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 그림을 읽다 [12회~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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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그림을 읽다 [12회~22회]

구름에 달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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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그림을 읽다 [12회~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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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그림을 읽다』 [  1회~11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09 

『정여울, 그림을 읽다』 [12회~22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10




12. 일상의 아름다움을 표정에 담은 명화 

- 평범한 삶 속에 깃든 눈부신 영혼의 빛이여! 


시공을 뛰어넘어 옛사람들의 일상으로의 초대

… 희로애락 교차하는 보통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삶의 소중함 일깨워



그냥 스쳐 지나갔을 법한 평범한 일상이 화폭에 담기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찰나의 삶의 아름다움이 새삼 느껴진다. 조선시대 서당의 흔했을 풍경이지만 요모조모 뜯어보면 무수히 많은 스토리와 해학을 발견할 수 있다. 김홍도 작 <서당> / 사진제공·정여울




무도 꽃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 정말이다. 너무 작아서 그 진면목을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너무도 바쁘고, 사물을 제대로 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 조지아 오키프 그림 속에 나온 ‘인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나온 ‘시대’나 ‘일상’ 자체가 중요한 그림들이 있다.

 ‘누가’ 나오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그림들이다. 흔히 풍속화라 일컫는 그림들이기도 하다. 꼭 풍속화가 아니더라도,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이 시공간의 장벽을 뛰어넘어 나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 같은 정겨움을 느낀다.

특정 인물의 위대함이나 빛나는 성취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나 자신을 그 그림 속에 슬쩍 끼워 넣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친근함. 익숙하고 만만해 보이지만, 그 커다란 화폭 안에 그 시대 사람들의 집단적 미의식이나 빛나는 시대정신이 촌철살인의 필치로 다가와 ‘숨은 그림 찾기’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들. 내 마음속의 아름다운 풍속화들, 그 첫머리에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가 자리한다. 



#1. <서당>, 김홍도, 18세기

김홍도가 그린 <서당>은 조선시대의 서당 풍경을 재현함과 동시에, ‘배움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해보도록 하는 매우 철학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화면 가운데 아이는 훈장님께 회초리를 맞게 될 것을 생각하니 눈물부터 뚝뚝 떨어지지만, 훈장님의 얼굴은 사실 전혀 무섭지가 않다.

아이를 벌주기 위해 단단히 무장을 한 듯한 심각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얼굴 표정이 웃음을 간신히 참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학생이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을 때는 따끔하게 회초리를 들지만, 그 마음에는 학생에 대한 푸근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을 것 같다.


조선시대 서당에서는 어제 배운 것을 다음 날 훈장님 앞에서 달달 외워야 했는데, 그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벌을 받아야 했다. 이를 배송(背誦)이라 했다.

눈앞에 책을 들고 읊는 것이 아니라 책을 향해 등을 돌린 채 외우는 것이었기에 결코 쉽지 않은 공부법이지만 효과는 만점이었을 것이다. 이 배송의 시간을 거쳐야 배움은 진정한 ‘내 것’이 되는 것이었다.

안 보고도 척척 외우고, 낭송하고, 그 의미까지 풀어서 설명할 수 있을 때, 어제 배운 지식은 오늘 진정한 ‘내 것’으로 흡수되는 것이니. 아름다운 문장을 하나라도 외우기는커녕 그 문장이 어디 있었는지조차 잘 몰라서 인터넷을 뒤적이는 우리 현대인들과는 사뭇 다른 배움 풍경이다.


엄청난 분량의 지식을 ‘검색’해서 그때그때 ‘편집’하고 ‘가공’해 쓰는 현대인들과 달리, 옛 사람들은 한 권의 책에서 우주 전체의 의미를 쥐어짜내듯이, 읽고 또 읽고, 외우고 또 외워, 마침내 ‘책거리’라는 형태로 배움의 여정을 축제의 장으로 전환했다. 



언제 봐도 정겨운 일상과 풍속의 이미지




초승달이 비추는 자정쯤 된 야심한 밤에 밀회를 즐기는 두 사람의 모습이 비밀스러우면서도 애틋하다. 두 사람의 사연을 설명하는 단서가 없으니 상상은 오롯이 감상자의 몫이 된다. 신윤복 작 <월하정인> / 사진제공·정여울



어제 배운 글을 다 외우지 못해 울상이 된 이 아이는 이제 선생님께 종아리를 내어주어야 하기에 왼쪽 발목의 대님을 풀면서 훌쩍거리고 있는데, 친구들의 표정은 또 저마다 각양각색이다. 그중 몇몇은 ‘저 녀석 봐라. 그러니까 어제 공부 좀 열심히 할 것이지’ 하는 듯한 표정으로 키득거리고 있고, 어떤 녀석은 책을 앞에 두고 열심히 외우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듯하다.

친구가 울고 있어 안타까워하며 살짝 ‘답’을 알려주려는 포즈인 것 같기도 하다. 그 옆의 학동은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난 절대 회초리를 맞지 않을 거야’라는 결연한 자세로 책장을 넘기고 있다. 아마 웃고 있는 동무들은 무사히 배송(背誦)을 끝냈거나, 친구가 훌쩍거리는 모습을 보며 조금은 통쾌해 하고 있는 듯하다.

어린 나이에 장가를 들었는지 혼자 갓을 쓰고 의젓하게 앉아 있는 나이 든 학생도 있다. 저마다 다른 나이, 다른 배움의 동기로 모여 앉았지만, 배송을 통해 배움의 깊이를 더하고, 그를 통해 앎의 의지를 축제적으로 고양하는 배움터의 따스하고 유머러스한 분위기는 오늘날의 학교로 그대로 전염시키고 싶을 정도로 정겹고 친근하다. 



#2. <월하정인>, 신윤복, 18세기

이 그림에는 은밀함, 안타까움, 비밀스러움, 서글픔같은 온갖 ‘불가능한 사랑’의 뉘앙스가 담겨 있다. 이 아름다운 남녀는 왜 이토록 어두운 밤에 마치 도망치듯 남의 눈을 피해 만나는 걸까. 여인의 눈썹처럼 가느다란 달빛이 희미하게 비추는 담 모퉁이에서 두 남녀가 은밀하게 만나고 있다.

남자의 신발은 빨리 이 여인과 함께 어딘가로 달려가고 싶다는 듯 화면 바깥을 향해 곧 질주할 것만 같고, 여자의 신발은 그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과 이 비밀스러운 만남의 파장에 대한 두려움으로 갈팡질팡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진짜 속마음은 ‘그를 따라가고 싶다’일 것이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여인의 다소곳하면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듯한 표정을 통해 두 사람의 사이를 직감한다. 두 사람은 야음을 틈타 아슬아슬하게 만나야 할 정도로 비밀스러운 관계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무척이나 갈구한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하늘이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이 비밀 많은 커플을 살짝 엿보는 듯, 달빛은 교교히 두 연인을 비춘다. 선비 차림의 남자는 등불을 들고 ‘내가 가는 곳이 어디든 당신은 반드시 따라와야 하오’라고 말하는 듯한 확신 어린 표정을 보여주고 있고, 도포자락 속에 여인의 마음을 기쁘게 해줄 만한 어떤 달콤한 선물을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양반가의 자제로 보이는 남자는 집안 어른들의 감시의 눈길을 피해 나온 것 같고, 여인 역시 쉽지 않은 발걸음이었을 것이다. 여인의 치맛자락이 일부러 멋을 부린 듯 한껏 올라간 것으로 보아 양반가의 규수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추측일 뿐이다.

이 그림에 대한 가장 정확한 설명은 화가가 이미 화제(畵題)로 나타낸 바 있다. “달은 기울어 밤 깊은 삼경인데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지니(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우리가 아무리 알록달록한 상상력을 동원해 ‘이 그림 속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사이일 거야’, ‘두 남녀의 신분은 서로 달랐을 것이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을 거야’라는 식으로 추측해봐도, 두 사람의 사연은 결국 두 사람밖에 알지 못할 것이다.


비밀의 베일 뒤에 감추어진 사랑의 언약은 금방이라도 사그라져버릴 듯한 저 달빛만이 들었을 것이다. 이 애틋한 서정과 은근한 로맨스가 가득한 그림으로 인해 18세기 조선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골목길 풍경, 젊은 남녀가 나누는 사랑의 속살거림까지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하다. 



캔버스 바깥세상을 향한 웨이트리스의 고백




누군가에게 사교와 축제의 장소일 연회장이 웨이트리스에게는 그저 일을 마치고 한시바삐 자리를 뜨고픈 따분하고 고된 노동의 현장일 수 있다. 웨이트리스의 두 모습- 정면과 뒤-은 이 같은 공간의 아이러니를 함축하고 있다. 마네 작 <폴리 베르제르 술집> / 사진제공·정여울




간의 영혼, 특히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표현하는 것만이 나의 관심사다. 그것이 없다면 그림은 아무것도 아니다.━ 에두아르 마네 


#3. <폴리 베르제르 술집>, 두에아르 마네, 1882

오래전 이 그림을 영국의 코톨드 갤러리에서 처음 봤을 때, 나는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그림 속의 그녀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좀처럼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김새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녀의 눈빛이 너무 슬퍼 보여서, 게다가 그녀의 볼 위로 감미롭게 퍼진 홍조가 너무도 애처로워서, 그 비애감과 사랑스러움이 묘한 하모니를 이루며 슬픈 멜로디를 연주하는 듯했다.

그녀의 이름은 쉬종(Suzon)이었고, 실제로 마네가 자주 갔던 술집이자 카바레였던 폴리 베르제르의 여급이었다고 한다.

이 그림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술집 안의 시끌벅적한 풍경은 거울에 비친 모습이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뒷모습과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앞모습은 기이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

거울에 비친 뒷모습의 그녀는 모자를 쓴 노신사와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면으로 보이는 그녀는 이 세상 아무 일에도 흥미가 없는 듯 공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자세도 다르다. 거울 속의 그녀는 다정하게 신사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지만,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앞모습은 그 무엇도 보고 있지 않은 듯하다.

아주 불편해 보일 정도로 꼿꼿한 직립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그녀의 상체는 거대한 술집의 풍경 속에서 유일한 ‘정적인 오브제’로 느껴진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떠들썩한 수다, 흥청망청하는 음주, 심지어 화면 왼쪽 상단에 힐끗 보이는 서커스 공연으로 정신이 없는데, 그녀의 시간만 멈춰져 있는 듯하다.

그녀는 마치 자기 앞에 놓인 수많은 술병처럼 꼿꼿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영혼은 이 자리에 있지 않은 듯하다. 그녀는 이 순간에 진심으로 집중할 수가 없다. 아무런 열정도, 아무런 흥분도 느낄 수 없다.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갖가지 주문을 해오고, 시답잖은 농담과 노골적인 추파를 던지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에 무관심할 것이다. 거울에 비친 술집의 요란한 풍경이 우리가 ‘실제로 보고 있는 모습’이라면 텅 빈 표정으로 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여급의 모습은 그녀가 차마 사람들에게 실제로 보여줄 수 없는 ‘진심의 민얼굴’이 아닐까.

그토록 슬픈 표정으로 마치 수족관에 갇힌 듯 갑갑해 보였던 그녀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만, 사실 내 영혼은 이 자리에 있지 않아요. 나는 이 자리에 진심으로 섞일 수가 없으니까요. 나는 그저 이 술병들처럼 이 자리에 어쩔 수 없이 붙박여 있을 뿐, 여기는 내가 진정으로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과연 이곳을 언제쯤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내 꿈은, 내 열정은 이곳에 있지 않은데, 나는 왜 여기에 이렇게 갇혀 사람들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다 들어주어야 할까요. 여기 있는 이 수많은 사물 중에서 어느 하나도 제 것이 없어요. 내가 입고 있는 이 화려한 옷조차도, 내 것이 아니지요. 내겐 어울리지 않는 것들, 내가 원하지 않는 모든 것이 내 숨통을 죄어오는 것만 같아요.’


나른한 일상 속의 눈부신 환상



농부들의 한가한 일상은 보는 이조차 한없이 늘어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이 그림은 강렬한 색채와 물결치듯 캔버스를 휘젓는 붓의 움직임으로 역동적인 분위기를 즐겨 표현했던 고흐의 다른 작품에서는 얻을 수 없는 느낌을 준다. 고흐 작 <낮잠> / 사진제공·정여울




“열린 창문을 통해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결코 닫힌 창을 바라보는 사람만큼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 한 자루 촛불로 밝혀진 창보다 더 그윽하고, 더 신비롭고, 더 풍요롭고, 더 컴컴하고, 더 눈부신 것은 없다. 태양 아래서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한 장의 유리창 뒤에서 일어나는 것만큼 흥미롭지 않다. 이 어둡거나 밝은 구멍 속에서, 생명이 살고, 생명이 꿈꾸고, 생명이 고뇌한다.

지붕들의 물결 저편에서, 나는, 벌써 주름살이 지고 가난하고, 항상 무엇엔가 엎드려 있는, 한 번도 외출을 하지 않는 중년 여인을 본다. 그 얼굴을 가지고, 그 옷을 가지고, 그 몸짓을 가지고, 거의 아무것도없이, 나는 이 여자의 이야기를, 아니 차라리 그녀의 전설을 꾸며내고는, 때때로 그것을 내 자신에게 들려주면서 눈물을 흘린다.”  (샤를 보들레르, ‘창문들’, <파리의 우울>, 황현산 옮김, 문학동네, 102쪽)

나는 그녀의 속삭임이 내가 거리에서 흔히 보는 사람들, 힘겨운 삶의 무게를 거대한 등짐처럼 지고 다니는 우리 시대 사람들의 ‘말하지 못한 이야기’와 다르지 않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에서 결코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의 쓸쓸하고 공허한 표정을 우리는 매일 도처에서 목격하지 않는가? 때로는 그 텅 빈 표정이 우리 자신의 얼굴이 되어 스스로를 날카롭게 찌르기도 한다.

보들레르는 “벌써 주름살이 지고 가난하고, 항상 무엇엔가 엎드려 있는, 한 번도 외출을 하지 않는 중년 여인”의 얼굴 속에서 그 화려한 파리의 물질문명이 구해내지 못한 인간의 쓸쓸한 영혼을 그려낸다. 에두아르 마네의 마지막 걸작인 이 작품은 당시 세계 패션의 중심이자 예술의 수도 파리를 향해 바치는 구슬픈 비가(悲歌)가 아니었을까.



#4. <낮잠>, 빈센트 반 고흐, 1890

‘평화’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내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는 바로 고흐의 <낮잠>이다. 인생에 1시간 이상 지속되는 평화가 얼마나 될까. 낮잠(La Siesta)이라는 이 그림의 제목처럼, 평화란 정말 힘든 노동 후에 잠깐 눈을 붙이는 ‘달콤한 시에스타’ 속에서나 가능한 찰나의 휴식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 그림에는 어떤 화려한 오브제도 등장하지 않지만, 바로 그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얼굴을 쉽게 이 그림 속 인물들에 가만히 대입해볼 수 있다. 눈부신 가을날, 어느 나라든, 어느 지방이든, 볏가리가 쌓여 있는 논밭이 있는 곳이라면, 이런 달콤한 오후의 나른한 오수(午睡)를 늘어지게 즐겨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이런 평화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열린 쾌락’은 아니다. 이 달콤한 낮잠이 가능하려면 땅과 하늘과 농작물과 주변의 온갖 동식물과의 힘겨운 사투가 있어야 한다.

밀레의 걸작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그려진 이 그림은 봄여름가을겨울 단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농부의 일상을 견뎌내는 사람들의 힘겨운 노동 속에서, 섬광처럼 잠깐 빛나는 눈부신 오후의 낮잠을 그려낸다. 열심히 몸을 움직여 일한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찬란한 오후의 평화가 이 그림 속에서는 숭고한 미학적 대상으로 승화된 것 아닐까.

이 그림에는 고흐 특유의 격정적인 붓터치가 극도로 자제되어 있다. 그림 자체에서 마치 거센 심장박동소리가 들리는 듯 거친 붓질은 고흐의 트레이드마크지만, 이 그림에서 고흐는 그런 격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있다. 평화와 격정은 쉽게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1860년대 프랑스 농가의 어느 평화로운 오후와 만나고, 같은 시기 우리나라의 어느 황금빛 벌판에서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한 후 새참을 즐기거나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는 여느 다정한 농가의 부부들을 떠올릴 수가 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이 사람들의 잠깐의 평화는 사실 농부의 일상적인 노동을 향해 숭고한 가치를 부여한 한 예술가의 빛나는 열정이 함께 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벌이는 곡예의 향연



서커스 단원들의 날렵한 동작과 여유로운 웃음 띤 표정에서 무대의 주인공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 묻어난다. 단순한 색채의 조합이 동화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쇠라 <서커스> / 사진제공·정여울




그림이란 감상하는 사람을 통하여 비로소 진정한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 파블로 피카소 



#5. <서커스>, 조르주 쇠라, 1891

너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어 ‘이 사람이 중년이 되어 좀 더 성숙하고, 무사히 노년기를 맞아 좀 더 오래오래 작품활동을 했다면, 얼마나 훌륭한 걸작이 나왔을까’하는 슬픈 상상을 하게 만드는 작가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특히 조르주 쇠라를 사랑한다.

쇠라는 일상의 아주 사소한 풍경 속에서 인간이 번쩍, 찬연하게 빛나는 한 순간을 포착해낼 줄 알았다. 그림을 가지고 소설을 써볼 수 있다면, 가장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그림들, 많은 사람의 천변만화한 사연들을 작은 화폭 속에 마치 ‘압축된 소우주’처럼 담아낼 줄 알았던 화가가 바로 조르주 쇠라였다.

안타깝게도 겨우 서른 두 살 나이에 디프테리아에 걸려 최후를 맞은 쇠라의 마지막 그림인 <서커스> 역시 런던의 코톨드 갤러리에서 만난 걸작이다.

 런던에서 오직 하루만 머물 수 있거나, 텔레비전이나 책을 통해 많이 접해본 너무 상투적인 런던의 풍경에 질린 분들이라면, 나는 코톨드 갤러리를 추천해드리고 싶다. 마네와 쇠라뿐 아니라 다양한 화가의 숨은 걸작들을 조용한 분위기에서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복잡한 대도시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서커스는 파리의 최첨단 문명의 상징이었고, 수많은 화가를 매혹시킨 주제였다. 쇠라뿐만 아니라 마네, 드가 등 수많은 화가가 서커스를 통해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실험하는 멋진 장면들을 담아냈다.

이 작품은 당시 파리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던 페르낭도 서커스를 그려낸 것이다.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같은 쇠라의 대표작에서는 많은 인물이 있지만 그 인물들의 모습은 다소 ‘정적(靜的)’인 느낌을 주었다면, <서커스>의 모든 인물은 역동적인 ‘움직임’ 속에 있다.

이 커다란 원형 극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언뜻 말 위에 올라탄 채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인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이 그림에는 또 하나의 중심인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화면 맨 밑에서 마치 이 모든 장면을 지휘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광대다.

꽈리열매처럼 선연한 붉은 빛 의상을 입고 있는 광대가 들고 있는 색테이프는 마치 리듬체조 선수가 돌리는 리본처럼 거대한 곡선을 그리며 화면 전체에 역동적인 리듬감을 부여하고 있다.


안장이 없는 말에 올라타서 자유로이 포즈를 취하는 능수능란한 곡예사, 그의 옆에서 가볍게 공중제비를 넘고 있는 광대는 마치 이 ‘붉은 옷의 광대’가 지휘하는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단원처럼 보인다.

이에 비해 객석에 앉아 있는 관중들의 모습은 다소 정적이다. 하지만 1등석, 2등석, 3등석으로 나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객석의 면면을 바라보면 그 하나하나의 표정들이 역동적으로 드러난다.

맨 앞의 1등석에 앉아 화려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은 화사한 옷차림에 비해 얼굴 표정은 다소 경직되어 보인다. 오히려 2, 3등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좀 더 자유롭고 쾌활해 보인다.

그들은 진심으로 이 서커스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옷차림도 저마다 개성이 있고, 표정도 하나하나 저마다 다른 흥미와 경이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맨 위층의 사람들은 서커스의 화려한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고 싶은지 조금이라도 몸을 무대 쪽으로 향하도록 팔을 아래쪽으로 늘어뜨리고 있다. 서커스의 화려한 몸짓을 제대로 보기 위해 햇빛을 향하는 식물처럼 몸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곰살궂게 다가온다. 



여가수가 뿜어내는 원색의 멜로디





클라이맥스를 향하는 듯한 여가수의 표정과 팔을 곧게 세운 몸짓에서 색채의 대비만큼 강렬한 멜로디가 감상자의 귓전을 때리는 듯하다. 드가 작 <장갑을 낀 여가수> / 사진제공·정여울




나는 이 그림에서 붉은 옷을 입은 광대가 보여주고 있는, 살짝 자부심 어린 표정이 정말 좋다. ‘이 시간 만은 내가 주인공이다, 이 시간만은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하는 지휘자다’라는 드높은 자긍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시간,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던 사람들이 이 시간만은 눈부신 존재로 비약할 수 있는 시간. 그것이 서커스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까. 




#6. <장갑을 낀 여가수>, 에드가 드가, 1878

드가의 그림과 조각 하면 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춤동작을 선보이는 여인들의 아름다운 몸짓이었다. 발레 공연 도중의 군무나 독무도 아름답지만, 춤 동작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며 조금씩 자신의 동작을 가다듬는 그림들, 아름다운 무대 의상을 입거나 벗는 모습, 목욕을 하거나 몸단장을 하는 모습 등을 즐겨 그렸던 드가는 ‘여성의 숨은 아름다움’ 혹은 ‘뜻밖의 아름다움’을 포착해내는 데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곤 했다.

그런데 <장갑을 낀 여가수>는 그런 드가의 다른 여성들과는 매우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드가의 초점이 여인들의 ‘몸’이 그려내는 부드러운 ‘윤곽선’에 있었다면, 이 그림은 여인의 ‘표정’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뒷모습이라든지 군무 중의 발레리나를 멀리서 포착해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고 ‘실루엣’만 보였던 다른 그림들과 달리, <장갑을 낀 여가수>는 깜짝 놀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여인의 ‘표정’을 클로즈업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을 항상 멀리서 관조하듯, 몰래 엿보는 것처럼 다소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던 드가가 <장갑을 낀 여가수>에서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투시하는 듯한 격정적인 시선으로 대상을 포착해내고 있다. 이 ‘당황스러운 가까움’은 오히려 멋진 결과를 낳았다.

‘소리를 빛으로 그려낸다면 이런 빛이 아닐까’싶을 정도로, 이 그림은 여가수가 뿜어내고 있을 아름다운 멜로디를 선명한 빛의 대조로 그려내고 있다. 여인의 목구멍 안쪽까지 속속들이 그려낼 기세로 드가의 붓은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의 뿌리, 목구멍 깊은 곳까지 시선을 드리우고 있다.

이 그림에서는 색채들이 배치되는 과정에서 유독 서로의 콘트라스트가 두드러진다. 여가수의 백묵처럼 새하얀 얼굴은 검은 장갑과 대조되어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으며, 벽면의 장식은 강렬한 녹색과 선명한 붉은색이 보색대비를 이루고 있다.

여인의 얼굴과 의상 안에서도 분명한 대조효과가 나타난다. 꽃잎처럼 붉은 입술은 백지처럼 하얀 얼굴과 대조를 이루고, 새하얀 바탕의 드레스는 검은색의 털 장식으로 더욱 커다란 대조효과를 자아낸다. 이 격렬한 색채들의 보색대비처럼, 그녀가 부르는 곡 또한 극적이고 역동적이지 않았을까.

털 장식으로 화려하게 흩날리는 그녀의 의상, 마치 동굴처럼 깊고 그윽하게 멀어지는 듯한 그녀의 두 눈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그녀가 존재하는 공간의 깊이를 이해하게 해준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가까워지다가, 때로는 조금씩 멀어지며 페이드아웃 되는 소리의 울림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멀리서 시작해 아주 가까이까지 울려 퍼지고, 아주 가까워지는 듯하다가도 조금씩 멀어져 간다. 빛의 농담으로 소리의 울림을 표현한 듯한 이 다이내믹한 그림은 드가의 또 다른 경지를 보여준다.

여가수는 찬란한 무대 불빛 속에서 검은 장갑을 낀 자신의 손을 높이 들어 올림으로써 자신의 목소리가 지향하는 아득한 높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팬더의 검은 눈두덩처럼 그늘진 여인의 눈초리는 깊은 산속의 동굴처럼 먼 곳에서 흘러나왔다가 먼 곳으로 사위어가는 소리의 생로병사를 아득히 상상하게 만든다.

여가수의 얼굴은 화면 전체를 압도하며 웅장한 울림을 이끌어내는 스피커처럼 소리를 이미지화한다. 역사책이나 위인전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 하지만 화가의 화폭에 담김으로써 진정 ‘특별한 존재’가 된 이들의 숨가쁜 일상이야말로 현대인에게 ‘기록되지 않은 평범한 삶의 소중함’을 따스하게 일깨워준다.

[출처] : 정여울 미술평론가,문학평론가 ; <정여울의 그림을 읽다>/ 월간중앙 2015.12.17.




13.삶과 죽음의 길 위에서 함께하는 것들 - 인류의 희로애락 품은 오브제를 찬미하다 


바니타스의 해골, 페넬로페의 물레, 고흐의 구두… 그림 속 ‘이야기’와 철학적 성찰 대변하는 상징물들






라틴어로 성서를 번역하고 있는 성 제롬(그림)의 책상 위에 놓인 해골은 삶과 죽음을 맞바꿀 정도로 치열했던 그의 열정을 대변한다. 그림 속 사물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상징하는 최고의 오브제로서 화가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내가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지지 말고, 내가 소유한 것 중에서 가장 은혜로운 것을 생각하라. 또한 나에게 그것들이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그것을 갈망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 감사히 여겨라. 그리고 어떤 이유로 그것을 불시에 잃어버리는 불행을 당하더라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도록 하라. - 아우렐리우스 



#1. 사물의 시선에 둘러싸인 인간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온갖 사물의 축복을 받으며 삶을 시작하고, 죽을 때도 온갖 사물의 배웅을 받으며 세상을 떠난다. 아기는 병원의 온갖 집기와 수술 도구는 물론 배내옷과 강보에 둘러싸여 탄생의 첫날을 맞이한다.


죽은 자는 깨끗한 수의에 감싸진 채 관에 넣어지고, 그가 가장 아끼던 애장품과 함께 관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문득 주변을 돌아본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조차도 수많은 사물의 시선에 둘러싸여 있다. 책상, 의자, 책들, 주전자, 머그컵, 컴퓨터, 스피커 등 익숙한 사물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우리는 사물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 때조차도, 사물들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진열대 위칸을 차지한 최첨단 지구의(儀)와 각종 측량도구에 비해 낡은 지구의와 류트, 성가집은 아래칸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다. 젊은 외교관과 사제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사물의 대조적 모습이 르네상스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듯하다


실내생활 시간이 늘어나면서 현대인은 더욱 많은 사물 속에 둘러싸여 살아가게 되었다. 그 사물들은 소유물이기도 하고 상품이기도 하며 도구이기도 하고 액세서리이기도 하다. 휴대전화나 자동차는 단순한 사물을 넘어 각자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상징이 되어가고 있다.

물건 때문에 너무 많은 시간과 자본을 저당 잡히는 현대인들은 사물을 소유함으로써 사물에 지배당한다. 환경, 분위기, 인테리어는 주변 사람들이 없을 때조차도 홀로 있는 인간을 지배한다.

인테리어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의 증가는 우리가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기보다는 ‘사물들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에 더욱 익숙해져가는 증거가 아닐까. 어느 때보다도 인간은 사물들과 친밀해졌고, 사물들에 대한 지식에 통달하게 되었다. 사물은 곧 인간의 마음을 반영하는 더욱 투명한 거울이 된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성 제롬>, 카라바조, 1605~6

화가들에게 사물은 최고의 오브제다. 자연처럼 변화무쌍하지 않고, 인간처럼 까다롭지 않다.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달라’고 부탁할 필요도 없고, 자연처럼 ‘제발 햇빛이 비쳐주길’ 바라지 않아도 된다. 사물은 인간이 변형하지 않는 한 굳게 제자리를 지킨다.

굳이 정물화라는 장르를 들지 않더라도, 사물은 화가를 끊임없이 매혹시키는 ‘친숙한 모델’이었다. 특히 바니타스(vanitas)는 화가들을 매혹시켜온 오랜 테마다. 라틴어로 공허함, 헛수고, 쓸데없음, 인생무상 등을 의미하는 바니타스는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무언가를 열망하는 인간의 탐욕스러움을 경계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바니타스의 대표적인 상징물은 해골, 촛불, 모래시계, 꽃, 비누방울, 조각상 등이다. 바니타스의 주제는 주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는 그림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자주 들리는 경구가 되었다.

언젠가는 죽을 것임을 기억하라는 것. 누구나 필멸의 존재임을 받아들이라는 것. 그것은 죽음을 빼면 인간의 존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로도 들린다. 그렇게 인간에게 죽음을 인식하게 해주는 사물들이 바로 바니타스다.

하지만 바니타스라는 주제가 늘 ‘허무’나 ‘덧없음’을 향하지는 않는다. 카라바조의 이 작품은 나에게 죽음의 한계와 싸우고 있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환기시켜주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사물은 열정을 일깨우는 철학적 도구



과학과 문명에 대한 17세기 네덜란드의 자신감이 남자가 소중한 듯 쓰다듬고 있는 천구의에 깃들어 있다. 사물은 무한을 꿈꿀 수 있게 만든다



사생결단을 하듯 맹렬한 열정으로 글을 쓰고 있는 이 사람은 성 제롬이다. 제롬이 불가타(Vulgate) 성서를 번역하는 장면으로 추정되는 그림이다. 그의 앞에 놓인 해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너는 반드시 임무를 끝마쳐야 해. 죽음이 네 심장을 조여오기 직전까지’라고 외치고 있는 듯하다.

모든 열정에는 이렇듯 뼈아픈 대가가 따른다. 열정을 바칠수록 우리 삶의 에너지는 소진된다. 열정의 눈부신 열매가 열릴 때마다 우리 삶이라는 나무의 나이테는 늘어나고, 열정의 그릇인 육체는 노쇠해진다. 하지만 이 그림 속의 제롬은 ‘늙고 병들었다’는 느낌이 아니라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도 오히려 젊은이보다 더욱 뜨거운 열정으로 자신의 일에 몰입하는 자의 아름다운 영혼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강퍅한 노인이 아니다. 주어진 시간 동안 어떻게든 자신의 사명을 다 끝내고 가기 위해 해골이라는 무서운 죽음의 상징을 매일 눈앞에 두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한순간이라도 헛되지 않게 보내려 노력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일분일초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문이지만, 바로 그 일분일초가 지상 위에 살아있음을, 아직 꿈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남아있음을 증언하는 절실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이렇듯 메멘토 모리를 증언하는 바니타스 정물들은 시간의 흐름, 필멸의 인간,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존재의 필연적인 가변성과 필멸성을 성찰하게 하는 철학의 도구이기도 하다.

성 제롬에게 이 사물들은 결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일종의 눈부신 계시인 것이다. 바니타스는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 아닐까. ‘너는 매우 특별한 임무를 하늘로부터 부여 받았으니 한순간도 허투루 낭비하지 말고, 오로지 너의 꿈을 향해 용맹정진하라.’

해골을 바로 옆에 두고, ‘내가 머지않아 죽게 되리라’는 것을 매 순간 느끼며 글을 쓰고 공부해도 모자란 인생. 나는 ‘바니타스’를 소재로 한 그림들을 볼 때마다 ‘죽음의 공포’보다 ‘삶의 소중함’을 더욱 뜨겁게 느낀다.

어쩌면 죽음의 공포 때문에 더욱 절실해지는 삶의 소중함일지라도, 카라바지오의 성 제롬처럼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탐구해도 모자랄 생의 진실을 아직 파고들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에 무한히 감사하게 된다. 



<대사들>, 한스 홀바인, 1533년

그림이 그려진 연도에 놀라는 순간이 있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같은 그림이 대표적이다. 10여 년 전 이 그림을 런던 내셔널갤러리에서 처음 봤을 때, 나는 그림이 그려진 연도나 그림 속 의상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다지 오래된 그림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다.

보존상태도 워낙 좋았기 때문에 더욱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 그림을 감상하다가 연도를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무려 500년 가까이 되는 엄청난 시간의 간극이 그 그림과 나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 그림 속의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가진 ‘가장 멋진 패’를 자랑스레 내어놓은 듯하다.

화려한 사물들로 한껏 공간을 치장하며, ‘인간 vs 인간’을 넘어 ‘권력 vs 권력’이 맞붙는 순간의 긴장감을 자아낸다. 중앙의 해골은 실제로 봤을 때 더욱 압도적인 무게감으로 공간을 장악한다. 해골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강렬한 시선과 각도로 한껏 자신의 존재감을 자랑하는 두 남자는 물론 관람객을 주시하고 있다.


이 작품 속의 해골은 마치 움직이는 판옵티콘(panopticon)처럼 작품 안쪽은 물론 작품 바깥의 전시공간까지 압도한다. 해골은 마치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삶의 가장 화려한 순간, 가장 위풍당당한 순간에도 죽음의 망령은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이 해골의 기운은 과연 섬뜩하지만, 마치 500년 전쯤에 만들어진 최첨단 SF 영화를 이제야 발굴한 듯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물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그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리라의 일부가 됐다. 오르페우스의 리라는 가장 숭고한 사랑을 노래하는 불멸의 오브제가 되어 감동을 준다




옷차림은 물론 표정에서도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왼쪽 인물은 1533년 영국에 파견된 프랑스 외교관 장드 당트빌, 오른쪽 인물은 프랑스 라보르의 주교 조르주 드 셀브라고 한다. 당트빌은 영국과 교황청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으로 파견되었지만,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고, 대신 그는 최고의 궁정화가 한스 홀바인에게 주문한 이 그림을 역사에 길이 남겼다.

 선반 위에 놓인 사물들은 전형적인 바니타스의 상징들도 있지만, 위쪽 선반 위에 놓인 사물들은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문명을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당시 과학문명의 첨단을 보여주는 지구의와 측량 도구 등은 ‘이성의 승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고, 아래쪽 선반에 놓인 사물들은 루터교의 성가집, 불화(不和)의 상징 류트 등으로서 상대적으로 ‘구시대의 유물’인 셈이다.

멋들어진 터키산 카페트 위에 마치 승리자의 전리품처럼 자랑스럽게 전시된 과학 도구들과 달리, 류트와 성가집 등은 상대적으로 낡고 고루해 보인다.

어쩌면 위칸의 사물들과 아래칸의 사물들의 대립은 신교와 구교의 대립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 두 사람의 나이는 각각 29세와 25세였다고 하니,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였을 것이다. 바로 이 순간 텅 빈 검은 눈으로 이 화려하지만 긴장감 넘치는 순간을 바라보고 있는 해골은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지금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 있는 너희들도 언젠가는 죽는다. 지금 너희들은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을 겪고 있는 듯하지만, 언젠가 이 갈등조차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2.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물들 



<천문학자>, 요하네스 얀 베르메르, 1668

어떤 사물은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마력을 뿜어낸다. 현미경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세한 세계를 향한 인간의 호기심을 확장했고, 천체 망원경은 우주에 직접 갈 수 없는 모든 사람에게 밤 하늘의 신비에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특히 지구본과 천구의는 인간에게 ‘과학의 눈’이라는 제3의 눈을 부여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특권을 제공한다. 베르메르의 <천문학자>에는 천구의를 돌리며 작은 방 안에서 무한한 우주를 사유하는 과학자의 열망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남자가 햇살을 등불 삼아 세심히 관찰하고 있는 천구의에는 선명하게 큰곰자리가 아로새겨져 있고, 책상 위에는 당시 최첨단의 천문관측기, 천문학과 지리학 관련 서적들이 도열하고 있다.

지금처럼 텔레비전과 인터넷으로 우주의 실사 이미지를 감상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지만, 17세기 네덜란드는 최첨단 문물의 각축지였고 ‘과학과 문명의 힘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치던 시대였다.

지구본도 아닌 천구의를 소유하는 것은 소수의 특권이었겠지만, 이 과학자의 표정과 몸짓에는 엘리트의 긍지가 아니라 학자의 겸허함이 넘쳐흐른다.

내 집에서 우주를 상상하는 쾌감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유한한 공간에서 무한한 우주를 상상하는 것, 한정된 시공간에서 한정 없는 시공간을 꿈꾸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고 인간의 무궁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유한한 조건에서 무한한 이상을 꿈꾸는 영혼의 몸짓을 멈추지 못한다. 이렇게 사물은 유한한 인간 존재가 무한을 꿈꾸게 만드는 마음의 미디어가 된다. 



인간의 이야기를 담는 타임캡슐




꽃과 온갖 선물을 들고 구애를 하는 남성들을 뒤로 한 채 옷감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는 가련한 페넬로페. 그에게 물레는 유혹을 견뎌내고 오디세우스에 대한 사랑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자 도피처다



<오르페우스>, 구스타프 모로, 1865

슬픈 사랑 이야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들 중 하나가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등일 것이다. 특히 오르페우스는 화가들이 가장 사랑하는 비극적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아는 사람들은 ‘리라’라는 악기를 볼 때마다 오르페우스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사물 속에 사람의 이야기가 완벽하게 물화(物化)된 것이다. 리라에는 이제 영원히 오르페우스의 숨결이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아무리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시간의 장벽 앞에서 그 빛과 온도를 잃어간다. 하지만 ‘이야기’의 그릇에 담긴 사랑의 기억은 불멸의 축복을 보장 받는다. 인간 사회가 유지되는 한, 언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이야기’라는 보이지 않는 캡슐에 담겨 그 사랑의 열기를 보존한다.

오르페우스의 사랑 이야기는 항상 그 첫머리 언저리에 서성일 것이다. 죽음의 한계조차 뛰어넘으려 했던 한 남자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는 리라라는 사물에 투영되어, 리라를 ‘사물 그 이상의 존재’로 격상시킨다.

죽음도 끊어낼 수 없는 사랑의 기억은 목이 잘린 채 리라에 합체되어 있는 오르페우스의 죽은 얼굴에 영원히 아로새겨져 있다. 분노하거나 절규하지 않고 오직 조용히 리라를 쓰다듬는 여인의 표정에는 그윽한 추모와 애도의 온기가 묻어난다.

저 리라를 켜는 것, 오르페우스의 혼이 담긴 저 리라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멜로디를 끌어내는 것이 음악가의 의무일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죽자 그녀를 구하기 위해 하데스로 내려가 그 아름다운 리라 연주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하데스 신을 감동시켜 아내를 되찾은 오르페우스. 그러나 그는 ‘뒤돌아보면 다시는 에우리디케를 볼 수 없다’는 신의 명령을 어기고 말아, 아내와 영영 헤어지고 만다.

오르페우스는 그 후에도 아내를 영영 잊지 못하고 슬픈 가락만 연주하여 여인들(메나드, 바커스교의 여신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오르페우스가 여인들의 구애를 끝끝내 거절하자 그녀들은 오르페우스를 죽여 머리를 잘라내고 말았다.

그림은 머리가 잘린 오르페우스를 발견한 여인이 오르페우스의 죽은 얼굴을 바라보며 깊은 성찰에 잠기는 모습을 담았다. 리라라는 사물에 투영된 오르페우스의 멈출 수 없는 사랑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어떤 사랑은 무한의 시간을 향해 뻗어나갈 수도 있음을 증언한다. 


#3. 유한한 사물로 무한한 마음을 표현하다 


<페넬로페와 구혼자들>, 윌리엄 워터하우스, 1912

어떤 사물은 오랫동안 깊이 숨겨놓은 마음을 표현한다. 단순한 사물을 뛰어넘어 뜨거운 상징이 되는 사물들의 공통점은 저마다 애틋한 사연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신데렐라의 구두, 모파상의 목걸이,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커플들의 결혼반지처럼. 그중에서도 <오디세이>의 물레만큼 사연 많은 사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영원한 ‘승리’와 ‘지혜’의 상징이 되었지만, 페넬로페는 끝없이 기다리는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치르고 온갖 모험을 겪으며 돌아오지 않던 20여 년의 시간 동안, 그녀의 미모와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는 남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페넬로페는 묘안을 짜낸다.

물레로 시아버지의 수의를 짜면서 ‘이 옷을 다 만들면 당신들의 구혼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페넬로페는 낮에는 열심히 옷감을 직조하고, 밤이 되면 바지런히 열심히 짠 옷감의 실오라기를 풀어낸다. 그렇게 자신의 ‘남자를 선택하지 않을 권리’를 지켜낸다. 페넬로페를 견디게 한 것이 과연 오디세우스를 향한 사랑뿐이었을까?

그것은 ‘내 삶은 내가 지키고, 일구고, 가꾸어나간다’는 조용한 집념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20년의 세월, 아버지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아들을 키우며 혼자 살아갔던 페넬로페가 얼마나 많은 역경을 견뎌야 했을까. 이 그림의 물레는 그녀가 견뎌야 했던 고통과 인내의 세월을 증언해준다.

베틀 위에서 옷을 짓는 데 여념이 없는 페넬로페의 눈빛은 기다림의 슬픔으로 가득하다. 질끈 다문 입술로 실을 끊어내는 그녀의 모습에는 ‘저 구혼자들에게 내 마음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결의마저 느껴진다.

구혼자들은 때로는 뻔뻔하게, 때로는 달콤하게 페넬로페를 유혹하고, 그녀의 집에 쳐들어와 음식과 숙박을 해결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심지어 페넬로페를 괴롭히는 구혼자들과 페넬로페 집에서 일하는 시녀들이 간음을 저지르기도 했다.

머지않아 저 구혼자들은 돌아온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에게 가차없이 살해당할 운명이었다. 자신은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아름다운 요정 칼립소와 무려 7년이나 동거를 하고, 마녀 키르케의 유혹에도 빠졌으면서, 오디세우스는 옹졸하게도 아내의 정절을 의심한다.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에게 살해당한 아가멤논은 죽음 저편의 세계 하데스에서 오디세우스에게 충고한다. 아내에게는 비밀이나 약점을 알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오디세우스, 자네의 아내 페넬로페는 최고로 지혜로운 여인이니 결코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페넬로페의 물레는 그렇게 끝없는 기다림, 변치 않는 사랑, 그리고 배신하지 않는 마음을 대변하는 뜨거운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물레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사랑, 여성을 향한 일방적 노동 착취, 남녀 간의 사회적 불평등을 상징하는 도구로도 비친다.

“그녀(클뤼타임네스트라)가 결혼한 남편(아가멤논)에게 죽음을 안겨주며 수치스러운 짓을 생각해 낸 것처럼, 마음속으로 그런 짓들을 꾀하는 여인보다 더 무섭고 더 파렴치한 것은 달리 아무것도 없을 것이오. (…)

그러니 그대(오디세우스)도 앞으로 아내에게 너무 상냥하게 대하지 마시오. 그대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라도 아내에게 다 알려주지 말고 어떤 것은 말하되 어떤 것은 숨기도록 하시오. 그러나 오디세우스여! 그대는 아내의 손에 죽지 않을 것이오. 사려 깊은 페넬로페는 매우 지혜롭고 마음속으로 좋은 생각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오.”(호메로스, <오디세우스> 중에서) 



숭고한 삶의 투쟁의 증인



낡은 구두 한 켤레에서 노동자의 고단함과 농부의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사물은 한 인간의 일생을 담은 이야기보따리가 되기도 한다



<구두 한 켤레>, 빈센트 반 고흐, 1886

이 구두에는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담겨 있는 듯하다. 밤낮없이 자연의 변화와 싸우는 한 농부의 땀과 눈물이, 이 구두에 서려 있다. 구두는 화려하거나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 구두에 얽힌 농부의 사연과 마음이 더해져 고요하고 경건한 분위기마저 감도는 듯하다.

이 작품은 언뜻 구두라는 사물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구두를 자세히 관찰하면 할수록 우리는 ‘이 구두를 신은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마치 ‘오늘 하루도 정말 고생했다’고 속삭이는 듯한 이 구두를 신은 사람은 하루하루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의 노동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평범한 구두에서 한 사람의 지난한 일생의 여독(旅毒)을 포착해낸 화가의 감수성은 얼마나 따스한 것인가.

한 사람의 인생에 완전히 밀착되어 이렇게 그 사람의 인생을 지문처럼 아로새기고 있는 이 구두는 ‘상점에 전시된 구두’나 ‘공장에서 막 생산된 구두’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이 구두는 더 이상 상품이나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생을 함께해온 오랜 친구이자, 우리의 신체 중 가장 고된 일을 담당하는 ‘발’이라는 존재가 머물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삶의 흔적이자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담아내는 장소로서의 사물은 이렇게 겉모습을 뛰어넘어 그 안에 담겨 있는 시간과 이야기를 향해 우리를 이끌어준다. 사물을 넘어 상징으로 거듭나는 이 구두라는 존재는 고흐의 눈과 손과 마음을 통해 하나의 풍요로운 ‘메시지’로 거듭난다.

고흐의 구두에는 우리가 차마 지나칠 수 없는 하나의 얼굴이 달려 있는 듯하다. 이 ‘말하는 듯한’ 구두는 손을 내밀어 우리를 붙잡고, 눈물을 흘려 걸음을 멈추게 하는 듯하다.

이 구두의 주인은 물론 농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고흐 자신의 구두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구두가 우리로 하여금 ‘구두를 신은 사람의 인생’을 상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물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단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존재하는 순간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사물을 통해 우리는 상상한다.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를. 우리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우리가 언젠가는 함께할지도 모를 기적 같은 시간을. 

[출처] : 정여울 미술평론가,문학평론가 ; <정여울의 그림을 읽다>/ 월간중앙 2016.1.17.




14.그림 속 아이들 - 잃어버린 순수를 자극하다 - 아이를 향한 이중적 시선의 몽타주 


고대 이집트 벽화부터 피카소 그림까지 시대에 투영된 아동에 대한 인식

… 보호받아야 할 존재이거나 가능성을 억압당한 ‘작은 어른’으로 묘사





예술작품 속에서 아이들은 사랑을 듬뿍 받고 있거나, 헐벗고 굶주린 채 보호받지 못하는 식으로 묘사된다. 아이들에 대한 인식이 시대와 사회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치는 두 소녀의 모습에서는 프랑스 부르주아 가정의 완벽한 ‘스위트홈’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피아노치는 소녀들>, 오귀스트 르느와르



피터팬은 항상 모든 걸 망치는 어른들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나무 안으로 들어가 일부러 1초에 다섯 번씩 짧게 숨을 쉬었다. 네버랜드에서는 아이가 한 번 숨을 쉴 때마다 어른이 죽는다는 말이 있다. 복수심에 차오른 피터는 그렇게 빨리 숨을 쉼으로써 닥치는 대로 어른들을 죽였다. -제임스 메튜 베리, <피터팬> 중에서

#1. ‘어린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대

끝없이 보호받고, 한없이 소중하고, 세상에 하나뿐인 ‘내 아이’에 대한 관념은 언제 생겼을까. 역사학자 아리에스는 ‘어린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의 관념이라고 주장한다. 근대 이전의 아이들은 특별히 보호받거나, 세상에 유일한 존재로 사랑받거나, ‘아이이기 때문에’ 온갖 힘들고 어려운 일을 면제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어린이의 역사를 다룬 <아동의 탄생>이라는 걸작을 관통하는 하나의 명제는 ‘아동은 없었다!’는 것이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 아무리 먼 곳이라도 이사를 몇 번씩 하고, 아이의 유학을 위해 엄마와 아빠가 기꺼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따로 살아가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 이토록 소중하고 절대적인 ‘어린이’. 이런 어린이의 개념은 ‘모성애’라는 인공적인 개념의 탄생과 함께 창조되고 편집된 철저히 근대적인 발명의 산물이다.

아이는 그저 ‘크기만 작은 어른’이 아니라 ‘별도의 개성 있는 인격체’라는 자각, 아이가 ‘하나의 인격’을 가진 주체이자 인권을 가진 개별적 존재라는 생각 또한 근대의 산물이다.

물론 고대인이라고 해서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행복한 가정, 스위트홈의 이상을 위해 모든 자원을 집중해야 하는 전략적 투자의 대상으로서의 어린이가 아니었을 뿐, 고대인에게도 아이를 향한 사랑은 당연히 존재했다. 육아의 즐거움과 고통은 현대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마틴 멀(Martin Mull)의 말처럼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당신의 두뇌 속에 언제 우당탕 넘어질지 모르는 수많은 볼링핀을 심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이가 진정 무서운 것은 ‘아이를 돌보기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아이가 항상 어른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이들이 어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아이에게는 어른들의 명령보다 더 중요한 ‘자기만의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자신들은 얼마든지 자유와 욕망을 즐기면서 아이들에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아이들은 이 명령과 실천 사이의 간극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인류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어린이’에 대한 경계심으로 아무리 무장해봐도, 동서고금의 어떤 그림을 볼 때든지, 동서양의 온갖 아이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바로 아이들의 귀여움과 천진난만함이다.

아이들이 예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이들의 이목구비 때문이 아니라 단지 아이이기 때문에 사랑스럽고 귀여운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자기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눈은 어떻겠는가. 



시대를 초월하는 아이에 대한 사랑

<아쿠엔아텐과 네페르티티, 그리고 아이들>, 작자 미상, 기원전 1320년경

이집트의 여왕 네페르티티의 아이들은 마치 엄마아빠의 몸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놀이터인 듯 신나게 놀고 있다. 엄마 아빠의 몸은 때론 미끄럼틀처럼, 때로는 그네나 롤러코스터처럼 아이들에게 이 세상 모든 놀이기구를 대신해준다.


왼쪽의 아버지 아쿠엔아텐은 아이를 높이 들어올려 곧 입을 맞출 듯한 몸짓을 취하고 있고, 오른쪽의 어머니 네페르티티는 어깨 위에 한 아이를 올려두고 한 아이는 무릎에 올려놓은 채 세상을 다 가진 듯 흐뭇해하고 있다.

아이들의 신체 비례는 실제 모습과 맞지 않고 어른의 몸을 사이즈만 줄여놓은 듯하다. 수천 년이 지난 작품이지만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이들이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은 바로 이렇게 함께 웃음꽃을 피우며 즐겁게 노는 시간임을 증언하는 이 작품은 뭉클한 가족애를 느끼게 한다.

지상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네페르티티 부부에게도 뭐니뭐니해도 가장 행복한 시간은 이렇듯 아이들과의 소박한 놀이의 기쁨이 깃든 시간이 아니었을까?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의 2대 미인으로 알려진 네페르티티의 흉상에서는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냉혹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더니 이 그림 속에서는 완전히 무장해제된 듯 환한 미소로 아이들의 재롱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여왕에게나 수천 년 후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에게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아이들의 티없는 웃음소리를 들을 때가 아닐까. 



<사랑의 학교(에로스의 교육)>, 코레지오(안토니오 알레그리), 1525



1. 고대 이집트의 여왕 네페르티티와 그의 남편 아쿠엔아텐이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 / 2.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경건한 표정과 달리 아기 천사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종교화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아이들의 순수함이 묻어난다. <마돈나와 아기예수>, 필리포 리피



올림푸스의 12신 중에서 가장 말썽꾸러기인 두 남녀를 꼽으라면 아마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일 것이다. 헤르메스는 장사꾼의 신이기도 하지만 거짓말과 속임수의 제왕이기도 하고, 아프로디테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남자를 언제든 유혹할 수 있는 ‘사랑의 마술’로 걸핏하면 문제를 일으키는 트러블메이커였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두 사람은 세상 누구보다도 믿음직한 ‘어머니’와 ‘스승’처럼 보인다. 두 사람이 에로스의 자애로운 부모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그림에서든지 아름다운 여성, 매혹적이고 관능적인 여성으로 표현되곤 하던 아프로디테가 이 그림에서는 ‘어머니’로 묘사된다.

천사처럼 사랑스럽고 귀여운 에로스를 키우기 위해 그녀는 잠시 숨막히는 사랑의 게임을 멈춘 듯하다. 나뭇잎 하나하나, 에로스의 금빛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이 그림은 ‘아이’를 위해 합심한 두 걸출한 신의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증언해준다.


그들은 끈끈한 가족애로 뭉쳐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아이’를 위해 합심하고 단결하는 부모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그림은 마치 사랑은 이런 것, 가족애란 이런 것, 교육이란 이런 것이라고 그림이라는 몸 전체로 정의를 내리는 듯하다. 



#2.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아이들



그리스 신화 속 올림푸스에서 가장 말썽꾸러기로 꼽히는 헤르메스(오른쪽)와 아프로디테(왼쪽)가 갓 걸음마를 뗀 아기 앞에서 자애로운 부모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사랑의 학교>, 코레지오



<마돈나와 아기예수>, 필리포 리피, 1450~1465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어 ‘우피치의 마돈나’로도 알려진 이 그림은 이후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렸던 마돈나와 아기 예수의 그림에도 영향을 준 걸작이다. 굵직굵직한 붓질과 과감한 색채가 돋보이는 이 그림은 자신의 아이를 수줍은 듯 그윽하게 바라보는 마돈나의 구슬픈 눈길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아이들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아기 예수를 들어올리고 있다. 아이의 천진한 미소에는 아무런 걱정거리도 복잡한 생각거리도 없어 보인다.

고대 이집트의 벽화에서는 ‘아이들의 실제 신체 비율’이 아닌 어른을 전체적으로 크기만 축소한 듯한 비례의 아이가 많이 그려져 있는 반면, 르네상스 시대의 아이들은 실제 크기와 비율에 흡사하게 묘사되어 있다.

사랑스러운 표정과 멋진 의상으로 무장한 매혹적인 마돈나 곁에서 웃음 짓는 아이들은 그저 미소 그 자체로,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행복해 보인다. 아기 예수를 향해 기도하는 듯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마리아의 경건한 표정은 아기 예수를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들어올리고 있는 천사의 표정과 대조를 이룬다.

 성스럽고 성숙하며 거룩해 보이기까지 한 마돈나의 모습 때문에 아기 예수의 토실토실하고 앙증맞은 모습은 더욱 ‘아기다운’ 이미지로 거듭난다. 비운의 여주인공처럼 가련한 표정을 그윽하게 담고 있는 마돈나의 모습 때문에 아기 예수의 모습은 더욱 천진난만하게 보인다.

조금은 짓궂은 듯한, 도발적인 표정으로 관객 쪽을 바라보는 천사의 표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아직 사리분별을 하지 못할 나이로 보이는 천진난만한 아기 예수와는 달리, ‘세상을 뭔가 조금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장난기 어린 천사의 표정은 어린이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거룩하고 순수한 천사의 표정이라기보다는 뭔가 악동 같은 분위기,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자아내는 천사는 어른들로서는 통제 불가능한 어린이의 본능, 즉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욕망덩어리로서의 어린이를 보여주는 것 같다.

종교화에서 흔히 보이는 성스럽고 순수한 천사의 모습이 아니라, ‘실제 어린이에 근접한, 매우 사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천사의 모습은 ‘어린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인 대답처럼 보인다. 



<무지한 백성을 가르치다>, 안토니오 카노바, 1795 <배고픈 자를 먹이다>, 안토니오 카노바, 1795




1, 2 안토니오 카노바의 연작 <무지한 백성을 가르치다>(왼쪽)와 <배고픈 자를 먹이다>에 나타난 태어날 때부터 역할과 계급이 정해진 아이들의 모습은 삶의 선택지가 이미 정해진 인간의 고통스러운 운명을 성찰하게 만든다




조각가 카노바는 당시 아본디오 레조니코(Abbondio Rezzonico)를 위해 두 개의 연작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배고픈 자를 먹이다>와 <무지한 백성을 가르치다>라는 부조였다. 레조니코는 이 부조를 당시 하층민들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의 벽에 전시하여 백성의 모범으로 삼으려 했다.

이 작품은 당시의 교육적인 규범 혹은 지배적인 가치를 보여준다. 곱슬머리 소년은 ‘읽기’를 배우고 있으며, 소녀들은 실 잣는 법과 천 짜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교육이 현격히 달랐던 것이다. 연단에 올라가 있는 소년이 다소 높은 자리에서 ‘글을 읽어주는’ 듯한 위압적인 모습으로 보인다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로사리오 묵주를 들고 기도하고 있는 소녀는 간절히 무언가를 염원하는 듯 서글픈 모습을 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삶이 정해진 비참한 아이들

<무지한 백성을 가르치다>보다 더 가슴 아픈 작품은 동시에 작업된 일종의 연작, <배고픈 자를 먹이다>이다. 교실 안의 모습보다 더욱 가슴 아린 풍경이 펼쳐진다. 읽고 쓰는 법은 물론 실 잣는 법이나 천 짜는 법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 아이의 모습이다.

눈먼 아버지의 길잡이가 되어 하루하루 구걸하며 살아가야 하는 소년의 모습은 ‘배울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한, 방치된 아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카노바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작품을 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부조를 본 많은 사람은 분노하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부터 남녀 차별을 내면화할 뿐 아니라, 배울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한 버려진 아이들의 슬픔이 절절하게 각인된 이 부조는 천진하고 순수한 어린이가 아닌, 태어날 때부터 이미 삶의 선택지가 정해져 버리는 인간의 고통스런 운명을 성찰하게 만든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주사위놀이를 하는 아이들>, 1676

이 그림 속의 아이들은 방치되어 있다. 살뜰한 돌봄을 받는 아이들이 아니다. 옷은 아무렇게나 걸쳐 흘러내리고 있고, 아이들의 얼굴과 몸 곳곳에서는 땟국에 절어있는 흔적이 구석구석 엿보인다. 17세기의 빈민가로 보이는 이 공간에서 아이들은 필시 교육의 혜택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부모들도 이 아이들을 애지중지 키우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골목길에서 하루 종일 뛰놀아 온몸이 흙먼지투성이일지라도 부모들은 별로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살 길이 바쁘니까.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이 고단하고 쓸쓸했을 테니. 하지만 이 아이들은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본 아이들의 그림 중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보인다. 물론 화가가 아이들을 그리기 위해 어느 정도 연출을 했을 수는 있지만, 화가가 그리려 했던 ‘원래 아이들의 모습’을 이 그림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아이들은 그 누구의 감시나 감독도 받지 않고 온전히 자기들끼리 ‘놀이’에 열중할 때 가장 아이다워 보인다.

이 아이들에게는 변변한 장난감도, 멋진 놀이터도, 부모의 든든한 지원도 없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지극히 행복해 보인다. 결핍 속에서 오히려 충만한 아이들의 못 말리는 웃음소리가 그림 바깥까지 들려오는 듯하다.

“메리 아줌마, 어른이 되면 바람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하나요?”
“어쩔 수 없어. 인간의 삶이란 그런 거니까.” -P. I. 트래버스, <메리 포핀스> 중에서 



#3. ‘어린이’의 탄생-보호받고, 양육되고, 관리되는 아이들




헤진 신발과 누더기 같은 옷을 대충 걸친 채 주사위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들의 모습에는 방치된 아이들의 가련함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천진난만함이 배어 나온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주사위놀이를 하는 아이들>



<피아노치는 소녀들>, 오귀스트 르느와르, 1892

우리가 ‘스위트홈’이라고 부르는 행복한 가정의 전형은 근대 이후의 발명품이기도 하다. 르누아르가 묘사하고 있는 이 피아노치고 있는 소녀들은 바로 프랑스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볼 수 있는 ‘근심 없고, 행복하며, 안전하게 양육되고 있는’ 아이들의 전형이며, 스위트홈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곱게 빗은 채 오직 피아노 악보가 가리키는 대로만 따라서 연주를 하면 세상의 어떤 걱정거리도 침입하지 못할 것 같은 이 완벽한 평화. 이 달콤한 행복과 완벽한 평화를 제조하기 위해 이 아이들의 부모들은, 혹은 그 부모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을까.

저 하늘거리는 드레스와 영롱한 피아노 소리와 물결치는 금발의 평화를 갖고 싶어도 갖지 못했던 사람은 얼마나 많을까. 



<비둘기를 안은 아이>, 파블로 피카소, 1901



피카소는 아이가 새를 조심스럽게 안고 있는 신중함과 순수함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인상 깊고 대담한 필체마저 버린 듯하다


피카소가 그린 아이는 ‘순수란 무엇인가’를 꾸밈없이, 그러나 완벽하게 보여주는 예술의 모범답안처럼 보인다. 이 그림의 아름다움은 연약한 존재인 아이가 또 다른 연약한 존재를 살포시 껴안고 있음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를 자신이 기꺼이 보살피겠다는 듯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소녀. 이 그림이 아직 영국에 있었을 때 처음 발견하고 ‘이게 정말 피카소 작품이야?’하며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내가 알고 있는 피카소의 대담하고 확신에 넘치는 필치가 아니라 아직 덜 무르익은, 그러나 이미 충분히 무르익은 또 하나의 새로운 피카소가 거기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입체파식 그림이 아니기도 했고 그림 자체에 따스하고 촉촉한 감수성이 넘쳐나기 때문이기도 했다.

피카소가 막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그려진 이 그림은 이 세상 무엇이라도 다 그릴 수 있다는 듯 순수한 자신감으로 충만한 피카소의 열정을 뿜어낸다. 이 그림은 마치 ‘어린이란 이런 것, 순수란 이런 것, 아직 한 번도 때묻지 않은 천사 같은 마음이란 이런 것’이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눈 먼 엄마>, 에곤 실레, 1914




아기의 얼굴에 눈, 코, 입을 그리지 않아 섬뜩한 기운마저 풍기는 에곤 실레의 이 그림은 자세히 보면 오히려 눈이 멀어 아기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어미의 슬픔을 대변한다




이 그림은 보는 사람의 심장을 아프게 찌른다. 결코 어여쁘거나 귀엽다고 할 수 없는 아기, 언제 가난과 위험에 휩쓸려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모를 백척간두에 선 아기가 있다. 유난히 아픈 사람, 신체가 불편한 사람, 그것도 어린 소년이나 소녀의 아픈 몸이나 뒤틀린 몸에 관심을 가졌던 에곤 실레의 그림에는 뭔가 불편한 광기가 서려 있다.

웬만하면 세상을 ‘주어진 것보다 더 아름답게 보려는’ 사람들의 의식적인 노력을 배반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때로는 끔찍하더라도 그 끔찍함을 있는 그대로’ 그리겠다는 다부진 결의 같은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귀여운 아이, 어여쁜 아이,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관념에 갇혀 있는 것은 ‘어린이의 실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어린이의 실체를 본다는 것이 너무 아프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어린이란 자고로 귀여운 것’이라는 통념 속에 실제 어린이의 울퉁불퉁한 모습, 예측 불가능한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거나 ‘왜곡’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그림에는 어떤 선의의 거짓말로도 포장되지 않은 아기, 어떤 선량한 의도로도 왜곡되지 않은 생생한 실제로서의 아이가 꿈틀거린다. 아기는 아직 인격이 있는 주체라기보다는 ‘언제 다치거나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생명’으로 보인다. 눈먼 엄마의 등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이 아기를 기다리고 있는 삶은 얼마나 혹독한 것일까?

하지만 아기의 탄생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이 아기의 안쓰러운 현실이 한때 우리 모두의 최초의 모습이기도 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아무런 준비도 없는 채로, 그저 무방비상태로 이 세상에 던져진 아기. 그것은 최초의 생명이 지닌 원시적인 모습이며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현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를 결정할 수도 없었으며, 남녀의 구분도, 조국도, 사는 장소도, 자기 몸의 건강이나 얼굴 생김새도 선택하지 못한 채, 그저 아무런 준비 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졌다. 자신의 눈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저 어린 핏덩이를 길러내야 하는 눈 먼 어미의 심정도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의 본원적인 공포일 것이다.

에곤 실레는 눈 먼 엄마와 아기를 그렸지만 이 작품은 눈이 멀쩡한 모든 엄마까지도, 눈 먼 어미를 두지 않은 모든 아기에게도 해당되는 ‘생명의 본질’에 육박한다. 자식을 둔 부모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어른이 돌봐야 할 아이들, 우리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아이들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순수한 욕망의 충족과 무궁한 잠재력의 현실화

사랑스러우면서도 변덕스럽고, 천진난만하면서도 도발적인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른들보다 더 적나라하게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는 것은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른들의 욕망은 사회화되어 있고, 제도와 관습에 의해 강력히 규제되어 있다.

아무리 야단쳐도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들의 ‘아이다움’은 자신의 욕망에 철저히 집중하는 인간의 고도의 자기중심성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더 많은 욕망’에 부합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서서히 바꾼 어른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아직 욕구 자체가 단순하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몇 가지 것’ 이외에는 놀라울 정도로 욕심이 없는 천진함을 발견할 수도 있다.


철없이 고집을 피우다가도 어느 순간 천사처럼 해맑은 미소로 어른들을 위로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인간의 욕망과 감정이야말로 영원히 예측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층 굳히게 만든다.

아이들을 그린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꿈꾼다.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 아이들이 더 많이 자유롭게 뛰어 놀 수 있는 세상이 진정 행복한 세상임을 알기에. 아이들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꿈을 꾸게 하고, 어른들이 물려줄 세상을 반성하고 성찰하게 하고, ‘내가 누릴 수는 없지만, 미래의 아이들은 누릴 수 있는 행복’의 가치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아이들을 그린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이 세상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항상 내 아이가 원하는 것들은 뭐든 들어줘야 한다’, ‘아이가 결코 결핍에 시달려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부모를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램프의 요정처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 속에서 아이들은 오히려 ‘결핍’이라는 것 자체에 결핍되어 있다. 결핍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은 결핍의 가치도 모르게 된다. 부모는 ‘내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 나를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내도 언제든 내게 다시 돌아오는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까.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이 안에 있는 가장 멋진 잠재력을 꺼내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기 어려운 존재를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때로는 그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자기 자신일 때도 있다. 언젠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너무 힘든 순간이 올지라도,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는 어른의 손길이 더욱 절실한 요즘이다.

[출처] : 정여울 미술평론가,문학평론가 ; <정여울의 그림을 읽다>/ 월간중앙 2016. 2.17.




15.얼굴 - 가장 많은 이야기가 피어 오르는 장소  -삶의 모든 이야기가 피어나는 원천 


일상의 눈부신 아름다움부터 비참한 순간까지 얼굴로 표현

… 초현실주의 작품들도 얼굴은 가장 사실적인 현실 반영해



반복되는 일상의 한 장면이 때론 인생의 가장 장엄한 순간의 기록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그저 늘 했던 대로 우유를 따르는 것뿐인 이 그림 속 여인의 표정에는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행동을 하는 듯한 진지함과 기품이 서려 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우유를 따르는 여인>



얼굴은 우리 몸 중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외부로 방출하는 기관이다. 사람들은 안색을 통해 그 사람의 건강이나 기분 상태를 포착하려 하고, 표정을 통해 그 사람과 교감하려 한다. 관상학은 얼굴생김새를 통해 그의 길흉화복을 점치고 미래를 예측하기도 한다. 얼굴에는 그만큼 인생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압축되어 있다.

상대의 눈빛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분석하고 예측한다. 눈동자의 상태와 빛깔, 모양을 분석해 건강 상태를 분석하는 홍채의학이 있을 정도로, 얼굴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정보가 잠재돼 있다. 인물화를 바라보며 느끼는 것은 바로 ‘타인의 삶’에 대한 모든 것이다. 얼굴은 이야기가 피어나는 장소이며, 삶의 증거가 서려 있는 장소다. 



#1. 무언가에 집중하는 얼굴

요하네스 베르메르, <우유를 따르는 여인>, 1658년경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대상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는 인간의 얼굴이야말로,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이 그림은 우유를 따르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여인의 무구한 몸짓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마치 이 순간만은 시간이 멈춘 듯한 숨막히는 현장감을 느끼게 만든다.

지극히 일상적인 몸짓 속에 담긴 인간의 아우라를 담아내는 데 탁월한 성취를 보여준 베르메르. 그는 우유를 따르는 여인을 통해 ‘일상 속의 소우주’를 그림 속에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여인은 그저 우유를 따르고 있을 뿐인데, 보는 사람은 생의 눈부신 신비를 느끼게 된다.


이 여인에게 그릇에 우유를 따르는 일은 매일 반복되는 단순노동이겠지만, 베르메르가 심혈을 기울여 담아낸 이 순간은 단 한 번뿐일 것이다.

이 그림에는 어떤 기품과 위엄이 서려 있다. 우유를 따르는 노동은 매우 평범하면서도 하찮은 일로 보이지만, 여인의 당당한 풍채와 경건한 표정은 마치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이런 평범한 노동이 인간의 삶을 지속시키는 위대한 힘이라고. 아무도 우유를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도 밥을 짓지 않는다면, 아무도 청소를 하지 않는다면, 인류 문명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삶을 지탱하는 소중한 힘은 이렇듯 단순한 노동 속에 존재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아름답게 형상화한 그림 속에서 나는 매번 생생한 감동을 느낀다. 



가장 찬란한 순간을 담은 얼굴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황홀한 표정으로 응시하는 나르키소스의 모습에서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갈증이 느껴진다. 자신을 둘러싼 검은색 죽음의 기운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나르키소스는 끝내 호수에 빠져 죽고 마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한다. 카라바지오, <나르키소스>



카라바지오, <나르키소스>, 1594~96

카라바지오의 나르키소스는 완벽한 도취의 순간을 그려낸다.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 이야기에는 또 다른 등장인물로 나르키소스를 짝사랑하는 에코가 등장하는데, 이 그림에는 오직 나르키소스만이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다.

에코가 아무리 나르키소스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봐도 나르키소스는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의 간절한 몸짓을 알아채지 못하는데, 카라바지오가 그린 나르키소스는 바로 나르키소스의 ‘주변상황’이 아닌 ‘내면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듯하다.

주변이 온통 암흑으로 처리됨으로써 나르키소스의 내면, 즉 ‘이 세상에 나와 이 호수 속의 인물밖에 없다’는 듯 완벽히 봉인된 세계가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한 나머지 그를 불러도 보고, 만져도 보려 하지만 끝내 가 닿지 못하자, 마침내 호수에 빠져 죽는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자기애’라는 것이 얼마나 강렬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지 증언해준다.

이 완벽한 도취의 시간은 어떤 비극적인 황홀경을 내포하고 있다. 내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아름다워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없는 황폐한 영혼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나’,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나’밖에 없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적막할까.

그런데 실제로 우리 삶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 내 문제에 지나치게 침잠해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주변에서 아무리 지혜로운 충고를 해줘도, 그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귀가 먹먹해지면서 마음속에서는 이런 소리만 들린다.

‘이건 당신 문제가 아니잖아. 이건 내 문제야. 아무도 해결하지 못해. 아무도 도울 수 없어.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지.’ 실제로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어도, 이런 심리상태에서는 타인의 따스한 손길이 보이지 않는다.

자기감정에 도취돼버린 것이다. 상대방을 미친 듯이 사랑했다가 자기가 꿈꾸던 만큼 사랑받지 못하면 ‘역시 이 세상에 날 사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하면서 지극히 폐쇄적인 자기애적 상태로 돌아오는 것도 나르시시즘의 한 형태다. 사랑을 하면서도 실은 자기 자신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을 가로막는 자기애적 봉인 상태다. 그리스 신화 속 나르키소스의 자기도취는 결국 ‘자기’라는 심연을 향해 스스로의 몸을 던짐으로써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김홍도, <월화취생>, 연도미상



바지와 소매를 걷어붙이고 생황을 연주하는 서생의 표정은 일상의 여유를 만끽하는 사람의 행복이 묻어난다. 술 한 사발에 취해 붓과 벼루를 물린 그의 모습은 홀로 고독을 즐기는 단원의 자화상 같다. 김홍도, <월화취생>



이 세상에 ‘너와 나만으로 충분하다’는 느낌을 주는 그림이 있다. 그 ‘너’는 꼭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악기 연주에 완전히 몰입하는 사람, 책에 흠뻑 빠져 있는 사람,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얼굴은 주변의 온갖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오직 대상과 나, 그 하나의 관계만으로 충만한 시간. 김홍도의 <월화취생> 또한 그런 완전한 충일감을 표현한다. 생황을 손 안에 가득 쥔 채 이 악기가 너무도 소중한 나머지 주변의 다른 것들은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그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 차 이 순간만은 현실의 어떤 고통도 다 잊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서당에서 공부하던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해학적인 모습이나 춤을 추는 사람들의 흥겨운 모습을 그린 김홍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그림이다. 흥성거리는 저잣거리의 모습이 아닌, 혼자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희열, 자신의 은밀한 기쁨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누리는 한 사람의 오롯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근대적인 의미의 ‘개인’은 아니겠지만 시문을 짓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혼자 있어도 결코 외롭거나 심심하지 않았던 옛 선비들의 완벽한 고독의 세계를 영롱하게 그려내었다. 이것은 단원 김홍도 자신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귀족이나 왕의 초상화를 주문받고 원치 않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 순간의 김홍도가 아닌, 풍속화를 그릴 때 민중의 희로애락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적극적인 모습의 김홍도가 아닌,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을 때의 나’를 그려낸 것이 아닐까.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 격식을 벗어 던진 옷차림에서 얼큰한 취기가 느껴진다.

두루마리 족자, 벼루, 먹, 붓, 그리고 생황.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다는 듯, 그림 속 인물은 완벽한 행복감에 몸을 떨고 있다. 늘 남들이 부탁한 그림만 그리다가 오직 자기 자신의 자화상 격의 그림을 그릴 때, 비로소 혼자가 된 자신과 만났을 김홍도의 외로움을 상상하게 된다.


‘월당의 생황소리 용울음보다 처절하네(月堂凄切勝龍吟)’라는 시가 ‘노래에 달린 날개’처럼 이 그림을 더욱 강렬한 흥취로 승화시키고 있다.



#2. 눈 감은 얼굴의 아름다움




잠든 소녀의 발그레한 얼굴과 나신을 은근히 드러내는 귤색 드레스가 피어 오르는 초여름의 열기를 뿜어낸다. 프레드릭 레이톤, <타오르는 6월>


사체가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언뜻 평화로워 보이지만, 눈을 감고 있기에 더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는 얼굴들이 있다. 눈을 감은 얼굴은 눈 뜬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기에 더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눈을 감은 그 얼굴 속에, 그들의 감은 두 눈 안에,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세계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잠든 사람의 머릿속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가 꿈을 꾸고 있다면, 그 꿈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눈 감은 얼굴에는 눈을 뜬 얼굴보다 훨씬 ‘적은 정보’가 보이지만, 눈을 뜬 얼굴보다 훨씬 ‘많은 비밀’이 감춰진다. 



프레드릭 레이톤, <타오르는 6월>, 1895

우리는 잠든 소녀의 얼굴을 통해 그녀의 ‘보이는 얼굴’ 너머 ‘그녀의 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물의 요정 혹은 잠든 님프를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굳이 그런 신화적 맥락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충분히 경이롭고 신비스럽다.

너무 깊이 잠들어 혹시 죽은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도, 그녀의 생기 넘치는 두 뺨과 상아빛 팔을 보고 안심하게 된다. 매우 독특한 자세로 잠들어 있는 이 소녀의 모습은 화가의 고심과 모델의 고생을 동시에 상상해보게 만든다.

‘과연 저 자세로 깊이, 자연스럽게 잠들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과 동시에,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오른쪽 팔의 각도를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그리려면 엄청난 고민이 필요했을 것이다. 프레드릭 레이톤은 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여러 장의 스케치를 그렸는데, 남아 있는 스케치 중 네 개는 누드였고 한 개는 옷을 입은 것이었다고 한다.

누드가 아닌 ‘옷을 입은 여인’의 잠든 모습을 선택한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누드였다면 이 그림은 ‘잠든 여인의 신비’를 일깨우는 깊은 성찰로 우리를 이끌기 전에 우선 아름다운 누드화라는 점이 부각되었을 것이기에. 투명하게 비치는 것이 아니라 어슴푸레하게 여인의 몸을 드러내면서도 감추는 다홍빛 드레스는 ‘타오르는 6월’이라는 이 그림의 제목처럼 단지 잠든 소녀의 모습이 아니라 이제 막 싱그럽게 피어 오르는 여름햇살의 열기를 상상하게 만든다.

 잠든 소녀를 비추는 햇살은 인간에게 잠이야말로 최고의 축복이라는 듯 그녀를 가장 아름다운 각도로 비춰주고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 <여인의 세 시기>, 1905 한스 발둥 그린, <여인의 세 시기와 죽음>, 1510




가장 순수한 표정의 아이와 한껏 물오른 아름다움에 도취된 표정의 젊은 여인의 곁에서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늙은 여인, 그리고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우려는 듯 모래시계를 들고 선 반백골의 노파. 아동-청년-노년의 세 시기를 한곳에 담아 감추고 싶은 내면의 타자를 끄집어낸다. 구스타프 클림트, <여인의 세 시기>(위)와 한스 발둥 그린, <여인의 세 시기와 죽음>




보통 그림은 화면 전체의 이미지로 알려지게 마련인데 이 그림은 부분만 편집되어 인터넷이나 기념품으로 유통되는 경우가 많다. 이 그림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엄마와 아이’를 그린 그림들을 찾던 중, 클림트의 아름다운 작품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여인의 모습만 깔끔하게 오려진 이미지들이 인터넷을 떠돌고 있었는데, 나는 뭔가 이상하다 싶어 그림의 원본을 찾아보니 놀랍게도 ‘여인의 세 시기’라는 제목의 작품 전모가 드러났다. 잘려진 그림의 전모는 한스 발둥 그린이 그린 비슷한 제목의 그림 <여인의 세 시기와 죽음>과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어린 시절, 젊은 시절, 그리고 노년기의 여성이 한 화면에 동시에 등장하는 이 그림은 일종의 알레고리로서 ‘여인의 삶과 죽음’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었다.

그러니까 본래 <여인의 세 시기>라는 작품은 엄마, 아이, 할머니를 그린 것이 아니라 ‘여성의 삶에서 아동기, 청년기, 노년기’를 그린 것이다. 사람들은 왜 쭈글쭈글한 노년기의 이미지는 쏙 빼고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두 시기’만을 편집하여 ‘클림트가 그린 엄마와 아이’ 그림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노년기는 말 그대로 ‘편집하고 싶은 우리 안의 타자’가 아닐까. 분명 우리 자신의 모습이지만, 지워버리고 싶은 모습. 분명 우리 자신의 일부이지만, 망각해버리고 싶은 존재의 비밀. 그것이 노년기를 아예 삭제해버린 채 이 그림을 유통시키고 있는 사람들의 무의식일지도 모른다. 



감추고 싶은 인간 내면의 ‘타자’

한스 발둥 그린의 작품에서는 피골이 상접하여 해골에 가까운 유령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노년기의 여성이 마치 젊디 젊은 아름다운 여인에게 ‘너도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야’라고 협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면, 클림트의 작품에서 노년기의 여성은 아예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잠잘 때조차도 행복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의 두 여성이 ‘얼굴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과 달리, ‘노년기’의 여성은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으로라도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림’으로써 자신을 표현한다.


한 화면에 동시에 표현된 ‘여인의 세 시기’는 엄마와 딸,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거쳐가야만 하는 ‘인생의 세 시기’인 것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민중을 위해 순교한 듯 장엄한 얼굴과 죽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고 손에 쥔 펜과 편지. 이 모든 것은 프랑스대혁명을 완성한 위대한 혁명가 마라를 위한 미장센이다. 자크 우리 다비드, <마라의 죽음>




눈을 감은 모습 중 가장 극적인 모습은 바로 죽은 자의 얼굴일 것이다. 인간은 ‘데드 마스크(dead mask)’를 뜨는 유일한 생물종이다. 죽은 자의 얼굴, 영원한 잠에 빠져든 듯한 얼굴은 그 사람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뿐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남은 삶을 성찰하게 만드는 최후의 철학적 대상이 아닐까.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은 마치 평화롭게 잠든 듯이 죽어버린 마라의 얼굴을 아름다운 화폭에 담음으로써 혁명가의 핏빛 희생을 위대한 영웅적 최후로 승화시켰다. 실제 마라의 삶과 떨어뜨려 놓고 보더라도, 이 그림은 충분히 숭고하고 비극적인 느낌을 준다.

아직 아무 이야기도 담기지 않은 하얀 도화지 같은 얼굴이 ‘갓난아기의 잠든 얼굴’이라면 세상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얼굴 속에 담긴 듯한 얼굴, 모든 사연이 응축된 얼굴은 바로 ‘죽은 자의 얼굴’일 것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자코뱅당의 지도자이자 ‘인민의 친구’임을 자처한 열혈전사 마라는 어처구니없게도 25세의 시골처녀에게 자기 집 욕실에서 칼에 찔려 사망한다.

마라는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듯 순결한 얼굴로 죽음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다. 25세의 처녀 샤를로트는 이런 메모를 적어 들고 마라를 방문했다고 한다. “저는 아주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당신이 제게 호의를 베풀어주실 이유가 충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마라의 아킬레스건, 그것은 인민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었고, 샤를로트를 사주한 지롱드당은 잔인하게도 이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이다.

마치 인민을 위해 순교한 듯한 자세, 안타깝고도 장엄하게 전사한 투사의 얼굴, 어디론가 편지를 쓰려는 듯 아직 펜 끝이 마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깃털 펜. 이 모든 것은 혁명가의 미장센을 완성한다. 



#3.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는 얼굴




정면을 쏘아보는 여인의 눈빛과 새하얀 반라의 몸이 도발적으로 상대를 압도한다. 여인의 몸을 감고 어깨에서 머리를 세운 뱀의 눈빛 또한 마치 여인의 분신인 듯 판박이다. 팜므파탈의 전형을 보여준다. 프란츠 폰 슈투크, <죄>


프란츠 폰 슈투크, <죄>, 1893

누군가가 나를 똑바로 쏘아보는 시선은 매우 부담스럽다. 하지만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도 함께 똑바로 쏘아볼 수만 있다면, 그것은 영혼과 영혼의 만남이 시작되는 순간일 것이다. 프란츠 폰 슈투크의 <죄>를 봤을 때 내 마음 깊은 곳의 어떤 열망이 꿈틀했다.

내 피에 녹아 있던 이브의 유전자일 것이다.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자아내는 그림 속의 여인은 나를 똑바로 쏘아보며 저 깊은 심연 어디선가 아련히 다가오는 듯한, 아니 어쩌면 멀어지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존재가 존재를 쏘아보는 시선은 언제나 부담스럽다. 하지만 그 부담스러움 속에 존재의 진실이 있다. 이 매혹적인 그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죄를 짓는 것 같은 으스스한 느낌도 든다. 뱀과 이브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마치 뱀과 이브가 합체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이 그림이 뿜어내는 충격적인 본질이다.

신화나 전설에서 차용된 여인의 유혹적인 누드 이미지를 즐겨 그렸던 프란츠 폰 슈투크는 ‘팜므파탈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가장 강렬한 사례로 인용될 만한 그림들을 그렸다.

오디세우스를 유혹한 여인이자 괴물 스킬라의 대담한 표정, 칼로 베어진 요한의 목 앞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살로메, 그리고 뱀과 하나가 된 이브의 모습을 형상화한 듯한 이 그림까지. 뱀에게 몸이 친친 감긴 채, 아니 차라리 뱀을 목도리처럼 자유자재로 친친 감은 채, 이브는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여인은 이렇게 질문하는 듯하다. 당신은 모든 열망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당신은 이브의 유혹을 완전히 거부할 수 있습니까? 



구스타브 쿠르베, <절망적인 남자>, 1844~1845




사실주의의 대표 화가 쿠르베의 철학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머리를 감싸며 당황하고 겁에 질린 듯한 표정에는 젊은 시절 실패를 거듭했던 쿠르베의 불운한 시기의 자화상이다. 구스타브 쿠르베, <절망적인 남자>

‘내게 천사를 데려다주시라, 그러면 천사를 그릴 테니!’라는 사실주의 선언으로 유명한 쿠르베의 걸작들은 주로 풍경화다. 자연의 풍광 속에서 환상 따위는 틈입할 수 없는 극사실주의적 요소를 발견했던 쿠르베는 그러나 메마른 팩트(fact) 지상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초기 작품은 오히려 낭만주의적인 향기가 짙다.

1840년대에서 1850년대 초반까지 그려진 쿠르베의 초기작에는 자화상이나 인물화가 많은데, 이 시기는 그가 화가로서 실패를 거듭하던 불운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창작된 자화상, 즉 <절망적인 남자>(1844~45), <부상당한 남자>(1844~54), <두려움으로 미쳐버린 남자>(1844~45) 등은 젊은 화가 쿠르베 스스로가 느꼈던 고통과 외로움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 시기의 자화상들은 꼭 화가의 모습이 아니라 때로는 음악가로, 때로는 이름 모를 광인의 모습으로, 때로는 연인에게 버림받은 젊은이의 모습으로 다채롭게 형상화됐으며, 그것은 마치 그림으로 쓰는 자서전 같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때의 작품들은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그는 여인의 누드화를 그릴 때는 대부분 후원자나 컬렉터를 위해 그렸지만, 상처 입은 남자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릴 때는 자발적으로, 마치 일기나 자서전을 쓰는 느낌으로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린 것 같다.

캔버스를 마치 거울처럼 바라보며 그린 것처럼 보이는 이 그림은 화면 가득한 얼굴, 겁에 질린 눈동자, 이미 잘 보이고 있는데 이마에 드리운 머리카락까지 굳이 다 들춰낸 모습으로 인해 관람자를 부담스럽게 만든다.

이 불편함과 꺼림칙함이 이 그림을 ‘사랑스럽지 않게’ 만들지는 모르지만, 자화상으로서는 훌륭하게 자신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쿠르베는 자신의 얼굴을 미화하지도, 어떤 상징적 표현으로 압축하지도 않는다.

절망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찰나의 표정을 마치 영원히 화석으로 만들려는 듯 그 ‘겁에 질린 얼굴’을 그림 속에 가둔다. 이로써 젊은 화가의 쓸쓸하고도 비극적인 얼굴은 ‘그림’이라는 아름다운 유리관 속에 박제됐다. 



초현실 보다 더 절박한 현실의 투영



얼굴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 곳곳이 갈라지고 부서져 위태롭다. 전신에 박혀있는 크고 작은 못에 고통스러울 법한데도 여인의 표정은 담담하다. 표정 없이 전방을 응시하는 여인의 눈빛은 고통에도 굴복하지 않는 강인함과 순수함이 서려 있다. 프리다 칼로, <부서진 척추>


프리다 칼로, <부서진 척추>, 1944

프리다 칼로는 자신을 ‘초현실주의 화가’라고 부르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어떤 고정된 미술 사조로 자신을 평가하는 것도 싫었지만, 자신에겐 너무도 선명한 ‘현실’을 사람들이 ‘초현실’, 그러니까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프리다 칼로는 그림 속에서 기괴하게 일그러지거나 몸속에 철심이 수없이 박힌 상태의 자신, 때로는 사슴으로 변해 있는 자신조차 ‘현실 그대로’라고 생각했다. 물론 3차원적 세계에서는 ‘현실’일 수 없겠지만, 그녀의 삶 속에서는 ‘진실’이었다.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의 영역에 속하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척추성 소아마비로 어린 시절부터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던 그녀는 한창 피어날 나이 18세에 심각한 교통사고로 인해 한동안 누워서만 지내야 했다.

대퇴골, 갈비뼈, 골반, 왼쪽 다리, 왼쪽 어깨, 어느 하나 성한 구석이 없을 정도로 그녀는 평생 고통에 시달렸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한 아이의 엄마’가 되기를 꿈꿨으나 매번 고통스러운 유산을 겪어야만 했다.


이 그림은 그렇게 온몸이 성한 곳이 없는 자신의 몸을 그야말로 ‘정직하게’ 그려낸 자화상이다.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할지라도, 프리다의 머릿속에서는 너무나 ‘현실적인’ 그림인 것이다.

눈물은 방울방울 진주알처럼 얼굴 위를 구르고 있고, 여러 개의 벨트로 간신히 동여맨 척추는 말 그대로 무너져가고 있다. 군데군데 치명적으로 조각난 척추는 붙어 있는 것이 더 신기할 정도로 간신히 한 여인의 몸을 지탱하고 있다.

그녀는 이 현실을 반드시 부정하고 싶거나 벗어나고 싶은 것으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이렇게 부서진 모습, 간신히 부서진 뼈를 끼워 맞춘 모습,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모습 그대로 눈물겹게 아름답다. 이토록 부서지고 조각난 모습으로도 그림에 대한 열정, 세상의 변화에 대한 열정,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열정, 새 생명을 품고 싶은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의 열정을 되새기게 된다.

이토록 부서진 채로도 기적처럼 살며, 사랑하고, 싸웠던 그녀의 ‘얼굴’은 부서지지 않았다. 회한 서린 표정도, 원망하는 표정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결의에 찬 표정도 아닌 해맑은 얼굴. 나는 그토록 힘겨운 투쟁 속에서도 ‘부서지지 않은’ 그녀의 순수를 읽는다.


얼굴을 사진으로 ‘찍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얼굴, 그 얼굴에 담긴 굽이굽이 물결치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제대로 그릴 줄 아는 화가는 여전히 희귀한 존재다.

[출처] : 정여울 미술평론가,문학평론가 ; <정여울의 그림을 읽다>/ 월간중앙 2016. 3.17.




16. 괴물과 싸우며 성장하는 존재들  - 최고의 용기는 내 안의 괴물과 마주하는 것! 


공포의 본질은 대상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불확실성

… 내면의 자아를 향해 당당해졌을 때 공포를 물리칠 수 있어


#1. 몬스터, 점점 다가오는 공포와 마주한다는 것



점점 심장을 조여오는 공포와 맞서 평정심을 잃지 않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포는 때로는 괴물의 모습으로, 때로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파동으로 다가온다. 어떤 경우건, 용기와 지혜만이 공포를 물리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다. 히드라와 맞서 싸우는 헤라클레스의 모습. / 그림제공·정여울


스릴과 서스펜스를 간직한 모든 이야기 속에는 변형된 형태의 괴물이 등장한다. 재난과 싸우는 인간을 그린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는 커다란 화재나 거대한 해일, 무서운 허리케인이 괴물로 등장하고, SF영화에서는 정체불명의 외계인들이 상상의 괴물로 등장한다.

거대한 용이나 뱀파이어, SF영화의 외계인은 사실 모두 상상의 괴물들이다. 인간은 왜 이렇게 괴물이라는 타자를 상상하고, 끝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하여 묘사하고, 그것과 싸우는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것일까?

어쩌면 인간은 온갖 기상천외한 괴물과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자기 안의 가장 빛나는 부분, 자기 안의 최고의 것을 발견해내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내부의 잠재된 가능성의 빛은 아무 때나 발현되지 않는다. 커다란 장애물과 싸울 때, 더 이상 그 공포를 견딜 수가 없을 때, 물러서거나 기다릴 것만이 아니라 이제는 반드시 싸워야 한다고 느낄 때 우리 자신도 몰랐던 놀라운 힘이 폭발한다.

우리는 수많은 신화나 소설,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다채로운 괴물과 싸우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인간이 가진 최고의 힘, 가장 아름다운 빛, 최선의 용기를 만난다.

괴물(monster)의 라틴어 어원은 monstro, monstrum, monere 등이 있는데, 그 뜻은 ‘다가오다’, ‘경고하다’이다. 괴물의 어원이 무언가 ‘끔찍한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다가오고 있다’는 것,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경고한다’는 뜻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괴물의 공포는 그 생김새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아직 모르는 존재의 다가옴’ 때문이 아닐까. 무엇인지 규정할 수 없는 존재가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다는 것, 예측 불가능한 것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끔찍한 외모나 무서운 행동보다도 진정으로 ‘공포스러운 것’의 본질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잘 알고 있다면, 대상이 어떤 것이든 그렇게 두렵지는 않다. 대상에 대한 무지(無知)야 말로 막연한 공포를 자아내며 그 ‘막연함’이야말로 공포의 맨 얼굴일 것이다. 그리하여 공포와 싸우는 최초의 무기는 지성이다. 적의 존재를 안다는 것, 적의 특징과 적의 단점을 알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괴물과 싸움을 앞둔 전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실질적 힘이다. 


구스타브 모로, <헤라클레스와 레르나의 히드라>, 1876


머리를 잘라낼 때마다 하나씩 새로운 머리가 돋아나는 끔찍한 괴물 히드라와 싸우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이야말로 이 ‘공포스러운 것’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아직 결전은 시작되지 않았다.

신의 도움이 아닌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영웅이 된,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본질적으로 ‘인간’을 대변하는 최고의 전사 헤라클레스는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적과 만났다.

히드라는 그 누구도 두렵지 않다는 듯, 바다 속의 산호처럼 돋아난 여러 개의 목을 당당히 곧추세우고, 이 새로운 적수를 노려본다. 주변에는 이미 시체와 해골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다.

모두 히드라의 아성에 도전했다가 목숨을 잃은 이들이다. 히드라는 이번에도 이길 것이라 믿는 것 같다. 한 번도 진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몇 분 후면 히드라는 저 아래 힘없이 늘어진 시체들보다 더 가련한 모습으로 산산이 흩어질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히드라를 물리친 비결은 ‘완력’이 아니라 ‘지혜로운 타인’과의 협업이었다. 히드라를 물리칠 묘안은 헤라클레스의 사촌이자 총명한 조력자인 이올라오스가 짜낸다.

이올라오스는 헤라클레스가 히드라의 목을 벤 상처에서 새로운 머리가 솟아나오기 전에, 그 상처를 재빨리 불로 지진다. 헤라클레스가 자르면, 이올라스는 지졌다. 불로 그을린 자리에서는 그 무시무시한 히드라의 새로운 목이 다시 자라나지 않았다. 헤라클레스의 무술과 이올라오스의 지혜가 합쳐져 마침내 괴물을 무찌른 것이다. 



 벤베누토 첼리니, <페르세우스>, 1545~54



메두사를 물리친 페르세우스는 육체적 힘보다 ‘지략’으로 괴물을 이긴 지적인 영웅상의 전형이다. 그는 메두사의 힘조차 자신의 무기로 만들어 적들을 물리쳤다.


페르세우스에 대해 가장 많이 알려진 이미지는 ‘메두사의 잘린 머리를 들어올리며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모습’이다. 아직 진정한 영웅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페르세우스가 최고의 영웅으로 대접받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낸 이후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새로운 영웅의 힘은 단지 완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괴물의 힘조차 내 것으로 만드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에 있었다.

메두사의 잘린 머리를 방패에 붙임으로써 자신의 모든 적을 돌로 만들 수 있게 된 페르세우스는 육체의 힘보다는 ‘지략’으로 승부하는 지적인 영웅상의 전형이 되었다. 하지만 메두사의 입장에서 보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억울한 쪽은 바로 그녀가 아니겠는가.

페르세우스는 신들의 축복을 받은 존재였다. 헤르메스를 통해 하늘을 나는 신발과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마법의 모자를 얻어낸 페르세우스의 승리는 사실상 예정된 것이었다. 메두사는 자신이 침입당하는지도 모른 채,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

메두사는 아폴론의 힘에 이끌려 아테네의 신전에서 애정행각을 벌였고, 아테네는 ‘나의 순결한 신전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메두사에게 저주를 내린다.

그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하나하나 무서운 뱀들의 형상으로 변하고, 그녀의 얼굴을 본 모든 존재는 돌로 변하는 저주. 하지만 아폴론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아폴론의 꾐에 빠진 메두사만 이런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그리스 신화에 나타난 심각한 남녀차별이기도 하다.

메두사의 억울함은 뜻밖에도 페가수스라는 아름다운 천상의 말이 풀어주게 된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내는 순간, 메두사의 잘린 머리에서 나온 핏물에서 날개 달린 말이 태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페가수스였던 것이다. 



#2. 괴물과 영물(靈物) 사이: 반인반수의 신비



누구도 풀지 못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단번에 풀어낸 오이디푸스(그림)는 지혜로운 영웅으로 등극했지만 끝내 자신의 운명의 사슬-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비극-을 풀지 못했다. / 그림제공·정여울


귀스트 앵그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 1808~1825


 반인반수의 괴물은 인간의 지혜와 야수의 광폭함을 동시에 지녔기에 더욱 처치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반인반수 중 가장 친숙하면서도 악명 높은 괴물이 바로 스핑크스다. 바로 그 스핑크스의 아성을 무너뜨린 자가 오이디푸스다.

오이디푸스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것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패륜아’의 낙인이지만, 실은 오이디푸스는 ‘인간들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인간’의 표상이다.

 ‘이 아이는 언젠가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는 아폴론의 신탁에 겁을 먹고 아들을 내다버린 라이오스. 자신이 테베의 왕자라는 것도 모른 채 코린트에서 자라난 오이디푸스가 ‘테베의 왕’이 된 것은 그가 지금까지 아무도 풀지 못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냈기 때문이다.

여인의 얼굴과 사자의 몸을 한 스핑크스는 인간들이 지나는 길목에 은밀히 숨어서 지나가는 여행자를 기다리다가, 수수께끼를 내고 그것을 풀지 못하는 사람들을 잡아먹었다.

라이오스왕이 살해된 이후, 테베에서는 이 골칫덩어리 스핑크스를 무찌르는 사람에게 테베의 왕좌를 주겠다는 선포가 내려진다. 마침 여행 중이던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와 운명적으로 조우하고, 스핑크스는 수수께끼를 냈다.

“아침에는 네 개의 다리로 걷고, 낮에는 두 개의 다리로 걷고, 밤이 되면 다리가 세 개로 변하는 것은 무엇인가?”

재기발랄한 오이디푸스는 대답했다. 그것은 인간이라고. 앵그르의 그림은 바로 오이디푸스가 ‘인간’이라는 대답을 하는 순간, 자신을 가리키며 ‘바로 여기 있잖아, 아침에는 네 개의 다리, 낮에는 두 개의 다리, 밤에는 세 개의 다리가 되는 존재가 바로 나잖아’라고 대답하는 듯한 순간, 자신 있게 괴물 스핑크스의 콧대를 꺾는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은유와 상징을 단번에 간파하는 힘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에게 아침은 유년기, 낮은 청년기, 밤은 노년기의 은유로 다가왔다. ‘네 개의 다리’는 네발짐승처럼 기어 다니는 아기의 모습, ‘두 개의 다리’는 직립한 인간의 늠름한 모습, ‘세 개의 다리’는 지팡이를 짚은 노인의 쇠잔한 모습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다가왔다.

괴물 스핑크스는 은유와 상징을 해석할 줄 모르는 인간의 ‘지혜롭지 못함’을 꾸짖는 계시적 존재가 아니었을까. 오이디푸스가 이 문제를 풀자마자 그는 인간들 중 최고로 지혜로운 존재로 등극했다.

사람들은 오이디푸스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사실 진짜 느껴야 할 감정은 공포가 아닐까? ‘인간들 중 최고의 지혜를 가진 사람조차도 자기 운명의 사슬을 끝내 풀지 못했다’는 점이 이 이야기의 진정한 비극이기 때문이다.


<미궁에서 싸우는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르스를 그린 로마 모자이크>, 연대미상



미궁에 갇힌 괴수를 찾아가 물리친 테세우스는 ‘실마리’를 제공해준 연인 아리아드네를 배신하고 만다. 미궁 속 괴수는 테세우스의 내면에 잠재돼 있는 속물적 욕망을 투영한다.


괴물과 싸워 이긴 영웅은 오래도록 칭송받지만, 때로는 영웅의 약점을 일깨우는 괴물도 있다. 특히 괴물 미노타우르스와 싸워 이긴 테세우스에게는 심각한 약점이 있다.

인간의 몸과 소의 머리를 가진 사나운 괴물 미노타우르스를 만나기 위해서는 필히 다이달로스가 만든 정교한 미궁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 미궁 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런데 테세우스는 그 죽음의 미궁으로 들어갔다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는 비결을 알려준 여인 아리아드네를 배신한 것이다. 그녀는 테세우스에게 푹 빠져 미궁의 탈출 비법을 알려주었지만, 공명심과 자만심으로 철저히 무장한 테세우스에게 버림받는다.

테세우스의 신화는 남성 영웅과 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사이의 비극적 로맨스를 그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테세우스는 저 유명한 ‘아리아드네의 실’로 미노타우르스의 미궁을 무사히 헤쳐가 불세출의 영웅이 되었지만, 막상 원하는 것을 얻어내자 사랑을 헌신짝처럼 버린다.

테세우스는 걸출한 영웅의 뜻밖의 세속성, 비굴함을 상기시키는 존재다. 한편, 미노타우르스는 ‘갇힌 괴물’이다. 드래곤처럼 신나게 하늘을 날거나 히드라처럼 광활한 벌판에서 수많은 적과 교전하는 장쾌한 이미지가 아니다. 미로 속에 갇혀 테세우스에게 살해당하는 미노타우르스는 어쩔 수 없는 연민을 자아낸다.

나는 테세우스 신화를 읽을 때마다 ‘어쩌면 괴물보다 무서운 것은 인간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성공에 눈멀고, 출세에 눈이 멀었으며, 헤라클레스처럼 유명한 영웅이 되고 싶었던 테세우스야말로 성공신화에 사로잡힌 모든 시대의 속물적 영웅을 대표하는 자가 아닐까. 때로는 괴물보다 영웅으로 ‘알려진’ 사람 내면의 괴물성이 더욱 두려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외젠 들라클루아, <아킬레스의 교육>, 1862 




반인반수의 괴물인 켄타우르스는 그 외모와 달리 고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여러 영웅의 스승이기도 했다. 자신의 등에 올라탄 아킬레스에게 활쏘기를 가르치는 켄타우르스의 모습은 자애로운 스승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 그림제공·정여울



켄타우로스는 고대인이 상상해 낸 괴물 중 유일하게 고상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가르침을 받은 케이론이라는 켄타우로스는 사냥, 의술, 음악, 예언에 모두 뛰어났다. 아킬레우스, 아스킬레피오스, 이아손 등의 영웅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들라클루아가 그린 켄타우로스는 다른 어떤 켄타우로스보다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준다.

‘나를 따르라’고 권위적으로 명령하는 스승이 아니라 ‘마음껏 나를 타고 오르라’고 직접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스승의 이미지는 얼마나 다정하고 자애로운가. 그는 사냥의 기술이나 활쏘기 기술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말’처럼 타게 만들어 스승의 호흡을 직접 제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것 같다.

몸 전체를 던지고 마음 전체를 집중해야만 가능한 이 살아있는 교수법은 아킬레우스뿐 아니라 수많은 영웅을 최고의 전사로 키워낼 수 있었다.



#3. 괴물, 내 안의 또 다른 나

구스타브 모로, <키메라>, 1867




불굴의 용기로 자신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운명을 바꾼 벨레로폰에게 가장 무서운 ‘괴물’은 키메라가 아니라 ‘자만’이었다. 결국 신들의 노여움을 산 그는 페가수스에서 떨어져 눈이 먼 절름발이가 되고 만다. / 그림제공·정여울


현대사회에서 유전자재조합식품(GMO)이나 다양한 유전자 변형 생물을 가리키는 말이 된 키메라(chimera)는 본래 불을 뿜는 무서운 괴물이었다. 몸뚱이의 앞부분은 사자와 염소, 뒤쪽은 용이었으니, 그 모든 동물의 장점을 갖춘 키메라는 얼마나 위력적이었을까?

동물은 물론 인간까지 위협하는 키메라는 이오바테스 왕을 골치 아프게 하고, 왕은 키메라를 퇴치할 전사를 찾고 있었다. 마침 벨레로폰이라는 젊은이가 왕에게 찾아왔다.

벨레로폰은 이오바테스의 사위인 프로이스토스로가 보낸 편지를 가지고 온 전령이었다. 편지에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첫 번째 메시지는 벨레로폰이 훌륭한 전사라는 칭찬이었다. 두 번째 메시지는 이 용감한 전사 벨레로폰을 꼭 죽여달라는 것이었다.

프로이스토스는 아내가 벨레로폰을 흠모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죽이고 싶어한 것이다. 사위의 부탁이니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고, 용감한 전사를 죽이기도 아까워 고민하던 이오바테스왕은 묘책을 짜낸다. 바로 그의 골치를 썩이던 키메라를, 벨레로폰에게 처치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벨레로폰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사형집행장을 가지고 온 셈이었다. ‘벨레로폰의 편지’라는 말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위해를 끼치는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벨레로폰은 키메라를 처치하기 위해 예언자 폴리이도스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는 페가수스를 타고 가면 키메라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한다. 페가수스를 만나기 위해서는 아테나 신전에서 밤을 꼬박 새야 한다는 조건도 덧붙인다. 아테네 신전에서 벨레로폰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꿈에 아테나 여신이 나타나 황금고삐를 손에 쥐어주며 페가수스가 페이레네 샘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고 알려준다.

과연 벨레로폰의 손에 들린 황금고삐를 본 페가수스는 스스로 그에게 다가온다. 벨레로폰은 마침내 페가수스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가 키메라를 무찌르고 일약 영웅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이오바테스는 벨레로폰이 키메라를 무찌른 것을 보고 그를 사위로 삼아 왕좌를 물려주려 했지만, 벨레로폰은 그 후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게 되어 신들의 노여움을 사고 만다.

기세 등등해진 벨레로폰은 천마 페가수스를 타고 하늘 끝까지 올라가려 했는데, 벨레로폰의 오만함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제우스는 커다란 등에 한 마리를 보내 페가수스를 공격하게 하고, 페가수스가 몸부림을 치자 벨레로폰은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최고의 전사이자 영웅이었던 벨레로폰은 결국 장님이자 절름발이가 되고 말았다. 순수하고 용감했던 시절의 벨레로폰은 신의 축복을 받아 모두가 두려워하는 괴물 키메라를 물리쳤다. 하지만 벨레로폰은 이후 그가 무찔러 없앤 키메라보다 더 무서운 진짜 괴물과 만난다.

진짜 싸워 이겨야 할 내 안의 괴물은 바로 스스로에 대한 자만, 다른 사람을 향한 우월감이었던 것이다. 죽을 고비를 넘겨 간신히 ‘자신의 사형 집행장’을 무효화시켰는데, 나중에 자신의 잘못, 즉 오만과 우월감 때문에 스스로를 나락으로 빠뜨린 것이다. 



존 헨리 퓌슬리, <악몽>, 1781



잠든 여인과 그녀를 올라타 제압하고 있는 괴물의 모습은 ‘가위눌렸다’는 한국적 표현과 맞아 떨어진다. 괴물은 내면의 두려움을 먹고 자라나 스스로를 옥죄기도 한다. / 그림제공·정여울


 구스타프 융의 심층심리학에 따르면 꿈에서 괴물을 보는 것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꿈속의 자아가 괴물과 어떤 스토리를 만들어가는지, 괴물과 나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는지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현재 상황이 어떤지에 따라 괴물의 상징과 은유는 달라진다.

심층심리학에 따르면 어떤 꿈도 ‘개꿈’은 아니다. 모든 꿈은 꿈꾸는 자의 인생 속에서 예언적 기능을 지닐 수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할 뿐이다. 심층심리학에서는 꿈속에 나오는 모든 이미지를 ‘내 안에 있는 무의식의 발현’으로 본다.

즉 꿈속에서 타인이 등장하더라도 그 타인은 실제로 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투사(projection)’라는 것이다. 꿈속의 괴물이 무서운 이유는 그 괴물의 정체가 ‘내 안에 있다’는 직감 때문이다.

이 그림 속에서 악몽의 주체는 침대 위에 널브러진 여인이지만, 그녀를 누르고 있는 저 원숭이를 닮은 괴물 또한 ‘그녀 안의 또 다른 그녀’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내 안의 괴물이다. 그 괴물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너는 절대로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없을 거야’라고 위협하는 괴물, ‘너는 결코 그 사람을 이길 수 없어’라고 속삭이는 괴물, ‘그 사람을 아무리 원해도 그를 결코 만날 수 없을 거야’라고 겁을 주는 괴물. 우리 안에는 스스로의 행복을 가로막는 수많은 괴물이 있다.

그 괴물들의 목소리는 아무리 시끄러워도 알고 보면 매우 명쾌하게 요약된다. ‘너는 네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거야.’ 이 내면의 괴물이야말로 우리가 꿈속에서도 싸워야 할 진짜 두려움의 정체가 아닐까. 퓌슬리의 그림 속의 여인은 지금 괴물과의 싸움에서 백기투항하고 있다.

괴물에게 완전히 짓눌려버렸다. 이런 끔찍한 가위눌림을 경험했다면, 그 꿈의 신호는 바로 ‘어서 빨리 일어나서 저 괴물과 맞서 싸우라’는 무의식의 절박한 외침이 아닐까. 



작자미상, <헤라클레스와 케르베루스>, 6세기경



여러 개의 머리가 달린 지옥의 파수견 케르베로스를 마치 애완견 다루듯 살살 달래는 헤라클레스의 표정과 순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케르베로스의 모습이 다소 우스꽝스럽다. 헤라클레스가 최고의 영웅으로 칭송 받는 이유는 공포를 마주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담대함 때문일 것이다. / 그림제공·정여울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한 ‘불완전한 인간’ 헤라클레스의 마지막 과업은 지옥을 지키는 파수견 케르베로스를 지상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에우리스테우스는 헤라클레스의 영웅적 행동들을 지켜보면서 ‘도대체 저 녀석이 못하는 게 뭘까’를 궁리하다가 아예 지옥으로 보내버리자고 결심한 모양이다.

 뱀의 비늘과 용의 꼬리를 지닌 케르베로스는 세 개의 머리를 이용해 사방을 온종일 감시하면서 지옥에서 도망치려는 이들을 잡아오는 무서운 파수견이었다. 헤라클레스는 헤르메스와 아테나의 도움으로 하데스의 영역인 저승세계로 내려간다.

헤라클레스의 사연을 들은 하데스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무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케르베로스를 데리고 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데스 역시 신들조차 위협하는 인간 헤라클레스의 힘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케르베로스의 목을 단번에 눌러 생포한 후 에우리스테우스에게 데리고 갔다. 올림푸스의 모든 신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헤라클레스는 이 미션을 완수함으로써 마침내 인간들 중 최초로 ‘불멸의 존재’가 된다. 죄 없는 케르베로스는 다시 하데스의 곁으로 보내주었음은 물론이다.

나는 이 그림에서 어떤 따스함과 정겨움을 느낀다. 주제는 케르베로스를 물리치는 헤라클레스의 용맹인데 헤라클레스의 표정은 괴물을 위협하거나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괴물을 살살 달래며 구슬리는 것 같다.

케르베로스의 표정도 무섭거나 끔찍하기는커녕 어딘가 살짝 모자라 보이고 유머러스해 보이기까지 한다. 괴물을 겁박하거나 찔러 죽이는 것이 아니라 괴물을 구슬리고 유인하여 자기 편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헤라클레스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까.

괴기스러운 힘, 신들조차도 놀랄 파괴력을 자랑하는 헤라클레스의 남성적인 면모만이 아니라 괴물조차 설득시킬 수 있는 지력과 유머를 지닌 것이 헤라클레스가 아닐까. 우리는 괴물을 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괴물과 함께 살아가며 괴물을 유인하고 때로는 괴물과 대화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신화 속의 괴물보다 더욱 복잡하고 다채로워진 현대사회의 괴물은 단지 ‘내 밖에 있는 괴물’뿐 아니라 내 안의 괴물, 평화로워 보이는 공동체 안에 숨은 괴물, 제도와 법칙 속에 숨어 있는 괴물로 진화했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처럼 괴물 자체의 무서움을 뛰어넘는 인간의 괴물성, 즉 괴물을 처치하고 처벌하는 인간의 법률과 제도, 인간의 욕망과 폭력성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우리가 목매고 있는 제도 자체의 괴물성을 거꾸로 깨닫게도 되었다.

처치하려는 것은 ‘무서운 괴물’이었지만 진정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추방하고 이 사회의 테두리 밖으로 몰아내려는 우리 안의 공포, 우리 안의 나약함이 아닌가.

괴물은 때로는 우리가 진정으로 성장하기 위해 넘어야 할 ‘외부의 장애물’로 나타나며, 때로는 내면의 트라우마가 악몽으로 변하여 나 자신을 공격하는 ‘내부의 장애물’로 나타난다.

괴물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내 안의 공격성’, 혹은 ‘내 안의 공포’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영웅은 괴물과 싸우면서 진정한 자아를 되찾기도 하고, 때로는 괴물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최후의 전사로 거듭나기도 한다.

괴물을 피하기만 해서는 진짜 인생이 시작되지 않는다. 공포로부터 도피하는 인간의 방어기제는 괴물이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이다. 우리는 오늘도 우리 안의 괴물과 싸우고 있다.

때로는 지나친 자존심이 괴물처럼 자라나 타인의 모든 행동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나친 질투가 괴물처럼 변해버려 ‘나보다 많이 가진 모든 사람’을 적수로 돌려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바깥의 괴물이든 내면의 괴물이든 괴물과 무작정 싸우기만 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괴물과 대화하고, 괴물과 협상하고, 때로는 괴물을 길들이기도 하는 변화 무쌍함과 유연함이 우리를 괴물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시키지 않을까.

당신 곁에 지금 어떤 괴물도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삶이라는 링 위에 데뷔하지 않은 것이다. 당신 곁에 너무도 많은 괴물이 들끓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제대로 된 삶의 전쟁터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당신은 매일 괴물과 싸우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진정 최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매일 수많은 괴물과 싸우는 당신, 그러면서도 지치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는 당신, 그대가 바로 진정한 영웅이다. 

[출처] : 정여울 미술평론가,문학평론가 ; <정여울의 그림을 읽다>/ 월간중앙 2016. 4.17.





17. 읽고 쓰는 인간의 아름다움 - ‘읽기’의 즐거움을 색채로 찬미하다 


읽기와 쓰기는 필연적으로 고독을 동반하는 것

… 책을 읽을 때 글쓴이와 책 속 인물들이 생명력 갖게 돼




책을 읽는다는 것은 외로움을 잊는 일이다. 책을 읽는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고독의 시간이기도 하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책 읽는 소녀>


#1. 책 읽기, 외로움을 잊는 기술

문명을 파괴하기 위해 굳이 책을 불태울 필요가 없다. 그저 사람들에게 책을 읽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다. - 레이 브래드베리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누구도 만날 필요 없이, 가만히 외로움을 잊는 기술. 내게는 그것이 책 읽기다. 아끼는 책 한 권만 옆에 있어준다면, 외로움은 더 이상 고통이 되지 않는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저자와 대화하고, 책 속의 여러 인물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에 미소 짓기도 한다.

그들은 지금 여기 있다. 내가 책 속의 문장을 읽음으로 하여, 그들은 이 세상에 더욱 생생하게 존재하게 된다. 책은 인간의 외로움을 잊게 하지만, 책 스스로는 매우 외롭다. 인간이 만져주고, 읽어주고,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면, 책은 그저 ‘사물’에 그치기 때문이다.

책 속에 숨은 이야기와 생각, 느낌과 흔적들에 생명을 불어 넣는 독자가 없다면, 책은 우리 자신보다 더욱 외로운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책과 함께하는 순간, 우리는 곁에 사람이 없어도 ‘추억’을 만들 수 있다. 책 속에 끼워두었던 껌종이나 낙엽, 꽃잎 같은 것들이 툭 떨어지는 순간. ‘그 책을 읽었던 순간의 나’는 또 하나의 친구가 되어 다정하게 말을 걸곤 한다. 



엘링가 피터 얀센스, <책 읽는 여인>, 1668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던지고 빛이 잘 들어오는 곳에 앉아 책을 읽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복잡했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치유의 효과를 느낄 수 있다. 엘링가 피터 얀센스 <책 읽는 여인>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없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아무렇게나 급하게 벗어 던진 신발은 여인의 차분한 뒷모습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여인은 책 읽기 삼매경에 빠졌다. 창가에서 가장 밝은 햇살이 들어오는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는 여인의 실루엣은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준다.

이 그림 자체에 치유적인 힘이 서려 있다. 수많은 고민의 실타래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답답할 때, 나는 이 그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래, 집에 가면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지. 지금은 이렇게 힘들지만 집에 돌아가면 이렇게 신발을 벗어 던지고 창가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지. 이런 위로가 내게 희망이 되어준 날들이 많았다.

17세기의 네덜란드인과 21세기의 한국인 사이에 이토록 강력한 연대의 끈을 만들어준 화가의 따스한 통찰력에 감사하게 된다. 17세기의 네덜란드 여인, 그리고 나. 우리는 모두 힘들 때마다 책을 읽는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아주 깊고 짙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된다. 



독서는 홀로 추억을 만드는 과정 |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책 읽는 소녀>, 1770년경

책 속에 과연 어떤 내용이 있기에 소녀의 볼은 저토록 발그레해져 있을까. 소녀의 복숭아 빛 뺨은 책 속의 내용 때문일 수도 있고 본래의 홍조일 수도 있지만, 앞모습이 아닌 옆모습으로 그려져 더욱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이 그림은 소녀가 읽고 있는 책 내용을 궁금하게 만든다.


이상적인 옆모습을 그리기 위해 다소 작위적으로 포즈를 취하게 한 듯한 느낌도 주지만, 커다란 라일락 빛깔의 쿠션에 상반신을 기대고 책 속에 푹 빠져 있는 소녀의 모습은 지극히 사랑스럽다.

책 읽는 소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은 18세기에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다. 18세기 유럽에서는 여성들 사이에서 일종의 독서 혁명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는 ‘소설’이 있었다. 특히 <파멜라>라는 서간체 소설은 지금까지 문학에 무관심했던 여성들에게서 놀라운 반향을 일으켰다.

뭇 남성에게 순결을 위협받는 하녀 파멜라가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에 성공하는 이야기는 수많은 여성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고 한다. 유럽의 공원이나 유원지에서는 소설 <파멜라>를 들고 다니는 여성들의 모습이 흔히 목격되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전 유럽에 걸친 폭발적인 인기를 방불케 할 정도로, <파멜라> 열풍은 대단한 것이었다. 여성들에게 ‘책을 읽는 행위’는 단순한 흥미거리를 넘어 ‘나도 어쩌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모른다’는 집단적인 희망에 불을 지피는 ‘삶의 새로운 방식’이었다. 



얀 베르메르, <푸른 옷을 입고 편지를 읽는 여인>, 1664년경



작은 편지의 첫 구절을 읽는 여인의 표정에는 이후 전개될 내용에 대한 호기심이 비친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설렘의 출발점에 선 표정이다. 얀 베르메르 <푸른 옷을 입고 편지를 읽는 여인>


나는 ‘설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이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 편지를 읽는 이 여인의 옆얼굴은 놀라움과 가슴 떨림, 그 다음 문장에 대한 미칠 듯한 호기심이 서려 있다.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내게 여전히 설렘의 출발점이다.

내가 알 수 없는 세계로 입장하는 마법이 이토록 단순한 ‘읽기’라는 행위에 스며 있다. 그 사람이 여기 없어도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최고의 매체는 바로 편지다. 편지는 ‘우리가 여기 함께 있지 않음’을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우리가 서로 함께하고 싶어함’을 확인하게 만드는 마음의 연결고리가 된다.

오래오래 고민하며 편지 쓸 내용을 구상하고, 펜으로 한 자 한 자 글씨를 쓰고, 촛농을 녹여 봉인하고, 또 그 편지가 사람의 손을 거쳐 무사히 전달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저 조그만 편지지 안에 녹아 있을 것이다. 저토록 조그마한 편지한 통에 우주의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는 듯, 절박한 표정으로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는 여인의 눈동자에서는 숨길 수 없는 사랑의 빛이 뿜어져 나온다. 



#2. 읽고 쓴다는 일의 소중함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한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황인숙 ‘말의 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읽고 쓴다는 것은 정말 진지하고 심각한 경험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읽고, 또 읽었다. 동화책이나 소설책, 어른들의 잡지는 물론 껌종이에 적힌 서정시, 과자나 라면의 성분분석표까지 샅샅이 뒤져 읽었다. 방학 동안 일기를 쓰거나 선생님께 편지를 쓰는 것은 물론 힘들었지만 뭔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읽고 쓴다’는 것은 틀에 박힌 입시 공부와 달리 뭔가 흥미롭고 소중한 체험이었다. 그때는 활자매체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기 때문에 교과서 외의 활자를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보다 훨씬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런데 그때보다 훨씬 많은 활자와 이미지를 접하는 지금, 나는 왠지 ‘말의 힘’을 잃어가는 것 같다.

황인숙 시인의 ‘말의 힘’을 읽어보니 더욱 더 단어 하나하나의 힘, 문장 하나하나의 힘을 잊어가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래, 기분 좋은 말들은 단순하고 소박하다.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이렇게 원시적인 체험을 담은 투명한 말들의 단단한 질감을 나는 잊어가고 있었다. 그렇지, 기분 좋은 말은 그저 눈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하나하나 발음해 보아야 한다.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나는 그 모든 말의 고유한 울림과 향기를 잊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렇게 활자화된 단어 하나하나를 천천히 쓰다듬고, 깨물어 보고, 씹어도 보고, 핥아도 보는 촉감적인 즐거움을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옛사람들이 글을 읽고, 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오래전부터 잊고 있었던 그 단순한 ‘활자 맛보기의 즐거움’이 다시 되살아난다. 우리가 매일 무덤덤하게 마주하던 수많은 활자를 더욱 애지중지하고 싶어진다. 



가브리엘 메츠, <편지를 쓰는 남자>, 1664~66



글을 쓰는 남자의 우아한 표정과 그를 둘러싼 고급스러운 사물들이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가브리엘 메츠 <편지를 쓰는 남자>


이 그림에는 ‘글쓰기의 즐거움’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편지를 쓰는 남자는 자기 주변의 모든 사물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있다. 그가 오른손으로 쥐고 있는 펜, 왼손으로 만지고 있는 편지지, 그가 앉아 있는 의자, 의자 위에 걸린 모자, 그가 의지하고 있는 책상, 책상 위에 화려하게 펼쳐져 있는 페르시안 러그, 은으로 만들어진 필기구 세트, 창문 뒤편으로 비치는 거대한 지구본까지. 그 모두가 ‘나는 어떤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상인이거나 과학자일 수도 있고, 학문과 예술에 관심이 많은 열정적인 젊은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읽고 쓰기’를 진심으로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문물을 향한 뜨거운 호기심으로 무장한 젊은이이며, 그 지적 호기심의 밑바탕에는 읽고 쓰는 일에 대한 흥미가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읽고, 쓰고, 공부하고, 이해하는 일의 즐거움은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원동력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향해 항상 열려있는 마음이야말로 우리를 권태와 매너리즘으로부터 구원해주기 때문이다. 



독자와 청자를 공동체로 맺어주는 낭독의 매력 | 줄리어스 르블랑 스튜어트, <낭독>, 1883년경



소리 내어 읽기는 그 소리를 듣는 이와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묵독’이 독자와 책 속의 등장인물 간의 개인적 관계 맺음의 행위라면, 낭독은 공동체적 관계를 맺어주는 매개체다. 줄리어스 르블랑 스튜어트 <낭독>



소리 내어 읽기에는 어떤 ‘관계 맺음’이 내포되어 있다. 묵독이 ‘독자와 저자’, ‘독자와 책 속의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 맺음을 전제로 한다면, 낭독은 거기에 ‘소리 내어 읽는 사람’과 ‘그 낭독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맺음이 더해진다.

묵독이 ‘개인’을 탄생하게 한다면, 낭독은 ‘공동체’를 탄생하게 한다. 묵독은 개인의 내면을 향해 울려 퍼지는 목소리이며, 낭독은 그날 그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사람을 향해 울려 퍼지는 목소리다. 꼭 많은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그 낭독의 소리를 들어주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낭독의 공동체는 성립된다.

줄리어스 르블랑 스튜어트의 <낭독>에는 소리 내어 읽기를 통해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순간의 경이로움이 담겨 있다. 그가 책을 읽어줌으로 하여, 그녀의 마음은 더 깊고 따스한 울림통이 된다.

우리의 학창 시절에 할머니는 지루함을 못이겨 도서관에서 <파멜라>를 시리즈로 빌려 읽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원래 소설을 읽는 분이 아니었다. 결코 소설 따위는 읽지 않았을 분이었다.

그러나 ‘파멜라: 또는 보답받는 미덕’ 이라는 제목 뒤에 그런 내용이 숨어 있을 줄 어찌 짐작이나 했으랴. 할머니는 소설 속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성경 구절처럼 고스란히 믿었다. 겨울밤이면 차를 마시고 나서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책을 큰 소리로 읽어주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자신이 읽는 내용에 완전히 충만해서, 단락단락을 가슴 깊숙이 받아들이고 일일이 코멘트를 달았다. 읽으면서 결코 쉬지 않았으나, 저자가 마법을 걸다시피 독자들의 가슴을 절절하게 만드는 부분을 만나면 목이 막혀 입술을 떨면서 더 이상 읽어나가지 못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슈테판 볼만, <여자와 책>(유영미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5) 중에서 



로렌스 알마 타데마, <호메로스의 낭독>, 1885



1. 책 속의 세상에 몰입해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고요와 평안이 느껴진다. 독서는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든든한 마음의 요새다. 클로드 모네 <책을 읽는 여인> / 2. 저 유명한 서사시 <일리아스>를 호메로스가 직접 낭독해준다면 몰입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호메로스(오른쪽)의 당당하고 활기찬 표정과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된 청중들의 모습이 생동감 넘친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호메로스의 낭독>


저 유명한 <일리아스>를 호메로스의 목소리로 직접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일까. 로렌스 알마 타데마는 바로 그런 장면을 상상해냈다. 화가로서는 ‘상상’이지만, 인류의 입장에서는 ‘회고’에 가까운 이 그림은 ‘저자로부터 직접 듣는 낭독의 목소리’만이 지닌 생생한 감동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 인류에게는 한때 이런 시간이 있었다. 호메로스로 추정되는 젊은 남자는 그의 무릎 위에 두루마리로 된 책을 펼친 채 청중들에게 낭독을 해주고 있다. 월계수 잎으로 만든 관을 쓴 호메로스는 젊고, 당당하며, 활기 넘친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는 청중의 표정과 몸짓이 말해준다. 한 남자는 몸을 아예 바닥에 엎드린 채 넋이 나가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턱을 괸 채 호메로스의 얼굴을 맹렬하게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눈빛은 이야기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연인으로 보이는 두 젊은 남녀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호메로스의 이야기에 완전히 도취된다. 탬버린을 들고 있는 여인과 류트를 곁에 두고 있는 남자는 아마도 연주를 멈추고 호메로스의 이야기에 빠져든 듯하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벽에 기대 서 있는 젊은이는 호메로스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지만, 시선만은 곧게 호메로스의 얼굴을 향하고 있다.


그 또한 이야기에 매료된 것이다. 대리석 벽감 너머로 펼쳐진 푸르른 바다는 그리스의 영광, 그리스의 위대한 정신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호메로스를 낳은 그리스, 그리고 <일리아스>를 낳은 호메로스는 이 그림 속에서 영원히 솟아오르는 창조성의 원천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3. 읽고 쓰고, 그리고 깊어지는 인간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가진 사람이다. -윌리엄 고드윈

클로드 모네, <책을 읽는 여인>, 1872 




모네,봄 (책읽는 여인)​, oil on canvas, 5 X 6.5 cm, 월터스미술관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독서야말로 최고의 피난처라는 생각이든다. 누구도 그녀의 독서를 방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녀는 책 속의 또 다른 세상에 완전히 몰입해 있으므로. 그녀는 책 속의 세계에 빠져들어 있기에, 책과 그녀 사이에는 그 어떤 불순물도 침입할 수 없다.

이렇듯 독서는 시끄러운 세상을 향한 방패막이 되어준다. 독서는 누구도 쉽게 뚫고 들어올 수 없는 든든한 마음의 요새가 되어준다. 내가 읽고, 내가 이해한 것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마음의 자산이다. 그리하여 독서를 하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오히려 강인해진다.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마음속이 엄청나게 수다스러워진다.

하고 싶은 말이 용솟음친다. 내면에는 수많은 할 말이 요동치고 있지만, 오래오래하고 싶은 말을 묵혀 둔 채, 독서의 감동을 숙성시키는 것이 좋다. 감동은 곧바로 표출하기보다 숙성과 발효의 과정을 거쳐 천천히 표현하는 것이 좋다.

강의를 하거나 글을 써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무언가를 표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더욱 사려 깊게, 더욱 심사숙고하여 자신의 감동을 무르익게 만들어야 한다. 


찰스 다나 깁슨, <그들의 첫 번째 싸움>, 1914 





굳은 표정으로 책을 읽는 남자와 슬쩍 곁눈질로 그를 엿보는 여자의 모습만으로도 대번에 말다툼을 하고서 토라진 연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에게 책을 읽는 것은 관계 맺기가 아니라 ‘배제’와 ‘고립’의 몸짓이다. 찰스 다나 깁슨 <그들의 첫 번째 싸움>


옛 사람들에게 독서란 소리 내어 읽고, 또 읽는 것이었다. 단순한 낭독을 넘어 성독(聲書)이었다. 성독은 노래하듯이 읽고 또 읽어 그 내용이 완전히 몸과 마음에 샅샅이 스며들도록 반복하여 읽는 것이었다.

최소한 100번 이상 소리 내어 읽으면, 그 어떤 글이라도 숨겨진 행간의 의미까지 가슴 깊이 스며들지 않겠는가. 이렇게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던 옛사람들의 독서와 달리, 현대인의 독서는 주로 지극히 조용하고 개인적인 묵독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이 그림은 흥미롭게도 ‘커플의 첫 번째 싸움’을, 남녀가 따로따로 책을 읽는 ‘묵독’의 장면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들이 싸우지 않았더라면, 누군가는 읽어주고, 누군가는 들어주며 아름다운 낭독의 공동체를 이루지 않았을까? 이 커플은 지금 서로에게 토라진 몸짓을 ‘묵독’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린 이미 싸웠으니까, 다정하게 함께 책을 보는 일은 할 수 없다는 ‘배제’와 ‘고립’의 몸짓이 바로 묵독인 것이다. 소리 내어 글을 낭독하는 것은 가족끼리 함께 있을 때 자주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 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면 다른 사람들은 살림을 하거나 또 다른 일에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소리 내어 글을 읽어준다는 것은 ‘우리가 각자 혼자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함께 한다는 것’을 전제할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바네사 벨, <버지니아 울프>, 1912




버지니아 울프는 “무엇이든 언어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되었다”고 했다. 자기만의 방에 앉은 울프는 읽고 쓰기를 반복함으로써 영혼의 독립을 꿈꿨다. 바네사 벨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는 <존재의 순간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든 언어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되었다. 그 온전함이란 그것이 나를 다치게 할 힘을 잃었음을 말한다.” 어떤 힘겨운 사건이라도 그것을 ‘언어화’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마음의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아무리 아픈 상처라도 그것을 ‘글’로 쓸 수 있다면, 그 상처는 나를 예전처럼 아프게 찌르지 않을 것이다.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상처라면, 글로 치유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훌륭한 문학작품은 상처 입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글로 표현된 상처는 총칼이나 실제 사건과 달리,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총칼 앞에서 인간은 쓰러지고, 너무도 충격적인 현실의 사건 앞에서 인간의 영혼은 무너지지만, ‘글’로 표현된 상처는 우리로 하여금 그 이야기의 ‘의미’와 ‘파장’을 생각하도록 만든다. 바로 그 집단적인 거리, 심리적인 거리가 치유를 시작하게 만들 수 있다.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판단.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 또한 작은 발걸음이나마 내디뎌야 한다는 결단. 내가 바뀌면 세상도 조금씩 바뀔 수 있다는 믿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자기만의 방’을 얻기 위해 분투했던 버지니아 울프는 이 세상 수많은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을 향한 투지를 일깨워주었을 뿐 아니라 ‘자기만의 방에서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어주었다.

자기만의 방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경제적 독립’이라면, 자기만의 방을 얻은 후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영혼의 독립’을 실천하는 일이다. 힘들게 얻은 자기만의 방 안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버지니아 울프는 읽고, 쓰고, 또 읽고 쓰는 길을 택했다.

그 길 또한 이 세상 어느 길 못지않은 가시밭길이었지만, 직장 상사에게도, 대중 독자에게도, 출판사에게도 눈치를 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영혼의 완전한 독립을 평생의 과제로 선택했다. 그 길을 선택함으로써 그녀는 이 세상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 자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내게 ‘읽고 쓰는 것’은 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미로에서 ‘나 자신의 길’을 찾는 방법이다. 그런데 그 광대한 미로 속에서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아리아드네의 실’은 하나의 길로만 통해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으로 가는 길, 그 가장 어렵고 복잡한 길은 내가 어떻게 항로를 수정하는지에 따라, 내가 어떻게 세상을 향한 주파수를 맞추는지에 따라, 매번 변화할 수 있다.

휴대폰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매일 읽고 쓰는 삶’을 이미 실천하고 있다. 문제는 어떤 글을 읽고, 쓸 것인가이다. ‘어떤 글을 읽고 쓰는가’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결정한다.

글쓰기란 누군가의 고독이 타인의 고독을 향해 말을 거는 몸짓이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 우리가 외로울 때, 글쓴이의 마음이 더 잘 들리는 것은 독서가 필연적으로 ‘몰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이 산란해질 때마다 눈앞에 보이는 아무 책이나 집어 아무 페이지나 펼쳐 소리 내어 읽기 시작한다.

낭독은 나의 고독이 나 자신을 향해 말을 거는 몸짓이다. 사람들 앞에서 소리 내어 글을 낭독할 때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그 글을 읽어주고 있는 셈이다.

나 자신을 향한 목소리가 낭독을 통해 울려 퍼지는 순간, ‘목소리’는 ‘눈’보다 훨씬 많은 의미와 여운을 실어 나른다. 읽기와 쓰기를 통해 삶의 의미를 한 올 한 올 직조해나갈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이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고 쓰고 다듬고 고치게 만든다.


내가 쓰는 글 속에는 좀 더 희망차고, 좀 더 용감해진 내가 들어차 있기를. 내가 읽는 글 속에, 내가 쓰는 글 속에 ‘어제보다 나아진 나’를 담을 수 있기를. 

[출처] : 정여울 미술평론가,문학평론가 ; <정여울의 그림을 읽다>/ 월간중앙 2016. 5.17.





18. 사계절의 정취를 그리다 - 캔버스 위에서 막 오른 계절의 향연 


봄의 찬란함·여름의 강렬함·풍요로운 가을·스산한 겨울

… 계절마다 간직한 고유의 지문을 색채로 묘사해 

#1. 봄, 설렘을 그리다

계절의 정취를 그린 그림들은 아무리 보아도 물리지가 않는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캔버스 위에 매일매일 그려지는 계절의 지문은 하루가 다르게 시시각각 그 모습이 변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을 맞이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은 매해 새로운 느낌으로 감성을 자극한다.

좀처럼 유행을 타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모네가 연못 위의 수련을 몇 년 동안 지치지도 않고 반복하여 그렸던 이유 중 하나도 이런 감정이 아닐까 싶다.

자연은 아무리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으니. 그 비슷함 속에 항상 미묘한 차이가 있으므로. 하루의 일조량이 시시각각 변하는 동안에도 루앙 대성당의 모습은 천차만별의 차이로 달라지지 않는가. 연못 위에 비친 수련의 모습은 매시간,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달라질 때마다 각각 다르게 비춰지지 않았을까. 자연의 변화 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바로 계절의 변화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꽃이 피고지는 봄날에는 간밤에 비만 내려도 가슴이 철렁할 때가 있다. 어느 날은 밤새 내린 보슬비에 목련이 다 졌을까, 어떤 날은 밤새 내린 폭우에 벚꽃이 다 떨어졌을까 걱정이 되곤 한다.

봄꽃이 얼굴을 내밀고 1년에 단 한 번 그 화사한 자태를 선보이는 기간은 워낙 짧기에 봄은 항상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는 것 같다.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춘효(春曉)’는 봄꽃이 전하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예찬한다.

“봄잠에 취해 새벽 오는 줄도 몰랐더니, 여기저기서 새들이 지저귀는구나, 밤새 세차게 몰아친 비바람 소리에, 떨어진 꽃들은 또 얼마나 될까.(春眠不覺曉 處處聞啼鳥 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 딱 하룻밤 사이인데, 꽃은 몰라보게 피어나고, 새순은 몰라보게 돋아나며, 이미 피어난 꽃들은 ‘나는 간다’는 인사도 없이 우리 곁을 떠나가버린다. 봄날의 아름다움은 이 찰나의 절정을 아쉬워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전기, <매화초옥도>, 19세기



나뭇가지에는 눈송이처럼 새하얀 매화가 뒤덮여 있고, 산에는 초록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한다. 봄의 풍경이 소담스럽다. 전기, <매화초옥도>



내게 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 바로 <매화초옥도>다. 멀리서 보면 포슬포슬한 눈송이들처럼 보이는 매화 꽃잎들은 ‘겨울’과 ‘봄’ 사이의 경계가 되는 흐릿한 시간을 그려낸다. 매화가 흐드러진 이른봄의 설레는 감성을 화려하기보다는 소담스럽게 담아낸 화가의 너른 품이 느껴진다.

이 그림 속에서 인간은 깨알처럼 작다. 매화 꽃송이 하나만한 크기의 얼굴은 그 생김새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자연의 넉넉한 품에 아기 캥거루처럼 쏙 안긴 인간의 모습은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그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을 암시해주는 듯하다.

인간은 이토록 작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 계절의 변화도, 날씨의 변화도, 오늘 하루 기분의 변화조차도 제대로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없는 아주 작고 여린 존재라는 것. 그렇게 거대한 자연의 품에 파묻혀 아주 자세히 보아야만 간신히 보일 듯 말 듯하게 살아가던 인간의 모습이 문득 아름답다.

연둣빛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나무들이 헐벗은 산에 하나 둘씩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모습 또한 싱그럽다. 봄이 만개하기 직전, 이제 막 봄이 피어나는 시간의 가녀린 아름다움을 설레는 마음으로 상상하게 만드는 그림이다. 



봄의 향연을 보며 대자연을 예찬하다

보티첼리, <프리마베라>, 1476년경 




봄꽃이 만발한 숲 속에서 여신들이 저마다 화려함을 뽐내며 향연을 벌인다. 사람보다 자연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리는 동양과 세계관의 차이를 뚜렷이 보여준다. 보티첼리, <프리마베라>




봄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그림이 바로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다. 여기서는 철저히 신(神)들이 주인공이다. 인간의 모습과 똑같이 닮은, 그런데 인간들 중에서도 출중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주인공들만 모아놓은 듯한 이 신들의 향연은 ‘봄’의 화려한 재림을 떠들썩하게 축복하는 듯하다.

전기의 <매화초옥도>를 보다가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를 보면 동서양 사람들의 자연관이 이토록 다르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전기의 <매화 초옥도>에서 주인공은 ‘매화’와 ‘초옥(草屋)’이다. 향기로운 봄꽃과 아주 작은 초가집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오밀조밀한 산들의 풍경, 그것이 전부다.

이 그림 속에서 인간은 커다란 역할을 하지 못한다. 아니, 인간은 자연 속에서 아주 작은 역할을 기꺼이 떠맡음으로써 인간의 소중한 본분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프리마베라>에서 봄은 분명히 주인공이지만, 봄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각은 ‘봄의 여신 프리마베라’에게 가 있다. 여신 프리마베라의 의상은 온통 꽃무더기다.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꽃을 두른 것처럼 보이는 이 현란한 의상 자체가 봄의 은유이자 의인화일 것이다.

봄이 아름다운 여신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세계관도 흥미롭고, 봄을 묘사하면서 자연은 배경이나 소품처럼 축소되어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화면 왼쪽에서 미의 여신 세 명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듯 화려한 자태로 춤추고 있고, 화면 오른쪽에서 서풍(西風)의 신 제피로스는 아름다운 요정을 납치해가려는 듯 강한 봄바람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아프로디테는 이 모든 봄의 주인공들의 요란한 콘테스트 와중에도 마치 ‘내가 진짜 주인공이다’라는 느낌으로 화면 한가운데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봄의 여신 프리마베라는 ‘계절’ 혹은 ‘시간’을 알려주는 전령처럼 화면의 중심에서 살짝 비껴가 있고, 아프로디테는 이 모든 봄의 메시지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바로 자신, 즉 ‘사랑의 여신’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이중섭, <봄의 아이들>, 1952~1953



1. 들판에서 봄나들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천진함 속에서 순수한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이중섭, <봄의 아이들> / 2. 옷섶을 풀어헤친 늙은 선비가 무더위를 피해 나무 그늘 아래서 발을 시냇물에 담그고 있다. 탁족은 우리 선조들이 여름에 즐겼던 피서이자 놀이문화였다. 이경윤, <고사탁족도>


전기의 <매화초옥도>나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가 봄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렸다면 이중섭은 봄을 맞이하는 인간의 마음을 그린 것 같다. 봄나들이라는 말은 있지만, 여름나들이나 겨울나들이라는 말은 쓰지 않지 않는다. ‘나들이’라는 설렘의 이미지는 오직 봄에만 어울리는 감각적인 단어다.

이 그림 속의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 중력에서 자유로워 보인다. 과학적인 의미의 중력은 물론, 사회적인 중력, 심리적인 중력으로부터의 자유. 아무것도 이들을 방해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아무것도 이들을 규정할 수도 분석할 수도 없다. 순수한 기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봄의 향기 속에서 피어나고, 튀어오르고, 날아오른다. 발가벗은 아이들의 티없는 영혼은 오직 마음껏 몸을 움직이며 놀이에 참여하는 기쁨에만 집중되어 있다. 세상 무엇에도 구속당하지 않는 기쁨이 이 그림 속에 있다. 이 그림 속의 아이들은 영혼 깊숙이 침투한 뿌리깊은 자유,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마음의 봄’을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2. 여름, 열정과 휴식



위태로운 돌다리를 건너 산꼭대기에 앉아 더위를 식히는 선비의 모습은 세속의 번뇌를 초월한 신선인 듯 그려졌다. 김홍도, <관산탁족도>


이경윤,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 16세기 말

시냇가에 앉아 구두와 양말을 벗고 탁족(濯足)을 한 기억이 언제던가. 도시의 편안함에 길들어버린 현대인은 시냇가에 그림같이 앉아 가만히 발을 씻는 지극히 단순한 기쁨을 잊어버렸다. 인간의 맨몸과 자연의 일부가 만나는 시간, 그 날것의 즐거움은 ‘미디어’와 연결되어 있을 때는 좀처럼 느낄 수가 없다.

우리는 텔레비전, 인터넷, 휴대폰 등의 미디어를 능숙하게 활용하느라 정작 우리의 ‘몸’이라는 최고의 미디어를 소홀히 한다. 시원한 계곡 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탁족회, 탁족정이라는 것이 있을 정도로 옛사람들에게 탁족은 현대인의 바캉스처럼 하나의 어엿한 놀이문화였다.

돌아가면서 시를 짓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던 시절, 탁족은 여름날의 휴식을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놀이문화였다.

휴대폰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
아주 슴슴한 곳
강원도 늦겨울 텅 빈 골짜기도 좋지만,
알맞게 사람 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부석사 뒤편 오전(梧田)약수 골짜기
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푸른 옷 바꿔 입을 때
흔들어봐도 안 터지는 휴대폰
(…) 시냇가에 앉아 바지 걷고 구두와 양말 벗는다
팔과 종아리에 이틀 내 모기들이 수놓은
생물과 생물이 선약 없이 문득문득 화끈하게 만난
찌르듯이 아팠던
문신(文身)!
-황동규, ‘탁족’ 중에서


이 시는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곳에서야 비로소 자기 몸이 자연과 만나는 생생한 감각을 느끼는 화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옛사람들이 그린 탁족도를 보면 인물이 아주 멀리 그려져 있다.

눈, 코, 입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사람이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만 보이는 정도의 원거리에서 인간이 그려지고 있다. 인간은 ‘주체’라기보다는 ‘풍경의 일부’로서 자연에 속해 있다. 이 아름다운 탁족도는 자연의 거대한 품에 안겨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기쁨임을 노래하고 있다. 



김홍도, <관산탁족도>, 연도미상




김홍도 관산탁족도 연도 미상



<관산탁족도>에는 산을 바라보며 발을 씻는 한 사내의 모습이 마치 세속에서의 모든 고통을 초월한 듯한 표정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진나라의 시인 좌사(左思)는 영사시(詠史詩)에서 벼슬에서 물러나 조용히 자신을 지키는 삶을 노래했는데, 이 시에는 탁족의 즐거움이 이렇게 묘사된다.

“천 길 언덕에서 옷을 떨치고, 만 리 강물에서 발을 씻는다.(振衣千岡 濯足萬里流)” 천 길이나 되는 높디높은 언덕에서 귀찮은 옷 따위는 다 벗어 던지고, 만 리나 되는 강물에서 발을 씻는 즐거움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정말 천 길 언덕, 만 리 강물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일상 속에서 ‘멀리 떨어진다는 것’ 자체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동규 시인이 <탁족>에서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곳’에서 진정한 탁족의 즐거움을 느꼈듯이, 진나라의 시인 좌사 또한 벼슬에서 멀리 떨어진 곳, 출세를 위한 진흙탕 싸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무념무상의 자유를 느낀 것이다. 김홍도 또한 ‘산을 바라보며 발을 씻는’ 행위에서 지상의 고통을 초월한 듯한 탈속의 경지를 그려내고 있다. 


폴 고갱, <신성한 샘, 달콤한 몽상>, 1894




일년 내내 여름인 천국의 섬 타히티를 그린 고갱의 그림은 붉고 정열적인 기운이 넘친다. 직선과 각이 진 면 일색의 도시와 달리 그림 속의 곡선들이 타히티의 풍요로움을 뽐낸다. 고갱, <신성한 샘, 달콤한 몽상>


이 정열적인 색채를 빼고 고갱을 말할 수 있을까. 고갱은 타히티 원주민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발산해내고 있는 이 찬란한 원색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연평균 기온이 27도 안팎이고, 평균 수온도 섭씨 26도 정도인 천국의 섬 타히티. 1년 내내 여름이나 마찬가지인 이 섬에서 고갱은 세상 그 어떤 대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타히티만의 색채에 빠져들었다.

겨울을 모르는 사람들, 추위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만이 뿜어낼 수 없는 본능적인 따스함의 기운을, 고갱은 화폭에 담았다. 타히티 시절 고갱의 그림에는 ‘각진 사물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둥글둥글한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의 몸은 물론 자세, 꽃과 나무들, 바다나 바위 하나하나도 풍만한 곡선으로 가득하다. 삭막한 도시의 네모진 풍경들, 모든 것이 직선으로 마름질된 도시의 날카로운 직선이 고갱의 타히티 연작에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생명의 모든 가능성이 가장 풍요로운 색채로 드러나는 시간, 그것이야말로 여름의 본질이니까. 여름의 본질을 가장 깊이 꿰뚫어버린 고갱의 야심 찬 색채 실험은 타히티에서 비로소 최고의 빛을 발휘할 수 있었다. 



#3. 가을, 풍요와 평화



인물의 표정이나 풍성한 수확물도 없이 가을의 풍요와 여유를 이토록 잘 표현한 그림이 또 있을까. 단 두 가지 색으로만 표현한 가을의 풍경이 평화롭다. 고흐, <시에스타>


빈센트 반 고흐, <시에스타>, 1890

가을은 축복받은 수확의 계절이지만, 그 수확이야말로 엄청난 노동이다. 아무리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 되어도, 그 많은 열매와 곡식들을 하나하나 채취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고흐는 풍성한 가을의 이면에 숨어있는 뜻밖의 표정을 발견해낸다.

밀레의 그림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긴 하지만, 고흐의 독창성이 훨씬 진하게 느껴진다. 고흐는 노동하는 사람들을 일종의 풍경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는 평범한 노동 속에서 인간의 신성함과 위대성을 발견하려 한다. 그림 속 농부들은 잠깐의 낮잠이 곧 천국의 휴식 같은, 그런 찰나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

이토록 바쁜 계절이 아니었더라면, 이 평범한 낮잠이 이토록 달콤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힘겨운 노동이 아니었더라면, 이 잠깐의 휴식이 이토록 눈부시지는 않았을 텐데. 고흐의 그림에는 이런 안타까움 속의 간절한 축복의 열기가 느껴진다.

이 그림은 사실 겨울에 그려졌다. 고흐가 생 레미 드 프로방스에 머물던 그해 겨울, 색채의 탐험가 고흐에게는 다른 계절에 비해 단조로울 수밖에 없는 겨울의 풍경이 지루했을 것이다. 1889년에서 1890년으로 넘어가는 시기, 고흐는 다양한 작가의 모작을 하면서 색채 감각을 연구했다.

단순히 명작을 베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자신만의 감성과 색채의 뉘앙스를 넣으려 노력했다. 고흐의 세계관, 고흐다운 붓질, 고흐적 색감을 찾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런 그림이 나왔다.

고흐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마치 시에스타 같은 달콤한 휴식을 느끼지 않았을까.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 소중하게 내려놓은 농기구, 그리고 ‘이 순간만은 얼굴 없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결심한 듯 얼굴을 한사코 가린 수건. 모두가 이 그림이 자아내는 달콤한 휴식의 분위기를 돋우어준다.

이때 그린 그림들은 동생 테오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들이기도 했다. 열정과 광기의 대명사였던 형 고흐에 비해, 언제나 차분하고 다정했던 동생 테오가 그토록 원하던 따스한 색감, 평화로운 분위기가 스며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 그림에는 고흐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달콤한 휴식, 찰나의 축복, 살아간다는 것 자체의 눈부신 기적이 깃들어 있다. 우리가 가을에 느끼는 본능적인 ‘감사’의 느낌 또한 이런 느낌이 아닐까. 



잭슨 폴락, <가을의 리듬>, 1950

사물을 ‘형체’로 인식하는 데 익숙해진 우리의 눈에는 이 그림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나무이구나, 이것은 뿌리구나, 이것은 나뭇잎이구나, 이런 식으로 분석해야만 사물을 이해하는 어른들의 눈에는 잭슨 폴락의 그림이 당황스럽다.

하지만 이 그림을 ‘음악’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갑자기 마음에 새로운 눈이 떠지는 느낌이다. 그림을 음악처럼 ‘들어본다면’, 무슨 소리가 들릴까. 힌트도 있다.

‘가을의 리듬(autumn rhythm)’이라니. 우리가 가을에 듣는 소리들이 이 그림 속에 음악처럼 수놓아진 것은 아닐까.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소리, 플라타너스를 밟으며 천천히 걸어가는 쓸쓸한 남자의 발걸음 소리. 이 모든 것이 가을의 리듬 아닐까. 이런 상상을 하면서 이 그림을 보니 더 이상 잭슨 폴락의 그림이 어렵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 그림은 음악이다. 이 그림을 음악이라고 생각하고 가만히 그 울림을 들어보려고 애쓰면, 그림을 음악으로 표현한 화가의 상상력이 더욱 눈부시게 느껴진다. 드립 페인팅(drip painting)이라 불리는 폴락의 화법은 그 자체로 ‘소리가 아주 많이 나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물감을 방울방울 떨어뜨리고, 일부러 흩어지게 하고, 때로는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감의 행로를 그대로 내버려두면서, 그는 신명 나게 물감과 붓과 캔버스와 어우러져 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 춤이 항상 즐겁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잭슨 폴락은 분명 그림으로 음악을 창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꼭 눈을 뜨고 그림을 볼 필요는 없다. 이 그림을 이미 요모조모 다 뜯어보았다면, 이제 가만히 눈을 감고 이 그림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음악소리를 들어보자.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이는 것들을 상상하면서. 눈을 감고, 우리가 가을의 소리라 믿는 것들을 들어보자.

걸을 때마다 발 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나뭇잎들의 노랫소리, 가을이면 어쩐지 더 쓸쓸하고 처연하게 느껴지는 새들의 울음소리, 책이나 신문의 책장이 가을바람에 휘리릭 넘어가는 소리. 그 모든 가을의 소리들이 우리의 가슴속을 꽉 채울 것이다. 어쩌면 이 작품은 가을에 들리는 자연의 온갖 소리의 악보일지도 모른다. 



#4. 겨울, 무언가를 떠나 보낸다는 것



1. 눈 덮인 평화로운 마을에는 얼음을 지치는 아이들로 활기가 넘친다.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하는 사냥꾼들의 발걸음이 경쾌하게 느껴진다. 피터 브뤼겔, <눈 속의 사냥꾼들> / 2. 가을을 형체가 아닌 음악으로 표현한 이 그림에는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소리가 불규칙하게 어우러져 묘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잭슨 폴락, <가을의 리듬>


피터 브뤼겔(Pieter Brügel the Elder), <눈 속 사냥꾼들>, 1565

겨울은 ‘추위 때문에 자꾸 움츠러들고 싶은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차게 움직이고 싶은 마음’ 사이의 투쟁을 불러일으킨다. 가끔은 추운 겨울에 에너지를 비축해두기 위해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한없이 부럽지만, 겨울에도 ‘아직 깨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문명의 축복에 감사하는 마음도 크다.

난방기구의 보편화와 음식 저장기술의 발달로 현대인은 편안하게 겨울에도 사계절의 식품을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수백 년 전의 사람들이 겨울에 받았던 가장 큰 스트레스는 ‘먹거리’에 대한 걱정이었다. 피터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들>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바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사냥꾼들의 역동적인 하루를 매우 실감나게 그려냈다.

1월이나 2월경, 가장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바지런히 사냥을 떠나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사냥꾼들의 힘겨운 삶을 생동감 넘치는 필력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이제 사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조금만 더 버티면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무거운 발걸음을 간신히 버티게 하는 것 같다. 돌아가야 할 마을은 너무도 평화로워 보인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스케이트나 썰매를 타고 있다.


이 아버지들은 저토록 평화로운 아이들의 일상을 지켜주기 위해 밤낮으로 애써야 했던 것은 아닐까.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간신히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순간, 그들이 지켜줘야 했던 일상의 고요함, 그들이 돌아가고 싶은 따뜻한 가족의 품이 힘겨운 시간들을 보상해준 것이 아닐까. 



정선, <설평기려(雪坪騎驢)>, 1740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나는 나그네와 작은 산봉우리의 품에 안긴듯한 마을 풍경이 겨울의 쓸쓸함과 포근함을 함께 전달한다. 정선, <설평기려>


눈 쌓인 벌판 위를, 나그네는 나귀를 타고 터벅터벅 지나가고 있다. 겸재 정선이 영조 16년(1740년) 가을 양천 현령으로 부임하던 해 겨울에 그린 그림이다. 새벽에 일어나보니 온통 새하얀 설경이 펼쳐진 어느 겨울날, 겸재는 그 장엄한 설경에 매혹되어 갑자기 훌쩍 떠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림 속의 나그네처럼 겸재는 별다른 짐도 없이 그저 삿갓 하나 머리에 쓴 채 터벅터벅 길을 떠났다. 그림 속에 든든하게 서 있는 두 개의 봉우리는 바로 우장산이다. 산을 그린 방식이 매우 재미있다. 산들은 마치 뱃속에 아기를 품은 어머니처럼 따스하게 집들을 가만히 품어 안고 있다.

별다른 정처도 없이, 그저 걷고 또 걷는 나그네는 이 아름다운 설경을 감상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욕심도 없어 보인다. 그는 무엇을 찾으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 새하얀 설경 속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 하나로 새벽길을 나선 것 같다. 그림에 담긴 나그네의 마음을 제화시는 이렇게 그려낸다.

 ‘길구나 높은 두 봉우리, 아득한 십리 벌판일세. 다만 거기 새벽 눈 깊을 뿐, 매화 핀 곳 알지 못하네(長了峻雙峰 漫漫十里渚 祗應曉雪深 不識梅花處).’

겨울이 유독 쓸쓸한 계절로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물리적인 온도와 시각적인 인상 때문이다. 사람의 체온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스산한 겨울바람, 급격히 줄어드는 행인들, ‘집이 제일 좋다’는 느낌이 드는 계절이 바로 겨울인 것이다.

하지만 이 생물학적인 추위보다 더 쓸쓸한 감정은 ‘한 해가 다 간다’는 상실감이다. 또 한 해 시간이 가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또 한 살 나이를 더 먹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겹쳐 추운 겨울은 더욱 스산하게 느껴진다.

눈 온 뒤 사립은 늦도록 닫혀 있고
한낮 다리에는 건너는 사람 적네
화로 잿불에는 아지랑이 모락모락
주먹만한 알밤 혼자 구워 먹는 맛
-이항복, ‘눈 내린 뒤에(雪後)’


주변이 쓸쓸해질수록, 바깥 세상이 춥고 스산할수록,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워진다. 평소에는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찬비 내리는 날이나 눈 내리는 날 집만큼 편안한 곳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행복이나 감사를 느끼는 시간은 어떤 ‘결핍’을 바라볼 때다.

나는 따뜻한 방안에 있고, 바깥에는 눈이 내릴 때. 이항복의 ‘눈 내린 뒤에’에서 주인공은 주먹만한 알밤을 혼자 구워먹으며 눈 내린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1행과 2행의 스산한 분위기 뒤에, 3행이 살짝 다리를 놓아주고, 4행에서는 따뜻한 반전이 일어난다.

 2행까지 읽으면, 우울한 시일까, 외로움을 달래는 시일까 짐작하게 되는데, 4행에서는 까르륵 웃게 된다. 겨울의 즐거움이란 이런 것. 아무리 추워도, 아무리 외롭고 쓸쓸해도, 따듯한 아랫목에서 군밤 하나 까먹으면 모든 슬픔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 온갖 사소한 즐거움들이 위대한 복락이 되는 곳. 거기 우리들의 겨울이 있다.

[출처] : 정여울 미술평론가,문학평론가 ; <정여울의 그림을 읽다>/ 월간중앙 2016. 7.17.


19. 가족 이야기를 담은 그림들 - 가족, 그 모든 상처와 행복의 기원 

“행복한 가족은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족은 모두 제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_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중에서



아버지는 신문을, 어머니는 아기를, 노모(老母)는 아기와 며느리를 바라본다. 서로의 눈을 바라봐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은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도 서로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자연스러움’이다. 에두아르 블라르(Edouard Vuillard), <가족의 점심> / 그림제공·정여울


#1. 가족,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

어린 시절 매일 아침 눈 비비며 일어나면 ‘어서 세수하고 양치질하고 밥 먹어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아버지는 ‘아침을 안 먹으면 학교를 보내지 않겠다’는 무시무시한 엄포를 놓으셨다.

늦게 잠든 아침에는 입맛이 없기 마련인데,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한 술 뜨고 나면 그제야 무거운 눈꺼풀이 반짝 떠지곤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가족끼리 함께 아침을 먹는 것’을 엄격한 생활규칙으로 삼았던 가정이 꽤 많다.

하루 일과를 꼭 가족과 함께, 그것도 함께 밥을 먹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제의(ritual)였다. ‘우리가 아직은 함께’라는 사실의 눈부신 확인. 그것이 아침을 먹는 일의 숨은 의미 아니었을까.

너무 바빠서 아침을 거르고 아침과 점심을 대충 얼버무린 ‘아점’을 먹거나, 가끔 ‘브런치’라는 핑계를 대며 점심도 저녁도 아닌 그 어딘가에서 간식도 아니고 정식도 아닌 모호한 끼니를 메우는 현대인들. 우리는 아침을 함께 먹는 가족과 멀어짐으로써 점점 외로워지고 허약해진 것은 아닐까. 



에두아르 블라르, <가족의 점심>, 1899

이 그림은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지만 ‘그래도 함께’ 있는 가족의 점심 식사를 여유롭게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는 신문을 보고 있고, 어머니는 아기를 보고 있고, 노모(老母)는 아기와 며느리를 함께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각자 딴 곳을 바라보고 있지만, 불행한 가족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기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미소, 며느리를 바라보는 노모의 미소 때문이다. 벽에 걸린 그림, 식탁의 풍성한 음식들, 빨간 체크무늬 식탁보 등이 유복하고 단란한 가정의 따뜻한 분위기를 증언해주는 듯하다.


단지 음식을 먹기 위한 ‘가족의 식탁’이 아니라, 쉬엄쉬엄 여유롭게 각자의 시간을 가지며 점심을 먹는 모습 자체가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정하게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지만, 가족 구성원들 누구도 서로의 눈치를 보지 않는 그 ‘자연스러움’이 가족의 편안한 분위기를 이끌어내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식탁이지만, 가족 간의 배려와 사랑이 흘러 넘친다. ‘오늘 우리가 노동한 대가로 이 저녁 식탁을 채웠다’는 은근한 자부심도 서려 있다.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힘겨운 하루의 노동이 끝난 후 함께 모여 소박한 저녁 식탁에 앉은 가족들의 식사 장면은 거룩하고도 숙연하다. 아름답고 화사하지 않다는 이유로, 비례와 초점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지어 추하고 끔찍하다는 이유로, 당시 이 작품은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고흐는 좌절하지 않았다.

고흐는 어느 평범한 농가의 소박한 식탁에 서린 숭고한 아우라를 그려냈고, 그 마음은 오래오래 인류의 가슴에 살아남았다. 고흐가 그린 아름다움은 현란한 색채나 완벽한 비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 인물들의 신산한 삶 그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이었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이 식탁에는 오직 감자와 뜨겁게 끓인 차(茶)가 전부다. 나이프도 포크도 없이 그저 손으로 감자를 먹는 이 농부의 식탁은 어떤 화려한 장식도 없지만 ‘오늘 우리가 노동한 대가로 이 저녁 식탁을 채웠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서려 있다.

이 ‘최소한의 식탁’에서 최대한으로 흘러넘치고 있는 것은 가족 간의 배려와 사랑이다. 굶주림과 피로감에 지쳐 있는 이 농가의 식탁에서 빛나고 있는 것은 서로를 향한 뜨거운 관심과 이해의 눈빛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빛에는 걱정과 배려가 가득하다.

당신 오늘도 힘들었겠구나. 나보다 당신이 더 힘들었겠군. 감자 한 알이라도 서로의 입에 더 넣어 주고픈 가족의 안타까운 사랑은 이 그림의 어두운 색조를 극복하는 환한 마음의 빛으로 타오르고 있다. 



노먼 락웰,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1943



가족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줄 수 있어서 뿌듯하고, 이렇게 행복한 집의 가장이어서 자랑스럽다. 가족과 함께 하는 최고로 행복한 순간을 담아냈다. 노먼 락웰, <빈곤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


‘행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듯한, 호쾌한 그림이다. 노먼 락웰의 이 작품은 행복한 가정의 모범답안을 이상적인 형태로 자신감 넘치게 보여준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제각기 서로 다른 표정으로 비슷한 행복을 노래하는 대가족의 구성원들. 요리를 한 사람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가족 모두에게 해먹일 수 있다’는 뿌듯함에 설레고, 접시 뒤에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아버지는 ‘이렇게 행복한 집의 가장은 바로 나’라는 듯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식탁머리에 서 있다.


자녀들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바지런히 속닥거리며 풍성한 식탁을 더욱 활기차게 만들고 있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우리 옛 속담처럼, 이 그림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듯한 최고로 행복한 순간을 ‘함께 먹고, 함께 수다 떨며, 함께 하나의 식탁에 앉아 있는 즐거움’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에도 바로 이런 명절의 풍성한 음식이야말로 가장 눈부신 희열의 순간을 만들어주는 최고의 주인공임을 강조하고 있다.

동서고금 어디서나 행복한 사람들의 얼굴은 비슷한 것이구나, 새삼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다. 힘겨운 시간을 견디게 해주는 힘, 그것은 우리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 수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는 기억의 소중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이튿날 아침에 우리는 고운 옷으로 치장하고 온 친척집과 이웃집에 세배를 드리러 갔다. 날씨는 꽤 차가웠다. 길바닥은 얼음장처럼 얼어붙었고 칼날 같은 바람이 마구 휘몰아쳤으나 우리들은 신이 나서 집집마다 돌아다녔다. 그리고 잘 왼 세배의 말들을 가는 곳마다 옮겼다. 어디에서나 따뜻하게 맞아주었으며 단 과자와 과일을 대접받았다. 기쁘고 우스운 이야기를 듣고, 맛있는 음식만을 먹을 수 있는 그런 명절은 얼마나 즐거웠던가?

(…)

아무도 찌푸린 얼굴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싫어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 마름으로 있는 둔한 순옥까지 여느 때는 나를 무능하다고 비꼬았으나, 이날만은 “언젠가 너도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다정스레 말해주었다. 모든 사람이 농을 걸었고 선물을 주었다.

(…)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보았다. 수암은 벌써 코를 골고 있었다.”(이미륵 지음, 전혜린 옮김, <압록강은 흐른다>, 범우사, 2000)

#2. 가족이기에, 우리는 닮았다




가족의 닮음은 숨겨지지 않는다. 그 닮음이 때로는 콤플렉스일지라도 그 닮음을 극복해가는 것이 주어진 운명과 싸우는 인간의 아름다움임을 고야는 말하고 있다. 프란시스 고야,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초상>

프란시스 고야,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초상>, 1800~1801

가족사진을 찍으러 가는 날은 모두가 정신이 없고 엄청나게 부산스럽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멋지게 보일까, 몸단장에 바쁜 가족들의 모습은 활기차면서도 긴장되어 있다. 사진관에 도착하면 긴장감이 극에 달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카메라 앞에서 더욱 긴장하게 되어 있으니. 사진사는 가족의 경직된 표정을 풀어주려 처음 만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농담을 던지고, 가족들의 딱딱한 얼굴 표정은 그제야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한다.

몇 초만 잘 버티면 완벽한 가족사진을 얻을 수 있는 지금과 달리, 화가 앞에서 오랜 시간 정해진 포즈를 취해야 했던 옛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족 모두가 함께 모인 초상화나 사진에는 ‘육체’는 언젠가 사라지지만 ‘기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의 마음이 담겨 있다.

고야는 이렇게 근엄한 왕실 가족들의 모습 속에서도 모종의 따뜻한 기운을 감지해낸다. 그것은 바로 저토록 닮은 가족들 사이에서 결코 숨길 수 없는 ‘서로의 닮음’이다. 눈빛이나 입매, 체격이나 머리카락 색깔 등 다양한 부위에서 조금씩 서로를 알록달록하게 닮은 가족들의 모습이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를 미소짓게 만든다.


가족은 닮음의 공동체라는 것을, 서로를 향한 숨길 수 없는 유사성의 공동체라는 것을 느끼게 하기에. 그 닮음이 때로는 쓰라린 콤플렉스일지라도, 우리는 그 닮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러나 세대를 거듭해갈수록 조금씩 그 콤플렉스나 운명적인 닮음을 극복해가는 것이야말로, 주어진 운명과 싸우는 인간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엘리자베스 르 브륀, <딸과 함께 한 자화상>, 1789




엄마와 딸, 단 둘이지만 조금도 모자람 없이 화면을 꽉 채운다. 이 자화상을 통해 ‘딸이 있어, 비로소 엄마가 될 수 있었던’ 한 여인의 무한한 행복을 보여주는 듯하다. 엘리자베스 르 브륀, <딸과 함께 한 자화상>

이 초상화는 매우 단순한 행복의 구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특별한 자부심이 넘친다. 대가족의 구성원이 보이지 않은 채로, 조촐하게 엄마와 딸만이 함께 하고 있는데도, 조금도 모자람 없이 꽉 차 보이는 화면구성이 보는 사람을 미소짓게 만든다. 이 그림은 가족의 초상이 아니라 자화상이다.

가족은 ‘내가 나임을 보여주는 관계’가 아닐까. 가족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갈등과 슬픔을 경험하지만, 그 복잡한 관계의 그물 속에서 ‘나다움’을 만들어간다. 엘리자베스 르 브륀의 자화상은 ‘딸이 있어, 비로소 엄마가 될 수 있었던’ 한 여인의 무한한 행복을 보여주는 듯하다.

화가는 엄마와 딸, 이 둘이면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을 것만 같은 행복한 순간을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은 온몸으로 속삭이고 있는 듯하다. 그 무엇도 필요 없다. 너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바로 그런 충만한 자신감이야말로 가족이 가져다주는 가장 빛나는 삶의 응원일 것이다. 



윌리암 아돌프 부그로, <잠든 아기를 바라보는 젊은 엄마>, 미상



‘잠든 아기’는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바라보고만 있어도 그저 좋은 존재다. 가족의 행복은 누구를 ‘소유’하는 게 아니라 ‘함께 있음’에 원초적 뿌리가 있는 듯하다. 윌리암 아돌프 부그로, <잠든 아기를 바라보는 젊은 엄마>


바라보고만 있어도 그저 좋은 존재. 그가 나에게 무엇을 주지 않아도, 그저 일방적으로 어여쁘고 뿌듯한 존재. 그것이 바로 ‘잠든 아기’일 것이다. 가족의 원초적인 행복을 보여주는 이 그림에는 아버지도, 조부모도, 다른 형제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엄마와 아기만으로도 충분히 꽉 차 있는 화면은 ‘행복의 뿌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앞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수많은 역경이 닥쳐오겠지만, 아마 이 아이도 엄청난 말썽을 피우겠지만, 지금은 완벽하게 평화롭다.

아이가 잠들어 있는 이 시간, 잠든 아기만큼이나 해맑은 표정을 가득 머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행복의 원초적 뿌리가 어떤 대상의 ‘소유’가 아닌 ‘함께 있음’에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그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좋은 관계. 잠든 모습만 봐도 무한한 행복이 느껴지는 관계. 그것이 가족의 이상향이 아닐까.

작가 척 팔라닉은 ‘부모’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부모는 당신에게 생명을 주었는데, 이제 당신에게 자신들의 인생까지 주려고 한다.”

정말 좋은 부모들은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생명을 준 것도 모자라, 자신들의 인생까지 다 바치려고 하니. 하지만 바로 그 희생 때문에 자녀가 엄청난 부담감을 느낄 수도 있고, 그 희생이 때로는 집착으로 바뀌어 자식들의 인생을 짓누를 수도 있으니. 사랑을 희생과 동의어로 생각하는 부모보다는, ‘자식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 사이의 거리를 둘 줄 아는 부모가 훨씬 지혜롭게 더욱 오랫동안 자식과의 행복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3. 가족,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



너무 흔한 그림이지만 감동은 언제나 뭉클하게 다가온다. 더 욕심내지 않는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보낼 수 있어 감사하는 부부의 평화로운 모습이 담겨 있다. 프랑수와즈 밀레, <만종>


프랑수와즈 밀레, <만종>, 1857~1859

밀레의 <만종>은 힘겨운 농사일이 다 끝난 뒤, ‘오늘 하루도 이토록 무사하게 지나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는 듯한 두 부부의 평화로운 모습이 담겨 있다. 너무도 단순한 구도이고, 너무 많이 노출된 나머지 ‘이발소 그림’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볼 때마다 뭉클한 감동을 받는다.

아마도 그건 이 그림이 ‘함께 있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때문일 것이다. 부부로 보이는 이 두 남녀의 ‘함께 있음’ 속에는 삶에 대한 무한한 감사가 스며 있다. 더 나은 내일, 더 엄청난 수확, 더 짜릿한 행복 같은 것을 바라지 않는 두 사람. 그들은 그저 오늘 하루가 무사히 지나간 것만을 감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의 감자 바구니가 실은 죽은 아이를 그렸다가 지우고 덧칠한 것이라는 루머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농부의 하루’가 저물어가는 풍경 자체에서 밀레가 찾으려 했던 원초적인 생의 에너지가 아닐까.

애니메이션 감독 트레이 파커는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형제자매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몰라. 물론 많이 싸우겠지, 하지만 항상 누군가 곁에 있잖아,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곁에 있잖아.”

정말 그렇다. 항상 함께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인간에게는 사실 자가발전의 동력이 자주 고갈되곤 한다.

그저 나의 힘만으로, 나의 의지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게 간신히 쥐어짜낸 자기중심적 에너지는 금방 소모되고 만다. 동기부여란 항상 외부에서 온다. 타인의 자극, 타인에 대한 부러움이나 질투, 타인의 조언과 충고, 타인을 향한 그리움. 모두가 더 나은 삶을 향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끊임없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곁에 둘 수 있는 길이 바로 가족을 만드는 것이다. 



클로드 모네, <죽은 아내 카미유의 침상>, 1879



모네가 그린 절망의 색채.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모네는 아내 카미유가 죽어있던 침대를 통해 ‘우선 멈춤’의 시간을 그려냈다. 클로드 모네, <죽은 아내 카미유의 침상>


클로드 모네 하면 화사하고도 풍요로운 색채를 먼저 떠올렸던 나에게 이 그림은 충격이었다. 내가 알기로, 이건 모네의 색감이 아닌 것만 같았다. 자연광이 뿜어 올릴 수 있는 가장 영롱한 빛을 골라 그리는 것만 같았던 모네의 화사하고도 부드러운 색채는 이 그림에서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림 제목을 보니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이것은 모네가 느낀 절망의 색채였다. 모네의 아내 카미유가 죽어 있던 그 침대, 그 침대 속에 푹 파묻혀 있던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어찌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네는 병으로 죽은 아내의 침상을 지키며 얼마나 깊은 고뇌에 빠져야 했을까. 지베르니에 정착한 이후로는 전심전력으로 그림만 그리던 모네에게, 아내의 죽음은 ‘시간의 멈춤’과 같은 것이었다.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모네에게도, ‘우선 멈춤’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 어쩔 수 없는 멈춤의 시간은 바로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찾아온다.

가족이란 그런 존재다. 누군가 많이 아프거나 죽음이 가까워지면, 내 모든 일과를 다 놓아버려야 하는 존재. 자연의 빛깔을 자신의 마음보다 더 크게 그리곤 했던 모네는 이 그림에서 거의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상의 색채보다 더 크게 그려놓은 것 같다.

 이 그림은 아내 카미유의 침상을 그린 것이지만 실제로는 모네의 절망, 모네의 상실감이야말로 진정 숨은 주인공이 아닐까. 



조셉 라이트, <자신이 짠 직물을 도로 풀어내는 페넬로페>, 1783~1784



구혼자들에게 “시아버지의 수의를 다 만들고 나면 결혼하겠다”던 페넬로페는 낮에는 열심히 수의를 만들고 밤에는 그 옷감을 풀어가며 남편을 향한 끝없는 기다림을 이어간다. 조셉 라이트, <자신이 짠 직물을 도로 풀어내는 페넬로페> / 그림제공·정여울


만일 페넬로페의 한결같은 기다림이 없었다면, 오디세우스는 과연 집으로 돌아와서 무사히 그 부서진 가정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었을까. 페넬로페가 그 수많은 구혼자들 중 한 사람과 결혼을 했더라면, 또는 그중의 한 사람에게라도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느꼈더라면, 오디세우스의 귀환은 페넬로페에게 기쁨이기보다는 고통이 되지 않았을까.

 낮에는 열심히 옷감을 짜고, 밤에는 다시 그 옷감을 풀어내는 노동을 반복하면서, 페넬로페는 이제는 얼굴조차 희미한 남편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자기 아들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오디세우스를 그리워하며, 페넬로페는 마치 유복자처럼 아들을 키워냈다.

아들은 아버지를 때로는 그리워하고 때로는 원망했으며 때로는 ‘정말 그런 분이 이 세상에 살아계시기는 한 걸까’ 의심했다. 조셉 라이트의 작품은 수많은 의심과 걱정 속에서도, 밤이 되면 남몰래 오디세우스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잠든 아들의 머리맡에서 회한에 잠기는 페넬로페의 심경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 사람이 없어도 그 사람의 빈자리를 결코 채우지 못하는 마음. 그것이 가족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아버지가 없는 동안에 아버지의 밥그릇을 가장 먼저 따스한 쌀밥으로 채워 따뜻한 아랫목에 놓아두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버지의 빈자리’ 또한 어엿한 가족사의 일부임을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텅 빈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고군분투하는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의 슬픔과 외로움을 대변하는 페넬로페는 끊임없는 실을 잣고 옷감을 짜는 노동으로 그 고통의 시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오디세우스가 결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며, 그는 분명히 난파되었을 것이라며, 페넬로페에게 재혼을 요구했지만, 그녀는 구혼자들의 끈질긴 요구를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거의 협박에 가까운 구혼자들의 청혼에 지칠 대로 지친 페넬로페는 묘안을 짜낸다.

시아버지의 수의를 다 만들고 나면 당신들의 요구에 대답해주겠다고. 시아버지의 수의를 완성하고 나면, 구혼자들 중 한 명과 결혼을 하겠다고. 이윽고 페넬로페는 낮에는 열심히 수의를 만들고 밤에는 몰래 그 옷감을 풀어내버리는 시시포스의 노동을 반복한다.

그녀는 누구와도 재혼하지 않기 위해, 다만 오디세우스를 기다리기 위해 그 가망 없는 노동을 반복했던 것이다. 그녀의 외로운 밤을 아름다운 오디세우스의 조각상이 마치 등대처럼 환하게 비춰주고 있다. 달 빛이 잠든 아들 텔레마코스의 얼굴을 비추는 동안, 페넬로페는 끝없는 상념과 그리움에 잠겨 있다.


이제 그 누구도 자신의 편이 없는 것만 같다. 곤경에 빠진 페넬로페의 모습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온전한 가족’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과 집념을 보여준다. 



가족애는 끝없이 노력하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축복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볼 때마다 뜨거운 극적 긴장감을 자아내는 소재. 그것이 바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주인공의 귀환이다. 이때 감동의 매개체는 바로 가족들의 간절한 기다림이다.

모두들 당신의 가족은 죽었다고 희망을 버리라고 말하는 분위기 속에서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 아들은 ‘과연 아버지가 살아 계시기는 한 걸까’ 의심하고, 그토록 돌아오지 않는 위대한 아버지보다는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아버지가 낫다고까지 생각하지만, 아들은 끝까지 아버지를 기다리고 마침내는 아버지와 상봉하게 된다.


뱃사람을 아버지로 둔 가족들이 수두룩했던 그리스 사람들에게 오디세우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살아오는 아버지에 대한 찬란한 믿음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가족의 해체를 말하는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여전히 우리 가슴속에는 언젠가 반드시 되찾고 싶은 그 단란한 저녁 식탁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이 남아 있다.

완벽한 가장과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니라도 좋다. 말썽꾸러기 아이들과 영원히 철들지 않는 엄마만이라도 좋다. 아이들이 없어도 일평생 소꿉놀이하듯 깨가 쏟아지는 노부부도 좋다. 굳이 혈연으로 묶이지 않아도 그저 서로 아끼고 걱정하고 토라지면서 그저 함께이면 충분할 사람들. 한 지붕 아래 하나의 식탁이면 남부러울 것이 없다.

하나가 아닌 둘 이상의 공동체, 결혼이나 혈연이 아닐지라도 서로를 향한 끝없는 이해와 공감으로 끝내 헤어질 수 없는 공동체에 대한 갈망은 아무리 끊어내려 해도 끊어낼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것은 가족이라기보다 가족애가 아닐까. 수많은 사람에게 가족은 있지만 가족애란 끝없이 노력하고 기다라고 투쟁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너무도 특별한 축복이기에. 우리들의 온갖 기쁨이 시작되는 곳, 우리들의 온갖 슬픔도 함께 시작되는 곳. 그곳이 가정이다. 가장 가깝기에 가장 사랑하는 듯하지만, 또 사랑이라는 이유로 상처 또한 가장 많이 받는 관계. 그 가족의 그물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넘어지고, 끊임없이 다시 일어선다 . 

[출처] : 정여울 미술평론가,문학평론가 ; <정여울의 그림을 읽다>/ 월간중앙 2016. 8.17.


20. 노동하는 인간 - 일이 행복해야 그 몸짓도 아름답다 

인간이 참여하는 노동의 밑바닥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내 식구를 먹여 살리려는 희망. 노동을 통해 내 삶이 바뀌리라는 희망. 내 노동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는 희망…



#1. 노동, 그 원초적 권리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 한국에는 세 가지 열풍이 불었다.

첫째, 바둑 열풍. 어린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학원이 때아닌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이세돌 9단의 인생역정과 바둑에 대한 책자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둘째, 인공지능 열풍. 인공지능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바둑 천재를 압도했는지, 수많은 사람이 ‘인공지능’에 관심을 두었고, 인공지능의 미래를 소개한 갖가지 강의나 책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셋째, ‘인공지능 시대에도 살아남을 직업’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 붐을 이루었다. 인공지능은 이제 과학기술의 경이로운 발전에 대한 ‘찬탄’보다는 인류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초래될 디스토피아에 대한 경고는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수없이 반복되었지만, 딥러닝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인류 역사의 변화는 기존의 모든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뛰어넘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수많은 논쟁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과학기술이 대체로 인류의 편의와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면, 이제 인공지능의 딥러닝 기술은 인간의 존엄 자체를 ‘위협’하는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100년 후에 똑같은 재능과 인격을 가지고 태어난다면, 과연 지금 열중하고 있는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완벽하게 똑같은 유전자와 환경을 가지고 태어난다면, 아마도 우리는 전혀 다른 직업을 갖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인공지능의 도입으로 인해 일자리를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에 앞서 더 본질적인 두려움은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일자리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을 인공지능에게, 기계에게 빼앗겨도 좋은 것일까. 사실 인공지능이나 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것이라기보다는, 바로 그런 과학기술을 좌지우지하는 구글과 같은 대자본의 힘이 노동의 착취 시스템을 더욱 비인간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불공정한 갑을 관계로 얼룩져 있는 임금노동의 시스템을 더욱 잔인하고 몰인정하게 바꾸는 것이 바로 ‘자본’의 권력이다.

구글이 노동력의 인공지능화를 실행하면, 전 세계의 기업이 이를 모방할 것이다. ‘내 직업은 인공지능과는 관계없다’며 안심할 일이 아니다.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은 외부환경이나 국가가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켜내야 하는 인간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김홍도(1745~1806), <벼타작>, 미상



술 한 병과 곰방대까지 갖추고 ‘유희’하는 양반보다 노동에 참여하는 이들의 표정이 더 밝다. 인류의 원초적인 노동, 벼농사의 기쁨을 해학적으로 그려냈다. 김홍도, <벼타작> / 그림제공·정여울


‘노동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은 수많은 화가의 오랜 예술적 테마이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의 벽화에서부터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노동하는 인간은 뒷모습이나 잠자는 모습,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모습 못지않게 매력적인 오브제였다.

벼 타작을 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인류의 원초적인 노동, 벼농사의 기쁨을 해학적으로 그려냈다. 갓을 쓴 양반은 곰방대를 길게 드리운 채 한가롭게 농부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표정이 다른 농부들에 비해 오히려 지루하고 재미없어 보인다.

노동에 참여하는 농부들은 하나같이 밝은 미소를 만면에 드리우고 있다. 지게에 볏단을 지고 나르는 농부도, 통나무에 볏단을 내려치면서 벼를 털어내는 총각도, 땅 위에 떨어진 알곡들을 향해 갈퀴질을 하는 사내들도, 낟알을 쓸어 담아 소중히 챙기는 남자도, 하나같이 미소를 머금고 있다.


양반은 마치 그들의 노동을 감시하는 듯 보이지만, 술 한 병과 곰방대까지 갖춘 그의 ‘유희’보다는 오히려 노동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의 표정이 밝다. 홍순관의 노래 ‘쌀 한 톨의 무게’에서처럼,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 “외로운 별빛”까지도 그 안에 스민 쌀 한 톨의 무게를 소중히 여기는 삶이 김홍도의 그림 안에 다 들어 있다.

나락 한 알 속에 숨은 생명과 우주의 무게를 느끼고, 소중히 호흡하는 삶의 아름다움이 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들어차 있다. 



윤용(1708∼1740), <나물바구니를 끼고 봄을 캐는 여인>, 미상



여인이 둘러멘 망태기에 봄 향기가 잔뜩 들어차 있을 것 같다. 여인 주위의 여백은 봄의 드넓은 들판을 상상하게 한다. 윤용, <나물바구니를 끼고 봄을 캐는 여인>


나물 캐는 여인의 모습은 인류의 역사에서 얼마나 오래된 노동의 장면일까? 정해진 땅을 일구고 곡식을 가꾸는 정착민의 농경보다 훨씬 오래된 노동이 바로 ‘채집’이니, 나물을 캐거나 과일을 따는 인간의 모습은 생존을 위한 투쟁의 방편이었다.

그런데 윤용의 그림에는 이런 생존을 위한 노동을 뛰어넘는 설렘이 있다. 청고 윤용(1708∼1740)의 그림 <나물바구니를 끼고 봄을 캐는 여인>은 제목부터 마음을 설레게 한다.


여인은 단지 나물을 캐는 것이 아니라 봄을 캐러 길을 나선 듯하다. 여인이 둘러멘 망태기에는 봄소식과 봄 향기가 잔뜩 들어 차 있을 것만 같다. 나물을 캐러 가는 여인의 마음속에는 ‘우리 식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누구보다도 봄을 먼저 만나러 가는 사람의 눈부신 설렘이 가득하지 않았을까?

알록달록한 꽃신을 신지도 않았고, 조신하게 장옷을 걸치지도 않았지만, 짚신을 신고 치마를 걷어 올린 활동적인 차림으로 길을 나선 아낙네의 뒷모습에는 건강한 아름다움이 넘쳐흐른다.

여인의 주위로 펼쳐진 드넓은 여백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 살아있는 파릇파릇한 봄의 드넓은 들판을 상상하게 해준다. 여인의 호미에 묻어 있을 흙이야말로 정직한 노동의 흔적이며,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과 인간이 교감한 생생한 흔적일 터이다.

이 그림을 통해 나물 캐기라는 노동은 여인이 먼 눈길을 던져 바라보고 있는 화면 저편 미지의 공간처럼, 지금의 이 시간 ‘너머’를 꿈꾸고 상상하는 아름다운 몸짓으로 거듭난다. 



김득신, <대장간>, 18세기 말~19세기 초




인간은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불은 ‘무언가를 만드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필수적인 도구였다. 김득신, <대장간>


불은 거의 모든 사물의 형체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불과 철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던 그리스 신화 속 헤파이스토스는 아내 아프로디테의 불륜 현장을 급습할 기상천외한 무기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기도 했다.


그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그물’을 만들어, 마치 덫을 놓아 산토끼를 잡듯이 아프로디테와 아이레스의 불륜 현장을 급습했다. 헤파이스토스의 재능은 그만큼 기상천외하고 신출귀몰해서 올림푸스의 수많은 신도 그의 재능에 의지할 정도였다.

김득신의 <대장간>을 보니 바로 그 헤파이스토스의 다재다능함이 떠오른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불은 그렇게 ‘무언가를 만드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필수적인 도구였다. 자신의 삶을 바꿀 ‘도구’를 항상 구상하고 만드는 인간, 호모 파베르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이 그림 속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2.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삶을 지탱하는 노동

빈센트 반 고흐, <불가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농가의 여인>, 1885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매일 지겹도록 반복되지만 그 누구도 칭찬해주지 않는 노동이 ‘요리’다. 빈센트 반 고흐, <불가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농가의 여인>


하루 세 끼 요리를 모두 주부에게 맡기던 엄혹한 시대는 점점 저물고 있지만, 아직도 가사노동은 많은 여성에게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다. 헬렌 니어링은 <소박한 밥상>(디자인하우스, 2001)에서 이렇게 말한다.

“식사를 간단히, 더 간단히, 이루 말할 수 없이 간단히-빨리, 더 빨리, 이루 말할 수 없이 더 빨리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시를 쓰고, 음악을 즐기고, 곱게 바느질하는 데 쓰자. 자연과 대화하고, 테니스를 치고, 친구를 만나는 데 쓰자.”

‘더할 나위 없이 간소한 식탁’은 얼마나 행복한 유토피아적 상상인가. 하지만 도시인들은 예전보다 더 맛있는 음식, 더 정교한 풍미를 자랑하는 ‘맛 집’을 찾게 되었고, 요리를 잘하는 사람들은 ‘스타’가 되어 맛집 프로그램의 단골손님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런 화려한 맛집 프로그램들이 은폐하는 점은, 요리가 본질적으로 ‘힘겨운 노동’이라는 사실이다.

수많은 직업 요리사는 물론, 어떤 보상도 없이 그저 가족을 위해 매일 밥을 해야 하는 주부들에게 요리는 아주 고될 뿐 아니라 엄청난 창의력까지 요구하는 노동이다. 365일 ‘오늘은 무얼 해먹을까’를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요리하는 사람의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헬렌 니어링이 말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간단한 요리’는 ‘맛있는 음식’에 대한 탐욕을 없애야만 가능하다.

아주 간단한 음식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감사의 마음이 필요하다. 고흐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노동, 매일 지겹도록 반복되지만 그 누구도 칭찬해주지 않는 ‘요리’라는 노동의 소중함을 화폭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고, 누구도 열심히 바라봐주지 않지만, 이토록 힘겨운 요리라는 노동이 없다면 인간은 지금의 문명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힘들게 일하고 집으로 돌아올 농부의 식탁에 올라갈 요리를 준비하는 여인의 손길에는 가족을 향한 사랑과 음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레이스를 뜨는 여인>, 1669~1671년경



뜨개질이나 자수만큼 생산적인 기다림의 방식은 흔치 않다. 아주 단순한 노동같지만 그 결과물은 결코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레이스를 뜨는 여인>


베르메르의 작품은 마치 현미경 아래 관찰 대상을 올려놓고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하는 과학자처럼, 레이스를 뜨는 작업 그 자체에 완전히 몰입하는 여인의 얼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주변의 그 어떤 것도 여인의 몸짓을 방해하지 못할 것만 같다.

뜨개질에 열중하거나, 수놓기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선에 열중하는 수행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주변에 아무리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도, 그들의 눈에는 지금 눈앞에서 조금씩 완성되어가고 있는 바로 그 작품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저렇게 한 땀 한 땀 작업해서 도대체 언제 목도리가 되고, 언제 옷 한 벌이 완성되는가 싶지만, 짐작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옷’이나 ‘소품’을 넘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곤 한다. 레이스를 뜨고, 수를 놓고, 뜨개질을 하는 이의 손끝에서는 수천 송이의 꽃이 피어나고, 수천 그루의 나무들이 자라나고, 드넓은 바다와 하늘이 태어난다.

뜨개질이나 자수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노동과 예술의 힘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반복적인 몸짓에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진다. 무언가를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할 때, 온갖 걱정으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 뜨개질이나 자수만큼 생산적인 기다림의 방식도 흔하지 않다. 아주 단순한 노동으로 보이지만, 그 결과물은 결코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디에고 리베라, <꽃을 나르는 사람>, 1935



지고 가야 할 커다란 바구니에는 향기로운 꽃들이 가득하지만 그 꽃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자기 몸보다 커다란 짐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먼 길을 걸어가는 이의 모습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보여주는 듯하다. 디에고 리베라, <꽃을 나르는 사람>


디에고 리베라의 <꽃을 나르는 사람>은 꽃을 운반하는 노동의 힘겨운 순간을 소박하고도 단순한 필치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힘겨운 노동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는 일꾼의 묵직한 고통이 느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 같기도 하다. 자기 몸보다 커다란 짐을 안고, 저 머나먼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앞도 끝도 보이지 않는 것. 옆에서는 그를 걱정하는 가족이나 연인이 있지만, 이 노동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하는 고통인 것이다. 그가 짐지고 가야 할 커다란 바구니에는 화사하고 향기로운 꽃들이 가득하지만, 그 꽃은 그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그 꽃의 향기도 빛깔도 그가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 그의 노동에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그의 노동은 바쳐진다. 노

동자는 항상 자신의 한계를 실험 당한다. 실적을 쌓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정리해고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항상 무리하게 자기 자신의 능력 이상의 것들을 해내야 한다. 그는 거대한 꽃바구니를 짊어진 채, 그 육중한 무게에 짓눌려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구스타브 카유보트, <대패질 하는 사람들>, 1875




의식주를 위한 노동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이 집 짓기 아닐까. 마루는 대패질에 따라 점점 부드러워지고 평평해지며 광택이 돌기 시작한다. 정직한 노동과 성실한 일상이 만들어낸 노동자들 특유의 건장한 근육질이 느껴진다. 구스타브 카유보트, <대패질하는 사람들>


의식주를 위한 노동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의식주 중에서도 ‘주거’를 위한 노동이야말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노동이다.

‘식(食)’을 위한 요리나 ‘의(衣)’를 위한 빨래는 집에서도 매일 볼 수 있는 노동의 장면이지만, 집을 짓는 노동자의 모습을 매일 볼 수는 없기에. 의식주를 위한 노동이 모두 어렵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이 집 짓는 일일 것이다.

이 그림은 마루를 대패질하는 인부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우리가 미처 잘 포착하지 못한 노동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카유보트의 이 명작은 1875년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었던 살롱 전시회에서 거부당한다. 상의를 벗은 노동자 계급의 몸을 묘사하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작품을 ‘저속하고 비천하다’고 보았다. 카유보트는 자신의 모든 노력을 쏟아부은 이 작품이 살롱에서 거부당한 것에 크게 상처받았지만, 이듬해 1875년에 열린 두 번째 인상파 전시회에 이 작품을 출품했다. 이 전시회에서는 에밀 졸라 등의 문필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이 그림은 무엇보다도 생생한 묘사력 그 자체로 관객들에게 감동을 준다. 대패질로 점점 더 부드러워지고, 매끄러워지며, 평평해지는 마루는 일꾼들의 작업속도에 따라 점점 광택이 돌기 시작한다.

저 커다란 공간을 완벽하게 매끄럽고 눈부신 주거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오랜 노동이 필요했을까. 힘든 노동으로 인해 흐르는 땀 때문인지, 겉옷을 벗어던진 인부들의 몸은 노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으로 빛난다. 정직한 노동과 성실한 일상이 만들어낸 근육질의 모습은 육체노동자들 특유의 건장함을 보여준다. 



피터 브뤼겔, <농가의 결혼식>, 1566~1567




부담 없이 잔치를 즐기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손님’이다. 가장 바쁜 사람들은 음식을 준비하거나 무대 장치를 준비하거나 손님들의 안전과 유희를 책임져야 할 이들이다. 휴일에 더 바쁜 노동자들이야말로 소중하다. 피터 브뤼겔, <농가의 결혼식>



농가의 결혼식은 언제 봐도 흥미로운 그림이다. ‘결혼식’이라고 하는데 신부와 신랑의 모습이 주인공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모두들 신나게 잔칫집 분위기를 내고 있는데, 신부는 화면 뒤쪽에서 마치 이 모든 야단법석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초탈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진탕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왁자지껄하게 수다를 떠는 사람들과 달리, 신부는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은 채 빨리 이 난장판이 끝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덩그러니 앉아만 있다. 신랑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화면에서 구별해낼 수가 없다.

정작 화면에서 가장 커다란 비중으로 그려진 것은 신랑신부나 혼주가 아니라 음식을 나르는 일꾼들이다. 그들은 이 떠들썩한 잔치판에서도 묵묵히 음식을 나르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 잔칫날에도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도드라지게 보인다.

이 오래된 그림을 보고 있으면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변치 않는 ‘잔치의 본질’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온다. 정작 주인공은 소외되거나 손님을 맞느라 정신이 없고, 잔치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은 ‘손님’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잔치나 축제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은 언제나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 무대 장치를 준비하는 사람들, 손님들의 안전과 즐거운 유희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지켜주는 행복과 안전의 울타리 속에서 비로소 ‘손님들’은 잔치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명절이나 공휴일에 더 바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야말로 이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기 몫’의 일을 책임지고 있는 분들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이야말로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3. 시시포스의 노동, 그러나 희망을 위하여

폴 시냑, <파괴하는 노동자>, 1897




무언가를 파괴할 힘도, 창조할 힘도 일하는 사람들의 특권이다. 건설 노동자들은 온갖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고 하루하루 ‘품’을 팔아야 하는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져야 한다. 폴 시냑, <파괴하는 노동자> / 그림제공·정여울


폴 시냑의 작품에는 무언가를 파괴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오직 자신의 몸 하나를 의지하여 힘겨운 노동으로 뛰어드는 한 사내의 모습이 이 그림에서는 당차고 늠름하게 그려져 있다.

노동자는 무언가를 창조하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파괴하기도 한다. 무언가를 부수고 그 폐허 위에 새로운 창조물을 세우는 것. 무언가를 파괴할 힘도, 무언가를 창조할 힘도, 일하는 사람들의 특권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공사판의 노동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온갖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하루하루 ‘품’을 팔아야만 유지할 수 있는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유용주 시인은 ‘막노동을 하고 싶다는 후배에게’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을 한다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품을 판다는 것인데/

우스운 것은 품보다/

포옴을 파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야.”

그는 ‘품’과 ‘폼’은 다른 것임을 힘주어 강조하며 겉멋을 과시하는 폼에 이끌려 자신의 몸 전체를 장작 삼아 태우고 또 태워야만 팔 수 있는 ‘품’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후배를 타이르고 있다.

“정당하게 품을 팔아야/ 바른 삶을 일구어나갈 것인데/ 폼부터 먼저 팔려고 드니 한심한 일 아닌가.”

시인은 ‘막노동을 하겠다’고 나서는 후배의 마음속에 어쩌면 ‘품’보다는 ‘폼’을 재고 싶어하는 욕심이 도사리고 있을까 걱정스럽다. 그리하여 막노동을 하겠다며 폼을 잡는 후배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먼저 정직하게 품을 팔 것/

품파는 데 자신 없는 사람이/

포옴을 먼저 팔려고 든다는 것을 명심하세.

(…)

땀냄새가 얼마나 구수한 줄 아나/

그 냄새를 진짜 맡을 때까지/

치열하게 자신을 밀어붙일 것!/

건투를 비네.”  (<가장 가벼운 짐>, 창작과비평사, 2002)

오직 일하는 사람의 땀 냄새에만 배어 있는 특유의 ‘구수함’은 자신의 몸 전체를 ‘품’으로 팔아 오랫동안 노동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노먼 락웰, <집을 떠나다>, 1954




아버지와 아들.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에 잔뜩 부푼 아들과 아들을 떠나 보내고 비싼 학비를 감당하기 위해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낼 아버지의 표정이 상반된다. 노먼 락웰, <집을 떠나다>


아버지는 아들에게만은 저 힘든 ‘블루칼라’의 작업복을 밀려주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비싼 학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는 아주 오랫동안 저 푸른 작업복을 벗을 날이 없을 것이다.

아들이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나 아름다운 대학 캠퍼스에서 낭만적인 대학생활을 하고 있을 동안, 아버지는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담배 한 개비에 온갖 시름을 실어 보내며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할 것이다. 아버지의 이런 속내를 아직 잘 모르는 철없는 아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어, 아무것도 모르는 해맑은 표정으로 기차가 어서 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들은 과연 아버지의 기대대로 힘겨운 육체노동을 하지 않고 멋진 사무실에 앉아 자신이 진정 꿈꾸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이 아버지의 앞길에는 얼마나 기나긴 노동의 나날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 세상 얼마나 많은 부모가 이 그림처럼 ‘내 자식만은’ 나 같은 고생을 시키지 않기 위해 오늘도 일터를 향하여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까?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1888



노동의 밑바닥에는 희망이 있다. 내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내 삶이 바뀌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란 희망이다. 이 그림 속에서 노동하는 모든 인간의 끝나지 않는 희망을 본다.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그리스 신화에서 시시포스는 매일 똑같은 노동을 반복해야 한다. 그 무거운 바위를 산 위로 다 끌어올렸다고 해서 멋진 건물이 지어지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꼬박꼬박 임금을 지불해주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시시포스가 우리 현대인들보다 훨씬 불행하다.


그에게는 노동의 기쁨도 노동의 대가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끙끙거리며 그 무거운 돌을 산 위로 올리는 노동을 계속하고 있다.

아마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가 바로 시시포스의 바위 굴리기가 아닐까 싶다. 이 이야기에는 그리스 신화에 넘쳐나는 그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로맨스도 없고, 내일이면 조금이나마 더 나아지리라는 실낱 같은 기대도 없다.

하지만 시시포스 신화에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가공할 비장미가 흐른다. 시시포스는 노동의 ‘결과물’이 아니라 노동 그 자체에 헌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노동의 본질적 위대성일지도 모른다.

그는 노동의 효율성을 따지지도 않고, 노동의 부산물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오직 그 노동 자체에 자신의 인생을 던지고 있다. 어쩌면 시시포스의 노동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헌신일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이 참여하는 노동의 밑바닥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내 식구들을 먹여 살리리라는 희망. 이 노동을 통해 내 삶이 바뀌리라는 희망. 이 노동을 통해 세상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는 희망.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에서는, 이 드넓은 들판에 오직 한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허전해 보이지가 않는다.

씨 뿌리는 사람은 홀로 서 있지만 결코 외롭지 않다. 땅에서 곧 파릇파릇 솟아날 새싹들이 그의 자식들이고, 그의 친구들이며, 그의 스승이 되어줄 것이기에.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몸짓 하나만으로도 이 캔버스는 우주 전체처럼 드넓게 느껴진다.

씨앗을 뿌리는 노동이야말로 노동의 시작, 희망의 시작, 그리고 나눔의 시작이기에. 고흐는 ‘씨 뿌리는 사람’을 그렸지만, 우리는 그 그림 속에서 노동하는 모든 인간의 끝나지 않는 희망을 본다.

[출처] : 정여울 미술평론가,문학평론가 ; <정여울의 그림을 읽다>/ 월간중앙 2016. 9.17.




21. 정면으로 응시한 ‘나’  -고독을 일깨우는, 자신을 찾는 순간 


‘자기애’의 커튼 속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의 세계

…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지혜’, ‘고독을 깨치고 더 큰 세계로 나아갈 용기’가 공존하는 삶을 위하여




내가 나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는 느낌을 최초로 강하게 느끼는 시절이 바로 사춘기가 아닐까. 에두아르 뭉크, <사춘기> / 그림제공·정여울

#1. 혼자임을 깨달을 때

요새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책제목에서 자주 눈에 띈다. <자존감 수업> <심리학, 자존감을 부탁해> <자존감이라는 독> 이런 식으로 ‘자존감’의 뿌리를 파고드는 책들이 눈길을 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자기를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감정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일까.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 일이 많아질수록 자존감은 ‘꼭 있어야 하는데, 아무나 가지기는 힘든’ 그런 진귀한 감정으로 이상화된다.

하지만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꼭 행복한 것은 아니다.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자기애에 푹 빠진 나머지 타인에 대한 배려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도 많다. 자존감은 확실히 과대평가된 가치다.

게다가 자존감(selfesteem)이라는 감정의 뉘앙스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투명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자기를 실제보다 더 크고, 멋지게 생각하는 감정’에 가깝지 않은가. 자신을 크고, 대단하고, 빛나는 존재로 바라봐야만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건강한 감정일까.

우리가 ‘자존감’이나 ‘자기애’라는 감정의 커튼을 걷어내고 진정 ‘자기를 인식하는 순간’은 어떤 때일까. ‘나는 더 강해야 한다, 나는 더 빛나야 한다, 나는 더 사랑받아야 한다’는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예술작품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천천히 바라보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닐까. 예술은 본질적으로 문명 안에 있지만, 훌륭한 예술작품은 반드시 문명의 안쪽에서 문명의 바깥을 추구하는 이중성을 지닌다.

위대한 예술 작품은 단지 문명이 약속하는 장밋 빛 환상에 갇히지 않고, 문명의 어둠을 날카롭게 응시하는 자기 안의 투시경을 지닌다. ‘나’를 비추는 마음의 거울 같은 작품들은 특히 ‘혼자인 순간, 인간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되는 순간’을 그려낸다. 



에두아르 뭉크, <사춘기>, 1894~1895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사춘기’에 내가 느꼈던 공포를 이 그림은 이미지로부터 마치 영혼의 거울처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몸은 급격하게 어른으로 변해가는데, 내 마음은 몸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어른스러움’도 싫고, ‘여성스러움’은 더더욱 싫었다.

하지만 내 주변의 세계는 어른스러움과 여성스러움을 동시에 요구했고, 그것은 마치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무겁게 다가왔다. 뭉크의 <사춘기> 속 그녀는 바로 그런 사춘기 소녀의 본능적인 공포를 생생하게 포착해냈다.

나의 마음과 나의 몸이 완전히 분리되는듯한 아픔, 내 마음이 내 몸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 주변 사람들이 ‘나’로 바라보는 내 모습과 내가 ‘나답다’고 느끼는 이미지가 서로 완전히 어긋나버렸을 때의 절망감. 내가 나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는 느낌을 최초로 강하게 느끼는 시절이 바로 사춘기가 아닐까.

뭉크의 <사춘기>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는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림자와 무척 닮았다. 사춘기는 대체로 해맑았던 소년소녀의 영혼에 어느새 불현듯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라는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는 시기다.

하지만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나’는 오히려 진정한 성장의 기회를 맞을 수 있다. 이제 저 그림자에 짓눌릴 것인가, 아니면 그 그림자와 함께 공생하며, 때로는 그림자를 달래고, 때로는 그림자를 촉매로 삼아 내면의 성장을 이룰 것인가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 되는 순간이다. 



벨라스케스, <부엌의 하녀>, 1618~22년경



그릇에 비친 얼굴은 ‘하녀의 모습’이 아닌 ‘소녀의 모습’이다. 소녀는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는 자신의 가능성을 엿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벨라스케스, <부엌의 하녀> / 그림제공·정여울


그릇을 닦다 보니 그릇이 마치 거울처럼 자신을 비춘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지? 나는 어떤 사람이지? 과연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호기심으로 그득한 소녀의 눈망울이 생기 넘치게 그려져 있다.

인간의 가장 정직한 모습이 드러날 때가 바로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가 아닐까. 소녀는 그릇을 닦으며 자신의 모습을 그릇이라는 거울에 비춰본다. 일에만 몰두하다가, 문득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이 시간이야말로 내가 진정한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나는 지금 왜 이 일을 하고 있을까. 한 달 후에도, 내년에도, 10년 후에도 나는 이 일을 하고 있을까. 그릇에 비친 얼굴은 ‘하녀의 모습’이 아니라 ‘소녀의 모습’이 아닐까. 주어진 역할의 한계 속에서 움직이는 자아가 아니라 어쩌면 지금 이곳의 울타리를 벗어나야만 바라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눈. 소녀는 지금 ‘하녀의 역할’을 넘어서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는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엿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프레드릭 칼 프리스크, <접시꽃>, 미상



황홀한 물아일체(物我一體)적 순간. 꽃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가, 마침내 그녀도 한 송이의 꽃이 되었다. 프레드릭 칼 프리스크, <접시꽃> / 그림제공·정여울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아름답다든지, 눈부시다든지, 그런 언어만으로는 도저히 그 감동을 표현할 수 없기에. 그렇게 ‘언어의 한계’에 부딪힐 때 우리는 나는 누구인지, 내가 쓰는 언어는 어떤 언어인지, 나를 둘러싼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를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다.

프레드릭 칼 프리스크의 <접시꽃>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그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한 사람의 물아일체(物我一體)적 순간을 황홀하게 그려낸다. 그녀는 이미 사람이라기보다는 꽃에 가까운 모습이다.

너무도 오래오래,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꽃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가, 마침내 그녀 자신도 한 송이 꽃이 되어 풍경 속에 녹아드는 듯하다. 때로는 ‘나’라는 존재를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진짜 ‘나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2. 혼자일 수밖에 없는 순간들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지오, <나르시스>, 1597~99년경



“자신을 모른 채 지낸다면, 오래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어쩌면 나르시스만이 아니라 현대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저주인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지오, <나르시스> / 그림제공·정여울


나르시스를 그린 그림은 수없이 많지만,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그림 속에 쑥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착각을 느낀다. 나르시스의 비극은 물론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더 큰 비극은 그 사랑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본인은 끝내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닐까.

자신이 스스로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물 속에 사는 또 하나의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르시스는 끝내 ‘호수’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나르시스에 대한 그리스 신화의 예언은 자못 섬뜩한 데가 있다.

“자신을 모른 채 지낸다면, 오래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랬다. 나르시스는 ‘자신’의 모습을 모른 채 살아갔을 때는 불행하지 않았다. 멈출 수 없는 사랑에 온몸이 타오를 것 같은 고통 따위는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르시스가 호수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순간, 그는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목격하고야 만다. 자신을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을 목격해버린 것이다. 자신을 모른 채 지냈다면 결코 자신과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을 텐데. 이것은 어쩌면 신화 속의 나르시스만이 아니라 현대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저주가 아닐까.

현대인은 전통사회의 사람들과 달리, 지나치게 미디어라는 거대한 호수에 자신을 많이 비추어보곤 한다. 화려한 미디어의 이미지에 비추면 우리 자신의 얼굴은 얼마나 작고 평범하게 느껴지는가. 나르시스가 자신의 이미지를 너무 과대평가하여 고통을 받았다면, 미디어의 현란한 이미지에 짓눌려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너무 과소평가하여 고통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르시스가 호수에 비춰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감탄하는 동안, 우리는 미디어라는 거대한 거울을 깨고, 미디어라는 거대한 호수를 박차고 나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떨까. ‘나’라는 이미지가 너무 견고하게 고정되어버리기 전에. ‘나’라는 환상에 빠져 ‘우리’나 ‘그들’과 연결되는 고리를 영원히 잃어버리기 전에.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어>, 1851~52



사랑하는 약혼자 햄릿의 손에 아버지를 잃은 오필리어는 실성한 채 산야를 헤매다 강물에서 실족사하고 만다. 오필리어는 이 순간 ‘진정한 혼자’가 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홀로 감내한다.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어> / 그림제공·정여울


오필리어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가장 죄 없이, 가장 억울하게 죽어간 존재다. 자신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오직 주변 상황의 엄혹함 때문에 참혹하게 희생된 대표적인 주인공이기도 하다. 오필리어는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았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기회가 없었다. 주변의 관심과 기대 속에 항상 사랑스럽게만 자라오던 오필리어는 약혼자 햄릿의 실수로 자신의 아버지가 죽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오필리어에게는 고통에 대한 예방접종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햄릿은 정작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숙부 앞에서는 망설이고 주저하면서도, 자신의 어머니와 오필리어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처사를 일삼는다. 아버지를 죽인 숙부에게 광적인 증오를 품고 있으면서도, 그 미칠 듯한 스트레스를 도리어 죄 없는 오필리어에게 해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햄릿은 아버지가 죽자마자 몇 달도 되지 않아 ‘숙부의 아내’가 된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는데, 어머니를 향한 증오에는 이렇듯 이유가 있지만 오필리어에 대한 적개심은 다소 갑작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것은 오필리어에게 무슨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은 결코 ‘아버지가 죽기 이전’의 평화로운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분노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숙부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 햄릿은 결코 사랑하는 오필리어와 함께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주인공이 될 수가 없었다.

오필리어는 그렇게 최초로 ‘혼자’가 된다. 자신을 늘 든든하게 보살펴주던 최고의 보호자, 아버지가 사랑하는 약혼자 햄릿의 손에 죽자, 오필리어는 실성하여 산야를 헤매다 강물에서 실족사하고 만다. 오필리어는 이 순간 최초로 ‘진정한 혼자’가 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홀로 감내하고 있다.

강물은 거대한 관이 되어 이 비극적인 여인의 주검을 감싸주고 있는 것 같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식물들은 저마다 의미심장한 상징을 품고 있다. 버드나무는 버림받은 사랑을, 쐐기풀은 쓰라린 고통을, 데이지는 순수함을, 팬지는 허무한 사랑을, 제비꽃은 한 사람을 향한 충절을 의미한다.

한없이 순수했던 오필리어의 사랑은 끝내 허무하게 끝나버렸고, 그 뒤에 남은 것은 버림받은 사랑의 아픔뿐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레이디 샬롯>, 1888



레이디 샬롯은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랜슬롯의 얼굴을 보겠다는 소원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죽고 만다. 죽음을 향한 발걸음은 ‘진짜 삶’을 향한 첫걸음이기도 했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레이디 샬롯>


레이디 샬롯은 어두운 탑 안에 갇혀 세상을 거울로만 보도록 허락받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갔으나 그 거울을 통해 원탁의 기사 랜슬롯 경을 처음 본 순간 거침없이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기로 마음먹는다. 자신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오직 죽음뿐임을 알면서도, 그녀는 ‘안전한 탑’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용감하게 나아간다. 그렇게 운명의 거울은 깨져버리고, 그녀는 랜슬롯 경이 있는 카멜론을 향해 흐르는 강을 따라 배를 타고 흘러가게 된다.

여인이 사공도 없이 홀로 타고 있는 배에 세 개의 촛불이 있었는데, 지금은 오직 한 개만이 켜져 있다. 이것은 아마도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 그녀는 죽기 전에 단 한번만이라도 랜슬롯의 얼굴을 보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간다.

사공도 없이 홀로 배에 몸을 실은 레이디 샬롯은 랜슬롯에게 가는 길 도중에 죽고 말았다. 며칠 후 그녀를 태운 배가 카멜론에 이르렀을 때, 기사들은 배 안에 누워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주검을 발견한다.

그녀의 싸늘한 주검은 결국 랜슬롯 앞에 도착하지만 랜슬롯은 이미 다른 연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저 “아름다운 얼굴이군, 신의 은총을”이라고 했을 뿐이다.

아더 왕 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테니슨의 시를 모티브로 삼은 이 그림에서 여인은 가장 처절한 비극 속에서 오히려 가장 눈부신 희열을 맛보는 것 같은 미묘한 표정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마치 한 편의 연극 속에서 감정이 최고조로 달한 클라이맥스를 연기하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삶을 압축하는 단 하나의 장면으로 영원히 박제된 듯하다.

그녀는 운명에 순응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인생보다는 운명에 저항하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한없이 불안하지만 한없이 용감한 삶을 택한 것이다.

죽음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지만, 사실 그 발걸음은 ‘진짜 삶’을 향한 첫걸음이기도 했다. 안전하고 평화롭지만 오직 거울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수동적인가.

그녀는 철저하게 혼자 있지만, 랜슬롯과 함께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세상’이라 부르는 진짜 무대로 나아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생애 최대의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을 깨닫지만, 끝내 고독을 떨치고 나아가려는 몸부림. 그것이 인간다움의 진정한 의미 아닐까. 


#3. 고독과 소외를 넘어, 내면의 성숙으로 가는 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모자를 쓴 여인>, 1917



여인의 눈동자가 없는 건 어쩌면 ‘바라보는 시선’의 본질적인 숙명일지도 모른다. ‘나’는 분명히 그를 바라보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보고 싶은 이미지’를 그에게 덧씌운 것인지도 모른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모자를 쓴 여인> / 그림제공·정여울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외로워진다. 익숙한 외로움도 더 깊어지는 것만 같다. 인간의 본능적인 외로움을 꿰뚫어보는 화가의 눈빛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가 있다. 이 그림 속에는 왜 눈동자가 없을까. 그것은 어쩌면 ‘바라보는 시선’의 본질적인 숙명일지도 모른다.

화가는 대상을 바라보지만, 대상은 화가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아니, 바라보고 있어도 화가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화가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모델의 시선에 부담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모델을 바라보는 시선에 집중하고 싶었던 화가는 어느 날 선뜻 ‘눈동자’를 지움으로써 모델의 시선을 피했는지도 모른다.

모딜리아니의 이 그림을 통해 나는 ‘시선의 비대칭성’을 생각한다. ‘나’는 분명히 그를 바라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내가 보고 싶은 이미지’를 그에게 덧씌운 것은 아닌가. 나는 그를 열심히 바라보고 있지만, 그는 나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화가로서, 기자로서, 작가로서, 어떤 대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묘사할 때, 그 시선은 비대칭적일 수밖에 없다.

‘바라보는 자’가 ‘보이는 자’를 제멋대로 재단하고 분석하고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그 슬픈 확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이 그림은 ‘사랑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는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람을 ‘나의 눈’으로만 바라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사랑할 때 그 사람을 속속들이 알려고 하고, 실제로 상대방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마주했을 때, 상대는 내가 상상했던 그 방향으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사랑했지만,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순간.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바로 그 ‘사랑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을 그린 것이 아닐까. 당신의 눈을 보고 있어도 당신의 눈동자는 볼 수 없는 시간. 당신의 겉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지만 당신의 내면을 꿰뚫어볼 수는 없는 시간. 그것이 우리가 ‘혼자’임을 깨닫는 순간이 아닌지. 



노먼 락웰,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문제>, 1964



오직 학교에 갈 권리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길을 걷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당차고 눈부시다. 벽 위의 깨져버린 과일, ‘검둥이(nigger)’와 인종차별 집단 ‘KKK’의 표식은 소녀에게 혹독한 세상을 절절하게 묘사한다. 노먼 락웰,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문제> / 그림제공·정여울


이 그림이 그려졌던 시절, 흑인들은 백인들과 같은 반에서 마음 놓고 수업을 들을 수도 없었다. 오직 학교에 갈 권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열심히 길을 걷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당차고 눈부시다. 노먼 락웰의 이 그림은 미국 인권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소녀 루비 브리지스는 오직 백인 학생들로만 채워져 있었던 윌리엄 프란츠 초등학교에 가고 있다. 그녀를 향한 폭행과 괴롭힘을 막기 위해 네 명의 보안관이 소녀의 주위를 엄호하고 있지만, 벽에서 부딪혀 핏빛으로 흩어지며 깨져버린 과일이 그녀를 향한 백인들의 적대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어린 소녀에게도 삶이란 투쟁이었다. 그리고 이 어린 소녀를 어떻게든 학교에 보내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것이 이 아이들의 부모에게, 그리고 이 아이를 응원하는 수많은 흑인에게 얼마나 커다란 삶의 희망이었는지를 곱씹어보게 된다.

그녀는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철저히 ‘혼자’로 보인다. 어른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그녀의 얼굴만 볼 수 있는 각도로 그려진 이 그림은 ‘아이의 눈높이’에서 보인 세상이 얼마나 혹독한 것이었는지를 더욱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검둥이(nigger)’라는 모욕적인 표현과 인종차별적 집단이었던 ‘KKK’의 표식이 벽 위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 이 어린 소녀를 향한 백인들의 증오가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를 증언한다.

지금은 흑인과 백인이 ‘함께’ 공부할 수는 있지만, 아직도 미국에서는 흑인을 향한 각종 차별과 총격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흑인과 백인 사이의 인종 갈등뿐 아니라 다인종·다문화 사회로 점점 변화하고 있는 모든 사회에서 인종 범죄는 여전히 첨예한 갈등을 낳고 있다.

이 그림 속의 소녀가 ‘혼자’ 고통을 감내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수많은 사람이 이 소녀의 등교 투쟁을 응원했으며, 수많은 사람이 흑인들의 ‘배울 권리’를 찾기 위해 분투했다.

그림은 ‘혼자’ 있는 소녀를 그리지만, 정작 이 그림은 수많은 사람의 참여와 연대를 호소하고 있다. 혼자 있지만 ‘함께’를 생각하게 만드는 그림, 이런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삶의 요소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옥스퍼드 사전에서 자기중심적인, 등등의 ‘자아’와 관련된 단어들을 찾아보면 대부분의 단어가 그다지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앤서니 스토의 <고독의 위로>라는 책을 보니, 자급자족할 수 있는(self-sufficient), 자기인식(self-knowledge), 자수성가한(self-made), 이기주의자(self-seeker), 자기성찰(self-examination), 자기중심(selfhood), 이기주의(self-interest), 자각적인(selfknowing), 자기기만(self-deception) 등 ‘자기(self)’와 관련된 단어들은 모두 17세기 말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자아’와 관련된 단어들을 한꺼번에 모아 읽어보니, 그 단어 하나하나를 읽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서운함이 느껴진다. ‘자기’라는 단어를 통해 파생된 단어들을 다 모아놓고 보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자기 중심성이 느껴진다.

‘자아’에 관련된 단어들을 계속 보고 있으면, 내 안의 외로움이 더욱 짙어진다. 어쩌면 인간이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대상화하고 상품화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본질이 아닐까.

군자나 대인 같은 이상적인 인간형을 추구했던 동양철학과는 달리, 서양철학은 ‘개인’이나 ‘자아실현’ 같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인간형을 양성하는 데 진력해왔다.

물론 이렇게 동서양의 철학을 단순화하기는 어렵지만, 만물과의 조화를 꿈꾸는 물아일체의 세계관이 ‘개인’을 최우선에 놓는 자아중심적 세계관보다 훨씬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을까. 나는 고독을 일깨우는 그림을 통해 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개인이란 무엇인가, 자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그리하여 고독 속에서 자기다움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눈부신 축복인지를 깨닫곤 한다. 하지만 고독 속에 매몰되는 것이 ‘결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지금 깊은 고독을 느낀다면, 그것은 반드시 일시적인 것이어야 한다. 고독만으로는 이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없다.

고독할 수 있는 용기와 고독을 깨치고 밖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 모두가 필요한 요즘이다. 나는 ‘개인’이라는 말을 소중히 여기지만 ‘개인주의’에 매몰되는 것이 두렵다.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지혜’와 ‘고독을 깨치고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용기’가 공존하는 삶이야말로 최고의 축복 아닐까. 

[출처] : 정여울 미술평론가,문학평론가 : < 정여울의 그림을 읽다> /월간 중앙 2016. 10.17.




22. 생사의 경계선에 선 표정 - 마지막 찰나의 순간 그 잔인한 생동감이여! 


달아나려 하는 바로 그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

… 유한함 속에서 무한의 사랑을 꿈꾸는 인간의 아름다움이야말로 포기할 수 없는 삶의 가치 아닐까




클레오파트라의 죽어서도 부릅뜬 두 눈은 한때 거대한 제국 로마를 위협했던 이집트 여왕의 당당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클레오파트라> / 그림제공·정여울




#1.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포착하다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그린 그림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판도라가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갈등과 슬픔은 물론 ‘희망’이 담긴 상자를 여는 순간, 아버지의 복수를 앞두고 사느냐 죽느냐를 고민하는 햄릿, 리어왕의 세 딸이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놓고 갈등하는 장면, 데릴라가 삼손을 유혹한 뒤 그를 죽음의 고통으로 몰아넣는 장면 등등.

‘이 순간’이 지나면 삶이 영원히 달라질 것만 같은 순간을 포착한 그림들은 늘 잔인한 생동감이 넘친다. 어쩌면 이 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바로 그 찰나의 이미지를 붙잡은 그림들은 ‘인간의 숨길 수 없는 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클레오파트라>, 1888

클레오파트라가 죽음을 결심하는 순간, 그녀의 눈앞에서는 어떤 장면이 스쳐 갔을까?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당당하고 눈부셨던 클레오파트라는 죽음의 순간 앞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았을 것만 같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존재’에서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는 존재’로 추락하는 그 순간의 덧없음이 이 그림 속에서는 마치 조각상처럼 완벽하게 굳어진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녀는 마치 살아있는 듯 보이지만, 까맣게 변색해가고 있는 파리한 얼굴빛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말해주는 듯하다. 하지만 그녀는 꼿꼿하다.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듯, 눈도 감지 못한 채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를 서성이고 있다. 그녀는 위엄을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죽어서도 감지 못한 그녀의 부릅뜬 두 눈은 한때 거대한 제국 로마를 위협했던 이집트 여왕의 당당함을, 온갖 지혜와 책략을 동원해 이집트를 살려냈던 명예로운 과거를 상기시키는 듯하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을 묘사한 수많은 그림이 있지만, 나는 클레오파트라의 관능적 아름다움보다는 죽어서도 잃을 수 없었던 그녀의 위엄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이 그림이 가장 좋다. 과연 여왕은 안타깝게 삶을 마감했지만 역사 속에서, 문학 속에서 결코 식지 않은 위엄을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들라크루아, <무덤 앞의 햄릿과 호라시오>, 1839



햄릿은 자신이 ‘피해자’였지만 어느 순간 사랑 하는 여인에게 ‘가해자’가 돼버렸다. 다음 순간 맞게 될 고통을 모른 채 죽음에 대한 고뇌에 빠져 있는 햄릿. 들라크루아, <무덤 앞의 햄릿과 호라시오> / 그림제공·정여울


햄릿이 죽이고 싶어 했던 것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숙부였지만, 정작 창졸간에 죽음을 맞은 것은 아무 죄 없는 약혼자 오필리아였다. 햄릿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숙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죽이는 것을 끊임없이 주저했고, 그 망설임의 시간 속에서 오히려 분노와 상처는 더욱 커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그는 오필리아의 아버지를 숙부로 오인해 죽였고, 자신의 약혼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오필리아는 그만 미쳐버리고 만다. 오필리아는 실족사 했지만 그것은 햄릿의 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아직 햄릿은 자신이 저지른 몹쓸 짓을 알지 못한다.

지금 일꾼들이 파고 있는 무덤은 오필리아의 것이지만 햄릿은 그것을 모른다. 그 묏자리를 파다가 우연히 발견한 해골이 어린 시절 햄릿 자신과 놀아주던 광대 요릭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햄릿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허무를 깨달으며 슬퍼한다. 다음 순간에 그는 오필리아의 죽음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햄릿의 가슴속에서는 아버지를 비명에 잃은 아들의 슬픔과 그 아버지가 죽은 지 몇 달도 안 되어 숙부와 결혼한 어머니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 그리고 자신이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 등 모든 인간적 공포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다준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세상은 그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을 빼앗긴 햄릿은 이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그런데 정작 그의 고통의 가장 큰 피해자는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 오필리아였다.

그는 자신이 ‘피해자’였지만 어느 순간 사랑하는 여인에게 ‘가해자’가 되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이 극적인 장면, 그러니까 다음 순간 자신이 맞게 될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는 햄릿이 죽음에 대한 자신만의 심각한 고뇌에 빠져 있는 순간을 그려냈다. 



존 싱어 사르젱, <맥베스 부인을 연기하는 엘렌 테리>, 1889



왕을 시해한 뒤에는 극심한 두려움에 떨었지만 그전엔 너무도 당당했던 맥베스 부인. 그녀의 그로테스크한 카리스마가 그림 속에 생생히 담겨 있다. 존 싱어 사르젱, <맥베스 부인을 연기하는 엘렌 테리> / 그림제공·정여울


이 그림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에 실제로 나오는 장면은 아니지만, 맥베스 부인을 너무도 훌륭하게 연기했던 실제 배우 엘렌 테리를 모델로 하여 맥베스 부인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마치 지상의 모든 존재들 위에 군림하듯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맥베스 부인의 모습은 당당하다 못해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줄 정도다. 사실 맥베스 부인은 때로는 맥베스 본인보다 더 적극적인 태도로 왕의 암살을 획책했다.

주저하는 맥베스를 암살자의 길로 밀어 넣는 데 맥베스 부인은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이 그림 속 맥베스 부인의 눈빛에는 광기가 번득인다.

왕의 시해라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두려움이 주로 맥베스 자신에게 돌아갔다면 사건이 일어난 뒤의 두려움은 맥베스 부인에게도 돌아가게 된다. 살인이 일어나기 전에는 살인을 획책하고 독촉하는 언행을 서슴지 않았던 맥베스 부인이 막상 살인이 일어나자 두려움을 숨기지 못한다.

맥베스 부부는 함께 두려움을 일으키는 주체였다가 나중에는 그들이 일으킨 두려움보다 훨씬 커다란 복수의 두려움에 위협당하는 객체로 전락한다.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는 의기양양하고 전도유망한 사람이었던 맥베스가 오히려 왕의 자리에 오른 뒤로는 주변의 모든 존재가 자신을 위협하는 듯한 극심한 환상에 시달리게 된다.

이 그림은 아직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이전의 맥베스 부인, 그러니까 자신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타인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로서의 맥베스 부인의 강한 카리스마를 생생히 담아내고 있다. 


#2. 운명의 나침반이 바뀌는 지점 



에드윈 오스틴 애비, <리어왕: 코델리아의 작별>, 미상



입에 발린 사랑을 표현한 두 딸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아버지 리어왕은 추운 겨울날 벌판을 헤매고 다니게 된다. 에드윈 오스틴 애비, <리어왕: 코델리아의 작별>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을 통해 ‘사랑받고 싶은 욕망’의 어리석음을 꿰뚫어보는 것 같다. 리어왕은 노년기에 접어들자 왕국을 통치하는 것도 힘에 부치고, 재산을 관리하는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세 딸 고네릴, 리건, 코델리아의 사랑을 받는 것이 그의 가장 순수한 기쁨이었다.

그는 사랑스런 세 딸에게 왕국과 재산을 물려주고 이제 그만 왕좌에서 물러나고 싶어진다. 거기까지는 지극히 인간적인 결정이다. 그런데 리어왕은 ‘세 딸에게 어떻게 재산을 나누어줄까’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딸의 순서대로 재산을 물려주자’라는 어리석은 셈법을 생각해낸다.

자신을 사랑하는 딸들의 마음을 비교하는 것도 어리석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너희들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보라’고 주문한 리어왕의 확신은 더더욱 어리석기 그지없다.

아버지이자 제왕의 재산과 권력을 탐낸 고네릴과 리건은 서로 ‘누가 더 감언이설을 아름답게 꾸며내는가’를 경쟁하듯 청산유수로 아버지에 대한 입에 발린 사랑을 표현한다. 어리석은 리어왕은 딸들의 속셈도 모른 채 그저 ‘언어’가 주는 광채에 미혹되어 마치 축제라도 벌이듯 신명이 나서 재산과 통치권을 나눠준다.

막내딸 코델리아만이 오직 침묵한다. 사랑을 말로 표현하라는 아버지의 강요가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코델리아는 사랑을 계량화할 수 있다는 믿음에, 사랑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아버지의 사유에 저항한다. 그러나 리어왕의 가족은 물론 측근들 그 어느 누구도 코델리아의 순수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코델리아는 우직하다 못해 답답하고 융통성 없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코델리아의 이런 순수한 모습은 리어왕의 마지막 구원의 씨앗이었음이 뒤늦게 밝혀진다. 코델리아의 언니들은 리어왕이 물려준 재산을 차지한 뒤 ‘언제 당신이 내 아버지였느냐’는 식으로 아버지를 홀대하고 만다.

두 딸에게 나라는 물론 재산까지 다 내어준 아버지는 심지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추운 겨울날 갈 곳이 없어 한기에 떨며 벌판을 헤매기까지 한다.

이 그림은 세 딸의 입장 차이가 격화되는 순간, 리어왕의 재산을 한치 혀의 달콤함으로 빼앗으려는 언니들과 아버지의 재산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순진한 코델리아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는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바로 이때가 마지막 기회가 아니었을까. 리어왕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틀린 선택을 고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자신이 쳐놓은 운명의 덫을 향해 자신이 스스로 빠져 들어가고 만다. 아버지와 언니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코델리아를 향해 등을 보인 채 돌아서 퇴장하는 토라진 노인의 모습이 바로 리어왕의 어리석음을 웅변한다. 



오딜롱 르동, <판도라>, 1914년경



판도라야말로 신들의 역사를 뛰어넘어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는 신호탄 아닐까. 불행도 고통도 없는 시간은 인류의 역사에서 한 번도 존재한 적이없으니까. 오딜롱 르동, <판도라>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된다’는 상자를 열어볼까 말까 고민하는 판도라의 모습은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주제였다. 불행이나 고통을 몰랐던 인류에게 판도라는 최초로 쓰라린 아픔을 겪게 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 신화 자체가 ‘최초의 여인’ 판도라를 헤파이스토스의 ‘작품’이자 인류의 역사를 시작한 기원으로서의 여성으로 보지만, 그런 판도라를 왜 이토록 부정적으로 묘사했을까. 어쩌면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 사회의 분쟁과 갈등의 씨앗을 ‘여성의 아름다움’이나 ‘못 말리는 호기심’으로 보았던 것일까.

그리스 신화는 이렇게 ‘최초의 불행’을 엿본 사람의 오명을 여성에게 뒤집어씌움으로써 ‘역사는 남성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불평등한 믿음을 심어주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판도라는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된다는 그 상자를 열고 싶은 호기심을 참지 못한다. 판도라는 ‘사악한 아름다움’이나 ‘치명적인 호기심’의 상징이 되어버렸지만, 과연 그런 것들이 전적으로 여성의 전유물일까. 그리스 신화에서는 판도라의 호기심과 아름다움을 치명적인 위험으로 묘사하지만, 나에겐 판도라야말로 신들의 역사를 뛰어넘어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는 신호탄으로 다가온다.

사실 불행도 고통도 없는 시간은 인류의 역사에서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으니까. 르동의 그림은 판도라가 상자를 열기 전의 세상을 낙원처럼 신비롭게 묘사해놓았다. 하지만 판도라가 상자를 여는 순간, 세상은 저 아름다운 낙원의 빛깔보다도 더 다채롭고 풍요로운 감정과 사건의 색채로 물들지 않을까.

고통은 때로 인간을 파괴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내면을 더욱 깊고 아름답게 성장시킬 수 있는 무기이기도 하니까. 고통이 없는 곳에서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희망’마저도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릴 테니까. 



피터 폴 루벤스, <삼손과 데릴라>, 미상




한때 불타는 열정을 공유했던 상대방에 대한 일말의 연민이 일렁이는 듯, 데릴라의 눈빛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다. 피터 폴 루벤스, <삼손과 데릴라>


이 그림 속에서 데릴라는 마침내 삼손을 유혹했고, 유혹한 직후에 그를 죽음의 길로 이끌고 있다. 삼손의 머리카락을 잘라냄으로써 그의 힘을 제거해버리는 데릴라의 재치와 용기가 반짝이는 장면이다.

방금까지 사랑을 속삭이던 엄청난 거구의 주인공 삼손을 힘없이 축 늘어진 주검으로 만들어버리기 직전, 데릴라의 생생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이 극적인 장면에서 데릴라는 마침내 미션을 완수하기 직전이지만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데릴라의 얼굴에서는 미묘한 애수의 분위기가 감돈다.

한 손은 마치 죽음의 기운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듯 물러서는 자세이지만, 한 손은 이제 주검이 될 삼손을 가만히 위로하며 토닥이는 듯하다. 한때 불타는 열정을 공유했던 상대방에 대한 일말의 연민이 일렁이는 듯, 데릴라의 눈빛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다. 


#3. 이 순간이 지나면, 인생은 어떻게 변해버릴까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티스베>, 미상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태가 된 그리스 신화 ‘티스베와 피라모스의 비극’은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고 싶은 사랑의 애절함을 신화의 형태로 보존한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티스베> / 그림제공·정여울


그리스 신화 속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모태가 된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있다. 바로 티스베와 피라모스의 비극이다. 양가 부모님의 반대로 서로 만날 수 없었던 티스베와 피라모스는 오직 ‘담벼락’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서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그림에서 티스베는 담벼락 너머로 혹시나 연인의 목소리나 인기척이 들릴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다. 두 사람은 오직 이 작은 구멍을 통해 서로의 모습을 엿보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지만, 언젠가는 함께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침내 사랑의 도피를 결심하고 성문 바깥에 있는 니노스 왕의 무덤 앞에서 만나기로 부모님 몰래 약속을 했다. 혹시나 누군가에게 들킬지도 몰라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티스베는 사자 한 마리가 주둥이에 피를 잔뜩 묻힌 채 물을 마시러 온 것을 발견하고 황급히 근처의 동굴로 몸을 숨긴다.

바로 그 순간, 바람에 베일이 날려 사자 곁에 떨어지고 만다. 사자는 베일에서 사람 냄새를 맡자 피 묻은 입으로 베일을 갈가리 찢어놓고는 제 갈 길을 간다. 사자가 떠난 뒤 피라모스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 티스베의 피 묻은 베일을 발견한다.

티스베의 것임에 분명한 베일이 사자의 발자국 곁에서 피투성이로 찢어져 있는 모습을 보고, 피라모스는 미칠 듯한 슬픔과 자책감에 빠져버린다. 피라모스는 티스베를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칼로 자신의 몸을 찌르고 만다.

잠시 후 이제나저제나 연인이 왔는지 학수고대하고 있던 티스베는 피투성이로 쓰러진 피라모스를 발견하고 자신 또한 그의 곁을 따라간다. 티스베는 피라모스의 옆구리를 찌른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른다.

두 사람이 연이어 죽음을 맞은 뽕나무 근처에는 사랑하는 두 남녀가 흘린 피로 흥건해졌는데, 뽕나무 열매가 피처럼 붉은 빛을 띠는 것은 바로 이 젊은 연인의 안타까운 죽음 때문이라고 한다.

서로 미워하던 양가 부모들은 이토록 어린 연인들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것을 알게 된 후 두 사람의 유해를 같은 곳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태가 된 것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사랑의 애절함을 신화의 형태로 보존하고 있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수태고지>, 미상



수많은 수태고지 중에서도 이 그림은 신성성을 최대한 억제하고 인간 마리아의 현실적인 고뇌를 생생히 그려냈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수태고지> / 그림제공·정여울


신의 아들 예수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천사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수태고지’의 주제 또한 수많은 화가가 앞다투어 그린 장면이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까 말까 고뇌하는 듯한 마리아의 모습은 언제나 매력적인 피사체다. 특히 이 그림은 ‘마리아의 두려움’을 생생하게 표현하여 더욱 오래 기억에 남는다.

마리아는 과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하다. 겁이 난 듯한 표정, 자신의 운명을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표정, 조금만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천사의 메시지를 가만히 듣고 있다. 아직 이렇다 할 평지풍파를 겪지 못했을 마리아에게는 천사의 수태고지가 청천벽력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수태고지를 그린 수많은 그림 중에서도 내가 이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떤 신성한 상징이나 신비로운 분위기 등을 최대한 억제하고 인간 마리아 그리고 여인 마리아의 현실적인 고뇌를 생생하게 그려낸 그림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성스러움의 휘장을 걷어내고, 종교화라는 장르적 문법도 걷어내고, 오직 인간의 현실 속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자신을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평생 살아온 사람이라면 과연 이 엄청난 운명의 메시지를 듣고 과연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천사는 사뭇 경건하고 엄숙한 몸짓으로 눈처럼 새하얀 백합을 선물하며 ‘네가 바로 그 사람’임을 알리고 있는데 소녀 마리아는 커다란 눈망울에 두려움을 가득 담고 벽 쪽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인생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녀는 예수의 어머니가 될 것이며, 나아가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상징적 어머니가 될 것이다. 



지오토, <나를 만지지 마라>, 1304~1306


‘신의 영역’에 올라선 예수님과 인간 막달라 마리아 사이의 거리감일까. 사랑의 본질이란, 너에게서 달아나려 하는 바로 그 존재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오토, <나를 만지지 마라> / 그림제공·정여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부활한 첫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쁜 마음에 그를 붙잡으려 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요한복음>의 이 장면 또한 화가들에게 수없이 사랑받았던 대목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사람들은 신과 인간의 돌이킬 수 없는 차이를 발견하기도 하고, 이제는 ‘인간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던진 채 마침내 ‘신의 영역’에 올라선 예수님과 인간 막달라 마리아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철학자 장 뤽 낭시는 <요한복음>의 이 장면에서 철학적 화두를 발견한다. 그토록 다정했던 예수님은 왜 막달라 마리아의 지극히 인간적인 반가움의 표현마저 거부했던 것일까.

낭시는 <나를 만지지 마라>라는 책에서 바로 그것이 사랑의 본질임을 주장하고 있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붙들려 하지 말라는 것. 가장 사랑하는 것을 차라리 놓아주라는 것.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너에게서 달아나려 하는 바로 그 존재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너는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다
너는 누구도 잡거나 붙잡을 수 없다.
바로 그게 사랑하고 아는 것이다.
너에게서 빠져 달아나는 이를 사랑하라.
가버리는 이를 사랑하라.
떠나고자 하는 이를 사랑하라.
-장 뤼크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중에서
 



카미유 코로, <지하세계에서 에우리디케를 데려오는 오르페우스>, 1861




다음 순간에 어떤 파국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는 인간의 모습은 서글프면서도 아름답다. 카미유 코로, <지하세계에서 에우리디케를 데려오는 오르페우스> / 그림제공·정여울



오르페우스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아내 에우리디케를 다시 이승으로 데려오기 위해, 저승으로 떠나는 모험을 감행한다. 오르페우스는 죽어서라도 아내와 함께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르페우스의 애절한 노래 소리에 감동받은 나머지, 신들은 그에게 기적을 선물해준다.

에우리디케를 살려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 하데스가 내건 조건이 있었다. 에우리디케를 이승으로 데려가는 대신, 이승으로 데려가는 그 길에는 절대로 아내를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고. 오르페우스는 그 약속을 꼭 지키겠다며 아내를 데리고 이승으로 가는 중이다.

그 다음에 어느 순간이 올지도 모르는 채 다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희망찬 미래를 생각하며 걷고 또 걷고 있다. 다음 순간에 과연 어떤 파국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는 인간의 모습은 서글프면서도 아름답다.

오르페우스는 다음 순간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신과의 약속을 어길 것이고, 간신히 하데스에서 찾아온 아내 에우리디케를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될 것이며, 그녀를 잃는 것이 곧 세상을 잃는 것과 다름없는 오르페우스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이 연인을 위해서는 결코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지 않다. 하지만 아직 오르페우스도 에우리디케도 ‘다음 순간의 파국’을 모른다. 모르기에, 다만 이 순간에 완전히 충실할 뿐이다. 모르기에, 뚜벅뚜벅 앞만 보고 걸어갈 뿐이다.

이것이 인간의 참모습이 아닌지. 1분 앞의 미래조차 알지 못한 채로 그저 미래로, 미래로 걷고 또 걷는 유한한 존재, 하지만 바로 그 유한함 속에서 무한의 사랑을 꿈꾸는 인간의 아름다움이야말로 포기할 수 없는 삶의 가치일 것이다. 

[출처] : 정여울 미술평론가,문학평론가 : < 정여울의 그림을 읽다> /월간 중앙 201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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