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외산리 하연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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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외산리 하연 유적지

金 容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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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3월22일 일요일

하연(河演, 1376년 ~ 1453년)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진양(晉陽).[1]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 또는 신희옹(新稀翁)이다 139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1431년에 대제학이 되고, 그 뒤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 좌참찬 등을 거쳐 1445년에 좌찬성이 되어 궤장(几杖)을 받았다. 우의정·좌의정을 지내고, 1449년황희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하연은 의정부에 들어간 이후, 약 20여 년 동안 원칙에 어긋남이 없이 공사간 법을 잘 지켜 조선왕조 500년의 역대 재상 중에서 유일하게도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청렴과 결백의 표상'이 된 인물이다. 1451년(문종 1)에 조선 문종이 대자암을 중수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뒤, 벼슬에서 물러나고 1453년 타계했다.[2][3] 이후 종묘 문종실에 배향되었다 하연(河演)은 1376년(고려 우왕 2년) 진주 여사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고려의 관리를 역임했는데, 증조부 하즙은 원나라 기황후의 남동생 기삼만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고, 할아버지 하윤원은 원주목사와 상주목사를 거쳐 대사헌을 지낼 당시 ‘그른 줄 알면서 잘못 판결하면 천벌을 받는다.[知非誤斷皇天降罰]’라는 여덟 글자를 집무실 벽에 걸어두고 민원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그의 아버지 이색, 정몽주, 길재 등과 교유했던 학자이자 문신이었지만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창건되자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고려 말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아들 하연이 1396년(태조 5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녹사에 제수된 이후, 하자종은 1407년(태종 7) 공조참의를 제수받아 공물(貢物) 운반 책임자로 50마필을 명나라로 운반하였으며, 이 때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고황후전(高皇后傳)》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후, 홍주목사·공안부윤·판청주목사 등을 지냈다. 세종은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1447년에 좌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左議政領經筵事)에 증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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