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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교 철학 - 신국원

작성일 작성자 동락당
 

기독교철학 96/1 I  1



(I) 서론


(가) 기독교 철학은 과연 존재했는가?


1. 이것은 특히 서양에 있어서는 기독교 지성이 존재했는가와 동일한 질문이다. 그것은 철학이 최근까지 서양의 지적 전통의 핵심이요 기초적 위치에 있어왔기 때문이다. 이 말의 의미는 초기 철학자들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근대 문화에 있어 데카르트, 로크, 칸트, 그리고 현대에 있어 마르크스, 듀이, 프로이드등)의 위치와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들은 단지 사상가였으나 이들은 진리가 무엇이며 삶이 무엇이고, 문화의 이상과 사회의 윤리와 규범과 나아가 인간이 무엇이라는 것을 규정했고 결국 구체적인 삶이 그것에 의해 형성되었다. 서구문화는 결국 철학적 사고의 실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결국 기독교 철학이 존재했느냐는 위의 질문은 기독교회가 이들에 필적할 만한 지성과 사상을 가진 인물을 가졌는가? 즉 세속적 사상가들이 가졌던 체계에 대적할만한 교회의 인물들이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3. 위에서 언급했지만 이것은 단지 지적 통찰력과 분석력 (그래서 세상과 인생을 그럴듯하게 파악/설명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과 경탄해 마지 않을 사상체계의 존재 유무에서 끝나지 않는 문제이다. 이런 인물과 체계의 존재는 바로 문화의 지도력과 삶의 형태를 구성하는 관건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철학이 삶의 지도적 위치를 점해온 서양에서 특히 중요한 문제이다.

        

4. 성급하지만 오늘 제기한 문제에 답을 하자면 대체로 긍정적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일학기 내내 살펴볼 것이지만 이미 초대교회로 부터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자신을 철학자로 자처한 사람들도 있었고 또 이들의 지적 영향력은 단지 신학이나 목회적 차원을 넘어서 세속적 철학자의 그것에 비견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대개 그들의 영향력이 교회 또는 기독교인 세계내에 국한되거나 세속적 철학만큼 광범위한 영향을 주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5. 기독교 철학이 세상 철학만큼 지속적으로 발전하거나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거기에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가지는 고유한 요인도 있고 또 그 이외의 원인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철학의 존재 여부를 따지기 앞서 서양철학사를 통해 알게된 철학의 정체에 대해 복습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나) 철학이란 무엇인가?


1. (서양) 철학에 대한 한국적 오해: 흔히 동양적 문화 유산에 속한 우리는 서양철학의 성격을 오해할 경우가 많다. 동양에서의 철학은 흔히 도를 닦아 준신선이 되는 일면 신비하고 유사종교적 행위로 인식된다. 또는 한 여름에 오바입고 세상 근심 걱정 염려는 홀로지는 모습의 인물을 연상한다. 그래서 철학하면 참선, 묵상, 입산수도등을 연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 김상원 형제의 예) 또 20세기 한국의 역사상황을 바탕으로 강한 영향을 미친 실존주의로 인해서 철학이 주로 우수에 젖어 인생의 부조리와 삶은 탄하는 반시인적, 예술적 상상력을 연상하기도 한다.


2. 물론 이러한 자세가 철학의 한 유파나 자세를 반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서양문화에 있어 철학이라 할 때에 그 말이 뜻하는 것은 이러한 신비적, 종교적, 예술적 상상력과는 크게 다른 오히려 그 반대의 자세에 해당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3. 서양, 특히 근대 서양에 있어 철학이란 하나의 학문이다. 철학은 학문의 학문, 또는 학문 중의 학문으로 여겨졌다. 학문이란 평이한 경험의 자세와 달리 실재를 대함에 있어 특수한 자세를 견지한다. 그 특수한 자세에는 실재를 추상적 분리, 객관화, 거리둠, 대상화와 원리 발견의 추구등이 포함된다.

        예를 들면 물을 생각해보자. 물이 시원하다던가, 갈증을 풀어준다던가, 시퍼러니까 무섭다던가, 깊은 물 마음이 푸근해진다던가는 일상적 체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추상화/객관화를 거쳐 우리는 비로서 물을 과학의 대상으로 만든다. 즉 실재에서 분리되지 않는 현상, 즉 물의 화학적 면을 추상적으로 접근하며 그 추상화한 일면을 실체화한 후 대상화, 객체화하여 관찰함으로 원리를 발견하고자 하며, 결국 그 원리발견으로 주체의 유익을 도모하고자 한다.

        과학은 원리추구, 기술은 그 원리의 실제적 적용이라는 분리는 하나의 근대적 신화이다. 후기 근대철학 비판가들이 보여주듯 과학에는 권력의지, 이데올로기, 실천적 의도, domination, control motive가 본질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철학도 결국 복잡한 현실을 이성적인 체계로 정신적으로 조직하려는 의도가 있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4. 철학은 학문이긴 하나 그 특성상 매우 종합적 학문이다. 철학은 실재의 어느 한 구체적 양상을 주목하기 보다 전체를 보고자 하며, 그 전체의 원리, 부분들과의 관계, 보편적 진리를 추구한다. 이러한 성격을 인해서 철학은 실재의 다양성 보다 그것의 보편적 특성을 언어적으로 모아놓은 개념 (concept)에 주목한다. 또 세계의 다양성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생각의 세계 속에서 생각을 도구로 사물을 정리하고 그 원리를 파악하고자 한다. (신동화 장로의 예: 바쁘게 서둘지 말고 앉아서 생각해라) 다른 학문들도 그러하지만 철학은 특히 생각을 주로 사용하는 학문이다.


5. 다른 학문들이 그렇듯이 철학도 그 대상인 실재 (그 전체)를 있는 그대로 상식적으로, 또는 일상경험적으로 파악하는 대신 특별한 자세로 접근한다. 방법론 (meta+hodos               )라고 부르는 이 특별한 자세들에는 여러가지 형태들이 있을 수 있다. 즉 방법론을 최초로 거론한 데카르트의 의심의 방법, 소크라테스-플라톤의 대화, 중세의 부정적 철학 via negativa, 칸트의 비판철학,  헤겔의 변증법, 현상학, 언어분석 등등. 이 모두가 접근방식은 다르나 결국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세계를 생각 속에서 이 방법을 통해 분류 정리하여 그 중 가장 중요한 실재, 원리를 파악하고 그로 말미암아 우주에 있다고 가정한 질서, 원리를 발견하거나 아니면 인간 이성의 원리를 따라 제정하여 삶의 근거와 원리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6.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철학은 첫째 논리적인, 그리고 둘째로 분석적인, 세째로 논쟁적 (논쟁이란 결국 논리적인 사고를 수단으로 삼아 알고자 하는 대상을 분석하고 그것에서 도출되는 내용을 재구성/종합하여 내린 결론을 가지고 논의하는 것이다) 생각에 치중하게 된다. 이러한 이면에는 우주의 원리가 곧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라는 서양적, 또는 희랍적 정신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서양철학의 전통은 논리적 사고, 이성적 사고를 통하여 우주의 원리를 파악하고자 한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그 원리 파악에 있어 과정상 논리가 중시되었고, 이견들이 서로 대립함에 있어서 서로에게 설득 또는 설명의 원리 역시 논리적인 논쟁이었다. 여기서 분석적이고 논쟁적 자세가 중시되었던 것이다.


7. 물론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은 서양철학의 일반적 추세에 관한 것이다. 철학이 반드시 이성적인 기초에 서서 그 이성의 법칙을 따라 논리와 분석을 사용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은 질문해보야 할 문제이다. 즉 논리적이지 않고 시적이나 예술적 통찰력, 계시에 입각한 사고, 천재적 지혜, 직관, 도통한 생각 등등은 아무리 체계적이고 깊이가 있어도 철학이 될 수 없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서양철학의 전통적 입지에서 보면 논리성이 중심되지 않은 동양철학, 히브리적 지혜, 상식 이상 (또는 이하의) 󰡒개똥철학 (자기는 심각하나 남이 들어 우스운 사고),󰡓 또 근자에 문제되는 포스트모더니즘 과연 철학인가 아닌가? 바로 이 문제의 한 연장이 기독교 철학의 가능성에 관한 논의이다. 


(다) 기독교철학이 가능한가?


1. 지금부터 대략 2-30년전만 해도 철학계에서는 기독교철학이란 네모난 원과 같은 모순되는 말로 생각함이 보편적이었다. (다시 김상원씨의 예: 신앙을 못갖는 변으로서 철학자의 중립성, 종교적 편견에의 경계) 이는 철학의 자율성, 중립성, 이성의 최종적 권위의 신화 때문이었다. 이러한 신화적 신앙은 근자에 이르기 까지 철학의 저변에 깔려있었다. 즉 고대 철학이 자체의 발단을 thaumazo (trauma            ) 즉 경이, 공평무사하고 중립적인 이해가 결부되지 않은 관조적 앎 (theoria,              ) 에서 출발하고 그 실해은 바로 philos+ sophia 愛知 라고 보는 견해로 부터 시작해서 Descartes󰡑 Cogito (의심으로 무장한 이성의 자기 존재 확립), Kant의 이성의 자기비판 (이성보다 우위의 비판자 없으므로), 이성적 통찰을 위해 판단을 중지하는 에포케의 철학 등 모두가 인간 이성의 자율성 신화를 대변하고 있다.


2. 이러한 문제는 철학이 그 학문 특성상 가지고 있는 전체적 구조 파악, 본질 추구와 파악이라는 기획과 그것이 다른 학문과 문화에 미치는 영향력이 쉽게 종교의 그것을 대체할 가능성이 큰 점에 있다. 물론 이럴 경우 한 철학은 본래 의도한 philosophia의 자신의 상대성, 지속적 추구라는 성격을 잃고 하나의 도그마로 변해서 이즘화 하고, 이즘, 이데올로기화한 철학은 본질에 있어 종교와 다름없다. 철학이 세계관을 대처하게 되고 현대는 절대가 무너진 후, 인간이성에 의한 기초를 찾기 시작하면서 자연히 방법상 차이가 강조되어 수많은 세계관 (종교적 안목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3. 사실상 철학도 하나의 학문이며, 모든 학문이 그러하듯 비이론, 초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으며 그 기초는 성격상 종교적이다. 모든 학문은 전 이론적인 삶의 비젼, 상식적 체계 (비판되지 않은 자의식적이지 않고 전통적으로 주어진 삶의 종합적 안목)으로서의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


4. 이렇게 볼 때에 어느 철학이 기독교 철학이냐 비기독교 철학이냐의 문제는 그 철학 기초에 어떤 종교적 전제가 놓여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이점은 다른 학문들, 문화가 기독교적이냐 아니냐를 규정하는 원칙적 기준이 된다. 어떤 학문, 철학, 문화가 기독교적이냐 하는 것은 그것의 기초를 형성하는 세계관이 기독교적이냐 하는 것에 달려있다. 또 기독교적이라 함은 바로 어떤 인간적 전통을 의미하지 않고 성경적 전통을 뜻하는데, 앞으로 보게될 것이지만 대개 성경적 세계관은 세개의 기본진리인 창조, 타락, 구속의 렌즈를 통하여 세상을 이해함을 뜻한다.


5. 그러나 그 기초의 문제가 일단 정리되고 난 후, 어떤 사고체계가 기독교 철학이냐 아니냐를 규정함에는 그것이 모종의 방법으로서 삶을 반성하고 있느냐 하는가에 달려있다. 철학이란 단지 상식적인 생각을 말하지 않고 평소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내용을 전체적인 시각에서 의식적 반성에로 가져오는 작업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일상경험의 내용들을 왜? 라는 질문으로 따져보는 자세라 할 수 있다. 종교적 자세는 실재에 대해 왜?를 묻기보다 주어진 답에 대해 󰡒그러면 그것을 믿을 것인가?󰡓를 직면한다. 반면 철학적 자세는 심지어 왜 존재가 있고 무존재는 있지 아니한가?를 묻는다.


6. 기독교철학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를 두고 (이성이란 무엇이냐 라는 기초적 질문에 대한 답을 포함해서) 성경적 세계관에 의해 삶의 내용들을 반성하는 것이다. 또 철학은 극히 인간적인 기획으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경험을 성경의 가르침에 끊임없이 비교 비판하는 중에 이루진 결과요 산물이다. 또 이는 철학의 본래적 이상대로 새로운 경험과 새로 터득한 성경의 진리에 의해 계속 개선하고 개조해야할 과제이지 일부 카토릭 철학자들이 그러하듯 중세 스콜라주의 철학처럼 어느 한 철학을 소위 philosophia perennis 만고불변의 영속적 철학으로 독단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도예베르트 자신이 이점을 강조한다.) 개혁주의의 정신은 글자 그대로 Semper Reformenda의 정신을 그 철학적 기획에서도 기본 방침으로 한다.


7. 이 점이 기독교 철학을 신학과 구분하게 한다. 신학도 하나의 학문이라는 점에서는 계시 그 자체와 구분되어 하나님 말씀이 갖는 권위와 무오성을 주장할 수 없다. 신학은 시대적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신학이 실천적이고 목회적일수록 이면이 강하다. (예: 변증으로, 이단과의 싸움 가운데 체계화되는 신학의 loci, confession들) 그러나 다른 한면에 있어 신학은 성경의 계시적 내용들을 직접으로 다루고, 그것을 주로 하여 체계화 하므로 기독교 철학보다는 보다 성경에 가까이 있고 그런 면에서 더 권위가 있다 하겠다.


8. 반면에 기독교 철학은 그것을 통하여 우리 일상생활을 기독교인 답게 생활하는데 보조역활을 할 수 있는 임시적 표준이라 볼 수 있다. 손봉호의 정의. 즉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이상처럼 반성되지 않은 가치없는 삶이 아닌 진정한 기독교인적 삶을 형성함에 기독교 철학의 기획이 유용하다. 이러한 철학은 성경에 의해 계속 비판을 받아야 한다.


9. 이러한 기독교 철학의 기획은 가능할 뿐 아니라 삶을 바른 성경적 기초에 올려놓는 일에 반드시 필요하다.



(라) 기독교철학의 발단의 배경

(손봉호, 칼스베이끄 기독교세계관 3-6쪽)


1.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특히 철학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그 이면에는 역사적 원인과 본질적 원인이 있다.


2. 역사적 원인: 팔레스타인에 기원지를 둔 기독교 신앙은 문화권으로는 헬라문명을 배경으로 한 지중해 연안에서 발전하였다. 헬라-로마 문명은 철학 을 기초로 발전한 독특한 문화였다.  복음 그 자체는 철학적이거나 사변적인 것이 아니다. 매우 실천적이고 종교적이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사변적인 헬라-로마 문화와 접하게 될 때에 거기에는 두가지 면에서 철학과 불가피한 접촉이 일어났다. 첫째로 복음과 교회를 옹호하는 변증적인 목적과 전도의 목적에서 희랍문화의 핵인 철학을 도외시할 수 없었다. 즉 철학적 사변에 젖은 문화에 대해 복음이 비논리적이건나 무논리한 것으로 제시하기를 주저하였던 것이다. 


3. 본질적 원인: 기독교 신앙은 계시에 근본을 둔 신앙이다. 이 신앙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에 기초한 신앙이다. 그러나 이 계시의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이 중심을 이루며, 그 기록된 계시라는 성격으로 인해 역사와 문화를 초월해있지 않다.

        물론 계시의 내용과 그 신적기원은 초월적인 것이지만 그 형식과 전달 방식으로 인해 그것은 역사와 문화적 환경속에 있게되었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성을 약화하기 보다 오히려 그 역사성과 구체성을 통해서 복음의 진리됨, 실질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성경계시는 초월적 진리의 성육신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기록된 계시로 전해진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고, 의미가 파악되어야 하는 진리이다. (예: classical Greek아닌 서민적 시장 상용어적 Koine (Common)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  성경은 주문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말로 당시의 문화와 역사속에 분명히 이해되는 문장으로 쓰여졌다. 기독교는 책 (biblos, book)의 신앙이고 그 계시인 성경의 진리를 기반으로 조직한 교리가 명제화될 수 있는 (성경자체가 명제는 아니나) 신앙이다. 이러한 진리는 의미가 파악되어야 비로서 믿어지고 고백될 수 있는 신앙이다. 이러한 계시적 신앙의 독특성 때문에 첫째로는 인간의 직관과 경험을 토대로 하는 자율적 사색의 철학과 대립관계에 들어오며, 둘 째로는 이 계시적 진리이해에 철학적 사색을 방법으로 이용하려는 시도가 있게 되었다. (로고스와 말씀의 일치 추정, 헬라적 사색의 틀과 용어로서 성경적 진리를 이해하려는 시도등. 신플라톤주의의 이원론과 영 육의 구분의 접목등의 예)


4. 초기의 기독교회는 이처럼 철학과 불편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그것에 무지할 수 없는 특이한 관계속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철학적 용어로서 복음이 설명되고 신학이 체계화되는 경우에 얼마만한 비성경적 배경과 함축이 의식, 무의식적으로 따라 들어오게 되는가 하는 소위 logos Theology 의 논의는 요한사도 이후 오늘날 까지 신학에 있어 주요한 문제이다.)


5. 이 불편한 관계속에서의 갈등은 이미 신약성경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의 한 두드러진 예가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를 구분한 사도바울에게서 잘 나타난다. (The Philosophy of the Church Fathers: Faith, Trinity, Incarnation, 3rd ed. Harry Austryn Wolfs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6.pp. 1-23, 참고 Cornelius Van Til, Paul at Athen)

        사도 바울에게는 팔레스타인과 알렉산드리아 (특히 필로에게서 예시된)의 유대교에서 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신 선재적 지혜와 인간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얻은 인간의 지혜의 두종류의 지혜를 구분하였다. 첫째로 하나님의 지혜는 구약에서 처음으로 계시되었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지혜이다. 그는 이것을 구약의 표현에 따라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 (epignwsis, epignosis, precise and correct knowledge, full knowledge of God)" 호4:1, 6:6, 잠2:5, 골 1:10, 또는 그리스도의 지식, 빌3:8,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한 지식 엡4:13 이라 부른다. 이 하나님의 지혜, 또는 지식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종함을 바울은 믿음 (pistis, pistis)으로 그린다.       

        이에 반해 세상의 지혜란 희랍인의 철학, 즉 고전1:22의 "헬라인은 지식을 구하고"에서 나오는 지혜를 말한다. 그가 고전 3;19에서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  있어 우매"라 하지만 그러나 거기에 일말의 진리가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헬레니스틱 유대인 저자들 (필로 같은) 처럼 바울도 희랍철학에는 한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대한 어떤 어렴풋한 이해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골2:8의 철학과 속임수에 대한 경고는 철학 전체를 무조건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교부들 (오리겐)이 지적한 바와같이 헛된 속임수에 기초한 철학에 대한 정죄이다.

        바울 자신은 그가 철학공부를 했다는 증거를 주지않는다. 그러나 롬7:18, 21, 고후 13:7, 골4:18; 6:9, 살전5:21 등에 to kalon (kalon) 나 빌4:8의 arete (areth) 등과 같은 철학적 용어의 사용, 그리고 행17:28의 스토익 시인 O(A)ratus과 개연적으로 Cleanthes으로 부터, 그리고 고전15:33의  Menander로 부터의 인용등은 그가 철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헬레니스틱 유대 철학 문헌에 방대한 지식을 갖고있었다. 그의 선재하는 지혜에 대한 설명은 솔로몬의 지혜서에, 그리고 그의 서신의 여러곳이 필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헬라적 유대 철학자들이 율법을 전할 때 사용하던 방법과는 정반대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새로운 복음의 전파가 철학적 논증으로 증거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지혜를 헬라인이 추구하는 철학적 지혜와 구분한 고전1:20-22의 맥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은 "말의 지혜아니요 (설득력 있는 말로 복음을 치장함)"로 복음을 전하려 함이 아니었다고 확언한다. 그는 자신의 목표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한 "믿음"을 심는 것이라고 확언한다 (고전2:4,5,7) 이러한 자세가 아테네에서 그의 전도에 나타난다. 그는 철학 자들이 섞인 아레오바고의 군중들을 향해서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육체부활과 재림,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고, 그들 일부의 조롱에 굴하지 않았으며, "다시 듣겠다"는 말에 유혹되지 않았으며 오직 소수의 영접자들에 만족했던 것이다. 바울의 異敎와 이방세계의 철학에 대한 자세는 단호했다. 그는 이교를 전적으로 배격하고, 그 철학의 사용 또한 전적으로 배격했던 것이다.


5. 바울의 이런 태도 중 이교에 대한 자세는 초대교부들 가운데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철학에 대한 바울의 자세는 그렇지 못했다. 초기 속사도 교부들 (the Apostolic Fathers, ca. 90-160)에게서는 대체로 철학의 배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철학을 대하는 교회의 자세는 2세기 후반의 교부들 가운데 변증가들 (Apologists)로 불리우는 이들에게 있어 변화가 왔다. 하르낙 Harnack의 지적처럼 그들에게 와서는 철학이 유대교가 필로에 의해 전해지는 방식과 흡사한 방식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철학화한 기독교가 일어나는데는 다음의 세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1. 철학의 훈련을 받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함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 철학자로 알려진 Aristides (136-61), Clement of Alexandria (ca. 185-211/215)는 본래 철학자들로 이교에서 개종한 이들이었다. Justin Martyr, Tatian, Theophilus과 무엇보다도 Augustine이 잘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들에게 있어 공통점은 구약성경이 개종에 기여했다는 점, 그들이 인용하는 구약성귀로 볼 때 그들의 이해가 필로의 설교가 늘 동반되어 이해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적극적으로 철학을 수용하려 했던 Justine Martyr나 Clement등은 제외하고라도 심지어 철학을 극도로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 Tertullian도 철학에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다.   즉 그들은 필로의 눈을 통해서 구약을 하나의 철학적 논술로서 보고있다. 필로가 그러하듯이 그들도 자신들의 철학적 지식을 성경이해에 늘 집어넣고 있다. (reading into) 이에 대해 터툴리안은 그의 De Test. Animae I 에서 "실로 고대 문헌들에 대한 그들의 탐구적 노력을 여전히 계속하여 그것의 기억에 사로잡혀있는 어떤 이들이 우리 손에 있는 이런 류 (즉 성경의 진리 옹호에 철학자들을 인용하는) 의 책들을 쓰고있다"고 평했던 것이다.

        2. 철학이 기독교에 대한 정죄에 대항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유대교에 대한 "무신론자" 라는 비난 이외에 영아살해,식인, 근친상간, 반국가 등의 새로운 정죄에 대하여 교부들은 이방 철학자들이 이방적 종교의식 비판에 대한 논리를 사용하였다.

        3. 철학이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예방및 해독제 로서의 소용에 더 유효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영지주의의 특성은 신약성경을 극단적 알레고리적 해석하여 기독교를 이교의 한껍대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반대하여 이레니우스나 터툴리안은 영지주의가 이교적 신화와 철학의 잘못된 가르침에 입각한 것으로 얼마나 기독교와 일치할 수 없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이에 반해 클레멘트 같은 이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헬라 철학자들의 참된 원리들과 교회의 전통적 신앙에 서있는 새로운 기독교 철학을 세우고자 했다. 특히 클레멘트는 영지주의자들이 오용하는 "그노시스" 라는 성경적 용어를 되찾고자 하며, 자신의 기독교 철학을 세우면서 그것을 "참된 철학 (the true philosophy)"이라 부를 뿐 아니라 자신의 철학이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그노시스(false gnosis) 에 대하여 "진리의 그노시스" (the gnosis of the truth)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2세기에 기독교에 들어온 철학은 간헐적인 반대가 없지는 않았으나 헬라교부와 라틴교부들 모두에 계속적 영향을 미쳤다.

        물론 필로나 교부들이 희랍철학을 전혀 무비판적으로 수용을 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필로는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 한 프로타고라스를 비판하며 그 증거로 성경을 사용한다.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세계의 영원성을, 스토익파는 하나님을 물질적인 무엇으로 만듬에 대해 비판한다. 그들은 한 편으로 성경이 어떻게 철학자들의 바른 견해를 앞질러 예견하고 있는지를 보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예견에서 철학자들의 잘못을 정죄하고 있는지 보이는 전략을 쓰고있다. 필로는 또한 철학이 그 자체로는 우리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참된 지식에로 인도하지 못함을 보이려고 했는데 교부들도 이 전략에 있어 대동소이하다. 교부들은 철학의 오류들을 알고있었고 그것이 이단의 근원이 된다고 비판했다. 또 그들은 철학이 철학자, 학파들 간에 일치하지 못함을 들어 그것이 진리의 인도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져스틴 마터, 타티안, 특히 Hermias' "The Ridicule of Gentile Philosophers")

        헬라주의적 유대교에 있어서와 바울에게서 처럼 초대교부들에 있어서도 철학에 대한 자세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성경적 신앙, 기독교와 다름을 분명히 하고있다. (그러므로 이 입장을 일부 변증가와 후대 아퀴나스의 노골적인 synthesis에 비해 여전히 일반적으로는 antithesis 적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은 때때로 잘못을 범하나 계시인 기독교는 늘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의 오류는 대개 인간적 한계, 인간의 능력 (즉 "인간의 감각과 인간의 이성, 논증")의 제한에서 오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이 종종 신적인 계시와 대조되고 있다.

        이런 자세에는 다음의 세가지 질문이 따른다. (1) 성경의 진리성 주장: 이들은 필로와 거의 흡사하게 성경의 진리성을 대개 1. 기적 (모세, 또는 예수님), 2. 예언의 적중, 3. (모세나 예수님 가르침의) 내재적 우월성, 4. 그 교훈의 실제적 효능 (성결증진등) 으로 주장한다. (2) 어떻게 계시 고유의 진리가 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나: 나아가 그들은 필로와 또한 유사하게 헬라철학에 나타나는 부분적 진리의 근원에 대하여, 1. 유대인들에게서 빌려간 것 (아브라함, 모세, 욥기의 고대성 주장), 2. 그들의 자연적 이성이 (물론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던 것 아니다) 발견한 것, 3.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 설명하였다. (3) 이들은 성경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하여 계시없이 발견되어 철학적 언어로 표현된 진리들을 계시로 주어지고 성경적 언어로 표현된 진리와 일치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풀었다.


6. 헬라철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가 불편한 것은 세속적 서구사상 즉 헬라사상의 뿌리에 이성중심, 종교적 중립성의 신화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서구 사상사에 드러나는 이성과 신앙의 문제는 종교란 항상 반성이전의 믿음의 문제요, 일방적이고 비과학적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반면 철학은 확고부동한 논리적 기초에서 시작하여 엄밀성, 합리성, 필연성에 근거하여 전개된 확고한 지식체계라는 편견이 깔려있다. 


7. 또한 철학은 그 성격상 실재에 대한 종합적이고 포괄적 이해를 지향하므로 그것이 하나의 세계관을 제시하면서 이데올로기, 종교의 대체물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의 철학이 세계관으로서 (절대적 입장을 초이론적으로 주장하는) 종교의 대체물이 된 경우  기독교 신앙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8. 교회 역사상 이러한 대립과 조화의 양면이 늘 있어왔으나 이 두가지 면을 반성적으로 체계화하여 기독교와 철학의 관계가 대립과 종합의 역사를 거쳤음을 보인 것은 화란의 볼렌호벤과 도예베르트였고, 이러한 면에서 이들은 최초가 아니면 가장 체계적인 기독교 철학 체계를 세우려 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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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철학 강의안 (1995년)

(I) 기독교 철학이란 무엇인가?


(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1. (서양) 철학에 대한 한국적 오해: 흔히 동양적 문화 유산에 속한 우리는 서양철학의 성격을 오해할 경우가 많다. 동양에서의 철학은 흔히 도를 닦아 준신선이 되는 일면 신비하고 유사종교적 행위로 인식된다. 그래서 철학하면 참선, 묵상, 입산수도등을 연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 김상원 형제의 예) 또 20세기 한국의 역사상황을 바탕으로 강한 영향을 미친 실존주의로 인해서 철학이 주로 우수에 젖어 인생의 부조리와 삶은 탄하는 반시인적, 예술적 상상력을 연상하기도 한다.


2. 물론 이러한 자세가 철학의 한 유파나 자세를 반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서양문화에 있어 철학이라 할 때에 그 말이 뜻하는 것은 이러한 신비적, 종교적, 예술적 상상력과는 크게 다른 그 무엇을 의미한다.


3. 서양, 특히 근대적 서양?¡ 있어 철학이란 하나의 고도화된 학문이다. 철학은 학문의 학문, 또는 학문 중의 학문으로 여겨져 왔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학문이란 삶의 다른 자세와 달리 실재를 대함에 있어 특수한 자세를 견지한다. 그 특수한 자세에는 실재의 추상적 분리, 객관화, 거리둠, 대상화와 원리 발견의 추구등이 포함된다. 예를 들면 실재에서 분리되지 않는 현상, 즉 물의 화학󰡓적󰡓 면을 추상적으로 접근하며 그 추상화한 일면을 실체화한 후 대상화, 객체화하여 관찰함으로 원리를 발견하고자 하며, 결국 그 원리발견으로 주체의 유익을 도모하고자 한다. (과학은 원리추구, 기술은 그 원리의 실제적 적용이라는 분리는 하나의 근대적 신화이다. 후기 근대철학 비판가들이 보여주듯 과학에는 권력의지, 이데올로기, 실천적 의도, domination, control motive가 본질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철학도 결국 복잡한 현실을 이성적인 체계로 정신적으로 조직하려는 의도가 있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4. 철학은 학문이긴 하나 그 특성상 매우 종합적 학문이다. 철학은 실재의 어느 한 구체적 양상을 주목하기 보다 전체를 보고자 하며, 그 전체의 원리, 부분들과의 관계, 보편적 진리를 추구한다. 이러한 성격을 인해서 철학은 실재의 다양성 보다 그것의 특성을 언어적으로 모아놓은 개념 (concept)에 주목한다. 또 외면적 세계의 다양성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생각의 세계 속에서 생각을 도구로 사물을 정리하고 그 원리를 파악하고자 한다. 다른 학문들도 (고급단계에서는 결국) 그러하지만 (신동화 장로의 예) 철학은 특히 생각을 주로 사용하는 학문이다.


5. 다른 학문들이 그렇듯이 철학도 그 대상인 실재 (그 전체)를 있는 그대로 상식적으로, 또는 일상경험적으로 파악하는 대신 특별한 자세로 접근한다. 방법론 (meta+hodos               )라고 부르는 이 특별한 자세들에는 여러가지 형태들이 있을 수 있다. 즉 방법론을 최초로 거론한 데카르트의 의심의 방법, 소크라테스-플라톤의 대화, 중세의 부정적 철학 via negativa, 칸트의 비판철학,  헤겔의 변증법, 현상학, 언어분석 등등. 이 모두가 접근방식은 다르나 결국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세계를 생각 속에서 이 방법을 통해 분류 정리하여 그 중 가장 중요한 실재, 원리를 파악하고 그로 말미암아 우주에 있다고 가정한 질서, 원리를 발견하거나 아니면 인간 이성의 원리를 따라 제정하여 삶의 근거와 원리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6.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철학은 첫째 논리적인, 그리고 둘째로 분석적인, 세째로 논리적인 논쟁적 생각에 치중하게 된다. 이러한 이면에는 우주의 원리가 곧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라는 서양적, 또는 희랍적 정신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서양철학의 전통은 논리적 사고, 이성적 사고를 통하여 이성 그 자체인 우주의 원리를 파악하고자 한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그 원리 파악에 있어 과정상 논리가 중시되었고, 이견들이 서로 대립함에 있어서 서로에게 설득 또는 설명의 원리 역시 논리적인 논쟁이었다. 여기서 분석적이고 논쟁적 자세가 중시되었던 것이다.


7. 물론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은 서양철학의 일반적 추세에 관한 것이다. 철학이 반드시 이성적인 기초에 서서 그 이성의 법칙을 따라 논리와 분석을 사용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은 질문해보야 할 문제이다. 즉 논리적이지 않고 시적이나 예술적 통찰력, 계시에 입각한 사고, 천재적 지혜, 직관, 도통한 생각 등등은 아무리 체계적이고 깊이가 있어도 철학이 될 수 없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서양철학의 전통적 입지에서 보면 논리성이 중심되지 않은 동양철학, 히브리적 지혜, 상식 이상 (또는 이하의) 󰡒개똥?또Ð (자기는 심각하나 남이 들어 우스운 사고),󰡓 또 근자에 문제되는 포스트모더니즘 과연 철학인가 아닌가? 바로 이 문제의 한 연장이 기독교 철학의 가능성에 관한 논의이다. 


(나) 기독교철학이 가능한가?


1. 지금부터 대략 2-30년전만 해도 철학계에서는 기독교철학이란 네모난 원과 같은 모순되는 말로 생각함이 보편적이었다. (다시 김상원씨의 예: 신앙을 못갖는 변으로서 철학자의 중립성, 종교적 편견에의 경계) 이는 철학의 자율성, 중립성, 이성의 최종적 권위의 신화 때문이었다. 이러한 신화적 신앙은 근자에 이르기 까지 철학의 저변에 깔려있었다. 즉 고대 철학이 자체의 발단을 thaumazo (trauma        

           ) 즉 경이, 공평무사하고 중립적인 이해가 결부되지 않은 관조적 앎 (theoria,              ) 에서 출발하고 그 실해은 바로 philos+ sophia 愛知 라고 보는 견해로 부터 시작해서 Descartes󰡑 Cogito (의심으로 무장한 이성의 자기 존재 확립), Kant의 이성의 자기비판 (이성보다 우위의 비판자 없으므로), 이성적 통찰을 위해 판단을 중지하는 에포케의 철학 등 모두가 인간 이성의 자율성 신화를 대변하고 있다.


2. 이러한 문제는 철학이 그 학문 특성상  ≠側í 있는 전체적 구조 파악, 본질 추구와 파악이라는 기획과 그것이 다른 학문과 문화에 미치는 영향력이 쉽게 종교의 그것을 대체할 가능성이 큰 점에 있다. 물론 이럴 경우 한 철학은 본래 의도한 philosophia의 자신의 상대성, 지속적 추구라는 성격을 잃고 하나의 도그마로 변해서 이즘화 하고, 이즘, 이데올로기화한 철학은 본질에 있어 종교와 다름없다. 철학이 세계관을 대처하게 되고 현대는 절대가 무너진 후, 인간이성에 의한 기초를 찾기 시작하면서 자연히 방법상 차이가 강조되어 수많은 세계관 (종교적 안목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3. 사실상 철학도 하나의 학문이며, 모든 학문이 그러하듯 비이론, 초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으며 그 기초는 성격상 종교적이다. 모든 학문은 전 이론적인 삶의 비젼, 상식적 체계 (비판되지 않은 자의식적이지 않고 전통적으로 주어진 삶의 종합적 안목)으로서의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


4. 이렇게 볼 때에 어느 철학이 기독교 철학이냐 비기독교 철학이냐의 문제는 그 철학 기초에 어떤 종교적 전제가 놓여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이점은 다른 학문들, 문화가 기독교적이냐 아니냐를 규정하는 원칙적 기준이 된다. 어떤 학문, 철학, 문화가  竪떡냅岵犬Ä 하는 것은 그것의 기초를 형성하는 세계관이 기독교적이냐 하는 것에 달려있다. 또 기독교적이라 함은 바로 어떤 인간적 전통을 의미하지 않고 성경적 전통을 뜻하는데, 앞으로 보게될 것이지만 대개 성경적 세계관은 세개의 기본진리인 창조, 타락, 구속의 렌즈를 통하여 세상을 이해함을 뜻한다.


5. 그러나 그 기초의 문제가 일단 정리되고 난 후, 어떤 사고체계가 기독교 철학이냐 아니냐를 규정함에는 그것이 모종의 방법으로서 삶을 반성하고 있느냐 하는가에 달려있다. 철학이란 단지 상식적인 생각을 말하지 않고 평소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내용을 전체적인 시각에서 의식적 반성에로 가져오는 작업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일상경험의 내용들을 왜? 라는 질문으로 따져보는 자세라 할 수 있다. 종교적 자세는 실재에 대해 왜?를 묻기보다 주어진 답에 대해 󰡒그러면 그것을 믿을 것인가?󰡓를 직면한다. 반면 철학적 자세는 심지어 왜 존재가 있고 무존재는 있지 아니한가?를 묻는다.


6. 기독교철학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를 두고 (이성이란 무엇이냐 라는 기초적 질문에 대한 답을 포함해서) 성경적 세계관에 의해 삶의 내용들을 반성하는 것이다. 또 철학은 극히 인간적인 기획으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경험을 성경의 가르침에 끊임없이 비교 비판하는 중에 이루진 결과요 산물이다. 또 이는 철학의 본래적 이상대로 새로운 경험과 새로 터득한 성경의 진리에 의해 계속 개선하고 개조해야할 과제이지 일부 카토릭 철학자들이 그러하듯 중세 스콜라주의 철학처럼 어느 한 철학을 소위 philosophia perennis 만고불변의 영속적 철학으로 독단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도예베르트 자신이 이점을 강조한다.) 개혁주의의 정신은 글자 그대로 Semper Reformenda의 정신을 그 철학적 기획에서도 기본 방침으로 한다.


7. 이 점이  기독교 철학을 신학과 구분하게 한다. 신학도 하나의 학문이라는 점에서는 계시 그 자체와 구분되어 하나님 말씀이 갖는 권위와 무오성을 주장할 수 없다. 신학은 시대적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신학이 실천적이고 목회적일수록 이면이 강하다. (예: 변증으로, 이단과의 싸움 가운데 체계화되는 신학의 loci, confession들) 그러나 다른 한면에 있어 신학은 성경의 계시적 내용들을 직접으로 다루고, 그것을 주로 하여 체계화 하므로 기독교 철학보다는 보다 성경에 가까이 있고 그런 면에서 더 권위가 있다 하겠다.


8. 반면에 기독교 철학은 그것을 통하여 우리 일상생활을 기독교인 답게 생활하는데 보조역활을 할 수 있는 임시적 표준이라 볼 수 있다. 손봉호의 정의. 즉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이상처럼 반성되지 않은 가치없는 삶이 아닌 진정한 기독교인적 삶을 형성함에 기독교 철학의 기획이 유용하다. 이러한 철학은 성경에 의해 계속 비판을 받아야 한다.


9. 이러한 기독교 철학의 기획은 가능할 뿐 아니라 삶을 바른 성경적 기초에 올려놓는 일에 반드시 필요하다.                                    


 기독교철학의 발단 (손봉호, 칼스베이끄 기독교세계관 3-6쪽)


1.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특히 철학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그 이면에는 역사적 원인과 본질적 원인이 있다.


2. 역사적 원인: 팔레스타인에 기원지를 둔 기독교 신앙은 문화권으로는 헬라문명을 배경으로 한 지중해 연안에서 발전하였다. 헬라-로마 문명은 철학을 기초로 발전한 독특한 문화였다.  복음 그 자체는 철학적이거나 사변적인 것이 아니다. 매우 실천적이고 종교적이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사변적인 헬라-로마 문화와 접하게 될 때에 거기에는 두가지 면에서 철학과 불가피한 접촉이 일어났다. 첫째로 복음과 교회를 옹호하는 변증적인 목적과 전도의 목적에서 희랍문화의 핵인 철학을 도외시할 수 없었다. 즉 철학적 사변에 젖은 문화에 대해 복음이 비논리적이건나 무논리한 것으로 제시하기를 주저하였던 것이다. þ


3. 본질적 원인: 기독교 신앙은 계시에 근본을 둔 신앙이다. 이 신앙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에 기초한 신앙이다. 그러나 이 계시의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이 중심을 이루며, 그 기록된 계시라는 성격으로 인해 역사와 문화를 초월해있지 않다. (물론 계시의 내용과 그 신적기원은 초월적인 것이지만 그 형식과 전달 방식으로 인해 그것은 역사와 문화적 환경속에 있게되었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성을 약화하기 보다 오히려 그 역사성과 구체성을 통해서 복음의 진리됨, 실질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성경계시는 초월적 진리의 성육신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기록된 계시로 전해진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고, 의미가 파악되어야 하는 진리이다. (예: classical Greek아닌 서민적 시장 상용어적 Koine (Common)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  성경은 주문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말로 당시의 문화와 역사속에 분명히 이해되는 문장으로 쓰여졌다. 기독교는 책 (biblos, book)의 신앙이고 그 계시인 성경의 진리를 기반으로 조직한 교리가 명제화될 수 있는 (성경자체가 명제는 아니나) 신앙이다. 이러한 진리는 의미가 파악되어야 비로서 믿어지고 ?紫俑É 수 있는 신앙이다. 이러한 계시적 신앙의 독특성 때문에 첫째로는 인간의 직관과 경험을 토대로 하는 자율적 사색의 철학과 대립관계에 들어오며, 둘째로는 이 계시적 진리이해에 철학적 사색을 방법으로 이용하려는 시도가 있게 되었다. (로고스와 말씀의 일치 추정, 헬라적 사색의 틀과 용어로서 성경적 진리를 이해하려는 시도등. 신플라톤주의의 이원론과 영 육의 구분의 접목등의 예)


4. 초기의 기독교회는 이처럼 철학과 불편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그것에 무지할 수 없는 특이한 관계속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철학적 용어로서 복음이 설명되고 신학이 체계화되는 경우에 얼마만한 비성경적 배경과 함축이 의식, 무의식적으로 따라 들어오게 되는가 하는 소위 logos Theology 의 논의는 요한사도 이후 오늘날 까지 신학에 있어 주요한 문제이다.)


5. 이 불편한 관계속에서의 갈등은 이미 신약성경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의 한 두드러진 예가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를 구분한 사도바울에게서 잘 나타난다. (The Philosophy of the Church Fathers: Faith, Trinity, Incarnation, 3rd ed. Harry Austryn Wolfs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6.pp. 1-23, 참고 Cornelius Van Til, Paul at Athen)

        사도 바울에게는 팔레스타인과 알렉산드리아 (특히 필로에게서 예시된)의 유대교에서 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신 선재적 지혜와 인간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얻은 인간의 지혜의 두종류의 지혜를 구분하였다. 첫째로 하나님의 지혜는 구약에서 처음으로 계시되었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지혜이다. 그는 이것을 구약의 표현에 따라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 (epignwsis, epignosis, precise and correct knowledge, full knowledge of God)" 호4:1, 6:6, 잠2:5, 골 1:10, 또는 그리스도의 지식, 빌3:8,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한 지식 엡4:13 이라 부른다. 이 하나님의 지혜, 또는 지식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종함을 바울은 믿음 (pistis, pistis)으로 그린다.       

        이에 반해 세상의 지혜란 희랍인의 철학, 즉 고전1:22의 "헬라인은 지식을 구하고"에서 나오는 지혜를 말한다. 그가 고전 3;19에서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  있어 우매"라 하지만 그러나 거기에 일말의 진리가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헬레니스틱 유대인 저자들 (필로 같은) 처럼 바울도 희랍철학에는 한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刻淡¡ 대한 어떤 어렴풋한 이해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골2:8의 철학과 속임수에 대한 경고는 철학 전체를 무조건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교부들 (오리겐)이 지적한 바와같이 헛된 속임수에 기초한 철학에 대한 정죄이다.

        바울 자신은 그가 철학공부를 했다는 증거를 주지않는다. 그러나 롬7:18, 21, 고후 13:7, 골4:18; 6:9, 살전5:21 등에 to kalon (kalon) 나 빌4:8의 arete (areth) 등과 같은 철학적 용어의 사용, 그리고 행17:28의 스토익 시인 O(A)ratus과 개연적으로 Cleanthes으로 부터, 그리고 고전15:33의  Menander로 부터의 인용등은 그가 철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헬레니스틱 유대 철학 문헌에 방대한 지식을 갖고있었다. 그의 선재하는 지혜에 대한 설명은 솔로몬의 지혜서에, 그리고 그의 서신의 여러곳이 필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헬라적 유대 철학자들이 율법을 전할 때 사용하던 방법과는 정반대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새로운 복음의 전파가 철학적 논증으로 증거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지혜를 헬라인이 추구하는 철학적 지혜와 구분한 고전1:20-22윽Ç 맥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은 "말의 지혜아니요 (설득력 있는 말로 복음을 치장함)"로 복음을 전하려 함이 아니었다고 확언한다. 그는 자신의 목표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한 "믿음"을 심는 것이라고 확언한다 (고전2:4,5,7) 이러한 자세가 아테네에서 그의 전도에 나타난다. 그는 철학자들이 섞인 아레오바고의 군중들을 향해서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육체부활과 재림,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고, 그들 일부의 조롱에 굴하지 않았으며, "다시 듣겠다"는 말에 유혹되지 않았으며 오직 소수의 영접자들에 만족했던 것이다. 바울의 異敎와 이방세계의 철학에 대한 자세는 단호했다. 그는 이교를 전적으로 배격하고, 그 철학의 사용 또한 전적으로 배격했던 것이다.


5. 바울의 이런 태도 중 이교에 대한 자세는 초대교부들 가운데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철학에 대한 바울의 자세는 그렇지 못했다. 초기 속사도 교부들 (the Apostolic Fathers, ca. 90-160)에게서는 대체로 철학의 배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철학을 대하는 교회의 자세는 2세기 후반의 교부들 4가운데 변증가들 (Apologists)로 불리우는 이들에게 있어 변화가 왔다. 하르낙 Harnack의 지적처럼 그들에게 와서는 철학이 유대교가 필로에 의해 전해지는 방식과 흡사한 방식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철학화한 기독교가 일어나는데는 다음의 세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1. 철학의 훈련을 받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함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 철학자로 알려진 Aristides (136-61), Clement of Alexandria (ca. 185-211/215)는 본래 철학자들로 이교에서 개종한 이들이었다. Justin Martyr, Tatian, Theophilus과 무엇보다도 Augustine이 잘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들에게 있어 공통점은 구약성경이 개"종에 기여했다는 점, 그들이 인용하는 구약성귀로 볼 때 그들의 이해가 필로의 설교가 늘 동반되어 이해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적극적으로 철학을 수용하려 했던 Justine Martyr나 Clement등은 제외하고라도 심지어 철학을 극도로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 Tertullian도 철학에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다.   즉 그들은 필로의 눈을 통해서 구약을 하나의 철학적 논술로서 보고있다. 필로가 그러하듯이 그들도 자신들의 철학적 지식을 성경이해에 늘 집어넣고 있다. (reading into) 이에 대해 터툴리안은 그의 De Test. Animae I 에서 "실로 고대 문헌들에 대한 그들의 탐구적 노력을¾ 여전히 계속하여 그것의 기억에 사로잡혀있는 어떤 이들이 우리 손에 있는 이런 류 (즉 성경의 진리 옹호에 철학자들을 인용하는) 의 책들을 쓰고있다"고 평했던 것이다.

        2. 철학이 기독교에 대한 정죄에 대항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유대교에 대한 "무신론자" 라는 비난 이외에 영아살해,식인, 근친상간, 반국가 등의 새로운 정죄에 대하여 교부들은 이방 철학자들이 이방적 종교의식 비판에 대한 논리를 사용하였다.

        3. 철학이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예방및 해독제 로서의 소용에 더 유효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영지주의의 특성은 신약성경을 극단적 알레고리적 해석하여 기독교를 이교의 한껍대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반대하여 이레니우스나 터툴리안은 영지주의가 이교적 신화와 철학의 잘못된 가르침에 입각한 것으로 얼마나 기독교와 일치할 수 없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이에 반해 클레멘트 같은 이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헬라 철학자들의 참된 원리들과 교회의 전통적 신앙에 서있는 새로운 기독교 철학을 세우고자 했다. 특히 클레멘트는 영지주의자들이 오용하는 "그노시스" 라는 성경적 용어뫖¦ 되찾고자 하며, 자신의 기독교 철학을 세우면서 그것을 "참된 철학 (the true philosophy)"이라 부를 뿐 아니라 자신의 철학이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그노시스(false gnosis) 에 대하여 "진리의 그노시스" (the gnosis of the truth)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2세기에 기독교에 들어온 철학은 간헐적인 반대가 없지는 않았으나 헬라교부와 라틴교부들 모두에 계속적 영향을 미쳤다.

        물론 필로나 교부들이 희랍철학을 전혀 무비판적으로 수용을 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필로는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 한 프로타고라스를 비판하며 그 증거로 성경을 사용한다.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세계의 영원성을, 스토익파는 하나님을 물질적인 무엇으로 만듬에 대해 비판한다. 그들은 한편으로 성경이 어떻게 철학자들의 바른 견해를 앞질러 예견하고 있는지를 보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예견에서 철학자들의 잘못을 정죄하고 있는지 보이는 전략을 쓰고있다. 필로는 또한 철학이 그 자체로는 우리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참된 지식에로 인도하지 못함을 보이려고 했는데 교부들탚µ 이 전략에 있어 대동소이하다. 교부들은 철학의 오류들을 알고있었고 그것이 이단의 근원이 된다고 비판했다. 또 그들은 철학이 철학자, 학파들 간에 일치하지 못함을 들어 그것이 진리의 인도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져스틴 마터, 타티안, 특히 Hermias' "The Ridicule of Gentile Philosophers")

        헬라주의적 유대교에 있어서와 바울에게서 처럼 초대교부들에 있어서도 철학에 대한 자세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성경적 신앙, 기독교와 다름을 분명히 하고있다. (그러므로 이 입장을 일부 변증가와 후대 아퀴나스의 노골적인 synthesis에 비해 여전히 일반적으로는 antithesis 적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은 때때로 잘못을 범하나 계시인 기독교는 늘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의 오류는 대개 인간적 한계, 인간의 능력 (즉 "인간의 감각과 인간의 이성, 논증")의 제한에서 오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이 종종 신적인 계시와 대조되고 있다.

        이런 자세에는 다음의 세가지 질문이 따른다. (1) 성경의 진리성 주장: 이들은 필로와 거의 흡사하게 성경의Ì 진리성을 대개 1. 기적 (모세, 또는 예수님), 2. 예언의 적중, 3. (모세나 예수님 가르침의) 내재적 우월성, 4. 그 교훈의 실제적 효능 (성결증진등) 으로 주장한다. (2) 어떻게 계시 고유의 진리가 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나: 나아가 그들은 필로와 또한 유사하게 헬라철학에 나타나는 부분적 진리의 근원에 대하여, 1. 유대인들에게서 빌려간 것 (아브라함, 모세, 욥기의 고대성 주장), 2. 그들의 자연적 이성이 (물론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던 것 아니다) 발견한 것, 3.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 설명하였다. (3) 이들은 성경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하여 계시없이 발견되어 철학적 언어로 표현된 진리들을 계시로 주어지고 성경적 언어로 표현된 진리와 일치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풀었다.


6. 헬라철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가 불편한 것은 세속적 펇󰏫말瀯ó 즉 헬라사상의 뿌리에 이성중심, 종교적 중립성의 신화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서구 사상사에 드러나는 이성과 신앙의 문제는 종교란 항상 반성이전의 믿음의 문제요, 일방적이고 비과학적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반면 철학은 확고부동한 논리적 기초에서 시작하여 엄밀성, 합리성, 필연성에 근거하여 전개된 확고한 지식체계라는 편견이 깔려있다. 


7. 또한 철학은 그 성격상 실재에 대한 종합적이고 포괄적 이해를 지향하므로 그것이 하나의 세계관을 제시하면서 이데올로기, 종교의 대체물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의 철학이 세계관으로서 (절대적 입장을 초이론적으로 주장하는) 종교의 대체물이 된 경우  기독교 신앙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8. 교회 역사상 이러한 대립과 조화의 양면이 늘 있어왔으나 이 두가지 면을 반성적으로 체계화하여 기독교와 철학의 관계가 대립과 종합의 역사를 거쳤음을 보인 것은 화란의 볼렌호벤과 도예베르트였고, 이러한 면에서 이들은 최초가 아니면 가장ô 체계적인 기독교 철학 체계를 세우려 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라) 기독교철학의 과제


1. 성경적 세계관의 규명을 통해서 삶 (개인, 사회, 한 문화, 시대의 삶)이 성경적으로 바른 기초에 서있는가를 돌아본다. 성경적 기초에서 우리의 경험을 분석하고 반성하여 보다 성경적인 삶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는 신앙의 수단으로서의 철학이 되어야 한다.


2.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규명, 역사적 모델들에 대한 반성.


3. 기독교 사고 내의 종합적 사고, 순수하지 못한 혼합적 사고에 대한 비판적 반성


4.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성경적 진리의 실천을 위한 세계-형성적 사고와 실천 지향적 사고 (world-formative, praxis-oriented thinking)의 발전도모


5.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우주와 삶의 구조를 규명함으로서 이원적이지 않은 바른 성경적 삶의 자세를 갖게함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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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hilosophy of the Church Fathers:

Faith, Trinity, Incarnation, 3rd ed.

Harry Austryn Wolfs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6.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 (pp. 1-23)

사도 바울에게는 팔레스타인과 알렉산드리아 (특히 필로에게서 예시된)의 유대교에서 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신 선재적 지혜와 인간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얻은 인간의 지혜의 두종류의 지혜가 있었다. 하나님의 지혜는 구약에서 처음으로 계시되었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지혜이다. 그는 이것을 구약의 표현에 따라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 (epignosis,            full knowledge of God)" 호4:1, 6:6, 잠2:5, 골 1:10, 또는 그리스도의 지식, 빌3:8,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한 지식 엡4:13 이라 부른다. 이 하나님의 지혜, 또는 지식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종함을 바울은 믿음 (pistis,           )으로 그린다.     

        이에 반해 세상의 지혜란 희랍인의 철학, 즉 고전1:22의 "헬라인은 지식을 구하고"에서 나굻윱Â 지혜를 말한다. 그가 고전 3;19에서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  있어 우매"라 하지만 그러나 거기에 일말의 진리가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헬레니스틱 유대인 저자들 (필로 같은) 처럼 바울도 희랍철학에는 한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대한 어떤 어렴풋한 이해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골2:8의 철학과 속임수에 대한 경고는 철학 전체를 무조건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교부들 (오리겐)이 지적한 바와같이 헛된 속임수에 기초한 철학에 대한 정죄이다.

        바울 자신은 그가 철학공부를 했다는 증거를 주지않는다. 그러나 롬7:18, 21, 고후 13:7, 골4:18; 6:9, 살전5:21 등에 to kalon (           ) 나 빌4:8의 arete (          ) 등과 같은 철학적 용어의 사용, 그리고 행17:28의 스토익 시인 O(A)ratus과 개연적으로 Cleanthes으로 부터, 그리고 고전15:33의  Menander로 부터의 인용등은 그가 철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헬레니스틱 유대 철학 문헌에 방대한 지식을 갖고있었다. 그의 선재하는 지혜에 대한 설명은 솔로몬의 지혜서에, 그리고 그의 서신의 여러곳이¦ 필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헬라적 유대 철학자들이 율법을 전할 때 사용하던 방법과는 정반대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새로운 복음의 전파가 철학적 논증으로 증거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지혜를 헬라인이 추구하는 철학적 지혜와 구분한 고전1:20-22의 맥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은 "말의 지혜아니요 (설득력 있는 말로 복음을 치장함)"로 복음을 전하려 함이 아니었다고 확언한다. 그는 자신의 목표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한 "믿음"을 심는 것이라고 확언한다 (고전2:4,5,7) 이러한 자세가 아테네에서 그의 전도에 나타난다. 그는 철학자들이 섞인 아레오바고의 군중들을 향해서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육체부활과 재림,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고, 그들 일부의 조롱에 굴하지 않았으며, "다시 듣겠다"는 말에 유혹되지 않았으며 오직 소수의 영접자들에 만족했던 것이다. 바울의 異敎와 이방세계의 철학에 대한 자세는 단호했다. 그는 이교를 전적으로 배격하고, 그 철학의 사용 또한 전적으로 배격했던 것이킒?

        바울의 이런 태도 중 이교에 대한 자세는 초대교부들 가운데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철학에 대한 바울의 자세는 그렇지 못했다. 초기 속사도 교부들 (the Apostolic Fathers, ca. 90-160)에게서는 대체로 철학의 배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2세기 후반의 교부들 가운데 변증가들 (Apologists)로 불리우는 이들에게 있어 변화가 왔다. 하르낙 Harnack의 지적처럼 그들에게 와서는 유대교가 필로에 의해 전해지는 방식과 흡사한 방식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철학화한 기독교가 일어나는데는 다음의 세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1. 철학의 훈련을 받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함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 철학자로 알려진 Aristides (136-61), Clement of Alexandria (ca. 185-211/215)는 본래 철학자들로 이교에서 개종한 이들이었다. Justin Martyr, Tatian, Theophilus과 무엇보다도 Augustine이 잘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들에게 있어 공통점은 구약성경이 개종에 기여했다는 점, 그들이 인용하는 구약성귀로 볼 때 그들의 이해가 필로의 설교가 늘 동반되어 이해의 길잡이가 되고 있늙募Â 점이다. 즉 그들은 필로의 눈을 통해서 구약을 하나의 철학적 논술로서 보고있다. 필로가 그러하듯이 그들도 자신들의 철학적 지식을 성경이해에 늘 집어넣고 있다. (reading into) 이에 대해 터툴리안은 그의 De Test. Animae I 에서 "실로 고대 문헌들에 대한 그들의 탐구적 노력을 여전히 계속하여 그것의 기억에 사로잡혀있는 어떤 이들이 우리 손에 있는 이런 류 (즉 성경의 진리 옹호에 철학자들을 인용하는) 의 책들을 쓰고있다"고 평했던 것이다.

        2. 철학이 기독교에 대한 정죄에 대항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유대교에 대한 "무신론자" 라는 비난 이외에 영아살해,식인, 근친상간, 반국가 등의 새로운 정죄에 대하여 교부들은 이방 철학자들이 이방적 종교의식 비판에 대한 논리를 사용하였다.

        3. 철학이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예방및 해독제 로서의 소용에 더 유효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영지주의의 특성은 신약성경을 극단적 알레고리적 해석하여 기독교를 이교의 한껍대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반대하여 이레니우스나 터툴리안은 영지주의가 이교적 신화와 철학의 잘못된 가르침에 입각한 것으로  窄떨ª 기독교와 일치할 수 없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이에 반해 클레멘트 같은 이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헬라 철학자들의 참된 원리들과 교회의 전통적 신앙에 서있는 새로운 기독교 철학을 세우고자 했다. 특히 클레멘트는 영지주의자들이 오용하는 "그노시스" 라는 성경적 용어를 되찾고자 하며, 자신의 기독교 철학을 세우면서 그것을 "참된 철학 (the true philosophy)"이라 부를 뿐 아니라 자신의 철학이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그노시스(false gnosis) 에 대하여 "진리의 그노시스" (the gnosis of the truth)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2세기에 기독교에 들어온 철학은 간헐적인 반대가 없지는 않았으나 헬라교부와 라틴교부들 모두에 계속적 영향을 미쳤다.

        물론 필로나 교부들이 희랍철학을 전혀 무비판적으로 수용을 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필로는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 한 프로타고라스를 비판하며 그 증거로 성경을 사용한다.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세계의 영원성을, 스토익파는 하나님을 물질적인 무엇으로 만듬에 대해 비판한다. 그들은 한편으로 성경이 어떻게 철학자들의 바른 견해를 앞질러 예견하고 있는지를 보잠隔í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예견에서 철학자들의 잘못을 정죄하고 있는지 보이는 전략을 쓰고있다. 필로는 또한 철학이 그 자체로는 우리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참된 지식에로 인도하지 못함을 보이려고 했는데 교부들도 이 전략에 있어 대동소이하다. 교부들은 철학의 오류들을 알고있었고 그것이 이단의 근원이 된다고 비판했다. 또 그들은 철학이 철학자, 학파들 간에 일치하지 못함을 들어 그것이 진리의 인도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져스틴 마터, 타티안, 특히 Hermias' "The Ridicule of Gentile Philosophers")

        헬라주의적 유대교에 있어서와 바울에게서 처럼 초대교부들에 있어서도 철학에 대한 자세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성경적 신앙, 기독교와 다름을 분명히 하고있다. (그러므로 이 입장을 일부 변증가와 후대 아퀴나스의 노골적인 synthesis에 비해 여전히 일반적으로는 antithesis 적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은 때때로 잘못을 범하나 계시인 기독교는 늘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의 오류는 대개 인간적 한계, 인간의 능력 (즉 "인간의 감각과 인간의 이성, 논증")의 제한에서 오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이 종종 신적인 계시와 대조되고 있다.

Ñ      이런 자세에는 다음의 세가지 질문이 따른다. (1) 성경의 진리성 주장: 이들은 필로와 거의 흡사하게 성경의 진리성을 대개 1. 기적 (모세, 또는 예수님), 2. 예언의 적중, 3. (모세나 예수님 가르침의) 내재적 우월성, 4. 그 교훈의 실제적 효능 (성결증진등) 으로 주장한다. (2) 어떻게 계시 고유의 진리가 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나: 나아가 그들은 필로와 또한 유사하게 헬라철학에 나타나는 부분적 진리의 근원에 대하여, 1. 유대인들에게서 빌려간 것 (아브라함, 모세, 욥기의 고대성 주장), 2. 그들의 자연적 이성이 (물론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던 것 아니다) 발견한 것, 3.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 설명하였다. (3) 이들은 성경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하여 계시없이 발견되어 철학적 언어로 표현된 진리들을 계시로 주어지고 성경적 언어로 표현된 진리와 일치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풀었다.

 기독교 철학 강의 계획표


1주 (2/27) 서론: 기독교철학은 가능한가? 역사적 기원: 대립적 철학과 종합적 철학: 변증가와 아퀴나스의 기독교 철학 (져스틴 마터, 클레멘트, 어거스틴, 아퀴나스) 


2주 (3/13) 종교개혁과 칼빈뮐聆퓽Ç 철학적 함의: 이성관, 인식론, 세계관과 하나님의 주권 (루터와 칼빈)


3주 (3/20) 반혁명-반계몽주의와 신칼빈주의의 철학적 함의: 프린스터, 카이퍼

파스칼, 키엘케골, 야스퍼스등과 화란전통의 배경적 차이점


4주 (3/27) 개혁주의적 기독교철학의 기원: 우주법 철학 (도예베르트와 볼렌호벤, 반틸)의 배경과 당면과제, 그 해결의 발견 


5주 (4/3) 인식론: 실재론, 비판적 실재론


6주 (4/10) 법 이념: 경계로서의 법과 인식론적 법 영역 개념 


7주 (4/17) 중간고사


8주 (4/24) 존재론: 연계성 개념


9주 (5/1) 인간론: 우주의 집합점으로서의 인간의 마음과 종교


10주 (5/8) 기독교철학의 사회-문화적 함의 


11주 (5/15) 개교기념일 축제


12주 (5/22) 영미, 제삼세계의 기독교철학 (개혁주의 철학과 개혁주의 인식론)


13주 (5/29) 기독교철학과 개혁주의 신학 방법론: 초월적 비판과 전제에 입각한 변증학, 신정통주의와 비교  


14주 (6/5) 결론: 기독교철학의 제문제: 기독교철학과 서양철학 전통과의 관계 (서양철학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철학의 해답과 그것에 대한 평가)


15주  (6/12) 굳綬뺐自ç 


성적평가 기준: 출석 10, 중간고사 20, 기말고사 30, (평상시) 과제 40

 교과서및 참고도서 목록


Harry Austryn Wolfson. The Philosophy of the Church Fathers:

Faith, Trinity, Incarnation, 3rd ed.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6.


Roger Douglas Henderson. Illuminating Law: The Construction of Herman Dooyeweerd's Philosophy (1918-1928).  Vrije Universiteit ph. D. Thesis, 1994.


Jacob Klapwijk, Sander Griffioen and Gerben Groenewoud. eds. Bringing Into Captivity Every Thought: Capita Selecta in the History of Chrisitan Eval!uations of Non-Christian Philosophy. Lanham: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91.


손봉호. 현대정신과 기독교적 지성. 서울: 성광문화사, 1978. "기독교철학은 가능한가?" "기독교철학의 방법론," "기독교철학의 전제조건들," "철학과 신앙" 216-240쪽.


Charles Partee. "Calvin, Calvinism and Rationality." In Hart, Van der Hoeven and Wolterstorff, eds. Rationality in the Calvinian Tradition. Lanham: University Press of ?merica, 1983. pp. 1-16.


Jacob Klapwijk. "Calvin and Neo-Calvinism on Non-Christian Philosophy." In K.A. Bril, H. Hart and J. Klapwijk eds. The Idea of A Christian Philosophy: Essays in Honor of D.H.Th. Vollenhoven. Toronto: Wedge Publishing Foundation, 1973. pp. 43-61.


N. Wolterstorff.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3. (1981년 화란 암스텔담 자유대학교 카이퍼 렉춰, 제목은 시85:10-11에서 채용했다.)


 Jacob Klapwijk, Sander Griffioen and Gerben Groenewoud. eds. Bringing Into Captivity Every Thought: Capita Selecta in the History of Chrisitan Eval!uations of Non-Christian Philosophy. Lanham: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91.


서론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가 자신의 저술을 De doctrina christiana로 부르고, "우리 기독교 철학" (Contra Julianum IV, 72)을 언급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초기부터 자신들의 신앙의 지적 함의와 결과에 대해 반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비기독교적 희랍-로마 철학과 근대철학도 종교적 함의와 이념적 열망을 보여준다 (또는 쎇㉲少?. 초기 교부들의 경우 조소적인 희랍-로마의 엘리트들을 직면하여 기독교인들은 희랍적 지성과 더불어 단지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실존적 (핍박과 순교라는) 문제들을 다루지 않으면 않되었다. 또 이들은 교회 내적으로 영지주의와 마니키안과 같은 이단의 침입을 대항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후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고도로 발달된 이지적 문화속에서 영향력을 갖게됨에 교회는 그 문화를 배척할 것인가 수용할 것이냐 사이에서 망설이게 되었다. 이러한 '대립'과 '종합' 사이에서의 망설임은 중세교회에 있어서도 계속되었다. 또 기독교 신앙과 비기독교적 사상 사이의 관계의 문제는 '후-기독교 문명시대'라 할 현대에 들어와 없어지거나 퇴화한 것도 아니다. 또 이 문제는 서양 (유럽과 북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기독교가 전파된 어느 곳에서건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문제는 고후10:5에 제시된 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나니"의 두가지 파라독스적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걸㎎좇獵? 


"Thomas Aquinas (1224/5-1274)" by Jan A. Aertsen


8세기 말로 9세기 초 Carolingian 시대에 오면 중세의 소위 "암흑시대"를 지나 중흥이 싹트기 시작한다. 여기에 이성적 원리를 교회생활 속에 정착시킴으로서 샬레망의 문화정치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 알퀸 (Alcuin 730-804)의 공이 크다. 그러나 본격적인 이성론적 기독교의 발달은 서구가 고대의 철학적 이성에 의해 전격적으로 도전을 받은 13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양상을 띄며 활달해졌다.

        (1) 대학과 스콜라주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소년기에 몬테카시노 (Monte Cassino)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맡겨진 이후 Naples의 대학에 입학하고 후일 가족들의 바램과 달리 새로 생긴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는 Cologne과 당시에 최고의 기독교 학문 중심지인 Paris에서 수학하고 59년 이후 이탈리아에서 가르치다 69년 파리에 와 가르친 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 74년 49세로 죽음.

        그의 삶에는 처음 형성된 대학이 큰 역활을 하였다. 1200년대는  볼로나, 파리, 옥스포드의 대학이 생기던 시대로  대학은 당시 산업이나 상업처럼µ 길드를 이루어 magistrorum et scholarium의 결합으로 universitas (본래 대학에 국한되기 보다 집단의 공동적 명칭이었다) 를 이루었다. 이는 학문도 하나의 직업화 함을 보여준다. Alexander of Roes (c. 1280)의 지적처럼 당시는 sacerdotium, imperium, studium의 세기관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대학이 교회와 왕궁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대학의 교육은 magister의 두가지 역활, 즉 講讀과 爭論 (legere et disputare)으로서 강독에는 정관(statutes)에 따라 정해진 권위적 텍스트 (auctoritates)를 읽고 설명하는 것이어서 자연히 "주석"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논쟁은 주석적 읽음에서 자연히 수반되는 질문들을 다룸에서 발전하였다. 권위적 문헌으로 부터 야기된 논쟁과 반론의 변증법은 생각이 가능한 모든 선택여지를 재는 일에 있어 근본적 개방성과 하나의 조직적 해결에 도달하기 위한 시도 속에 그 한계까지 밀어붙여진 이성의 엄밀한 적용 둘다를 요구하였다. 여기에서 schoolmaster or 'of school'을 뜻하는 scholasticus로 부터 중세철학과 거의 동의어라 할 憺ö 있는 scholasticism이 유래하였다.

        (2) 인문학부: 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facultas artium (faculty of arts)는 중세대학의 4개 학부중 하나로서 오늘날 (영어권의) 문학사, 석사에 해당하며 신학, 법학, 의학부의 예비단계로서 어거스틴의 De doctrina christiana에서 결정해놓은 세속적 지식의 전부를 포괄하는 전통적 체계를 가리킨다. De doctrina christiana는 성경연구에 중점을 둔 "기독교 학문체계" (Christian scholarship)에 인문학부가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본적 사상으로 하고있으며 13세기까지도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 책의 정신은 과학은 그 자체가 목적을 가지고 있을 수 없고 그 의미와 연계 (meaning and coherence)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연관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가면서 인문학부는 점차 "서구에 아리스토텔레스 전체가 소개 (the introduction of the complete Aristotle in the West)"라 불리우는 중대사건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맞게된다. 이 때까지 만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저술만이 알려져 있었으나 12세기 중반에 Physica, De anima, Metaphysica, Ethica가 번역되었늚? 사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아리스토텔레스 (the Stagirite)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희랍 주석서들 방대한 희랍-아라비안 문헌이 도입되었고 신플라톤주의 문헌과 심지어는 유대인 사상가들의 문헌도 라틴어로 번역 소개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시대에는 다양한 영역들에서 고대문화로 부터의 방대한 내용들이 채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많은 이들은 이 비기독교적인 고전문화와 중세문화 사이의 대립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 좋은 예로 Absalo of St. Victors는 "그리스도의 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이 지배하는 곳에선 지배하지 않는다" (The spirit of Christ does not rule where the spirit of Aristotle reigns)라고 했다. 고대문화를 채용함과 배격의 두 입장은 결코 온전히 조화되지 못한채 양극으로 남아있었다.

        이것은 1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강독에 교회가 크게 반발하여 1210년에는 막 설립된 파리대학에서 그의 자연철학 저술의 강독은 파문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수수께끼처럼 그의 강독은 번져나갔고 1255년 결국 공식적으로 허용되어 이제는 물訃壤Ã 대학 학과목에 그의 저술에 대한 강독이 들어있어야 했었다. 이렇게 해서 인문학부 (facultas aritum)은 사실상 철학부가 되었고 모든 학생들을 위한 예비단계였던 인문학부는 이교적 철학에 푹젖게 되었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부르듯 "그 철학자" (the Philosopher)가 되어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견해를 받아들임은 실재에 대한 전통적 견해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요, Ferdinand Sassen의 말처럼 "중세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속에서 자신에 대해서와 그들이 가진 자연적 능력들에 대해 의식하게 되었다." 

        (3)신학부: 성경학과 수도회: 신학부 교수도 역시 강독과 논쟁을 중심으로 가르쳤으나 여기서 주된 권위적 문헌은 물론 성경이고 그 강독이 중심과제였다. 13세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중흥 뿐 아니라 성경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이 일어난 시대였다. 스콜라적 방법이 성경연구에 확대된 결과 그 연구도 학문의 일부가 되어 아퀴나스의 Summa theologiae에서 처럼 최초로 조직화되어 theo-logy로 발전되었다. 13세기의 수도원의 새로운 발전은 후랜시스와 도미鍛謳  수도회의 신학발전으로 1250이후 대부분의 주요 신학자는 수도승이었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이전의 수도회와 달리 도시적 분위기에 적대적이지 않고 설교와 선교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활동의 관점에서 학문연구에 강조를 두게된다. 도미니칸은 ordo studentium이라 할 만큼 수도원 생활의 핵심적 일부로서 연구를 둔 첫 수도회였다. 이 수도회가 당시 세워지던 유럽의 대학들에서 주요 교수직을 차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4) 아리스토텔레스: "만인은 본능적으로 앎을 원한다."

이시대 대학의 좌표를 정한 原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일 것이다. "만인은 본능적으로 앎을 원한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들이 감각에서 취하는 기쁨을 들 수 있다. 그것들은 효용성을 떠나서 그것 자체로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최고는 시각적 감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자연적 앎의 욕구의 징표는 봄에 대한  無私한 감지이다 (the disinterested appreciation of seeing) 봄은 앎의 최선의 길로 여겨진다. 봄과 앎은 theoria, Idea, visio등과 같은 용어에서 보듯이 언어적으옆琯µ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이데가도 이점에 대해 "Being is that which shows itself in the pure perception which belongs to beholding, and only by such seeing does Being get discovered. Primordial and genuine truth lies in pure beholding. This thesis has remained the foundation of western philosophy ever since. This Greek priority for 'seeing' is today often brought into connection with the theme of the 'Hellenization of Christianity' and is then opposed tot he decisive experience of reality in the Old Testatment." 희랍인들은 청각보다 시각적 접근을 중시하고 셈족의 경우 보다 청각적 접근에 강조점 둔다. A. J. van der Aalst)

        앎의 본능은 어떤 일의 원인 (causa)를 파악하는 지식 (scientia)에서 채워진다. 앎이 선이라면 앎의 본능은 선에의 지향이고 무지(ignorantia)도 긍정적으로 말해서 부족함에 대한 인식이다. 앎의 충동은 보는 것에 대한 (즉 그 뒤에 숨은 원인에 대한) 경이 (wonder)에 놓여있다. 데카르트와 달리 보편적이고 방법적으로 시행된 의심이 아니라 경이걸¡ 사람으로 하여금 철학의 길에 접어들게 하는 철학의 근원이었다. 경이에서 처음 발생하는 것은 질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든 질문은 1. 무엇이 존재하는지 (whether something is), 2. 본질에 관한 결정적 질문인, 그것이 무엇인지(what something is)의 두개의 질문이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반해서 본능적 앎의 욕구에 대해 "본능적" 이라는 점을 주제화하는 세가지 "선험적" (a priori)인 논증, 즉 만물은 자체의 가능성의 완성을 추구한다는 의미의 선 (bonum)을 지향한다는 존재론적 논증을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사고의 핵심은 유기적 목적론: 즉 생명은 발아-성장-결실한다는 것에 있다.) 우선 두가지는 앎의 욕구의 동력은 만물이 자연히 완성 (perfection, or may be salvation: ontologically perceived salvation)을 추구하듯, 그것이 '인간으로 인간답게' 완성한다는 것과 만물이 자신의 고유한 기능 (열은 뎁히고 무거운것 떨어지듯)을 발현하는 바 앎의 욕구는 '인간의 특수한 활동'의 완성이라는 면에서 설명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백지(tabula rasa)이다. 즉 인간의  이성은 그자체로서는 하나의 가능성이어서 실제적 앎을 통해서 실재를 파악함으로서 획득되어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의 지성은 앎으로 자체의 완성을 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연적 활동은 그의 본질인바 이해 (to understand, intellegere)이다. 여기서 'omnis scientia bona est. 모든 과학 (학문, 앎)은 선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앎 (학문)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완성이고 그의 자연적 욕구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토마스의 시대는 모든 앎을 정당화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뿐 아니라 오히려 "호기심, curiositas" 즉 알고자 하는 '덕스럽지 못한 (unvirtuous)' 욕구를 정죄하는 (발동된 욕구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 어거스틴적 전통이 또한 대등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호기심은 주로 고백록 10권에서 요일 2:16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는 말씀에 근거한 논지이다. 특히 35장은 안목의 정욕을 호기심과 동일시한다. 호기심이란 학문의 외투로 위장된 졸治컥Ç 헛된 욕구이다. 왜 그것은 안목의 정욕이라 하는가? 그것은 봄이 지식추구에 우선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봄의 기쁨이 본능적 지식욕구의 증거이나 어거스틴은 그것이 세상에 굴복하는 징표로 이해한다. 호기심의 "유혹"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위해 만물을 시험하도록 꼬인다. 호기심은 어거스틴의 근본적 구별인 사용 (uti, using)과 즐김 (frui, enjoying)의 구분을 토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의 De doctrina christiana에 있어 과학의 개념도 이 구분에 기초한다. 그는 지식은 반드시 인류 구원에 봉사할 수 있는 것 (uti)이어야 한다. 하나님 만이 안식을 주고 즐거워할 우리의 모든 갈구의 궁극적 목적이다. 사람들은 즐거워할 것을 사용하기 원하고, 사용하여야 할 것을 즐기는 反轉으로 이 관계를 왜곡한다. 따라서 어거스틴에 있어 무사한 관조 theoria로서의 세속적 지식에 연연하지 않고 기독교 학문적 지식은 도구적 의미를 가짐을 역설함이 그의 호기심 정의에 두드러진다. 즉 그의 관심은 하나님을 앎과 이 종교적 목적에의 효용에 의해 정해진다. 즉 질문의 동인은 그 방향도 결정해야 므磯募Â 것이다. 에트엔느 질송에 의하면 중세 기독교 철학의 가장 특징적 점은 철학적 문제들 가운대 선택을 행한다는 점이다.  즉 어거스틴은 하나님과 영혼을 알기를 원한다. 그외에? 전혀 아무것도." (독백 1,2,7) 기원을 아는 지식과 연관된 자기을 아는 지식, 이 둘 만이 가치있는 지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어거스틴은 자연과학을 본능적인 무엇이 아니라 "앎 자체를 위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의 맥락에 넣는다.

        토마스는 앎을 자연본능적 욕구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호기심을 왜곡된 욕구로 보는 이 둘 사이를 어떻게 조화시키고 있는가? 토마스는 신학대전 II-II, 166ff 에서 원죄에 대한 논의 직후 호기심에 대해 언급하면서 "진리 자체에 대한 지식과 진리를 알고자 진력하고 연구하는 것을 분리해서 판단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진리 자체는 선한 것으로 보는 이 구분은 어거스틴에게서 거리를 둠을 의미한다. 토마스는 지식 달성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완성되고 자연적 욕구인 지식소유가 완성되는 것으로 봄과 연관된다. 토마스는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철학연구는 그 자체에 있어 적법적이고 찬양할 만하늦? (신학대전 II-II, 167, 3) 물론 지식의 추구에 있어 잘못될 수는 있다. 이 잘못됨의 근원을 밝힘에 있어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육체의 욕구와 영의 욕구의 구분을 언급하며 죄가 이 둘 사이의 조화를 깨트린 것 (즉 육체의 욕구는 지식추구를 꺼리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반드시 자신의 추구를 통제해야 하는데 여기서도 토마스는 중용 mesotes, 德, 즉 "right mean" between two extremes 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의 핵심개념에 의존한다. 호기심은 앎의 욕구에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극단이므로, 절제 (temperantia, temperance)의 가능적 부분인 학구열 studiositas (zeal for learning)의 덕에 의해 합리적인 통로로 유도되어야 한다. 즉 그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극단적 형태의 앎의 욕구인 호기심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의 지배에 들어와야 한다. 문제의 불화는 지식의 바른 목적인 하나님을 앎에 관계시킴 없이 피조물에 대한 진리를 추구 하는데서 기인한다. 이리하여 어거스틴이 말하는 바 호기심의 종교적 동기가 이론적 고찰의 위계속으로 이전되어 들어온다. (Augustine's religious motivation of theâ curiositas is transposed into the hierarchy of the theoretical consideration.) 그러한 갈구는 존재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탐구하지 않는 과학에서 악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7) 순환 동기 (circulation motif)와 인간의 행복: 토마스의 종교적 동기를 이론적 고려로 바꾸어 놓음은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완성을 이루는 바, 그 원리와 연합되고자 욕구한다"는 그의 제3논증에서 더 두드러진다. 이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외에도 Proclus, Pseudo-Dionysius와 같은 신플라톤적 순환교리의 채용으로 말미암는다. 신플라톤주의는 모든 실재가 두개의 상반된 동시적 운동, 즉 유출과 회기 (emanation and return, a turning around, conversio, from the first principle, the One or the Good)의 역학관계로 본다. 유출된 모든 것이 근원으로 돌아가기 원함은 거기에 완성 (존재론적으로 미완의 존재, 결핍의 존재가 완성되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회기란 참된 자신들로 부터 멀어진 물질적-감각적인 것으로 부터 분리되어 그 원리와 합일됨을 통해서 순수하게 영적이고 신적인 존재로 됨 (이런 동기의식을 에로스라 함)을 말한다. 탉訝떽병Â 인간 이성 (human intellect)의 원리 또는 근원을 비물질적 본질들 (incorporeal substances, substantiae separatae)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인간영혼, 천사, 하나님의 불멸적 존재를 부르는 통칭이다. 인간됨의 한 본질은 이성을 통하여 비물질적 본질에 연관됨 이다. 앎이란 아는자와 대상의 합일인데 인간의 최고 목표는 최고의 원리를 앎으로 사유하는 인간이 그에 합일되는 것이다. 여기서 산출 (exitus, procession)과 회기(reditus, return)의 신플라톤주의 원리가 기독교적으로 바뀌어 하나님으로 부터와 하나님을 향한 이중적 과정이 실재에 있어 근본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이로써 창조교리와 다른 유출의 교리마저 수용된다. 토마스는 자연에 의해 강제된 단계적 유출은 부정하고 하나님 만이 모든 것의 창출적 근원으로서 궁극적 목적이 되신다고 한다. 그리하여 토마스도 어거스틴 처럼 오직 하나님에게서 만이 인간d의 참된 안식이 있다는 고백으로 귀결한다. 그러나 토마스에 있어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의 원인들을 알고자 욕구하는 그것은 바로 이성의 안식없음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됨은 바로 그잉Ç 이성을 통해서 이기 때문이다.

        (8) 철학의 고민과 인간의 행복: 토마스는 신학자나 철학자 공히 인간 이성과 신적 본질 사이의 "거리"의 문제에 봉착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답하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본 이 문제를 토마스는 인간 지식의 위상과 관해 부정적으로 대답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즉 학문은 단지 감각이 달하는 곳에 유효하므로 비물질적 본질들에 대해 알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의 궁극적 행복은 본질적으로 추상적 과학들을 철학적 이론으로 고려함에 있지않다. 본능적 앎의 욕구는 사색적 과학에서의 완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종적 목적을 초월하며 철학은 완전한 행복을 이루지 못하고 단지 불완전한 행복을 유추할 뿐이다. 철학자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하나님 지식은 그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가 어떠한 분이라는 것은 알 수 없다. (the knowledge that he is, not what he is) 그러나 본능적 앎의 욕구가 거기에 만족할 수 없다. 토마스는 인간의 완전한 행복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명상인 the visio Dei (the contemplation of God's essence)에만 연관된다고 했다. 여기서 theoria와 흡사한 언어사용을 본榮? 이 하나님의 명상은 철학적 탐구의 질서에 상충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연구는 결국 궁극적 원인인 하나님의 본질을 알지못하기 때문에 앎의 욕구와 성취 사이의 괴리를 이루어 인생의 초험적 성취를 이룰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해결은 철학의 고민과 낙망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해결은 포기, 체념 (resignation)의 그것이었다. 인간의 행복은 제한된 것이고 미완성과 불완전에 머물 뿐이다.

        (9) 신앙을 통한 (합리적) 해방: 만일 앎의 자연적 욕구가 채워질 수 없다면 완전한 행복이란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것이나 인생이 무의미하고 목적이 없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불합리하다. 토마스는 여기서 "이성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것이 가능해야만 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visio Dei의 불가능성은 신앙과도 상치한다. 하나님에 대한 즉시적 명상은 성경에 약속되어 있고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성경의 권위를 통해서 철학의 고민으로 부터 해방된다. 그의 신학대전이 이런 맥락에 부합한다: 인간의 구원에 관하여, 철학적 훈련들과 더불어 신적으로 계시된 교리들이 있다. 그는 이 해결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거듭 강조한다. 여기서, 기독교 신앳湛Ç 종말론이 앎의 자연적 욕구의 궁극성 (the finality of the natural desire to know)와 조화 (종합)되는 점이 충격적이다. 이것의 불길한 의미(portent)인즉 신적 계시는 이성을 초월하나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 반대로 계시는 이성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마5:8의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함의 원문이 마음으로, 즉 이성으로 (God is seen by the heart, that is, by the intellect) 볼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신에 대한 명상은 하나님 본질에 대한 명상으로  (visio Dei = vision per essentiam) 해석되어 그것이 철학적 사색의 지평을 초월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본질적으로 theoria의 아이디얼에 의해 결정되는 상태에 머문다.

        (10) 자연 위의 초자연적 목적에로 부상함: 토마스는 자연/초자연의 이중적 완전을 말한다.  "자연적 원리들 위에 하나님에 의하여 사람에게 운행의 초자연적 원리들이 주입되어야만 이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은총이다. 여기서 은총은 사죄와 교제회복으로 이해되지 않고 최종적 목적을 위해 인간성의 초자연적 완성 (the supernatural perfection of humanity for the final goal)이눼?

        (11) 자연과 초자연: 13세기의 인식론적 문제의 핵심은, 실재내의 인간의 방향성에 있어 희랍적 이성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 토마스는 이 문제를 자연과 초자연의 구분을 통해서 대답한다. "... 은총의 선물들이 자연의 선물들 위에 더해지되 그것이 후자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는 방식으로 더해졌다." (신앙의 빛이 이성의 빛을 파괴하지 않는다). 1. 이 둘 사이에는 조화가 있다. "만약 철학자들의 가르침 가운데 신앙에 상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본래 철학이라기 보다 이성의 불완전성에 기인하는 철학의 오용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보듯이 치성의 자충족성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 없다. 또 철학의 오용은 이성 그자체에 의해 밝히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인용문은 인문학부의 어떤 교수들의 주장처럼 신앙에 병립하거나 대립되는 '이중적 진리'를 배격하고 진리란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임을 보인다. 하나님께서 이 둘의 근원이시고 조화를 보증하신다. 이 조화론에도 결국 유출 (앎의 욕구)과 회기 (앎의 완성으로서의 계시, 은총) 라는 순환逞逞┛¡ 엿보인다.  2. 여기서 gratia perficit naturam의 주제가 나온다. 기독교 삶은 자연적 질서의 완성이다. 3. gratia prae-supponit naturam (grace presuppose nature). 자연은 은총의 prae-ambula이다. 이러한 이유로 토마스는 자연과 초자연적 목표를 말한다.

        (12) 결론적 관점: 카토릭과 종교개혁의 근본적 차이는 자연과 은혜의 관계에 대한 상이한 견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개혁자들에게 있어 은총은 인간 본성의 高揚이 아니라 회복이요 해방이다. 즉 방향성에 관한 문제도 언급된다. 인간의 본성은 관계적 relational이라고 본다. 그러나 토마스는 자연의 개념에 사물 그자체들의 존재론적 일관성에 대한 표현이 나타난다. 물론 토마스에게 있어 자연이 피조물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적) 관계임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 관계성을 (비본질적인, 우연한) 범주 (the accidental categories)의 하나로 본다. 즉 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모두 본질 이후에 나오는 비본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세계의 관계가 피조물의 본질에 후속한다는 문제를 낳으므로 여기에 새로운 관계, 즉 범주적 관계가Í 아닌 초월적 관계 (not catagorical but transcendental)를 필요로 한다.

        토미즘의 또 다른 문제는그것이 인류를 두종류의 목적으로 갈라놓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화란 철학자 쉴레벡스가 말한대로 토마스는 이원론으로 삶을 나누기보다 오히려 그의 가장 깊은 의도는 인간의 삶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삶, 하나의 마지막에 예정된 바, 근원과의 관계 속에서 움직이고 존재함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Jocob Klapwijk. John Calvin (1509-1564)


        1.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요한 칼빈의 역사적 배경에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있다. 르네상스는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서 개체성, 활력, 고전적인 미와 신비적 열정을 증거하며 주로 남유럽의 도시귀족 (후로렌스의 메디치가)와 상류 시민사회 (아우버그의 휴거 은행가), 그리고 로마 고위 성직자들 (교황 쥴리어스 2세와 레오 10세) 등의 환영을 받은 반면 종교개혁은 주로 조직된 교회의 생활과 교리에 촛점을 두고 회개를 촉구하면서 북유럽 대중들의 반응을 일으켰다.

        2. 초자연주의에 대한 반발: 자연/초자연 영역의 구분과 종합은 단지 이론적이고 문화적 의의 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의의도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신학과 철학의 이분과 종합구조, 희랍-로마문화 유산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관계, 그리고 신적으로 정위된 사회의 계층적 질서의 관점등이 그것이었다. 초자연주의는 교회가 주도하는 단일문화적 견해를 정당화하는 기초를 제공하였다.

        중세말 William of Ockham (1285-1349/50) 같은 이에게서 보듯 이 세속적인 하층의 자연과 영적인 상위의 초자연의 조율은 의심받아 두영역 이론은 신빙성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신앙과 이성 사이의 종합을 꾀하는 시도 그 이상의 보다 실재의 보다 통합적인 경험을 위한 탐구가 도처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르네상스 철학과 거기서 파생한 서구적 합리론에 있어 초자연적 실재에 대한 관념은 신속하게 완전히 도외시 되거나 아니면 무용지물이 되었다. 신앙과 종교는 私的인 문제가 되고 18세기 에는 합리주의와 경건주의가 동시에 번성하면서 19세기 까지 철학은 종교에 대한 극단적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적 실재의 초자연적 성격이 철학적 논제가 되면서 신의 개념이 변화하였다. 신은 데빫ジF?? (1596-1650)에서 인간 이성의 기반과 보증이요, 스피노자(1632-77)의 natura naturans에서 처럼 자연 그자체의 창조적 능력으로 보게되었다. 또 니콜라스 쿠사 (1401-64, Giordano Bruno, c. 1548-1600)에서 보듯이 이탈리 르네상스 에서 벌써 신과 인간은 동등하게 자연의 수준에 놓고 무한적 대우주의 세계-영혼인 하나님과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소우주로서 신에 흡사한 보게되었다.

        종교개혁 또한 이런 반초자연주의에 합세하였다. 물론 그 방향은 다른 것이기에 헤겔이나 딜타이의 생각처럼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같은 방향에 둘 수는 없는 것이었다. 초기 인본 (문)주의자들은 교회를 떠날 생각을 갖고있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나 시간이 감에 따라 이 두운동이 영적으로 상호조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 출발점이나 정신에 있어 이 두 운동은 서로 상극이었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고대 희랍-로마 고전에서 영감을 얻는 반면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샘에서 그들의 물을 길어냈다. (심지어 신격화된 자연이성의 빛의 인도와 시적 상상력의 창조성을  따르는 전자와 sola fide의 믿음을 기초로 시작하여 성경 계시의 빛에 따라 sola scriptura 걷는 후자)

        3. 종교개혁의 독특성: 르네상스의 자연과 자연적 삶의 숭상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1452-1519)의 예에서 보듯 uomo universale 즉 신격화 (apotheosized)된 창조적으로 자신을 개진하는 우주의 형상으로서의 자충족적이고 창조적이며 교화된 교양인의 이상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이상은 곧 데카르트에게서 보듯 자충족적이고, 창조적이며, 재구성적인 이성으로서의 인간 즉 cogito의 이성주의적 이상에서 일방적이고도 극단적 축약을 낳았다. 그러나 마틴 루터 (1483-1546)에게서 예시되듯이 종교개혁은 전혀 다른 이상을 가졌다. 거기에는 죄와 허물에 대한 고뇌와 갈등의 깊음에서  하나님 자비로 나아오는 경험이 중심을 이루어 르네상스적 자연주의의 여지가 없었다. 부패함없는 자충적적 자율적 인간 대신 sola gratia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에 전적으로 의지한 그 앞에서의 삶 coram deo의 이상이 있었다. 이러한 관계성의 바른 정립에서 비로서 인간은 참된 완성과 탈淪纜¡ 이르게 된다.

        종교개혁에 있어 르네상스적 자연주의가 배격되나 마찬가지로 스콜라적 초자연주의도 배격되었다. 실상 자연주의는 자연에 제한적 자율 (naturalia manent integra, nature remained intact)과 인간 이성의 일정한 자충족성을 허용한 중세적 (아퀴나스적) 전통에서 그 씨앗이 이미 뿌려졌던 것이다. 이러한 허용은 시간이 감에 따라 인간적 자율성, 보편성, 완전성에 관한 보다 포괄적이고 무제한적인 이상 (a broader, unqualified ideal of human autonomy, universality, and integrality)을 예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전혀 다른 길을 가고자 했었다. 적어도 그 원리에 있어서는 그랬으나 실제에 있어서 범람하던 초자연주의 사상을 극복하기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맞서던 비기독교 사상에 대해 종교개혁적 입장은 부정적이고 대립적 자세이외 어떤 다른 자세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루터는 이성을 창녀라 하고 믿음이 이성을 죽인다 하지 않았는가? 이 문제는 칼빈에 있어 보다 첨예하게 거론되었다. 칼빈은 고전과 중세문화에 아주 익숙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는 전물 û 철학자는 아니었고 심지어는 학문적인 목적으로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 신앙과 당시 철학적 문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조직적 분석의 논문을 남긴 일이 없다. 그는 첫째 개혁자요, 교회의 교사로서 학문적이기 보다 실천적이요 목회적이었다. 그의 목표는 성경을 해석하고 그에 따라서 교회의 교리를 새로이 구성하고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학문과 문화에 대해서는 이 주된 관심에 관련된 한 기독교 신자의 공동체의 믿음을 세우는 일에 연관하여 언급되고 있다. 그는 또한 16세기 사람으로서 힘을 다해 성경해석이나 교리 조성에 있어 스콜라적 초자연주의를 배격하였으나 다른 면에서는 간혹 자연-초자연의 이원론에 기대는 점이 있었다.

        4. 칼빈과 philosophia christiana: 특히 칼빈에게 있어 종교개혁은 단지 교회적 또는 신학적 프로그램이 아닌 정치, 경제, 도덕, 사회적 관계들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즉 칼빈에게 있어 종교개혁은 스트라스버그, 제네바, 불란서, 화란, 스코트랜드에서 보듯 세계를 개혁하는 능력 (world-transforming force)이었다. 그러의Ñ 만큼 그것은 학문세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독특하게 기독교적 인생관이란 의미의 "philosophia christiana"를 말하지만 동시에 이교도의 저자들의 글이 "진리의 존경할 만한 빛"을 발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키고 있는가?

        칼빈이 처음으로 "기독교 철학"이란 말을 쓴 것은 1533년 파리대학에서 행했던 종교개혁 특유의 논조요, 그 때문에 망명하지 않을 수 없게된 유명한 Beati pauperes spiritu (blessed and the poor in spirit) 라는 Nicholas Cop 연설에서 였다. 또 1541년의 불어판 기독교 강요 서문에서도 그는 'la Philosophie Chrestienne'라는 말을 쓰고 있으나 이들은 20세기적 기독교 철학이라기 보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 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강요 3권에서는 자신이 아는 모든 철학을 "이성의 철학"이라 부르고 비판하면서 기독교철학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강요 3-6-7, 노트 8) 거기서 칼빈은 모든 철학자들이 바울이 엡4:23에서 말한 성령께서 마음을 변화시키심에 대해 무지함을 말하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들이 이성만을 인간의 지배엿片 Î 세우고, 그것 만이 청종되어야 하며, 그것에 만 삶의 행위를 내맡기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철학은 이성으로 하여금 성령에 물러나 복종하고 자신을 굴복시킬 것을 명한다." (III,7,1) 즉 기독교철학은 첫째로 순종적인 철학이어야만 한다. 그 자체를 지혜의 원천으로 선언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며 그의 뜻에 의지함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이성이 스스로 만으로는 인도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칼빈이 당시의 철학을 배격함은 이성이 인간의 지배원리라는 의미의 자충족성을 이성에 부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순종적 기독교 철학은 하나님 말씀에 의해 인도되는 철학으로 결국 성경적 철학을 말한다. 이는 또한 성령의 역사로 새롭게된 마음 (삶의 모든 부분과 연관된)의 철학이어야 한다.

        제네바에 대학을 설립한 칼빈은 이성적 사고를 비이성적으로 배격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죄로 말미암아 맹목이 된 (II,1,9) 마음이 성령으로 새롭게 됨 (엡4:23, 롬12:2)을 강조한다. 기독교철학이 단지 성경주의 이상으로 철학적 주장들을 성경의 메시지에 외적으로 적당히 맞추거나 조읖暉纛Ì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나는 살아있는 영성으로 어떠한 세상적 철학도 갖지 못한 것이다. 칼빈의 이러한 생각은 크리소스톰의 기독교철학의 기초가 겸손 (humiltas)이라는 점에 동의함에서 또 다른 주제로 나타난다. (II,2,11 어거스틴의 연설과 전달의 비유처럼 기독교 철학, 종교의 첫,둘,세째 원리는 모두 겸손이라.) 칼빈에게 있어 겸손은 의존성, 개방성, 수용성, 즉 하나님의 뜻과 그의 말씀과 그의 영과의 연합등 이성이 가져야 마땅한 특성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말한다.

        5. 전적부패 (corruptio totalis): 아담이 의의 샘을 저버린 후 지성을 포함한 영혼의 모든 부분이 죄에 사로잡혔다. (II,1,9) 그리하여 복구 아닌 전적 재생이 필요하게 되었다 (restoration is not enough but total renewal is required.) 스스로의 지성을 믿는 것도 잘못되고 (II,1,2,3) 自力 (self-power, autexousios)이란 뻔뻔스런 철학자들의 억지에 불과하다 (II,2,4) 칼빈의 이러한 비판은 이성은 죄로 인해 손상되어 초자연 영역에서 무능하나 자연영역에서 능력있다는 donum superadditum, gratia infusa등의 자왹?초자연의 이원론적 가르침에서 자신을 멀리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 교리가 모든 죄가 동등히 악함을 말하거나 칼빈 특유의 죄 "비관론 (sin pessimism)"을 말하지 않는 것은 결국 sola gratia가 corruptio totalis의 세력을 이기기 때문이다. 죄가 인간과 세계의 구조를 바꾸는 존재론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형이상학적으로 보지 않고 "방향전환 (a change of direction, not new but renewed nature)"으로 보는 것이다.

        6. 한점의 빛들: 중세의 자연 자충족 사상과 계몽시대의 이성의 빛의 덕에 충분성에 반하여 칼빈은 이성의 자연적 빛을 "맹목"으로 여긴다. (II, pref., 13) 나아가 교부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철학자들에게 너무도 가까이 가서, 성경을 절반에서 조화시키려 한적이 있음을 지적하고 (II,2,4) 이를 배격한다. 하지만 이런 배격의 자세가 세속작가의 지혜를 전적으로 배격하는 것으로 나가지는 않는다. "인간의 왜곡되고 부패한 성품 속 (특히 인간 이성 속)에 얼마간의 빛이 여전히 빛나고 있다"  (II,12, 12; 참고 I, 5, 14; I,2,19).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들로 옷입고 장식되어 있으며 (II,2,15) 따라서 과학, 미? 예술등과 같은 부분에 성취가 가능하다. (II,2,14) 그러나 이것을 인간 자연적 성취나 재능으로 간주하기 보다 하나님의 영의 선물들로 보아야 한다. (II,3,4)

        7. 일반은총: 칼빈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kindness, II,2,17;  I,5,14), 그의 자비와 인자 (III,3,25), 모두를 또는 일부를 향한 특별한 은총 (II,2,14) 또는 죄의 영향을 제어하고 인류와 개인을 선물들로 복주시는 섭리 (II,3,3)을 언급하고 있으나 카이퍼에서 보는 것과 같은 조직적 일반은총을 논한적이 없다.  그는 자연과 은총을 병립시키지 않고 죄와 은총을 병립시킨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화란적 신학에서 보는 일반은총 논쟁 (1924년 Herman Hoeksema's Protestant Reformed Churches in America; 1944 Klaas Schilder's Vrijgemaakte Gereformeerde Kerken)의 소지가 없다.

        8. 죄의 잠행성 (The insideousness of sin): 칼빈은 죄악에 떨어진 인간이 여전히 통찰력과 이해의 선물을 간직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두기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이 불신자의 삶속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규명함에 있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에 아니면 그것이 개인의 맑弩ソÍ 권세와 명망을 높이는데 쓰이는가? 후자의 경우 그것은 자연적 선의 증거일 수 없다. (II,3,4) 여기에는 롬1장 특히 21의 증거 즉 하나님을 알되 감사치도 않고 상상력에 헛되고 마음이 허망해져 하나님을 알지만 동시에 참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음을 증거로 제시한다. 

        9. 대립과 종합을 넘어 겸손으로: 철학에 대한 칼빈의 자세는 근본적 비판과 진정한 숭앙을 엿보인다. 비기독교적 철학에 대한 그의 견해는 기독교인이 살며 숨쉴 수 있는 집이 아니나 그렇다고 완전히 허물어 버려야할 것도 아니다. 또 참과 거짓이 첨삭가능하도록 분리되어 있어서 상황의 요구에 따라서 어떤 부분은 헐고 어떤 부분을 복원하여 보존할 이둘의 종합은 더우기 아니다. 칼빈은 이성이 빛을 발하기는 하나 그것은 짙은 무지로 억눌려 제대로 나올 수가 없다고 한다. (II,2,12) 이러한 이중성을 감지한 칼빈은 매사에 조심스레 평가한다. 그는 비기독교적 사상을 적어도 그 가장 고상한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죄로 물들지 않은 양 감지덕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하나님 자신이 저버리시지 않으신 문화발전율» 업신여길 권리를 가진 냥 그것을 무조건 무시하지도 않는다. 또 그 둘 가운데 기독교인이 기독교와 비기독교의 부분적 진리의 조야한 종합 (rudimentary synthesis, a half-harmonization, II,2,4)을 꾀하지도 않는다.

        칼빈의 대안은 우리 철학의 기초가 겸손이라는 것이다. (즉 비기독교 철학의 자율성, 자충족성에 대한 비판 그 자체가 자율적이거나 교만의 발로로서 자율을 또 하나의 기독교적 자율로 비판함이 아니라 겸손과 온유여야 한다는 것으로 이는 바로 벧후3:16의 정신과 통한다.) 비기독교 철학은 자충족성의 관념에 사로잡혀 겸손의 기초 즉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의 기초가 결여되어 있다. 그가 이 자충족성이 자기-교만과 가장된 불충분성인 점을 보여 혹독히 비판한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닫혀있는 자충족적 사고도 그 생명과 동력은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고 부딛침으로 부터 얻는다. 하나님의 진리는 기독교와 비기독교 철학의 가능성 그 자체의 전제조건, 즉 초월적 조건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나는 그곳이 어디이건 간에 (wherever God's truth manifests itself) 심지어눅Â 그것이 비기독교 철학자들의 작품들 속에서 희미하고 억압된 개념들 속에서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향해 마음을 열 겸손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열린 마음과 비판적인 마음으로 들음을 호소함 (an appeal to listen, open-mindedly and critically)  이외에 어떤 무엇도 아니다. 


손봉호. 현대정신과 기독교적 지성. 서울: 성광문화사, 1978. "기독교철학은 가능한가?" "기독교철학의 방법론," "기독교철학의 전제조건들," "철학과 신앙" 216-240쪽.


        1. 기독교철학의 가능성: 철학은 하나의 인생관, 세계관, 신관으로서 언제나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철학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어떠한 바탕과 기준 위에서 삶의 자세를 반성하고 비판하여 의식화된 내용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수반한다. 기독교철학의 근거와 기준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기독교철학이란 기독교인이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생관, 세계관, 혹은 신관을 의식화시키고 체계화 시킨 것인 동시에 그것은 끊임없이 성경의 비판을 받아야 하는 역동적인 것이라 할 쎕ö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의 한부분을 대상으로 다루는 국부가 아닌 전체에 대한 학문이기에 종교적 신앙과 가장 근사한 (그 영향과 포괄성에 있어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철학은 계시의 근본정신에 근본을 둔 우리 일상경험의 객관화요, 계시의 빛 아래서의 삶에 대한 인간적 반성이다. 그것은 따라서 "신앙이나 계시로 대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학적 권위도 가질 수 없다." 기독교철학은 인간적 과제요 그것으로 일상생활을 기독교인 답게 (예: 사고를 기독교적으로 하는 일에) 하는 일의 보조 역활을 할 수 있는 임시표준이다. 물론 신학도 임시표준인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신학은 계시 그자체의 전제가 아닌 인간적 학문으로서 철학의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 그점에 관해서는 철학의 비판을 받을 필요있다.

        2. 기독교철학의 방법론: 생각을 주로 사용하는 학문이요 자세인 철학도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철학자들은 대화법, 분석적 방법, 회의적 방법, 종합의 방법, 비판적 방법, 판단중지등의 방법을 사용해왔다. 이 방법들의 목적은 "복잡한  현실을 정리하여 중요한 것들과 부수적인 것들을 구별하여,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참된 것, 그리고 가장 기본되는 것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직관이 중시되나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철학의 대상을 다루기에 역부족이므로 그것 모두를 체계화하여 사고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는 대개 조직적이고 일관성있는 방법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 점은 근대철학의 주된 관심을 "비판적인 숙고와 계속하여 심화하는 방법적 연구를 통하여 엄밀한 과학으로서의 철학을 만들어 보려는 것"이라고 한 훗설이 말에 잘 드러나고 있다. 또 그 좋은 예가 이러한 추세는 형이상학 기술 이전에 방법서설을 썼던 데카르트이다. 어떤 면에 있어 근대철학은 철학의 내용보다 철학방법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은 결국 방법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기독교철학도 방법을 갖게된다. 방법의 선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철학적 선택이요 종교적인 전제하에서 이루어진다. 기독교 철학은 합리론 (주로 분석적 방법)이나 경험론 (주로 귀납적 방법)의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으나 인간이성이나 경험을 완전붔÷ 무시할 수 없다. 또 기존의 철학이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 기독교 철학의 좋은 한 방법은 비판적인 방법 (경이 자체가 하나의 일상에 대한, 전 사고에 대한 비판이다) 일 것이다. 비판이란 절대적 표준을 전제하지 않으면 않된다. 물론 여기서 비판이란 자율성을 전제로 하는 비판이 아닌 계시의 시각에서 사고를 출발시키는 것을 말한다. 칸트철학은 합리론 비판, 훗설의 현상학은 심리주의비판에서 시작했으나 우리는 비기독교적 사고 전반에 대한 비판을 그 출발점으로 해야한다. "오늘날 기독교철학이 비판해야 할 대상도 자연이 아니고 인간의 사상과 인간의 사상체계의 영향을 깊이 받은 우리 문화와 일상생활인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무의식적으로 비기독교적 사상에 젖은 자신인 것이다."

        비판을 방법으로 삼는 철학은 인간 사고의 자율성, 자충족성과 그것에 근거한 낙관주의 역사관에 근거해있는 경우가 많다. "낙관적 역사관을 배격하면 역사의 의미를 종말에 둘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비판은 필연적으로 더 좋고 아름┫牟î 진리를 산출한다고 전제하지 않고, 다만 거짓과 우상을 배격하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서 헤겔식의 낙관론적 (보편주의 역사관과 진보사관) 변증법을 배격하는 가다머 해석학적 방법론의 철학적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서 비종말론적 사고와 낙관적 사고의 분간이 필요하다.


Charles Partee. "Calvin, Calvinism and Rationality." In Hart, Van der Hoeven and Wolterstorff, eds. Rationality in the Calvinian Tradition. Lanham: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3. pp. 1-16.


칼빈은 의식적이며  의도적으로 合理性 (rationality)을 하나의 복음제시를 위한 도구로 보고, 이 도구를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 칼빈주의자 됨에 배치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되는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첫머리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인간에 대한 지식에 선행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그의 논의, 즉 의지와 지성에 관한 논의는 고전철학과 신학적 전통에서의 고전철학 수용의 영향을 받았으나 성경적 계시의 기초위에서 이것들을 판단 纛Ì 전제되었다.

        그는 "인간이성이 하나님이 누구이며 그가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고 본다. (II,1,18) 그러므로 칼빈은 인간의 철학을 그리스도와 혼합하는 것을 하나의 부패로 보고 (I,10,3) 이성에 기초를 둔 인간의 철학과 성경과 성령의 인도에 기초한 기독교 철학을 구별한다. "기독교철학은 이성으로 하여금 성령에 ... 굴복하도록 명한다." (III,8,1 cf. II,2,26)

        칼빈은 논리 (dialectica)를 하나님에게서 나온 학문들 (사28:29) 중 하나로 보며 이성이 우리를 짐승으로 부터 구분한다 (II,2,12,17)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이성을 또한 "사탄의 논리" (마27:43)로 불리울 수도 있다. 에티에느 질송은 칼빈의 기독교 철학이 이성이 아닌 신앙에 기초한 것으로 잘 지적하고 있다. 칼빈은 "육적" 이성의 빛 속에서 피조물적 이성의 한계들을 규정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그는 "구속된" 이성의 사용도 규정하지 못하였다. 그는 이성을 접근가능한 (또는 모을 수 있는) 증거들에 기초하여 "세상적" 결정을 내리는 일과 성경에 계시된 신학적 내용들을 연관시키는 일을 위한 하나의 적절한 그러나 결코 졊タ의舊ö 않은 도구로 간주한다. 이성은 여기 저기 분리되어 나타나 그것을 고려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같이 분명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 계시적 자료들을 조심스레 반성하는 일에 중요한 역활을 한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계시를 넘어서 하나님의 신비들을 바르게 사변에 있어 무제한적 능력이나 힘을 가진 것이 부정된다. (I,14,4) 이성은 인간적 합리성의 어떠한 법칙들에 의해서건 우주적 통일성을 가진 결론과 연관을 보일 수 없다.

Jacob Klapwijk. "Calvin and Neo-Calvinism on Non-Christian Philosophy." In K.A. Bril, H. Hart and J. Klapwijk eds. The Idea of A Christian Philosophy: Essays in Honor of D.H.Th. Vollenhoven. Toronto: Wedge Publishing Foundation, 1973. pp. 43-61.


        1. 문제의 제기: 철학은 계속 외면화 (현상중시, 언어중시, 언어와 사회구조 분석의 도구화 )하고 반면에 종교의 내면화 (표현할 수 없는 개인적 주관적 경험으로 치부)하는 오늘날의 추세를 감안하여 볼 때, 과연 기독교 신앙과 세속철학의 관계 규명이 여전히 중요한 문제인가? 기독궈낡¡ 세속 철학과 사회의 위협을 당하거나 오히려 그것을 지배하던 시대에 있어서 뿐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 관계이해는 여전히 중요하다. 이 시대의 철학은 비기독교 철학이 아니라 후-기독교 철학 (과학, 학문)으로 그 내용에 기독교의 영향, 흔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세속과학도 자신의 역사적 뿌리를 검토하려 할 때에는 기독교와의 관계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기독교가 문화에 대한 책임을 생각할 때, 또 소극적으로 학문이 기독교에 가하는 비판과 도전을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이 관계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2. 기독교인들은 이전 시대의 이교적 배경의 철학적 통찰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졌는가? 성경의 진리 수용이 철학자들에 대한 배격을 의미했는가? 아니면 여전히 그 독립적 가치를, 또는 적어도 종속적 가치를 인정했는가? 이 문제는 단지 부정과 배격아닌 복잡한 양상의 대답을 야기했었다.

        3. "찬란한 악" (Splendida vitia, splendid vices): 종교개혁자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악의 전제적(totaliterian) 성격 이해, 즉 corruptio totalis 교리는 인간의 이성이 부패하였음을 ╟纛피構í 이러한 생각은 비기독교적 사상을 평가함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4. 칼빈의 반-스콜라주의: 전적부패 교리에 부합하게 칼빈은 이성의 자연적 빛 lumen naturale를 "맹목 (blind)"라 불렀고, 반면 성경을 그것이 우리들 주위의 세계 속에서 참된 하나님을 다시금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안경" (자연적 능력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개안수술적 도구)으로 보았다. (I,4,1)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인간의 부패한 성품 속에도 여전히 지식과 이해의 선물을 포함한 여러가지 선물을 (일반)은총으로 주시며, 이로 말미암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속에도 빛의 편린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들이 스콜라주의에서 말하듯 부분적으로 선하게 남아있는 자충족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죄악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은총으로 세상을 유지하고 계심을 증거할 뿐이다.  그들을 통해 주어진 교회 밖의 하나님의 선물을 무시하려 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자세가 그것을 주신 이에 대한 감사치 않는 자세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4. 흐른과 스콜라적 이원론: 화란의 역사가요 정치가인 흐른 반 프린스터는 스콜라주의를 "반-역사주의적"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스콜라주의가 상이한 종교적 뿌리를 가진 희랍적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이론은 희랍종교에서 비롯된 것인데)과 성경적 신앙을 그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종합하려 했기 때문이다. 흐른의 주된 주장은 "철학이 본질상 종교의 한 파생물 (philosophy is in essence a derivative of religion)" 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기독교는 모든 종교적 계몽의 근원이다"라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의 일반계시의 빛이 에덴동산에서 주어졌던 원초적 계시의 빛이므로 그것에 의해 진리를 발견하는 모든 종교는 원천적으로 기독교의 파생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죄악에 빠진 인간의 그 타락한 성품의 자연적 종교는 하나님을 대적함이다. 따라서 여기에 기독교인이 불신사상과 거리를 두어야 할 이유가 있다. 불신사상과 철학의 상대적인 가치를 인정하되 그것의 방향에 의해 부패된 것임을 인지함이 필요하다는 주장한다. "기독교적 기반에서 우리는 좋은 의미의 절충주의적 사상가 (eclectic think?r)가 될 수 있다." 흐른은 모든 과학적 진리가 종교적이고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적 근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주장을 펼 수 있었다.

        5. 카이퍼: 그는 흐른의 추종자였으나 그의 "절충주의"와 달리 "대립"의 주제를 강조했다. 카이퍼가 일반은총을 말하면서 화란어의 보편적 의미의 은총인 genade 대신 gratie를 쓴 것은 genade가 자칫 특별은총과 혼동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별은총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작을 하심을 말하고 일반은총은 옛것을 영구히 보존하심을 말한다. 일반은총의 목적은 부정적으로는 죄를 억제하고 피조계를 보존함이며, 긍정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 속에 두신 가능성들을 개발함, 즉 피조물의 개현과정을 말한다. 이러한 일반은총 교리의 내용은 사고, 과학, 철학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기초함을 의미한다. 즉 과학은 "하나님 자신의 창조물이다." (GG III p. 495.) 이러한 생각으로 카이퍼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산물인 이교적이며 세속적 사고를 인지할 수 있었다. 카이퍼는 과학들 가운데 차이를 인식한다. 자연과학은 인문과학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 관찰에 입각한 만큼 일반적 領릿煐별ú 공통적 수용 (general validity and common acceptance)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기원, 관계성 그리고 대상의 목적등에 관한 질문들, 즉 관찰을 통해서 풀 수 없는 질문들이 일어난기 때문에 역사, 철학과 다른 인문학에 있어서는 연구자의 주관성이 문제된다. 결국 카이퍼는 자연과학에 있어서는 기독교-비기독교적 학문의 구분과 대립을 원하지 않았으나 과학철학을 포함한 모든 인문학에서는 두개의 다른 과학이 존재함이 가능하고 특히 참된 기독교적 학문이 요구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성경적 자료들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거듭난 정신이 기독교적 학문의 특성을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GG III p.514,521.) 비기독교적 사고에 대한 카이퍼의 자세는 분명히 양면적이다. 일면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선물과 그것이 현현 (플라톤, 칸트등에서의)을 찬양하나, 다른 한편 오직 중생한자 만이 영적인 것은 영으로만 분별할 수 있음 (고전2:13)을 강조하며 기독교적 철학과 과학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전반적으로 보아 카이퍼의 입장은 후자에 기울어 "중생한 과학" 대 "중생의 영향 밖의 과학"의 대립에 기운다. 따라서 일반은총의 기능은 비기鍍떡냅û 개념들의 인지를 위한 바탕이라기 보다 기독교적 활동의 주도적 역활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점은 그의 스톤렉춰에서 진일보하여 정상주의자와 비정상주의자의 다른 전제들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6. 반퍼슨과 도예베르트: 도예베르트의 신비판에 대한 반퍼슨의 비판적 논평으로 시작된 이 둘 사이의 Philosophia Reformata 24-26 (1959-61) 논쟁은 비기독교적 사고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는 일치하나 그 인지의 정도와 근거 (degree and ground of appreciation)에 있어 상이하다. 도예베르트는 비기독교적 철학이 모든 사람들에 강제되는 "창조의 법-체계들을 따르는 상태 (states of affairs)"에 직면해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 인지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반퍼슨은 그러한 상태를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상황 (affairs)"가 결코 정적이 아니고 인간의 의미부여와 인간 상호간의 해석의 유형에 따라 유동하기 때문이다. (즉 창조의 법-체계의 유동성에 있어 도예베르트 보다 덜 기계적이고 보다 주관적 요소에 강조를 두고있다.) 오히려 반퍼슨은 모든 인간적 사고행위, 의미, 또 심지어 이방에서도 나타나는 일반계시 쇨湛Ç 하나님의 임재 (God's presence)를 그 근거로 말한다. 그러나 도예베르트는 불신자의 마음속에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적 근본동기와 대립적인 반역적인 동기가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반대한다.     도예베르트의 공로는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만든 것에 있다. 이로서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 중심적이나 동시에 교회중심적이지 않은 문화관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카이퍼의 문제를 종교와 신앙 (religion and faith)을 분명히 분리함으로서 해결한다. 그의 문화, 과학관은 그리스도에 종교적으로 뿌리밖고 있으나 교회적인 신앙의 조항들과 아무런 직접적 연관을 함의하지 않는다. 크라바이크는 여기서 비기독교적 사상가들의 중심에 반역적 기본동인이 자리하고 있다는 도예베르트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이것이 그 사상속에 잠재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즉 반역적 동기는 항상 종교적이며, 천국에로의 자의적 외침이며 억눌리고 왜곡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중생하지 못한 이들을 도전하고 있는 진리이다. 이것이 모든 이방종교와 철학의 애매모호한 다의성 (ambiguity)의 근원이다. 긱琉 臼© 이방철학 (종교, 문화)에 귀를 기울인 자는 늘 경이와 당혹을 경험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영께서 이방과 세속주의 속에서 역사하고 계심에 대한 경이이다. 또 하나님의 역사가 항상 인간의 무지와 죄악으로 둘러쌓여 있다는 당혹감이다. 애매모호함과 이중성이 비기독교적 사고에 항상 존재하며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열린 마음과 전적 반대를 요청한다. 우리는 반대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해 높아진 모든 것을 정복한다. 우리는 열린마음으로 모든 인간적 사고를 그리스도께 복종하도록 사로잡아 온다.


손봉호. 감수자의 머릿말. 엘 칼스베이끄 저. 황영철 역. 기독교인의 세계관: 기독교 철학개론. 서울: 평화사, 1981. pp. 3-6.


기독교는 역사적 원인과 본질적 원인에 의해 다른 어떤 종교보다 철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다.

        1. 역사적 원인: 기독교가 비록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하였으나 그 발전이 헬라문명을 배경으로 한 지중해 연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 복음은 비록 그 자체로 매우 실천적이고 비사색적이지만, 매우 사색적인 철학문화와 접했을 때, 한편 변증적 목적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 전도의 목적으로 희랍적 사색을 쏠 ▤構Ô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논리적 사고에 깊이 젖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것을 완전히 비논리적이거나 무논리적인 것으로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복음을 희랍적 문화에 적절하게 제시하고자 철학적 분위기에 적응시킴에 부작용과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위 "로고스 신학"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반발도 따랐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했던 터툴리안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심지어 터툴리안도 철학에 무지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철학에 무지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이렇듯 철학과 기독교 신앙과의 이런 불편하나 분리될 수 없는 어색한 관계는 서구문화와 그 영향권 아래있는 모든 문화에서 계속되고 있다.

        2. 본질적 원인: 기독교는 계시종교이다. 인간의 창조성 (직관)이나 경험을 초월한 진리가 하나님께로서 나타났으나 그것은 이해되어야만 할 언어로 나타났다. 신적 계시는 본질상 인간의 직관이나 경험의 산물인 (세상의 지혜라 할 수 있는) 철학과 충돌하는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때로 계시의 내용이해에 철학이 방법론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관계는 늘 불편하고 긴장이 至 뎬Â 것이었다.

        3. 이 긴장의 핵심은 철학의 중립성, 객관성, 과학성에 비해 신앙은 주관적이고 편견이라는 오해에 있다. 철학은 그 반성의 범위가 전체적 성격과 포괄적 내용에 의해 삶의 방향설정과 가치관 형성에 강한 영향을 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종교의 역활을 대신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철학은 학문을 떠나 하나의 이즘의 형태로 이데올로기화 한다.

        4. 과거 수세기간 서양철학이 종교의 역활을 대신해온 것을 많은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할 정도이다. 이러한 상황을 직시하고 고발한 공로가 흐른 반 프린스터 (Groen Van Prinsterer, 1801-1876) 카이퍼 (1837-1920)그 뒤를 이어 하나의 철학체계를 형성한 도예베르트 (1894-1977) 였다. 이들의 전통과 체계는 하나의 철학으로서 권위나 영구성을 가질 수 없고 그러한 주장도 하지 않는다. 많은 비판이 측근으로 부터 가해졌고 그래서 발전되어 왔다.


Bernard Zylstra. "Introduction." In L. Kalsbeek. 황영철 역. Contours of a Christian Philosophy: An Introduction to Herman Dooyeweerd's Thought.  기독교인의 세계관: 기독교 철학개론. 서울: 평화사, 1981. 17-37쪽.


        1. 하일라우메 흐른 반 프린스터 (Groe? Van Prinsterer, 1801-1876)는 헤이그 왕실과 가까운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일생에 걸쳐 "프랑스 혁명 (1789-99) 이후에도 기독교가 서구문명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여전히 소금의 역활을 할 수 있는가?"라는 고독한 문제와 씨름했다. 그는 역사가, 정치가, 언론인, 수필가로서 성경적 기독교의 부활에 진력했다. 그의 모든 노력은 19세기 당시의 자유주의 비판에 모아졌다. 그는 자유주의란 프랑스혁명을 통해서 유럽에 소개된 급진적인 정치 사상이 온건하게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했다. 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투쟁은 특히 (공립)학교를 자유주의자의 독점물로 허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학교교육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에 대항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노력이 물론 시대의 추세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하였으나 계몽시대 자유주의와 과학주의의 치명적 영향을 최소한 지연시킨 공로가 있다.

        2. 아브라함 카이퍼 (1837-1920)은 라이덴 신학부의 신학적 자유주의에서 돌이킨 후 프린스터 휘하에서 당시 지배계급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자유주의로 부터도 개종했다. 프린스터의 "반혁명적" 또는 "역사적 기독교" (antirevolutionary, Christian-historical)운링¿ 보수당과 연관을 맺고있었으나 1870-1년에 분열되었다. 1863년 국교회인 개혁교회 (Hervormde Kerk)에서 사역을 시작한 카이퍼는 프린스터의 후계가 되었고 1874-5년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1878년 그는 조직이 약한 반혁명운동을 지금도 의회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반혁명당 (Anti-revolutionary Party)으로 재조직했다. 그의 정치적 이력의 절정은 1901-5년 수상직 재임에 있었다. 기독교가 새힘을 얻기 위해서는 생동적 교회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깨닫은 그의 노력의 결과 1886년 교회의 분리 (Secession)이 일어났다.

        (N. Wolterstorff. Keeping Faith: Talks for New Faculty at Calvin College, Vol.7, No1, February 1989에 의하면 이 분리의 전주곡이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Afscheiding는 화란의 국교회인 Hervormde Kerk가 감성에 있어 매우 지적으로 변하고 신학이 아주 자유적이어 문화의 발전에 넓게 열린 성향을 가져 계몽주의 영향 아래 놓여있던 배경에서 일어났다.  1834년 동부화란 작은 마을들에서 국교회로 부터의 분리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들은 Hendrick deCock의 주도하에 신학적으慢灌Â 정통이요 경건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이며 고급문화에 대한 의심을 갖는 집단이었다. 이 운동은 불법이었고 정부도 군인들을 일부 농가에 기숙케 하는등 조처를 취했으나 급속히 파급되어 2년내에 120여 교회가 설립되었다. 1846-7 이들 중 일부가 종교의 자유와 경제적 향상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Holland, Michigan과 Pella, Iowa에 정착했다. 그들은 화란계 개혁교회에 참여하려 했으나 신학적 상황이 화란 국교회보다 심각한 것을 알고 1857년 Christian Reformed Church을 설립하게 되었다. Afscheiding은 전적으로 "작은 사람들 Kleine Luyden" 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화란의 일부 엘리트들 가운데도 국교회의 상황과 계몽주의, 그리고 불란서혁명이 교회에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Reveil이라 일컫는데 그중 흐른 반 프린스터와 그 뒤를 이은 카이퍼가 뛰어난 지도자였다. 특히 카이퍼는 국교회의 상황에 대항하여 "애통자 Doleantie (weeping ones)"로 알려진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들중 미국으로 이민한 사람들은 화란개혁교회가 심지어 프리메이슨을 멤버로 허용한 것에 충격을 받고 대개는 CRC沽¡ 합류한다.) 결국 1886년 극도의 정치적, 교회적 논쟁과 분쟁속에 심지어 양쪽의 물리적 힘의 충돌 가운데 200여 교회가 국교회에서 분리하여 Gereformeerde Kerken을 설립하였고 1892년에는 이미 50년전 국교회에서 분립한 Afscheiding 교회들의 대부분이 이 교단에 합류하였다. 카이퍼는 Afscheiding 교회의 경건과 그들의 신학적 정통성에 대해 깊은 동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전체적 비젼은 매우 달랐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에 대한,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존재 전부에의 우주적 주권을 인정하고 그것이 모든 문화와 사회 속에서 인정됨을 몸부림치는 바울의 비젼에 의해 사로잡혔다. 그는 이것을 세상의 어느 한뼘의 땅도 주 예수 그리스도에 속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념하에 Afscheiding 교회의 분리주의적이고 고급문화 지양적 성향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회와 문화를 정복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카이퍼와 그의 추종자들은 기독교 학교를 세우고 기독교 대학을 설립했고, 기독교 정당과 기독교 노동조합을 만들고, 기독교 일간 신문을 발행하翎눼?)

        그가 일했던 사회는 하나의 위기에 봉착한 사회였다. 특히 갑자기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로 인해 깨어지기 쉬운 산업혁명의 파괴적 효과를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정당, 의회, 상업연합체, 자선단체 등을 통한 활발한 사회활동이 일어나야 할 필요를 역설했다.

        또 신교의 학자들이 현대철학과 과학의 전제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경각심을 느낀 그는 교회, 국가, 사회 경제적 영역, 예술, 세계의 교육을 기독교적으로 재정립하는데 필수적인 지적 지도자 양성을 위해 1880년 자유대학을 설립했다.

        카이퍼는 유럽에서 기독교가 문화적 영향력을 상실할 가능성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시대조류를 거스려 Kleine Luyden (화란 복음주의 개혁 신교의 사람들)을 중심한 환상과 비젼을 가지고 또 북아메리카의 신천지에서 그리스도적 문화가 다시금 꽃필 가능성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은 1898년 프린스톤에서의 스톤렉춰에 나타났을 뿐, 카이퍼의 실질적 영향은 화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세계관의 기본원리가 자연과학, 사회과학, 문학등에서 기독교적 작업을 가능하게 만뒵é 수 있는 이론적 골조로서 구체적이며 조직적인 기독교 철학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이 그 한 이유였다. 그의 이론적 작업은 그의 학문적 동역자인 헤르만 바빙크와 마찬가지로 주로 신학에 머물렀다.

        (파스칼 Blaise Pascal (1623-62), 쉐렌 키엘케골 (Kierkegaard, Soren Aabye, 1813-55), 카알 야스퍼스 Karl Jaspers (1883- ) 등도 기독교 철학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칼빈주의적 기독교 철학자들과 그들의 철학적 사색의 폭이나 방향성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들중 특히 얀센니즘의 영향을 받은 파스칼과 루터교적 전통의 덴마크 국교회와 긴장관계속에 있던 키엘케골의 철학은 종교철학이나 철학적 신학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종교적 실존의 윤리적 차원에 대한 사색에 촛점이 맞아있다. 독일 루터교적 전통의 야스퍼스 역시 정신병 의사 출신으로서 철학은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보고 형이상학적 존재론에 치중하였다. 즉 그의 철학은 참된 존재로서의 초월자를 향해 물어나가는 형이상학으로 그 방법은 암호독해 (Chiffrelesen)이며 초월자의 숨은 수수께끼를 푸어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조쓩냅岵Î 철학, 특히 기독교 신학적 사고로 철학적 문제 해결에 몰입하였으나 자신들 세대의 철학이 갖는 반기독교적, 인본주의적, 비성경적 동기에 대해서 그다지 의식적인 비판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제기한 경우에도 자신의 철학을 그러한 핵심적 비성경적 사고체계에 대립될 만한 조직적이거나 그 핵심을 완전히 드러내 대항하는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특히 두 후자의 경우 그들의 철학성향이 루터의 자성적 신학이나 내면지향적 신학, 또 소위 니버가 말하는 "문화와 역설관계에 있는 기독교"의 분립주의 사고의 영향과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또 이들은 화란의 기독교 철학자들과 달리 사회운동이나 교회의 움직임을 대변하거나 인도하던 지도자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개인적 철학자로서 비교적 고립된 삶을 살았다. 중세의 기독교와 그 사상이나 인생, 세계관이 공동체적이며 외면적이고 형식, 의식적이었 것에 비해 그에 대한 반발이라 할 만큼 이들의 철학은 내면지향적이고 개인주의적이었다. 이들의 삶과 철학은 따라서 파스칼에 있어서는 신비적인 성향마저 가질 정도로 내성적이씛í 개인적이며 사변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에 비해 화란의 기독교 철학은 위기에 처한 신앙 공동체를 옹호하며 그들의 삶과 세계관을 강화하여 나아가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주려하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개혁적 world-formative, or world-transforming vision"을 함의하고 있었다. cf. N. Wolterstorff.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Chapter I. "World-Formative Christianity," pp. 3-22.)


N. Wolterstorff.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3. (1981년 화란 암스텔담 자유대학교 카이퍼 렉춰, 제목은 시85:10-11에서 채용했다. 서문으로 이 성구와 더불어 라틴 아메리카의 기도문을 실었다. "오 하나님,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시옵고, 빵을 가진 우리에겐 공의로 굶주리게 하소서. O God, to those who have hunger give bread; and to us who have bread give the hunger for justice.)

        이 책 서문에서 월터스토프는 자신의 목적이 초기 카이퍼 렉춰의 주제인 "종교개혁의 정치적 결과들" The Political Consequences of the Reformation을 따라¼ 본래 칼빈주의적 종교개혁의 사회적 비젼을 "채용 (appropriate)" 하고자 함이라고 밝힌다. 여기서 채용이라 함은 전통을 무비판하게 수용하거나 전적으로 배격함이 아니고 자신의 환경에 그 주된 요소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거기에는 자신이 개혁주의 전통에서 자라나면서 그것이 본래 그토록 뚜렸하게 가지고 있던 세계형성적 추진력 (world-formative impulse)를 거의 가지지 못함에 대한 반성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들의 비젼은 성도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질서를 개혁하기 위해 진력하는 성도의 의무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을 부르신 제자도의 한 부분으로 고백한다. 그 의무는 종교에 부가물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의 동력들 가운데 위치한다. )

        

Chapter I. "World-Formative Christianity," pp. 3-22.


        로마문명에 들어온 기독교는 초창기 사회질서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으나 시간이 감에 따라 (약3-4세기후) 그 영향을 상실한다. 중세 기독교는 사회구조 (출신과 역활을 포함한) 에의 묵종을 가르쳤다. 16세기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이와 다른 비젼과 실천을 가져와 당시 사회제도를 악한 것으로 暾풔洑構í 개혁을 선언하였다. 여기에서 세계-형성적 기독교의 재탄생을 본다. 이후 이 유형의 기독교는 때로 독재적 승리주의, 혁명으로 어떤 때는 겸손한 해방자로 간간히 역사에 나타나곤 했다. Michael Walzer, The Revolution of the Saints,에서 16-7세기 영국 청교도를 가리켜 중세인들과 달리 자신들이 속한 세상 (특히 사회구조)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그것의 향상을 위해 계속 노력하는 자들로 규정한 것은 매우 옳다. 사회구조란 자연질서의 단순한 일부가 아니며 인간적 결의의 결과이므로 합의적 노력에 의해 변개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구조는 또한 실로 타락한 구조로서 때로 변개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그들 종교의 본질적인 일부이다. 

        월터스토프의 기획은 현대 사회질서 속에 기독교인이 어떻게 참여하여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물론 그는 전대의 칼빈주의자들의 세계-형성적 기독교의 비젼을 그대로 옹호하거나 재현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적 비젼이 유일하고 가장 옳은 것은 아니나 사회질서에 참여하고자 하는 몇개의 기독교적 비젼의 항속적 패턴들 중 하나였던 것은 사실이다.

        중세의 인생관은 극히 저세상쩜û (otherworldly)이었다. 세상적 일들 (농공상 정부등)은 종교적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야 하기에 했다. 중세 전체에 강한 영향을 미친 신의 도성에서 어거스틴은 기독교인들이 "모든 세상적이고 시공적 사물들이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에서 잘못되거나 걸림되지 않도록 이방에 사는 것과 같이 사용하고, 미래에 언약된 영원한 축복에" 시야를 고정해야 할 것을 말했던 것이다. 월터스토프는 삶에 있어 문제점을 보나 그것을 개혁하기 보다 묵과하고 피해 돌아서는 이 성향을 formative 종교와 구분하여 "회피적 (avertive)" 종교라 부른다.  회피적 종교나 형성적 종교는 세상에 어떤 문제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활동을 단지 축복 (blessing)으로만 보는 제삼의 형태와 대비하여 구원적 (delivering, salvation)종교라 할 수 있다.

        중세의 회피적 모델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연합하는 명상적 (contemplation) 의무들이 강조되며, 아울러 모든 실재는 매우 계층적 구조 (hierarchical structure)의 연속적 체인을 이룬다는 관념이 지배적이다. 이 연쇄속에 모두가 상이하고 계층적으로 불평등한 위치로 션프떫퓸駭? 따라서 중세인은 사회적 역활들 이나 그 불평등을 생각하는 대신 상이한 역활들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천부적이고 자연적인 불평등을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모반자와 반역(rebels, usurpers)을 익숙히 알고 있었으나 급진주의자, 혁명자 (radicals, revolutionaries)에 대해 아는 바 없었다. 중세에는 심지어 군왕도 주어진 (given)제도를 수정하는 일은 상상하지 못했다. 군왕 (교황이나 감독도 교회를 돌볼 뿐)은 주어진 제도를 단지 돌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중세후반과 16세기에 들어서 단지 주어진 제도의 개념 대신 만들어진 그래서 수정될 수 있고 잘못이 발견되면 반드시 고쳐야만 할 대상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그 변화의 주체도 천부적으로 권위를 위탁받은 어떤 일부가 아니라 바로 시민들임으로 바뀐다. 즉 중세의 수동적인 臣民 (subject)가 능동적 市民 (citizen)이 되면서 변화한다. 월터스토프는 왈저를 인용하면서 이런 시작이 바로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 최초로 군왕으로 부터 성도들 (또는 일단의 성도들)에게로 정치적 사고의 강조를 전환핌構í 독립적인 정치적 활동을 이론적으로 조직화한 것은 바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즉 영국 청교도들에 있어 성도들이 불평등한 제도를 고쳐야할 임무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루터주의 역시 형성적 동기가 강하나 그 촛점이 "종교적"인 면에, 주로 교회 구조와 개인적인 "내면성 (inwardness)"에 주어졌다. 반면 "비종교적"인 면, 정치나 사회적 변혁에 대해서는 중세만큼이나 묵종적이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 세계-형성적이라 할 때, 그 세계는 자연이 아닌 사회적 세계를 말한다. 이들에게 있어 형성활동은 하나님에게의 순종이었으며, 그것은 실재를 하나님의 뜻에 보다 가깝게 만들고자 하는 동기로 추진되었다. 변혁의 대상이 내부가 아닌 외부적 실재일 경우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 또는 기구라고 (servant or agent)라고 생각하였다. 회피적인 종교에서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의 그릇 (하나님을 명상을 통해 연합한, 담은 그릇, a vessel of God)이기를 소원하나 세계-형성적 종교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 (an instrument of God)이길 원하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메타퍼가 세계?형성적 종교의 목표와 희망에 있어 중요한 참조점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형성적 동기가 반드시 자신의 능력으로 천국을 가져오는 유토피아적 혁명이나 승리주의적 환상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요약하자면, 본래적 칼빈주의의 등장은 하나님과 보다 가까운 연합을 찾기 위하여 사회적 세계로 부터 돌아서는 환상과 실천으로 부터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사회적 세계를 개혁하고자 일하는 실천으로의 기독교적 감성에 근본적 변화를 나타낸다. (... the emergence of original Calvinism represented a fundamental alteration in Christian sensibility, from the social world in order to seek closer union with God to the vision and practice of working to reform the social world in obedience to God.)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중세적 신학저술의 전통을 따라 신지식에 대한 서술로 시작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 획기적인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즉 신지식이 더이상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명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하신 일 (works)에 대한 적절한 반응 (response)로 구성되어 있다. 신지식은 하나님에 대풂Ñ 인지 (acknowledgment)로서 그것은 신뢰, 존경, 감사와 봉사등 삶 전체에서 일어난다. 제네바 요리문답 (1541)의 인간의 목적에 대한 부분에서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과 선은 그를 만드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참되고 바른 신지식은 그에게 바른 존경을 돌리는 지식이 얻어짐이며, 바른 존경의 방법은 "우리를 그에게 온전히 의탁함이며; 그의 뜻에 순종함으로 우리들 삶 전체를 통해 그를 섬김을 연구함이고; 구원과 그에게서 얻어질 수 있는 모든 선한 것을 갈구하며 우리의 모든 필요에 있어 그에게 간구함이며; 마지막으로 마음과 입술 모두에서 모든 복의 유일한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칼빈주의가 흔히 하나님은 주로 법을 주신 분이요 우리는 거기에 복종한다는 이해가 있으나 그 이면에 하나님께서 선히 주시고 성도는 그에 대한 감사로 복종한다는 바탕의식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회에 있어서도 순종은 그 감사의 표현이요, 하나님의 영광에로의 순종이다. 칼빈의 요리문답에는 인간의 삶이 세상을 향하고, 나아가 도피적 종교를 부정함이 뚜렸하다. (칼빈주의가 이러한 성향으로· 현대적 세속화를 야기시킨 도구였다는 비판이 있다. 물론 칼빈주의가 도피아닌 세상을 향하게 하고, 그 속에서 신적 권위를 가진 모든 것의 권위를 박탈하고 예배하기를 거부함으로 세상을 "속화 (secularized)" 한것이 사실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흔히 칼빈주의가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순종의 형태로서 세상에 도장을 새기려 함을 통하여 세상을 성화 (sacralized)한 것을 간과하고 있다.) 칼빈주의자의 사회적 경건의 중심에는 감사에서 동기되고 소명으로 표현된 순종 (감사, 순종, 소명)이 깔려있다. 칼빈주의자의 소명의식은 단지 "직업" (occupation)의 개념보다 넓어 감사, 순종, 소명의 삼요소를 가진 사회적 역활 모두를 포함한다. 즉 칼빈주의자들은 자신의 직업을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순종을 실행하는 그 무엇으로 보았다. (트렐취가 말하는 바 중세적 Christian morality was exercized in vocatione but not per vocationem 이었는데 반해서 Calvinist saw his occupation as something through which to exercise his obedience 였다. 즉 단지 자신의 직업을 버리지 壺歌í 그 역활을 지키는 것 (remaining in that role)의 순종이 아닌 순종적 감사에 바탕을 두고 그 역활에서 담당하는 활동 (the actions performed in that role) 으로 직업을 생각했던 것이다.) 또 이들은 단지 자신이 타고난 직업에 충실히만 하면 공동의 선에 기여한다는 무비판적 생각을 넘어서 자신의 직업이 공동의 선에 참으로 기여하는가를 반성했다. 성경이 보여주는 대로 자신이 사는 세계와 그 사회적 질서가 자연적 세계 아닌 인간의 질서로 거기에는 인간적 악이, 그 영향이 스며있는 것을 인식하고, 거기에 대하여 책임의식을 가지는 새로운 사고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점이 실로 중세적인 사고를 넘어 사회 개혁과 심지어 혁명에 이를 수 있는 혁신적인 사고였다.

        이러한 초기 칼빈주의의 혁신적 세계형성적 성향이 훗날 (루터주의에서 내면성과 교회 중심적 사고로 국한된 것에 반해) 칼빈주의에서는 쑞탭逵ú 철학형성을 위한 관심 집중의 에너지로 빠져나가면서 소멸하였거나 그러할 위기에 놓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초기 칼빈주의는 사회적 세계를 하나님에게서 유리되지 않은 것으로 재구성하려는 열정적 욕구를 가졌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은 사회가 인류의 공동복지를 위해 봉사하는 질서있는 "형제체계 (brotherhood, or solidarity)"을 이룩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또한 인류로부터도 유리되지 않은 것이 될 것이었다. 물론 칼빈주의는 초기에 그들과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정의로운 사회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깊히 생각하지 못한 결과 정의를 말하면서도 매우 억압적인 성향을 지닌 것이 사실이다. 또 칼빈주의자들은 자주 승리주의 (triumphalism, dominon theology)에 빠지곤 했다. 쑡結¡ 대해 월터스토프는 이렇게 제언한다. 주의 말씀과 백성들의 외침들이 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우리들의 축복을 세아리는 것 이상의, 우리들의 내면세계를 가다듬는 것 이상의, 우리들의 생각을 개혁하는 것 이상의 것을 하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의 싸움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우리들에게 허락될 것이라는 소망과 기대속에 새로운 사회를 위해 투쟁해나가라고 부른다. (the Word of the Lord and the cries of the people join in calling us to do more than count our blessings, more than shape our inwardness, more than reform our thoughts. They call us to struggle for a new society in the hope and expectation that the goal of our struggle will ultimately be granted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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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고대 교회의 기독교철학


(가) 지난주 서론의 정리: 철학적 문화 속의 기독교회


1. 바울의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와 세상의 지혜의 구분과 후자의 배격은 2세기 후반의 교부들 가운데 변증가들 (Apologists)로 불리우는 이들에게 있어 변화가 왔다. 철학적 분위기를 지닌 기독교가 일어나는데는 세가지 이유가 있다.

        A. 철학의 훈련을 받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함을 통해서

        B. 철학이 기독교에 대한 정죄에 대항하는데 도움으로 사용되었다. "무신론 자" 라는 비난은 유대교 뿐 아니라 흔히 소크라테스 같은 비판적, 반체제적 철학 자들에게 적용된 정죄였다. 따라서 변증가들은 이들의 자신들 입장 변호의 논리를 차용하여 (예: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변증의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이외에 영아살해,식인, 근친상간, 반국가 등의 새로운 정죄에 대한 변증에 교부들은 이방 철학자들이 이방적 종교의식 비판에 사용한 논리를 차용하였다.

        C. 철학이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유효한 처방으로 생각되었다. 영지주의의 특성은 신약성경을 극단적 알레고리적 해석하여 기독교를 이교의 한껍데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레니우스나 터툴리안은 영지주의가 이교적 신화와 철학의 잘못된 가르침에 입각한 것으로 단정하고, 그것이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참고: 터툴리안의 이단에 대한 처방) 그러나 클레멘트 같은 이는 자신의 교리적 가르침을 그 문화에서 존대받는 철학중에서도 "참된 철학 (the true philosophy)"이라 부를 뿐 아니라 그것을 영지주의자의 잘못된 그노시스(false gnosis)에 대립시켜 "진리의 그노시스" (the gnosis of the truth)라고 불렀다.

        

2. 이렇게 해서 2세기에 기독교에 들어온 철학은 간헐적인 반대가 없지는 않았으나 헬라교부와 라틴교부들 모두에 계속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들의 철학에 대한 자세는 중세의 아퀴나스나 현대의 철학적 신학자들의 의도적이며 노골적인 synthesis에 비해 기본적으로는 antithesis 적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철학에 대해 비교적 유화적인 져스틴, 클레멘트도 철학은 잘못을 범하나 계시인 기독교는 늘 옳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들은 기독교 신앙이 당시 문화의 주류인 헬라철학 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인지? 혹시 협력을 강구할 접촉점이 없는지를 찾고자 하는 매우 소극적인 동기에 이끌렸던 것이다.


3. Justine Martyr (100-165): 변증철학자, 순교자. 이교도 양친 하에 사마리아 세겜 출신. 청년시기에 스토아, 아리스토틀, 플라톤등을 익히고 훗날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만나 개종함. 개종의 동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성취에 감명받아 구약과 신양연구, 교회를 찾아 가르침받음. 에베소에서 유대인 학자 Trypho와 논쟁을 벌이고 Tatian을 제자삼아 가르침 두권의 변증론과 트리소와의 대화가 있다. 그의 주된 논점은 이교도들의 반대와 중상에 대항하여 이론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다.


4. Tertullian, Quintus Septimius Florens (150/60-220) 칼타고 백부장 아들. 법률, 수사학과 희랍고전 배움. 최고의 학적수준. 법률가로서 명성을 떨침. 이교도적 방탕생활 청산 훗날은 엄격주의 이단인 몬타누스 운동에 가담.

        라틴신학의 본산인 칼타고는 이탈리아 바로 남부에 위치한 지리적 영향 때문이다.  대표적 신학자 Cyprian, 키프리안.  칼타고의 라틴신학은 paradosis 전승 傳承 tradition을 중시함 (정통파, 보수파)

        Tertullian-> Cyprian-> Ambrosius -> Augustine -> Catholic

알렉산드리아 신학이 형이상학적 전통, 철학적 신학의 시조라면 (Logos 중심) 라틴신학은 전통, 역사적 기독교 (historical Christianity, fides historica 멜랑흐톤 = fides informis 단순한 신앙, 즉 역사적 사실 만을 믿는 칭의의 조건이 되지 않는 신앙) 그리고 사도들의 전통을 중시하는 교회였다. (교권주의, 정통주의) 암부로시우스, 황제를 혼내준 주교.

        이 전통에서 중요한 논제는 취득시효 De Praescritptione Haereticorum  이단의 취득시효논쟁, 최초의 이단 논박 논문. "너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성경을 소유할 권한 없다. 너희는 누구나, 내 영토에서 무엇을 하는가... 이 것은 나의 소유이다 (복음의 구전, 전승)나는 이것을 본래 소유하고 있었다. 너희보다 먼저 나는 그것을 소유하였다... 나는 본래 소유자로 부터 받은 양도증을 갖고있다.. 나는 사도들의 상속자요, 법적 절차를 따라 위탁받아 소유한다. (기독교의 역사성을 내세워 신비주의, 영지주의, 철학적 기독교 신학을 배격하는 입장에 서있었다.)


(나) Clement of Alexandria (150-215)


1. 앞서 말한대로 고대교회가 철학에 대한 소극적인 분위기를 갖고있던 것을 감안할 때, 클레멘트와 오리겐으로 대표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오히려 기독교인들을 향해 희랍철학을 두둔했다 할 정도로 가장 철학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졌다.


2. 북아프리카의 로마제국 제2의 도시인 상업중심지요 인구 50만.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스틱 유대인의 본고장이었고 (누가 행18: 24,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특히 기독교 변증가들에 앞서 헬라철학의 통찰력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건 모세오경의 지혜에서 유래된 것으로 해석하려는 필로의 지적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다. 

        판타이누스 Pantaenus가 신학교 (Catechetical School)에서 클레멘트, 오리겐 키워냄.


3. 클레멘트는 아테네 출신. 개종에 대해 별로 알려진 바 없다. "헬라인에의 권고," "교사," 논설집 (Stromateis)

        기독교적 학구 속에 고대 희랍철학의 위치를 인정한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터툴리안이 철학은 이단의 아버지라 했다면 클레멘트는 철학은 복음에 이르는 준비로 유명함

        그는 교회가 철학을 배격함은 그 철학의 본질을 익숙히 알아서가 아니라 첫째는 철학에 대한 일반적 무지와 둘째로 고전 1:18이하, 골2:8 의 바울의 교훈, 즉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는 말씀에 근거한  편견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았다.


4. 따라서 그는 사도바울의 철학에 대한 경고가 철학 전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철학, 특히 모든 영적 실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배격하는 에피큐레스 학파의 유물론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자신의 작업을 착수했다.

        4-2 또한 교회가 일반적으로 철학에 무지한 형편이었기에 모르는 것을 비판함이 잘못이라는 지적과 함께 자신의 접근이 우월하다는 주장을 세우기는 비교적 수월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5. 그러나 그보다 희랍철학에 대해 이런 혁신적 자세를 갖게 만든 근본적 원인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의 특이한 신앙관이었다. 그는 기독교 복음이 인류 구원에 있어 불가결한 지혜의 교훈, 이성적 지식을 준다고 보아 그것을 철학, 즉 지혜를 찾고자 하는 추구와 동일시 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6. 클레멘트에 앞서 져스틴 마터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즉 그리스도인 이전의 사람들은Logos의 일부인 spermatic logos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성육신하신 Logos로 부터 계시된 온전한 지식을 얻었으므로 기독교는 유일의 참된 철학, 지혜, 지식이라 부르기 주저하지 않았다고 그의 변증은 이 확신에 기초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7. 그러나 져스틴과 달리 클레멘트는 희랍철학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우위를 말함에 있어서 그의 Stromateis (The Miscellaanies)에서 "신비"라 칭한 사도들의 구전된 전통의 소유에 강조를 두었다.


8. 정리하자면 클레멘트는 기독교 신앙도 이성적이고, 헬라철학도 그러하나 후자는 온전하지 못한 것으로 단지 준비의 과정, 헬라인들에게 율법대신 주신 것으로 보았다. (참고: 클레멘트의 Stromateis, I, ch. 5.)


9. 클레멘트에 의하면 철학은 두가지 효용이 있다.

        A. 헬라인들에게 있어 철학은 사다리였다. 철학은 그들이 의롭게 살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는 심지어 "철학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진" 경우를 언급한다. (Stromateis, I, ch. 4.) 헬라인들에게 있어 철학은 "그들에게 특수한 언약 (covenant peculiar to them)"이요 "그리스도를 따른 철학에로의 디딤돌 (a stepping-stone to the philosophy which is according to Christ)"이라 했다. (Stromateis, VI, ch. 8.)

        B. 기독교인에 있어 철학은 엘리베이터였다. 철학은 기독교인이 하나님 나라의 "앞선, 고급한 (advanced citizens)"이 됨에 준비물로서 효용있고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기독교인이 교회의 가르침에 참된 통찰력을 갖고, 신앙을 옹호하는 일에 나서려면 철학은 필수적이다. Stromateis, I, ch. 5. 마지막 부분)


10. 클레멘트는 자신이 기독교인으로서 이 후자에 대하여 매우 강한 의견을 갖고 있었다. 혹자는 만약 희랍철학이 태양이 떠오르기전 촛불같은 것이요, 예비라면 이제 대명천지에 왜 필요한가? 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클레멘트에게 이러한 질문은 떠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철학이 유용성은 너무도 자명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어떤 정당화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11. 이러한 클레멘트의 자세는 기독교인들이 기존의 문화, 특히 그 문화의 지적 핵심을 이루는 과학과 철학을 정당한 영역으로 받아들이는 하나의 모범적 케이스를 제공한다. 아마도 이러한 클레멘트가 없었더라면 기독인들은 철학은 악의 세력이요 산물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했을 것이고, Augustine, De doctrina christiana (On Christian Science)는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 있어 클레멘트는 기독교 학문, 기독교 철학의 시조적 역활을 담당했다 할 것이다.


12. 그러나 그와 더불어 그는 기독교 학문, 철학이 지금까지도 갖는 문제의 핵심을 동시에 그 전통속에 심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너무도 무비판적으로 희랍적 전통, 희랍인들의 철학과 기독교가 접합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희랍철학의 종교적 뿌리를 충분히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궁극적 믿음과 충성은 기독교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철학의 효용 (이지적 효용, 변증적 효용, 교리적 효용등)을 과신한 나머지 비성경적인 지적 엘리트주의적 구분을 교회 공동체에 들여오는 우를 범했다. 즉 단순한 믿음의 무식한 교인과 철학적으로 깨인 진보된 교인의 구분이 그것이다. 


13. 물론 우리의 입장에서 클레멘트를 비난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기독교철학은 (일반적으로 철학이 그러하듯) 하나의 의도이고 사명이다. 즉 기독교철학은 하나의 실재이라기 보다 결단이다. 그것은 성취라기 보다 명령이다.

        


(III) Origen (185-254)


(가) 생애

1.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표적 인물. 헬라계 이교에서 개종한 부모하의 모태신앙 (터툴리안, 클레멘트, 져스틴 어거스틴 처럼 이교의 과거가 없다.)요 순교자의 아들 (아버지 따라 순교하려 해서 어머니가 옷감춤, 스스로 거세를 할 만큼 열정있는 교사. 그러나 평신도로서 설교하는 사람이었고 (이것이 화근되어 훗날 교회정치의 감독전제주의자인 데메트리우스의 화를 사서 장로직 박탈, 출교당함, 231-232)   70세까지 내내 큰 활약. 카파도기아 학파의 대표인 그리고리 타우마투르거스 (Gregory Thaumaturgus), 니케아의 영웅 아타나시우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 암브로시우스등이 친구요 제자들.

        Decius황제 박해때 심한 고문당해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


2. 본격화된 핍박의 시기, 순교자의 자녀로 순교의 체험. 삶 자체도 극히 순교자적이다.


3. 헬라적 교양인들의 조롱과 비난. 예로서 플라톤주의자 켈소스의 True Discourse를 반대하여 Contra Celsum 을 썼다. Henry Chadwick, Cambridge: CUP, 1965.


4. 라틴교회/ 신학과 더불어 교회정치적 정통노선의 강화라는 부담. Ortho-doxy/ ortho-praxis)


5. 오리겐 개인은 매우 극적인 면이 있는 인물: 정치적 희생은 당했으나 개인적 열정과 가르침이나 행동거지의 카리스마가 대단했을 것이 틀림없는 인물. (Henk Hart???)


6.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나타난 정보에 의하면 오리겐도 초기에는 philology, 수사학등을 배격했으나 나중에는 자신의 학교의 학과에 철학을 비롯 희랍학문을 재도입하였다. 그 이유는 이단의 교설 뿐 아니라 철학자들이 진리에 대해 주장하는 바를 고려해볼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 했다.


7. 그러나 그의 가르침의 궁극적 목표는 제자들로 하여금 최고의 덕인 <경건 piety>에 도달하도록 인도하는 것. 물리, 지리, 천문학 모두가 학생들로 우주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이성적 경외를 갖도록 인도하고, 철학은 사물의 원인에 대한 지식, 특히 덕인 자기를 앎에 이르게 하고, 성경주석은 감추어진 진리에 도달하게 한다.


8. 그의 제자 그레고리에게 비친 오리겐은 <철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특징은 경건과 이성을 결합하는 것. the conjunction of piety and reason


9. 희랍인들은 철학을 가장 고귀한 교육 the pre-eminent paideusis 즉 문화 Bildung 교화,와 학식을 얻는 최고, 주된 방법으로 여겼다.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사상가들은 그것을 오로지 준비적인 단계 a pro-paideusis 로 보았다.

(나) 오리겐의 사상

1. 오리겐은 보기에 따라 이단에서 부터 극도의 순수주의자, 변증가, 교사, 순교자로 보인다. 또는 살기는 기독교적으로 살았으나 생각은 철저히 헬라적이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평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개종한 지도자와 달리 그가 모태신앙인 점, 순교자라는 점이 그렇다.


2.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상대화를 마지않음. (신학에 대한 지나친 권위의식을 갖지않음) 즉 사도들의 전통이 말하지 않은 영역 부분들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교조적 권위를 주장하기 보다 그리고 자신의 가르침을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에 대한 해석이나 반복으로 주장하기 보다, 이성적/합리적이고 방법론적인 추론으로 진리에 근접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mere approximations of the truth


3. 오리겐 시대는 기독교의 교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기요, 아직도 많은 실험의 단계였다. experimenting stage: 철학과 심지어 영지주의 종파들 (종교들)이 제공하는 수 많은 개념들과 수 많은 체계들이 기독교의 신앙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일에 실험적으로 사용되는 시대였다. 그리고 그런 자료들은 정말 풍부했다.


4. 우의적 성경해석 allegorical interpretation : 오리겐의 우의적인 해석은 유대인들의 구약해석 (선민사상등)이나 말시온파와 같은 문자적 해석으로 이단에 떨어진 이들을 배격하기 위한 변증적 신학의 한 방편이었다.

        오리겐은 Marcion (최초의 성경편집, 문서설적 이단)의 (구약을 예언적, 영적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배격하기 위해 노력했다. "문자가 표시하는 것보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읽으라." 말시온은 <선>한/<공의로운> 하나님의 상반 주장: 구약/신약의 하나님, 예수님의 육체탄생 부정, 가현론 Doceticism

         참고로 안디옥학파는 역사적 해석 (Alam어권, 네스토리우스 이후 정죄된 곳, 수리아어권, 삼위일체보다 모나키안적) 뚜렸한 신학자 부재. 라틴교회는 문법적 해석. Grammatical-historical interpretation/ allegorical interpretation.


5. 교육적 섭리 (철학적 신학): God's pedagogical providence 란 사실에 대한 우의적 해석과 같다. "Read: what it says is not what the words convey." "See: what is there is not what the eye beholds."

        오리겐은 가시적 세계, 성육신을 포함한 역사의 전 과정이 영적인 존재 (인간)으로 하여금 물질적인 것이 아닌 신적 실재 (divine reality) 지식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보았다. 인간이 주변을 살펴 자신의 영적 근원을 바라보게 하려 함이다. (시8편, 전도서 3:11) 기독교 신앙은 영원한 로고스와 함께 있던 영혼이 본향을 그리워하며 결국 그곳으로 돌아가야 함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리겐의 이런 주장은 순수히 성경적인 것 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적 세계관과 철학이란 곧 영혼의 본연적 자세로 주장된 <회상 recollection> 의 고상한 작업이라는 이론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오리겐 당시 철학은 이미 근본적 질문을 던지며 지혜를 추구하는 전통을 떠나서 신학적이고 주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즉 3세기의 플라토니즘은 종교화된 철학으로서 구원이나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여 삶의 안정을 주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가 철학 (특히 최고의 형태인 플라톤주의) 을 무시한다는 켈수스의 비난에 대항하여 기독교는 오히려 플라톤 철학이 추구하는 영적세계로의 복귀를 이루는 참된 철학이라 주장한다.

        여기서 오리겐의 문제점은 영계로의 복귀의 방법을 philo-sophical 철학, 지혜의 추구, 지식으로 본 것이다. 그리하여 오리겐은 기독교 신앙을 플라톤적/희랍적 신앙, 즉 이성적 (사변적) 방법을 통한 구원의 추구 성향에 접근시키는 위험성이 있다. 이 면에서 오리겐은 철학적 신학자라 할 수 있다.


6. 정죄됨: 이러한 오리겐의 철학적 자세는 553년 Constantinople에서 모인 6차 ecumenical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다. 여기에는 종교적 이유와 더불어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유스트니안 Emperor Justinian (527-65) 과거의 로마제국을 군사력이나 황제숭배의 이데올로기로 통합했던 것 처럼 교리적으로 통합된 기독교제국 Christendom의 이념으로 회복하려는 야망가. 그 일환으로 첫째 플라톤의 유서깊은 the Academy in Athens 폐교 (529) 하고 이어서 교회와 신학영역의 이단 색출 작업에 착수하여 이미 543년에 오리겐을 정죄했던 것. 

        물론 이런 정치적 개입이나 심지어는 교회정치의 힘이 기독교와 희랍철학의 문제를 풀거나 종결시킬 수는 없었다. 이 문제는 오늘까지 내려온다.


7. 오리겐은 이처럼 보기에 따라 매우 극단적으로 상반된 모습을 보인다. 즉 한편으로 순교자요 다른 면에서는 이단자이다. 과연 그는 기독교도인가 희랍철학자인가? 결국 질문은 "오리겐이 어떻게 근본적으로 희랍적인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면서도 아무런 문제없이 그 신앙에 신실할 수 있다고 믿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점에 대한 답이 그의 로고스론이다.


(다) 오리겐의 로고스론

1. logos 개념에 대한 현대 (개혁) 신학자들의 반대: 기독교 신앙의 인격적이고 윤리적인 요소가 논리와 객관성의 제단에 희생되었다. 또 영원불변, 단 한번에 모든 것에 통용되는 (which holds once and for all) 그 무엇을 뜻하므로 전혀 새로운 것을 바라는 종말론적 요소에 장애로 봄.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 기독교 지성인들 이 개념을 기꺼이 수용하여 매우 널리 사용했다.


2. 오리겐도 예외가 아니며 그는 이 개념을

1) 일반인과 로고스의 관계: 모든 사람이 로고스에 참여 (또는 분신임)이기 때문에 신적 진리 (divine truth, 신존재 의식, 신에 대한 막연하기도 하고 때로는 명확한 지식; 초월적 존재, 능력, 지혜, 공의, 심판, 복주는 존재, 조물주 의식등) 에 대해 다소간에 알고 있다는 설명한다.

        바로 여기에 철학과 기독교의 연결점이 있으나 철학은 몇가지 약점을 가진다. 첫째 약점은 그것이 많은 바른 통찰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롬1:8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suppressing the truth in unrighteousness)"(예를 들면 죄를 구조화하는 것) 등의 왜곡이 있다. 둘째 철학은 대부분의 사람의 지적능력을 넘어서는 엘리트적 속성이 있다. 세째로 철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지혜와 인간 스스로를 의존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므로 철학은 진리에 이르는 일에 꼭 필요하거나 불가결한 것이 아니다.


2) 신자들에게 있어 로고스: 그리스도는 로고스의 한 이름일 뿐으로 영원한 로고스는 성육신한 로고스와 구분되어야 한다는 이단적 교리와 더불어 영원한 로고스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계단이라 봄.  즉 철학은 준비이고 신자들 가운데도 대부분은 이적을 믿는 신앙이나 목자, 치유자, 십자가에 못밖히신 이 등의 "열등한 이름들" (inferior names)로 안다. 그러나 소수는 영원한 로고스에 가까이 가는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서 종래에는 하나님 자신을 명상하는 visio Dei의 단계에 이르는다는 것.

        오리겐의 이 교리는 신자들 간의 우열이 지적인 구분이며 자칫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his person and works 마16 (28), 막8 (16), 눅9 (24), 요12: 23 (21) 대신 명상적, 사변적 신앙을 고무할 수 있다는 위험을 내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볼 때 이시기는 아직도 대속설이 표준교리, 정통화되는 과정에 있었던 신학적 실험시기 였다는 점을 또한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여러면으로 볼 때, 오리겐은 매우 철학적인 면에 비판정신이 약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없다.


3. 결국 오리겐은 로고스론을 통해 철학과 기독교 신앙의 연속성과 보편성을 보장하고 아울러 양자의 조화 가능성을 모색했다고 볼 수 있다. 희랍인들이 만인의 영혼이 참여한 영원한 로고스를 진리의 근원으로 본 점에 주목하여 이 로고스와 요한복음 초두의 로고스를 동일시 하므로서 그는 일견 철학 (특히 훌륭한 통찰력이 깊은 플라톤 철학등)과 기독교 신앙의 연결과 조화를 보장하는 듯 하다.

        그러나 결국 그의 철학적 신학은 연속성을 강조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영원한 로고스의 한 양상, 이름으로 축소시키는 위험한 경향을 보인다. 또 신앙의 우위를 강조하고 철학을 열등한 것으로 놓을 때에는 이원론적 분리로 나아간다.










(IV) Augustine Aurelius, Bishop of Hippo (354-430)


(가) 생애와 신/철학적 사유의 바탕


1. 19세에 키케로 (106-43 B.C. 희랍철학의 라틴화의 대부,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 다음으로 영향력있는 스토아 철학자)의 Hortensius를 접하고 지혜추구 시작. (철학자의 길에 들어섬) 그와 동시에 비의종교인 마니교에 가입했다 로마로 진출할 무렵 떠나 영적/지적 회의주의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세속적인 면에서는 성공적인 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결국 고향 타가스테와 카르타고와 로마에 수사학자로 진출한다 (대학교수, 변호사쯤의 입신).


2. 그의 삶에 대한 면모들은 386년 개종이후 15년 지난 해 Confessions 청년시기의 자서전적 정보제공.  33세까지 기독교 배경에 무관심하다 밀란의 감독 Ambrose의 설교를 정기적으로 듣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책을 통해 플로티노스의 황홀경을 체험하는 등 감각적 세계 이외의 영적세계의 실재를 믿기 시작함. 이것이 마니교의 조야한 물질주의 또는 성욕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실마리를 주었을 것이다.


3. 386년 마침내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수사학을 버리고 그의 재능을 그리스도께 바치기로 결심했으나 아직도 철학적인 분위기가 강한 저술을 했다. 특히 세례를 받기위해 밀란 근처 카시시아쿰 Cassiciacum 이란 곳에 머물며 쓴  Contra Academicos (Against the Academics)는 이 시기에 쓴 De beata vita (On the Blessed Life), De ordine (On the Order)와 더불어 기원전 3-2세기의 철학학파들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담고있다. 이들은 대화체 저술로 그 형태에서 조차 플라톤 전통의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또  이 글들에서 특히 3-2세기의 회의론적 철학자들에 대한 반론을 펴되 인식론, 윤리, 존재론의 세부분으로 나누어 적고있다.


4. 아프리카로 돌아가 타가스테의 수도원에서 지낸 후 히포에서 장로, 부감독, 감독이 됨 (396) 목회자요 감독으로 바쁜 중에도 저술활동: 방대한 저술했다. 특히 그의 전반기 저술에는 (그의 작품 전체에도 다소간) 그가 개종의 전후에 깊이 영향을 받은 신플라톤주의와 이제 세례를 받음으로 받아들인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복합적 영향의 요소가 보인다. 어쨋던 그의 개종은 신앙의 개종이자 그의 사상 전체, 그의 지혜추구, 철학의 방향전환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이 처음에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을 지라도.


5. 교회사와 기독교 사상사에 있어 어거스틴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그는 청년기까지 몰두했던 고대의 희랍-로마 문화의 전통과 개종후에 헌신한 기독교 신앙을 종합할 뿐 아니라, 그로써 기독교 신앙과 희랍-로마문명의 종합으로 특징될 수 있는 중세의 관문에 서있다. 또 교회사적으로도 그 자신이 라틴교회 출신이나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분위기를 종합하는 위치에 서있기도 하다.


6.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그는 신앙과 이성이라는 두가지의 진리의 길을 조화속에 활용하는 자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세례받기 위해 준비하던 카시키아쿰에서 쓴 Contra Academicos III, 14장에서 "우리는 권위와 이성의 이중의 힘에 의하여 배우게 된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차후로 나는 그리스도의 권위에서 결코 떠나지 않으려고 결심하였다. 대개 나는 이보다 더 타당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묘한 이성으로 추구해야 할 것에 관해서는 믿음으로만 진리를 깨닫을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도 깨닫기를 갈급한다. 그리하여 나는 플라톤주의자들에 있어서도 우리의 거룩한 그것들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라고 적고있다.


7. 이와 아울러 중요한 것은 그가 플라톤 철학을 진지하게 접하기 시작한 시기가 개종을 준비하던 시기와 엇비슷 하다는 점이다. 그는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과 세상적 학문의 연마, 철학의 사용사이에 터툴리안과 같은 긴장을 겪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나) 3-2세기 희랍철학 비판


1. 그는 Contra Academicos의 마지막 부분에서 당대철학의 경향의 분석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그는 아테네에 있던 플라톤의 아카데미의 후예들이 자못 타락한 회의주의에 젖어있는 폐혜를 비판한다. 그는 철학을 참/거짓 철학으로 이분하면서 이 회의주의 철학을 거짓의 철학 이라 하였다.


2. 거짓의 철학으로 분류한 회의주의 전통은 진리 그자체, 진리의 성육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눈앞에 두고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빌라도의 깊이없는 "지혜"와 다를바 없는 것이라 했다. 즉 소피스트적 냉소와 비판주의적 자세는 폭넓은 관용의 분위기란 연막에 감추어진 영적, 정신적 위기의 표현일 뿐이라고 보았다.


3. 어거스틴은 그 어떠한 이유에서건 인간이 삶의 기초를 이루는 진리와 확실성을 발견하기를 포기하거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분위기에 빠지면 삶 자체가 미로에 빠지고 마는 것으로 보았다. 그가 이러한 철학을 극구 반대하는 것은 그 철학이 살인이나 여타의 범죄를 방조하지는 않더라도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절망에 빠지게 하는 폐혜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4. 이러한 회의론 철학과 더불어 그 유파인 에피큐레스학파의 탐미주의와 유물론적 사고도 배격해야 한다고 보았다.


5. 또 아울러 비교적 순결이나 도덕성 강조로 적지않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에 의해 적지않은 선호와 호평조차 받았던 스토익학파에 대해서도 재고한다.  그는 이도 배격해야 할 것은 스토익파도 세상을 보는 안목이 이생과 물질적인 것에 매여있기 때문이라 했다.


6. 그러나 그는 이러한 허위, 거짓된 철학과는 달리 진리의 전통이 철학에는 흐르고 있다고 인정했다. 잘못된 전통들은 서로 비난하고 불일치 하지만 참된 철학은 모든 조류를 하나로 묶어 통일체계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7. 그는 플라톤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이러한 고전적 예를 본다. 그는 이 철학들을 부정적, 회의적이고 최선의 경우 독단론을 비판하는데 그치는 소극적 철학 들과 달리 긍정적이고 바른 철학 전통으로 간주한다. 특별히 CA III 37, 42에 보면 플라톤 철학을 "희랍철학의 유익한 모든 요소를 규합하여 윤리, 존재론, 인식론, 사회철학, 정치학, 법철학 등을 고루 구비한 하나의 최고의 체계를 제시한 완전한 형태로 칭찬하고 있다."

        (플라톤 철학이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으로 유타이프로, 파이돈, 소크라테스의 변명, 국가편, 법등 29편의 그당시 알려진 학문의 집대성으로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사란 이 대화편의 주석이라 했을 정도이다. 또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화신같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익명의 기독교인으로 부를 유혹에 빠질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다) 플라톤주의의 과대평가


1. 어거스틴이 플라톤 주의를 높이 평가하게 된 첫 이유는 그 존재론에 있다. 플라톤주의의 존재론은 두개의 세계, 즉 현상, 가시계와 이념의 세계이다.

가지세계 intelligible     형상, 최고선            지식            지식

                                수학적 대상 (추상)      사고

가시세계 visible          사물, things            신념 belief

                                허상 image             상상            속견

물론 전자는 후자보다 저등한 일종의 타락한 세계로 본다. 이러한 존재론은 나아가 창조주와 조물주 Demiurge  사상, 정신/물질의 이원적 세계관에 있어 성경에 근접한다고 봄.


2. 인식론은 존재론에 따라서 가시계는 이데아의 세계의 이미지, 그림자로 보고, 그 둘의 관계가 모방, 유사 mimesis, resemblence의 관계로 보았다. 이런 인식론도 인간의 마음은 앎에 잇어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조명이 필요하다는 기독교 인식론과 통하는 것으로 봄.


3. 윤리를 최고로 놓는 플라톤주의는 참된 행복이란 자신의 근원인 신을 향하는 명상이라고 했던 면에서 기독교와 통하는 것으로 간주함. 그러나 나아가 플라톤주의는 바른 행위를 위한 규범을 사람 모두가 아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고도의 지성을 소유한 "소수"에 국한된다고 보았다. 이는 플라톤주의의 elitism적 요소라 할 수 있다.


4. 어거스틴이 놀랍게도 플라톤주의의 이러한 요소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두세계 이론이 그가 배격하고자 했던 유물론적 바탕을 가진 철학과 영지주의 배격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5. 이러한 두개의 세계 이론은 그를 마니키즘의 이원론적 세계관, 즉 세계 자체가 선과 악으로 되어있다는 견해를 벗어나 그가 성경적인 세계이론이라 생각한 영과 물질계에 대한 구분을 확신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영과 물질계 구분을 기초로 하여 에피큐레스, 스토익의 유물론을 배격하였다.


6. 개종이후 그리스도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과 권위를 고백한 어거스틴은 세부적으로 가서 성경의 가르침에 부딪치는 것 같이 보이는 플라톤주의의 몇가지 면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 배치되지 않는다고 보는 한 플라톤주의의 고도화된 이성을 잘 사용함으로 삶의 많은 유익과 진리 발견의 유익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특히 그는 플라톤주의의 핵인 이 두세계관에 대해 별다른 의심과 비판없이 그것을 성경적 영/육의 구분과 동일시 하였다. 그는 이러한 판단하에 플라톤주의는 바울이 철학과 헛된 신화에 대한 경고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보았다.


7. 이렇듯 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에게 눈을 열어 영적인 세계의 존재와 그에 대립하는 물질계를 보게하였으나 동시에 그 철학적 함의와 비성경적 동기를 인해 그의 시각을 굴절시키는 이중적 영향을 미쳤다.


8. 플라톤주의에 대한 과도한 평가는 그의 생애 전반에 대개 지속되었다. 이것은  반달족 알라릭에 의한 로마침공과 연관된 변증서인 말기작품 De civitate Dei (410)에서도 드러난다.


(라) 플라톤주의의 영향


1. 어거스틴은 De beata vita (복된 삶)에서 sapientia (wisdom)을 얻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또 복된 삶의 기초로 말하고 있다. 


2.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이데아의 총합이며 가시세계의 원형이며 존재의 완전한 완성으로 인간은 지적 명상을 통해 그것에 참여한다고 주장 한다.


3. 어거스틴은 지성 (intellection)을 인간의 활동중 최고로 보고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활동이나 일보다 훨씬 중요하고 우월한 것으로 본다. 반면에 감각적 경험을 명백히 경시한다. 즉 수학, 기하학, 음악등의 이론적 과학은 감각적 실재에 대한 연구보다 훨씬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4. 그러나 이론적 과학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만유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명상이었다. 어거스틴은 그 명상을 지칭하는 말로 visio Dei, frui Deo (enjoying God) 하나님을 즐거워 함이라 불렀다.


5. De ordine에서는 참철학에 관한 언급으로 참 철학은 인간을 물질적이며 부패할 수 있는 실재로 부터 해방시키는 것으로 정의된다. 플라톤철학을 natural theology라 부르고 이것만이 기독교신앙에 비견될 수 있다했다.


6. 하나 특이한 것은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신앙의 유사성에 대한 설명에 있어 그는 당시의 널리 사용되던 간접적 모세의 영향설을 지지한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이렇게 차용된 진리는 본래 피조계에 숨겨진 진리로서 그것을 이교도들이 찾아내었을 뿐이라고 한다.


7. 그러나 여기서 어거스틴은 이 진리의 소유권이 본래 기독교인에게 속한 것임을 주장한다. (터툴리안의 이단을 향한 취득시효론을 연상케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비롯한 기독교철학자들의 이교철학 이용을 spoliation 탈취, 수복의 행위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마치 출애급 당시 애급의 보화를 취하듯이 (출12:36)   그러나 이런 자세에 무비판적인 면이 문제이다. 이방의 보화에는 이교의 우상숭배의 찌꺼기가 남아있음을 주의해야 했다. 이교도의 건물을 예배처소로 전용함에 벽화, 장식, 또 그 기초가 남아있는 상태로 사용되는 것은 과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가?


8. 플라톤주의는 오늘날 관념론적 이성주의라 부르는 것과 가깝다. 그는 관념을 감각적 세계의 근원으로 보았는데 이는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반박되었다. 플라톤의 핵심적 문제는 우리의 이해기구인 이성, 사고능력을 이해의 내용, 가능성인 감각과 경험과 분리하고 이성, 사고능력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천상적인 무엇으로 취급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이성의 실체화 hyperstatization이라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실체화된 이성을 잠언 3:19-20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동일시 한 것이 문제이다. "여호와게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 이 지혜는 생명나무, 이것을 가지는자는 복됨 17절.  

9. 이러한 자세는 결국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 관념적, 이성적인 면을 물질적이고 유기적인 면 위에 군림하게 하는 비성경적인 (서구의 고질적인) 이성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을 드러낸다. 물론 여기서 그가 유물론적 사상과 싸움에서 유용성을 본 점은 감안할 수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경우 이러한 비성경적 구분과 서열매김이 바울의 영/육의 구분과 동일시되어 자연스레 받아들여지고 있음도 주지할 만 하다.


10. 어거스틴에 있어 기독교의 우월성은 하나님의 아들의 겸손의 방식과 고통, 죽음을 통한 말씀이다. 철학은 지적 소수를 상대하나 복음은 만민을 상대할 수 있다. 특히 가시적으로 오신 그리시도는 특히 징표요 이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구체적으로 보이셨다. 어거스틴이 성육신을 강조한 이면에는 이런 생각과 관련이 깊다. 물론 그의 말기작품에서 예수의 오심이 육체로 부터 풀어주기 위함이 아니라 죄로 부터 풀어주심을 위함이요, 모범설이 아닌 대속설에 대한 이해가 확실하다.


11. 어거스틴이 플라톤주의등 고전철학에 대해 전폭적으로 무비판한 자세로 일관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펠리기우스와의 자유의지 논재엥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자연인의 절대무능의 개념에는 이미 서구사상의 이성의 자충족성에 대한 비판이 엿보인다.  (파르메니데스식의 전통에서 감각, 경험보다 이성을 우위에 놓고 그 독립성을 주장하는 전통)

(마) 정리


1. 어거스틴은 라틴신학의 전통/권위에 입각한 역사적 신앙 (fides historica  그의 표현에 의하면 "이성으로 발견한 것이 아니라... 기억에 맡겨진 것")을 중시하며 개혁자가 아닌 전승의 수호자로 자처했다. 

        

2. 그러나 그에게는 알렉산드리아의 탐구정신도 강하게 작용했다. 그는 전통에 입각하고 권위를 존중하여 받아들인 신앙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하여 이성의 사용과 나아가 이교도들의 학문중 자신의 판단으로 가장 훌륭하다고 인정한 플라톤 철학의 활용을 주저하지 않았다.


3. 이것이 바로 "신앙은 찾고 지성은 발견한다 (fides quaerit, intellectus invenit)"라는 말로 정착된 어거스틴 특유의 원리다. 그는 신앙과 이성을 대립시키기 보다 오히려 이성은 신앙을 북돋우는 것으로 이해한다.


4. 한철하의 지적처럼 어거스틴에게서 터둘리안과 클레멘트가 조화됨. (언제나 위대한 인물은 전통위에 서서 그 전통을 의미있게 살려내는 능력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5. 그는 신앙을 더 잘 이해하고 보존하고 설명하려 했다. 그는 특히 처한 상황에 따라 동시대인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하기 위해 고대의 모든 지적유산을 연구하고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로 인해 자연히 고대문화의 내용물들이 기독교의 문화적 유산으로 변형되어 흡수되기 시작하였다.


6. 그는 전통의 바른 해석, 의미있는 이해를 위해서 당대의 문화의 분위기와 이슈를 배경으로 자신의 신앙과 소명을 발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문화의 현주소와 이슈를 심도있게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며 어거스틴에게는 이런 준비가 되어있었다. 또 그에게는 당대의 사람들 특히 지식인들에게 설득력있고 이해시킬 수 있는 언어및 지적 도구를 최고의 수준에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물론 이런 능력만 있고 바른 신앙이 없었으면 그것도 아무런 기독교적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시대의 문화를 열어가는 기독교인은 이렇게 학문성과 전문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7. 그는 자신의 시대에 충실하고 그의 한계속에서 신앙의 선포와 기독교적 사상체계를 세우는 일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이상을 바랄 수도 성취할 수도 없으며 단지 우리는 그의 한계나 문제점을 발견하고 우리의 사명을 바로 수행함에 타산지석으로 삼을 뿐이다.


8. 그러나 고대교회의 사상가들의 사상적 노력을 평가하자면 미흡하다는 말로 결론내릴 수 밖에 없다. 이들은 이교문화와 그 철학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 그 종교성에 대한 철저한 의식에 이르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중세인들 처럼 노골적인 종합의 방향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사용하여 복음을 이해함에 차원을 높이거나 동시대인에게 설명하거나 변증하려 함에 별다른 주저가 없었다. (이는 심지어 터툴리안에게서도 거의 마찬가지였던 것 처럼 보인다.)


(V) John of Fidanza, Bonaventura 보나벤츄라 (1217-1274)


(가) 배경


1. 초대교회 교부들은 적대적인 환경에 있었다. 유대-기독교 전통과는 다른 이교와 이방철학의 도전이나 핍박 뿐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영지주의 같은 매력적인 혼합주의적 이단의 내적인 도전도 있었다. 그러나 그후 천년이 지나 이제는 유럽이 기독교 세계로 확립된 시대인 중세의 환경은 아주 달랐다.

        1-1 기독교 신앙이 중세의 삶과 사상의 구심적 요소였음은 누구나가 아는 일이다. 중세초 까지도 신앙은 대부분 학식이 높지 않은 평신도들이 이루어 놓은 유산이었다. 중세초기는 이면에 있어 전체적 기독교인이 소수이지만 그에 비해 지도자들은 강력한 지성을 갖춘 인물들이었던 것과 차이점이 있다. 그 이유는 게르만 민족의 유럽침공과 로마제국의 몰락, 이들의 대규모적 기독교화는 초기 변증가들의 시대나 어거스틴 시대와는 다른 문화적 양상을 만들어냈다. (예:한 게르만 군대 장관의 세례식: 칼을 빼어들고 검에는 세례받지 않겠다는 것) 북방 이주민족의 대규모 개종과 지배로 말미암아 유럽은 어떤 면에서 "암흑시대"라 지칭할 만한 그 무엇이 있었다.

        1-2. 8세기 말로 9세기 초 Carolingian 카롤링왕조 시대에 오면 중세의 소위 "암흑시대"를 지나 중흥이 싹트기 시작한다. 여기에 이성적 원리를 교회생활 속에 정착시킴으로서 서로마 제국의 황제 샬레망 (Charlemagne 742-814)의 문화정치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 알퀸 (Alcuin 730-804)의 공이 크다. 그는 이성적 원리를 기독교적 삶 속에 정당한 요소로 자리잡게 하고자 진력했다.


2. 이 시대는 심지어 황제들 조차 교황청 (the Holy See)의 권위를 존중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달랐다. 이교도 철학자들의 명맥이 끊긴지도 오래되었다. 플라톤을 제외한 고대철학도 대부분 무지속에 뭍혀버렸다.


3. 기독교 교리가 잘 정립되어 있었다. 이단이 없던 것은 아니나 누가 정통이요 이단이냐를 가리는 어려움이 아니라 어떻게 박멸하느냐 만이 문제였다. 결국 이교사상과 기독교 신앙의 문제는 초대교회에서 처럼 교회의 사활이 걸린 실천적인 문제가 아니라 학적인 문제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4. 물론 중세에도 신앙과 이해, 계시와 이성, 은총과 자연의 관계가 중요한 이슈였던 것은 사실이다. 꼭 반대자 핍박자만이 신앙의 의미를 삶과 연관지워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신앙 그 자체가 철저한 반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중세인들은 어거스틴 이후 이러한 자세를 충실히 견지해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Anselm of Canterbury (1933-1109)요 보나벤츄라였다.


5. 이들은 자신들이 믿음의 깊은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인 이성이 이교도 철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져 세련되어진 도구로서 필로나 변증가들에 의해 채용되고 기독교화 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이미 천년이상 교부들로 부터 기독교인들이 이 도구를 사용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그 전통을 따라 이 도구 사용을 익히고 나름대로 새로운 색갈을 입혔다.


6. 중세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희랍의 이성적 전통 즉 철학을 어떤 자세로 대하는가에 따라 논쟁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Peter Abelard (1079-1142)같은 사람은 희랍철학에 매우 우호적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플라톤이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막연한 생각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한편 Bernard of Clairvaux (1091-1153)는 이러한 아벨라드를 향해서 플라톤이 기독교인임을 보이려 애쓰는 것은 자신이 이교도임을 입증하는 것에 다름아니라고 경고할 만큼 강성이었다.


7.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기독교와 비기독교 사상의 문제는 결코 세계가 외면적으로 기독교화 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영속적 문제이다. (기독교와 문화의 문제처럼) 중세에서 달라진 것이란 단지 일반적 환경이 기독교적인 분위기였다는 차이 뿐이다.


8. 이 배경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있어 신앙과 이성의 문제는 이전과 전혀 다른 형태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13세기의 중요한 문화적 변천인 (1)대학의 설립, (2) 아리스토텔레스의 소개 (아랍과 유대인들 주석가들을 통해 이들의 사상과 더불어), (3) 탁발 수도승 교단들의 설립과 발전이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생각함이 중요하다. 특히 보나벤츄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소개와 탁발 수도회중 후렌치스 교단의 설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다.


9. 보나벤츄라는 여전히 플라톤주의의 영향하에 있었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13세기 이전의 기독교 사상가들은 대부분 플라톤 영향하에 있을 만큼 플라톤주의는 확고한 지위를 구축했었다. 교부시대에도 그러했지만 후대에는 특히 희랍철학에 대한 지식이 미약해진 관계로 해서 그리고 교부들의 권위의 확립으로 인해서 교부들의 사상속에 얼마나 희랍적 사고가 취합되어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고 비판정신도 거의 없었다.


10. 역사가들이 12세기의 Renaissance라고 부르는 사건은 고전연구나 잊혀진 전통의 복구라는 다른 것과 함께 그 이름에 걸맞게 매우 자연주의적 성향을 띈 것이었다. 그것은 자연질서와 사물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발견할 인간의 사고능력에 대한 발견이 있었다.


11.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소개와 더불어 12세기 르네상스는 상상했던 이상의 사건이 되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형이상학을 포함한 작품들은 이제껏 초자연적 이데아의 세계와 기독교적 신비의 세계에 익숙했던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철저히 자연적이고 경험적인 안목으로 비쳤으나 반면에 그 과학적 접근의 수준이 높음은 경탄해마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발견으로 인해 이제껏 익숙한 전통인 초자연주의적 플라톤적 기독교에 일대 직접적 도전이 일어났다.


12. 최초의 반응은 아리스토텔레스 문건에 대한 공적인 연구와 학습을 금지하는 칙령들의 반포였다. 그러나 곧 이런 시도는 무위한 것이 밝혀졌다. 탁발 수도사들이 이에 도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고 전파하는 역활을 담당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14세기 초의 수도사 기록...)


13. 그 결과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앙과 근접시켰고 (이전에 플라톤의 철학을 그렇게 했듯이, 그의 사상의 눈으로 그의 세계관으로 성경적 진리를 보았듯이) 당연히 이전 교부들과는 다른 안목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의 입장은 곧 교부들, 특히 어거스틴에 의해 발전된 기초적 입장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를 불가피하게 했다.


14. 보나벤츄라는 이러한 새로운 신학사조를 비판하는 입장에 섰다. 그는 이러한 사조가 어거스틴이 생각했던 바 플라톤 철학의 (exemplarism and divine enlightenment)를 부정한 결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가운데 기독교 신앙과 배치되는 최악의 요소를 끄집어 내어 철학을 하고있다고 비판했다.


15. 그는 플라톤이 이데아의 세계를 바라보는 고상한 안목을 지닌 것이 조금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인간이 죄인이며 그 세계에 스스로 이를 수 없다는 의식이 결여된 것이 문제였다고 보았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눈에 매우 현실주의적 철학으로 비쳤던 것이다. 보나벤츄라의 이러한 자세는 토마스 아퀴나스 이전의 중세 철학자들의 일반적인 성향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중세의 기독교 사상 (99년 4월 30일)


(1) 13세기의 상황

1. 초대교회, 핍박하의 변증적이던 교부시대와는 달리 문화의 주도권을 가지고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최고의 지성인과 예술, 문화인을 교회가 가지고 있던 시대이다. (한국교회는 오늘날 한국의 최대 종교/사상집단이라는 외형적 모습과 내실, 문화적 지도력의 확보가 시급한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2. 문화적 지도력의 중심으로 대학이 부상하던 시대이다. 기존의 수도원, 궁정학교와 더불어 거기서 발전한 대학이 12세기중반 (oxford 1168) 13세기에 들어 세워진다. 대학의 설립은 다음 두 가지 수반된 사건과 함께 중세 기독교 사상 형성과 그 특징을 결정하게된다.


3.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체 저작의 재도입에 관련된 긴장과 교회의 세속화가 그것이다. 이는 또한 대학을 중심한 교권과 특별히 프란시스파 수도회 같은 탁발 수도회를 중심한 반-교권적 구룹간의 긴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것이 보나벤튜라와 아퀴나스의 대립된 입장에서 예시된다.


4. 이제까지 영/육을 분리하던 세계관에 입각한 플라톤주의가 Augustine을 위시한 초기 중세 기독교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반면에 은총/자연을 분리하는 새로운 세계관에 입각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Aquinas를 중심으로 중세의 대표적 기독교사상을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5. 이는 중세사상이 플라톤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복사판이거나 표절, 또는 변형에 불과하다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는 계시에 관한 신앙이며, 그 자체의 독특한 세계관이 있다. 그러나 역사상 실제로 기독교인들 조차 그들의 세계관을 형성할 때, 순수하게 성경적 세계관만이 드러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과거 기독교인들은 순수한 성경적 세계관과 사상체계,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다소간에 자신들이 속했던 문화와 그 세계관의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이 그들의 사상에 혼합되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출애급한 이스라엘이 애급과 가나안의 영향을 받았던 것과도 같다.


6. 초대교부들, 변증가들 뿐 아니라 어거스틴과 아퀴나스는 우선적으로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의 최대의 관심사는 복음전파요 기독교 문화건설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복음전파와 기독교 문화건설은 늘 주변문화라는 맥락 속에서 되어졌고 따라서 그것과 부딪침 속에서 그 사상과 문화를 극복하고, 활용하고 (또는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 변화시키기도 하고 반대로 그것들의 영향을 입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은 역사상 기독교가 가장 강했던 중세에도 예외없이 나타났던 현상이라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입과정과 그 영향

1.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입과정은 어거스틴에 있어 Plato의 유입과 흡사하다. 13세기는 기독교가 전체 유럽을 하나로 묶은 제국 즉 Christendom을 이룩했던 시기이다. 또 게르만 민족이 정착하고 새로운 문화전통을 건설하는 시기였다. 이 때에 신앙적 지도력과 문화의 지도력을 가진 교회가 서구의 문화전통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희랍-로마문화를 기독교신앙과 배치되는 죄악된 문화로 보는 터툴리안의 죄악 vs 은총이나 어거스틴의 “두도시 이론”의 대립적(antithesis) 전통/파라다임을 떠나서 중립적인 자연과 그 부족을 채우고 보완하는 은총이라는 새로운 종합적(synthesis) “이층집” 도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철학자로 인정되어 그의 과학은 채용할 수 있으나 “인간은 본성적으로 앎을 원한다”는 지식추구의 무조건적이며 절대적(categorical)정당화를 토대로 하는 형이상학 (존재론/인간론/신학)은 배격되었다. 이는 지식 그 자체를 이상화하고 기쁨의 원천으로 보고 인간의 목적으로 삼는 이성주의적 인간론(인간의 목적은 앎이다)과 신학을 내포하는 것으로 보였다. 더욱이 지식은 사용하는 것으로 보고 종교적 목적이 바로 전제되지 않은 무조건적 지식욕구는 악한 호기심(curiositas)로 정죄한 어거스틴의 권위가 이런 태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어거스틴은 지식이 악하게 되는 것은 그 방향(direction)이 문제라는 점을 직시했다. 아마도 이런 그의 인식에는 성경적 사고와 더불어 이 세상 사물의 원형은 이데아이며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플라톤적 세계관의 영향도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이퀴나스는 신학대전 II권에서 ominis scientia bona est "철학연구는 그 자체로는 적법적이고 찬양할만 하다“라고 말해 플라톤/어거스틴과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즉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하는 것에는 그의 새로운 형상이론의 자연주의적 성향도 크게 작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이 세상 사물과는 동떨어져 존재하는 형상(形相)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형상을 사물들 속에서 찾는 자연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즉 질료들은 무질서하지만 그것으로 하여금 ...되게 하는 원리로서 자연주의적 형상을 인정한다. 형상은 이리하여 영적 원리라는 인상보다는 사물의 원리, 즉 구조의 원리, structure처럼 보이는 것이다.


4. 자연적 지식을 중립적으로 또 그 자체가 선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제한적으로 수용한다. 즉 자연적 지식 추구는 본성적이고 그 자체는 선한 것이다. 호기심은 과도한 지적추구로 절제와 중용하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것은 단지 불완전한 것이다. 철학 (또는 문화)는 본질 추구를 하되 그 궁극은 채울 수 없는 거리/고민을 안겨줄 뿐이다. 그것은 infusa gratia로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gratia perficit naturam, gratia prae-spponit natural, 자연은 은총의 prae-ambula) 그것은 죄악된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의 불완전은 directional한 문제가 아니라 structural한 것으로 전환되었다. 


5. 이리하여 어거스틴 처럼 호기심을 악/선의 문제로 종교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가치의 위계로, 또 그 자율적 절제로 규제할 수 있는 과학의 문제로 바꾸어놓았다. 이로써 이방학문과 전통을 기독교의 우산 아래 복잡한 변혁의 절차없이 손쉽게 들여올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체제의 문제는 인간과 문화의 문제는 고양, 완성의 문제가 아니라 회개와 전환이 필요함을 간과하는 것이다.


6. 아퀴나스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을 중립적인 것, 세상의 원리를 파악함에 관한 한 제한적 자율성을 가진 유용한 것으로 인정하고, 그 위에 교회와 신학이 방향적인 것을 좌우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방법으로 기독교와 헬라전통을 종합한 것이다. 여기서 자연신학과 자연과 은총의 이원론적 세계관 구조가 가능하게 되고 급기야는 행위와 믿음이라는 불건전한 구원론도 야기되었다.







(VI) Thomas Aquinas (1224/5-1274)


(가) 시대적 배경: 대학과 스콜라주의의 정착


1. 중세를 특징지우는 본격적인 스콜라적 신학, 즉 이성론적 기독교의 발달은 서구가 고대의 철학적 이성의 재발견으로 인해서 다시금 전격적으로 도전을 받은 13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양상을 띄며 활달해졌다. 물론 중세의 기독교는 이런 학자들의 기독교와 서민의 의식적이고 사뭇 미신적인 신앙간의 상당한 괴리가 있던 것도 초대교회와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이 시기에 유럽은 이전에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고대 철학적 이성에 의해 영향과 도전을 받는 일이 생긴다. 이는 주로 잊혀졌던 고전의 재발견과 아라비아로 부터의 유입을 인한 지적 자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9세기 운동이 시작이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던 반면, 이 시기의 지성운동은 심화되고 강한 영향을 불러일으킨다.


3. 여기에는 13세기에 이탈리아 (볼로나), 파리 (솔본), 영국 (옥스포드, 켐브리지), 독일 (쾰른)등 발전하기 시작한 대학과 그곳을 중심해서 발전한 학문인 스콜라 철학의 기여가 컸다.


4. 토마스 아퀴나스 (아퀴노의 토마스)는 이 시대를 살고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유럽의 기독교 지성인이다. 그를 이해함이 이 시대에 있어 고전철학과 기독교 신앙이 어떠한 형식으로 종합되었는지를 이해함에 필수적이다. 또 그를 이해함에는 그 시대의 대학과 그곳의 학문적 분위기를 이해함이 중요하다.


5. 토마스 아퀴나스는 소년기에 몬테카시노 (Monte Cassino)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맡겨진 이후 Naples의 대학에 입학하고 후일 가족들의 바램과 달리 새로 생긴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는 Cologne과 당시에 최고의 기독교 학문 중심지인 Paris에서 수학하고 59년 이후 이탈리아에서 가르치다 69년 파리에 와 가르친 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 74년 49세로 죽었다.

        

6. 그의 삶에는 처음 형성된 대학이 큰 역활을 하였다. 1200년대는  볼로나, 파리, 옥스포드의 대학이 생기던 시대로  대학은 당시 산업이나 상업처럼 길드를 이루어 magistrorum et scholarium (masters and students)의 결합으로 universitas (본래 대학에 국한되기 보다 집단의 공동적 명칭이었다)를 이루었다. (oxford, cambrige, Tornto's University College, St. Michael College) 이는 학문도 하나의 직업화 함을 보여준다.  Alexander of Roes (c. 1280)의 지적처럼 당시는 유럽의 사회와 문화는 sacerdotium, imperium, studium의 세기관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대학이 교회와 왕궁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7. 당시의 대학의 교육은 magister의 두가지 역활, 즉 講讀과 爭論 (legere et disputare)으로서 강독에는 정관(statutes)에 따라 정해진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진 텍스트 (auctoritates)를 읽고 설명하는 것이어서 자연히 "주석"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논쟁은 주석적 읽음에서 자연히 수반되는 질문들을 다룸에서 발전하였다. 권위적 문헌으로 부터 야기된 논쟁과 반론의 변증법은 생각이 가능한 모든 선택여지를 저울질하는 일에 있어 근본적으로 열린마음 (개방성)과 함께 조직적 해결에 이르기 위해 한계까지 밀어붙여진 이성의 엄밀한 적용 둘다를 요구하였다. 여기에서 schoolmaster or 'of school'을 뜻하는 scholasticus로 부터 중세철학과 거의 동의어라 할 수 있는 scholasticism이 유래하였다. (종이자르기의 예)

        

8. 인문학부 facultas artium (faculty of arts)는 중세대학의 4개 학부중 하나로서 오늘날 (영어권의) 문학사, 석사에 해당하며 신학, 법학, 의학부의 예비단계로서 어거스틴의 De doctrina christiana에서 결정해놓은 세속적 지식의 전부를 포괄하는 전통적 체계를 가리킨다. De doctrina christiana는 성경연구에 중점을 둔 "기독교 학문체계" (Christian scholarship)에 인문학부가 종속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기본으로 한 것으로 13세기까지도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 책의 정신은 과학은 그 자체가 목적을 가지고 있을 수 없고 그 의미와 연계 (meaning and coherence)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연관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9. 시간이 가면서 인문학부는 점차 "서구에 아리스토텔레스 전체가 소개 (the introduction of the complete Aristotle in the West)됨" 이라 불리우는 중대사건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맞게된다. 이 때까지 만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저술만이 알려져 있었으나 12세기 중반에 Physica, De anima, Metaphysica, Ethica가 번역되었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아리스토텔레스 (the Stagirite 그 마케도니아의 스테지라 사람)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희랍 주석서들 방대한 희랍-아라비안 문헌이 도입되었고 신플라톤주의 문헌과 심지어는 유대인 사상가들의 문헌도 라틴어로 번역 소개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시대에는 다양한 영역들에서 고대문화로 부터의 방대한 내용들이 채용되었던 것이다.


10. 이와 동시에 많은 이들은 이 비기독교적인 고전문화와 중세문화 사이의 대립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 좋은 예로 Absalo of St. Victors는 "그리스도의 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이 지배하는 곳에선 지배하지 않는다" (The spirit of Christ does not rule where the spirit of Aristotle reigns)라고 했다. 고대문화를 채용함과 배격의 두 입장은 결코 온전히 조화되지 못한채 양극으로 남아있었다.

        

11. 이것은 1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응에서 또 한번 표출된다. 초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강독에 교회가 크게 반발하여 1210년에는 막 설립된 파리대학에서 그의 자연철학 저술의 강독은 파문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수수께끼처럼 그의 강독은 번져나갔고 1255년 결국 공식적으로 허용되어 이제는 반드시 대학 학과목에 그의 저술에 대한 강독이 들어있어야 했었다. 이렇게 해서 인문학부 (facultas aritum)은 사실상 철학부가 되었고 모든 학생들을 위한 예비단계였던 인문학부는 이교적 철학에 푹젖게 되었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부르듯 "그 철학자" (the Philosopher)가 되어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견해를 받아들임은 실재에 대한 전통적 견해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요, Ferdinand Sassen의 말처럼 "중세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속에서 자신에 대해서와 그들이 가진 자연적 능력들에 대해 의식하게 되었다."  down-to-earth philosopher.

참고 (1) 플라톤적 영성의 고대철학과 기독교 신앙, (2) 아리스토텔레스적 사변적인 자연철학과 기독교신앙, (3)기계론적/ 유물론적 과학기술, 계몽사상과 기독교 신앙, (4)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사상의 패라다임 변천

        

12. 신학부, 성경연구와 수도회: 신학부 교수도 역시 강독과 논쟁을 중심으로 가르쳤으나 여기서 주된 권위적 문헌은 물론 성경이고 그 강독이 중심과제였다. 13세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중흥 뿐 아니라 성경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이 일어난 시대였다. 스콜라적 방법이 성경연구에 확대된 결과 그 연구도 학문의 일부가 되어 아퀴나스의 Summa theologiae에서 처럼 최초로 조직화되어 theo-logy (loci system)로 발전되었다.


13. 13세기의 수도원의 새로운 발전은 후랜시스와 도미니칸 수도회의 신학 발전으로 1250년이후 대부분의 주요 신학자는 수도승이었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이전의 수도회와 달리 도시적 분위기에 적대적이지 않고 설교와 선교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활동의 관점에서 학문연구에 강조를 두게된다. 도미니칸은 ordo studentium이라 할 만큼 수도원 생활의 핵심적 일부로서 연구를 둔 첫 수도회였다. 이 수도회가 당시 세워지던 유럽의 대학들에서 주요 교수직을 차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1. A의 철학개요: 이시대 사상과 대학의 좌표를 정한 原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일 것이다. "만인은 본능적으로 앎을 원한다." 그것은 감각에서 취하는 기쁨에 의해 입증되는데, 그것은 효용성과 상관없이  사랑을 받는다. 봄 (특히 the disinterested appreciation of seeing)은 앎의 최선의 길로 여겨진다. 봄과 앎은 theoria, Idea, visio등과 같은 용어에서 보듯이 언어적으로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2. 이는 100 쪽의 각주 16 하이데가의 말처럼 독특한 헬라적 사상이다.  "바라봄에 속한 순수한 지각속에서 그 자체를 드러내는 존재, 그리고 오로지 그와 같은 봄에 의해서만 존재는 발견된다. 근원적이요 참된 진리가 순수한 봄에 위치한다. 이 주장은 그 이후 계속해서 서양철학의 기초로 존속해왔다. '봄'에 관한 희랍적 우선성이 오늘날 자주 '기독교의 헬라화'와 관련지워지며  그렇게 하여 구약에 나오는 실재에 대한 결정적 경험에 대립된다." 

Being is that which shows itself in the pure perception which belongs to beholding, and only by such seeing does Being get discovered. Primordial and genuine truth lies in pure beholding. This thesis has remained the foundation of western philosophy ever since. This Greek priority for 'seeing' is today often brought into connection with the theme of the 'Hellenization of Christianity' and is then opposed to the decisive experience of reality in the Old Testatment." 희랍인들은 청각보다 시각적 접근을 중시하고 셈족의 경우 보다 청각적 접근에 강조점 둔다. seeing and listening  A. J. van der Aalst

        

3. 아리스토텔레스의 앎은 플라톤이 원하는 가지계/예지의 세계에 대한 추상적인 (신비에 가까운 통찰)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적인/지상적인 일들에 대한 논리적/분석적 앎이다.  이런 앎의 본능은 어떤 일의 원인 (causa)를 파악하는 지식 (scientia)에서 채워진다.  앎의 충동은 보는 것의 숨은 원인에 대한 경이 (wonder)에서 비롯되고 1. 뭔가가 존재하는가 (whether something is), 2. 그 본질이 무엇인가 (what something is)의 두 질문으로 나아간다.


4. 토마스의 채용: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본능적 앎의 욕구라는 논제에서 "본능적으로" 를 강조적으로 취하여 만물은 자체의 가능성의 완성을 추구하며 그것이 善 (bonum)이라는 유기적 목적론을 주목한다. 즉 인간의 알고자 하는 동기는 만물이 자연히 완성 (perfection, 존재론적으로 구원?)을 추구하듯, '인간으로 인간답게' 완성한다는 것과 만물이 자신의 고유한 기능 (열은 뎁히고 무거운것 떨어지듯)을 발현하는 '인간의 특수한 활동'의 완성이다. 즉 인간의 영혼은 백지(tabula rasa)요, 이성은 하나의 가능성이어서 실제적 앎을 통해서 실재를 파악함으로서 자체의 완성을 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연적이고 본질적 활동은 이해 (to understand, intellegere)이다. 여기서 'omnis scientia bona est. 모든 과학 (학문, 앎)은 선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앎 (학문)은 인간의 완성이고 그의 자연/본질적 욕구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5. 어거스틴의 전통과 마찰: 모든 앎을 정당화하는 A와 달리 어거스틴은 호기심, curiositas" 즉 '덕스럽지 못한 (unvirtuous)' 앎의 욕구에 대한 정죄한다. 고백록 10권은 요일 2:16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는 말씀에 근거한 논박한다. 35장은 안목의 정욕을 호기심과 동일시한다. 호기심이란 학문의 외투로 위장된 지식의 헛된 욕구이다. 특히 안목의 정욕이라 한것은 바울도 희랍인들이 지식추구에 있어 봄에 우선권을 부여함을 알기 때문이는 것이다.


6. 아리스토텔레스는 봄의 기쁨을 본능적 지식욕구의 증거로, 어거스틴은 그것이 세상에 굴복하는 징표로 이해한다. 호기심의 "유혹"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위해 만물을 시험하도록 꼬인다. 호기심은 어거스틴의 근본적 구별인 사용 (uti, using)과 즐김 (frui, enjoying)의 구분을 토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의 De doctrina christiana에 있어 과학의 개념도 이 구분에 기초한다. 그는 지식은 반드시 인류 구원에 봉사할 수 있는 것 (uti)이어야 한다. 하나님 만이 안식을 주고 즐거워할 우리의 모든 갈구의 궁극적 목적이다. 사람들은 즐거워할 것을 신을 사용하기 원하고, 사용하여야 할 지식을 관조의 theoria 운운하며 최고의 목적으로 즐기는 反轉으로 이 관계를 왜곡한다. 사실 어거스틴은 서구에 이미 싹트기 시작한 이성주의적 성향을 잘 간파한 것이다.


7. 어거스틴에 있어 무사한 관조 theoria로서의 세속적 지식에 연연하지 않고 기독교 학문적 지식은 도구적 의미를 가짐을 역설함이 그의 호기심 정의에 두드러진다. 즉 그의 학문적 관심은 하나님을 앎과 그로 인해 즐거워함이라는 종교적 목적에의 부합하느냐 여부에 의해 정해진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과 영혼을 알기를 원한다. 그외에? "전혀 아무것도. (Anything else?Absolutely nothing else)" (독백 1,2,7) 기원을 아는 지식과 연관된 자기을 아는 지식, 이 둘 만이 가치있는 지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어거스틴은 자연과학을 본능적인 무엇이 아니라 "앎 자체를 위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의 맥락에 넣는다.

        

8. 토마스의 절충: 토마스는 앎을 자연본능적 욕구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호기심을 왜곡된 욕구로 보는 이 둘 사이를 어떻게 조화시키고 있는가? 토마스는 신학대전 II-II, 166ff 에서 원죄에 대한 논의 직후 호기심에 대해 언급하면서 "진리 자체에 대한 지식과 진리를 알고자 진력하고 연구하는 것을 분리해서 판단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 구분은 어거스틴에게서 거리를 둠을 의미한다. 이 구분의 목적은 다름아니라 지식 그자체는 선한 것으로 보고 거기에는 왜곡된 호기심이 깃들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그가 지식 달성이 인간의 완성이요 자연적 욕구인 지식소유가 완성되는 것으로 봄과 연관된다. 토마스는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철학연구는 그 자체에 있어 적법적이고 찬양할 만하다고 보았다. (신학대전 II-II, 167, 3) 토마스는 이처럼 만일 과학이 인간의 완성이라면 지식의 어떤 영역 (특히 theoria)를 구별하거나 배제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진다.


9. 토마스는 지식의 추구가 잘못될 수는 있음을 인정한다. 잘못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추구를 꺼리는 육체의 욕구와 영의 지식욕구 사이의 조화가 죄로 인해 깨어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추구를 통제해야 하는데 여기서도 토마스는 중용 mesotes, 德, 즉 "right mean" between two extremes 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의 핵심개념에 의존한다. 호기심은 앎의 욕구에 나타날 수 있는 극단으로, 절제 (temperantia, temperance)인 학구열 studiositas (zeal for learning)의 덕에 의해 합리적인 통로로 유도되어야 한다. 즉 어거스틴의 악덕인 호기심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의 지배에 들어와야 한다.


10. 토마스의 해결의 핵심: 토마스는 A의 문제점을 지식추구가 그것의 바른 목적인 하나님을 앎에 관계됨 없이 피조물에 대한 진리를 추구 하는데로 나가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즉 이런 지식추구는 존재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탐구하지 않고 자연현상에 대한 지식에 만족하는 과학에서 드러나는 악이다. 이리하여 T는 A가 말하는 인간의 본질로서의 지식추구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앎에 연관시켜야 할 것을 말한다. 그는 이 작업을 하되 A의 지식추구를 하나님을 앎의 하위개념으로 두고자 한다. 즉 어거스틴이 말하는 바 호기심의 (악한) 종교적 동기가 이론적 고찰의 위계 (상하관계)로 바뀐다. (Augustine's religious motivation of the curiositas is transposed into the hierarchy of the theoretical consideration.) 이러한 토마스의 해결은 이미 자연과 은총의 이층구조를 함축한다. 

        

11. 토마스가 종교적 동기를 이론적 고려의 순서로 바꿈은 제3논증에서 더 두드러진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완성을 이루는 원리와 연합되고자 욕구한다"는 이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외에도 Proclus, Pseudo-Dionysius와 같은 신플라톤적 순환교리 circulation motif의 채용으로 말미암는다. 신플라톤주의는 모든 실재가 두개의 상반된 동시적 운동, 즉 유출과 회기 (emanation and return, a turning around, conversio, from the first principle, the One or the Good)의 역학관계로 본다. 유출된 모든 것이 근원으로 돌아가기 원함은 거기에 완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회기는 물질적-감각적인 것으로 부터 순수하게 영적이고 신적인 존재로 됨을 말한다.


12. 토마스는 인간이성 (human intellect)의 원리를 비물질적 본질 (incorporeal substances, substantiae separatae)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인간영혼, 천사, 하나님의 불멸적 존재를 부르는 통칭이다. 앎이란 아는자와 대상의 합일인데 인간의 최고 목표는 최고의 원리를 앎으로 그에 합일되는 것이다. 여기서 산출 (exitus, procession)과 회기(reditus, return)의 신플라톤주의 원리가 엿보인다. 또 창조교리와 다른 유출의 교리마저 수용된다. 토마스는 자연에 의해 강제된 단계적 유출은 부정하고 하나님 만이 모든 것의 창출적 근원으로서 궁극적 목적이 되신다고 한다. 그리하여 토마스도 어거스틴 처럼 오직 하나님에게서 만이 인간의 참된 안식이 있다는 고백으로 귀결한다.


13. 철학의 고민과 "거리": 그러나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의 원인들을 알고자 이성의 욕구는 안식이 없다. 이것이 바로 이성에게 안식없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철학의 고민이 있다. 토마스는 신학자나 철학자 공히 인간 이성과 신적 본질 사이의 "거리"의 문제에 봉착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답하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본 이 문제를 토마스는 인간 지식의 위상과 관해 부정적으로 대답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즉 학문은 단지 감각이 달하는 곳에 유효하므로 비물질적 본질들에 대해 알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의 궁극적 행복은 본질적으로 추상적 과학들을 철학적 이론으로 고려함에 있지않다. 본능적 앎의 욕구는 사색적 과학에서의 완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종적 목적을 초월하며 철학은 완전한 행복을 이루지 못하고 단지 불완전한 행복을 유추할 뿐이다. 철학자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하나님 지식은 그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가 어떠한 분이라는 것은 알 수 없다. 


14. 그러나 본능적 앎의 욕구가 거기에 만족할 수 없다. 토마스는 인간의 완전한 행복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명상인 the visio Dei (the contemplation of God's essence)에만 연관된다고 했다. 여기서 theoria와 흡사한 언어사용을 본다. 이 하나님의 명상은 철학적 탐구의 질서에 상충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연구는 결국 궁극적 원인인 하나님의 본질을 알지못하므로 앎의 욕구와 성취 사이의 괴리를 이루어 인생의 초험적 성취를 이룰 수 없다. A의 해결은 철학의 고민과 낙망을 말하고 포기, 체념 (resignation)을 해결로 제시한다. 그는 인간의 행복이 제한된 것이고 미완성과 불완전에 머물 뿐이라고 믿었다.

        

15. 그러나 토마스는 만일 앎의 자연적 욕구가 채워질 수 없다면 완전한 행복이란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것이나 인생이 무의미하고 목적이 없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즉 "이성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것이 가능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신학의 발상) 왜냐하면 visio Dei의 불가능성은 신앙과도 상치하기 때문이다.


16. 하나님에 대한 즉시적 명상은 성경에 약속되어 있고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성경의 권위를 통해서 철학의 고민으로 부터 해방된다. 그것은 인류에 구원에 관하여는 철학 다음에 신적계시를 통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신적계시는 철학을 초월하나 철학의 이상 즉 인간의 본질인 이성적 앎의 완성을 성취하는 이성적인 성격을 가진 무엇으로 이해되고 있다.


17. 그 한 증거로서 토마스는 계시와 신앙을 통한 철학의 고민으로 부터의 해결이 얼마나 "합리적 (reasonable)" 한 것인지에 대해 수차례 강조한다. 그는 심지어 마5:8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함의 원문를 이성으로 (God is seen by the heart, that is, by the intellect) 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석의 놀라운 점은 기독교 신앙의 종말론이 앎의 자연적 욕구의 궁극성 (the finality of the natural desire to know)과 조화 (종합)시키고 있는 점이다. 이처럼 토마스는 신적 계시가 이성을 초월하나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16. 그 반대로 계시는 이성을 '완성'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이 이성적 존재로서의 그의 궁극적 목적에 도달하는데 불가결한 진리가 계시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에 대한 명상은 하나님 본질에 대한 명상으로  (visio Dei = vision per essentiam) 해석되어 철학적 사색의 지평을 초월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본질적으로 theoria의 (이성주의적) 인 무엇으로 이해된다.

        

(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


1. 토마스에게 있어 신학은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실을 이론적으로 반성하는 학문의 체계를 말한다. 반면 철학은 이성의 확인절차를 거친 지식과 경험에서 출발한 思考(reasoning)로서 새 지식에 이르는 길 (the way of discovery)이다. 이것의 특성은 경험적 판단들을 원리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재검하여 (the way of reducing) 이성적 확인의 절차를 거치는 것이다. 철학은 일상적 경험의 의미를 이해하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진 자연적 형태의 지식이다.


2. 즉 신학과 철학은 그것이 다르는 대상에 의해서 구분되지 않고 접근방법의 차이에 의해 구분된다. 같은 진리를 신학자는 계시에서 출발하고 철학자는 이성적 추론의 결과로 안다. 예를 들어 신의 존재는 신학자는 계시를 통해 받은 전제이고 사고를 통해 그 내용을 더 잘알고자 하지만 철학자에게는 증명의 대상이다. 


3.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이 철학을 신앙에 의해 받아들인 지식에 대한 영적 진보의 수단으로 여겨진 것과 차이를 보인다.  또 철학을 신앙의 예비단계 또는 준비였다고 말한 져스틴이나 클레멘트와도 다르다. 이들은 헬라와 히브리, 이방과 구약적 선민전통을 구분하고, 철학이 어떻게 헬라인들로 하여금 복음에 다가서게 했는가를 설명하고자 했다. 반면 아퀴나스는 철학의 일반적 정당성과 그것의 자연적 요소를 강조함으로서 초자연적 성격이 강조된 신앙과 구분하고 있다. 


4. 그는 철학자 (헬라철학자들 뿐 아니라 라틴 (세네카), 이슬람, 유대의 현인, 문인등도 자주 인용한다)를 성자 (the saints, Augustine, Ambrose 등)과 엄격히 구분한다. 또 그는 신학이라는 말 대신에 sacra doctrina "성스러운 교리" 라는 말을 선호한다. 이런 자세는 신학을 철학과 구분하려는 생각과 더불어 철학의 자율성을 보장하려는 생각을 함축하고 있어 문제이다. 그 역시 기독교적 기초에서 특이한 철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점에 있어서는 초대교부들과 다르지 않았다.


5. 물론 철학과 신학은 그 성격상 당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철학이 신학으로 부터 구분된다고 해서 종교적 신앙으로 부터도 독립되어 자율적인 학문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철학은 신앙으로 부터 독립될 수 없다. 아퀴나스의 잘못은 철학을 신학과 구분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으로 부터의 구분이 철학을 신앙으로 부터도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간주한 점이다. 그는 철학을 자연적인 것으로 보고 이것은 이성이 있는 인간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것이요, 자연적인 것이므로 철학의 영역에서는 기독교인이나 이교도가 공통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 영역에서는 이교도 철학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다.


6. 아퀴나스는 이성과 신앙을 예리하게 구별했다. 신학은 계시에 의존하며 철학은 이성에 속한다. 그러나 이성의 권위는 철학의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고 신학에도 미친다. 신학의 분야라도 이성으로 이해되는 것은 이성의 힘으로 탐구한다. 즉 "자연신학 (natural theology)"란 바로 계시없이 경험적 이성에 의존한 사고를 통해서 신학의 주제들에 접근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그는 신존재와 성격에 대한 문제를 다룸에 있어 철학적 접근을 마지 않았다. 참고로 철학에서 자연신학이란 이성적 논증에 의하여 종교적 진리를 정립하려는 기획이다. 일반적으로 자연신학의 두 중심주제는 신존재 증명과 영혼의 불멸성 논증이다.  


7. 아퀴나스도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철학적으로 알 수는 없어도 그의 존재는 논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한 안셈의 본체론적 증명을 버리고 경험계의 사실을 통해 귀납적으로 또는 목적론적으로 논증했다.


8.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원리를 이용한 자연신학은 신존재 증명의 "다섯가지의 길"에 핵심이 담겨있다. (1.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의 변형; 만물의 궁극적 원인으로서의 unmoved mover, the first cause, 순수한 형상, 완전한 존재, 2. 우연성-필연성 논증; 우연적 존재는 필연적 존재에 의해 궁극적으로 설명될 때 비로서 평안이 있다, 3. 완전자의 존재의 필요를 말하는 완전성 논증, 화살이 과녁을 지향하듯 우리의 의식도 완전한 존재인 하나님을 목적해야 한다는 목적성 논증)


9. 부정의 방법: 하나님의 신의 속성에 관한 논의가 자연신학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것은 불가지론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1) 부정의 방법 (via negativa)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Contra Gent. I 14, "하나님의 실체는 그 무한함으로 인해 우리 지성이 지니는 모든 형상을 초월해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인지를 아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실체에 대한 모종의 지식을 갖는다"고 했다. 이는 소거의 방법 (via remotionis)라고도 한다. 즉 하나님은 책상이 아니고 (고로 인격이요) 사람이 아니요 (고로 불변하며) 이런식으로 무한대로 나가면 상당한 지식을 얻는다.


10. 유비의 방법 類推, 類比 (doctrine of analogy): 자연신학의  중대부분으로서 어떤 특수경우에서 다른 특수경우를 미루어 짐작하는 것 (동물 수컷의 성격에서 남자의 성격 짐작하기) 이는 하나님을 알되 그가 계신 그 모습대로 알지 못하나 단지 그가 어떤 분이셔야만 한다는 논증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만물의 창조주로서 초월하신 분이므로 세상의 무엇을 통해 알려고 할 때에 반드시 본질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반틸은 이것을 꺼꾸로 뒤집어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 지식의 유사라 하였다.)


11. 계시신학의 필요성: 그러나 그는 인간 이성에 의한 철학 연구 외에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지식이 인간 구원에 불가결하다고 강조하였다. 즉 기독교의 기본교리, 즉 삼위일체, 성육신, 육체의 부활등 이성영역의 밖에 속한 교리는 이성과 상충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초월한 것으로 성경과 교부들의 전통에 의해 전달된다. 이것을 계시신학이라 한다. 


12.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의 관계는 신에 대한 지식에서 잘 드러난다. 첫째, 신의 본질은 인간의 유한한 이성으로 인식될 수 없으나 신의 존재, 영원성, 창조적 능력, 섭리등은 계시를 떠나서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이성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만물의 제일원인 이며 그 피조물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이성은 길을 인도할 수 있으나 그것의 목적인 하나님을 앎을 완성하는 것은 계시뿐이다. 그리하여 철학은 신학 또는 교회의 종 (ancilla ecclesiae)라고 보았고, 이 역활을 담당할 때에만 온전하다. 


13.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이르러 일반계시와 특수계시로 나누는 생각과 바르트와 부른너의 자연신학, 일반은총논쟁, 그리고 카이퍼와 스킬더의 일반은총 논쟁과 화란 기독교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의 관계성에 대한 논의는 모두가 아퀴나스의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의 논제와 흡사하다. 예를 들어 부르너는 창조 가운데는 하나님의 진리 계시가 있으나 유효한 자연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와는 무관한 하나님의 접촉교리라고 정의한다. 이들은 일반계시를 자연신학으로 연관시키지 않고 자연적인 것에 관하나 신학으로 이해한다.


(라) 자연과 초자연


1. 13세기의 인식론의 핵심은 희랍적 이성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관계였다. 토마스는 이 문제를 자연과 초자연의 구분으로 대답한다. "은총의 선물들이 자연의 선물들 위에 더해지되 후자를 파괴치 않고 오히려 완성하는 방식으로 더해졌다." (신앙의 빛이 이성의 빛을 파괴하지 않는다). Gratia no tollit naturam, sed perficit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완성한다.) 하나님이 이 둘의 근원이시고 조화를 보증하신다. 이 조화론에도 유출 (앎의 욕구)과 회기 (앎의 완성으로서의 계시, 은총) 라는 순환주제가 엿보인다.


2. 이 둘 사이에는 조화가 있다. "만약 철학자들의 가르침 가운데 신앙에 상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본래 철학이라기 보다 이성의 불완전성에 기인하는 철학의 오용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여기서 보듯 토마스에게는 이성의 자충족성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 없다. 그 예로서 철학의 오용은 이성 그자체에 의해 밝히 보여질 수 있다고 본다.   


3. 자연 위의 초자연적 목적: "자연적 원리들 위에 하나님에 의하여 사람에게 운행의 초자연적 원리들이 주입되어야만 이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은총이다. 여기서 은총은 사죄와 교제회복으로 이해되지 않고 최종적 목적을 위해 인간성의 초자연적 완성 (the supernatural perfection of humanity for the final goal)이다.


4. 여기서 gratia perficit naturam의 주제가 나온다. 기독교 삶은 자연적 질서의 완성이다. gratia prae-supponit naturam (grace presuppose nature). 자연은 은총의 prae-ambula이다. 이러한 이유로 토마스는 자연과 초자연적 목표를 말한다.


5. 이와같이 토마스는 자연이 은총에 이르는 독립적인 디딤돌이요 기독교적 상부구조의 하부구조였다. 그는 성경의 하나님을 제일원인으로, 그리고 자연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했다.


6. 그러나 그의 종합적 사고에는 (A) 희랍철학의 자연 개념에 따라 무질서, 혼돈, 순환적인 질료의 세계인 자연 속에서 움직이는 생성, 성장, 성숙의 목적론적 원리인 형상을 통해 (내재적인) 일원론적 통일을 시도한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자연과 구별되는 은총을 다시금 도입하므로서 (B) 그의 종합은 사실상 자연을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고 그 독립성을 부여한 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요소와 그러나 그것을 다시금 은총이라는 초월적 영역의 하부구조로 위치시킨 점에 있어서는 플라톤적 이원론의 모습을 가진 세계관을 도입했다.


7. 이런 세계관에 대한 대표적 비판이 중세말 프란체스코파 수도사인 William of Ockham (1280-1349)에게서 일어난다. 오캄은 토미즘 체계가 자연과 초자연 사이의 관계가 토마스 생각처럼 상하위 관계로 연결될 수 없는 독립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즉 은총이 자연에 대해 갖는 내재적 가치를 박탈하고 오히려 자연에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대립의 전통은 마틴 루터 (1483-1546)과 멜랑흐톤 (1497-1560) 으로 이어지고 다시 칼 바르트나 부르너, 고가르텐 등의 신정통 신학으로 이어진다. 


(마) 정리


1. 카토릭과 종교개혁의 근본적 차이는 자연과 은혜의 관계에 대한 상이한 견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개혁자들에게 있어 은총은 인간 본성의 高揚이 아니라 회복이요 해방이다. 즉 방향성에 관한 문제도 언급된다. 인간의 본성은 관계적 relational이라고 본다. 그러나 토마스는 자연의 개념에 사물 그자체들의 존재론적 일관성에 대한 표현이 나타난다.


2. 물론 토마스에게 있어 자연이 피조물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적) 관계임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 관계성을 (비본질적인, 우연한) 범주 (the accidental categories)의 하나로 본다. 즉 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모두 본질 이후에 나오는 비본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세계의 관계가 피조물의 본질에 후속한다는 문제를 낳으므로 여기에 새로운 관계, 즉 범주적 관계가 아닌 초월적 관계 (not catagorical but transcendental)를 필요로 한다.

        

3. 토미즘의 또 다른 문제는 그것이 인류를 두종류의 목적으로 갈라놓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화란 철학자 쉴레벡스가 말한대로 토마스는 이원론으로 삶을 나누기보다 오히려 그의 가장 깊은 의도는 인간의 삶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삶, 하나의 마지막에 예정된 바, 근원과의 관계 속에서 움직이고 존재함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근대의 기독교사상 (Decartes, Locke, Kant, Hegel)


(가) 중세적 종합의 붕괴이후

1. 중세적 방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기독교 전통과 인본주의(Greco-Roman 전통)이 화합할 수 있다고 믿고 기본적으로 후자 또는 근대적으로 해석된 철학전통의 입장에서 기독교적 진리를 취합하려던 시대이다. 헤겔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서구 사상가들은 스스로를 기독교 사상가로 여기거나 그에 뿌리를 둔 것으로 이해했다. 헤겔은 자신을 기독교철학자로, 자신의 작업 철학을 Gottesdienst the worship of God이라고 불렀다.


2. 그것은 아마도 이들에게 있어 기독교란 선택사안이 아니고 문화였으므로 이들이 간단히 떨쳐버리기에 너무나 무거운 전통으로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르네상스 정신의 핵심인 자율적 이성의 계몽을 믿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신앙을 새로운 이성적 대안이 제시될 때까지는 계속 유지되어야 할 것, 철학을 위한 전제, 신비를 설명하기 위한 제한적인 무엇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졌다. 이런 자세는 확실성의 기초로서의 신 (데카르트 브61), 하나의 가설로써의 기계론적인 신을 말한 라이프니츠의 변신론 (예정조화설, 브90,91), 스피노자는 내재적 원인으로써의 신 (natura naturans, 신에 취한 사람, 브87 Creator/creature distinction 폐지)  로크의 이성적 신앙과 종교관용론과 프랑스혁명에의 영향 (브100, 준이성, 초이성, 반이성  accroding to, above, contrary to reason) 루소는 에밀에서 “양심과 이성을 따르는 성실성”을 강조하는 자연주의적 신관과 계시종교 부정 (브131-3) <오직 이성의 한계 내의 종교>, 종교없는 종교, 예배없는 종교, 요청된 신 (칸트, 브163), 영국의 이신론자들은 자연신학의 한 유형이며, 볼테르 조차도 신이 없다면 만들기라도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헤겔은 절대관념론, 절대정신으로서의 신, 모든 세계 만물의 완성으로서의 신, 하나님의 자기의식으로서의 종교, 역사(브187)을 생각했다.


3. 파스칼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이다. 그는 이성으로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직관으로 아는 하나님이시다. (브92) 팡세는 그의 변증서이다. 마찬가지로 키엘케골은 헤겔류의 관념론적 신관을 배격한다. 공포와 전율이 그것을 보여준다.


4.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중심적 사고를 비판함으로써 명백히 다른 비전과 세계관을 제시했으나 후속적인 견실한 철학과 학문을 발전시키는 점에서 약했다.


5. 결국 초기 철학자들의 기대처럼 기독교적 세계관과 르네상스적 세계관의 통합은 철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극단적인 분리와 방향을 상실한 문화로 치닫게 되었다. 그것은 기독교의 무게가 생각보다 깊다는 의식 (쌰르트르, 카뮤, 카라마죠프의 형제  신이 없다면)이 견딜 수 없는 반발을 불러왔다는 것과 철학자들의 조심성과 인내와 실험을 대중이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과학의 발전에 입각한 맹목적이고 성급한 유토피아주의, 그리고 결국 이런 비전을 정치적으로 실험하려는 불란서혁명 같은 사건이 폭발하고 말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이런 비전을 계속 각 방향에서 투사하고 혁명을 부추기는 사람들 (Comte 1789-1800, Marx 1818-83, 프로이드 1856-1934, 니체 1844-1900)이 줄을 잇게된다.




(X) Friedrich Ernst Daniel Schleiermacher (1768-1834)


(가) 생애와 저작


1. Breslau 출생으로 조부와 부친이 목사요 본인도 (개혁파) 목사였으며 어려서부터 모리비안 학교에 보내져 경건주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결국 독일 경건주의의 본산인 (스페너, 프랑케등의 영향이 큰) Halle대학에서 공부한 후 그곳에서 가르치게 되었으나 나폴레옹의 진주로 할레가 프러시아 영토에서 떨어져 나가 무산되었다.


2. 그는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목회를 하던 중 그곳의 대학창설에 기여하고 신학과목과 종교학을 교수하였다. 동시에 그곳 삼위일체 교회에서 설교자로 명성을 높였다.


3. 그의 학문적 기여는 종교철학과 신학에 있어 철학에서 칸트에 비견될 만한 것으로 흔히 현대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울 전환점을 이루었다. Karl Barth는 이 점을 들어서 슐라이에르마허는 "학파를 창설하는 대신 한 시대를 창조했다"고 했다.


4. 헤겔이 이제까지 기독교 역사내의 철학적 사유가 신학적 철학의 전통을 가져온 것에서 떠나 신학자체를 철학의 기초에서 이루려는 철학적 신학의 길을 열었다면 그와 동시대인 슐라이에르마허는 또 다른 차원에서 현대신학의 문을 열어놓았다. 그리하여 헤겔과 더불어 현대신학의 양대지류를 이루고있다.


5. 그의 대표적 저작은 , 1799, , (1821-22, 1830-31) 후자는 750쪽이 넘는 대작.                                                            


(나) 낭만주의적 반계몽사상


1. 슐라이에르마허는 헤겔과 더불어 데카르트이후 점차 고도화되어 그 문제점을 확연히 드러낸 근대 인본주의적인 과학문명의 이성주의와 자율성이 내포한 근본문제인 인간성의 소외현상에 대한 문제점을 그 학문적 바탕으로 하고있다.


2. 헤겔이 이성의 소외현상을 합리주의적이요 보다 능동적이며 통일지향적인 이성에 호소해서 해결하려 하고 있어서 전형적인 서구 희랍적 전통에 서있다면 슐라이에르마허는 희랍적인 방법을 배격하고 감성적이고 인격적인 면의 회복과 부양에 관심을 두고 나아가 능동적이기 보다 오히려 피동적인 이성이 지닌 관계성과 의존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헤겔의 이상이 자유라면 슐라이에르마허는 의존이다.)


3. 슐라이어르마허는 특히 계몽사상의 반종교적 분위기에 대한 강한 반발을 대변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계몽사상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낭만주의 운동과의 연계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계몽사상에 대한 그의 비판의 뿌리는 더 깊은 경건주의적 성향에서 찾는 것이 더 정당할 것이다. 즉 그의 낭만주의는 종교적 성향의 부차적인 점일 것이다.


(다) 직관과 감정의 신학


1. 슐라이에르마허의 가장 큰 기여는 종교를 형이상학이나 도덕과 분리하여 그 독자적 성격을 부각시킨 일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전통적 신학이나 근대에 발전된 자연신학등이 모두가 서양의 형이상학에 방불하는 것으로 여기고 나아가 칸트의 <이성의 한계내의 종교>는 도덕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2. 그는 종교의 본질을 직관과 감정이라 보았다. 이것은 형이상학이 이성적 사유와 연관되고 도덕이 행위와 연관되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특히 여기서 감정이란 느낌이 아니라 보다 추상적인 통찰력 즉 영적 직관과 같은 것이다. 그의 사고에는 약간이나마 동양적 신비의 모습이 엿보인다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한예로서 그는 종교를 우주의 직관이라고 하였다. (소위 직통파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경건주의, 신비주의의 후예다운 점이다.) 그의 신관 역시 인격신에 덧붙여 스피노자식의 범신론의 영향이 강하게 풍긴다.


3. 자연을 이성적으로 반성하는 자연신학을 가진 중세와 세계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형이상학에 근거해서 철학적 신학을 해보려는 이성주의 신학은 말할 나위없이 종교개혁이후에도 칼빈의 경우에서 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종교)는 언제나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처럼 언제나 서양의 전통은 교회, 사제, 자연, 계시 (성경), 사유 (로고스 신학), 그리스도를 통하는 종교였다. 이에 반해 슐라이에르마허는 개개인이 신적 존재와의 직접적 교통을 중시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4. 칸트의 자연신학과 자연신론 비판은 근대주의적 이성에 입각한 신학에의 시도에 매우 파괴적이었다. 그는 물자체/초자연세계 (본질의 세계)에 대해 현상계 (시/공계)만을 알 수 있는 이론적 이성이 알 수 없는 것이므로 그것은 신학의 하부구조로 기능할 수 없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5. 슐라이에르마허는 바로 이러한 난관을 실증신학 positive theology로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절대의존의 감정이라 하였고 기독교의 우월성은 <경건의 감정>에 있다고 했다. 절대의존의 감정이란 한 인간이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신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신과의 관계속에 있는 자신을 의식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6. 이러한 강조점을 인해 그는 흔히 주관주의, 낭만주의, 체험주의로 불리우고 헤겔의 객관주의적인 절대적 관념론에 비교된다. 그 내용은 실증신학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라) 실증신학


1. 그의 성경관은 독특하다. 그는 성경이 신적언어로 되어진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 즉 종교적 경험의 기록이라고 본다. 여기서 출발하여 그는 종교적 경험분석에 집중한다.


2. 그는 종교가 인간이 신적 실재에 대한 관계요 경험이므로 기독교적인 경험도 타종교와 공유할 수 있는 인간 공통적이요,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수용될 수 있는 용어로서 기독교 신앙이해가 이런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다.


3.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가 사유나 행위가 아닌 무한자를 향한 의식과 체험 sense and taste for the Infinite 라고 보았다. 여기서 중심은 절대의존의 감정 sense of absolute dependence이다.


4. 하나님의 속성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맺고자하는 관계의 태도를 언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즉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드러내는 자세의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중심주의 종교 anthropocentricism라 비판된다.


5. 죄역시 하나님의 정하신 법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태도라고 본다. 즉 의존성의 본성을 벗어나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자세를 말한다. 그래서 죄를 Gottlosigkeit, Gottvergessenheit 하나님 상실 또는 하나님 망각이라고 했다.


6. 따라서 구속은 절대의존의 감정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절대의존 감정의 화신이자 완성이요 모범이라고 한다. 예수는 신인으로 보아서는 안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 인간이다. (즉 성육신을 부정하여 인간에게 가까이 온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God-Consciousness 신의식을 지속적으로 가진 점에서 다른 인간과 구별되고 모범이 되신다. 그의 사역은 다른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처럼 신의식을 강하게 갖도록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6. 위에서 보는 것 처럼 슐라이에르마허의 특별한 점은 전통적인 신학의 용어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으되 그 내용이 매우 상이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점에서 그는 현대 (주관주의적)신학의 시조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이다. 그 한예가 그도 삼위일체를 "기독교교리의 최후의 보루"라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감정에서 신의식으로 움직이는 성자를 말하고, 나아가 성령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 대한 언술이라고 한다. 이처럼 그는 삼위일체를 말함에 있어 본질의 통일, 그러나 삼위의 분립등의 이원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여 정통적 삼위일체론의 핵심을 부정하고 거기에서 완전히 일탈하여 오히려 uniterian의 모습으로 나아간다.


7. 그의 주저인 <기독교 신앙>은 매우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언어로 중세 스콜라 신학/철학이나 헤겔의 합리주의적 신학에 못지않게 난해하다. 이점에 있어 그도 결국 감정을 강조하는 반면 결국 이성주의적 전통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본다.


(마) 그의 기독교 사상의 영향


1.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은 인간의 경험과 감정에서 출발하는 인본주의적 신학이다. 특히 계시에서 출발해온 전통적 신학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 그는 계시란 결국 인간의 영감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2. 그는 이성과 감성의 치명적 타락성 (전적 타락)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 속에 연약하고 부패할 가능성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존재하는 신의식 God-Consciousness가 있다고 확증하고 거기서 출발한다. (피터 버거의 천사의 소문등과 같은 소리) 이는 전적타락과 하나님 형상의 상실을 말하는 칼빈주의적 신앙과 매우 대조적인 면이 있다. 아마도 현대신학의 인본주의적 모습이 강조되는 것은 훗날 자유신학의 대명사가 되는 리츌등에 이러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3. 슐라이에르마허는 변증가 시대이래 서양철학의 영향을 받아 신학도 희랍적 형이상학에 따라 영향을 받고 있는 점을 누구보다 강하게 의식하고 비판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성경적 계시나 그 세계관에 의한 바른 토대의 회복에로 나아가지 않았기에 전통적인 이성중심주의/객관주의 로고스중심주의의 신학은 피할 수 있었는지 모르나 또 다른 비성경적인 모티브에 빠져들었을 뿐 바른 성경적 철학이나 신학을 열지는 못했다.


4.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 그는 물질에 익숙해져서 모든 초자연과 무한성에 대한 의식을 잃은 세속적이고 불신적인 현대인에게 가시적 세계 이면의 또 다른 궁극과 초월의 세계가 있음을 주지시키려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초월의 개념을 잃고 신학조차 자연신론과 합리론으로 떨어졌으나 그에 반반하여 개인의 감정, 신성의 경험에 집착할 때 그 또한 바르지 못한 철학에 접목될 뿐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현대신학, 현대의 또 하나의 비성경적 기독교 세계관을 열어놓았다. 이는 개인의 정서와 통찰에서 열리는 영원을 향한 몸짓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자율을 떠나서 공허를 향해서 자신을 내던짐, 누군가가 받으리라고... 이 또한 위험하다. 후라이판에서 오븐으로)


5. 그 뿌리가 낭만주의와 같은 수맥에 닿아있듯이 슐라이에르마허는 미학, 예술이 종교의 적이 아니라 동행자라고 보았다. 이러한 면에 있어 그에게 다소간에 포스트모던적 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6. 그의 신학적 방법론에 영향은 해석학의 줄기를 타고 딜타이, 하이데가, 가다머와 오늘날 해석학자인 에벨링과 훅스에로 이른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John Robinson, Paul Tillich, Karl Barth 등 신정통신학과 소외, 인간성 상실등을 중시하는 현대신학에 태두가 되었다. 그 예로 틸리히의 ultimate concern, depth dimension, ground등은 현대인이 잊고사는 의존의 대상, 관계성의 신학을 강조하고 상대적으로 성경적 신학 biblical theology를 배격하며 객관적 계시에 입각한 반성적 신학아닌 감정의존과 주관적 사변과 경험의 신학으로 나아간다.







(XI) Paul Tillich (1886-1965)

Tillich은 Karl Barth와 함께 오늘날 장신, 한신, 감신, 연신 등에서 철학적 신학에서 가장 중시되는 신학자이다. 아마도 Vantil을 Barth에 비교한다면 Tillich은 Dooyeweerd에 비견할 수 있다. 단 Tillich은 Dooyeweerd보다 관심의 폭이 좁으나 Barth는 Vantil 보다 폭이 넓다. 그는 또한 Niebuhr 형제와 친분이 있었고, 나치의 핍박을 당했다는 면에서는 Bonhoeffer와 비견된다.


(가)  배경

1. 역사적 상황: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근대문명에 대한 포괄적 회의와 불안을 가져왔다. 근대는 이성의 시대로 생각되었으나 양대 세계대전이 보여준 것은 극도의 비이성적 상황이었다. 이 시대를 카뮤나 싸르트르와 같은 작가들은 신의 침묵과 광기의 시대로 묘사했다. 이러한 시대를 향해, 특히 비판적 지성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기독교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기독교 신앙은 이런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Tillich은 새로운 변증적 사명에서 기독교 사상을 모색해야할 사명을 느꼈다.


2. 신학적상황: 기독교의 초자연성과 역사성에 대한 회의에 근거하여 도덕과 정신운동으로서의 기독교로 바꾸어 놓은 자유주의의 시대가 앞서있었다. 이 시대의 기독교는 하르낙의 <기독교는 무엇인가 What is Christianity>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초대교회 공동체가 만든 경건한 사고의 산물로 보았다. Schleiermacher (1768-1834)와 Albert Ritschl은 Kant처럼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을 모두 거부하고 감정적 절대의존과 의지적 도덕종교요 인간의 경험으로써의 종교를 말한다. Albert Schweitzer(1875-1965)는 역사적 예수를 찾기 포기하고 역사적인 기독교 아닌 삶으로써의 기독교를 중시한다.

        이런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역사적 신앙과 성경적 신앙을 보수하는 운동이 Princeton Seminary를 보루로 하여 1927년 Westminster 신학교 분립 이전까지 B. B. Warfield나 Charles Hodege G. Machen 등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이성주의의 몰락과 함께 위기에 봉착했다. 이미 1919년에 Karl Barth (1886-1968)는 30대의 신학자로서 로마서 주석을 내어 (Welt ist Welt, aber Gott ist Gott)로 대변되는 초월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통렬히 비판했다. Tillich역시 이 시대를 신학적 위기의 시대로 인식한다. 전통적인 성경적 계시의 신학이나 logos 신학 (즉 철학적-이성적 신학), 그리고 자연신론(Deism)과 윤리적 신학 모두가 무의미해진 시대에 기독교는 어떤 사상적 기초를 가져야 하는가? 이에 대한 그의 답은 존재(Being)의 신학을 말했다.


3. 개인적 경험: 동부독일 브란덴부르그 주의 Starzeddel에서 목사의 아들로 출생 베르린에 이주한 아버지를 따라 거기서 중고등 교육받고 Breslau에서 Schelling의 철학 논문으로 박사학위 받고 1년후 Halle 대학에서 신학박사, 1916년에는 Habilitation을 취득한다. 1912년 목사안수 후 1914년 1차대전에 군목으로 참전하여 전쟁을 몸소 체험한다. 전쟁 후 베를린, 마아르부르그, 드레스덴, 라이프지히 대학에서 가르치며 문화와 철학, 신학을 가르쳤고, 1929년에는 Max Scheler (철학적 인간학의 대가)의 후임으로 신제 비종교적 대학인 Frankfurt 대학의 철학과 사회학과교수로 초빙된다. 1933년 <사회주의적 결단>이라는 책에서 나치를 비난하고 유태인들을 학생테러단체로부터 옹호했다는 이유로 비유대인으로서는 최초로 나치에 의해 면직되었으며 라인홀드 니버의 초청으로 뉴욕의 Union 신학교에 건너가서 신학을, Colombia에서 철학을 그리고 1955년 은퇴후 University Professor of Harvard가 되고 마지막에는 Chicago에서 강의하다 미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대표적인 저작들로는 Systematic Theology, Theology of Culture 문화신학, 설교집으로 The Shaking of the Foundation, New Being, The Courage to be 등이 있다.


(나) 존재의 신학

1. 존재의 신학은 위기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Tillich의 새로운 신학의 필요에 부응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사에 입각한 삶의 자세, 존재를 향한 갈구라는 깊이의 차원(depth dimension)을 종교로 파악하는 신학이다. 전통적인 인격적 하나님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서의 신에 주목한다. 파스칼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아닌 철학의 신을 성경의 신과 동일시 하여 인간 보편 경험의 가장 깊은 차원으로써의 의미추구,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을 다루는 것이 종교라고 본다. “신이란 인간의 유한성에 내포된 질문에 대한 답”이다.


2. 이 때에 신은 전통적인 성경이 계시한 삼위일체적 인격자 하나님이 아니라 존재 그자체, 무제약적인 무엇이요 (무한자), 존재의 힘, 모든 존재의 근거와 의미이다. 이런 신은 오직 간접적이고 상징적으로 진술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는 Bultmann 같은 신학자들이 성경의 비신화화를 외치며 성경을 비상징적인 과학의 언어로 바꾸려는 것을 배격하고 신화와 상징을 도덕이나 학문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상징과 신화적 인 것은 그 자체로 해석되어야 하며 이성적으로 변질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3. 신앙이란 그 분의 계시와 은총에 대한 순종과 응답으로써 인격적 관계에 들어오는 것(교리-신앙고백)과 동행하는 삶(윤리-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신비적 체험이요, 삶의 결단과 그 결단에 입각한 행위(문화)로 여겨진다. 이 때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존재론적 추구와 결단과 이에 입각한 삶의 모범으로 간주된다. 즉 본질적인 인간의 자세인 존재의 본질로부터 소외를 극복하는 용기를 가진 모범으로 그려진다. 그의 <존재에의 용기 Der Mut zum Sein>은 의심과 무의미를 넘어서 결단하는 존재로의 용기를 말한다. 삶은 그 자체가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하나 그것을 직면하는 의심의 용기는 부정적이나 긍정적 자기 표현이라는 해석이다. 따라서 이런 그리스도는 카뮤의 시즈프스 신화와 페스트의 영웅들이나 슈사쿠 엔도의 침묵에서와 포세이돈 아드벤쳐의 신부들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이 신성이 부정된 실존적 인간에 불과하게 된다. 이런 존재로의 용기를 가진 사람은 기독교인 뿐 아니라 불신자, 회의자, 무신론자 까지도 모두 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보편구원론적인 입장으로 나간다. 그 좋은 예가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들 (성채)에서 보는 치셈신부의 입장이다.


(다) 존재의 철학과 관계

1. 틸리히는 존재론적 신관에 입각한 일종의 철학에 입각한 신학자요, 일종의 존재론적 범신론이며, 명상적 종교를 말한다. 그의 복음은 새로운 존재로의 결단인 인간적 복음이다. 존재의 신학은 이성적 철학을 배격하지만 또 다른 형태의 철학인 키에르케고르, 카뮤, 싸르트르, Heidegger의 존재의 철학인 실존주의의 영향을 반영한다. 실존철학은 사유보다 존재가 앞선다고 보고 주어진 존재로부터 존재의 뿌리, 존재의 의미의 발견 또는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철학이다. 즉 주어진 존재란 무엇이며, 그 존재의 본질이 무엇이며,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구조와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으려 한다. 인간의 존재는 특이하다. 던져진 존재이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규명해야할 도전에 입각한 존재이다.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으나 자칫 무의미로 떨어질 위험에 처한다. 인간은 이 의미 추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존재이나 이를 거부하거나 망각할 때 의미를 상실한 비존재가 되고 만다. 이 철학은 수동적 존재, 주어진 존재, 존재의 한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점이 특징이며, 그러나 그 존재의 본질을 비존재 또는 죽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불안(anxiety)를 특징으로 생각하고 이를 어떻게 직면하고 해결해야 하는지를 모색하는 철학이다.


2. 틸리히는 이런 철학과 신학의 연속성을 모색한다. 즉 logos 대신 pathos 또는 on을 중시하는 철학과 theos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은 존재의 구조를 연구하며 신학은 궁극적인 관심사인 존재에 의해 야기된 실존적 질문에 답하는 행위와 노력이라고 보았다. 그의 신학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이 철학에 비추어 인간이 전 존재를 바쳐서 삶의 의미와 방향을 그것에서 찾는 무엇이 바로 신이요 그 추구행위가 종교라고 해석한다. 이런 종교는 데카르트가 자기 지식의 확실성을 위해, 칸트는 자신의 도덕과 윤리를 위해, 헤겔은 체계의 종합의 극점으로 신을 요청한 것과 같이 인간의 존재와 존재의 의미를 정당화하기 위한 철학적으로 요청되고 결론된 신이다. 이런 신을 중심한 종교는 절대적 은혜와 의존을 말하는 수동적인 Barth와 마찬가지로 보편론적 기독교로 변질된다. 차이는 틸리히는 수동적 은혜를 말하기 보다 능동적 결단과 실존적 추구 강조에 있다.


3. 문화는 이런 행위를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화는 종교와 분리되거나 대립되지 않고 종교에 기초한 구체적 삶을 통한 표현이 된다. 틸리히는 자유주의 신학의 인본주의적 자세나 이성적 신학의 한계를 비판하고 거부하는 Barth의 초월주의적 신학와는 다른 자세를 갖는다. 그는 반박과 배타성이 아닌 연결의 신학적 자세를 가진다. 그는 Barth와 달리 신학과 철학, 교회와 사회, 종교와 문화, idealism과 materialism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대화적이며 변증적으로 매개하려는 자세를 갖는다. 그리하여 신과 이성, theos와 logos를 매개하려는 그의 새로운 종합적 신학을 Vermittlungstheologie, Theology of Correlation, 그리고 문화신학이라고 부른다.  


(라) 평가

1.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Tillich에 있어 죄란 존재로부터 소외 또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용기나 의지의 부재, 무관심이다. 이는 합리론적 기독교 사상에서 비이성과 무지로, 이신론적 신관에서는 무질서와 비과학이, 윤리적이고 도덕적 기독교에서 윤리적으로 축소된 죄와 흡사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total depravity와 영적사망과 육적 사망을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다. 이는 일종의 죄의 구조화이다.


2. 이런 신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마치 신이 없는 것 처럼” 행동하는 사신신학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Althuiser의 You fathered me. 신의 세속화를 말하는 Harvey Cox나 Honest to God을 쓴 울리치의 John Robbinson 감독의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신학은 존재로의 용기를 신에 조준하기 보다 신이 없음을 전제하여야 인간의 실존적 결단 또는 세속적 삶의 긍정의 강도가 세어진다고 보는 관점이다.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니코스 카쟌차키스의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 거슬러 올라가 도스토에프스키의 <카라마죠프 형제>의 이반의 대심문관, 사르트르의 오해과 김은국의 <순교자>에 나오는 목사 등도 이런 반열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모두가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습 그 자체가 이미 구원을 배태하고 있다고 그린다. 그러나 구원은 그런 진지한 고민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감에 있다.


3. 정통신학은 계시에 입각한 유신론에서 출발한는 반면 틸리히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 특히 극도의 불합리하고 모순된 위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의미있게 하려는 갈등이 한계에 부딛친 상황, 즉 어쩌면 그것이 여전히 이성적 극복을 모색하기 때문에 오는 위기와 한계 상황에서부터 철학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신학이다. 결국 Tillich을 비롯해서 오늘날의 위기의 신학조차 위기 속에서 성경으로 돌아가기 보다 여전히 이 세상의 철학과 대화 또는 종합을 모색하고 변혁적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 체계에 귀속되어 문제의 해결을 제시하지 못하고 철학이며 대화에 그치고 만다. 이런 종교는 dialogue와 conversation을 말하고 conversion을 말하지 않는다.  궁극적 관심으로 표명된 신과 존재의 근원은 이름만 다를 뿐, 그 내용은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틸리히 신학은 마치 피카소의 그림을 보는 것과 같다고 평한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익숙한 것이 있어보이는 듯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신학과 특히 설교는 전통적인 용어들을 여전히 사용하지만 그것이 실존적 개념으로 바뀌어 있어서 피상적으로 들어 독자의 선이해의 틀 속에서 이해했을 때에는 여전히 매우 은혜롭게 들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특히 경계해야 한다.



************첨가


(XII) Cornelius Van Til (1985-1987)과 Herman Dooyeweerd (1894-1977)


Cornelius Van Til


(가) 배경

화란출생, 10세 이민, Calvin College와 Princeton 석사, B.D., Th. M. Ph. D. (철학의 최고)

전제주의의 신학자: 코넬리우스 반틸 (Cornelius Van Til 1895-1987)


요즈음 세계적으로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쟈크 데리다나 미셸 푸코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의 근대 학문과 특히 철학에 대한 극단적 비판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들은 철학과 학문이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 아니라 항상 정치 사회적 이념을 밑에 깔고 있음을 폭로했다. 이는 학문이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고 확증한다고 믿어온 상식에 파괴적 충격을 주기에 족한 것이었다. 나아가 객관성과 중립성을 담보하는 진리의 주체로 자처하며 문화위에 군림해온 학문의 자만심에 찬물을 끼얹고 근본적 반성을 촉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오래 전부터 철학과 학문이 중립적이지 않음을 주장해온 것은 기독교 사상가들이었다. 그것은 학문의 주체인 이성이 보통 생각처럼 독립적이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미 어거스틴이나 루터와 칼빈도 이성은 종교적 신념에 입각해서 만 기능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근래에 들어 와서는 화란의 헤르만 도예베르트, 미국의 코넬리우스 반틸, 그리고 이들의 사상을 대중화한 프란시스 쉐이퍼 같은 이들이 이 오랜 전통을 대표하는 철학자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은 근대사상과 학문의 종교적 성격을 드러내어 그 중립성 주장의 허구성을 비판하려 했기 때문에 지식과 권력의 불의한 관계를 폭로하려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들과는 의도에 있어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기서 소개하려는 반틸 (Cornelius Van Til 1895-1987)의 경우에도 근본의도가 철저히 복음적이요 변증적이었다.

        반틸은 미국 동부 필라델피아시 근교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변증학을 가르쳤던 금세기의 대표적인 개혁주의적 사상가이다. 그는 화란에서 미국으로 이민해 칼빈대학을 졸업한 후 오늘날도 미국내 최고의 철학부로 인정받는 프린스톤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마쳤고 프린스톤 신학교를 거쳐 장로교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반틸의 공로는 객관성과 과학적 중립성을 토대로 철학과 과학이 진리를 판정함에 있어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며 종교를 억누르던 시대에 학문도 하나의 종교, 즉 이성의 능력을 맹신하는 종교임을 밝힌 점이다. 근대 문화를 지배하는 철학과 과학이 종교적으로 중립이 아니며 따라서 객관적이지도 않음을 보인 것이다. 또 인본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기독교 신앙이 근거없는 편견이거나 고집이 아니며 오히려 더 이성적이며 합리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의도는 신앙을 옹호하고 나아가 복음의 능력으로 불신자를 도전할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려는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없다.

        이런 반틸의 변증학은 흔히 전제주의 (presuppositionalism)라고 불리운다. 그것은 그의 변증학이 비판하고자 하는 사상체계의 가장 핵심적 전제를 파악하여 그것의 모순됨을 드러내는 근본적 비판의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물론을 비판함에 있어 공산주의 국가의 경제적 빈곤이나 정치적 독재와 억압을 들어 비판하기 보다, 물질을 만유의 기본으로 내세우는 사상이 결국 어떤 모순과 문제점에 봉착할 수 밖에 없는지를 보이고 그와 비교해 기독교 신앙이 우월한 삶의 기초라는 점을 보이는 전략이다.

        한편 반틸은 성경이 계시하는 독특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하신 일에 대한 신앙고백을 자신의 제일되는 전제로 삼는다. 그는 칠판에 커다란 원 아래 또 하나의 조그마한 원을 그리고 둘 사이에 평행선을 그어 나누어 놓는 도식으로 자신의 근본 전제를 설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큰 원은 창조주 하나님을, 작은 것은 피조물 우주를, 그 중간에 그어진 선은 둘 사이의 절대적 차이를 강조하기 것이다.

        본질상 철저히 구분되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사이는 평등의 관계일 수 없다. 반틸은 그것이 당연히 유비(類比)의 관계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조물은 모든 면에서 창조주를 닮고 그의 법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모든 면에서 그를 따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해야 한다.

        만약 그 순종적 유비를 의도적으로 벗어난다면 그것이 곧 죄요 타락이다. 창세기 3장에서 보는 바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는 행동이 그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를 거절하고 독자적인 판단과 행동으로 나가는 자율선언의 결과이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 섬김을 거절하고 자신을 섬김을 삶의 목적으로 삼게된다.

        반틸은 타락한 인간에게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정면충돌"이라고 부르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 방법은 롬1:18-25의 죄인의 근본속성에 대한 바울의 진단에 기초해있다. 이 말씀에 따라 반틸은 인간 누구나 본성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신성에 대해 알고있다고 확신한다. 그 진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심성에 너무나 깊고도 분명히 박혀있어 그 어떠한 억지와 변명으로도 불신앙을 "핑계할 수 없다." (19절) 불신앙이란 단지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이요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짖누르는 것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가 아니라 억지이다. 

        따라서 이 억지를 꺽는 일에는 "정면충돌" 이상 유력한 방법이 없다고 보았다. 불신자에게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으나 역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자연의 위대한 창조를 말하고,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하고, 부활과 다른 기적의 사실성 증명할 수 있으나 결국 기독교인은 불신자를 향해서 어떤 형태로던 "회개하라"고 도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전통적인 변증이 추구하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합리적인 증거의 추구와 제시와 논증은 복음으로 사람을 회심시키기에 불충분하다. 불신앙의 억지스러운 고집으로 맹목이 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증거보다 회개를 촉구하는 일이 더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중립성의 부정이나 정면충돌 전략은 포스트모던 사상과 일면 비슷한 점이 없지않다. 포스트모니스트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중립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모든 진리주장에 대해 그것이 누구의 합리성에 근거한 것인지 따져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반틸은 종교적 중립은 가능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따라서 불신자와 어떤 사실의 진위를 논하고자 할 때, 판단의 기준 자체가 인본주의적인 사상이거나 성경적 원리 둘 중 하나일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불신자와의 대화에 있어 공통적으로 논의를 펼 중립적 기준을 상정하게 되면 그것 자체가 이미 성경적 진리가 타협없이 제시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홰손하는 것이라고 것이다.

        이런 반틸의 변증학이 불신앙의 논적들로 부터 독단이라고 비난을 받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전제주의는 기독교 내에서도 강성으로 인식되어있다. 그것은 그가 전제주의 비판을 불신사상 공격 뿐 아니라 신학 내적 논쟁에도 적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정통신학자 칼 바르트 뿐 아니라 심지어는 학문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친분을 나누었던 도예베르트나 쉐이퍼 까지도 엄격히 비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전적 비판가라는 강성의 이미지로 정평이 있다.

        그러나 필자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유학시절 그의 주저인 <변증학>을 번역하며 친숙해진 반틸은 정말 소박하고 따듯한 분이었다. 반틸은 한국

유학생을 특별히 좋아해서 자주 집에 부르곤 했다. 부인을 사별한 후라 밖에 나가 저녁을 사주곤 했는데 헤어질 때는 언제나 모든 방문객에게 서명한 자신의 책을 한아름씩 안겨주곤 했다. 한글판에 실으려고 사진을 찍으러 갔을 때 일이었다. 모든 책들을 기증했으나 그의 서가에는 유독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독어판 전집이 남아있었다. 그는 그 중 두권을 빼내어 양손에 들고는 자신은 이 공룡과 싸웠던 기사였노라며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는 것이었다.

        어쨌던 반틸은 과학에 의해 위축된 기독교를 옹호하고 자유신학에 의해 수세에 몰린 정통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싸웠던 투사였다. 그가 평생 교수로 있던 웨스트민스터는 장로교 신학의 중심이었던 프린스톤 신학교 마저 자유화하는 추세에 반발하여 독립한 학교였다. 반틸은 복음적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유신학과의 싸움의 선봉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이렇듯 그에게 붙은 강성적 이미지는 시대 형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편 그의 이러한 모습은 과거 어느 때에 못지 않는 치열한 믿음의 싸움을 해야할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 요즘 화제를 일으키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는 고작 학문의 객관성과 중립성의 신화를 깨트렸을 뿐이다. 그러나 반틸은 중립의 불가능성이 보다 더 깊은 종교적 차원에 뿌리밖고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사상과 학문이 하나님의 존재를 고백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를 대적해서 인간을 높이고 섬긴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바로 이 점에서 반틸은 기독교인이 세상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변치않는 비판의 정석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하겠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사상

돌아온 선교사: 레슬리 뉴비긴 (Lesslie Newbigin)


레슬리 뉴비긴은 글자 그대로 돌아온 선교사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잡지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가 작년 겨울 그를 다룬 특집기사의 제목À "우리에게 (즉 서양인들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선교사 (God's Missionary to us)" 라고 붙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그는 30세가 채 안된 청년 선교사로 영국을 떠나 인도에 갔고 거기서 거의 4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1974년 임무를 마치고 귀국했으나 그것은 결코 그가 생각했던 것 처럼 은퇴한 노인으로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번엔 영국, 아니 서구 전체를 위한 선교사로서 돌아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어쩌면 수년전 상연된 공상영화의 줄거리와 흡사하다. 오랜기간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났던 사람이 불시착을 하게 되었다. 지구로 생각했던 그곳은 기후조건만 비슷할 뿐 온통 원시적인 원숭이 세상이었다. 원숭이에게 잡혀 죽을 고생 끝에 탈출한 그는 도주 중 해변에서 파괴된 자유의 여신상의 잔해를 발견하고 경악하게 된다. 그곳은 바로 그가 우주에 있을 동안 일어난 핵전쟁으로 인해 바뀌어버린 뉴욕이었던 것이다.

        영국으로 돌아온 뉴비긴의 심정이 그랬을런지 모른다. 그는 젊어서 기독교 문화로 부터 복음의 사자로 이방 암흑의 세계로 나아갔었다. 그러나 노년이 되어 돌아온 고국의 모습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그는 거기서 기독교와 가장 멀어진 문화를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이미 이런 충격의 일부를 맛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인도의 거리에는 영국 젊은이들이 거지 구도자의 모습으로 동양의 "지혜"와 "구원"을 찾아 배회하는 믿기지 않는 장면을 더러 목격했던 적이 있었다. 

        뉴비긴은 은퇴후 육로를 통해 귀국한 이야기로 유명하다. 육십이 훨씬 넘은 노부부가 등짐과 가방 하나를 들고 인도에서 터키와 남부 유럽을 거쳐 긴여행을 했던 것이다. 이미 선교사로서 국제적 명사였던 이들의 안전을 우려한 인도정부는 예상되는 여행로 상의 모든 외교공관들에 접대명령을 했으나 그 누구도 이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들이 지방버스들을 갈아타고 민박에 토속음식을 먹으며 여행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이 여행에서 이들 부부는 한 때 소아시아의 기독교 중심지였던 갑바도기아에서 단 한명의 기독교인들도 찾을 수 없어 단둘이 텅빈 거대한 교회당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한 때 그토록 강했던 교회가 훗날 완전히 파괴될 수 있음을 뼈져리게 느꼈다고 했다.

        더우기 그 불길한 경험이 영국에서는 일상적으로 부딪쳐오기 시작했다. 돌아온 뉴비긴은 난생 처음으로 선교대학에서 강의하게 되었다. 그는 거기에서 전통적인 선교란 시대착오요, 심한 경우 인종적, 문화적 우월주의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서구교회는 활력을 잃고 희망마져 상실한 것을 보았다. 무엇보다 인도의 빈민굴에서 조차 소망은 살아있었건만 정작 문명세계엔 죽음 같은 절망이 그늘을 내리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이제껏 그가 만난 그 어떤 피선교지의 사람들 보다 복음에 대해 닫혀있고 냉소적이었다. 교회 지도자들도 복음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모든 선교지에서 뒤로 뒤로 물러나고 있음을 보았다. 사람들이 줄어드는 지역의 교회나 사회영역의  선교지는 너무도 쉽게 포기하는 정책이 그 증거였다.

        이런 비극의 근본 원인은 기독교의 기초인 성경적 세계관과 거기서 나오는 복음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이라고 뉴비긴은 진단한다. 문제의 직접적인 발단은 서구교회가 오래전 부터 이미 세속화되어 왔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종교 다원주의이고 상대주의적인 문화에 조차 적응한데 있었다. 

        뉴비긴은 인도의 한 사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다른 힌두교 신들과 나란히 모셔지고 있는 것을 본 경험을 이야기 한다. 매년 성탄절엔 특별한 제사가 예수의 초상 앞에서 드려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복음이 힌두교와 그 다신교적 문화에 흡수된 결과 이런 희한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뉴비긴은 서서히 자신도 그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고 고백한다. 서구인들도 흔히 예수를 그들의 문화에 맞추어 변질시켜 왔을 것이라는 자각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적 진리와 가치들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서구인들은 그들의 문화의 세계관을 안경삼아 기독교의 진리와 가치를  판단하고 있다. 그 결과 복음은 서구문화에 적응되어 본래적 빛과 힘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에 맞서 서구문화와 사회를 선교사의 눈으로 바라보는 특이한 저술가가 되었다. 뉴비긴은 결코 학자로 자처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은퇴할 때 까지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책을 쓴 적이 없었다. 그는 이방문화로 가득찬 선교지가 되어버린 "서구를 복음으로 도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밝히려고 썼던 소책자를 썼다. 이 책은 결국 프린스톤 신학교의 워필드 강연에서 보완되어 <헬라인들에게는 우매>라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후 <열린비밀: 선교신학의 스케치, 1979>, <끝나지 않은 논제: 자서전, 1985>, <희랍인에게 우매, 1986>, 그리고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책인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1989>과 그 외에도 3권의 책을 출판했다. 뉴비긴은 현재 88세며 노환으로 시력을 상실했으나 여전히 활발히 저술을 계속하고 있다. 또 그의 책들은 모두가 세계적 베스트셀러로서 선교사는 물론 우리 시대의 복음사역자들과 기독교 문화연구가의 필독서로 꼽힌다.  

        뉴비긴의 글은 매우 특이하다. 그것은 전통적인 학문적 논문은 아니다. 그러나 결코 가벼운 수필도 아니다. 그는 첨단 사상가들의 이론을 이 시대의 진단과 복음적 대안을 제시하는 일에 이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격적 지식>으로 유명한 마이클 폴라니나 <덕 (德) 이후>의 알라시데르 매킨타이어 같은 철학자들의 이론을 빌려 이성의 절대성이 불신되는 포스트모던 분위기 속에선 복음전도가 과거처럼 비이성적인 것이라는 비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도데체 누구의 합리성을 기준하여 비이성적이란 말인가 라고 되물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이 시대의 조류인 포스트모니즘의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를 오히려 전략적으로 이용하면서 역으로 복음의 세계관을 자신있게 제시하는 것이 학문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능함을 역설한다. 모든 사상이 궁극적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인 전제에 입각해있으므로 성경적 세계관이 기독교인들의 믿음과 삶의 전제라는 사실을 증거함에 위축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 점에 있어 그는 조금 앞서 흡사한 주장을 했던 화란의 도예베르트나 미국의 반틸과 프란시스 쉐퍼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그는 모든 진리와 가치는 물론 절대적이어야 할 종교조차 상대화하고 다원화 되어버린 서구문화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취할 바른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이는데 주력한다. 특히 다양성을 신봉하는 현재의 문화적 추세에 따라 선교 대신 종교간의 대화를 주장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라고 힘주어 경고한다.               그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병폐는 복음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이라고 주장한다. 즉 "나는 어쩌다 보니 기독교인으로 태어났으니 이렇지만, 당신이 성경을 믿으리라고 생각도 않고, 그럴 필요가 없을지 모르나..." 라는 식으로 말하며 서로의 믿음에 대해 대화나 나누자고 하는 소심증이 그가 가장 경악해 마지않는 자세이다.

        현재 런던의 조그만 거처에서 살고있는 그는 늘 그래왔듯이 자신이 세계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그런 사람이다. 지금도 그는 인도에서 처럼 평범한 선교사로서의 또 다른 사역을 감당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사에 겸허한 그이지만 복음의 절대성에 대해서는 그만큼 강경한 사람도 없다.

        그는 성경적 세계관의 회복을 단순하고 분명한 어조로 역설한다. 그리고 오늘날 처럼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절실하게 필요하는 때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단순한 복음의 진리를 서구인들에게 다시금 들려주기 위해 이 노후의 선교사를 돌아오게 하신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도 레슬리 뉴비긴의 삶과 글이 가진 교훈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90년대에 들어 교회성장이 정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 세속화와 종교 다원주의, 상대주의등 오늘날의 문화의 영향이 흔히 거론되고 있다. 우리는 결코 서구교회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뉴비긴의 교훈은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로 보냈던 선교사를 돌아와 한국 땅에 복음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원주의 신학의 개척자: 데이빗 트레이시 (David Tracy)


1983년 5월 독일 튜빙겐 대학에서는 미래에 신학이 어떤 모습으로 바뀔 것인가를 논의하는 대규모 국제 학술대회가 열렸었다. 거기에는 세계적인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나 죤 콥스, 남미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 미국의 문화신학자 랭던 길키 이외에도 위르겐 하버마스와 폴 리꾀르 같은 철학과 인문사회학의 세계적인 대가들이 70명이나 대거 참여한 바 있다.

        데이빗 트레이시는 이 모임을 세계적인 신학자 한스 큉과 함께 주관했을 할 정도의 유명인사이지만 우리에겐 아직까지도 생소한 사람이다. 그는 다원주의 신학의 개척자: 데이빗 트레이시 (David Tracy)


1983년 5월 독일 튜빙겐 대학에서는 미래에 신학이 어떤 모습으로 바뀔 것인가를 논의하는 대규모 국제 학술대회가 열렸었다. 거기에는 세계적인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나 죤 콥스, 남미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 미국의 문화신학자 랭던 길키 이외에도 위르겐 하버마스와 폴 리꾀르 같은 철학과 인문사회학의 세계적인 대가들이 70명이나 대거 참여한 바 있다.

        데이빗 트레이시는 이 모임을 세계적인 신학자 한스 큉과 함께 주관했을 할 정도의 유명인사이지만 우리에겐 아직까지도 생소한 사람이다. 그는 카토릭 사제로서 마침 한스 큉이 교황무오설을 비판하다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에 유사한 문제로 교황청의 조사를 받은 인연이 있다. 그만큼 그의 입장은 카토릭 내에서 조차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현재 미국 시카고 대학의 신학부에서 철학적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심포지움 주제강연은 오늘날의 다원주의 문화 속에서 신학이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다원주의 상황에 대한 그의 관심은 매우 오래되고 줄기찬 것이다. 1975년 이래 출판된 그의 모든 책들의 제목에서 "다원성"이란 단어가 빠짐없이 등장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다원주의는 근대 서구문화의 기초인 이성의 객관성과 통일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상대성과 다양성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일어나면서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문화적 추세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진리추구를 생명으로 여겨온 서구 학문에 치명적인 위기를 몰고왔다.     

        트레이시는 물론 참석자 대부분이 신학도 이 위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느낀다. 더우기 교파적 다양성을 피할 수 없는 신학은 자칫 학문이 아닌 독단으로 비치기 쉽상이다. 그러나 획일적으로 통일된 신학이란 불가능하게 보인다. 이처럼 다양성과 통일성 사이의 긴장은 신학에서 더욱 심각하다. 신학이 학문으로 존속하려면 이 문제의 해결이 중요하다는 것이 트레이시와 참석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과연 "모든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 신학에 근본적 일치점이 존재하는가?" 첫발제자인 큉은 교회역사는 교리상 차이들이 오히려 공통점 모색을 가능케 한 기초였음을 증거한다고 주장했다. 즉 신학의 공통성은 차이들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때문에 모색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레이시는 한걸음 나아가 그것을 가능케 할 다원주의 신학을 제시하려 했다. 큉이 문제를 역사적으로 분석하여 해결 가능성을 논했다면  트레이시는 철학적 작업을 통해서 실제로 해법을 내놓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제시한 해법의 욧점은 다원주의 상황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아온 시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트레이시는 늘 다원성이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는 점을 부각시키기를 애써왔다. 즉 다원성은 모두를 풍요케할 가능성의 보고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넓게는 종교 다원주의 상황과 특히 기독교 교파의 다양성이라는 현실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나아가 다원주의 신학으로 그 다양성을 오히려 보강하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트레이시는 다원주의 시대에서도 신학은 여전히 학문적 위상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학이 교파에 따라 분열된 독단들로 비친다면 기독교 옹호에 유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만일 신학 같이 분열되기 쉬운 학문이 다원성과 공통성를 모두 유지할 방법적 모범을 보일 수 있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학문적 위기를 극복함에 큰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그는 이를 위해서 다원성과 신학의 공통적 학문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묘안의 발견을 그의 평생의 과제로 삼고있다. 

        이 이중적 기획의 윤곽은 이미 1975년에 출판한 첫저서인 <질서를 위한 복된 열정>에서 제시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다원주의 상황에서는 정통신학, 자유신학, 신정통주의, 급진주의 대신 "수정주의"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수정주의는 근대적 신학의 획일성을 배격하고 다원주의를 기조로 한다. 다원성은 이처럼 교파와 신학방법의 다양성 뿐 아니라 타 종교나 세속적 사상까지도 적절히 이해할 수 있는 넓은 창문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저서인 <유비적 상상>에서는 다원주의적 문화속에서 조직신학이 해야할 일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교회를 위해 기독교 전통을 재해석하는 일이다. 이어서 <다원성과 애매성>, <타자와의 대화>등의 비교적 근작에서는 기독교 밖의 사회나 타종교와의 관계를 풀어갈 신앙의 실천과 선교의 방법은 대화라고 주장한다.

        결국 트레이시는 다원주의 신학을 통해서 기독교 내의 모든 교파적 대립을 뛰어넘는 에큐메니즘을 추구하고, 나아가 타종교나 세속사상과 기독교의 대립구도 까지도 넘어설 보편적인 학문과 실천의 체계를 지향한다. 그래서 자신의 신학이 과거의 협소한 틀을 벗어나 공적인 성격을 획득했다는 의미로 "공공신학 (公共神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트레이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공공신학이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납득될 수 있는 기독교를 만들어 보려던 과거의 자유주의 신학의 의도를 계승한 새로운 자유주의 신학 또는 "후기 자유주의" 신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트레이시의 신학은 매사에 지나치게 혼합적 성향을 갖고있다. 그가 다원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것은 알고보면 최신 철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혼합성은 왠만한 다원주의 철학을 훨씬 넘어선다. 우선 이론적 기초의 면에서 보더라도 잡탕이라는 인식을 피하기 어렵다.

        그는 현재 신학에 큰 영향을 미치는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의 해석학을 기본적 입장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과 대립적 논쟁관계에 있는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데리다의 해체주의, 푸코의 계보학 등은 물론이고 그외에도 주요 문학이론등 모든 철학과 인문사회학의 유력한 이론들을 종합하려고 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도 다원성에 대한 트레이시의 편애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종합하려는 이론들도 오랜 상호 토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립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다원주의의 한계를 보여준다. 아울러 다원주의에는 긍정적 요소 만큼 부정적 요소도 있음을 무시해서는 곤란하다. 또 만의 하나 다원주의도 하나의 독단적 전제일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로 다원성에 대한 편애는 자칫 상대주의로 떨어질 위험이 높다. 오늘날의 상황이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원주의적임을 인정하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신학을 하려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상황이 그러니 신학도 다원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그것은 이 시대의 위기를 가져온 상대주의를 극복하는 길이 아니라 도리어 정복당하는 첩경이다. 사실상 트레이시는 다원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극복하려 했으나 오히려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는 인상이 짙다.

        그 한가지 증거로서 트레이시는 성경을 불경이나 코오란, 또는 플라톤의 철학작품과 같이 하나의 고전임을 인정하고 객관적 비교를 통해서 그 진리됨을 증거하고자 한다. 만약 그런 방식으로 성경이 다른 고전들 보다 오늘날의 상황에 대해 적절함을 입증한다면 독단이라는 오해를 피하면서 보다 효과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레이시가 성경을 고전과 크게 구별하지 않는 것은 성경과 더불어 자연인의 이성을 통한 진리 발견의 가능성을 말하는 자연신학과 교회의 전통의 권위를 중시하는 카토릭 신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성경 만을 성경 해석과 신학의 기준을 삼는 종교개혁의 기본원리에 정면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다.

        또 그의 전략은  기독교의 진리를 다른 신앙과 차별적으로 제시하는 일에 있어서는 도움이 되기 보다 분명히 저해요인으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성경이 다른 고전보다 우월함을 어떤 기준에서 입증할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즉 성경의 상대적 우월성이 과연 불경이나 세속적 철학의 입지나 객관주의 과학의 견지에 서있는 사람에게 증명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렇게 우월성이 입증된 기독교 신앙은 성경과 역사적 기독교의 전통에 부합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문화와 학문, 그리고 종교의 보편적 인간경험에 의해 공인된 기독교란 결국 문화의 기준에 적응한 기독교가 되기 쉽상이다. 그것은 문화의 산물이 되버려 초월성은 물론 문화를 비판할 예언자적 계기도 상실하고 만다.

        따라서 오늘날의 변화한 상황을 직시하고 그에 적합한 기독교 사상을 제시하려는 트레이시의 계획이 바로 서려면 무엇보다도 성경 만이 기독교 사상과 신학의 규범이라는 점을 확립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럴 때에 비로서 트레이시가 그렇게 했던 것 처럼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이나 그가 수용한 다른 철학의 원리들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대신 성경의 렌즈를 통하여 철학의 이론들과 자신의 신앙전통을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관점이 생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카토릭 사제로서 마침 한스 큉이 교황무오설을 비판하다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에 유사한 문제로 교황청의 조사를 받은 인연이 있다. 그만큼 그의 입장은 카토릭 내에서 조차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현재 미국 시카고 대학의 신학부에서 철학적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심포지움 주제강연은 오늘날의 다원주의 문화 속에서 신학이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다원주의 상황에 대한 그의 관심은 매우 오래되고 줄기찬 것이다. 1975년 이래 출판된 그의 모든 책들의 제목에서 "다원성"이란 단어가 빠짐없이 등장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다원주의는 근대 서구문화의 기초인 이성의 객관성과 통일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상대성과 다양성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일어나면서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문화적 추세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진리추구를 생명으로 여겨온 서구 학문에 치명적인 위기를 몰고왔다.     

        트레이시는 물론 참석자 대부분이 신학도 이 위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느낀다. 더우기 교파적 다양성을 피할 수 없는 신학은 자칫 학문이 아닌 독단으로 비치기 쉽상이다. 그러나 획일적으로 통일된 신학이란 불가능하게 보인다. 이처럼 다양성과 통일성 사이의 긴장은 신학에서 더욱 심각하다. 신학이 학문으로 존속하려면 이 문제의 해결이 중요하다는 것이 트레이시와 참석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과연 "모든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 신학에 근본적 일치점이 존재하는가?" 첫발제자인 큉은 교회역사는 교리상 차이들이 오히려 공통점 모색을 가능케 한 기초였음을 증거한다고 주장했다. 즉 신학의 공통성은 차이들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때문에 모색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레이시는 한걸음 나아가 그것을 가능케 할 다원주의 신학을 제시하려 했다. 큉이 문제를 역사적으로 분석하여 해결 가능성을 논했다면  트레이시는 철학적 작업을 통해서 실제로 해법을 내놓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제시한 해법의 욧점은 다원주의 상황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아온 시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트레이시는 늘 다원성이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는 점을 부각시키기를 애써왔다. 즉 다원성은 모두를 풍요케할 가능성의 보고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넓게는 종교 다원주의 상황과 특히 기독교 교파의 다양성이라는 현실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나아가 다원주의 신학으로 그 다양성을 오히려 보강하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트레이시는 다원주의 시대에서도 신학은 여전히 학문적 위상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학이 교파에 따라 분열된 독단들로 비친다면 기독교 옹호에 유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만일 신학 같이 분열되기 쉬운 학문이 다원성과 공통성를 모두 유지할 방법적 모범을 보일 수 있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학문적 위기를 극복함에 큰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그는 이를 위해서 다원성과 신학의 공통적 학문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묘안의 발견을 그의 평생의 과제로 삼고있다. 

        이 이중적 기획의 윤곽은 이미 1975년에 출판한 첫저서인 <질서를 위한 복된 열정>에서 제시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다원주의 상황에서는 정통신학, 자유신학, 신정통주의, 급진주의 대신 "수정주의"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수정주의는 근대적 신학의 획일성을 배격하고 다원주의를 기조로 한다. 다원성은 이처럼 교파와 신학방법의 다양성 뿐 아니라 타 종교나 세속적 사상까지도 적절히 이해할 수 있는 넓은 창문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저서인 <유비적 상상>에서는 다원주의적 문화속에서 조직신학이 해야할 일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교회를 위해 기독교 전통을 재해석하는 일이다. 이어서 <다원성과 애매성>, <타자와의 대화>등의 비교적 근작에서는 기독교 밖의 사회나 타종교와의 관계를 풀어갈 신앙의 실천과 선교의 방법은 대화라고 주장한다.

        결국 트레이시는 다원주의 신학을 통해서 기독교 내의 모든 교파적 대립을 뛰어넘는 에큐메니즘을 추구하고, 나아가 타종교나 세속사상과 기독교의 대립구도 까지도 넘어설 보편적인 학문과 실천의 체계를 지향한다. 그래서 자신의 신학이 과거의 협소한 틀을 벗어나 공적인 성격을 획득했다는 의미로 "공공신학 (公共神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트레이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공공신학이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납득될 수 있는 기독교를 만들어 보려던 과거의 자유주의 신학의 의도를 계승한 새로운 자유주의 신학 또는 "후기 자유주의" 신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트레이시의 신학은 매사에 지나치게 혼합적 성향을 갖고있다. 그가 다원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것은 알고보면 최신 철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혼합성은 왠만한 다원주의 철학을 훨씬 넘어선다. 우선 이론적 기초의 면에서 보더라도 잡탕이라는 인식을 피하기 어렵다.

        그는 현재 신학에 큰 영향을 미치는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의 해석학을 기본적 입장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과 대립적 논쟁관계에 있는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데리다의 해체주의, 푸코의 계보학 등은 물론이고 그외에도 주요 문학이론등 모든 철학과 인문사회학의 유력한 이론들을 종합하려고 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도 다원성에 대한 트레이시의 편애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종합하려는 이론들도 오랜 상호 토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립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다원주의의 한계를 보여준다. 아울러 다원주의에는 긍정적 요소 만큼 부정적 요소도 있음을 무시해서는 곤란하다. 또 만의 하나 다원주의도 하나의 독단적 전제일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로 다원성에 대한 편애는 자칫 상대주의로 떨어질 위험이 높다. 오늘날의 상황이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원주의적임을 인정하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신학을 하려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상황이 그러니 신학도 다원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그것은 이 시대의 위기를 가져온 상대주의를 극복하는 길이 아니라 도리어 정복당하는 첩경이다. 사실상 트레이시는 다원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극복하려 했으나 오히려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는 인상이 짙다.

        그 한가지 증거로서 트레이시는 성경을 불경이나 코오란, 또는 플라톤의 철학작품과 같이 하나의 고전임을 인정하고 객관적 비교를 통해서 그 진리됨을 증거하고자 한다. 만약 그런 방식으로 성경이 다른 고전들 보다 오늘날의 상황에 대해 적절함을 입증한다면 독단이라는 오해를 피하면서 보다 효과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레이시가 성경을 고전과 크게 구별하지 않는 것은 성경과 더불어 자연인의 이성을 통한 진리 발견의 가능성을 말하는 자연신학과 교회의 전통의 권위를 중시하는 카토릭 신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성경 만을 성경 해석과 신학의 기준을 삼는 종교개혁의 기본원리에 정면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다.

        또 그의 전략은  기독교의 진리를 다른 신앙과 차별적으로 제시하는 일에 있어서는 도움이 되기 보다 분명히 저해요인으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성경이 다른 고전보다 우월함을 어떤 기준에서 입증할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즉 성경의 상대적 우월성이 과연 불경이나 세속적 철학의 입지나 객관주의 과학의 견지에 서있는 사람에게 증명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렇게 우월성이 입증된 기독교 신앙은 성경과 역사적 기독교의 전통에 부합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문화와 학문, 그리고 종교의 보편적 인간경험에 의해 공인된 기독교란 결국 문화의 기준에 적응한 기독교가 되기 쉽상이다. 그것은 문화의 산물이 되버려 초월성은 물론 문화를 비판할 예언자적 계기도 상실하고 만다.

        따라서 오늘날의 변화한 상황을 직시하고 그에 적합한 기독교 사상을 제시하려는 트레이시의 계획이 바로 서려면 무엇보다도 성경 만이 기독교 사상과 신학의 규범이라는 점을 확립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럴 때에 비로서 트레이시가 그렇게 했던 것 처럼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이나 그가 수용한 다른 철학의 원리들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대신 성경의 렌즈를 통하여 철학의 이론들과 자신의 신앙전통을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관점이 생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David Tracy의 신학적 해석학


트레이시의 학문적 노력은 첫째로 오늘날 서구사회와 문화의 전반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다원주의적 분위기를 그 기본적 밑그림으로 하고 있다. 그의 신학적 노력은 특히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과 신학적 다원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틀 위에서 그 현상들의 실체를 규명하고 또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트레이시는 오늘날 다른 서구의 여러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흔히 포스트모던적 상황이라 불리우는 크게 변화한 사회와 문화속에서 신학의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고 이 시대의 도전을 대응하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새로운 신학적 모델을 찾고자 하는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다원주의적 상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트레이시는 결코 상대주의적 결과의 위험성을 간과하지 않고 그에 대한 깊이있는 대안을 모색하려는 면에서도 이 시대의 다른 여러 철학자를 비롯한 학자들과 그 맥을 같이한다. 그는 거듭해서 신학자로서의 자신의 노력이 일반 학문세계의 연구자들과 그 기반을 같이하는 공통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가 한편 다원주의 상황을 반기고 나아가 그것을 옹호하려는 자세에서 그치지 않고 모든 신학자들이 공동적으로 일치할 수 있는 학문적 방법과 기준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려 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그 스스로가 택한 "수정주의자 (revisionist)"라는 이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 명칭은 그가 한편으로 근대적 전통인 획일적 정통신학을 배격하면서 신학적 다원주의를 환영함과 동시에 그것을 폐기하기 원하기 보다 오늘의 변화된 현실의 필요에 따라 재해석함으로서 신학이 다시금 의미있는 무엇이 되도록 하려는 시도를 잘 보여준다. 그는 특히 자신의 수정주의 모델을 정통신학, 자유신학 (신신학), 신정통신학, 그리고 급진신학과 구별함으로 그 의도를 더욱 분명히 하고있다.

        


폴 리쾨르 (Paul Ricoeur, 1913- ) 종합과 화해의 철학자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 (Paul Ricoeur)는 현대철학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해석학의 대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특히 프랑스 철학자 가운데서는 매우 보기드문 개신교 기독교인이다. 프랑스는 근래에 들어 가장 극단적 형태의 반기독교적 사상인 포스트모니즘의 온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신앙인임을 밝힐 뿐 아니라 실제로 성경적 주제들에서 철학의 기초를 취하여 발전시키려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오히려 기이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기독교적 진리를 현재적 상황과 직결되는 철학적 논의에 포함시키려는 리쾨르의 평생에 걸친 노력은 1986년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에딘버러의 기포드 강연과 그 강연 내용을 출판한 <타인으로서 자신, Oneself as Another>이라는 논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기포드 강연은 자연신학을 주제로 매년 세계적인 학자중 한명을 강사로 초빙하는 역사깊은 강좌로서 신학과 철학의 노벨상으로 비교되기도 하는 명예로운 강연이다.

        이토록 세계적인 학자로 우뚝 선 리쾨르의 생애 전반부는 비극의 연속이었다. 그는 1913년 프랑스 동남부 발렌스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의 출생 직후 사망했고 영어교사였던 부친은 그가 두살때인 1915년 1차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전사했다. 조부모와 고모의 손에 자란 그는 수업에 임하기 앞서 교재를 완전히 독파하는 뛰어난 학생이었지만 막상 명문 고등사범학교 입학시험에는 낙방하여 그의 말처럼 평생 잊을 수 없는 좌절을 겪었다. 소르본느 대학에 진학하여 철학을 전공하고 철학교사 자격을 획득하였으나 마침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징집되어 장교로 싸우던 중 포로가 되어 종전후 석방될 때 까지 수용소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 독일 포로 수용소에서 훗셀을 연구하여 그의 첫 작품인 <의지의 철학>을 구상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할 정도로 고난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리쾨르는 이런 사정으로 인해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1950년 즉 40세가 가까워서야 철학박사 학위를 마치게 된다. 이처럼 그는 어려운 삶의 조건을 이기며 성실한 연구로서 자신의 명성을 바닥에서 부터 쌓아온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결국 다소 늦게나마 철학계의 거목으로 떠올라 모교 소르본느 대학의 교수를 지냈고 그 후에는 파리 10대학의 책임자로 있다가 은퇴했다.

        그는 또 1970년 이래 폴 틸리히가 맡았던 자리를 이어받아 매년 정기적으로 미국 중부의 명문 시카고 대학에서 강의하여 미국의 철학계와 신학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시카고 대학은 이미 앞선 글에서 소개한 포스트모던적 해석학 신학자 데이빗 트레이시를 비롯해서 창조와 문화의 신학자로 유명한 랭던 길키와 세계적인 종교학자 미르세아 일리아데등이 교수로 있어 리쾨르는 그곳에서의 강의를 기회로 하여 이들과 함께 신학과 종교연구에 동참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리쾨르 자신은 결코 전통적인 의미의 신학자이거나 변증학자 또는 철학적 신학자도 아니다. 또 그의 학문적 방법론 역시 신학적이지 않다. 그는 가브리엘 마르셀이나 에드문드 훗셀 같은 프랑스와 독일의 주요 현대철학에 대한 연구로 부터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과 문학비평, 그리고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해석학을 거쳐 마침내는 사회과학에로 나아가 문화와 정치, 사회에 이르기 까지 그의 저술은 인문사회학 전분야에 걸쳐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쾨르는 자신의 철학적 작업에 있어 성경적 주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서 의식적으로 종교를 멀리하려는 현대철학의 방향을 역행하는 매우 특이한 철학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개신교적 성장배경으로 인해 고교시절 철학에 입문할 당시부터 이미 신앙과 이성 관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또 하나님에 대한 전적 의존, 죄의식, 그리고 속죄의 개념이 자신의 철학에 있어 중요한 역활을 했다고 말한다. 더우기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보다 앞설 뿐 아니라 죄악보다 심오하고 보다 강력한 힘이 담겨있다고 확신하는 점 등은 이 시대의 어떤 철학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분명한 기독교적 면모를 드러낸다.

        리쾨르 철학의 기독교적 요소는 <악의 상징론>, <은유의 법칙>, <시간과 담론>등의 거의 모든 작품들에서 드러난다. 특히 <타락할 수 있는 인간>에서 드러난 악과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그의 관심은 서양철학자들이 거의 다루지 않는 매우 독특한 주제이다. 파스칼의 영향을 보여주는 이 책은 인간의 타락가능성이 드러나는 악의 모습을 창세기 3장에 나타난 타락의 기록을 통해 분석한 것이다. 리쾨르는 악이 인간의 본성 깊이 뿌리밖고 있는 현실을 분명히 인식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비관에 빠지지 않는데 그것은 그가 악을 극복하는 구속의 능력을 확신하기 때문이라고도 고백한다. 

        그러나 리쾨르는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앙인에겐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면도 적지않다. 특히 다른 철학적 논의와 마찬가지로 죄와 악에 대한 설명도 지극히 추상적이며 철학적이다. 예를 들어 그는 인간의 연약성 즉 죄와 도덕적 악으로 떨어질 가능성에 대해 인간에게 주어진 시험이라는 단순한 말보다는 유한성과 무한성의 양극 사이의 균형 상실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또 인간의 타락가능성을 구약의 기록속에서 드러난 종교적 상징속에 나타나고 있는지를 밝히는 과정도 극히 복잡한 철학적인 논의를 통해 전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많은 노력을 기울인 니체와 프로이드 같은 극단적인 무신론적 사상가들에 대한 비판을 예로 보더라도 전통적인 변증적 신학자는 아님이 분명해진다. 그는 처음부터 니체나 프로이드의 기독교 비판을 부정적으로 조목별로 반박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이들의 무신론이 종교를 파괴하는 부정적인 면이 있으나 아울러 이 시대의 참다운 신앙을 위한 터전을 닦는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오히려 우리들의 잘못된 종교적 자세를 고쳐야 참다운 변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상인 리쾨르의 이런 자세는 어쩌면 영국의 신학자 앤토니 씨슬톤의 지적처럼 오늘날 기독교가 직면한 새로운 위협인 포스트모던 사상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대응일지도 모른다. 씨슬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이제껏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파괴적 위협이 되고있음을 지적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니체나 프로이드를 따라서 모든 진리란 결국 보편성이 결여된 하나의 의견이요 나아가 권력을 탐하고 남을 지배하려는 구실에 불과하므로 마땅히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들은 바 복음을 의심없이 믿는 자세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모든 진리주장 이면의 숨은 의도에 대한 의심을 부추기는 이 새로운 도전은 로마의 박해나 진화론을 위시한 과학과 철학의 위협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라는 주장이다.

        아마도 리쾨르는 이 시대의 기독교가 직면한 이러한 위협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과학정신 보다 오히려 오늘날 점차 서구사상의 주류를 장악해가는 포스트모던 사상을 주된 적으로 생각하고 이들의 원조격인 니체와 프로이드의 사상을 비판했다 할 수 있다. 리쾨르가 이들을 대항해서 내세운 전략은 그들의 의심과 비판의 원리 대신 신뢰를 이해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일이다. 그는 인간의 삶에 있어 신뢰가 의심이나 비판보다 더 근본적 바탕임을 주장한다. 즉 믿기위해서 뿐 만이 아니라 의심이나 비판을 위해서는 먼저 이해해야 만 한는데 이해는 신뢰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논박하고 있다.

        또 그런 맥락에서 그는 실제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들의 극단적 공격에도 귀를 귀울이는 자세를 실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논적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을 가지는 자세야 말로 오늘날 무차별한 비판과 의심을 부추기는 사상에 가장 적절한 대응이라는 생각이다. 이렇듯 그는 의심과 비판이 가득한 세계 속에서 신뢰를 되찾기 위한 철학을 정초하고자 노력한 사람이다.

        리쾨르는 이러한 정신은 서로 상반되거나 논쟁적 관계에 있는 이론과 학문의 분야들을 종합하려는 그의 철학적 노력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그는 철학에 신학을 접목하려 했을 뿐 아니라 무신론적이고 반기독교적인 프로이드의 심리분석 방법도 채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또 가다머와 하버마스의 해석학 논쟁과 같은 대표적인 대립적 이론의 중재적 입장을 개발하는 등 여러 철학 이론을 절충하여 종합하는 독특한 방법론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리쾨르는 현대의 거의 모든 학문의 영역들을 섭렵하여 그 내용들을 자신의 철학에 종합하고 있다. 물론 이런 그의 관심이 철학적 해석학과 성경해석학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데 미치지 않았을리가 없다.

        그러나 한편 깊고도 넓은 그의 학문적 자세는 찬사와 함께 절충주의에 대한 적지않은 비판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볼 때, 그가 철학자들이 도외시하는 성경의 주제들을 철학의 중심에 끌어들인 것은 칭찬할만 하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기독교의 입장에 서서 희랍철학을 수용하려는 점에서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비슷한 면이 있다. 또 우리는 아퀴나스의 종합적 신학의 문제점을 통해서 희랍정신과 성경이 절충될 때에 생기는 어려움을 익히 알고있다. 그러므로 만일 누가 리쾨르로 부터 신앙과 신학에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그가 철학적으로 관심과 방법으로 타락이나 악과 같은 성경의 주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혹시 복음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나마 가리워지거나 다른 사상과 혼합되어 왜곡되지나 않는지는 세심히 살펴보아야 함을 반드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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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Aquinas (1224/5-1274)" by Jan A. Aertsen


8세기 말로 9세기 초 Carolingian 시대에 오면 중세의 소위 "암흑시대"를 지나 중흥이 싹트기 시작한다. 여기에 이성적 원리를 교회생활 속에 정착시킴으로서 샬레망의 문화정치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 알퀸 (Alcuin 730-804)의 공이 크다. 그러나 본격적인 이성론적 기독교의 발달은 서구가 고대의 철학적 이성에 의해 전격적으로 도전을 받은 13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양상을 띄며 활달해졌다.

        (1) 대학과 스콜라주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소년기에 몬테카시노 (Monte Cassino)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맡겨진 이후 Naples의 대학에 입학하고 후일 가족들의 바램과 달리 새로 생긴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는 Cologne과 당시에 최고의 기독교 학문 중심지인 Paris에서 수학하고 59년 이후 이탈리아에서 가르치다 69년 파리에 와 가르친 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 74년 49세로 죽음.

        그의 삶에는 처음 형성된 대학이 큰 역활을 하였다. 1200년대는  볼로나, 파리, 옥스포드의 대학이 생기던 시대로  대학은 당시 산업이나 상업처럼 길드를 이루어 magistrorum et scholarium의 결합으로 universitas (본래 대학에 국한되기 보다 집단의 공동적 명칭이었다) 를 이루었다. 이는 학문도 하나의 직업화 함을 보여준다. Alexander of Roes (c. 1280)의 지적처럼 당시는 sacerdotium, imperium, studium의 세기관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대학이 교회와 왕궁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대학의 교육은 magister의 두가지 역활, 즉 講讀과 爭論 (legere et disputare)으로서 강독에는 정관(statutes)에 따라 정해진 권위적 텍스트 (auctoritates)를 읽고 설명하는 것이어서 자연히 "주석"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논쟁은 주석적 읽음에서 자연히 수반되는 질문들을 다룸에서 발전하였다. 권위적 문헌으로 부터 야기된 논쟁과 반론의 변증법은 생각이 가능한 모든 선택여지를 재는 일에 있어 근본적 개방성과 하나의 조직적 해결에 도달하기 위한 시도 속에 그 한계까지 밀어붙여진 이성의 엄밀한 적용 둘다를 요구하였다. 여기에서 schoolmaster or 'of school'을 뜻하는 scholasticus로 부터 중세철학과 거의 동의어라 할 수 있는 scholasticism이 유래하였다.

        (2) 인문학부: 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facultas artium (faculty of arts)는 중세대학의 4개 학부중 하나로서 오늘날 (영어권의) 문학사, 석사에 해당하며 신학, 법학, 의학부의 예비단계로서 어거스틴의 De doctrina christiana에서 결정해놓은 세속적 지식의 전부를 포괄하는 전통적 체계를 가리킨다. De doctrina christiana는 성경연구에 중점을 둔 "기독교 학문체계" (Christian scholarship)에 인문학부가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본적 사상으로 하고있으며 13세기까지도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 책의 정신은 과학은 그 자체가 목적을 가지고 있을 수 없고 그 의미와 연계 (meaning and coherence)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연관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가면서 인문학부는 점차 "서구에 아리스토텔레스 전체가 소개 (the introduction of the complete Aristotle in the West)"라 불리우는 중대사건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맞게된다. 이 때까지 만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저술만이 알려져 있었으나 12세기 중반에 Physica, De anima, Metaphysica, Ethica가 번역되었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아리스토텔레스 (the Stagirite)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희랍 주석서들 방대한 희랍-아라비안 문헌이 도입되었고 신플라톤주의 문헌과 심지어는 유대인 사상가들의 문헌도 라틴어로 번역 소개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시대에는 다양한 영역들에서 고대문화로 부터의 방대한 내용들이 채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많은 이들은 이 비기독교적인 고전문화와 중세문화 사이의 대립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 좋은 예로 Absalo of St. Victors는 "그리스도의 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이 지배하는 곳에선 지배하지 않는다" (The spirit of Christ does not rule where the spirit of Aristotle reigns)라고 했다. 고대문화를 채용함과 배격의 두 입장은 결코 온전히 조화되지 못한채 양극으로 남아있었다.

        이것은 1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강독에 교회가 크게 반발하여 1210년에는 막 설립된 파리대학에서 그의 자연철학 저술의 강독은 파문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수수께끼처럼 그의 강독은 번져나갔고 1255년 결국 공식적으로 허용되어 이제는 반드시 대학 학과목에 그의 저술에 대한 강독이 들어있어야 했었다. 이렇게 해서 인문학부 (facultas aritum)은 사실상 철학부가 되었고 모든 학생들을 위한 예비단계였던 인문학부는 이교적 철학에 푹젖게 되었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부르듯 "그 철학자" (the Philosopher)가 되어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견해를 받아들임은 실재에 대한 전통적 견해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요, Ferdinand Sassen의 말처럼 "중세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속에서 자신에 대해서와 그들이 가진 자연적 능력들에 대해 의식하게 되었다." 

        (3)신학부: 성경학과 수도회: 신학부 교수도 역시 강독과 논쟁을 중심으로 가르쳤으나 여기서 주된 권위적 문헌은 물론 성경이고 그 강독이 중심과제였다. 13세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중흥 뿐 아니라 성경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이 일어난 시대였다. 스콜라적 방법이 성경연구에 확대된 결과 그 연구도 학문의 일부가 되어 아퀴나스의 Summa theologiae에서 처럼 최초로 조직화되어 theo-logy로 발전되었다. 13세기의 수도원의 새로운 발전은 후랜시스와 도미니칸 수도회의 신학발전으로 1250이후 대부분의 주요 신학자는 수도승이었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이전의 수도회와 달리 도시적 분위기에 적대적이지 않고 설교와 선교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활동의 관점에서 학문연구에 강조를 두게된다. 도미니칸은 ordo studentium이라 할 만큼 수도원 생활의 핵심적 일부로서 연구를 둔 첫 수도회였다. 이 수도회가 당시 세워지던 유럽의 대학들에서 주요 교수직을 차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4) 아리스토텔레스: "만인은 본능적으로 앎을 원한다."

이시대 대학의 좌표를 정한 原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일 것이다. "만인은 본능적으로 앎을 원한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들이 감각에서 취하는 기쁨을 들 수 있다. 그것들은 효용성을 떠나서 그것 자체로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최고는 시각적 감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자연적 앎의 욕구의 징표는 봄에 대한  無私한 감지이다 (the disinterested appreciation of seeing) 봄은 앎의 최선의 길로 여겨진다. 봄과 앎은 theoria, Idea, visio등과 같은 용어에서 보듯이 언어적으로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이데가도 이점에 대해 "Being is that which shows itself in the pure perception which belongs to beholding, and only by such seeing does Being get discovered. Primordial and genuine truth lies in pure beholding. This thesis has remained the foundation of western philosophy ever since. This Greek priority for 'seeing' is today often brought into connection with the theme of the 'Hellenization of Christianity' and is then opposed tot he decisive experience of reality in the Old Testatment." 희랍인들은 청각보다 시각적 접근을 중시하고 셈족의 경우 보다 청각적 접근에 강조점 둔다. A. J. van der Aalst)

        앎의 본능은 어떤 일의 원인 (causa)를 파악하는 지식 (scientia)에서 채워진다. 앎이 선이라면 앎의 본능은 선에의 지향이고 무지(ignorantia)도 긍정적으로 말해서 부족함에 대한 인식이다. 앎의 충동은 보는 것에 대한 (즉 그 뒤에 숨은 원인에 대한) 경이 (wonder)에 놓여있다. 데카르트와 달리 보편적이고 방법적으로 시행된 의심이 아니라 경이가 사람으로 하여금 철학의 길에 접어들게 하는 철학의 근원이었다. 경이에서 처음 발생하는 것은 질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든 질문은 1. 무엇이 존재하는지 (whether something is), 2. 본질에 관한 결정적 질문인, 그것이 무엇인지(what something is)의 두개의 질문이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반해서 본능적 앎의 욕구에 대해 "본능적" 이라는 점을 주제화하는 세가지 "선험적" (a priori)인 논증, 즉 만물은 자체의 가능성의 완성을 추구한다는 의미의 선 (bonum)을 지향한다는 존재론적 논증을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사고의 핵심은 유기적 목적론: 즉 생명은 발아-성장-결실한다는 것에 있다.) 우선 두가지는 앎의 욕구의 동력은 만물이 자연히 완성 (perfection, or may be salvation: ontologically perceived salvation)을 추구하듯, 그것이 '인간으로 인간답게' 완성한다는 것과 만물이 자신의 고유한 기능 (열은 뎁히고 무거운것 떨어지듯)을 발현하는 바 앎의 욕구는 '인간의 특수한 활동'의 완성이라는 면에서 설명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백지(tabula rasa)이다. 즉 인간의 이성은 그자체로서는 하나의 가능성이어서 실제적 앎을 통해서 실재를 파악함으로서 획득되어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의 지성은 앎으로 자체의 완성을 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연적 활동은 그의 본질인바 이해 (to understand, intellegere)이다. 여기서 'omnis scientia bona est. 모든 과학 (학문, 앎)은 선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앎 (학문)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완성이고 그의 자연적 욕구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토마스의 시대는 모든 앎을 정당화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뿐 아니라 오히려 "호기심, curiositas" 즉 알고자 하는 '덕스럽지 못한 (unvirtuous)' 욕구를 정죄하는 (발동된 욕구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 어거스틴적 전통이 또한 대등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호기심은 주로 고백록 10권에서 요일 2:16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는 말씀에 근거한 논지이다. 특히 35장은 안목의 정욕을 호기심과 동일시한다. 호기심이란 학문의 외투로 위장된 지식의 헛된 욕구이다. 왜 그것은 안목의 정욕이라 하는가? 그것은 봄이 지식추구에 우선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봄의 기쁨이 본능적 지식욕구의 증거이나 어거스틴은 그것이 세상에 굴복하는 징표로 이해한다. 호기심의 "유혹"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위해 만물을 시험하도록 꼬인다. 호기심은 어거스틴의 근본적 구별인 사용 (uti, using)과 즐김 (frui, enjoying)의 구분을 토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의 De doctrina christiana에 있어 과학의 개념도 이 구분에 기초한다. 그는 지식은 반드시 인류 구원에 봉사할 수 있는 것 (uti)이어야 한다. 하나님 만이 안식을 주고 즐거워할 우리의 모든 갈구의 궁극적 목적이다. 사람들은 즐거워할 것을 사용하기 원하고, 사용하여야 할 것을 즐기는 反轉으로 이 관계를 왜곡한다. 따라서 어거스틴에 있어 무사한 관조 theoria로서의 세속적 지식에 연연하지 않고 기독교 학문적 지식은 도구적 의미를 가짐을 역설함이 그의 호기심 정의에 두드러진다. 즉 그의 관심은 하나님을 앎과 이 종교적 목적에의 효용에 의해 정해진다. 즉 질문의 동인은 그 방향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트엔느 질송에 의하면 중세 기독교 철학의 가장 특징적 점은 철학적 문제들 가운대 선택을 행한다는 점이다.  즉 어거스틴은 하나님과 영혼을 알기를 원한다. 그외에? 전혀 아무것도." (독백 1,2,7) 기원을 아는 지식과 연관된 자기을 아는 지식, 이 둘 만이 가치있는 지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어거스틴은 자연과학을 본능적인 무엇이 아니라 "앎 자체를 위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의 맥락에 넣는다.

        토마스는 앎을 자연본능적 욕구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호기심을 왜곡된 욕구로 보는 이 둘 사이를 어떻게 조화시키고 있는가? 토마스는 신학대전 II-II, 166ff 에서 원죄에 대한 논의 직후 호기심에 대해 언급하면서 "진리 자체에 대한 지식과 진리를 알고자 진력하고 연구하는 것을 분리해서 판단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진리 자체는 선한 것으로 보는 이 구분은 어거스틴에게서 거리를 둠을 의미한다. 토마스는 지식 달성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완성되고 자연적 욕구인 지식소유가 완성되는 것으로 봄과 연관된다. 토마스는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철학연구는 그 자체에 있어 적법적이고 찬양할 만하다. (신학대전 II-II, 167, 3) 물론 지식의 추구에 있어 잘못될 수는 있다. 이 잘못됨의 근원을 밝힘에 있어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육체의 욕구와 영의 욕구의 구분을 언급하며 죄가 이 둘 사이의 조화를 깨트린 것 (즉 육체의 욕구는 지식추구를 꺼리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반드시 자신의 추구를 통제해야 하는데 여기서도 토마스는 중용 mesotes, 德, 즉 "right mean" between two extremes 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의 핵심개념에 의존한다. 호기심은 앎의 욕구에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극단이므로, 절제 (temperantia, temperance)의 가능적 부분인 학구열 studiositas (zeal for learning)의 덕에 의해 합리적인 통로로 유도되어야 한다. 즉 그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극단적 형태의 앎의 욕구인 호기심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의 지배에 들어와야 한다. 문제의 불화는 지식의 바른 목적인 하나님을 앎에 관계시킴 없이 피조물에 대한 진리를 추구 하는데서 기인한다. 이리하여 어거스틴이 말하는 바 호기심의 종교적 동기가 이론적 고찰의 위계속으로 이전되어 들어온다. (Augustine's religious motivation of the curiositas is transposed into the hierarchy of the theoretical consideration.) 그러한 갈구는 존재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탐구하지 않는 과학에서 악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7) 순환 동기 (circulation motif)와 인간의 행복: 토마스의 종교적 동기를 이론적 고려로 바꾸어 놓음은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완성을 이루는 바, 그 원리와 연합되고자 욕구한다"는 그의 제3논증에서 더 두드러진다. 이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외에도 Proclus, Pseudo-Dionysius와 같은 신플라톤적 순환교리의 채용으로 말미암는다. 신플라톤주의는 모든 실재가 두개의 상반된 동시적 운동, 즉 유출과 회기 (emanation and return, a turning around, conversio, from the first principle, the One or the Good)의 역학관계로 본다. 유출된 모든 것이 근원으로 돌아가기 원함은 거기에 완성 (존재론적으로 미완의 존재, 결핍의 존재가 완성되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회기란 참된 자신들로 부터 멀어진 물질적-감각적인 것으로 부터 분리되어 그 원리와 합일됨을 통해서 순수하게 영적이고 신적인 존재로 됨 (이런 동기의식을 에로스라 함)을 말한다. 토마스는 인간 이성 (human intellect)의 원리 또는 근원을 비물질적 본질들 (incorporeal substances, substantiae separatae)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인간영혼, 천사, 하나님의 불멸적 존재를 부르는 통칭이다. 인간됨의 한 본질은 이성을 통하여 비물질적 본질에 연관됨 이다. 앎이란 아는자와 대상의 합일인데 인간의 최고 목표는 최고의 원리를 앎으로 사유하는 인간이 그에 합일되는 것이다. 여기서 산출 (exitus, procession)과 회기(reditus, return)의 신플라톤주의 원리가 기독교적으로 바뀌어 하나님으로 부터와 하나님을 향한 이중적 과정이 실재에 있어 근본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이로써 창조교리와 다른 유출의 교리마저 수용된다. 토마스는 자연에 의해 강제된 단계적 유출은 부정하고 하나님 만이 모든 것의 창출적 근원으로서 궁극적 목적이 되신다고 한다. 그리하여 토마스도 어거스틴 처럼 오직 하나님에게서 만이 인간d의 참된 안식이 있다는 고백으로 귀결한다. 그러나 토마스에 있어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의 원인들을 알고자 욕구하는 그것은 바로 이성의 안식없음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됨은 바로 그의 이성을 통해서 이기 때문이다.

        (8) 철학의 고민과 인간의 행복: 토마스는 신학자나 철학자 공히 인간 이성과 신적 본질 사이의 "거리"의 문제에 봉착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답하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본 이 문제를 토마스는 인간 지식의 위상과 관해 부정적으로 대답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즉 학문은 단지 감각이 달하는 곳에 유효하므로 비물질적 본질들에 대해 알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의 궁극적 행복은 본질적으로 추상적 과학들을 철학적 이론으로 고려함에 있지않다. 본능적 앎의 욕구는 사색적 과학에서의 완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종적 목적을 초월하며 철학은 완전한 행복을 이루지 못하고 단지 불완전한 행복을 유추할 뿐이다. 철학자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하나님 지식은 그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가 어떠한 분이라는 것은 알 수 없다. (the knowledge that he is, not what he is) 그러나 본능적 앎의 욕구가 거기에 만족할 수 없다. 토마스는 인간의 완전한 행복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명상인 the visio Dei (the contemplation of God's essence)에만 연관된다고 했다. 여기서 theoria와 흡사한 언어사용을 본다. 이 하나님의 명상은 철학적 탐구의 질서에 상충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연구는 결국 궁극적 원인인 하나님의 본질을 알지못하기 때문에 앎의 욕구와 성취 사이의 괴리를 이루어 인생의 초험적 성취를 이룰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해결은 철학의 고민과 낙망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해결은 포기, 체념 (resignation)의 그것이었다. 인간의 행복은 제한된 것이고 미완성과 불완전에 머물 뿐이다.

        (9) 신앙을 통한 (합리적) 해방: 만일 앎의 자연적 욕구가 채워질 수 없다면 완전한 행복이란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것이나 인생이 무의미하고 목적이 없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불합리하다. 토마스는 여기서 "이성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것이 가능해야만 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visio Dei의 불가능성은 신앙과도 상치한다. 하나님에 대한 즉시적 명상은 성경에 약속되어 있고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성경의 권위를 통해서 철학의 고민으로 부터 해방된다. 그의 신학대전이 이런 맥락에 부합한다: 인간의 구원에 관하여, 철학적 훈련들과 더불어 신적으로 계시된 교리들이 있다. 그는 이 해결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거듭 강조한다. 여기서, 기독교 신앙의 종말론이 앎의 자연적 욕구의 궁극성 (the finality of the natural desire to know)와 조화 (종합)되는 점이 충격적이다. 이것의 불길한 의미(portent)인즉 신적 계시는 이성을 초월하나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 반대로 계시는 이성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마5:8의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함의 원문이 마음으로, 즉 이성으로 (God is seen by the heart, that is, by the intellect) 볼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신에 대한 명상은 하나님 본질에 대한 명상으로  (visio Dei = vision per essentiam) 해석되어 그것이 철학적 사색의 지평을 초월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본질적으로 theoria의 아이디얼에 의해 결정되는 상태에 머문다.

        (10) 자연 위의 초자연적 목적에로 부상함: 토마스는 자연/초자연의 이중적 완전을 말한다.  "자연적 원리들 위에 하나님에 의하여 사람에게 운행의 초자연적 원리들이 주입되어야만 이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은총이다. 여기서 은총은 사죄와 교제회복으로 이해되지 않고 최종적 목적을 위해 인간성의 초자연적 완성 (the supernatural perfection of humanity for the final goal)이다.

        (11) 자연과 초자연: 13세기의 인식론적 문제의 핵심은, 실재내의 인간의 방향성에 있어 희랍적 이성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 토마스는 이 문제를 자연과 초자연의 구분을 통해서 대답한다. "... 은총의 선물들이 자연의 선물들 위에 더해지되 그것이 후자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는 방식으로 더해졌다." (신앙의 빛이 이성의 빛을 파괴하지 않는다). 1. 이 둘 사이에는 조화가 있다. "만약 철학자들의 가르침 가운데 신앙에 상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본래 철학이라기 보다 이성의 불완전성에 기인하는 철학의 오용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보듯이 치성의 자충족성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 없다. 또 철학의 오용은 이성 그자체에 의해 밝히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인용문은 인문학부의 어떤 교수들의 주장처럼 신앙에 병립하거나 대립되는 '이중적 진리'를 배격하고 진리란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임을 보인다. 하나님께서 이 둘의 근원이시고 조화를 보증하신다. 이 조화론에도 결국 유출 (앎의 욕구)과 회기 (앎의 완성으로서의 계시, 은총) 라는 순환주제가 엿보인다.  2. 여기서 gratia perficit naturam의 주제가 나온다. 기독교 삶은 자연적 질서의 완성이다. 3. gratia prae-supponit naturam (grace presuppose nature). 자연은 은총의 prae-ambula이다. 이러한 이유로 토마스는 자연과 초자연적 목표를 말한다.

        (12) 결론적 관점: 카토릭과 종교개혁의 근본적 차이는 자연과 은혜의 관계에 대한 상이한 견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개혁자들에게 있어 은총은 인간 본성의 高揚이 아니라 회복이요 해방이다. 즉 방향성에 관한 문제도 언급된다. 인간의 본성은 관계적 relational이라고 본다. 그러나 토마스는 자연의 개념에 사물 그자체들의 존재론적 일관성에 대한 표현이 나타난다. 물론 토마스에게 있어 자연이 피조물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적) 관계임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 관계성을 (비본질적인, 우연한) 범주 (the accidental categories)의 하나로 본다. 즉 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모두 본질 이후에 나오는 비본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세계의 관계가 피조물의 본질에 후속한다는 문제를 낳으므로 여기에 새로운 관계, 즉 범주적 관계가 아닌 초월적 관계 (not catagorical but transcendental)를 필요로 한다.

        토미즘의 또 다른 문제는그것이 인류를 두종류의 목적으로 갈라놓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화란 철학자 쉴레벡스가 말한대로 토마스는 이원론으로 삶을 나누기보다 오히려 그의 가장 깊은 의도는 인간의 삶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삶, 하나의 마지막에 예정된 바, 근원과의 관계 속에서 움직이고 존재함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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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Augustine Aurelius, Bishop of Hippo (354-430)


(가) 철학적 저술의 시작


1. 목회자요 감독으로 바쁜 중에도 저술활동: 방대한 저술


2. 그의 삶에 대한 면모들은 386년 개종이후 15년 지난 해 Confessions 청년시기의 자서전적 정보제공.  33세까지 기독교 배경에 무관심하다 밀란의 감독 Ambrose의 설교를 정기적으로 듣기 시작하였다.


3. 마침내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아직도 철학적인 분위기가 강한 저술을 했다. 특히 세례를 받기위해 밀란 근처 카시시아쿰 Cassiciacum 이란 곳에 머물며 쓴  Contra Academicos (Against the Academics)는 이 시기에 쓴 De beata vita (On the Blessed Life), De ordine (On the Order)와 더불어 기원전 3-2세기의 철학학파들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담고있다.


4. 이들은 대화체로 저술되어 그 형태에서 조차 플라톤 전통의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또  이 글들에서 특히 3-2세기의 회의론적 철학자들에 대한 반론을 펴되 인식론, 윤리, 존재론의 세부분으로 나누어 적고있다.


5. 그 반론과 아울러 그가 개종의 전후에 깊이 영향을 받은 신플라톤주의와 이제 세례를 받음으로 받아들인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복합적 영향의 요소가 보인다.


(나) 3-2세기 희랍철학에 대한 반대


1. 그는 CA의 마지막 부분에서 고대철학의 조류의 분석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그는 소피스트적 전통 즉 이오니아 문명의 쇠퇴로 야기된 밀 레토스 학파, 엘레아 학파의 쇠퇴와 실용주의 등장으로 아테네를 중심한 자못 타락한 회의주의 전통의 폐혜에 주목하고 그의 의도를 분석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철학의 전통을 참/거짓 철학으로 이분하고  이 회의주의 철학을 의심하고 거짓의 철학으로 구분하였다.


2. 거짓의 철학으로 분류한 회의주의 전통은 진리 그자체, 진리의 성육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눈앞에 두고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빌라도의 깊이없는 "지혜"와 다를바 없는 것이라 했다. 즉 소피스트적 냉소와 비판주의적 자세는 폭넓은 관용의 분위기란 연막에 감추어진 영적, 정신적 위기의 표현일 뿐이라고 보았다.


3. 어거스틴은 그 어떠한 이유에서건 인간이 삶의 기초를 이루는 진리와 확실성을 발견하기를 포기하거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분위기에 빠지면 삶 자체가 미로에 빠지고 마는 것으로 보았다. 그가 이러한 철학을 극구 반대하는 것은 그 철학이 살인이나 여타의 범죄를 방조하지는 않더라도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절망에 빠지게 하는 폐혜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4. 이러한 회의론 철학과 더불어 그 유파인 에피큐레스학파의 탐미주의와 유물론적 사고도 배격해야 한다고 보았다.


5. 또 아울러 비교적 순결이나 도덕성 강조로 적지않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에 의해 적지않은 선호와 호평조차 받았던 스토익학파에 대해서도 재고한다.  그는 이도 배격해야 할 것은 스토익파도 세상을 보는 안목이 이생과 물질적인 것에 매여있기 때문이라 했다.


6. 그러나 그는 이러한 허위, 거짓된 철학과는 달리 진리의 전통이 철학에는 흐르고 있다고 인정했다. 잘못된 전통들은 서로 비난하고 불일치 하지만 참된 철학은 모든 조류를 하나로 묶어 통일체계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7. 그는 플라톤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이러한 고전적 예를 본다. 그는 이 철학들을 부정적, 회의적이고 최선의 경우 독단론을 비판하는데 그치는 소극적 철학 들과 달리 긍정적이고 바른 철학 전통으로 간주한다. 특별히 CA III 37, 42에 보면 플라톤 철학을 "희랍철학의 유익한 모든 요소를 규합하여 윤리, 존재론, 인식론, 사회철학, 정치학, 법철학 등을 고루 구비한 하나의 최고의 체계를 제시한 완전한 형태로 칭찬하고 있다." (플라톤 철학이란 결국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대한 대화편으로 유타이프로, 파이돈, 소크라테스의 변명, 국가편, 법등 29편의 그당시 알려진 학문의 집대성으로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사란 이 대화편의 주석이라 했을 정도이다. 또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화신같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익명의 기독교인으로 부를 유혹에 빠질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다) 플라톤주의의 과대평가


1. 어거스틴이 이렇듯 플라톤 주의를 높이 평가하게 된 첫 이유는 그 존재론에 있다. 플라톤 주의의 존재론은 두개의 세계, 즉 현상, 가시계와 이념의 세계이다. 물론 전자는 후자보다 저등한 일종의 타락한 세계로 본다.


2. 인식론은 존재론에 따라서 가시계는 이데아의 세계의 이미지, 그림자로 보고, 나아가 그 둘의 관계가 모방, 유사 mimesis, resemblence의 관계로 보았다.


3. 바른 행위를 위한 규범은 사람 모두가 아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고도의 지성을 소유한 "소수"에 국한된다고 보았다. 이는 플라톤주의의 elitism적 요소라 할 수 있다.


4. 어거스틴이 놀랍게도 플라톤주의의 이러한 요소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두세계 이론이 그가 배격하고자 했던 유물론적 바탕을 가진 철학과 영지주의 배격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5. 이러한 두개의 세계 이론은 그를 마니키즘의 이원론적 세계관, 즉 세계 자체가 선과 악으로 되어있다는 견해를 벗어나 그가 성경적인 세계이론이라 생각한 영과 물질계에 대한 구분을 확신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6. 또 그는 이 영과 물질계 구분을 기초로 하여 에피큐레스, 스토익의 유물론을 배격하였다.


7. 개종이후 그리스도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과 권위를 고백한 어거스틴은 세부적으로 가서 성경의 가르침에 부딪치는 것 같이 보이는 플라톤주의의 몇가지 면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 배치되지 않는다고 보는 한 플라톤주의의 고도화된ㄴ 이성을 잘 사용함으로 삶의 많은 유익과 진리 발견의 유익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특히 그는 플라톤주의의 핵인 이 두세계관에 대해 별다른 의심과 비판없이 그것을 성경적 영/육의 구분과 동일시 하였다. 그는 이러한 판단하에 플라톤주의는 바울이 철학과 헛된 신화에 대한 경고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보았다.


8. 이렇듯 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에게 눈을 열어 영적인 세계의 존재와 그에 대립하는 물질계를 보게하였으나 동시에 그 철학적 함의와 비성경적 동기를 인해 그의 시각을 굴절시키는 이중적 영향을 미쳤다.


(라) 플라톤주의의 영향


1. 지혜: 어거스틴은 De beata vita에서 sapientia (wisdom)을 얻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또 복된 삶의 기초로 말하고 있다. 일면 그는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창조됨, 즉 영원한 로고스에 대해 언급한다.


2. 반면에 그는 하나님의 지혜를 모든 이데아의 총합으로, 즉 가시세계의 원형적 모델로 말하고, 이러한 총합으로, 존재의 완전한 완성으로 거기에 인간이 지적이며 명상적 활동을 통해 참여하는 그 무엇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3. 어거스틴은 지성 (intellection)을 인간의 모든 활동중 최고로 간주하고 그것이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활동이나 일보다 훨씬 중요한 것으로 우월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반면에 감각적 경험을 명백히 경시한다. 즉 수학, 기하학, 음악등의 이론적 과학은 감각적 실재에 대한 연구보다 훨씬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4. 그러나 이론적 과학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만유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명상이었다. 어거스틴은 그 명상을 지칭하는 말로 visio Dei, frui Deo (enjoying God) 하나님을 즐거워 함이라 불렀다.


5. De ordine에서는 참철학에 관한 언급으로 참 철학은 인간을 물질적이며 부패할 수 있는 실재로 부터 해방시키는 것으로 정의된다. 


(V) Thomas Aquinas (1224/5-1274)  기독교철학 95/5


(가) 시대적 배경


1. 기독교 신앙이 중세의 삶과 사상의 구심적 요소였음은 누구나가 아는 일이다. 중세초 까지도 신앙은 대부분 학식이 높지 않은 평신도들이 이루어 놓은 유산이었다. 그 이유는 게르만 민족의 유럽침공과 로마제국의 몰락, 이들의 대규모적 기독교화는 초기 변증가들의 시대나 어거스틴 시대와는 다른 문화적 양상을 만들어냈다. (예:한 게르만 군대 장관의 세례식: 칼을 빼어들고 검에는 세례받지 않겠다는 것) 북방 이주민족의 대규모 개종과 지배로 말미암아 유럽은 어떤 면에서 "암흑시대"라 지칭할 만한 그 무엇이 있었다.


2. 8세기 말로 9세기 초 Carolingian 시대에 오면 중세의 소위 "암흑시대"를 지나 중흥이 싹트기 시작한다. 여기에 이성적 원리를 교회생활 속에 정착시킴으로서 샬레망의 문화정치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 알퀸 (Alcuin 730-804)의 공이 크다. 그는 이성적 원리를 기독교적 삶 속에 정당한 요소로 자리잡게 하고자 진력했다.


3. 그러나 본격적인 이성론적 기독교의 발달은 서구가 고대의 철학적 이성에 의해 전격적으로 도전을 받은 13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양상을 띄며 활달해졌다. 여기에는 13세기에 이탈리아 (볼로나), 파리 (솔본), 영국 (옥스포드, 켐브리지), 독일 (쾰른)등 발전하기 시작한 대학과 그곳을 중심해서 발전한 학문인 스콜라 철학의 기여가 컸다.


4. 이 시기에 유럽은 이전에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고대 철학적 이성에 의해 영향과 도전을 받는 일이 생긴다. 이는 주로 잊혀졌던 고전의 재발견과 아라비아로 부터의 유입을 인한 지적 자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9세기 운동이 시작이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던 반면, 이 시기의 지성운동은 심화되고 강한 영향을 불러일으킨다.


5. 토마스 아퀴나스 (아퀴노의 토마스)는 이 시대를 살고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유럽의 기독교 지성인이다. 그를 이해함이 이 시대에 있어 고전철학과 기독교 신앙이 어떠한 형식으로 종합되었는지를 이해함에 필수적이다. 또 그를 이해함에는 그 시대의 대학과 그곳의 학문적 분위기를 이해함이 중요하다.

        

(나) 대학과 스콜라주의와 토마스


1. 토마스 아퀴나스는 소년기에 몬테카시노 (Monte Cassino)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맡겨진 이후 Naples의 대학에 입학하고 후일 가족들의 바램과 달리 새로 생긴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는 Cologne과 당시에 최고의 기독교 학문 중심지인 Paris에서 수학하고 59년 이후 이탈리아에서 가르치다 69년 파리에 와 가르친 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 74년 49세로 죽었다.

        

2. 그의 삶에는 처음 형성된 대학이 큰 역활을 하였다. 1200년대는  볼로나, 파리, 옥스포드의 대학이 생기던 시대로  대학은 당시 산업이나 상업처럼 길드를 이루어 magistrorum et scholarium의 결합으로 universitas (본래 대학에 국한되기 보다 집단의 공동적 명칭이었다) 를 이루었다. 이는 학문도 하나의 직업화 함을 보여준다.


3. Alexander of Roes (c. 1280)의 지적처럼 당시는 유럽의 사회와 문화는 sacerdotium, imperium, studium의 세기관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대학이 교회와 왕궁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당시의 대학의 교육은 magister의 두가지 역활, 즉 講讀과 爭論 (legere et disputare)으로서 강독에는 정관(statutes)에 따라 정해진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진 텍스트 (auctoritates)를 읽고 설명하는 것이어서 자연히 "주석"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논쟁은 주석적 읽음에서 자연히 수반되는 질문들을 다룸에서 발전하였다. 권위적 문헌으로 부터 야기된 논쟁과 반론의 변증법은 생각이 가능한 모든 선택여지를 저울질하는 일에 있어 근본적으로 열린마음 (개방성)과 함께 조직적 해결에 이르기 위해 한계까지 밀어붙여진 이성의 엄밀한 적용 둘다를 요구하였다. 여기에서 schoolmaster or 'of school'을 뜻하는 scholasticus로 부터 중세철학과 거의 동의어라 할 수 있는 scholasticism이 유래하였다.

        

5. 인문학부: 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facultas artium (faculty of arts)는 중세대학의 4개 학부중 하나로서 오늘날 (영어권의) 문학사, 석사에 해당하며 신학, 법학, 의학부의 예비단계로서 어거스틴의 De doctrina christiana에서 결정해놓은 세속적 지식의 전부를 포괄하는 전통적 체계를 가리킨다. De doctrina christiana는 성경연구에 중점을 둔 "기독교 학문체계" (Christian scholarship)에 인문학부가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본적 사상으로 하고있으며 13세기까지도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 책의 정신은 과학은 그 자체가 목적을 가지고 있을 수 없고 그 의미와 연계 (meaning and coherence)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연관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6. 시간이 가면서 인문학부는 점차 "서구에 아리스토텔레스 전체가 소개 (the introduction of the complete Aristotle in the West)됨" 이라 불리우는 중대사건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맞게된다. 이 때까지 만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저술만이 알려져 있었으나 12세기 중반에 Physica, De anima, Metaphysica, Ethica가 번역되었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아리스토텔레스 (the Stagirite)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희랍 주석서들 방대한 희랍-아라비안 문헌이 도입되었고 신플라톤주의 문헌과 심지어는 유대인 사상가들의 문헌도 라틴어로 번역 소개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시대에는 다양한 영역들에서 고대문화로 부터의 방대한 내용들이 채용되었던 것이다.


7. 이와 동시에 많은 이들은 이 비기독교적인 고전문화와 중세문화 사이의 대립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 좋은 예로 Absalo of St. Victors는 "그리스도의 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이 지배하는 곳에선 지배하지 않는다" (The spirit of Christ does not rule where the spirit of Aristotle reigns)라고 했다. 고대문화를 채용함과 배격의 두 입장은 결코 온전히 조화되지 못한채 양극으로 남아있었다.

        

8. 이것은 1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강독에 교회가 크게 반발하여 1210년에는 막 설립된 파리대학에서 그의 자연철학 저술의 강독은 파문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수수께끼처럼 그의 강독은 번져나갔고 1255년 결국 공식적으로 허용되어 이제는 반드시 대학 학과목에 그의 저술에 대한 강독이 들어있어야 했었다. 이렇게 해서 인문학부 (facultas aritum)은 사실상 철학부가 되었고 모든 학생들을 위한 예비단계였던 인문학부는 이교적 철학에 푹젖게 되었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부르듯 "그 철학자" (the Philosopher)가 되어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견해를 받아들임은 실재에 대한 전통적 견해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요, Ferdinand Sassen의 말처럼 "중세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속에서 자신에 대해서와 그들이 가진 자연적 능력들에 대해 의식하게 되었다." 

        

9. 신학부, 성경연구와 수도회: 신학부 교수도 역시 강독과 논쟁을 중심으로 가르쳤으나 여기서 주된 권위적 문헌은 물론 성경이고 그 강독이 중심과제였다. 13세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중흥 뿐 아니라 성경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이 일어난 시대였다. 스콜라적 방법이 성경연구에 확대된 결과 그 연구도 학문의 일부가 되어 아퀴나스의 Summa theologiae에서 처럼 최초로 조직화되어 theo-logy로 발전되었다.


10. 13세기의 수도원의 새로운 발전은 후랜시스와 도미니칸 수도회의 신학발전으로 1250이후 대부분의 주요 신학자는 수도승이었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이전의 수도회와 달리 도시적 분위기에 적대적이지 않고 설교와 선교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활동의 관점에서 학문연구에 강조를 두게된다. 도미니칸은 ordo studentium이라 할 만큼 수도원 생활의 핵심적 일부로서 연구를 둔 첫 수도회였다. 이 수도회가 당시 세워지던 유럽의 대학들에서 주요 교수직을 차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1. 이시대 사상과 대학의 좌표를 정한 原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일 것이다. "만인은 본능적으로 앎을 원한다.


2.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들이 감각에서 취하는 기쁨을 들 수 있다. 그것들은 효용성을 떠나서 그것 자체로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최고는 시각적 감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자연적 앎의 욕구의 징표는 봄에 대한  無私한 감지이다 (the disinterested appreciation of seeing) 봄은 앎의 최선의 길로 여겨진다. 봄과 앎은 theoria, Idea, visio등과 같은 용어에서 보듯이 언어적으로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3. 하이데가도 이점에 대해 "Being is that which shows itself in the pure perception which belongs to beholding, and only by such seeing does Being get discovered. Primordial and genuine truth lies in pure beholding. This thesis has remained the foundation of western philosophy ever since. This Greek priority for 'seeing' is today often brought into connection with the theme of the 'Hellenization of Christianity' and is then opposed tot he decisive experience of reality in the Old Testatment." 희랍인들은 청각보다 시각적 접근을 중시하고 셈족의 경우 보다 청각적 접근에 강조점 둔다. A. J. van der Aalst)

        

4. 앎의 본능은 어떤 일의 원인 (causa)를 파악하는 지식 (scientia)에서 채워진다. 앎이 선이라면 앎의 본능은 선에의 지향이고 무지(ignorantia)도 긍정적으로 말해서 부족함에 대한 인식이다. 앎의 충동은 보는 것에 대한 (즉 그 뒤에 숨은 원인에 대한 경이 (wonder)에 놓여있다. 데카르트와 달리 보편적이고 방법적으로 시행된 의심이 아니라 경이가 사람으로 하여금 철학의 길에 접어들게 하는 철학의 근원이었다. 경이에서 처음 발생하는 것은 질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든 질문은 1. 무엇이 존재하는지 (whether something is), 2. 본질에 관한 결정적 질문인, 그것이 무엇인지(what something is)의 두개의 질문이다.


5.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반해서 본능적 앎의 욕구에 대해 "본능적" 이라는 점을 주제화하는 세가지 "선험적" (a priori)인 논증, 즉 만물은 자체의 가능성의 완성을 추구한다는 의미의 선 (bonum)을 지향한다는 존재론적 논증을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사고의 핵심은 유기적 목적론: 즉 생명은 발아-성장-결실한다는 것에 있다.)


6. 우선 두가지는 앎의 욕구의 동력은 만물이 자연히 완성 (perfection, or may be salvation: ontologically perceived salvation)을 추구하듯, 그것이 '인간으로 인간답게' 완성한다는 것과 만물이 자신의 고유한 기능 (열은 뎁히고 무거운것 떨어지듯)을 발현하는 바 앎의 욕구는 '인간의 특수한 활동'의 완성이라는 면에서 설명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백지(tabula rasa)이다. 즉 인간의 이성은 그자체로서는 하나의 가능성이어서 실제적 앎을 통해서 실재를 파악함으로서 획득되어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의 지성은 앎으로 자체의 완성을 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연적 활동은 그의 본질인바 이해 (to understand, intellegere)이다. 여기서 'omnis scientia bona est. 모든 과학 (학문, 앎)은 선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앎 (학문)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완성이고 그의 자연적 욕구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7. 그러나 반면에 토마스의 시대는 모든 앎을 정당화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뿐 아니라 오히려 "호기심, curiositas" 즉 알고자 하는 '덕스럽지 못한 (unvirtuous)' 욕구를 정죄하는 (발동된 욕구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 어거스틴적 전통이 또한 대등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호기심은 주로 고백록 10권에서 요일 2:16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는 말씀에 근거한 논지이다. 특히 35장은 안목의 정욕을 호기심과 동일시한다. 호기심이란 학문의 외투로 위장된 지식의 헛된 욕구이다. 왜 그것은 안목의 정욕이라 하는가? 그것은 봄이 지식추구에 우선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8. 아리스토텔레스는 봄의 기쁨이 본능적 지식욕구의 증거이나 어거스틴은 그것이 세상에 굴복하는 징표로 이해한다. 호기심의 "유혹"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위해 만물을 시험하도록 꼬인다. 호기심은 어거스틴의 근본적 구별인 사용 (uti, using)과 즐김 (frui, enjoying)의 구분을 토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의 De doctrina christiana에 있어 과학의 개념도 이 구분에 기초한다. 그는 지식은 반드시 인류 구원에 봉사할 수 있는 것 (uti)이어야 한다. 하나님 만이 안식을 주고 즐거워할 우리의 모든 갈구의 궁극적 목적이다. 사람들은 즐거워할 것을 사용하기 원하고, 사용하여야 할 것을 즐기는 反轉으로 이 관계를 왜곡한다.


9. 따라서 어거스틴에 있어 무사한 관조 theoria로서의 세속적 지식에 연연하지 않고 기독교 학문적 지식은 도구적 의미를 가짐을 역설함이 그의 호기심 정의에 두드러진다. 즉 그의 관심은 하나님을 앎과 이 종교적 목적에의 효용에 의해 정해진다. 즉 질문의 동인은 그 방향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트엔느 질송에 의하면 중세 기독교 철학의 가장 특징적 점은 철학적 문제들 가운대 선택을 행한 다는 점이다.  즉 어거스틴은 하나님과 영혼을 알기를 원한다. 그외에? 전혀 아무것도." (독백 1,2,7) 기원을 아는 지식과 연관된 자기을 아는 지식, 이 둘 만이 가치있는 지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어거스틴은 자연과학을 본능적인 무엇이 아니라 "앎 자체를 위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의 맥락에 넣는다.

        

10. 토마스는 앎을 자연본능적 욕구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호기심을 왜곡된 욕구로 보는 이 둘 사이를 어떻게 조화시키고 있는가? 토마스는 신학대전 II-II, 166ff 에서 원죄에 대한 논의 직후 호기심에 대해 언급하면서 "진리 자체에 대한 지식과 진리를 알고자 진력하고 연구하는 것을 분리해서 판단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다." 진리 자체는 선한 것으로 보는 이 구분은 어거스틴에게서 거리를 둠을 의미한 다. 토마스는 지식 달성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완성되고 자연적 욕구인 지식소유가 완성되는 것으로 봄과 연관된다. 토마스는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철학연구는 그 자체에 있어 적법적이고 찬양할 만하다고 보았다. (신학대전 II-II, 167, 3)


11. 물론 지식의 추구에 있어 잘못될 수는 있다. 이 잘못됨의 근원을 밝힘에 있어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육체의 욕구와 영의 욕구의 구분을 언급하며 죄가 이 둘 사이의 조화를 깨트린 것 (즉 육체의 욕구는 지식추구를 꺼리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반드시 자신의 추구를 통제해야 하는데 여기서도 토마스는 중용 mesotes, 德, 즉 "right mean" between two extremes 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의 핵심개념에 의존한다. 호기심은 앎의 욕구에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극단이므로, 절제 (temperantia, temperance)의 가능적 부분인 학구열 studiositas (zeal for learning)의 덕에 의해 합리적인 통로로 유도되어야 한다. 즉 그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극단적 형태의 앎의 욕구인 호기심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의 지배에 들어와야 한다.


12. 문제의 불화는 지식의 바른 목적인 하나님을 앎에 관계시킴 없이 피조물에 대한 진리를 추구 하는데서 기인한다. 이리하여 어거스틴이 말하는 바 호기심의 종교적 동기가 이론적 고찰의 위계속으로 이전되어 들어온다. (Augustine's religious motivation of the curiositas is transposed into the hierarchy of the theoretical consideration.) 그러한 갈구는 존재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탐구하지 않는 과학에서 악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라) 순환 동기 (circulation motif)와 인간의 행복


1. 토마스의 종교적 동기를 이론적 고려로 바꾸어 놓음은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완성을 이루는 바, 그 원리와 연합되고자 욕구한다"는 그의 제3논증에서 더 두드러진다. 이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외에도 Proclus, Pseudo-Dionysius와 같은 신플라톤적 순환교리의 채용으로 말미암는다. 신플라톤주의는 모든 실재가 두개의 상반된 동시적 운동, 즉 유출과 회기 (emanation and return, a turning around, conversio, from the first principle, the One or the Good)의 역학관계로 본다. 유출된 모든 것이 근원으로 돌아가기 원함은 거기에 완성 (존재론적으로 미완의 존재, 결핍의 존재가 완성되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2. 인간에게 있어 회기란 참된 자신들로 부터 멀어진 물질적-감각적인 것으로 부터 분리되어 그 원리와 합일됨을 통해서 순수하게 영적이고 신적인 존재로 됨 (이런 동기의식을 에로스라 함)을 말한다.


3. 토마스는 인간 이성 (human intellect)의 원리 또는 근원을 비물질적 본질들 (incorporeal substances, substantiae separatae)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인간영혼, 천사, 하나님의 불멸적 존재를 부르는 통칭이다. 인간됨의 한 본질은 이성을 통하여 비물질적 본질에 연관됨 이다. 앎이란 아는자와 대상의 합일인데 인간의 최고 목표는 최고의 원리를 앎으로 사유하는 인간이 그에 합일되는 것이다. 여기서 산출 (exitus, procession)과 회기(reditus, return)의 신플라톤주의 원리가 기독교적으로 바뀌어 하나님으로 부터와 하나님을 향한 이중적 과정이 실재에 있어 근본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4. 이로써 창조교리와 다른 유출의 교리마저 수용된다. 토마스는 자연에 의해 강제된 단계적 유출은 부정하고 하나님 만이 모든 것의 창출적 근원으로서 궁극적 목적이 되신다고 한다. 그리하여 토마스도 어거스틴 처럼 오직 하나님에게서 만이 인간d의 참된 안식이 있다는 고백으로 귀결한다. 그러나 토마스에 있어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의 원인들을 알고자 욕구하는 그것은 바로 이성의 안식없음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됨은 바로 그의 이성을 통해서 이기 때문이다.

        

5. 철학의 고민과 인간의 행복: 토마스는 신학자나 철학자 공히 인간 이성과 신적 본질 사이의 "거리"의 문제에 봉착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답하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본 이 문제를 토마스는 인간 지식의 위상과 관해 부정적으로 대답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즉 학문은 단지 감각이 달하는 곳에 유효하므로 비물질적 본질들에 대해 알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의 궁극적 행복은 본질적으로 추상적 과학들을 철학적 이론으로 고려함에 있지않다. 본능적 앎의 욕구는 사색적 과학에서의 완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종적 목적을 초월하며 철학은 완전한 행복을 이루지 못하고 단지 불완전한 행복을 유추할 뿐이다. 철학자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하나님 지식은 그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가 어떠한 분이라는 것은 알 수 없다. (the knowledge that he is, not what he is)


6. 그러나 본능적 앎의 욕구가 거기에 만족할 수 없다. 토마스는 인간의 완전한 행복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명상인 the visio Dei (the contemplation of God's essence)에만 연관된다고 했다. 여기서 theoria와 흡사한 언어사용을 본다. 이 하나님의 명상은 철학적 탐구의 질서에 상충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연구는 결국 궁극적 원인인 하나님의 본질을 알지못하기 때문에 앎의 욕구와 성취 사이의 괴리를 이루어 인생의 초험적 성취를 이룰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해결은 철학의 고민과 낙망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해결은 포기, 체념 (resignation)의 그것이었다. 인간의 행복은 제한된 것이고 미완성과 불완전에 머물 뿐이다.

        

(마) 신앙을 통한 (합리적) 해방


1. 만일 앎의 자연적 욕구가 채워질 수 없다면 완전한 행복이란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것이나 인생이 무의미하고 목적이 없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불합리하다. 토마스는 여기서 "이성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것이 가능해야만 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visio Dei의 불가능성은 신앙과도 상치한다. 하나님에 대한 즉시적 명상은 성경에 약속되어 있고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성경의 권위를 통해서 철학 의 고민으로 부터 해방된다.


2. 그의 신학대전이 이런 맥락에 부합한다: 인간의 구원에 관하여, 철학적 훈련들과 더불어 신적으로 계시된 교리들이 있다. 그는 이 해결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거듭 강조한다. 여기서, 기독교 신앙의 종말론이 앎의 자연적 욕구의 궁극성 (the finality of the natural desire to know)와 조화 (종합)되는 점이 충격적이다. 이것의 불길한 의미(portent)인즉 신적 계시는 이성을 초월하나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3. 그 반대로 계시는 이성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마5:8의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함의 원문이 마음으로, 즉 이성으로 (God is seen by the heart, that is, by the intellect) 볼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신에 대한 명상은 하나님 본질에 대한 명상으로  (visio Dei = vision per essentiam) 해석되어 그것이 철학적 사색의 지평을 초월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본질적으로 theoria의 아이디얼에 의해 결정되는 상태에 머문다.

        

4. 자연 위의 초자연적 목적에로 부상함: 토마스는 자연/초자연의 이중적 완전을 말한다.  "자연적 원리들 위에 하나님에 의하여 사람에게 운행의 초자연적 원리들이 주입되어야만 이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은총이다. 여기서 은총은 사죄와 교제회복으로 이해되지 않고 최종적 목적을 위해 인간성의 초자연적 완성 (the supernatural perfection of humanity for the final goal)이다.

        

(바) 자연과 초자연


1. 13세기의 인식론적 문제의 핵심은, 실재내의 인간의 방향성에 있어 희랍적 이성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


2. 토마스는 이 문제를 자연과 초자연의 구분을 통해서 대답한다. "... 은총의 선물들이 자연의 선물들 위에 더해지되 그것이 후자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는 방식으로 더해졌다." (신앙의 빛이 이성의 빛을 파괴하지 않는다).


3. 이 둘 사이에는 조화가 있다. "만약 철학자들의 가르침 가운데 신앙에 상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본래 철학이라기 보다 이성의 불완전성에 기인하는 철학의 오용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보듯이 이성의 자충족성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 없다. 또 철학의 오용은 이성 그자체에 의해 밝히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인용문은 인문학부의 어떤 교수들의 주장처럼 신앙에 병립하거나 대립되는 '이중적 진리'를 배격하고 진리란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임을 보인다. 하나님께서 이 둘의 근원이시고 조화를 보증하신다. 이 조화론에도 결국 유출 (앎의 욕구)과 회기 (앎의 완성으로서의 계시, 은총) 라는 순환주제가 엿보인다. 


4. 여기서 gratia perficit naturam의 주제가 나온다. 기독교 삶은 자연적 질서의 완성이다. 3. gratia prae-supponit naturam (grace presuppose nature). 자연은 은총의 prae-ambula이다. 이러한 이유로 토마스는 자연과 초자연적 목표를 말한다.

        

(사) 결론적 관점


1. 카토릭과 종교개혁의 근본적 차이는 자연과 은혜의 관계에 대한 상이한 견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개혁자들에게 있어 은총은 인간 본성의 高揚이 아니라 회복이요 해방이다. 즉 방향성에 관한 문제도 언급된다. 인간의 본성은 관계적 relational이라고 본다. 그러나 토마스는 자연의 개념에 사물 그자체들의 존재론적 일관성에 대한 표현이 나타난다.


2. 물론 토마스에게 있어 자연이 피조물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적) 관계임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 관계성을 (비본질적인, 우연한) 범주 (the accidental categories)의 하나로 본다. 즉 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모두 본질 이후에 나오는 비본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세계의 관계가 피조물의 본질에 후속한다는 문제를 낳으므로 여기에 새로운 관계, 즉 범주적 관계가 아닌 초월적 관계 (not catagorical but transcendental)를 필요로 한다.

        

3. 토미즘의 또 다른 문제는그것이 인류를 두종류의 목적으로 갈라놓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화란 철학자 쉴레벡스가 말한대로 토마스는 이원론으로 삶을 나누기보다 오히려 그의 가장 깊은 의도는 인간의 삶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삶, 하나의 마지막에 예정된 바, 근원과의 관계 속에서 움직이고 존재함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기독교철학 95/1-6

(VI)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


(가) 신학과 철학의 관계


1. 아퀴나스에게 있어 신학이란 계시의 내용을 신앙과 권위에 기초하여 받아들인 바, 즉 종교적인 믿음으로 이미 받아들인 사실을 이론적으로 반성하는 사고의 체계를 말한다. 이점에 있어서 그는 어거스틴이 이론적 사유를 믿음의 진보의 수단으로 보았던 점과 일치한다.


2. 이에 반해 철학은 이성의 빛 (the light of reason)에 의존해서 이성적 확인절차를 거쳐 가지게된 어떤 지식이나 현재 경험하는 것들에서 출발한 사고 (reasoning) 를 말한다. 이 사고는 새로운 지식에 이르는 길 (the way of discovery)이다. 이 사고의 특성은 지식과 경험에 근거해서 내린 판단들을 원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에로 되집어 봄으로서 (the way of reducing) 그 판단의 옳고 그름에 대해 합리적, 이성적 확인의 절차를 거치는 것이다.


3. 특별한 은총인 계시에 의존하지 않는 일반적 사고의 결과인 철학은 일상적 경험의 의미를 이해하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진 자연적 형태의 지식이다. 아퀴나스의 이러한 점은 어거스틴이 바른 철학을 이미 신앙에 의해 받아들여진 지식에 대한 고등하고 신비한 영적 진보의 수단으로 여겨진 것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4. 또 아퀴나스는 철학을 신앙의 예비단계 또는 준비였다고 말한 져스틴이나 클레멘트와도 강조점이 다르다. 져스틴이나 클레멘트는 헬라와 히브리, 이방과 구약적 선민전통을 구분하고, 어떠한 의미에서 철학이 헬라인들로 하여금 복음에 다가서게 했는가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철학의 일반적 정당성, 또는 그것의 자연적 요소를 강조함으로서 초자연적 성격이 강조된 종교적 신앙과 구분하고 있다. 


4. 그리하여 그는 철학자 (philosophers, 그는 헬라철학자들 뿐 아니라 라틴 (세네카), 이슬람, 유대의 현인, 문인등도 자주 인용한다) 를 성자 (the saints, Augustine, Ambrose 등)과 엄격히 구분한다. 또 그는 신학이라는 말 대신에 sacra doctrina "성스러운 교리" 라는 말을 선호한다. 이러한 자세는 신학을 철학과 구분 하려는 생각과 더불어 철학의 자율성을 보장하려는 생각을 함축하고 있다. 이처럼 신학과 철학은 그것이 다루는 대상이 무엇이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같은 대상을 다룰지라도 그 접근방법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같은 진리를 신학자는 계시된 것에서 출발하여 알고 철학자는 이성적 추론의 결과로 생각한다. (예: 신의 존재는 철학자에게 있어 증명의 대상이지만 신학자에게 있어 전제이고 그것을 계시에 의거해 받아들인 내용으로 그것에 대해 더 알고자 반성한다. 교의신학 (계시신학)과 자연신학은 겹치는 부분이 있으나 그 종류가 다르다.) 


5. 그러나 그의 관심이 어떻게 철학의 본질을 손상함 없이 철학을 신학에 도입하느냐에 있지 않다. 그는 신학자로서 신학의 본질에 손상이나 마찰없이 철학을 신학에 도입하거나 그 준비단계로 수용하느냐 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6. 즉 그는 그 이전의 초대교부나 어거스틴등이 그러했듯이 성경적 기초에서 출발하는 독특한 철학체계를 세워보려는 생각을 갖지 못했다. 변증가들이 철학을 변증적 관점에서 수용, 이용하려 했다면 어거스틴은 신앙, 아퀴나스의 경우 신학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수용하고자 했던 것 뿐이다.  철학의 효용은 신앙에서 받아들인 내용에 대해 이론적으로 설명함에 필요한 철학적 범주와 추론양식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예: 삼위일체의 내용은 성경계시에 의거하지만 그 신비를 설명하는 철학적 범주나 추론양식등을 철학에서 수용한다.)


7. 물론 철학과 신학은 그 성격상 구분됨이 사실이고 당연히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철학이 신학으로 부터 구분된다고 해서 종교적 신앙으로 부터도 독립되어 자율적인 학문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은 그 학문의 성격상 신앙으로 부터 독립될 수 없다. 이 점은 모든 학문이 다 마찬가지이다. 아퀴나스의 잘못은 철학을 신학과 구분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으로 부터의 독립이 바로 철학을 신앙으로 부터도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간주한 점이다. 그는 철학을 자연적인 그 무엇으로 보고 이것은 이성이 있는 인간에게 있어 어느 누구에게 있어서나 공통적인 것이요, 자연적인 것이므로 철학의 영역에서는 기독교인이나 이교도가 공통적이며 중립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철학의 영역에 있어 이교도 철학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다.


(나) 자연신학


1. 아퀴나스는 단지 철학이 신앙의 진리를 설명하는 철학적 도구역활을 하는 것 이외 자연인들 사이에 통용되고 설득력있는 신학서론적 역활을 하는 자연신학을 구성하는 효용이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아퀴나스의 "자연신학 (natural theology)"이란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경험적 이성에 의존하여 사고함을 통해서 철학적으로 신학의 주제들에 접근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그는 신존재와 성격에 대한 문제를 다룸에 있어 철학적 접근을 마지 않았다. 참고로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자연신학이란 계시에 의존함없이 이성적 논증에 의하여 종교적 진리를 정립하려는 기획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자연신학의 두 중심주제는 신존재 증명과 영혼의 불멸성 논증이다.


2. 예를 들면 그는 신의 개념, 완전한 존재로서의 신 개념 자체에 신존재가 증명된다는 안셈의 본체론적 증명을 배격하고 경험적인 (논리적인), 즉 경험계의 사실을 통해 귀납적으로 또는 목적론적 증명이 요구됨을 주장하였다. 그런 논증의 필요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 (그는 제일철학, 신학이라 불렀다)의 신학적 요소를 이용한 새로운 신존재 논증으로 충족된다고 생각하였다.


3.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원리를 사용하여 5가지의 신존재 증명을 중심으로 자연신학을 발전시킨다. 그는 철학적으로 신의 본성을 알지 못할지라도 그의 존재는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4. 아퀴나스가 채용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신성의 존재 증명의 소위 5개의 길 중 첫 세가지를 포괄하는 바, 첫번째 방법은 소위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 논증을 변형한 철저하게 논리적 증명이었다. 우리 경험은 모든 영역에서 변화와 운동으로 충일하다. 모든 운동에는 원인이 있다. 그 원인들 뒤에는 궁극적인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은 운동이 아니다. 이는 바로 제일원인 The First Cause요, Unmoved Mover 부동의 동자 不動 之 動子, 이가 바로 신 즉 순수형상으로 완전하고 완벽한 존재인 것이다.

        

5. 둘째 방법은 우연성-필연성 논증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연적으로 타에 자신의 존재를 의존하고 있다. 존재의 현존은 자기설명적이지 않으며 그것이 생성한 보다 넓고 큰 배경에서만 이해된다. 그러나 이 큰배경 역시 더 큰 배경을 요구하고 이렇게 계속 확산되어도 궁극적인 설명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이해와 설명을 요구한다. 그것을 얻을 때까지 안식이 없다. 이 우주는 존재론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요 그의 존재가 타에 의존적이지 않은 영원한 존재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이해될 때에만 그 현존과 의미가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궁극적 존재는 하나님이다. 


6. 완전성 (완전자의 존재 필요성) 논증과 다섯번째의 목적성 (화살이 과녁을 지향하듯 우리의 의식도 완전한 존재, 최종적 목적으로 하나님을 향하므로 그 목표가 있어야만 한다는 ) 논증도 곁들여져 있다.


7. 부정의 방법 (via negativa): 하나님 존재의 증명은 자연신학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자연신학에서 신의 속성에 대한 논의가 불가능한가? 단순히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성품, 즉 속성에 대한 불가지론적 부정이 아니다.  Contra Gent. I. 14 에서 "하나님의 실체는 그 무한함으로 인해 우리 지성이 지니는 모든 형상을 초월해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인지 아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실체에 대한 모종의 지식을 갖는다." 이것이 바로 부정의 방법 (via negativa),  소거의 방법 (via remotionis)이다. 일종의 용각산 방법-....입니다가 빠진  (예: 하나님은 책상이 아니다, (인격이시다), 사람도 아니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으신다) 이런 방법을 무한대로 밀고가면 결국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해로 접근한다는 것.


8. 그러나 심지어 아퀴나스 조차도 자연적 신학에서 하나님에 대한 긍정적 지식도 가능한 부분이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선하심, 예지등은 완전한 말이 아니고 그 본질이 온전히 담기지는 않았으나 우리의 지성한계 내에서 이해된 것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

        참고사항: 자연과 은총의 위장된 성경적 기초 (롬1:19-20, 2:14-15)

                1. 롬 1:19-20의 이성의 자연적 빛 (natural light of reason)에 의해 하나님을 아는 것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보고 이것을 자연신학의 기초로 삼는다.

                2. 그러나 바울은 이 맥락에서 일반계시를 언급하고 있다. 그가 18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죄인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이들의 성향을 보이고 있음도 분명히 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 계시는 신앙으로만 이해되고 믿어지고 알게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22절에서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라고 이방인이나 헬라인 모두를 질타하고 있다.

                3. 롬2:14-15의 율법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다는 귀절도 역시 일반계시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이방인, 헬라인들의 강력한 반역에 대한 바울의 강조점이 부각되는 본문의 맥락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9. 또 하나 자연신학에 있어 중요한 부분은 類推論, 類比論 doctrine of analogy (어떤 특수한 경우에서 다른 특수한 경우를 미루어 짐작하는 것, 동물의 숫컷의 성격에서 남자의 성격 짐작하기...) 로서 하나님을 알되 그가 계신 그 모습대로 알 수 없고 단지 그가 어떤 분이셔야만 한다는 논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 그 이유는 그가 만물의 초월적 근원으로서, 이세상에  모든 것들은 피조물에 대한 말이므로 그것을 하나님께 적용할 때 거기에는 본질적으로 표현못할 차이가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반틸은 꺼꾸로 적용하여 선, 덕등이 하나님께 적용된 것을 인간에 유비적으로 적용한다 했다.)


(다) 계시신학의 필요성

        

1. 아퀴나스는 이성과 신앙을 예리하게 구별했다. 신학은 계시에 의존하며 철학은 이성에 속한다. 그러나 이성의 권위는 철학의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고 신학에 까지 미친다. 신학의 분야일지라도 이성으로 이해되는 것은 이성의 힘으로 탐구하려고 한 다. 이것이 자연신학이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어느 정도 철학에 의하여 논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인간 이성에 의한 철학 연구 외에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지식이 인간 구원에 불가결하다고 강조하였다.


2. 이성은 알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한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제일의 지식이요, 인간의 목적이라고 보았으며, 이 목적의 성취는 반드시 가능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형이상학의 영향과 자연신학이 철학의 최종적인 한계부분이므로) 그러나 이성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이 만물의 제일원인 이며 그 피조물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를 알 수 없다고 보았다.


3. 이성은 길을 지시하고 인도할 수 있으나 그것의 목적인 하나님을 앎을 완성하는 것은 계시뿐이다. 그리하여 철학은 신학의 또는 교회의 종 (ancilla ecclesiae)라고 보았고, 이 역활을 담당할 때에만 그것은 온전한 것이다.


4. 뿐만 아니라 철학, 자연신학은 고도의 노력과 평균이상의 지성, 연구능력, 고차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견되는 진리는 오염된 진리가 많다. 과학적 지식의 오류도 무섭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오류는 더 큰 문제이다.


5. 즉 기독교의 기본교리, 즉 삼위일체, 성육신, 육체의 부활등 이성영역의 밖에 속한 교리는 그것이 이성과 상충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초월한 것으로 성경과 교부들의 전통에 의해 전달된다. 이것을 계시신학이라 한다.


6.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의 관계는 신에 대한 지식에서 잘 드러난다. 첫째, 신의 본질은 인간의 유한한 이성으로 인식될 수 없으나 신의 존재, 영원성, 창조적 능력, 섭리등은 계시를 떠나서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다.


7.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이르러 일반계시와 특수계시로 나누는 생각과, 바르트와 부른너의 자연신학, 일반은총 논쟁은 유명하다. 부르너는 창조 가운데는 하나님의 진리 계시가 있다. 그러나 유효한 자연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의 계시와는 무관계한 하나님과의 접촉교리라고 정의한다. 이들은 일반계시를 자연신학으로 연관시키지 않고 자연적인 것에 관한 신학으로 이해한다. 


8. 이러한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의 관계 규정의 이면에는 아퀴나스의 철학적 신학 체계 전반을 기초하는 기본 동기, 전제인  자연/은총의 구조적 인식이 존재한다.  


(라) 자연과 은총


1. 13세기의 인식론적 문제의 핵심은 희랍적 이성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 토마스는 이 문제를 자연과 초자연의 구분을 통해서 대답한다. "... 은총의 선물들이 자연의 선물들 위에 더해지되 그것이 후자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는 방식으로 더해졌다." (신앙의 빛이 이성의 빛을 파괴하지 않는다). Gratia no tollit naturam, sed perficit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완성한다.)


2. 뿐만 아니라 이 둘 사이에는 조화가 있다. "만약 철학자들의 가르침 가운데 신앙에 상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본래 철학이라기 보다 이성의 불완전성에 기인하는 철학의 오용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보듯이 이성의 자충족성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 없다. 또 철학의 오용은 이성 그자체에 의해 밝히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인용문은 인문학부의 어떤 교수들의 주장처럼 신앙에 병립하거나 대립되는 '이중적 진리'를 배격하고 진리란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임을 보인다. 하나님께서 이 둘의 근원이시고 조화를 보증하신다. 이 조화론에도 결국 유출 (앎의 욕구)과 회기 (앎의 완성으로서의 계시, 은총) 라는 순환주제가 엿보인다. 


3. 여기서 gratia perficit naturam의 주제가 나온다. 기독교 삶은 자연적 질서의 완성이다. 3. gratia prae-supponit naturam (grace presuppose nature). 자연은 은총의 prae-ambula이다. 이러한 이유로 토마스는 자연과 초자연적 목표를 말한다.


4. 이와같이 아퀴나스에 있어 자연은 은총에 이르는 독립적인 디딤돌이요 기독교적 상부구조의 하부구조였다. 그는 성경의 하나님을 제일원인으로, 또 자연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명하였다.


5. 그러나 이러한 토마스의 근본 사고 구조인 자연과 은총의 종합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내포되어 있다.

        A. 희랍철학의 무비판적 수용에서 오는 철학적 문제점들:

                1. 그의 자연의 개념은 희랍철학의 자연의 개념에서 유래하였고 따라서 희랍적 자연의 개념과 다르지 않았다. 이 자연의 개념은 희랍의 질료 (matter)와 형상 (form)의 개념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자는 농경사회적 초기 자연종교의 정신을 후자는 도시국가적 문화종교의 정신을 반영한다. 전자는 무형식적고 혼돈과 무질서, 순환적인 존재를 궁극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 후자는 초자연적이며 불멸적, 이성적 형식을 가진 신들의 등장이 있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질료와 형상의 이원적 희랍정신을 하나의 체계로 단일화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질료의 세계인 자연을 생성, 성장, 성숙의 목적론적 원리를 지닌 일종의 형상으로 봄으로서 질료와 형상을 하나로 만들려 했다. (도토리는 상수리 나무가 되려하는 형상을 지닌 그 무엇으로 보았다.)

        

        B. 결과적으로 발생하는 신앙상의 문제점들:

                1. 하나의 삶을 두 극단적 요소로 분리하여 이원화한다. 자연의 동인은 이성으로 하여금 은총의 신비를 심판하여 부정하고 소멸시킬 위험이 있다. 이성으로 납득되지 않는 것, 부정하지 않더라도 그 실질성을 약화시킬 것이 분명하다.

                2. 다른 한편으로 초자연적 은총은 신비적 경험속에서 죄악된 자연을 도피하도록 만든다. 또 그 결과로 금욕주의와 세속 도피로 이끌리는 신비주의의 위험에 빠진다.

                3. 이 둘 사이의 접촉점이 부정되어 자연과 은총은 독립적인 그 무엇이 된다.

                4. 타락이 종교적, 윤리적 성격아닌 일종의 결핍으로 이해된다.


(마)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비판


1. 오캄의 도전: William of Ockham (1280-1349) 프란체스코파 수도사로서 로마 카토릭, 토미즘의 이원론적 성격에 반발하여 그 체계에 의하면 이 둘 사이에 아무런 접촉점도,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연이 은총을 예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단정하고, 교회는 자연적 삶 속에서 초자연적 인도자의 권한이 있음을 부정하였다. 즉 은총이 자연에 대해 갖는 내재적 가치를 박탈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은 오로지 죄악된 세상을 다스리는 엄격한 도구였다.


2. 루터 (1483-1546)/멜랑흐톤 (1497-1560) 의 이원론적 성격: 루터는 자연적 삶과 초자연적 기독교의 구분을 지운 오캄의 이원론에 영향을 받았다.  루터의 경우 이 갈등은 율법과 복음의 대립으로 이해되었다. 그는 율법을 "죄악된 자연"으로 격하하고 복음적 은총에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위에 서있는 존재들이다. 구속은 은총으로 하여금 자연을 삼키우게 하는 것이다.


3. 루터파에 있어 자연이성에 인도된 정의와 질서는 세속적 문제들이었다. 정의는 율법의 영역, 즉 죄악된 자연의 영역으로 세속 권세에 맡겨진 것이었다. 오직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집전만이 은총의 영역에 속한 것이었다. 따라서 루터파는 심지어 교회의 행정적 조직내지 재정적 제도마저 국가가 관장하는 것을 허용한다. 교회는 단지 성례전과 말씀 선포를 그 영역으로 갖는다. 이것이 그들의 국가교회의 개념이다.


4. 수도사 출신 루터와 달리 멜랑흐톤은 인문주의자였다. 철학에 무관심하던 루터와는 달리 멜랑흐톤에게 있어 철학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5. 칼 바르트나 부르너, 고가르텐등의 변증법적 신학, 신정통주의는 바로 이러한 자연과 은총의 대립적 반정립을 기초한 접촉점 부정의 사고에서 뿌리를 내리웠다. 이들은 토미즘의 종합의 정신에 대해 대립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자연은 은총의 준비나 디딤돌이 아니라 별개의 질서, 오히려 대립적인 질서였다.


(바) 스콜라 철학의 기초


1. 자연/은총의 공식으로 대변되는 스콜라 철학의 기초는 이미 초대교회의 여러 교부들에게 있어서 준비되었다. 스콜라주의의 핵심은 희랍사상과 기독교의 종합의 추구다. 만일 기독교 신학이 희랍적 기초에 따르는 철학에 따라 운용된다면 이러한 종합은 성공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으로 이들은 생각했다.


2. 이 일에 큰 몫을 담당한 것은 어거스틴이었다. 어거스틴은 물론 철학의 자율성을 부정하고 그것은 신앙으로 안 것을 더 잘 알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였다. 신앙은 철학 사상을 안내해야 하고 그러한 안내 없이 철학은 이방적 신앙에 의해 지배되고 말 것이었다.


3. 따라서 철학은 신학적 체계, 준거틀 안에서만 다루어져야 하고, 교의신학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다. 그는 신학이론이 기독교 신앙과 동일한 것으로 가정하고 그것의 기준에 따라 철학을 기독교화 하려 했던 것이다.


4. 어거스틴의 기독교 신학에 대한 이해가 문제이다. 그는 철학적 이론이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에 이르는 길로 여기는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이점은 그의 신학이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이해의 영향을 깊이 받았음을 보여주는 점에서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기본원리 (즉 그에게 있어서 신, unmoved mover)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을 심지어 "신학"이라고 보면서 학문의 여왕으로 추대했었다. 형이상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이자 지배자로 어느 무엇도 그것에 배치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어거스틴에게 있어 기독교 신학은 바로 기독교 교리에 대한 과학적 이론인 철학적 신학이었고 그 성격 규정에 있어 희랍적 형이상학과 다름 아니었다.


5. 중세 기독교 사상가들 사이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많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에 영향을 주던 플라톤주의는 물론 신플라톤 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한 요소로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보나벤튜라와 같은 신학자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주된 철학적 영향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왔다.

        

(사) 결론적 관점


1. 카토릭과 종교개혁의 근본적 차이는 자연과 은혜의 관계에 대한 상이한 견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개혁자들에게 있어 은총은 인간 본성의 高揚이 아니라 회복이요 해방이다. 즉 방향성에 관한 문제도 언급된다. 인간의 본성은 관계적 relational이라고 본다. 그러나 토마스는 자연의 개념에 사물 그자체들의 존재론적 일관성에 대한 표현이 나타난다.


2. 물론 토마스에게 있어 자연이 피조물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적) 관계임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 관계성을 (비본질적인, 우연한) 범주 (the accidental categories)의 하나로 본다. 즉 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모두 본질 이후에 나오는 비본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세계의 관계가 피조물의 본질에 후속한다는 문제를 낳으므로 여기에 새로운 관계, 즉 범주적 관계가 아닌 초월적 관계 (not catagorical but transcendental)를 필요로 한다.

        

3. 토미즘의 또 다른 문제는 그것이 인류를 두종류의 목적으로 갈라놓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화란 철학자 쉴레벡스가 말한대로 토마스는 이원론 으로 삶을 나누기보다 오히려 그의 가장 깊은 의도는 인간의 삶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삶, 하나의 마지막에 예정된 바, 근원과의 관계 속에서 움직이고 존재함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VI) John Calvin (1509-1564)


(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1. 요한 칼빈의 역사적 배경에는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이대 운동인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있다. (토미즘의 발전에는 중세의 암흑시대로 부터의 문화중흥 운동이 대학이라는 기관을 통해 일어나는 배경이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칼빈의 이해에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해가 중요하다.)


2. 어거스틴, 아퀴나스 등이 지배하던 중세의 지적 분위기와 16세기로 부터 오늘에 이르는 지적 분위기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시대는 문화적으로 인쇄술 (구텐베르크, 코스터)와 나침판의 발명, 중산계층의 부상, 무엇보다도 "고전적" 자연과학 (티코 브라이헤, 코페르니쿠스, 갈리레오) 의 급속한 발전, 그리고 르네상스에 의한 예술의 중흥 (레오나르도 다빈치), 인문주의 (에라스무스) -고대 문헌학, 원어성경 편집등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이 열리던 시대였다. 


3. 르네상스는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서 개체성, 활력, 고전적인 미와 신비적 열정을 증거하며 주로 남유럽의 도시귀족 (후로렌스의 메디치가)와 상류 시민사회 (아우버그의 휴거 은행가), 그리고 로마 고위 성직자들 (교황 쥴리어스 2세와 레오 10세) 등의 환영을 받았다. 르네상스는 이와같이 소위 high class/ high culture와 연관된 지적이고 엘리트적인 운동이요, 인문주의와 연계가 깊은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이상은 全人의 회복이며 사람의 완성에 있었다.


4. 반면 종교개혁은 주로 조직된 교회의 생활과 교리에 촛점을 두고 회개를 촉구하면서 북유럽 대중들의 반응을 일으켰다. 종교개혁은 high culture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복음을 상실한 결과 어두움과 영적 무지에 싸인 사회에 다시금 복음의 빛을 밝히는 운동이었다. 루터의 경우 이 점이 두드러 진다. 종교개혁의 이세대요, 종교개혁의 원리를 문화의 영역으로 확대했다고 할 수 있는 칼빈 조차도 그의 이상은 최고급의 high culture를 지향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불신, 인본주의 사상과 싸우고 그 문화적 이상에 대치되는 참된 성경적 자세, 세계관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회복하는 것, 즉 신본주의적 문화를 경건의 기초에 세우는 것이었다.


5. 예: 프랑스 빵이 왜 맛있는가?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 먹기위해서 일하는 것, 즐기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서 먹는다. 이러한 철학과 세계-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음식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얏고 고운 가루에 온갓 향료를 넣은 빵들, 바게트, 크레송등 다양한 맛진 빵을 만들어 내는 남부 유럽의 문화, 멋과 정취, 예술의 프랑스, 이탈리와 실질, 효율 위주의 삶, 근면 성실, 검약, 청빈을 자랑으로 삼는 북유럽 (빵도 시커먼 보리빵에 어걱 어걱 씹히는 거친 가루 사용한다.) 불란서 사람들 초대 받아 가면 5시부터 새벽 두시까지 훌-훌 코스 디너 먹고 디저트에 포도주까지 먹으나 (배불러 못먹겠다 하면 멋모르고 예의없는 사람) 화란에서는 커피 두번째, 두번째 찻잔 채우면 가라는 이야기 이다. (거기에 나는 차 좋아한다 어쩌구 하면 무식하고 교양없다는 이야기 듣는다.)

        

(나) 초자연주의에 대한 반발


1.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비롯되는 중세적 세계관의 기초인 자연/초자연 영역의 구분 과 종합은 단지 이론적이고 문화적 의의 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의의도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신학과 철학의 이분과 종합구조, 희랍-로마문화 유산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관계, 그리고 신적으로 정위된 사회의 계층적 질서의 관점등이 그것이었다. 초자연주의는 교회가 주도하는 단일문화적 견해를 정당화하는 기초를 제공하였다.

        

2. 중세말 William of Ockham (1285-1349/50) 같은 이에게서 보듯 이 세속적인 하층의 자연과 영적인 상위의 초자연의 조율은 의심받아 두영역 이론은 신빙성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프란체스코파 수도사로서 로마 카토릭, 토미즘의 이원론 적 성격에 반발하여 그 체계에 의하면 이 둘 사이에 아무런 접촉점도,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연이 은총을 예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단정하고, 교회는 자연적 삶 속에서 초자연적 인도자의 권한이 있음을 부정하였다. 즉 은총이 자연에 대해 갖는 내재적 가치를 박탈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은 오로지 죄악된 세상을 다스리는 엄격한 도구였다.


3. 결국 신앙과 이성 사이를 신앙은 이성을 취소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방식으로 종합을 꾀하는 시도 보다 더 실재에 대한 통합적인 경험을 위한 탐구가 도처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르네상스 철학과 거기서 파생한 서구적 합리론에 있어 초자연적 실재에 대한 관념은 신속하게 완전히 도외시 되거나 아니면 무용지물이 되었다.


4. 신앙과 종교는 私的인 문제가 되고 18세기 에는 합리주의와 경건주의가 동시에 번성하면서 19세기 까지 철학은 종교에 대한 극단적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적 실재의 초자연적 성격이 철학적 논제가 되면서 신의 개념이 변화하였다. 신은 데카르트 (1596-1650)에서 인간 이성의 기반과 보증이요, God intoxicated man, (pantheism) 스피노자(1632-77)의 natura naturans에서 처럼 자연 그자체의 창조적 능력으로 보게되었다.


5. 또 독일의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신비주의 수도사 출신의 철학자 니콜라스 쿠사 Nicolas Cusanus (1401-64),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내용을 신학적-형이상학적 함축을 찾아 전개한 사람인 Giordano Bruno, c. 1548-1600)에서 보듯이 이탈리 르네상스 에서 벌써 신과 인간은 동등하게 취급하는 범신론적 사고가 있었다. 즉 무한적 대우주의 세계-영혼인 하나님과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소우주로서 신에 흡사한 보게되었다.

        

6. 종교개혁 또한 이런 반초자연주의에 합세하였다. 물론 그 방향은 다른 것이기에 헤겔이나 딜타이의 생각처럼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같은 방향에 둘 수는 없는 것이었다. 초기 인본 (문)주의자들은 교회를 떠날 생각을 갖고있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나 시간이 감에 따라 이 두운동이 영적으로 상호조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 명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 종교개혁자와 인문주의자의 왕자의 자유의지론 대립--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을 연상케 하는 이 논쟁에서 이 두운동의 차이가 잘 드러나 보여진다. 또 피코델라 밀란돌라의 인간 예찬론과 요한 칼빈의 전적부패와 전적 무능력의 인간론, 루터는 에라스무스를 뱀장어라 불렀다.)


7. 그 출발점이나 정신에 있어 이 두 운동은 서로 상극이었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고대 희랍-로마 고전에서 영감을 얻는 반면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샘에서 그들의 물을 길어냈다. (심지어 신격화된 자연이성의 빛의 인도와 시적 상상력의 창조성을 따르는 전자와 sola fide의 믿음을 기초로 시작하여 성경 계시의 빛에 따라 sola scriptura 걷는 후자)

        

(다) 종교개혁의 독특성


1. 르네상스의 자연과 자연적 삶의 숭상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1452-1519)의 예에서 보듯 homo universale 즉 신격화 (apotheosized)된 인간상에서 예시된다.  즉 그의 인간은 우주의 형상으로서 (소우주) 창조적으로 자신을 개진하는 자충족적이고 창조적이며 교화된 교양인의 이상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이상은 곧 데카르트에게서 보듯 자충족적이고, 창조적이며, 재구성적인 이성으로서의 인간 즉 cogito의 이성주의적 이상에서 일방적이고도 극단적 축소를 낳았다.


2. 그러나 마틴 루터 (1483-1546)에게서 예시되듯이 종교개혁은 전혀 다른 인간상을 가졌다. 거기에는 죄와 허물에 대한 고뇌와 갈등의 깊음에서  하나님 자비로 나아오는 경험이 중심을 이루어 르네상스적 자연주의의 여지가 없었다. 부패 함없는 자충적적 자율적 인간 대신 sola gratia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에 전적으로 의지한 그 앞에서의 삶 coram deo의 이상이 있었다. 이러한 관계성의 바른 정립에서 비로서 인간은 참된 완성과 통합에 이르게 된다.

        

3. 종교개혁에 있어 르네상스적 자연주의가 배격되나 스콜라적 초자연주의도 또한 배격되었다. 실상 자연주의는 자연에 제한적 자율 (naturalia manent integra, nature remained intact)과 인간 이성의 일정한 자충족성을 허용한 중세적 (아퀴나스적) 전통에서 그 씨앗이 이미 뿌려졌던 것이다. 이러한 허용은 시간이 감에 따라 인간적 자율성, 보편성, 완전성에 관한 보다 포괄적이고 무제한적인 이상 (a broader, unqualified ideal of human autonomy, universality, and integrality)을 예비하게 된 것이다.


4.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전혀 다른 길을 가고자 했었다. 적어도 그 원리에 있어서는 그랬으나 실제에 있어서 범람하던 초자연주의 사상을 극복하기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워낙 강세에 있던 이 비기독교 사상에 대해 종교개혁적 입장은 부정적이고 대립적 자세이외 어떤 다른 자세를 가지기 어려웠다. 그래서 루터는 이성을 창녀라 하고 믿음이 이성을 죽인다 했던 것이다.


5. 칼빈은 이 문제를 보다 첨예하게 거론했다. 칼빈은 고전과 중세문화에 아주 익숙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는 전문적 철학자는 아니었고 심지어는 학문적인 목적으로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 신앙과 당시 철학 적 문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조직적 분석의 논문을 남긴 일이 없다. 그는 첫째 개혁자요, 교회의 교사로서 학문적이기 보다 실천적이요 목회적이었다. 그의 목표는 성경을 해석하고 그에 따라서 교회의 교리를 새로이 구성하고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그의 신학의 핵심어는 "경건 piety"였다.


6. 학문과 문화에 대해서는 이 주된 관심에 연관하여 기독교 신자의 공동체의 믿음을 세우는 일에 주로 관심을 두고 있다.


(라) 칼빈과 philosophia christiana


1. 특히 칼빈에게 있어 종교개혁은 단지 교회적 또는 신학적 프로그램이 아닌 정치, 경제, 도덕, 사회적 관계들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즉 칼빈에게 있어 종교개혁은 스트라스버그, 제네바, 불란서, 화란, 스코트랜드에서 보듯 세계를 개혁하는 능력 (world-transforming force)이었다.


2. 그러한 만큼 그것은 학문세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philosophia christiana"라는 말을 분명하고 독특한 기독교적 인생관이란 의미로 사용하였다.


3. 칼빈이 처음으로 "기독교 철학"이란 말을 쓴 것은 1533년 파리대학에서 행했던 종교개혁 특유의 논조요, 그 때문에 망명하지 않을 수 없게된 유명한 Beati pauperes spiritu (blessed and the poor in spirit) 라는 Nicholas Cop 연설에서 였다. 또 1541년의 불어판 기독교 강요 서문에서도 그는 'la Philosophie Chrestienne'라는 말을 쓰고 있으나 이들은 20세기적 기독교 철학이라기 보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 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의미하고 있다.


4. 그는 또한 동시에 이교도의 저자들의 글이 "진리의 존경할 만한 빛"을 발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강요 3권에서는 자신이 아는 모든 철학을 "이성의 철학"이라 부르고 비판하면서 기독교철학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강요 3-6-7, 노트 8) 거기서 칼빈은 모든 철학자들이 바울이 엡4:23에서 말한 성령께서 마음을 변화시키심에 대해 무지함을 말하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들이 이성만을 인간의 지배원리로 세우고, 그것 만이 청종되어야 하며, 그것에 만 삶의 행위를 내맡기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철학은 이성으로 하여금 성령에 물러나 복종하고 자신을 굴복시킬 것을 명한다." (III,7,1)


5. 즉 기독교철학은 첫째로 순종적인 철학이어야만 한다. 그 자체를 지혜의 원천으로 선언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며 그의 뜻에 의지함을 알아야 한 다. 그것은 이성이 스스로 만으로는 인도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칼빈이 당시의 철학을 배격함은 그것이 이성에게 인간의 지배원리라는 의미의 자충족성을 부가하기 때문이다.


6. 여기서 순종적 기독교 철학은 하나님 말씀에 의해 인도되는 철학으로 결국 성경적 철학을 말한다. 이는 또한 성령의 역사로 새롭게된 마음 (삶의 모든 부분과 연관된)의 철학이어야 한다.

        

7. 제네바에 대학을 설립한 칼빈은 이성적 사고를 비이성적으로 배격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죄로 말미암아 맹목이 된 (II,1,9) 마음이 성령으로 새롭게 됨 (엡4:23, 롬12:2)을 강조한다. 기독교철학이 단지 성경주의 이상으로 철학적 주장들을 성경의 메시지에 외적으로 적당히 맞추거나 조절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나는 살아있는 영성으로 어떠한 세상적 철학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8. 칼빈의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철학의 기초가 겸손 (humiltas)이라고 말한 크리소스톰에 동의함에서 또 다른 주제로 나타난다. (II,2,11 어거스틴의 연설과 전달의 비유처럼 기독교 철학, 종교의 첫,둘,세째 원리는 모두 겸손이라.) 칼빈에게 있어 겸손은 의존성, 개방성, 수용성, 즉 하나님의 뜻과 그의 말씀과 그의 영과의 연합등 이성이 가져야 마땅한 특성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말한다.

        

(마) 전적부패 (corruptio totalis) total deprevity


1. 아담이 의의 샘을 저버린 후 지성을 포함한 영혼의 모든 부분이 죄에 사로잡혔다. (II,1,9) 그리하여 복구 아닌 전적 재생이 필요하게 되었다 (restoration is not enough but total renewal is required.)


2. 스스로의 지성을 믿는 것도 잘못되고 (II,1,2,3) 自力 (self-power, autexousios)이란 뻔뻔스런 철학자들의 억지에 불과하다 (II,2,4) 칼빈의 이러한 비판은 이성은 죄로 인해 손상되어 초자연 영역에서 무능하나 자연영역에서 능력있다는 donum superadditum, gratia infusa등의 자연/초자연의 이원론적 가르침에서 자신을 멀리하는 효과를 낳는다.


3. 이 교리가 모든 죄가 동등히 악함을 말하거나 칼빈 특유의 죄 "비관론 (sin pessimism)"을 말하지 않는 것은 결국 sola gratia가 corruptio totalis의 세력을 이기기 때문이다. 죄가 인간과 세계의 구조를 바꾸는 존재론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형이상학적으로 보지 않고 "방향전환 (a change of direction, not new but renewed nature)"으로 보는 것이다.

        

4. 중세의 자연 자충족 사상과 계몽시대의 이성의 빛의 덕에 충분성에 반하여 칼빈은 이성의 자연적 빛을 "맹목"으로 여긴다. (II, pref., 13) 나아가 교부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철학자들에게 너무도 가까이 가서, 성경을 절반에서 조화시키려 한적이 있음을 지적하고 (II,2,4) 이를 배격한다. 하지만 이런 배격의 자세가 세속작가의 지혜를 전적으로 배격하는 것으로 나가지는 않는다. "인간의 왜곡되고 부패한 성품 속 (특히 인간 이성 속)에 얼마간의 빛이 여전히 빛나고 있다"  (II,12, 12; 참고 I, 5, 14; I,2,19).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들로 옷입고 장식되어 있으며 (II,2,15) 따라서 과학, 법, 예술등과 같은 부분에 성취가 가능하다. (II,2,14) 그러나 이것을 인간 자연적 성취나 재능으로 간주하기 보다 하나님의 영의 선물들로 보아야 한다. (II,3,4)

        

5. 일반은총: 칼빈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kindness, II,2,17;  I,5,14), 그의 자비와 인자 (III,3,25), 모두를 또는 일부를 향한 특별한 은총 (II,2,14) 또는 죄의 영향을 제어하고 인류와 개인을 선물들로 복주시는 섭리 (II,3,3)을 언급하고 있으나 카이퍼에서 보는 것과 같은 조직적 일반은총을 논한적이 없다.  그는 자연과 은총을 병립시키지 않고 죄와 은총을 병립시킨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화란적 신학에서 보는 일반은총 논쟁 (1924년 Herman Hoeksema's Protestant Reformed Churches in America; 1944 Klaas Schilder's Vrijgemaakte Gereformeerde Kerken)의 소지가 없다.

        

6. 죄의 잠행성 (The insideousness of sin): 칼빈은 죄악에 떨어진 인간이 여전히 통찰력과 이해의 선물을 간직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두기보다 이 하나님의 선물이 불신자의 삶속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규명함에 있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에 아니면 그것이 개인의 소유와 권세와 명망을 높이는데 쓰이는가? 후자의 경우 그것은 자연적 선의 증거일 수 없다. (II,3,4) 여기에는 롬1장 특히 21의 증거, 하나님을 알되 감사치도 않고 상상력에 헛되고 마음이 허망해져 하나님을 알지만 동시에 참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음을 증거로 제시한다. 

        

(바) 겸손의 철학


1. 철학에 대한 칼빈의 자세는 근본적 비판과 진정한 숭앙을 엿보인다. 비기독교적 철학에 대한 그의 견해는 기독교인이 살며 숨쉴 수 있는 집이 아니나 그렇다고 완전히 허물어 버려야할 것도 아니다. 또 참과 거짓이 첨삭가능하도록 분리되어 있어서 상황의 요구에 따라서 어떤 부분은 헐고 어떤 부분을 복원하여 보존할 이둘 의 종합은 더우기 아니다.


2. 칼빈은 이성이 빛을 발하기는 하나 그것은 짙은 무지로 억눌려 제대로 나올 수가 없다고 한다. (II,2,12) 이러한 이중성을 감지한 칼빈은 매사에 조심스레 평가한다. 그는 비기독교적 사상을 적어도 그 가장 고상한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죄로 물들지 않은 양 감지덕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하나님 자신이 저버리시지 않으신 문화발전을 업신여길 권리를 가진 냥 그것을 무조건 무시하지도 않는다. 또 그 둘 가운데 기독교인이 기독교와 비기독교의 부분적 진리의 조야한 종합 (rudimentary synthesis, a half-harmonization, II,2,4)을 꾀하지도 않는다.

        

3. 칼빈의 대안은 우리 철학의 기초가 겸손이라는 것이다. (즉 비기독교 철학의 자율성, 자충족성에 대한 비판 그 자체가 자율적이거나 교만의 발로로서 자율을 또 하나의 기독교적 자율로 비판함이 아니라 겸손과 온유여야 한다는 것으로 이는 바로 벧후3:16의 정신과 통한다.)


4. 비기독교 철학은 자충족성의 관념에 사로잡혀 겸손의 기초 즉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의 기초가 결여되어 있다. 그가 이 자충족성이 자기-교만과 가장된 불충분 성인 점을 보여 혹독히 비판한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닫혀있는 자충족적 사고도 그 생명과 동력은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고 부딛침으로 부터 얻는다.


5.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기독교와 비기독교 철학의 가능성 그 자체의 전제조건, 즉 초월적 조건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나는 그곳이 어디이건 간에 (wherever God's truth manifests itself) 심지어는 그것이 비기독교 철학자들의 작품들 속에서 희미하고 억압된 개념들 속에서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향해 마음을 열  겸손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열린 마음과 비판적인 마음으로 들음을 호소함 (an appeal to listen, open-mindedly and critically)  이외에 어떤 무엇도 아니다.



(VIII) 일반은총론


(가) 이방인의 덕 (pagan virtue)의 문제에 대한 고대와 중세의 해결


1. 성경적 근본진리인 창조, 타락, 구속의 교리에 대한 일관성있는 논리적 결론은 절대적인 종교적 대립 (absolute religious antithesis) 이다. 이 절대적 대립의 성격이 성경적 근본진리에 대한 이방적 (주로 희랍적) 요소의 혼합으로 말미암아 흐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왔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바른 대립의 개념은 타락으로 인해 죄악된 반역적 성향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의 원리의 개입으로 빚어지는 근본적인 충돌을 말한다. 


2. 그러나 이 절대적 대립의 개념은 비기독교적 문화에서 나타나는 부인할 수 없는 선함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듯 하다. (또 전적으로 부패한 비기독교인들과 달리 거듭난 기독교인은 전적으로 선해야 하는데 과연 그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칼빈주의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Sin places before us a riddle, which in itself is insoluble. If you view sin as a dealdy poison, as enmity against God, as leading to everlasting condemnation, and if you represent a sinner as being "wholly incapable of doing any good, and prone to all evil," and on this account salvable only if God by regeneration changes his heart, then it seems as if of necessity all unbelievers and unregenerate persons ought to be wicked and repulsive men. But this is far from being our experience in actual life.  On the contrary the unbelieving world excels in many things. Precious treasures have come down to us from the old heathen civilization.... Yea, we may not pass it over in silence, not unfrequently you entertain the desire that certain believers might have more of this attractiveness, and who among us has not himself been put to the blush occasionally by being confronted with what is called the "virtues of the heathen?" (Lectures on Calvinism, pp. 121f.)


3. 만약 이 문제를 피하기 위하여 이방인의 덕을 인정하고 그들의 궁극적인 선함을 인정한다면 이는 또한 성경의 타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니다.


4. 아직 국가와 사회의 핍박의 위협아래 있던 초대교회 교부들이 이방인의 덕의 진실성을 의심하였던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 조차도 이방인의 덕을 "splendid vices"로, 신자들의 죄는 옛사람 아담의 품성으로 돌림으로 이 딜레마를 면하고자 했다. 또 다른 시도는 이방인의 덕들의 일부를 구약의 영향으로 설명하는 방법이었다.


5. 2세기 변증가들이나 특히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 이르면 보다 적극적으로 이방인들에게도 자연의 빛, 이성에 따라 제한적인 선이 가능함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중세의 자연/은총의 이원적 세계관이 이러한 사고의 기초에 놓여있었다.


(나) 칼빈의 일반은총론


1. 종교개혁의 일세대인 루터는 로마 카토릭의 잘못된 구원론으로 부터 교회를 해방한 공로가 있으나 그는 토미즘의 자연/은총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율법/복음의 긴장에 싸인 대립적 분리로 바꾸어 놓았다.  중세의 이원적 세계관을 극복하는 과제는 칼빈에게서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2. 칼빈은 자연인의 전적 무능력을 강조한다. 그와 더불어 그는 하나님의 주권 (sovereignty of God)과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에 주안점을 두고 강조한다. 이점은 이신칭의냐 이신득의냐 하는 Justification by faith 라는 귀절의 번역에 대한 뉴앙스에서 잘 볼 수 있다.

        루터가 주로 구속론적 관심을 가졌다면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이 갖는 우주적 원리에 더 주안점을 두었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삶의 어느 부분도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영역이 없음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는 당연히 루터처럼 율법/복음의 긴장의 구도에서 파생되는 신앙과 문화의 분리함을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3. 칼빈은 세상에 존재하는 질서와 선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선은 인간의 부패와 악이 그 파괴적인 세력을 온전히 나타내지 못하도록 그것을 제어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이다. 인간이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은총의 결과로 보존되는 그 무엇이 인간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인의 능력, 불신문화의 선은 자연인의 능력에 돌려질 그 무엇이 아니다. 이것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보존적 은총의 결과이다.


4. 칼빈이 뜻한바 이러한 보존적 은총은 대개 "일반은총"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구원하는 은총과 분명히 구분하여, 구원하지는 않으나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활동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 자신은 이 단어를 전문성을 가지고 정의한 적이 없다.


        But here it ought to occur to us that amid this corruption of nature there is some place for God's grace; not such grace as to cleanse it, but to restrain it inwardly. For if the Lord gave loose rein to the mind of each man to run riot in his lusts, there would doubless be no one who would not show that, in fact, every evil thing for which Paul condemns all nature is most truly to be met in himself. (Institutes, II, iii, 3)


5. 칼빈에게 있어 일반은총은 사람 속에 잔존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죄를 어거하는 양심과 더불어 정부도 핵심적 일반은총이다. 또 영웅적인 행위, 특별한 예술, 문학적 은사도 일반은총이다.


6. 칼빈은 삶의 전반에 미치는 죄의 영향을 간과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세상을 삶에 있어서 세상의 것에 연연하는 자세를 지양하여야 참된 기독교적 윤리로 살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선한 것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들로 그것들이 어디서 나타나던지 간에 감사로 누려야 할 것을 말한다.

        "...let this be our principle: that the use of God's gift is not wrongly directed when it is referred to that end to which the Author himself created and destined them for us, since he created them for our good, not for our ruin." (Institutes, III, x,2)

        Nonetheless he fills, moves, and quickens all things by the power of the same spirit, and does so according to the character that he bestowed upon each kind by the law of creation. But if the Lord has willed that we be helped in physics, dialectic, mathematics, and other like disciplines, by the work and ministry of the ungodly, let us use this assistance. For if we neglect God's gifts freely offered in these arts, we ought to suffer just punishment for our sloth. (Institutes, II, ii, 16)


7. 칼빈은 이와같이 그리스도인들이 비기독교인들의 성취 가운데 하나님의 일반은총 의 선한 열매를 분간하여 그것을 무시하지 말고 감사로 취하여야 한다. 칼빈은 일반은총론으로 단지 이방인의 덕이라는 난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그 덕을 죄악된 인간에 근원이 있는 것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돌리며, 나아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것을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열고있다.


8. Herman Kuiper. Calvin and Common Grace. Goes: Oosterbaan & Le Cointre N.V. 1928.


(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론


1. 프린스톤 신학교의 Charles Hodge나 Herman Bavinck도 일반은총론을 자신들의 조직신학의 일부로 다루었으나 이들의 논의는 신학적 관심에 매여있다.


2. 칼빈의 일반은총론 교리를 다시금 문화와 사회적 활동에 연관하여 부흥시킨 것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공로이다. 카이퍼는 19세기 유럽에 몰아친 근대주의의 폭풍우와 그 기조인 자유-인본주의 사상에 맞서 성경적 기독교에 입각한 세계관 정립을 시도했다. 이는 기독교가 한편으로 자유주의적인 "실천적" 기독교인과 경건주의적이며 보수적 "신비주의" 성향으로 나뉘어 자유-인본주의 사상에 참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처방이었다. 카이퍼는 특히 보수-경건주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어디고 없음을 강조하며 어떠한 이원론 적 사고도 성경적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그는 칼빈주의의 부흥만이 이 시대에 있어 재세례파적 이원론의 폐혜를 막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인본사상의 홍수를 막을 대안임을 주장한다.

        With such a coherent world and life-view, firmly resting on its principle and self-consistent in its splendid structure, Modernism now confronts Christianity; and against this deadly danger, ye, Christians, cannot successfully defend your sancturary, but by placing, in opposition to all this, a life-and-world view of your own, founded as firmly on the base of your own principle, wrought out with the same clearness and glittering in an equally logical consistency. Now this is not obtained by either Christian works or mysticism, but only by going back, our hearts full of mystical warmth and our personal faith manifesting itself in abundant fruit, to that turning-point in history, and in the development of humanity which was reached in the Reformation. And this is equivalent to a return to Calvinism. (Lectures, p. 191.)


3. 결국 카이퍼가 칼빈주의와 특히 그의 일반은총론 교리에 주목하는 것은 문화와 사회속에서 참다운 기독교적 활동 (Christian Action)을 근본에서 저해하는 잘못된 이원론과 하나님의 나라로 간주된 교회와 죄악으로 저주받은 세계 사이의 잘못된 대립의식이다. 이러한 비성경적 세계관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급진적 혁명이나 그와 반대로 그러한 혁명적 비젼이 실현불가능으로 판명될 경우 세상으로 부터 후퇴하는 성향을 부추긴다고 보았다. 이와 달리 (Zuidema의 해석에 의하면) 카이퍼는 일반은총론은...

"common grace supplies the believer with the material for fulfilling his calling to be culturally formative and to fight the battle of the Lord in the world of culture." (Communication, p. 57.)


4.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이 칼빈의 그것과 다른 점은 문화적 활동의 기초로서 그 교리를 이해하는 점이다. 칼빈은 일반은총을 이 세상에서 순례자로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누릴 세상적인 것의 내용규정이라는 기독교 윤리라는 비교적 소극적인 관점에서 생각하였으나, 카이퍼는 이 세계에서 하나님을 위한 활동을 위한 문화적 동력 (cultural force which Christian action possible in the world) 이라는 맥락에서 그리하였다. 그의 일반은총론 (Gemeene Gratie) 3권과 더불어 Pro Rege 3부작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5. 카이퍼는 일반은총을 문화가 가능하기 위하여 죄악을 제어하는 하나님의 활동에 중점두어 이해한다. 그 반면 특수은총은 인간의 마음을 거듭나게 하여 구원하시는 은총이다. 이 특수은총이 가능하기 위해서 일반은총으로 세계를 유지하신다는 것이다. 즉 일반은총은 특수은총의 기반이다.

"... the world must continue, men must be born, the course of history must show progres," [in order to be saved.]


6. 카이퍼는 일반은총을 창조의 보존과 역사의 발전을 위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의 역사로 해석한다. 이에 그는 일반은총은 bange genade, (anxious grace)라고 부르기 조차 한다.


7. 카이퍼는 일반은총과 특수은총을 구분하고 이 둘의 근원이 각기 창조의 중보이신 그리스도와 구속의 중보이신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일반은총을 특수은총과 독립된 것으로 구분하여 그것의 근원도 다른 사역을 감당하시는 그리스도에게 돌린다. 바로 이점이 후대 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게된 중요한 사항이다. 질문인즉 만일 기독교인들이 특수은총의 덕으로 "왕을 위하여" 문화사명을 감당하여 영광을 돌린다면, 비기독교인들은 누구를 위하며 무엇을 위하여 문화 창조에 나서는가? 하는 것이다.


8. 카이퍼는 여기서 비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죄와 거역하는 마음, 원하지 않으나 하나님의 목적에 봉사하고 있다는 사상을 피력하는 듯이 보인다. 그의 "케이블에 매여 급류를 건너는 배"의 비유는 이런 인상을 주기에 족하다. 만약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특수은총 아래서만 사는가? 아니면 부분적으로 일반은총, 부분 적으로는 특수은총 아래 사는가? 카이퍼는 이점에 있어서도 문제성이 엿보이는 후자를 택한다.


9. De Gemeene Gratie. 3 vols. Kampen:J.H.Kok.


(라) 카이퍼 이후의 일반은총론


1. K. Schilder는 카이퍼의 후계로 지목을 받던 사람이나 카이퍼의 신학노선이 자칫 문화 낙관론으로 치우칠 수 있는 점을 보며 그의 일반은총론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는 특히 문화가 타락이후의 창조를 보존하기 위한 일반은총의 기반에서 가능하게 된 것이라기 보다 본래 창조시에 주어진 하나님의 프로젝트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특수은총을 베풀기 위한 시간연장으로서의 일반은총 개념도 반대한다. 만약 그것이 은총이라면 온전한 구속이 이루어지기 까지 시간이 연장됨은 일반저주라 해야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2. C. Van Til은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이 일종의 문화적 중립지대를 설정하는 이론 으로 사용되며, 그러한 함축을 지닌 것을 반박한다.


3. De Graaf는 일반은총이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과 구분되는 그리스도의 창조의 중보에 기초한다는 카이퍼의 이론을 배격하고, 어떠한 하나님의 은총도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기초함을 주장하였다.


4. H. Dooyeweerd는 데흐라프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는 카이퍼와 반대로 일반은총 은 특수은총에 기반을 둔 은총의 일부임을 주장하였다.


5. Douma, Jochem. Algemene Genade. Goes: Oosterbaan & Le Cointre N.V. 1966.


6. Bavinck, Herman. Algemene Genade. Kampen: G. Ph. Zalsman, 1894.



(IX) 근대철학과 기독교 신앙


(가) 중세적 종합의 붕괴 


1. 우리는 기독교 복음이 서구에 전파된 이래 그것은 서구사회를 기초하고 있던 희랍-로마 문화/문명과 그 종교적-정신적 토대라 할 수 있는 철학과 긴장과 수용등 불편하지만 긴밀한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을 살펴보았다.


2. 특히 우리는 기독교계의 일반적 경향이 4세기를 전후하여 서구문화의 희랍적 요소들과 대립보다는 종합의 자세로 돌아섰던 것을 보았다. 여기에는 어거스틴의 플라톤주의적 성향의 자연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신학 체계가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을 보았다.


3.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종합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종합이 단지 자연과 은총의 이원론적 존재론이나 세계를 수직적인 계급체계로 나누는 엘리트주의적 인식론등 철학적인 문제 만이 아니라 신학적 함축에 있어 매우 유해함을 지적했다.  즉 구원론에 있어서 행위를 강조, 성례전에 있어 화체설, 의식이 강조되는 예배 등 신학적인 문제와 실천적인 면에서 성속이 분리되는 이원론 적 사고등에 있어 큰 오류를 불러일으킴을 직시하였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잘못을 시정하되 중세적 종합을 지양하고 바른 성경적 진리를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4. 중세적인 성경의 정신과 희랍-로마의 사상적 종합은 16세기 이후 근대적 인본주의 사상가들에 의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결국 해체되었다.  이들의 비판과 반대는 종교개혁자들의 그것과는 달리 희랍-로마적 정신 가운데 인간중심적 사고를 그것에 제한을 가하고 억압한다고 본 기독교적 동기와 중세적 종합에서 해방하여 그것을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문화의 기초로 만들고자 하는 동기(정신, vision)를 가지고 있었다.


5. 결국 16세기에 들어 4세기 이후 천년이상 서구문화를 지배하던 중세적 기독교-희랍정신의 종합의 상징인 스콜라 철학은 종교개혁자들과 인본주의적 사상가들의 양면공격으로 붕괴하여 해체되었다. 이제 서구사상은 그 뿌리에서 기독교적인 동기와 인본주의적 동기 (vision)의 두방향으로 분열되었다.


6. 지난주에는 루터와 칼빈등 종교개혁자들이 아퀴나스적 종합을 비판하고 성경적 동기를 회복함을 살펴보았다. 금주에는 인본주의 사상가들의 활동을 살펴볼 차례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들이 어떻게 중세적 종합을 배격하고 인본적 동기를 일관성있게 추구해나가는 과정이다. 이들의 배경에는 오캄으로 부터 시작된 유명론의 기여가 크다.


(나) 중세적 실재론의 배격


1. 이미 누누히 강조한 바와 같이 중세적 세계이해의 밑바탕에는 성경적 세계관과 희랍-로마적 사고의 종합이 깔려있다. 특히 교회의 성자요, 교회의 박사로 공인된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철학 대계로 인해서 중세의 이론적, 특히 존재론적 이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온건한 실재론 (moderate realism)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는 플라톤적 실재론과 달리 본질, 형상  또는 보편자가 감각적으로 이해가 가능한 세계, 즉 현상계에 속한 사물들, 개체들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입장과 그것과는 정반대로 보편자, 형상은 단지 이름일 뿐으로 존재하지 않는 구체적 사물들의 성격을 실체화한 것이라는 유명론의 중립적인 입장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입장이나 그것을 채용하여 신학의 기초를 삼았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이 바로 온건한 실재론의 기초라 할 수 있다.


3. 온건한 실재론은 본질, 형상  또는 보편자가 감각적으로 이해가 가능한 세계, 즉 현상계에 속한 사물들, 개체들 속에 존재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따라서 이 입장은 지각할 수 있는 구체적 사물들, 개체들로 부터 그들의 본질, 보편자들을 추출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 본질들, 또는 구체적 형상들, 보편자들 (specific forms = concrete universals)은 감각가능한 사물들 속에 존재론적으로 위치하며 추상적으로 추출되면 감각적 사물들의 본질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필연적 진리를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 또 그것은 개체적 사물들의 원인에 대한 증명가능한 지식을 성취하게 해준다.


4. 이러한 온건한 실재론 신학에 이용되어  아퀴나스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특히 그의 유비론에 의해) 자연으로 부터의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대한 증명가능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자연신학의 이론적 기초가 가능하게 해준다.


5. 이러한 온건한 실재론에 대한 반대의 조짐은 이미 14세기의 오캄 (William Ockham 1285-1347)을 대표적 인물로 하는 바 via antiqua (the old way)를 배격하는 via moderna (the modern way)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캄에 의하면 감각적인 직관적 인식만이 확실한 진리요, 그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개체만이 현실이다. 유와 종과 같은 보편자는 정신에 있어서 말 (이름 terminus) 로 존재할 뿐이다. 개체적 사물들은 그 자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자, 형상과는 관계없이 그 자체에 있어 본질적이며 일반적 특성들이나 구체적 형상들이 사물들 자체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은 결국 토마스가 은총아래 예속시켰고, 은총 으로 나아가는 준비단계, 은총의 세계의 모방으로서의 의의를 가진 자연을 독립시킨 철학적 기반을 마련한다. 자연은 은총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의미있고 본질을 갖춘 세계가 되었다. (Ockham's razor, 존재는 필연성 없이 증가되서는 안된다)


6. 그의 극단적 경험론으로 인해 중세의 흄으로 일컫는 오캄의 실재론 비판은 여러가지 함축을 가진다. 이중 가장 중요한 함축은 자연을 준거로 하여 그 자체를 넘 어선 본질, 보편을 발견하여 실재에 대한 증명을 얻고자 하는 시도를 포기함이었다. 더이상 하나님이나 초자연적 실재를 발견하기 위해서 자연을 연구하지 않는다. 자연은 자연으로서 그 자체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7. 자연을 자연 그 자체의 의미로 주목하게 된 것에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기에 개혁자들은 자연신학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종교개혁은 기독교 철학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단지 그 씨앗이 뿌려졌을 뿐이다. 따라서 16세기 이후 급속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비기독교적 사고와 그 사상의 체계화로서의 근대철학과 철학적 바탕에서 맞서 겨눌 대안을 갖지 못했다. 물론 카토릭의 옛 스콜라철학이 그 대안이 되지 못한 것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다) 자연과학의 영향


1. 이러한 신학과 철학의 변혁과 더불어 15-6세기에 급성장하기 시작한 자연과학도 중세적 종합을 해체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자연을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연구를 위하여 주목하게 된 것에는 유명론적 신학의 영향이 컸다. 이러한 추세를 부추김을 받고 상승적 작용으로 확고한 역사의 물줄기를 잡아간 것은 자연과학의 발전이었다.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연구하는 과학이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이 과학은 자연적 인과관계나 수식, 물리학적 법칙등에 의거하여 자연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2. 만약 자연의 모든 것을 수학과 물리등의 과학적 인과관계로 설명해 버리는 경우 과연 거기에 하나님이 개입할 어떤 여지가 남아있는가? 만약 그러한 가능성이 남아있다면 하나님은 만물의 자연법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17.8세기의 과학 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통일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3. 새로운 기계적 과학이 하나님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계속적인 임재는 필요하지 않았더라도 신적 존재가 필요하긴 마찬가지였다. 즉 자연이 한번 동작에 들어가 그 스스로의 움직임에 들어가기 위해 어디선가 첫 움직임이 주어져야 하며, 또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먼저 만들어져야 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요, 질서 유지를 위해 섭리하시는 하나님으로는 대부분 인정되거나 요청되었다. 


4. 이렇게 초기 과학자들은 여전히 전통적 신학의 체계 내에 안주하면서 과학은 단지 사실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려 하거나 아니면 과학은 종래의 신학적 가정들을 전혀 무용지물로 만들거나 그와는 관계없는 새로운 학문으로 생각하는 견해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5. God of gaps: Isaac Newton (1642-1727) 같은 이는 우주를 전적으로 자충족적인 윈리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로 보지 않았았다. 우주의 운행을 과학적으로 만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많음을 잘 아는 뉴톤은 선한의도로서 과학의 설명이 미진하거나 주어지지 못하는 곳에 하나님을 두어 설명하고자 하였다.


6. 또한편에서는 하나님은 만드신 모든 것들이 움직이도록 첫 충격을 주시는 분 이요, 이제는 그것에서 손을 떼고 그 스스로 움직이도록 방임하는 분으로 생각되었다. Alexander Koyre "The workaday God was superseded by the God of the sabbath." 이신론의 등장이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당신은 거기 계시옵소서... 주의 뜻이 땅에서 안이루어져야 하고, 그의 나라가 이땅에 안임해야 하고...)


7. 그러나 과학이 발전해 감에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은 점점 뉴톤이 배정한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라플라스 (1749-1827)의 "Sire, I have no need of that hypothesis" 라는 말이다.


8. 과학적 혁명은 도덕, 사회, 법, 정치의 기초들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함의한다. 과학적 기초에 의해 자연은 자율적인 존재로 사고됨에 따라 인간의 활동도 역시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서 생각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라) 합리론적 근대철학


1. 결국 17세기에 들어서 체계화되기 시작한 근대철학은 4세기 이후 천년간 서구사상을 지배해온 스콜라 주의의 종합을 배격하고 새로운 철학사상을 만들어 내었다. 이로서 서구사회는 그 기초에 있어서 부터 중세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근대 (modern era)" 또는 서구문화의 세속화 시대가 문을 연 것이다.

        

2. 초기 이성주의는 대략 1600에서 헤겔이 죽은 1831년까지로 볼 수 있다. 초기 이성은 수학, 물리, 천문학등의 발전과 더불어 과학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 시대의 철학자들이 우주의 기본원리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우주의 합리성이었다. 자연이라는 복잡한 기계의 배후에는 이성적 정신이 존재하며, 이것은 인간의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면 파악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3. 이성주의 rationalism이란 인간의 선험적 내용들을 갖춘 (man's thinking ability equipped with aprioris) 사고능력인 이성 ratio, logos를 절대적으로 과장하고 과대평가 하는 경향을 말한다. 이러한 이성에 대한 개념은 그 자체가 이방적 개념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구분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는 했으나 이성 그 자체를 주신 바 없다. 이러한 이성은 희랍정신의 질서와 혼돈의 두 종교동인 중 질서, 이성의 실체화된 것에 불과하다. 이성주의자들 가운데는 합리론자와 경험론자로 나뉘어진다.


4. 근대초기의 대부분의 철학자들도 자신이 기독교적 진리와 배치되는 그 무엇을 설파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적 철학을 행한 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그 사고의 근저에 있어 전폭적으로 희랍적 동기인 이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논의는 성경의 진리와 동떨어진 세속적 사고로 나아가고 있었다.


4. 대표적인 합리론자는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의심의 방법과 그 결론인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경귀는 결국 감각적 경험은 그 이외에 다른 기초 (즉 경험을 반성하는 이성적 자아의 반성)가 없고서는 확실한 지식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극적으로 보이고자 한 것이다. 그는 결국 자신의 자의식이 모든 사고의 기초임을 확인하고, 이 자의식 속에 있는 선험적 신지식에서 세상의 존재와 경험의 신뢰가능성을 도출하였다.

        4-1. 이와같이 데카르트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아퀴나스는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해 세상을 사용한 반면 데카르트는 세상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였다. 하나님은 이세상에 관한 우리들의 생각이 타당하다는 것을 보증하기 위한 일종의 자연을 다스리는 신으로 이해하였다.

        4-2. 대주교였던 윌리암 템플의 촌평: 유럽이 가장 불행한 계기는 데카르트가 자기 방에서 벽난로를 마주하고 안락의자에 앉아 생각에 깊이 빠진 때; 왜냐하면 이 때야 말로 성경적 사고가 아니라 데카르트의 철학적 천재가 발휘되어 그로 부터 유럽의 문명이 개인적 자의식에 기초를 두고 움직이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으므로... ) 데카르트의 신은 성경의 창조주, 주권자 하나님이 아니라 이성의 확실성을 보장해주기 위해 요청된, 또는 중세의 깨어진 파편에서 줏어 차용한 조각에 불과하다.


5. Benedictus Spinoza (1632-77)은 암스테르담 태생의 유대인으로서 "신은 만물의 내재적인 원인이지 초월적 원인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여 초월적인 하나님을 부정하고 우주에 내재한 창조원리로서의 신관, 또 인간과 동일시 되는 신의 범신론 적 사고를 퍼트렸다.

        5-1. ein gottrunkerner Mensch (Novalis)라고 불리웠던 그가 정작 철학 적으로 이룩한 일은 하나님과 인간을 함께 다루고 또 하나의 정신적 실재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포괄적 체계의 시조라 할 수 있다.

        5-2. Natura naturans (能産的 自然)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자연의 원인에 대한 것이고, 所産的 自然 natura naturata 자연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미 되어진 결과를 주목하는 것이다. 

        5-3. Van til's Creator/creature 구분이 성경적 신앙의 고수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되면 이러한 사고가 얼마나 희랍적인지를 알게된다. 내재하는 원리 (창조, 사랑의 원리)로서의 신의 개념은 Honest to God을 써서 유명해진 John Robinson, Cox 등 세속화 신학이나 해방신학, 틸리히의 신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고이다.


6. 라이프니츠 (1646-1716)는 우주가 무한한 숫자의 창문이 없고 단순한 구성요소로 된 단자 單子 (monads)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론으로 유명하다. 이 모나드는 의식이 없는 모나드로 부터 완전한 자의식으로 깨어있는 신의 모나드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이 모나드들은 일련의 질서속에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모나드론 은 세계가 완전한 기계적 법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고를 반영한다. 신은 이 모든 단자들을 산출하는 근원이다.


7.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성론자들의 신은 기계론적인 하나님이다. 이 신은 하나의 체계인 우주를 존재하게 하고 작용하게 하기 위해 세운 가설적이고 추상적 존재이며 역사와 현실적 경험속에서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 신은 논증에 기초를 두고 존재하는 신이다.


8. 파스칼은 철학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 후 당시 이성주의적 사상가들을 향한 기독교적 변증서를 쓰기로 하였다. 이것이 그의 Pensees 단상집 이었다. 그는 이 시대의 외로운 기인이었다. 마치 키엘케골이 후대에 그러했듯이... 파스칼은 마음의 직관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하나님에 대해 강조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진리가 논증과 이성을 초월하는 그 무엇에 있음을 밝히는 공로는 있었으나 체계적인 기독교적 사상체계를 마련하지 못하였다. 또 그러한 관심도 없었다. 그는 후기에 매우 신비적 성향을 지닌 쪽으로 치우쳤다.


(마) 경험론적 근대철학


1. 경험론자의 대부로 알려진 John Locke (1632-1704)는 Oxford Christ College, John Owen이 부총장일 시절에 이 학교를 다녔다. 로크는 흔히 데카르트의 이성주의적 관념론에 반대하여 경험론 Tabula rasa 를 말함으로 대립되는 것 같이 생각하지만 그러나 결국 마음의 거울에 비친 지식 (그에게 있어서 지식은 실체가 아닌 실체의 표상인 idea 이다 representation theory)이 실체와 일치하는지를 검증 (reflection 反省) 하는 것은 곧 이성이다 라고 주장한 면에서는 역시 이성주의자이다. 로크 역시 자신을 신앙의 수호자로 생각했는데 그는 회의주의자들에 대한 신앙변증론까지 쓸 정도였다.


2. 로크의 변증론은 신앙과 이성을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성 (according to reason)은 감각과 그에 대한 반성을 통해 아는 지식을 말한다. 이에 반해 이성을 초월하는 것 (above reason)이 있다. 즉 죽은 자의 부활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뿐 만 아니라 이성과 상충하는 것 (contrary to reason)도 있다. 즉 삼위로 존재하나 일체이신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부분들이다. 그는 신앙의 진리는 이성을 초월하고 상충하는 진리들을 포함한다고 주장하였다.


3. 그 의도가 어디에 있던 간에 진리의 기준을 경험에 정초한 경험주의는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회의론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지식은 모두가 개연적이며 습관에 의거한 지식일 뿐 아무런 경험적 논리의 필연성을 갖지 못한다는 주장을 편 흄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흄의 불가지론적 철학: 신학이나 형이상학에 관한 책을 볼 때, 양이나 수에 관한 논증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면 ... 사실과 실제에 대한 실험적 논증이 있는가 보라... 그렇지 않으면 불속에 던져버려라. 이는 훗날 신학에 커다란 도전을 가져오는 논리실증주의적 불가지론의 시조라 할 수 있다.


(바) 계몽주의 사상


1. 루소는 인간의 존엄성과 성선설적 낙관주의적 견해를 누구보다 강조한 사람이다. 그는 인간의 진보가 도덕의 타락을 불러온다고 보았다. 그는 감정에 기초한 자연종교를 위해 계시종교를 부정한다. 에밀 (Emil, on Education, 1762) 4권에 의하면 양심과 이성에 따라 가르침 받은 것을 행하라는 강조점이 있다. 그는 인간을 핵심적 준거점으로 잡았으나 볼테르나 다른 계몽사상가들 처럼 종교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2. Kant 는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larung? 계몽이란 인간이 자기오성을 사용하여 미성숙 상태를 벗어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1793년 오직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라는 책을 써서 성경이 참된 도덕종교 (Moral religion) 안에서 일반대중을 계몽하는 최고의 수단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의 신에 대한 접근이 매우 윤리적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얼핏보아 이점은 그의 주장인 계몽과 상치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바는 인간이 자기 이성의 옳다는 바를 행해야 하며 하늘에 계신 조언자나 동기 부여자로서의 하나님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Religion within the Limits of Reason alone)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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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철학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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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Wolterstorff.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3. (1981년 화란 암스텔담 자유대학교 카이퍼 렉춰, 제목은 시85:10-11에서 채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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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 저. 박영남 역. 칼빈주의. 서울:세종문화사, 1971.


헤르만 도예베르트 저. 신국원/김기찬 역. 서구 사상의 황혼에 서서. 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4.


Herman Dooyeweerd. A New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t. Jordan Stantion, Ontario: Paaideia Press, 1984.


출처 : 푸우도사 자료실~!^^ | 글쓴이 : 조광성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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