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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플란팅가의 기독교 철학

작성일 작성자 동락당
 

플란팅가의 기독교 철학

하 종 호*


1. 생애1)


  플란팅가(Alvin Plantinga)는 1932년에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에서 출생하였다. 그 당시 그의 부친은 미시간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생이었다. 그의 부모는 화란에서 이주해 온 집안의 후예들로서 그의 친가와 외가의 조부모들은 칼빈 교리를 신봉하는 독실한 기독교인들이었다. 그의 부친은 대학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가르치면서 목회자가 유고 상태인 인근 교회에서 설교를 해 주기도 하였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에 젖어든 플란팅가는 여덟 살 무렵 교회에서 칼빈의 5대 교리에 대해 설교를 들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인간의 전적 부패와 타락에 관한 교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이 정말 그토록 사악한 존재란 말인가라는 의문이 들면서, 10대에 접어든 후부터 인간의 자유, 결정론, 하나님의 예지 및 예정과 같은 문제들을 가지고 친구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의 부친이 칼빈대학교 교수로 초빙 받아 가족이 이사를 하게 됨에 따라 플란팅가도 그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칼빈대학교 첫 학기에 그는 장난삼아 하바드대학교에 장학금을 신청했는데 놀랍게도 두둑한 장학금을 받게 되어 그리로 옮기게 되었다. 하바드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마음에 들었으나 기독교와 유신론을 비판하는 글들을 읽게 되면서 비기독교적인 사상과 부딪히게 되었다. 거기서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동안에 점차 자기가 언제나 믿어왔던 것이 정말로 옳은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이런 의심을 깨뜨린 사건이 생겼다. 하나는 1월의 어느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하바드 캠퍼스에서 일어났다. 날은 어둡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더니 강력하고 장엄하면서도 감미로운 노래가 들려왔다. 그리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을 보면서 마치 천국으로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플란팅가는 하나님이 실제로 살아 계시고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가 생각해 온 것이 사실 그대로라는 분명한 확신이 들었다.

  이러한 종류의 체험은 그 후 혼자 등산하다가 길을 잃게 되었을 때에도 겪었다. 첩첩산중에서 길을 잃었을 때 비와 눈이 쏟아지고 짙은 안개가 모든 산봉우리를 가리웠다. 그 날 밤 눈과 비를 피하느라 고목 나무 아래서 떨고 있을 때 하나님이 자기 곁에 가까이 계신다는 느낌이 그를 휘감았다. 그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매우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험준한 산 속에서, 기도할 때, 교회에서, 성경을 읽다가, 음악을 듣다가, 나뭇잎이나 풀잎에 떨어지는 아름다운 햇살을 보다가,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두운 숲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그를 압도할 때가 많았다.

  하바드 시절에 일어난 두 번째 사건은 봄방학을 맞아서 부모가 있는 그랜드 래피스로 돌아왔을 때였다. 하바드대학교와 칼빈대학교의 봄방학 기간이 일치하지 않은 관계로 플란팅가가 집에 왔을 때에 칼빈대학교는 아직 강의 중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부친에게 철학을 가르쳤던 젤레마(William H. Jellema) 교수의 윤리학 강의를 그 주간에 청강하였다. 젤레마 교수는 독실하면서도 생각이 깊은 기독교인이었다. 플란팅가가 청강할 때 젤레마 교수는 근대성에 관해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플란팅가는 그 교수가 근대성이 던지는 기독교에 대한 의심과 반론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겁내지 않고 있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특히 기독교와 유신론에 대한 지성인들의 반격이 실제로는 확실한 근거도 없는 지적인 제국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젤레마 교수의 생각은 충격적이었다. 젤레마 교수의 철학적 사유의 뿌리는 카이퍼(Abraham Kuyper)를 비롯한 화란의 칼빈주의자들과 어거스틴에게까지 뻗어 있었다.

  플란팅가는 젤레마 교수로부터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하바드를 떠나 칼빈대학교로 되돌아 와서 젤레마 교수로부터 철학을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플란팅가는 그 봄방학 주간이 자기에게는 숙명적인 주간이었으며, 칼빈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한 것은 너무나 잘한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만일 하바드에 계속 머물렀다면,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었을지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최소한 기독교나 유신론은 자신의 관심에서 멀어졌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1954년에 칼빈대학교를 졸업한 플란팅가는 미시간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로 진학했다. 미시간 철학과에서 플란팅가는 유신론을 옹호하는 길을 게속 찾아나갔다. 그러나 미시간 교수들은 젤레마 교수처럼 폭넓게 철학을 조망하기보다는 매우 미세하게 분석해나가는 접근법을 택함으로써 젤레마 교수가 보여주었던 철학적 직관을 보여주지 못했다. 너무나 메마르고 단편적인 접근법에 식상한 나머지 플란팅가는 프랑케나 교수에게 독일 관념론자들 식으로 통이 크게 철학을 할 수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프랑케나는 예일대 철학과라는 답변과 함께 그리로 옮기면 후회할 것이라는 충고도 덧붙였으나 플란팅가는 옮기고 말았다. 예일대 철학과는 다양한 분야와 사조의 철학자들이 모여 있었으나 철학사를 나열하는 수준에서 머무를 뿐 어느 것이 진리냐는 물음에는 답해 주지 못했고, 교수들간의 불화와 이전투구로 인하여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플란팅가는 예일대에서 박사학위과정을 끝낼 무렵 디트로이트에 있는 웨인 주립대에서 철학 교수로 초빙받아 1957년에 부임하였다. 그 당시 웨인 주립대 철학과는 새로운 진용을 갖추기 위해서 유능한 소장 교수들을 영입하였다. 플란팅가가 부임하기 전후로 카스터네이다(Hecto Castaneda), 게티어(Edmund Gettier), 슬레이(Robert Sleigh), 카트라이트(Richard Cartwright), 레어(Keith Lehrer)가 합류함으로써 20세기 후반에 미국 철학계를 주도했던 인물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되었다. 그들은 예일대 교수들과는 달리 자기 나름대로 독창적인 철학을 추구하는 학자들이었고, 방식도 각기 다양해서 아침부터 모여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들을 초빙해서 학과를 재건한 나크니키안(George Nakhnikian) 학과장과 게티어 교수는 목사의 아들이었고, 카스터네이다 교수는 어릴 때에 과테말라에서 천주교인으로 자랐지만 모두 다 기독교에 등을 돌린 상태였다. 자연히 플란팅가의 유신론은 이들로부터 집중적인 포화를 받게 되었으나 플란팅가는 오히려 그들의 비판을 견뎌낼 수 있는 논변을 계속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후에 『신과 타자의 마음』(1967), 『필연성의 본질』(1974)과 같은 수작이 탄생하게 되었다.

  1963년에 칼빈대학교의 은사인 젤레마 교수가 은퇴하자 그 대학에서 교수로 초빙받게 되었다. 웨인 주립대에 재직하는 동안 이미 몇 대학들에서 매력적인 조건의 교수직을 제의 받았으나 사양한 마당에 서부 미시간의 작은 대학으로 옮기겠다는 플란팅가의 결정은 동료들에게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플란팅가가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첫째로, 학문이나 교육이 종교적으로 중립일 수 없다는 그의 칼빈주의적인 신념과 기독교 대학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때문이었다. 둘째로, 대학 시절부터 자신이 품고 있었던 기독교 철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대학이 칼빈대이고, 다른 기독교 철학자들과의 유대 속에서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혼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발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플란팅가는 19년 동안 칼빈대에서 봉직한 후 1982년 인디애나 주에 있는 노트르담대학교 철학과 석좌 교수로 부임하였다. 오랫동안 정들었던 칼빈대를 떠나는 것이 그에게는 고통스러웠으나 대학원 과정이 없었던 칼빈대에서는 교육적인 발전을 이루기가 어려웠고 노트르담대 철학과를 최고의 기독교 학과로 발전시켜 보자는 생각에서 옮기게 되었다. 그는 최근에 자신의 인식론을 집성한 세 권의 책을 출간함으로써 인식론, 형이상학, 종교철학의 대가로서의 위상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2. 기독교 철학자의 사명2)


  플란팅가는 노트르담대 철학과 석좌 교수 취임사로 발표한 “기독교 철학자들에게 주는 조언”에서 철학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법과 기독교 철학자들의 연구 자세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첫째로, 기독교 철학자들은 독자성과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기독교 철학자들의 철학적 관심과 문제 의식은 비기독교적 또는 무신론적 철학자들과 다르기 때문에 현재 유행하는 사조와 연구 프로젝트를 따라 잡느라 급급해서는 안된다. 만일 기독교 철학자들이 비기독교적인 철학계에서 유행하는 주제들에 집중하다 보면, 기독교 철학자로서의 핵심적인 임무를 소홀히 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철학자들은 독자적인 철학적 문제들을 규명해야 한다.

  둘째로, 어느 철학적 이론이든지 특정 관점이 전제되므로 기독교 철학자들이 유신론적인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그들의 기본 권리다. 무신론적이거나 유물론적인 관점은 당연시되면서 유독 유신론적인 관점은 배격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따라서 기독교 철학자들은 비기독교적 철학자들이 받아들이는 명제들로부터 자신의 철학적인 의견을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즉 기독교 철학자들은 자기가 믿고 있는 데에서부터 출발해도 하등 문제가 안 된다. 그리고 비기독교 철학자들의 평가 기준에 좌우되거나 주눅이 들 필요도 없다. 이것은 기독교 철학자들의 자신감과 용기, 당당한 태도를 요구한다.

  플란팅가는 20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향후 21세기에 기독교 철학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몇 가지로 설정하였다. 그는 먼저 기독교 철학이 헤쳐 나가야 할 반기독교적 사조로서 자연주의(물리주의)와 반(反)실재론을 꼽는다. 자연주의는 물리적인 자연을 넘어선 어떠한 존재도 부정하는 입장이다.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의 모든 비물리적인 특성도 모두 자연화(물리화)시킴으로써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로서의 인간관이 아예 들어설 여지가 없게 만들어 버린다. 반실재론은 세계의 근본 구조와 틀을 인간이 결정짓는다고 보는 입장으로서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했던 프로타고라스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주관성을 극대화시킨 칸트를 통해서 강화되었다고 플란팅가는 진단한다. 시간과 공간, 실체와 속성간의 구조, 수, 양상, 진리와 존재 등은 물자체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적 활동의 결과라고 보는 칸트의 관점으로부터 우주의 창조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며 심지어 하나님의 창조도 인간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상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플란팅가는 지적한다. 이러한 반실재론은 객관적 진리와 가치를 부정하는 상대주의를 낳게 되어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이 현대 사상계를 주름잡게 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풍조 속에서 기독교 철학은 어떻게 그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것인가? 플란팅가는 다음 다섯 가지의 방안을 제시한다. 첫째, 부정적 변신론(negative apologetics)이다. 이것은 반기독교적 공격과 도전으로부터 기독교의 진리와 믿음을 옹호하는 논변을 만드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① 기독교의 모든 명제들은 인지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실증주의자들의 주장, ② 이 세계에 존재하는 악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시도, ③ 프로이트, 막스, 니체 등의 반기독교적 사상, ④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해서 기독교의 절대적 구원관에 도전하려는 시도 등으로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방어하고 옹호하는 논리를 구축하는 작업이 기독교 철학자들에게 요구된다.

  둘째, 긍정적 변신론(positive apologetics)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그동안 현대 기독교 철학자들이 괄목할 만한 실적을 쌓아 왔다. 선과 악, 도덕적 의무의 존재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한다든지, 악의 존재로부터, 지향성으로부터, 집합과 수의 본질로부터, 반사실문으로부터, 우주의 조화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는 일이 이에 해당된다. 이외에도 우연적 존재로부터의 논증, 단순성으로부터의 논증, 귀납으로부터의 논증, 일반적 회의주의의 오류로부터의 논증, 직관의 신빙성으로부터의 논증,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크립키의 해석으로부터의 논증, 선험적 지식의 존재로부터의 논증, 지식의 인과적 조건으로부터의 논증, 사랑․미(美)․희락으로부터의 논증, 인생의 의미로부터의 논증, 정당화와 근거의 합치로부터의 논증, 적합 기능과 신빙성의 합치로부터의 논증, 적합하게 작용하는 기관과 체계의 존재로부터의 논증도 가능하다.

  셋째, 철학적 신학(philosophical theology)의 정립이다. 이것은 기독교적 신앙의 주요 교리들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철학의 자원을 활용해서 생각함으로써 그 교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 깊이 있게 만드는 작업이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원성 등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한 예다.

  넷째, 기독교적이면서 철학적인 비평(Christian philosophical criticism)도 기독교 철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 작업은 다양한 철학적 연구 프로젝트와 프로그램들이 기독교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현대 미국 철학계에서 심리 철학은 주요 연구 프로젝트인데 기본적으로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러면 기독교인은 이 프로젝트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그 이론은 비물질적 존재자로서의 하나님의 성품과 어떻게 부합할 수 있는지, 기독교 철학자들은 그 작업에 동조해야 하는지, 우리가 그 이론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등을 검토해 봐야 한다.

  다섯째, 구성적 기독교 철학(constructive Christian philosophy)이 있다. 이 철학은 철학자들이 묻고 답하는 다양한 의문들에 대해서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다. 지향성의 문제, 도덕성의 문제, 지식의 문제, 의미의 문제, 인간의 자유 문제 등 철학적인 문제들에 대해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해결책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철학자들은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다. 즉 기독교 철학자들은 비기독교 철학자들과 문제나 관심, 연구 주제를 공유하지만, 그것들에 대한 답은 다르게 내 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기독교 철학자로서 뚜렷한 문제 의식과 주체성을 가졌던 플란팅가의 기독교 철학적 연구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 업적을 다음 절에서 차례로 살펴보겠다.


3. 악의 문제3)


  ‘악의 문제’란 다음 두 명제가 양립할 수 없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1) 전지전능하고 도덕적으로 가장 선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

(2) 이 세계에는 악이 존재한다.

무신론자들은 (2)의 명제가 참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므로 (1)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곧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유신론은 치명타를 입게 된다. 이에 대해서 유신론자들이 제시할 수 있는 최상의 해결책은 (1)과 (2)가 양립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플란팅가는 ‘자유 의지의 문제’에 착안해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인간의 행위가 자유 의지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선행(先行) 조건들에 의해서 인과적으로 결정되는 것인지에 관한 문제는 오랫동안 철학자들이 논란을 벌여 온 문제다. 결정론자들은 인간이 자연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수히 많은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이상 완전한 의미에서 자유롭다고는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면 먼저 그 사람이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강제적인 상황에서 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그 행위를 수행하였다면 책임을 묻는 것이 부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 의지와 결정론이 상충하는 양상은 하나님의 존재와 악의 존재와의 긴장 관계와 유사하다. 무신론자들이 악의 문제를 가지고 유신론을 공격할 때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창조하지 못했으므로 그의 전능성은 온전하다고 볼 수 없고, 전능성이 훼손된 하나님은 아예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므로 하나님의 존재는 부정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플란팅가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했다는 데에서 출발할 것을 제안한다. 왜 하나님은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을 창조했는가? 그것은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의 창조가 그렇지 않은 인간의 창조보다 더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이 왜 더 완전한가? 선만 행하도록 결정해 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행위하는 인간이 선과 악 중에서 어느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해서 행위하는 인간보다 불완전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가장 완전한 하나님이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이므로 가능한 한 그를 닮은 상태가 그렇지 않은 상태보다 더 완전하기 때문이라고 플란팅가는 답한다. 만일 하나님이 자유 의지를 결여한 인간들로 채워진 세계를 창조했다면 하나님은 더 완전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세계를 창조한 셈이 되기 때문에 이는 전능성에 위배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들로 채워진 가능 세계를 현실화시켰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제 다음 (3)을 (1)과 (2) 사이에 놓고 보자.

(3)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은 모두 자유 의지를 갖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면 세 명제는 상충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원리에 기초한다. “P와 Q가 모순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명제 R이 있음을 보이면 된다. (i) P와 R은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고 (ii) P와 R은 함께 Q를 필연적으로 함축한다.” 이 원리에 나오는 P에 (1)을, Q에 (2)를, R에 (3)을 대입하면 (1), (2), (3)이 이 원리를 만족시킴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과 (2)는 모순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서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자유 의지를 지닌 인간이 선만 행하는 가능 세계를 현실화하면 더 완전한 창조가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이 물음에 대해 플란팅가는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해서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태까지 현실화할 수는 없고, 그것이 하나님의 전능성을 훼손하지는 않는다고 답한다. 즉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해 놓고서 선만 행하게끔 만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에 악이 존재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전능성이 훼손되지도 않거니와 그의 존재가 배제될 필요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최근에 플란팅가는 악의 문제로부터 유신론을 방어하는 자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의 문제가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어떤 사태나 행위를 악하다고 할 때 그 가치 판단의 기준은 어디에 근거해 있는가? 동일한 사태가 어떤 사람에게는 악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선이 될 수 있기도 하다. 무신론자들이 유신론자들에게 들이대는 악도 어느 기준에서 보느냐에 따라 악이 아닌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것은 무신론자들이 이미 선과 악의 평가 기준을 전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 기준은 어디에 근거해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서도 무신론자는 답해야만 하는데 하나님께 절대적 가치 기준을 두지 않는 한, 모든 가치 기준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이제 무신론자는 다음 두 가지 명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가) 이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한다.

(나) 선과 악의 절대적인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다.

(가)를 인정하면 선과 악의 절대적 기준을 인정해야 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면 다른 절대적 기준을 제시해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나)를 인정하면, 선과 악의 판단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앞에서 말한 명제 (2)를 주장할 근거가 없게 된다. 따라서 악의 문제는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4. 기독교적 믿음의 기초성4)


  플란팅가는 기독교적 믿음을 기초적 믿음(basic belief)으로 분류한다. 믿음의 기초성 개념은 정초론자들이 도입한 개념이다. 정초론(Foundationalism)에 따르면, 우리의 지식(또는 믿음) 체계의 토대를 이루는 기초적 믿음들은 다른 믿음들에 근거해서 받아들여지는 믿음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정당화되는 종류의 믿음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기초적 믿음에 근거해서 비기초적 믿음들이 정당화된다고 본다. 따라서 믿음과 믿음 사이의 관계는 아래 단계에 있는 믿음이 위의 단계의 믿음을 지지해 주는 관계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지지 관계는 ‘증거’ 개념에 의해서도 설명된다. 즉 p라는 믿음이 q라는 믿음을 지지한다고 할 때 p는 q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기초적 믿음들의 ‘기초성’은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남는다. 기초적 믿음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른 믿음의 지지없이도 그 스스로 성립 근거를 가지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기초적 믿음은 ‘자기 정당화적인’(self-justifying) 믿음으로서, 기초적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격을 갖춘 믿음이 되려면 그 믿음은 ‘오류불가능’(incorrigible)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면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기초적 믿음이 과연 있을까? 정초론자들은 ‘현상적 믿음’(appearance belief)이 바로 그러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본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대상이 무슨 색깔인지에 관해서 틀릴 수 있지만, 그 대상이 우리에게 어떤 색깔로 느껴지는 지에 관해서는 틀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정초론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 책상은 붉다’라는 나의 믿음은 틀릴 수 있어도, ‘저 책상이 나에게 붉게 느껴진다’(I am appeared to redly and deskly)라는 믿음은 설령 문제의 책상이 붉지 않더라도 그 대상이 나에게 느껴지는 방식에 대한 믿음인 이상 틀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류불가능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을 갖는 것과 그 믿음이 나타내는 것 사이에 강한 논리적 관계가 성립해야 하는데, 우리의 일상적인 믿음들의 경우에는 그 믿음을 갖는다고 해서 반드시 그 믿음이 참이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따라 나오지 않는 반면에 현상적인 믿음의 경우에는 그러한 논리적인 관계가 성립한다고 정초론자들은 본다.

  이상의 정초론에 근거해서 증거주의(Evidentialism)는 종교적 믿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1) 종교적 믿음을 믿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는 한, 그 믿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2) 종교적 믿음을 믿는 것이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그 믿음의 증거가 되고 따라서 그 믿음을 지지해 주는 관계에 있는 다른 믿음들에 근거해서 그 믿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요컨대 종교적 믿음이 합리적이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고, 증거에 의해서 지지를 받지 않는 종교적 믿음은 합리적일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증거주의의 기본 입장이다.

  증거주의가 정초론에 근거해 있다고 보는 이유는, 그 이론이 상정하는 지식 체계가 정초론에서 말하는 기초적 믿음과 비기초적 믿음간의 지지 관계에 의해서 구축된 피라미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종교적 믿음을 지지해 주는 믿음들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기초적 믿음들로 구성된 토대에 다다른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적 믿음과 그것을 지지해 주는 믿음 사이에 과연 합리적인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그러한 합리적인 관계가 성립하지 않거나, 종교적 믿음을 지지해 주는 증거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믿음이 없다면, 종교적 믿음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비록 유신론자들 중에도 증거주의적 입장을 취하여 종교적 믿음의 합리성을 옹호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아퀴나스가 한 예다.)이 있더라도 증거주의는 오히려 종교적 믿음의 비합리성을 지적하고 그것의 인식적 지위를 격하시키기 위한 이론적 근거가 될 가능성이 더 많다. 이로 인하여 플란팅가는 증거주의가 근거해 있는 정초론을 비판하고 그것을 붕괴시킴으로써 증거주의를 제거하는 한편, 종교적 믿음에 대해서 증거주의자들과는 달리 ‘기초성’을 부여함으로써, 즉 종교적 믿음을 일종의 기초적 믿음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종교적 믿음의 인식적 지위를 확보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플란팅가는 정초론의 다음 전제를 공격 목표로 삼는다.


(F) 명제 p에 대한 인식 주체 S의 믿음은, S에 대해 p가 자기 명증적이거나 오류불가능할 때에만 기초적 믿음이 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초론의 기본 전제인 (F)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면, ‘기초적 믿음’이라는 개념은 들어 설 근거가 없게 되어 정초론은 무너지고 만다. 플란팅가는 두 방향에서 (F)를 공격하는데 그 중 첫 번째의 공격은, (F)의 조건을 만족하지 않으면서도 기초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믿음들을 예시하는 것이다. 플란팅가는 다음의 믿음들이 한 예라고 소개한다.


① 나는 나무를 보고 있다.

② 나는 오늘 아침에 식사를 했다.

③ 저 사람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플란팅가는 이 믿음들이 자기 명증적이거나 오류불가능하지 않더라도 기초적인 믿음이라고 보는데 그 이유는 이 믿음들을 다른 믿음들에 근거해서 우리가 갖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F)는 우리가 기초적 믿음들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많은 부분을 버리는 결과를 낳으므로 기초적 믿음의 기준으로서 부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F)의 성립 근거에 대한 플란팅가의 두 번째 의문은 다음과 같다. (F)에 대한 믿음이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기초적 믿음이든가, 아니면 다른 기초적 믿음들에 근거해야 한다. (F)에 따르면, 어떤 믿음이 기초적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자기 명증적이거나 오류불가능해야 하는데 (F)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과연 그러한 성격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렵다. 인식론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F)를 이해하자마자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다른 믿음에 근거하지 않고서 (F)를 믿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플란팅가는 우리가 이 물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는 한, (F)에 대한 믿음은 기초적 믿음이 될 수 없다고 한다.

  (F)에 대한 믿음이 기초적 믿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비기초적 믿음이어야 한다. 비기초적 믿음이라고 함은, (F)가 자기 명증적이거나 오류불가능한 명제들로부터 귀납적이든지 연역적인 논증에 의해 추론된 믿음이어야 하는데 정초론자들치고 이에 관해 만족스러운 논증을 제시한 사람이 없으므로 (F)에 대한 믿음은 비기초적 믿음이라고도 할 수 없다고 플란팅가는 주장한다. 따라서 기초적 믿음의 기준에 대한 정초론자들의 믿음은 그 기준 자체에 의해서 기초적이지도 않고 비기초적이지도 않다는 결과가 초래된다. 이는 (F)가 거짓 명제든가, 아니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비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한다. 결국 어느 경우이든지간에 (F)에 대한 믿음은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F)에 근거한 정초론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플란팅가는 진단한다.

  정초론의 붕괴는 곧 증거주의의 무력화(無力化)를 의미한다. 종교적 믿음이 비기초적 믿음이므로 그것을 지지해 주는 다른 믿음들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은 정초론이 주장하는 “믿음의 기초성”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믿음이 다른 종류의 믿음들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는 점을 주장하려는 플란팅가는 증거주의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을 정초론의 붕괴를 통해 보여 줌으로써 종교적 믿음이 비기초적 믿음이라고 생각할 근거가 없음을 입증한다.

  또한 기초적 믿음에 대한 정초론자들의 규정 자체가 합당치 않은 이상 종교적 믿음이 (F)의 기준에 의해 기초적이지 않다고 간주해야 할 이유가 없게 된다. 더욱이 유신론자들이 종교적 믿음들을 다른 믿음에 근거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한, 종교적 믿음의 기초성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고 플란팅가는 주장한다. 이것은 곧 종교적 믿음이 다른 인식적 믿음들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받게 됨을 의미한다.


5. 기독교적 믿음의 인식적 정당성5)


  전통적으로 인식론에서는 지식의 조건으로 ‘정당화된 참인 믿음’을 꼽아왔다. 어떤 명제 p를 알기 위해서는 p가 참이어야 하고, 인식 주체가 그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이 정당화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때 정당화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문제를 놓고서 여러 종류의 이론이 제기되어 왔는데 가장 유력한 관점은 인식적 의무(epistemic duty) 개념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다. 즉 참된 것을 믿고 거짓된 것은 배척하는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으로서 정당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인식 주체가 문제의 명제를 믿는 상황에서 그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으면 그 믿음은 정당화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정당화되지 못하여 지식을 결여하게 된다고 본다.

  그런데 플란팅가는 인식적 의무 개념에 의해 이해되는 정당화 개념으로는 우리의 지식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식적 의무를 이행하려고 최선을 다하더라도 우리의 인지 기능이 비정상적인 상태라면 지식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식적 정당화 개념을 대체하는 개념이 필요한데 플란팅가는 그것을 ‘근거’(warrant)라고 명명한다. 그러면 믿음이 근거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가? 플란팅가는 적합하게 작용하는 인지 기능에 의해서 믿음이 산출될 때 근거를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인지 기능은 그것이 설계된 계획에 따라 참된 믿음들을 산출하되 설계에 부합하는 환경에서 작용할 때 적합하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눈은 참된 믿음들을 산출하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일정한 가시 거리 내에서 작용할 것이 전제되어 있다.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을 보도록 설계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에 눈이 그것의 설계 계획에 부합하는 환경 안에서 작용할 때만 그 눈을 통해서 얻게 되는 믿음은 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어떤 사람의 믿음이 근거를 가지고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그의 인지 기능에 부합하는 인지 환경 안에서, 진리를 산출할 확률이 높은 설계 계획에 따라 적합하게 작용하는 그의 인지 기능에 의해 그 믿음이 산출되어야 한다. 이때 근거의 정도는 그 사람이 그 믿음을 얼마나 확고하게 믿느냐에 비례한다. 그리고 인지 환경은 두 종류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거시 환경이요, 다른 하나는 미시 환경이다. 거시 환경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처하는 환경이다. 예를 들어, 이 지구가 늘 암흑으로 덮여 있다면 이것은 우리의 인지 기능에 부합하지 않는 거시 환경일 것이고, 빛과 공기가 없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거시 환경은 정상적이지만 특정 인식 주체가 처한 특정 환경이 그의 인지 기능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가 모르는 기묘한 우연에 의해서 그 믿음이 참이 되면 그 믿음은 근거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위의 조건에서 환경은 미시 환경까지 포함해야 한다. 즉 거시 환경뿐만 아니라 미시 환경도 인식 주체의 인지 기능에 부합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플란팅가는 인식적인 믿음 일반에 적용되는 위의 지식 조건이 하나님에 관한 기독교인들의 믿음에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기독교적 믿음의 인식적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플란팅가는 먼저 기독교적 믿음의 근거를 설명해 주는 모델로서 아퀴나스-캘빈 모델(이하 A/C 모델로 약칭함.)을 상정한다. 이 모델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죄로 인하여 구원과 구속을 필요로 하는 상태에 처하게 되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의해서 구원의 길을 제시하였고, 그 결과 인간은 죄로부터 구원되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의 도리를 알려 주기 위해 세 가지의 방안을 마련하였다. 첫째는 성경이고, 둘째는 성령의 임재와 역사이고, 셋째는 신앙이다. 이 세 가지 방안은 모두 인지적인 성격을 갖는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과 행위를 지도하고 구원의 소식을 전해 준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 믿으며, 응답하게 된다. 신앙은 칼빈이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구원에 대한 지식이다. 따라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믿고 아는 것이다. A/C 모델에 따르면, 기억이나 지각과 마찬가지로 신앙은 믿음을 산출하는 과정이다. 한 믿음이 규칙적인 방식으로 산출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신앙은 기억, 지각, 추리, 귀납 등과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신앙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포함함으로써 자연계에서는 믿음의 직접적인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A/C 모델에서 볼 때 기독교적 믿음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기억, 지각, 이성, 추리 등의 인지 기능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획득된다. 즉 우리의 자연적인 기능이 작용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선물인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적 믿음들은 내적으로 합리적이다. 내적으로 합리적인 믿음은 경험에 부합하면서 정합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기독교적 믿음은 기존의 믿음과 현재의 경험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내적 합리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기독교적 믿음을 믿게 되는 기독교인의 인지 기능이 모두 적합하게 작용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믿음은 외재적 합리성도 갖게 된다. 끝으로 기독교적 믿음들은 인식 주체에 대해서 근거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 믿음들은, 참된 믿음을 산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설계 계획에 따라, 적합한 인지 환경 안에서 적합하게 작용하는 믿음-산출 과정에 의해 인식 주체 안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믿음은 내재적 합리성, 외재적 합리성, 근거 확보라는 인식론적으로 긍정적인 지위를 점유하게 된다.

  기독교적 믿음이 다른 인식적 믿음들과 마찬가지로 근거를 가진 믿음으로서 지식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다음과 같이 입증될 수 있다.


(1)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산출된 기독교적 믿음들은 적합하게 작용하는 인지 과정에 의해 산출되었다. 기독교적 믿음을 산출하는 전체 과정으로서의 신앙은 기독교적 믿음을 산출하도록 하나님에 의해서 설계되었다. 이것은 눈이 시각적 믿음을 산출하도록 하나님에 의해서 설계된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신앙이 그 설계에 따라 기독교적 믿음을 산출할 경우 그것은 적합하게 작용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적 믿음은 외재적 합리성의 조건을 충족시킨다.

(2) A/C 모델에 따르면, 우리의 거시적 환경은 죄로 인한 인지적 오염을 포함해서 이러한 과정의 설계에 부합하는 인지 환경이다.

(3) 그 과정은 참된 믿음을 산출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4) 그 과정이 산출하는 믿음들―복음과 관련된 사항들에 대한 믿음들―은 실제로 참이다.

 

  이 네 조건은 인식적 믿음이 근거를 갖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과 일치한다. 따라서 기독교적 믿음은 인식적으로 정당하여 지식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적 믿음들은 다른 믿음에 근거해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명증적인 믿음이라는 점에서 확실성도 보장된다.


6. 평가와 의의


  플란팅가가 20세기에 배출된 탁월한 기독교 철학자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는 인식론, 형이상학, 논리철학 등 이론 철학의 핵심 분야에서 독창적인 이론을 창안함으로써 기독교 철학자 이전에 일반 철학자로서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위상을 확보하였다. 미국 철학계의 리더로서의 그의 위상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신론, 진화론, 유물론, 상대주의가 팽배해 있는 미국 철학계에서 기독교 철학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플란팅가의 학문적인 위상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겉으로 봐서는 일반 철학계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들을 플란팅가가 연구한 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겠다는 일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플란팅가의 모든 철학적인 탐구는 오로지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고 입증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나머지 사항들은 그것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필연성에 대한 그의 이론은 전형적인 양상 논리학의 문제에 관한 것이지만 그 이론을 구축한 그의 근본 동기는 오로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데에 있었다. 그런데 그의 연구 결과는 비단 기독교 철학에서뿐만 아니라, 논리철학 분야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가치를 지님으로써 무신론적인 노선에 있는 철학자도 그 주제와 관련해서는 플란팅가의 이론에 의존하게끔 만들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20세기의 아퀴나스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유신론적 철학자다.

  둘째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플란팅가가 학자로서,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보여 준 일관성 있는 삶의 태도다. 그는 자신이 전문적인 학자로서 본연의 임무에 충실함으로써 기독교 철학자들이 학자로서의 전문성과 수월성을 확보하는 데에 주력할 것을 말없이 촉구하였다. 만일 플란팅가처럼 뛰어난 철학자가 기독교적인 관점을 발전시키는 일에 천착하지 않았다면 미국 철학계에서는 기독교 철학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플란팅가가 활동했던 시기는 미국의 현대 철학이 급성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철학자로서의 학문적 탁월성을 공인 받았던 플란팅가나 얼스턴이 없었다면 기독교 철학자들이 철학계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플란팅가와 같은 거물급 철학자가 칼빈대학교와 같은 소규모 대학에 19년 동안이나 재직했다는 사실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칼빈대가 기독교 대학으로서의 명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미국의 대학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플란팅가는 기독교 정신을 구현하고 기독교 철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최적의 대학이라는 판단에서 더 좋은 조건과 영예를 누릴 수 있는 대학들의 제의를 뿌리치고 칼빈대에 남았다. 그의 이런 모습에서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철저한 복음주의 정신에 입각해서 철학을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삶 자체도 그 정신에 부합하였다. 그리고 세속적인 영예보다는 학자로서의 내실을 더 귀하게 여긴 그의 가치관은 비단 기독교 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학자들에게도 큰 귀감이 된다고 하겠다.

  셋째로 플란팅가는 현대 기독교 철학의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그의 저술은 방대한 고전에 대한 참조, 정치한 논리와 깊은 사색, 비범한 독창적 직관을 담고 있다. 기독교인이 아닌 철학자들도 철학자로서의 플란팅가를 감히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20세기에 기독교적으로 철학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에 기독교 철학이 어떠한 노선에 서서 무엇을 다루어야 할지를 제시했다. 플란팅가 덕분에 후속 세대의 기독교 철학자들은 훨씬 수월하게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플란팅가가 이론 철학에 치중함으로써 윤리학을 비롯한 실천 철학 분야를 위한 구체적인 제안이 미흡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 철학적인 작업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면 기독교 실천 철학이 어떠한 모습을 갖춰야 할지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앞으로 미국 철학계에 플란팅가와 같이 최정상의 복음주의적인 철학자가 다시 나타날지는 미지수다. 물론 후속 세대의 학자들이 기독교 철학적인 작업을 활발히 하고 있지만 플란팅가의 철학적 위상을 이어받을 만한 학자는 아직 눈에 띄지 않는 실정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형편이다. 복음의 핵심을 꿰뚫고서 그것의 철학적 의미를 밝히 드러내기를 원하는 학자들에게 플란팅가는 시대와 국적을 초월해서 존경받을 만한 훌륭한 모델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출처 : 문화와 설교연구원 | 글쓴이 : 신동식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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