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중고서적

초대교회에서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문제

작성일 작성자 산곡당

'초대 교회에서 이방인이 신자로 받아들여진 기준 '

처음에는 어땠으며 그 후에 그 기준이란 게 어떻게 흘러갔는지...

대략, 이런 질문인 것 같습니다.

이건 예루살렘 회의에서 난 결정과 관련될 수 밖에 없는 문제죠

 

글쎄요, 이런 주제를 온 몸으로(?)

다룬 책은 상당히 드물 거라 생각되네요.

있다고 해도 상상력이 풍부한(?) 신학자들이 써낸 책은 꽤 됩니다.

아마 적확하게 '유대 기독교 Vs. 이방인 기독교' 간의 갈등을 다룬 글은

이책저책 부분적으로 여러 곳에 산재해 있을 것입니다.

바울신학과 초대교회 도서 중에서 관련 항목을 보면 됩니다.

 

그렇지만 대략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1. 이방인들이 지금처럼 딸랑 믿음만 갖고 교회에 가입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 당시에 이스라엘, 특히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 대부분이 유대인 신자였으므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행습을 벗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참 이방인 기독교인이 (가견적) 교회에 들어올 때

믿음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의식법도 지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한 결정이어서 이방인 가입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은 물론, 신약시대도, 초대교회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단지 교회에 가입하는 외적인 절차로 부과했던 게 할례 등의 율법 준수라는 건데

그건 한시적인, 초대교회의 초기의 잠시 있었던 일일 뿐이라는 거죠.

 

2. 그런데 다 알만한 사도들초자 이에 동조하고 있는 분위기가 행 15장에 감지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정지어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승천하실 때 사도들을 성령으로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들이 일순간에 개명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가  지붕 위에서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결한' 음식이 내려왔을 때

그의 반응이 우리로서는 의외지요.

이 음식은 그 자체로 의식법적인 음식 규정에서 금한 음식이기도 하지만

이방인을 뜻하기도 합니다.(10:28)

심지어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고서도

여전히 베드로는 버팁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한참 맛있게 식사하다가 유대 기독교인('할례자들')이 그 자리에 오자

무서워서 슬그머니 내뺀 적도 있습니다(갈 2:11 이하). 

그만큼 헌부대에서 새부대로의 이행은 더딥니다.

어쩌면 이건 당연한 일이죠.

몇 천년 이어져온 구약적 관습을 몇 십년만에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3. 이방인에 대한 태도가 변한 분기점 - 오순절 성령 강림

 

오순절은 결국 하나님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구원하신다는 표였습니다.

행 2장을 보면 성령을 받은 자들의 첫 반응이

각국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첫 오순절 강림 이야기(행 2:1-13)를 쭉 훑어보면

단연 이방인에 대한 강조가 지속적이고 뚜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건의 의의를 구약의 예언을 들어 이렇게 정리합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그런데 대부분 놓지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행 2장, 8장, 10장은 모두 한 세트의 오순절 성령 강림이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 칠칠절 다음 날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2장이 진짜 성령 강림이고 나머지는 그에 비해

부차적인 것, 아류(아류)라고 보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강림이 딱 한번 진짜 오순절에 일어나면 돼지

왜 세번(19장까지 합치면 네번)인가 하는 겁니다.

문제는 이 사건의 진정한 성격을(아무리 베드로가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 하더라고)

사도들조차 실제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합니다.

이방인들에 대한 구약적인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 이건 앞에서 누차 이야기 했습니다. 

 

사마리아에서의 성령 강림을 기록한 8장이 중요한 이유는

이 성령강림으로 인해 사마리아가 이방인의 선교 기지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핍박이 나서 모두들 흩어지게 되었고 그 중에 한사람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제 두 사도들을 보내 그 복음을 받은 이방사람들에게 안수해서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을 성령 강림으로 눈에 보이게 인증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도가 사마리아까지 가서 안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도 중 적어도 베드로는 이방인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불결한' 음식을 '하늘의 음성'이 권했는데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10장의 성령강림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을 생각하면서 이방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일정부분 깨지게 되었습니다. 

10장 28, 29, 35-36절은 핵심 구절입니다.

특히 마지막 구절에서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신약에서 주로 외모하면 얼굴 생김새가 아니라 족속 차별을 말합니다)

취하지 아니하고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그리고 성령님이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고(44절)

할례받은 기독교 신자들이 깜짝 놀랍니다.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임했다는 것을 성령강림을 보고 알았지만

이 사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45, 46절)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가 세례까지 주겠다고 하면서 할례자들에게 너스레(?)를 떱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47절) 

박영선 목사님 버전으로 하면 '우리와 같이'에 밑줄을 쳐야 합니다.

왜냐면 유대인뿐만 아니라 할례나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지키지 않는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임했다는 것을 이 구절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They have received the Holy Spirit just as we have.(47)

(그들은 우리와 성령을 받은 것과 똑같이 받았다)

 

그러나 할례자들은 베드로의 행태가 몹시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11장에 베드로의 변명이 장장 펼쳐집니다.

15절을 주의해 보세요.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즉, 유대인들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이 말을 듣고 형광등에 불과한(^^) 할례자들도 순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18절)

 

요컨대, 세차례의 성령 강림은 특히나 이방인의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윗, 선지자들에게 누누이 계시하신 천하만민의 구원 약속,

이 약속이 성취되는 순간을 이렇게 누가는 가슴 벅차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순절주의자들이 안타깝게도 놓치는 골수입니다.

겉이나 주변적인 것에는 몰두하고 속(골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4. <그러나 예루살렘에 모여보니 못 깨닭은 불순분자들이 여전히 있더라>

 

결국 원칙적으로는 이미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율법 준수는 폐해졌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을 출교해버리면 간단하쟎아?"

그럴 수도 없습니다.

유대인(바리새파 등등) 그리스도인들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편을 든자 보다 훨씬 더...

 

그런데 누가는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갑니다.

타협안은 이방인에게 율법으로 과도한 짐을 지우지 말고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과 목을 매서 도살한 동물의 고기, 피, 음행을 멀리하라고

이방인에게 권고하라는 것입니다(행 15:19-20).

음행이야 누구나 피해야 하지만 그 앞의 세가지는 타협안입니다.

이것 자체가 옳지는 않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닙니다.

존 스토트는 이 타협안에 대해 이렇게 논평합니다.

"구원은 행함이 없이 믿음만을 통한 은혜만으로 인한 것이라는 원리를 확립해 놓고 나서는,

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인 동료 신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몇 가지 관습들을 삼감으로서

그들의 양심을 존중해 줄 것을 호소할 필요가 있었다"<사도행전 강해>

이것은 진리의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 보다는 양심 보호 차원의 조치였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사도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얼마든지 먹을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형제들을 위해 그 자유를 (방종으로 흐르게 하지 않도록) 억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8:12)

진리는 불변하나 그 진리 적용에 있는 사랑의 원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전 10:19 이하의 말씀도 중요한 힌트를 줍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즉, 구원코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행 16장에서 초두를 보면 바울 스스로가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키는 것도 다 이런 연유에도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원칙적인 면에서 철저했습니다 -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그렇다면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역시 원칙적인 면에서 양보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야고보도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맨위로
통합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