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시장 간증(2001년) - 현대판 요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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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시장 간증(2001년) - 현대판 요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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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시장 간증(2001년) - 현대판 요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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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악연도 인연이다. - 미웠던 선생님 덕분에 고등학교에 진학한 사연


저는 어렸을 때 부모님과 우리 5형제, 총 7식구가 가난한 단칸방에 살았다.

그냥 단칸방이 아니라, 넓은 옛 절간을 여러 칸막이 방으로 나눈 것 중의

한 칸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한 칸 방에 여러 빈민 가족들이 어울려 살았다.


사람들은 벽을 세울 때, 절간이 천정이 높아서 다 못 막고,

사람 키 높이까지만 벽을 막았다.

그래서 옆집 이야기가 온 동네(?)에 다 들렸다.

특히 늦은 밤(조용해서 작은 소리도 잘 들림)에 한 집에서 싸우기 시작하면

옆집에서 시끄럽다고 고함쳤고,

나중에는 절간 전체가 한 밤 중에 고성이 난무했다.


우리 어머니는, 가난했지만 지혜로우셔서, 우리 5형제들을 적어도 중학교

까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다 졸업을 시키려고 하셨다. 다만 형님 한 사람만

대학교까지 보내서 성공하도록 온 가족이 뒷바라지해서,

나중에 그 형님이 나머지 가족들을 돌보게 하려는 생각을 가지셨다.


그래서 저도 초등학교 때부터 방과 후에는 행상하시는 어머니를 졸졸

따라 다니면서 도왔고, 그 일은 중학교 다닐 때도 계속되었다.

특히 중학생 때는, 몸도 좀 커서, 어머니 행상 보따리가 무거우면

그것을 제 목에 걸고 다니면서 행상을 도와드렸다. 그런 공로(?)로 원래는

초등학교까지만 다닐 가정 형편이었는데, 나는 운 좋게 중학교를 마쳤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어머니는 “이제 너는 중학교까지 다녔으니,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 형님 학비를 대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돈을 벌었고,

중학교 졸업이 나의 최종학력이 될 뻔 했었다.

그런데 이 때 참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중학교 다닐 때,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어렵사리 학교를 다녔는데,

그 때 저를 아주 못살게 굴던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그 분은

제 형편을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아주 저를 불량학생으로 취급하셨다.

저는 그 선생님이 보기 싫어서 학교에 가기 싫을 정도였다.


뜻밖에 어느 날, 그 절간 단칸방에 그 악질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제가 졸업한 후에 우연히 제 사정을 누구를 통해 들으신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우리 어머니를 만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가, 명박이의 사정을 잘 모르고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어머니께서 명박이를

고등학교에 보내주시면, 아픈 제 마음이 좀 풀어지겠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오형제를 키우시면서, 선생님은 그날 처음 만나보셨다.

어머니는 선생님 말씀을 가만히 듣기만 하시면서 아무 대답이 없으셨다.

선생님은 단칸방을 휙 둘러보시더니, 고등학교를 보내라고 더 이상

종용할 형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하시고는 곧 돌아가셨다.

저는 거기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하루는 그 선생님이 또다시 우리 집에 찾아 오셨다.

“어머니, 명박이가 고등학교를 다닐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을 제가 알지만

이 시골에 야간 상업고등학교가 있는데,

얘를 거기에 보내면 삼년 후에는 고등학교 졸업이 됩니다.

그래도 남자가 세상에 살려면 고졸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선생님, 그러면 야간 학교는 등록금이 없습니까?”

“거야 낮에 벌어서 밤에 다니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어머니는 정색을 하시면서 말씀하셨다;

“낮에 번 돈은 딴 데 써야 됩니다!” (형 공부시키는데)


선생님은 순간 아주 난처해지셨다. 그래도 나는 정말 놀라운 경험을 했다.

중학교 다닐 때 가장 나를 괴롭혔고, 그래서 내가 몹시 싫어했던 선생님이

두 번씩이나 몸소 우리 집에 찾아오셔서, 나를 위해 진학상담을 해 주셨다.


결국 입학시험에 수석을 하면 등록금이 면제된다는 선생님의 설득에

어머니는 제가 시험에 응시하도록 허락하셨다.

어머니도 선생님의 간곡한 설득을 쉽게 뿌리칠 수 없으셨다;

“얘가 재수가 좋아서 일등으로 들어가도, 나중에 2등만 되도 못 다닙니다!”

(장학금으로 다녀야지, 등록금 내고는 학교에 못 보낸다는 뜻)


그래서 저는 겨우 야간 상업학교에 입학시험을 쳤고,

결국 수석으로 입학해서 계속 다녀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내게 놀라운 은혜요, 큰 깨달음을 주었다.

저를 아끼고 사랑하시던 선생님들은, 중학교 졸업 후에 진학을 포기하고

집에 있던 내게 아무도 연락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내가 보기 싫던 악질

선생님은 저를 두 번씩이나 찾아와서, 저를 고등학교 시험 치도록 만들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좋은 인연으로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고

정말 묘한 인연을 가지고도, 악연을 가지고도,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 뻥튀기 장사를 하며 고등학교를 다니다.

이렇게 어렵사리 야간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나는 그 때,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천한 일을 다 하면서 살았다.

당시 어머니는 행상이 돌아다녀야 하는 불편이 있으니까

고정된 자리에서 일하시는 것을 좋게 여겨서, 길에서 빵을 구워 파셨다.


고등학생이 된지 3개월 만에 어머니는,

저와 함께 두 사람이 붙어서 하기엔 빵장수가 너무 수입이 적다고,

제게 독립적인 돈벌이를 맡겨 주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뻥튀기 장사였다.


뻥튀기 장사가 어려웠던 점은, 어머니가 나를 여자고등학교 앞에서 팔게

하셨다. 남학생이 여고생들 앞에서 뻥~ 튀기는 것이 몹시 부끄러웠다. 

남루한 복장인 나를 쳐다보는 여학생도 없었지만, 그래도 너무 부끄러워서

한 겨울에도 창이 큼직한 밀짚모자를 쓰고서 얼굴을 가리며 장사를 했다.


사람들 얼굴도 안 쳐다보고 장사를 하니, 아무리 뻥튀기라도

장사가 잘 될 리 없었다. 하루는 그런 제 모습을 보시고 어머니는,

“사내 녀석이 너무 부끄럼 탄다”고 저를 심하게 나무라셨다.


나는 당시 어머니가 무식하셔서 저를 나무라신다고 야속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 어머니는 비록 가난하셨지만,

매우 고상한 정신자원을 갖고 계셨으며,

그런 정신자원이 고스란히 제게 전수되었다.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2. 어머니로부터 정신자원을 배우다

제가 어머니 행상 보따리를 들어드리며 돕던 중학교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행상을 하시며 돌아다니시니까, 마을 사정을 훤하게 알고 계셨다.


“어느 부잣집에 딸 시집가는 데 일손이 부족하니까 가서 일을 도와드려라.

너도 그만큼 자랐으니까, 잔치하는데 가서 일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저는 당시 거지처럼 살고 있어서 늘 남에게 도움 받을 생각만 하고 살았다.

그래서 부잣집에 가서 일 해주고, 대신 실컷 얻어먹고 오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가기 전에 길에서 눈을 부릅뜨시고 제게 주의를 주셨다;

“너는 그 집에 가서 일을 열심히 해 주되,

일 하는 동안 물 한 모금도 얻어먹지 말라!” 


저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럼 내가 뭣 하러 그 집에 가서 일해 주랴?’

당시 나는 어머니의 속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저는 그 집에 가서 열심히 일을 도와 드렸고 물 한 모금 먹지 않았다.

그 집에서는 처음에 저를 뭣이나 얻으러 온 거지취급을 하면서

별로 탐탁케 여기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랑곳없이 어느 날, 또 다른 집에 가서 일을 도와주라고 하셨다.

점점 나는, 동네 잔칫집에 도와주러 가면, 문 앞에서 저지를 당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주인집에서 일 하는 저를 늘 감시하기도 했었다. 혹시 거지같은

애가 와서는, 일 도와주는 척하며 음식에 손을 댈까봐 염려하는 눈치였다. 


저는 어머님이 시키신 대로, 목이 마르고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만 열심히 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나는 곧 신용을 얻게 되었다. 음식 얻어갈 것을 바라며 일하지 않았고,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주기 위해 일한다는 신용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저녁에 집에 돌아갈 때, 주인아주머니가 음식을 정성껏 싸 주셨다.

그러나 저는, 어머니의 지침대로, 극구 사양하고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런 경험을 통해 나는 어려서부터 ‘거지 근성’을 버릴 수 있었다.

이전에는 그렇게 부자 집에 가서 공짜로 얻어먹고, 얻어 입고 싶어 했는데

해가 질 때까지 남의 집안일을 열심히 해주고, 얻어먹지 않고 나오는 나는

가슴속에 이상한 벅찬 희열을 느꼈다.


어머니는 아랑곳없이 계속 저를 남의 집 일손 돕기에 보냈다.

저는 이제 남의 집에, 거지로서가 아니라, 일꾼으로 당당하게 드나들었다.

일을 도와주러왔다고 인사드리고, 일을 끝내고 간다고 당당하게 인사드렸다.

이전에 부자를 보면 고개가 숙여지고 비굴해졌는데 (뭔가 얻을까 해서)

이제는 부자를 보고도 당당함이 생긴 것이다.


처음에 어머니는, 왜 내가 물 한 모금 얻어 마시지 않고 일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거지 근성을 버리고 당당하게 살아라.’를 가르쳐 주신 것이었다.


후에 나는 어디를 가든지, 거지 티가 나지 않았다. 늘 당당했다.

부자를 봐도 당당하고, 권력자를 만나도 늘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릴 적 어머니의 교훈 때문이었다.


만약, 어머니께서 저를 늘 받기만 바라는 거지 의식으로 키워서 사회에

내보냈더라면, 저는 커서도 늘 남에게 도움을 기대하며 살았을 것이고,

설령 도움을 받더라도, 내 기대만큼 도움 받지 못했다고 원망했을 것이다.

남이 도와줘도 감사할 줄 모르고, 늘 세상을 원망하며 살았을 것이다.


 

우리 집 절간 옆방에는 나와 동갑내기 거지 친구가 있었다.

그들 가족은 동냥을 받아서 살던 진짜 거지였고, 우리는 거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보니까, 거지는 늘 밥을 먹고 살았고, 우리는 밥도 못 먹고 살았다.


동갑내기 거지는, 밥 먹을 때 항상 문을 활짝 열어놓고 뽐내며 먹었다.

저는 어렸을 때, 비록 동냥이었지만 밥을 먹는 그 집을 부러워하며 살았다.


제가 1998년 미국에 갔을 때, L.A. 교포들에게 초대를 받아 강연을 했다.

(이 간증의 시점은 2001년 임)

참석자들은 대부분 변호사, 교수 직함을 가진 교포 2세들이었다.

강의가 끝나자, 밖에서 나를 꼭 만나야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옛날 절간 옆집에 살던 동갑 거지 친구를 수 십 년 만에 거기서 만났다.


그는 제 숙소까지 와서, 새벽 2시까지 울면서 계속 이야기했다.

저는 그 다음날에도 스케줄이 꽉 차 있었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는 어렸을 때, 우리보다 더 잘 사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사실이었다. 


“우리 부모는, 우리가 배고플 때 밥을 얻어서 먹여 주었고,

우리 옷이 떨어지면 남에게 옷을 얻어서 우리를 입혀 주었다.

그런데 당신 부모는, 배고플 때 자식들이 벌어서 먹게 했고,

못 벌면 굶든지 죽을 쒀 먹게 했고,

옷이 떨어지면 정성껏 기워서 입혔다.

그런 (자립정신을 심어준) 당신 형제들은 지금 다 부자가 되었고

우리 형제들은 지금까지 여전히 모두 거지처럼 살고 있다.”


 

♣3. 서울에 올라와서 고려대학 경영학과에 합격하게 된 사연.

우리 가족은 서울에 올라와서 달동네에 살았다.


부잣집 사람들은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지만

달동네 사람들은, 비좁은 집이었지만, 한 방에 비비고 잠도 재워도 주었고

숟가락 한 개만 가져가면, 없는 반찬이었지만, 밥도 먹여 주었다.


저는 새벽 5시에 인력시장에 나갔다. 사람이 1~2백 명 모여 있었다.

건설회사 같은 데서 사람을 데려가는데, 운이 좋으면 일을 나갔고

운이 없으면 그 날은 허탕 쳤다.


일을 못 나간 사람들은, 모두 홧김에, 달동네에서 소주를 외상으로 마쳤다.

돈 버는 사람은 술 마실 여가가 없는데,

돈 못 버는 사람은 가게에 외상이 늘어갔고, 밤에는 부부싸움이 잦았다. 


사람들은 처음에 달동네 아래쪽에 살다가, 사글세를 못 내 점점 위로 간다.

그러니까 같은 달동네도 꼭대기 동네가 제일 골목이 좁고 제일 못 산다.


 

♧ 대학 중퇴 학력을 얻기 위해 대학 시험을 치다.

저는 그 달동네 꼭대기에 살았는데, 주님은 제게 어느 날 소원을 주셨다.

노동자는 중학교 졸업생이나, 고등학교 졸업생이나 별로 차이가 없었다.

(막노동판에서는 제가 애써 딴 고등학교 졸업장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생각했다;

‘내가 대학시험 쳐서 합격만 하면, 비록 돈이 없어 학교를 못 다니더라도

대학중퇴 학력이 되니까, 고졸보다는 뭔가 생계에 도움이 되겠지...’

그래서 대학 시험만 쳐서 합격만 하고 안 다니기로 결심했다.


만약 애시 당초, 대학에 합격되더라도

한 학기 등록금을 납부내야 대학중퇴가 인정되는 줄 알았더라면

(사실이다. 합격만 하고 안 다닌다고 대학중퇴가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예 시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멋모르고 대학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삽입 해설) 사람이 행동하지 않고, 너무 아는 것만 많으면...

사회에서 골치 아픈 인간이 된다. 두 개 알면 두 개 실천하는 사람이,

열 개나 알지만 다섯 개만 실천하는 사람보다 더 낫다.

이런 ‘아는 사람’이 많이 소속된 가정, 교회, 사회는 늘 골치 아프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거의 말로만 하려 들기 때문이다.

특히 그런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이 정치계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뭘 몰랐던 것이 큰 다행이었다.

합격하고, 입학금 및 등록금을 최소한 한 학기라도 내야 ‘대학중퇴’가

인정되는 줄 알았더라면, 당시 가정형편으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신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대학중퇴 학력도 꽤 알아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대학중퇴’ 하려고 대학에 입학했다.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 졸업은 엄두에도 못 내었다.)


그래서 나는 청계천 주변 헌책방에 나가서 입시 준비 책을 사러갔다.

책방 주인은 제게 “문과냐, 이과냐?” 물었다.

나는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라서 상당히 당황해 하면서

“상과대학요!”라고 대답했다. 그만큼 대학에 관한 지식이 없었다.


헌책방 주인은 신이 나서, 좋은 헌 책을 여러 과목 제게 골라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싼 헌 책도, 나는 그 절반밖에 치를 돈 뿐이었다.

주인은 아침부터 재수 없다고 막 제게 화를 냈다.


그러나 나는 형편이 이래서... 자초지종을 상세히 주인에게 설명했다.

그랬더니 주인은 설득되었는지, 있는 돈만 내고 책을 가져가라고 했다.

뭐든지 안 된다고 일찍 단념하거나, 쉽게 포기하지 마시라.


저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헌 책을 보며 독학했다. 그런데 목표는

상과대학이었지만, 어느 대학교에 지망해야할지 뚜렷한 생각이 없었다.

그러던 중 종로학원에 다니던 재수생을 만났는데, 그의 목표가 고려대였다.

아무 생각 없이 덩달아 나도 그 친구 따라서 고려대 경영학과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그 재수생은 낙방했고, 저는 합격했다.


 

♧ 대학 등록금을 구하게 된 사연

우리 가족이 서울에 온 이후, 어머니는 이태원 시장에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바구니에 생선 몇 마리를 얹어놓고 파는 좌판을 시작하셨다.


단칸방에 아버지, 어머니, 누이동생이 누우면 제가 누울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저는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서 합숙소 등지에서 적당히 잠을 잤다.

그래도 막상 합격 통지서를 받으니, 어머니께 제일 먼저 알리고 싶었다.


생선바구니 앞에 두고 앉아계신 어머니 귀에 제 고려대 합격소식을 알렸다.

어머니는 “그래, 그래” 끄덕이시는데, 다른 사람 얘기인줄 아셨던 모양이다.

“어머니, 제가 고려대학에 합격했다니까요, 제가요!”

“정말 네가 합격했니?” 놀라시더니 곧장 어머니 얼굴에 수심이 떠올랐다;

“네가 어쩌려고 그런 일을 저질렀니?”

어머니는 제가 입학금과 등록금을 얻으러 온줄 아셨다. 그래서 저는 즉시

“어머니, 저는 대학에 다니지는 않을 거구, 그냥 시험만 쳤어요!”라고

말씀드리면서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며칠 후에, 합숙소로 연락이 왔다. 집에서 급하게 날 찾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를 찾아갔더니 희소식을 들었다. 이태원 시장 측에서

제가 새벽에 시장을 청소해 주는 조건으로

입학금과 등록금을 미리 빌려준다는 것이었다.


그 후 저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이태원 시장을 청소했다.

오물은 리어카에 실어서 반포대교 근처에 실어다 버렸다.

적을 때는 하루 4번, 많을 때는 하루 8번씩 실어다 버렸다.

겨울에는 오물이 얼어붙어서, 곡갱이로 찍어서 버려야 했으니 힘들었다.


그래서 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태원시장에서 열심히 일했다.

계약은 6개월씩 계속 연장되었다.

원래 목표는 대학 중퇴였으나, 결국 대학 졸업까지 하게 되었다.


이것은 제 노력이 아니었다. 우리 어머니의 신앙 덕분이었다.

어머니의 신앙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다.

시장에서 행동으로 예수 믿는 믿음의 본을 보여주었다.


어머니는 생선 몇 토막을 팔지만, 매일 주변 청소를 깨끗이 하셨다.

남들이 필요 없다고 해도, 자기는 다 팔았지만 파장될 때까지 기다려서

일년 열두 달 매일, 저녁에도 시장 청소를 깨끗하게 마치셨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웃음을 보이셨다.


시장에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당신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 도우셨다.

도와주었다고 무슨 대가를 받지도 않으셨다.

거기서 행함으로 예수 믿는 사람의 본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셨던 것이다.


성경말씀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셨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갖고도 네가 구원을 받겠느냐고 하신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4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 누구나 할 수 있다.

행하는 믿음을 보인 어머니 때문에, 저는 안면도 없고 주소도 불분명했지만

계약서도 없이, 시장 측에서는 입학금과 등록금을 선뜻 미리 내주셨다.

그만큼 사람들은 제 어머니를 믿어주신 것이다.


 

♣4. 고려대 학생회장에 당선되어 학생운동을 하던 중 수감되다

그렇게 고생했으면 무사히 대학을 졸업을 했으면 좋았으련만...

괜히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당선이 되어 버렸다.

그 바람에 학생운동을 하다가 서대문교도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


징역을 살다가 출소한 학생들은 대부분 김영삼 김대중 씨를 따라갔다.

취직하기 힘든 것도 그런 중요한 사연이었다.

학생운동 하던 사람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대기업에 취직이 불가능했다.

또한 학생운동 하느라 공부를 등한시해서 입사시험 성적도 좋지 않았다.

이래저래 양 김씨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는 감방에서도 열심히 공부했다.

등록금이 아까워서라도 열심히 공부했다.

저는 졸업할 때 ‘이 가난한 나라에 일자리도 없는데 정치는 무슨 정치냐?’

그래서 기업에 취직하는 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 취직을 하려는데 취직이 되지 않다

나는 당시, 학생운동 전과자들은 대한민국에 어떤 직장에도 취직이

안 된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중앙정보부는 학생운동 전과자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려서 돌렸기 때문에

은행에 시험을 봐도 낙방 등 세 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그 때 깨달았다. 나는 대한민국에서는 취직하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러던 중 당시 신설기업이었던 현대건설에서 신입사원 뽑는다는 광고를

보았다. 당시 현대건설은 총 직원 98명의 중소기업에 불과했다.

회사 역시 정식으로 공고해서 대졸 신입사원을 뽑는 것은 처음이었다.


저는 ‘이렇게 조그만 회사에 입사하는 것은 정부가 봐 주겠지...’ 생각했다.

그것이 정주영 회장을 처음 만나게 된 사연이다. 입사 면접 때 만났다.

“이군, 자네 정말 우리 회사에 올 건가?” 정 회장이 진지하게 물었다.

저는 속으로 ‘이건 합격과 다름없군!’ 이라 생각하며 기뻐했다.


저는 일단 이 작은 회사에서 1~2년 다니다가, 신분이 풀리면

다른 큰 회사로 옮길 요량으로 현대건설에 입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면접까지 끝냈는데도, 결국은 입사가 좌절되었다.


 

♣5. 하나님은 평화의 사람을 쓰신다. 우여곡절 끝에 현대건설 입사.

할 수 없이 저는 청와대 이낙선 보좌관을 찾아가서 내 처지를 호소했다.

(그는 나중에 국세청장, 상공부장관을 역임했다.)

두 달간이나 그를 찾아가 만나서 하소연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만나 주먹질이라도 한 번 하고

“에이, 더럽다!” 욕이라도 한 마디 하고 그만두려고 그를 찾아갔다.

다시 밑바닥 노동자로 돌아가기 전에 시원하게 화풀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마지막으로 보좌관을 만난 자리에서

저는 엉뚱하게 부드럽게 말이 나왔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서 노동자의 길로 되돌아갔다.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 후, 현대건설에서 연락이 왔다.

입사해서 일을 해도 좋다는 합격통보였다.


내가 입사하니 마침 현대건설회사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다.

사우디에서 돈을 벌어 와서 처음에 자동차회사를 만들었다.

자동차로 돈을 벌자 이번에는 조선소를 만들었다.

1~2년 다니다가 그만 두려고 했지만, 그만 둘 시간조차 없이 바빴다.

그 소용돌이 급성장 한 가운데 제가 있었고, 물론 저도 열심히 일했다.


저는 언제나 창업 팀에 발탁되었다. 자동차를 창업하다가 본궤도에 오르면

중공업 창업 팀으로 옮겨졌다. 그런 과정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일들을

다양하게 배운 것이 지금도 내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저는 입사 12년 만에 만 35세로 현대그룹에서 사장이 되었다.

처음에 저를 면접했던 중역들이 이제는 제 아래에 있었다.

당시에 이사급은 최소 50세, 아니면 60세가 되어야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사장 취임식 날, 이낙선(옛 청와대 보좌관) 씨가 축하하러 저를 찾아왔다.

당시 그는 상공부 장관이 되어있었다.

“축하도 할 겸, 내가 자네에게 특별히 말 한 마디 전해주려고 왔네!”

“무슨 말입니까?” 제가 궁금해서 물었다.

“자네, 그 때 청와대 보좌관 시절 내게 와서 던지고 간 말을 기억하는가?”

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그에게 단호하게 따지지 못하고,

웃으면서 따진(?) 것이 후회스러웠다는 기억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낙선 씨는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자기는 그 말을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대통령의 지시로, 동태 보고를

받는 조건으로 제 신분이 해제되어 현대에 입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최연소 사장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그 날 제가 청와대 보좌관실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 젊은이가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살려고 하는데

나라가 그 길을 막는다면

한 나라가 한 젊은이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봐도 내가 그 때 어떻게 이런 좋을 말을 했는지 신기했다.


만약 그 날 싸우고 욕을 해대고 나왔더라면....

오늘의 이명박 시장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온유한 말로, 저는 블랙리스트에서 해제되어 드디어 취직이 되었다.

그래서 그 날 그렇게 사장까지 취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날 마지막으로 찾아가서 싸우고 욕을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더라면

나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의 내가 있었을까?

하나님은 모든 일을 평화스럽게 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배웠다.

그 날 욕하며 싸우지 않은 일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지혜였다.


 

♣6.하나님의 섭리는 알 수 없다.

내가 처음에 입사하려고 했던 당시 대기업

중앙정보부가 나를 진로를 막고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당시 은행이나 대기업에 입사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오늘같은 영광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방해로, 당시 남들이 알아주지 않던 조그만 건설회사에

어쩔 수없이 입사했는데, 그 회사가 이렇게 큰 회사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교훈을 배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 큰 시련을 주시지만

그 시련조차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하나님은 언젠가는 그 시련의 크기만큼 축복도 주신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급하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간구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기가 원하는 때에 도와달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제 경험으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들어주셨다.

사람이 원하는 때에,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간절한 내 기도에 응답이 즉시 안 된다고 실망해서 떠나지 말라!


 

♣7. 어머니의 기도

제가 감방에 있을 때 마음고생이 무척 많으셨던지,

출소 후에 한 달 만에 어머니는 단칸방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절간 단칸방 때부터 새벽 4시에 항상 꿇어 엎드려 기도하셨다.

일생동안 하루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방 천정 칸막이가 터져 있어서, 옆방에 방해되니까, 소곤소곤 기도하셨다.

어린 저를 엎드려 무릎을 꿇게 했지만,

저는 그 자세로 어머니 무릎을 베고 잠만 계속 잤다.


우리 형제들은 커서 흩어질 때까지 10~20년 어머니 기도를 듣고 자랐다.

어머니 기도는 복잡하지 않았다. 우리는 기도 순서를 다 외울 정도였다.  


어머니는 날마다 새벽에 기도하실 때, 항상 타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노점상을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이 예수 믿게 해 달라는 전도의 기도를 드리셨고


또 어느 부잣집 아들이 몸이 아파 학교를 못 가면

그 아들이 빨리 나아서 학교를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우리 자녀들은 그럴 때마다 막 화가 났었다;

‘부잣집 아들이 몸 아프면 돈 주고 약 사먹으면 되지

왜 남의 부잣집 아들을 걱정하며 기도해 주냐? 어머니 정신 나가셨다!’

우리가 어려서 어머니의 기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자기를 위해서 간구하기 보다는 항상 타인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마지막으로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기도가 그리 길지 않았다.

제 기도는 특히 짧았다; “명박이는 건강하고 예수 잘 믿게 해 주세요!”


우리 형제들은 커서 흩어져 살았지만 새벽 4시만 되면 언제나 눈이 떠졌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어머니의 기도소리는, 어디 가서 살든지, 우리는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어머니의 수 십 년 기도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어졌다.

우리 오형제는 늦게라도 모두 대학을 마쳤다.

또한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


제 집사람은 원래 예수를 믿지 않았지만

제가 결혼 조건으로 신앙을 내세웠으므로 급하게 예수를 믿었다.

비록 아내가 시어머니를 만나 뵙지는 못했지만(결혼 전 소천)

시어머니의 신앙을 전해 듣고는,

또한 시어머니의 생전 기도의 덕분으로

우리 오형제의 배우자들까지 모두 크리스천이 되어 기도에 힘쓰고 있다.


저는 하나님이 제게 서울시장의 자리를 주신 것은

제가 서울에 이사 온 후, 앞서 말씀드린 대로,

말할 수 없는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렇게 서울 시장이 된 것은,

뭔가 주님이 주신 소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저의 항상 걱정은 바로 이것이다;

‘장로 시장이 저럴 수 있느냐?’

이런 비난을 듣지 않으려고 저는 항상 주의하며 산다.


많은 분들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셔서 감사하다.

저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큰 영광을 돌리지 못하더라도(겸손 표현)

하나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것이

저의 4년 동안 주어진 임기를 수행하는 신앙인으로서의 자세이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의 많은 중보기도를 필요로 한다.

또한 크리스천 신앙을 행동으로 보여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게 맡기신 소임을 일부라도 감당하게 되기를 소원한다.(겸손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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