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得要領 부득요령

(아닐 불)

(얻을 득)

(구할 요, 원하다)

(옷깃 령{},  가장 요긴한 곳)

 

요령을 얻지 못하다,

중요한 일을 달성시키지 못하다

사물의 중요한 부분을 잡을 수 없다. 말이나 글의 요령을 잡을 수 없음을 이름


전한(前漢) 7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의 일이다. 

당시 만리장성 밖은 수수께끼의 땅이었다. 

그러나 영맹한 흉노는 동쪽 열하(熱河)에서부터 서쪽 투르키스탄(중앙 아시아 지방)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세력을 펴고 빈번히 한나라를 침범 약탈했다. 


그래서 무제는 기원전 2세기 중반에 흉노에게 쫓겨 농서[ 西:감숙성(甘肅省)] 에서 서쪽 사막 밖으로 옮겨간 월지(月氏:大月氏)와 손잡고 흉노를 협공할 계획 을 세웠다. 

그리고 월지에 다녀올 사신을 공모한 결과 장건(張騫:?∼B.C. 114)이란 관리가 뽑혔다. 

건원(建元) 3년(B.C. 138), 장건은 100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 고 서쪽 이리(伊犁:위구르 자치구 내)란 곳에 있다는 것밖에 모르는 월지를 찾아 장안[長安:서안(西安)]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농서를 벗어나자마자 흉노에게 잡 히고 말았다. 

이때부터 흉노와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장건은 활짝 트인 성격으로 해서 흉노에게 호감을 사 장가도 들고 아들까지 낳았다. 


그러나 그는 잠시도 탈출할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포로가 된 지 10년이 지난 어느 날, 

장건은 처자와 일행을 데리고 서방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우뚝 솟은 천산(天山) 산맥의 남쪽 기슭을 따라 타림 분지를 횡단한 그들은 대완국(大宛國) 강거국(康居國)을 거쳐 마침내 아무르강 북쪽에 있는 월지의 궁전에 도착했다. 

장건은 곧 월지의 왕을 알현하고 무제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왕의 대답은 의외로 부정적이었다.


 "월지는 서천(西遷) 이후 기름진 이 땅에서 평화롭게 살아왔소. 

그러니 백성은 이제 구원 (舊怨)을 씻기 위한 그런 쓸데없는 전쟁은 원치 않을 것이오.

" 장건은 여기서 단 념하지 않고 당시 월지의 속국인 대하국(大夏國)까지 찾아가 월지를 움직이려 했으나 

허사였다. 


이 일을 사서(史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끝내 사명으로 하는 월지의 '요령을 얻지 못한채[要領不得]' 체류한 지 1년이 지나 귀국 길에 올랐다."


장건은 귀국 도중에 또 흉노에게 잡혀 1년 넘게 억류되었으나 부하 한 사람과 탈 출, 13년만에 장안으로 돌아왔다(B.C. 126). 

그로부터 3년 후 박망후(博望侯)에 봉 해진 장건은 계속 서역(西域) 사업에 힘썼는데 그의 대여행은 중국 역사에 많은 것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힌 바가 있었기에

비록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서역 문명의 소개자로서 청사(靑史歷史)에 길이 업적을 빛내기에 이르렀다.

우선 동서의 교통이 트이면서 서방으로부터 명마(名 馬) 보석 비파(琵琶) 수박 석류 포도 등이 들어오고 한나라로부터는 금과 비단 등이 수출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실크 로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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