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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 이바디파의 기원과 역사

작성일 작성자 다안

오만은 아라비아 반도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고 사방이 바다, 산악,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어 인근 걸프 아랍 국가들과 다른 독특한 역사, 정치, 문화적 특색을 지녀왔다. 또한 종교적으로 다른 대부분의 아랍 무슬림들은 양대 종파인 순니파나 쉬아파를 따르고 있는데 반해, 오만의 무슬림들은 이바디파(Ibadhi)라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종파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오만의 인구는 약 277만명이며 이 가운데 95%가 무슬림이다. 그리고 오만의 무슬림 가운데 67% 이상이 이바디파를 따르고 있다. 이바디파에 대한 이해는 현대 오만의 종교, 문화, 정치적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바디파의 기원과 오만으로의 전파

역사적으로 이바디파는 예언자 무함마드(570-632)의 사후 50여년 후에 카와리지파(Khawarij)에서 나와 생성된 분파로 알려져 있다. 7세기 초반 이슬람 세계는 알리(‘Ali)가 제 4대 칼리파에 오르자 극심한 분열에 시달렸다.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무와이야는 알리가 칼리파에 오르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반기를 들었다. 알리는 무아위야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시리아로 출정시켰고, 657년 양 진영은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위치한 십핀(Siffin)에서 대치했다. 무아위야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알리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협상을 놓고 알리 진영은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졌다. 알리가 무아위야와 협상을 시작하자, 결국 반대파는 알리가 불의를 저지른 자와 협상을 하는 불의를 저질렀다고 비난하며 그의 진영으로부터 이탈했다. 이슬람 역사에서 이들은 ‘나간 자들’이란 뜻으로 ‘카와리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주전론자들이었던 카와리지파는 무슬림 사회에서 주류에서 갈려나간 이슬람 최초의 종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초창기 카와리지파는 매우 과격하고 극단적인 행태를 보였고, 급기야 661년 4대 칼리파였던 알리를 암살했다. 그리고 그들은 알리의 죽음 이후 창건된 우마이야조(661-750)에 대해서도 적대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들은 후대의 이슬람은 부패하고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예언자 무함마드, 제1대 칼리파인 아부 바크르, 제2대 칼리파인 오마르 시대에 있었던 순수한 이슬람 국가 건설을 이상으로 내세웠다. 또한 카와리지파는 칼리파가 반드시 예언자 가문 출신일 필요가 없으며, 당대의 사람들을 잘 이끌어갈 수 있는 인물이 칼리파로 선택되어야 한다는 혁신적인 사상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들은 우마이야조로부터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고, 이란, 이라크, 북아프리카, 아라비안 반도 등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7세기 무렵 여러 지역에 흩어진 카와리지 분파 가운데 오늘날 이라크의 바스라 지역에 정착한 분파가 바로 이바디파다. 이바디파는 과격한 행동주의를 없애고 온건하면서 순니파와 절충적인 교리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 같은 이유에서 일부 학자들은 이바디파가 비록 카와리지파로부터 유래했고 교리적인 측면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두 파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바디파는 684년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서 압둘라 빈 이바드 알 무리 알 타미미(Abdullah bin Ibad al-Murri al-Tamimi)에 의해 창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바디파에 속한 학자들은 순니파 무슬림들도 학생으로 받아들일 만큼 개방적이었으며, 우마이야조나 압바스조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바디파 역시 정권으로 부터의 탄압을 피하지 못했고, 결국 새로운 안식처를 찾기 시작했다.

압둘라 빈 이바드의 제자였던 자비르 이븐 자이드 알 아즈디(Jabir ibn Zaid al-Azdi, 642-714)는 새로운 안식처를 찾아 자신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바스라를 떠나 오만으로 향했다. 그는 오만에서의 이바디파 창시자가 되어 하디스를 편찬하고 교리를 정립했다. 이때부터 이바디파는 오만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749년 오만의 이바디파는 알 줄란다 이븐 마스우드(al-Julanda ibn Mas'ud)를 이맘으로 선출하고 내륙에 위치한 니즈와(Nizwa)를 수도로 하는 최초의 이맘국을 건설했다. 최초의 이맘국은 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압바스조는 이 나라를 압박했으나, 오만이 이맘국은 제국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위치해 있었던 이유로 압바스 제국의 압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왔다. 결국 오만은 오늘날까지도 이바디파가 다수인 나라로 남게되었다.

오만 이바디파의 교리와 정치적 성향

이바디파의 교리는 온건하며 순니파의 말리키(Maliki) 법학파의 가르침과 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다 과격한 성향을 지닌 카와리지 분파가 사라진데 반해, 이바디파가 아직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온건한 성향 덕택이었다. 이바디파는 최고의 능력을 갖춘 자가 이맘으로 선출되어야 하며, 이맘직이 하나의 부족이나 가문에 의해 독점되어야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초창기부터 이바디파 공동체는 정치적 박해로 북부 아프리카나 인도 등으로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한 시대에 한명 이상의 이맘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상적 전통이 확립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카와리지파의 분파들과 달리 이바디파는 자신들의 이맘을 신자들의 왕(Amir al-Mu'minin) 또는 무슬림들의 왕(Amir al-Muslimin)이라고 부른다. 이는 자신들의 이맘을 군주라고 여긴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다른 대부분의 카와리지 분파들은 이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 이바디파에게 있어서 이맘이란 절대군주이자 전쟁 발생시 군지도자이며, 동시에 최고의 권위를 지닌 재판관이다. 이맘은 종교적 권위자로서 경정 꾸란,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인 순나, 선대 이맘들의 가르침 등에 정통해야 한다. 하지만 이바디파의 교리는 사회 리더십에 있어서 엄격한 도덕성을 강조한다. 이바파의 교리에 의하면 공동체의 원로들은 지식과 신앙심을 기준으로 이맘을 선출해야 하며, 만일 이맘이 정의롭지 못한 통치자라면 공동체는 그를 폐위시켜야할 의무가 있다.

이바디파의 특징 중 하나는 내부의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만, 외부인들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푼다는 것이다. 이바디파는 카와리지파 계열에 속하지 않는 무슬림들에게도 관용을 베풀며 이들과의 결혼도 허용한다. 또한 이바디파는 교리적으로 순니파인 말리키 법학파의 구성원인 것처럼 가장한 채 공동체 속에서 어울려 사는 것도 허용한다. 이같이 독특한 교리가 정착된 이유는 다수에 둘러싸인 소수 집단이라는 상황 때문에 생존을 위하여 현실에 적응하면서 온건하면서도 인내하는 면모를 키워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내륙 산악 지역에 위치한 니즈와(Nizwa)는 오만의 종교적 중심지이자 정치적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니즈와는 오만 이바디파의 본산으로 오만을 통치하는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이곳의 대모스크에서 이맘으로 선출되는 절차가 필요했다. 그러나 18세기 현 오만의 왕가인 알 부사이드 왕조(Al Bu Sa'id, 1749-현재)가 등장하면서 니즈와는 그 중요성을 점차 잃어 갔다. 알 부사이드 왕조는 침략세력인 페르시아인들을 소하르와 무스카트에서 축출한 후 항공 도시인 무스카트를 수도로 삼아 강력한 해상 왕국을 건설했다. 알 부사이드 왕조는 이맘이 지닌 종교적 권위를 감소시키고 스스로의 권위를 높이고자 술탄(sultan)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오만은 18세기 후반부터 니즈와에서 선출된 이맘은 내륙지역을 다스리는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했고, 무스카트를 근거지로 삼은 알 부 사이드 왕조의 술탄은 해안 지대를 통치했다.

자발 전쟁과 이바디 이맘국의 몰락 그리고 현대 오만의 탄생

20세기 초반 오만은 한동안 이맘국과 술탄국으로 나뉘어져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1913년 알 부 사이드 왕조의 타이무르 빈 파이살(Taymur bin Faysal, 1913~1932 재위)은 술탄에 오른 뒤 자신의 통치권을 내륙지역까지 확대하고자 그 곳의 주민들에게 자신을 이맘으로 선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니즈와를 중심으로 한 내륙의 주민들은 이 요구를 거부하고 대신 살림 빈 라쉬드 알 카루시(Salim bin Rashid al-Kharusi)를 이맘으로 선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15년 이맘국과 술탄국은 전투를 치렀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이맘은 내륙 지역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술탄보다도 세력이 강했다. 결국 양측은 1920년에 십(Sib)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이맘은 숱탄의 권위를 인정해 주었고, 술탄은 루스타크(Rustaq)와 니즈와를 중심으로 한 내륙 지역에서 갖는 이맘의 권위를 인정하기로 공식 합의했다.

1932년 새롭게 술탄에 즉위한 알 부 사이드 왕조의 사이드 빈 타이무르(Sa‘id Bin Taymur, 1932~1970 재위)는 다시 한 번 내륙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여러 부족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규합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맘이었던 갈립 빈 알리 알 히나이(Ghalib bin ‘Ali al-Hina’i)는 술탄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1954년 아랍연맹(Arab League) 가입을 신청했다.

그는 이를 통해 이맘국이 국제적으로 독립 국가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 무렵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이맘을 지원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무스카트의 술탄을 영국에 아첨하는 꼭두각시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1955년 위기감을 느낀 술탄 사이드 빈 타이무르는 영국 군대의 지원을 받아 이맘국으로 진격했고 결국 이바디파의 본산 니즈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1957년 이맘 갈립 빈 알리는 바니 리얌(Bani Riyam) 부족을 비롯한 내륙 지역의 여러 부족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험준한 자발 알 아크다르(Jabal al-Akhdar) 산악에서 게릴라 항전을 펼쳤다. 흔히 ‘자발 전쟁(Jabal War)’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에서 술탄의 군대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마침내 술탄 사이드 빈 타이무르는 최후의 수단으로 영국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영국의 공군은 이맘의 세력을 초토화시키기 위해 니즈와 근처에 위치한 타누프(Tanuf)와 비르카트 알 마우즈(Birkat al-Mawz)를 폭격하여 그들의 근거지를 폐허로 만들었다. 1959년 이맘과 추종자들은 항복했다.

이때부터 이맘국과 술탄국으로 갈라졌던 오만은 재통합되었고, 오늘날 오만을 통치하고 있는 알 부 사이드조의 군주는 술탄과 이맘이라는 두 가지 칭호를 동시에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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