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이 꿈꾸고 세종이 만든 나라, 조선왕조의 창업 비록(秘錄)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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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이 꿈꾸고 세종이 만든 나라, 조선왕조의 창업 비록(秘錄)Ⅱ

구름에 달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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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창업 비록(秘錄)]

정도전이 꿈꾸고 세종이 만든 나라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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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창업비록(秘錄)』Ⅰ [ 1~  5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7 

『조선왕조의 창업비록(秘錄)』Ⅱ [ 6~1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8

『조선왕조의 창업비록(秘錄)​Ⅲ

 


6. 14세기 말, 고려의 토지와 - 백성의 땅에서 권력의 수탈 피할 곳 없구나 


왕권 약화하고 대외무역 늘면서 토지 사유화 폐단 늘어

…수확물보다 조세 많아 가족 빼앗기고 고향 떠난 유랑민 급증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이후 창왕이 아홉 살 나이로 즉위한 뒤 토지제도 개혁은 고려의 최대 현안이었다. 고려 말의 전제(田制)는 공적인 의미를 거의 상실한 채 권문세족의 사익의 도구로 전락했다. 의식 있는 관료들은 전제를 개혁하지 않고는 나라를 일으킬 수 없다며 연일 개혁을 촉구했다



 

1388년(우왕 14) 조준의 전제개혁 상소.

사전을 폐지하고 공전을 회복하기 위해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사진:네이버 국역 [고려사]



1388년 7월, 창왕의 즉위 직후 조준은 장문의 전제개혁 상소문을 올렸다. 토지문제의 난맥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외침이 하늘에 사무친다는 내용이었다.

백성이 사전(私田)의 세금을 낼 때 남에게 빌려서도 능히 충당하지 못 하며, 처자식을 팔아도 빌린 것을 능히 갚을 수 없고, 부모가 주리고 떨어도 봉양할 수 없으니, 원통하게 부르짖는 소리가 위로 하늘에 사무쳐 화기(和氣)를 해쳐서 물난리와 가뭄을 부릅니다. 이로 인해 호구가 텅 비게 되고, 왜구가 깊이 들어와 천리에 시신이 널려 있어도 막을 자가 없습니다.” ([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사전이란 국가가 관료나 공신 등에게 지급하고, 이들이 백성들에게 직접 조세를 받는 토지다.

전근대 민서(民庶)의 삶은 고달팠다. “봄에 쟁기질 하고, 여름에 제초질하고, 가을에 추수를 하여, 겨울에는 비축을 한다. 봄에는 풍진에, 여름에는 혹서에, 가을에는 습우(濕雨)에, 겨울에는 한랭에 내맡겨져 있다.

네 계절에 휴식이라곤 없다. 이렇듯 열심히 고된 생계를 꾸려 가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홍수와 가뭄과 재해, 정치적 탄압과 학대, 갑작스런 정세, 관아의 극히 변덕스런 명령들 등등이 가중된다. 재산이라도 가진 자들은 그것을 반 가격으로 팔아치우지만,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은 두 배에 달하는 이자로 빚을 낸다.

이러한 이유에서 많은 사람이 빚을 갚기 위해서 자기 땅과 집을 팔고, 심지어는 자기 자식들까지 팔고 있는 것이다.”([한서(漢書)] ‘식화지’ 上; 송영배, [중국사회사상사], 222쪽) 한나라 경제 때 조착(晁錯, BC 200~154)의 글이다.

고려 말 최대의 개혁 현안은 토지문제였다. 25세의 청년 이색은 공민왕 원년(1352)에 올린 상소에서, “신은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하고 정전(井田)을 고르게 하는 일이야말로 치인의 급선무’라고 들었습니다. 조종이 만들어 물려준 제도와 지킬 규범은 지극히 옳은 것이었으나 400여 년이 흐른 지금 폐단이 어찌 전혀 없겠습니까? 그 가운데 전제(田制)가 특히 심각합니다([이색전(李穡傳)])라고 말했다.

고려 말에도 수차 전제 개혁안이 제시되었다. 충목왕 원년(1345) 이제현의 개혁안, 위의 이색의 상소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제현의 개혁안은 왕의 식읍, 그리고 경기 지역 녹과전에 대한 겸병의 폐지만을 목표로 했다.

이색도 불법적 토지겸병과 과도한 조세 수취를 지적한 뒤, 충숙왕 원년(1314) 완성된 토지대장인 갑인주안(甲寅柱案)에 따라 불법을 시정할 것을 제안했다. 충목왕 원년 원순제와 기황후의 지지 하에 추진된 전제개혁이나, 신돈 집권기의 전제개혁도 모두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국운 되돌릴 방법은 전제개혁뿐


 

김홍도의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

조선 후기에 본격화된 이앙법으로 수전에 모내기를 하는 모습이다.



전근대 국가에서 전제는 국가의 운명 그 자체다. 조준의 개혁상소를 보자.   

“대저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로부터 시작되니, 전제를 바르게 하여 국용을 풍족하게 하고 민생을 후히 함은 당금의 급무입니다. 국가 존속의 장단은 민생의 고락에서 나오고, 민생의 고락은 전제의 균부(均否)에 있습니다. 문왕·무왕·주공은 정전(井田)에 의해 양민(養民)하였기 때문에 주나라가 천하를 800여 년 동안 유지했으며, 한나라는 전세를 가볍게 하여 천하를 400여 년 동안 가졌습니다. 진나라는 정전을 무너뜨려 천하를 얻은 지 두 세대 만에 망했습니다.” ([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전제는 군사력보다 중요하다. 태조 왕건은 이 원칙의 신봉자였다.

 “태조께서 용흥(龍興)하시어 즉위한지 34일에 군신을 만나 개연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근세에 포학한 수렴으로 일경(一頃)의 세금이 6석에 이르니 백성은 조금도 생을 편안히 할 수 없다. 나는 이를 심히 불쌍하게 여기니, 지금부터는 마땅히 십일제(什一制, 1/10세)를 써서 밭 일부(一負)에 세금 세 홉을 내게 하라’ 하시고, 마침내 3년의 조세를 민간에게 면제하였습니다. 당시는 삼국이 정립하여 군웅이 각축했으므로 재용이 매우 급하였으나 우리 태조께서는 전공을 뒤로 하고 백성을 먼저 진휼하시니, 이는 천지가 만물을 기르는 마음이요 요순과 문무의 인정입니다.” ([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그러나 전제는 국가재정과 민생 문제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전제는 관료제와 국방, 나아가 문명 그 자체를 결정한다. 조인옥의 견해다.


“조종께서 밭을 나눈 제도에 따라 왕이 몸소 적전(籍田)을 경작하는 것은 천지와 종묘의 제사를 받들기 위함이요, 360장처의 전토는 주상께 봉공코자 함이며, 전시, 구분전(口分田)은 사대부를 우대하여 염치를 닦고자 함이며, 주·부·군·현·향·소·부곡·진·역의 아전부터 국역을 제공하는 모든 사람이 밭을 받지 않음이 없는 것은 민생을 후히 함으로써 국가의 근본을 키우려는 것이며, 42도부 4만 2천의 병사에게 모두 전토를 주는 것은 무비를 소중히 하려는 까닭이었습니다.” ([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토지는 이처럼 상징적 제의로부터 국방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모든 기능, 그리고 이와 결부된 역할분담(國役)과 관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토지가 개인에게 점유되어 사전화될 경우, 국역자들은 공적 서비스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 없었다. 국가의 기초가 무너지는 것이다.

인륜도 전제에 달려 있다. 맹자는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다”고 말했다. 조준 역시 사전 개혁으로 “예의가 일어나고 염치가 행하며 인륜이 밝아지고 소송이 종식되어, 사직의 기초가 반석같이 편안하고 태산같이 튼튼해진다”고 주장한다. ‘필요(needs)’의 영역이 정의롭지 않고는 인간의 정신문명도 위태로운 것이다.

그런데 고려 말의 전제는 공적인 의미를 거의 상실했다. 위기의 근본 원인은 ‘사전화(私田化)’에 있었다. 토지의 공적 기능이 대부분 잠식되고 사익만이 추구된 것이다. 구체적인 문제는 권문세족들의 겸병과 수조체제의 혼란이었다.

고려의 전제는 국전제였다. 토지의 소유권은 국가에 속했다. 백성에게는 토지가 주어지지 않았다. 농민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소작인으로서, 땅을 경작하는 대신 조세와 공물, 부역을 바친다. 



국전제 명분 뒤에 귀족들의 사익 도구화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에 실린 ‘논갈이’. 갈이는 풀을 제거하고 흙을 고르게 부수어 토양을 비옥하게 한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토지는 어떻게 분배했는가? 국가에서의 역할, 즉 국역에 따라 분배되었다. 고려의 전제는 크게 다섯 번 바뀌었다. 940년 태조 왕건 때의 역분전, 975년 경종 때의 시정전시과, 998년 목종대의 개정전시과, 1076년 문종대의 경정전시과, 1257년 고종대의 녹과전제다. 앞의 네 차례는 기본적으로 지방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해 가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역분전의 분배 기준은 인품과 관품이었다. 인품이란 건국 과정에서의 공로를 뜻한다. 즉, 공로의 다과, 관직의 고하에 따른 것이다. 건국기의 고려는 기본적으로 호족연합국가로서, 호족과 관료가 뒤섞여 있었다. 시정전시과는 인품을 약화시키고, 기본적으로 관품에 따랐다.

호족을 약화시킨 것이다. 토지는 전현직 관리 모두에게 지급되었다. 개정전시과는 오직 관품에 따랐다. 호족이 배제되고 중앙집권국가가 완성된 것이다. 경정전시과에서는 전직관리가 배제되었다. 토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전시과의 규정대로라면 약 87만 결의 토지가 필요했다. 그런데 1388년 위화도회군 뒤의 양전을 보면 가용 토지는 50만 결에 그쳤다.(이영훈, [한국경제사(I)], 222쪽)

토지의 분배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왕실 비용을 충당하는 내장전(內庄田)이다.

둘째, 중앙정부의 운영비를 조달하는 토지다.(공해전, 둔전, 학전, 적전 등) 이상 둘이 공전(公田)이다.

셋째, 왕족, 사원, 관료, 중앙군에 지급된 사전(私田)이다.(궁원전, 사원전, 양반전, 군인전)

조세를 개인이 직접 거두므로 사전이다. 문관 424명, 무관 3589명, 마군과 보군 약 3만~4만 명, 군현의 호장층을 합해 약 5만여 명이 농민의 소출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호장층을 빼면 모두 개경에 사는 군인이었다. 개경 근교까지 약 50만 명이 모여 살았다.

그런데 경정전시과는 곧 중단되고, 녹봉제가 시행되었다. 국가가 조세를 일괄 수령하여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전시과 체제에서는 관인 등 수조권자가 농민에게 직접 조세를 받았다. 녹봉제는 양자의 직접적 관계를 끊은 것이다. 요컨대 중앙집권화의 완성을 의도한 것이다.


“녹봉제의 시행은 모든 직역자에 대한 보수체제를 통일적인 관료제적 질서로 정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려왕조의 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에 있어서 일대 획기를 이루었다.” (이영훈, [한국경제사(I)] 224쪽) 이를 계기로 “10~11세기 전시과체제에서 귀족, 관료의 세습적 가산으로 존재한 사전은 12세기 이후 점차 그 모습을 감추었다.” (이영훈, 앞의 책, 227쪽)

농민도 전호(佃戶)의 신분을 획득했다. 국가의 토지를 빌려서 경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전 농민이 국가와 직접 연결된 것이다. 그런데 통일신라의 왕토주의나 고려의 국전제는 그저 이념일 뿐 토지는 실제 사유지였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였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고려의 전제가 공전제이며 토지의 사유는 인정되지 않았다고 한다.(이영훈, [한국경제사(I)]) 토지의 매매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물론 공전이라 해도, 국가의 소유권과 귀족·관료의 수조권, 농민의 경작권이 중첩된 상태로 존재했다.

고려의 공전제가 결정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무신 집권기 때부터였다. 몽고와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녹봉을 지급할 수 없었다. 녹봉 360석의 재상이 고작 30석을 받았다. 그래서 1257년 녹봉제가 폐지되고 녹과전제가 시행되었다.


182년 만에 다시 토지를 분급한 것이다. 단지 사전의 확대를 막기 위해 경기도에 한정했다. 단 왕족, 귀족에게 지급한 별사전, 사급전은 예외였다. 이것이 문제였다.



국가 기강 무너지고 백성들은 피폐해져



정전제(井田制)의 도해.

사방 1리의 토지를 9개로 나눠 8개 구역은 사전으로 하고 가운데 1개는 공전으로 정해 이 구역의 소출은 조세로 바치도록 했다. / 사진:중국 [유기백과]



공민왕 15년(1366), 신돈이 전제개혁을 단행할 때 공포한 방문을 보자.

“최근 국가 기강이 크게 무너지고 백성의 재물을 탈취하는 일이 유행을 이루어 종묘·학교·창고·사사(寺社)·녹전(祿轉)·군수전(軍須田) 및 국인의 세습 전민(田民)을 권세가가 거의 다 점탈했다. 반환 결정이 내려도 그대로 차지하고 있고, 혹 양민을 노비로 만든다. 주·현의 역리·관노·백성 가운데 국역을 피한 자들을 모조리 숨겨 놓고 농장을 크게 일으켜 백성을 병들게 하고 나라를 쇠잔케 하니, 하늘도 분노해 홍수와 가뭄을 내리고 돌림병 또한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신돈전(辛旽傳)])

이를 보면, 강력한 겸병운동이 발생해 공사전은 물론이고 왕의 소유지까지 잠식당했음을 알 수 있다. 조준의 상소를 보자.

“근년에 이르러 겸병이 더욱 심하여 간흉한 무리가 주군을 포함하여 산천으로 표를 삼아 모두 이를 가리켜 조업전(祖業田)이라 하여 서로 밀치고 서로 빼앗아 서로 훔치고 서로 빼앗으니 1무의 주인이 대여섯 명을 넘기기도 하며 1년에 가져가는 조세가 여덟아홉 차례에 이르기도 합니다.

위로는 어분전(御分田)으로부터 종실·공신·시조(侍朝)하는 문무관원의 전지, 외역(外役)·진(津)·역(驛)·원(院)·관(館)의 전토와 무릇 사람들이 누세에 걸쳐 심은 뽕나무와 지은 바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빼앗아 가지매 슬프게도 우리 무고한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구렁텅이에 빠집니다.

조정에서 분급한 토지는 신민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제는 신민을 해치기에 알맞게 되었으니 이는 사전(私田)이 난리의 괴수가 된 것입니다.” ([고려사], ‘식화1’, 전제-녹과전)

탈점의 방법은 첫째, 권력을 이용한 것이다. 원 지배기의 권문세족은 왕도 제어하기 어려웠다. 대개 원 조정에 후원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344년 전제개혁 때, 기황후가 “무릇 나의 친척은 세력을 믿고 남의 전민을 빼앗지 말라. 만약 어기면 반드시 죄주리라”고 경고하였던 사례는 이를 보여준다.

 심지어 개혁의 심벌인 이제현의 아버지 이진조차 남의 노비를 빼앗아 피해자가 문 앞에서 목을 매고 죽기도 했다. “이진이 이제현의 세력을 믿고 남의 노비를 많이 빼앗자, 애소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그 집 앞에 줄을 섰다. 교감(校勘) 최면이 이진의 집 문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 ([이진전(李傳)])

둘째, 지방관과의 결탁이다. 지방관은 대개 중앙관청의 하급보조직인 부사(府史)와 서리 출신이었다. 이들은 “남의 전답과 백성을 빼앗아 권문에 바치고, 권신의 우마와 매, 개를 길러 아첨하여 승진의 매개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탐오하고 잔폭한 화가 서리보다 심했다.” ([고려사], ‘선거지3’, 선용수령, 창왕) 지방의 서리도 비슷했다.

충목왕 3년, 양광도 안찰사 김두는 재상 채하중에게 공전을 뇌물로 바친 이천현리의 귀를 베었다.([왕후전(王傳)]) 이런 일은 고려 중기 이래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주현의 서리가 공사전을 주인 없는 땅(閑地)이라고 하여 권세가에 바친 결과 한 토지에 여러 명의 주인이 생기고, 그 부담은 농민이 모두 지게 되었다.

셋째, 사급전(賜給田)을 이용한 탈점이다. 사급전은 왕족이나 공신에게 하사하는 것이다. 원래는 노는 땅(閑田)을 개간하려는 국가의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사패를 빙자하여 비록 주인이 있고 전적에 올라 있는 전토도 모두 빼앗”는 폐단이 보편화되었다.

고려 후기의 왕들은 충성을 확보하고자 측근들에게 무분별하게 사패를 나눠주었다. “여러 공신과 권세가가 사패를 함부로 받아 스스로 본전(本田)이라 칭하고 산천으로써 표를 삼아 앞다투어 문서를 위조해 탈점(據執)”했다.([고려사], ‘식화지1’, 녹과전, 충목왕)

그런데 왜 강력한 사전화 운동이 발생한 것일까?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 농업생산성의 향상이며, 둘째, 국가의 약화다. 9세기 후반 고려 인구는 200만이었다. 12세기 전반은 300만, 1392년은 555만으로, 고려 초에 비해 약 3배 증가했다. 그만큼 농업생산력이 높아진 것이다.

 “11~14세기에 걸쳐 수전의 생산성이 2~3배 증가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영훈, [한국경제사(I)], 324~325쪽)

농업생산성이 증가한 원인은 팍스 몽골리카 하의 농업기술의 발전, 그리고 대외무역의 확대로 인한 것이었다. 28년에 걸친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는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었다. 1254년에는 포로로 잡혀간 남녀가 20만6800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13세기 말 피해가 거의 복구되었다.

“1296년에는 개경에 1008개의 기둥으로 연결된 긴 복도의 시전(市廛)이 다시 세워졌다. 그보다 앞서 1279년에는 원과의 역참로가 개통되었다. 이로써 고려왕조는 한반도에서 발칸반도까지, 베트남에서 헝가리까지, 시베리아에서 인도까지의 광활한 유라시아대륙과, 지중해에서 인도양을 거쳐 동지나해와 발해만에 이르는 광대한 해원(海原)을 종횡으로 엮는 대몽골 울루스에 깊숙이 포섭되었다.” (이영훈, [한국경제사(I)], 277~280쪽)

국제무역도 번성했다. 1976년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무역선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배는 1323년 중국 영파를 떠나 일본으로 가던 중 난파했는데, 발굴된 2만 점의 자기 중에는 고려청자도 포함되어 있다.

팍스 몽골리카 하 고려의 대외무역은 [노걸대(老乞大)]라는 책에 잘 나와 있다. 이 책은 “원제국을 방문하던 상인들의 언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려 정부가 발행한 일종의 어학 교습서”다. (이강한, [고려와 원제국의 교역의 역사], 193쪽) 책이 나올 정도로 고려 상인의 수가 적지 않았다.

책은 “상인이 고려를 떠나 원 대도에 도착, 무역을 벌이는 과정을 따라간다. (…) 관인 무역 허가증을 지니고 있고, 고려-원 간을 정기적으로 왕래하며, 원내에서 모시천을 파는 친척을 가진 자”로 설정돼 있다.

인삼과 모시가 유력한 수출품이었다.

“고려 인삼의 경우 ‘선상(船商) 거상(車商)이 다퉈 인삼을 매입하여 원방(遠方, 중국)에서 높은 가격으로 팔았으며 이에 따라 관가도 이익을 탐했다.’는 기사를 통해 이전부터 그 수출 규모가 컸음을 엿볼 수 있다. 고려 모시의 경우도 원제국의 수요가 높아 수출 열기가 지속되었다. 특히 견직업, 저직업의 규모가 비대해져 생산구조가 왜곡될 정도였다.” (이강한, [고려와 원제국의 교역의 역사], 195쪽)

무역에 투자한 권세가들이 농장에 밭작물 대신 모시를 심게 해 소작농이 곡물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역에 대한 욕망은 꽤 크고 일반화되었던 듯하다.

“권세가들이 다투어 무역을 하느라 초피(貂皮)·송자(松子)·인삼·봉밀(蜂蜜)·황랍·미두 등 거둬들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백성들이 너무 고통을 겪는 나머지 노인과 어린 아이를 데리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유랑을 떠나니 참으로 통곡할 만한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부터는 백성들로부터 억지 구매하는 짓(抑買)은 일절 금지하고 만약 어기는 자가 있으면 엄격히 법에 따라 처벌하소서.” ([조준전(趙浚傳)])



왕은 장사치로, 장사치는 돈으로 권력 매수

 

 

13세기 팍스 몽골리카 시대의 세계 무역지도.

몽골은 정복지역 전체에 역참을 두고 해상 실크로드를 구축해 세계적인 규모의 안정적인 교역 시대를 열었다. / 사진:지식공유사이트 ‘슬라이드셰어’


고려는 모시, 인삼, 말을 수출하고 견직물을 수입했다. “고려 상인들은 직물류 등 고려 물자를 원에 수출해 3분의 1 정도의 차익을 얻고, 중국 물자를 수입해 고려에서 두 배 이상의 가격으로 판매함으로써 100%의 이익을 거두는 식의 무역전략을 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들도 직접 무역에 나섰다.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이 대표적이다.

1342년 충혜왕은 의성·덕천창·보흥고의 포 4만8000으로 점포를 열고 시중에서 거래했다. 또한 2만 필의 포화를 원에 보내, “측근 남궁신으로 하여금 금은·초 그리고 포를 유(幽)·연(燕) 지역에서 무역하게 했다.” ([고려사] 세가 충혜왕 복위3년 3월 병신; 이강한, 앞의 책, 237쪽) 충혜왕의 대리상은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의 무슬림 상인인 회회인(回回人)이었다.

천민 중에도 거상이 탄생했다. 우왕대의 지불배(池佛陪)와 변벌개(邊伐介)라는 인물이다. 우왕 9년(1283) 어떤 사람이 도길부의 문에 글을 써 붙이기를, “지불배가 대사헌이 되고 변벌개가 장령이 되었다”고 하였다.


두 사람은 신분이 본래 용렬하고 미천하니 시정(市井)에서 생장하여 간사하고 탐욕스럽고 아첨을 일삼은 자로 일찍이 한 번도 진신(縉紳, 고급관인)과 나란히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글로써 희롱한 것이다.([이인임전(李仁任傳)])

시정(市井)에서 생장했다고 하니, 이들은 시전의 상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이인임의 사위 도길부를 재력으로 매수해 고관에 올랐을 것이다. 변벌개는 실제로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1385년(우왕 11)에는 사복부정(司僕副正)으로서 국가의 마필을 관리하였다. 당시 고려 정부도 납속보관제(納粟補官制)를 실시해 관직을 팔았다.(강재광, ‘고려 거상의 현대적 조명: 변벌개’)

농업기술의 발달을 보자. 고려전기의 경지이용방식은 휴한농법이었다. 토지가 척박하여 해를 걸러 농사를 짓는 것이다. “10세기만 하더라도 1년 1작의 상등전은 드물었고, 2년 1작의 중등전이나 3년 1작의 하등전이 일반적이었다.” (이영훈, [한국경제사(I)], 288쪽)


12세기 이후 농업기술이 크게 발전했다. 수리사업의 발전, 신품종의 벼 종자 도입, 소와 말의 분뇨를 이용한 우마구분법(牛馬廐糞法) 등 시비법의 발달, 윤답법, 심경법, 이앙법 보급에 의해 상경농법이 확대되었다.(위은숙, ‘12세기 농업기술의 발전’; 이태진, ‘14~15세기 농업기술의 발달과 신흥사족’)

공민왕 21년(1372)에 간행된 [농상집요(農桑輯要)]는 한국 최초의 농업서로서, 이 시대의 농업 발달을 보여준다. 농업 기술의 발전을 주도한 집단은 개성에서 내려온 이른바 재향품관층이었다. 농업기술의 발전은 대규모의 농장 경영을 가능하게 했다.(안병우, ‘고려후기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농장’)

생산성의 향상에 따른 잉여는 누가 가져갔을까? 기록들을 보면, 열심히 겸병에 나선 대농장주에게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국가가 대단히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무신집권기의 왕은 허수아비였다. 원 지배기에도 왕권을 회복하긴 했으나 여전히 취약했다. 원 조정이 왕을 임명했다.

충선왕은 즉위 후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진했으나, 귀족들의 반대와 원의 간섭으로 실패했다. 7개월 만에 폐위된 그는 원에 소환당했다. 충혜왕, 충정왕도 폐위당한 뒤 살해되었다.


충숙왕도 심왕 왕고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다, 연경에 5년간 유폐되었다. 한편 고려의 귀족들도 원 조정에 자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황후의 일족 기철 등이 대표적이다. 기철의 권력은 왕을 능가했다.



왕권 약화 틈타 권력가의 부정축재 횡행

겸병운동이 강력히 전개된 것은 이처럼 국가가 약화되면서 발생한 것이다. 우왕대의 집권자 이인임의 사례를 보자. “나라에는 열흘간의 비축도 없었으나 이인임은 전원(田園)과 노비를 온 나라에 걸쳐 소유했으며 그의 힘으로 고위관직에 오른 자들이 다투어 그를 본받아 남의 전민(田民)을 빼앗고 국사를 돌보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두고 ‘제조노비(提調奴婢)’라고 불렀다.” ([이인임전])

그의 측근들도 다르지 않았다. “우왕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이인임과 우왕의 장인 이림 및 임견미·염흥방·도길부·이존성·최렴 등이 호종하면서 각자 자신들의 겸종을 보내 가는 곳마다 떼를 지어 백성의 전려(田廬)를 끝없이 탈취했다.”

강제적인 점탈이 아니라 스스로 개간에 나서 농장을 조성한 사례도 있다.

“팍스 몽골리카의 번성한 국제적 교류는 고려의 경제를 자극하였다. 농지의 개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근기에서 개간의 주체는 개경의 국인들이었다. 잘 알려진 사례로서 안목(安牧, ?~1360)의 농장을 들 수 있다. 그는 개경 부근 파주의 서쪽 들을 개간하였다. 그의 손자 안원(安瑗, 1346~1411)에 이르러서는 개간지의 규모가 무려 수만 결에 달하였고, 경작 노비가 수백 호나 되었다.” (이영훈, [한국경제사(I)], 291쪽)

이처럼 귀족·관료층은 점탈과 개간을 통해 농장을 조성하고, 새롭게 증가한 잉여를 독차지한 것이다.

이에 반해 1388년 조준의 전제개혁 상소에서 묘사된 농민의 처지는 눈물겹다. 부모와 처자를 먹이고 입히기는커녕 빌린 조세를 내고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처자식을 팔아야 했다. 그들의 슬픈 외침이 하늘에 사무쳤다. 분노한 하늘은 홍수와 가뭄을 내렸다. 그런데 이것이 과장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고려사]의 이 같은 서술에는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녹과전과 별사전은 수조율 10분의 1의 수조지에 불과했다. (…) 왕실과 귀족의 대규모 농장이 야기한 폐단은 개경과 가까운 경기도와 충청도에 국한된 현상이었다. 이 두 도에서 망성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타 도에서 사정은 달랐다. 13~14세기 원 복속기의 여러 기록을 세밀하게 읽으면 일반 농민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개선되고 있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영훈, [한국경제사(I)], 285쪽)



고향 등지고, 빌린 돈 갚으려 가족마저 팔아


 

[고려사] 열전 ‘안목(安牧)’. 안목은 한국 성리학의 시조 안향의 손자다.

망성(亡姓)이란 “13세기 후반과 15세기 전반 사이에 유망하여 그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된 토성집단을 말한다.” 13~14세기에 고려의 농촌사회는 큰 구조적 변동을 겪었다. “군현의 지배 세력인 토성이 해체되거나 다른 지방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런 경향은 몽고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3세기 후반부터 부쩍 활발해졌다.

그 양상은 “15세기 전반의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전국 334개 군현의 토성(土姓), 망성, 속성(續姓)의 실태로부터 그 정보를 구할 수 있다. (…) 전국의 2281개 토성 가운데 망성은 542개로서 24%의 비중이다. 망성은 경기도에 159개, 충청도에 120개로서 전체 망성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이 두 도에서 망성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은 아무래도 개경과 가까워 중앙의 착취나 압력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이영훈, [한국경제사(I)], 282쪽) 경상도와 전라도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경상도의 망성은 17개, 전라도는 72개에 불과했다.

14세기 후반 전라도 농촌의 모습은 한가하고 유족했다. 1374년 정도전은 회진현(會津縣, 나주) 거평부곡(居平部曲)의 소재동에 유배되었다. 마을은 10여 호가 살았다. 부곡민들은 그를 따뜻하게 대해줘 그는 큰 감동을 받았다. 백성에 대한 정도전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도 이곳에서였다.

“동리 사람들은 순박하고 허영심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기를 업으로 삼는데, 그 중에서도 황연은 더욱 그러했다. 그의 집에서는 술을 잘 빚고 황연이 또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술이 익으면 반드시 나를 먼저 청하여 함께 마시었다. 손이 오면 언제나 술을 내어 대접하는데 날이 오랠수록 더욱 공손했다. 또 김성길이란 자가 있어 약간의 글자를 알았고, 그 아우 김천도 담소를 잘했는데 모두가 술을 잘 마셨으며, 형제가 한집에 살았다. 또 서안길이란 자가 있어 늙어 중이 되어서 안심(安心)이라 불렀는데, 코가 높고 얼굴이 길며 용모와 행동이 괴이했으며, 모든 사투리·속담, 여항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또 김천부·조송이란 자가 있는데, 그들도 술을 마시는 것이 김성길·황연과 비슷했다. 날마다 나를 찾아와 놀고, 매 철마다 토산물을 얻게 되면 반드시 술과 음료수를 가지고 와서 한껏 즐기고서 돌아갔다.” ([삼봉집] ‘소재동기(消災洞記)’)

부곡은 특수 행정구역으로 노비와 천민과 유사한 비천한 자들이 사는 곳이다. 전국 군현 수가 580개인데, 향, 부곡이 똑 같이 580개이니 그 규모가 상당했다.

부곡에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하나는 후삼국 통일전쟁기에 왕건에 대항한 호족 세력지역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국가의 공전을 경작하거나 축성에 동원되었다. 다른 하나는 신라 말 호족세력의 집단 예속민 지역이라는 설명이다. 다른 민전의 조세가 10분의 1인 반면, 이곳은 4분의 1이었다.

이들은 국학에 입학하지 못했고, 승려가 될 수 없었다. 부곡의 향리는 5품 이상의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삶은 상대적으로 열악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농사를 짓고, 계절 따라 술을 빚고 음식을 나누며 담소를 즐겼던 것이다.

“14세기 나주 농촌사회의 넉넉한 분위기는 농업생산력이 크게 발전한 가운데 수조율이 10분의 1로 낮아진 덕분이었다. 농민들은 농민적 토지소유를 구가하는 자영농으로 성립해 있었다.” (이영훈, [한국경제사(I)], 291쪽) 농장주만이 아니라 농민들도 생산력 발전의 혜택을 누렸던 것이다.

원래 고려의 조세는 공전 4분의 1, 사전 2분의 1이었다. 12세기 초 예종대에는 공사전 모두 실질적으로 4분의 1이 되었다. 다시 13세기 초반까지 10분의 1로 낮아졌다. 국가가 일부러 수조율을 낮춘 것은 아니다. 농업생산력이 높아진 만큼 저절로 낮아진 것이다.

수조량이 늘지 않은 것은 토지에 대한 농민의 권리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농민의 자기 노동에 기초를 둔 사유(私有)가 크게 신장된 결과에 다름아니다.” (이영훈, [한국경제사(I)], 289쪽)



땅 하나에 주인은 7~8명


정도전의 유배지에 세워진 초가집과 소재동비.

하지만 [고려사]의 기록은 압도적으로 농민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건국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고려사] 편찬자들의 과장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양심적인 학인이나 관인들의 기록은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 1352년 청년 이색의 복중상서를 보자.

 “백성은 오로지 토지만을 하늘로 삼고 살아가는바, 몇 뙈기 밭에서 일 년 내내 부지런히 일을 해도 부모처자를 부양하기조차 힘든 판에 조(租)를 거두는 자가 들이닥치게 됩니다. 만약 그 밭의 주인이 하나면 다행이지만 혹 서너 집이거나 심지어 일곱 여덟 집인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그 가문의 권세가 서로 엇비슷하다면 누가 양보하려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조(租)를 바치고 부족하면 남에게 빌려서라도 더 바쳐야하니 백성들은 무엇을 가지고 부모를 봉양하며 처자를 양육하겠습니까? 백성이 곤궁한 것은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시경]에도 ‘부자들은 그래도 괜찮거니와, 외로운 이 사람들 불쌍하도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색전(李穡傳)])

이색이 지적한 바처럼 토지의 주인이 7~8명이나 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준 또한 “1무(畝)의 주인이 5~6명을 넘으며, 1년의 세금을 8~9차나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의 약화로 소유권을 특정하지도 못하고, 부당한 수취를 금지할 수도 없었다. 조세가 10분의 1로 줄었어도 백성에게는 무의미했던 것이다. 견디지 못한 농민은 자녀를 팔았다.

1356년 공민왕은 “부호들이 돈을 빌려주고(稱貸) 이식을 취하는데 이자가 또 이자를 낳으므로 빈민은 조석을 걱정하여 자녀를 전매하기까지 하니 심히 불쌍하다”고 말했다.

“13세기 후반 이래 상업경제의 발전으로 사회적 유동성이 일층 높아졌다. 그에 따라 공적 조부나 사적 채무의 부담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자녀를 팔거나 인질로 빼앗기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이영훈, [한국경제사(I)], 275쪽)

14세기 이후 국가는 더 빈번하게 민간의 고리대에 개입하여 채권이나 인질을 해소했다. 몰락한 농민의 마지막 방법은 대농장에 투탁하거나 초적이 되는 것이었다. 우왕대에 왜구를 가장한 다수의 천민집단이 비적화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1388년 조준은 “그 형세가 두렵다”고 말했다.

13세기말 이래 고려는 농업생산성이 높아져 사회적 잉여가 2배 이상 커졌다. 그 결과 새로운 잉여를 둘러싼 격렬한 경쟁이 발생했다. 국가와 특권층, 그리고 농민이 서로 경쟁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약화로 인해, 새로운 잉여는 대부분 소수 특권층에 독점되었다.

그 결과 사회적 참상이 초래되고, 농촌사회의 해체가 촉진되었다. 13~14세기의 고려는 사적인 이익들이 각축하는 일종의 투기장이었다. 플라톤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의 국가 안에 다시 여러 계급들로 분열된 다수의 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 각자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다수의 국가다. 적어도 두 개의 국가가 서로 전쟁 중이다. 하나는 부자의 국가이며, 다른 하나는 가난한 자의 국가이다. 그리고 각각의 국가는 다시 더 많은 국가로 분열된다.” (Plato, Republic, 422e~423a.)

​[출처]: 김영수 영남대학교 정외과 교수<조선왕조 창업비록> / 월간중앙, 2018. 6.17.


​7. 14세기 말, 전제개혁 논쟁과 경제의 역설-혁명가 이성계가 고민한 정의란 무엇인가 

고려 말 토지와 백성의 소수 독점에 따른 중앙집권제 해체

…기득권 부정하고 국가 재산 새롭게 분배한 이성계의 ‘혁명’


 

서울 종묘 공민왕 신당에 있는 영정.
공민왕(오른쪽)이 노국공주와 그려져 있다. 공민왕의 개혁 시도로도 기울어진 고려를 재생할 순 없었다.

14세기말 고려의 최대 현안은 토지제도 문란이었다. 겸병에 의한 사전(私田)의 확대가 문제였다. 그 원인은 역설적으로 사회적 잉여의 확대에 있었다. 13세기말 이래 사회적 잉여가 두 배 이상 커졌다. 1세기에 걸쳐 두 배의 경제성장이 일어난 것이다. 자연적 농업경제에서는 가히 경제적 폭발이라 할 만하다.

 이 때문에 잉여 분배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발생한 것이다. 대대적인 겸병을 통해 극소수의 특권세력이 잉여를 독점했다. 여기에 왕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이 직접 교역에 나서고, 왕실 전용 농장을 경영했다.

국가와 농민은 상황이 오히려 악화됐다. 지배세력도 이원화됐다. 힘에서 밀린 자는 영락할 운명에 빠졌다. 염흥방의 강제 점탈에 저항한 조반의 옥사, 그리고 1388년 무진정변도 그렇게 일어난 일이다.

국가가 약화되자 관료체계가 취약해졌다. 관인들에게 적절한 보수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토지 300결을 받아야 할 재상이 오히려 송곳을 꽂을 만한 땅도 가지지 못하게 됐고, 360석의 녹봉을 받아야 할 재상이 20석도 못 받는 일이 벌어지게 됐다.” ([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7월)

공민왕대의 명신 경복흥은 공민왕의 인척이자 오랫동안 재상직에 있었지만 매우 가난했다. 개성 근교에 토지가 전혀 없고 집안에 곡식 한 말도 없었다. 사적으로 재산 증식을 도모하지 않으면, 고위 관료도 경제적 곤란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충목왕 원년 개혁상소에서, 이제현은 경기 지역의 전제(田制)를 개혁하면, “기뻐할 자는 심히 많고 기뻐하지 아니할 자는 권호 수십 명뿐일 것입니다. 무엇을 꺼려하여 과감히 실시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주장했다.([이제현전])

관료층도 이처럼 양극화돼 있었다. 공민왕은 관리들의 근무태만을 질책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라면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국방체계도 거의 붕괴됐다. 병사들에게 군전(軍田)을 지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388년 7월 전제개혁 상소에서 조준은 그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국가가 기름진 땅을 베어 42도부(都府)의 갑사 10여 만 인의 녹으로 하니, 그 의복과 양식, 군사장비가 모두 밭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나라에 양병하는 비용이 필요 없었으니, 조종의 법은 곧 삼대에 군사를 농업에 간직하는 뜻을 따르던 것입니다.


지금은 병사와 밭이 함께 망하여 매양 급한 때를 당하면 농부를 몰아 군사에 보충함으로써, 병졸이 약해져 적의 먹이가 되고, 농민들의 양식을 쪼개어 양병하기 때문에 호수가 줄어들어 읍이 망했습니다.

조종이 지극히 공평하게 나눠준 전지를 한 집안 부자간에 사유(私有)로 삼아서, 한 번도 문을 나와 조정에 벼슬하지 않은 자와 한 번도 발을 들어 군문(軍門)을 밟지 않은 자가 비단 옷과 맛난 음식으로 앉아서 그 이익을 누리며 공후(公侯)를 멸시합니다.


비록 개국공신의 후예와 밤낮으로 왕을 시위하는 신하와 백전근로의 장사라도 도리어 한 뙈기의 먹을 것과 입추의 토지도 얻지 못하여, 그 부모 처자를 봉양하지 못하니, 무엇으로써 의로움을 권장하여 공업을 독려하며, 전공을 연마하여 외침을 막겠습니까.” ([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7월)


중앙집권제 해체가 불러온 토지제도의 문란


북한 개성에 위치한 공민왕릉. 부인인 노국공주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국방문제는 일차적으로는 토지문제였다. 그런데 14세기말 고려 정부는 군인전을 지급할 수 없어 정규군이 없었다. 군대는 사병으로 존재했고, 위기 시에는 일반 농민을 징발했다. 군량도 확보할 수 없었다. 군량이 없으면 군대도 없다.

이성계의 유명한 ‘안변책’ 역시 세족과 관리의 수탈로 인한 군량부족과 북방경비의 난조를 지적했다. 공민왕 19년 이성계가 지휘한 요동공벌에서 전투에서 이기고도 철군해야 했던 이유는 군량의 부족이었다. 고려 말 40년에 걸친 왜구의 침입에 속수무책이었던 것은 이처럼 국방체계가 붕괴했기 때문이었다.

토지문제의 문란으로 행정 기능이 마비됐다. 겸병으로 토지분쟁이 폭주했기 때문이다.

 “안으로 판도사(版圖司: 戶部의 다른 이름)와 전법사(典法司)가, 밖으로 수령과 안렴사가 그 본직을 폐하고 날마다 토지소송을 듣는다. 추위와 더위를 피하지 않고 땀을 뿌리고 붓 든 손을 불며 문권을 상고하고 증거를 조사한다.

 전호(佃戶, 소작농)를 심문하고 노인에게 묻는다. 무릇 재판에 연관된 자가 옥에 차고 뜰에 가득하여 농사를 폐하고 판결을 기다린다.

수개월의 안건이 산같이 쌓이고, 한 뙈기의 쟁송이 수십 년을 끌어 침식을 잊고 폐하여도 확단하여 주지 못하는 것은 사전(私田) 때문에 쟁단이 생겨 소송이 번거롭기 때문이다.” ([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7월)

사회적 분쟁도 많았다. 부자와 형제간, 혹은 동료 간에도 토지분쟁이 생겼다.

“자식이 부모에게 약간의 토지를 요구하였다가 혹 여의치 못하면 도리어 원한을 품어 길가는 사람 보듯이 하며, 심한 자는 겨우 상복을 벗으면 병간호하던 노비를 채찍질하여 밭의 공문서를 요구하게 되니, 지친에게 이러한데 하물며 형제간이겠는가. 이것은 사전(私田)으로 인해 인륜을 금수에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조정의 사대부들이 겉으로는 서로 좋은 것 같으나, 마음으로는 서로 시기하여 은밀히 중상함에까지 이르니, 이것은 사전으로 함정을 만든 것입니다.” ([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7월)

 이른바 인륜에도 문제가 생긴 것이다. 조선개국공신 유만수는 형제의 전민을 빼앗았다. 관리들 사이의 토지분쟁도 많았다. 개혁파 윤소종도 친구의 사위인 최을의와 노비를 두고 분쟁을 벌였다. 국가사회를 내적으로 결속시키는 관습적 규범 역시 붕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국적 지식인들은 국가의 위기를 근심했다. 권근은 권근은 “밤이 되어도 자지 못하고, 밥을 대해도 탄식하여 가슴을 치며 슬픔을 금하지 못 하는 바”라고 탄식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잇달아 일어나고 기근과 유행병이 겹쳐, 나라에는 수개월간의 저축이 없고, 백성은 하루 저녁거리의 마련이 없어, 늙고 약한 자는 (죽어서) 개천과 구렁에 뒹굴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널려 있습니다.


게다가 이웃 나라가 국경 가까이 군사를 주둔하여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며 우리의 인민을 꾀어 가고, 또 왜적이 깊이 들어와 약탈해서 각 고을이 소요하여 버려져 적의 구혈이 되었어도, 수령이 능히 막지 못하고 장수가 제어하지 못하니, 자고로 위란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섶을 쌓아두고 불을 지르는 것도 족히 현재의 다급함에 비유할 수 없고, 침대가 부서지고 사람의 몸에까지 화가 미친다는 것도 족히 현재의 절박함을 비유할 수 없습니다.” ([고려사절요], 우왕 9년 8월, 권근의 상소)

고려 말의 상황은 공전공민제를 근간으로 한 통일적인 중앙집권제가 해체돼 가는 과도기였다. 토지와 인민은 소수 가문에 독점돼 소유권 점탈을 둘러싼 분쟁이 폭증했지만, 그것을 조정할 국가권력은 거의 유명무실했다.

조반사건에서 알 수 있는 바처럼, 국가권력은 이 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최종적인 권력을 의미했다. 사병 집단을 기반으로 토지와 인민을 둘러싼 무력충돌이 전면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았다.


조선 건국은 사유재산제와 지방분권제의 역류


일본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지방분권적 봉건국가의 문을 열었다./ 사진:위키미디어


이상의 상황을 볼 때, 당시 고려는 중대한 갈림길에 처했다. 대안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공전제와 공민제를 포기하고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는 방법이다. 한국사에서는 1424년 처음으로 토지가 사유재산으로 공인됐다.

세종은 부모의 장례를 치르거나 묵은 빚을 갚기 위해서라는 특별한 사유에 한하여 토지 매매를 허용했다. 농민의 경작권은 곧 이어 상업적 소유로 전진할 만큼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이영훈, [한국경제사1], 326쪽)

15세기 후반 이후 토지는 개인의 상업적 소유로 취득되고 처분됐다. 16세기에는 관의 입안 없이도 토지 매매가 이루어졌다. 완전히 자유화된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토지 소유권이 국가에 있다는 왕토주의 이념이 포기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국가의 통제력이 엄존하는 상태에서 백성의 경작권을 인정한 것이다.

고려 말은 토지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지극히 취약한 상태였다. 이 경우 중세 일본처럼 지방분권적 봉건국가로 갈 수 있다. 이 길은 소유권 확보를 둘러싼 상당 기간의 내전을 거치게 된다. 일본은 645년 고토쿠(孝德) 천황의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을 계기로 귀족지배를 불식하고 공전, 공민의 천황체제로 전환했다.

남녀 공히 6세가 되면 일정한 토지를 받고 세금을 납부하는 것으로서, 이는 중앙집권적 정치 체제의 근간이다. 그러나 점차 중앙의 군사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한 결과 지방을 중심으로 장원이 발생했다. 장원 소유자들은 토지를 지키기 위해 무력을 양성했고, 헤이안(平安, 794~1192년) 시대 초기에 분권적 봉건체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가권력이 취약하여 토지 분쟁과 치안 부재가 초래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가정권인 가마쿠라(鎌倉) 막부가 탄생했다. 그리하여 정치적 정통성은 중앙의 천황 또는 조정에 둔 채 실질적 권력은 막부에서 행사하며, 전국의 토지와 인민은 각지의 영주인 다이묘(大名)가 장악하는 분권적 봉건제가 1867년 메이지유신까지 지속됐다.

고려도 이 길로 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고려 말의 농장주들은 지방에 대규모 군사력을 양성하지는 않았다. 염흥방의 경우 겸병에 저항하는 조반을 체포하기 위해 순군(巡軍) 400여 기를 백주로 보냈다. 관병을 동원한 것이다.

그런데 조반은 수십 명의 기병을 동원해 염흥방의 가노 이광의 목을 베었다. 이들은 가병이었을 것이다. 이미 상당한 사병이 존재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성계다. 그의 친병은 2000명 규모로서, 영흥을 중심으로 한 동북면 일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최영을 비롯한 모든 유력한 장군도 처한 상황이 같았을 것이다. 위화도회군 뒤, 이들 대부분은 제거됐다. 최영, 변안열, 정지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되고도 사병은 해체되지 않았다.

제1·2차 왕자의 난도 사병을 기반으로 발생한 것이다. 사병은 태종대에 해체됐다. 고려가 일본의 지방분권제로 가지 않은 것은 사병 집단이 제거됐기 때문이다. 또한 군사집단의 문화도 달랐다. 고려 무신정권이나 고려 말의 사병 집단은 지방에 상주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체로 개성에 머물렀고, 중앙에서 권력투쟁을 벌였다.

토지의 소유권 문란을 막는 두 번째 길은 사적 소유권을 혁파해 공전, 공민제로 복귀하는 것이다. 조선의 건국자들이 취했던 방법이다. 고려 원종 이래 모든 전제개혁은 이와 동일한 정치적 구상을 지향했다. 중앙집권국가로의 역사적 운동과 정치적 지향이 강력하게 존재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개혁 이념과 운동이 왕권 강화를 목표로 하고, 국가의 공공성 회복을 고창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 건국은 사유재산제와 지방분권제에 대한 역류였다. 이성계의 전제 개혁은 사전(私田)을 완전히 부정하고 토지를 몰수해 국역(國役)이라는 기준에 따라 재분배하려는 것이었다.

공전공민제로의 복귀인 것이다. 성리학은 보편적 우주론과 정치론을 제공해 통일적인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에 공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상(理想)은 ‘공전제(公田制)’, 하지만 현실은…




고려사는 1451년 조선 문종 때 편찬됐다. 고려 말 부와 권력을 손에 쥔 권문세족의 부패 상황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1388년 이후 전제개혁 과정에서 치열한 이념논쟁이 발생했다. 먼저 정의로서의 공전론(公田論)과 관습으로서의 사전론(私田論)이 대립했다. 사실 1388년 전의 전제개혁론은 관습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제현과 이색의 개혁론도 그랬다.

문제는 토지의 ‘사유’가 아니라, 그 사유권을 불법으로 혼란케 하는 ‘겸병’이 문제였을 따름이다. 그래서 현실적 ‘관습’을 인정한 가운데 그 폐단을 개선하려 했다. 그 반면 이성계파는 현실을 완전히 부정하고 새로운 ‘원칙’ 아래 전제를 재편하고자 했다.

그들이 반대한 것은 단순한 토지겸병이 아니라 토지의 사적 소유권 자체였다. 그들은 국전제의 원칙에 따라 모든 토지를 회수한 다음, 국가에서의 역할에 따라 토지를 재분배하고자 했다. 정도전의 말을 들어보자.

 “전하(이성계)는 즉위 전에 친히 그 폐단을 보고 개탄스럽게 여기어 사전을 혁파하는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정하였다. 그것은 대개 경내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인구를 헤아려서 토지를 나눠 주어서 옛날의 올바른 토지제도를 회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조선경국전상], ‘부전’-경리)

이는 ‘혁명’ 없이는 불가능했다. 기득권을 부정하고 국가의 재산을 새롭게 분배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왕정 하의 토지 국유제는 관념적인 것일 뿐 현실과 거리가 멀다고 한다. 그러나 혁명의 시대에는 그것이 현실이 된다. 그것이 부정한 현실을 개혁하는 정의의 표준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원칙은 ‘공전제’였다. 정약용에 따르면 그것은 이렇다.

“무릇 전(田)은 모두 왕전(王田)이다. 사주(私主)는 전주(田主)라고 하면 안 되고 잠깐 가지고 있다(時占)고 해야 한다.” ([경세유표], 地官修制-전제9-井田議1)

왕전(王田)이라 해도 왕의 사유가 아니다. 왕은 사인(私人)이 아니라 하늘을 대신해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전은 공전이다. 공전이므로 국가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따라 분배된다.

역할이 없으면 먹을 것도 없다. 역할이 끝나면 국가에 반납해야 한다. 토지 1결을 더 지급한 자, 더 받은 자, 빠트린 자, 미반납 자, 숨긴 자, 몰래 주고받은 자, 빼앗은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 그러나 생활능력이 없는 퇴직자나 여자, 어린아이는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했다.

조준이 천명한 전제개혁의 원칙은 이렇다.

“태조의 지극히 공정한 분전법(分田法)을 준수하고, 후인이 사사로이 주고받아 겸병하는 폐단을 고쳐, 선비도 아니고 군사도 아니고 나라의 일(役事)을 맡은 자가 아니면 밭을 주지 말 것이며,

죽을 때까지 사사로이 주고받지 못하도록 엄격한 한계를 세워, 백성과 더불어 새 출발(更始)을 시작하여, 국가의 재용을 풍족하게 하고 민생을 후하게 하십시오.” ([고려사], ‘식화지1’,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7월)

즉, ‘공적 역할에 의한 토지분배’와 ‘사적인 토지거래 금지’가 2대 원칙이었다.



“공역(公役)을 맡은 자에게 모두 토지를 주었다”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한 뒤, 고려 말의 질서를 해체하고 국가의 재산을 새롭게 분배하는 중앙집권 정책을 꾀했다. / 사진:문화유산국민신탁



공전제, 그중 주나라의 정전제는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의 영원한 이상이다. 맹자는 정전제를 이상국가의 실현조건으로 제시했다. 먼저 사방 1리(里, 약400m)인 1정(井=900畝=1頃)을 기본단위로 삼아 땅을 가른다.

다음으로 1정을 9등분하여, 성인 남성 8인에게 각각 100무를 배당한다. 남은 100무의 공전은 8인이 공동 경작해 납세한다. 이는 1/9세의 조세 제도다.

동시에 이를 기초로 행정 조직을 만든다. 병농일치제이므로 국방 조직이기도 하다. 전 국토를 이렇게 구획하므로 국토분할 및 개발 플랜이다. 질서정연한 기하학적 토지제도 위에 국가를 세우는 것이다. 정전제는 생산단위이자 가족제도, 사회조직이며, 조세제도이자 행정조직, 국방조직, 정치체계다.

이는 수학적 아름다움을 가진데다, 공정성과 효율성을 보장할 수 있는 최선의 제도이다. 전제 조건은 땅이 고르고 평평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이 많고 지형이 복잡한 곳에서는 실행이 어렵다.

가장 치명적 단점은 생산단위인 매호(每戶)의 노동력이 변동될 때마다 토지를 재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구변동과 토지분급이 연동돼야 한다. 이는 설사 가능하다 해도, 장기간 유지되기는 힘들다.

공전제의 이념은 평균지권(平均地權)이다. 모든 농민이 전주(田主)가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도전은 대토지 소유를 막는 균전제(均田制)나 일정 이상의 토지소유와 매매를 제한하는 한전제(限田制)조차 고식책(당장 편한 것만을 택하는 꾀나 방법)이라고 봤다.

고대의 ‘황금시대’에는 “천하의 백성으로서 토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고, 경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문왕, 무왕, 주공은 정전제로 백성을 길렀기 때문에 주나라가 천하를 800년 동안 차지하였다.” 그것을 따르는 것이 어진 정치(仁政)이다.

그 반면 진나라가 망한 것은 정전제를 폐지하고 토지 사유제를 합법화했기 때문이다. 즉 사전제는 국망의 첫째 원인(私田爲亂之首)이라는 게 조준의 생각이다.

그러나 1391년(공양왕 3년) 최종 확정된 전제개혁은 농민에게 토지를 지급하지 않았다. 지급할 수 없었다. 토지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시

“경기와 6도 토지의 작황을 일률적으로 조사해 수확량을 계산했는데, 경기에서는 실제 경작 토지가 13만1755결, 오래 묵어 황폐한 토지가 8387결로 확인됐으며, 6도에서는 실제 경작 토지가 49만1342결, 오래 묵어 황폐한 토지가 16만6643결로 확인됐다.” ([고려사], ‘식화지1’, 전제 녹과전, 공양왕 3년 5월)

경작토지 62만3097결, 묵은 토지 17만5030결, 총 79만8127결이었다.

1389년 12월, 공양왕 즉위 시 올린 조준의 상소에 따르면, 왕실비용이 13만 결, 관인의 녹봉과 과전이 각각 10만 결이었다. 이것만 해도 총 33만 결이었다. 여기에 군인전, 중앙과 지방관공서 경비가 필요했다. 1076년 고려 문종대의 경정전시과에 필요한 토지는 87만 결이었다.

요컨대 농민에게 분급할 토지가 없었다. 정전제의 이상에도 불구하고 전근대사회의 농민은 기본적으로 국전의 소작인이었다. 전객(佃客)이란 그런 말이다.

조선 세조 4년 “땅이 없는 백성이 거의 3할”이라는 기사가 있다. 이들은 소작지도 없는 백성이었다. 하지만 정도전은 “공역(公役)을 맡은 자에게도 모두 토지를 주었다”고 말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국가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정치적 건전성은 충족시켰던 것이다. 고려 말은 국역(國役)을 지고도 땅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정도전은 “백성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비록 옛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토지제도를 바로잡아 일대의 전법(田法)으로 삼았으니, 고려의 문란한 제도에 비하면 어찌 만 배나 나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자평했다.([조선경국전], ‘부전’-경리)

농민에게 중요한 것은 토지 소유권보다 가벼운 조세와 안정적 소작권이었다. 1391년 과전법에서 수조율은 1/10로 엄격히 통제됐다.

“모든 공전과 사전의 조세의 액수는 수전(水田) 1결 당 조미( 米) 30두, 한전(旱田) 1결 당 잡곡 30두이며, 이 액수를 넘어 함부로 거두는 자는 뇌물죄로 다스린다.” 농민의 소작권도 보호됐다.

“전주가 전객(佃客)의 경작지를 빼앗는 경우, 1부(負)에서 5부까지는 태형 20대를 가하고, 5부 늘어날 때마다 1등급을 추가하며, 형벌은 장 80까지 가하고 직첩은 회수하지 아니한다. 1결 이상이면, 그 정(丁)을 타인이 교체하여 수령하는 것을 허용한다.”



토지개혁 반대론자들의 목소리




▎[경세유표]는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관제·부역·토지 등, 국가행정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담은 책이다


그러나 개혁 반대자들은 고려 중기 이래의 ‘사전제’를 정당한 것으로 인식했다. 1390년(공양왕 2) 9월, 공사(公私)의 토지문서를 불사르자, 공양왕은 “조종의 사전법이 과인의 대에 이르러 갑자기 혁파되니 애석하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사전제는 이미 관습적 원리로 정착됐던 것이다.

당대의 토지 소유자들은 공전제 안을 오히려 불법적 소유권 침해로 인식했다. 전대의 모든 개혁이 사법 조치, 즉 불법적인 탈점의 방지에 머문 것도 그러한 인식의 반영이었다. 그것은 개혁이라기보다 불법행위의 근절대책에 가까워, 감찰과 재판 위주로 진행됐다.

공민왕 원년의 개혁조치도 전법관으로 하여금 잉집(仍執: 토지, 노비의 불법점유)과 거집(據執: 소유권 문서위조)을 처벌하고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개혁의 최대 목표였다. 충목왕 대의 정치도감이나 신돈 집권기의 전민변정도감의 목표도 같았다. 공민왕 원년, 이색의 복중상서도 충숙왕대의 갑인주안(甲寅柱案)에 따라 불법을 시정하자는 것이었다.

1389년 4월 도당에서 전제개혁이 논의됐을 때, 이색은 “옛 법을 경솔히 개혁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개혁의 범위만 놓고 보면, 이는 그의 본래 입장이다.

그러나 그는 청년 시절 “부자의 밭은 창졸히 빼앗기 어렵고 적년의 폐는 문득 고치기 어렵다”는 세론에 대해, 공민왕에게 “이는 무능한 왕이 행할 바이요, 전하에게는 바랄 바가 아니”라고 반박한 바 있었다.

이색은 대토지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한산과 면주, 이천, 여흥 등 최소한 10여 곳에 토지가 있었다.(홍승기, ‘노비의 사회경제적 역할과 지위의 변화’, 1983)

1389년 (창왕 원년) 8월, 조준은 “세신·거실은 오히려 폐풍을 답습하여 말하기를 본조의 성법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개혁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제개혁을 반대한다고 비판했다.

간관 이행 등도 온건 개혁론을 비판했다

 “혹은 말하기를 지금 권호의 무리들은 거의 모두 복죄하였으니, 마땅히 변정도감에 위탁하여 소송하는 사람의 고조·증조의 계약문서를 고찰하여, 그것을 가진 연대가 오래되고 파계(派系)가 명백한 것은 각각 그 주인에게 돌려주면, 억울하고 원통한 것이 없어지고 국가가 무사하게 된다고 하오나, 신등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조종께서 입법한 뜻은 대개 왕족과 재상 이하 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국전을 받아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처자를 보육하여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법이 폐하게 되고 밭을 한정하는 제도가 없으니, 늙은 부인과 어린 아들, 깊은 병과 몹쓸 병의 무리도 그 문을 나서지 않고 그 조부의 문권을 가지고 국전을 앉아서 먹는 것이 100~1000결에 이른 자가 있으니, 비록 관사로 하여금 지극히 공명하게 처결하여도 어찌 군국(軍國)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있겠습니까.” ([고려사] 권78, ‘식화지1’,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7월)



국가의 정의로운 토지분배 제도는 존재하는가

공정한 재판이나 불법행위 근절이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시대가 위기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전통국가의 위기는 반드시 토지소유의 극심한 불균형과 때를 같이 했다.

 반란세력이 고창한 이념도 항상 ‘균평(均平)’이었다. 그래서 공자도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국가가 수립되면 이 불평등성이 대폭 시정된다.

그러나 토지소유는 정확히 ‘욕망의 법칙’에 따라 변한다. 불평등이 자연적이며 평등은 인위적인 것이다. 평등하게 분배된 토지는 시간이 지나며 점차 독점화된다. 누구든 자신에게 분배된 토지를 반환하지 않고 나아가 타인의 토지를 점유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려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조준의 설명을 보자.

“밭을 나누어주고 거두어들이는 법이 점차 해이해져, 간활한 자가 이 틈을 타서 기만하고 은폐함이 끝이 없다. 이미 벼슬하고 출가한 자도 오히려 한인전(閑人田)을 먹고, 군대에 소속되지도 않은 자가 함부로 군전을 받는다.

아비는 숨겨 감추어 사사로이 자식에게 주고, 자식은 가만히 도적질하여 국가에 돌리지 않아, 이미 역분전(役分田)을 먹고 또 한인전을 먹으며 또 군전을 먹는다.

그러나 토지를 관리하는 관원은 그가 이미 현직에 있어 마땅히 역분전을 받아야 할 자인지, 또 관직도 없고 출가하지도 않아 마땅히 한인전을 받아야 할 자인지, 또 그가 과연 군사인지, 그 아버지가 과연 요새지에 근무하는지, 그 조부가 과연 다른 나라로부터 귀화했는지 묻지 않으니, 밭을 주고 거둬들이는 조종의 법이 이미 무너지고 겸병의 문이 열렸다.” ([고려사] 권78, ‘식화지1’,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7월)

따라서 공전제의 성공은 바로 이 경향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구체적으로 국역이 끝난 자로부터 어떻게 토지를 반납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조준의 전제개혁은 국역을 중심으로 한 토지분배안과 토지 회수안으로 양분돼 있었다.

토지회수와 관련하여 토지 1결이라도 탈락시킨 자는 사형에 처한다. 지나치게 엄격한 조치처럼 보이나, 공전제의 성공은 바로 그 점에 달려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공전제는 일종의 시지푸스적인 난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영원히 반복되는 시소게임이다. 그러나 국가는 이 난점을 피할 수 없다. 적절한 분배의 정의 없이는 어떠한 국가도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체체의 순환은 욕망과 정의의 균형에 좌우된다.

전제의 이념을 둘러싼 두 번째 논쟁은 ‘정신’과 ‘정의’의 대립이다. 보수파들이 제기한 두 번째 명분은 만약 토지 전체를 공유화한다면, “사군자(士君子)의 생계가 날로 어려워져서 반드시 공업과 상업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색의 반대론으로서, 귀족제 사회의 전형적인 논리이다.

이 주장은 신분제 사회의 역사를 고려해 볼 때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만약 국역에 따라 모든 부를 분배한다면, 모든 지식인은 관직시험에 몰두할 것이다. 이는 정신의 자유와 문명의 진보를 막는다. 밀(J. S. Mill)의 견해를 보자.

“만일 이들 여러 가지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직접 정부에 의해 임명되고 급여를 받는 한편 그들의 입신출세는 오로지 정부에 기대를 걸게 된다면, 아무리 출판의 자유가 인정되고 의회의 민중적 조직이 인정된다 해도, 우리 영국이나 다른 어떤 나라도 명목 이상의 자유국이 될 수 없을 것이다. (…) 또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국내의 모든 유능한 인재를 통치집단에 흡수하는 것은 조만간 그 집단 자신의 정신적 활동과 진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자유론], 1859)

따라서 훌륭한 덕목을 갖춘 인재가 배출되려면, 정치적 보상에 의존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이상을 추구할 여유가 허용돼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세습 재산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여유가 자유와 덕목(virtue)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여유 없이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평등주의에 반대해 전통 영국사회를 옹호했던 에드먼드 버크도 의견이 같았다.

“교회의 모든 수입이 마지막 한푼까지 언제나 자선에 사용되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일정 부분은 대체로 자선에 사용된다. 인간을 단순한 정치적 자비(political benevolence)의 기계나 도구가 되도록 하는 것 보다는, 원래의 목적이 조금 훼손된다 해도 많은 부분을 자유롭게 쓰도록 놓아두어서 덕성(virtue)과 인간성(humanity)을 함양하도록 하는 편이 낫다. 온 세상은 자유에 의해 이득을 볼 것이다. 자유가 없으면 덕성도 존재할 수 없다.”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국가나 교회로부터 독립된 상당한 경제력이 자유를 가능하게 하고, 이 자유가 덕성을 가능하게 한다. 신분, 명예, 재산은 덕성과 분리가 불가능하다.



국가의 정의 vs 경제의 효율성.



에드먼드 버크의 초상화.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전통 영국사회의 수호자로서 프랑스 대혁명의 평등주의에 반대했다. / 사진:영국국립초상화갤러리





고려 말의 개혁파도 이러한 논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행은 공전제 개혁은 “사족(士族)이 업을 잃어 생계를 잇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선비의 무직자는 전토를 주어 농사짓게 할 수 있게 하고, 유직자는 녹봉을 주어 농사에 대신하도록 하면 가히 생계를 이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준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비켜 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준의 전제개혁안은 실직에 있지 않은 자(散官)나 퇴임자, 명예직(添設職), 그리고 가장이 죽고 개가하지 않은 처, 출가하지 않은 자제의 경우 생활을 보장했다. 그러나 이는 매우 한정된 것이었다.

 공전제의 이상은 사회적 특권계급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개인의 덕성과 능력에 의하여 사회적 지위를 인정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파들의 지적대로 사회 전체에 정치적 족쇄를 채울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개혁파들은 반대파의 주장이 궁극적으로 특권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준은, “사전(私田)은 사문(私門)에만 이롭고 국가에는 이익이 없으며, 공전(公田)은 국가에 이익이 되고 백성에게도 심히 편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반개혁파가 “서로 뜬소문을 선동하여 여러 사람의 귀를 현혹시키고 사전을 회복하여 부귀를 보존코자 하니, 그것이 일가의 생계를 위해서는 득이 되겠으나, 사직과 생민은 어떻게 될 것이며, 만약 사전이 복구되면 이는 삼한 백만의 민중을 들어 기름불 속에 넣는 것”이라고 극언했다.

그러나 경제에 관한한 정의(rightness)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국가는 정의를 요구하지만 경제는 효율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공전제는 옳지만 비효율적이다. 먼저 관리에 많은 비용이 든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행위 동기에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위 할 때 가장 적극적이다. 13세기 고려의 농업생산력이 폭발한 이유 중 하나도 그럴 것이다. 농장주는 국제무역의 확대와 생산기술의 발전에서 비롯된 잉여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래서 토지 소유를 적극적으로 늘리고 농장경영에 직접 나선 것이다.

국가가 약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다. 그 결과 생산성이 가속화돼, 13세기에 잉여가 무려 2배나 확대된 것이다. ‘팍스 몽골리카(몽골의 패권에 의한 세계평화)’가 지속되고 토지 사유제가 더 진전됐다면, 더 큰 생산성 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 반대로 진행되어, 목가적 자연경제로 복귀했다. 생산체제의 변혁기는 항상 불평등이 심화된다. 구체제가 붕괴되고 신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대규모 집단이 비참한 빈곤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들이 혁명세력으로 봉기한다. 그들의 목표는 옛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인류의 발전에는 역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에서 정의가 항상 옳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밀이 지적하듯이 정신적 자유와 문명의 진보를 막기 때문이다. 경제의 역설이라 할 만하다. 경제의 기본은 자유에 두되, 정의로 보완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지혜이다. 하지만 13세기말에는 그런 지혜가 알려지지 않았다.



​[출처]: 김영수 영남대학교 정외과 교수<조선왕조 창업비록> / 월간중앙, 2018. 7.17.

8.피로 쓴 이성계 시대의 전제·군정 개혁 - 조선 설계자들이 꿈꾼 ‘백성의 발견’ 


신흥권력의 급진적 사전(私田) 해체, 고려의 멸망 앞당겨

…무너진 군사 시스템 복원, 공격적 방어책 강구해 왜구문제 해결




이성계가 중심이 된 조선 건국 세력은 위화도회군 직후 고려의 토지개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 세력과의 치열한 권력다툼은 불가피했고, 이는 고려의 멸망을 촉진했다. 사진은 역사의 전환점이 된 위화도 전경

위화도회군 이전의 전제(田制) 개혁책은 기본적으로 법률적인 조치였다. 즉, 불법적인 토지 점탈을 처벌하고 금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성계파는 전면적 개혁을 원했다. 전면적 전제개혁은 재산권의 변동을 의미한다.

존 K. 갤브레이스(John K. Galbraith)의 지적대로 이런 “토지개혁은 실로 혁명적 조치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동체의 한 집단으로부터 다른 집단으로 권력과 재산, 지위를 이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분도 재산 없이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재산권의 변동은 결국 지배계급 자체의 교체를 뜻한다.

요컨대 재산에 관한 개혁보다 더 비상한 개혁은 없다. 보통사람들에게 재산은 곧 생명이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이란 어버이의 죽음은 잊기 쉬워도 재산의 손실은 여간해서는 잊기가 어렵다”고 적시했다.

역사는 재산을 둘러싼 싸움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기본적인 대립과 갈등은 언제나 부자와 빈자 사이에 일어난다”고 통찰했다. 그만큼 재산에 관한 개혁은 어렵다. 기원전 133년 무렵, 로마의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도 토지개혁을 시도하다 반대파에게 피살당했다.

사전(私田) 개혁은 매우 지지부진해 1391년 5월에야 비로소 과전법을 정할 수 있었다. 조선 건국 직전이었다. 그 사이에 개혁안을 반대하는 정치세력은 이성계를 암살하고 우왕을 복립시키려는 계획을 진행시키기도 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원상(元庠)은 “우왕을 세워 그 일(사전개혁)을 저지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전제개혁은 이성계의 핵심적인 개혁이었다. 회군 뒤 가장 먼저 시작했을 뿐 아니라, 이것이 완료되자 고려왕조가 멸망했기 때문이다. 위화도회군 후의 권력투쟁은 실질적으로 전제개혁을 둘러싸고 벌어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성계파가 권력 유지만을 염두에 두었다면, 기존의 지배세력과 타협하는 것이 더 안전했을 것이다. 5년여에 걸친 권력투쟁은 격렬하고 참혹했다. 수많은 사람이 고문당하고 죽었다. 조선을 건국할 때까지 누구도 안전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러한 대립은 1388년 7월 조준의 전제개혁 상소가 올라가자마자 시작됐다.



토지개혁을 둘러싼 권력투쟁

사전개혁과 관련해 조민수가 1388년 7월 처음 제거됐다. 기록에 따르면, 조민수는 “임견미, 염흥방이 처형될 때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백성에게 빼앗은 밭을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나 다시 득세하자 차츰 도로 빼앗아 탐하는 버릇을 부려, 사전을 개혁하는 것을 저해하므로 대사헌 조준이 논핵하여 쫓아내었다.” ([고려사절요] 신우 14년 7월)

회군 후 권력투쟁 첫 단계에서 조민수는 고려 지배세력의 지도자였다. 그의 목표는 이인임 노선의 부활이었다. 당대의 정치에서 이는 사전개혁에 대한 반대로 가시화됐던 것이다.

조민수의 유배 뒤, 개혁파는 각 도의 안렴사를 도관찰출척사로 바꾸고, 왕의 교서와 부월(斧銊, 도끼)을 주고, 파견해 토지를 다시 측량하게 했다. 전제개혁을 위한 기초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교서와 부월을 준 것은 왕의 전권을 위임한다는 뜻이다.

새로운 도관찰출척사로 임명된 인물은 정당문학 성석린, 전 평양윤 장하, 전 밀직부사 최유경, 전 밀직상의 김사형, 밀제학 조운흘이었다. 원래 안렴사는 정3품관이었다. 하지만 새 도관찰출척사는 개혁파의 핵심인물들이자, 2·3품의 주요 관서 대신들이었다. 전제개혁파의 결의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개혁파들도 저항을 우려해 단계적인 시행을 건의했다. 그들은 개혁의 근거와 시안을 제시한 뒤, 조사 작업이 진행되는 3년에 한해서 사전의 소유권을 인정하되 조세는 국가에서 받아 분배해 줄 것을 제시했다.

 “지금 마침 토지를 측량할 때가 되었으니, 액수를 책정해 토지를 지급하기 전에 3년 동안 임시로 국가에서 조세를 거두면 주요한 국사의 비용도 충당하고 관리의 녹봉도 지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려사] 권78, 식화지1,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6월) 그들은 토지조사와 재분배작업에 약 3년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반(反)개혁파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우상시 허응 등이 9월에 올린 상소를 보면, 반개혁파도 타협안을 제시한 듯하다. “종묘·사직·도전(道殿)·신사(神社)·공신·등과(登科)의 토지에서는 조세를 징수하지 말자는 주장이 대두되었습니다.”

반개혁파도 전제개혁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토지는 개혁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것이다. 1388년 8월, 창왕은 “사전의 조세를 국가에서 거두면 반드시 식록을 걱정할 것이니, 일시적으로 그 조세를 반만 거두어 국용에 충당”하게 했다.

개혁파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공신전과 등과전이 개혁 대상에서 제외되면 개혁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이 때문에 개혁파는 조세를 반만 거두라는 명령은 법을 시행해보기도 전에 이를 폐기시키는 조치라고 반발했다.

또한 국가상황이 비상시국임을 주장했다. 창왕은 즉시 자신의 조치를 번복했다. 10월에는 급전도감(給田都監)이 설치됐다. 이로써 전제개혁을 위한 계획과 제도가 갖춰졌다.

그러나 전제개혁의 추진은 지지부진했다. 이듬해인 1389년 4월, 도당에서 전제개혁에 관한 논의가 재개됐다. 1388년 9월, 조세의 절반 징수를 놓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뒤 거의 6개월만이었다. 이때까지 조정의 의견은 양분돼 있었다.

이색은 전제개혁에 반대하는 이론적 논거를 제시했다. 이색은 우왕 대에는 정치활동을 거의 중단했다. 요동정벌 국면에서도 수동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우왕의 폐위와 창왕의 즉위에서 시작해 전제개혁 초기 국면에서는 적극적 입장을 개진했다.

이색은 개혁 자체를 넘어 역성혁명을 걱정했을 것이다. 신하가 왕이 시행해야 할 은혜를 베풀어 인심을 장악한다면, 반란의 가능성은 목전에 와 있는 것이었다. 한비자는 신하가 임금을 위협하는 다섯 가지 경우(壅)를 말하고 있다.

임금의 이목을 가로막는 것(閉其主), 이익을 제어하는 것(制財利), 명령을 마음대로 하는 것(擅行令), 사의를 행할 수 있는 것(得行意), 자기 사람을 심는 것(得樹人)이 그것이다. 전제개혁은 이성계가 왕의 이익을 제어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자기 사람을 심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색이 개혁에 찬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전제개혁은 결국 전통적인 고려 지배세력의 몰락과 신흥세력의 득세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명분이 무엇이든 현실적으로는 조민수에 이어 이인임 노선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외척세력인 이림과 우현보도 반대했다. 무장세력 중에는 변안열이 반대파에 가담했다. 변안열은 군공과 군세에서 이성계에 밀렸다. 하지만 당대의 유력한 무장세력이었다. 신진유신 중에는 후덕부윤(厚德府尹) 권근과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유백유가 이색에 찬성했다. 문신, 무신, 외척이 뭉친 것이다.



서로 다른 길 걸어간 정몽주, 이색, 조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그리스도교가 추구했던 인간상과 차별화된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본성을 정치에 녹였다


정몽주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정몽주는 그해 11월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기 위한 흥국사 회의에 참가했다. 그는 이 회의의 주역인 8장상 중 1인으로서, 공신에 책봉되기도 했다. 이는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후손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의 처형도 인정하는 것이다.

정몽주는 이색과 달리 역성혁명의 위험보다는 개혁을 우선시한 것이다. 그는 이듬해인 1390년(공양왕 2년) 7월에 가서야 비로소 노선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김저 사건으로 반개혁파의 중심인물인 이색, 이임, 우현보, 변안열 등이 처형되거나 유배되고, 많은 인사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였다.

이색을 중심으로 한 신진 성리학자들은 1367년(공민왕 16년) 성균관의 중창을 계기로 결집됐다. 그들은 1374년 공민왕의 암살 뒤 대외노선의 변경을 둘러싸고 이인임 세력과 대결했다.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는 처음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투쟁에 패배해 죽거나 유배됐다.

우왕 14년간 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정치적 존재감은 없었다. 이색은 침묵했다. 염흥방은 이인임과 타협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갔다.

그리고 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 전제개혁을 둘러싸고 이들은 두 집단으로 분열됐다. 이들 중 정몽주, 정도전, 윤소종 등 극소수만이 이성계파에 가담했다. 이색, 이숭인, 권근 등 대부분의 주요 인물은 반(反)이성계파에 섰다. 정몽주도 결국 반이성계파로 돌아섰다.

대사헌 조준과 예문관제학 정도전, 대사성 윤소종은 전제개혁을 옹호했다. 고위 관인들 다수는 반개혁적 입장이었다. 하지만 일반 관리들에게 의견을 물은 결과 53명중 80~90%가 찬성했다. 반대자는 모두 대가의 자제들이었다고 한다.

이성계는 뒤에 이렇게 회고했다. “조준 등과 더불어 사전을 개혁하고자 하여, 백관으로 하여금 가부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윤소종이 정도전 등과 더불어 힘껏 청하여 이것을 개혁하였다.” ([태조실록] 태조 2년 9월 기미)

고려의 핵심 그룹 내에서는 반대가 주류를 이뤘다. 이색의 반대가 결정적이었다. 그는 단순히 사적인 이익의 옹호자이기보다 지식인 집단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사실 이성계도 급진적 개혁을 감행하는 데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가장 큰 어려움은 대중국 관계였다.

우왕 대의 이인임처럼 반역의 혐의를 받을 염려가 컸다. 그래서 이성계는 1388년 10월 이색, 이방원을 사신으로 보내 명의 감국(監國)을 요청했다. 명의 직접 지배를 받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1389년 3월에 귀국한 사신 강회백은 매우 어두운 자문을 가지고 왔다. “이제 신하가 그 아버지를 내쫓고 아들을 왕으로 세워 중국에 조회하러 오기를 청하니, 대개 인륜이 크게 무너지고 왕의 도가 전혀 없으며, 신하 노릇하지 않는 반역이 크게 드러났다.” ([고려사절요] 공양왕 원년 3월)

명이 위화도회군 후의 조치를 부정한다면 이성계의 권력 기반은 크게 타격받을 것이다. 장래의 생사가 달린 상황에서 전제개혁은 상대적으로 한가한 문제일 수 있었다. 이런 불안한 상황은 이해 9월, 명이 이성계파의 조치를 인정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럼에도 이성계는 개혁을 강행했다. 1389년 8월 조준은 사전개혁에 반대하는 논의를 비판하고 개혁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다시 올렸다. 조준은 반개혁파를 강하게 비판했다.

“권세가와 권력자들이 그 악습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우리 왕조에서 작성된 법전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없앨 수 없으며 만약 무리하게 없앤다면 선비들의 생계가 날로 어려워져 필시 장사치나 공장(工匠)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마구 헛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을 솔깃하게 만들며 사전을 되살려 자신들의 부귀를 보존하려 한다.”

이것은 이색을 견제하는 견해였다. 이색에 대해 조준은 “혹시라도 사전을 되살린다면, 이것은 우리나라 백만의 민중을 기름불 속에 던져 넣는 것과도 같다”고 극언했다.

이에 앞서 이색은 1389년 7월, 문하시중의 직위에서 물러나기를 간청했다. 그는 대신 외척인 이림(李琳)을 천거했다. 그는 중국 사행으로 자청해 가면서, 창왕의 친조를 추진했다.

중국이 창왕을 공식 승인한다면 이성계도 쉽사리 왕조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도는 실패했다.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이색은 위험을 느낀 듯하다.



권력암투 승리한 이성계의 개혁 ​드라이브



이색은 고려를 끝까지 수호하려는 세력의 정신적 지주였다. 이색은 사상적으로 역성혁명에 반대했고, 이성계와의 대립은 필연적이었다


사전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은 이성계를 암살하려는 모의를 진행시켰다. 그 사건은 1389년 11월 우왕 복립을 기도했던 김저(金佇)·정득후(鄭得厚)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김저는 최영의 생질이고 정득후는 최영의 족인이었다. 두 사람은 여주에 유배된 우왕을 몰래 만나러 갔다.

우왕은 이들에게 팔관회 행사 때 이성계를 암살하도록 촉구했다. 기록이 옳다면, 이 사건에는 개혁 반대자들이 대거 연루돼 있었다. 그 결과 우왕·창왕이 처형당하고 공양왕이 즉위했다.

개혁파의 공세는 김저 사건 발생 두 달 전인 1389년 9월부터 본격화됐다. 개혁파는 개혁의 지체에 위기감을 느낀 듯하다. 또한 9월, 중국에서 당도한 자문이 개혁파를 크게 고무했을 것이다.


중국은 이성계파의 행위와 명분을 모두 인정했다. “왕위는 왕씨가 시해를 당하여 후사가 끊어진 이후 비록 왕씨라고 꾸며서 이성(異姓)으로 왕을 삼았으나, 이것은 삼한이 대대로 지켜왔던 좋은 일이 아니다.” ([고려사절요] 공양왕 원년 9월)

이성계파는 비로소 근본적 불안에서 해방됐다. 그리하여 그들은 반개혁파와의 본격적 대결에 나선 것이다. 이후의 권력투쟁에서 우왕과 창왕이 폐위, 처형됐다. 변안열도 처형됐다. 이색은 장단의 별장에 은거했다. 하지만 그는 고문을 당했고, 유배됐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대사헌 조준은 12월에 다시 전제개혁 상소를 올렸다. 이것은 세 번째 단계의 논의였다. 조준은 이때가 전제개혁의 호기라고 주장했다.


“하늘이 다시 화란을 뉘우쳐서 여러 흉인이 이미 멸망되고 신씨(우왕, 창왕)도 이미 제거되었으니, 마땅히 사전을 일체 개혁하여 백성을 부유하고 오래 살게 해야 하는데, 이 때가 그 기회입니다.” ([고려사절요] 공양왕 원년 12월)

이 상소에서 조준은 특히 경기지역 밖으로 과전(科田)을 확대하려는 계획에 반대했다. 반대파들은 사전을 포기하되 차선책으로 녹봉의 양을 확대하려고 했던 듯하다.


그러나 조준은 경기지역 밖으로 과전을 확대할 경우, 사전겸병의 재발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경기지역에 과전을 한정하면 사전이 재발해도 일정 지역 밖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현실적으로 전국 경작 가능한 토지의 수가 50만 결이므로, 왕실과 관료, 퇴임자 등의 비용을 빼고 나면 17만 결밖에 남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했다. 토지가 절대 부족했다.


그리하여 조준은 “거실의 유언비어를 꺼려서 생민의 큰 해를 생각하지 않고, 다시 외방에 사전을 복구하여 간활한 자들의 겸병하는 문을 열어 삼군을 굶기는 등의 폐해를 부활시키는 것은 경국제민의 정치가 아니라”고 주장했다.([고려사] 식화지1, 전제, 공양왕 원년 12월)

이렇게 사전개혁이 본격화됐다. 이듬해 1월 급전도감에서는 품계에 따라 토지문서를 지급했다. 9월에는 공사의 토지 문서를 모두 불살랐다.


 “공전과 사전의 전적을 저자거리에서 불살랐는데, 불길이 수일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 왕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조종의 사전의 법이 과인의 대에 이르러 갑자기 개혁되니 애석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공양왕 2년 9월)

11월에는 급전도감에서 지방의 토지지급을 확정했으며, 관리들의 녹봉을 결정했다. 1391년 7월에는 전법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유백유가 유배됐다. 1391년 5월에 과전법이 정해졌다. 1392년 5월 급전도감이 폐지되고, 호조에 환속됐다. 몇 달 뒤 고려왕조는 망했다.



14세기 말 토지개혁의 역사적 의미



김홍도의 풍속화 ‘타작.’ 양반은 일하지 않고도 소득을 취했지만 그래도 백성들의 얼굴은 밝다. 조선 건국세력이 꿈꾼 이상적 세계관일 수 있다


사전개혁은 고려 말의 대개혁이었다. 사전개혁은 정확히 권력투쟁의 단계와 일치하고 있다. 그만큼 격렬한 대립을 수반한 것이다. 현대 국가에서 토지의 정치적 중요성은 결정적이지 않다. 하지만 전근대의 삶에서 토지는 거의 유일한 생존 수단이었다.


국가를 상징하는 사직(社稷)은 토신(土神)과 곡신(穀神)에 제사 지내는 곳이었다. 토지는 정치권력과 부, 신분의 원천이었다. 정치체제와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토지를 매개로 결정됐다.


 “역사적으로 토지와 정치는 긴밀하고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토지의 소유형식은 정치 권력의 패턴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특정한 권력형태는 특정한 소유형식을 유지했다. 이 상호의존적인 관계는 원시공산제 사회, 중세사회, 그리고 가족경영적인 농업사회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김상용, [토지소유권 법사상])

생존의 측면에서 국가는 ‘필요(needs)’의 영역이며, 그중 “가장 우선적이고 커다란 욕구는 우리의 삶을 보존하기 위한 식량이다.” (Plato, [Republic]) 공자도 국가의 세 가지 기본요소 중 하나로 족식(足食)을 제시했다.([논어], ‘안연’)


백성의 본질은 ‘욕망을 가진 존재(民有欲)’이다.([서경], ‘중훼지고’) 그래서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君以民爲天 民以食爲天)”라고 주장했다.


또한 “먹는 것은 백성의 근본이요, 백성은 나라의 바탕이다(食者民之本也 民者國之基也).” 그래서 토지는 백성의 ‘하늘’이다.

“어진 정치는 밭둑에서 비롯된다(夫仁政 必自經界始)”고 한 맹자의 말도 그 말이다. 즉, 국가의 선(善)은 백성들의 필요를 얼마나 만족스럽고 정의롭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성계파의 전제개혁은 기존의 사적 소유권을 모두 부정하고 국역에 의해 재분배하려는 것이었다. 단순한 시정이 아니라 근본적인 외과수술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만약 하나의 토지제도가 심각하게 결점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을 바로 잡으려는 행동은 모든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때만 의미가 있다. 작은 문제나 상징적인 개선책을 가지고 땜질하는 것은 어떠한 항구적인 결과도 만들어낼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생산 요소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농업 사회에서 일종의 ‘게임 규칙(rules of the game)’의 변화다.” (Hung-Chao Tai, [Land Reform and Politics])

이성계파의 개혁안은 국가 전반의 혁신과 연계된 것으로, 새로운 국가의 창출을 위한 기초로서 구상됐다. 이성계의 인척이자 조준의 친우로서, 조선개국공신인 전법판서 조인옥은 전제개혁을 “오늘의 급무로, 사직의 안위와 생민의 휴척이 매달려 있는 것”이며, “전법이 바르면 사직이 편안하고 그렇지 아니하면 사직의 안위를 가히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이성계파의 전제개혁안은 그 체계성과 포괄성에서 한국 역사 초유의 것이다. 1949~1950년 남한의 농지개혁, 또는 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에 비견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전제개혁이 농민을 토지 소유자로 만든 것은 아니다. 농민은 기본적으로 소작인이었다. 국가가 농민을 부르는 전객(佃客)이나 전호(佃戶)라는 호칭도 그점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고려의 전통적 지배세력을 완전히 교체한 것도 아니다. 고려와 조선의 지배세력은 단절적이기보다 연속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제개혁을 현대적 의미의 계급혁명으로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당대의 관념에서 국가의 건전성을 대폭 향상시킨 것은 사실이다. 전제개혁을 통해 개혁자들은 국가재정을 확충하고, 관료체계를 정비했으며, 민생 안정과 국방체제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졌다.


이는 국가의 건전성에 필수적인 요소가 모두 완비됐음을 뜻했다. 그러나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이성계파는 전통 지배계급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민심을 장악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조선의 군정개혁, 군사력의 공공화(公共化) 작업


직지사의 탱화에 등장하는 왜구들.

원 지배기 고려의 군정 시스템이 망가진 40여 년 동안 극성을 부렸다



당대의 개혁자들이 전제개혁만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다. 1388년 위화도회군 뒤 5년간 국가 모든 분야의 쇄신이 시도됐다. 전제개혁안은 그 일부일 뿐이다. 다른 분야의 개혁을 총체적으로 구상하고 이끈 것도 역시 조준이었다. 위화도회군 이후의 정국에서 개혁을 이끈 게 조준이라면, 정치투쟁을 이끈 것은 윤소종이었다.


조준은 사헌부를, 윤소종은 대간을 담당했다. 1388년 7월 전제개혁안 후반부에서도 조준은 지방정치와 군사 선발, 역마 체제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또한 한 달 뒤인 8월에는 국가의 모든 분야에 대한 장문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이는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의 뼈대를 이루는 것이다. 조준의 상소는 조선건국의 청사진 초안에 해당하는 셈이다.

먼저 군정개혁을 살펴보자. 1351년 공민왕의 즉위 이후 고려는 숱한 전란에 시달렸다. 하지만 고려는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난 등 대규모 전쟁을 모두 극복했다. 하지만 위화도회군 전까지 왜구문제를 거의 해결하지 못했다.


고려는 본래 군사국가였다. 조준의 상소에서 나타난 바처럼, 고려의 중앙군은 2군 6위체제였다. 단위부대는 총 42도부로서 병력은 4만 5000명에 달했다.


1076년 개정 전시과를 보면, 중앙군의 마군과 보군은 토지를 지급받았다. 무관의 수는 정3품 3과에서 정9품 13과까지 무관 수는 1751명이다. 14과 대정 1838명까지 합하면 3589명이다.


문관은 424명이다. 문관과 무관의 토지 지급 비율은 1대 7이다. “고려왕조는 11세기 후반까지 무사들이 정부의 인적, 재정적 구성에서 지배적 비중을 차지한 군사국가였다. 왕도 개경에 집주한 중앙군은 국가체제의 중추를 이루었다. 중앙군은 대략 3500명의 무관과 3~4만 명의 마군과 보군으로 이루어졌다.” (이영훈, [한국경제사(1)], 221쪽)


지방군 중 주현군이 약 5만, 주진군이 14만 명 정도였다. 가용한 군사력이 총 23만 5000명 정도였던 것이다. 고려가 거란, 여진, 몽고와 대결할 수 있는 힘이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고려의 군사체제는 원 지배기에 무너졌다. 당시의 군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병역 종사자들이 보수를 받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사전개혁의 목표 중 하나는 이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병력 대부분이 사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체계적인 지휘체계가 결여돼 있었다.


각 군사지휘관은 독자적인 군대를 거느리고 독자적인 명령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전투가 있을 때는 연합군 형식으로 군대가 운영됐다. 그래서 통합적인 군사력 운용이 불가능했다.


조준의 지적을 보자.

“근세에는 병제가 크게 무너져 전쟁을 한 지 30여 년에 군정의 통솔이 없었습니다. 전술이 없는 장수로서 교련받지 않은 백성을 거느리고 싸우게 되니, 적이 왔다는 풍문만 듣고 패하여 달아났습니다. 조그만 왜놈이 나라의 걱정의 되었으니 몹시 상심이 되지 않습니까?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예전 품계가 4품 이상의 관원은 3군에 소속시켜 군에 장좌를 두며, 5품 이하의 관원은 부위에 소속시켜 군부사에 통속되게 하여서, 상하가 서로 매이고 체통이 서로 연결되어 군정이 한 곳에서 처리되어,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한 곳에 통일된 후에 군령을 거듭 밝히고 사졸을 훈련한다면, 백만의 군사도 몸이 팔을 쓰는 것과 같고 팔이 손가락을 쓰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디를 지킨들 견고하지 않으며, 어디를 공격한들 빼앗지 못하겠습니까?” ([고려사절요] 34, 공양왕 원년 12월)

군통수권을 통일시키고 일원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돼 1391년 1월에는 마침내 3군부가 설치됐다. 이는 물론 무력을 장악하기 위한 이성계파의 의도와 직접 관련돼 있다. 위화도회군 후 최영부터 시작해 조민수, 변안열, 우인열, 정지 등 유력한 장군들이 모두 제거됐다.


건국 과정은 사병 해체와 국가의 군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사병은 조선건국 뒤에도 해체되지 않았다. 제1·2차 왕자의 난도 사병을 기반으로 일어난 것이다. 사병 문제는 태종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결됐다.


사병의 해체와 일원적인 군 지휘체계의 확립은 국가의 입장에서 불가피한 조치다. 군사지휘관들의 특권 남용과 부정 방지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즉, 군정개혁은 군대의 성격을 공적인 것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

세 번째 문제는 지휘관들의 문제였다. 이는 일찍이 공민왕 원년 청년 이색의 복중상소에서 이미 지적됐던 것이었다. 이때 이색은 지휘관에 해당하는 군 고위직이 모두 권문세가의 세습직으로 바뀌어, 실제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무관들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하여 이색은 문과 시험과 동일하게 무과를 설치하여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자들을 선발할 것을 건의했다.([고려사] 열전28)

조준도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이 장수를 가지지 않으면 그 나라를 적에게 내주는 것이 되고, 장수가 병법을 알지 못하면 그 임금을 적에게 내주는 것이 된다’ 하였으니, 장수를 가려 왜적을 제어하는 것은 오늘날의 급무”라고 주장했다.([고려사절요] 34, 공민왕 원년 12월) 이 결과, 1390년 4월 도당은 무과 설치를 건의해 33명을 선발했다.

결국 군정개혁은 병역의무자들에게 정당한 보수를 지불하고, 군대편성과 그 지휘권을 국가의 공적인 기관에 통합시키며, 적절한 군사지휘관의 선임을 핵심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군사력의 ‘공공화(公共化)’가 목표였다.



정치적 책략 너머를 추구한 민생개혁



정도전이 집필한 [경제문감]. 정도전은 조준과 더불어 조선의 민생을 시야에 넣은 개혁가였다



이러한 군정개혁의 결과 왜구에 대한 방어력은 대폭 증강됐다. 40년에 걸쳐 고려를 유린했던 왜구문제가 이 시대에 와서 거의 해결됐다.


1389년 2월 경상도원수 박위(朴葳)는 대마도를 정벌했다. 왜구의 본거지를 공격한 것이다. 이는 왜구 문제 해결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징표로 볼 수 있다. 고려와의 전면전을 우려한 그들은 적극적으로 사신을 보내, 왜구금지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거듭했다.

회군 후 이성계는 둘째 아들 이방과를 전투에 파견했다. 군대는 더 이상 전투를 회피할 수 없었고, 군사지휘관들은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마침내 왜구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됐다.

이것은 개혁파들의 정치적 능력을 입증하는 대표적 사례다. 고려 정부는 오랜 세월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것은 물론 군사력의 문제라기보다 전적으로 정치적 부패와 무능력 때문이었다.


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공민왕의 말처럼, 고려는 대규모 전쟁을 승리를 이끌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왜구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였다. 즉, 고려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에서 한계에 도달했던 것이다.


국가는 백성들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할 수 없었으며, 그것을 개선할 능력도 없었다. 따라서 왜구 문제의 개선은 개혁파들의 국가 운영능력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상의 모든 개혁을 고려해 볼 때, 민생에 대한 개혁파의 깊은 관심은 단순한 정치적 책략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 시대의 다른 정치집단과 비교할 때, 이것은 ‘백성의 발견’이라고 부를 만하다. 개혁의 선봉에 섰던 조준과 정도전은 민생을 몸소 목격하는 체험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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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영수 영남대학교 정외과 교수<조선왕조 창업비록> / 월간중앙, 2018. 8.17.



9. 위화도회군 후 대명(對明) 관계 둘러싼 암투 - ‘불신의 역모’를 돌파하다 

이성계, 개국 명분 얻으려 아들(이방원) 명나라에 인질 보내

…감국(監國) 요청, 최영의 처형 이후 이색 등 반대파와 연립정권 수립

정몽주(오른쪽)가 ‘최후의 고려인’이었다면, 정도전(왼쪽)은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적 가치 체계에서 조선 건국 후 정몽주는 조선이 추구하는 이념(忠)의 상징이 됐고, 정도전은 ‘패역의 화신’으로 규정됐다. 사진은 SBS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한 장면. / 사진:SBS


개혁과 참혹한 권력투쟁이 병행되던 시대였다. 개혁파는 궁극적으로 왕조 교체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반개혁파는 고려왕조의 존속을 위해 싸웠다. 개혁파가 모두 반역적인 것은 아니었고, 반개혁파가 모두 수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개혁과 충성이라는 두 가치가 분열됐다. 누구든 하나의 가치를 선택해야 했다.

중립이나 공존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양심적인 정치가들은 내면적 분열과 고통을 겪었다. 정몽주는 두 개의 가치 사이를 방황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최영처럼 정몽주는 시대의 정치적 상황이 초래한 비극적 인물의 전형이 됐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그 분열과 고통을 의도적으로 단순화시켰다. 그는 충성의 화신으로서, 조선이 추구하는 이념의 상징으로 부활했다.

정도전은 그 반대로 패역의 화신으로 규정됐다. 하지만 정도전 없이는 조선건국도 없었다. 그렇다면 조선은 패역 위에 세워진 것인가? 사실의 관점에선 그렇다. 아무리 성리학이라 할지라도 그 이념이 서식할 국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패역의 터널을 지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을 인정하면 성리학은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성리학의 존재는 천리(天理)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건국의 패역은 정도전 개인의 죄악으로 치부된다. 또한 정몽주를 사실상 조선건국의 정신적 뿌리로 인식한다. 이는 성리학이 정치의 세계에 들어갈 때 직면하는 곤란과 당혹을 은폐하려는 정신구조다.



영토문제로 촉발된 고려와 명(明)의 갈등

회군 후 첫 권력투쟁은 조민수파와 이성계파 사이에 전개됐다. 두 번째 단계의 투쟁은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한 1389년 11월까지 약 1년 4개월에 걸쳐 진행됐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변수는 명(明)의 입장이었다.

만약 명이 우왕의 폐위와 창왕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성계는 이인임의 운명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다. 두 번째 정치적 변수는 이성계파가 반대파를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개혁파는 특히 이색을 처리하는 데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했다.

제2단계의 권력투쟁에서 이색이 반개혁파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를 제거하기엔 그의 명망이 너무 컸다. 그러나 그를 제거하지 않는 한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가 어려웠다. 이 단계에서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수용한 지식인 집단이 분열됐다. 또한 이색에 대한 대응책에 따라 개혁파 내에서도 일차적인 분열이 발생했다.

1388년 6월, 창왕이 즉위한 지 오래지 않아 박의중이 중국에서 돌아왔다. 그는 고려의 요동정벌에 앞서, 마지막으로 중국의 철령위 설치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사신이었다. 그의 사행(使行)은 성공적이었다. 중국은 매우 긴 외교문서를 보냈다.

그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첫째, 고려와 명의 국경 문제는 재고하겠다는 것이다. “고려 표문에 이르기를, 철령 인구와 호구(人戶)의 일은 조종 이래로 문천·화주·고원·정평 등의 주가 본래 고려에 예속하였다 하니, 왕의 말을 따르면 그 땅은 마땅히 고려에 예속될 것이다. 이치로 말하면, 그 몇 주의 땅은 일찍이 원이 통치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요동에 예속되어야 할 것이다. 고려가 말한 바를 가볍게 믿을 수 없으니, 반드시 자세히 살핀 다음이라야 할 것이다.”([고려사] 창왕 즉위년 6월 신해) 고려의 주장을 일단 접수한 것이다.

둘째, 우왕대 이래 고려의 대명외교가 범한 다섯 가지의 실책을 열거했다. 가장 큰 문제는 진헌하는 말의 품질이 매우 열악하다는 것이다. 당시 명은 건국 초의 숱한 전쟁으로 말의 수요가 매우 높았다. 원이 탐라(제주도)에 목장을 설치해 직접 말을 사육했기 때문에, 명은 고려에 양마(良馬)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 여파로 말 문제는 고려 우왕대 이래 조선 세종대까지 국가를 괴롭힌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됐다. 중국은 말 값을 지불했지만, 계속되는 말의 반출로 국가의 군사력에 대한 우려가 제기될 정도였다.

셋째, 한나라부터 원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가 한반도 국가를 정벌한 사례를 차례로 열거하고, 그 책임을 한반도 국가에 돌렸다. “그 흔단(釁端)을 찾아보건대, 모두 고려가 자초한 것이요, 중국의 제왕이 병탄하기를 좋아하고 영토에 욕심냄이 아니었다.” 외교문서에서 전쟁을 거론하는 것은 가장 극단적인 표현이다.

[명사(明史)]를 보면, 주원장은 철령위 문제에 대한 고려의 해명을 의심했다. “고려가 예로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다고 하여, 이제 철령에 관해 그럴 듯하게 말을 꾸몄지만, 거짓되고 속이는 게 분명하다. 이런 뜻을 짐의 말로 효유하여, ‘본분을 지키게 하여 흔단을 만들지 말라고 유시한다.” ([明史] 列傳 第208 外國1, 태조 21년 4월)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은 인식한 듯하다. 중국은 고려의 과오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전쟁 위협까지 가했지만, 저간의 뜻은 결국 양국 간 영토문제를 재고하겠다는 것이었다.


반(反) 이성계파 거두 이색의 대명(對明) 외교


밑바닥에서 출발해 명(明) 왕조를 세운 주원장.

이성계는 권력을 잡은 뒤, 중국의 ‘승인’을 얻는 데 외교 역량을 집중했다


영토 문제가 전쟁으로 비화될 뻔했다는 사실은 그해 8월 고려의 천호 진경(陳景)이 명에 투항해 말한 진술에서 분명해졌다. “올해 4월 우왕이 요동을 침범하고자 하여 도군상(都軍相) 최영과 이성계가 서경에서 군대를 갖추고, 이성계가 진경으로 하여금 애주(艾州, 신의주)에 둔치게 했는데 군량이 이어지지 않아 퇴군했습니다. 왕이 노해 이성계의 아들을 죽이니, 이성계는 군대를 돌려 왕성을 공파해 왕과 최영을 가두었습니다.”

진경의 이름은 [고려사]에 나오지 않는다. 진경의 진술을 들은 명 태조는 요동의 수비를 엄중히 하고 사람을 보내 정탐하게 했다. 하지만 일단 전쟁의 위협은 사라졌다.

그러나 요동정벌의 정치적 책임에 관한 문제는 남아있었다. 1388년 6월, 창왕 즉위에 즈음해 발표된 정비의 교서는 바로 그 점을 천명하고 있었다. 즉 요동정벌의 모든 책임을 최영 한 사람에게 전가시키고, 우왕은 왕위를 사퇴하는 형식에서 매듭짓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7월 문하찬성사 우인열과 정당문학 설장수가 중국에 파견됐다. 우왕의 이름으로 보내진 표문 역시 정비의 교서와 동일한 취지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왕의 사퇴가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의 뜻에 의해 이뤄졌음을 강조한 것이었다.

“신이 그윽이 스스로 생각하건대, 최영이 이에 이른 것은 진실로 신으로 말미암아 이루게 된 것이니 부끄럽고 송구하여 죄를 피할 바 없습니다. 하물며 신은 본래 질병이 있고 국사는 또한 매우 번잡하니 한거하여 정양하기를 진실로 원합니다.”([고려사] 창왕 즉위년 6월 신해) 이 표문은 또한 우왕의 사퇴가 고려의 정치적 전통에 근거해 이뤄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이 생전에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역사적 사례가 그것이다. 이는 회군파에 대한 명의 의심을 불식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그런데 이 표문을 본명 태조는 “전에 그 왕이 갇혔다고 들었는데 이는 반드시 이성계의 모략이니, 잠시 기다리면서 사태가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자(觀變)”고 말했다.([明史] 列傳 第208 外國1, 태조 21년 10월) 고려의 상황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파악했던 것이다.

1388년 10월, 이색이 이숭인과 함께 명에 사신으로 파견됐다. 이색이 자원한 사행이었다. 이 사행의 의미에 대해, 이색은 이성계에게 “중국과 분란을 일으킨 뒤를 당하여 집정한 사람이 친히 황제의 조정에 조회하지 않으면, 공(公, 이성계)의 충성을 천하에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명은 공민왕의 죽음이 “역신(逆臣)이 임금을 죽인 시해”이며, 그 주모자가 이인임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래서 “공민왕이 돌아간 뒤로부터 천자가 번번이 집정대신을 들어오라고 해서, 모두 겁을 내고 감히 가지 못했다.” ([태조실록] 5년 5월 7일, 이색 졸기)

우왕 14년간 이런 상태로 불안한 대외관계가 지속됐다. 우왕의 퇴위에 대해서도 명은 그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우려가 컸다. 이색 자신이 나서서 이럴 위험을 막겠다는 것이다.

이색의 지위와 명망을 고려하면 이 사행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중국에도 알려져 있었다. 명 태조도 이색의 명망을 들어 알고 있었다. 조선 태종대에 명의 사신으로 조선에 왔던 왕연령은 우정승 성석린에게 “이색 같은 분은 중원(中原)에도 한두 사람에 지나지 못하오. 중원 사람이라고 어찌 다 조선 사람 같겠소?”라고 말했다.([태종실록] 3년 11월 15일)

이색은 아버지 이곡과 함께 원의 과거시험(制科)에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했다. 1353년(공민왕 2년) “가을에 정동행성의 향시에 장원하였고, 갑오년(1354)에 회시에 합격하였으며, 전정(殿庭)에서의 대책(對策)에서 제2갑(甲) 제2명으로 합격하였다.”  ([태조실록] 5년 5월 7일, 이색 졸기)


원의 과거시험은 지배지역에서도 시행됐다. 향시를 보는 곳은 11개 행성, 2개의 선위사, 직예성부로 17개 지역에서 실시해 300명을 뽑는다. 고려는 정동행성의 향시를 통해 3인을 선발한다. 향시 합격자는 다시 회시에 응시하는데, 3분의 1인 100명이 선발된다.(고혜령, [고려 사대부와 원 제과])


정동행성 응시자 중 합격자는 1명으로 제한돼 있다. 회시 합격자는 다시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전시에 응시한다. 전시는 대책문으로 합격자 중 순위를 가리는 시험이다. 몽고, 색목인과 한인(漢人), 남인(南人)을 나눠 방을 붙인다. 이색은 한인에 속한다. 제1갑은 3명이므로 제2갑 제2명은 한인, 남인 전체 중 5등에 해당한다.


([元史] 志31 選擧1) 과거시험에 제출된 그의 책문은 시험 감독관들의 찬탄을 불러 일으켰다. “독권관 참지정사 두병이(杜秉彝)와 한림승지 구양현(歐陽玄) 등 제공이 크게 칭찬하여 칙지로 응봉한림문자·동지제고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제수받았다.” ([태조실록] 5년 5월 7일, 이색졸기)


국정에 대한 이색의 식견은 공민왕 원년에 올린 그의 유명한 ‘복중상서’에서 입증된 바 있다. 당시 25세에 불과했던 그는 장래 조선건국의 개혁 청사진에 준하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색의 태도는 어떤 의미에서 이성계에 대한 무언의 압박이었다. 명의 요구대로라면 이성계가 가야 했던 것이다. 이색의 의도는 복합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반이성계파의 정치적 명분을 제고시키는 것이다. 고령의 노재상이 국가 현안의 해결에 솔선수범함으로써, 반이성계파의 정치적 입장이 국가 대의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 이성계에게 정치적 부채를 지우는 것이다. 부담을 느낀 이성계는나와 공(公)이 일시에 사자로 가면 나라 일은 누가 맡겠는가? 내가 자식 하나를 택하여 공을 쫓아서 가게 하면, 내가 가는 것이나 다름없소”라고 말했다. 장래의 조선 태종인 5남 이방원이 서장관으로 파견됐다.([태종실록] 4년 2월 18일)


감국(監國)까지 자청한 이성계의 ‘불안’



경기도 고양시의 최영 장군 묘.

최영 장군의 한(恨)이 서린 듯, 600년 동안 붉은 풀이 자라났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색의 사행 목적은 ‘감국(監國)’이었다.

“나라를 보전하는 것은 사대에 있고 먼 곳을 편안하게 어루만지는 것은 감(監)을 두는 데 있습니다. (…) 생각건대 소읍(小邑)이 멀리 변방에 처하여 비록 성교(聲敎)의 미침을 입었으나 아직도 예의의 풍습에 어두우니 왕관(王官)이 오셔서 오직 성스런 교화(聖化)의 선포를 바라나이다.” ([고려사] 창왕 즉위년 10월)

이는 명에서 파견된 관리가 고려를 직접 통치하라는 요청이었다. 일종의 총독정치인 셈이다. 명의 오해를 불식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성계 등 회군파의 불안은 이 정도로 컸다.

이와 관련해 이색의 또 다른 의도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명의 ‘감국’은 이성계파에 대항해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책이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일찍이 무신정권에 대항해 원종이 취한 정책이었다. 당시 태자였던 원종은 항복을 위해 중국에 갔다.

그런데 제4대 칸 몽케가 죽고 후계를 둘러싼 내전이 발생했다. 쿠빌라이와 동생 아리크부카가 경쟁했다.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원종은 쿠빌라이를 찾아갔다.

감격한 쿠빌라이는 “다시 감히 난을 일으켜 위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너희 임금을 범하는 것일 뿐 아니라, 곧 우리의 법을 문란케 하는 것이다. 나라에 상헌(常憲)이 있으니, 사람마다 이를 주륙해야 한다” ([고려사] 원종 원년 4월 병오)고 선언했다.

원종은 원의 군사와 함께 고려에 돌아와 무신 집권자들을 제거했다. 이렇게 100여 년에 걸친 무신정권이 무너졌다. 공민왕 5년, 고려의 표문을 보면 원의 지배 하에서 “사람이 분수를 범하면 반드시 베일 것을 아는데, 어찌 참월하게 명분을 범하여 난역을 꾀하는 자가 있겠는가”라고 원의 통치를 찬양했다.([고려사] 조일신전)

둘째, 이방원은 일종의 인질이었다. 적어도 이색이 중국에 파견돼 있는 동안은 어떠한 정치적 변혁도 시도하지 않겠다는 이성계의 약속 같은 것이다.

“이색은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성하여, 조정과 민간에서 마음이 그에게 돌아감으로써,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태조의 아들 하나를 같이 가기를 청하니, 태조가 전하(이방원)로써 서장관으로 삼았다.” ([태조실록]총서)

그 반대로 이성계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이방원을 대동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안로(金安老)의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이색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것을 자청한 것은 장차 어떤 계획이 있었던 까닭에 태조가 의심할까 두려워서 태종을 데리고 갔던 것이다. 명 태조를 보고 우리나라를 붙들어 보호하여 달라는 뜻을 말하였으나, 황제가 일부러 알아듣지 못하는 체하였다고 한다.” ([연려실기술] 권1, ‘태조조고사본말’)

그러나 이성계파가 설사 이색의 의도를 알았다 해도 중국의 의심을 불식시키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었다.

1388년 11월, 다시 밀직사 강회백과 밀직부사 이방우가 중국에 파견됐다. 이성계는 자신의 장남을 직접 파견했다. 이들의 사행 목표는 창왕의 ‘친조(親朝)’였다. 황제에게 인사하기 위해 왕이 직접 중국에 가겠다는 것이다.

이로써 회군을 전후한 일련의 사태가 극히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입증코자 했을 것이다. 회군파는 ‘감국’으로도 불안을 씻을 수 없었던 것이다.

1388년 12월, 해가 가기 전에 최영을 처형했다. 정국이 유동적인 상황에서 최영을 중심으로 반이성계파가 결집하거나, 그가 중국으로 압송될 경우의 문제도 고려했을 것이다. 모두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였다.


명(明)이 던진 ‘불신의 역모’가 불러온 파장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하고 있는 [송조천객귀국시장]

 

조선 세종대 명(明) 수도 베이징에서 조선 사신을 송별하는 장면을 그려놓았다. 조선의 ‘사대외교’는 다양한 포석을 지닌 전략이었다

그런데 회군파가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1389년 3월에 입국한 강회백은 회군을 둘러싼 정치과정을 ‘불신(不臣)의 역모’로 규정한 황제의 글을 가지고 왔다.

 “이제 신하가 아비를 쫓아내고 그 아들을 세워 내조하고자 청하니, 대개 떳떳한 윤리가 크게 무너지고 임금의 도리가 전혀 없어 불신의 역모가 크게 드러났으므로, 사신을 타일러 돌아가게 하고 동자(창왕)도 반드시 내조할 필요가 없다. 세우는 것도 저에게 있고, 폐하는 것도 저에게 있으니, 중국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고려사] 창왕 원년 3월)

이는 회군파의 정치적 입지에 치명적이었다. 우왕대 내내 고려를 괴롭힌 악몽이 재현된 것이다. 그러나 4월에 입국한 이색의 전갈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감국을 요청하러 갔던 그는 겨우 ‘황제 주위의 자제들과 결혼시킬 여자를 보내라’는 서신을 가지고 왔다. “내가 여기에 아이들을 몇몇 갖고 있는데, 고려의 지체 좋은 집안의 여아들을 데려와 친혼을 맺도록 하라.” 이는 공녀의 재개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회군파는 일말의 안도감을 느끼면서, 다른 한편 중국의 진정한 의도에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이 때문에 6월에 문하평리 윤승순과 첨서밀직 권근을 중국에 보내 다시 왕의 친조를 청했다. 회군파로서는 중국의 의도를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중국의 입장이 모호했기 때문에, 이성계는 정치적 구상을 새롭게 바꿔야 했던 듯하다. 이 시기에 그는 반이성계파와의 연립정권을 구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중국으로부터 돌아온 이색의 말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색은 중국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남경에 조회가서 예부에 이르니, 상서(尙書) 이원명(李原明)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는 아버지를 내쫓고 아들을 세우니 천하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느냐. 왕과 최영이 모두 갇혔으니 이것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내가 말하기를, ‘최영이 왕으로 하여금 요양을 범하도록 하였으나, 장군 조민수와 이성계가 불가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의주까지 왔으나 감히 출발하지 못하니, 최영이 자주 독촉하므로 마지못하여 군사를 돌이켜 최영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에 왕이 노하여 여러 장수를 살해하고자 하므로, 태후가 왕을 폐하여 강화에 안치하였으나 개경과 거리가 20여 리이며, 옛 수도의 경치 좋은 곳이므로 정신을 수양하기에 이 땅과 같은 곳이 없으며, 또 재상이 시위하고 의장·기물과 조석의 음식이 모두 평일과 같은데 어찌 내쫓았다고 하리오’라고 하였습니다. ([고려사절요] 공양왕 2년 2월) 이것은 강회백이 가져온 중국 예부의 자문 내용과 같은 것이다.

중국 정부의 비공식적 입장은 이보다 더 강경했던 듯하다. 이색은 귀국 후 이성계를 만나 이를 전했다. “이원명의 말은 귀로는 들을 수 있어도 입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흥은 먼 땅이니 가까운 곳에 두면 임금을 추방했다는 비난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어떻겠습니까”라고 권고했다.

중국의 입장을 통해 이성계를 위협해 우왕의 입지를 강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색의 권고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이었다. 반대파들의 결집을 촉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색이 회군파의 입장을 변호했다고 하나 믿기 어렵다. 이색은 반이성계파의 사실상 우두머리였다. 위화도회군에 대한 이색의 변호를 자세히 살펴보면, 회군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마지못해 단행된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러나 이성계파의 공식적 입장은 이성계가 처음부터 ‘사대’를 명백한 명분으로 제시하고 요동정벌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색의 진술에는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반대했으나, 그 명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1389년 7월, 이성계는 판삼사사 심덕부, 판개성부사 배극렴, 문하평리 정지 등 회군파의 핵심적인 장군들을 대동하고 우왕을 찾아가 잔치를 베풀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우왕과의 화해가 필요했던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 따라 우왕을 복위시켜야 할지도 몰랐다. 권력의 관점에서만 보면, 최영의 처형은 때를 놓치지 않은 것이었다.


궁극의 처세술 보여준 홍영통



창덕궁 대보단.

1705년 설치된 것으로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明) 신종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조선 ‘사대외교’의 징표처럼 각인돼 있다


한편 1389년 7월, 이색은 사임하면서 후임에 창왕의 장인인 이림(李琳)을 천거했다. 이색은 회군 후 이성계파와의 권력 투쟁에서 중심에 서 있었다. 조민수를 도와 창왕을 즉위시킴으로써 이성계파의 의도를 일단 좌절시켰다. 다음으로 사행을 자원해, 명의 ‘감국’을 통해 고려왕조에 대한 보증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 의도는 실패했다.

하지만 중국이 우왕의 폐위를 ‘불신의 역모’로 규정함으로써 이성계파는 궁지에 빠졌다. 그러나 중국이 군사적으로 고려를 압박하지 않는 한, 이성계의 권력을 직접 제거할 방법은 없었다. 따라서 다음의 권력투쟁은 직접 행동에 나서는 것뿐이었다.

이 단계에서 이색은 반이성계파의 영수 역할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듯하다. 이후 이색의 정치적 거취는 적극적 대결보다는 시종일관 수동적인 것에 머물렀다.

이색의 사임에도 불구하고, 창왕은 오히려 이색을 판문하부사, 이림을 시중, 홍영통을 영삼사사에 임명했다. 반이성계파가 최고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최고 요직을 독점한 것이다. 홍영통처럼 정치적 격류에 영향을 받지 않은 인물은 드물다.

하지만 이인임처럼 주도면밀하게 정치적 운신을 계산했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세상의 보통 상식과 인정에 따름으로써 시류에 거스르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는 “천성이 순박하고 조심스러워 상례(常例)를 좇아 계책을 세워 건의하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태조실록] 태조 4년 10월 11일) 그 덕분에 여말선초의 정치적 격변기에 불구하고, 한 번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지 않았다.

신돈 집권기에는 그의 측근이었다. 신돈이 아직 보통 승려였을 때, 그는 은혜를 베풀었다. 신돈이 집권하자, “신돈에게 빌붙어 늘 음식을 보내고 문안했으며, 그가 출입할 때마다 반드시 말을 타고 뒤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의 처신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춘부, 김난과 함께 신돈의 최측근이었다. 감찰대부와 밀직부사를 역임했고, 불법 행위도 많았지만 항상 신돈의 비호를 받았다.

홍영통은 상당히 독실한 불교도였로서, 이색·이무방과 함께 남신사(南神寺) 불교 모임인 백련회 멤버였다.([고려사] 이색전) 신돈이 반대파를 다수 살해할 때, 그는 불교의 인과응보설을 들어 적극 만류함으로써 많은 사람을 구했다고 한다. 신돈이 실권하고 이춘부·김난이 모두 처형됐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우왕은 그와 인척 관계였다. 우왕대에 그는 이인임파로서 임견미, 조민수와 함께 내재추(內宰樞)가 됐다. “항상 궁중에 있었으며,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먼저 여기를 통과한 후에야 시행되었다”고 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관직은 최고위직인 문하시중, 판문하 부사에 올랐다. 1388년(우왕 14) 무술정변 때도 홀로 목숨을 구했다. 오히려 그가 영문하부사가 되자 세상은 “홍영통 같이 탐욕스러운 자가 임견미와 염흥방의 참화를 면하고 벼슬에서 쫓겨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재상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복인이다”라고 평했다.

공양왕대에 간관들은 홍영통의 처단을 주장했다. “홍영통은 우왕의 인척이므로 혼자 살아남았는데도, 다시 변안열과 함께 우왕의 복위를 도모했습니다. 이것은 천지가 용납하지 못할 죄이오니 바라옵건대 대의로써 처단하소서.” 그러나 공양왕은 오히려 걱정하지 말라는 밀지를 보냈다.


그는 이성계와도 관계가 좋았다. 조선건국 뒤 이뤄진 첫 인사에서 판문하부사가 되었고, 개국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이성계의 잠저 시절 옛 친구로서, 이성계의 사적인 주연에도 참석했다. “임금이 새 궁궐의 양청에 주연을 베풀었는데, 남양백 홍영통과 창녕부원군 성여완이 잠저 때의 친구들로서 참예하였다.” ([태조실록] 4년 3월 20일)


1395년 그는 이성계의 생일날 주연에 참석했다가 술에 취해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러나 이 격변의 시대에 정치적으로 계속 순탄한 길을 걸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색·이림·이성계의 불안한 동거



[삼국지]의 영웅인 조조의 초상화.


조조는 힘 없는 한나라 황제를 섬기는 모양새를 취하며 구석(九錫)의 특전을 받는 등 권세를 누렸다. 이를 본떠 고려 말 이성계의 연립정권도 동등한 특권을 행사했다



1389년 9월, 창왕의 친조를 위한 행차가 준비됐다. 그의 친조는 이성계파와 반이성계파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회군파는 창왕의 친조를 통해 명에게 자신들의 결백을 입증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색은 이 행차를 서둘렀다. 그는 요동의 겨울이 빨리 닥치므로 이른 시기에 출발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창왕의 어머니 근비의 반대로 행차가 중지됐다.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불신의 역모’라는 중국의 입장을 확인하고 근비는 상황을 낙관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성계파에게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색의 생각은 달랐을 것이다. 창왕이 일단 명의 승인을 받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성계 파로서도 역성혁명을 꿈꾸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유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색은 명의 입장이 확고한 것이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뒀는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이색의 생각이 옳았다.

1389년 9월, 연립정권 구상이 현실화됐다. 이것은 정몽주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이색·이림·이성계는 특별한 지위에 임명됐다. 세 사람에게는 “칼을 차고 신을 신은 채, 전상(殿上)에 오르고 찬배(贊拜)할 때 이름을 부르지 않도록”했으며, 각각 은 50냥과 비단 10필, 말 1필이 주어졌다.

전상은 왕이 거처하는 정전(正殿)의 안을 뜻하며, 찬배는 신하가 군주를 뵐 때 집례자가 행례의 절차를 알리는 것이다. 전상의 댓돌에 신을 신고 오를 수 있는 권리는 납폐(納陛)라고 한다. 모두 최고의 공신에게 베푸는 특별대우다.

중국에서는 최고의 공신에게 구석(九錫)이라는 아홉 가지 특전을 베푼다. [삼국지]에 보면, 조조는 스스로 위공에 올라 구석의 특전을 향유하고자 했다.

그러나 30년간 조조를 위해 기략을 짜온 순욱이 반대했다. 그는 조조가 한실 부흥을 위한 충신으로 남기를 바랐다. 조조는 그에게 빈 찬합을 보냈다. 그는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창왕이 세 사람에게 내린 교서는 이들의 업적을 찬양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볼 때는 일종의 역할분담을 규정하고 있었다. 이색에게는 사부, 이림에게는 외척으로서 왕의 장인(元舅), 이성계는 공신으로서 원훈(元勛)의 역할이 주어졌다.

창왕은 “진실로 사부의 가르침(訓謨)과 원구의 보호(保佑), 원훈의 구함(匡救)가 아니었다면 어찌 그 능히 구제할 수 있었으리오”라고 말했다.([고려사] 창왕 원년 9월)

이색은 왕을 훈계하여 정치를 지도하고, 이림은 외척으로서 왕실을 보호하고, 이성계는 공신으로 정치를 담당하는 책임이 부여된 것이다. 이성계의 정치적 의미는 축소됐다. 이성계의 역할은 일종의 정책 집행자에 한정됐으며, 국가의 지도원리와 왕실문제는 이색과 이림이 담당하게 됐다. 반개혁파와 왕실, 개혁파를 동거시키는 절묘한 구상처럼 보인다.

​[출처]: 김영수 영남대학교 정외과 교수<조선왕조 창업비록> / 월간중앙, 2018. 9.17.




10.  이성계·이색의 연립정권 성립 이후의 권력투쟁 - 정몽주, ‘경계인’의 고뇌 




明의 ‘불신의 역모’ 칼날 피하기 위한 정치적 생존책이 빚은 대연정

…문장력보다 경세의 역량 중시한 개혁파의 이숭인 탄핵으로 정면충돌



1216년 세워진 개성 선죽교. 정몽주는 개혁파와 보수파의 타협에 의한 연립정권을 꿈꿨다. 그러나 개혁파 내 급진파였던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의 뜻을 무시하고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암살했다. 선죽교는 정몽주의 지향이 좌절된 공간으로서 영속성을 갖는다



1389년 9월, 이성계파가 반대파와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그해 2월 강회백이 가져온 외교문서에서, 중국은 위화도회군 이후의 고려정치를 ‘불신(不臣)의 역모’로 규정한 바 있다. 신하가 아버지를 내쫓고 아들을 세우는 것은 신하로서 해선 안 되는 역모란 뜻이다. 이 때문에 이성계파는 우왕과 화해를 시도하고, 반대파와도 공존을 모색해야 했다.

연립정권을 제안한 이는 공식적으로 정몽주였다. 제안은 타이밍상 완벽했다. 이성계파로서도 제휴가 절박한 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립정권의 필요성은 정몽주로서도 절실했다. 그는 어느 한 쪽에 확고하게 서지 못하고, 방황했다. 정몽주는 당시 고려 정계에서 이성계파로 인식됐다.


김종연은 이성계를 암살하고 우왕을 복립하려던 계획에 연루돼 1390년 12월 처형됐는데, 그의 첫 번째 살해 대상이 바로 이성계와 정몽주였다. 정몽주를 이성계파의 둘째 유력자로 본 것이다. 국


문 과정에서 그는 “이시중은 인품이 본래 인자한데 정몽주·설장수·조준·정도전 등에게 꾀여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이시중과 함께 정몽주만 해친다면 나도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진술했다.([고려사절요] 34, 공양왕 2년 12월)

정몽주는 창왕을 폐위시킨 1388년 11월 흥국사 9인 회의에도 참석했다. 창왕의 폐위 명분은 그가 왕씨가 아니라 신 씨라는 비왕설(非王說)이었다. 이것은 이성계파의 핵심적 집권 명분이자, 고려 수호파가 강력히 부정한 논리였다. 정몽주는 이 명분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1388년 7월 이후의 사전(私田)개혁에 대한 입장은 달랐다. 사전개혁에 대해 “이림·우현보·변안열 및 권근·유백유는 이색에게 동조했고, 정도전·윤소종은 조준의 주장에 동조했으며, 정몽주는 양자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조준전])



이색, 성리학계의 ‘오피니언 리더’



포은 정몽주의 영정. 정몽주는 고려말, 이성계파와 이색파 사이에서 끝 모를 방황을 했다



정몽주는 처음부터 혼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색, 이림, 이성계에게 공동의 특전을 하사함으로써 연립정권을 구체화시킨 뒤, 창왕은 그 명분을 천명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이 교서는 제안자인 정몽주의 의사가 반영됐을 것이다. 교서를 보면, 고려의 정신적 지도자는 이색이었다.


이색은 “학문은 하늘과 사람으로 통하고 지식은 고금을 꿰뚫어··· 염락(濂洛)의 학을 알게 하고 풍속을 추로(鄒魯)의 풍으로 변하도록 한 것은 실로 경의 힘”이라고 찬양되고 있다.


염락의 학은 성리학이며, 추로의 풍은 공맹(孔孟)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당대 성리학자들의 세계관이자 정치이념이었다.

실제 한국에서 성리학을 하나의 확고한 시대사조로 만든 것은 이색이었다. 그는 1367년(공민왕 16년), 전쟁으로 무너진 성균관 중건을 주도하고 성리학 붐을 일으켰다. 성리학이 비로소 고려 학계와 사상계에서 주류로 부상한 것이다. 이와 함께 이색 학파가 탄생했다.


정도전의 설명을 보자.

“오늘날 목은 이색 선생은 일찍이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고 북으로 중원에 유학하여 바른 사우(師友)의 연원을 얻고서 성명(性命)과 도덕의 설을 궁구하였으며, 동방으로 돌아와서는 제생을 교육하였다. 이 선생의 가르침을 접하고서 흥기한 자로는 정몽주, 이숭인, 하륜, 박상충, 김구용, 박의중, 권근, 윤소종 등이 있고, 또 나처럼 불초한 자도 몇 분 군자의 대열에 끼이는 영광을 얻었다.” ([도은집] 서)

1374년 공민왕 사후 이인임은 친명(親明)에서 친원(親元)으로 대외정책을 바꾸고자 했다. 이색 학파는 일제히 이에 반대함으로써,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러나 권력투쟁에서 패한 결과 뿔뿔이 흩어졌으며, 14년간 역사의 수면 아래에서 잠류했다.

1388년 위화도회군 후 사전개혁은 이색 학파에 닥친 제2의 정치적 분수령이었다. 이색이 입장을 정하자 권근과 유백유는 이색을 따랐고, 윤소종과 정도전은 이색을 떠났다. 이로써 이색 학파는 갈라졌다. 정몽주의 주저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개혁과 이념의 분열을 뜻했다.


정몽주 입장에서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최선책은 이색이 개혁파로 전향하는 것이었다. 차선책은 양자가 타협하며 공존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명나라의 압박으로 그런 정치적 상황이 조성됐다. 이 연립정권은 아마 현실정치가 정몽주에게 허용한 가장 행복한 대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몽주가 이성계 그룹의 급진파인 조준, 정도전을 제치고 이성계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동시에 그것은 철저한 개혁이 좌절됐음을 뜻했다. 이성계에게는 정치적 생존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립정권을 허용한 급진파는 탄핵기관과 왕명을 출납하는 직위에 개혁파 인사들을 배치했다. 지방정치의 개혁을 위해 1388년 8월 지방에 파견된 인사들이 귀경해 요직에 임명됐다.


 장하와 성석린은 문하평리, 조운흘·김사형·최유경은 동지밀직사사, 권주는 밀직제학, 민제는 개성윤, 이행은 지신사, 이근은 좌부대언, 오사충·남재는 좌우사의, 조박은 문하사인, 권담은 사헌장령, 김이음·최사위는 지평에 임명됐다. 물론 이들이 모두 급진파를 지지한 것은 아니다. 권력투쟁에서 가장 급진적인 논객으로 나선 것은 오사충과 남재, 조박이다.

개혁파내의 급진파들은 연립정권에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불만은 이색을 제거하기 위한 단계적 정치투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급진파는 행동에 나서 서서히 이색을 향해 공격의 칼날을 겨눴다.


이는 정몽주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이색이 제거되면 연립정권도 유지될 수 없었다. 이색에 대한 공격은 사실상 연립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정몽주의 고민은 깊어졌다.

1389년 9월, 정몽주의 연립정권안이 현실화되기 직전 이숭인에 대한 탄핵이 시작됐다. 이색을 제거하기 위한 전주곡이었다. 이숭인은 이색이 가장 높이 평가하고 총애했던 인물이었다. 1388년 10월의 중국 사행 때도 이색은 이숭인을 부행(副行)으로 데리고 갔다.

이숭인은 천재적인 문장가였다.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명문장가인 최립(崔岦, 1539~1612)은

“이색의 글과 이숭인의 시는 우리 동방에서 첫째”(牧隱之文 陶隱之詩 吾東第一 家數也)라고 평가했다.([簡齋集] ‘新印陶隱詩集跋’) 이숭인의 글은 [시경]과 [서경]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우아하고 고전적이었다.(典雅) 정도전의 평을 보자. “그가 저술한 시와 문 약간 편을 보더라도 [시경]의 비흥(比興)과 [서경]의 전모(典謨)에 뿌리를 두었으며, 화순함이 안에 쌓여서 영화로 밖에 발한 그것 역시 모두가 예악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니, 도의 경지에 깊이 들어간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 ([도은집] 서)

이색도 붓을 들면 바로 글이 나오는 뛰어난 문장가였다. 하지만 그는 이숭인의 시에서 그 진수를 맛봤다.

“정사년(1377, 우왕 3년) 동짓달 그믐 3일전,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향을 피우고 단정히 앉아서 도은(陶隱)의 시 서너 편을 읽어 보았더니, 마치 옥구슬이 소반 위를 구르는 것과 같고, 골짜기에서 나온 얼음덩어리가 옥병 속에 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시를 읽어 오면서도 시의 참다운 맛을 느껴보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유독 공자께서 일러주신 ‘사무사(思無邪)’라는 한마디 말씀과 거의 비슷하게 되어야 하리라고 혼자 상상하면서 노년에 이르도록 그 말씀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도은의 시어(詩語)를 보니, 한 점 티끌도 없이 쇠락한 느낌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추구하는 방향도 오직 거기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에게 성정(性情)의 바름을 느끼게 하여 삿됨이 없는 경지로 인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은집] 발)

이색은 또한 “우리 동방의 문장은 선배들도 자안(子安, 이숭인)과 같은 사람은 없었다. 이 사람의 문장과 같은 것을 중국에서 찾아보아도 구하기 힘들 것이다”라고 감탄했다. 명태조 주원장도 이숭인이 지은 “표문의 글이 참으로 간절하구나!(表辭誠切)”라고 탄복했다



당대의 문장가 이숭인



이숭인의 초상화. 당대의 문장가였던 이숭인은 일급 외교문서 작성자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론 이성계파와 대척점에 섰다



이숭인은 과거 합격 이후 줄곧 왕의 교서 등 국가의 주요문서를 작성하는 직위(製敎)를 겸했다. 이색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외교문서는 모두 그에게서 나왔다. 서구는 말의 힘이, 동아시아는 문장의 힘이 강하다. 중국문화권에서 문장은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철학적 깊이와 정치적 역량을 가늠하는 잣대였다.

국가 간 외교에서 주고받는 문장은 특히 어렵다. 오늘날의 외교문서는 다분히 실무적이다. 그러나 전근대의 외교문서는 예술적이지 않으면 안 됐다. 외교문서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작품이 돼야 하는 것이다. 문장의 품격이 국격이 되고, 국익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외교문서 작성엔 또한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안을 균형 있게 다룰 줄 아는 정무감각이 필수적이다. 예술적인 문장 속에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 함축돼야 한다. 너무 드러나면 격이 낮고, 너무 은미하면 뜻이 안 통한다.


이숭인의 외교문서에 대한 권근의 평을 보자. “우리나라가 명나라를 섬긴 이래로 표전(表箋)과 사명(詞命)가운데 이숭인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습니다. 공민왕이 명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은 것과 상왕(우왕)께서 작위를 이어받은 것은 모두 이숭인이 지은 문장의 힘입니다. 그리고 해마다 금은·말·베의 공납을 면제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숭인의 힘입니다. 황제가 문장이 아름답다고 자주 칭찬하시면서 우리나라에 인물이 있다고 말한 것도 다 이숭인의 공입니다. 이숭인의 문장은 간결하고 고아한 당대 최고의 문장으로 중국에도 그런 인재는 드무니 국가의 외교문서는 이 사람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숭인전])

이숭인은 또한 자질이 영민하고 총명했다. 권근의 평은 이렇다.

“천품이 영특하고 고매한 위에 학문이 또 정밀하고 박식하였으며, 염락의 성리학에 뿌리를 두고서 경사자집(經史子集)과 백가의 글에도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조예가 깊을뿐더러 식견이 더욱 높아 정대한 영역에 우뚝 섰으며, 불교와 노장의 학설에 대해서까지도 옳고 그름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도은집] 서)

그는 14세인 1360년(공민왕 9년) 국자시에 합격했다. 2년 뒤 16세 때 과거에 급제했다. 1367년 이색이 성균관을 중심으로 성리학운동을 시작했을 때, 이숭인은 성균관 학관으로서 크게 활약했다. 한국 성리학의 공동 창시자인 셈이다.


 “그중에서도 자안(子安, 이숭인)은 정심(精深)하고 명쾌한 면에서 제자(諸子)를 능가하였다. 그는 선생의 설을 들으면 조용히 이해하고 마음으로 통하여 다시 귀찮게 질문하는 법이 없었고, 혼자서 해득하는 것 역시 사람의 의표를 멀리 뛰어넘는 점이 있었으며, 각종 서적을 널리 독파하면서도 한번 보기만 하면 곧장 암기하였다.” ([도은집] 서)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숭인은 이인임의 인척이었다. 그의 증조부 이백년(李百年)은 이인임의 조부 이조년(李兆年)의 맏형이었다. 이인임은 이숭인의 재종숙부이다. 그래서 이숭인의 정치적 부침도 가계와 직결됐다. 이인임이 축출된 1388년 무진정변 때 이숭인도 장형을 받고 통주에 유배됐다.


 최영의 문객 정승가(鄭承可)가 그를 참소했다. 위화도회군 뒤 최영이 축출되고 창왕이 즉위하자, 정권을 잡은 조민수가 가장 먼저 요청한 것이 이인임과 이숭인의 복권이었다.([고려사절요] 신우4) 그때 이인임은 이미 죽은 뒤였다.

그러자 조민수는 창왕에게 이인임을 예장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청했다. 시호는 왕이나 사대부가 죽은 뒤 그 공덕을 기려 추증하는 호이다. 보통은 좋은 뜻을 담은 선시를 내린다. 그런데 시호 제정을 담당한 전의시(典儀寺) 관리들이 병을 핑계로 출근하지 않았다.


전의부령 공부가 “내가 광평군(廣平君, 이인임)의 시호를 의논하지 않으면 누가 감히 하겠는가” 하고는 ‘황무(荒繆)’라는 시호를 지었다.


황무란 “극히 착오가 심하여 조리에 매우 어긋남”(absurd)을 뜻한다. 나쁜 뜻이다. 이숭인, 강회백, 하륜 등이 공부를 욕했다. 하륜은 이인임의 동생 이인미의 사위니, 이인임의 조카사위다. 무진정변 때 그 역시 유배됐다.


조선 선조대의 명신 윤근수(尹根壽, 1537~1616)는 이런 이숭인의 정치적 태도에 비판적이었다. “이인임으로 말하면 자신의 임금을 죽였으니 악의 큼이 염흥방, 임견미와 비교할 바가 아닌데, 그 당시에 이인복, 이숭인이 한 집안의 사람으로 이에 대하여 한마디 말도 없는 것은 또 무슨 일이었는가?” ([寄齋雜記]1, ‘歷朝舊聞’1, 國初)



고려왕족 영흥군 진위(眞僞) 스캔들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 정문에서 바라본 태화전. 조선 사신들은 명나라를 상대로 사대외교를 펼칠 때, 이 길을 거쳐 갔을 것이다. 이성계 때부터 중국의 지지는 곧 정권의 정당성을 의미했다



이숭인의 정치이념은 이인임의 그것과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숭인은 이인임에 우호적이었다. 씨족사회에서 인척의 연을 벗어나기란 매우 어렵다. 게다가 그는 이색과 정치적 거취를 같이했다. 이성계파와는 완전히 반대다.


공양왕 때 간관은 “이숭인과 하륜이 과거 이인임의 심복노릇을 하다가, 뒤에는 이색의 간계에 호응해 창왕을 재우쳐 명나라에 알현시키려 했고, 또 우왕을 복위시켜 왕씨의 적통을 단절하려 했다”고 비판했다.([이숭인전]) 이처럼 이성계파는 이숭인을 확고한 반대파로 인식하고 있었다.

1389년 9월, 이성계파가 이숭인을 공격한 빌미는 사소한 것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일본으로부터 생환한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의 진위를 둘러싼 문제였다. 왕환은 신종의 6대손이고, 공양왕의 종숙(從叔)이다. 처남은 신순(辛珣)이다. 신순의 형은 신예로서 매부 고용보와 함께 충혜왕, 충목왕대의 권신이었다.


신순의 동생은 신귀로서, 이성계와 동서간이다. 신순, 신귀는 신돈과 같은 영산 신씨였는데, 그의 우익이 됐다가 1371년 신돈과 함께 처형됐다. 이때 왕환도 신순의 죄에 연루돼 무릉도(울릉도)에 귀양갔다. 거기서 실종돼 19년간이나 생사를 알지 못했다.([고려사] 종실)


그의 아내 신씨는 왕환이 일본으로 표류했다는 풍문을 듣고, 금은을 마련해 일본에 가는 사신에 가노를 두세 차례 딸려 보냈다. 1389년 가노는 드디어 왕환을 데리고 귀국했다.

그런데 자칭 왕환이란 사람은 “위인이 매우 어리석고 얼굴도 닮지 않았으며, 말도 많이 잊어버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과 성이며 마을도 알지 못하였다.” 이숭인의 아우 이숭문(李崇文)은 왕환의 사위였다. 이숭인이 자칭 왕환을 보니 나이에 비해 너무 젊었다.


그래서 진위를 알아보려고 “생년(生年)을 감안하면 지금 늙었을 텐데 모습이 쇠하지 않았으니, 어찌 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강남의 약을 복용했기 때문에 늙음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하였다.([도은집] 권3)


그러나 왕환의 친인척과 하륜 등도 “우리들이 왕환을 매우 잘 아는데, 이 사람은 실제 왕환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나 왕환의 아내 신씨는 “남들이 아는 것이 어찌 아내가 아는 것과 같겠는가?”라며 왕환임을 주장했다.


왕환의 형인 승려 참수(旵髓), 두 아들도 “진짜 영흥군”이라고 했다. 이숭문도 처음에는 부인했다가 뒤에 장인이 맞다고 번복했다.

사헌부는 이숭인 등을 왕족에 대한 무고죄로 고발했다. 이숭인이 도망치자, 사헌부는 이숭인의 아들 이차약을 체포했다. “이숭인이 도망쳤으므로 옥졸은 이숭인의 아들 이차약의 두 손을 뒤로 결박하고 이숭인을 찾아내라고 채찍으로 등을 때리니, 피가 흘렀다.”


 악의 없는 오류에 대해, 더욱이 당사자도 아닌 대신의 아들을 이처럼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은 악의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비서감(秘書監) 박돈지(朴敦之)도 이숭인과 함께 유배됐다.


죄목은 과거 장모와 간음했고, 이색의 명나라 사행시 함께 따라가 상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가 이숭인과 평소 사이가 좋은 게 탈이었다.

이차약이 잡혀가다가 도중에 이성계를 만났다. 이차약이 큰 소리로 “영공께서는 나를 살려 주시오”라고 부르짖었다. 깜짝 놀란 이성계는 자초지종을 묻고, 옥졸에게 “어찌 아들을 욕보여 아비를 찾으려 하느냐?”고 꾸짖고는 석방토록 했다. 그리고 종자 한 명을 붙여서 집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다시 체포될까 우려한 것이다.


궁궐에 들어간 이성계는 시중 이림(李琳)과 함께 창왕에게, “즉위 초기에는 넓은 아량을 베풀어야 하니 박천상 등을 용서하소서. 또한 이숭인은 서연(書筵)에서 시강을 맡아 오랫동안 임금을 계발했으니 그 직무를 맡도록 명하십시오”라고 요청했다.


이를 보면, 이숭인을 탄핵하고 처벌하려는 사헌부의 행동이 이성계의 동의 없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숭인을 방면시키고 이림과 함께 그의 사면을 요청한 것으로 봐서 이성계는 연립정권을 유지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한 것이다.



정몽주의 연정, 급진파의 반발



▎이성계는 역전의 용사였지만 정몽주 암살을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이를 어긴 아들 이방원을 이성계는 용서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을 향해 화살을 날리기도 했는데 지금까지 이를 기억하는 살곶이벌 축제가 서울 성동구에서 열린다



이숭인은 간신히 처벌을 면했다. 하지만 사헌부가 다시 탄핵했다. 간관은 구성우, 오사충, 남재 등이다. 당시 사헌부 장관은 조준이었다. 조준은 이숭인을 미워했다. 조선건국 뒤 이숭인이 장살당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에 따르면, “처음에 정도전과 친구로 삼아 종유(從遊)한 지가 가장 오래 되었는데, 정도전이 후일에 조준에게 친밀히 하게 되어, 조준이 이숭인을 미워함을 알고서는 도리어 몰래 험담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태조실록] 1년 8월 23일)


당시 이성계파 언론의 선봉장이던 윤소종도 “이숭인의 뛰어난 재주를 질투하고, 또 이색이 이숭인을 칭찬하면서 자기를 칭찬하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갖은 방법으로 참소하고 헐뜯었다”고 한다. 이숭인은 윤소종의 국자시 동년이고, 모두 이색의 가르침을 받은 동문이었다. 그런데 윤소종은 소시부터 조준과 절친한 벗이었다. 어쨌든 이숭인은 이성계파의 주요 인물들에게 두루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조준은 이런 소문이 거짓이라고 부인했다. 조선건국 2년 뒤인 1393년, 당시 시중이었던 조준은 춘추관에서 고려의 사초를 보았다.


그런데 고려의 사관이었던 이행이 “윤소종이 이숭인의 재주를 꺼려서, 조준에게 알려 이숭인을 해치려고 하였다”고 쓴 기사를 봤다. 조준은 해를 가리키면서 “윤소종의 말을 듣고 이숭인을 해치려고 하였다는 것은 하늘의 해가 증명하고 있다”고 맹세했다.([태조실록] 2년 1월 12일) 반이성계파의 인물들은 이처럼 이숭인의 불운 뒤에 조준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숭인에 대한 공격에는 확실히 개인적 호오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정몽주의 연정 구상에 대한 급진파의 반발로 볼 수 있다. 이성계는 급진파와 온건파를 오갔다. 때로는 정몽주의 손을 들어주고, 때로는 조준·정도전의 편을 들었다.


1392년 조선건국 직전에도 정몽주 쪽에 섰는데, 그때 조준과 정도전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정몽주가 이들을 죽이려고 하는데도, 이성계는 정몽주를 제거하자는 이방원을 강하게 제지했다. 이때 이방원이 이성계의 뜻을 무시하고 정몽주를 죽이지 않았다면, 조준과 정도전은 조선건국도 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화살과 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역전의 용사였다. 하지만 500년이나 된 왕조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을 결행하자는 급진파의 간청을 선뜻 받아들이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회군 이후 조선건국에 이르는 5년간, 이성계는 오락가락했다.


급진파는 이런 이성계의 태도가 매우 불안했을 것이다. 1389년 9월의 연립정권 구상은 이성계가 정몽주 쪽으로 쏠린 명백한 징후였다. 명나라가 ‘불신의 역모’라는 입장을 밝혔으니 이성계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급진파의 위기감도 급격히 고조됐을 것이다.



문풍(文風)에 대한 경세(經世)의 반감



조선시대 성리학 사상의 본거지였던 소수서원.

1542년 주세붕이 지었다. 500년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을 일으킨 이성계파가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장착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런 위기감이 이숭인의 탄핵 상소에 깊이 배어 있다. 탄핵 사유는


첫째, 이숭인의 불효다. “부모상을 당한 후 3년이 경과하지 않고는 과거를 주관할 수 없는 것이 국가의 제도”이다. 그런데 산기상시(散騎常侍) 재임 중 모친상을 당했는데도 감시(監試)의 시관이 됐다. 3년상도 치르지 않았는데 문관의 조복(朝服)을 입고는 과거를 주관할 수 없자, 일부러 관직을 낮춰 상호군이 되어 과거를 주관했다.


이숭인은 우왕 8년(1382) 4월, 국자감시를 주관한 바 있었다. 그는 또한 “모친이 사망한지 겨우 백일을 넘기고는 육식을 예사로 했다. 이것은 인륜을 훼손한 것으로 탄핵감이다.


산기상시는 중서문하성의 정3품 문반직으로서 재상 아래로는 최고위직이다. 왕에 대한 간쟁과 봉박, 왕명과 문서 출납, 법제 제정과 관리임명에 대한 서경권(署經權, 서명권)을 가졌으며 과거의 시험관이 될 수 있었다.


대략 조선시대의 사간원과 승정원의 역할을 함께 한 것이다. 상호군은 중앙군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정3품 무반직이다. 품계가 같아도 무관은 문관보다 낮게 평가된다.

둘째, 이숭인은 사악한 자다. “성품이 간사하고 탐욕스러우며, 언행이 사악하고 아첨을 잘하는 자”다. 또한 무능한 자다. “나라를 경영할 재주가 없고 사려가 깊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글재주로 출세해 명예를 도둑질하면서 오랫동안 요직을 차지했다.” 그는 이인임 집권기에 그 일당이 됐다.


또한 우왕 8년(1382) 8월 한양천도를 전후해 이인임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임견미가 집권하자 그의 심복이 돼 불법을 자행했다.

셋째, 이숭인은 외교적 임무를 망각하고 사익을 추구했다. 이색과 명나라 사행 시 “장사치처럼 몸소 물건을 사고팔아” 국격을 손상시켰다. 그가 “비록 일곱 걸음 만에 시 한수를 짓고 입으로는 요순의 말을 읊어댈지라도 행실은 개나 돼지만도 못했으니 참으로 이른바 소인배 유생”이다. 이런 자를 시독(侍讀)으로 삼아 왕의 사부가 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넷째, 영흥군 문제로 종친을 모함해 부자·형제·부부의 윤리를 무너뜨렸다.

탄핵 내용을 보면, 본말이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탄핵 사유는 본래 영흥군 문제인데, 정작 맨 마지막에 단 한 줄뿐이다. 영흥군 문제는 단지 공격의 빌미가 됐을 뿐이다. 다음으로, 모친상 중 과거를 주관한 것 외에는 구체적인 범법행위가 없다. 탄핵이 공격을 위한 공격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이숭인에 대한 이성계파의 반감을 알 수 있다. 위선자이자 과대평가된 인물로서, 글재주는 조금 있지만 경세의 역량은 빈약하다는 것이다. 조준, 정도전, 윤소종 등 이성계파 인물들은 경국제세의 기풍이 강했다.


회군 후 조준의 방대한 국정 개혁안, 그리고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 펼쳐진 경륜은 하루아침에 가능한 게 아니다. 평생 정진을 거듭해 왔을 것이다. 그런 인사들의 눈으로 보면, 이숭인 등 이색파는 경륜보다 문풍이 과도하다고 느꼈음직하다. 그에 대한 경멸감을 드러낸 것이다.



탄핵을 둘러싼 정치적 함의


사헌부의 탄핵에 대해 창왕은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게 했다. 사헌부는 그날 밤 즉시 대졸(臺卒)을 시켜 이숭인의 집을 지키게 하고 담장을 뚫고 달아나는 이숭인을 체포했다. 담장을 뚫고 달아나는 행위는 재상급 관인에 어울리는 처신이 아니다.


더욱이 명분과 체통을 중시하는 사대부의 금도를 벗어난 것이다. 이숭인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결국 경산부(星州)로 유배됐다. 남쪽으로 유배를 떠나며 정몽주에게 시 한 수를 보냈다,

연래에 한층 눈이 내린 귀밑머리
질병이 또 침노하니 못 견디겠군
누구 집이 강남의 약을 알아서 비축했을까
늙음을 물리치는 영흥(永興)을 배워야 하겠는데
([도은집] ‘南行呈圃隱’)


자칭 영흥군이란 자의 거짓을 풍자한 시다. 이숭인은 그가 가짜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자, 이성계파의 중심인물인 정몽주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를 보낸 것이다. 정몽주는 정도전, 윤소종과는 달리 이색 그룹과도 계속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연립정권도 그런 상호 신뢰 위에서 성립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권근이 이숭인을 구원하기 위해 상소를 올렸다. 이성계파와 이색파의 싸움이 서서히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위화도회군 후 두 정파의 공공연한 권력투쟁은 없었다.


회군 직후 6월에 가장 먼저 우왕과 최영이 제거됐다. 다음으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회군파 내부에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조민수파가 창왕을 즉위시킴으로써 이성계파에 승리했다. 그는 이색의 지지를 받았다.


회군 직후 이성계도 군막에서 이색을 만났지만 지지를 얻어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색이 공개적으로 이성계파에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1388년 7월, 조준이 과격한 전제개혁 상소를 올리면서 두 정파의 대립은 불가피해졌다. 먼저 조민수파가 이성계파에 맞서 이인임의 복권을 기도했다. 하지만 조민수는 곧 축출됐다. 공식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격렬한 싸움이 있었을 것이다.

전면적이고 철저한 사전개혁이 추진되면서 정치적 긴장이 극도로 고조됐다. 이색은 개혁 자체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제한적이고 온건한 개혁을 지지했다. 사전(私田) 개혁을 둘러싸고 고려 정계는 양분됐다.


이색은 반이성계파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두 정파의 갈등은 조심스럽게 관리됐고, 정몽주에 의해 결정적 대립은 회피됐다. 이성계도 대중국관계의 불안 때문에 과감한 행동에 나설 수 없었다.


그런데 중국이 회군 이후의 정치적 사태를 ‘불신의 역모’로 규정짓자, 연정이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이성계파 내 급진파는 이 상황을 용인할 수 없었다. 이숭인에 대한 탄핵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첫 공세였다.


이색파에서 권근이 맞대응에 나선 것을 보면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라고 본 것이다. 권근은 당대 최고의 명문세족이자 걸출한 문인이었다.

​[출처]: 김영수 영남대학교 정외과 교수<조선왕조 창업비록> / 월간중앙, 201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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