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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빙크와 스킬더의 기독론

작성일 작성자 동락당
강의 : B. Kamphuis(화란 캄펜 신학교)

통역 : 유해무(고려신학대학원)

디텍팅 : 한주환




칼케돈 신경의 결정 내용을 두 사람이 어떻게 수용하면서 오해했는가? 특별히 바빙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인성을 약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스킬더는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너무도 법적으로 접근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직분을 강조하는 형태로 나타남으로서 다소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내용의 강의가 될 것이다.






이 강의가 한국에 온 중요한 목적중 하나이다. 내가 생각할 때 기독론이 신학의 심장이다. 빌립보서 3:8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말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때문에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한 번 반성해본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론의 대부분의 기독론의 선언은 칼케돈 신조에서 시작한다. 미리 이전 역사에 대한 것을 살펴봄으로 강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칼케돈 회의의 결정 배경은 교회 안에 흐르는 두 개의 신학조류의 충돌이 있었다. 그것은 시리아의 안디옥파와 알렉산드리아학파의 갈등이다. 안디옥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었다고 강조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와 인성의 결합이라는 것은 본질적인 결합이라기보다는 윤리적, 도덕적 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예수’라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의지가 연합과 일체성의 근거가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이중성이 나란히 나오게 된다. 로고스와 인간 예수가 병행하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보면 병행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고 말씀하는 사실이 하나라는 것과 모순이다. 반면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체성 즉 하나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 신인 이라는 측면에서 일체성을 찾고자 했다. 물리적이고 본체론적인 혼합을 일체성으로 본 것이다. 복음서에서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관성은 잘 드러내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인간인지에 대한 질문이 야기된다. 특별히 5세기에 이르러 30년 정도 쌍방이 매우 심하게 부딪혔다. 칼케돈 회의는 여기에 대한 결론이다. 이스탄불의 가까이에 있는 칼케돈은 터키의 한 도시이다. 600명 정도가 모였는데(이는 최대의 종교 회의였다) 이 회의 자체는 쌍방 중 하나를 정죄하기 보다는 쌍방 모두를 인정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우리는 두 본성들로 혼합되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고 고립되지도 않는 한 분인 동일한 그리스도, 성자, 주님, 독생자를 가르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두 위격으로 나뉘거나 분할되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서 싸움을 종결시키고 교회의 일체성을 회복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첫째가 그리스도의 일체성이다. 동일하신 그리스도, 주님, 성자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부르던 인간이라 부르던 동일한 하나님이다. 후렴처럼 칼케돈 신조에서 나타나는 것이 “동일한”에 대한 강조이다. 두 번째는 진짜 하나님이시고 진짜 인간이라는 점에 대한 강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도 완전하고 인성도 완전하다. 일체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양성이 지니는 독특성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양성의 독특성이 그대로 보존됨을 고백한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것처럼 “체휼 하시되 우리와 같지만 죄가 없다” 이는 인성의 진정성이다. 이 결정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정통적 교회는 이 결정을 그대로 따른다. 물론 완전한 표현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짧게 요약한 칼케돈 신조를 개혁신학 전통에서 어떻게 수용하고 작업했는지 살펴보겠다. 캄펀의 이 두 분(바빙크, 스킬더)이 나의 전임자이다. 전임자들이 기독론을 어떻게 말했는지 연구했다. 이 두 사람에게 지금도 배울 것이 많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해결책 자체가 다시 우리 시대에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먼저 바빙크에 대해 말하겠다. 바빙크는 교의학을 4권으로 출판한 위대한 신학자이고 지금도 그 명성이 알려져있다. 바빙크에게도 역시 기독론이 신학의 심장이었다. 기독론은 전 교의학의 출발이 아니라 중앙에 위치하며 모든 각론의 핵심이다. 다른 각론들이 기독론을 향하며 또 다른 각론들은 기독론으로부터 나온다. 교의학의 심장인 기독론에서 우리 기독교의 종교성과 기독교의 윤리적 삶이 박동치고 있다. 기독론은 경건의 비밀이다. 계속 말하기를 그는 성육신 사건 자체가 세계역사의 중심에 있다라고 말했다. 세계 역사의 진행방향이 예수 그리스도였고 그의 성육신이었다. 때문에 여타의 종교에서도 성육신을 더듬는 흔적이 나타난다. 이 점을 그리스도의 인격(위격)이라 말할 수 있는데, 각종 종교에 나타나는 사제들이 모두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보자에 대한 흠모로 나타난다. 성육신이나 신격화 이런 것이 모든 종교에 나타난다(유교수는 반대). 가령 헬라 신화에 나타나는 이야기 들이나 구체적인 역사(신화)에서 왕의 이야기에서도 이에 대한 열망(성육신)이 나타난다. 이교에서 주장하는 가장 고상하고 멋진 표현은 결국은 기독교를 지향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종교다원주의에서 중요한 발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메시야 일뿐 아니라 모든 이방인의 소망이다. 바로 이 같은 관점이 바빙크 신학의 핵심이다.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보편성을 종교다원주의와 비견될 만한 이 같은 방식으로 표현 한 것이 바빙크 신학의 특징이다. 교회만 공교회 일뿐 아니라 기독교 자체가 보편적이다. 복음은 온 세상 그리고 온 인류를 위한 말씀이다. 구속을 향한 인류의 열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기독교 적이라는 그 자체가 곧 인간적이라는 것이다(먼말이고). 때문에 바빙크에게서 나타나는 공교회성(보편성)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얘기하는 데 부담을 가지고 있고, 위험을 초래한다.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함으로서 물질 자체가 악하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이같이 기독교의 보편성을 가지고서 기독론의 보편성으로 연결시킨다. 이것은 20세기 신학 발전에서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바르트는 기독론을 가지고 기독교의 독특성을 강조하려 했는데 바빙크는 보편성을 강조했다. 바르트가 말하기를 기독교는 모든 종교와 대치한다. 이것은 기독론적 집중이라 말할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지니고 있는 독특성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바빙크처럼 보편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성이 아니고 칼바르트에게서는 독특성이다. 바르트와는 다르지만 스킬더 역시 그리스도의 독특성에서 출발한다. 보시다 시피 바빙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편성에서 출발해서 모든 것을 포함하는 기독론을 제창한다, 이 요소가 창조론에서 나타난다. 기독론 자체가 창조론을 포괄한다(바빙크에 의하면).




성육신 조차도 세계 역사의 콘텍스트 속에서 설명한다. 바빙크의 전제조건은 첫째,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이시라는 신론의 문제이다. 바빙크의 삼위일체론의 독특성은 하나님께서는 삼위로 계시면서 자신을 타자에게 수여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제한된 피조물 속에 자신의 전능하신 작정을 포함시키셨다. 하나님은 무한한 분이시만 유한한 피조물 속에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 중에서 창조 가운데서 창조 자체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셨다.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함으로서 자신을 나누어 주실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유사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을 때, 그 인간이라는 존재에 하나님께서 직접 하감하신 것이다. 셋째는 계시문제이다. 계시와 성육신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타자에게 수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바빙크의 독창성은 하나님의 자기 수교성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타자(피조물)에게 수여하시되 하나님은 경감되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동일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렇게 세가지 전제를 가지고 말한 성육신이 실제로 종교의 본질과 일치한다. 여기서 보편성을 생각해야 한다. 종교가 무엇인가? 종교는 교제다. 교제에 하나님의 자기 수교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 종교는 하나님과 우리의 신비적 연합이다. 이는 모든 종교에서 볼 수 있다. 이 초점이 성육신이자 기독교이다. 이같이 하나님과 인간의 종교적 교제가 밀접하기 때문에 신비적 연합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참여한다. 바빙크의 구원론도 신인의 내적인 밀접한 교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의 초점도 하나님께 자신을 주실 수 있다는데 있다. 이 독특성을 가지고 바빙크는 한편으로 이신론과 범신론을 극복한다. 이신론은 신과의 내적인 교제가 없는 것이며, 범신론은 하나님께서 피조물 속에 해소되어 하나님의 독자적 존재가 부정되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바빙크의 해석과 신학은 지금도 중요한 관점을 준다. 이신론과 범신론의 위험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다. 이점에서 이를 극복한 바빙크에서 배울점이 많다. 바빙크 만큼 하나님의 내재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해소한 사람은 많지 않다.




<휴식>




지금까지 바빙크의 보편성과 하나님의 수교 가능성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바빙크가 칼케돈 신조에 대해 취한 태도는 다소 유보적이고 신중한 모습이었다. 신학이 성경적이고 고백적이길 원한다면 양성적이고 고백적일 수밖에 없다. 이미 선배들의 결정내용을 받아들이고 비판을 시작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과 그리스도의 영광도 훼손하는 것이다. 칼케돈 신조 자체를 종착점으로 본 것이 아니라 종착점과 동시에 출발점으로 보았다. 바빙크가 칼케돈 신조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취하면서 결함이 무엇인지 밝혔으면 좋았을 것인데, 언급이 없다. 그러면서 스스로 많은 문제점만 던지고 있다. 이렇게 얘기 할 때 바빙크가 칼케돈 신조의 헬라 철학적 본체론을 의심하는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만 칼케돈 신조가 집중하고 있는데 대한 비판인지 모르겠다. 때문에 시대에 걸맞는 즉, 칼케돈을 받아들이면서 표현방식을 달리해야한다는 것인지... 뭐 이런 얘기들. 아니면 좀 더 구체적으로, 용어 자체가 헬라적 이었다는 것을 비판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정통 신학자로서 그는 칼케돈 신조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분명하다. 개혁파 신학의 전통은 신조를 받아들이면서 그에 대해 의문점을 던지는 것이다. 바빙크가 이런 태도를 취했는데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에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여기서 바빙크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이렇게 말하면서 바빙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고 부당하게 훼손시켰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 속에 있다” 이것이 교회의 최종 결론이었는데,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당하게 다루고 있다. 바빙크의 결정적 약점은 “예수 그리스도는 나와 너 라는 개별자 중의 한 개별자가 아니다.” 이것이 큰 결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을 가지고 전 인류를 대표하는 보편자일 뿐이다. 이것은 인성에 대한 엄청난 훼손이다. 예수님은 다양한 질병이 침입할 수 없다. 보편자로서 우리의 대속자이지만 개별자는 아니기 때문에 내적 모순이다. 때문에 바빙크의 기독론은 결정적인 한계를 지닌다. 요점은 바빙크가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면모가 복음서의 기록과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교회의 영지주의와 유사하다. 바빙크의 ‘보편적인 인간’개념은 성경적이지 않다. 그는 칼케돈을 따른다 말하지만 칼케돈에 저항하고 있다. 따라서 바빙크의 강조점은 신성으로 가게 되었다. 신성은 진짜이지만 인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이제 스킬더를 살펴보자.




스킬더는 1930년대 바르트가 나타난 그 순간부터 그를 비판하면서 개혁신학을 확립한 학자이다. 바르트가 기독론적 취했듯이 스킬더도 그러했다. 1937년 헤프(Hepp)의 글 때문에 토론이 시작된다.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양성의 연합문제이다. 바빙크가 강조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보편성의 노선을 따는 Hepp와 스킬더는 논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이라는 인성이 아니라 보편성을 지닌 인간으로 생각했다(당시 시대상황과 결부). 나치의 탄압을 피해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화란으로 넘어오는 시기에 이 이야기는 히틀러에게 좋은 소식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인간 중 열외적 존재라는 것이다. 바빙크에게 헤프로 나아가면서 이 사상이 만개했다. 그러자 스킬더가 반론을 펴기 시작한다. 개혁파 전통(17-18세기)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켜서 구체적이고 특별한 섭리로 이야기했다. 바로 이 전통을 이어받아 스킬더는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지니고 있는 독특성을 강조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남자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주 구체적인 시대를 산 인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수의 아들이고, 이것은 아주 구체적인 특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반적인 인간의 모범으로 볼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살았다는 것을 스킬더는 강조했다. “우리는 구세주를 아주 특별한 상태 속에서 그를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천국에는 전설적인 미남이 아니라 구속주가 계시며, 그의 상처는 십자가에 달려 당하신 특별한 상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성과 역사성을 스킬더는 강조했다. 이것이 그의 신학의 특징이다. 스킬더는 바르트를 대항하여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사역했다라고 주장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3권의 책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당하시고 대처하셨는지 아주 구체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 스킬더의 신학은 바르트와 다르다. 바르트 신학에서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인데, 이에 대항하여 스킬더는 역사성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당신을 계시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바빙크는 보편성을 강조했다면, 스킬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체적, 역사적 사역을 강조했다. 이점에서 스킬더가 바빙크보단 그리스도의 위격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관점은 몇 가지 문제를 야기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참 하나님과 참 사람)을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직분)과 위격을 연결시킨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인간 그리스도의 신비를 우리가 묵상하자면, 그분의 본성을 말하지 말고 그 분의 사역과 직분에 대해 묵상하자” 본성은 이미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이고, 인간 그리스도는 직분 속에서 그의 위격이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신성이 무엇인가? 인성이 무엇인가? 이것이 논쟁의 초점이었다면, 스킬더는 이것이 왜 필요한가에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과 사역이다. 헤프는 예수 그리스도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개별성을 가질 수 없다라고 주장했는데 스킬더는 이것을 동의할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직분자로서 그 일을 하려고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왔기 때문에, 이 구체성 자체가 편파적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삼 직분(선지자, 왕, 제사장)을 스킬더는 매우 강조하였다. 스킬더 신학 전부가 그리스도의 직분이 중심이다. 이 점에 있어서 스킬더 신학의 특징이 있다. 칼케돈의 정체적 신학에 반해 그의 신학은 동적이고 열려 있고 힘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 한계가 있다. 위격과 직분의 관계에서 스킬더는 너무 법적인 관계에서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강점이자 약점이다. 위격과 사역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은 옳지만 위격을 직분으로 고정시킬 때 문제가 생긴다. 위격=직분 이것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렇게 법적으로 정의 하다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점점 우리에게서 멀어져 간다. 이것은 너무 형식적이다. 결국은 바빙크과 헤프가 보고 있는 비 위격적인 일반성을 스킬더가 수반하고 있는 듯하다.




이 두 사람이 칼케돈 신조에 대한 태도에서 우리가 배울 바가 무엇인가? 세 가지로 요약하겠다. 첫째로, 이 두 신학자는 이전의 칼케돈 결정을 그대로 수용했지만 반복한 맹종자들이 아니었다. 자기 시절에 고대 교회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그것을 합당하게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만 보는 자유주의적인 기독론에 대항하여 바빙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했다. 스킬더는 바르트가 역사를 무시하는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강조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바빙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의미와 신성을 강조했고, 스킬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체적으로 지닌 역사성을 강조하면서 직분, 사역을 강조했다. 이와 같이 신학자들은 각각의 시대를 살면서 그 시대의 문제를 고대 교회의 교리를 가지로 답변하였다. 우리도 이 시절에 이 같은 모델을 따라 신학 작업을 해 나가야 한다. 한편으로는 우리 교회의 전통을 정직하게 수용하면서도 고립이 아니라 이 시대에 맞게 다시 해석하고 그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둘째로 이들의 재해석과 의미부여가 그 시대의 상황에 매여 있는 한계에 부딪힌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시대가 가진 편파성에 나도 모르게 따르게 된다. 이들의 신학을 맹종할 이유는 없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신학적 가치를 재음미 해보면,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이 시대에 걸맞게 기독론을 깊이 반성하며 발전시켜야 한다. 현대와 같은 지구화, 세계화의 시대에 바빙크가 주장했던 보편성이 자기가 의식하지 못할 만큼 이 시절에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성, 교회의 보편성을 배타적, 폐쇄적으로 말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나아간 적극적 태도가 우리의 귀감이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수교할 수 있다는 이 중요한 바빙크의 발견이 아직 이 시대에도 우리가 더 작업해야 할 주제이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신 자기 수교의 의미이다. 세속화가 무엇인가?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직접 오실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 계신다. 이것이 바빙크의 훌륭한 발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성과 직분을 통하여 그 위격을 보려고 한 스킬더의 이 관점은 자기시대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가 더 많은 연구를 통해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50년대 말과 60년대 초에 판넨베르크가 비로소 독일에서 했던 그것을 스킬더는 이미 30년 전에 이미 강조했던 선구자이다. 현대 신학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는 달리 스킬더는 구체적인 성경 말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정통 신학의 약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만 강조하는 것이었는데, 성경은 양면을 다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아들이 육신을 입고 왔다. 특별히 스킬더가 위격을 사역, 직분의 관점에서 봐야한다는 것은 깊은 통찰력이다. 때문에 바빙크의 칼케돈에 대한 유보적 생각을 스킬더가 보완했다고 할 수 있다. 칼케돈의 정체적인 표현을 넘어 훨씬 구체적이고 활동적인 기독론을 스킬더는 주장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들의 생각을 맹목적으로 따르는데 머무르지 말고 더 발전시키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다. 이 영광스런 이름에 우리가 발을 디디고 동시에 이 이름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계속 반성해야 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때문에 성경말씀에 충실한 신학자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함께 이 작업을 수행해야겠다. 이 일을 위해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해야 하겠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조명을 받아야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성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학 작업을 할 수 있다. 바로 이 작업, 이 신학 작업에 우리 모두가 동참하여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해야 하겠다.




(제2탄 또다른 역본)

H. Bavinck(1854-1921)와

K. Schilder(1890-1952)의 기독론

-기독론 특강 (캄파이어스 교수)-

2005-10-4




첫번째 시간

빌3:8-내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




기독론의 선언은 칼세돈 회의에서 발원한다. 칼세돈 회의 의 배경은 교회안의 두 가지 조류의 충돌이 깔려있다. 첫째는 시리아의 안디옥 학파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있다.



안디옥은 예수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채택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와 인성의 결합은 본질적이라기보다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본다. 예수라는 인성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의지 그 의지가 연합과 일체성의 근거가 된다. 그렇게 될 경우 예수의 이중성이 나란히 나오게 된다. 로고스와 인간 예수가 병행을 하게 된다. 내적 연관성이 없다.



성경말씀에는 이런 병행보단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체성을 강조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요, 인간이라는 측면보다는 신인이라는 일체성을 찾으려했다. 물리적이고 본체론적인 혼합을 일체성으로 본다. 이들은 복음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일관성은 잘 드러내지만 결국 그 위험은 예수그리스도가 인간이심을 부인하게 되는 것에 있다.



5세기에 쌍방의 싸움은 커진다. 431년 칼세돈이 이런 문제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 회의는 쌍방을 중재하려는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유해무, [개혁교의학] P.431) 이 칼세돈 공의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일체성을 강조하면서도 양성을 구별하여 한편으로 안디옥을 비판하고 통과하고 다른 한편으로 알렉산드리아의 혼합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양자를 중재하였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체성을 회복하였다. 이런 발언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핀다.



첫째는 예수그리스도의 단일성, 동일하신 주님, 성자 하나님을 강조,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부른다하더라도 동일한 고백이다. 후렴처럼 칼세돈 신조에서 나타나는 것은 "동일"에 강조가 있다.



두번째는 진짜하나님이며 진짜 인간이란 것이다. 일체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양성이 지닌 독특성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우리와 똑같으나 죄는 없다. 물론 완전한 표현은 아니기 때문에 문제는 있으나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다. 칼세돈 신조를 개혁신학에서 어떻게 수용하고 작업했나?




<바빙크>



바빙크에게도 기독론이 신학의 심장이었다. 기독론은 전 교의학의 출발이 아닌 중앙에 위치하며 모든 각론의 핵심이다. 다른 각론들이 기독론을 향하며 다른 각론들은 기독론으로 부터 나온다. 교의학의 심장인 기독론에서 기독교적 종교성과 윤리성이 약동하고 있다. 기독론은 경건의 비밀이다.



성육신 사건자체가 세계역사의 중심에 있다. 세계역사의 진행방향은 예수그리스도 성육신이었다. 그러므로 여타의 역사에서 성육신을 더듬는 흔적들이 나타났다. 모든 종교들에 나타나는 주장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을 지지하며 확증한다. 각종 종교들에 나타나는 사제들은 결국은 예수그리스도라는 중보자의 흠모가 드러나는 직분들이다.



성육신이란 모든 종류의 신격화라는 것에 나타난다. 가령 헬라 신화에 나타나는 이야기들. 구체적 역사들은 신격화의 열망이 나타난다. 이러한 것들을 바빙크는 기독론으로 해석하려 한다.



이교는 무의식적 예언사상이며 폄하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교에서 주장하는 가장 고상하고 멋진 표현은 결국 기독교를 지향하며 예수그리스도를 향한다. 이와 같은 관점이 바빙크 신학의 핵심이다. 기독교가 지니는 보편성을 종교다원주의와 비교될만한 이와 같이 표현하는 것이 …



교회만 공교회일 뿐 아니라 기독교 자체가 보편적이다. 복음은 온 세상 온 일류를 위한 것이다. 구속을 향한 인류의 열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바빙크에게서 나타나는 공교회성, 보편성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이야기하는데 위험을 초래한다. 결국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부인하는 데까지 가게 되는데 인성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본질적 부분을 하나님과의 참된 일체성에 대하여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함으로써 이원론을 극복한다. 기독교의 보편성에 기독론의 보편성을 연결시킨다.



이것은 결국 20세기의 신학발전에 흔적을 남긴다. 바르트는 기독교의 독특성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모든 종교와 대치한다 . 이것은 기독론적 집중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독특성을 출발로 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빙크의 보편성은 칼 바르트의 독특성과 구별된다. 한편, 스킬더도 그리스도의 독특성에서 바빙크는 보편성에서 출발하여 모든 것을 포용하는 기독론을 주창한다.



바빙크에게 기독론 자체가 창조론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

성육신을 설명할 때 바빙크는 몇 가지를 제안한다.

성육신의 첫째 전제, 하나님은 삼위하나님이시다. 바빙크의 삼위일체론의 독특성은 자기 자신을 타자에게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두번째 전재는 창조론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제한된 피조물 속에 자신의 전능하신 작정을 표현한다. 창조가운데서도 창조 자체에 하나님을 보여주셨는데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나누어 주실 수 있다는 것에서 하나님의 자기 수여를 볼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유사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드셨을 때 인간이라는 존재에 하강하셨다.



성육신의 세 번째 전재는 계시이다. 계시와 성육신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타자에게 수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수여한다고 해서 자신이 경감되는 것이 아닌 여전히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런 세 가지 전제로 말한 성육신은 종교의 본질과 일치한다. 여기에서 보편성을 생각해야 한다. 종교는 교제이다. 교제라는 말에서 하나님의 자기 수여 가능성을 파악해야 함을 보여준다. 종교는 교제인데 교제의 핵심은 신비적 연합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연합이 모든 종교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적 연합이 구원이다. 신, 인의 밀접한 교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국 예수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셨느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부터 신학과 신앙생활에 있어 위협하는 것은 이신론과 범신론을 극복한다. 이점에서 바빙크에게 배울 것이 많다.





두번째 시간



첫 번째 시간에는 바빙크의 기독론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고, 특별히 그의 신학의 보편성과 하나님의 자기 수여 가능성을 이야기 하였다.




칼세돈 신조에 대한 바빙크의 태도: 조금은 유보적이며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칼세돈 신조를 종착점이면서 출발점으로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학은 양성론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받아들여 이 고민에서 신학을 이루어 가야 한다. 이 문제를 영원히 안고 가야 한다." 이 말은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보려는 노력에 대한 그의 비판이다.



5세기의 존재론적 사고에서 바빙크의 시대에는 관계적 사고로 바뀌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마도 칼세돈 신조에 대해서 유보적인 자세를 보였는지 모른다.....칼세돈 신조에 대한 그의 태도에 대해서 구체적인 답변이 없고 그는 정통신학으로써 받아드리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신학하는 방법의 자세이다.




바빙크에 대해 비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발전시키지 못했고 부당하게 훼손시켰다. 엔 휘포스타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 속에 있다"는 것을 안-휘포스타제로 이해함으로써 이렇게 하였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한 개별자가 아니다. 보편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전 인류를 대표하는 보편성이다. 그의 인성은 보편적 인성이다. 그렇다면 개별자가 아니기에 구체적으로 죄의 결과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향을 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의 보편성은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면모가 복음서의 기록과 충돌할 수 있다. 그는 일반적인 면만을 강조했다. 가현설적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칼세돈 신조를 따른다고 하지만 이런 면에서 저항하고 있는 면이 있는 것이다. 참 하나님과 참 인간에 대한 칼세돈 신조에 충실하지 못한 면이다.




이것을 연결점을 삼아서 스킬더로 넘어간다.




<스킬더>

바르트를 1930년대부터 비판함.... 바르트가 기독론적 중심이듯이 스킬더도 기록론적 중심을 취한다. 그는 한편으로는 바르트와 한편으로는 바빙크와 관련되어져 있다. 1937년 바빙크의 제자인 Hepp와 토론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의 연합의 문제를 다룬다. 인성의 보편성에 대한 Hepp의 강조와 이에 대한 스킬더의 비판이 있었다. Hepp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유대인으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는 히틀러 치하였기에, Hepp는 계속 이 측면을 부각시킨 면이 있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후손이 아닌 열외적 존재이다. 바빙크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Hepp에게서 만개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체적 개별적 인간이 아니다. 이것에 대한 반론이 스킬더이다. 독특성에 대한 강조.



개혁파 전통 중에 17, 18세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이고 특별하게 다루는 전통이 있었다. 이 전통을 이어 받아서 스킬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독특성과 특별성을 강조했다. 개별성, 구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 인간으로 부각시킴. "우리는 구세주를 아주 특별한(혹은 독특한) 상태에서.....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 구체성 강조 이것은 그의 신학의 특징이다. 칼 바르트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역사적 개입, 역사성을 제대로 부각시킨 사람이 바로 스킬더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책 "그리스도와 고난"에 나타난다. 이 점에 있어서 바빙크와 다르다. 또한 바르트와도 달리 하나님이 오신 역사에 대해 긍정한다.

바빙크보다 스킬더가 더욱더 참 인간적 측면을 잘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 비판받을 것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을 강조했는데, 위격(칼세돈 신조)을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직분을 위격과 나누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 그분의 사역, 직분에서부터 시작하여 생각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분의 본성은 직분, 사역을 위하여서 그러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person이 이전에 강조되었던 것이 스킬더는 직분과 사역에서부터 person으로 간다(이것은 Pannenberg가 1960년대에 했던 작업을 이미 앞질러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바로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구체성이 곧 편파적으로 이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스킬더의 특징이다. 이에서 그는 칼세돈 회의의 정적인 차원을 동적으로 이동시켰다.



여기에 한계가 있다. 법적인 문제로 강조하고 있다. 위격과 사역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은 옳은데, 위격이 직분자라는 것은 항상 정당할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법률적인 직분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점점 멀어져 간다. 그래서 결국은, 법적인 용어인 직분으로 위격을 이해한 것이 너무 형식적으로 된다. 그래서 비위격적인 보편성에 가까이 가고 있는 모습이다.




<결론>

칼세돈 신조에 대한 바빙크와 스킬더의 태도에서 배우는 신학하는 자세.

1. 수용했으나 맹종자는 않았다. 바빙크는 칼세돈을 자유주의적 입장에 대항하여 강조하였고, 스킬더는 바르트가 역사를 무시하는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바빙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의미를 강조하였고, 스킬더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강조하여 직분, 사역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 고대의 전통을 받아드리면서 현재를 비판적으로 원용해야 한다. 정직하고 바른 수용과 재해석이 필요하다.




2. 이들의 재해석이 시대 상황에 매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을 우리는 맹종할 필요가 없다. [어떠한 신학도 상황과 맥락을 무시하고서 그대로 도입할 수 없다.]




3. 이들의 남겨준 신학적 의미....... 우리도 이 시대 걸맞게 기독론을 발전시켜야 한다. 바빙크의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성이 세계화 시대인 지금 보다 더 적실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폐쇄적인 태도가 아닌 포괄적인 그의 태도가 우리의 귀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니고 있는 보편성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자기 수여 또한 중요한 관점이다(엡 1:8).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곧 하나님의 자기 수여의 충만을 의미한다. 세속화된 시대에 하나님의 자기 수여는 중요하다.




스킬더의 구체성의 관점은 자기 시대에는 선구자적인 관점이다.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60년대에 판넨베르그가 했던 것을 이미 30년대 했던 선구자적 위치에 스킬더가 있다. 하지만 현대신학과는 달리 스킬더는 성경에 철저하게 입각한 직분을 보여주었다. 정통신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것을 스킬더는 보완한 것이다. 칼세돈의 정체적인 것은 동적으로 기능적으로 이해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는 머물지 않고 계속 추구해 가야 한다.




<질문과 답변>

1) 바빙크의 보편성에 대한 질문?

답: 바빙크는 그 당시 종교에 대한 박학한 지식이 있었고 그래서 혼합주의에 대한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계속 관철시켰다. 하지만 그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은 전 일류를 위한 사건, 전 실재에 대한 구속이기에 보편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혼합주의의 가능성이 있으나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강조한다.

스킬더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을 강조하였기 우리는 그분의 육신의 고통에서 우리는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직분자로서 강조해야 한다. 이 때 우리와 그의 거리감이 나타난다. 오히려 우리는 그 두려움을 나와 가까이 계신 두려움으로 말하고 직분도 강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직분을 거리감을 두면서 말하고 싶지 않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이 우리와의 거리감이 있다고 강조하지만, 우리 또한 직분자라고 본다면 우리와 가까울 수 있다. 이것은 창조론에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답: 스킬더는 창조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명을 제대로 수행한 자이고 제대로 이해한 자이다. 바로 이점에서 직분자로서 삼직을 수행하셨고 우리도 이 직분을 수행할 수 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으로 충만한 자들이 된다면 우리는 태초에 원하셨던 인간이 될 것이다.




3) 두 분의 신학자는 모두 삼위일체를 전제하고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인카네이션에서 신인을 확인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되었을 때 구체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은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특히 부활의 의미는 무엇이 되는가?

답: 우리는 비판적으로 선배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이 말한 기독론을 우리는 인카네이션 뿐 아니라 부활까지 포함해서 신인을 이야기하며 논의해야 한다. 부활에 대해 강조해야 한다는 것을 유교수랑도 이야기 하였다. 우리는 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유해무 교수님께서 통역하신 것을

이충만 전도사님께서 타이핑해 주셨습니다.

전도사님의 허락을 받아 올립니다.

퍼가실 때에는 리플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위의 내용 중에 []친 부분은 다른 시간에 언급되었던 캄파이스 교수님의 설명을 참고로 삽입한 것입니다.

* 행원소구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

출처 : 언약교회 | 글쓴이 : 이종인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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