학부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아우구스티노 회원들과 함께 신학 공부에도 열중했다. 당시 유명했던 철학자 알렉산드로 부르지오는 그런 필립보 네리를 두고 “재능이 참으로 뛰어난 사람”이라고 불렀다. 모두들 필립보 네리가 “뛰어난 신학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필립보 네리는 여기서 또 한 번 중대한 결심을 한다. 공부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쉽지 않은 결단이다. 오늘날에 비유하면, 결정된 박사학위 논문을 찢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연히 주위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그를 만류했다.
“넌 조금만 공부를 더하면 훌륭한 신학자 혹은 철학자가 될 수 있어.”
하지만 필립보 네리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여기서 당장 선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다리고 있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필립보 네리는 돈이 많을 때는 돈을 버렸고, 학문적 성취가 눈앞에 보일 때는 그마저 포기했다.
돈과 지식에 대한 욕심을 모두 떨쳐 버린 필립보 네리가 선택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헌신이었다. 반드시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소외된 이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필립보 네리는 자신이 공부하던 책을 모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부유했던 시절(1막), 공부와 기도에 매달렸던 시절(2막)에 이어 필립보 네리의 인생 3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가톨릭신문, 2009년 8월 23일, 우광호 기자]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2. 성 필립보 네리 ③ 애덕 실천으로 ‘가톨릭 교회’ 인식 바꿔
- 그림은 필립보 네리가 교황 클레멘스 8세를 치유하는 모습.
교황 바오로 3세와 ‘교회 바로 세우기’ 나서
정기적으로 40시간 성체조배 이후 선행 실천
가난한 이들 돕는 단체 설립…36세에 사제품

순조롭게 항해하던 배가 태풍을 만났다. 세상이 요동치고 있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우왕좌왕했다.
필립보 네리가 살던 시대는 그야말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의 시대였다. 교회의 중심, 로마는 더더욱 그랬다. 여기서 잠깐, 필립보가 처한 당시 시대상황에 대해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 필립보의 행동과 처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갈등과 고민, 결단 배경 등을 알기 위해선 당시 정치 및 국제 정세를 알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 프랑스의 장 칼뱅, 스위스의 쯔빙글리, 영국의 헨리 8세 국왕…. 당시 유럽은 종교 분열의 시대였다. ‘유럽=가톨릭 교회’라는 등식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됐다. 수많은 이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저버리기 시작했다. 15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가톨릭교회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절대적 권위는 무너졌으며, 너도나도 교회를 이탈해 나갔다. 가톨릭교회는 위기감을 느낀다. 아니, 큰 충격을 받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하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가톨릭교회는 쇄신과 개혁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개혁 움직임은 마르틴 루터의 분열 훨씬 이전부터 있었지만, 교회의 1500년 완고함으로 인해 그 빛을 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개혁을 늦출 수 없었다. 분열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그리스도의 정통적 가르침마저 소멸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중심에 교황 바오로 3세가 있었다. 1534년 교황직에 오른 바오로 3세 교황은 이단에 대처하고, 각 나라 왕들 간의 분쟁을 조정하고, 이슬람 세력의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 엄청난 땀을 흘렸다. 무엇보다도 트렌트 공의회를 개최, ‘교회 바로 세우기’에 적극 나섰다.
바오로 3세 교황은 훌륭한 선장이었다. 큰 배는 급작스런 방향 전환을 시도할 경우, 전복될 수 있다. 바오로 3세 교황은 커다랗게 곡선을 그리며 배를 안전하게 선회시킨다. 이럴 경우 배의 속도를 줄일 필요도 없다. 편안하고 무리 없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험난한 항해는 훌륭한 선장만 있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배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예상치 못했던 산호초 혹은 암초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선 능숙한 선원이 필요하다. 당시 로마에 살았던 필립보는 훌륭한 선장을 도와서 배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없어서는 안 되는 최고의 선원이었다. 당시 교회가 험난한 시기를 뚫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필립보와 같은 능숙한 선원들 역할이 컸다.
- 트렌트 공의회의 제1차 회기(1545-1549) 모습을 담은 그림.
필립보의 활동은 로마 거리나 교회에서 그리스도교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그는 특히 애덕 실천에 열심이었다. 그는 가정이나 병원, 노숙인 수용소 등을 찾아가 병자들을 돌보았다. 또 모금운동도 전개했다.
필립보는 이때 몇몇 사람들의 힘만으로는 수많은 가난한 이들의 신앙을 도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만든 단체가 ‘가장 거룩한 삼위일체회’다. 필립보는 회원들에게 “기도생활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순례자들과 환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가장 거룩한 삼위일체회’의 기도생활은 주로 성체 신심이 중심이었다. 정기적으로 40시간의 성시간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기도 후에는 반드시 소외된 이웃을 찾아 나섰다.
이러한 필립보의 노력은 서서히 결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환멸을 느끼고 떠나려 했던 사람도 필립보를 보며,‘가톨릭교회에도 역시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필립보는 “가톨릭교회에는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역시 하느님은 가톨릭교회에 계신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필립보는 당시 교회에 있어서 보배와 같은 존재였다.
필립보 네리는 개혁을 말로만 외치지 않았다. 직접 생활과 실천을 통해 교회를 개혁했다. 40시간의 성체조배가 끝나면 필립보는 작은 종을 울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기도 시간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선행을 베풀어야 할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필립보는 이렇게 17년을 로마에서 살았다. 이제 로마 사람이라면 필립보의 뛰어난 영성과 사랑 실천을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사제가 아니었다. 필립보의 나이는 벌써 36세 였다.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 필립보의 영적 지도 신부였던 페르시아노 로사 신부가 어느 날 필립보를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사제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가 되면 더욱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학업, 영성, 인품 등 이미 사제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갖췄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사제 서품을 받읍시다.”
필립보는 처음에는 겸손히 사양했지만 결국 주위 사람들의 권고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필립보는 1555년 5월 23일 파리오네에 있는 성 토마스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부자 청년’이 사제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늦깎이 필립보 네리 신부의 사제생활은 매우 특이했다.
[가톨릭신문, 2009년 8월 30일, 우광호 기자]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2. 성 필립보 네리 ④ 끈질긴 고해성사로 ‘회개의 행복’ 선사
- 한 사제가 고해성사를 마친 신자를 축복하고 있다.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고해성사에 열중
직위고하 막론하고 모든 이를 평등하게 대해
사제가 된 기쁨? 글쎄….
필립보 네리에게 그런 흥분이 있었다는 기록은 그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사제가 되길 간절히 원하지 않았다. 하느님 안에서 기도하며 열심히 살다보니, 사제의 길로 저절로 들어선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하고 묵묵히 따랐을 뿐이다.
사제가 된 필립보는 사제로서 충실하게 살았다. 평상시처럼 기도하고, 봉사하고, 희생했다. 그는 평신도일 때는 평신도로서 충실했고, 사제가 된 이후에는 사제로서 충실했다.
특히 고해성사 직무에 충실했다. 필립보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성당 앞에 가서 서성거렸다. 신자들이 성당에 찾아왔을 때 언제든지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단 한 명의 신자라도 성당에 왔다가 고해 사제가 없어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고귀한 한 명의 영혼이 회개할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필립보는 이처럼 단 한 명의 영혼의 회개를 위해서 발을 동동거렸다. 고해성사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중요한 일도 중단했다. 그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고해성사를 잘 받는 것이야말로, 모든 영적 쇄신의 기초가 됩니다.”
필립보의 뛰어난 영성과 성덕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은 필립보를 통한 고해성사에서 특별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다. 끊임없이 똑같은 죄를 되풀이하는 한 청년이 죄를 고백하기 위해 왔다. 필립보가 말했다.
“당신은 회개하고 죄의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제 성체를 받아 모시십시오. 이후에 또 똑같은 죄를 짓는다면 다시 나에게 오십시오. 그리고 반드시, 하느님의 선하심을 믿으십시오.”
청년은 얼마 후 같은 죄를 고백하러 또다시 찾아왔다. 이후에도 한 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결국 청년을 절망한 나머지 이렇게 말한다.
“신부님, 더 이상 죄를 고백할 용기조차 없습니다. 이젠 잘못을 바로잡을 희망조차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필립보는 의외로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당신은 완전히 죄악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필립보는 지치지 않고 그 청년에게 고해성사를 베풀고, 성체를 모시게 했다. 결국 그 청년은 완전히 자신의 악습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얼마 후 훌륭한 고해 신부로서의 그의 명성이 로마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고해소를 찾았으며, 역시 수많은 영혼이 회개의 행복을 맛보았다. 당연히 필립보는 이른 새벽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고해소에서 보내야 했다. 심지어 저녁 늦은 시간에 고해성사를 위해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휴식시간까지 아낌없이 내놓았다.
필립보의 영성과 성덕이 한층 깊이를 더하는 것이 이 시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필립보에게는 다양한 기적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미사를 집전하는 도중에 필립보의 몸이 공중에 떠오를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는 이런 현상들을 감추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다.
그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었다. 사람들이 혹시나 자신을 존경할까 걱정한 나머지, 스스로 어릿광대 옷을 입고 다닌 일도 많았다. 심지어 로마 시내 한복판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성덕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멀리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근엄한 목소리와 위엄 가득한 모습으로 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머집을 꺼내 유창하고 밝은 목소리로 읽어 주곤 했다. 또 사람들이 축복을 받기 위해 그의 옷자락을 만질 때면, 자신은 예수님이 아니라며 상대방의 귀나 머리카락을 익살스럽게 잡아당기기도 했다.
하지만 성덕은 감춘다고 감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짜내는 성덕은 남들 앞에 드러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지만, 찻잔에 물이 흘러넘치듯 하는 성덕은 가만히 있어도 대지를 적시게 된다. 필립보는 심지어 “거두어 주십시오. 하느님 거두어 주십시오. 당신의 은총의 물결을 멈추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정도였다.
필립보의 성덕은 특히 ‘나홀로 성덕’이 아니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고매한 인격 앞에 저절로 머리를 숙였다. 성 필립보 네리 전기를 쓴 카를로 가스바리는 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중압감을 느끼지 않도록 평신도들을 인도하고, 명령하기보다는 설득하고, 엄정하게 이치를 따지기보다는 애정으로 감싸고, 격려를 통해 상대방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교만을 스스로 벗어버리게 한다. 그리고 악을 피하고 영혼을 높은 경지로 끌어 오리는데 적합한 밝고 유쾌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필립보는 특히 사람들을 만날 때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는 찾아오는 이들을 모두 똑같이 대했다. 그가 노인, 서민, 신심이 깊지 않은 이들, 노동자, 직업을 가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갖는 관심은 추기경과 교황, 사제, 수도자, 청년들에게 갖는 그것과 동일했다.
자연히 필립보 주위에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와 기도 모임을 한번이라도 함께 가진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필립보 신부를 알게 된 그 날은 축복받은 날이었다”라고 말했다. 이른바 필립보 기도 모임이 세상에 서서히 알려지고 있었다.
성 필립보 네리가 남긴 말
- 거두어 주십시오. 하느님 거두어 주십시오. 당신의 은총의 물결을 멈추게 해 주십시오.
-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십자가를 절대로 피하려 들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 어느 것도 십자가보다 안전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 살아서 지옥에 내려가 보지 못한 사람은 죽은 후에 지옥에 가는 큰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 하느님 저의 머리 위에 당신의 손길을 뻗쳐 주십시오. 만일 당신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필립보는 그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톨릭신문, 2009년 9월 6일, 우광호 기자]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2. 성 필립보 네리 ⑤ 영적 성장 위해 ‘오라토리오회’ 창설
- 로마 키에사 누오바 내에 있는 필립보 네리 제단. 이곳에서 성직자들로 구성된 오라토리오회가 시작되었다.
동료 사제들과 영적 모임 '오라토리오회' 창설
성경 읽고 기도·공연·노래… 영적 성장 이뤄
이후 하이든 비발디 모차르트 의해 크게 발전

사제 필립보의 뛰어난 영성과 고해성사에 대한 열정은 이미 유럽 전역에 알려져 있었다. 그런 필립보를 로마인들은 ‘로마의 사도’로 불렀다. 수많은 이들이 주위에 몰려들었으며, 고해성사를 청했다. 그는 모든 이들을 두 팔로 받아들였다. 노인, 가난한 이, 청소년, 서민들도 늘 가까이 하며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뭔가 허전했다. 사제 직무를 수행하면서 큰 보람과 기쁨을 느꼈지만, 영적 진보에 대해서 뭔가 다른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작은 기도 모임을 만든다. 억지로 만들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찻잔 속의 물이 넘치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모임이 만들어졌다.
‘오라토리오회’는 이렇게 생겨났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오라토리오’(Oretorio)를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대규모 악곡으로 알고 있다. 이 오라토리오의 기원이 바로 필립보에 있다.
오라토리오라는 용어는 본래 수도원 혹은 신학교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경당을 의미했다. 그런데 필립보가 이 경당에서 동료 사제들과 영적 모임을 갖고 고해성사를 베풀었고, 모임 명칭도 자연스레 ‘오라토리오회’가 됐다. 이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이 모임을 공식 승인했고, 이후 오라토리오가 음악용어로 정착됐다. 오라토리오 모임에서 성경을 감동적으로 느끼기 위해 신비극을 공연하고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후 오라토리오는 하이든, 비발디, 모차르트에 의해 크게 발전한다.
어쨌든 필립보의 오라토리오회는 처음에는 작게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제들이 참여가 크게 늘기 시작한다. 오라토리오회는 엄격한 생활규율과 청빈을 요구하지 않았다. 별도의 서원도 필요 없었다. 재산 포기와 청빈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라토리오회는 그저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행복한 사제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줄 뿐이었다. 회원들은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를 하는 한편, 영성 서적과 성인전을 탐독했다. 그리고 묵상을 나눴다. 그 열매는 소외된 이웃을 위한 헌신, 복음 선포에 대한 열정, 신비 체험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났다. 사제가 쇄신되면서 교회도 쇄신되기 시작했다. 오라토리오회를 통해 로마는 쇄신되고 있었다.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하던 필립보에게 죽음이 찾아온다. 성인들의 생애를 조사하다 보면, 공통된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죽음 직전에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는 점이다. 영성가들은 이를 두고 영혼의 정화 과정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고통을 겪고 부활했듯이, 이 땅의 영혼이 천국문에 들기 위해선 연옥의 고통이 필수적인데, 성인들은 대부분 지상에서 그 고통을 먼저 받는다는 것이다. 연옥에서의 고통 없이 천국으로 바로 오르기 위한 과정이라고 한다. 필립보도 5년 동안 심한 병고에 시달렸다. 고통이 얼마나 심했든지, 실신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필립보는 고통 속에서 이렇게 외친다.
“예수님, 당신은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데, 저는 깨끗하고 안락한 침대에 누운채, 이렇게 친절한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간호를 받고 있습니다. 얼마나 염치없는 노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 외의 것을 원하는 참으로 해야 할 일을 모르는 자입니다.”
고통을 이겨내는 유일한 힘은 성체와 성모께 대한 의탁이었다. 필립보는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이것이 나의 약”이라고 했다. 필립보는 또한 병으로 고통받는 가운데서도 성모에 대한 남다른 신심을 보였다고 한다.
필립보 스스로 예언한 날이 다가왔다. 1595년 5월 26일 이었다. “나는 갑니다. 나는 갑니다.” 필립보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모두 축복을 했다. 그리고 입속으로 어떤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것이 끝이었다. 로마의 모든 이들이 필립보를 애도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성인께서 돌아가셨다. 위대한 성인께서 돌아가셨다.”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는 필립보 네리를 이냐시오 로욜라,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이시도로, 아빌라의 데레사 등과 함께 성인품에 올렸다. 필립보 네리의 축일은 성인의 선종일인 5월 26일이다.
젊은이들을 위한 성 필립보 네리의 충고
- 육신을 돌보는데 지나치게 마음을 쓰지 마라. 교만을 미워하라. 자주 기도하라.
- 선을 행할 시간이 주어졌으니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은 행복하다.
- 기쁨의 정신은 그리스도인의 완성에 이르게 하지만 우울한 정신은 그렇지 못하다.
- 인색한 사람은 덕성에 있어 결코 진보할 수 없다.
- 하느님을 등지는 사람은 아주 쉽게 육욕에 빠진다.
- 자기를 내세우지 마라.
- 지나치게 신심에 빠져들려 하지 마라. 조금씩 시작하여, 꾸준하라.
- 마치 페스트를 경계하듯이, 거짓말하는 것을 경계하라.
- 유혹을 받게 되면 곧바로 주님께 매달려라.
- 게으름을 경계하라. 게으름은 악습의 온상이다.
- 사람들이 너에게 거두어간 영광은 하느님께서 반드시 되돌려 주신다.
(출처 : 필립보 네리, 성 바오로, 1994)
[가톨릭신문, 2009년 9월 13일, 우광호 기자]

 

 

[금주의 성인] 성 필립보 네리(St. Filippo de Neri, 5월 26일)
1515~1595.이탈리아 피렌체 출생, 사제, 로마의 수호성인.
필립보 네리는 자신 앞에 놓인 부와 명예를 버리고 가난과 봉사의 삶을 선택한 성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쾌활하고 밝은 성격이던 성인은 누구에게나 인기가 좋았습니다. 유머감각도 뛰어나 가톨릭교회 성인 가운데 가장 재치 넘치고 유머스러운 성인으로 손꼽히기도 합니다.
성인은 10대 때 부잣집 친척의 양자로 입양됩니다. 평생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지낼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로마로 건너와 신학과 철학 공부를 시작합니다.
성인의 생활은 기도와 묵상, 공부가 전부였습니다. 어느 날 성인은 공부조차도 기도와 묵상에 방해되는 것 같아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은수자처럼 살아갑니다.
성인은 어느 날 밤, 기도 중에 밝은 빛이 자신의 온몸을 가득 채우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 빛은 성령의 빛이 아니었을까요.
성인은 이후 은수자 생활을 접고 세상으로 나와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돕는데 앞장섭니다. 그리고 대중들을 향해 하느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37살이라는 뒤늦은 나이에 사제품을 받고 특히 고해성사에 주력하며 신자들을 돌봤습니다.
성인은 작은 방(오라토리오, Oratorio)에 모여 기도와 묵상, 영적 나눔을 갖는 오라토리오회를 설립했고 또 40시간 동안 기도와 묵상만 하는 '40시간 신심' 운동을 전파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가톨릭교회 중심이라 불리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나태해진 신앙과 교회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활동하면서부터 다시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성인은 선종하기 전 8년간 투병생활을 하며 고통스런 날을 보냈지만 모든 것을 참고 이겨냈습니다. 성인은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평화신문, 2010년 5월 23일, 박수정 기자]

  

독서기도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6-05-26&stype=re

삼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6-05-26&stype=mi1

육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6-05-26&stype=mi2

구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6-05-26&stype=mi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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