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20세기 학(鶴)그림을 통해 본 전통의 계승과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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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20세기 학(鶴)그림을 통해 본 전통의 계승과 변용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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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20세기 학그림을 통해 본 전통의 계승과 변용


박계리 朴桂利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초빙교수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
한국회화사



한국근현대시기에도 학 그림은 지속적으로 그려졌다. 본 논문에서는 20세기 한국 학그림들을 분석함으로써 전통적인 도상으로 알려져 있는 학그림이 20세기에는 어떤한 의미들을 표상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전통적인 도상들이 어떻게 계승되고 변화되는지, 새로운 표상들은 왜 만들어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전통이 어떻게 우리 안에 내면화되고 또한 새롭게 창출되는지 분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학 그림을 크게 두 가지 부류로 구분해볼 수 있다. 하나는 생명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동물로서의 학을 사생을 통해 그리는 작업이며, 다른 하나는 의미를 표상하는 상징물로서의 학을 그린 작품들이다.

의미를 표상해내는 방식은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도상을 차용하는 경우와 20세기의 새로운 의미를 표상해내고 있는 작품으로 구분해볼 수 있을 것이다.


* 필자의 최근논저: 『모더니티와 전통론 : 혼돈의 시대, 미술을 통한 정체성 읽기』, 혜안, 2014;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명성황후발인반차도> 연구」, 『동아시아의 궁중미술』, 한국미술연구소 CAS, 2013.



Ⅰ. 학을 사생하다


먼저 사생을 통해 제작된 작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대한제국은 1906년 '보통학교 시행규칙'을 발표하면서 도화과목을 필수로 지정했다. 이때 도화교육의 목표는 “형체를 간취하여 진상을 그리는(畵하는) 능력을 얻게(得케) 하고 겸하여, 미감을 양성함을 요지”로 하였다.

이는 이보다 이른 1896년 발표된 『심상소학』의 목표인 “그림은 아무것이나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을 계승한 것이다. 눈이 중심이라는 이러한 목표는, 전통시대 사의성을 중심으로 하였던 서화의 목표와 대치된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그린다는 것은 뜻을 그린다는 사의성과 다른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서 1910년 『보통 교육학』에서 사생화 교수법이 발표되어 “고정된 일점 투시법에 의한 원근법” 즉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투영해서 보는 근대적 미술교육의 대강이 확정된다. 눈에 보이는 대로 손으로 그릴 것을 강조하는 사생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에 따라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기 위해서 많은 예비 화가들이 동물원으로 몰려갔다. 사생해서 그리기 위함이었다. 이는 이후 거의 1세기 동안 우리나라 미술교육의 근간이 되었다.


천경자의 <학>, 원문자의 <휴식>, 이석구의 <군학>도1은 모두 이러한 사생을 토대로 제작된 작품들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도상에 등장하던 소나무는 보이지 않으며, 실제로 학의 서식지에 많이 자라는 갈대가 등장한다. 상상의 성스러운 학이 아닌 자연스러운 새의 일상이 포착되어 있다.


1 이석구 <군학> 1978년 종이에 수묵담채 53×42cm 개인소장



Ⅱ. 전통적인 학 도상들을 차용하다


20세기 한국미술 속에서도 전통적인 학 그림의 도상이 여전히 차용되어 작품화되었다.


학은 여전히 장수와 순수함, 고상함, 길상적인 모든 상징적 가치를 표상해내었다. 여전히 학은 신선을 태우고 이동하는 수단으로 그려지기도 하였으며, 상서로운 구름 사이를 나는 모습에서 선학, 상서로운 서학이 그려졌다. 이미 문인이라는 계층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은 청렴결백한 문인들의 성격을 표상하기도 하였다. 장수와 불멸뿐만 아니라 문인의 숭고함과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기질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표상들은 왜 여전히 20세기에도 제작되었으며, 이전 시대와는 다른 맥락에서 소통된 것은 없었는지, 도상의 변화는 없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 長壽


진나라의 갈홍이 『포박자』에서는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데, 거북과 학은 오래 산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수의 상징으로서 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1 이처럼 학을 장수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었다.


장승업은 이러한 해파의 영향 속에서 화훼 화조 병풍에 산수화나 고사인물화, 십장생도에서 장수와 자식을 많이 낳음을 상징하는 도상들을 결합시키는 새로운 양식을 확립했다. 이는 그의 제자인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전해졌다. 안중식과 조석진은 화훼영모도의 전통과 해파의 영향을 받아 현실구복적인 성격의 장식성이 더욱 풍부해진 작품들을 많이 제작했다.


조석진의 <화훼영모도>(1912) 10폭 병풍은 이를 잘 보여준다.

1폭은 연꽃과 한 쌍의 백로를 그려 연꽃처럼 한 곳에 뿌리를 내려 번성하라는 상징성을 표현했다. 이 도상은 해파에서 기원한 것으로 장승업, 안중식의 그림에도 등장한다.

2폭에는 파초와 닭이 등장하는데, 닭은 公名을 상징한다.

7폭은 국화와 괴석, 한 쌍의 고양이가 등장하는데 이는 장수와 젊음을 상징한다. 이러한 파초와 닭, 고양이 등도 해파 화조화에서 많이 사용하는 제재이다.

2 4폭에는 소나무와 영지를 배경으로 한 쌍의 학이 나타난다. 이는 장수를 의미한다. 소나무와 학이라는 전통적인 도상에 영지를 결합시킨 것은 십장생도의 도상을 차용하여 화조화를 구상하는 장승업의 방법을 차용한 것으로 파악된다.3


안중식이 1894년에 제작한 <화조도> 10폭 병풍도 해파의 영향을 받아 길상적인 의미가 반영되어 있다.

각 폭에는 길상적인 의미가 있는 사자성어를 적어서, 높은 관직에 올라 부귀와 번영을 누리며 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1폭에는 해안가 암벽 위에 붉은 머리를 한 단정학이 그려져 있다. 다른 화폭의 길상적인 의미와 연결되어 단정학은 장수를 상징하는 도상으로 그려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5폭은 괴석, 모란과 목련을 그려서 장수와 부귀를 표현하고 있는데, 해파인 조지겸 <화조도>의 12폭과 유사한 구도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안중식도 이 시기 해파의 영향을 받은 스승 장승업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안중식은 스스로 1981년 상해에 방문하여 머무르면서 해파의 그림들을 직접 보았다. 당시 상해에서도 임훈이나 임백년의 작품에서 보듯이 단정학은 길상적 그림의 유행과 더불어 많이 그려졌다.4



2 김은호 <신선도> 1975년 종이에 수묵담채 51×66cm 국립현대미술관


이처럼 학을 ‘장수’ 로 표상하는 전통적인 도상해석은 안중식과 조석진의 제자였던 김은호의 작품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김은호의 <쌍학도>에는 전서체로 “소나무의 연령과 학의 수명(松齡鶴壽)”라는 화제가 씌어 있고 단정한 해서체로 “김은호가 삼가 그린다(金殷鎬謹寫)”라는 묵서가 씌어 있어서, 소나무와 학처럼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은호 <신선도>도2에는, 행서체로 “긴 수염에 흰 깃털 부채 신선 같은 풍채 피어나니, 오래 묵은 이 늙은이 소나무와 함께 한다네(養髥白羽仙風起 長住斯翁與侍松).”라는 제시와 “1975년 초가을 이당이 그린다(乙卯孟秋節以堂寫).”는 묵서가 씌어 있다. 머리가 벗겨진 인물의 모습에서 83살의 만년을 맞은 김은호가 자신의 장수를 축수하는 뜻을 담아 그린 작품으로 이해된다.


한편 화조도에 십장생도의 도상을 결합시키는 방식은 채용신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화조영모 팔폭병풍>에는 태양이 뜨고 파도가 넘실거리는 해안에 학이 나타나는 전통적인 도상에 십장생도에서 등장하는 거북이와 같은 제재들을 결합시켜 화려한 장식적 화면을 만들어 내고 있다.


3 채용신 <십장생도> 1920년대 비단에 수묵담채 80×310cm 국립현대미술관


채용신 십장생도 좌


채용신 십장생도 우


채용신은 <십장생도>도3를 그리기도 하였는데, 해, 구름, 물, 바위, 불로초, 사슴, 학 등의 전통적인 십장생과 함께 공작새, 물오리, 기러기 등을 묘사하고 있다. 가운데 사선으로 노송을 배치하여 화면에 긴장감을 조성하고, 파초와 매화 및 열대식물들을 배치했다. 원근법은 전통적인 삼원법이나 부감법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고 있어 주목된다. 화면의 지평선을 낮게 설정하고, 화면 중간에 노송을 앞으로 당겨 배치함으로써 화면 안에 거리감을 극대화하였다. 이를 통해 사실성을 높인 근대적인 화면을 구성해낸 것이다.


김기창은 자신의 <바보산수> 시리즈 작업 중에서 십장생도를 현대적인 조형언어로 번안한 작품들을 선보였다도4. 김기창은 스스로 민화의 현대화 작업을 ‘바보 산수’라 명명했다.

‘바보산수’란 바보가 그리는 산수 또는 바보적인 산수라 해석될 수 있는 중의적인 명칭으로, ‘순수하고 꾸밈없고 순진하다는 의미’에서 채택되었다.5

김기창은, “민화 속에는 인간본능의 미의식과 순수한 자기 감정의 표시가 담겨” 있기 때문에,6 “우리 현대미술의 한 지표로 삼아 해부하고 연구해서 (중략) 그것을 현대회화로 승화”시키고자 하였다.7

따라서 그의 바보산수에 등장하는 학 그림은 장수와 길상을 의미함과 동시에, 조형실험을 통해 보다 대중적이면서도 현대적이고 그러면서도 한국적인 작품을 제작해내기 위하여 차용된 도상으로 파악된다.


4 김기창 <십장생> 1977년 종이에 수묵담채 53×48cm 개인소장


1 고연희, 「한중 영모화조화의 정치적 성격」(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2), p.163.에서 재인용.
2 최경현, 「19세기 후반 20세기 초 상해 지역 화단과 한국화단과의 교류 연구」(홍익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p.163.
3 최경현, 위의 글(2006), p.163.

4 최경현, 위의 글(2006), p.162.

5 “민화 속의 산수, 이것이 오랫동안 내가 찾고 있었던 모습이었습니다. 산이나 들, 나무, 언덕 등 이 모든 것이 불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실로 이것처럼 자연을 정확히 표현한 그림은 없습니다.” 김기창, 「미술화제: 운보 화도 50년 회고전」, 󰡔한국일보󰡕,1980.9.9.
6 「천당에 가있는 아내에 보낸 그림 便紙: 침묵 끝에 개인전 갖는 김기창 화백」, 󰡔주간중앙󰡕,1976.5. 23.
7 김기창, 󰡔일간스포츠󰡕,1976.8.12.



2. 군자의 삶


예로부터 학은 전형적으로 군자들의 삶을 표상했다. 몽고족 치하의 원대에 학은 원 정부에 봉직을 거부하는 문인의 이상적 심볼이 되면서, 문인의 숭고함과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기질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이는 새의 고결한 정신과 구속당하지 않는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학을 통해 표상하고자 한 것이었다.

명대의 화가들은 순수하고 고결한 문인관료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학을 그려내었다. 명대와 조선의 문인 관료들의 흉배에 그려진 학의 도상은 이를 대변한다.


대한제국기에 그려진 작품으로는 조석진의 <一品壽富圖>(1901)가 이처럼 군자의 의미를 표상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소나무와 단정학이 그려져 있고, 소나무 뒤쪽엔 모란꽃이 화려하게 피어 있어서 해파의 영항도 보인다. 학과 소나무와 모란이 결합된 도상은 안중식의 <송학도>(1902)에서도 보이며, 안중식의 1908년도 작품에서는 소나무 대신 파초가 그려졌지만 학의 포즈는 유사하다.

특히 조석진 작품에는 ‘일품수부’라는 화제가 씌어 있어서 이 그림의 도상이 상징하는 바를 확인할 수 있다. 富 즉 부귀는 모란, 壽 즉 장수는 소나무, 一品은 학이 표상하고 있는 의미를 지칭한다 하겠다. 학이 ‘일품’을 표상한다 함은 조선시대 문관의 흉배에 학 도상이 사용된 것과 관련된다.


5 이도영 <송학도> 1922년 118×49cm 국립현대미술관


6 채용신 <古松瘦鶴> 1920년대 초 종이에 수묵담채 62×42cm 전북도립미술관


이러한 표상은 이도영 <송학도>도5에서도 드러난다. 이 작품은 조석진의 <일품수부도>와 안중식의 <송학도>(1902)에서 보았던 송학도의 도상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이도영의 작품에는 예서체로 “소나무의 지조와 학의 자태(松操鶴姿)”라는 화제가 씌어 있어서, 학과 소나무를 통해 문인들의 지조와 숭고하고 곧은 자태를 표현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에는 행서체로 1922년 이도영이 아는 형을 위해 그린 그림임을 밝히고 있어서 제작년도를 확인할 수 있다. 1922년이면 이미 문인이라는 계층은 없어진 시대였으나 나라를 잃은 일제강점기였음을 상기하면, 새의 고결한 정신과 소나무와 같은 지조를 지키며 살라는 당부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古松瘦鶴 碧梧秋月>은 채용신이 그린 김제덕 초상을 보관하던 영정함 문 안쪽 좌우에 붙어 있던 두 폭의 작품으로 채용신이 그린 것이다.도6. 화면 우측에 적힌 화제인 ‘고송수학 벽오추월’은 채용신이 김제덕의 초상을 그리고 적어 준 화상찬문의 부분이다.


"김추수상찬 / 고송과 여읜 학이오, 벽오동에 가을 달이로다. 얼굴은 환히 빛나고 눈썹은 밝고 진하니 옛 사람의 마음 한 조각, 붓이나 말로는 다하기 어렵구나."


군자로서의 모습을 상찬한 것이다.
이처럼 군자의 삶을 표상한 학과 작가 자신을 결합시켜 학그림을 그렸던 작가로 장우성을 빼놓을 수 없다. 전통시대 이래 학그림이 영모화조화 또는 십장생도라는 맥락에서 주로 그려짐으로써 학이 장식화의 채색법으로 주로 그려지던 경향과는 달리, 장우성은 문인화풍으로 학그림을 제작해내었다.8


장우성은 자신이 학을 즐겨 그리는 이유는 학의 성큼한 다리와 눈빛 같은 몸차림에서 오는 선연한 단정함, 낙락장송 가지 위에서 보여주는 거침없는 자세, 초연한 기품, 고고한 생애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9

이러한 그의 뜻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 <학>(2003)이다. 이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 있다.


달 아래 외로운 잠이여
꿈은 삼산에 감돌도다.
세속에 물들지 않음이여
신선 중에 참신선이로다.
늙은 화가의 회심이여
한 붓질이 바로 선(禪)이로다.

계미년(癸未 2003) 가을에 이 늙은이가 남은 먹으로 시험 삼아 그리고 나니 쏟아지는 비가 그치고 홀연히 찬바람이 불었다. 기이한 일이다. 월전 92세10



7 장우성 <오염지대> 1979년 68×60.5cm 이천시립월전미술관


그러나 장우성이 추구하는 군자의 삶은 복고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작품 <오염지대>도7 의 제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사람들은 근대화를 원했지만
어찌 공해가 무서울 줄 알았으랴.
불 바람은 대기를 더럽히고
독한 오수는 강과 바다를 물들인다.
풀과 나무는 말라들어 가려 하고
사람과 가축은 죽음에 임박해가는구나.
아아 뉘우친들 어찌하리
인간이 자초한 재앙인 것을.
기미년(己未 1979) 복중에 월전이 땀을 닦으며11


<오염지대>는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고 이 시대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학 한 마리가 고개를 떨구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작품이다. 그가 근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포스트모던 시대의 나아갈 바를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8 김기창 <송학도> 연도미상 종이에 수묵담채 47.5×37.5cm 개인소장


학의 이미지에 자신을 결합시킨 작품으로는 김기창 <송학도>도8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에는 해서체로 “인간세상 친구조차 없으나 천상에는 지기지우가 있다네(人間無伴侶 天上有知音).”라는 제시가 있다. 이 작품에서 학은 소나무 위에서 하늘 보며 우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는데, 우는 학의 도상은 전통시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모두 많이 그려졌던 도상이다.

초기 유교 서적인 시경에 “학이 구곡에서 울 때 그 소리는 하늘에 들린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도상에서 학의 울음은 현자의 목소리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현명한 군신의 울음 소리는 하늘의 아들인 훌륭한 통치자에게 들릴 것이라는 믿음이 함께 암시되어 있는 도상이었다.

김기창은 이러한 전통적인 도상을 빌어서 통치자가 아닌 천상의 친구를 애타게 부르고 있다. 그에게 하늘에 있는 친구는 먼저 죽은 아내 박래현을 은유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군자 간의 군신의 문제에서 벗어나 부부애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적이며, 김기창의 자전적 이야기가 함축된 자화상이며 애끓는 연서이다.



9 중광 <무학> 8폭 병풍 중 2폭 연도미상 종이에 수묵담채 각 67×44cm 갤러리미


10 이숙자 <古韻-운학문방석1> 1972년 순지에 암채 65×80cm 개인소장


중광의 학그림은 학과 화가 자신이 합일이 된 경지에서 일필휘지로 그려낸 작품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도9. 응물상형을 통한 응찰의 단계를 거쳐 대상과의 합일의 단계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선종화를 대표한다.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학을 통해 군자의 모습을 표상한 대표적인 도상이 문관들의 관복에 붙는 흉배 도상이다. 그런데 이숙자는 <古韻-운학문방석1>(1972)도10 을 통해 군자를 표상하는 남성적 도상에 방석이라는 여성적 제재를 결합시켜 독특한 화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군자라는 남성의 상징적 도상을 차용하여 남성성을 제거시킴으로써 이 도상을 제작하고 있는 여성 장인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흉배를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여성, 즉 흉배의 제작자의 성별은 운학문 도상이 표상해내고 있는 군자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짐과 동시에 삭제된다. 우리 모두는 운학문을 감상하면서 여성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과 같다.

표상 뒤에 숨겨진 제작자, 특히 흉배라는 복식 제작을 담당했던 여성 장인들의 모습이 이숙자의 사실적인 방석 이미지를 통해 복원된다. 그의 작품이 전통적인 운학문 도상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남성적 이미지로 전달되지 않는 이유이다.


8 이와 관련해서는 장준구, 「월전 장우성의 학그림」, 『월전 장우성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논문집: 월전 연구의 새로운 모색』(이천시립월전미술관, 2012), pp.58-79를 참고할 것.
9 장우성, 『月田隨想』(열화당, 2011), p.30.
10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월전의 붓끝, 한국화 100년의 역사』(2012), p.140.



3. 瑞鶴, 仙鶴


학의 이미지를 통해 상서로움 즉 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조짐이 있음을 알리는 그림들도 전통시대 이래 지속적으로 그려졌다. 이러한 상서로운 학의 이미지는 중국에서 황제의 善政을 증거하고 곧 상서로운 일이 일어날 것을 알리는 역할을 맡았으며 우리나라로 전래되었다.12


이와 관련하여 20세기 기념비적 작품이 창덕궁 대조전 서벽에 그려진 김은호의 <백학도>이다.

이 작품은 창덕궁의 나머지 벽화 총 6점과 함께 제작된 것으로 6점 전체를 통해 표상해내고자 했던 의미를 먼저 검토하고 그 안에서 <백학도>가 표상하는 바를 논해야 할 것이다.


서화협회 작가들과 서화연구회의 김규진에 의해 제작된 《창덕궁벽화》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광무개혁 이념을 반영한 이 시대 미술의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화재로 인근의 건물과 함께 소실된 것을 일본인 감독 하에 1920년 10월 중건했는데, 《창덕궁벽화》는 이때 제작된 것이다.13

이왕직 찬시 윤덕영의 주관 하에 당대의 명가였던 김규진을 필두로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오일영, 이용우 등 당시 갓 20대의 신진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각자가 담당한 작품은 아래와 같다.


오일영·이용우, 〈봉황도〉, 197×579, 견본채색, 대조전 동벽
김은호, 〈백학도〉, 197×579, 견본채색, 대조전 서벽
노수현, 〈조일선관도〉, 184×526cm, 견본채색, 경훈각 동벽
이상범, 〈삼선관파도〉, 184×526cm, 견본채색, 경훈각 서벽
김규진, 〈해금강총석정절경도〉, 195×880cm, 견본채색, 희정당 동벽
김규진, 〈금강산만물초승경도〉, 195×880cm, 견본채색, 희정당 서벽


희정당에는 당대의 명가였던 김규진이 참여하고 있는데, 이것은 순종의 이복동생이었던 영친왕 이은에게 서예를 가르친 스승이라는 인연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번 창덕궁 벽화 제작에서 김규진을 제외한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오일영, 이용우는 모두 서화미술원 출신의 안중식, 조석진 제자라는 점이 눈에 띈다.


창덕궁 희정당 등의 중건이 3·1운동 등 어수선한 시국과 맞물려 지체되던 중에 1919년 겨울에 서화협회 초대 회장이었던 안중식이 졸거한 데 이어 1920년 봄 서화협회 제2대 회장이었던 조석진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들에게 안배했던 4장의 벽화를 그들의 제자들에게 맡긴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상범이 회고록에서 경훈각 벽화 위탁을 받고 준명당에서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는 5월이 바로 조석진이 세상을 떠난 달이었음은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준다. 분명한 것은 아직 객관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던 젊은이들을 왕실의 대역사에 참여시킨 것은 분명 파격적인 결정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처녀작인 이 벽화를 발판으로 근대화단의 주목할 만한 신인들로 성장할 수 있었다.


11 김은호 〈백학도> 1920년 비단에 채색 197×579cm 희정당 서벽


양식적으로 볼때, 김은호의 〈백학도〉도11를 비롯해서 대조전과 경훈각의 벽화는 보수적 궁정장식화의 전통이 강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1세대 위였던 김규진의 작품에게서 새로운 서양화법이나 사진술의 수용이 감지되는 반면, 훨씬 젊은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그와 같은 새로운 감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화풍에서는 다만 장승업의 활달한 필치와 궁정장식화 전통의 화려함이 느껴질 뿐 근대와 관련되는 분위기를 감지하기 힘들다. 젊은 화가들에게는 자신들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기보다는 스승이었던 안중식과 조석진의 화풍과 똑같이 그릴 것이 요구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것이 현존하는 벽화에서 감지되는 강한 보수성, 전통성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희정당 벽의 〈해금강총석정절경〉과 〈금강산만물초승경〉은 벽화 중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김규진이 그렸다. 비록 전통회화의 잔영을 완전히 씻어내지는 못했지만, 길이 약 9m의 벽을 가득 채운 장대한 파노라마와 화려한 채색, 실경 스케치와 사진을 활용한 역동적 화면은 그 자체가 회화사에 남을 기념비이다.14

그물 모양의 물결무늬나 원산의 표현, 채색법 등에서는 전통적인 화법이 드러나지만, 화면 전체를 압도하는 것은 현장 사생과 사진에 의한 강력한 사실감이다. 그래서 관람객은 마치 바다에서 배를 타고 해금강을 바라보거나 하늘에서 비행기를 타고 내금강을 내려다보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전통적인 궁정장식화법은 관람객의 완전한 몰입을 거부한다. 작품은 사진 같은 사실성으로 금강산을 묘사하기 보다는 화려한 색채로 희정당에 왕실의 존엄과 위엄을 드러내준다.

이러한 구성과 화법은 이전의 정선파나 김홍도파의 전형화된 금강산도와 다를 뿐만 아니라, 도화서의 궁중기록화와도 구별된다. 이 작품은 전통에 기초하면서도 새로운 양식을 수용하여 전통회화가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생각된다.


김은호의 <백학도>는 열여섯 마리의 학과 포도와 소나무, 모란과 대나무가 표현되어 있다.

하얀 백학이 날아오는 장면은 상서로운 기운이 화면 안에 넘치게 한다. 중국 『한서』에는 황제들이 제사를 올릴 때 ‘백학’ 혹은 ‘군학’이 나타났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흰색의 학과 한 무리의 학들을 상서로움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15

이처럼 날아드는 학을 상서로 간주한 예는 북송 때부터 그 전통을 갖고 있었다.16 또한 파도와 소나무, 학의 결합은 이상경을 표현하는 도상으로 날아오는 백학의 군상과 함께 결합되어 왕이 통치하는 이곳이 바로 이상경임을 표상하고 있다.


이처럼 전통적인 도상을 차용하고 있는 <백학도>를 비롯한 벽화들과 근대적인 금강산도의 조화는 결과적으로 구전통과 신화풍이 서로 별개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융합되어 조선의 신문화 건설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舊本新參’의 이념을 드러낸다. 따라서 창덕궁 벽화는 이 시대의 문화정책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대한제국기 개항을 시작으로 세계자본주의 시장에 편입되기 시작한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서 상서로움을 표상하는 瑞鶴의 이미지는 국가를 위해 제작되는 것 외에, 기업들을 위해 제작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장우성의 <군학>(1884)의 제시는 이를 잘 드러내 준다.


신선사는 삼산에서 온 길 푸른 구름 속 만리 밖을 생각하는 마음
인간세계에서는 짝할 것이 없고 천상에서만이 지음이 있을 뿐이다.
서학비상도이다. 한성컨트리클럽 창업의 복됨을 표하다.
갑자년(甲子 1984) 초여름 반룡산인 월전 작품이다.17


이 제시를 통해 화가는 상서로움을 표상하는 서학을 기업의 복됨을 위해 그렸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12 박생광 <십장생> 1980년 종이에 채색 134.5×136cm 경남도립미술관


13 김봉준 <겨레춤> 12폭 병풍 1989년 종이에 수묵


더 후대인 박생광의 작품에도 지붕 위로 날아오는 상서로운 학이 그려져 있는데 학이 먹이를 물고 있어서 주목을 요한다도12. 이때의 학은 부모와 자식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예경󰡕의“학의 울음은그 자식에 의해 대답될 것이다”라는 내용에 기초한 것으로, 학의 입에 물려 있는 먹이를 통해 이 먹이를 기다리고 있을 자식들이 함께 표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봉준의 <학춤>은 학을 그린 것이 아니라 학춤을 추고 있는 사람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들과는 차별화된다.도13. 이 춤은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3호인 동래학춤을 그린 것이다.18

학이 아니라 학춤을 추는 사람의 등장은 1970~80년대 연희와 미술의 결합이 익숙했던 민중미술 작가들에게는 어색하지 않은 결합이었다. 화가 김봉준은 붓으로 춤추는 자의 신명을 담으려고 했다고 밝혔다.


<겨레춤>(1989)은 화가 김봉준이 대학 탈춤반에서 추었던 춤들을 모은 것으로, 맨 앞의 <학춤>이 춤꾼들을 선도하고 있다. 이때의 학은 仙鶴으로 신선사상을 상징한다. 학이 불멸을 위한 운반자이며, 신선을 태우고 이동하는 수단으로 그려지던 전통을 생각하면, 신화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의 맨 앞에서 이들을 선도할 수 있는 것은 역시 학이다.


14 김봉준 <학마을 잔치> 1995년 종이에 수묵담채 45×40cm 개인


1970년대부터 탈춤, 풍물, 민요, 단청, 탈, 불화 공부를 해오던, 김봉준은 신화와 의례와 예술과 놀이가 융합되어 있던 상태로 다시 마을공동체가 복원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그린 <학마을 잔치>도14는 공동체의 중심에 붉은 태양과 더불어 구름과 학이 묘사되어 있다. 상서로운 서학의 기운과 함께 이 마을공동체가 바로 이상적인 공간임을 표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학이 국가나 기업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를 위해 상서로운 조짐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금 신화의 세계를 꿈꾸며 마을문화공동체 운동을 하고 있는 작가의 지향점이 응축된 화면이라 하겠다.


김봉준은 신선들이 사는 신화의 세계는 범신론적 다원주의의 세계이며, 이는 모든 생명의 공생과 평화를 말하는 문화의 세계이기 때문에 신화의 세계가 모던사회의 문제를 극복해낼 수 있는 미래사회의 지향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토대로 마을문화공동체 운동을 벌여나가고 있다.


12 고연희, 앞의 글(2012), p.164.
13 희정당은 ‘조선식을 위주로 하고 나머지는 양식을 참고로’ 중건되었다. 경복궁 강녕전 건물을 뜯어다가 지었기 때문에 일견 조선식이지만 일본식 현관같은 새로운 요소가 절충되어 있으며, 내부도 서양풍의 가구와 커튼박스, 붉은 카펫 등 조선식과 양풍의 절충적 인테리어를 살펴볼 수 있다.

14 국립중앙박물관, 󰡔아름다운금강산󰡕(한국박물관회,2000),p.31.

15 고연희, 앞의 글(2012), p.165
16 이와 관한 자세한 논의는 고연희 위의 글(2012)을 참고할 것.

17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앞의 책(2012), p.135.
18 주로 정월대보름날이나 줄다리기를 할 때 추던 춤으로, 어떤 춤꾼이 도포에 갓을 쓰고 덧배기 춤을 추는 모습이 “학이 춤추는 것과 같다”라고 한데서 학춤이라 이름 붙여졌다 한다.



Ⅲ. 학을 통해 전통을 표상하다.


학 도상이 장수, 길상, 상서로움 등 구체적인 이미지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 을 포괄적으로 표상하는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19 이를 대표하는 화가가 김환기이다.


김환기는 평소에 지인들로부터 학과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화가이다. 취하면 학춤 추기를 즐겼다는 그의 그림에는 유독 학이 많이 그려졌다. 물론 더 많은 수의 작품들은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도자기들과 연관된다. 그는 한국적 전통을 표상하는 이미지를 현대적인 조형실험을 통해 함축함으로써 운율을 가진 자신만의 작품으로 재탄생시켜내곤 하였다.


김환기가 학을 그리고 도자기를 그렸던 것은 한국적인 모더니즘 회화를 이룩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흥미롭게도 김환기는 우리 전통에 대한 자신의 취향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 글에서 자신이 즐겨 그렸던 학 도상이 도자기 문양에서 온 것임을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나는 단원이나 혜원에게서 배운 것이 없다. 나는 조형과 미와 민족을 우리 도자기에서 배웠다. 지금도 내 교과서는 바로 우리 도자기일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그리는 그것이 여인이든 산이든 달이든 새든 간에 그것들은 모두가 도자기에서 오는 것들이요, 빛깔 또한 그러하다.”


그는 왜 이토록 도자기에 집중했던 것일까?


"고요하기만 한 우리 항아리엔 움직임이 있고 속력이 있다. 싸늘한 사기지만 그 살결에는 다사로운 온도가 있다 (중략) 실로 조형미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나로선 미에 대한 개안은 우리 항아리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한다. 둥근 항아리, 품에 넘치는 희고 둥근 항아리는 아직도 아직도 조형의 전위에 서 있지 않을까.20"


결국 김환기가 그토록 도자기를 바라보았던 이유는 이 작품이 골동품이기 이전에 그 시대의 전위였으며, 그가 세계 속에서 전위로 서 있고자 했을 때, 자신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뿌리였기 때문이었다.21

그 속에서 학이라는 도상은 타향의 땅에서도 뚜렷이 기억나는 고향의 영원성이었으며, 서구의 도시문화에 비교되는 동양 자연의 영원성이었으며, 논리 정연한 학설이 아닌 시의 운율이었으며 김환기 자신이었다.


15 안동숙 <한월> 1960년대 종이에 담채 99×66cm 함평군립미술관


학을 통해 전통을 표상함으로써 한국적 모더니즘을 이룩하고자 했던 다른 작가 작품으로는 안동숙의 <한월>도15을 들 수 있겠다. 달밤에 학 한 마리가 서 있는 서정적인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은 묵림회 출품작으로 알려져 있어서 더욱 주목하게 한다. ‘묵림회’는 1960년 서세옥이 중심이 되어 제1회 묵림회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묵림회’는 ‘먹의 숲’이라는 의미로 진부한 껍데기를 벗고 전통의 현대화를 모색하고자 결성되었다.


안동숙은 필자와의 대담에서 일본문화를 탈피하자는 정신이 묵림회 안에서 공유되고 있었음을 밝혔다. 일본문화를 탈피하고 새로운 우리의 예술을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정신적 공통점이 먹에 집중하게 했다고 언급했다. 일본화란 채색화로 통용되었고, 거꾸로 이는 친일 잔재 청산의 문제와도 결합되는 이슈였다.

또 다른 맥락에서는 당시 쏟아져 들어오는 서양의 추상미술작품들을 의식하면서 서양과 다른 현대미술은 어떻게 가능할까 고민하게 되었으며, 서양은 색채의 문화라면 동양은 먹의 문화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밝혔다.22


결국 이들은 묵림회를 통해서 지필묵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한국적 모더니즘을 이룩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서양화단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한국적인 소재를 택해서, 물감을 쌓아올리는 유화에서는 할 수 없는 기법인 번지기, 우리기와 같은 기법을 통해 수묵작업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특히 안동숙은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보다 새로운 독창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다가 “아교를 섞어서 써봤어요. 아교는 그림에 항시 쓰는 거에요. 채색을 아교에다 개거든요. 그래서 부착력을 만드는 건데, 그것을 그냥 먹에다 팍 찍어서 하면 먹이 번지는 것이 (중략) 팍 즉 쫙 번져요. 아름답게.”23

그의 이러한 기법은 히트를 치면서 묵림회를 중심으로 한 화가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이러한 안동숙의 묵림회 시절 제작된 작품이 <한월>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학이 표상하는 것은 구체적인 길상적인 덕목이 아니라 ‘전통’ 표상하는 것이며, 이를 소재로 조형실험을 지속하여 서양의 모더니즘 회화와는 다른 한국적인 안동숙적인 모더니즘 회화를 이룩해내려고 했던 것이다.


19 이와 관한 자세한 논의는 장준구의 앞의 글(2012)을 참고할 것.

20 김환기, 「편편상」(1961. 9); 『김환기 25주기 추모전: 白磁頌』(환기미술관, 1999. 4), p.88에서 재인용.
21 김환기, 「항아리」(1963. 4); 『김환기 25주기 추모전: 白磁頌』(환기미술관, 1999. 4), p.94에서 재인용.

22 필자와 안동숙과의 인터뷰(2005. 11. 19).
23 필자와 안동숙과의 인터뷰(2005. 11. 19).



Ⅳ.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근현대 학 그림들은 다양한 의미들을 표상해냈다. 전통적인 도상인 길상, 군자의 삶, 신선의 세계를 넘나드는 선학, 상서로운 조짐을 알리는 서학의 이미지 등이 여전히 표상되었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이 표상되는 과정에서 상서로움의 주체는 왕조에서 국가로 변모되었다가 국가주의의 희석 속에서 부각되는 지역의 작은 공동체가 되기도 하였으며 부부애로 대표되는 근대적 가족이 되기도 하였다.

문인이라는 계층은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군자의 삶의 태도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자화상과 결합되면서 삶의 지향점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학이 전통이라는 포괄적인 이미지를 표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의미들을 표상해내면서도, 한국근현대 학그림은 20세기라는 시대가 요청했던 조형적 실험을 지속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이러한 노력이 한국근현대 학그림이 단순히 복고적인 화면이 아닌 생명력 있는 당대 회화로 자리잡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판단된다.



주제어 keywords
김기창 Kim Ki-Chang, 김봉준 Kim Bong-Jun, 김은호 Kim Eun-Ho, 김환기 Kim Whan-Ki, 안중식 Ahn Jung-Sik, 이숙자 Lee Sook-Ja, 장우성 Chang Woo-sung, 조석진 Cho Seok-Jin, 채용신 Chae Yong-Sin, 학 Crane


투고일 2014년 8월 29일 | 심사일 2014년 9월 12일 | 게재확정일 2014년 9월 26일



참고문헌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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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Inheritance and Transformation of Traditions Seen through Pictures of the Crane in

20th Century Korea


Park, Carey


In modern Korea, the crane has come to symbolize a wide range of meanings. Even the broad concept of “tradition” itself is represented through the crane as it has carried over the various tales that have been ascribed to it since the old ages. This bird was said to have the ability to cross over to the Taoist paradise, to represent the life of a virtuous man, and to be a sign of luck and a good omen. But during the 20th century the object of good fortune changed first with the transition from Kingdom to nation state and then with the dilution of the state to smaller communities of regions down to the marital relationship of man and woman. Although no class of Confucian literary existed anymore, the attitude of the virtuous man still remained a point of orientation for intellectuals during that time which led them to include this image of the crane in their self-portraits as well.
The various connotations expressed in pictures of the crane were like other symbols during the 20th century subject to continuous experiments and change. Despite being a traditional symbol, therefore changes in its depiction can be analyzed through the influence of this force of change that was set in motion with mod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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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 〈백학도> 1920년 비단에 채색 197×579cm 희정당 서벽


김은호, 백학도 좌


김은호, 백학도 우


김규진 금강산만물초승경


김규진 해금강총석정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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