移木之信 이목지신

(옮길 이)

(나무 목)

(갈 지)

(믿을 신)


나무를 옮겨 믿음을 주다.

 

진(秦)나라가 육국을 멸하고 전국시대를 통일할 정도로 강성해진 것은 상앙(商鞅)이라는 인물이 부국강병의 기초를 잘 세운 덕분이었다. 

상앙의 본명은 공손앙(公孫鞅)으로, 원래 위(魏)나라 재상인 공숙좌(公叔痤)를 섬겼다. 

공숙좌가 병이 나자 위혜왕(魏惠王)이 친히 문병을 와서 앞일을 물었다. 

공숙좌는 평소 공손앙이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왕에게 공손앙을 강력히 추천하면서, 만약 쓰지 않으려면 죽여 버리라고 진언했다. 

위혜왕은 공숙좌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이 돌아간 뒤 공숙좌는 공손앙에게 사실을 말해 주며 도망하라고 권했다.

 공손앙은 왕이 자신을 쓰라는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자신을 죽이라는 진언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도망하지 않았다. 

공숙좌가 죽은 뒤, 마침 진(秦)나라의 효공(孝公)이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영을 내렸다. 

이 말을 듣고 공손앙은 진나라로 가 효공에게 유세를 했다. 

몇 차례 계속된 공손앙의 유세를 들은 효공은 그를 등용하고, 그의 계책을 받아들여 변법(變法)을 단행하려고 법령을 제정했다. 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가는 10집 혹은 5집을 한 조로 묶어 서로 잘못을 감시하도록 하고, 한 집이 죄를 지으면 10집이 똑같이 벌을 받는다. 

죄지은 것을 알리지 않는 사람은 허리를 자르는 벌로 다스리고, 그것을 알린 사람에게는 적의 머리를 벤 것과 같은 상을 주며, 죄를 숨기는 사람은 적에게 항복한 사람과 똑같은 벌을 준다. 

백성들 가운데 한 집에 성년 남자가 2명 이상 살면서 분가하지 않으면 부역과 납세를 2배로 한다. 

군공을 세운 사람은 각각 그 공의 크고 작음에 따라 벼슬을 올려 주고, 사사로이 싸움을 일삼는 자는 각각 그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벌을 준다. 

본업에 힘써 밭을 갈고 길쌈을 하여 곡식이나 비단을 많이 바치는 사람에게는 부역과 부세를 면제해 준다. 

상공업에 종사하여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와, 게을러서 가난한 자는 모두 체포하여 관청의 노비로 쓴다. 

군주의 친척이라도 싸워 공을 세우지 못했으면 심사를 거쳐 공족으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없게 한다. 

신분상의 존비, 작위와 봉록의 등급을 분명히 하여 차등을 두고 토지와 집, 신첩, 의복의 등급을 작위의 등급에 따라 차별이 있도록 한다. 

공을 세운 사람은 명예를 누리지만, 공을 세우지 못한 사람은 부유해도 화려한 생활이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백성이 신임을 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법을 공포하기 전에 국가가 신임을 먼저 보여 주는 작업을 했다. 높이가 세 발 되는 나무를 남문에 세우고 이를 북문에 옮겨 놓는 사람에게 10금을 상으로 준다고 공시했다. 하지만 모두들 이상히 여기기만 할 뿐 아무도 옮기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상금을 50금으로 올려 공시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옮기자 약속대로 50금을 주었다. 이처럼 나라가 백성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 알린 다음, 마침내 법령을 공포하였다.

(令旣具, 未布, 恐民之不信. 已乃立三丈之木於國都市南門, 募民有能徙置北門者予十金. 民怪之, 莫敢徙. 復曰能徙者予五十金. 有一人徙之, 輒予五十金, 以明不欺. 卒下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불평을 하였지만, 법이 시행되고 10년이 지나자 길가에 물건이 떨어져도 줍는 사람이 없었고, 도둑도 없어졌으며, 집집마다 다 넉넉해졌고, 백성들은 전쟁에는 용감하였으나 개인의 싸움에는 힘을 쓰지 않았고, 나라는 잘 다스려졌다. 

공손앙은 법 앞에 성역이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법을 시행했다. 

심지어는 태자가 법을 어기자 태자 대신 태자의 부(傅, 후견인)인 공자 건(虔)을 처벌하고 태자의 사(師, 교육 담당)인 공손가(公孫賈)를 자자형(刺字刑, 얼굴이나 팔뚝의 살을 따고 홈을 내어 먹물로 죄명을 찍어 넣는 형벌)에 처할 정도였다. 

공자 건은 4년 후 또 범법을 하여 의형(劓刑, 코를 베는 형벌)에 처해져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진나라는 공손앙의 변법을 통해 가장 막강한 나라가 되었다. 

공손앙은 또 위나라를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위혜왕은 과거에 공숙좌의 진언을 듣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 

공손앙은 이 공으로 상오(商於) 땅을 식읍으로 받고 상군(商君)에 봉해졌다. 이로부터 상앙(商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효공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자 상앙은 평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공자 건의 무리들에 의해 모반죄로 몰려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거열형이란 환형(轘刑)이라고도 하는데, 수형자의 두 팔과 다리 및 머리를 각각 매단 수레를 달리게 하여 신체를 찢는 형벌을 말한다.



상앙은 일찍 형명학을 공부하여 法家(법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본래 ()나라 사람이었지만 뜻을 펼치지 못하자 진의 孝公(효공)에 의해 발탁되어 재상이 되었고 법치에 의한 부국강병책을 시행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했다

상앙은 각종 정책을 시행하기 전 백성들이 믿고 따라줄지 몰라 묘책을 냈다

남쪽 성문에 3(, 9m)이나 되는 긴 장대를 세운 뒤 북쪽 성문으로 옮기면 황금 10냥을 준다고 한 것이다.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상금을 50냥으로 올렸더니 밑져야 본전이라며 한 정신 나간 사람이 달려들어 옮겨 놓았다. 상앙이 즉시 이 사람을 불러 약속대로 거금을 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조정의 법령은 어느 누구도 어기는 사람이 없었고 나라는 크게 부강해졌다.

 

상앙의 후일담

엄격한 법치로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았지만 그만큼 반감도 많이 샀다

태자 때 법을 어겨 벌을 받은 惠文王(혜문왕)이 즉위하자 반대파들에게서 반역죄로 몰려 처형되었고 그의 시신은 사지가 찢어지는 車裂刑(거열형)에 처해졌다. 이러고 보면 곧이곧대로의 법집행도 얼마든지 원성을 사게 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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