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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사닥다리가 의미하는 것

작성일 작성자 산곡당

 


야곱이 꿈에 본 사닥다리는 무엇일까? 천사가 그것을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머리 속에 그려보면, 그 영상이 낯설어 심지어는 기괴한 느낌마저 드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더 기괴하게도(?) 야곱은 감히 하나님의 사자와 한판 겨루기에서 이긴 적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신자로서 좀체 상상하기 힘든 이런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데 누구나 느끼는 것이겠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본문의 흐름이 자연스러워지고 자신의 신앙에 주는 메시지까지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소득을 얻으려면 다소간 힘을 들여야 한다.

 

1. 꿈에 본 사닥다리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창 28:12-3)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판에 나오는 사닥다리는 히브리 원문에 술람이라고 되어 있다. 이 단어는 살랄 즉, '쌓아 올리다' 에서 온 말인데 술람은 그런 행위를 통해 완성된 어떤 것을 가리킨다. 더군다나 개역판의 '사자'는 사실 개역개정판의 번역처럼 '사자들'로 번역되어야 한다. 키드너(Derek Kidner)는 이 말을 "천사들이 연속해서(stream)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점에서 사다리라기 보다는 계단으로 보는 것"을 지지한다. 예를 들어, 삼하 20:15에서처럼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공격기 위해 인공적으로 쌓아올린 토산(mount)과 유사한" 형태도 여기에 해당한다.1 폰 라트(Gerhard von Rad)는 천사들이 좁은 사다리를 타고 서로 몸을 부대끼며 오르내리는 이미지가 우스꽝스럽거나 기이하게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천상까지 이어진 사다리'에 대해 생각해 볼 때, 그러나 그것은 실제 사다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날개 없는 신적인 사자들이 그것을 타고 그렇게 동시에 오르내리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폰 라트는 이것을 "이 히브리어 단어는 경사로(ramp)나 어떤 경우에는 계단 형태로 된 길(a kind of stairlike pavement)을 가르킨다"고 말했다.2 

 

우리가 쉽게 떠올려 볼 수 있는 이미지는 아마도 지구라트의 형상일 것이다. 이것은 피라미드 모양의 신전인데 아래서 위로 올라갈수록 그 폭이 줄어들어 정상에 이르면 신에게 제사하는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그 중에서 우르에 있는 우르-남무의 지구라트는 한 가운데 계단이 일직선으로 나 있어서 그 계단을 오르면 정상에 있는 제단에 다다르게 되어 있다.(이 복원모형이 리빙스톤(G. Herbert Livingstone)의 <모세오경의 문화적 배경>(기독교문서선교회: 1990)의 p.154에 게재되어 있다. 간편하게 찾아보려면 http://blog.naver.com/swwyang?Redirect=Log&logNo=100009265779를 참고하면 될 터인데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형태를 주목하길 바란다. 네 번째 사진은 우르-남무가 잔존한 형태이고, 다섯번째는 일부 실제 복원 사진이며, 첫번째는 전체적인 복원 모형도이다. 이것을 기준으로 하면 나머지도 어느 단계에 속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곱이 꿈에 본 '사다리'는 지구라트와 같은 신전 전체이거나 그 건물 중 일부인 계단을 가르킬 수 있는 것이다(키드너와 폰 라트도 이렇게 생각한다). 특히 피쉬베인(M. Fishbane)은 "계단이 놓인 성전"(a staged temple)이라고 말해 이 두 개체를 통합시킨다.3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그 위에' 계셨다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의 문화에서 신전 맨 위의 재단은 인간이 신에게 제사 드리는 곳인 동시에 가장 거룩한 곳으로서 신이 거주했던 곳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이해할 때 17절에서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외친 야곱의 말은 한층 생동감 있게 들린다. 그가 이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이름지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을 단순히 고대인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해서 그것으로 끝나버리거나 이스라엘 종교의 독특성을 훼손시킨다면 이는 적절치 못한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본문은 비록 꿈이라 할지라도 야곱이 처한 어려운 환경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개입한 사건이며 그 과정에서 야곱이 전혀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분이 은혜로운 약속을 주고 계시다는 독특한 면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더군다나 고대근동의 배경은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지 그 구체적인 의미까지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2. 이 계단이 야곱에게 주는 의미

 

그러므로 우리는 야곱이 어떤 정황에서 이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왜 야곱에게 하나님은 이런 꿈-계시를 주셨는가? 그리고 이것이 야곱의 생애에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

 

이 12, 13절이 속해 있는 28장을 보면 야곱은 현재 하란으로 가고 있는(정확하게 말해서 도망치고 있는) 중이다. 그 이면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야곱은 늙어서 시력을 읽은 아비 이삭에게 축복을 받기 위해 그가 편애하는 에서로 변장하여 결국 목적을 이뤘다. 그런데 이 사실을 뒤늦게 안 형 에서는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곡할 때가 가까왔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27:41) 이삭의 아내는 지아비와는 반대로 야곱을 편애하여 이 끔찍한 분위기를 막내둥이에게 알려 집안을 떠나 오라비가 있는 친정 하란으로 피신하라고 이른다. 더군다나 에서는 막내가 아예 거기에서 결혼해서 사는 게 낫겠다고 충고한다. 야곱도 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정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도주하던 중 하루는 날이 저물어 하는 수 없이 돌로 베게를 삼아 노숙해야 했다. 그리곤 잠에 들어 이 '사다리' 꿈을 꾸게 된 것이다.

 

본문에서는 꿈의 영상뿐만 아니라 말씀-계시도 함께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놀랍게도 여호와께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을 소개하신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13절) 황망한 도피길에 오른 야곱은 고향 밖에서는 어디든지 이방인이요 심지어는 낮선 불청객으로 취급되어 감금 내지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될 수도 있었다. 이때 다정다감하게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을 떠올리며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야곱에게 크나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14, 15절에서는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맏이 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물려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특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는 말씀은 야곱에게 계단이 주는 의미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왜냐하면 그 계단을 왕래한 것은 천사인데 그 역할이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천사들은 다른 민족들과 그들의 영토를 돌보고 땅을 순찰"한다고 고든 웬함(Gordon J. Wenham)은 말하면서 12절이 "분명히 놀라울 정도의 독창적이고 새로운 어떤 것을 덧붙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4 슥 1:8-17을 보면 이런 사상이 두드러지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은 하나님의 명을 받고 땅을 두루 탐지하고 그 결과를 다시 하나님께 보고하는 자들로 묘사된다. 특히 야곱 집안이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있고 한편에서는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동생에게 다가오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천상의 군대와 야곱이 마주친 것은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32:1). 더군다나 그 이후 얍복 나루에서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하는 중, 그 '하나님'은 이제 놓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다고 하신다.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이것은 야곱이 씨름에서 하나님을 '이겼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라반을 이겼고 후에는 에서까지 이기리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에서와 대면하면서 야곱의 안전이 극적으로 보존됨은 물론이다.

 

 요컨대 12절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분주히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는 것은 바로 난처한 상황에 있는 야곱에게 필요한 위로의 영상이며 여행길에 야곱과 함께 하시며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을 성례전적으로('눈'에 보이는 말씀으로) 보여주신다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과연 신실하셔서 그 약속을 모두 지키신다. 하나님은 야곱의 두 처 레아와 라헬에게 아이를 배게 하시며(29:31와 30:22-24), 삼촌 라반 조차 조카와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를 알 정도였으며(30:27, 30; 그리고 30:9 참조), 그분은 그가 삼촌 집을 떠날 때를 일러 주시며(31:3) 야곱을 해치지 못하도록 라반의 꿈에 말씀하신다(31:24, 29, 42). 여기에 열거된 구절에서 하나님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해보라. '꿈에 본 사닥다리'의 의미와 그에 따른 약속을 하나님은 다 지키셨고 이루셨다!

 

3. 궁극적 성취 -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야곱의 시대를 지나 거의 이 천년을 뛰어넘어 주후 1세기에 이르러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

 

이 말씀의 나오게 된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본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빌립이 찾아와 예수를 만나보러 같이 가자고 말하자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이렇게 일축한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그러나 '와 보라'는 독촉에 결국 예수님과 만난 그는 깜짝 놀라고 만다. 서로 초면임에도 그의 인격은 물론, 어디에서 무엇을 한 것까지 다 아는 듯한 발언을 예수님께서 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는 말씀에 충격을 받은 그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 본문인 것이다.

 

본문은 놀랍도록 창세기의 본문과 유사하다. NIV의 번역문을 구성 성분별로 서로 대조해보면 이렇다.

 

the angels of God were ascending and descending on it                              (창 28:12) 
the angels of God         ascending and descending on the Son of Man          (요 1:51)

 

이와 같은 유사성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창세기의 본문을 염두에 두고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셨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곧 이 본문을 해석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다. 흔히 개역성경을 보면서 마치 천사가 하늘과 예수님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위의 NIV 번역 대조를 보면 그 의미는 분명하다. 여기에서 창세기에서 on 다음의 'it'은 사다리, 즉 앞에서 설명되었던 계단을 말하고 있는데, 이 it의 위치에 대응하는 요한복음의 용어는 계단이 아니라 'the Son of Man', 즉 인자이신 예수님이다. 천사가 예수님을 타고 오르내린다는 아이디어는 비유적이지만 놀라운 발상이다!

 

그러나 필자는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계단의 자리에 '인자'를 대체해 넣었다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창세기에서 살펴본 것처럼 계단이 의미하는 것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역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땅에서 곤경에 처한 야곱의 사이를 이어주어 그에게 하나님의 복이 전달되고 천사를 통해 보호하시는 길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이제 그 계단이 바로 자신이라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인자는 땅과 하늘의 간격에 다리를 놓는다는 의미다. 그분은 사다리를 대신하신다"고 썼다.5 신약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로서 예수님은 길 또는 문(야곱이 '하늘의 문'이라고 외쳤던 것을 떠올려 보라)으로 묘사되곤 한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시며(14:6) "나는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신다(10:9). 

 

무엇보다도 이 말씀은 나다나엘(과 그와 함께 한 청중)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좋겠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이미 보았다고 하자 그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말을 뒤엎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나는 전지하므로 네가 무엇을 했는지 다 안다"는 식으로 말씀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레온 모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무화과나무는 거의 조국을 상징했다(사36:16; 미4:4; 슥 3:10). 후기에는 그 그늘은 기도와 명상과 연구를 하는 장소로 쓰였다 …… 나다나엘은 자기 집에서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경험을 실제로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고 말한다.6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알되 그 깊은 마음까지 안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 47절에서 하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알게 된 증거가 바로 무화과나무 아래서의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것이다. 이러니 나다나엘이 놀랐던 것이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후에 "이보다 더 큰 일"(50절)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친히 계단 역할을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속을 알뿐만 아니라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하시는 분이다. 하늘과 인간을 가로막는 담을 허시고 거기에 길을 내시며 우리가 성부께 가까워지도록 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같은 구원자로서의 역할과 사역을 곧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시며 그것이 더 큰 일이며 놀라운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1. Derek Kidner, Genesis: Tyndale Old Testament Commentary, 1967, p.158f. [본문으로]
  2. Gerhard von Rad, Genesis: Old Testament Library, 1981, p. 284. [본문으로]
  3. M. Fishbane, Text and Texture, Newyork: Schocken Books, 1979. [본문으로]
  4. Gordon J. Wenham, 창세기 16-50: Word Biblical Commentary, 솔로몬, 2001, p.407. [본문으로]
  5.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1984, p.171. [본문으로]
  6. 상게서, p.16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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