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마지막 왕릉 홍유릉 1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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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이야기

조선왕릉, 마지막 왕릉 홍유릉 191224

노인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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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전화 : 홍유릉관리사무소 031)591-7043







홍유릉(사적 제207호)은 홍릉과 유릉을 합쳐 부르는 말로, 조선 말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의 위에 오른 고종과 순종의 능이다.

홍릉은 조선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최초의 황제인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합장능이고, 유릉은 조선 제27대 왕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과 첫번째 황후인 순명황후 민씨, 두번째 황후인 순정황후 윤씨의 삼합장능이다.







홍릉과 유릉은 기존의 조선왕릉 형식과 다르게 대한제국의 황제릉으로 조성되었다. 황제릉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 한 후 명나라 황제의 예를 참고하고, 기존 조선 왕릉의 예를 계승하여 조성한 능이다.

제향공간에 있던 정자각 대신 침전을 두었고, 침전 앞부터 홍살문까지 향로를 따라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모양의 석물을 배치하였다.







매표소를 거쳐 출입문을 들어서면 이정표가 있고 왼쪽으로 가면 홍릉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유릉이다.







홍릉(洪陵) (고종과 명성황후)


고종(高宗)(1852-1919, 왕재위 1863-1897, 황제재위 1897-1907)은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신정익황후의 명으로 익종(문조익황제)의 양자가 되어 왕위에 올랐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처음엔 신정익황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이후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운영하였다. 1873년(고종 10)부터 직접 정사를 돌보았으며, 조일수호조약,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등 대외개방 정책을 펼쳤다. 1897년(광무 1)에는 자주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로 정한 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의 압력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실패되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경술국치(1910)후 1919년에 세상을 떠났다. 고종의 장례일을 계기로 3.1운동이 일어났다.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는 민치록의 딸로 1866년(고종 3) 왕비가 되었다. 고종을 도와 조선의 외교정책에 영향력을 내세웠고, 1895년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는 정책에 위기를 느낀 일본에 의해 참변을 당했다(을미사변).  대한제국 선포 후 황후로 추존되었고 서울시 청량리에 홍릉이라는 능호로 안장되었다가 1919년 고종 승하 시 현재의 홍릉에 합장되었다.







홍릉으로 가는 길은 우람한 소나무와 전나무, 향나무가 어우러진 숲길이다.







능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커다란 연못(洪陵淵池)이 있다.  기존 조선 왕릉의 연못은 작고 천원지방(天圓地方)(연못은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이고 섬은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으로 되어있으나, 황제릉으로 조성된 홍릉은 연못과 가운데 섬이 모두 원형인 원지원도(圓池圓島)로 조성되어 있다.







금천교를 지나 왼쪽에 수라간이 마련되 있고, 규모가 큰 재실이 있다.











금천교를 지나 오른쪽 가면  금방 홍살문에 도착하게 된다.









지금은 공사중이라 낮은 가림막이 쳐져 있으나 기존의 조선왕릉과는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가운데 향로와 좌우에 어로가 설치된 참도와 판위가 있는 점은 기존 왕릉과 같다.







제향공간이 정자각 대신에 일자형의 커다란 침전이 설치되어 있다.






홍살문에서 침전까지 사이에 이전의 왕릉에선 능침 공간에 있던 문.무인석과 종전에 볼 수 없던 각종 동물석이 실물 크기로 좌우에 늘어서 있다.








침전에서 홍살문 방향으로 문인석과 무인석이 있다.

둘다 실물 크기의 석상인데, 문인석은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고 수염과 얼굴 표정까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그 다음은 동물상인데 당시 실물을 보지 못하고 상상으로 조각했는지 실물과 닮지 않은것 같은 동물석도 있다.


기린석






코끼리석






사자석






해태석






낙타석






마석 (석마는 한쪽에 두 마리로 좌우 네 마리이다)






침전


 제향을 모시는 건물로 제향공간의 중심적 건축물이다. 황제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대신 방형의 침전으로 격을 높였다고 한다.

참고로 황제릉의 양식은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침전으로 오르는 길은 좌우로만 되어있는 정자각과는 달리 정면과 좌 우, 삼면으로 되어있다.











침전의 오른쪽에 비각이 있다.

비문에는 '대한 고종태황제홍릉 명성태황후부좌'라고 새겨져 있다.

봉분 안에 고종이 오른쪽 명성황후가 왼쪽에 누워있다는 뜻이다.







침전 뒷면에 신이 능침공간으로 돌아가는 신도가 있고,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좌측에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예감과 우측에 산신에게 제사하는 산신석이 있다.








제정 또는 어정

제향에 필요한 물을 긷는 우물이다







능침공간에 진입이 금지되어 멀리 언덕에서 망원렌즈로 크로즈업 해보지만 시원하게 볼 수가 없고 개략적인 윤곽만 살펴본다.

합장된 하나의 능상을 곡장이 삼면을 둘러싸고 있고,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르고 있다. 혼유석과 그 앞에 장명등이 있으며 좌우로 망주석이 서있다.

기존의 왕릉에서 보호석으로 설치했던 문.무인석과 석마,석호,석양의 동물석은 침전 앞으로 옮겨 설치되어 여기에는 없다.







참도 오른쪽에 능지기의 근무처인 수복방이 있고, 그 건너편에 지당(강우시에 빗물을 모아 연지로 빼내는 작은 연못)이 있다.








홍릉 답사를 마치고 전나무 숲길을 걸어내려오면서 고종을 생각해 본다. 내가 역사교과서에서 배우고 각종 역사문헌에서 읽어 알고있는 고종은 아버지의 도포자락에 휘둘리고, 아내의 치맛자락에 휘말리는 줏대없고 용약한 임금이었다. 오늘 다시 그의 면모를 살펴보니, 그는 조선왕조 600년간 이어져 온 종주국 중국에 대한 속국의 자세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자주 독립국임을 천명하여 황제국임을 선포하였고, 국운이 다한 조선말기 쇄약한 국력과 일신의 영달만 꽤하는 친일파 신하들 소굴속에서도 헤이그 밀사 파견, 아관파천 등 일제의 마수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쳐온 결코 용열하지 않은, 단지 비운의 황제였음을 새삼 깨닫고 그의 명복을 빌어준다.






다음은 유릉으로 간다.






유릉(裕陵)  (순종과 순명황후. 순정황후)


순종(純宗)(1874-1926, 황제재위 1907-1910)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1907년에 황위에 올랐다. 연호를 융희(隆熙)로 정하고 일본에 의해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1910년 국권을 일본에 강탈당하여(경술국치) 이왕으로 강등되었다. 1926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장례일에 맞추어 6 .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순명황후(純明皇后)(1872-1904)는 민태호의 딸로 1882년(고종 19) 왕세자빈, 1891년(광무 1) 황태자비가 되었다. 1904년(광무 8) 순종이 황제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순종이 황위에 오르자 황후로 추존되었다.


순정황후(純貞皇后)(1894-1966)는 윤택영의 딸로 1907년(광무 10) 황태자비가 되었다가 순종이 황위에 오르자 황후가 되었다. 경술국치 후 일제강점기와 광복, 한국전쟁등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를 겪으며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다가 1966년에 세상을 떠났고, 조선왕릉의 마지막 안장자가 되었다.






유릉은 입구 가까이에 바로 재실이 있다.











재실이 끝나는 부분에 금천교와 유릉 설명 안내판이 있고 옆으로 홍살문이 보인다.










홍살문에서 침전에 이르는 참도와 좌우에 배치된 석물들은 홍릉과 똑 같은데 석마의 크기가 실물에 맞게 홍릉보다 조금 크다.













가까이서 자세히 뜯어보면 석물 개개의 조각은  홍릉보다 조잡해 보인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서양인의 얼굴에 가깝고 눈동자도 생략했다. 조각의 디테일이 홍릉의 석물보다 거칠다는 느낌이 든다.

순종의 장례 절차가 일본인 주관으로 국장 기일까지 단축해서 간단히 치러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침전에 오르는 길은 역시 정면과 좌우 삼면으로 되어있다.










침전의 뒷면에는 신도와 예감, 산신석이 있다.







다행히 능원의 옆 담장을 따라 능침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고 능침과 같은 높이에서 망원으로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이 유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순종과 순명황후, 순정황후의 삼합장릉이다. 삼합장릉이면서도 합장릉의 홍릉보다 봉분이 작아 보인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나는 알 수 없지만, 이 능 터는 후손이 끊길 악지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왕가의 번성을 원치 않는 일제와 친일 대신들이 야합하여 일부러 그런 자리를 택했다는 믿기지 않는 설까지 돈다고 한다.







장명등이다.

기왕의 조선왕릉의 장명등보다 훨씬 화려하다. 지붕의 모양이나 사면에 조각한 꽃모양이 황제릉 답다.






좌우의 망주석이다.

망주석에도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아래 위로 오르내리는 다람쥐의 모습이 선명하다.

왼쪽 망주석의 다람쥐는 내려오고 오른쪽 망주석의 다람쥐는 올라간다. 이것이 '비대칭의 미'라는 것이다.

비대칭의미는 또 있다. 좌우에 있는 수라간과 수복방의 모습이 다른 것도 비대칭의 미를 강조한 것이라 한다.









혼유석(魂遊石)이다. 석상이라고도 부른다.

민간의 묘에서는 제향 때 이곳에다 제물을 진설하지만, 왕릉에서는 정자각이나 침전에다 진설하고 제향을 지낸다.

그래서 이 혼유석은 이름 그대로 '혼령이 노니는 곳'이다.






병풍석과 난간석이다.

안쪽에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병풍석이고, 그 바깥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을 이어주는 돌이 난간석이다.

기왕의 조선왕릉보다 꽃무늬 등 조각이 다양하고 화려하다. 이것이 왕릉과 황제릉의 차이라 한다.






능침공간 답사를 마치고 아래로 내려오면 오른쪽에 비각이 있다.

비석에는 '대한 순종효황제유릉 순명효황후부좌 순정효황후부우'라 새겨져 있다.

왕릉은 왕이 오른쪽, 그 왼쪽에 순명왕후, 그리고 순명왕후 왼쪽에 순정왕후를 배치해야 하나

황제릉에서는 순종을 가운데 두고 순명황후를 왼쪽에, 순정황후를 오른쪽에 배치했다.

좀더 민주적이라고나 할까.







능지기의 근무 장소인 수복방이다. 여기서는 재실이 가까워서 그런지 수라간이 없다.






수라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어정이 있다. 특이 하게도 유릉에는 어정(우물)이 두 개가 있다.

들어오는 입구 금천교 주변에 있는 어정은 둘레석만 남아있는 폐쇄된 어정이다.







답사를 마치고 경내를 둘러본다.

여기까지가 600년을 이어 온 조선왕릉의 화려했던 문화 의식과 굴곡 많은 왕조의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 곳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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