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1회~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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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1회~ 5회]

구름에 달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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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 [Ⅰ회~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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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 [ 1회~  5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9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 [ 6회~1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40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 [ 11회~15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41


1.  400년 전 태평양 건넌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모험

​-사무라이는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7년 동안 4만1100㎞ 대장정 거쳐 쿠바에 도착…250년 뒤 조국의 개화 위한 ‘근대의 씨앗’ 역할


일본이 되살아난다. 잃어버린 20년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고 있다. 부활하는 일본이 화제다. 소니를 비롯한 일본 전통 대기업의 재기도 눈에 띈다. 그 바탕은 사무라이 정신이다. 집요하고 거칠 것 없는 승부사로서의 사무라이. 아직 세계 제조업의 부품과 소재·장비 등에서 타의 추종을 절대 불허하는 일본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400년 전, 조선이 아직 몽매에 젖어 있을 때 그들은 바다로 나아갔다. 태평양을 건넜고, 로마의 교황을 알현했으며, 유학생을 보냈다. 바다에 실려온 바람으로부터 그들은 세상 변화를 읽었고, 세상의 광대함을 깨달았다.


일본은 그로부터 힘을 얻어 개화의 꽃을 피웠다. 지금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넓음과 개방의 효용을 깨달아 혁신으로 무장할 때 그는 살아남는다. 그렇지 못하고 좁은 내부로 시선을 돌릴 때 자기부정과 암울한 내투(內鬪)에 봉착한다. 일본이 가로질러 세계로 나아가려 했던 일본의 개방적인 근대사를 가로질러 가보자.


 

세계적 휴양지로 꼽히는 카리브해에 위치한 쿠바의 아바나 항구의 스페인 시대  해안진지 엘 모로.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명물 말레콘(‘제방’의 스페인어)이 있다. 엔트라다 운하(Canal de Entrada) 건너편의 이런 말레콘 덕에 만들어진 공원에 새벽 햇살을 향한 채로 한 남자가 서 있다. 그는 청동으로 만들어져 먼 바다의 항로를 주시하고 있다. 바닥에는 ‘로마까지 8700㎞’라고 쓰여 있다.

인생은 기억이고 역사는 기록이다. 필멸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때로 불멸을 꿈꾸며 시간의 틈을 만들어 기억과 역사를 적는다. 혁명으로 박제화해 영락하는 이 도회의 버려진 담벼락에도 어김없이 혁명 구호를 적어대는 쿠바인들은 공원에 세계적 명사들의 동상이나 흉상을 세웠다.

공원 쪽 해 뜨는 방향으로 걷다 보면 인도의 시인 타고르,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20세기 초 페루의 사상가 호세 마리아테기의 흉상이 차례로 이어진다. 주변의 이런 흉상들과는 다른 동상이 이어 눈에 띈다. 우뚝한 높이에 울타리로 둘러져 있다.

커피색 현지인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무라이의 동상이다. 하카마(袴)에 진바오리(陣羽織)를 걸쳐 여느 초상화에 등장하는 영락없는 사무라이 복장이다.

허리띠에 쑤셔 넣은 일본도를 왼손으로 잡고 부채를 쥔 오른손은 동트는 쪽 로마를 가리키고 있다. 새벽 하늘을 배경으로 부채와 칼이 대각선의 긴 선으로 이어져 있다. 동상의 이면 바닥에는 또 ‘센다이(仙台)까지 1만1850㎞’ 표시가 새겨져 있다. 대체 누구일까?

이 사무라이는 어떻게 태평양을 건너 쿠바까지 왔을까? 청동 설명판을 읽으니 호기심이 동한다.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가신으로 주군의 명령으로 이곳에 왔다. 1614년에 아바나까지 온 사무라이가 있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뜻밖의 장소에서 충격적인 조우를 했다.

마사무네의 가신이라면 조선에도 왔을 개연성이 있다. 임진왜란 때 우리의 적장으로 현해탄도 넘었으리라. 이리저리 걸으며 일본의 무장(武將)이 쿠바까지 오는 동안 당시 조선은 어땠을까를 생각하며 흥분을 달래본다.

세상에는 이야기가 널려 있다. 조선에 왔던 사무라이가 아바나까지 오다니 그 시절 멀리도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한 만남이 여행이고 인생이다.

그는 1614년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떠나 멕시코만의 해류를 타고 아바나로 들어와 한 달여를 머물다 대서양으로 떠났다고 적혀 있다. 이 사무라이의 이름은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常長)다.

2005년 동상을 세운 센다이육영학원 히데미쓰(秀光)중·고등학교의 설명에 따르면 학원창립 100년을 맞아 국제화가 이슈인 21세기 일본과 세계의 장래를 책임질 젊은이의 육성, 나아가 국제사회 이해교육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동판 설명서를 좀 더 읽어보자. “쓰네나가는 센다이의 개부자(開府者), 번주 다테 마사무네의 명령으로 대항해시대에 일본이 유럽에 파견한 외교사절단 대사로 대서양을 건너는 도상에 1614년 일본인으로 처음 쿠바의 땅을 밟았다.” 해외를 향한 마사무네의 야심찬 기개와 미지의 세계에 도전한 쓰네나가의 용기를 영원한 귀감이라고 치켜세우고 그 꿈과 로망을 현창(顯彰)하는 것은 개부 400주년을 맞는 센다이 인의 자랑이라고 적고 있다. 



바다를 벗하거나 싸우며 살았던 그들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는 1492년 콜럼버스의 지리상 발견이 촉발한 시대적 흐름이다. 그가 ‘인도’라고 믿고 도착한 땅이 바하마제도이며 그의 네 번에 걸친 항해는 쿠바 섬을 중심으로 이어진다. 중국은 그에 앞서 15세기 초 명나라의 정화함대를 7차례에 걸쳐 동남아시아·인도·아라비아반도·아프리카까지 보냈다.

이런 노력에도 신대륙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 뒤 해금정책을 펴면서 해양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나 유럽의 해양민족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교역을 하다가 강력하게 등장한 오스만 제국을 피해 해로로 대서양을 건너고 희망봉을 돌아 아시아로의 대항해 시대를 연다.

황금의 땅 ‘엘 도라도’를 찾아 정복, 살인의 살벌한 전쟁을 벌인다. 원주민들이 노예로 전락하거나 독한 병균으로 죽어나가자 아프리카에서 ‘검은 다이아몬드’로 불리던 흑인 노예들이 대거 유입된다. 한바탕 인종 청소를 겪은 쿠바는 에스파니아 식민지 중 가장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변한다.

지리상 발견으로 유럽인들의 지리상 발견으로 세계의 바다를 휘젓고 다닌 지 한 세기가 다 돼 이 사무라이는 일본의 동북지방 센다이를 출항해 석 달 만에 쿠바의 아바나에 도착했다. 센다이 해안에 밀려오던 거센 태평양의 파도와는 다르게 하루에도 12번씩 변하는 카리브의 물빛과 태양빛 아래 이국에서 이들은 분명 새로운 꿈을 꿨으리라.

이미 대서양과 카리브해를 휘젓고 다니며 세계를 일주한 유럽의 해양민족에 비하면 1세기나 늦게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에스파니아와 로마까지 간 사실이 부각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떨까? 대항해시대는 강국들의 각축전이 전 지구적으로 펼쳐지던 시대였다. 따라서 당시의 항해는 일본도 자체적으로 선박을 건조하고 자국인을 승선시켜 당당히 대항해시대의 일원이 됐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낭만적 시선을 거두고 우리의 내부로 가보자. 이 사무라이가 태평양을 건너던 1613년은 조선으로 치면 광해군 치세다. 1611년은 전쟁으로 불탄 경복궁 대신 창덕궁이 지어져 정궁으로 자리 잡는 시기다. 국란의 상처를 추스르던 때다.

우리 해양 역사 기록을 찾아보자. 조선통신사를 제외하면 조선의 어부가 중국·일본·베트남·필리핀에 표류하고 돌아온 이야기는 있어도 조직적으로 대외 협력 차원에서 바다를 건넜다는 이야기는 없다.

바다는 조선의 영토가 아니었다. 조선은 표류했지만 일본은 태평양을 건넜다. 조선의 배 어느 한 척도 태평양 바다로 나갔다는 기록을 찾을 길이 없다. 조선은 내부의 문제 해결에만 모든 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일본의 중앙권력이 아닌 일개 번의 영주가 서양식 범선을 건조하고 일본인 포함 180여 명을 승선시켜 태평양에 진출했다. 시선과 호기심·모험심, 더 나아가 가슴에 품은 의지의 차이가 아니고 무엇이랴. 한 일본 사무라이를 조명하면서 우리는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의 틀에 갇혀 한 발짝도 넓게 보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의 사고방식 말이다. 적어도 제대로 된 국제적 소통을 하고 않았느냐를 진지하게 반성해 볼 시점이다. 성찰하지 않는 민족에게 미래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중국은 담을 쌓고 음흉한 모략을 키워왔지만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섬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바다를 무대로 풍파와 벗하거나 싸우며 살았다. 노회한 모략가와 칼 든 사무라이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존해야 할까.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이 충돌하는 한반도의 선택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일본은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왜구(倭寇)라는 이름의 총본산지로 동아시아의 바다를 넘나들었다. 선박의 보유량으로 따지는 현재의 해운력에서 일본은 그리스·중국에 이어 세계 3위의 해운국가다. 



노부나가가 되고 싶었던 애꾸눈 장수  


 

1. 세비아 근처의 코리아 델 리오에는 ‘하폰(Japon)’ 등을 성(姓)으로 하는 사람 약 7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사진은 유럽에서 셋째로 큰 세비아 성당 야경. / 2. 쿠바의 아바나 공원에 있는 하세쿠라 쓰네나가 동상



한국도 한때 세계 5위까지 올랐다가 2017년 현재 미국 다음의 7위에 자리 잡았다. 해운 분야에서 일본은 소리 없이 강하다. 그리스라는 거품과 중국이라는 거대 공장 국가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세계 1위나 마찬가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는 해군력의 우위에서 비롯했다. 굳이 분류하자면 일본인은 해양민족이다.

지중해 해양민족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우스]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보면 일본의 왜구를 떠올리게 한다. 해양민족은 노를 저어 세상 끝에 다다르려 했다. 섬이라는 지정학적 특성에 중국과 조선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동아시아에서는 특이한 문명권에 속한다. 사무엘 헌팅턴이 지적했듯이 일본은 독자 문명, 어쩌면 유럽문명에 가까울 수 있다.

한국이 처음으로 태평양을 건넌 때는 1952년 한국 화물선 고려호가 처음이다. 박옥규 제독이 선장이었다. 그는 1949년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전함 백두산 호를 미국 뉴욕에서 인수해 진해항까지 몰고 왔다. 일본은 1613년 자체 제작한 범선 갈레온을 몰고 태평양을 건넜다.

 메이지 유신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스승으로 알려진 가쓰 가이슈(勝海舟)는 1860년 증기선 칸닌마루(咸臨丸)호를 타고 150여 일에 걸쳐 태평양을 왕복했다. 증기선으로는 일본 최초다. 일본의 근대는 바다를 넘어간 사내들의 꿈으로 열렸다.

일본의 근대 개화는 운 좋게 이뤄지지 않았다. 자신보다 뛰어났던 문명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 스스로를 낮추는 학습으로 개화를 이뤄갔다. 우리에게는 괴로운 일이었지만 틈만 나면 바다를 건너왔다. 격렬한 전쟁을 치른 두 나라의 운명은 서서히 바뀐다. 우리는 안으로 움츠러들었고 그들은 먼바다로 눈을 돌렸다.

다테 마사무네는 천하제패의 야망을 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버금가는 실력의 전국시대 무장이다. 이에야스 사후에는 최대 실세로 꼽혔지만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의 신하가 된다. 영지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해외 무역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막부가 스페인, 멕시코와의 협상에서 부진하자 선교사 루이스 소테로의 권고를 받아 움직인다. 마사무네는 곧 오슈왕(奧州王)의 자격으로 사절을 파견한다. 센다이를 멕시코와 무역 거점으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조선이 일본에 왜 뒤졌을까. 이유는 한둘이 아니지만 먼저 꼽으라면 유럽문화를 누가 먼저 수용했느냐는 점이다. 일본은 유럽과의 교류로 인해 생긴 시대를 ‘남만문화(南蠻文化)의 시대’라고 한다. 유럽과의 접촉 시대는 철포의 전래(1543년)와 에스파니아 선교사 사비에르의 도래(1549)에서부터 쇄국(포루투갈인 도래금지 1639)까지 이어진다.

그중 일본인이 유럽에 적극 진출한 덴쇼사절단[(天正遣使節), 1582]부터 이에야스의 금교령까지를 일컫는다. 비록 구체적인 성과는 적었으나 견구사절단(遣歐使節團)은 남만 문화 시기의 적극적 문화접촉에 방점을 찍는 사건의 하나이다. 유럽의 중심을 다녀온 자신감은 쇄국정책을 펴는 와중에도 불씨로 남아 있었다. 이 사절단의 기획 역할을 맡은 사람이 마사무네다.

그가 사절단을 파견하던 시점인 1613년은 아직 전국이 완전 통일되기 전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이에야스의 동군은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와 대치하고 있었다. 마사무네는 현실적인 정치적 감각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당대 최고의 실력자와는 늘 같은 편이었다. 시대가 바뀌자 그는 이에야스의 동군으로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를 거치며 비중 있는 전국 무장이 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이와데야마(岩出山)성을 출발해 나고야(那古野)에서 출병 준비를 하다가 1593년 조선에 출병한다. 1593년 4월 부산에 상륙, 이어서 6월에 진주성을 공략한 뒤 9월에 나고야로 돌아왔다. 조선 출병 시 여타 군대와는 다른 화려한 군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들은 심지어 ‘멋쟁이’를 의미하는 일본어 다테모노(伊達者)라는 말의 어원이 되기도 한다.



“마음속 달을 앞세우고, 속세의 어둠을 밝혀가리라” 


다테 마사무네의 군이 출병할 때 화려한 행군을 보려고 인파가 운집했다. 마사무네는 애꾸눈 이었다. 따라서 그런 콤플렉스 때문에 화려함을 즐겼다는 설도 있다. 그의 캐릭터는 한자로 ‘독안룡(獨眼龍) 장수’로 불린다.

아울러 센다이번(仙台蕃)의 개창자로서 이곳을 대표하는 동북의 왕으로 현재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짧은 조선 출병 중에 진주성 2차 전투에 참여했고 남해안 왜성 축조를 적극적으로 하다가 본국으로 돌아왔다.

다테의 군대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부터 네 그루의 와룡매(臥龍梅)를 가지고와 자신의 영지에 식재한다. 와룡매의 자목 한 그루는 한일우호의 상징으로 1999년 남산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심겼다.

다테 마사무네의 중요한 치적은 센다이번의 개부(開府)와 게이초견구사절단(慶長遣歐使節團)의 파견이다. 스스로 운영하는 지역에서 집요하게 구축한 세력, 개인적으로 품은 자질로부터 우러나오는 리더십과 용기 등에서 그가 일찍이 군왕, 나아가 황제로 성장할 만한 인물로 부상했다는 점을 지적했던 세간의 평가도 제법 있다.

게이초 6년(1601년) 그는 센다이 성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이어 다테 마사무네를 센다이라는 번의 번조(藩祖)로 탄생했다. 미곡 수확량(石高) 62만석은 카가(加賀) 마에다(前田), 사쓰마(薩摩) 시마즈(島津)에 이어 전국 제3위였다.

센다이 성은 산성으로 천연의 지형을 이용한 방어요새이며, 센다이의 건설은 연인원 100만 명이 동원된 대공사였다. 번 안에 48곳의 저택을 두고 신하들을 배치했다.

히데요시가 요시노(吉野)에서 시회(詩會)를 열고 무장들이 각각 시가를 읊을 때 마사무네가 단연 돋보였다고 한다. 와카(和歌)에 정통하며 문재(文才)가 아주 빼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재주를 두고 일본 역사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단편 소설 [마상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다]를 통해 이런 평을 남겼다.

 “역사에 나오는 무장(武將)의 문학작품으로는 고대 중국의 조조(曹操)에 필적할 수준”이라고 말이다. 마사무네가 만년에 남긴 [醉餘口]이다. 음주 후의 호기로운 외침이다.

“馬上少年過 世平白多 殘軀天所赦 不樂是如何(말 위에서 젊음을 보내며 세상을 평정하니 백발만 남았다. 하늘이 준 여생이 남아 있다면 즐기지 않으면 이를 어쩌리.)”

다테 마사무네는 또 세상을 등지는 말, 즉 사세구(辭世句)를 이처럼 남긴다.

“한 점 흐림 없는 마음속 달을 앞세우고, 속세의 어둠을 밝혀가리라.”

다시 태평양 건너 쿠바에 갔던 일본 사무라이 이야기다. 하세쿠라 쓰네나가(1571~1622)는 에도시대 초기 무사, 센다이번(仙台藩)의 다이묘(大名) 다테 마사무네의 가신이었다. 임진왜란에 종군해 조선으로 건너가 아시가루(足輕), 철포조장(鐵砲組頭)으로 활약했다.

다테가(家)가 조선에 출병한 사실은 확실하지만 마사무네의 참전 여부는 불확실하다. 1500~3000명의 병력이 다녀간 것으로 확인된다. 대신 하세쿠라는 진주성 2차 전투에 최 하급 무사 이시가루 철포조장으로 참전했다.

전투에서의 상세한 역할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부대는 전쟁의 수습 차원에서 남해안 일대에 막부의 재정적 지원 없이 자발적으로 왜성을 축성했다는 사실만이 전해진다.

이들은 왜 큰 바다를 건너려고 했던 것일까. 2011년과 1611년이면 딱 400년 차이다. 2011년에는 동일본 대지진이 닥쳤고, 그 400년 전인 1611년 12월에는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규모의 게이초 쓰나미(慶長大津波)가 센다이번를 강타했다.

이때의 재난이 유럽으로 사절단을 보내려고 했던 당시 일본의 움직임과 관계가 있으리라는 추정이 나온다. 지진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대외통상과 외교문제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말이다.
 

문화·기술·정보·인적 교류도 불러일으켜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견구사절단의 태평양 왕복(1613~1620년) 항로


마사무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올렸다는 보고서인 [슨뿌끼(駿府記)]에는 이 지진으로 센다이 지방에서만 500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울러 당시 일본의 해안을 탐색 중이던 외국인의 기록에도 당시의 재난 참상이 규모와 정도에서 아주 대단했음을 묘사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 같은 대형의 재난, 1611년의 게이초 쓰나미가 발생한지 불과 2주 후에 마사무네는 선박 건조와 게이초 사절 파견의 구상을 밝히면서 그 2년 후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로 승선해 쓰끼노우라 항구에서 태평양을 향해 닻을 올렸다. 따라서 마사무네가 주도한 사절 파견은 당시에 일본을 참혹하게 덮쳤던 대형 재난과 분명히 상관관계가 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사절단에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선택한 이유도 궁금해진다. 아마도 임진왜란 때 침략군의 일원으로 출항을 한 경험, 게다가 이국인 조선에 체류했다는 사실, 또 최하급 무사 총포조장으로서 일정한 병력을 통솔하는 능력이 있다고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패했을 때의 후유증을 감안해 상급 가신이 아닌 하급 무사 하세쿠라가 뽑혔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모두 사료의 부족으로 진상을 알기는 어렵다.

번주 마사무네와 하급 무사 하세쿠라가 추구한 대외 무역과 외교는 물자의 유통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문화·기술·정보·인적 교류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것은 나라가 부흥하는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다. 어쨌든 400년 전 센다이의 무사들은 대형 재난의 아픔을 뒤로 하고 사절단을 구성한 뒤 화려하기 짝이 없던 ‘다테모노’ 패션으로 세계의 무대에 나섰다.

16세기 전국시대 내전을 겪은 일본은 드디어 통일을 이룬다. 센다이의 마사무네는 도쿠가와 막부 성립 후 3대 유력 영주로 떠오른다. 그는 이에야스로부터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 스페인 그리고 로마에 있는 바티칸으로 사절단을 보내는 프로젝트를 명 받는다.

하세쿠라는 스페인 선교사 루이스 소테로와 함께 특별 사절단으로 임명된다. 이 사절단의 목적은 스페인과 무역 협정을 맺고 로마의 교황 바오로 5세와 스페인 국왕 펠레레 3세를 접견하는 것이다. 후에 산 후안 바우스티스타호로 불리게 되는 ‘다테마루’란 대형 갈레온 선이 센다이의 조선소에서 만들어진다.

이 배는 당시 일본 최대의 갈레온선으로 배수량 기준 500t에 전장이 55m다. 1613년 멕시코를 향해 출항한다. 약 180명이 승선한다. 구성인원은 10명의 막부 사무라이, 12명의 센다이 사무라이, 그리고 120명의 상인과 선원이다. 40여 명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인이 동승한다.

배는 순풍과 환류를 타고 90여 일 만에 북태평양을 횡단하며 순항한다. 이어 멕시코의 아카풀코에 성공적으로 도착한다. 그곳에서 육로로 멕시코시티를 경유해 베라크루즈항까지 간다. 1614년 베라크루즈에서 하세쿠라와 그의 사절은 스페인 함대로 갈아타고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에 도착한다.



도해(渡海)의 꿈, 일본의 무장 


하세쿠라는 사무라이 검과 활로 무장한 사절단을 거느리고 스페인의 세비아에 입성해 세비아의 왕궁 알카사르에 머문다. 그곳에는 지금도 그가 세비아 주지사를 만난 방이 남아있다. 마사무네가 보낸 서한도 아직까지 안전하게 보관 중이다.

1614년 12월 하세쿠라는 마드리드의 국왕 펠레페 3세에게 향한다. 그는 마드리드의 왕궁에서 펠레페 3세를 알현한다.

복장은 비단의 품격 넘치는 ‘다테모노’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날 끝에 놓고 스치기만 해도 부드러운 종이가 잘린다는 사무라이 검에 대한 기록도 남긴다. 사절단은 스페인 전체의 환영을 받고 현지인들의 큰 화제로 떠오른다. 하세쿠라는 국왕의 개인 사제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펠레페 프란시스코 하세쿠라’라는 세례명도 받는다.

사절단은 8개월을 스페인에 머물다가 교황 바오로 5세를 만날 수 있는 이탈리아로 향한다. 하세쿠라는 라틴어로 된 금박까지 입힌 서한을 교황에게 전한다. 멕시코와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일본에 기독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고 귀족의 작위를 받는다.

세비아 근처에 있는 코리아 델 리오(Coria del Rio)에는 ‘하폰(Japon)’ 또는 ‘자폰(Xapon)’을 성(姓)으로 하는 사람 약 700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을 400년 전에 스페인에 정착한 사무라이의 후손이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한다.

하세쿠라는 해외 순방을 마치고 멕시코와 필리핀을 거쳐 7년 만에 귀국한다. 유럽으로의 사절단은 그 후 1862년까지는 없었다. 200년 이상 이어진 쇄국정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250년 뒤의 개화를 위해 아주 중요한 ‘근대의 씨앗’을 심어둔 셈이었다.

90여 년 전 쇼와(昭和) 초기 오타니(大谷)초등학교 아사노 스에지(淺野末治) 선생이 이 지방 땅에 묻힌 하세쿠라 쓰네나가에 착안해 아이들이 그의 위업을 배우도록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노래]를 만든다. 일본의 어린이들은 학예회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드넓은 세상을 꿈꾼다. 400여년 전 아주 먼 바다로 나갔던 제 조상들을 생각하면서다.

노래를 부르는 일본 어린이들의 뇌리에는 자연스레 하세쿠라가 건넜던 태평양의 바람과 파도가 펼쳐질 것이다. 가사는 어려운 한자를 썼지만 그의 위업을 찬양한다. 당시 사절단을 ‘붕익도남(鵬翼圖南, 큰 새가 남쪽을 향해 웅비한다는 뜻)’이라 칭하고, 그의 항해를 ‘팔중(八重)의 조로(潮路)’라 지칭했다. 거대한 뜻이 담긴 아주 어려운 항해라는 뜻이다.

당시의 그는 달뜨는 포구, 쓰키노우라(月浦)를 떠났을 것이다. 돛을 달고 노를 저어가는 뱃전에는 그저 구름과 물뿐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서럽고 그리워 400년 전의 그들은 망망하기 짝이 없는 구름과 물을 넘어 7년의 세월을 견디며 머나먼 4만1100㎞의 여정을 펼쳤던 것일까.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독서회 [고전만독]을 이끌고 있으며,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주요 관심 사항은 대항해시대 문명의 소통 양상이다. 독서와 여행으로 문명과 바다가 펼쳐진 세계를 일주할 기획하고 있다.
 



2. 마네무사와 세계의 만남, 견구사절단(遣使節團) - “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꿔라”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중화 그늘’에서 벗어나려 한 용기 멕시코·쿠바·스페인·로마

… 17세기 초 요동치는 세계가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의 복원선. 배수량 500t, 길이 50m로 복원돼 ‘산 후안 뮤지엄’ 외부 도크에 전시돼 있다.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드넓은 세계로 나아갔다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견구사절단(遣使節團)은 명목상 통상교섭과 선교사 파견 요청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의 꿈을 싣고 떠나 먼 바다 건너에 희망의 씨를 뿌리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흔적은 250년 뒤 이탈리아를 찾아간 이와쿠라 사절단의 눈에 띄어 곧 꽃을 피웠다. 견수사(遣隋使)·견당사(遣唐使)를 보내던 일본은 이로써 자신의 활동무대를 극적으로 넓힐 수 있었다. 조공과 책봉의 중화질서를 벗어나 새로운 문명권에 능동적으로 다가간 계기였다.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중화의 그늘을 벗어난 일본과 그늘에 안주한 조선은 운명이 갈린다.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했던 ‘돈키호테’라는 기사가 있다. 당시의 스페인은 그 [돈키호테]를 읽고 있었다. 사절단이 방문할 당시 스페인 국왕 펠레페 3세도 [슬픈 몰골의 기사] 애독자였는지 한 말씀을 남긴다. 어느 벤치의 젊은이가 깔깔 웃고 있는 걸 보고는 “저 친구는 미쳤거나, [돈키호테]를 읽고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 1권을 집필했으나 판권을 미리 팔아버려 10년 동안 궁색한 생활을 하다가 2권을 펴낸 때다. 10년 만인 1615년에 2권을 냈을 때이니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스페인을 왕복할 때 세르반테스는 마지막 퇴고를 하고 책을 출간 중이었던 셈이다. 하세쿠라는 펠레페 3세를 일본 오슈왕의 대사 자격으로 만난다.

스페인에서 로마로 눈을 돌려보면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지동설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다가 교황청에 소환당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때 콜럼버스가 찾아 헤매던 동양의 일본이란 나라의 칼 찬 사무라이들이 로마에 나타났다. 교황청이 권위를 찾아야 하는 시점에 맞춰 나타난 고마운 존재였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이국적인 사절에게 입시식(入市式)이라는 행사까지 성대하게 치러준다.

세계는 요동치고 있었다. 스페인은 레콩키스타(이슬람에 대한 실지 회복운동)로 1492년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건설에 나서면서 부강해졌다. 1571년 세르반테스도 참전한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물리치고 제해권을 잡는다.

그러나 1588년 영국과의 칼레 해전에서 무적함대 아르마다가 패하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는다. 스페인이 17세기 초반 세계 최강국에서 서서히 물러나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세계의 ‘표준’을 만들던 대단한 국가였다. 그런 제국에 하세쿠라 일행이 간 것이다. 마드리드에 입성한 때는 1614년 12월, 당시 제국의 수도는 눈에 덮여 있었다. 일본은 그 이듬해 ‘세계의 서울’ 로마에 간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동북 오슈왕다테 마사무네와 그의 가신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배운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일본 동북지방의 시골뜨기들은 바다 건너 이국땅 조선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도했고, 그로써 대외교섭 능력과 타 문명에 대응하는 책략을 깨우친다.
 


너울뿐인 태평양 너머가 무엇이 두려우랴



▎‘달 뜨는 포구’라는 뜻의 쓰키노우라,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의 출항지다.


그들은 규슈(九州)나 긴키(近畿) 지방의 서부 다이묘들에게는 한반도 남부 낙동강(김해 죽도)에서 왜성을 쌓으며 축성술을 배운다. 그들이 배운 최고의 가치는 해협을 건넜던 자신감이었다. 견구사절단의 부사(副使)로 하세쿠라가 발탁된 것은 이러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참혹한 전쟁의 땅 조선도 다녀왔는데 파도와 너울뿐인 태평양 저 너머가 무엇이 무서웠을까?

다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명나라 정화(鄭和)는 15세기 초반 인도양을 건너 아프리카까지 7차례 원정을 떠난다. 주목적은 불안정한 초창기 정권의 강화 차원이다. 그가 타고 간 배의 실제 크기는 알쏭달쏭하다. 그러나 중국의 주장에 따르면 목조선의 길이가 역사상 가장 긴 150m라고 한다. 8000t급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동원된 연인원은 수십만 명에 이른다.

콜럼버스의 첫 항해는 이에 비해 소박하다. 세 척의 배 중 제일 큰 배인 산타마리아호가 233t에 길이 30m 내외이고 동원된 인원은 120명이다. 그는 막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한숨을 돌리고 있던 이사벨 여왕을 설득해 투자를 받는다. 정화의 함대에 비하면 초라하고 허름한 범선이다.

단순 비교이기는 하지만 15세기까지만 해도 동서양의 힘의 크기는 아직 동양 쪽에 기운다. 문제는 대항해시대 이후에 힘의 균형이 바뀌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확실히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일대의 사건이다. 1492년의 일이다.

1613년 일본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주군 다테 마사무네의 명을 받아 길고 긴 항해를 시작한다. 그의 배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는 배수량 기준 500t에 전장이 55m다. 단 한 척의 항해였지만 울림은 크다.

쓰네나가는 주군의 꿈을 안고 거친 바다로 나섰다. 폭풍우가 몰려와 배가 요동이라도 칠라치면 천주를 향해 기도를 해가며 신산고초의 항해 끝에 3개월 뒤 태평양을 건너고 신세계에 당도한다.

정화의 대함대는 그 뒤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명나라의 위상을 세우고 아프리카에서 진귀한 동물인 기린·코끼리·사자 따위를 싣고 돌아오면서 사람들의 눈요기에 기여는 했지만 그 뒤로 해금정책을 펴며 바다로부터 멀어진다. 그들의 목적은 권력의 과시와 안정이 전부였다. 이때부터 명나라는 바다의 세계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러나 지구가 둥글다고 확신한 모험가 콜럼버스는 신대륙에 닿는다. 바하마제도에 도착해 서인도로 착각하고 ‘지팡구’라 불리던 일본에 닿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네 차례 더 대서양을 건너온다. 그가 이룩한 세계사적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황금을 찾기 위한 ‘폭력의 세계화’, 바야흐로 그 시발점이었다. 부지런히 세계를 돌아다닌 해양세력에게는 축복이 쏟아진다. 이질적인 인간들을 순진하게 접대한 사람들은 노예로 전락한다. 세계는 새롭게 편집되기 시작하고 대륙 간 우열이 가려지기 시작한다.

과시형 해상활동, 욕망의 신대륙 발견, 꿈을 찾아 드넓은 세상으로 떠난 항해…. 이 세 가지 도전을 보면서 조선은 어느 유형이었을까를 생각해본다. 아마도 중화의 명나라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세쿠라가 활동하던 시기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조선통신사를 보낸다. 소중화의 과시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우리가 문명을 전해준 그들은 벌써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음에도.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 선명(船名)의 유래는 세례자 성 요한과 관련이 있다. 1617년 3월 13일 멕시코의 에스파냐 총독으로부터 스페인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등장하는 이 선명은 나중에 배 건조에 참여한 스페인 사람 비스카이노 일행과 다테 마사무네가 에도에서 만나던 날(1611년 6월 24일)이 마침 세례자 성 요한의 명절이어서 얻은 것으로 보인다.

다테 마사무네는 스페인 비스카이노와 막부의 지도 협력을 얻어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를 건조했다. 조선에 필요한 재목은 모두 센다이 번 지역에서 벌목해 외판과 갑판에 사용했다. 히가시번사고(東藩史稿)에 의하면 목수 800명, 대장장이 600명, 잡역 3000명의 인력을 쓰고 약 45일 걸려 건조한다. 2년 전에 발생한 대형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은 번의 경제 활성화에 이 선박의 건조가 역할을 했다고 한다.

1990년에 펼쳐진 복원 운동에 따라 당시 항해 선박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가장 높은 중앙의 마스트는 정산공치가기록(貞山公治家記)으로 따지면 32.43m다. 위 갑판 주변은 지름 90㎝이다. 전체 길이는 48.80m에 이른다. 재료는 미송(美松)을 쓰고 있다.

출항지 쓰키노우라(月浦)는 우리식으로 풀면 ‘달 뜨는 포구’다. 오시카(牡鹿) 반도의 중간 부근이다. 고이데지마(小出島)가 방파제로 작용해 태풍이 와도 그다지 파도가 일지 않는다. 수심이 충분하며 아울러 아메리카 대륙에 직접 이르는 장대한 구로시오(黑潮) 해로가 앞바다까지 다가온다. 태평양 항해의 출범지로서 최적의 모양새다.

1565년 마젤란에 이어 세계 일주에 성공한 스페인 신부 안드레스 데 위루다네타가 필리핀의 세부 섬부터 북동무역풍을 피해 북위 40도 근처까지 북상했다가 구로시오 해류를 타고 아카풀코에 다다랐다. 이로써 아카풀코와 일본 근처의 태평양 해역 사이 항로가 열렸다.

쓰키노우라에서 출범한 산 후안 바우티스타도 이 항로로 태평양을 왕복했다. 이시노마키시 와타노하(渡波)에서 가자코시고개(風越峠)의 터널을 쭉쭉 뻗은 삼나무 사이로 바다를 향하며 산길을 달린다.

언덕 곳곳에는 애기동백 꽃이 빨갛게 피어 있다. 언덕을 내려가서 모모노우라(桃浦) 어항을 지나 돌출한 끝에 쓰키노우라가 있다. 태평양을 향해 남동쪽으로 뻗은 오시카 반도의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가면 견구사절단이 출항한 쓰키노우라 입구가 나온다.

안내판에 등장하는 문구가 심상치 않다. ‘남만(南蠻) 우물….’ 스페인 사람 비스카이노 일행이 이 우물을 마시며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400년이 넘은 우물은 그저 흔적뿐이다. 인적마저 드물었다. 포구 바깥쪽 섬들이 자연방파제 역할을 해 파도는 잔잔하다.

하지만 이 허름한 어항이 강력한 기운을 가진 역사의 산실임을 깨닫는다. 우물을 지나 해변이 끝나는 지점의 벼랑길을 오르면 ‘支倉六衛門常長解纜地碑’라는 비석이 서 있다. 



‘달 뜨는 포구’에서 닻 올린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 



▎도고 헤이하치로는 일본 합함대사령장관으로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했다



비문은 도고 헤이하치로(東平八)의 휘호다. 1922년에 건립했다. 메이지 일본 해군을 이끌고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를 격파한 그도 ‘희망을 찾아 바다로 나간 땅’으로 이곳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람(解纜)’이란 닻줄을 풀다는 뜻이다.

나는 오히려 온몸을 칭칭 휘감았던 강력한 사슬을 풀어낸 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습과 인습의 사슬을 벗어던지고 해양으로의 도전과 모험을 향해 스스로 탈각(脫殼)한 당시의 일본을 떠올렸다.

1613년 10월 28일 휘영청 보름달 빛을 받아 쓰키노우라에서 돛을 올린 지 3개월 뒤 산 후안 바우티스타는 태평양을 넘어 아카풀코에 도착한다. 상투를 틀고 칼을 찬 사무라이들이 아카풀코에 상륙했다.



▎러일전쟁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의 휘호.


멕시코와의 교역만을 바라는 도쿠가와 막부와 다테 마사무네의 다른 목적, 엇갈리는 소테로와 비스카이노의 말. 당혹스런 멕시코 부왕(副王: 현지 총독 격)은 일본의 태평양 진출을 문제시해 산 후안 바우티스타의 귀국을 금한다. 그리고 일본인과 멕시코인 사이의 유혈 소동이 발생한다. 무사히 끝났지만 사절 일행은 검을 몰수당한다.

아카풀코 충돌사건의 보고를 받은 멕시코 부왕은 재빨리 “일본인에게 위해를 가한 자는 처벌한다”는 포고를 내지만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사절 일행은 검을 빼앗겼다. 대우 개선의 보증과 함께 하세쿠라 등 10명 정도의 상위 인물을 제외하고 귀향 때까지 무기를 맡겨야 했다.

일행은 이어 멕시코에서 쿠바의 아바나를 거쳐 스페인에 상륙한다. 세비아에 있는 알카자르 궁전은 사절단이 묵은 최고의 숙소였다. 유럽에서 이 사절단은 어디에서나 ‘일본 최초’를 기록했다. 스페인에서의 투우 관람, 기상 악화로 잠시 들른 프랑스에서 알몸으로 요에 누워 잔 일도 모두 ‘일본 최초’였다.

코를 푸는 데 수건을 사용하는 프랑스인들은 화지(和紙)로 코를 푸는 사절단의 종이를 얻으려고 소동도 일으킨다. 늘 젓가락을 지참하고 서양요리를 먹었다. 젓가락으로 먹은 서양요리의 맛은 어땠을까. 이색적이고 다양한 세상을 봤을 뿐 아니라 유럽에 동양의 매력을 발산하고 다녔던 셈이다.

사절 일행이 직접 교섭선인 스페인 국왕이 있는 마드리드를 향해 가다가 세비아에서 환영을 받고 있던 때 일본에서는 막부가 그리스도 교인을 국외로 추방하는 처벌을 단행했다. 신망이 높았던 그리스도교인 다이묘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을 포함한 많은 선교사와 일본인 신자 148명을 마카오와 마닐라로 추방하고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없애는 사건이었다. 1614년 11월의 일이었다.

쓰키노우라를 출범한 지 2년이 지나 이들은 드디어 로마의 땅을 밟는다. 도착하자마자 교황 바오로 5세로부터 직접 장도의 노고를 치하 받는다. 1615년 10월 29일 로마 입시식을 마치고 5일 후 바티칸 궁전에서 교황을 알현한다.

많은 추기경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세쿠라는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발에 입을 맞추며 일본어로 사명(使命)을 진술한 후 다테 마사무네의 서장(書狀)을 건넨다. 고국에서 그리스도교 탄압의 소식은 당도하며 로마 교황청은 겉으로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사절단의 의도에 응하지 않는다.


투우 관람하고, 젓가락으로 서양요리 맛보고


▎남만우물, 쓰키노우라의 스페인 사람들이 인근 막사에서 생활하며 선박을 건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절은 고난의 귀로에 들어선다. 1616년 1월7일 로마를 떠난 사절 일행은 일본에서 그리스도교도 박해 실태, 선교사 소테로의 신용 실추부터 마드리드에 들리지 않도록 하는 지시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마드리드에 들어갔다.
그러나 바로 세비아로 내쫓긴다. 소테로와 하세쿠라는 국왕에의 탄원, 스페인 각 부처와의 절충에 분주하지만 부탁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의 속에 귀도에 오른다.

1616년 9월30일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는 아카풀코로 향했다. 두 번째 태평양 횡단이다. 막부로부터 냉대를 받은 답례 대사 산타 가타리나와 사형을 면제받은 선교사 등을 승선시키는 한편 다테 마사무네의 교역선이라고 하는 복잡한 사정이 함께 섞여 있었다.
 항해는 운 나쁘게 폭풍우를 몇 번이나 만나서 마스트가 부러지고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와 5개월 후에 캘리포니아에 도착한다.

아카풀코에서 이들은 다시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로 마닐라를 향해 떠난다. 그러나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전쟁으로 마닐라에 2년을 더 머물던 일행은 스페인에 배를 양도하고 나가사키를 통해 센다이로 돌아왔다. 1620년 9월 22일이었다. 쓰키노우라 출항 후 실로 7년에 이르는 여행이었다. 


▎다테 마사무네의 [견구사절기]. 이탈리아 역사학자가 시피오네 아마티의 이탈리아어판 저술이다.

 


다테 마사무네에 귀국 보고를 한 하세쿠라의 그 뒤 행적은 사료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리스도교의 탄압을 개시한 마사무네로 인해 하세쿠라가 믿음을 버리라고 권고 받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진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세쿠라는 2년 후에 병으로 죽었지만 장남인 간사부로 쓰네요리가 동생과 하인 등이 그리스도교 혐의를 받으면서 참죄에 처해졌고 급기야 멸문(滅門)에 이른다.

선교사 소테로는 일본 전도의 열정을 누를 길 없어 1622년 일본에 잠입하지만 곧 체포돼 2년 후인 1624년 호우코바루(放虎原)에서 화형에 처해져 순교한다. 센다이에 있는 절의 하세쿠라의 묘 옆에는 소테로의 현창비(顯彰碑)가 서 있다.

 12월의 어느 한 낮 누군가 갖다 놓았는지 싱싱한 국화가 놓여 있다. 드넓은 해양을 넘나들던 다른 국적의 두 사람은 죽어서 하나가 됐다.



멸문지화로 막 내린 ‘영웅’의 집안 



▎센다이성에 있는 다테 마사무네의 동상.

스페인식 갈레온선을 건조해 태평양을 횡단시킨 센다이번의 제1대 번주다


 

약 250년 동안, 게이초견구사절의 존재는 잊혀졌다가 1873년(메이지 6년)에 메이지 정부가 유럽과 미국에 파견한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의 사절이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서장을 발견하면서 드디어 실체가 드러난다.


 이어 센다이현 난학자들의 노력으로 견구사절단의 면모가 하나씩 밝혀진다. 묻혔던 진주가 다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세계를 학습장으로 사용한 250년 후 자손들의 손으로 말이다.

센다이시박물관 소장 국보 게이초견구사절 관계 자료 가운데 ‘로마시공민증서’, ‘하세쿠라 쓰네나가상’, ‘로마교황바오로 5세상’ 세 점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게이초사절 관계 자료는 약 400년 전에 센다이 번주 다테 마사무네가 유럽에 파견한 하세쿠라 쓰네나가 일행이 일본에 가지고 들어온 것들로 합계 47점에 이른다.

그중 위의 세 점이 세계적으로 가치가 있는 기록유산으로 인정받아 등재가 이뤄졌다. 이 박물관에는 당시 사절을 따라 통역으로 마드리드에서 로마까지 수행한 로마의 역사학자 시피오네 아마티가 쓴 이탈리아 판 [다테 마사무네 견구사절기]와 이를 독일어판으로 번역한 책자가 있다.

본문 31장부터 마사무네와 선교사 소테로의 만남부터 사절 파견에 이르는 경위, 스페인 국왕과 로마 교황을 알현한 일의 전말이 적혀 있다. 



▎이와쿠라(왼쪽 셋째) 사절단. 12개국 구미 시찰단은 메이지 4년부터 메이지 6년까지 일본 과도정부에서 유럽과 미국에 파견됐다.



저자가 동행한 후반부의 기술에 대해서는 신뢰가 가지만 전반부의 일본에 대한 기술과 스페인 도착까지의 경과에 대하여서는 소테로로부터 들어 적었기 때문에 정확도가 떨어지는 부분이 많다고 한다. 사절이 로마 체재 중에 나온 기록이어서 그들의 동향이 얼마나 세상에 강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는지를 알 수 있다.

게이초견구사절은 지금의 센다이·오슈(奧州)부터 세계에 눈을 돌린 획기적인 외교 교섭이었지만, 그 후 그리스도교 금교령과 쇄국정책에 의해 해외에로의 적극적인 움직임은 막혀 버렸다. 그러나 오슈의 땅에 싹튼 선진성, 진취적 기상은 에도시대 중기 이후부터 다양한 형태로 싹튼다.

표류하다가 세계 일주를 이룬 쓰다유(津太夫), 견구사절단을 과학적인 눈으로 파악한 오쓰키 겐타쿠(大槻玄)와 개국을 부르짖은 오쓰키 반케이(大槻磐溪)등의 난학자 그룹, 다른 번에 앞서 선구적으로 만든 양식 범선 가이세이마루(開城丸), 1960년의 견미사절단(見米使節團)을 수행하며 항미일록(航米日錄)을 저술한 타마무시 사다유(玉左太夫), 1873년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인정받아 뉴욕 부영사 등의 외교관을 맡은 도미타 데쓰노스케(富田鐵之助), 1893년 기아에 허덕이던 이누이트들을 구하고 알래스카의 성자로 칭송받은 프랭크 야스다(安田恭輔) 등이 견구사절의 정신을 계승한 인물들이다. 아울러 세계로 통하는 다양한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다. 일본인들은 이 사절단을 ‘미래를 향한 희망과 용기의 심벌’로 받들고 있다.



희망이 없어도 도전했던 그들은 돈키호테


일본이 우리보다 앞설 수 있었던 것은 동아시아의 기존의 가치에 함몰하지 않고 틀을 깨부수며 드넓은 세계를 향했기 때문이다. 통신사를 보내며 조선이 우쭐대고 있을 때 사무라이들은 해양을 항해했고 로마의 시내를 사무라이 복장으로 행진했다.

그들의 꿈은 실패했지만 우리에게 말한다. “희망이 없더라도 도전하라.”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이야기는 250년의 세월을 묻혀 있다 깨어나 150년 넘게 되살아났다. “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꿔라.” 그들은 돈키호테였다.

일본 동북지방의 겨울은 4시 반이면 어둑해진다.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 역 앞에서 35년째 스시를 만들어 파는 후키즈시(富喜壽司)의 오오바히데오(73·大場英雄)씨에게 쓰네나가를 물었다.

“비록 실패는 했지만 7년간의 오랜 생활을 견뎠지요. 영주의 명령을 받아 멀리도 다녀왔어요.” 그러자 사이타마 출신이라는 손님이 나선다. “막부도 아니고 센다이번이 파견한 게 정말 대단해요.” 말투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구로시오 해류 속에서 자란 태평양산 뱅어 무침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TV는 일본에서 봄이 제일 먼저 오는 남국의 가고시마(鹿兒島)현 다네가시마(種子島) 우주센터를 비춘다. ‘쓰바메’라는 인공위성 발사 준비하고 있다.

이름도 ‘문명의 봄’을 가리키는지 제비라는 뜻이다.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동아시아에서 우주 굴기(屈起)를 한다. 견구사절단의 후예들은 조총의 전래지에서 우주와 소통하고 있었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독서회 [고전만독]을 이끌고 있으며,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주요 관심 사항은 대항해시대 문명의 소통 양상이다. 독서와 여행으로 문명과 바다가 펼쳐진 세계를 일주할 기획하고 있다.
[출처] : 글·사진 최치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 / 월간중앙 




3.‘유럽인 최초 사무라이’미우라 안진의 모험-도쿠가와 막부 외교정책 수립에 큰 역할 


英에서는 미천한 신분, 日에서는 귀족 대우…자기 것만 고집하지 않는 ‘유연한’ 풍토 덕분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선원으로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일행들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했다. 제주도 남제주군에 세워진 하멜 상선 전시관



17세기 대항해 시대였다. 안개가 자욱한 템스 강변에서 바다를 동경하던 영국 소년이 있었다. 항해사의 꿈을 갖고 있었다. 나중에 대양을 가로지르는 모험으로 일본에 도착했다. 이어 일본 막부의 외교고문까지 된다. 후지산이 보이는 저택에서 영지를 경영하는 사무라이…. 그가 나중 사람들에게 유명해진 이른바 ‘사무라이 윌리엄’이다.

조선이 성리학의 틀에 눌러 앉아 고리타분한 공리(空理)와 공담(空談)에 빠져 있던 무렵, 일본은 태평양을 건너온 영국인을 사무라이라는 상층 계급의 일원으로 포용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일본이 지닌 문명의 포용성과 개방성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17세기 당시 일본 지도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이 영국 모험가와의 대화를 즐겼다. 자신이 딛고 선 땅 너머 세상에 시선을 던지며 질문을 해댔다. 그는 당시의 모든 주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폭풍우의 태평양을 건너 표착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영국인 항해사 윌리엄 애덤스(1564~1620)를 만난 그는 대화를 통해 세계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

예수회와는 다른 개신교인 애덤스 일행의 방일(訪日) 목적은 무엇인가,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 요인은 어디 있는가, 희망봉 경유의 항로를 두고 왜 드넓은 대양을 건너서 왔는가 등을 물었다.

그러나 비슷한 무렵의 조선은 어땠을까? 그로부터 53년 후 조선 땅에 당도한 네덜란드의 하멜 일행을 만나 조선 국왕 효종이 던진 질문은 간단했다. “어디에서 무슨 목적으로 왔나?” 하멜의 답도 단답형이다. 조선은 이방인에게 무심했다. 본국 송환을 청원하는 하멜 일행에게 효종은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는 것은 이 나라 관습이 아니므로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하멜이 파악하는 조선인의 세계 인식은 단순했다. 세계에는 12개의 나라가 있으며 동해 저편은 망망대해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세계관이다. 하멜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 나라가 다른 나라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은 세상의 변화, 살아 있는 정보와 지식에 무관심했다. 죽은 가치와 정체된 문명만을 사랑했다. 대륙의 눈치만 보고 해양의 가치를 외면했다. 



문명의 자부심과 유연성 



하멜의 초상 



조선은 서구와의 긍정적인 만남을 애써 회피한다. 서구의 시선과 접촉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다. 서구 사람들 또한 바다를 통해 끊임없이 밀려왔으나 조선을 일부러 찾으려 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 시절의 서구는 자신보다 뛰어나 보이는 문명국가 일본에 경외감을 표현하며 뜨겁게 다가가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최종 목적지는 동아시아 끝에 있던 황금의 섬 일본이었다.

일본은 서구를 만날 실력, 그들로부터 학습할 다양한 분야에 대한 호기심, 그들의 도전에 기꺼이 응전하려는 개방적인 태도를 보유하고 있었다. 문명의 자부심과 다른 문명도 기꺼이 수용하려는 유연성이었다.

1611년 봄 런던 상인들에게 흥미롭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편지가 날아든다, 윌리엄 애덤스라 불리던 영국 선원이 일본에서 보낸 편지에 그가 미지의 땅인 일본에서 10년 넘게 살며 쇼군의 궁성에서 가장 높은 신분에 올라 있다는 내용이었다.

윌리엄 애덤스는 영국에서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바다에 도전하며 항해사로 살다 일본에서 귀족으로 죽었다. 고국인 영국을 평생 그리면서도 일본 문화에 철저하게 적응하며 일본의 대외정책 수립에 중요한 조언을 한다. 일본 여인과 결혼했고 나중에는 미우라 안진(三浦按針: 미우라의 항해사)이라는 사무라이가 된다.

그는 처음 붕고라 불리던 현재의 큐슈 오이다겐(大分縣)의 해안에 표착(漂着)했다. 때는 1600년이다. 대서양을 건넜고, 마젤란 해협을 지났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 같은 환상적이지만 위험천만한 모험을 겪으며 남미대륙을 통과했다.

이어 태평양을 건너 암스테르담 출항 후 19개월 만에 일본에 왔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영국 항해사로 일본에 최초로 도달한 영국인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발탁한 막부의 외교 고문이다. 태국을 방문한 첫 영국인, 유럽인 최초의 일본 사무라이다.

16세기 말 영국은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인기를 모았던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였다. 선원들은 모험에 나서며 성공을 거두는 꿈에 젖어 있었다. 그들이 목표로 잡은 목적지의 하나가 극동, 일본이다. 포르투갈이 지키는 희망봉 항로, 스페인이 확보한 태평양 항로를 피해 제3의 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노력은 처절했다. 강추위와 얼음, 그리고 유빙(流氷)이 떠다니는 북극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른다.



서양식 범선 건조에 성공하자 파격 대우 



도쿠가와 막부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발행한 무역허가서.



신규 투자를 하면서 다양한 해로 개척을 강구하던 시절 해적으로 시작해 출세한 드레이크경이 영국인 최초로 세계일주에 성공한다. 식민지 개척에 선두로 나섰던 스페인 함대를 상대로 엄청난 양의 전리품을 거두고 영국으로 귀환한다. 놀라운 전과였다.

그간의 북극항로 개발 노력은 묻힌다. 선원들도 국적을 불문하고 가장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나라로 용병처럼 선원을 지원하고 나선다.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가 동인도회사를 지원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은 거친 바다, 사나운 원주민, 괴혈병과 괴질, 바람과 파도, 선원 반란, 아사 직전까지 가는 단말마의 고통을 극복하며 태평양을 건넌다. 윌리엄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탐험 선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상선 ‘리푸데호’의 항해사로 참여했다.

1600년, 오랜 항해로 너덜너덜해진 배 한 척이 일본 붕고에 도착한다. 일본에 표착한 후 당시의 도쿠가와 막부를 위해 다방면에 걸쳐서 얼마나 실질적인 공헌을 했는지 궁금하다. 그럼에도 당시 도쿠가와 막부 실권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에게 베푼 파격적인 대우에서 그 정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도쿠가와의 명령으로 두 척의 서양식 범선 건조에 성공하자 봉토를 받고 영주의 대우를 받는 귀족 사무라이에 오른다.

도쿠가와 막부는 이미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포르투갈 사람이 조총을 가지고 표착한 이래, 이들의 창의적인 기술 정보에 관심을 가진다. 도쿠가와 막부는 외국의 난파선이나 표착선 등의 해난 사고를 귀찮은 외교처리 문제로 여기지 않고 소중한 정보와 지식 습득의 기회로 삼았다.

윌리엄은 영국 켄트의 어촌 마을인 길링엄에서 태어나 12세 때부터 런던 템스 강변의 라임하우스에서 자랐다. 어려운 살림에 제대로 된 교육은 받지 못 하고 바다에 뜻을 두고 조선업자 니콜라스 디킨스의 견습생으로 항해와 조선술을 배웠다. 선박 건조보다 항해에 소질이 있었다.

1588년에 견습생 과정을 마치면서 해군에 입대했다.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아르마다 해전 발발 시점에는 ‘리처드 더필드호’를 지휘해 보급을 맡았다. 아르마다 해전 뒤 결혼해 런던 바르바리 상인조합에 취직한 뒤 10년간 북아프리카의 해안을 항해하면서 영국 양모(羊毛)를 수송했다.

 35세 때 로테르담에서 인도 제도의 향로제도에 파견할 대규모 선단을 비밀리에 조직한다는 소문을 듣고 기회의 나라 네덜란드로 향한다.

당시 예수회 선교사와 가톨릭 국가 사람들은 이미 희망봉을 돌아 연안 항해를 통해 인도와 동남아와 중국을 거쳐 일본에 상륙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네덜란드 같은 개신교 국가 사람에게 일본은 미답의 땅이었다. 호기심과 풍부한 기술을 갖춘 뱃사람인 윌리엄이 일본을 향한 모험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식을 두고 떠나는 괴로움도 그의 모험심과 호기심을 꺾을 수 없었다. 1598년 윌리엄은 어느덧 35세의 장년이었다.

1600년 4월 그가 탄 리푸데호는 분고우스키(豊後臼杵)의 쿠로시마(黑島)에 도달했다. 기력을 상실해 자력으로 상륙하지 못한 선원들은 우스키 성주가 보낸 조그만 배로 간신히 일본 땅을 밟았다. 일본 측은 배 안에 실렸던 대포와 화승총, 탄약과 같은 무기를 몰수한 다음 오사카 성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지시를 구했다.

5월 12일 실질적 일본의 통치자 도쿠가와는 처음 그들과 만난다. 예수회의 농간으로 리푸데호를 해적선이라 믿고 있던 이에야스였으나 사정을 듣고 나자 달라졌다.

그들의 노정과 항해 목적,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분쟁을 겁내지 않고 설명하는 윌리엄이 마음에 들어 오해를 풀었다. 잠시 선원들을 투옥했지만 집요하게 처형을 요구하는 선교사들을 묵살한 이에야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접견을 거듭한 끝에 이들을 석방토록 한 뒤 에도로 초청했다.

일행의 원래 출항 목적은 남미의 서안에 도착해 화물을 팔고 은으로 교역하는 일이었다. 이 미션이 실패할 경우 다음 과제는 마젤란 해협을 통과해 일본으로 항해한 뒤 은을 확보하고 몰루카(향신료 제도)에서 향신료를 얻어 유럽으로 돌아올 작정이었다.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을 출발한 배는 괴혈병, 괴질, 남미 원주민의 습격 등의 고통을 겪는다. 마젤란 해협을 통과할 무렵 다섯 척의 선단은 와해돼 한 척만 남는다.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본행을 결정한다.

다섯 척의 배 중 한 척만이 남아, 100명 중 24명만의 선원을 태우고 유령선처럼 일본에 도착했다. 그것도 6명은 거의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에도에서 그는 귀국을 청원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이에야스는 쌀과 봉급을 줘 위로하고 외국 사절과의 대면이나 외교 교섭에 있어서 통역을 맡기거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 기하학·수학·항해술 등의 지식을 이에야스 측근에게 가르친다. 



하멜 일행은 잡초 뽑는 것이 역할의 ‘전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의 히라도 상관(商館)​



그는 이어 에도만(灣)에 계류된 리푸데호가 침몰하자 배 목수로서의 경험을 인정받아 서양식 범선을 건조한다. 오랫동안 조선(造船)의 현장에서 멀어졌던 애덤스는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일본에서 처음으로 이토(伊東)에 조선 도크를 두고 80t의 범선을 건조했다. 이것이 1604년에 완공되자 기분이 좋아진 이에야스는 대형 선박 건조를 지시한다.

1607년에는 120t 선박을 완성시킨다. 이에 만족한 이에야스는 귀국 만류 차원에서 윌리엄을 쇼군 알현이 가능한 250석의 하타모토(旗本)에 임명하고 칼을 차는 것을 허용했으며 영지(領地)도 하사한다. 그는 영국과 네덜란드 등과의 대외 협력 중재자로 나선다.

1653년 일본의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동인도회사 소속의 스페르베르 호는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제주 해안에 표착한다. 36명이 제주에 상륙한다. 이듬해 서울로 압송돼 훈련도감 소속으로 활약하다 전라도 강진과 여수의 병영에서 노역이나 잡무에 종사했다.

본국 송환을 거절하는 조선의 방침에 맞서 여러 번의 탈출을 시도한 끝에 표류 13년 만인 1663년 현종 7년 동료 7명과 탈출에 성공한다.

그들은 일본에서 조사를 받고 이듬해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간다. 조선이 그들에게 얻은 것은 별로 없다. [하멜표류기]란 보고서가 남아 당시 조선의 실정을 유럽인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록만 얻었을 뿐이다.

낯선 나라에서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신분으로 13년 28일을 보냈다. 배가 난파된 곳은 켈파르트라 불린 제주도였고 승무원은 64명, 대포는 30문, 선원 중 28명이 죽고 36명이 상륙했다. 하멜을 포함한 8명이 세 번째 시도 끝에 탈출했을 때는 총 생존자는 16명이었다.

 탈출하지 못 한 사람은 남원에 3명, 순천에 3명, 여수에 2인 등 8명이었다. 탈출 뒤 일본의 고토에 상륙해 여러 조사를 받고 나가사키의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에 보내진다. 이들 8명은 첫 일본 상륙이었다.

그들이 제주에 상륙했을 때 조선의 지휘관은 술 한 잔씩을 줬고 약 1시간 뒤에 갑작스러운 음식으로 탈 날 것을 우려해 죽을 줬다. 저녁에는 쌀밥을 줬다. 이들은 답례로 은잔에 레드와인을 따라 조선 관원들에게 돌렸다. 조선 관리들은 우호적이었다. 은잔도 돌려줬을 뿐 아니라 이들을 텐트까지 바래다줬다.

당시 제주 목사는 이원진으로,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나중에는 향연을 베풀어주기도 했다. 곧 일본으로 보낼 것이라고 말하는 등 조정의 답신을 자기 일인 양 함께 기다렸다. 하멜은 기독교인이 오히려 무색할 정도로 이교도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들의 통역으로 나선 사람이 이들에 앞서 난파한 뒤 조선에 상륙한 3인 중 유일한 생존자인 벨테브레다. 그가 하멜과 만났을 때는 모국어인 네덜란드어를 거의 잊고 있어서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한 달 정도 같이 지낸 뒤 다시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서울로 올라온 이들은 효종을 알현했고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일본행은 좌절했다. 이어 일행은 벨테브레의 훈련도감에 배속되기에 이른다.

청나라와의 외교 문제로 말썽 소지가 있어 이들의 존재를 숨기던 조선 정부는 청나라와의 대외 마찰을 우려해 이들을 강진으로 보내고 나중에는 전라도 각지에 분산·배치한다. 이들로부터 바깥의 정보와 기술을 얻으려는 의도는 조선에 거의 없었던 듯하다.

조선 조정은 그저 청나라와의 외교관계만 중요시한 것 같았다. 사실 이들이 이후 한 일은 관가 뜰의 풀 뽑기, 화살 줍기 등 잡무가 고작이었다. 나머지는 생존을 위해 장사를 하거나 땔감을 구하는 일이었다. 점차로 중앙권력의 시야에서 멀어져 가던 이들 중 탈출의 염원을 안고 때를 기다리다 8명만이 탈출에 성공한다.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해 1년 정도 체류하면서 하멜은 표류기를 작성했다. 원래는 동인도회사에 밀린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작성한 일지인데 유럽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을 소개한 최초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원본과는 다른 허구와 과장된 삽화가 가세하면서 유럽에서 선풍적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일본이 서양을 품에 안아 들이는 자세는 조선과 천양지차였다. 1543년의 일이다.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포르투갈의 철포(鐵砲)가 도래했다. 중국으로부터 표착한 포르투갈의 배는 일본에 큰 충격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문명의 융합’이라는 자세로 수용한다.

 그러나 이웃의 조선에게는 큰 재앙으로 발전한다. 포르투갈로부터 조총(鳥銃)을 입수한 일본인은 바로 복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를 실전에 사용한 것은 1575년의 일이다. 입수한 지 35년 전후다.



‘소중화의 자부심’에 젖어 스스로 벽을 쌓고 



윌리엄 애덤스는 영국에서는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일본에서는 미우라 안진이라는 귀족으로 살다가 죽었다



예수회 선교사가 본국에 보낸 서한에 따르면 1578년에는 이미 오사카(大阪) 혼간지(本願寺)에 조총 8000여 점이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철포대를 편성하는 당대 세계 최강의 전력으로 조선 침략에 활용한다. 호기심이나 욕망의 크기가 근세사의 명암을 가른 셈이다.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있는 한반도의 상황은 달랐다. 미우라 안진의 일본 표착과 하멜의 조선 표착을 비교해보면 너무나 명확하다. 하멜은 범죄자 취급을 받아 감시에서 놓여날 수 없었다. 청나라 사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숨겨야 하는 외교적 골칫덩이였다.

비슷한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이 너무도 달랐다. 조선의 외국인관(觀)은 이처럼 편협했다. 반면 일본은 자신들과 다른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발전시켰다. 물건과 사람을 보는 안목이 우리와 달랐던 것이다.

조선은 그러나 대항해 시대 유럽 해양문명과의 접촉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며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지 못 했다. 소중화의 자부심에 젖어 스스로 벽을 쌓고 눈과 귀를 막았다. 기존의 편집된 세계가 지닌 가치에 함몰해 변화하는 세계에 문을 닫았다. 대륙에서 넘어온 진부한 가치의 노예로 전락해 변화하는 세상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다.

섬나라인 일본의 사정은 달랐다. 모든 문명은 바다를 통해 건너왔다. 일본에서 바다는 문명의 소통로였던 셈이다. 섬나라는 고독함과 안전함의 두 가지 이미지를 지닌다. 외부의 정보에 민감한 체제를 가진다. 항상 귀를 쫑긋 세우고 바다 건너의 정보에 귀를 기울였다. 일방적인 정보 편식(偏食)으로 하나의 가치나 정보만을 믿는 폐단은 없었다.

표류하는 조선, 바다 포기한 중국, 대양 건너간 일본



교토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상 



늘 여러 가치가 공존해 정보의 가공도 다양했다. 해양을 건너서 오는 해외의 위험요소를 비교적 잘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정보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 소식을 1813년에 이미 알고 있었고,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의 속보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에도 막부는 쇄국령을 내리고 대외 접촉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에 네덜란드 상관(商館)을 열고 막부가 대외 무역을 독점하는 한편 외국선이 입항할 때마다 풍설서(風說書)라는 종합정보 보고서를 막부에 제출토록 했다.

대양의 바람과 파도를 넘어 동아시아에 도착한 서구의 해양민족은 도착한 국가의 ‘그릇 크기’에 따라 쓰임새가 갈렸다. 시대적인 시간차는 존재하지만 조선에 표착한 하멜은 13년 넘게 잡역에 종사하고 붙잡혔다가 일본으로 도망쳤다. 조선은 겨우 그의 기록, [하멜표류기]로 유럽에 이름을 알린다.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미 활약하고 있던 일본 땅에 도착한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는 일본에서 서양식 범선을 건조하고 포르투갈에 의해 잘못 알려졌던 일본인의 유럽 인식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이베리아 반도에 가톨릭 국가 말고도 개신교 국가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나중에 네덜란드가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통한 유일의 공식 교역국이 되는 계기다. 종교와 무역의 분리 대응원칙도 이로부터 발전한다.

하멜이 조선에 표류하던 시절 조선 국왕 효종은 국법을 언급하며 하멜 일행의 송환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하지만 일본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윌리엄 애덤스 일행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우한다.

양국 지도자가 갖고 있던 세계관의 차이에서 양국의 근세사는 크게 갈리고 만다. 이념 지향적이던 효종은 국법을 언급하며 하멜의 송환을 저지했다. 청나라 눈치를 봤던 것이다. 하멜 일행의 전략적 가치에는 아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윌리엄 애덤스 일행을 활용하며 민첩하게 세계의 동향을 파악했다. 아울러 이들에게 서양식 범선을 제작토록 하는 등 다양하게 자신과 다른 세계의 문명을 수용했다.

눈먼 장님을 자처한 조선의 쇄국과 세계에 귀를 활짝 열었던 일본은 여러 분야에서 격차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 나라의 수준에서 또한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일본의 지도자는 질문과 호기심의 크기에서 조선의 국왕과 차원이 달랐다.

조선과 일본은 임진왜란이라는 대규모 전쟁을 겪으면서도 서양의 이질문명을 수용하는 방식은 정반대였다. 조선은 청나라의 간섭을 두려워하며 안으로 움츠러들었고 일본은 세상의 변화와 흐름에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모시는 나라도, 특정한 이데올로기도 없었다.

대항해 시대 동아시아의 인문적 지형(地形)은 분명했다. 표류하는 조선, 바다를 포기한 중국, 대양을 건너간 일본이다. 일본은 태평양을 건너기도 했고 그들을 찾아온 미지의 문명을 한 자락이라도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이해하고, 또 품으로 떠안았다. 그러면서 점차 나 아닌 바깥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당시 일본 문명의 ‘심성’은 유연하며 물 흐르듯 했다.
 

[출처] : 글·사진 최치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월간중앙. 2018.2.
 



4. 인간 심연(深淵)의 여행자 가쓰시카 호쿠사이 - “이번 생은 꿈이야. 미쳐라” 


서양인들의 일본 애호 현상인 ‘자포니즘’ 만들어낸 주인공

…[라이프]지 선정 ‘지난 1000년 세계의 인물 100명’ 중 86위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서양인의 일본 문화 애호를 가리키는 ‘자포니즘’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빨간 후지](凱風快晴). / 사진:최치현

지난해 도쿄의 우에노 공원에 있는 서양미술관은 ‘호쿠사이와 자포니즘’이란 제목으로 미술품 전시회를 개최했다. 부제는 ‘호쿠사이가 서양에 준 충격’이다. 2017년 10월 21일부터 2018년 1월 28일까지 연인원 36만4149명이 관람했다.

19세기 후반 일본 미술은 ‘사고’를 친 적이 있다. 새로운 표현 양식을 찾고 있던 일단(一團)의 서양 예술가들을 매료시키고, 서양인의 일본 문화 애호를 가리키는 ‘자포니즘’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받은 작가는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 1760~1849)였다. 그 영향은 모네·드가 등 인상파 화가를 비롯해 구미(歐美) 전역에 걸쳐 회화·판화·조각·포스터·장식공예 등 모든 분야에 미쳤다. 강렬한 색채, 자유로운 상상력, 과감한 시점과 구성으로 속세의 순간을 포착하며 유럽 인상파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

지난해 전람회는 세계 10개국 이상에서 모은 명작을 호쿠사이의 그림과 비교·전시하면서 그 영향력을 살펴보는 자리였다. 호쿠사이의 우키요에(浮世繪)와 유럽 인상파, 아르누보 계열의 작품을 비교하는 첫 시도였다. 주최측의 홍보 문안은 압도적 스케일의 ‘꿈의 공연’이라고 자랑한다. 오디오 설명을 들으며 주요 작품을 천천히 둘러봐도 대략 3시간 이상이 걸리는 규모였다.

일본에 들어온 ‘문화 현상’들은 늘 그랬다. 스스로 심화하는 과정을 거쳐 거꾸로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식이다. 일본은 서양의 판화 기술과 원근법을 모방하고 배워서 심화·확대시켜 자신의 것으로 만든 뒤 유럽의 근대 미술에 다시 충격을 준다.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에도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화가다. 대표작으로 [후지산 삼십육경] [호쿠사이 만화] [동해도 오십삼 역참]이 있다. ‘북쪽 공방’이라는 뜻의 ‘호쿠사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에 서명하면서 ‘여름의 평원을 날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자신만의 길을 갔다.

 예술가답게 늘 변화를 추구하며 인생의 새로운 국면마다 거듭 태어났다. 그때마다 서명을 바꾸다 보니 이름이 서른여섯 개에 이른다. ‘그림에 미친 노인’이라는 뜻으로 ‘가교로진 호쿠사이’라는 이름이 가장 즐겨 불린다. 그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평생 삼라만상을 그리며 3만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젊었을 때부터 의욕적이어서 판화 외에 육필 우키요에(浮世繪) 분야에도 뛰어났다. 화가로서의 위상은 [후지산 삼십육경] 발표로 부동의 지위를 확보한다. 풍경화에도 새 분야를 열었다. 호쿠사이의 업적은 뛰어난 묘사력에 있다. 속필은 ‘호쿠사이 만화’ 속에서 볼 수 있다.

게다가 독본(讀本)·삽화 예술에 신기원을 열었다. ‘호쿠사이 만화’를 비롯한 그림책을 다수 발표한 것이다. 붓으로 형태 그리는 일에서 큰 솜씨를 떨친 것 등은 회화 기술의 보급과 서민 교육에도 영향을 끼쳤다.

‘가쓰시카파(葛飾派)’의 비조(鼻祖)가 돼 나중엔 빈센트 반 고흐 등의 인상파 화단의 예술가를 비롯한 공예가와 음악가에도 영향을 줬다. 온갖 것들을 다 그렸던 호쿠사이는 말년에 동판화나 유리 그림도 시도했다고 여겨진다. 또 유화에 대해서도 관심이 강했지만, 비교적 장수했음에도 결국 이루지 못했다. 


일생현명, 한 자리에 뼈를 묻을 각오로 일하라 



▎83세 무렵의 가쓰시카 호쿠사이 초상


“이번 생은 꿈이야. 미쳐라.”

그림에 미친 노인은 죽을 때까지 이렇게 되뇌며 그림만 그려댔다. 때로는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때로는 눈 덮인 후지산(富士山)을 그렸다. 매와 같은 눈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마음속에 죽순을 키우듯 이미지가 대나무로 자라면 화선지에 그림으로 나타냈다. 눈과 가슴과 손이 어우러져 나오는 광기는 예술로 승화했다.

아울러 그가 포착한 찰나의 순간은 영원한 시간으로 번졌다. 그가 바라본 세상은 어김없이 정지 화면으로 남아 사람들을 유혹했다. 그는 자신만의 프레임으로 세계를 가뒀다. 에도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였다. 일본에 원근법과 판화 기술을 전해준 유럽에 거꾸로 예술적 충격을 준 역사적 인물이기도 하다. 유럽 인상파의 스승이다.

“예술은 전적으로 쓸모 없는 것”이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은 전적으로 예술이 지향하고 추구해야 할 것이 아름다움이라는 말이다. 일본의 미의식은 헤이안(平安)시대에 완성됐다고 한다. 탐미주의 성향이 강한 일본의 예술은 사회와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오로지 인간 내면을 응시한다. 그것만 바라보기도 벅차다.

‘일생현명(一生懸命)’ ‘일기일회(一期一會)’는 일본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말들이다. 목숨 걸고 일을 하는 자세, 한 번뿐인 인생에서 역시 최선을 다하는 삶을 가리킨다.

앞의 ‘ 일생현명’은 비슷한 발음의 ‘일소현명(一所懸命)’에서 변한 말이라고 한다. 원래는 옛날에 하나의 영지(領地)를 사수(死守)하면서 살아갔던 데서 나왔다. 한 자리에 뼈를 묻을 각오로 목숨을 걸고 일하는 것이다.

뉴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 미국의 유명 잡지 [라이프]에서 발표한 ‘지난 1000년에서 가장 중요한 공적을 남긴 세계의 인물 100명’ 중 호쿠사이를 86위로 꼽았다. 유일한 일본인이다. 그는 생전에 늘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세상에는 자신에게밖에 걸을 수 없는 길이 있다. 그 길을 걷는 것이 인생이다.”

‘우키요에’는 일반 서민·대중의 삶을 소재로 한 당대의 풍속을 그린 목판화다. 일본인은 이 세상을 덧없는 세상으로 파악한다. 용어 자체가 미학적이다. 유한한 인간이 세상을 사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일본인은 괴로움과 덧없음의 세상을 이 단어로 표현했다.

따라서 이런 세상을 사는 방식으로 그들은 찰나의 인생을 즐기는 현세적 경향을 보인다.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양식인 예술이 발달한 이유다.

일본화의 한 유파의 흐름을 길어 종합적 회화 양식으로서의 문화적 배경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풍물 등을 그렸다. 연극·고전문학·와카(和歌)·풍속·지역의 전설과 기담(奇談)·초상·정물·풍경·문명·개화·황실·종교 등 다채로운 소재가 있다. 크게 나누면 판본의 삽화, 한 장 인쇄의 목판화, 육필 우키요에의 세 종류다.

당연히 목판화가 쏟아져 나오기 전에는 두루마리 등의 육필 우키요에를 포함한다. 육필 우키요에는 형식상 병풍·두루마기·화첩·족자, 부채 그림, 말 그림, 밑그림 판, 밑그림 8종류로 대별(大別)된다. 우키요에 화가는 책의 삽화 표지 그리는 일도 병행했다.

육필화는 한 점짜리이며 이름 있는 화공에 의한 것은 고가였다. 판화는 판화이기 때문에 같은 무늬의 것을 많이 찍어 올릴 수 있어 값싸고 에도시대의 일반 대중도 쉽게 구했다.



고흐·모네·드가 등 인상파에 큰 영향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대표작 [가나가와 앞 파도 속]. (神奈川沖浪裏]​

우키요에 판화는 대중문화의 일부로 사람들이 휴대하고 다니며 즐길 정도였다. 손에 들고 바라보는 방식 외에 액자에 넣어 미술관이나 가정 등에 장식품으로 걸리는 일도 잦아졌다.


구사조시(草雙紙: 삽화가 든 통속 소설책의 총칭)나 두루마리 그림, 또 가와라반(瓦版: 신문·찰흙에 글씨나 그림 등을 새겨 기와처럼 구운 것을 판으로 해 인쇄한 속보 기사판)의 삽화 역할도 했다. 그림 달력으로 불리는 달력 제작도 하고 그림 속에 숫자를 숨기는 등 다양한 발전을 거듭하면서 만들어졌다.

호쿠사이는 화가이자 디자이너이며,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애니메이터, 나아가 엔터테이너이기도 했다. 200년 이상 전에 그가 그린 ‘호쿠사이 만화’에 있는 ‘화면 분할, 개그, 의인화’라는 기법은 현대의 만화, 애니메이션의 원점인 것으로 일컬어지며 미즈키 시게루(水木しげる), 마쓰모토 레이지(松本零士),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 등의 저명한 만화가가 이 ‘호쿠사이 만화’의 팬임을 공언하고 있다.

시누아즈리(Chnoiserie)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던 중국풍 양식을 말한다. 청나라와의 활발한 교역으로 그림과 자기·병풍·차 등이 수입되면서 귀족들이 앞다퉈 중국식 물건들을 비싸게 구입했다.

당시 유행했던 화려하고 여성스러운 로코코 양식의 중국풍 장식이 모방되기도 했다. 프랑스의 로코코 양식을 대표한 프랑스와 부세는 철저히 유행을 따라 그림을 그렸다. 그에게 당시 유행했던 중국풍은 역시 매력적인 소재였다. 서양인이 가진 중국에 대한 판타지의 한 예다.

일본풍은 중국풍이 유행하던 18세기를 지나 19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해 일본 에도시대의 도자기와 차 부채, 우키요에 판화 등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유럽에서 유행했던 일본풍을 자포니즘이라고 한다. 이는 유럽인들이 일본의 것을 즐겼던 일종의 취미와 경향성을 일컫는다.

만국박람회 출품 등을 계기로 일본 미술이 주목을 받으며 서양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870년에는 프랑스 미술계에서 자포니즘의 영향은 현저해졌다. 1876년에는 ‘Japonisme’이라는 단어가 프랑스의 사전에 등장한다.

특히 일본의 목판화이자 풍속화인 우키요에는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우키요에는 명암이나 그림자 등 섬세한 색채 표현 없이 단순하고 평면적이면서 뚜렷한 윤곽선을 특징으로 한다. 이렇게 소박한 장식적인 그림은 기존의 사실적 회화와는 다른 길을 추구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표현방식에 대한 영감을 줬다.

그중에서도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일본을 사시사철 따듯하고 찬란한 햇살이 내리쬐는 낙원으로 생각했다. 일본을 동경했던 그는 자신의 작품 배경에 우키요에를 자주 그려 넣었다. [탕기 영감의 표상]도 그런 작품 중의 하나다.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등 강렬하고 단순한 원색을 사용한 이 그림에서 탕기는 마치 불상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있는데 그의 머리 위에 있는 후지산 그림이 마치 후광(後光)처럼 보인다. 이 밖에도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라든지 벚꽃을 배경으로 한 일본 풍경 그림도 볼 수 있다.



파문(破門)은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고


▎‘호쿠사이와 자포니즘’ 전시회 포스터. / 사진:최치현

자포니즘은 단순하며 일시적인 유행에 그치지 않았다. 14세기 이후 서구에서는 몇 차례 큰 변혁이 일어났다. 서양 근대를 알리는 르네상스에서 자연회귀 운동이 일어나고 사실성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점차 강해졌다. 19세기 중엽에 쿠르베 등에 의해서 명실상부한 사실주의가 정착했다.

19세기 후반 사실주의가 쇠퇴하고 인상주의를 거쳐서 모더니즘에 이르는 변혁이 일어났다. 이 큰 변혁의 단계에서 결정적으로 작용을 미친 것이 자포니즘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포니즘은 유행에 그치지 않고 이후 1세기 가까이 계속된 세계적 예술운동의 발단이다.

외로운 영혼의 예술가 호쿠사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 새로운 화풍을 시도함으로써 스승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상처를 그는 새로운 동기부여의 기회로 삼았다. 그 후 더 폭넓고 다양한 실험적인 시도를 한다. 현재의 일본 미술계와 세계 미술계는 그 점을 높이 평가한다.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화가들은 그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맑은 하늘과 바람으로 만든 삼라만상을 그리겠다며 풍경·인물·풍속·사물을 넘나들며 목판화를 비롯한 다채로운 소재를 다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30번 이상 자신의 호를 바꿨으며 90번 이상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이런 기록을 볼 때 그는 지속적으로 환경 변화를 시도하면서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한 예술가다. 결코 멈춰 서지 않으려 했던 인물이다. 그는 진정한 세 단계 예술 창조자의 길을 거친다.

이른바 ‘슈하리(守破離)’다. 일본에서 다도·무도·예술 등에서 고루 쓰이는 단계적인 발전 방식이다. 개인의 스킬(작업 수행 능력)을 표현하는 3단계 수준으로도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스승이 하신 말씀에 따라 형태를 ‘지키다’(守)에서 수행을 시작한다. 그 뒤 그 형태를 자신에 비춰 연구함으로써 자신에게 맞는 더 좋다고 생각하는 형태를 만들어 기존의 틀을 ‘깨기’(破)에 이른다.

최종적으로는 스승이 부여한 형태, 그리고 자기 자신이 만든 형태로부터 ‘떨어지기’(離)에 도달한다. 이 마지막 떨어지는 단계가 결국은 자유자재, 누구 또는 어떤 형식에도 걸리지 않는 최고의 경계라고 본다. 이 세 단계에 비춰 호쿠사이의 일생을 풀어볼 수 있다.

그는 우선 6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어 19세 때 당시 배우 그림의 제1인자였던 가쓰카와 슌쇼(勝川春章) 문하에 입문한다. 틀에 얽매인 그림을 그리기 싫어해 카리노파(獵野派), 린파(琳派) 등 여러 유파에서 그림을 배웠다.

당시로서는 절대 금기였다. 엄연한 스승을 둔 문파(門派)의 일원이 다른 곳에 몸을 들여 배우고 익히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곧 가쓰카와 문하에서 파문당한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호쿠사이는 서양화·중국화 등 다양한 기법을 배우고 자신의 화필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50세를 넘긴 무렵에 호쿠사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누구로부터 배우는 것은 없다. 나의 선생님은 자연뿐이다.”

호쿠사이는 어느 유파(流派)에도 속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면 50세가 넘도록 다양한 기법을 계속 배운 것을 의미한다. 슈하리(守破離)의 수(守)에 해당하는 기초 토대를 철저하게 쌓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바로 모든 예술의 황금률이다.


“청소할 틈이 있다면 그림 그리겠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탕기영감의 초상].
호쿠사이는 아흔 살에 임종을 맞았다. 그때의 모습은 이렇게 적혀 있다. “노인은 죽음에 임해 장탄식하고 ‘하늘이 나에게 십 년의 목숨을 길게 해주신다면’이라고 했다가 잠시 뒤에 또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5년의 목숨을 유지해주면 진정한 화공이 되리라’고 말을 더듬으며 죽었다.” 그의 예술세계에 휴식은 없었다.

신장 1m80㎝의 장신으로 귀가 컸던 호쿠사이의 모든 일상생활은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 맞춰져 있었다. 생애 93번이나 이사를 하고 때로는 하루에 세 번이나 이사할 때도 있었다.
호쿠사이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청소를 할 틈이 있다면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만큼 그림 그리기에만 온 힘을 쏟았던 사람이었다. 밥 할 시간을 아끼느라 음식은 늘 배달시켜 먹었고 옷 또한 간소하게 갖춰 입었다.

예술가에게 다반사인 음주와 흡연도 멀리했다. 보통의 화공에 비해 배 이상의 작품 값을 받았음에도 그는 늘 가난했다. 금전 감각이 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직접 금전 관리를 하지 않았다. 결혼했다 돌아온 딸 오우에이와 둘이서 작업을 진행했다.

그림 값이 와도 보따리를 풀지 않았고 더구나 세어보지도 않았다. 돈은 그저 그의 그림 책상 밑에서 방치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쌀가게나 땔감나무 집에서 청구가 오면 꾸러미째 던지고 건넸다. 그와 거래했던 가게들은 의외의 돈이 오면 그대로 착복하고, 적으면 거꾸로 재촉했다. 이런 무책임한 금전 취급이 그가 초래했던 가난의 진짜 원인이다.

호쿠사이는 만년에 이르렀어도 화법의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계속해 나갔다. 그는 “인물을 그릴 때 골격을 모르면 진실을 묘사할 없다”며 접골(接骨) 전문가 나구라 야지베(名倉弥次兵衛) 문하에 입문하고, 접골 기술이나 근골의 해부학을 깊게 연구한다.
이로써 그는 겨우 사람의 몸을 그리는 진정한 방법을 이해했다고 말했다.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학습의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작업장 풍경은 대개 이랬다. 지저분한 옷이 널려 있고, 책상 근처에는 먹거나 아예 손을 대지 않았던 음식 보따리가 어지러이 쓰러져 있었다. 딸도 그 쓰레기 더미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만년의 호쿠사이가 제자 츠유키 이이츠에게 한 말이 유명하다.

“9월 하순부터 4월 상순까지는 고타츠(炬燵: 일본식 난방기구)에 들어가 어떤 사람이 찾아도 그림을 그릴 때면 고타츠를 나올 수 없었다. 피곤하면 옆의 베개에서 자고 깨어나면 그림을 그렸다. 낮과 밤 이를 계속했다. 잠옷은 낭비로 여겨져 입지 않았다. 고다츠에 들어가 계속 앉아 있으면 숯불이 타오르기 때문에 조개탄을 사용한다. 이불에는 이가 많이 발생했다.”


고흐도 극찬 아끼지 않았던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작품 [구린내 나는 풍경].
우키요에 이외에도 이른바 삽화가로도 활약한 일면이 있다. 노란빛 표지, 화류계를 제재로 한 소설과 교재 등 수많은 통속소설의 삽화를 다뤘다. 작자가 제시한 밑그림대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자주 작가와 충돌을 반복했다.

통속문학 작가 교쿠테이 바킨(曲亭馬琴)과 콤비를 이뤘던 한 시기 그는 [新編水滸畵傳(신편수호화전)] [近世怪談霜夜之星(근세괴담상야지성)] [椿說弓張月(춘설궁장월)]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바킨과 함께 큰 이름을 날린다. 읽을거리의 덤 정도의 취급에 불과했던 삽화의 평가를 현격하게 올린 인물이다. 또한 호쿠사이는 한때 바킨 집에 식객으로 기거한 바도 있다.

호쿠사이는 저세상에 가면 영혼이 돼 여름 들판에 산책하러 가자면서 마음의 여유를 표현했다, 그가 남긴 사세구(辭世句)는 다음과 같다.

“人魂で 行く気散じや 夏野原 (영혼으로/ 가는 편안한 마음/ 여름의 푸른 평원)”

호쿠사이의 대표작은 [빨간 후지](凱風快晴, 통칭 赤富士)와 [가나가와 앞 파도 속](神奈川沖浪裏)이다. 이를 본 고흐가 화가 동료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극찬을 멈추지 못한다. 역시 그로부터 커다란 영감을 받은 드뷔시는 교향시 [바다]를 작곡하고 그 후 서구의 다른 예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물마루가 무너지는 모습의 이 [가나가와 앞 파도 속]은 보통 사람이 보면 추상 표현밖에 나오지 않지만 하이 스피드 카메라 등에서 촬영된 파도와 비교하면 그것이 사실적으로 뛰어난 정지 화면임을 알 수 있다.

호쿠사이가 그린 ‘큰 파도’는 당시 사람들에게 “파도가 이런 모양을 할 수가 없다”는 야유와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현대에 실재하는 ‘5000분의 1초’의 초고속 카메라로 물결을 촬영한 사진들은 이 ‘큰 파도’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호쿠사이는 ‘천재적 관찰력의 소유자’뿐만 아니라 어쩌면 ‘순간기억 능력’의 소유자였다.

호쿠사이는 일본보다 해외에서 평가가 매우 드높다. 예술은 예술끼리 통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유럽의 찬란한 예술계 별들, 즉 고흐·모네·드가·에밀·갈레 등은 호쿠사이에게 아주 커다란 감명을 받고 그를 자신들의 예술 영역에 끌어들였다.

또 2017년 2월에 열린 미국의 옥션에서는 판화 입찰상 세계 최고액인 1억 엔으로 호쿠사이 그림이 낙찰됐다. 아울러 세계적인 박물관인 대영박물관에서는 ‘호쿠사이-큰 파도 저 편으로’라는 특별전이 열렸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인간만이 도달할 수 있는 압도적인 예술의 혼과 역량이 빛을 본 것이다.

호쿠사이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자재의 삶을 온 생애에 투입함으로써 삶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일본인은 조선이 관념과 추상에 젖어 쇄국과 구안(苟安)의 경지에 머물고 있을 때 드넓은 바다를 건너갔고, 인간의 내면에 드리운 아주 깊은 심연으로 예술 여행을 떠났다. 세계는 그런 일본을 늘 동경과 찬탄으로 지켜봤다.
[출처] : 최치현술실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 / 월간 중앙




5.‘영혼의 자식’ 남기고 간 히구치 이치요( 口一葉, 1872~1896).

 - “당신 외에 누구에게 이 머리를 묶게 할까요” 




일본 영화 [신설국]의 한 장면. 중년의 실업가 시바노 쿠니오(오쿠다 에이지 분)는 선대부터 이어온 사업에 실패한 뒤 가족에게도 외면당하자 쓰키오카(月岡)를 찾아 이곳에서 생을 마무리하려 한다. 인근 온천의 젊은 게이샤인 모에코(유민, 일본명 후에키 유코)가 다가오면서 둘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된다



"붓통의 애환이여, 뜻대로 안 되는 이 세상이여!” “나는 여자인 것을.”

절을 이어받아 운영해야 하는 남자 주인공 신뇨(神如)는 승려 수행 여행에 나선다. 수선화 한 송이를 당찬 소녀 미도리(美登利)의 격자문에 몰래 꽂아두고 떠난다. 미도리는 언니의 뒤를 이어 유곽(遊廓) 요시와라(吉原)에서 유녀(遊女)로 일해야 하는 소녀….

도쿄의 유곽을 배경으로 사춘기 청소년들의 다툼과 사랑, 이별을 그린 성장소설 [키 재기]는 일본의 ‘국민 소설’이라 할 정도로 유명하다.

메이지 시대 밑바닥 여인의 사랑과 삶을 그린 작가 히구치 이치요( 口一葉, 1872~1896). 이치요는 불꽃같은 24년의 짧은 삶을 살았다. 쌀독이 비어 끼니를 걱정하는 현실의 삶에서는 무참한 패배를 당했으나 문장으로 자신의 삶을 승화한다. 그녀는 마침내 2004년 일본 5000엔 권의 삽화 인물로 등장한다. 한 국가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고액권 화폐에 초상이 오르는 일은 불멸의 이름을 남긴 사람만이 가능하다.

아주 짧은 생애를 살다간 한 여류 소설가에게 일본인은 뜨거운 찬사로 화답했다. 일본 사회는 사랑으로 시작해 밑바닥 인생을 사는 여인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어루만진 이 작가의 진지함을 높이 샀다. 그녀는 소설 22편, 수필 5편, 통속 서간문을 발표하고 4000여 수의 와카(和歌)와 일기를 남겼다.



스승이자 마음속 연인이었던 그 남자

추운 아침이었다. 10시께부터 진눈깨비 섞인 비가 내렸다. 이치요는 홍고기쿠자카(本鄕菊坂)에 있는 집을 나왔다. 마사고(眞砂)마을 근처부터 마침내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키자카( 岐坂)에서부터 걷는 것을 포기하고 인력거를 잡았다.

구단자카(九段坂)를 오르자 호리바타거리(堀端通り)의 길에 쌓인 눈이 하얗게 빛났다. 히라카와 텐만구(平河天滿宮)를 넘어가면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 1861~1926)의 ‘은신처’는 이제 금방이다. 1892년(메이지 25년) 2월 4일 오후였다.

곧 스무 살이 되는 이치요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때였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도쿄 아사히신문의 소설기자 도스이에게 소설 지도를 받고 있었다. 알고 지낸 지 10개월이다. 도스이는 31세로 아내와 사별한 독신이었다. 결혼 후 1년 만에 죽은 아내의 관을 붙잡고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울부짖던 사내다. 이치요는 그런 남자로 살고 있던 도스이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눈은 계속 내렸다. 이치요는 처음으로 쓴 소설을 품속에 넣고 눈 속에서 도스이에게 가고 있다. 도스이는 신문에 통속소설을 연재하고 있었으며, 그 지도를 받는 것은 표면상의 이유였다. 도스이는 이치요에게 스승이자 연모의 마음을 품은 짝사랑의 정인(情人)이었다.

도스이는 장신에 미남자이며 언행도 부드러웠다. 10개월 전 처음 만난 날부터 이치요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다. 계속 내리는 눈 속, 도스이와 이치요는 새롭게 창간하는 동인지 [무사시노(武野)]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치요는 품 안에 지참했던 [밤 벚꽃(闇櫻)]을 도스이에게 보여준다. [무사시노] 창간호에 게재한 그녀의 데뷔작이었다. 잠시 후 도스이는 이치요를 위해 팥죽을 만든다며 옆집에 솥을 빌리러 나간다.

옆집 젊은 아주머니가 “선생님 재미 좋겠어요”라고 놀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눈이 내리던 날 단 둘이 화로를 사이에 두고 팥죽을 먹으며 문학을 논했다. 정감은 그날의 눈처럼 쌓여갔다.

날은 어두워지고 도스이는 “눈이 많이 내렸으니 묵고 가라”고 말한다. ‘착각한’ 이치요는 몹시 동요한다. 도스이는 웃으면서 “나는 근처의 친구 집에 묵으니까”라고 덧붙인다. 이치요는 인력거를 불러 귀갓길에 나선다. 눈 덮인 마을을 보면서 머물 수 없어 떠나야만 했던 소녀의 가슴에는 눈물이 흘렀다.

이때 도스이는 31세, 이치요는 19세다. 화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팥죽을 먹는 정경의 이 [눈오는 날(雪の日)]은 가난과 고뇌로 점철된 이치요의 인생에서 큰 기쁨의 순간이었다. 살면서 아주 드물게 맞닥뜨렸던 진실의 순간이었다. 희망이 없는 희뿌연 세상 언뜻언뜻 보이는 푸르고 푸른 하늘 같았던 날의 풍경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 단둘이 사제 이상의 정을 나눈다는 소문과 주변의 만류로 도스이와 단호한 결별의 수순을 밟는다. 이치요는 이날을 깊은 슬픔과 후회를 가져올 추억으로 가슴에 새겨둔다.

이치요는 그 눈 오는 날 1년 후, 일기에 도스이를 향한 연모의 정을 차곡차곡 기록한다. 일기가 공개된 것은 이치요 사후 16년이 경과한 1912년(메이지 45)이었다. 세상은 도스이에 대한 간절한 이치요의 사랑에 충격을 받는다.



열매 맺지 못한 수선화 같은 사랑

이치요가 2004년 일본의 5000엔 권 인물로 등장하면서 도스이는 이치요가 사랑한 연인으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다. ‘메이지, 다이쇼의 신문 소설가이며 히구치 이치요의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남자’라는 타이틀이었다. 그러나 그는 메이지 문학사의 각주 정도에나 실릴 정도의 평범한 문인이자 신문기자였다. 둘은 열매를 맺지 못한 수선화 같은 사랑을 남겼다.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는 [춘향전]을 세계 최초로 번역한 아시히 신문의 조선 특파원이다. 유명한 여류 문인의 연모를 받은 덕에 나카라이 도스이는 고향인 쓰시마(對馬)에 문학관이 세워진다.

이 문학관이 게재한 설명을 보자.

 “도스이는 메이지, 다이쇼 시대에 걸쳐 활약한 대표적인 대중 소설가다. 대륙으로 가는 관문 쓰시마 번 의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레쓰(洌), 아명은 센타로(泉太)다. 나카라이 가문은 속해 있었고 대대로 의사로 종사해왔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부산에서 소년기를 보내며 조선어를 익힌다. 일본으로 돌아와 도쿄 영문학학원에서 공부했다.

1881년에는 아사히신문 기자의 신분으로 조선에 건너갔다. 그 다음해에는 한국의 고전 [춘향전]을 세계 최초로 번역해 아사히신문에 연재했다. 1889년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을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고, 연간 500회 이상을 게재한 해도 있다. 히구치 이치요가 소설 창작 지도를 받기 위해 도스이를 찾은 것은 1891년이며, 같은 해 도스이의 대표작인 [조선에 부는 모래바람(胡砂吹く風)]이 신문에 연재됐다.

1883년 [조선에 부는 모래바람]을 단행본으로 발간한 서적에는 이치요의 서가(序歌)가 머리말에 올려져 있다. 1904년에는 종군기자로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전후에는 후반기 대표작 [덴구회람(天狗廻)]을 신문에 연재했다.”

도스이가 지한파(知韓派)였음을 밝힌 프리라이터 요시나리 시게유키(吉成繁幸)가 2004년 민단 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보자.


“메이지 유신에 대한 조선정부의 대응을 두고 일본 조야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나오고 있었다. 도스이가 부산에서 체재하고 있을 때 신정부는 무역 업무를 쓰시마번(對馬藩)에서 상사(商社)로 일방적으로 변경한다. 미쓰이구미(三井組)의 종업원을 부산으로 들여보냈다. 조선 정부는 관례를 무시했다고 격노하며, 왜관(倭館)의 정문에 항의문을 게시했다. 



잊지 못할 세 남자… 구원의 길은 소설뿐 



1. 24년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또렷한 발자취를 남긴 히구치 이치요. /

2. 히구치 이치요의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나카라이 도스이. /

3. 히구치 이치요는 방대한 양의 일기를 남겼다. 김만중의 [구운몽]을 필사한 기록도 있다. /

4. 팥죽을 사이에 두고 문학을 논하는 이치요(왼쪽)와 도스이를 형상화한 모형



이 항의문을 번역한 사람이 도스이이며 그의 번역은 그대로 일본 정부에 전해지고 ‘정한론’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진다. 도스이는 이런 냉각된 관계를 자신이 부추겼다고 자책한다. 1875년, 강화도에서 일본 군함 ‘운요호 포격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태에 일본 여론은 흥분하지만 신문 논조는 의외로 냉정하여 유력 신문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나 [유빈호치(郵便報知)] 등은 무력 행사 반대론을 전개했다. 15세 학생이었던 도스이도 [도쿄니치니치]에 무력행사 반대를 주장하는 글을 게재한다.”

1882년, 아버지의 조수로 다시 부산으로 건너간 그는 아사히신문 촉탁으로 부산 특파원이 된다. 그가 체재한 1887년까지의 5년간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이 일어났다. 도스이는 이 보도로 이름을 떨쳤으며, 아사히신문의 판매부수는 일거에 늘어난다.

하지만 그의 장점은 조선의 화류계나 서민의 풍속 등 조선의 일상을 전하는 르포기사나 한글 입문과 같은 문화 자료를 다루는 데 있었다. 그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은 [춘향전]을 세계 처음으로 번역해 [계림정화춘향전](桂林情話春香傳)이란 이름으로 소개한 일이다. 1892년 아사히는 그의 번역을 연재했다.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귀국 후 소설기자로 아사히신문사에 정식으로 입사한다. 일본의 문호로 일컬어지는 나쓰메 소세키보다 16년 먼저 이 신문사에서 소설을 연재한 작가다. 그의 대표작은 [조선에 부는 바람]으로 한일 혼혈인 주인공 하야시 마사모토(한국명 임정원)가 조선을 배경으로 부모의 원수를 갚는 무용담이 펼쳐진다.

소설은 조선의 정치·지리·역사·풍물·인정과 같은 흥미로운 내용으로 아사히신문에 150회에 걸쳐 실렸다. 이 소설의 권두를 이치요가 단가로 장식했다. 연재했던 시기는 이치요가 그와 ‘사제관계’를 맺었던 때다.

24년의 짧은 생애를 살다간 이치요에게는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정혼자에서 파혼자로 바뀐 시부야 사부로( 谷三), 스승이자 마음속 연인이었던 도스이, 그리고 그녀를 첩으로 만들려고 했던 유명 점성가 구사카 요시타가(久佐賀義孝)다. 그러나 어떤 남자도 그녀를 구원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인생 욕망의 이정표는 소설이었다. 붓으로 세상에 자신의 못다한 사랑의 상처와 욕망과 고독을 외치기 시작한다.

이치요의 소설은 초기 연애소설에서 후기로 접어들며 차가운 현실세계에서 분투하는 여성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대표적인 소설이 [흐린 강]이다. ‘기적의 14개월’이라 불리는 기간 동안 모든 것을 불꽃처럼 사른다.

한동안 글이 안 나와 고민하던 이치요는 글을 쓰려고 하는 주체할 수 없는 욕구에 사로잡힌다. 마법처럼 인물을 창조해내고 자신을 소설 주인공들에게 투영한다. 그 인물들을 통해서 자신의 사랑과 고독과 운명을 노래한다. 1894년 12월 이치요는 [섣달 그믐]을 발표한다. 그 후 [키 재기] [흐린 강] [열사흘 밤] [갈림길]을 차례차례 발표한다.

[흐린 강]은 그런 의미에서 이치요의 대표작이랄 수 있다. 오리키라는 작부의 삶과 죽음을 통해 사회의 냉혹한 현실과 삶의 지난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는 것을 아는 듯 그녀는 격렬함 속으로 들어간다.

그중에서도 1년에 걸쳐 [문학계]에 연재한 [키 재기]는 모리 오가이(森鷗外), 고다 로한(幸田露伴), 사이토 로쿠(齋藤雨) 등 문단의 거두에게 격찬을 받는다. 히구치 이치요의 매력은 무엇일까? 예리하고 아름다운 문어체의 아름다움이 그 하나이지만 그것뿐은 아니다. 그 기적의 시절에 이르기까지 분투를 거듭했던 삶이 그녀의 매력이다.

이치요는 여러 이유로 정규학교 교육을 제때 마치지 못하지만 그녀의 재능을 아쉽게 생각한 부친의 배려로 14세 때인 1886년 나가지마 우다코(中島歌子)의 가숙(歌塾) 하기노야에 입문한다. 이곳은 귀족 살롱의 정취가 있었으나 재능이 있는 사람도 모여들었다. 고전의 소양과 치카게류(千蔭流)라고 불리는 서법을 익힌다.

이치요는 다나베 다쓰코(田邊龍子), 이토 나쓰코(伊東夏子)와 함께 3대 재원으로 불린다. 다쓰코의 존재는 작가 이치요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치요는 와카(和歌)의 수행에 전력을 쏟는다.

1887년이 저물 무렵 15세인 이치요의 삶에 돌연 암운이 드리운다. 오빠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2년 후에는 아버지 노리요시(則義)가 사업 실패의 여파로 병사한다. 이치요는 시부야 사부로( 谷三)라고 하는 약혼자가 있었지만 이 일로 상대방으로부터 파혼을 당하기에 이른다.

1890년 9월 이치요는 어머니 다키(多喜), 여동생 구니와 함께 혼고기쿠자카(本鄕菊坂)로 이사한다. 그리고 일가는 바느질과 빨래로 생계를 이어가기 시작한다. 이치요는 다쓰코가 [덤불 속의 새]를 간행해 거액의 원고료를 받는 것에 놀란다. 



진눈깨비 흩날리던 차가운 밤 세상과 작별

그리고 수입을 얻기 위해 소설을 쓸 결심을 한다. 이치요는 친구로부터 아사히신문 소설기자 도스이를 소개받는다. 이치요는 도스이를 소설의 스승으로 우러르기에 이른다. 이치요는 우에노의 도쿄 도서관에 다니며 도스이의 가르침을 받아 습작에 몰두한다. 도스이의 도움으로 작가의 길을 걷지만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동인지 [무사시노]가 곧바로 폐간됐기 때문이다.

도스이와 이치요의 사이에 소문이 일자 이치요는 도스이와 일방적으로 절교한다. 당시 미혼의 처자가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다. 다소 이기적인 감이 있으나 작가를 꿈꿨기 때문에 스승으로서 도스이에게 한계를 느꼈을 수 있다.


도스이로부터 멀어진 이치요는 다나베 다쓰코에게 부탁해 소설 [버림받은 신세]를 잡지 [미야코노하나(都之花)]에 발표한다. 드디어 이치요는 문단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는다.

1893년 7월 이치요 일가는 지금의 이치요 기념관이 있는 시타야류센지초(下谷龍泉寺町)로 이사를 하고 잡화와 과자를 파는 가게를 연다. 그러나 생활 곤궁함은 나아지지 않는다. 류센지초(龍泉寺町)는 환락가 요시와라와 함께 살아가는 거리다. 이 빈곤한 거리에서 듣고 본 일이 이치요를 인간적으로 성장시켜 문학적 재능을 개화시킨다.

생활이 궁핍했던 이치요는 추가로 부채를 더 짊어진다. 스승인 나카지마 우다코에게 진 빚도 늘고, 첩이 되면 생계를 보장해주겠다는 제의를 유명한 점성가 구사카 요시타가(久佐賀義孝)에게서 받기도 한다. 동문인 다쓰코 등이 가숙(家塾)을 연 것을 듣고 질투와 초조함으로 애를 태우기도 한다.

1894년 6월 이치요는 혼고구마루야마후쿠야마초(本區丸山福山町)로 이사한다. 그리고 하기노사의 조교가 되지만 급료는 2원으로 집세에도 못 미쳤다. 이치요는 가난한 자신에게 유곽에서 삶을 버텨내는 슬픈 여인들의 모습을 중첩시킨다.

여자 혼자 살기에 이 시기는 너무 힘들었다. 이때부터 이치요의 집에는 히라타 도쿠보쿠(平田禿木), 바바고초(馬場孤蝶)등 문학계 동인을 중심으로 하는 청년들이 방문한다. 이치요의 집은 마치 근대 일본문학 살롱 같았다. 청년들과 열띤 토론을 거치면서 이치요의 창작의욕은 더욱 타올랐다.

그러나 드디어 작가로서 절정을 향해 치닫는 무렵 이치요의 신체에 이상이 나타났다. 모리 오가이의 소개로 동경제대의 아오야마(靑山) 교수로부터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이내 손을 쓸 수 없었다. 1896년 11월 23일 이치요는 겨우 24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철야의 밤, 도스이 등 일부 문인이 이치요 집에 모여들었다. 진눈깨비가 비에 섞여 내리는 차가운 밤이었다. 장례식 참가자는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 변화의 여명을 붓으로 열다 



히구치 이치요가 삽화 인물로 등장한 일본의 5000엔 권.


“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니 참으로 나는 여자인 것을, 무슨 생각 있다한들 그대로 이뤄지겠는가? (…) 나는 여자요, 아무리 좋은 뜻이 있다한들 그대로 이 세상에 이뤄질 수 있을 것인가?” _[수상일기](1896년 2월)



그녀의 사후 여동생 구니, 그를 따르던 문인 바바 고초, 사이토 로쿠 등이 전력을 기울여 이치요의 작품을 모아줬기 때문에 초고(初稿)·일기·편지 등이 세상에 나와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를 읽는 한 우리는 이치요가 불행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이치요는 당시의 낭만적인 정열을 지닌 청년들이 동경하는 대상이었다. 빈곤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 닫혔거나 닫았던 마음을 열게 해줬기 때문이다. 이치요의 기적의 14개월은 실로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래도 5000엔 권 지폐 안에 무표정하게 있는 이치요를 바라보면 어쩐지 슬픈 기분이 든다. 곤궁한 삶을 산 예술가가 고액권 화폐에 등장하다니 정말로 얄궂은 일이다.

일본의 엔카 가수 가와노 나쓰미(川野夏美)가 2007년 발표한 [사랑의 수선화(戀水仙)]라는 노래는 바로 소설 [키 재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승려 신뇨가 격자문에 두고 간 수선화 한 송이를 보면서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한층 성숙해진 소녀 미도리가 부르는 사랑노래다.

어릴 적부터 키 재기 놀이를 하면서 지낸 편한 사이였지만 어느덧 사랑의 감정을 품는 남녀로 자리를 잡았다. 뭐든지 서투른 신뇨는 나막신 끈도 묶지 못했다. ‘어떻게 수행을 떠났을까’ 걱정하는 미도리는 자신이 신을 묶어줘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혼자 부끄러워하면서 추억을 생각한다. 이 소재는 역사를 한참 거슬러 올라간다.

9세기 초 일본 최초의 노래 이야기 소설집인 [이세 이야기(伊勢物語)]는 총 125단의 이야기가 있다. 제23단은 ‘우물벽(筒井筒)’이다. 이치요의 [키 재기]라는 제목이 이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보인다. 이야기는 소꿉친구가 자라서 사랑으로 감정이 변화하는 흐름이다.

원작은 역시 힘이 세서 자손을 많이 거느린다. 지금도 일본인들은 소꿉친구 첫사랑을 늘 ‘우물벽’이라 칭한다. 시·노래·소설·드라마에 등장하는 단어다. 내용이 우선 흥미롭고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감동적이다.

어린 시절 우물 주위에서 놀던 소꿉 남녀가 있었다. 두 사람은 커서 서로 얼굴을 마주 바라보는 것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소년은 가슴속에 그 소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고 소녀도 이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싶었다. 성인된 남자가 여인에게 보낸 편지가 바로 ‘우물벽’이라는 노래다.

“이제 우물 난간을 넘어버린 것 같아요. 당신을 만나지 못하는 사이에”
(筒井つの 井筒にかけしまろがたけ/ 過ぎにけらしな 妹見ざるまに)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첫사랑 그녀도 답가를 보낸다.

“(당신과 길이를) 견주던 나의 가르마 탄 머리도, (길게 자라) 어깨를 넘었습니다. 당신 외에 그 누구에게 이 머리를 묶게 할까요.” (くらべこしふりわけも 肩すぎぬ/ 君ならずて たれかあぐべき)

이런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결혼에 이른다. 첫사랑을 떠올리는 일본인의 심성에는 어린 시절 함께 키를 재며 같이 놀던 ‘우물벽’이란 이야기가 자리를 틀었다.

2004년 일본 정부는 이치요를 5000엔 권의 인물로 선정한다. 지폐의 도안은 20년마다 신권 디자인으로 바뀐다고 한다. 이전에는 [무사도]로 일본의 정신을 세계에 알린 작가 니토베 이나조(新渡造)가 5000엔 권 인물이었다. 


사랑과 불멸의 이름을 사람들 가슴에 



베르너 비숍의 1952년작 [메이지 신궁].


도안 변경 당시에 이미 여성 인물을 내세우기로 내정했었다. 여성으로는 1881년 발행한 지폐에 등장한 신공황후 이후 123년 만에 두 번째다. 일본은 1999년 남녀공동참여사회기본법을 제정한다. 이 법률은 남녀평등과 상호존중을 추진해 여성이 성별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취지다.

히구치 이치요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가장 심했던 메이지 시대에 변화의 여명을 붓으로 연 작가다. 여성으로 이름을 남긴 문화인이자 여러 조건을 충족시킨 인물이다. 바야흐로 화폐에서도 사무라이 시대가 저물고 여성들의 시대가 열린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사무라이의 칼이 아니라 이제는 대지의 품성을 지닌 여성의 덕이다.



기모노를 곱게 차려 입은 일본 게이샤들.



한 사람의 가슴속에 사랑의 기억을 남겨놓기도 지난(至難)한 일이다. 히구치 이치요는 1억3000만 일본 국민과 매년 일본을 찾아오는 3000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의 가슴에 사랑의 수선화를 건네고 있다. 소설을 포함한 문학은 존재의 어둠 속에서 세계를 향해 부르짖는 고독한 외침이다. 삶이 고독을 견디는 일이듯이 문학도 고독을 이기려는 의지다.

이치요는 궁핍하고 외로운 삶에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워주고 간 작가다. 그녀는 외롭게 죽어갔으나 사랑과 불멸의 이름을 사람들 가슴에 심었다. 가부장적 사회의 치부가 잘 드러나는 유곽을 작품 배경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계층적 질서를 뒤집어버림으로써 일약 유명해진다.

이치요가 사랑·곤궁함·고통을 불사르며 남긴 것은 처연한 슬픔과 불멸의 이름이다. 맺을 수 없는 슬픈 사랑으로 시작해 현실에 존재하는 가련한 밑바닥 인생을 자신의 삶과 견주면서 시대와 세상을 그린 작가였다. 그의 시선은 뜨거웠고 세상은 차가웠다. 이치요는 에로스의 사랑 대신 밑바닥 여인들의 삶을 사랑하며 ‘영혼의 자식’을 남기고 갔다.
 

[출처] : 최치현술실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 / 월간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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