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의 본관 363본 (현존)

 

성(姓)의 하나. 한국의 274개 성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은 성씨이다. 김씨의 본관은 《증보문헌비고》에 499본,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623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것은 363본이며 그 중 인구수가 확인된 것은 112본 정도이다.

 

거의 모든 김씨는 가락국 수로왕계와 신라 김알지계의 두 갈래로 나뉜다.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이 동자(童子)로 변해 되었다는 수로왕계는 김해김씨가 대표이며, 이 밖에 김해허씨(金海許氏)와 인천이씨(仁川李氏)도 수로왕의 후손이다. 경주김씨계의 시조인 김알지는 신라 탈해왕때 경주시림(始林;鷄林)의 금궤(金櫃)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김>이라 했다고 전하며, 그의 7대손 미추왕이 신라 김씨왕실의 시조가 된다.

 

김알지계는 경주김씨를 중심으로 광산(光山)·안동(安東)·강릉(江陵)·연안(延安)·의성(義城)·선산(善山)·청풍(淸風)·김녕(金寧)·순천(順天)·청도(淸道)·상산(商山)·언양(彦陽)·서흥(瑞興)·울산(蔚山)·나주(羅州)·전주(全州)·풍산(豊山)·영동(永同)·도강(道康) 등 수십 본으로 갈라진다. 이 밖에 안동권씨(安東權氏)·광주이씨(光州李氏)·수성최씨(隋城崔氏) 등도 김알지계이다.

 

2000년 11월 인구조사에 따르면 김씨는 총 992만 5949명, 310만 2537가구로 최대 성씨를 차지했고, 그 중 김해김씨는 남한 인구의 9.3%를 차지하는 412만 4934명이다.

 

 

가평(加平)김씨~고산(高山)김씨

 

가평(加平)김씨

시조는 김계공(金繼恭)으로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金周元)의 22세손이며 김봉선(金奉先)의 아들이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4등공신으로 가평군(加平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가평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7524(2000).

 

감천(甘泉)김씨

시조는 김만추(金萬秋)로 김알지의 후예로, 문과에 급제했다고 알려졌을 뿐이다. 시조나 세계·본관의 유래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감천을 본관으로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1134(2000).

 

강동(江東)김씨

시조는 김윤해(金潤海)로 자는 문원(文遠), 청도(淸道)김씨 김지대(金之岱)의 21세손이며 김의지(金義之)의 아들이다. 그의 본관이 강동인 것을 보면 후손들이 청도에서 분적(分籍)하여 그를 시조로, 강동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온 듯하다. 인구수 1236(2000).

 

강릉(江陵)김씨

시조 김주원(金周元)으로 신라 원성왕 때 명주군(溟州郡;강릉의 옛이름) 왕이 되었다. 계림(鷄林)김씨의 후예로 대보공 김알지의 21세손이며, 신라통일을 이룩한 태종의 6세손이다. 원성왕이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거절하고 강릉에 은거했는데, 이에 왕이 명주를 중심으로 한 익령(翼嶺)·삼척(三陟)·울진(蔚珍) 등지를 식읍으로 하사했다. 그는 영동(嶺東) 일대를 통치했으며, 이에 후손들이 강릉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이로써 강릉김씨는 신라김씨 중 제일 처음 분적한 맏집이 되었다. 인구수 16만 5963(2000).

 

강서(江西)김씨

시조는 김양(金洋)으로 자는 사원(詞源), 호는 송정(松亭)이다. 신라 경순왕의 여섯째 아들 강릉군 김건(金健)의 후손으로 전하나, 문헌이 없어 계보나 본관의 유래에 대해 알 수 없다. 현재 경상북도 영풍군(榮豊郡) 풍기읍(豊基邑)에 후손이 살고 있다. 김양은 개성(開城)김씨의 시조인 김용주(金龍珠)의 4대손으로 전하기도 한다. 인구수 3870(2000).

 

강진(康津)김씨

시조는 김원경(金原卿)으로 고려 때 사온서직장동정을 지냈다. 도강(道康)김씨 《임자보(壬子譜)》에 의하면 도강김씨의 시조 김희조(金希祖)의 7세손으로 나와 있다. 인구수 4306(2000).

 

강화(江華)김씨

계통을 달리하는 강화파(江華派)·숙천파(肅川派)·의주파(義州派)가 있다. 강화파는 신라 경순왕의 셋째 아들 김명종(金鳴鍾)의 7세손 김성(金晟)을 기세조로 삼고 있다. 숙천파는 김명종의 18세손 김광(金光)을 1세조로 삼고 있으며, 의주파는 김광의 4세손 김송학(金松鶴)을 기세조로 삼고 있다. 인구수 4441(2000).

 

개성(開城)김씨

시조는 김용주(金龍珠)로 의성(義城)김씨 시조 김석(金錫)의 8세손 김공우(金公瑀)의 셋째 아들이다. 여러 차례 여진족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의성김씨에서 갈라져 나와 그를 시조로 개성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1930년대에 후손들이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금곡면(金谷面)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용산면(龍山面)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인구수 2만 341(2000).

 

결성(結城)김씨

신라 김알지의 후예로 계통을 달리하는 두 파가 있다. 하나는 금녕김씨 시조 김시흥(金時興)의 10세손인 김연(金硏)의 둘째 아들 김예철(金禮哲)을 시조로 하는 상주파(尙州派)이며, 다른 하나는 이조판서를 지낸 김달손(金達孫)을 시조로 하는 위원파(渭原派)이다. 인구수 1020(2000).

 

경산(慶山)김씨

시조는 김육화(金育和)로 초명은 숙화(叔和)이며, 신라 김알지의 28세손이다. 고려 때 경산군(慶山君)에 봉해졌다. 김추(金錘)의 10세손 김인궤(金仁軌), 또는 고려 때 경산군에 봉해진 김이(金怡), 또는 조선시대 때 문과에 급제한 김한(金翰)을 시조로 삼는 설도 있다. 인구수 7550(2000).

 

경주(慶州)김씨

경주김씨의 기원은 대보공(大輔公) 김알지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1965년(신라 탈해왕 9) 계림(鷄林)의 나무끝에 걸려 있던 금궤에서 태어났는데, 탈해왕이 이를 기뻐하며 김씨성을 하사함으로써 경주김씨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뒤 3파로 갈리게 되는데, 신라 경순왕의 셋째 아들 영분공(永芬公) 김명종을 1세조로 하는 영분공파와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을 1세조로 하는 대안군파, 그리고 계보를 알 수 없는 장군 김순웅을 1세조로 하는 파가 있다.

 

경주김씨는 대보공의 후손 미추(昧鄒)가 청해왕의 뒤를 이어 신라 13대왕으로 즉위하면서 신라의 왕성이 되었다. 경순왕의 아홉 아들 가운데 마의태자로 알려진 큰아들 김일(金鎰)은 망국의 한을 안고 입산하였고, 둘째 아들 김굉은 나주(羅州)김씨의 시조가 됨으로써, 셋째·넷째 아들인 김명종·김은열의 후손과 김순웅의 후손이 신라의 왕성인 경주김씨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173만 6798(2000).

 

계림(鷄林)김씨

시조는 김구사(金九思)로 신라 경순왕의 셋째 아들 김명종의 l7세손이며, 계림부원군 김종(金綜)의 손자로 벼슬이 승정(承正)에 이르렀다. 문헌이 없어 본관의 유래를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 많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선조가 계림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계림을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생각된다. 인구수 1378(2000).

 

고령(高靈)김씨

시조는 김남득(金南得)으로 초명은 기지(麒芝)이고 의성김씨 시조 김석의 11세손이며 김의(金宜)의 큰아들이다. 고려 공민왕 때 벼슬이 판개성부사문하평리(判開城府事門下評理)에 이르렀고, 공민왕 폐위음모사건을 저지하는 등 공을 세워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고양은 고령의 옛이름)에 봉해지고 남득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후손들이 경주김씨에서 갈라져, 그를 시조로 고령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1만 3692(2000).

 

고부(古阜)김씨

시조는 김극(金克)으로 신라의 종성(宗姓)이며 김복량(金福亮)의 아들이라고 전하나 문헌이 없어 본관의 유래·계보를 알 수 없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고부를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200(2000).

 

고산(高山)김씨

시조는 김환(金紈)으로 김연옥(金淵屋)의 아들이라고 전하나 문헌이 없어 자세한 계보를 알 수 없다. 한편 황간(黃澗)김씨와 시조가 같기 때문에 같은 근원으로 전하기도 한다. 인구수 1040(2000).

 

고성(固城)김씨~김해(金海-金首露王)김씨

 

고성(固城)김씨

시조는 김말로왕(金末露王)으로 구지봉(龜旨峰) 황금알에서 김수로왕(金首露王)과 함께 태어난 여섯 동자 중 막내로 6가야의 하나인 소가야국을 세워 왕이 되었다. 그 도읍이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이어서 후손들이 본관을 고성으로 정했다. 시조 이후 계보가 확실치 않다가 조선초에 여러 차례 왜구를 격파한 공을 세우다 순국한 김빈길(金贇吉)에 이르러 더욱 뚜렷한 씨족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므로 그를 중조로 대접한다. 인구수 1만 1888(2000).

 

고양(高陽)김씨

시조는 김용한(金龍翰)으로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며 김진찬(金振纘)의 아들이다. 1755년(영조 3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직장·정랑을 지냈다. 문헌이 없어 계보를 알 수 없으나, 다만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고양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1930년의 국세조사에 의하면 후손들이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 동암면(東巖面) 용삼리(龍三里)에 21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인구수 517(2000).

 

공주(公州)김씨

시조는 김룡(金龍)·김구(金龜)·김타 세 사람으로 공주백(公州伯) 김의손(金義孫)의 아들들이다. 김의손은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며 청도김씨 시조 김지대의 10세손이다. 그의 세 아들이 아버지의 작위로 본관을 삼았는데, 김룡의 자손은 공주, 김구의 자손은 평양(平壤), 김타의 자손은 곽산(郭山)에 정착하였다. 인구수 7587(2000).

 

광산(光山)김씨

시조는 김흥광(金興光). 신라 헌강왕 또는 신무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신라의 비운을 예견하여 무주(武州;현재의 光州 西一洞)에 은거함으로써 광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뒤 고려 태조가 그를 광산부원군에 봉하자 후손들이 광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9세 김선(金璇)의 후계는 아들 김정(金正)이 고려 충혜왕 때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삼화(三和)로 유배된 이후 그곳에 정착하였고, 8세 김의원(金義元)의 후계는 초기에 장단(長湍)·개풍(開豊) 등 경기도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김의원의 6세손 김수(金須)의 자손들이 대체로 전라도와 충청남도 일원으로 옮겨가 거주하였다. 16세 김광식(金光軾)의 후계가 20세 김모(金瑁) 이래로 보성(寶城)과 나주(羅州) 등지에 자리를 잡았고, 김광재(金光載)의 후계는 제주(濟州)를 세거의 터로 삼았다. 인구수 83만 7008(2000).

 

광양(光陽)김씨

시조는 김황원(金黃元)으로 광산(光山)김씨 시조 김흥광(金興光)의 후손이며 고려 때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후손들이 연안(延安)·수안(遂安)으로 이주해 살면서 광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1987(2000).

 

광주(廣州)김씨

시조는 김녹광(金祿光)으로 신라 경순왕의 다섯째 아들인 의성김씨 시조 김석의 7세손이다. 고려 때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지고 광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광주를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2만 1926(2000).

 

괴산(槐山)김씨

시조는 김지효(金知孝)로 신라 김알지의 후예로 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 좌사경(左司經)을 지냈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괴산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777(2000).

 

교하(交河)김씨

시조는 김맹정(金孟貞)으로 신라 경순왕의 둘째 아들 김굉의 7세손이다. 1135년(인종 13) 장군으로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교하군(交河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교하를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1946(2000).

 

구례(求禮)김씨

시조는 김두남(金斗南)으로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7세손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고려 때 구례태수를 지냈으므로 후손들이 구례를 본관으로 삼았다. 김행(金荇)을 시조로 삼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812(2000).

 

금릉(金陵)김씨

1세조는 김중구(金仲龜)로 가락국 15대 무위왕의 후손이다. 무위왕이 즉위하던 해 가락국은 신라에 병합되었으며, 진흥왕은 가락국에 금관소경을 설치한 뒤 무위왕에게 시랑 겸 대통관을 제수하고 금릉군(金陵君)에 봉했는데, 그의 아들 김창현(金昌玄)이 금릉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그 뒤 계보를 알 수 없어 후손인 김중구를 1세조로 삼아 대를 잇고 있다. 인구수 1만 8158(2000).

 

금산(錦山)김씨

시조는 김신(金侁)으로 신라 김알지의 42세손이며 자는 윤직(倫直), 호는 낙천재(樂天齋),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요양성참정(遼陽省參政)을 지낸 뒤 귀국해서 금주군(錦州君;금주는 금산의 옛이름)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금산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1만 4052(2000).

 

김녕(金寧)김씨

시조는 김시흥으로 신라 김알지의 35세손이다. 고려 때 공을 세워 금녕군에 봉해졌는데, 금녕은 김해(金海)의 옛이름이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김해로 하면서 선김(先金;金首露系, 김해김씨)과 후김(後金;김시흥계, 김녕김씨)으로 구별해 왔다. 그러나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명성이 크게 알려진 뒤로 타인들이 김문기의 후손을 자청하는 등 종통(宗統)을 어지럽히는 일도 잦아 1849년(헌종 15) 후손인 김주성(金周聲) 등이 예조에 상소, 본래의 김녕을 본관으로 확정지었다. 인구수 51만 3105(2000).

 

김제(金堤)김씨

시조는 김천서(金天瑞)로 고려 때 문하시중·월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김제에 살았다. 그의 7세손 김정걸(金正傑)이 조선 태조를 도와 3등개국공신이 되었고, 1401년(태종 1)에는 다시 공을 추증받아 김제군(金堤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김제를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5220(2000).

 

김천(金川)김씨

시조는 김화로 신라 경순왕의 후예이다. 참봉을 지냈고 요계서원에 제향되었다. 김사찬(金沙粲)의 후손 또는 부령김씨와 같은 근원이라고도 한다. 인구수 4100(2000).

 

김해(金海-金首露王)김씨

시조는 김수로왕. 41년 가락국(駕洛國)의 9간(九干)이 놀이를 나갔다가 구지봉에서 금합을 발견하여 열어보니 6개의 황금알이 들어 있었고, 그 알 속에서 여섯 동자가 나왔다. 제일 먼저 나온 수로를 왕으로 추대하고 나머지 다섯 동자는 각각 5가야(五伽倻)에 봉했다. 김수로는 금합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김으로, 여섯 동자 가운데 제일 먼저 나왔다 하여 이름을 수로라고 한 것이다.

 

그는 뒤에 아유타국(지금의 인도)의 공주 허황옥(許皇玉)을 왕비로 맞아 10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인 김거등(金居登)이 왕위를 계승했다. 가락국의 도읍은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로, 고려 충선왕 때 김해부(金海府)가 설치됨으로써 후손들이 김해를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김해김씨의 후손은 148개 파로 갈라져 대를 잇고 있는데, 김목경(金牧卿)계의 경파(京派), 김익경(金益卿)계의 4군파(四君派), 김관(金管)계의 삼현파(三賢派)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구수 412만 4934(2000).

 

김해(金海-金忠善)김씨~덕산(德山)김씨

 

김해(金海-金忠善)김씨

시조는 김충선. 일본사람으로 본래 이름은 스나야가[沙也可(사야가)]이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의 좌선봉장으로 조선 침략에 앞장섰으나, 임진왜란이 조선에 대한 불의의 침략임을 깨닫고 조선의 문물을 흠모하여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투항, 일본군을 무찔렀다.

 

뒤에 도원수 권율(權慄) 등의 주청으로 김충선이란 성명을 하사받고 자헌대부에 올랐다. 진주(晉州)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과 결혼하였고, 김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그의 일본 성이 스나[沙(사)]임을 고려하여, 모래 중에는 사금이 으뜸이라 하여 김(金)씨 성을 하사하고, 금 중에는 김해의 금이 으뜸이라 하여 김해를 본관으로 하사했다고 전한다. 인구수 19만 9544(2000).

 

김화(金化)김씨

시조는 김경신(金景信)으로 김해군 김렴(金濂)의 둘째 아들이다. 평장사를 지냈으며 김화군(金化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김화를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4756(2000).

 

김화(金華)김씨

시조는 김랑(金浪)으로 신라 경순왕의 후예이다. 문헌이 없어 시조나 계보·본관의 유래를 알 수 없다. 다만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김화를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나주(羅州)김씨

시조는 김운발(金雲發)로 신라 경순왕의 손자이다.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고, 나주군(羅州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나주로 하여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4만 6420(2000).

 

낙안(樂安)김씨

시조는 김수징(金粹澄)으로 고려 명종 때 반란을 토벌한 공으로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낙안을 본관으로 삼았다. 《낙안김씨시조설단기》에 의하면 낙안김씨는 경주김씨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김수징은 김알지의 40세손이라고 한다. 2세손인 김광습(金光襲)을 시조로 한 문헌도 있었으나, 김수징으로 바로잡혔다. 인구수 3474(2000).

 

남양(南陽)김씨

시조는 김남귀(金南貴)로 조선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현령을 지냈다고 하는데, 문헌이 없어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다. 남양은 충청남도 서천(舒川)의 옛이름, 또는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華城郡)의 이름이다. 인구수 2403(2000).

 

남원(南原)김씨

시조는 김사지(金四知)로 신라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 일선군(一善君) 김추(金錘)의 9세손이다. 남원을 본관으로 삼은 까닭은 알 수 없다. 후손들이 평안북도 초산군(楚山郡) 송면(松面), 함경북도 고원군(高原郡) 등지에서 살다가 6·25 때 월남하면서 문헌을 잃어버려 중간 계보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인구수 1725(2000).

 

남평(南平)김씨

시조는 김창협(金昌協)으로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 김은열의 후손인 양주김씨 시조 김원보(金元寶)의 후예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본관의 유래와 계보를 알 수 없다. 한편 남평군(南平君) 김기홍(金器弘)을 시조로 삼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588(2000).

 

남포(藍浦)김씨

시조는 김전(金鈿)으로 신라경순왕의 후손이다. 후손들이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에 많이 살았으나 남북 분단으로 월남,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다.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김시중(金始重)의 아들 김성일(金聲一)이 남포김씨의 시조라 하고, 또 김충길(金忠吉)을 시조로 삼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757(2000).

 

능주(綾州-綾城)김씨

시조는 김계원(金繼元)으로 평안남도 안주(安州)에서 살았다. 그의 큰아들 김명하(金鳴夏)는 조선 숙종 때 군수·통례를 지냈고, 작은아들 김명은(金鳴殷)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한편, 김명은을 시조로 삼는 능주김씨와 효절공 김시창(金始昌)을 시조로 삼는 능성김씨도 있다. 인구수 557(2000).

 

달성(達城)김씨

시조는 김담(金淡)으로 신라 김알지의 후손으로 진사를 지냈다. 문헌이 없어 자세한 계보를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달성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1281(2000).

 

담양(潭陽)김씨

시조는 김삼준(金三俊)으로 언양(彦陽)김씨 시조 김선(金鐥)의 후손이며 김옥(金沃)의 아들이다. 후손들이 개성(開城)에 옮겨 살았는데 선대의 세거지인 담양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900(2000).

 

당악(唐岳)김씨

시조는 김락(金樂)으로 신라 신무왕(神武王)의 5세손 김무력(金武力)의 아들이다.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일등개국공신으로 당악군(唐岳君)에 봉해지고 1048년(문종 2) 삼중대광 당악현개국공에 추봉되었다. 후손들이 당악(지금의 평안남도 中和)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5464(2000).

 

대구(大邱)김씨

시조는 김달(金達)로 신라 김방경의 현손이다. 원래는 경상북도 대구 도화촌(道化村)에 살았으나, 1400년(정종 2) 제2차왕자의 난 때 함경북도 길주(吉州)로 유배되어 정착함으로써 이전의 거주지인 대구를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2986(2000).

 

덕산(德山)김씨

시조는 김량(金亮)으로 신라대보공 김알지의 후손으로 진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한편, 김충한(金沖漢)·김준신(金浚臣)의 후손, 또는 경주김씨의 분파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440(2000).

 

도강(道康-康津)김씨~분성(盆城)김씨

 

도강(道康-康津)김씨

시조는 김희조(金希祖)로 김공(金恭)이라고도 한다. 대안군 김은열의 후손으로 고려 때 도강백(道康伯)에 봉해졌다. 도강은 조선 태종 때 강진으로 고쳐 불렸으므로 강진을 본관으로 삼는 후손도 있다. 강진김씨의 시조인 김원경은 김희조의 7세손이라고 한다. 인구수 2만 1274(2000).

 

동래(東萊)김씨

시조는 김흥수(金興壽)로 조선 명종 때 동래부사를 지내던 중 을묘사화로 화를 입어 안변(安邊)으로 유배되었다. 그뒤 후손들이 시조가 재임했던 동래를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897(2000).

 

등주(登州)김씨

시조는 김식(金軾)으로 김알지의 후손이다. 등주는 안변(安邊)의 옛이름으로 후손들이 이곳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한편, 중국 명나라 사람으로 조선에 와서 등주에 정착한 김장생(金長生)을 시조로 삼는 문헌도 전한다. 인구수 263(2000).

 

무장(茂長)김씨

시조는 김자무(金自武)로 무주(茂州)사람이며, 박팽년(朴彭年)의 사위였다. 단종복위운동으로 박팽년이 화를 입자 그도 벼슬을 버리고 장연(長淵)으로 피신, 본관을 무장으로 바꿈으로써 후손들이 무장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한편 김해김씨의 후손인 김선(金璇)을 시조로 삼는 무장김씨도 있어왔는데, 이는 김자무가 장연에서 은거함으로써 가문이 영락했고 후손들이 그의 자손임을 감추고자 했기 때문이다. 인구수 2339(2000).

 

무주(茂朱)김씨

시조는 김성(金晟)으로 대보공 김알지의 43세손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조선 태종 때 무주백(茂朱伯)에 봉해졌다. 무주김씨는 시조 김성이 무주백에 봉해진 다음 분관(分貫)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느 본(本)에서 갈라져 나왔는지 족보의 기록에는 분명치 않다. 인구수 2255(2000).

 

문화(文化)김씨

시조는 김검달(金檢達)로 신라 김알지의 후예라고 전할 뿐 문헌이 없어 계보를 알 수 없다. 유주(儒州)에 정착하여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문화를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유주는 문화의 옛이름으로 유주김씨와 같은 뿌리라고 한다. 인구수 1701(2000).

 

밀양(密陽)김씨

시조는 김승조(金承祖)로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12세손이다. 1272년(원종 13) 김방경을 도와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밀성군(密城君;밀성은 밀양의 옛이름)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경주에서 갈라져 그를 시조로 밀양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9951(2000).

 

배천(白川)김씨

시조는 김선(金善)으로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다. 조선 성종 때 전라좌수사를 지내다가 화를 입어 1476년(성종 7) 의주(義州)로 유배되었다. 그뒤 후손들이 배천으로 옮겨가 정착하면서 안악(安岳)김씨에서 갈라져나와 김선을 시조로 배천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1572(2000).

 

보령(保寧)김씨

시조는 김억적(金億積)으로 병조정랑을 지냈다. 보령에 정착한 사대부로 후손들이 본관을 보령으로 하며 대를 잇고 있다. 인구수 1157(2000).

 

봉산(鳳山)김씨

시조는 김명진(金明晉)으로 신라 경순왕의 23세손이며 봉산태수 김이상(金履祥)의 후손이다. 상산김씨와 같은 뿌리라고 전한다. 인구수 515(2000).

 

봉화(奉化)김씨

시조는 김인방(金仁昉).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다. 문헌이 없어 계보를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봉화를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1837(2000).

 

부령(扶寧-扶安)김씨

시조는 김일(金溢)로 마의태자라고 부른다. 신라 경순왕의 큰아들로 국운이 쇠하자 금강산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그뒤 5세손 김경수(金景修)에 이르러 고려 선종 때 이부상서를 지냈고 그의 아들 김춘(金春)이 부령(부안의 옛이름) 부안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부령을 본관으로, 김일을 시조, 김경수를 1세조, 김구(金坵)를 중시조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5만 6318(2000).

 

부여(扶餘)김씨

시조는 김작신(金作辛)으로 부령김씨 시조 김일의 7세손이다. 후손들이 선대의 거주지인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1024(2000).

 

부평(富平)김씨

시조는 김을진(金乙軫)으로 신라 영분공 김명종의 18세손이다. 문헌이 없어 본관의 유래·계보를 알 수 없으며, 후손인 김환(金丸)을 1세조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후손들이 전라남도 화순(和順), 전라북도 고창(高敞) 및 황해도 장연(長淵) 등지에 살고 있다. 인구수 1288(2000).

 

분성(盆城)김씨

시조는 김준영(金俊榮)으로 금녕김씨 시조 김시흥의 13세손이다.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여 몽진한 공으로 3등호성공신이 되고, 분성군(盆城君;분성은 지금의 金海)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분성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3859(2000).

 

사천(泗川)김씨~순천(順天)김씨

 

사천(泗川)김씨

시조는 김부(金阜)로 김방경의 5세손이다. 원래 안동이 본관이었는데, 그의 아버지 김제안(金齊顔)이 신돈(辛旽)을 제거하려다 살해당하고, 그는 사성(泗城;사천의 옛이름)으로 귀양갔다가 왜구의 난 때 공을 세워 사성부원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사천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4955(2000).

 

삼척(三陟)김씨

시조는 김위옹(金渭翁)으로 신라 일선군(一善君) 김추(金錘)의 아들이다. 고려 때 삼한벽상공신상주국좌승상을 지내고 실직군왕(悉直郡王;실직은 삼척의 옛이름)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삼척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7만 9985(2000).

 

상산(商山)김씨

시조는 김수(金需)로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며, 고려 때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졌다. 여러 대에 걸쳐 상산에 살아 5세손 김비궁(金匪躬)이 상산부원군, 9세손 김일(金鎰)이 상락군(上洛君), 10세손 김록(金祿)이 상성군(尙城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상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상산·상락은 상주(尙州)의 옛 이름이다. 인구수 6만 3528(2000).

 

서산(瑞山)김씨

시조는 김득배(金得培)로 상산김씨 시조 김수의 11세손이며 김록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상산김씨 족보에는 문충공파조(文忠公派祖)로 되어 있다. 후손들이 상산김씨에서 갈라져 나온 뒤 그를 시조로 서산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한편 고려 때 대학사를 지낸 김영중(金永中)을 시조로 삼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8087(2000).

 

서흥(瑞興)김씨

시조는 김보(金寶)로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5세손이며 고려 때 금오위정용중랑장을 지냈다. 그의 손자 김천록(金天祿)이 상장군으로 일본 정벌에 종군한 공으로 서흥군(瑞興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서흥을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2만 8313(2000).

 

선산(善山-金宣弓)김씨

시조는 김선궁으로 신라 김알지의 29세손이다.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정난보국공신에 오르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일선(一善)을 본관으로 삼았는데, 조선 태종 때 일선이 선산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선산으로 바꾸었다. 김추를 시조로 하는 선산김씨는 본관이 같을 뿐 별개의 성씨이다. 인구수 10만 9682(2000;김추를 시조로 하는 선산김씨와 합친 숫자).

 

선산(善山-金錘)김씨

시조는 김추로 신라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이다. 경순왕과 고려태조 왕건(王建)의 맏딸 낙랑(樂浪)공주 사이에서 태어나 일선군(一善君)에 봉해졌다. 일선은 선산의 옛이름이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선산으로 삼았다. 그런데 김선궁을 시조로 하는 선산김씨와 성·본관이 같아 혼동이 생기기도 한다. 인구수 10만 9682(2000;김선궁을 시조로 하는 선산김씨와 합친 숫자).

 

설성(雪城)김씨

시조는 김준(金畯)으로 자는 적중(適中)이며, 고려 때 진주사록·좌습유지제고를 지냈다. 그의 선대는 경주김씨로 의성군 김석(金錫)의 10세손이며 개성김씨 시조 김용주(金龍珠)의 손자이다. 인구수 2049(2000).

 

성주(星州)김씨

시조는 김맹(金孟)으로 신라 희강왕의 후손, 또는 대안군 김은열의 12(또는 16)세손으로 전해오나 문헌이 없어 계보를 알 수 없다. 경산(京山)김씨의 시조로 전하기도 한다. 성주가 선대의 세거지였기에 후손들이 본관으로 삼은 것 같다. 한편,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에는 조선 중종 때의 김영숭(金永嵩)이 시조로 되어 있다. 인구수 3022(2000).

 

성천(成川)김씨

시조는 김한초(金漢貂)로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며 고려 때 국자감주부를 지냈다. 1930년 국세조사에 의하면 강원도 정선군(旌善郡) 북면(北面) 숙암리(宿巖里)에 20가구가 살고 있었다. 인구수 577(2000).

 

수안(遂安)김씨

시조는 김훤(金煊)으로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8세손 김방경의 큰아들이다. 고려 때 원충단력안사보정공신으로 벼슬이 부지밀직사 전법판서 상장군에 이르고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김위(金爲)를 중시조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4459(2000).

 

수원(水原)김씨

시조는 김품언(金稟言)으로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손자이다. 고려 현종 때 충순적덕정난공신으로 은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태자소보를 지낸 뒤 거란군을 평정한 공으로 수성군(隋城君)에 봉해지고 수성(수원의 옛이름)을 식읍으로 하사받음으로써 후손들이 수원을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1만 6009(2000).

 

수주(樹州)김씨

시조는 김정보(金鼎寶)로 신라 김명종의 16세손이며 고려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그의 4세손 김만형(金萬亨)이 조선 숙종 때 고위관직에 오름으로써 경주김씨에서 갈라져 나와 김정보가 터를 잡았던 수주(지금의 富平)를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2203(2000).

 

순창(淳昌)김씨

시조는 김지진(金之珍)으로 대안군 김은열의 13세손 김공기(金公器)의 손자라 전하나 문헌이 없어 계보·본관의 유래를 알 수 없다. 후손들이 순창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975(2000).

 

순천(順天)김씨

시조는 김총(金摠)으로 신라의 종성(宗姓)이다. 신라 말엽 때 인가별감으로 공을 세워 평양군(平陽君;평양은 지금의 순천)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순천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5만 2258(2000).

 

순흥(順興)김씨~언양(彦陽)김씨

 

순흥(順興)김씨

시조는 김함일(金咸逸)로 대안군 김은열의 12세손 김자창(金自昌)의 5세손이며 조선 때 정랑(正郞)을 지냈다고 전하나 문헌이 없어 본관의 유래를 알 수 없다. 후손들이 순흥을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702(2000).

 

승평(昇平)김씨

시조는 김윤인(金允仁)으로 순천김씨 시조 김총의 16세손이다. 승평은 순천의 옛이름이므로 승평을 본관으로 삼은 것 같다. 한편 김사윤(金泗潤)을 시조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564(2000).

 

신천(信川)김씨

시조는 김득추(金得秋)로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라고 전하는 조선 개국공신 계림군(鷄林君) 김균의 7세손이며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김만종(金萬鍾)의 아들이다. 그가 황해도 신천에 거주했으므로 후손들이 그곳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431(2000).

 

신평(新平)김씨

시조는 김만정(金萬挺)으로 순천김씨 시조 김총의 29세손이며 김황의 둘째 아들이다. 문헌이 없어 시조와 본관의 유래를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순천김씨에서 갈라져 나와 그를 시조로 신평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김광엽(金光燁)을 시조로 전하는 문헌도 있는데 그도 순천김씨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인구수 916(2000).

 

안동(安東-舊)김씨

시조는 김숙승(金叔承). 신라 대안군 은열의 둘째 아들이며, 고려초에 공부시랑(工部侍郎)을 지냈다. 그뒤 김방경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참고로 <기미보(己未譜)> 서문에도 안동김씨는 신라로부터 나왔으니 충렬공은 경순왕의 9세손으로, 구보(舊譜)에 15세손으로 기록된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동은 안동김씨 일문이 500여 년 동안 세계(世系)를 이어온 마을이다. 입향조(入鄕祖)는 고려말 도평의공(都評議公) 김구정(金九鼎)의 아들 김자담(金子膽)이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안동에서 이곳으로 숨어들어 초야에 묻혀 살았다. 구안동김씨는 김방경 이후 가문이 번성하기 시작하여 고려말에는 최고 가문의 영예를 누렸다.

 

관향이 같으면서도 김숙승을 시조로 하는 계통을 구안동김씨,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계통을 신안동김씨로 구분한다. 인구수 42만 5264(2000).

 

안동(安東-新)김씨

시조는 김선평으로 신라말 고창(古昌;안동의 옛이름)의 성주였다. 견훤(甄萱)을 토벌한 공으로 삼한벽상공신이 되었고, 고창이 안동부로 승격됨에 따라 후손들이 안동을 본관으로 삼았다. 신안동김씨의 선대는 신라김씨, 즉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라고 하나 김알지계인지 경순왕계인지 확실하지 않다. 김선평 이후의 계보가 확실하지 않아 7세손인 김득우(金得雨)를 기세조(起世祖)로 삼은 적도 있었다. 인구수 4만 7702(2000).

 

안로(安老)김씨

시조는 김지경(金之敬)으로 경순왕의 후손이다. 일설에는 경순왕의 손자 김운발(金雲發;羅州김씨의 시조)의 넷째 아들, 또는 김우발(金雨發)의 아들이라 전한다. 여러 대에 걸쳐 안로(나주의 속현)에 살았던 사대부로 생각된다. 김지경으로부터 김득장(金得章)으로 대를 잇고 있다. 인구수 173(2000).

 

안산(安山)김씨

시조 김긍필(金兢弼)은 고려 현종 때 사람으로 대보공 김알지의 32세손이며, 신라 태종무열왕의 17세 직계 현손으로 안산개국후에 봉작되고 벼슬은 상서좌복야이다.

그의 아들 김은부는 호부상서, 상호군이며 딸 3명이 고려 현종의 태후 및 왕후가 되어 국구(왕의 장인)로서 안산개국후에 봉작되었고,

외손인 덕종, 정종, 문종이 왕에 오르면서 4대 50여년동안 고려시대의 최고 문벌귀족이 되었으며. 김태후 집안(안산김씨)은 대대로 왕실과 혼인하도록 정해져 고려시대 문벌귀족 가문의 지위를 계속 누리게 되었다.

안산김씨 김은부의 부인은 인주(인천)이씨 이허겸의 딸로서 인주이씨가 귀족반열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자연은 이허겸 손자다.

김은부의 큰아들 충찬은 병부상서 작은아들 난원은 문종의 왕사를 거쳐 경덕국사가 되었으며, 대각국사 의천(문종의 아들)의 스승이 되었다.

손자 원황은 공부상서, 병부상서 증손 경용은 평장사, 문하시중, 경용의 아들 인규는 이부상서, 후손 위는 문하시중, 그 후손들인 원상과 성경은 대제학 등 대대로 큰벼슬을 지냈으며,

김은부의 11대 후손 김정경이 이조판서와, 좌명공신으로 안산군(연성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안산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1만 4975(2000년).

 

안성(安城)김씨

 

시조는 김재영(金再英)으로 신라 내물왕의 후손이다. 진덕여왕 때 백제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졌는데 신하에게 군(君)을 봉하는 법으로는 처음이었다. 이후 계보가 실전되었다가 고려 고종 때에 이르러 김돈(金墩)을 기세조로 삼아 대를 잇게 되었다. 인구수 2519(2000).

 

안악(安岳)김씨

시조는 김영(金瑩)으로 경주김씨 시조 김은열의 후손이며 김균의 5세손이다. 조선 단종 때 봉사직장으로 있으면서 단종을 영월로 호종한 것이 빌미가 되어 참소로 강화에 유배되었다. 성종 때 풀려나 안악군(安岳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안악을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1314(2000).

 

야성(野城-盈德)김씨

시조는 김취린으로 신라 김알지의 42세손이며 경순왕의 14세손이다. 고려 때 호장중윤(戶長中尹)으로 거란의 침략을 격퇴시킨 공으로 시중시랑이 되고 야성군(野城君)에 봉해졌다. 야성은 지금의 영덕이므로 후손들에 따라 본관을 야성 또는 영덕이라고도 쓴다. 인구수 3401(2000).

 

양산(梁山)김씨

시조는 김연(金衍)으로 고려때 통사사인(通事舍人)을 지냈다. 《고려사열전》에 의하면 그의 손자인 김맹(金猛)은 양주(梁州;양산의 고려 때 이름) 의춘현(宜春縣) 사람으로 시조가 김연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조부터 양산을 본관으로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인구수 2628(2000).

 

양주(楊州)김씨

시조는 김원보(金元寶)로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9세손이며 김윤선(金允鐥)의 아들이다. 고려 고종 때 양주백(楊州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양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3510(2000).

 

양평(楊平)김씨

시조는 김의간(金義杆)으로 신라의 종성(宗姓)이며 사정(司正)을 지냈다고 전할 뿐 문헌이 없어 계보·본관의 유래를 알 수 없고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양평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321(2000).

 

언양(彦陽)김씨

시조는 김선(金鐥)으로 신라 경순왕의 일곱째 아들이며, 고려 태조의 외손이다.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언양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계보가 확실치 않아 5세손인 김수(金壽)를 시조로 삼았던 적도 있으나, 경주김씨와 익화(益和)김씨 등의 방계 족보에 김선으로부터 김수까지의 계보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 인구수 3만 8383(2000).

 

여주(驪州)김씨~영주(榮州)김씨

 

여주(驪州)김씨

시조는 김순량(金純良)으로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라 전하나 문헌이 없어 계보를 알 수 없다. 한편 고려 때 태자소보를 지낸 영주(榮州)김씨 시조 김정자(金挺磁), 또는 검교 태자첨사를 지낸 황리(黃利;지금의 여주)김씨 시조 김준(金濬)을 시조로 삼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1137(2000).

 

연기(燕岐-燕城·燕州)김씨

시조는 김준손(金俊孫)으로 대안군 김은열의 후손이다. 조선 성종 때 문과에 급제했고,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에 책록되면서 연성군(燕城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연주를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연성·연주는 연기의 다른 이름이다. 한편 조선 효종 때의 김중화(金仲華)를 시조로 삼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584(2000).

 

연안(延安)김씨

시조는 김섬한(金暹漢)으로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다. 형제가 왕에게 직간하다가 형은 북빈경(北濱京;지금의 江陵), 아우는 고염성(鼓鹽城;지금의 연안)으로 각각 유배되었는데, 김섬한은 연안으로 간 아우의 후손이라고만 전할 뿐 자세한 계보를 알 수 없다. 김섬한이 고려 명종 때 가문을 일으켰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연안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7만 9788(2000).

 

연일(延日-烏川)김씨

시조는 김서흥으로 대안군 김은열의 8세손인 김봉기(金鳳麒)의 둘째 아들이다. 고려 인종 때 문림랑(文林郎)·예빈승동정(禮賓丞同正)을 지내고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졌다. 그의 4세손 김예직(金禮直)이 원종 때 공을 세워 다시 오천군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오천(연일의 옛이름)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704(2000).

 

연풍(延豊)김씨

시조는 김이도(金以道)로 상산(商山)김씨 시조 김수(金需)의 22세손이며 인조 때 부사어(副司禦)를 지냈다. 한편 연풍군(延豊君) 김수(金燧)를 시조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444(2000).

 

영광(靈光)김씨

시조는 김심언(金審言)으로 대안군 김은열의 손자이다. 고려 성종·목종·현종 때의 명신으로 내사시랑평장사를 지내고 오성군(筽城君;오성은 영광의 옛이름)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영광을 본관으로 삼았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7세손 김보당(金甫當)이 의종을 복위시키려다 반군에게 살해당하고 일족은 전국 각처로 흩어졌으므로 중간 계보가 실전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은 경파(京派)·장흥파(長興派)·영광파(靈光派)·고창파(高敞派)·양사파(良士派)·강계파(江界派)의 6파로 나뉘어 중시조로 대를 잇게 되었다. 인구수 3만 2412(2000).

 

영산(永山)김씨

시조는 김영이(金令貽)로 신라 신무왕의 넷째 아들 김익광(金益光)의 후손이다. 고려 때 전객시령(典客寺令)을 지내고 영산군(永山君)에 추봉되었으며, 그의 아들 김길원(金吉元)은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왕을 호종하여 몽진한 공으로 영산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영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1만 7120(2000).

 

영산(靈山)김씨

시조는 김순(金淳)으로 신라경순왕의 후손이며 조선 세종 때 대사헌을 지냈다. 《국조방목》에는 김순의 본관이 의성(義城)으로 나타나 있으나 의성김씨의 세계에는 연결이 안 된다. 한편 의성김씨에서 분적하여 김순을 시조로 영산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고 전하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1916(2000).

 

영암(靈巖)김씨

시조는 김숙(金淑)으로 고려 명종 때 호남안찰사로 영암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영암군(靈巖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영암으로 하여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2568(2000).

 

영양(英陽)김씨

시조는 김충(金忠)으로 중국 허난[河南(하남성)]사람이다. 당나라의 관리로 일본에 다녀오다가 심한 풍랑을 만나 신라 유린(有隣;지금의 丑山)에 표착했는데, 경덕왕이 영양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남(南)씨 성을 내리고 죽은 뒤 시호까지 내려 2개 성이 되었다. 그러나 김충의 큰아들 김석중(金錫中)은 김씨성을 계속 사용하고 영양에 정착하면서 김씨의 혈통을 이어왔으나 그뒤 계보가 실전되어 김충을 원조(遠祖)로, 김충황(金忠晃)을 기세조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7462(2000).

 

영월(寧越)김씨

시조는 김여생(金麗生)으로 일선군 김추의 8세손이다. 그에 관한 연대·사적은 전하지 않아 알 수 없고 다만 전옥서 봉사(典獄署奉事)를 지내다가 화를 입어 영월로 유배, 그곳에 정착했다고 전할 뿐이다. 그뒤 문헌이 실전되어 중간 세계를 알 수 없게 되자 김복중(金福仲)을 기세조로, 영월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699(2000).

 

영주(榮州)김씨

시조는 김정자(金挺磁)로 신라 경순왕의 9세손이며 고려 때 태자소보(太子小保)를 지냈다고 한다. 황리(黃利)·여주(驪州)김씨와 같은 근원이라고 전하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922(2000).

 

영천(永川)김씨

같은 본관을 사용하면서 시조를 달리하는 4파가 있다. 신라 경순왕의 셋째아들 김명종의 17세손 김일(金佾)을 1세조로 하는 파, 김온(金溫)을 시조로 삼은 파, 경순왕의 후손인 김지식을 1세조로 하는 파가 있다. 그리고 김알지의 후손으로 검교한성부윤을 지낸 김영장(金永長)을 1세조로 하는 파가 있는데, 후손들이 황해도 평산(平山)으로 이주하면서 조상의 세거지였던 영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3540(2000).

 

영해(寧海)김씨

시조는 김억민(金億敏)으로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14세손이며, 고려말에 중랑장을 지내고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원종공신으로 안동군(安東君)에 봉해진 김철(金哲)의 손자이다. 따라서 영해김씨는 경주김씨에서 갈라져 나온 안동김씨의 후손이 된다. 인구수 718(2000).

 

예안(禮安-宣城)김씨

시조는 김상(金尙).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냈으며 예안에 살았던 사대부.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예안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1만 5313(2000).

 

예천(醴川)김씨~은진(恩津)김씨

 

예천(醴川)김씨

시조는 김선치(金先致)로 상산김씨의 시조 김수(金需)의 11세손이며 김군실(金君實)의 아들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시조와 본관의 유래를 알 수 없다. 인구수는 884(2000).

 

옥천(玉川)김씨

시조는 김곤으로 예안김씨 시조 김상(金尙)의 17세손인 김득선(金得先)의 셋째 아들이다. 예천(醴泉)에서 살았으며 조선 인조 때 문과에 급제, 현감·감찰 등을 지냈다. 분관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예천김씨에서 갈라져 나와 그를 시조로 옥천을 본관으로 삼은 것 같다. 한편 진사 김천익(金天益)을 시조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723(2000;沃川김씨와 합친 숫자).

 

옥천(沃川)김씨

시조는 김희철(金希哲).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파조(版圖判書公派祖) 김장유(金將有)의 10세손이다. 《국조방목(國朝榜目)》에 후손 김련(金輦)이 평안북도 선천(宣川)에 대대로 살면서 본관이 옥천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후손들이 선천으로 이주한 뒤에도 선대의 거주지였던 옥천을 본관으로 삼은 것 같다. 인구수 723(2000;玉川김씨와 합친 숫자).

 

완산(完山)김씨

시조인 김정(金晸)은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7대손으로 생원을 지냈다고 한다. 문헌이 없어 계보·본관의 유래는 미상이나, 후손들이 경주에서 갈라져 나와 그를 시조로 완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653(2000).

 

용궁(龍宮)김씨

시조는 김존중(金存中)으로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의 8세손이다. 고려 인종 때 문명이 널리 알려져 의종의 동궁시절에 시강(侍講)을 맡았다. 의종이 즉위한 뒤 용궁군(龍宮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용궁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1만 660(2000).

 

용담(龍潭)김씨

시조는 김덕생(金德生)으로 조선 때 병조참의를 지내다가 명천(明川)으로 낙향해서 세거했으며, 그 뒤 후손들이 함경북도 명천·경성(鏡城)·길주(吉州) 등지에 세거하며 용담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한편 수원김씨의 시조 김품언의 아들 김순서(金順瑞)를 시조로 삼는 문헌도 전한다. 인구수 197(2000).

 

용성(龍城)김씨

시조는 김시보(金時輔)로 수원김씨 시조 김품언(金稟言)의 22세손이다. 문헌이 없어 본관·계보의 유래를 알 수 없다. 김시보는 수원김씨 족보에도 실려 있다. 인구수 104(2000) .

 

용안(龍安)김씨

시조는 김덕령(金德齡). 신라 김알지의 후예로 신무왕의 셋째 아들이며 광산(光山)김씨 시조 김흥광의 30세손.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으나 모함을 받아 옥사하자 아들 김광옥(金光沃)이 전라북도 용안에 숨어 살게 되어 본관을 용안으로 바꾸었다. 인구수 500(2000).

 

우봉(牛峰)김씨

시조는 김오(金澳)로 신라 경순왕의 셋째 아들 김명종의 큰아들이다. 고려 성종 때 시어사(侍御史)로 공을 세워 수지의후(首知衣侯;수지의는 우봉의 고구려 때 이름)에 봉해지고 다시 우잠군(牛岑君;우잠은 우봉의 신라 때 이름)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우봉을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 김오의 4세손 김원길(金元吉)이 고려 인종 때 우봉군에 봉해졌으므로 그를 관향조(貫鄕祖)로 삼기도 한다. 인구수 2980(2000).

 

울산(蔚山)김씨

시조는 김덕지(金德摯)로 신라 경순왕의 별자(別子).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김덕지가 학성(울산의 옛 이름)으로 수관(受貫)함으로써 시조가 되었다. 시조 이후 13세손까지의 계보는 실전되었고, 14세손 김환(金環) 이후부터의 소목(昭穆)은 분명하다. 그는 고려 충숙왕 때 삼중대광 광록대부 학성군에 봉해졌다. 인구수 3만 6225(2000).

 

웅천(熊川)김씨

시조는 김취행(金就行)으로 신라의 종성(宗姓)이며 김홍해(金弘海)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지냈다고 한다. 문헌이 없어 세계나 본관의 유래를 알 수가 없다. 한편 김취행의 선조인 김중재(金重材)를 1세조로 삼는 문헌도 전한다. 인구수는 347(2000).

 

원주(原州)김씨

시조는 김시조는 김거공(金巨公)으로 신라 김알지의 36세손이다. 고려 의종 때 원성백(原城伯;원성은 원주의 옛이름)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원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1만 978(2000).

 

월성(月城)김씨

시조는 김광우(金光佑). 신라 대안공 김은열의 15세손이다. 조선초 문과급제 후 세종 때 덕천(德川)군수로 있으면서 직간하다가 평안남도 성천(成川)에 유배당했다. 후손들도 그곳에서 세거하게 되었으나 그 근원이 경주김씨이므로 월성(경주의 옛이름)을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 같은 본관을 사용하면서도 경순왕의 셋째 아들 김명종의 17세손 김이진(金以珍)을 시조로 삼는 계통도 있다. 평안남도 성천, 경상북도 영일·영천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인구수 1만 5753(2000).

 

은율(殷栗)김씨

시조는 김상동(金尙銅)으로 조선 명종 때 사정(司正)을 지내다가 은율로 유배당했으며, 사면되어 상경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정주(定州)에 표류하여 정착함으로써 본관을 은율로 삼았다. 인구수 315(2000).

 

은진(恩津)김씨

시조는 김전개(金田漑)로 광산김씨 시조 김흥광의 후손. 조선 명종 때 벼슬이 판관에 이르렀다. 1930년 국세조사에 의하면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용계면(龍溪面) 고창동(古倉洞)에 36가구가 살고 있었다. 인구수 230(2000).

 

의령(宜寧)김씨~정산(定山)김씨

 

의령(宜寧)김씨

시조는 김천극(金天極)으로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가 의령군(宜寧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의령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온 것 같다. 인구수 1345(2000).

 

의성(義城)김씨

시조는 김석(金錫). 신라 경순왕의 몇째 아들인가는 불분명하다. 의성을 관향(貫鄕)으로 정한 것은 시조 김석이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짐으로써 자손들이 본관을 의성으로 삼았다고 《을축보(乙丑譜)》 세록에 쓰여 있다. 9세 김용비(金龍庇) 이래로 의성을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삼아왔으므로 일찍이 의성에 세거했다고 믿어진다. 인구수 25만 3309(2000).

 

의주(義州)김씨

시조는 김성갑(金成甲)으로 세계와 시조의 생존시기는 알 수 없다. 1930년 국세조사에 의하면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하면(臨河面) 천전동(川前洞)에 10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인구수 482(2000).

 

의흥(義興)김씨

시조는 김성갑(金成甲)으로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15세손이며 구성군(龜城君;구성은 의흥의 옛이름)에 봉해졌다. 그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의흥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190(2000).

 

이천(伊川)김씨

시조는 김순걸(金順傑)로 신라 태종무열왕의 11세손인 김도강(金道康)의 후손으로 전한다. 그의 아들 김춘(金椿)과 손자 김언남(金彦楠)은 이천에 정착한 사대부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다고 한다. 따라서 후손들이 이천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441(2000;利川김씨와 합친 숫자).

 

이천(利川)김씨

시조는 김양진(金楊震). 풍산(豊山)김씨 시조 김문적(金文迪)의 11세손이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후손들이 풍산김씨에서 갈라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441(2000;伊川김씨와 합친 숫자).

 

익화(益和)김씨

시조는 김인찬(金仁贊)으로 대안군 김은열의 후손이며 김존일(金存一)의 넷째 아들이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동참하여 동지밀직사사에 오르고 개국공신으로 익화군에 추봉되었다. 당시 익화는 양근(楊根)으로 불렸으므로 후손들이 양근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오다가 1975년 후손들이 합의하여 익화김씨로 하였다. 인구수 5357(2000).

 

인동(仁同)김씨

시조는 김정(金淀)으로 수원김씨 시조 김품언의 22세손 김예중(金禮仲)의 아들이다. 그가 인동부사(仁同府使)를 지냈으므로 후손들이 수원김씨에서 갈라져 나와 인동을 본관으로 삼았다. 후손들의 세거지에 따라 대송파(大松派)와 철원파(鐵原派)로 나뉘어 있다. 인구수 1282(2000).

 

임진(臨津)김씨

시조는 김인조(金仁朝). 신라 종성이며 김일신(金日新)의 아들로 신호위상장군을 지냈다. 세계·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임진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115(2000).

 

임피(臨陂)김씨

시조는 김한추(金漢樞)로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9세손 김여흥(金餘興)의 손자. 고려 때 임피군(臨陂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임피를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 김수옹(金守甕)을 시조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117(2000).

 

장성(長城)김씨

시조는 김극신(金克信)으로 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 판교(判校)를 지냈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장성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525(2000).

 

장연(長淵)김씨

시조는 김정신(金鼎新).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라 전하나 문헌이 없어 계보를 알 수 없다.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인구수 334(2000).

 

적성(積城)김씨

시조는 김상환(金尙煥)으로 의성김씨 시조 김석(金錫)의 9세손인 김용필(金龍弼)의 후손이며 김몽립(金夢立)의 아들이다. 한편 계림군(鷄林君) 김적(金積)의 증손 김광(金光)을 시조로 삼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669(2000).

 

전주(全州)김씨

시조는 김태서(金台瑞)로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7세손이며 경주김씨와 뿌리가 같다.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침입으로 경주가 폐허가 되자 일족을 이끌고 전주로 옮겨갔다. 명종·신종·희종·강종·고종의 다섯왕에 걸쳐 수문관대제학·이부상서·상장군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고종 때 세상을 떠나자 전주군(全州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전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5만 7979(2000).

 

정산(定山)김씨

시조는 김복수(金福壽)로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15세손 김한(金漢)의 둘째아들이다. 무오사화에 관련되어 정산으로 이주, 뒤에 다시 평안도에 정착하여 광유(光酉)로 이름을 바꾸고 전거주지였던 정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 김은열의 16세손 김태서(金台瑞)의 4세손인 김행경(金行敬)을 시조로 하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673(2000).

 

정읍(井邑)김씨~철원(鐵原)김씨

 

정읍(井邑)김씨

시조는 김수온(金守溫)으로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다. 그의 선대는 영산(永山)김씨와 같은 근원으로 영산김씨족보에 김수온이란 인물이 5세조로 나타나 있으나 동일 인물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인구수 480(2000).

 

제주(濟州)김씨

시조는 김렴(金濂)으로 상산김씨 시조 김수(金需)의 18세손이며 김수돈(金守敦)의 아들이다. 조선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한산(韓山)군수에 이르렀는데, 급제 당시 본관이 상산(商山)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후손들이 상산김씨에서 갈라져 나와 그를 시조로 제주를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온 것 같다. 인구수 744(2000).

 

중화(中和)김씨

시조는 김철(金哲)로 신라 문성왕의 5세손. 당악(唐岳)김씨 시조 김낙(金樂)의 동생이다.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그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본래 순천(順天)사람인데 중화로 갈라져 나왔다. 인구수 426(2000).

 

진도(珍島)김씨

시조는 김자경(金自敬)으로 김알지의 후손으로 전할 뿐 확실한 세계를 알 수 없다. 후손들이 진도에 토착, 대대로 살면서 본관을 진도로 삼았다. 고려 때 군정사(軍政事)를 지낸 김국빈(金國檳)을 계보상의 시조로 삼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1464(2000).

 

진산(珍山)김씨

시조는 김천석(金天錫). 신라 김알지의 후손으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자세한 세계를 알 수 없다. 조선 때 문과에 급제, 감사(監司)를 지냈으며, 그 뒤 후손들이 진산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230(2000).

 

진위(振威)김씨

시조는 김승경(金昇景)으로 경기도 영신현(永新縣;지금의 평택군 진위면)에서 태어나 세종 때 과의교위행대호군(果毅校尉行大護軍)으로 함경남도 단천(端川)에 파견된 것이 계기가 되어 정착함으로써 진위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진위김씨의 시조는 그의 5세손인 김기문(金起門)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아마도 김기문의 경력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인구수 1235(2000).

 

진잠(鎭岑)김씨

시조는 김극복(金克福)으로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다. 선조가 나라에 공을 세워 진잠군(鎭岑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진잠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선대의 문헌과 유적을 잃어버려 세계를 밝히지 못하고 김희(金熙)를 1세조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한편 대사간을 지낸 김승보(金承普)를 시조로 삼거나 김극복을 중시조로 보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114(2000).

 

진주(晉州)김씨

본관이 같으면서 시조는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하나는 신라김씨의 분파로서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 김추(金錘)를 시조로 하는 신라김씨계와, 다른 한 계통은 가락(駕洛)김씨계의 후예로 김수로왕의 13세손 김유신(金庾信)의 둘째 아들 김삼광(金三光)이 진주에 터를 잡아 후손들이 대대로 살게 됨으로써 진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1만 9795(2000).

 

진천(鎭川)김씨

시조는 김사혁(金斯革)으로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金周元)의 18세손이다. 그가 죽은 뒤 충청북도 진천의 와곡(瓦谷)에 장사지내고 후손들이 진천에 세거했으며, 조선 때 4대사화를 피하기 위해 진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광복 이후 대부분이 강릉김씨로 복귀했다. 인구수 1885(2000).

 

진해(鎭海)김씨

시조는 김이진(金以珍)으로 신라 김알지의 후예라고 전한다.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으며 후손들이 진해를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1063(2000).

 

창녕(昌寧)김씨

시조는 김정철(金廷哲)로 신라 김알지의 후예라고 전할 뿐 자세한 세계를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창녕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창녕을 본관으로 삼았다. 김전(金佺)을 시조로 삼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2278(2000).

 

창원(昌原)김씨

시조는 김을진(金乙軫)으로 신라 경순왕의 18세손이다. 벼슬이 금자광록대부태자첨사에 이르렀고, 홍건적 토벌에 공을 세워 회원군(檜原君;회원은 창원의 옛이름)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창원을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3094(2000).

 

창평(昌平)김씨

시조는 김석규(金錫奎)로 조선 때 주부(主簿)를 지냈고, 창평에 정착하여 후손들이 창평을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 사공(司空)을 지낸 김태(金兌)를 시조로 하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243(2000).

 

천안(天安)김씨

시조는 김덕린(金德麟)으로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며 김세중(金世重)의 아들이다. 용궁(龍宮)을 세거지로 삼았으며 조선 영조 때 문과에 급제, 직강(直講)을 지냈고 천안 군수를 지냈다고도 한다. 《국조방목》에 그의 본관이 축산(竺山;용궁의 옛이름), 거주지가 용궁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안과 축산은 같은 근원으로 보이며, 따라서 축산김씨의 시조로 되어 있는 김덕린과 동일 인물로 생각된다. 한편 좌우위력장군 김윤명(金允明)을 시조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1494(2000).

 

철원(鐵原)김씨

시조는 김응하(金應河)로 구안동김씨 중시조인 김방경의 12세손이다. 철원 출신이다. 후손들이 안동김씨에서 갈라져 나와 그를 시조로 철원을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392(2000).

 

청도(淸道)김씨~파평(坡平)김씨

 

청도(淸道)김씨

시조는 김지대(金之岱, 1190~1266)로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8세손이며 김여흥(金余興)의 셋째 아들이다.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 전주사록·전라도안찰사 등을 거쳐 금자광록대부 수태부중서시랑 평장사를 지내고 오산군(鰲山君;오산은 청도의 옛이름)에 봉해져 후손들이 청도를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7만 5567(2000).

 

청산(靑山)김씨

시조는 김치제(金治濟)로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다. 후손들이 청산[沃川郡(옥천군)에 속한 면]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한편 김사한(金士翰)의 후손 또는 신라김씨와 같은 근원으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810(2000).

 

청송(靑松)김씨

시조는 김정기(金正己)로 신라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인 김태서(金台瑞)의 6세손이다. 조선 태조 때 한성판윤을 지냈으며, 1398년(태조 7) 태조가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咸興)으로 갈 때 태조에게 여러 차례 직간하다가 미움을 사 중산(仲山;지금의 定平)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후손들이 김정기의 전거주지였던 청송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1641(2000).

 

청양(靑陽)김씨

시조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하나는 선대를 알 수 없는 김침을시조로 하는 감무공계(監務公系)이다. 다른 하나는 김진완(金振玩)을 시조로 하는 진완계이다. 그는 신라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이라고 전한다. 인구수 871(2000).

 

청주(淸州)김씨

시조는 김정(金錠)으로 신라 경순왕의 여섯째 아들이다. 그 뒤의 계보가 확실치 않아 고려 때 금오위대장에 오른 10세손 김보(金甫)를 중시조로 하여 2파로 갈렸다.

 

김보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김예(金藝)는 함경도 북청(北靑)에 들어가 그곳에서 대대로 살게 되었고, 둘째 아들 김전(金篆)은 고려 때 전서 병부상서를 지냈으며, 셋째 아들 김양(金襄)은 후손이 없었다고 한다. 청주를 본관으로 한 것은 김보가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져 청주의 구봉산(九峰山)에 은거한 것을 연유로 한다. 인구수 2만 9198(2000).

 

청풍(淸風)김씨

시조는 김대유(金大猷)로 신라 김알지의 47세손이며 김은열의 큰아들 김정구(金正矩)의 16세손이다. 고려 때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청성(淸城;청풍) 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청풍을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9만 4468(2000).

 

초계(草溪)김씨

시조는 김수(金須)로 광산김씨 시조 김흥광(金興光)의 14세손이며 김경량(金鏡亮)의 아들이다. 광산김씨 족보에 그의 사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후손들이 광산김씨에서 갈라져 나온 것 같다. 인구수 283(2000).

 

춘양(春陽)김씨

시조는 김이(金怡)로 고려 충숙왕 때 경산군(慶山君)에 봉해졌으며, 추충보절동덕공신에 올랐다. 한편 신라 경순왕의 아들 일선군 김추의 11세손이며 대장군 김윤성(金允成)의 아들인 김인궤(金仁軌)를 시조로 전하기도 하는데, 김이의 경우 경산군에 봉해졌으므로 경산김씨의 시조로 삼기도 한다. 인구수 92(2000).

 

충주(忠州)김씨

시조는 김남길(金南吉)로 신라 경순왕의 셋째 아들 영분공 김명종의 16세손이며 김정윤(金正潤)의 아들이다. 고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평장사 문하시중에 이르고 공민왕 때 태자대부를 지낸 뒤 충원군(忠原君;충원은 충주의 옛이름)에 봉해져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9099(2000).

 

칠원(漆原)김씨

시조는 김영철(金永哲)로 신라 종성이며 호조참판을 지냈다. 칠원에 정착한 사대부로 후손들이 그곳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1930년 국세조사에 의하면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순창읍(淳昌邑) 복실리(福實里)에 23가구가 살고 있었다. 인구수 83(2000).

 

태원(太原)김씨

시조는 김학증(金學曾)으로 명나라 신종 때 푸젠성[福建省(복건성)] 도어사(都御史)로 랴오둥[遼東(요동)]에서 공을 세워 한림태원백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김평(金坪)은 중국 태원사람으로 명나라가 망한 뒤 1626년(인조 4) 김해(金海) 대종산(大鍾山) 아래로 옮겨 정착함으로써 후손들이 시조의 출생지인 태원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2557(2000).

 

토산(兎山)김씨

시조는 김부윤(金富允)으로 신라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이다. 한편 후손 김일선(金一善)에 의하면 원래는 토산김씨였는데,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통선(通仙)에 세거하며 월성(月城)김씨로 본관을 바꾸었다고 한다. 인구수 168(2000).

 

통천(通川)김씨

시조는 김교(金較)로 마의태자 김일의 큰아들이다. 고려 혜종 때 금양군(金壤君;금양은 통천의 옛이름)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통천을 본관으로 삼고 김교를 시조, 그의 12세손 김원등(金遠登)을 중조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4981(2000).

 

파주(坡州)김씨

시조는 김영긍(金永兢)으로 신라 김알지의 후예이며 이조참의를 지냈다고 전하나 문헌이 없어 계보를 알 수 없다. 한편 파평(坡平)김씨와 같은 근원으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533(2000).

 

파평(坡平)김씨

시조는 김장수(金長壽)로 호는 포재(圃齋),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친 공으로 상장군에 오르고 1363년(공민왕 12) 김용(金鏞)의 반란을 평정하려다 순국했다. 평정 후 일등공신으로 파평군(坡平君)에 추봉되어 후손들이 파평을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1681(2000).

 

평산(平山)김씨~함창(咸昌-咸寧)김씨

 

평산(平山)김씨

시조는 김승무(金承茂)로 신라 영분공 김명종의 손자이다. 6·25때 월남한 김영훈(金泳薰)이 쓴 《신라김씨 2천년사》 발문에 경주김씨 분파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후손들이 경주에서 갈라져 나와 시조의 거주지인 평산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인구수 1591(2000).

 

평양(平孃)김씨

시조는 김운(金運)으로 대안군 김은열의 셋째 아들인 김렴(金濂)의 손자이다. 고려 때 신령공(神寧公)에 추봉됨으로써 평양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런데 고려 말에 향공진사로 큰 공을 세운 김대진(金大振)이 평양군에 봉해져 그를 1세조로 삼아 대를 이어 오고 있다. 인구수 875(2000).

 

평창(平昌)김씨

시조는 김명응(金鳴應)으로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7세손 김세우(金世羽)의 후손으로 전하나 문헌이 없어 자세한 세계를 알 수 없다. 다만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평창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415(2000).

 

평택(平澤)김씨

시조는 김완고(金完考)로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다. 문헌이 없어 자세한 세계를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평택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440(2000).

 

평해(平海)김씨

시조는 김숙흥(金叔興)으로 대안군 김은열의 9세손이다. 고려 때 공부상서를 지내고 평해군(平海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평해를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 김준례(金遵禮)의 아들 김맹절(金孟節)을 시조로 삼는 문헌도 전한다. 인구수 192(2000).

 

풍기(豊基)김씨

시조는 김숭원(金崇元)으로 풍산김씨 시조 김문적(金文迪)의 15세손이다. 그의 선대는 풍기에 세거한 호족으로 후손들이 벽동(碧潼)으로 이주하면서 전거주지인 풍기를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340(2000).

 

풍덕(豊德)김씨

시조는 김자앙으로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뒤 도강군(道康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풍덕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74(2000).

 

풍산(豊山)김씨

시조는 김문적(金文迪)으로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다. 《풍산김씨유사(遺事)》에 의하면 그가 풍산현[지금의 安東郡(안동군)]에 살면서 공을 세워 풍산백(豊山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풍산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1만 2438(2000).

 

풍천(豊川-永柔)김씨

시조는 김영주(金英柱)로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라고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세계·본관의 유래·시조의 사적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후손들이 영유에 정착하면서 선조의 세거지였던 풍천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2292(2000).

 

하음(河陰)김씨

시조는 김효일(金孝逸). 대안군 김은열의 후손인 김태서(金台瑞)의 증손으로 하음부원군에 봉해졌다. 한편 김효일의 6대조 김경보(金景輔), 또는 강화(江華)김씨 시조 김성(金晟), 또는 하음의 김희정(金希正)을 시조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503(2000).

 

한남(漢南)김씨

시조는 김녹연(金祿延) 또는 녹정(祿廷)으로 수원김씨 시조 김품언(金稟言)의 손자이며 김순거(金順擧)의 아들이다. 인구수 71(2000).

 

한산(韓山)김씨

1930년 국세조사 때 함경남도 덕원군(德源郡) 풍하면(豊下面) 석천리(石泉里)에 30가구가 살았다고 나타날 뿐 문헌이 없어 계보·시조의 사적을 알 수 없다. 인구수 507(2000).

 

함안(咸安)김씨

시조는 김태백(金太白)으로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며 문희공(文熹公)으로만 전할 뿐 문헌이 없어 계보를 알 수 없다. 한편 마의태자 김일의 후손 또는 광산김씨의 분파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888(2000).

 

함양(咸陽)김씨

시조는 김준덕(金俊德).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 때 태사를 지냈으며,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함양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2766(2000).

 

함창(咸昌-咸寧)김씨

시조는 고령가야왕(古寧伽倻王)으로 41년(신라 유리왕 18) 김해(金海) 구지봉(龜旨峰)에서 김수로왕과 함께 금합에서 태어났다 하여 김씨가 되었다. 시조 이후의 계보를 알 수 없어 후손인 김종제(金宗悌)를 중시조로 삼고, 그뒤 김세순(金世珣)을 1세조로 삼는 파와 김조(金釣)를 1세조로 삼는 파로 나뉘어 있다.

 

고령가야국이 함창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함창을 본관으로 삼았고, 함창은 고려 광종 때 함녕으로 고쳐 불렀기 때문에 함녕김씨라고도 한다. 인구수 2만 6318(2000;함창), 4519(2000;함녕).

 

함평(咸平)김씨~희천(熙川)김씨

 

함평(咸平)김씨

시조는 김구정(金九鼎)으로 상산(商山)김씨 시조 김수(金需)의 22세손이며 함평군(咸平君)에 봉해졌다. 그뒤 후손들이 상산에서 갈라져나와 그를 시조로 함평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한편 대안군 김은열의 12세손 김계명(金啓明), 또는 신라 신무왕의 후손 김취실(金就實), 또는 마의태자 김일의 후손을 시조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1612(2000).

 

함흥(咸興)김씨

시조는 김렴(金濂)으로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며 조선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경승부윤(敬承府尹)을 지냈다. 문헌이 없어 세계·본관의 유래를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함흥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후손 김기지(金驥趾)는 연산군 때 군수·사정(司正)을 지냈다. 인구수 187(2000).

 

합천(陜川)김씨

시조는 김현덕(金玄德)으로 신라 종성이라 전하나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대사간을 지냈으며, 그뒤 후손들이 합천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1508(2000).

 

해남(海南)김씨

시조는 김인(金忍)으로 신라 경순왕의 셋째 아들 김명종의 19세손이라 전한다. 《해남김씨족보》에 의하면 해남김씨는 옛 당악(棠岳;해남의 옛이름)김씨로 김인을 시조로 한다고 했고, 《신라김씨 2천년사》에 의하면 김인의 3대조 김남보(金南寶)가 난을 피해 해남에 내려가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당악으로 삼았다고 한다. 인구수 2455(2000).

 

해주(海州)김씨

시조는 김우한(金佑漢)으로 신라 경순왕의 손자 김운발(金雲發)의 25세손이며, 김상의(金尙義)의 둘째 아들. 해주김씨는 현재 3개의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고려말의 김사렴(金士廉)을 원조(遠祖)로 하고 김문동(金文東)을 중조로 하는 파, 김알지를 시조로 하며 경순왕의 19세손 김안국(金安國)을 중조로 하는 파, 김안국의 5세손 김맹(金孟)을 증조로 하는 파가 있다. 인구수 5864(2000).

 

해평(海平)김씨

시조는 김훤술(金萱述)로,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해평을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고 달리 상고할 문헌도 없으므로 고려 때 홍호시전직(弘虎寺殿直)을 지낸 김태(金兌)를 기세조(起世祖)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4643(2000).

 

해풍(海豊)김씨

시조는 김숭선(金崇善)으로 고려 때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예부상서에 이르고 해평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해풍으로 삼게 되었다. 분파로 덕수(德水)김씨·정주(貞州)김씨가 있다. 인구수 3508(2000;덕수), 2384(2000;정주), 9293(2000;해풍).

 

현풍(玄風)김씨

시조는 김수(金修)로 신라 경순왕의 셋째 아들 영분공 김명종의 후손인 김천서(金天瑞)의 현손으로 조선 때 족친위장(族親衛將)을 지냈다. 인구수 595(2000).

 

홍주(洪州)김씨

시조는 김인의(金仁義)로 신라 경순왕의 여섯째 아들 김건(金建)의 후손이다. 홍주의 사족(士族)으로 덕천(德川)군수로 부임할 때 후손들이 따라가서 용천(龍川)과 철산(鐵山)에 정착, 그를 시조로 조상의 세거지인 홍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의 후손 김순(金珣)을 1세조로 하는 태천파(泰川派)와 계보를 알 수 없는 김일덕(金一德)·김대유(金大猷) 등을 시조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인구수 885(2000).

 

화개(花開)김씨

시조는 김인황(金仁璜). 고려원종 때 화개위(花開尉)가 되었고, 시호를 문희(文僖)라 하였다. 그런데 화개김씨 상계(上系)의 세계가 실전되었기 때문에 《병자보(丙子譜)》를 간행할 때 하동계(河東系)의 가승(家乘)과 진양계(晉陽系)의 가승을 참작하여 진양(晉州의 옛이름)김씨라 하였다.

 

그러나 그뒤 김택영(金澤榮)의 발의로 득관시조 김인황이 진양후(晉陽侯)에 봉작되었다는 사실은 잘못임이 밝혀져 《을묘보(乙卯譜)》 이후 화개를 본관으로 삼고 있다.

 

화순(和順)김씨

시조는 김익구(金益九)로 신라 영분공 김명종의 후손인 김두문(金斗文)의 아들이다. 조선 숙종 때 문과에 급제, 결성(結城)현감·춘추관기사관을 지냈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화순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1570(2000).

 

황주(黃州)김씨

시조는 김정순(金正純)으로 1107년(고려 예종 2) 윤관(尹瓘)과 함께 여진정벌에 공을 세우고, 1135년(인종 13)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했다. 인구수 758(2000).

 

흥덕(興德)김씨

시조는 김이점(金以漸)으로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며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홍덕은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에 있는 지명이다. 인구수 110(2000).

 

흥해(興海)김씨

시조는 김을락(金乙輅)으로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다. 문헌이 없어 자세한 세계를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흥해를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인구수 307(2000).

 

희천(熙川)김씨

시조는 김우(金佑)로 신라 경순왕의 셋째 아들이다. 고려초에 문하시중으로 공을 세워 온양군(溫陽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온양을 본관으로 삼았다가 1400년(조선 정종 2) 김우의 13세손 김우(金宇)가 병조판서로 공을 세워 희천군(熙川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삼고 본관을 희천으로 바꾸었다. 인구수 2512(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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