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범죄조직 "청방"의 우두머리]두웨성( 杜月笙)

댓글수0 다음블로그 이동

♣ 역사 공부방 ♣/< 중국 >

[상하이 범죄조직 "청방"의 우두머리]두웨성( 杜月笙)

바우
댓글수0

젊은 시절의 두웨성

'두웨성'(두월생, 중국어: 杜月笙, 병음: Dù Yuèshēng)은 중국 상하이의 범죄 조직인 청방의 우두머리이다. 그는 1920년대 공산당과 맞서던 장제스국민당의 주요 후원자였으며, 중일 전쟁 당시 중국에서 활동했던 주요 인물이기도 하다.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1949년 국민당타이완으로 후퇴하자, 홍콩으로 망명하여 1951년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생애

초기의 생애

두웨성은 청나라 말기 광서제가 재위하던 시기인 1888년 8월 22일, 상하이 현 동쪽의 작은 마을이던 가오차오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그가 태어나고 1년 뒤인 1889년 상하이로 이사했다. 9살이 되었을 때 가까운 가족을 모두 잃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릴 때 이미 죽었고, 여동생은 돈을 받고 팔려나갔으며, 아버지도 죽었고, 마지막으로 계모도 그를 버렸다. 그래서 태어난 가오차오로 돌아가서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1902년 상하이로 돌아왔고, 프랑스 조계지역에 있던 과일가게에서 일했지만 절도로 인하여 해고되었다.  여관의 경비원이 되기 전까지 잠시 이곳 저곳을 방황했으며, 여관에 취직한 이후 그곳에서 범죄 조직인 청방에 대하여 알게되고 16살때 청방의 단원으로 들어갔다.

청방의 우두머리가 되다

그는 친구를 통하여 당시 상하이 프랑스 조계 경찰의 중국계 형사 관장이자, 상하이에서 가장 악명높은 폭력배 중 한 명이었던 황진룽을 소개받아 알게 된다. 황진룽의 아내는 역시 영향력 있는 범죄자였으며,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청방의 단원이 아니었음에도 어린 두웨성을 좋아했다. 두웨성은 황진룽의 도박과 아편 사업을 책임지게 되었고 이후 부유해졌다. 옷과 여자에 있어서 취향이 꽤나 까다로워 오직 중국제 비단 옷만 입었고, 경호원들은 러시계아 백인이었으며, 상하이에 있는 최고의 나이트 클럽등에 자주 다녔다. 또한 미신을 믿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홍콩에서 특별히 수입된 세 개의 작은 원숭이 머리를 등 뒤의 옷에 달고 다녔고 명성은 곧 프랑스 조계에 4층짜리 서양식 별장을 구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첩도 수십명 이상 있었고, 4명의 법적인 부인과 6명의 아들을 두었다.

두웨성이 이렇게 최고의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은 상하이에서 가장 유명한 폭력배이자, 두웨성의 보스였던 황진룽1924년 상하이의 프랑스 관할지역 경찰에게 체포되고 나서이다.[1] 황진룽은 당시 상하이를 지배하던 군벌의 아들이 자신이 흠모하던 오페라 스타를 모욕하자, 이를 참지 못하고 부하들을 시켜 군벌의 아들을 공개적으로 폭행하게 만들었다. 황진룽은 군벌에 의하여 곧 체포되었고, 두웨성이 협상하여 보석금을 내주자 풀려날 수 있었다. 황진룽은 이 사건을 통하여 명성을 모두 잃고, 부하인 두웨성에게 그의 범죄 왕국을 양보하게 되었다. 두웨성은 곧 황진룽에 이어 상하이 범죄 세계에서 "종사"(宗師)등으로 불리며 완전한 지배자가 되었다. 두웨성은 도박장과 매춘, 상점 보호등의 불법 사업은 물론, 상하이의 최고 물류회사와 두 개의 은행을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경찰과 프랑스 식민정부의 암묵적인 지원에 힘입어,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역의 아편거래를 운영했고, 이 때문에 아편에 심하게 중독되었다.

 

저장 성 항저우 시에 있는 두웨성의 이전 거주지. 항저우의 역사 유적으로 등록되어있다.

장제스와의 동맹

두에성은 범죄인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독실한 유교적 보수주의자였다. 또 비밀 조직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장제스와 친밀한 사이였다. 장제스는 1920년대 이후로 여러 비밀 결사와 정치적 연맹을 했는데, 두웨성이 주도하던 청방도 그 중 하나였다. 두웨성의 청방4·12 사건을 통하여 국민당과 상하이의 좌파 세력을 학살하는데 협력했다. 이 사건으로 국공 합작은 끝났고, 장제스는 두웨성의 공로에 대한 대가로 상하이 마약 관리국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리하여 두웨성은 중국 전체의 아편 거래를 공식적으로 통제하게 되었다. 청방중화민국 국민정부에 자금과 물자를 지원했으며, 심지어 마약 관리국 명의로 독일제 융커스 Ju 87 전투기를 구매하기도 했다. 장제스는 이러한 두웨성의 지원에 대한 대가로 노동 조합과 여러 사업들을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1931년, 두웨성은 그의 조상과 가족들을 위한 절을 세우기 위해 정치적·경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고 절을 세우자 3일간 대대적인 개관행사 및 파티를 열었다. 이는 당시 상하이에서 가장 큰 행사여서, 수백여 명의 유명인사들과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 절의 개인적인 시설은 개관하고 나서 헤로인을 제조하는 곳으로 바뀌었고, 곧 상하이에서 가장 큰 마약 공장이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두웨성은 양쯔강 입구에 그의 선박들을 고의로 침몰시켜 일본군을 막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홍콩으로 피신하였고, 이후에는 충칭으로 피신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청방의 단원들은 장제스의 정보국장이었던 다이리와 협력하여 무기와 물자를 밀수하여 국민당에게 제공했다. 두웨성은 중화민국적십자회의 중역 회원이기도 했다 1945년 9월 일본의 패전과 함께, 두웨성은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구하려던 도시인 상하이에 도착해서 따뜻한 환영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상하이의 많은 시민들은 그가 시민들을 일본군에게 버리고 가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 주요 정치인들과 폭력배들이 저지른 부패와 범죄로 국민당내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자, 장제스와 두웨성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는 1940년대 후반 상하이에서 반부패 캠페인을 실시했다. 이로 인하여 두웨성의 친척들이 최초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두웨성은 장징궈 친척에 의하여 행해진 횡령등의 범죄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하여 그들을 모두 석방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두웨성의 아들은 결국 투옥되었고, 이때문에 장제스와의 동맹은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홍콩으로의 망명과 죽음

1949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중국 공산당에 패배하고 타이완으로 후퇴한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두웨성은 공산화된 중국을 버리고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다. 이에 상하이에서의 모든 세력을 잃고 말았다.

1951년 나이가 들어 점차 시력을 잃어가고 몸이 노화되자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중국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아편 중독으로 생긴 병 때문에 의하여 죽었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그의 시체는 타이완에 있던 그의 아내 중 한 명에게 전달되었고, 신베이 시 시즈 구에 묻혔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곳에 묻혀 있는지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2]

이름

그의 어릴 때 본명은 "두웨성"(두월생, 중국어: 杜月生, 병음: Dù Yuèshēng)으로, 이름의 끝 글자가 다르다. 그는 장빙린의 조언으로 이름을 "두용"(두용, 중국어: 杜鏞, 병음: Dù Yōng)으로 바꾼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름인 "웨성(월생, 月笙)"은 그의 호(號)이다. [위키백과 - 문구는 일부 수정]

----------------------------------------------------------

[같이 보기]

 

임시정부의 은인 두웨성

왜 독립유공자 명단에 빠졌나?

이동훈 기자 flatron2@chosun.com

 
 

초대 주한(駐韓) 중화민국(대만) 대사(1949~1951)를 지낸 샤오위린(邵毓麟)이 쓴 ‘사한회억록’(使韓回憶錄·1980)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김구 선생이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경찰청장(경무국장) 겸 한교(韓僑)회장(한국교민회장)을 맡고 있을 때 두웨성(杜月笙) 선생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샤오위린 전 대사는 장제스 국민당 정권에서 대한(對韓) 외교를 총괄하며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과 직접적인 교류를 가진 외교관이다.

이어 샤오위린은 ‘회억록’에서 두웨성과 직접 만난 일을 회고하며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집안 식구나 다름없는데 돕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안심하시고 혹 문제가 있으면 저를 찾아주십시오”라는 두웨성의 언급을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올해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상하이 임시정부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인물이 바로 두웨성이다. 중국의 ‘알 카포네’로 불리는 두웨성은 상하이의 밤을 지배한 폭력조직 ‘청방(靑幇)’의 전설적인 두목이다. 상하이 푸둥의 과일장수 출신으로 청방에 투신해 아편 제조와 밀매, 도박장과 청루(매매춘) 운영, 부두 하역 노동자 공급, 은행 운영 등으로 상하이를 사실상 지배한 인물이다. 황진룽(黃金榮), 장샤오린(張嘯林) 등과 함께 상하이 3대 ‘다거(大哥)’로 불렸다. 실질적인 세력은 두웨성이 가장 커서 ‘중국인 이야기’의 저자인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는 그를 “청방 300년 역사상 최고의 두목”으로 꼽기도 했다.

장제스가 1927년 상하이쿠데타(4·12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당의 실권을 잡을 때 행동대장 역할을 맡아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휘를 받던 좌경 노동자 규찰대를 분쇄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 공으로 중화민국 육·해·공군 총사령부 고문 겸 군사위원회 소장참의라는 고위직에도 올랐고,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상하이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주변 경계경호를 담당하기도 했다. 경극여왕이자 그의 다섯 번째 부인인 멍샤오둥(孟小冬)과의 러브스토리로, 상하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전설적인 이름이다.


상하이 최고의 청방 두목

두웨성이 임시정부에 적지 않게 공헌했다는 점은 한국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단의 문화재 정보에도 “첫 임시정부 청사는 쑨원의 심복으로 알려진 두웨성의 주선으로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 22호에서 수립되었지만, 이곳이 청사로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성주현 청암대 재일코리안연구소 연구교수)

두웨성은 암흑계 입문 초기 대외적으로 프랑스 조계의 중국계 순포(경찰) 대장으로 활동한 황진룽의 수하였다. 당시 두웨성은 프랑스 조계 내의 치안유지를 사실상 관장하고 있었다. 프랑스 조계 측은 조계 내의 치안유지를 위해 ‘청방’ 인사들을 대거 순포로 채용했다. ‘어둠으로 어둠을 제압한다’는 ‘이흑제흑(以黑制黑)’의 논리였다. 두웨성의 묵인 내지 묵계 없이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비밀회합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김구의 자서전인 ‘백범일지’에 따르면, 당시 상하이의 한국 교민 수는 500여명으로, 대부분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하이 임시정부 자리를 알선해준 두웨성은 수많은 문헌에 나오는 명백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독립유공자 명단에서 빠져 있어 의문이 일고 있다. 독립유공자 포상을 주관한 옛 문교부, 총무처,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모두 89명(2019년 현재). 이 중 중국 출신은 33명으로 가장 많다. 당시 중화민국의 주요 정재계 인사들과 국민당 고위 간부들은 대부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장제스(1953·이하 수여 연도) 중화민국 총통에게 독립유공자 1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한 것이 신호탄이 됐다. 이후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1966), 천궈푸(1966), 쑨원(1968), 천치메이(1968) 등 중화민국의 핵심인사 5명이 1급 유공자에 올랐다. 독립유공자 2급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에도 쑹자오런(1968), 탕지야오(1968), 런썬(1968), 황싱(1968), 후한민(1968), 쑨커(1970) 등이 올라 있다. 그 아래인 독립유공자 3급 건국훈장 독립장에도 다이리(1968), 천리푸(1968), 후종난(1968), 추푸청(1996) 등이 올라 있다.

중화민국 인사들은 김구의 차남 김신씨가 주중화민국(대만) 주재 한국대사로 있던 1962~1970년 사이 대거 유공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박정희 정부 당시 중화민국은 미국 다음가는 맹방이었고, 장제스는 김구와의 인연으로 그의 아들 김신 전 대사를 각별히 아꼈다고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상하이 임시정부 운영 당시 직간접적으로 교류를 주고받은 중화민국의 고위인사들이 대거 독립유공자에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


독립유공자로 이름 올린 중국인들

하지만 중화민국 고위인사들을 대거 독립유공자 명단에 올릴 때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과 한국 교민 보호에 직접적 도움을 준 두웨성의 이름이 왜 빠졌는지는 미스터리다. 두웨성이 암흑가의 보스로 악명 높은 인물이라서 독립유공자 훈포장 명단에 올리기를 꺼렸을 것이란 어림짐작만 할 뿐이다. 1949년 국민당이 국공내전에서 패퇴할 즈음 두웨성은 부정축재자로 몰려 장제스·장징궈 일가와 멀어졌다. “장제스 일가의 비리를 폭로하겠다”는 협박카드로 인신구속만은 면한 것으로 알려진다.

두웨성은 1949년 공산당 집권 이후 상하이를 떠나 홍콩으로 건너가 쓸쓸하게 말년을 보내다가 1951년 63세로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현재 대만 신베이시의 네 번째 부인 묘 옆에 있다. 그가 살던 상하이의 대저택은 도심개발 과정에서 철거됐으나, 한 사업가가 매입해 상하이 외곽 자딩에 고스란히 복원했다. 그가 첩들에게 나눠준 상하이의 저택들 역시 호텔과 고급식당 등으로 쓰이고 있다. 두웨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각종 드라마와 영화는 셀 수 없이 많다.

모든 역사에는 흑백과 음양이 있기 마련이다. 100주년을 맞이한 상하이 임시정부 역시 예외가 될 순 없다. 국가보훈처의 한 관계자는 “독립유공자 지정은 과거 총무처, 문공부 등에서 하다가 1977년부터 국가보훈처에서 주관하고 있다”며 “학계나 전문가의 추천을 받거나 보훈처 직권조사를 통해 유공자에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

[정보] 책-중국현대사: 조관희 지음

맨위로

http://blog.daum.net/wwg1950/13725

신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