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아름다움(Elegant Beauty)

행복을 위한 일곱 빛깔 무지개(rainbow)

작성일 작성자 연미소

일곱 빛깔 무지개(rainbow)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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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로키의 아침 노래(Cherokee Morning Song) / sung by Walela

 

01 빛의 분산

 

일곱 색깔 무지개는, 비가 갠 뒤 공기 중에 남아 있던 둥근 물방울들에 의해 빛이 분산된 것이다.

동그란 물방울이 프리즘 역할을 하며, 그 속에서 전자기파의 굴절과 분산이 일어나고, 그 하나하나의 방울들이 무수히 모여 동심원의 무지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02 무지개는 동그랗다 

 

무지개는 원래 둥근 모습이지만, 땅 위에 있는 우리는 활처럼 휜 반쪽짜리 원만 바라본다.

반원의 무지개는 땅 밑으로 계속되는 완전한 원의 일부이다.

땅이 가로막고 있지 않다면, 무지개는 모두 완전한 원으로 그려진다.

비행기를 타고 충분히 높이 올라가서 무지개를 보면, 무지개가 완전한 원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03 무지개가 아름다운 이유

 

무지개는 닫힌 하늘 문을 열어젖히고 하늘의 여왕이 드리우는 구원의 무지개이다.

무지개는 축복의 세계에서 비추는 햇살이다.

무지개는 순수로 충만한 세계에 서리는 성스러운 안개이다.

무지개는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차원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일곱 색깔이다.

무지개는 만물의 자궁인 큰 바다에서 생겨나는 안개구름이다.

 

 

 

무지개엔 많은 신화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고대 켈트인은 믿었다.

요정들이 금덩어리를 감춰 둔 장소가, 비가 오면 드러나는 것이 바로 무지개라고.

 

이제 우리는 무지개 속에서 더 큰 신화를 찾는다.

빛으로 가는 다리,

빛이 다시 다리가 되어 은하수를 건너고 우주를 건너

마침내 우아한 아름다움에 이른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이유는, 신화의 나라에서 내려오는 경이로움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신화의 세계를 꿈꾸며 소망을 피워 올리는 향기에 있다.

 

꿈은 세상을 만나는 방식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부드러운 비단결의 꿈이 우리를 감싸면, 우리는 부드러운 세상을 만난다.

거칠고 무거운 꿈으로 우리를 덮으면, 우리는 하드보일드(hard-boiled)의 냉혹한 세상과 조우해야 한다.

 

04 빛의 무한한 농담(濃淡)

 

빛은 모든 색을 담고 있는 온전한 전체이다.

빛은 수많은 진동이 서로 겹쳐 혼합돼 있다.

색깔은 각자마다 다른 진동수를 가지는 빛이다.

이 서로 다른 진동수는 분리되면 서로 다른 색깔을 띤다.

 

백색광인 빛을 프리즘을 통하여 조금이라도 굴절시켜놓으면,

서로 다른 진동수로 인한 진행 속도가 달라지면서 빛의 분산이 일어나는 것이다.

마치 한 벌의 카드를 테이블 위에 쫘악 펼쳐 놓듯이,

빛은 프리즘을 통과하며 색깔을 공간에 쫘악 펼쳐 놓는다.

 

펼쳐 진 색깔들 중, 빨강의 파장이 가장 길고, 보라색의 파장이 가장 짧다.

파장이 가장 짧은 보라색은 대신 진동수가 커서 에너지도 가장 크다.

보라색의 바깥쪽엔 파장이 더 짧아 육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에너지가 훨씬 더 큰 빛들이 존재한다.

 

05 왜 빛깔이 일곱 개일까?

 

빨주노초파남보 가시광선은 전자파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빛은 무한한 농담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 눈에는 일곱 가지 색깔만 보이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인간의 눈에 있다.

 

눈의 망막에서 빛을 감지하는 세포엔 “간상세포와 원추세포”의 두 가지가 있는데,

간상세포들은 흰색과 검은색을 지각하고,

세 종류의 원추세포는 각각 빨강‧초록‧파랑에 민감하다.

 

이 간상세포와 원추세포 의 두 가지 시세포가 받아들인 조합 가능한 파장들을,

우리의 관념은 익숙한 패턴으로 분류해서 일곱 가지의 색깔의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이다.

 

이름 붙인 것이라고? 그렇다. 이름 붙인 것뿐이다.

 

전자기파 스펙트럼은 모든 색의 잠재적 가능성을 담은 진동의 연속체이다.

무한대의 연속선상에서 단지 일곱 가지의 색깔만을 뽑아 이름 붙인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일곱 개의 패턴을 따라 가는 마음 때문이다.

백설 공주와 일곱 난장이, 일주일, 일곱 개의 차크라, 칠성신…….

이렇게 세븐(7)은 마음에 익숙한 패턴 중 하나이다.  

그림은 탄트라의 전통에서 확립해 온 일곱개의 차크라를 일곱색깔 무지개 색깔에 따라 배열한 것이다.

 

일곱 색깔 무지개에는

그림 그리는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는 16만 가지의 이름을 붙일 수도 있고,

간단하게 일곱 가지만 붙여서 단순화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진동수와 그 파장을 빨강이라고고 부르자’고 약속한 것뿐이다.

 

‘그 진동수와 그 파장이 감지되면, 도망쳐야 하는 것이라 부르자“라고 약속하고 살아가는 개미 세계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06 빨주노초파남보의 바깥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빛들

 

우리가 그림을 보거나 글을 읽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빛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머언 저 편의 우주 한 켠에서 반짝이는 별빛과 지구의 외로운 동반자 달의 모습도,

거기서부터 쉼 없이 달려 온 빛의 여정이 우리의 시선에 맺혀야만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정보를 담고 있는 빛, 즉 전자기파 중에서 우리의 센서(눈)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가시광선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림 설명 / 전자기 스펙트럼에 나타나는 라디오파, 마이크로웨이브, 적외선, 자외선, X선, 감마선 등의 모든 파동들은 종류에 관계없이 1초에 30만 킬로미터(km)의 속도로 움직이며, 모두 전자기장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겨난다. 그러나 사람의 눈은 대략 파장이 1/16만 센티미터(cm)에서 1/12만 센티미터(cm)까지의 극히 한정된 전자파만 감지한다.

‘빨주노초파남보’라고 흔히 명명하는 이 가시광선 중, 보라색의 파장이 가장 짧고(따라서 주파수와 에너지가 가장 크다), 빨강의 파장이 가장 길다.

이 가시광선은 우리에게는 사물을 인지하게 해주므로 너무나 소중한 반면, 전자기 스펙트럼 위에서는 너무나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빛이 만들어 내는 일곱 색깔 무지개, 즉 빨주노초파남보의 가시광선은 전자파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며, 가시광선의 양쪽으로 여전히 무한대의 진동과 파동들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파장이 수천 킬로에 이르는 라디오파에서, 파장이 원자핵보다 짧은 감마선까지 시선은 확대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제한된 범위의 빛만을 볼 뿐이다.

견고한 물질을 우리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지각 기능이 감지할 수 있는 파장의 범위 내에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 인류의 과학기술은

육안의 한계를 넘는 센서를 확장해 왔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시도 역시 계속될 것이다.

우리의 육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대부분(90%이상)은 바로 이러한 확장, 즉 전파나 마이크로파, X선, 감마선 및 그 밖의 여러 파장의 빛을 탐지하는 장비들을 이용하여 알아 낸 것이다.

 

파동은 무한소에서 무한대로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

파장이 달라지면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게도 되며,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도 된다.

그러므로 보인다는 것 자체도 그다지 중요성을 부여할 수는 없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가 못 볼 뿐.

들리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가 못 들을 뿐.

 

07 무지개가 주는 행복과 평화

 

아기는 햇살 가득한 마당에서 그리움의 씨앗을 품는다.

아기는 소년으로 자라나, 무지개를 좇아 들판 너머로도 가보고, 파랑새를 찾아서 숲 속으로도 가본다.

수평선 끝을 쫓아 바다 너머로 한없이 가보지만, 어느 곳에서도 무지개를 잡을 수 없고, 파랑새도 찾지 못한다.

그리움은 채워지지 않은 채, 갈수록 커져만 가는 그리움 따라 소년은 청년으로 성장한다.

연애도 해보고, 수많은 세상의 지식들을 섭렵해 보지만, 그리움은 채워지지 않고 세상을 헛돌기만 한다.

 

장년을 지나 노년에 이른 그리움 덩이는 문득 알아차린다.

“왜 나는 무지개를 잡으려고 했던가?

왜 나는 무지개와 파랑새를 소유하려 했던가?

이제 집착을 내려놓고 무소유가 되어 보자.“

 

 

그러자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무지개를 잡으려 애쓰지 않자, 비 온 뒤 잠시 나타난 햇빛의 분산이 아름다운 무지개가 되어 그의 것이 된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한가로움 속에 존재할 때, 행복과 평화를 담은 무지개는 이미 거기에 있었다.

 

자기 꼬리를 쫓는 강아지는 결코 자기에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 무지개를 좇는 마음은 결코 무지개를 소유할 수 없다.

허망을 쫓는 마음은 더욱 허망으로 얼룩질 뿐이다.

 

행복과 평화를 쫓을 때엔 가도 가도 무지개를 잡을 수 없지만,

마음이 쉬고 집착이 내려놓아질 때, 무지개는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소유하려는 주먹의 움켜쥠만 펴면,

애욕과 갈망은 손바닥에서 시공간 속으로 풀려나고,

움켜잡으려던 팔만 벌리면 무지개는 변함없이 우리 곁에 있다.  

 

 

 

연미소 (yeonmi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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