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 성지는 무진박해(1868년) 때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당한 순교성지이다.

순교자들은 당시 여산군의 속읍지였던 고산, 금산, 진산 등에 숨어 살다가 잡혀 온  이들이다.

여산은 당시 사법권을 지닌 부사가 있었기 때문에 교우들이 붙잡혀 오면 여산에서 처형되었다.


[치명일기]에 기록된 순교자만도 25명에 이르며 그 외에도 이름을 알지 못한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다.

숲정이, 뒷말, 배다리, 장터, 기금터, 감옥터, 백지사터 (여산 칠순교지) 등 여산면 전체가 순교성지라 할 수 있다.

이곳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방법으로 신자들을 처형하였는데, 특히 참수형, 수장형, 백지사형 등은 유명하다.

순교자들은 박해의 모진 고난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지막 순교의 순간까지 목숨을 바쳐 신앙을 고백하였다.


여산 숲정이 성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고, 얼굴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사시킨 동헌에는 대원군의 척화비가 여전히 세워져 있다.

인근에 위치한 천호 성지에는 이곳에서 순교한 분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네비게이션을 따라 가다 보면 큰길가에 여산 숲정이 성지 간판이 보이고 지금은 숲이 아닌 들판에 조형물과 함께 순교성지가 조성되있다.








 야외제대가 있는 여산 순교성지 중앙광장 입구이다.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 중 17명이 고산 넓은바위 사람들이었다.

그 중 김성첨(토마스)는 조카 김명언을 비롯해 정규, 정언 등 3형제와 그 아들 등 3대에 걸치는 6명을 포함해 마을 사람 17명 전부가 자기가 전교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칼을 쓴 죄인들은 형장인 풀밭에 가서야 칼을 풀었고, 굶주림에 짐승처럼 풀을 뜯어 먹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성첨은 " 우리는 이때를 기다려 왔으니 천당 진복을  누리려 하는 사람이 이만한 괴로움도 이겨 내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으로 참아 받자."며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중앙광장 한가운데 세워진 피에타상이다. 그 뒤로 야외제대가 있다.















여산 성지 성당은 성지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있다.

낮으막한 언덕에 고딕 건축 양식의 붉은 벽돌집이 웅장하고 아름답다.

지금은 기존의 여산 성당을 이용하고 있지만 성지 기념 성당을 별도로 건축할 예정이다.





















순교자의 모후관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김성첨 토마스 기념관이다.


 




여산 성당 : 063)-838-8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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