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장막

[스크랩] 새 언약에 관하여(김성수 교수)

작성일 작성자 주님의 장막

                                 새 언약에 관하여

                                               김성수 [합신대 교수]

 

 

서    론

 

   새 언약은 모든 언약의 마침이며 성취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다른 언약들보다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약에서의 옛 언약은 사실상 보다 더 좋은 언약인 새 언약을 기대하였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옛 언약이 성취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새 언약은 옛 언약과는 다른 보다 새로운 의미를 가진 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새 언약은 구약의 옛 언약과 전혀 다른 성격의 언약이 아니고 옛 언약과 그 본질을 같이하고 있음으로 절대적 의미에서의 새로운 언약은 아닌 것이다.    혹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연속성의 측면에서의 논의는 간과하고 불연속성의 측면에서의 의의를 더 우선시함으로 새 언약의 우월성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신 구약의 관계성을 보지 못하고 고정된 시각으로만 언약을 보게 되면 옛 언약은 새 언약에 비해 조금은 열등한 언약으로 볼 수 있고,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조건적인 언약과 무조건적인 언약으로, 혹은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대비시키는 우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상대적 차이는 인정해야 하지만 그 차이가 계시의 점진성으로 인해 야기된 차이이지 그 본질의 차이는 아님으로 옛 언약을 새 언약과 전혀 다른, 혹은 보다 열등한 언약으로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새 언약은 앞서 있었던 더 이상의 언약갱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모든 언약의 마침이며 성취라는 점에 있어서 새로운 언약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 새로운 언약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본인은 본 논문에서는 먼저 새 언약의 본질과 그 성취를 밝힘으로 새 언약에서 약속한 것이 무엇인지 논하고, 다음으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어떠한 본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상대적 차이는 인정되지만 본질이 전혀 다른 언약이 아닌 동일한 언약임을 밝히기로 하겠다.

 

 

I. 새 언약의 본질

A.새언약의 내용 1.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구분   ‘이전 언약’과 ‘새 언약’, 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구분은 예레미야 31:31과 성찬제정의 말씀,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다양한 표현으로 여러 번 발견된다.    Palmer Robertson은 그리스도 이전의 하나님과 인간의 유대관계는 ‘옛 언약’으로, 그리스도 이후의 관계는 ‘새 언약’으로 부를 수 있다고 보았고 ‘옛 언약’은 약속, 그림자, 예언 등으로 특징 지워지며, ‘새 언약’은 성취, 실재, 실현 등으로 특징 지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렘31:32절에서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땅을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으로 문자적으로는 여기서 옛 언약은 모세언약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 고후3:6에서는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하심으로 새 언약과 모세의 율법을 대조하고 계시며, 갈4:24에서는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말씀하심을 볼 때 바울은 옛 언약을 모세의 율법체계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히9:1이하에서도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라고 이야기 함으로 히브리서 기자 역시 옛 언약을 모세의 율법체계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옛 언약은 모세 언약을 가리키는 것이요, 새 언약은 선지서에서 예언된 언약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언약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 예레미야서에 나타난 새 언약의 약속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1-34)

 

  1) 계약에 참여하게 된 자들의 내적 본질이 변함으로써 순종이 촉진된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   새 언약은 순종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옛 언약에 순종하는 일에 있어서의 백성의 실패를 배경으로 주어진다. 언약이 선포될 때 축복과 저주의 개념이 소개된 것으로 보아서 언약에 대한 순종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로서는 심비에 새겨지지 않고 돌비에 새겨진 율법에 대한 순종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불순종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그들의 마음으로 받는데 실패하였다.    그런데 새 계약은 새로운 마음, 즉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합당한 순종의 태도를 약속하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새로운 율법이 아니라 순종할 수 있는 새로운 힘에 있었다. 새 언약 아래서 율법은 직접 마음 안에 놓여지고 그것은 동기유발의 요인, 모든 행동이 지배받는 기준, 진정한 순종을 산출하는 생동적인 원리가 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 맞는 자발적인 순종을 얻으려 인간의 마음속에 자신의 율법을 기록하기 위한 새롭고 성공적인 시도를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2) 하나님과의 참다운 교제(임마누엘)가 가능해진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3)”   이것이 새로운 약속, 새로운 이상, 새로운 관계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래로 계속해서 자기 백성들과 자기와의 특별한 관계가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셨다.    옛 언약하에서 그들은 언약을 파기함으로 “내 백성이 아니라(호1:9)”고 여겨졌었는데 이제 다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주께서는 자신에게 심한 범죄를 저질렀던 언약백성들에게 그의 사랑을 표현하시고 또한 출애굽 구속 후에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거룩한 나라로 세우셨을 때처럼 마치 그들을 다시 찾으셔서 그들을 새롭게 하신다.    새 언약에서 ‘임마누엘’의 약속은 옛 언약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부분이다. 구약에서 회막이라는 상징체를 통하여 되어진 임마누엘의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오심과(요1:14)과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취될 것이다(계21:3-4)

 

  3)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지식이 주어진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31:34)”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경험은 아니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이스라엘의 유산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호4:2)”고 그들에게 비난하였으니 그것은 비극이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적 지식에 근거하여 알지 못했다. 그러나 새 언약하에서는 옛 언약하에서 누리는데 실패하였던 하나님과의 깊은 교계-연합-가 가능해질 것이다.   옛 언약하에서는 모세와 같은 중보자가 필요하였으나 앞으로는 제사장이나 특별한 임무를 맡은 선지자 등과 같은 중재자들과 그들이 옛 언약하에서 작동시켜왔던 교육적인 제도들을 유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자들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새 언약아래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교육이 폐지될 것이다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알다’라는 단어에 담겨진 하나님과의 내적이며,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질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로운 상황에서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알 것이고 그 지식은 직접적인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성령님 안에서 가능해질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주어질 것임을 동일하게 말하고 있는 에스겔 16:63절에는 “너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고 말한다. 이 어구는 에스겔서에서 50번 이상이나 나타나고 있는데, 이 어구에서 나오는 ‘야다’(???, to know)라고 하는 히브리어는 지적인 지식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그것은 마음의 지식이며 사랑을 필요로 한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라고 기록된 요일서 2:27절의 말씀은 새 언약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실행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는 아무리 약하고 미천한 자라도 새 언약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이는 만인이 똑같이 가지는 특권도 아니요 또 교제를 돕기보다는 방해하는 그런 머리(지성적)의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된, 그리고 전적으로 동화가 되어 버린 그런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것이며, 영원한 생명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것이다. 성부 하나님과 하나시며 하나님 안에 거하시므로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를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그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4) 죄에 대한 완전한 용서가 일어난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31:34)”   죄의 용서에 대한 약속은 옛 언약하에서도 이미 존재했었다. 예레미야는 죄가 옛 언약 아래서 용서함 받았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이미 죄를 용서할 것에 대해서 약속하셨고 이와같은 약속은 옛 언약하에서 계속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죄 용서는 제사를 통한 제도화된 접근체제와 한데 묶여 있었다. 하나님은 제사제도를 통하여서 죄를 용서하였다. 그렇지만 렘31:34절에는 새 시대에서의 그와 같은 제도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즉, 여기에는 죄가 한번에 그리고 완전히 다루어지는 상황이 고려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 시대에는 죄를 상쇄하는 어떤 다른 제도가 요구되지 않을 것이다.    죄의 완전한 용서에 대한 약속은 예언적 과장법의 어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새 시대의 하나님에 대한 심리적 태도를 가리키는 어구도 아닌 것으로서 이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잊으심으로 죄를 용서’하실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징벌의 위협이 사라지며 계약은 결코 파기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옛 계약 아래서 약속의 실현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옛 계약이 아무 효력도 없는 것으로 만들었던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죄였고 그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일에서 풍성해질 것이다.    선지자들에게 있어 죄사함은 메시야 시대의 축복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었고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 예수와 서기관들 사이의 논쟁은 예수가 죄를 용서하심을 선언하셨을 때에 시작되었다. 예수께서는 죄사함의 선언을 실제로 이룩하셨다. 죄사함은 선지자들이 종말론적 나라에서 있을 것을 약속하셨던 것을 사람들이 현세에서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예수의 인격 가운데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

 

  3. 에스겔서에 나타난 새 언약의 약속   예레미야 31:31-34절의 새 언약처럼 에스겔의 영원한 언약도 역시 죄의 용서를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예레미야에 의하여 율법이 백성의 마음에 있어야 한다고 진술되었듯이 에스겔의 언약에서도 새 마음과 새 영이 약속되었다(겔36:27). 순종은 율법의 새로운 조항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촉진 될 것이다.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레를 지켜서 행할지라”(겔36:27)   위 말씀은 선지서들 중에서 매우 뛰어난 진술이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새 계약을 담은 약속이고 바울 신학에서는 복음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성령의 복에 대한 전조이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이 율법의 내면화로 말미암아 순종을 촉진하도록 약속하였던 것과 꼭 같이 에스겔의 새 언약도 하나님의 영이 심령에 임하심을 통해 순종을 확실케 할 것이다.

B. 새 언약의 성취 1. 성찬과 새 언약과의 관계   포로귀환 사건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예언에 대한 소망의 성취를 어느 정도 나타내었다. 분명히 그것은 외적인 회복을 나타내었으며, 그 이후에는 우상숭배를 했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나 혹은 명백한 기록이 더 이상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포로귀환은 완전한 치료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 새 언약에 관한 예언이 휠씬 더 근본적으로 성취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새 언약의 성취가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드신, 그리고 당신이 이처럼 제정해 놓은 성만찬이 끝날때까지 마시게 될 그 포도주가 새 언약의 피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맹백하게 주장하였다. 이 말씀들은 십자가에서 당신이 죽으심으로써 선지자에 의해 예견된 소망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날 밤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시면서 식탁에 있는 떡(빵)을 하나 집어들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것이 내 몸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 주셨다. 잠시 후에 그는 포도주 잔을 취하여 축사하신 후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고전11:23-25), 또는 “이것은 나의 피 곧 언약(new covenant)의 피니라”(막14:24)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나눠 주셨다.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신 것은 예수께서 몸을 내어 주신 일과 피를 흘리신 일로 말미암는 은혜를 그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표였다. 떡과 잔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가져 오실 주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는 그 나라에 참여한다는 뜻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자신들의 그 언약에 포함되며 하나님 나라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성찬식을 이렇게 시작하심으로 자신의 피흘림과 새 언약의 제정을 연관시켰다. 그분의 피는 언약을 인준(認准)하는 피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가 “많은 사람을 위해” 흘려진 피이며,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선언한 ‘새 언약’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라는 식으로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대속적 죽음의 일반적인 성격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의 피흘리심은 우리들의 죄사함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고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식은 죄사함을 위한 최종적인 성례였다고 볼 수 있다.    구약의 제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된 자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메시지를 한결같이 담고 있다. 구약의 제도들 역시 나름대로 효력을 발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제도들이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인 효력을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죄의 문제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근복적인 해결을 보게 된 것이다. 이제 주께서 행하신 성찬식은 언약이 완성되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예수께서 제정하신 새 언약에서 볼 수 있는 심대하고 중심된 사상은 예수님의 죽음이 전적으로 대속적 제사이며 옛 언약하에서 상징되어 오던 모든 것의 성취라는 것이다.   주의 만찬은 구약에서의 유월절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완성하신 구원을 기념하는 의식이다. 과거 유월절이 언약갱신의식으로서 정기적으로 계속 행해졌던 것처럼 주의 만찬도 계속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만찬과 관련하여 “...때마다”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고전11:25) 이 만찬이 유월절보다 더욱 자주 행해져야 할 것임을 시사한다.

 

 2.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히8:6)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파기한 모든 죄인들의 저주를 홀로 담당하신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또한 그 분은 언약 아래 계시며 동시에 언약을 세우시는 분이시며 절대주권자이시라는 점에서 이중적인 역할 - 그러나 상충되지 않는 - 을 감당하였다. 그는 성격상 왕이시지만 고통을 담당해야 할 주의 종이며 백성에 대한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도록 지명받은 하나님의 특별한 도구인 것이다. 이 한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목적은 결정적인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그 분은 율법을 성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신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었으며, 그는 율법의 저주를 대신받으신 것이다.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생긴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떨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율법을 어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저주를 제거하신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담당해야 할 저주를 ‘아멘’ 이시요 ‘충성’이신 그리스도께서(계3:14) 자신이 대신 지고 죄인의 자리에서 죽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사하려고 다시 말해 계약적 저주의 희생제물로서 죽으심으로 부르심을 입은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셨다(히9:15). 그리스도는 옛 언약하의 범죄의 총 결과를 담당함으로써 그 저주로부터 우리들을 구원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옛 계약안의 범죄를 지워버릴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새 계약의 축복된 상태로 인도하고 있다.   이제 저주와 축복의 이중 역할은 그리스도안에서 완성적인 의미를 찾게 된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면서 동시에 축복된 새 계약을 세운다. 계약에 명시된 저주로부터의 장차 구원의 약속이 구약에 나타나는 반면, 이 약속이 실현된 사실이 신약성경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 증거는 특히 히9:15-20과 새 계약 수립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마26:28, 눅22:20)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사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9:15).” 히브리서 기자는 첫 언약에서 범한 죄를 사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으로 해석한다. 새 계약을 세운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파괴로 인한 저주로부터 구원을 제공하였다. 그의 “계약의 피”는 새 계약을 세웠으며 동시에 옛 계약의 저주를 없애는 역할을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는 율법 파괴자의 자리에 자신을 대신하였다. 그리스도는 계약의 저주를 자신이 담당하면서 그들의 자리에서 죽었다. 그분은 언약의 저주는 자신이 담당하시고 대신에 언약의 축복은 우리에게 전가시키신 것이다. 이러한 축복은 우리들이 믿음으로 노력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순간 우리에게 부여된 축복들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축복이 우리에게 전가 되어지고 반대로 우리의 죄로 인한 저주는 그리스도께 전가되어지는 즐거운 교환이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중보자는 다름아닌 ‘아멘’이신 그리스도시다.

 

 3. 새 언약의 참여자   새 언약에 누가 참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해결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구약 교회의 성격이 어떠한가를 규명함으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담언약과 노아언약 그리고 아브라함언약 등은 본래 하나님과 한 인간이 맺은 언약이었으나 이러한 언약은 본질적으로 대표성을 띤 계약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아담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지만 그 언약은 온 인류를 대표한 언약이며, 노아와 아브라함 언약 역시 개인과 맺은 언약이긴 하지만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과도 맺은 언약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약을 맺은 당사자가 한 개인이라고 할지라도 언약 당사자들은 언약 공동체를 대표한 대표자의 자격으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므로 그 언약의 효력은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 후손들에게 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 “언약”은 그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넘어서까지 계속성을 확인하는 조항이 포함될 수 있다. 실지로 성경적 계약들은 “수천대”까지 연장되었다.   아담 한사람으로 인해 모든 인류가 그와의 연합으로 인해 그의 범죄에 동참케 된 것과(롬5:12-14) 홍수심판중에도 노아 한사람으로 인해 노아를 비롯한 여덟 식구가 구원을 받은 사건(창7장)들은 계약 공동체의 성격의 한 단면을 드러내 준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한 개인은 선행이든 악행이든 그 자신만의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그는 개인적인 사람(a private person)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단체의 일원이자 한 부분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두고 볼 때 이스라엘이라는 구약 교회는 한 사람의 행동으로 인해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언약의 역사를 살펴보면 언약공동체를 대표하는 대표자 한 사람의 행동에 의해 그 후손들이 동일하게 그 언약에 참여하게 되고 그 언약의 효력범위 아래 들어가는 일들이 일어난 것은 이스라엘이란 민족이 언약백성임을 명백히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언약 중보자 한 사람의 사역에 의해 그 언약 중보자와 결속(solidarity) 되어진 모든 백성이 언약 중보자가 성취한 일에 동참하였듯이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사건(a saving event)에 예수 그리스도와 언합된 모든 믿음의 자녀들은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새 언약의 구성원은 이제 육적 이스라엘이 아닌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새 언약에는 그리스도와 결속되어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여할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새 언약에 참여하는 구성원이 옛 언약에서와 같이 혈통에 의해 될 것인가? 아니면 혈통과 상관 없이 될 것인가? 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새 시대의 영적인 축복은 혈통을 근거로 하기보다는 개개인의 믿음을 근거로 수여되어질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새로운 관계의 개인적인 조건을 다음과 같은 말씀하심으로써 분명히 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마10:35-36). 육적인 가족나 민족단위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흔히 가족의 유대를 간과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혈육의 유대관계를 파괴할 수도 있는 개인적인 신앙이 인간이 하나님 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는 근본적인 기초가 된다.

 4. 새 언약과 성령    옛 언약하에서 솔로몬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필요를 인식하였고(왕상8:23,38,39), 선지자들도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구속을 인(印)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성별시키기 위하여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후손들에게 내릴 것을 가르쳤다. 이렇게 약속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이 가능해진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롬8:3-4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은 이제 우리의 영혼에 역사하여 모든 거룩한 본분을 다하게 하고, 모든 실제적인 죄악들을 범하지 않을 수 있게 하심으로써 영혼을 더러움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새로운 약속(new covenant)의 교훈을 따라 그것을 순결하고 거룩하게 보존해 주신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지키시는 것이다. 새 언약에의 참여는 이처럼 성령의 선물을 받음으로 가능해지고 그것은 구원의 은사를 받는 것으로 연결되어진다. 성령은 구원의 보증이 되시고 부활의 보증이 되시는 것이다.    이처럼 새 언약 하에서는 인간의 내적 자기갱신이 아니라 인간 속으로의 거룩한 신적 속성이 주입 될 것이다. 새 언약의 갱신은 회복시대의 시작을 표시할 뿐 아니라 또한 성령의 시대로 표시된다. 앞서 언약들의 집행시에도 표징이 있었던 것처럼(노아 언약에서 무지개, 아브라함 언약에서 할례, 시내산언약에서 안식일) 새 언약의 표징은 약속으로 오신 성령이다.

 

II. 새언약과 옛언약의 관계

   지금까지는 새 언약의 본질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살펴본 새 언약의 성격이 옛 언약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새 언약의 요소들이 옛 언약의 요소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인지, 아니면 옛 언약과 같은 본질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A. 옛 언약에서의 요구는 새 언약의 요구와 다른가?   모세언약에서 볼 수 있는 순종에 대한 요구를 많은 사람들이 은혜보다는 행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해석해왔다. 이러한 해석은 모세언약에서 볼 수 있는 순종의 요구가 복음 아래서 요구되는 순종의 요구와 원리적으로 동일하지 않는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면 모세언약의 지배적 원리는 무엇인가? 그 원리는 은혜와 대조됨으로 새 언약의 원리와 대립되는 율법의 원리인가?    모세언약에 관한 이러한 해석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예가 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그 언약을 지킨다는 말투로 표현되어 있다(출19:5-6,24:7). 이것은 분명히 은혜언약의 말투가 아니라 법률적이고 협약적 약정으로 이루어지는 계약적 말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실제로 다음의 두 가지말로 요약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레11:45)” 즉 이 말씀의 요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에 들어간 사람 편에서도 나타나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원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옛 언약의 요구는 새 언약의 요구와 동일한 것이요 원리적으로 다른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거룩하심의 요구는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을 막론하고 그의 언약의 교제에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으로 이 거룩함의 요구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하는 것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 거룩함의 요구는 요구일 뿐만 아니라 언약적 축복의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하여 구속되었고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거룩함은 언약축복의 본질이요 핵심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심은 이러한 거룩을 이루기 위한 선택임으로 그 거룩에서 떠난다면 그들의 선택은 무의미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 그의  백성은 그 교제를 통하여 거룩함을 열매로 맺게 되고 그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계속적으로 순종하는 것 없이 하나님과의 교제와 언약의 특권을 누릴 수 있다고 오해하는 것 만큼 은혜의 교리를 곡해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참 성도들은 종말적 구원에 이르기 까지 보호되어진다. 그렇지만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보호되는 것이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공로적 근거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오래참음에 의해서이다(참고 히6:11,12). 이러한 믿음과 오래참음은 계명순종에 의해 필수적으로 표현되게 된다. 믿음과 오래참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집중적인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순종은 행위언약이나 공로언약에서 발견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한 은혜언약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언약에서 볼 수 있는 순종의 요구는 새 언약 아래서 동일하게 요구되는 순종의 요구와 원리적으로 같은 것이다. 순종이 새 언약에서 공로라는 법적 영역에 속해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옛 언약에서도 그러하다. 신약시대의 신자는 하나님께 대해 율법이 없는 자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다(참조 고전9:21). 이처럼 모세언약에서 볼 수 있는 순종의 요구를 복음안에서 율법과 은혜의 관계라는 점에서 비추어 재 검토해 본다면 행위를 은혜와 반대되는 것으로 보는 해석과는 아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요구는 상이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B. 의의 표준으로서의 율법    세대주의자들은 새 언약하에서의 율법은 더 이상 고유의 기능을 발휘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새 언약하에서의 율법은 결코 폐지된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는 그는 계약을 범한 이스라엘을 꾸짖고 있지 옛 언약을 저주하지 않는다. 새 언약에서 말하고 있는 ‘법’이란 새 언약을 위한 새로운 법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유일한 법, 다시 말하면 그의 성품의 영원한 표현으로서 신 구 언약의 공통되는 그 법이다.   Hengstenberg는 “율법이 두 시대에 공통되기 때문에 새 언약이 옛 언약과 비교하여 새롭고 더 완전한 하나님의 율법의 계시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새 언약이란 이전 것에 기반을 전혀 주지 않고 전적으로 새로운 어떤 관련을 소개하는 것으로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고 말한다.   율법은 새 계약에서 표현된 대로 존귀케 되어야 하며 순종되어야 한다. 옛 시대의 올무는 사라졌으나 율법의 위대한 윤리적 요구들이 예수님과 바울의 교훈들 속에서 표현되었다. 따라서 율법은 계속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다만 이제 더 이상 신자는 정죄되지 않을 뿐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간에 근본적인 불연속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종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는 등의 표현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율법은 언약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인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성취하려 오셨다(마5:17-20). 또한 율법은 여전히 하나님의 의의 표준으로 남아 있는 것이며(롬2:13), 믿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굳게 세우는 것이다(롬3:31). 더우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사셨으며, 또한 죽으신 것은 율법의 요구와 형벌을 완전히 감당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우리 자신들이 율법의 요구하는 바를 행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요구하는 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일을 감당하셨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굳게 세우는 것이다.

C. 심비에 새겨진 율법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    고후3:3절에서는 하나님의 유일한 법이 그의 백성들에게 주어졌을때의 두 가지 반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하나는 심비에 새겨진 법이요 다른 하나는 돌비에 기록된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얼핏 읽으면 옛 언약하에서는 율법이 심비에 새겨지는 일은 없었으며 새 언약하에서 비로소 율법이 심비에 새겨지는 일이 가능하게 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렇게 되면 옛 언약하에서는 이와같이 율법이 심비에 새겨지는 일은 없었으며 또 렘31:33절의 말씀은 새 언약하에서만 이루어질 어떤 특별한 일을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율법은 신자의 심비에 새겨져야만 했었던 것이고 고후3:3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법이 주어졌을 때 그 백성의 반응을 두가지로 표현한 것이지 율법이 심비에 새겨지는 일이 옛 언약하에서는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이 율법에 대해 불순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대한 순종의 필요성과 마음이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은 옛 언약 하에서도 이미 요구되어졌던 것이다. 언약은 끊임없이 갱신되어 왔지만 언약 규정인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명령은 꾸준히 반복되었고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할 필요성 역시 강조되어 되어졌다(신6:6; 11:27절 참조). 옛 언약하에서도 율법은 단지 외적인 죽은 의문이 아니었다. 단순한 율법의 외적수여를 통해서는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없었으므로 옛 언약하에서도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판에 새겨졌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와같은 사실을 부인하면 옛 언약하에서는 ‘회개함으로 새로와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옛 언약하에서도 율법이 심비에 새겨져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또 실제로 율법이 심비에 새겨지는 일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마음에 할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신30:6)과 율법을 마음에 새기는 것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단순히 외적 의문이었다고 하면 시편 19편 등과 같은 성경에서 율법을 지극히 찬양한 예들을 설명할 수 없다. 구약에서도 새 마음은 이미 창조되었고(시51:10), 이러한 창조의 성격을 모르는 것은 “이스라엘의 선생”에게 큰 수치였던 것이다(요3:10)   사51:7에 의하면 의를 안다는 것, 즉 언약관계의 참다운 특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마음에 율법을 소유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에스겔이 말하고 있는 새 언약의 단락들을 고려해 보아도 이같은 마음의 관계와 관련된 문제가 새 언약 하에서는 보다 더 진전되고 있긴 하지만 행위율법의 전제조건으로서의 마음의 율법은 분명히 구약적인 것이며, 성경전체적인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의 두 언약간의 대비를, 단지 새 계약의 내향성에 반대하는 것으로 옛 계약의 외향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정당하지가 않다. 옛 언약도 역시 율법의 내향적인 성향을 그 이상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새 언약 하에서 율법이 마음 즉 심비에 새겨질 것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은 이러한 일들이 본질적이 차이에서 일어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정도의 차이, 상대적으로 더 분명하고 더 충만한 역사가 일어날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새 언약에 속한 자들은 실제로 일어난 더 분명한 실체를 보고 믿게 되었으며 이 실체를 믿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인해 더 깊이 더 충만하게 더 많은 사람들이 혈육의 장벽을 뛰어넘어 중생의 은혜에 참여하게 될 것이며 그 은혜로 인해 하나님을 온 마음과 온 뜻과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함으로 그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D. 속죄제사와 새언약   흔히들 새 언약의 중요한 특성은 ‘완전한 죄사함’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면 죄사함의 의미가 새 언약에서만 부각되는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죄사함에 대해서 이미 모세언약에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실 때 죄사함을 얻을 수 있는 통로를 함께 열어 놓으셨다. 하나님은 모세언약을 주실 때 성막의 식양을 계시하신 것이다. 제사제도를 통해 율법을 불순종한 모든 죄를 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속죄제사는 반복적으로 드려져야만 하였고, 인간이 아닌 동물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였기에 완전한 속죄을 위한 형식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 구약제사제도는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히10:3)”이었다.    동물을 드리는 제사는 첫 언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죄를 중재하시는 방도였지만, 실제로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한 것은 동물들의 죽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었다. 이런의미에서 볼 때 구약의 속죄제도는 실체를 바라본 상징이요 예표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불완전한 것이었다. 물론 이 말은 옛 언약에서는 죄사함의 의미가 부각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실체를 지시하는 손으로서의 예표였다고 하는 의미에 있어서 불완전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옛 언약하에서의 속죄제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은 새 언약의 제정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깨서 죽으심으로 보다 확실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영 단번에 자신의 몸을 드리신 것이다. 이제 새 언약하에서는 더 이상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일은 죄사함의 수단이 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자기백성의 죄값을 한번에 다 치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용서를 구하는 믿음의 고백이 죄사함의 수단이 되어진 것이다.    그러면 과연 새 언약하에서는 죄사함의 실제적인 용서의 효과를 얻었지만 옛 언약하에서는 실제적인 용서의 효과를 누리지 못했는가? .옛 언약하에서의 제사제도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실제적인 죄사함의 은혜를 누리게 하지는 못했는가? 아니다. 이러한 질문은 구약성도의 계시 이해 수준을 낮추어 봄과 동시에 구약성도들이 실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구약의 역사속에 살고 있음으로 완전한 의미에서의 계시의 효과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는 잘못된 가정에서 비롯된 오해들이다.    우리들은 구약의 성도들 즉 옛 언약하의 백성들이 실체가 온 신약시대의 성도들보다 계시이해 수준이 떨어지고 따라서 그 계시의 효과를 누리지 못했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아브라함이나 다윗과 같은 인물들을 분명 구약의 속죄제사를 통해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결코 그들이 죄사함의 주관적 용서의 효과를 누리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구약백성은 제사에 참여함으로 - 비록 앞으로 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혜의 실체)을 예표하는 것이지만 - 곧 성례전적인 의식을 통하여 앞으로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한 이 은혜의 수단에 믿음으로 참여함으로 실제적인 죄사함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레위기에서는 희생제사의 효과를 수차례 반복되는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는 말로 나타낸다. 이 속죄는 거짓말, 도둑질, 사기, 위증 음란의 죄들을 다 포괄하는 효과적인 것이다(렘6:1-7). 다윗의 경우 음란과 살인 공모에까지 그 죄의 목록이 확대될 수 있다(시32,51편). 사실 대속죄일에는 이 목록들에 포함된 “모든 죄”가 사함 받는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며(레16:21,22), 또한 다윗은 이러한 주관적 용서의 경험으로 인해 찬양하기도 하였다(시103:10-12).    이와같은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옛 언약하에서의 백성들이 결코 옛 언약하에서의 속죄제사의 효력이 가져다 주는 주관적인 죄사함의 효과를 누리지 못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새 언약과 옛 언약에 있어서 죄사함의 효력은 동일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의 본질적 요소도 동일한 것이다.

 

E. 옛 언약에서의 성령의 역사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새 언약 하에서는 성령의 활동이 두드러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에스겔은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 속에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레를 지켜 행할찌라(겔36:26-27)”고 말하면서 신자 안에서 성령이 주도적으로 일하심으로 율법을 지키도록 하실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옛 언약하에서와는 달리 새 언약하에서 성령의 활동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러면 옛 언약하에서의 성령의 활동은 다소 소극적이었는가? 또는 성령의 활동은 없었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대 부분의 학자들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성령이 존재했으며 활동하고 있었으며(창1:2;욥26:13;사32:15), 또한 모세나(민11:17) 70인의 장로들(민11:16-17)과 같은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구약성도들 모두가 보편적으로 성령체험을 했는가?” 하는 질문에 있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그들은 계시의 영을 받은 선지자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예레미야와 에스겔과 요엘이 예견한 성령의 시대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성령이 만약 평범한 각 사람의 속에서 활동하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은 거듭나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구약시대에는 극소수만이 구원받았다라고 하는 논리가 성립됨으로 위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옛 언약하에서도 중생케 하고 율법을 지켜 순종케 하는 성령의 사역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구약의 몇 구절을 예로 들어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윗이 시51:11절에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말한 사실과 이사야가 이스라엘을 가리켜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한 나라라고 말한 사실을 볼 때 옛 언약하에서도 성령이 신자와 함께 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도 고후4:13절에서 우리의 믿음이 구약성도들의 삶 속에도 역사하였던 것과 꼭같은 “믿음의 영(spirit, 개역성경은 ‘믿음의 마음’으로 번역)”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옛 언약하에서도 새 언약하에서와 동일한 성령의 사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새 시대에는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레를 지켜 행할찌라(겔36:27)”는 에스겔의 주장과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2:29)”라는 요엘의 주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또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7:39)”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스미톤은 오순절 성령의 유형강림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오순절은 보혜사의 사역의 시작을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날이다” 성령은 이미 구약 시대 신자들의 “안에” 계셨으나, 구약시대에 선취적으로 경험한 신자들의 경험을 유용한 것으로 만들어 주기 위하여 유형적으로 나타나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 하에서의 성령의 주도적 사역은 전혀 새로운 사역이 아닌 이미 옛 언약하에서의 사역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그 옛 언약이 예표한 것이 성취되었다고 하는 의미가 있듯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유형적으로 일어난 성령강림사건은 구약에서 있었던 성령이 모든 믿는자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임했으며 또한 앞으로 임할 것임을 보여주는 면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F. 새 언약의 필요성  1. 이스라엘의 범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됨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는 바 대로 살지 않았다. 아니 살지 못했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들은 에브라임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하며”(시78:10), “오히려 범죄하여”,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다”(시78:32,37). 이사야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음이라”(사24:5)고 통탄하였고, 예레미야도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 열조와 맺은 언약을 파하였도다”(렘11:10, 참고 22:9, 34:18)라고 한탄하였다. 에스겔은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겔16:59)이라고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파기했음을 백성들에게 알렸다. 언약을 어겼다는 선지자들의 고발은 분명하며 이러한 고발은 성경에서 반복해서 나타난다. 이러한 선지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소흘히 하자 마침내 언약의 저주대로 그들은 이방의 포로로 사로 잡혀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율법의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얻은 땅에서 뽑히고 심지어 발바닥 쉴 곳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셨고(신28:58, 63-66절 참조) 예언자들을 통해서 언약을 준수하면 복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다가 마침내 그 땅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와같이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가시화되자  이제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언약 갱신의 필요성이 요구되게 되었다. 불순종으로 인해 심판이 불가피 하였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실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에 충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비록 언약의 의무를 수행하는데 실패하였지만 하나님은 결코 자기백성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자기백성을 구원하시려던 그분의 본래의 목적은 새 언약의 체결을 통해 마침내 실현될 것이다.

 

  2. 옛 언약이 파기된 이유    우리는 위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 이스라엘의 범죄 즉, 언약규정을 이행하지 않은 율법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파기되어졌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이렇게 볼 때 표면적으로는 언약파기의 이유가 율법을 불순종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사실을 오해하면 율법주의에 기초한 율법의 완전한 성취로 인해 언약이 유지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처럼 언약존속의 여부를 율법주의적인 율법의 수행에 둔다면, 옛 언약 하에서는 율법주의적 공로를 언약유지의 수단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러나 옛 언약 하에서는 결코 완전한 의미에서의 언약순종이란 사실상 불가능했었다라는 사실을 전제하면 율법을 불순종한 것만이 언약파기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이렇게 보면 옛 언약은 유명무실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옛 언약이 인간의 욕구를 불러 일으키고, 인간의 노력을 부추기고, 하나님께 의존하고자 하는 생각을 깊게 해주고, 인간의 죄와 약함에 대해 확실히 알게 해 주며,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불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면 옛 언약파기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참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법을 순종했느냐 하지 못했느냐 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있지 않는냐를 나타내는 표식이지 율법순종여부가 언약파기의 참된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행하지 않은 것이 궁극적인 언약파기의 원인이 될 수 없고, 믿지 않은 불신앙이 언약파기의 궁극적 원인인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과 순종의 행위는 대조되는 것이 아니고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믿어 순종케(롬1:5, 롬16:26)” 된다고 하면서 참된 믿음은 순종이란 열매를 자연스럽게 맺게 된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처럼 믿음과 순종을 대조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믿음에는 순종이 반드시 동반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언약파기의 원인을 불순종이라기 보다 불신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옛 언약의 불완전성   새로운 언약이 왜 필요했는가? 하는 새 언약의 필요성의 문제는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한 옛 언약의 파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옛 언약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불완전성으로 인해서도 대두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옛 언약이 불완전하다고 하는 의미가 옛 언약 자체가 언약으로서 구비되어야 할 조건이 불충분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옛 언약이 불완전하다는 말은 옛 언약이 인간의 불순종으로 파기되어져 온 언약이고 새 언약을 바라보게 하는 예표성을 띤 언약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히8:7)”라고 하면서 옛 언약이 불완전함을 말하였다. 옛 언약하에서의 희생제사는 그 자체로서 죄를 없이 하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제한적이었고 세상의 죄를 제거할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했었다. 물론 앞서 언급한대로 죄사함의 본질은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이나 동일하지만 상징자체가 실체가 아님으로 옛 언약은 불완전하였던 것이다. 구약의 모든 계시가 그 자체로서의 효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그 계시의 실체가 드러났고 또한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새 언약을 예표하는 면에서 불완전한 언약이라고 할 수 있는 옛 언약은 성령님에 의한 인간의 내면적 변화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의한 완전한 대속의 실체를 약속하는 새 언약을 요구하였다.

 

 

결    론

   오직 율법의 요구만이 역사적 실체로 주어졌고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은혜는 상징적 의식과 예표로 주어졌던 옛 언약은 율법적 요구가 더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옛 언약은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고 그리스도를 대망케 하는 몽학선생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세언약을 끼어든 것이라고 말한다(롬5:20). 그러나 실제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이질적인 언약이 아닌 것이다.    옛 언약의 요구는 새 언약의 요구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의한 계명순종과 이로인한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의 교제에 동참하라는 은혜의 요구였으며,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의의 기준도 동일한 율법의 말씀이며 이 율법은 단순히 의문에 그치지 아니하고 옛 언약과 새 언약 하에서 공히 심비에 새겨져야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옛 언약 하에서도 새 언약과 같이 동일한 속죄의 효력을 누렸고 동일한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했던 것이다.    다만 새 언약은 이제 상징과 예표로 주어졌던 그리스도의 은혜가 실체로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주어진 구속의 은혜가 놀랍게도 분명하고 풍성해졌다는 의미에 있어서 옛 언약과 다른 것이다. 이 차이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라고 요한이 말씀하실 만큼 그 풍성함과 분명함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옛 언약의 축복이 그 자체로서는 매우 중요하고 풍성하지만 휠씬 더 풍성하고 중요한 축복과 비교해 보면 너무 미미한 것이어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이 보일 정도다.    그러나 만일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위와 같은 동질성을 부인한다면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나라 전체가 단순한 허위와 환상으로 변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없다. 다만 새 언약은 옛 언약의 온전한 실체와 그 성취라는 점에 있어서만 새로운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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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장 서울노회 | 글쓴이 : 최정열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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